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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달콤한 포도일수록 오래 삭혔을 때 도수가 높은 와인이 된다고 한다.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태형은 그게 역설적이라고 생각했다. 달콤할수록 나중에는 더 독한 술이 된다는 게. 사람을 더 쉽게 취하게 만든다는 게.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거 같아서 그랬어요. 윤기 형 아니었으면 오늘도 나한테 아는 척 안 했을 거 같아서.’

난 이렇게 끝내긴 싫다고요. 어제 너무 좋았거든.’

연락할게요, 받아요.’

위로해달라고 한 적 없는데? 그럼 오늘 내가 다 사면 데이트라고 해 줄 건가?’

나랑 연애할래요?’

이런 관계는 그만 두자면서요. 그러니까 연애해요, 나랑.’

 

정국과의 기억은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달콤한 것 같다가도 항상 그 끝은 썼고 태형은 언제나 방 안에 앉아 그 쓴 기억을 혼자 곱씹어야만 했으니까. 태형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언제부터 그랬더라. 정국과의 처음은 어땠더라. 언제까지 달콤했고 언제부터 아팠더라. 언제부터 나는 전정국과의 기억을 힘들게 느꼈더라.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인지 머리가 몽롱했다. 밤바람에 눈가가 시렸고, 심장이 뛰었고, 귓가가 울렸다.

 

아무것도 안 바랄게요. 다른 사람이랑 연애해도 좋고, 나랑은 잠만 자도 좋고. 나한테는 눈길도 안 줘도 좋아요. 그러니까,”

…….”

나한테서 도망가려고 하지만 마요.”

 

그렇다면 이 기억은 어떨까. 이건 어떻게 기억될까. 그다지 달콤하지만은 않았던 기억들도 뒤늦게 꺼내보았을 때 지독하리만큼 썼었는데. 너무 독해서 다시 꺼내어 넘길 때마다 목이 따끔거렸는데,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아프게 만들었었는데.

 

내가,”

…….”

졌어요.”

 

지금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지? 어떤 기분이지? 태형은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의 눈이 올곧게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다른 어떤 곳도 아닌, 제 자신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온 세상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주위는 온통 제 심장 박동이 웅웅거리는 소리로만 가득했다. 이 세상에 오롯이 정국과 자신, 둘만 남겨진 것처럼.

 

나는,”

…….”

형이 욕심나요.”

 

태형은 심장에 가만히 제 손을 올렸다. 이건 꿈일 수가 없다. 태형은 멍하니 생각했다. 이런 건 상상해본 적도 없었으니까. 이런 정도까지는 바란 적도 없었으니까. 이건 꿈일 수가 없고, 꿈이 아니어야 하고, 그리고…….

 

나는, 형이 너무 간절하고,”

…….”

갖고 싶어요.”

 

정국의 목소리가 느리게 이어진다. 태형은 손끝을 타고 심장 박동과 함께 전해지는 제 감정을 가늠한다.

 

인정하기 싫었어요. 나는누군가를 욕심내기 싫었어요.”

…….”

내가 영원히 가질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내가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사람은 변하고, 언젠가는 나를 떠날 거니까. 그러니까 그걸인정하기 싫어서, 나는 항상 여유롭고 싶고, 휘둘리기 싫고, 완전하고 싶고. 그런데,”

…….”

형이 없으니까…….”

 

정국이 고개를 숙인다. 태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국을 쳐다봤다. 손끝이 뜨거웠다. 심장이 저릿저릿하고, 시큰거리고내가 지금 듣고 있는 게 정국이 하는 말이 맞을까.

 

…….”

…….”

욕심내면 안 돼요?”

 

어느새 차가워진 여름밤의 바람이 선선하게 태형을 훑고 지나갔다. 정국의 향기, 정국의 목소리. 현실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비현실적인 이 상황, 정국이 뱉는 말들, 정국의 감정. 모든 게 몽롱하게 흐릿했다.

 

좋아한다고 말 해 봐요.’

?’

한 번만.’

.’

그냥,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서.’

…….’

빨리요.’

싫어.’

…….’

그런 말을 왜 해,’

…….’

쓸데없이.’

 

태형은 언젠가 나눴던 정국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언젠가 정국은 문득 그랬었다. 좋아한다고 말해 보라고. 정국이 하는 말들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언제나 태형에게 가장 어려운 일들 중 하나였다. 정국이 하는 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 왜 좋아한다고 말해보라는 걸까. 왜 사귀자고 하는 걸까. 왜 나한테 파트너를 하자고 했을까. 정국에게는 항상 선이 있었으니까. 그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걸 태형은 잘 알았으니까. 그렇게 많은 시간들 동안 정국은 태형을 헷갈리게 하면서도 한 번도 태형에게 좋아한다 말한 적 없었으니까. 연애하자고 할 때도, 파트너를 하자고 했을 때도, 헤어지자 했을 때도, 마지막으로 끝냈을 때도. 정국은 한 번도 진심을 보여준 적 없었다. 그러나 지금,

 

좋아해요.”

 

그 어느 때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제가 들었던 그 어느 고백들보다도 정국이 내뱉는 말들이 진심처럼 느껴지는 지금,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 전부터,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나는 형을 좋아했어요.”

 

그러니까 전정국이 정말로,

 

한 번만,”

…….”

딱 한 번만 잡혀 줘요.”

…….”

그럼 죽을 때까지 놓지 않을게요. 내가 잡고 있을게요. 죽어도 안 놓칠 테니까…….”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지금,

 

나한테서 도망가지 마요.”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

 

태형은 멍하니 침대에 몸을 누인 채 푸르스름한 빛으로 가득 찬 천장을 쳐다봤다. 고작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인데 아직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대로 굳어버린 듯 태형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때마침 나타난 우진이 정국과 인사를 나눈 후 자연스럽게 저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지 모른다. 연회장으로 돌아온 후에도 계속 멍해 있는 저를 집까지 데려다 준 것 역시 우진이었다. 태형은 멍하니 몇 분 전 도착한 우진의 문자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괜찮아요? 그 사람 만난 이후로 계속 멍해 있는 것 같아서혹시 도움 필요하거나 좀 괜찮아지면 말해줘요.]

 

아이러니하게도, 우진의 문자만이 아까 있었던 그 일이 제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라는 유일한 증거가 되어 준다. 눈으로 한 번 더 천천히 문자를 확인한 태형은 이내 핸드폰을 끄고 다시 텅 빈 벽을 쳐다봤다. 아직까지도 심장 박동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 이틀 뒤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요.’

…….’

지금도 간신히 빠져나온 거라서, 그렇다고 그 뒤에 포기하겠다는 뜻은 아니고, 그러니까

…….’

나 한국에 있어서, 형한테 못 올 동안, 천천히 생각해 봐 달란 거예요.’

…….’

부탁할게요.’

 

정국의 목소리가 아직까지 따뜻하게 귀에 남아 웅웅거린다. 공명이 많은, 듣기 좋은 다정한 목소리. 정국은 포기하지 않겠다고, 놓지 않겠다고 했지만 정작 정국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태형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과 같았다. 만약 태형이 정말로, 진심으로 정국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면 정국이 한국에 있는 사이에 숨어버릴 수 있도록. 그걸 정국이 모를 리는 없었을 것이고 그러니까 그 말은 정국이 모든 선택을 태형에게로 넘겨준 것을 의미했다.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모든 진심을 고백하고, 제 모든 것을 태형에게 넘긴 채 오롯이 태형만이 둘의 관계를 정의내릴 수 있도록. 졌다는 말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

 

태형은 몸을 뒤척였다. 가벼운 이불이 부드럽게 몸에 감겼다. 시간이 지나고, 심장박동이 조금 잦아들고, 술기운도 조금 가라앉고 나니 머릿속이 조금씩 맑아졌다. 그래서 태형은 정국을 떠올렸다. 천천히 생각해 봐 달라던 정국의 부탁은 사실 의미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국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태형은 정국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아니, 이미 예전부터 그러지 않으려고 애썼음에도 그러고 있었으니까.

 

좋아해요.’

 

아직까지도 그 음성이 선명하게 남아 울린다.

 

나는 형이 욕심나고, 갖고 싶어요.’

 

그 말들이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순간 정국의 목소리는 진심을 담고 있었고 정국의 모든 것이 진실을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태형은 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일까.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인데. 차마 꿈에서조차 들을 수 없었을 정도로 간절히 바랐던 것들인데. 그 순간 정국은 가볍지도 않았고, 술에 취해 있지도, 장난스럽지도 않았는데.

 

…….”

 

언제부터 전정국은 나를 좋아했을까. 태형은 멍하니 생각했다. 정국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전부터, 더 많이 자신을 좋아해 왔다고 했다. 그 오래 전이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제가 정국을 좋아했던 시간들 안이겠지. 태형은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서로 좋아하면서도 서로에게 상처를 줬던 시간들. 여러 이유들을 붙여 가며 마음을 숨기고 감추고 속였던. 그리고 태형은 이불을 꼭 말아 쥐었다. 과거를 천천히 정리하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거 아닐까.

 

애인은 알아요? 형이 나랑 잔 거?’

너 나 좀 그만 괴롭혀.’

미안해요.’

그런 말을 왜 해, 쓸데없이.’

형 가벼운 사람이잖아요.’

너 그러는 거 진짜 짜증나.’

애인은 형이 이렇게 아무하고나 자고 다니는 거 알아요?’

그냥 평생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정국이 제게 했던 뾰족한 말들과, 제가 정국에게 했던 날선 말들이 한꺼번에 뒤엉켰다. 그 속에 진심이 없었다 할지라도,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했더라도 결국 그 말들은 진심 대신 서로에게 전해졌고 서로를 상처입혔었다. 그 기억들을 지울 수 있을까? 심장이 시큰거렸다. 태형은 이불을 조금 더 꼭 말아 쥐었다. 전정국을 좋아하느냐 묻는다면 그건 다시 대답할 필요도 없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국과 자신은 오랜 기간 서로 좋아하면서도 서로에게 상처를 줬었으니까. 그건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는 소리고 그럼 정국과 자신은 인연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닐까? 이제 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정국을 마주하고 웃을 수 있을까? 아무 생각 없이 정국의 손을 잡을 수 있을까? 과거의 기억이 자신을 갉아먹지는 않을까?

 

…….”

 

자신이 없다. 겁이 났다. 어쩌면 너무 갑자기 찾아온, 오랫동안 바랐던 일이라 그게 당황스러운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태형이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은 행복보다는 무서움에 가까웠다. 정국과의 오래된 기억은 그다지 달콤하지만은 않았음에도 태형을 아프게 할 만큼 독했으니까. 만약 이대로 정국과 연애를 하게 된다면, 나중에 혼자 남겨졌을 때 그 기억들이 얼마나 자신을 아프게 할까. 얼마나 커다란 후유증이 자신을 잡아먹을까. 태형은 눈을 감았다. 어느새 차가워진 바람이 태형의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

 

전정국 온 거 같더라.”

 

밤새 뒤척이느라 제대로 자지 못해 부스스한 얼굴을 하고 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아침부터 들이닥친 석진이 그랬다. 태형은 달칵 소리를 내며 끊긴 커피머신에서 컵을 집어들려다 멈칫했고 그런 태형을 보며 석진은 말을 이었다.

 

시사회 때문에 한창 바빠 죽겠는데 지 멋대로 탈주한 거라고, 혹시라도 이틀 뒤에 안 돌아오겠다고 하면 경찰을 불러서라도 돌려보내달라고,”

…….”

민 감독이.”

알아. 어제 연회장에서 봤어.”

파티에서?”

 

태형의 말에 석진이 놀란 눈을 했고 태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뜨거운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잠시 입을 살짝 벌리고 고개를 갸웃한 석진이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아닌데.”

…….”

공식적으로 초대받은 건 W그룹 정도인가? 근데 뭐, 어떻게든 올 수야 있었겠지. 민 감독 아는 사람이 여기에도 꽤 되니까.”

 

그러고는 잠시 침묵. 그 침묵에 태형은 컵을 내려놓았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그거 말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거 아냐. , 앞으로 어쩔 거냐고? 태형이 조용히 말하자, 석진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솔직히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긴 한데, 그것보다,”

…….”

너 괜찮냐고.”

 

석진의 말에 태형이 순간 멈칫했고 그런 태형을 눈치 챈 석진이 고개를 돌렸다. 너 말하기 불편하면 말 안 해도 돼. 그냥 걱정돼서 왔어. 석진의 목소리가 조용히 이어진다. 태형은 컵 끝을 만작였다. 어젯밤에 잠 한 숨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생각한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수많은 생각들 기저에 공통적으로 깔려 있던 것은 두려움이었다. 그러니까 괜찮냐고 물으면,

 

아니.”

 

괜찮지 않았다.

 

태형아.”

너무 오래 끌었어. 시작부터 잘못됐는데, 그 이후로도 계속 꼬여있기만 했잖아.”

 

아무도 용기를 내서 꼬인 매듭을 풀려 하지 않았다. 서로 피하기만 했고, 오랜 시간 방치되었던 그 꼬인 매듭은 아마 지금쯤 녹이 슬어 손을 댈 수조차 없게 되었을 것이다. 태형은 자신이 없었다. 그 꼬인 매듭을 무시할 자신이.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없으리라는 자신이. 정국과 사귀게 되면, 계속해서 불안해하게 되지 않을까? 여태까지 정국과의 관계가 그랬으니까. 항상 놓고 싶었지만 놓지 못했고, 끊고 싶었지만 끊지 못했고. 겨우 마음 정리가 다 되어 간다고 생각할 즈음, 정국은 다시 나타나 태형이 애써 묻어놓고 흐려지게 했던 것들을 한순간에 뒤집어놓았다. 너무 쉽게.

 

…….”

 

정국을 좋아하면서, 너무 많은 감정들이 닳았다. 너무 많은 것들을 생각해야 했다. 그 소모들이 버겁고, 그 후에 감당해야 할 것들이 무서웠다.

 

내일 모레 오후 155분 비행기래.”

?”

아니 그냥 뭐, 궁금할 수도 있잖아. 한국 직항 시간표가 어떻게 되나~ 난 가끔 궁금하더라고.”

 

향수병 때문인가? 한국에 발붙이고 산 기간보다 안 그런 기간이 더 긴데 이게 참 피라는 게 무서워, 그치? 갑자기 난데없이 비행기 시간을 내뱉더니, 석진이 능청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태형이 눈을 깜박였다. 석진이 그런 태형을 보며 씩 웃었다.

 

가끔은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게 도움이 안 될 때도 있더라고. , 그런 말도 있잖아. 철이 없으면 사는 게 즐겁다고.”

…….”

그래서 내가 인생을 즐겁게 살잖아. 뭐 내가 생각 쫌 안 한다고 세상이 두 쪽 나는 것도 아니고.”

 

뜬금없는 석진의 생각 타령에 태형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그런 태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석진은 말을 이었다.

 

결국은 네 마음대로 하는 거지.”

…….”

배고프다. 나 햄버거 포장해 왔는데. 모닝 햄버거 콜?”

 

종이 봉지를 가볍게 흔들며, 석진이 웃었다.

 

*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정국은 바쁘게 움직였다. 본 목적이야 태형을 찾으러 온 것이었지만 어쨌든 영화 홍보 차 왔다는 핑계가 있었으니까. 이틀간 많은 파티에 참여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 날 이후 단 한 번도 태형의 모습은 볼 수는 없었다. 류현이에게 듣기로는 태형이 이런 종류의 파티에 곧잘 참석한다고 했었는데.

그 날, 그러니까 윤기에게 전화를 걸어 태형을 찾은 날, 자다 깬 목소리로 윤기는 태형이 지금 H 감독의 영화에 참여하기 위해 석진을 따라 미국에 갔다는 것만 알 뿐 다른 것은 모른다고 했다. 윤기를 닦달해 석진의 연락처까지 알아낸 후 자존심까지 굽혀 가며 전화를 걸었지만 석진에게선 알아서 하라는 대답만이 돌아왔었고. 그나마 H 감독의 영화라는 힌트만을 잡고 제 인맥을 쥐 잡듯이 잡았지만 아무런 단서는 나오지 않았었는데, 의외의 곳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거다.

 

‘H 감독 찾는 거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열애설 보도가 난 후 아예 연락을 끊고 있었던 류현이로부터 온 문자였다. 그 대상이 류현이라는 것이 꺼림칙했지만 H 감독, 아니 태형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류현이는 제 스폰서의 그룹이 예전에 H 감독의 영화에 투자한 적이 있다고, 그 정도의 부탁은 대신 해줄 수 있다고 했다. 네가 왜 날 위해 그렇게까지 하냐는 질문에 류현이는 간단하게 답했다.

 

원해서 한 건 아니었더라도 날 도와줬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류현이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이게 미안함을 표현하는 류현이의 방식이라는 것을 모르진 않았다. 그룹의 스폰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하더라도 스폰서 본인과의 관계는 끊어진 상태에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테니까.

W그룹을 등에 지고 거기에 정국의 네임밸류까지 얹으니 미국에서 열리는 영화 관련 행사에 참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초대장을 건네주며, 류현이는 그랬다. 진심으로 잘 되길 바란다고.

 

…….”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오늘까지, 정국은 태형의 머리카락 한 올 볼 수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거고, 예상했던 건데도 못내 씁쓸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다. 이제 한국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다시 미국으로 올 수 있게 되었을 때, 태형이 저를 피하지 않고 여전히 미국에 머무르고 있기만을 바라야 하는 건가. 정국은 손을 꽉 쥐었다. 꾹 다문 입술이 욱신거렸다. 혹시, 그 때 만났던 게 마지막은 아니었을까.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의 가지가 뻗어나갔다. 만약 그렇다면, 그 때 조금 더 얘기할 걸. 조금 더

 

…….”

 

매달릴걸.

