02
아, 그래. 이제 알겠어. 태형은 속으로 중얼였다. 이제야 태형은 제가 뜬금없이 이 조선시대로 떨어진 이유를 깨달았다. 이것은 세상이 제게 날리는 엿이었다. 수없이 많은 빅엿을 먹이겠다는 뜻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
“왜 말을 하다 말지?”
정국, 아니 왕이 빙긋 웃었다. 시발, 웃는 것까지 전정국이랑 똑같아. 태형은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무슨 놈의 스토리가 이따위인 것일까. 장르가 궁중 로맨스인줄 알았더니 궁중 치정물이었던 것으로도 모자라, 제가 치정을 펼쳐야 할 상대는 제 짝사랑이고, 치정을 통해 얻어내야 할 인물은 제 라이벌이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 태형은 죽고 싶어져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정실부인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첩하고만 놀아난다기에—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었다—한량에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놈팽이일 줄 알았더니, 제 눈앞의 인물은 정국을 닮아, 아니다. 정국이 이 사람을 닮은 건가? 아무튼, 훤칠하니 잘생겼다. 동그란 눈과 서글서글한 인상. 태형은 간신히 벌려진 입을 다물었다. 제 눈앞의 왕은 여전히 살짝 웃고 있었다. 태형도 입 꼬리를 끌어올려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 하…….”
사실, 태형과 정국이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지. 태형은 정국이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정국이라면 죽고 못 살 정도로 정국을 아꼈고, 그런 태형을 정국도 곧잘 따라 둘은 칙칙한 공대의 훈훈한 투샷으로 손꼽히곤 했었다. 둘은 틈만 나면 붙어 다녔고, 항간에 사실은 둘이 사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았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그 소문은 1년을 채 가지 못했다. 태형과 정국이 있는 동아리에, 2학기부터 들어오게 된 다른 과 후배 한유라의 등장 때문에.
한유라는 인문대의 여신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로, 예쁜 얼굴로 유명했다. 성격은… 모른다. 굳이 소문이 나지 않은 걸로 보아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겠다고 대충 추측할 수 있었을 뿐이다. 유라는 예뻤고, (남자)선배들에게 예쁨을 한 몸에 받았다. 남자들만 득시글한 공대 위주로 편성된 동아리에서, 한유라의 존재는 단연 돋보였다. 태형과 정국이 든 동아리는 꽤나 학술적인 것으로 인문대 사람들과는 오억 광년쯤 떨어져 있었기 때문—그래서 태형과 정국 같은 훈훈한 남자가 둘이나 있음에도 여타의 여자들이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던 것이었다.—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새로운 신입생이 들어와 반가운 마음뿐이었다. 태형은 유라에게 친절하게 대했고, 유라도 태형을 곧잘 따랐다. 금세 유라는 정국과 태형의 일상에 끼어들었고 그 전에는 늘 둘이서 했던 것들을 차츰 셋이서 하게 되었다. 상황은 대략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선배, 오늘 뭐 해요?’
‘나 오늘 정국이랑 영화 보기로 했는데?’
‘우와! 뭐 보세요?’
‘킹스맨2.’
‘저도 그거 보고 싶었는데!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어? 그, 그래, 뭐.’
이런 식으로, 유라는 계속해서 둘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고, 태형은 그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정국은 그 상황이 퍽 달가운 것 같지는 않은 눈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별 말을 하지는 않았고. 그때까지만 해도 태형에게 유라는 그저 후배 1, 여자와는 연이 없었던 태형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서투르게 대해도 계속해서 다정한 성별이 여자인 인간일 뿐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유라는 끊임없이 태형에게 눈웃음을 쳤고, 꼭 달라붙어 애교를 부렸다. 문제는, 남중 남고를 나와 공대에 진학한 태형은, 이런 것에 면역이 없었다는 거다. 그 잘난 얼굴을 가지고도 여자와 이렇다 할 역사를 쓰지 못한 이유였다. 태형은 그 때마다 얼굴이 빨개지기 일쑤였고, 유라는 그런 태형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게임 끝. 혹시 유라가 날 좋아하나?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태형은 언젠가부터 유라를 보면 심장이 뛰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태형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 챈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한 몸처럼 붙어 다니는 정국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정국은 태형을 불러내어…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지?”
“…아.”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태형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건지, 제 얼굴 바로 앞에 있는 정국의 얼굴을 한 왕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태형은 제 몸이 기우뚱 기울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망할 놈의 치마.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무겁고 치렁치렁한 한복은 아직 태형에게 마음을 채 다 열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시 한 번 치마 끝단을 밟은 태형이 어어- 하는 소리와 함께 팔을 휘저었다. 넘어진…!
“으잉.”