 

…….”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계속해서 후회가 남는다. 너무 오랫동안 말들을 쌓아놓기만 해서일까. 정국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슬슬 검색대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시간이었다. 체크인은 이미 예전에 마쳤지만 어쩐지 이대로 미국을 떠나면 이제 더 이상 태형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의미 없이 서성이고 있던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을 피해 오기로 예정되어 있던 파티에도 오지 않았던 태형이 공항에 올 리가. 정국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국 돌아가면 입술 다 부르텄다고 혼나겠네. 정국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 더 전광판을 확인하고, 괜히 다시 한 번 더 입구 쪽을 보고.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정국이 발걸음을 내딛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전정국.”

 

익숙한 목소리가 정국의 귓가에 닿았고 그 순간 정국은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곳엔,

 

나한테 할 말 없냐 그랬지.”

 

태형이 있었다. 정국은 눈을 깜박였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정국은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알싸한 감각이 전해졌다. 아픈 감각이 이토록 반갑게 느껴질 줄이야. 뛰어 왔는지 살짝 가쁘게 쉬고 있던 숨을 몰아 쉰 태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있어. 있었어. 사실은 그 때도 있었고 지금도,”

…….”

많아.”

 

그 날 그렇게 석진이 돌아간 뒤로, 태형은 혼자 멍하니 앉아 생각했다. 정국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태형 자신을 생각했다. 정국과의 과거를 후회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을 떠올렸다. 정국을 만난 이후로 태형은 과거만을 생각했었으니까. 정국과의 처음을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이 달라졌을까? 그 수많은 시간들 동안 내가 한번이라도 솔직했었다면 이렇게 돌아오지는 않았을까.

 

니가 그랬지, 네 생각 해 달라고.”

…….”

그런데 석진이 형은 나보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라 그러더라.”

…….”

그래서,”

…….”

둘 다 안 했어.”

 

태형이 고개를 들어 정국을 마주했다. 정국은 가만히 멈춰 서서 그런 태형을 쳐다봤다. 태형이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생각한 것들을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 말들이 다 솔직하게 전달될 수 있을까. 오래 묵혀 왔던 말들이 온전하게 정국에게로 닿을 수 있을까. 태형이 숨을 살짝 들이쉬었다.

 

내가 너를 알게 된 이후로는 내 생각보다는 네 생각을 더 많이 했었거든.”

…….”

그래서 이번에는 이틀 동안 내 생각만 엄청 많이 했어.”

 

그런 때가 있다. 일상의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이 갑자기 새롭게 다가오는 때. 이틀을 멍하니 생각만 하다가 문득 창밖을 봤을 때, 태형은 그 순간 여름이 끝났다는 것을 느꼈다. 바람이 선선했고, 창밖은 온통 여름의 향이 아닌 가을의 향으로 가득했다. 감정의 종류와는 상관없이 시간은 흐르고 기억은 쌓인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생각했다. 만약 지금의 달콤했던 기억이 오래되어서 나중에 꺼냈을 때 쓰디 쓴 기억으로 변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래서 결론을 내렸는데,”

 

지금 말해야 한다고.

 

잡혀줄게.”

 

전정국에게,

 

나 놓지 마.”

 

좋아한다고 말해야 한다고.

 

욕심 내도 돼.”

 

그러니까 지금 잡아야 했다. 더 이상 정국이 없는 시간들이 쌓이지 않게. 어차피 쌓이는 기억들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콤할 수 있게. 정국을 만난 이후로 이미 제 모든 음악의 출처는 정국이었으며 모든 계절은 정국으로 인해 의미를 가졌으니까. 부정한다고 아니게 될 명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태형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했다. 혹시 나중에 쓴 기억을 혼자 곱씹게 된다 할지라도, 지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욕심내기로. 태형은 말을 마치고 다시 입술을 물었다. 정국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국의 눈이 느리게 깜박여진다. 내 말이 제대로 전해진 거 맞나? 제가 할 말을 다 끝냈음에도 이어지는 침묵에 태형이 한 걸음 정국에게 다가간 순간이었다.

 

…….”

 

정국이 그대로 태형을 붙잡아 안았다. 순식간에 정국에게 안긴 태형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가 이내 얕은 숨을 내쉬고 천천히 정국을 마주 안았다. 그러자 정국이 조금 더 저를 세게 안아 오는 것이 느껴졌다.

 

다행이다.”

 

그리고 태형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로, 정국은 조용히 그렇게 중얼였다. 정국의 향기에 파묻혀 있던 태형이 뭐가, 하고 응수하자 정국이 살짝 몸을 떼어내고는 태형을 보며 씩 웃었다.

 

욕심내도 된다고 해 줘서요.”

……?”

어차피 나, 형 포기 못 했을 텐데. 이제 마음 놓고 집착해도 된단 거잖아요.”

…….”

 

정국의 낮은 목소리에, 태형이 빠르게 눈을 두 번 깜박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 번 더 태형의 얼굴을 꼼꼼히 눈으로 도장 찍은 정국이 다시 태형을 끌어안았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태형이 정국을 밀어냈다. 태형의 움직임에 한 번 더 태형을 꼭 안았다 힘을 푼 정국이 왜 그러냐는 듯 태형을 쳐다봤고 태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그런 스타일이야?”

뭐가요?”

집착하는 스타일이냐고.”

몰랐어요?”

…….”

나 소유욕 엄청 강해요. 그래서 형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여태까지 숨겼던 건데.”

 

그러고는 씩 웃는다. 그 당당함에 태형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그 때, 때마침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태형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주위의 시선이 모두 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런 시선이 익숙할 정국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태형은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빠르게 뒷걸음질 쳤고 정국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태형은 붉게 변한 제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며 나머지 한 손으로는 정국을 밀어냈다.

 

너 이제 들어가.”

너무 매몰찬 거 아니에요?”

너 비행기 놓치면 윤기 형한테 나 죽어.”

애인이 죽는데 제가 가만히 있겠어요?”

애인…….”

 

정국이 아무렇지도 않게 뱉는 그 단어에, 태형의 얼굴은 더 붉어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이렇게 쉽게 애인이라는 단어로 서로를 묶을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었는데, 너무 멀리 돌아왔다는 걸. 여전히 붉은 얼굴을 한 채로, 가려진 손가락 사이로 태형이 빼꼼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은 여전히 자신을 올곧이 쳐다보고 있다. 가라는데 가지도 않고. 결국 얕은 한숨을 내쉰 태형이 손을 내리고 정국을 쳐다봤다. 그래, 남들이 좀 보면 어때. 나중에 윤기 형한테 잔소리 좀 듣지 뭐. 태형의 한숨에 눈이 동그랗게 된 정국이 보여서, 태형이 살짝 웃었다.

 

전정국.”

?”

좋아해.”

 

정국에게는 처음 하는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태형은 더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정국의 볼을 잡았다. 갑자기 닿아 오는 태형의 온기에 정국이 눈을 깜박였지만 태형은 그저 씩 웃고,

 

……!”

 

제 입술을 정국의 입술에 붙였다. 이 공항에 있는 누군가는 정국을 알아보겠지만, 이 순간 그런 것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태형의 눈이 감기고, 놀라 동그래졌던 정국의 눈도 이내 사르르 접힌다. 주위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조금 더 커지고, 곧이어 찰칵 하는 소리까지 들려왔지만 정국은 태형을 밀어내는 대신 태형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지금 중요한 건 태형이 처음으로 제게 잡혀 주었다는 것뿐이니까.

영화 홍보 하나는 끝내주게 되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정국이 조금 더 태형을 제 쪽으로 당겨 끌어안았다. 맞닿은 입술 끝으로, 태형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길었던 여름의 끝과 함께 찾아온, 연애의 시작이었다.


 


+안 읽으셔도 무방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는 TMI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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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정국 번외 2

 

너무 많이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흔들리는 게 무서웠으니까.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나면 끝도 없이 깊은 감정이 될까봐.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나는 김태형에게 좋아한다 말하고 싶었다. 김태형을 안을 때마다 좋아한다는 말이, 좋아한다 말해달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은 자존심일까, 두려움일까. 차라리 자존심이었으면 좋겠는데. 두려움이면, 내가 너무 비참하잖아.

나는 내 감정의 밑바닥을 보는 게 무서웠고 그냥 그 정도의 감정만 유지하고 싶었다. 욕심내고 싶지 않았고, 욕심을 내다 언젠가는 포기해야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류현이는, 그런 나와 다른 듯 비슷한 사람이었다.

 

나 그 사람 좋아해.”

 

류현이는 내가 스무살 초반에 사귀었던 여자 중 하나로, 류현이를 다시 만난 것은 26살의 겨울이었다. 드라마를 같이 하게 됐고, 어렸을 때 깔끔하게 사귀었다 헤어졌던 사이라 오래 만날 수 있었다. 어차피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었으니 다른 사람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관계를 원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 류현이가 편했으니까. 파트너나 연인이라기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관계.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류현이는 갑자기 나에게 그랬다. 자신의 스폰서를 좋아한다고.

 

무슨 소리야?”

알아. 웃기게 들린다는 거. 그런데 그렇게 됐어.”

이 얘길 왜 나한테 하는데?”

도와줘.”

 

류현이의 스폰서는 한 그룹의 후계자였다. 재벌과 연예인의 스폰 관계는 연예계에선 흔한 일이었지만, 스폰서를 좋아하게 된 류현이의 경우가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어쨌든 류현이와 나는 애초에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헤어지자는 말이 필요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런 얘길 왜 나에게 하냐고, 새삼스럽게 헤어지기라도 하자는 거냐 물으니 류현이는 대뜸 그랬다. 도와달라고.

 

그 사람이 아는지는 몰라.”

…….”

말 한 적은없으니까.”

 

이유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혹시라도 알게 되면 버려질까봐겠지. 류현이의 부탁은 함께 칸쿤을 가 달라는 거였다. 그 사람이 그 곳으로 자길 초대했는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다고. 그러니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이 후회할 행동을 하지 않도록 말려달라고 했다. 나는 차마 류현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좋아하면서, 좋아한다 말도 못 하는 류현이의 모습이 어쩐지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그리고, 류현이의 짐작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이렇게까지 할 필욘 없잖아…….”

 

류현이가 울었다. 나와 알고 지낸 오랜 기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 스폰서에겐 약혼녀가 있었고 칸쿤은 그 여자와의 약혼식을 위해 간 거였다. 류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약혼식장에 도착했고, 약혼식 내내 그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자신은 그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그 어떤 말보다도 잔인한 이별 통보.

이틀을 내리 울다가 삼일 째 되는 새벽, 내가 자는 사이에 류현이는 그 남자를 찾아갔었다고 했다. 그리고 붙잡았다고 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그냥 그대로도 만족할 수 있었는데. 아무 말도 안 하고, 티내지 않으려고 꾹 참으면서 옆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는데 왜 그랬냐는 류현이의 말에 그 스폰서는 그 감정 자체가, 그러니까 류현이가 자신을 좋아하는 그 감정 자체가 부담스럽다고 했다고 했다. 가볍게 시작한 가벼운 관계는 그렇게 끝내는 게 가장 좋다고. 류현이의 그 말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김태형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가볍게 시작한 관계는 가볍게 끝내는 게 가장 좋다는 그 말이, 꼭 나와 김태형을 두고 하는 말 같아서.

 

그리고 그 날, 칸쿤에서 돌아와 김태형과 밥을 먹으러 갔던 그 날. 류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김태형이랑 있으니까 무시하려 했는데, 이어 도착한 문자는 내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너 김태형 좋아하지.]

[전화 받아.]

[아니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이게 뭐야.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나는 류현이를 포함해 누구에게도 내가 김태형을 좋아한다고 말 한 적 없었다. 그러니까 지레짐작하는 것일 테고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다. 다만…….

 

저 사람은 어때?’

누구?’

저 사람 얼굴. 네 스타일 아냐?’

 

칸쿤에서 류현이가 가리키던 사람들이 모두 묘하게 김태형을 닮아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별 생각 없이 내가 그렇다고 대답했던 것들도. 나는 핸드폰을 꾹 쥐었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혼자만의 일이야 상관없지만, 김태형이 연관되어 있다면 말은 달라진다. 잠깐 전화 좀 받고 온다는 내 말에 김태형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오해할 게 뻔하지만 지금은 일단 류현이가 왜 이러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오해야 그 다음에 풀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상황은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

 

미쳤어?”

 

지금 당장 자기한테 와 달라는 류현이의 협박에 가까운 부탁에 김태형까지 혼자 두고 온 나에게 류현이는 그랬다. 자기랑 사귀자고. 아니, 정확히는 사귀는 척을 하자고. 나는 그 말에 허 웃었다. 김태형을 볼모로 날 불러내서 기껏 한다는 말이 뭐? 사귀는 척을 해 달라고? 하지만 류현이의 얼굴은 진지했고 나는 그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김태형이 언론에 드러나는 게 싫을 테니까.”

?”

너랑 김태형이랑 사귀는 사이라고 기자한테 말할 거야. 네가 김태형 좋아하는 거 알아. 진짜로 사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증거야 얼마든지 많겠지.”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쟤가 지금 뭐라는 거야? 하지만 방금 전에 운 것 같은, 잔뜩 짓무른 눈을 하고서도 류현이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 뭐하자는 건데.”

기자가 나랑 그 사람의 사진을 찍었어.”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이랑 스폰 관계인 걸 알아.”

…….”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다음부터는 굳이 듣지 않아도 뻔했다. 그 남자는 약혼을 앞두고 있었고, 만약 이 건이 터진다면 그 남자에게, 그리고 그 남자의 회사에 치명적일 거고. 어쩌면 약혼에도. 연예인과 재벌의 스폰 관계야 공공연한 비밀이라지만 공식적으로 터지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니까. 그러니까말하자면 류현이는 그걸 덮을 다른 특종이 필요한 거였다. 거기에 가장 적합한 게 나였던 거고. 류현이가 나를 쳐다본다. 나는 이를 물었다.

 

정국아.”

…….”

미안해…….”

 

류현이의 짓무른 눈가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는 그런 류현이를 아무 말 없이 쳐다봤다. 지금 류현이는 자신을 위해 스폰 기사를 막으려는 게 아니었다. 오로지 그 사람을 위해서였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버려지고도 그 사람을 위해 그러고 싶어? 나는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류현이가 나를 쳐다본다. 그 눈에,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나도,

 

나는,”

…….”

그 사람이 중요해…….”

 

저렇게 될까.

 

미안해 정국아…….”

 

류현이가 울고 있었다. 류현이의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오늘로 두 번째였다. 그런데 이유는 그 때와 같다. 그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해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저렇게 될까.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 때문에 저렇게 힘들어하게 될까. 김태형이 날 좋아하지 않아도, 김태형이 다른 사람 앞에서 웃고 있어도 그 오랜 시간 동안 난 김태형을 놓지 못했는데.

 

미안해…….”

 

류현이의 우는 모습에 내 모습이 겹쳐 보여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열어 놓은 창문에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김태형은, 지금쯤 집에 들어갔을까.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류현이 때문에 달려온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자길 두고 간 나 때문에 화가 났을까.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을까.

 

진짜,”

 

만약 지금 김태형의 기분이 좋지 않다면,

 

짜증난다.”

 

그게 나 때문이었으면 좋겠다.

*

 

김태형에겐 차마 연락하지 못 한 채로 며칠이 흘렀다. 연락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변명할 말이 없었으니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해도 어차피 며칠 후엔 류현이와 내 열애설이 나갈 텐데. 내 방안에 틀어박힌 채로, 나는 멍하니 김태형을 생각했다. 몇 번이고 달려 나가고 싶은 것을 참았다. 전화해서 좋아한다고, 사실은 다 아니라고. 전부 다 고백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랬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아서. 김태형을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김태형에게 그걸 전부 다 말하고 나면 정말로 끝도 없이 깊어지게 될 것 같아서. 혼자 남겨지는 건 결국 내가 될 것 같아서.

내가 원하는 것 중에,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김태형은 영원히 쥘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김태형에게 다가가고 싶어질 때마다 스무살의 그 여름이 나를 괴롭혔으니까. 지독히도 앓았던 그 시간들. 욕심을 너무 일찍 알았고, 포기를 너무 늦게 알았던 어린 날의 나. 그래서 가벼운 척을 했다. 계속 다른 사람을 찾았다. 김태형이 나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 정도만. 나도 딱 그 정도의 감정만 유지하고 싶었으니까. 자존심이고, 이기심이라는 걸 알지만 상대방이 나를 원하는 것보다 내가 그 사람을 더 원한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결국 힘들 건 나잖아.

 

…….”

 

하지만 내가 하고 있는 게 최선이 맞을까. 나는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라리 TV를 보면 좀 머릿속이 조용해질까 싶어 TV를 틀었더니 TV 속에선 내 인터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운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들었어요!”

, 촬영은 다 끝났고, 이제 편집 막바지 단계에 있어요.”

 

TV 화면이 물빛처럼 번져서 뿌옇게 보여 나는 눈을 깜박인다.

 

이번 영화가 정국 씨한테 특별하다고 들었어요.”

, 처음으로 시나리오랑 연출에 참여했거든요.”

 

.”

 

나는 멍하니 웃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것마저도 김태형의 이야기였다. 나 진짜 답이 없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남주인공이 오랜 짝사랑을 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저건 내 얘기였다. 내 이야기이자, 김태형의 이야기. 이번 영화는 너도 시나리오에 참여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윤기 형의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게 그거였으니까.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 좋아해.’

…….’

정신 차려 보니까 이미 좋아하고 있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유치한 짓이었다. 일부러 그런 대사를 넣고, 연기연습을 해달라는 핑계로 김태형에게서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아무 의미도 없는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내가 먼저 좋아했어요.’

 

그런 식으로 비겁하게 굴었다. 유치하고, 비겁하고, 한심하게. 좋아한단 말은 감추고 거짓으로. 그래도 그게 안전하니까.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말했다가 되돌아오지 않을 말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나는 손으로 눈가를 꾹 눌렀다. 눈이 시렸다. 심장이 불안하게 뛴다. 목이 메인다. 이런 내가 한심하고, 짜증나고,

 

…….”

 

싫다.

 

…….”

 

그 때였다. 내 핸드폰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쏟아지는 문자와 메신저, 그리고 전화들. . 나는 멍하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결국 류현이와 내 열애설이 보도된 것 같았다. 소속사에도 말하지 않았으니 내 소속사도 지금쯤 뒤집어졌을 게 뻔하고. 나는 하 웃었다. 지금 이렇게 수없이 들어차는 소리와 문자들 속에 김태형의 것은 하나도 없어서. 당연한 건가. 나는 핸드폰을 꺼 버렸다. 머릿속은 이미 충분히 시끄러우니까. 창밖의 붉은 신호등이 깜빡, 깜빡 점멸하는 것이 빗방울에 번져 보였다. 아무런 소음도, 빛도 없는 공간에 빗방울이 창밖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또다시 찾아온,

 

…….”

 

김태형이 없는 여름 장마의 시작이었다.

 

*

 

윤기 형, 나 잠깐 형 핸드폰 좀…….”

 

열애설이 터진 다음 날, 나는 새벽부터 찾아온 매니저 형에게 핸드폰을 빼앗겼다. 사장님의 명령이라고 했다. 내 나이가 몇 살인데 핸드폰을 빼앗느냐고 항변해 봐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잠잠해질 때까지 당분간 연락은 모두 매니저 형을 통해서 하고 자숙하라는 거였다.

꼬박 이주일을 소속사에서 굴리는 대로 살았다. 어차피 중요한 일들은 전부 매니저 형을 통해서 연락이 왔고, 그 외엔 의미 없는 관계들뿐이어서 딱히 불편할 것도 없었다. 한 명만 빼놓곤. 어차피 할 수 있는 말도 없으니까 차라리 잘 된 건가. 그렇게 위안해 봐도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러다가 그 날, 문득 민윤기가 생각났다. 민윤기를 통해서라면 매니저 형의 눈을 피해 연락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매니저 형을 닦달했다. 나 윤기 형이랑 작업 관련해서 얘기할 거 있어. 윤기 형 작업실로 데려다 줘. 가서 뭐라고 하면서 김태형과 연락할 건지, 김태형한테는 뭐라고 할 건지. 그런 것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그냥 김태형이 보고 싶었다. 머릿속에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뭐야?”

 

무작정 민윤기의 작업실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민윤기가 아닌 김태형이었다. 순간 헛것을 보는 건가 했다. 그러나 곧바로 그의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고 나는 이를 물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다가가 김태형과 그 남자를 떨어트렸다. 오랜만에 닿는 김태형의 온기에 손끝이 따끔거렸다. 심장 박동이 핏줄을 타고 김태형한테까지 전해질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김태형의 팔을 꼭 쥐었다. 지금 당장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싫어하잖아요. 김태형 씨랑 무슨 사이신진 몰라도, 싫어하는데 계속 잡고 있는 건 무례한 거,”

무례한 건 그 쪽 아닌가? 무슨 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그렇게 끌고 가고.”

…….”

그리고, 그 쪽이야말로 태형이랑 무슨 사인진 몰라도,”

…….”

태형이는 나랑 더 친하거든요.”

 

그리고 그 남자는 김태형을 제 쪽으로 다시 끌어당긴다. 김태형은 쉽게 나에게 끌려온 것처럼, 나에게서 떨어진다. 너무 쉽게. 나는 손을 꼭 말아 쥐었다. 모래를 쥐었다 놓은 것처럼 손 안에서 잡히지 않는 온기가 허전하게 따끔거렸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표정 관리가 안 됐다.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눈앞엔 그토록 바랐던 김태형이 있고, 심장박동이 뇌를 울리고, 나에게 잡혀 있던 듯했던 김태형은 내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렸고. ,

 

그러니까 자기소개부터 할까요? 저는…….”

!”

…….”

, 아니, 석진이 형.”

 

그 때처럼.

 

그만 가자. 배고프다며.”

진이라고 부르는 거 오랜만이네!”

 

그 사람은 김태형을 향해 환하게 웃고, 김태형의 손은 그 사람의 팔을 잡아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김태형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나와 김태형 사이에는 간극이 있고 그 사람과 김태형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시간들이 잔뜩 쌓여 있다. 해야 하는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많은데. 전부 김태형과 관련된 것들로만 나는 가득 차 있는데 김태형은 그런 나에게 눈 한 번 제대로 맞춰 주지 않는다. 속에서 울컥, 뜨거운 실뭉치가 따갑게 날 건드린다. 한 번만,

 

윤기 형, 저 이만 갈게요.”

 

날 봐 주면 안 돼?

 

전정국 너도

 

나는 계속…….

 

잘 지내고.”

 

당신만 생각했는데.

 

…….”

 

결국 김태형이 그 남자의 팔을 잡아끌고 등을 돌리고, 나는 입술을 깨문다. 이대로 보내는 게 맞는데. 그게 내가 원했던 건데. 그냥 이대로 김태형을 보내고, 나는 김태형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고. 김태형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로, 아무 말도 할 필요 없고,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궁금해 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잘 됐네.”

…….”

나도 윤기 형이랑 밥 먹을 참이었거든요. 이왕 이렇게 된 거,”

 

할 수 있을 리가.

 

같이 먹죠.”

 

김태형이 나를 쳐다본다. 그럼 김태형을 마주보면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

 

아깐 실례했습니다. 태형이 형이 싫어하는 것 같아서 그랬던 건데.”

그럴 수도 있죠. 다른 사람들도 종종 오해하더라구요.”

많이 친하신가 봐요, 태형이 형이랑.”

특별한 사이긴 하죠. 안 지 오래되기도 했고.”

제가 괜히 두 분 식사하시는 데 끼어든 건가요?”

괜찮아요. 태형이랑은 뭐, 맨날 같이 먹는데요. 오랜만에 여럿이서 먹으니까 좋네요.”

 

김석진이라는 사람은 사사건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었다. 김태형과 어떤 사이인지 제대로 말해주지는 않으면서, 한 순간도 틈을 내어주지 않는다. 그를 떠 보기 위해 한 질문들은 전부 빗겨나가고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들만 돌아온다. 그러다가 그가 한 말에, 나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래서 제가 지금 태형이한테 잘 보여야 돼요. 태형이 뉴욕으로 데려가려면.”

 

뉴욕? 나는 김태형을 쳐다봤다. 하지만 김태형의 시선은 날 향해 있지 않다. 김태형은 나를 마주친 그 순간부터 계속 불안해 보였다. 왜 불안해하는 건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서, 그게 내 기분을 계속해서 바닥으로 치닫게 만들고 있었고. 아마도 내가 김석진의 앞에서 나와 자신의 관계를 말해버릴까 봐. 나는 이를 물었다. 뉴욕으로 데려간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도망가려고, ? 그 때처럼?

 

태형이 형을 뉴욕으로 왜…….”

, 그건 H 감독 영화

, 영화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그러나 김석진이 제대로 된 말을 하기도 전에, 김태형은 말을 가로챈다. 아직 뉴욕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듣지도 못했는데 영화라는 단어가 다시 내 심기를 건드린다. 태형이가 H 감독을 제일 좋아하잖아요. 근데 최근 개봉작을 아직 못 봤다고 해서. 그거 보러 가려고 했거든요. 꾹 물고 있었던 입술이 송곳니에 눌려 짓이겨진다. 혀끝으로 씁쓸한 피 맛이 느껴졌다. H감독의 영화. 내가 김태형에게 보러 가자고 했었던 거. 왜 하필……. 우연이라면 이런 거지같은 우연이 있을 수도 있을까.

 

, 다 먹었지? 이제 슬슬 일어나자. 진짜로 영화 시간 늦겠다.”

그거 그냥 취소하면 안 돼? 이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좀 실례잖아.”

 

더 거지 같은 사실은, 김태형이 자꾸만 이 자리를 피하려고 하고 있다는 거였다. 김태형은 지금 누가 봐도 불안해 보였고, 그에 반해 오히려 김석진은 여유롭다. 그 사실이 못 견디게 힘들었다. 자꾸만 초조하게 만들었다. 김태형이 나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숨기고 싶어 한다는 게. 내가 김태형에게 불안함이 된다는 게. 김태형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나라는 게.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결국 김태형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는 그런 김태형을 눈으로 좇지만 김태형은 끝끝내 나에게 시선 한 가닥 주지 않는다. 나는 다시 김석진을 쳐다본다. 김석진은 나를 보며 웃고 있다. 뭐가 저렇게 여유로울까. 김태형은 당신 때문에 저렇게 불안해하는데. 그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그 후에도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그렇게 하면, 김태형과 저 사람의 관계는 끝날까. 그렇게 되면, 혹시, 나에게도 다시 기회가 올까. 김태형이 나를떠나지 않을까.

 

정국 씨?”

…….”

 

그러나 나는 이미 안다. 그런 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거라는 걸. 어차피 김태형은 나를 보지 않을 거고,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고, 나는 김태형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이렇게 아무것도 묻지 말아야 하는데.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 하는데. 김태형이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면, 내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간다면 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데. 그러나 아까 김태형을 작업실에서 마주친 이후로 내 몸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나한테 할 말 없어요?”

 

화장실을 가는 길목에 얼마나 기대어 서 있었을까, 김태형이 보였다. 그리고 김태형이 보이자마자, 나는 김태형을 붙잡고 물었다. 나한테 할 말 없냐고, 나한테 해주고 싶은 말 없냐고. 나는 많았는데. 궁금한 게 너무 많았는데.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내 열애설에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기분이 나빴는지,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았는지. 나를 원망하지는 않았는지, 내가 궁금하지는 않았는지.

 

없어.”

하고 싶은 말도 없어요?”

 

그 사람은 누군지, 왜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인지. 나는,

 

전정국.”

…….”

없어. 너한테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그거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안 되는지.

 

…….”

 

그러나 나를 바라보지 않는 김태형의 표정은 충분히 그 대답이 되어 준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짜증스런 표정. 피곤한 것 같은 태도.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 날 레스토랑에 형 혼자 두고 간 거 미안해요.”

 

정도. 그리고 나는 입을 다문다. 김태형이 나를 쳐다본다. 지친 듯 한 눈. 피곤한 표정. 이 자리가 불편하다는 걸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태형을 놓을 수가 없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할 말은 그게 다고?”

…….”

 

말을 해버릴까. 좋아한다고. 그 기사들은 전부 거짓이고, 어쩔 수가 없었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내 자존심이었다고. 무서웠다고.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인정하기 싫었다고. 언젠가는 나 혼자 그 감정의 무게를 다 감당해야 할 것 같아서 무서웠다고. 욕심내지 않으면, 그래서 갖지 않으면 잃을 필요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태형이 형.”

전정국.”

 

당신을 좋아한다고.

 

너 나 좀 그만 괴롭혀.”

 

그러나 내 말들이 소리가 되기 전에, 김태형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닿는다. 나는 김태형을 쳐다본다. 김태형의 눈은 날 향해 있지 않고, 내 심장은 내려앉는다.

 

나한테 사과는 왜 해? 왜 자꾸 찾아와? 왜 자꾸 앞에서 거슬리게 알짱거려. 지금도, 왜 불러내는데. 밥은 왜 같이 먹자고 하는데. 너 그러는 거 진짜 짜증나.”

…….”

그냥 평생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머리가 멍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김태형이 나에게 하는 말들이 전부 다 현실일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 상관없으니까 나 좀 내버려 둬.”

…….”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하자.”

 

김태형의 차가운 말이 날카롭게 나를 찌르고, 혀를 굳힌다. 뭘 그만 해.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내가 뭘 했는데. 나는나는 아직 아무것도 말한 적 없는데. 내가 김태형에게 원하는 것들을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 없는데. 무서워서, 자존심이 상해서, 김태형이 도망갈까 봐, 이루어지지 않을까 봐온갖 이유를 다 갖다 붙이면서 입 밖으로 꺼낸 적 없었는데. 그런데 김태형은 또 도망가려고 한다. 그냥 이대로 옆에 있어주길 바라는 게, 그게 그렇게 큰 바람이야? 나는 이를 악문다. 눈앞의 김태형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 사람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나는 그랬다. 내가 김태형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 대신, 준비하지 않았던 말을 했다. 꽉 아문 턱에 힘이 들어간다. 김태형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닿고,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지만 김태형은 나에게서 돌아선다. .

 

맨날 가볍게 굴었잖아요. 형 가벼운 사람이잖아요. 왜 그 사람한테는 안 그래요?”

전정국.”

, 애인은 뉴욕에 따로 있으니까, 애인 몰래 그냥 즐긴 건가?”

 

그래서 나는 또 날카로운 말을 하고, 김태형은 나를 돌아보고. 이게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몸은 말을 멈추지 않고.

 

난 그것도 모르고. 민윤기 좋아하냐고나 묻고 있었네.”

.”

애인이 곧 뉴욕에서 돌아올 거라서,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이제야 이해가 되네.”

 

말의 온도가 차갑다. 머리가 멈춘 채로 나는 차가운 말을 내뱉는다. 이 말들이 김태형에게 상처가 될까?

 

애인은 알아요? 형이 나랑 잔 거?”

…….”

형이 이렇게 아무하고나 자고 다니는 거. 나랑 섹스 파트너 관계였던 거 다 아

태형아!”

 

내가 하는 한심한 말들을 김태형이 가만히 전부 듣고만 있던 그 때,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내 귓가를 울리고 김태형의 시선이 내 뒤로 향한다. 그리고 나는 손을 말아 쥔다. 차라리 다행일까. 나도 내가 하고 있는 말들을 멈출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하필 저 사람일까. 왜 하필 지금, 여기일까. 김석진이 나를 지나쳐 김태형에게 다가간다. 나는 멍하니 김태형을 감싸는 김석진을 쳐다본다. 그제서야 김태형의 새하얗게 질렸던 표정이 조금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진짜 영화에 늦을 것 같아서. 이만 태형이를 데려가도 될까요?”

…….”

할 말 끝났어. 가자.”

 

김석진이 나를 향해 웃으며 말하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리고, 잠시 후에 김태형이 대답한다. 나는 눈을 깜박인다. 김석진이 김태형을 붙든 채로 내 옆을 지나가고, 김태형이 멀어져 가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렇게,

 

…….”

 

김태형과의 마지막이 끝났다.

 

*

 

무슨 정신으로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윤기 형을 만났던가? 매니저 형이 집에 데려다 줬던가? 아니면 그냥 혼자 돌아왔을까.

꼬박 이주일을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매니저 형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핸드폰은 나에게 돌아온 지 오래였지만 방 안 어딘가에 처박아 둔 채로 아무 연락도 받지 않았다. 머리가 아팠다. 하도 말을 하지 않으니 목도 잠겼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몰랐다. 낮과 밤이 섞이고, 소음과 노랫소리가 섞이고, 온갖 감정들이 전부 뒤섞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고 TV를 보다가,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다가, 결국은 김태형을 생각했다.

 

…….”

 

차라리 잘 된 거라고 생각하려 했다. 여태까지 버텨왔으니까. 깊어지지 않으려고, 무거워지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벽을 치고 거리를 두고 도망다녔으니까. 그 결과로 김태형은 내 눈앞에서 사라졌고, 내가 찾지 않으면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김태형은 연예인도 아니고 꼭 마주쳐야 하는 사람도 아니니까 내가 찾지 않으면, 내가 먼저 찾아가지 않으면 영원히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내가 아닌 누군가와 평범하게 살겠지. 그럼 내 감정도 언젠가는 잦아들 거고 나는 그렇게 김태형을 잊을 거고, 감정도 기억도 흐려질 거고, 그러니까…….

 

씨발.”

 

나는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확 몸을 일으킨 탓에 머리가 시큰했다. 나도 모르게 꽉 깨물고 있었던 입술에서 짭짤한 맛이 났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나는 시큰거리는 눈에 손을 올렸다. 김태형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감정이 잦아들 거라고? 기억이 흐려질 거라고?

 

…….”

 

김태형을 좋아하는 것은 내 습관이 된 지 오래였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만 김태형을 떠올린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냥 그 감정이 선명해지는 것일 뿐 사라졌던 게 아니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이제는 김태형을 제외하고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감정이 습관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을 의미했다. 매 여름 나는 김태형을 생각했었다. 그 날의 온도, 그 날의 감정, 그 날의 기억, 그 날의 김태형. 김태형을 만난 이후로 김태형을 생각하지 않고 보낸 여름은 없었다. 애초에 불가능했는데. 왜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왜 버텼을까. 왜 자존심을 끝까지 가지고 있었을까. 심장이 시큰거렸다. 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을까. 그냥 솔직하게 말할걸. 자존심이든, 두려움이든 뭐든 그냥 좋아한다고 할 걸. 그 수많은 시간동안 어쩌면 한 순간은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솔직하게…….

 

…….”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침대에서 벗어났다.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김태형이 김석진을 좋아하든 말든, 이미 내가 늦었든 아니든. 어차피 후회할 거라면 말해야 했다. 나는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휴대폰을 들어 민윤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어지는 연결음 소리가 꼭, 뚝뚝 끊어져 내리는 장맛비같이 느껴졌다.

 

-여보세요?

윤기 형.”

-갑자기 뭐야, 이 새벽에.