“무슨 생각을 하기에.”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머릿속에서 삐용삐용 하고 적신호가 켜졌다. 너무 가깝다. 아까도 가까웠는데, 지금은 더 가까웠다. 무엇이? 정국, 아니 왕의 얼굴이. 그리고 태형은 그 순간 왕의 팔과 손이 제 허리에 감겨 있음을 감지했다. 그러니까, 태형이 넘어지기 직전에 왕이 제 팔을 뻗어 태형의 허리를 감아 잡아챈 거였다. 태형이 흡, 하고 숨을 멈추었다. 너무, 심각하게 가까웠다. 왕이 그런 태형을 보고 픽 웃고는 살짝 힘을 주어 태형을 바로 세워 주었다. 그제서야 태형은 숨을 몰아 쉴 수 있었다. 태형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뜨거웠다. 온통 새빨개져 있을 게 분명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오늘따라 중전이 평소와 많이 다른 것 같은데.”
“…….”
헉.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목소리에 태형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아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부부는 부부였는지 그 짧은 새에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챈 모양이었다. 태형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라 둘러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태형의 머릿속은 이미 과열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태형이 멍하니 제 눈앞의 인영을 쳐다보고 있는 새, 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자꾸 고개를 숙이고…”
“…….”
“중전은 나랑 있는 것이 많이 불편하신가 봅니다.”
묘하게 서운한 티가 묻어 있는 목소리. 태형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런 게 아닙니다! 그렇게 내뱉고 나니 그럼 뭐냐는 듯 저를 쳐다보는 왕의 얼굴에 태형은 입 안쪽 여린 살을 잘근 깨물었다. 사이가 안 좋다더니, 다 거짓부렁이었나? 말투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 어디 한 군데 다정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게다가 제가 고개 좀 숙이고 있었다고 서운한 듯 말하기까지. 어떻게 봐도 금슬 좋은 부부인데. 태형이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무슨 말을 해야 가장 자연스러울까?
“나랑 있는 것이 불편…”
“그럴 리가요!”
태형이 재빨리 말을 가로막았다. 불안함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태형의 다급한 목소리에 왕의 눈이 놀란 듯 느리게 깜박여졌다. 태형이 살짝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너무 좋아서, 심장이 두근거려서…”
“…….”
“떨려서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부끄러운 듯 소매로 입가를 가리는 연기까지 해낸 태형이 슬쩍 왕의 눈치를 봤다. 왕은 그대로 멈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서… 성공 한 건가? 태형이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소매로 가린 입가는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 쪽팔려 죽을 것 같다. 아까 경회루 위로 올라오면서 왕이 중전과 단 둘이 있고 싶다며 사람들을 물린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같은 남자한테 이딴 수줍은 고백이라니. 게다가 그냥 남자도 아니고, 아무리 본인은 아니라지만 전정국을 닮은 남자한테. 태형은 눈을 감았다. 이불킥 백 년 감이다. 태형은 이제 이 상황이 몰래카메라거나 예능이 아니기를 바라야 하는 처지가 됐다. 왜냐하면 이 사실을, 그러니까 정국을 닮은 왕에게 이런 부끄러운 듯 수줍은 고백을 했다는 사실을 저 말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사실만이 태형에게 단 한 가지 위로가 되어 주…
“…큽.”
“……?”
그러나 순간 들려온, 웃음을 참는 듯한 묘한 소리에 태형이 내렸던 눈을 들어 눈앞의 왕을 쳐다봤다. 왕은 저를 쳐다보면서 입술까지 깨물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왜 저래? 저렇게 좋은가? 어리둥절해진 태형이 멍하니 그런 왕을 쳐다봤다. 잠시 숨을 고른 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엇이 그리 좋은 것인데?”
“예?”
“무엇이 그리 좋아서 떨릴 정도냐 물었다.”
“그야 당연히 주상 전ㅎ…”
“난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제가 얼마나…”
“그 날 이후로 연락도 다 씹고, 아는 척도 안 하길래.”
…씹어? 뭘 씹어? 태형은 순간 뇌가 멈추는 소리를 들었다. 중전이 왕의 연락을 씹… 그래도 되는 건가? 아니 그보다 씹다니. 육포나 고기를 씹는 게 아니라 연락을 씹다니. 연락을 씹는다는 관용어가 조선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관용어였던가. 조선시대에도 연락을 씹는다는 힙한 표현을 썼던 건가. 태형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왕을 쳐다보자 왕의 입이 다시 천천히 열렸다.
“뭘 그리 놀라요, 태형 형. 나 모르겠어요?”
…형이란다. 왕이 중전에게. 태형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삿대질을 했다. 너무 놀란 입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어- 어- 하는 이상한 소리만 냈다. 그럼 안 놀라겠니. 날 배신 때린, 믿었던 후배가 하루아침에 내 남편이 됐는데. 그 말을 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태형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
“정신이 좀 들어요?”