지금,”

 

내가 김태형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멀리 떨어져 있는다고, 잊으려 한다고, 부정하고 무시한다고 흐려지고 잊혀질 감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김태형이 김석진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래서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나는 김태형을 좋아한다고. 나는 김태형이 갖고 싶고, 욕심나고, 김태형이 내 옆에만 있어 줬으면 좋겠고, 김태형이,

 

김태형 어디 있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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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정국 번외 1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카메라 앞에 서서 연기하는 내 모습이다. 그 때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시끄러운 시장 속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어린 아이였고, 나는 내 키보다 훨씬 큰 카메라와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울어야 했다. 사람들은 나를 보며 내가 울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속에는 엄마 역시 있었다. 내 엄마는 저기 내가 보이는 앞에 있는데, 이곳은 시장도 아닌데. 왜 내가 엄마를 찾으며 울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도 잠시 나는 바로 울음을 터뜨렸고, 감독의 만족스러운 컷 사인이 떨어진 후 날 바라보던 사람들은 날 보고 웃으며 날 칭찬했다. 어린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연기를 잘 할 수 있냐고. 천재임에 틀림없다고. 그리고 그 날 그렇게, 내가 살아가는 평생 동안 내 이름 앞에 놓일 수식어가 결정됐다.

 

*

 

나에게 세상은 두 가지여야 했다. 연기하기 위해 주어진 세상과, 내가 살아가야 할 실제 세상. 좋은 배우는 그 두 가지 세상을 제대로 분리해서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고, 그렇지 못하면, 연기 속 세상이 갉아 먹히든, 현실이 갉아 먹히든 둘 중 하나가 된다. 나의 경우는 후자였다.

내 연기는 훌륭했고, 최고였고, 그 나이 대 아이로서 완벽했다고 모두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행복했다. 모든 걸 가진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이 나를 향해 칭찬을 했다.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연기를 하냐고. 그래서 몰랐다. 내가 내 세계를 갉아 먹으며 연기를 하고 있는 줄. 현실과 연기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줄. 사실, 어린 아이에게 그건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다. 내 친구들은 모두 드라마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었고, 드라마 속 친구들이 내 진짜 친구들이었다. 드라마에서 싸운 친구들은 현실에서도 어색해졌다. 연기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랬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상을 휩쓸었다. 그 나이에, 내가 맡은 역할에 탈 수 있는 상은 모두. 그렇게 내 세계는 완벽했다. 내가 원하면 뭐든 가질 수 있었다. 당연했다. 모두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탈락이요?”

 

21, 처음으로 성인연기에 도전하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내가 원하는 감독의 새로운 작품. 상업 영화도 아닌 독립 영화. 오디션 같은 건 그냥 피상적인 것뿐이고, 전정국이 먼저 오디션 의사를 밝혀왔다는 것부터 이미 주연은 정해진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나 역시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받은 통보는 불합격. 그것도 모든 배역에서.

 

연기에 부족함이 없네요.”

감사합니다.”

그거 칭찬 아닌데.”

 

대학교를 갓 졸업한 감독이랬는데. 나는 오디션장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민윤기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 나를 마주한 사람 모두가 호의적인 표정을 보일 때, 그렇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 민윤기의 그 말 한마디에 오디션장이 술렁인다. 심지어는 민윤기 옆자리에 앉아 있던 메인 작가까지. 그러나 민윤기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연기를 못 하는 건 아닌데,”

…….”

경험하지 못한 건 티가 날 수 밖에 없어요.”

그게 무슨…….”

실패해본 적 없죠.”

…….”

뭔가를 잃어 본 적도 없는 거 같고.”

 

민윤기는 나에게 그랬다. 한 손으론 펜을 돌리면서. 실패? 나는 멍하니 민윤기를 쳐다봤다. 그런 걸 내가 해봤을 리가. 여태까지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었는데.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있자 민윤기가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이해해요, 나라도 그랬을 거니까.

 

경험해본 적 없는 걸 연기하는 게 보여요.”

…….”

딱 그 정도의 상실, 적당한 정도의 결핍.”

…….”

그래서 정국 씨는 저희랑은 안 맞을 것 같아요.”

 

아쉽네요, 마스크는 내 스타일인데. 민윤기가 웃으며 말했고 나는 그 순간 지금 이 오디션이 비공개 오디션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이미 유명한 배우라는 점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나는 차오르는 쪽팔림을 숨기기 위해 손을 꼭 쥐었다. 옆에서 메인 작가가 민윤기를 쥐고 흔드는 것이 보였다. ‘지금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차요?!’ 자기 딴에는 나에게 안 들리게 한다고 한 것이었겠지만 흥분해서 목소리 조절이 안 된 건지 가까스로 나에게 그 목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민윤기는 여전히 덤덤하게 말했다. ‘우리 영화랑은 안 맞아.’ 나는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자존심이 상했다.

 

왜 결핍이 있어야 돼?”

 

오디션장에서 집으로 차를 타고 가면서 난 그랬다. 차를 몰던 매니저 형이 글쎄……. 하고 말을 얼버무린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아누웠다. 솔직히 쪽팔리고, 자존심 상하고. 그랬다.

 

…….”

 

객기도 맞았고, 괜한 욕심도 맞았다. 그냥 하던 거나 하면 될 걸, 안 해본 걸 해보겠다고. 드라마도 아니고, 상업 영화도 아니고, 이름 없는 감독의 독립영화에. 그것도 해본 적 없는 성격의 역할로. 그러나 보여주고 싶었다. 나도 이제 성인이고, 내가 할 수 없는 건 없다는 걸. 그러나 그 시도는 시작도 못한 채로 망가졌다.

 

그러니까 드라마 하자고 했잖아. 이번에 박소현 작가 드라마에,”

그거 또 고등학생 아들 역할이잖아.”

시청률은 보장된 건데…….”

지겨워.”

정국아.”

 

말하자면 그런 거였다. 따먹지 못할 포도는 넘보지도 말라는 거. 처음부터 매니저 형은 내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걸 원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한데, 굳이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할까? 나는 이미 가진 게 많고, 내가 뭘 잘 할 수 있는지도 알고. 하지만 그러고 싶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원한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오기였다. 민윤기 감독의 오디션에서 떨어진 걸, 실패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성인이 된 이후의 첫 연기는 민윤기 감독의 영화여야만 했다.

그 때, 핸드폰이 조용히 진동했다. ‘김지현’. 저번 드라마에서 내 여자 친구 역할을 맡았던 동갑내기 배우. 역시나 드라마가 끝난 후에 자연스럽게 사귀게 된. 그러나 난 핸드폰을 덮어 버렸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

?”

나 휴가 갈래.”

?”

해외. 사람들 별로 없는 곳으로. 가서 좀 쉬다 올래.”

 

그러니까, 일종의 도망이었다. 내가 신경 써야 하는 것들로부터의. 민윤기 감독의 영화에 누가 캐스팅됐는지,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 질 건지, 그런 정보들로부터의. 그리고,

 

내가 돌아오고 싶을 때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들로부터의 도망.

 

*

 

.”

 

나는 내 앞에 펼쳐진 세상에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진짜 남자들밖에 없네. 나는 슬그머니 인파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시끄러운 소리가 고막을 울려댔다.

 

너 클럽 가지 마. 또 여자 문제 만들기만 해 봐!’

 

매니저 형이 비행기 티켓을 끊어주며 했던 소리였다. 나는 그 말에 그러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그 때는 그냥 정말 사람 없는 비교적 한적한 도시로 가서(완전히 시골은 싫었다) 쉬다 올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는 곧 지루해졌고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푹 쉬려고만 했던 내 생각은 이미 날아간 지 오래였다. 그래서 갔다. 게이 클럽에. 매니저 형과의 약속은 지킨 거였다. 여자 문제는 안 만들어질 테니까.

 

, 한국 사람.”

 

그런데 누가 알았겠냐고. 거기서 그 사람을 만나게 될 줄. 그 때의 나는 클럽 한 구석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차피 남자는 내 취향도 아니었고, 그냥 시끄럽고 사람 많은 곳에 가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멍하니 스테이지를 지켜보고 있던 나에게, 그 사람이 다가왔다. 그러니까,

 

맞죠, 한국인.”

 

김태형이.

 

진짜 신기하다. 나 여기서 한국인 처음 봐요.”

 

나를 만났을 때 김태형은 이미 취해 있었다. 나는 나에게로 다가온 김태형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 때는 그냥, 잘생겼다고만 생각했던 거 같다. 매력적인 사람. 김태형은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게, 그러니까 조금은 어색하게 내 옆에 앉았다. 클럽에 자주 오는 사람은 아닌가 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김태형은 내 옆에 앉아 조잘조잘 떠들었다. 평소의 나라면 술 취한 사람의 주정 같은 걸 듣고 싶어 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 날은 이상하게 가만히 앉아 김태형의 말을 듣고 있었다. 김태형의 목소리가 듣기 좋은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김태형은 외롭다고 했다. 가끔은 유학 온 걸 후회한다고도 했다. 힘들어서 다 때려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그러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게 되니까 그럴 수 없다고도.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김태형의 얼굴을 쳐다봤다. 길게 뻗은 속눈썹과, 커다란 눈, 예쁘게 말려 올라간 입술이나 코끝의 점 같은 것들. 그리고 난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김태형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췄다. 취하지도 않았었는데. 취한 건 내 눈앞에 있는 김태형이었는데. 내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김태형은 내가 입술을 떼고 난 후에도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나는 내가 하고도 놀라 덩달아 김태형을 마주 보고 눈을 깜박였고. 나 지금뭐 한 거지. 그러나 그 순간, 김태형이 웃었다. 그리고 그랬다.

 

나랑 잘래요?”

 

내가 그 순간에 뭐라고 대답했어야 했을까. 나는 갓 성인이었고, 여자친구는 많이 사귀어 봤지만 한 번도 관계를 가져 본 적은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까 원나잇 같은 것도 당연히 안 해 봤고. 그런데 내 첫 경험을 이런 곳에서? 방금 전에 만난, 전혀 모르는 사람이랑? 하지만 김태형이 날 보고 웃는 순간, 그런 것들은 전부 의미 없는 것들이 되어 버렸다. 김태형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이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만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래서, 어쩌면 이렇게 시작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김태형이 간절했다. 어떤 의미로든.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마, 그 때부터 나는 이미 김태형을 좋아하고 있었던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날 밤이 완벽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기억나는 건, 처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 나랑 잘래요?’라고 말했던 사람 같지 않게 김태형이 서툴렀다는 것. 그리고 관계를 가지는 내내, 내가 그를 붙잡았다는 것. 이상하게 김태형은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자꾸 내 손 밖으로 빠져나갈 것 같은 느낌. 내가 쥘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나는 몸을 섞는 내내 계속해서 그에게 말했다. 날 기억해 달라고.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고. 그의 이름을 물었고, 그가 지내고 있는 곳을 물었고, 그의 번호를 물었다. 처음에는 대답하지 않으려 했던 그도 내가 끈질기게 묻자 끝에 가서는 순순히 말해줬었다. 이름은 김태형, 지내고 있는 곳은 이 근처의 호텔, 번호도. 술에 취한 사람을 데리고 관계를 맺는다는 죄책감과 이 사람이 다음 날 아침 오늘의 일을 기억할까 하는 불안감이 그 시간 내내 나를 괴롭혔지만.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내 옆에 김태형은 없었고 나는 그가 내 옆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바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설마. 내가 어제 그렇게 부탁했는데. 하지만 혹시 어젯밤 일이 꿈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김태형은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진 후였다. 혹시 잠깐 나갔다 돌아오려나 싶어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려 봤지만 당연히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텅 빈 방 안에 어젯밤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내 옷가지들과 선명한 내 기억뿐이었다. 그날 오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김태형을 찾으러 시내에 나가 김태형이 말했던 그 호텔을 찾았지만 오늘 아침 이른 체크아웃을 했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라는 안내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나한테 이래?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남은 건, 정말 내 기억뿐이었다. 어쩌면 나에게 알려 줬던 그 김태형이라는 이름 세 글자조차 전화번호처럼 거짓말이었을지도 모르니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상실감이 한꺼번에 나를 덮쳤다.

 

…….”

 

인정하기 싫은데.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내가 또다시 실패했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나는 그 사람을 원했는데, 그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 자존심이 상했다. 인정하기 싫었다. 실패해본 적 없죠.’ 민윤기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왜 그런 걸 해 봐야 하는데. 지금 이게 뭐, 나에게 상실이란 감정을 알려주기 위한 신의 선물, 뭐 그런 거야?

 

의미부여 하지 마.”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당연히 느낄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아쉬움일 뿐이다. 상실감 같은 게 아니라. 나는 내 자신에게 중얼였다. 처음이었으니까. 좋았으니까. 그래서 지금 조금 아쉬운 감정이 드는 것 뿐, 조금만 지나면 잊어버릴 가벼운 감정일 것이다.

애초에 말이 안 되잖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이렇게 빨리 좋아하게 될 리가 없으니까.

 

*

 

여름휴가에서 돌아오고, 여름의 열기가 가시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될 때까지 나는 아무런 오디션도 보지 않았다. 처음에는 왜 그러냐며 나를 들볶던 매니저 형도 이내 포기한 듯 쉬고 싶을 때까지 쉬라며 날 내버려 두었다. 데뷔한 후로 한 번도 세 달 이상 쉬어 본 적이 없으니 아마 내가 지친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지쳤다라. 그런가? 지쳐서 그런 건가?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너무 오랫동안 쉬지 않아서, 그래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다가도 짜증나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 해 연말, 처음으로 아무런 시상식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로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나는 여름을 생각했다. 여름, 휴가, 바다, 소음, 그리고,

 

김태형.”

 

내가 맞았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시간이 지나자 김태형은 연해져 갔다. 지금에 와선 얼굴도 제대로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너무 희미해져 그 날 있었던 일이 꿈같을 정도로. 그러면서도 가끔씩 생각나긴 했다. 딱히 매개체가 없어도, 문득 문득. 얼굴이 어땠더라. 목소리가 어땠더라. 향기가 어땠더라. 제대로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떠올릴 때마다 이상하게 짜증이 났다. 몸 한구석이 간지러운 느낌. 아마 내 첫 경험이었어서 그런 건가. 나는 침대에 엎드려 있던 몸을 돌려 천장을 쳐다봤다. 그 사람도 나를 기억할까? 가끔 이렇게 김태형을 떠올리게 되면, 이 생각도 자연스럽게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그 사람도 가끔씩 나를 이렇게 떠올리고 그럴까. 나는 눈을 감았다.

 

짜증나…….”

 

김태형을 떠올린다고 해서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심장이 욱신거린다거나 울고 싶다거나 견딜 수 없는 건 아니니까 좋아했던 게 아닌 건 맞을 텐데.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왜 자꾸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걸까.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그런가. 너무 오래 쉬었나. 그치만 아직 아무것도 하기가 싫은데. 그냥 계속 침대에 누워 자고만 싶다.

 

평생 이렇게 떠오르면 어떡하지.”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는지 짓눌린 입술이 욱신거려서 손을 내 입술에 가져다 댔다. 막 울고 싶은 건 아닌데, 심장이 아픈 건 아닌데. 못 견디게 보고 싶고 싶은 것도 아닌데 그냥,

 

짜증나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잖아.

 

*

 

그동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어요?”

 

민윤기 감독이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민윤기 감독의 첫 번째 상업 영화. 꼬박 1년을 쉬고, 이제는 슬슬 새 작품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을 때 운명은 운명인지 민윤기 감독이 새로운 작품에 들어간다는 정보를 매니저 형이 가지고 왔다. 사실, 그 때까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 않았다면 나한테 말하지도 않았겠지. 어차피 떨어질 오디션이라도 한 번 보라는 심정이었을 거다.

 

“1년 동안 쉬었다더니 연기 연습만 엄청 했나.”

…….”

표정이 훨씬 더 복잡해졌네.”

 

나는 민윤기 감독을 쳐다봤다. 민윤기 감독은 살짝 웃고 있었다. 그 옆의 작가진들도. 나는 눈을 깜박였다. 저번에 민윤기 감독 앞에 섰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이건 나도 잘 아는 익숙한 분위기였다. 그러니까,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뻔한 결과일 때.

 

더 볼 것도 없네.”

…….”

앞으로 잘 부탁해요.”

 

민윤기 감독이 일어서서 내 앞으로 와 손을 내밀었고 나는 내밀어진 손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성공한 거다, 결국엔. 이거 봐. 내가 원하는 것 중에 내가 가질 수 없는 건 없잖아. 나는 민윤기 감독의 손을 마주 잡았다.

민윤기는 여러모로 신기한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는 내가 왜 처음에 하필 민윤기 감독의 영화에 그렇게 출연하고 싶어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인연이 있다면 이런 걸까 싶을 정도로. 민윤기는 적당한 선 안에서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굳이 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고,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은 물어보지 않는 사람. 그래서 편했다. 내 모든 것을 알려주지 않아도 되니까.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게 만들어 주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깊은 감정들을 곱씹어 생각하지 않아도 되게 해 주니까. 민윤기와의 첫 번째 작업이 끝나고, 나는 제일 먼저 김태형을 만났던 그 곳으로 갔다. 그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서 반, 그 때는 실패했던 오디션을 이번엔 성공했던 것처럼, 혹시 다시 김태형을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반.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때는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곳에 김태형은 없었고 나는 내 자신이 어이가 없어 웃었다. 당연한 거였는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애초에 그렇게 마주쳤던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부터가 바보 같은 거였지.

그리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그냥 이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젠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감정도 흐려졌다고. 여기까지 굳이 와본 건 그냥 가벼운 미련 같은 거고, 막상 와 보니까 아무렇지도 않다고. 제대로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끝내 버려서, 그 여파가 길었던 것뿐이라고. 그건 일종의 자기 세뇌 같은 거였다. 실패를 인정하기 싫은 자존심. 그래도 그 효과는 꽤 괜찮아서, 그 후로 몇 년이 흐르는 동안 내가 찍었던 영화에 나오는 OST 중에 마음에 들었던 한 노래 작곡가의 이름이 김태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재밌는 우연의 일치네 웃을 수 있었다. 나는 스무살 이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가벼운 연애를 여러 번 했고, 모든 게 그 전과 똑같았다.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걸 가질 수 있었고, 실패하지 않았고, 완벽했으니까. 그러나 그건 모두 내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은, 정말 한순간이었다.

 

*

 

인사해. 여긴 이번 영화 OST 맡아 주신 김태형 작곡가님, 여긴 배우 전정국.”

처음 뵙겠습니다. 김태형이라고 합니다.”

 

나는 멍하니 김태형을 쳐다봤다. 설마. 진짜? 김태형이 웃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그러니까, 진짜 김태형이. 그 현실감이 없는 명제에 나는 내밀어진 손을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김태형을 쳐다보고만 있다가 민윤기가 뭐 하냐는 듯 나를 치자 그제서야 눈을 깜박였다. 희미해졌다고 생각했던, 아니 희미해지다 못해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얼굴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한순간에 다시 선명해진다. 그 때와 조금 다른 듯 똑같은 색과 모양, 농도로.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내 눈앞에 있는 인영은 환상이라기에는 너무 선명했다.

 

나 몰라요?”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랬다. 나 몰라요? 난 당신을 아는데. 아주 오래 전에 만났잖아요, 우리. 그러나 내 눈앞의 김태형은 내 말에 당황하는 눈치다. 설마. 기억 못 하는 거야? 어이가 없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그 긴 시간을 버렸는데. 그런데 김태형은 오래전부터 내 팬이었다는 소리나 하고 있다. 오래 전이라니. 언제부터? 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모르는 척을 하는 건가, 정말 모르는 건가.

 

초면 아니죠, 우리?”

?”

내 영화 OST 참여한 거, 처음 아니던데.”

, 맞아요. 모르실 줄 알았는데.”

 

당황으로 물들었던 김태형의 한순간에 환해진다. 혹시나 해서 던져본 질문에 김태형은 너무나도 쉽게 대답한다. 그러니까, 정말 모르는 거다.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다. 나는 어이가 없어 허 웃었다. 잊어버린 거야? 그렇게 쉽게?

 

그 때는 왜 인사 안 했어요? 인사 들은 기억이 없는데. 오래 전부터 팬이었다면서.’

 

그래서 부러 짓궂게 말했다. 반쯤은 진심이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김태형이 자꾸 떠올라서 짜증났는데, 김태형은 날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었을 테니까. 내가 문득문득 김태형을 떠올리던 나날들 동안, 김태형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내가 아니었을 테니까. 나는 김태형을 찾으려고 노력했는데, 김태형은 날 알게 된 후에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으니까. 한순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었다. 이건 좋아서 이러는 건가? 그런데 왜 이런 감정이 들지? 이미 예전에 다 끝난 일인데. 의미부여 할 필요 없었던 일인데. 그냥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해서 질질 끌었던 것뿐이었는데. 그러니까 이 감정은 그냥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거 같아서 그랬어요.”

…….”

윤기 형 아니었으면 오늘도 나한테 아는 척 안 했을 거 같아서.”

 

씨발. 나는 속으로 욕을 읊조린다. 자꾸만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해서. 내 앞의 김태형이 웃는다. 그리고 난 깨닫는다. 말도 안 되는 합리화는 애초에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결국, 이건, 좋아하는 감정이다. 좋아하는 감정이었다. 나는 김태형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고. 그냥 오래된 미련은 무슨.

오랫동안 쌓아 올렸던 벽은 그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나는 그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희미해졌던 감정은 희미해진 게 아니라 오래된 기억이라 먼지가 쌓였던 거였다. 조그만 흔들림에도 먼지들은 모두 떨어져 나가고 그만큼 다시 선명해진 기억이 고개를 든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무서워졌던 거다.

 

김태형씨.”

 

그 감정이.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난 내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시작했던 사회생활이 그걸 알려줬으니까. 나는 소유욕이 심했고, 내가 원하는 건 뭐든 가져야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내가 다 가질 수는 없으니까. 노력해도 안 되는 건 분명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나 자신을 속이는 거였다. 방법은 쉬웠다. 거리를 두면 됐다. 그만큼 원하지 않도록. 그만큼 원하기 전에. 그런데 김태형은, 그 오랜 시간들 동안에도 잊혀지지 않았던 사람이었으니까. 사실은 간신히 희미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기억이었으니까. 그래서 무서웠다. 거리를 두려고 했는데, 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계속해서 날 속여 왔는데 나도 모르게 나는 계속 김태형을 생각했고 조금만 방심하면 머릿속은 온통 김태형으로 가득 찼었으니까.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몸을 섞어도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김태형으로 회귀하게 됐었으니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런 감정은 나를 여유롭지 못하게 만들 게 뻔하니까.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는 감정보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이 무거우면 내가 힘들 걸 아니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 나는 김태형을 놓지 못했지만.

그 날, 김태형은 나와 자신이 관계를 가진 줄 알지만 사실 그 날 김태형과는 아무 일도 없었다. 김태형은 잔뜩 취해 있었고, 나는 그런 김태형을 부축해 내 집으로 데려왔을 뿐이다. 이미 한 번 잘못 시작했었던 관계를 또 같은 식으로 잘못 시작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냥 없었던 일로 해요. 피차 깔끔하게.”

 

이 상황이 익숙한 것 같은 김태형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 짜증났다. 그러고 보면 그 때도 그랬었지. 날 두고 도망갔었지. 그리고 지금도 그러려고 하고 있고. 없었던 일? 웃음도 안 나왔다. 없었던 일이 되는 건 그 때 한 번으로 족하다. 김태형의 말에 제대로 시작하고 싶었던 내 다짐은 변색되고 나는 뾰족한 말을 뱉는다. 가벼운 관계, 가벼운 감정. 그런 걸 당신만 할 줄 아는 건 아니야.

 

나도 깔끔한 거 좋아해요. 그렇다고 없던 일로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서 나는 그런 식으로 김태형을 잡았다. 차라리 그 때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했으면 이렇게 멀리 돌아올 필요는 없었을까.



+





한 편에 다 올리려고 했는데ㅠㅅㅠ 너무 길어져서… (잘랐는데도 11000자가 넘어가는 어마무시한 분량)

다음 편은 최대한 빨리 오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항상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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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세상의 모든 순간에는 소리가 있다. 그리고 태형은 그 모든 순간의 소리를 음악으로 인식했다.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할까. 모든 소음은 박자가 될 수 있고, 모든 소리는 멜로디가 될 수 있으니까. 매 순간마다 기록되는 박자와 멜로디들이 시간이 지나 가라앉고 걸러지고 나면, 태형은 제 기억 속에 흘러가지 않고 남아 있는 소리들에서 음을 꺼내 곡을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제 기억의 용량이 작아져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이미 경험한 많은 감각들에 무뎌져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태형의 뇌리에 남아 있는 소리들은 점점 그 부피를 줄여 갔다. 처음으로 작곡을 배웠을 때는 채 다 음표로 기록하지도 못할 정도로 많았던 소리들은 이제 태형이 기억하려고 노력해야지만 겨우 머물러 있어 줬으니까. 그래서 태형이 제 고충에 대해서 선배들에게, 친구들에게 털어놨을 때 친구들은 그랬다. 그건 당연한 거라고. 감각이 무뎌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고, 기억력이 안 좋아지는 것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거라고. 모두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고, 반쯤은 우스갯소리로 그랬다. 그래서 태형은 그게 자연스러운 일인 줄 알았다. 앞으로는 계속 노력을 해야만 그 감정과 감각들을 기억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태형이라고 합니다.’

나 몰라요?’

 

정국을 처음 마주하기 전까지는.

 

, 알죠, 어떻게 몰라요, 저 되게 오래 전부터 팬이었는데.’

.’

 

그러고 보면, 정국과의 첫 만남은 그다지 평범하지만은 않았다. 애초에 TV에서 먼저 보고 좋아하던 연예인과의 첫 만남을 어떻게 평범하다고 정의내릴 수 있겠냐마는, 이상하게 그랬다. 공기의 흐름이 달랐다고 할까. 낯설지 않고, 익숙한 느낌. 예전에 만나야 했던 사람을 이제야 만난 것 같은 느낌. 우연찮게 친해진 윤기가 소개해주지 않았더라면 한낱 작곡가와 배우는 만날 일이 없는 인연이었을 텐데, 언젠가는 만났을 거라는 확신. 태형의 말에 정국이 터트린 짧은 탄성에서, 태형은 그런 걸 느꼈었다.

 

초면 아니죠, 우리?’

?’

내 영화 OST 참여한 거, 처음 아니던데.’

 

.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의 초면이라면 초면이 아닌 게 맞았으니까. 비록 먼 발치에서였지만 태형은 3년 전 영화의 뒤풀이에서 정국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 잊을까. 그 때 처음으로 첫눈에 반한다는 감각을 알게 됐는데. 그러나 굳이 그 날을 언급하지 않았던 건, 숨기고 싶은 감정을 가진 사람의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정국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김태형이라는 사람을 만나는 첫 순간일 테니까.

 

맞아요. 모르실 줄 알았는데.’

그 때는 왜 인사 안 했어요? 인사 들은 기억이 없는데. 오래 전부터 팬이었다면서.’

…….’

그 땐 내 팬 아니었어요?’

 

전정국이 이런 성격의 사람이었나? 계속해서 이어지는 정국의 질문에 태형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TV에서 보던 거랑은 좀 다르네, 싶었다. 태형은 살짝 눈을 굴렸다.

 

바빠 보이셔서, 기회가 없기도 했고…….’

…….’

 

잠시 간의 침묵 후 제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이유라기보다는 변명에 가까웠다. 진실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 정국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그 때 당시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던 정국의 애인이 불편했다고. 그 앞에 서서 자기소개를 하고, 처음 뵙는다며 팬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고. 정국에게 수많은 영화 관계자 중 제 팬인 한 사람으로 잠시 동안 머리에 앉았다가 잊혀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 전정ㄱ,’

농담이에요. 놀랐어요?’

 

그리고 무언가 미묘한 분위기에 윤기가 입을 연 그 순간, 정국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떠오르며 정국은 낯선 사람에서 제가 알고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 트란퀼로(tranquillo)에서 아니마토(Animato).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알았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 정국과 처음으로 눈을 맞춘 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아마 앞으로 정국과 마주할 시간들 전부가,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거 같아서 그랬어요.’

…….’

윤기 형 아니었으면 오늘도 나한테 아는 척 안 했을 거 같아서.’

 

흘러가지 않는 소리가 되어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거라는 걸.

 

*

 

일찍 알았으면 뭐, 하는 윤기의 웃음 섞인 말에 정국은 살짝 웃으며 저번 영화에서 OST 듣고 너무 좋았는데, 일찍 알았다면 이거보다 더 전의 영화들도 부탁했을 거야. 하고 말했다. 사실 그 날의 감정과 감각이 선명하게 남았다고 해서 구체적인 기억까지 선명한 것은 아니라 그 날 정국이 저에게 뭐라고 했는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확실한 것은 그 이후로 정국은 계속 제 옆에 있었다는 거였다.

 

윤기 형이랑은 언제부터 친했어요? 많이 친해요?’

언제부터 나 좋아했어요?’

유학은 얼마나 오래 했어요?’

내가 왜 좋아요?’

 

, 그리고 선명한 게 또 하나 있다. 신기할 정도로 정국이 제게 질문을 퍼부었다는 거. 보통은 반대의 상황이 정상 아닌가? 보통은 팬이 연예인한테 궁금한 게 많은 거잖아. 그러나 태형은 제가 정국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할 틈도 없이 정국의 질문에 대답하기 바빴다. 사실, 물어볼 틈이 있었다 해도 태형이 가진 질문들은 제 입 밖으로 내보낼 수 없는 것들이 대다수긴 했다.

 

같은 동아리였더라구요. 그 때부터 아는 사이는 아니었는데, 많이 친해졌어요.’

유학하고 있을 때 영화로 처음 알게 됐는데, 그 때부터였던 거 같은데.’

꽤 오래 했죠. 몇 년이나 있었더라.’

그냥 다 좋은데. 연기도 잘 하시고, 잘생기시고……. 하하.’

 

그 땐 그렇게 얼버무렸지만, 사실 태형의 진짜 대답은 그러게요.’였다. 왜 전정국이 좋은지, 태형 자신도 알지 못했으니까. 전정국이 왜 좋을까. 어디가 그렇게 좋았을까. 태형은 손으로 턱을 괴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아직까지도. 이렇게까지.

 

시차 적응 아직 다 안 됐어?”

, .”

피곤해 보이네.”

 

석진이 차가 담긴 컵을 내밀었고 그 순간 태형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더워 죽겠는데 웬 뜨거운 차야. 태형은 툴툴거리면서도 씩 웃으며 컵을 받아들었다. 뜨겁다곤 해도, 손대지 못할 만큼은 아니라 태형은 컵을 손으로 감싸 잡았다. 에어컨 바람이 슬슬 춥게 느껴지던 참이었다.

 

미팅 어땠어?”

좋았지, .”

별로 감흥이 없어 보이네. 안 좋아?”

 

미국에 온 지 일주일. 시차 적응을 하고, 석진의 지인들도 만나고, 가장 중요한 H 감독과의 미팅도 하고. 시차 적응을 하느라 더디게 보냈던 이틀을 제외하면 태형의 일주일은 정말 말 그대로 눈 코 뜰 새 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안 좋긴, 영광이지. 태형의 그 말에도 석진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지만.

 

너 미국에 온 이후로 제대로 웃는 걸 본 적이 없는 거 같아.”

…….”

괜히 데려온 건가?”

 

석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태형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그런 석진을 바라보던 태형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내가 선택한 건데.”

…….”

여기로 오는 게 최선이었어.”

 

나한테도, 전정국한테도. 태형이 한 박자 늦게 덧붙였다. 최선의 선택이라는 말은, 진실이었고 진심이었지만 석진은 얕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너 정말 괜찮겠어? 그 말에, 태형은 가만히 입에 컵을 가져다 댔다. 괜찮겠냐는 질문에는 진심으로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으니까. 미지근한 온도의 씁쓸한 차가 입술을 적시는 것이 느껴졌다.

 

너 계속 걔 생각 하지.”

…….”

…….”

.”

 

잠시간의 침묵 후, 태형이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바빴던 일주일 동안, 낮에는 정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뉴욕은 바빴고, 정신없었고,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더니 생각나지 않는 것도 같았다.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하는 사람들로만 둘러싸여진 환경도, 정국을 만나기 전의 유학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지게 했으니까.

 

…….”

 

그러나 밤에는.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고, 암막 커튼으로 꽁꽁 가려져 있어 뉴욕의 화려한 불빛이 보이지 않는 밤에는, 태형은 자연스럽게 정국을 떠올렸다. 아니, 떠올린 게 아니라 떠올랐다.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버릇.

 

처음에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려지면 지워내고, 떠오르면 묻어 두려 했다. 그러다가, 4일째 되는 밤부터는, 그냥 내버려 뒀다. 어차피 이제는 볼 일 없는 사이가 될 테니까. 더 이상 떠올릴 순간이 없을 때까지 전부 떠올리고 나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어서. 아니면 무뎌지기라도 할까 싶어서.

가까운 과거에서 먼 과거로, 먼 과거에서 다시 가까운 과거로. 두서없이 떠오르는 정국과 관련된 기억들 속에서 태형은 제가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기억들까지 꺼낼 수 있었다. 정말 이 정도까지 정국과의 모든 순간을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싶을 만큼. 그러다가, 태형은 어쩌면 정국과 제 관계가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틀어질 수 있었을지 모를 순간까지 떠올렸다. 결국엔 또 다른 상처로 남았지만.

 

아무도 없네.’

 

첫 번째는 정국과 파트너 관계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원래부터도 정국과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다지만, 요 며칠 유독 정국에게서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던 차였다. 그 날도 그냥 그렇게, 평범하게, 아무 일 없이 흘러갈 줄 알았는데. 그 평범함은 늦은 밤 정국이 태형의 집 문을 두드리면서 깨졌었다.

 

이 시간에 그럼 누가 있어.’

그러게요.’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

 

태형은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 오는 진한 술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서 이렇게 많이 마시고 온 거야. 여기까지는 또 어떻게 온 거야.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놓고, 왜 자기 집이 아니라 내 집에 온 거야. 한순간에 많은 질문들이 떠올랐지만 그 수많은 질문들은 그 순간 내뱉은 정국의 한 마디에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

.’

나랑 연애할래요?’

 

나랑 연애할래요? 정국은 그 말을 하며 씩 웃었다. 차라리 슬픈 얼굴이었다면. 그렇게 장난스럽게 웃지만 않았었다면. 조금만이라도 진지한 얼굴이었다면. 평소 태형을 기분 좋게 만들었던 정국의 향기보다, 술 냄새가 진하지 않았더라면. 그랬으면 그 때 태형의 대답은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너 취했어?’

조금요.’

장난치는 거야?’

글쎄요.’

 

하지만 상황이 그랬다. 태형이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국은 술에 취해 있었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고, 태형은 요 며칠간 아무 연락 없는 정국에 초조해 있었다. 그 때 그냥 모른 척, 그러자고 했으면 뭔가 달라졌을까? 더 비참해졌을까.

 

이런 장난, 치지 마.’

…….’

아침에,’

 

다시 얘기해주면 안 돼? 그렇게 묻고 싶었다. 술 취해서 말고, 장난스럽게 말고. 맨 정신으로, 지금보단 진지한 얼굴로. 다시 한 번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내 얼굴 어떻게 보려고.’

 

그러나 태형의 입에서는 그 말 대신 다른 말이 나왔다. 그리고 태형은 돌아섰다. 내 침대에 올라올 생각 하지 말고, 자고 갈 거면 소파에서 자고 가든가. 그렇게 말했다. 돌아보지도 않고. 어두웠던 집 안에, 오롯이 밝았던 현관 불이 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태형은 돌아보지 않았다.