“전ㅎ…, 아니 너!”
“…….”
“전정국?!”
잠시간의 멍때림 후 정신을 차린 태형이 제 앞의 왕, 아니 전정국을 보고 삿대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주위 신하들이 봤다면 기함을 할 행태였지만 태형의 사고는 거기까지 닿지 못했다. 정국이 그런 태형을 보며 씩 웃었다. 정신이 들었네요. 형이 저 기억 못 하는 줄 알았잖아요.
“너 전정국?!”
“네.”
“내 후배!?”
“네.”
“21세기에 살고 있는 K대 기계공학과 전정국?!”
“…학번까지 불러 드려요? 저 맞다니까요, 태형이 형.”
“…….”
“…태형 누나?”
“아니거든!!”
정국의 말에 태형이 눈을 키우며 빽 소리를 질렀다. 아, 그렇구나. 난 또 혹시나. 정국의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에 더 대수로워진 것은 태형이었다. 너, 너, 너! 너 언제, 아니, 너 왜 말 안 했어!!!! 태형이 빽빽 소리를 질렀다.
“당연히 형도 알고 있는 줄 알았죠. 옆에 사람들 있으니까 연기하는 줄 알았는데.”
“그럼 너 나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어?!”
“네. 그래서 여기 올라올 때 신하들 다 가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너…!!”
그럼 날 보던 그 다정하고 따스한 눈빛은 뭐야! 아니 것보다, 경회루에 올라오고 나서도 정국은 계속해서 말투가 이상했다. 계속해서 연기를 하고 있었단 소리다. 아니 도대체 왜?! 태형은 무엇부터 따져 물어야 할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게다가, 지금 태형은 21세기에서 보던 ‘선배 김태형’의 모습이 아니라 조선시대 ‘중전’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화려한 가채에 치렁치렁한 ‘여자’한복. 게다가 부끄러운 듯 수줍은 고백까지!! 세상에서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상대에게 그 모든 것을 들켜 버린 태형은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게다가 전정국은 왜 왕이냔 말이다. 내시도, 신하도 아닌! 왕이라니!!
“너 왜 왕이야!”
“…네?”
그래서, 모든 의문과 궁금증들을 제치고 태형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그거였다. 너 왜 왕이야?! 왜 니가 왕이야?! 난 중전인데!? 태형의 억울함을 잔뜩 담은 눈이 그대로 정국에게 꽂혔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정국의 눈매가 애매하게 접혔다.
“…글쎄요. 그럼 형은 왜 왕비예요…?”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저도 몰라요. 워크샵 끝나고 집 가는 길에 버스에서 자다 일어났더니 이렇게 되어 있던데요.”
…아. 넌 버스에서 자다 일어났니? 태형은 순식간에 멍한 얼굴이 되었다. 버스에서 자다가 깨 보니 타임슬립이었다니, 쟤도 참 정신없었겠다 싶었다. 자취방에서 낮잠 자다가 끌려온 나는 양반이라 해야 되나.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정국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근데 형 생각보다 잘 어울리네요.”
“…….”
“처음에 나한테 부인이 있다기에 누군가 했는데. 형이었을 줄이야.”
…그러니까 이거 지금 욕이지? 주저앉은 제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제 앞에 꿇어앉은 정국이 태형을 찬찬히 훑으며 한 말에, 태형은 넓은 한복 단을 펄럭이며 성질을 부리려 했다. 한복이 무겁고 이미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탓에 앙탈을 부리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지만. 정국이 신기한 듯 태형의 머리 위에 올려져 있는 장신구들을 만작였다. 이거 진짜예요?
“몰라. 아니 그보다 너, 너 왜 다 알고 있으면서 계속 연기했어?!”
“제가 뭘요?”
“여기 올라오고 난 다음에도 너 계속 왕인 척 했잖아!!”
“…형도 계속 연기하길래 장단 맞춰 준 건데.”
정국이 몸을 일으켜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태형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태형은 어이가 없어 입을 뻐끔거렸다. 그거야, 나는! 네가 전정국이 아니라 여기 시대 사람인 줄 알고 그런 거지! 태형이 성질을 버럭 내고는 제게 내밀어진 정국의 손을 팩 뿌리쳤다. 그러나 당당했던 그 뿌리침과는 다르게, 혼자 힘으로 일어나려니 아까 주저앉을 때 한복을 깔고 넘어진 것인지 몸이 일으켜지지가 않았다. 태형이 낑낑거리자 정국이 얕게 한숨을 내쉬며 태형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계속 앉아 있고 싶은 거예요?”
“너, 너 나는 어떻게 알아봤는데?!”
“제가 형을 왜 못 알아봐요?”