 

 

잘 잤어요?’

 

그리고 다음 날, 일부러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나간 거실엔 멀쩡한 얼굴의 정국이 앉아 있었다.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어젯밤 일이 꿈이 아니었구나.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럼? 뭔가 달라졌을까? 태형이 멍하니 정국을 쳐다보고 서 있자, 정국이 어색하게 웃었다. 왜 그렇게 봐요.

 

어제, 미안해요.’

…….’

내가 실수했죠.’

 

차라리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으면 지금보단 나았을까. 태형은 쿵 떨어지는 심장에 입술을 깨물었다. 실수. 사과. 어제의 일이 그렇게 마무리된다. 정국이 천천히 일어나 태형에게 다가왔다. 기분 많이 나빴어요?

 

요즘 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

술만 마시면 자꾸 헛소리를 하더라구요. 그냥 잊어버려요.’

 

헛소리. 태형은 그 말에 쓰게 웃었다. 그 말이 그 무엇보다도 제게 미안해해야 할 말이라는 걸, 정국은 알까. 아마 죽어도 모르겠지. 태형이 피곤한 눈가를 손으로 꾹 눌렀다. 이젠, 연기를 해야 할 차례다.

 

알았으면 됐네.’

…….’

술 깼으면 가.’

화난 거 아니죠?’

내가 화를 왜 내.’

 

짧게 주고받아지는 대화 속에 진심은 없다. 태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돌아섰다. 나 작업해야 돼. 그 말을 끝으로 태형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건 태형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자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정국이 제 시야 안에서 사라지기 전에, 제가 먼저 정국의 시야 밖으로 벗어나는 것.

 

한심하다, 진짜.’

 

태형이 중얼였다.

 

*

 

태형아, 너 사람 만나볼래?”

 

뉴욕에 온 지 이주일하고도 반이 지난 때였다. 점심을 먹던 석진이 문득 꺼낸 말에, 태형은 물을 마시다 사래가 들려 기침을 했다. 뭐라고? 아직 기침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태형이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니, 그냥. 그 때, 크랭크인 파티 갔을 때. 너 소개시켜 달란 사람이 있었거든.”

무슨 뜻으로?”

여러 가지?”

 

석진이 고기를 마저 입 안으로 구겨 넣으며 태형을 쳐다봤다. 부담 갖진 말고. 그 사람도 꼭 그런 의미로만 소개시켜달란 건 아니었으니까. 석진의 이어진 말에 태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야, 그게.

 

일단은 작업 관련으로 소개해달란 거였어. 너 모를 때도, 내가 걔한테 네 곡 나온 영화 보여주니까 관심 있어 했었거든. 그런데 여러 가지라고 말한 건, 혹시나 부담스러우면 미리 거절하라고. 그 쪽으로 아주 뜻이 없어 보이진 않았거든. 눈빛이.”

 

내가 걜 몇 년을 봤는데. 말 안 해도 다 알지. 석진이 살짝 웃으며 말했고 태형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럴 생각도 못 했고. 태형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석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애 괜찮아. 진중하니. 아마 네가 부담스러워하면 바로 그만둘 거고. 사실 알아두면 좋은 애긴 하거든.”

…….”

애가 성격이 좋아서, 관계자들이 다 좋아해. , 말 안 했구나. 걘 배우. 5년찬데, 연기도 잘 하고, 감독들 사이에서 평도 좋아. 이번 영화 주연이라, 영화 올라가고 나면 아마 확 뜰 거야.”

…….”

만나만 봐.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잖아.”

아니, 아깐 나한테 다른 맘 있어 보인다며.”

애인이나 친구나 종이 한 장 차이지 뭐. 이제 앞으로 계속 미국에 있을 거라며. 그럼 친구도 만들어야지.”

 

그건 그런데태형은 어색하게 웃었다. 앞으로 계속 미국에 있을 거라며. 분명 뉴욕에 오기 전, 제 입으로 석진에게 했던 말이고 스스로 한 결심인데 그 사실이 아직까지도 낯설게 느껴졌다. 태형은 물컵을 내려놓았다. 어쩐지 혀끝이 썼다.

 

*

 

안녕하세요. 진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 때 석진의 말에 확실하게 동의를 했던 기억은 없는데. 태형은 저에게 말을 걸어 온 훤칠한 남자에 눈을 깜박였다. 미국에 온 지 3주째, 석진은 종종 태형을 파티에 데려가곤 했다. 주로 영화 쪽 관계자들이 많이 참석하는 파티인데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집에 박혀 있는 것보단 밖에 나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태형도 순순히 응해주고 있던 차였고. 그런데 이렇게뒤통수를 칠 줄이야. 태형이 어색하게 웃으며 제게 내밀어진 남자의 손을 맞잡았다. 태형도 이 사람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지. 이번 영화의 남자 주인공인데.

 

……. 만나서 반가워요. 저번에 인사를 못 드렸네요.”

제가 먼저 인사드렸어야 했는데요. , 진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한국 이름이 한우진이라.”

 

한우진이라고 발음하는 남자의 한국어 발음이 어색했다. 애초에 영어로 말을 걸기도 했고, 지금 보니 우진의 얼굴은 완전한 한국인이라기엔 조금 이국적이었다. 혼혈인가? 태형이 멍하니 생각하며 저보다 훨씬 큰 우진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우진이 그런 태형의 시선에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미국인이세요. 태어나기도 미국에서 태어났고, 그래서 한국어는 잘 못해요.”

…….”

혹시 제가 불편하신 건…….”

, 아니에요!”

 

태형이 살짝 웃었다. 정국을 만난 이후,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다가오는 상대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 자체를 하게 된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말이 부자연스럽게 나왔다. 정국과도 처음에 이랬을까?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정국을 떠올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태형은 다시 우진을 쳐다봤다. 두 눈에 가득 담긴 호의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신기하고 낯설었다. 혹시 헛된 착각을 품게 할까 봐, 정국의 표정을 추측하는 것은 항상 포기했었으니까. 태형이 웃는 얼굴을 하자 긴장으로 살짝 굳어 있던 우진의 얼굴이 풀리는 것이 보여서, 태형은 조금 더 눈을 접었다. 대화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 발코니에서 불어 오는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진이, 그러니까 석진이 태형 얘기 많이 했어요. 작업한 영화들도 보여 줬고.”

그랬어요?”

. 그런데 너무 좋은 거예요. 이런 말 하면 좀 그런가? 영화에서 음악이 그렇게 큰 역할을 하는 지 처음 알게 됐어요.”

, 정말요?”

지금 제 얘기, 재미없진 않죠?”

 

초조해하는 것도 느껴진다. 태형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런 기분이 너무 오랜만이라. 그러자 우진이 그런 태형을 쳐다보다 이내 따라 웃었다.

 

, 그런데 아무것도 안 마셔요?”

, 깜박하고. 바 어디 있어요?”

제가 가져다줄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는…….”

잠시만요!”

 

우진은 태형이 말리기도 전에 발코니를 나섰고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이내 웃어버렸다. 누군가의 호감을 사고 싶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솔직한 행동을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어쩌면 정국과 저도 이렇게 시작했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럼 연애할래요?’

 

두 번째. 태형이 생각하는 관계의 전환점이 될 수 있었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순간은 파트너로 지내게 되고도 시간이 꽤 지난 후였다. 태형이 처음으로 정국에게 파트너를 그만두자고 했던 날. 이런 관계는 그만하는 게 어떻겠냐는 태형의 말에, 정국은 그랬다. 연애할래요? 태형의 눈을 쳐다보면서.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런 관계는 그만 두자면서요. 그러니까 연애.’

진심이야?’

글쎄요.’

 

그 때, 태형은 처음 정국이 제게 연애하자고 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 때도 정국은 장난이냐는 태형의 물음에 글쎄요.’하고 답했었다. 그리고 그 날을 떠올림과 동시에, 박동을 빨리 하려던 태형의 심장이 멈추었다.

 

다를 거 없잖아요, 지금이랑.’

장난치지 마.’

왜 장난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생각해 보면, 그때와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정국은 술에 취해있지 않았고, 한동안 연락이 두절된 상태도 아니었으며, 정국의 몸에선 술 냄새 대신 태형이 좋아하는 정국의 향이 나고 있었으니까. 그 날, 태형이 바랐던 모든 것. 그러나 문제는 그 때와 달라진 것이 또 있었다는 거였다. 태형이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런 소리 하지 마.’

…….’

그러려고 만나는 거 아니잖아, 우리.’

 

그래서 태형은 부러 차갑게 말했다. 그 날에 받은 상처가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 태형을 괴롭히고 있었으니까. 태형의 말에 정국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정국을 쳐다보고 있던 태형은 먼저 정국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렇게, 그 날의 일은 없던 것이 됐고.

 

 

무슨 생각해요?”

.”


다시 한 번, 우진의 목소리에 의해 태형의 상념이 깨졌다. 서둘러 왔는지 우진의 볼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태형은 그런 우진을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또 저도 모르게 정국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태형은 우진의 손에 들린 세 개의 잔을 쳐다봤다. 뭘 저렇게 많이 갖고 왔지.

 

,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제가 마시고 있던 게 도수가 조금 높은 거라서. 혹시 몰라서 낮은 것도 가져왔는데…….”

…….”

 

태형이 조그맣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되게 다정하네. 아니, 이럴 땐 섬세하다고 하는 건가. 태형은 웃으며 다른 잔을 받아들려다 이내 우진이 들고 있던 잔과 똑같은 잔을 받아들었다. 우진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태형은 고개를 으쓱했다.

 

이 술이 맛있어서 마시고 있던 거 아니에요?”

그건 그런데, 술 잘 못 하신다고…….”

오랜만이라서, 별 일 있겠어요.”

…….”

 

우진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보인다. 태형은 달콤하면서 쓴 액체를 넘기며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웃었다. 시원한 바람, 안정된 분위기. 어쩌면꼭 매듭짓지 않아도 이렇게 흐려져 갈 수도 있을까. 태형은 멍하니 우진을 쳐다봤다. 어쩌면그러니까 어쩌면

 

밤바람이 참 좋죠. 한여름 같지 않게.”

 

이렇게 그냥, 그 위로 시간의 무게를 쌓아가다 보면, 그렇게 자연스럽게 덮여질 수도 있을까.

 

*

 

! 여기 있었네. S감독이 찾아.”

? 갑자기?”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대. , 너 좋아하는 영화 감ㄷ, 일행이 계셨네.”

전 괜찮으니까 가 봐요.”

 

태형은 웃으며 우진을 살짝 밀었다. 우진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망설이다 이내 태형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야기만 하고 금방 올게요. 그 말에, 태형은 난 신경 쓰지 말고 대화하고 오라는 뜻으로 살짝 웃어 보였다.

우진이 멀어져 가고, 태형은 얕게 숨을 몰아쉬었다. 생각보다 편안하고 유쾌했지만 어쨌든 처음 보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딱히 낯을 가리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태형에게도 많은 기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으니까. 바람이나 좀 더 쐴까. 태형은 아예 건물 밖으로 나섰다. 화려한 조명이 켜져 있는 시끄러웠던 홀과는 다르게 고요하고 은은한 불빛의 정원이 시원한 여름밤에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앞으로 더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우진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의 기저에 있는 의미를, 태형이 모르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술을 마셔 뜨끈해진 볼을 감싸며 태형은 천천히 걸었다. 도수가 꽤 높은 술을, 기분이 좋아 조금 빨리 마셨던 게 지금에서야 몰아오는 기분. 그런데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태형은 살짝 미소 지었다.

우진은 편안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야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지 아는 사람이었고, 어떻게 해야 자신이 매력적으로 비치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태형은 우진에게서 매력을 느꼈다. 좋은 사람이라던 석진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그 잠깐 사이에도 우진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정하고, 솔직한 사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모두 내보여주는 사람.

 

편안할까.”

 

우진과 연애를 하게 된다면. 태형이 조그맣게 중얼였다. 연애. 안정적이고 편안한 연애. 연애가 꼭 설레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굳이 죽도록 상대가 보고 싶고, 좋아하는 마음이 벅차오르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도. 그런 것도 연애의 한 종류니까. 그래서. 그러니까. 우진이라면, 그런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속 끓이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이대로 우진과 연애를 하게 되면, 정국을 잊을 수 있을까. 술기운에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태형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눈을 감았다. 여름밤의 향기가 짙어졌다. , 꿈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쉬고. 태형은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숨을 멈추었다.

 

김태형.”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정국의 목소리가 태형의 귓가를 울리고, 익숙해서 심장을 벼랑 끝으로 떨어트리는 그 향기가 바람에 실려 태형에게 닿는다. 이건, 환상일까? 태형은 홀린 듯 제 눈앞에 서있는 인영을 바라봤다. 오늘 하루 종일 전정국만 생각했던 내가, 그러면서 자꾸 지워내려고 애쓰는 내가 너무 안타까워서. 술에 취한 내 자신이 나에게 주는 위로 같은 걸까?

 

태형이 형.”

…….”

아무것도 안 바랄게요. 다른 사람이랑 연애해도 좋고, 나랑은 잠만 자도 좋고. 나한테는 눈길도 안 줘도 좋아요. 그러니까,”

 

현실감이 없었다. 술에 취해 흐려진 시야가 태형의 머릿속처럼 울렁였다. 정국이 태형에게 느릿하게 다가오고, 여름밤의 농도보다 정국의 농도가 더 짙어진다. 태형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그런 정국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한테서 도망가려고 하지만 마요.

 

태형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눈을 감았다 떠도 전정국은 사라지지 않는다. 더 또렷해지고, 가까워지고, 짙어질 뿐이다. 이 감각들이 전부 환상이라면 이건 위로가 아니라 벌이었다. 내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제가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할 상실감이, 태형은 벌써부터 무서웠으니까.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국이 한 걸음 더 가까이 태형에게 다가갔다. 태형은 숨쉬는 것도 잊은 채 정국을 쳐다봤다. 꿈일까, 환상일까. 전정국이 손을 뻗어 내 팔을 잡고, 따뜻한 체온이 내 살갗에 닿고. 심장이 박동을 빨리 하기 시작했는데. 그런데 내 눈앞의 전정국이 전부 내 환상이라면,

 

내가,”

 

전정국이 하고 있는 이 모든 말들도 전부,

 

졌어요.”

 

내 바람이 만들어 낸 것들일까.



+


다음 편은 정국 번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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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형 진짜 왜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도 아예 제 차로 같이 타고 가자는 석진의 말에 식겁해 우리 밥 먹고 바로 영화 보러 가기로 하지 않았냐며 없는 약속까지 만들어 낸 태형이 차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석진에게 물었다.

아무리 제가 석진을 안 세월에 비해 만난 시간은 짧다고 해도, 또 제가 알던 석진의 성격이 만나지 못했던 몇 년 간 바뀌었다고 해도. 지금 석진의 이러한 행동들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아무리 초면에 정국이 실례를 했다지만 그 웃으면서 내리찍는 화법은 웬 것이며, 방금 전에 그래 놓고 같이 밥 먹으러 가자니까 바로 응하는 건 또 뭐냐고. 그러나 그런 태형의 반응에도 석진은 태연히 차에 시동을 걸 뿐이었다. 뭐가?

 

갑자기 왜 같이 밥을 먹자 그래? 언제 봤다고.”

 

사실 이것 말고도 물어보고 싶은 건 더 많았지만, 다른 질문들은 애써 삼켰다. 혹시라도 제가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었냐 물으면 석진이 그럼 걔는 너한테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하고 되묻기라도 할까 봐. 그러나 그런 제 걱정은 전혀 쓸데없는 것이었음을, 태형은 석진의 차가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잠시 말없이 정면을 응시하던 석진이 입을 연 순간 알게 되었다.

 

쟤지?”

?”

네 뮤즈.”

?”

너 한국으로 돌아가게 한 사람.”

 

생각지도 못했던 석진의 말에 태형은 그대로 굳어 눈만 깜박였다. 그런 태형의 얼굴을 쳐다보던 석진은 이내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씩 웃으며 다시 정면을 쳐다봤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태형은 멍하니 그런 석진을 쳐다봤다. 뭐야, 이 형?

 

마스크는 좋네. 이름이 전정국이었던가.”

어떻게…….”

민 감독 영화에 심심찮게 나오던데. 연기도 곧잘 하고.”

 

태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형이 이렇게 눈치가 빨랐나? 아니면 내 행동이 그렇게 티가 났던 건가. 석진이 제 감정을 어디까지 눈치 챈 것인지 알 수 없어 태형은 손을 꼭 쥐었다. 석진의 말을 듣고 나니 석진의 이상했던 행동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석진은 처음부터 제가 귀국하는 것을 의아해했고, 자연히 제가 귀국을 결정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인 그 뮤즈에 대해 궁금해 했다. 정국과의 사이가 애매해져버린 후 태형이 정국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그걸 알아챈 후에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마음 한 구석에 계속 궁금증은 남아 있었을 테고. 태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뒤따라오고 있는 정국의 차를 쳐다봤다. 이대로 석진과 정국을 같은 공간 안에 둬도 괜찮을까?

 

그리고 지금도, 망설이는 이유가 저 애 때문인 것 같고.”

아니 형, 그건 아니,”

 

태형이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석진의 차가 부드럽게 멈췄고 씩 웃은 석진이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발렛 파킹 직원에게 키를 맡기고 태형이 앉아 있는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려는 직원을 제지한 후 친히 조수석 문을 열어 태형을 에스코트했다. 그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얼떨결에 석진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나온 태형이 눈을 깜박였다. 석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때, 석진의 얼굴이 확 하고 가까워졌다. 태형은 순간 숨을 멈췄다. 석진의 목소리가 가깝고 조용하게 귓가에 울렸다. 그러니까,

 

쟤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그러는데,”

…….”

나 조금만 놀려도 되지?”

 

? 그러나 태형이 석진에게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석진은 제 뒤를 향해 씩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에 태형이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정국과 눈이 마주친다. 태형이 꿀꺽, 침을 삼켰다. 진짜 이대로,

 

금방 따라 왔네요. 정국 씨, 여기 괜찮죠? 일부러 가까운 곳으로 왔는데.”

, .”

 

같이 있어도 괜찮은 거냐고.

 

*

 

아깐 실례했습니다. 태형이 형이 싫어하는 것 같아서 그랬던 건데.”

그럴 수도 있죠. 다른 사람들도 종종 오해하더라구요.”

많이 친하신가 봐요, 태형이 형이랑.”

특별한 사이긴 하죠. 안 지 오래되기도 했고.”

제가 괜히 두 분 식사하시는 데 끼어든 건가요?”

괜찮아요. 태형이랑은 뭐, 맨날 같이 먹는데요. 오랜만에 여럿이서 먹으니까 좋네요.”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모르겠네. 태형은 제 몫의 파스타를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분명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화인데 왜 이렇게 숨이 턱턱 막히는지. 태형은 파스타 대신 핑퐁처럼 주고받아지는 대화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 장소에서 긴장하고 있는 것은 태형밖에 없는 듯, 평화로운 평일 오후의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전부 안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태형이 앉아 있는 이 테이블도 마찬가지였고. 그게 설사 표면적인 것뿐일지라도 말이다.

 

태형이 형한테 이렇게 친한 형이 있는 줄 몰랐네요. 태형이 형 주변 사람은 대충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 그거 좀 이상하게 들리는 거 알아요?”

 

쿨럭. 태형은 저도 모르게 작게 기침을 했다. 정국의 시선이 잠시 태형에게 닿았다가 다시 석진에게로 향했지만 태형은 그런 정국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불안한 눈빛으로 석진을 쳐다봤다. 이 형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그런 태형의 불안함에는 아랑곳 않고, 석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꼭 자기 애인 주변 사람 견제하는 것 같잖아요.”

그게 무슨…….”

근데 그럴 리는 없으니까.”

 

진짜 이 형이 어디까지 하려고! 태형은 입술을 꼭 문 채로 석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꽤 세게 찌른다고 찌른 거였는데, 석진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정국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프지도 않나? 태형은 불안한 눈빛으로 정국을 쳐다봤지만 정국의 시선은 자신을 향해 있지 않았고 마지막 희망으로 쳐다본 윤기 역시 이 상황이 흥미로운 듯 그런 석진과 정국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네. 태형은 속 타는 마음에 물컵을 꼭 쥐었다. 아무래도 이 레스토랑을 나가자마자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약국에 가는 것이 될 듯싶었다. 방금 먹은 파스타가 얹힐 것은 분명해 보였으니까. 빨리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 태형이 꿀꺽, 침을 삼켰다.

 

왜 그럴 리가 없,”

아무튼 뭐, 대답을 하자면,”

…….”

제가 쭉 뉴욕에 있었어서 그럴 거예요. 뉴욕 살거든요. 지금은 태형이 보러 잠깐 온 거고.”

, 그럼 다시 돌아가시는 건가요?”

. 그래야죠. 그래서 제가 지금 태형이한테 잘 보여야 돼요. 태형이 뉴욕으로 데려가려면.”

!”

 

. 태형이 한 박자 늦게 짧은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지만 이미 석진의 말은 정국에게 닿은 후였고, 그 말을 들은 정국의 시선 역시 태형에게 닿은 후였다. 태형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김석진 진짜. 아군이야 적군이야. 태형은 으득 이를 물었다. 확실한 건, 아군이든 적군이든 지금 김석진은 시한폭탄과 같다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진짜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릴 기세였다. 태형은 석진의 허벅지를 꾹 눌렀다. 그만 해, 제발…….

 

태형이 형을 뉴욕으로 왜…….”

, 그건 H 감독 영화

, 영화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이번엔 늦지 않게, 태형이 석진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으며 외쳤다. 다행히도 석진의 짧은 비명은 태형의 큰 목소리에 묻혔고 태형은 그런 석진을 향해 어둡게 웃어 보였다. 흐즈 믈르그 흐쓸튼드……. 그러나 그런 태형의 표정에도 석진은 아프지도 않은지 빙글빙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태형이 입술을 꾹 물었다. 이 형 진짜 왜 이래? 태형이 석진을 향해 최대한 티 나지 않게 눈을 부라리고 있을 때쯤, 정국이 입을 열었다.

 

영화?”

, , 영화! 밥 먹고 영화 보기로 했거든. 예약해 둔 시간이 좀 촉박할 것 같아서! , 하하, !”

“H 감독은 무슨 말,”

태형이가 H 감독을 제일 좋아하잖아요. 근데 최근 개봉작을 아직 못 봤다고 해서. 그거 보러 가려고 했거든요.”

 

이제야 좀 제 의도를 이해한 것인지 처음으로 석진이 태형을 거들었고 태형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영화. H 감독 영화 보러 가기로 했거든. 태형은 석진의 말을 반복하며 괜히 볼을 긁었다. 지금 태형의 머릿속에는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석진이 눈치를 좀 챈 것 같아 다행이긴 해도, 태형은 한 번도 석진에게 정국에 대해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었으니 석진은 악의 없이 실수를 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태형은 오랜만에 정국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굳이 석진이 도와주지 않아도 말이다.

 

, 다 먹었지? 이제 슬슬 일어나자. 진짜로 영화 시간 늦겠다.”

그거 그냥 취소하면 안 돼? 이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좀 실례잖아.”

…….”

 

바로 이렇게. 태형이 석진의 옷깃을 살짝 잡아끌며 말했지만 석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눈치를 챈 것 같았는데, 그냥 착각이었나? 태형은 애가 타는 마음에 입술을 꼭 짓씹었다. 김석진 진짜, 도와주질 않네. 아무래도 석진에게 정국과 제 관계에 대해 제대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굳이 정국을 화제로 꺼내놓고 싶지 않아 말하지 않았던 것이 이런 상황을 불러올 줄이야. 태형은 어떻게 하면 석진에게 지금 당장 이 곳을 나가고 싶다는 제 뜻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이 앞에서 대놓고 나가자고 할 수도 없고, 문자를 보낼 수도 없고…….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잠시 고민하던 태형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짧게 생각해 본 결과 가장 최선의 선택은 화장실을 가는 척 자리를 떠서 석진에게 전화를 거는 거였다. 나중에 설명할 테니 일단 나오자고 직접적으로 말할 생각이었다. 정국과 윤기의 앞에서는 아무리 간접적으로 눈치를 줘도 석진은 눈치를 챌 것 같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석진과 윤기, 그리고 정국의 시선이 잠시 태형에게 닿았고 태형은 제가 이 셋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 잠시 동안 혹여 석진이 허튼 말을 할까 석진의 어깨를 부러 꾹 눌렀다. 제발 3분만 입 닥치고 있어……. 차마 입으로 내뱉진 못하고, 눈을 통해 석진에게 간절한 텔레파시를 보낸 태형이 잰 걸음으로 테이블을 나섰다. 그 와중에 레스토랑은 또 쓸데없이 커다래서. 화장실까지 가는 그 짧은 거리가 태형에겐 꼭 천릿길처럼 느껴졌다.

 

*

 

.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오늘은 이만 가자. 알겠지?”

 

태형은 두 손으로 핸드폰을 붙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너 돌아오면 가자. 석진의 이 말이 이토록 반갑게 느껴질 일인가. ‘내 이름 말하지 말고 잠자코 듣고만 있어.’로 시작한 짧은 통화 끝에, 마침내 얻어낸 그 대답에 태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드디어 벗어날 수 있겠구나. 오늘 정국을 마주한 이후로 계속해서 답답하게 조여 왔던 숨통이 이제야 좀 트이는 느낌이었다.

 

언제까지 이래야 되냐.”

 

전화를 끊고, 차가운 물에 손을 씻고 나니 그제서야 좀 돌아오는 것 같은 정신에 태형이 멍하니 거울을 쳐다보며 중얼였다. 알고 있다. 이렇게 피하기만 해서 해결될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마주하기가 무섭다는 핑계로 벌써 몇 년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만 있으니까. 태형은 제 손에 닿아 있는 차가운 물방울을 응시했다.

그렇지만. 핑계라고 하면 핑계지만. 태형은 손을 문질렀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정국도 답을 주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확실한 감정, 애매한 관계. 그 간극 사이에서 태형은 끊임없이 상처받았고 그걸 정국이 모르지는 않았을 거라고 태형은 생각했다. 어쩌면 답을 주지 않는 것이, 그게 답인 걸까. 몇 년째 유지되고 있는 이 한없이 가벼운 관계가, 정국이 제게 줄 수 있는 가장 무거운 감정인 걸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리 끝없이 물어도 혼자서는 답을 낼 수 없었지만.

 

…….”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정국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물음이었다. 정국은 태형에게 태양 같았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정국은 빛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결국 태형은 언제나 시선을 빼앗겼으니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떠올랐고 냉정해지려 해도 차가워지지 않았다. 정국에 대한 지리한 이 감정은 한동안 보지 않으면 사그라진 듯 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생겨났다. 태형이 물기 묻은 손으로 제 눈가를 꾹 누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눈가가 시렸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고, 머리 아프고. 한 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고 나면,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자. 그리고 찬찬히 생각을 해 보는 거다. 정국과의 관계에 대해서. 사실, 답은 정해져 있겠지만.

 

…….”

 

그러니까, 정말로 그러려고 했다. 외면하지 않고, 정국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했다.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태형 스스로. 혼자 깊이 생각하고 결론을 내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태형이 형.”

 

태형은 그 자리에 멈춰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진정되었던 심장이 다시 뛰고, 조금 트였던 숨통이 다시 꽉 답답해져 오기 시작했다.

 

잠깐 얘기 좀 해요.”

 

코너를 돌아 화장실을 빠져나온 그 순간 마주한, 벽에 기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전정국 때문에.

 

*

 

나한테 할 말 없어요?”

 

여기선 좀 그렇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자는 정국의 말에 비상구 계단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 얼마나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을까. 태형은 정국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침묵의 시간 동안 정국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태형은 입을 꾹 다물고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존심이라면 자존심이고, 무서움이라면 무서움이다. 그러나 그 침묵을 깨고 제 귓가에 닿은 정국의 목소리에, 태형은 결국 고개를 들어 정국을 마주했다. 태형이 말없이 바닥을 쳐다보고 있는 내내, 정국의 시선은 줄곧 태형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태형이 고개를 들자마자 둘의 시선은 공중에서 얽혔다. 평소 같았으면 그 눈에 생각이 멎었을 태형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태형은 입을 벌렸다.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닌, 어이없음의 감정에 자연스레 나온 반응이었다.

 

너는,”

 

나한테 할 말 없어? 그러나 뒤에 딸려 나와야 했던 단어들은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대신 태형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태형의 모습에 정국의 미간이 작게 좁혀졌지만 태형은 눈치 채지 못했다. 태형은 주먹을 꼭 쥐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고, 눈가가 시려 왔다. 여기서 울면 진짜 답 없는 거야, 김태형. 참아. 태형이 제 자신을 다독였다. 이렇게 눈물이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정국의 앞에 서면 감정이 널을 뛰어서 통제가 힘들어졌다. 그러나 이제 태형은 정국을 보면 널을 뛰는 감정에 익숙해지다 못해 그런 자신을 달래는 것도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게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아이러니한 것은, 그 널뛰는 감정을 통제하진 못해도 간신히 숨기고 감출 수 있는 것 역시 정국의 앞에서였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제가 정국에게 갖고 있는 감정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정국과의 이런 가벼운 관계마저 끊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태형으로 하여금 감정을 숨길 수 있게 했으니까.

 

없어.”

 

그래서 태형은 그렇게 대답했다. 정국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묻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따지고 싶은 것도, 화내고 싶은 것도. 그러나 태형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말들과 감정 중에 정국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다 제 감정을 나타내는 것들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럴 자격이 태형에겐 없었으니까. 뭐라고 물어볼 수 있을까. 왜 나한테 연락 안 했냐고? 현이 씨랑은 진짜 사귀는 거냐고? 태형은 시린 눈가를 꾹 눌렀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 누적된 피로와 감정이 같이 태형을 짓누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도 없어요?”

전정국.”

…….”

없어. 너한테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그거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태형은 한 글자 한 글자 혀로 꾹꾹 눌러 말했다. 정국이 원망스러웠다. 왜 자꾸 가만히 있어도 힘든 사람을 건드려.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난 이미 충분히 힘든데. 내 감정의 무게도 감당하지 못해서 버거운데. 나한테는 명확한 대답 한 번 준 적 없으면서 나한테서 무슨 말을 기대하는데. 태형이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의 표정은 읽을 수가 없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답답한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둘 다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그 날 레스토랑에 형 혼자 두고 간 거 미안해요.”

…….”

…….”

할 말은 그게 다고?”

 

태형은 기다렸다. 그러나 정국에게선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뭐라고 설명해 주면 좋을 텐데. 그럴 일이 있었다고. 사과만 하지 말고, 이유를 말해 주면 좋을 텐데. 너를 부른 사람이 류현이라서라는 이유 말고, 내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유가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끝끝내 정국의 입에서는 그 이유가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나는 김태형이고, 걔는 류현이니까. 그 이유만으로도 전정국에겐 충분한 이유가 될 테니까. 생각해 보면 그랬다. 정국은 싸웠던 연인과 화해하기 위해 자리를 뜬 것뿐이고, 갑자기 자리를 뜨게 된 것에 대해 태형에게 사과도 했다. 그 때 정국의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태형에게 구구절절 설명해야 할 의무가 정국에겐 없다. 하지만.

 

…….”

 

굳이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었을까. 차라리아무 말도 하지 말지. 사과하지 말지. 이렇게 다른 이유를 얘기해줄 것처럼, 그 날 일을 설명해줄 것처럼 날 여기로 데려오지 말지. 기대하게 만들지 말지. 태형은 하도 깨물어 아려 오는 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감정은 깊은 바다와 같았다. 옅은 바람에 수면은 흔들리지만 바다 속 싶은 곳은 미동하지 않는 것처럼. 정국을 향한 태형의 감정이 그랬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수면에 파동이 그어지지만, 몇 번씩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어도 결국 깊은 곳에 있는 무거운 감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태형의 바다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다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진동은 무거운 감정을 뿌리 채 흔들리게 하고 있었다. 쌓아 왔던 감정은 이미 금이 잔뜩 가 있었고 조그만 진동에도 금방 부서질 수 있는 상태가 된 지 오래였으니까.

 

태형이 형.”

전정국.”

 

한계였다. 태형은 지금 흔들리고 있었다. 모든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태형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흔들리고, 부서지고, 끌어올려졌다 내팽겨쳐졌다. 태형이 숨을 몰아쉬었다.

 

너 나 좀 그만 괴롭혀.”

…….”

나한테 사과는 왜 해? 왜 자꾸 찾아와? 왜 자꾸 앞에서 거슬리게 알짱거려. 지금도, 왜 불러내는데. 밥은 왜 같이 먹자고 하는데. 너 그러는 거 진짜 짜증나.”

…….”

 

한여름의 태양. 눈이 부시게 빛나서 시선을 빼앗기고 어디에 있든 바라보게 되는 여름날의 햇빛. 하지만 한여름의 태양은 눈부신 만큼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바라볼 순 있어도, 그 옆에 다가갈 수도, 같이 걸을 수도 없게. 태형은 이제 정국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그냥 멀리 있을걸. 다가가지 말걸. 욕심내지 말걸. 멀찍이 제 환상 속에서 정국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만족할걸.

 

그냥 평생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후회됐다. 석진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냥 상상 속으로 남겨놓고, 가까이 다가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태형은 꾸역꾸역 올라오는 감정들을 간신히 눌러냈다. 나는 너만을 위한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지금의 나는 다 네가 있어야만 의미가 있게 됐어. 내가 화내는 것도, 실망하는 것도. 우울한 것도 행복한 것도 다 너 때문이고 내 모든 감정들을 네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 내가 싫어. 답이 없는 고민을 계속해야 되는 것도 싫어. 지쳤어. 그만 하고 싶은데 그만 할 수 없는 것도 싫어. 지긋지긋한 기대. 지리한 감정의 반복.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라 태형의 목울대가 울렸다.

 

다 상관없으니까 나 좀 내버려 둬.”

그러나 그 수많은 말 대신 태형이 내뱉은 말은 나 좀 내버려 두라는 말이었다. 이건 자존심일까, 무서움일까. 알 수 없다. 그냥, 너무 지쳤다. 태형은 고개를 들어 정국을 마주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하자.”

 

목소리가 떨려 나오진 않았을까. 태형은 제가 뱉은 목소리가 최대한 담백했길 빌었다. 아무렇지도 않았길 빌었다. 정국을 좋아하면서 익숙해진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연기가 이 순간 최대로 빛을 발하길 간절히 빌었다.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 사람 때문에 그래요?”

?”

 

태형의 말에 정국은 아무 말이 없었고 태형은 눈을 감았다 떴다. 해야 할 말은 다 했기 때문에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하고 싶은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머리가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정국의 시야 밖에서 사라지고, 제 시야에서 정국을 몰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태형이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린 그 순간 들린 정국의 목소리에 태형은 발을 멈췄다. 정국의 목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맨날 가볍게 굴었잖아요. 형 가벼운 사람이잖아요. 왜 그 사람한테는 안 그래요?”

전정국.”

. 애인은 뉴욕에 따로 있으니까, 애인 몰래 그냥 즐긴 건가?”

 

태형이 몸을 돌려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은 비스듬히 서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태형이 눈을 깜박였다. 저런 표정의 전정국은 처음이다. 저렇게 날선 말을 하는 전정국도.

 

난 그것도 모르고. 민윤기 좋아하냐고나 묻고 있었네.”

.”