붙어 다닌 시간이 얼만데. 정국이 가채를 쓰고 있는 태형이 신기한 듯,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며 말했다. 갑자기 가까워진 정국에 태형이 히익, 하고 몸을 뒤로 물렀다. 가, 가까이 오지 마, 너!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 내가 진짜 여기 사람이었으면 어쩌려고?”
“…그 얼굴을 하고요?”
“너 그거 무슨 뜻이냐?”
태형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묻자 정국이 어깨를 으쓱이며 살짝 웃었다.
“그래서 좀 자세히 봤었는데, 나 보자마자 형이 그랬잖아요. ‘전…!’”
“…….”
“그러고 얼굴을 가리질 않나, 허둥지둥하질 않나. 어딜 봐도 매일 보는 남편 얼굴 보는 부인 모습은 아니라서. 아, 형이구나 했죠. 아니 그리고 뭣보다 너무 똑같이 생겼잖아요.”
“똑같이 생겼다고 다 우리 같은 처지는 아니야. 너 한 희빈 못 봤어?”
태형이 눈을 반짝였다. 이곳으로 떨어진 후로 제가 누군가보다 뭔가를 더 아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괜히 목소리가 높아졌다. 너 못 봤구나? 태형의 말에 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부인 본 건 형이 처음이에요.
“…부인…….”
“…….”
“이라고 하지 마, 새꺄!!”
누가 니 부인이야!! 태형이 버럭 소리를 쳤다. 괜히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온몸에 닭살이 돋는 느낌에 태형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태형을 보며 정국이 웃었다. 왜요, 맞잖아요. 그 말에, 태형은 입을 벌렸다. 전정국이 원래 저런 성격이었던가? 그러나 정국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뭔가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지금은 그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태형이 입을 열었다.
“나도 우연히 만났는데, 한 희빈. 유라랑 똑같이 생겼어. 난 처음에 유라도 같이 떨어진 줄 알았다니까.”
“한유라요?”
“응. 유라.”
“…….”
정국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태형은 입술을 삐죽였다. 아 괜히 말했나. 진짜 유라는 아니라지만, 유라랑 정말 똑같이 닮은 사람인데, 정국은 그런 한 희빈의 남편이고 자신은… …됐다. 태형은 여전히 주저앉아 정국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정국은 이내 다시 태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니까 걔는 타임슬립을 한 건 아니라는 거죠?
“…응. 왜, 아쉽냐? 모처럼 공식적으로 연인이 될 수 있었는데?”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요.”
그런데 형 계속 그렇게 앉아있을 거예요? 거기 편해요? 태형의 질문을 간단히 일축한 정국이 태형에게 물었고 태형은 아, 아니, 그건 아닌데…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아까 그렇게 당차게 정국의 손을 뿌리쳐 놓고 혼자 못 일어나겠어… 따위의 약한 말을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던 탓이다. 하지만 그런 태형을 눈치챈 듯, 정국이 픽 웃더니 태형이 뭐라 하기도 전에 태형에게 다가와 태형을 끌어안듯이 안아 태형을 일으켰다. 태형의 얼굴은 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너, 너, 누가 막 함부로 내 몸에 손 대래!”
“뭘 이 정도 가지고. 부부 사이에.”
“부부 사이는 무슨! 이 나라 중전이랑 왕이 부부지 너랑 내가 부부냐!?”
“지금은 그렇잖아요.”
“아, 왜 하필 또 너야!!”
태형이 홧김에 소리쳤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왜 하필 전정국인가. 여자로 타입슬립한 것도 억울한데, 왜 전정국은 왕이고, 내 남편은 전정국이냔 말이다. 그것도 유라를 첩으로 두고 있는! 유라와 정국을 두고 치정을 벌일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던 태형은 암담해졌다. 이게 뭐야…….
“근데 형은 내가 왕이어서 좋아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미쳤냐?”
“아니, 그렇잖아요. 들어보니까 조만간 합방 있다던데. 형이 누나 아니라면서요.”
“그건……!”
태형이 입을 벌렸다. 정국은 진심으로 궁금한 듯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입을 벌렸지만 할 말은 없는 태형이 입을 뻐끔거렸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아프다고 버텼다 한들, 그 변명이 통했을지도 모르고, 언제까지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거였다. 그러면… 전정국이 왕, 그러니까 내 남편인 걸 감사해야 하나…….
“…그러게.”
“그쵸?”
태형의 멍한 대답에 정국이 씩 웃었다. 그 모습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지만 태형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생판 모르는 사람이 남편인 것보다야 전정국이 남편인 게 낫…아냐. 생판 남이 나은 거 같기도 한…….
“아악!!!”
“왜 그래요?”
“몰라…….”
태형이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다행인 거다. 혼자보단 둘이 낫긴 나으니까. 어찌 됐든 현재에서 과거로 떨어진 것이 저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위안이 되어 줬다. …그게 설령 사이 안 좋은 후배, 전정국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