애인이 곧 뉴욕에서 돌아올 거라서,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이제야 이해가 되네.”

 

정국의 온도가 너무 차가워서, 태형은 침을 삼켰다. 정국과의 관계가 좋게 마무리될 수 없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질 줄은 몰랐는데. 정국의 입에서 쏟아지는 날선 말들은 이미 너덜해져 더 이상 상처가 날 수 없을 것 같았던 감정에도 생채기를 낸다.

 

애인은 알아요? 형이 나랑 잔 거?”

…….”

형이 이렇게 아무하고나 자고 다니는 거. 나랑 섹스 파트너 관계였던 거 다 아

태형아!”

 

그 때였다. 비상구 문이 열리고, 환한 빛과 함께 석진의 목소리가 태형의 귓가에 닿았다. 태형은 고개를 들어 석진을 쳐다봤다. 석진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태형은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고 석진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챈 듯 여기 있었네, 하며 태형과 정국에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곧이어 석진이 태형을 감쌌고 그걸 본 정국은 입술을 꾹 물었다. 석진이 조심스럽게 태형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냐는 의미였다. 태형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진짜 영화에 늦을 것 같아서. 이만 태형이를 데려가도 될까요?”

…….”

할 말 끝났어. 가자.”

 

대답이 없는 정국 대신, 태형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 짧은 단어를 내뱉는 데에도 심장이 울컥하고 눈이 시렸다. 최악의 날에 하는 최악의 마무리. 이보다 더 거지같은 결말도 있을까. 태형이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걸어 올라갈 동안에도 정국은 끝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너 괜찮아?”

…….”

너 짐 내가 다 챙겨 나왔어. 얼른 차로 가자. 너 얼굴 진짜 안 좋

.”

 

태형이 눈가를 짚었다. 나 다 끝났어. 엘리베이터 안, 정국이 없는 곳. 정국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 도착하자 그제서야 꾹 눌러 왔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게 무슨 소리냐 묻는 석진의 말에 태형은 대답하지 못했다. 온 몸이 전부 욱신거렸다. 머리도, 눈가도, 입술도, 심장부터 발끝까지 모두. 제 울음에 석진이 당황해 저를 도닥이는 것이 느껴졌다. 태형은 주르륵 무너져 내렸다. 진짜 끝났다. 모든 것이.

 

그게 무슨 소리야, 뭐가 끝나. 태형아.”

…….”

, 태형아. 왜 그래. 너 괜찮아? 물이라도 갖다 줄

…….”

 

단어가 울음 때문에 뚝뚝 끊겨져 나왔다. 태형은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뱉어냈다. 정말 다 끝났다. 제가 생각했던 최악의 결말보다도 더 최악으로. 석진이 괜찮냐고 물어 오며 제 등을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안 괜찮다. 괜찮을 수가 없었다. 모든 소리가 소음으로 대치되어 귓가를 찢어질 듯이 울리고 있는데. 아직도 그 차가운 목소리와 얼굴이 계속해서 눈가를 울리는데. 태형이 울음에 푹 젖은 목소리로 숨을 헐떡였다. ,

 

, 듣고 있어.”

미국 갈래…….”

?”

나 미국 갈래 형…….”

 

모든 것이 끝났다. 제 감정도, 정국과의 관계도.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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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태형은 정국과의 관계가 꼭 저온 화상을 입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따뜻한 줄만 알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깊숙이 파고들어 상처를 입히는 열 같은 관계.

처음에 무엇을 기대하고 정국에게 다가갔던 걸까. 이제 태형은 그것마저도 기억해내기 어려웠다. 섹스 파트너로만 지내는 걸로 만족하려고 정국의 제안을 수락했던 거였나? 아니면, 그렇게 지내다 보면 정국의 마음이 제게 기울까 기대한 거였나. 그것도 아니면, 더 이상 먼발치에서 혼자 정국을 바라보는 게 지쳐서였을까.

 

…….”

 

만약 마지막 이유였다면, 태형은 당장이라도 이 미지근한 관계를 그만두고 정국과 시작한 것을 후회해야 했다. 옆에서 지내다 보면, 마음이 식을 줄 알았던 걸까. 옆에 있는 것이 멀리서 지켜보는 것보다 덜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뭐가 됐든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저온 화상은 자각이 없어 더 위험하니까. 상처가 더 깊어지는 줄도 모르고 따뜻함에 취해 계속 머무르려 하게 되니까. 마치 지금 제 상태처럼.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는 배우 전정국의 소속사 측은 본인 확인 결과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맞다.’고 류현이와의 공식 열애설을 인정했다. 연예계 선남선녀 커플의…….]

 

태형은 전정국와 류현이의 열애설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는 기사를 읽다 이내 인터넷 창을 꺼 버렸다. 기사를 찾기 위해 검색하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모든 포털사이트들이 전정국과 류현이의 열애설을 더 많이 띄우지 못해 안달이었으니까.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만두고 싶지 않다면 그것 역시 거짓말일 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정국을 놓지 못하는 것은, 그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러지 못해서였다. 여태까지 태형이 맺어 왔던 관계들에서 태형이 항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많은 관계들 중에, 분명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보다 제가 상대를 더 좋아했던 적도 많았고, 하룻밤의 인연으로 끝내기에는 아쉬워 관계를 지속해볼까 고민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때마다, 태형은 제 자신을 통제할 수 있었다. 어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태형은 그 상대들보다 항상 제 자신을 우선에 둘 수 있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옅어지는 감정은 그런 태형을 도왔으니까. 그런데 왜.

 

짜증나…….”

 

전정국한테는 그게 되지 않을까. 태형은 눈가에 손을 올렸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너무 오래 좋아해서? 너무 오래 애태워서? 제대로 만난 적도 없을 때, 혼자 먼발치에서 시작한 짝사랑이라서? 마음이 있는 채로 몸을 섞어서? 그러고도 놓지 못해서? 놓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서? 계속 마주쳐야 하니까?

갖다 붙이려면 이유는 많았다. 전정국을 좋아한다는 이유 말고도 제게 전정국이란 존재는 특별했으니까. 그러니 그런 이유들을 다 갖다 붙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게 답이 아니라는 것은 제 자신이 이미 제일 잘 알고 있는데.

 

전화 한 번 정도는 해 줘도 되잖아. 태형은 입술을 짓씹었다. 우울하다가, 허탈하다가, 그 감정도 지나가니 이번엔 억울함이 찾아왔다. 며칠 전까지 나한테 그렇게 말해놓고. 현이 씨를 만나러 간 이후로 아무 연락 없는 전정국이 너무 미워서. 그리고 그게 정말로, 전정국의 안에 김태형이란 사람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알려주는 것 같아서. 사실, 그 정도가 맞겠지만.

누군가 그랬다. 제 살을 깎는 사랑은 하지 말라고. 그 감정은 결국 사람을 닳게 만들어 지치게 한다고. 하지만 태형은 그 사람에게 묻고 싶었다. 제 살을 깎아가면서까지 그 감정을 놓지 못하는 사람이, 그 감정을 가져가고 싶어서 여태껏 갖고 있는 것이겠느냐고. 놓지 못하니까. 놓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것 아니겠냐고.

 

…….”

 

무엇보다 비참한 건, 지금 이 순간에도 자꾸만 현관문을 보게 되는 제 자신이다. 혹시라도 정국이 그 문을 열고 들어오길 바라면서.

 

*

 

태형아!”

 

누구를 만나고 싶은 기분은 전혀 아니었는데. 태형의 감정과 상관없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 정국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 동안 작업이 제대로 진척이 될 리 없었지만 태형은 작업실 안에 틀어박혀 이어지지 않는 멜로디만 붙잡고 있었다. 윤기에게서 몇 번이고 전화가 왔지만 태형은 받지 않았다. 윤기의 얼굴을 보고 무슨 말을 하게 될지 제 자신도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정국에 대한 제 마음을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인 윤기의 앞에서 볼썽사납게 펑펑 울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너무 비참하잖아.

 

무슨 일이야, 이렇게 갑자기.”

 

그러나 그런 태형에게도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은 있었다. 정확히는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기 보다 거절할 수 없는 경우가 더 정확하겠다. 미국에서 나 하나 만나려고 날아왔다는데 어떻게 거절해. 태형은 석진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석진이 그런 태형을 와락 끌어안았다. 너 보고 싶어서 왔지!

 

석진은 태형이 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우연히 만난 한국인이었다. 태형이 대학을 다녔던 그 도시에 살았던 건 아니었고, 방학을 맞아 놀러간 휴양 도시에서 만난. 사실 한국인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폐가 있는 것이, 석진은 한국인의 모습을 한 외국인에 가까웠다. 부모님만 한국인일 뿐 그 도시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도시에서 살았으니까. 그렇지만 오랜 외국 유학 생활에 지친 태형에게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고 그러니 태형이 석진을 클럽에서 만나지 않은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석진과 하룻밤을 보내고 이름도 모른 채 그대로 헤어졌을 테니까.

 

여기서는 막 그렇게 껴안으면 사람들이 오해해.”

볼에 뽀뽀하려다가 자제한 건데.”

그건 거기서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태형은 살짝 웃으며 석진을 마주 안았다. 석진은 같이 있으면 즐겁고, 편안한 사람이었다. 석진이 사는 도시와 태형이 대학을 다니는 도시는 꽤 거리가 있었음에도 여름휴가 내내 꽤 친해진 둘은 그 후에도 종종 만나곤 했다. 태형이 귀국을 하고, 석진은 미국으로 취직을 하게 된 이후로는 처음 만나는 것이었지만.

 

형은 여전하네.”

여전히 잘생겼지.”

 

태형의 말에 석진이 씩 웃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인정. 태형도 석진을 따라 마주 웃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러나저러나 오랜만에 만나는 석진은 태형을 웃게 만들었다. 김석진이란 사람 자체가 그랬다. 딱히 알고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태형이 우울하거나 외로울 때마다 석진은 귀신같이 연락을 해 오곤 했다. 그리고 석진을 만나면, 어쨌든 석진과 함께 있는 시간동안은 웃을 수 있었고.

 

타이밍도 좋아.”

?”

아냐. 그런데 회사는 어쩌고 온 거야?”

사실은 나 지금 일하는 중이야.”

?”

 

석진의 캐리어를 살피던 태형이 고개를 들어 석진과 눈을 맞췄다. 석진이 그런 태형을 보고 씩 웃었고 그 웃음에 태형이 미간을 좁혔다.

 

뭐야. 출장 온 거야? 나 보러 왔다더니. 순 사기꾼,”

너 보러 온 거 맞는데?”

……?”

 

태형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일하는 중이라며. 출장 온 거 아니었어? 태형은 석진의 웃음을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석진이 무슨 회사에 다니더라?

 

같은 말이야.”

?”

너 헌팅 하러 왔거든.”

 

빵야. 석진이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흔들며 웃었고, 태형은 그런 석진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

 

진짜?!”

그럼 가짜게.”

 

끼니때가 훨씬 지난 3, 태형과 석진이 발걸음을 옮긴 곳은 태형의 집이나 한적한 카페가 아닌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태형의 몫까지 총 3인분을 시킨 석진은 배고파 죽는 줄 알았다며 제일 먼저 나온 스테이크를 잘라 입에 쏙 넣었다.

누가 보면 스튜어디스들이 형 굶긴 줄 알겠어. 태형이 웃었다. 석진이라면 뉴욕에서 한국까지, 장장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동안 비즈니스 클래스에 앉아 나오는 기내식이며 간식·안주거리들을 전부 다 놓치지 않고 섭렵했을 게 분명한데, 석진의 배는 아직 모자란 모양이었다.

 

기내식은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아.”

그건 그렇긴 한데.”

암튼 그래서, 생각 있어?”

 

스테이크 한 접시를 깨끗이 비운 석진이 냅킨으로 입가를 꾹 누르며 태형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공항에서 석진이 태형을 헌팅 하러왔다는 말의 뜻은 태형을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였다. 석진은 뉴욕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헤드헌팅 회사의 문화 예술 파트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평소 태형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인 H. M. Big 감독이 이번에 새로 들어가게 될 영화를 맡을 마땅한 영화 작곡가를 찾지 못해 석진에게 의뢰를 해 왔고, 그에 석진은 태형을 추천했다는 것이 석진의 설명이었다.

 

너 그 감독 좋아하잖아.”

좋아한다 뿐이게. 이번에 개봉한 영화도 보러 가려고 했었는데…….”

 

태형은 순간 말을 멈췄다. 석진을 만난 덕에 잠시 잊고 있었던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집에 쳐들어와서는 한다는 말이 우리 영화 보러 가요.’ 였지. 로케 촬영 때문에 미국에 다녀왔다더니, 국내에서는 아직 개봉하지도 않은 H 감독의 영화 포스터를 가져와 흔들며 정국은 그랬었다. 개봉하자마자 보러 가자고. 꼭 자기랑 봐야 한다고. 그러나 정작 국내 개봉일에 전정국은 현이 씨와 칸쿤에 있었지.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덕분에 보통은 늦어도 개봉 다음 날에는 봤을 영화를, 태형은 아직까지도 못 보고 있었다.

 

했었는데?”

아냐.”

 

괜히 목이 타서, 태형은 앞에 있는 컵을 들었다. 나중에 DVD 사서 보면 되지. 그깟 영화가 뭐라고. 태형은 애써 제 자신을 다독였다. 석진도 앞에 있는데 우울해지고 싶지 않았다. 태형에게서 이렇다 할 답이 없자, 석진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뭘 고민해. 좋은 기회 아니야?

 

나 지금 형 덕 보는 거야?”

내가 네 덕 보는 거지. 그 감독이 네 곡 듣더니 엄청 좋아했어. 왜 이런 사람 여태 몰랐냐고.”

진짜?”

그래서 내가 그 때 너 귀국하지 말라고 했잖아. 나랑 같이 미국 가자니까.”

뭐래…….”

 

석진은 얼굴이 살짝 진지해졌지만 태형은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영화 음악 작곡가라는 직업을 살리기에 한국보다는 미국이 훨씬 더 좋긴 했다. 시장 크기 자체가 비교가 안 되니까. 하지만 대학 졸업을 앞두고 거처를 고민하던 태형은 그 즈음 우연히 영화를 보게 됐었다. 정국의 영화. 영화의 주연도 아니고, 주인공의 친구였을 뿐인 조연이었는데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태형의 머릿속에는 온통 정국뿐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사람의 영화에 제 곡을 쓰고 싶다고. 그렇게 태형은 귀국을 결정했다. 뭐 물론, 이유가 그거 하나 뿐은 아니고. 오랜 외국 유학 생활에 지쳐 있던 탓도 있었겠지만.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별 건 아니고.”

?”

영화가 끝날 때까지, 네가 현장에 있었으면 좋겠대.”

?”

 

그 감독 작업 방식이 그래. 좀 피곤한 스타일이긴 하지. 현장에 직접 나와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봐야 좋은 곡 나온다고, 계속 실시간으로 피드백 주고받기도 편하고. 석진이 말을 이었고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런데 뭐, 딱히 문제 될 건 없지 않아? 아예 와서 살라는 것도 아니고.”

…….”

길면 5개월 정도. 그동안 살 곳은 아마 감독이 준비해 줄 거야. 매번 이렇게 하거든. 아니면 나랑 같이 살아도 되고.”

아니…….”

개런티는 뭐, H 감독인데 당연히.”

 

어때, ? 석진이 씩 웃었지만 태형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5개월씩이나 가 있어야 한다고? 예상과는 다르게 태형이 곧바로 긍정의 대답을 내놓지 않자, 석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완전 좋아할 줄 알았는데. 표정이 안 좋네.”

아니, 좋아. 좋은데…….”

맡고 있는 작업 있어? 지금 당장 오라는 건 아니야. 2주일 정도 시간 있어. 못다 한 작업은 미국 가서 해도 되고.”

…….”

너 잘 생각해. 이거 완전 좋은 기회야. 대박이잖아.”

 

석진의 말은 사실이었다. H 감독이라니. 그 감독이 디렉팅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감독이니 흥행 보장은 물론, 온갖 영화제란 영화제에는 전부 노미네이트 될 것이 뻔했다. 그런 영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비단 태형이 제일 좋아하는 감독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태형의 커리어에도 엄청난 득이 되는 것일 거고.

그런데 계속 마음에 걸리는 얼굴이 있어서. 태형은 제 손을 꼭 쥐었다. 이런 일생일대의 기회 앞에서 고작 그런 게 마음에 걸리다니 제가 생각해도 제 자신이 너무 우습고 어이없지만, 마음은 솔직했다. 전정국. 5개월 동안 미국에 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정국을 5개월 동안 못 본다는 말과 같았다. 물론 지금이라고 해서 매일매일 보는 사이라거나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이는 아니긴 했지만, 그래서 더 문제였다. 차라리 그렇게 시간을 내서 만날 정도로 친한 사이였으면, 정국보고 미국에 오라고 하거나 보고 싶을 때마다 제가 정국을 만나러 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태형과 정국의 관계는 그 정도도 되지 못했으니까.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태형이 그렇게 망설이고만 있자, 그런 태형을 쳐다보던 석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난 꼭 너 데려갈 거야.”

…….”

이참에 아예 눌러 앉으면 더 좋고.”

 

석진의 말에 태형이 뭐라 답을 하려던 순간 타이밍 좋게 석진이 시킨 두 번째 메인 디쉬가 서빙되었고 순간 진지해졌던 석진의 얼굴이 한순간에 확 풀렸다. 일단 먹고 다시 얘기하자. 석진이 씩 웃으며 포크를 들었고 태형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나 꼭 너 데려오겠다고 그 감독이랑 약속했어. 내 커리어를 위해서라도 너 데려가야 돼.

 

라고 석진은 농담 삼아 말했지만, 그 밑에 깔려 있는 석진의 진심을 태형이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석진은 태형이 귀국과 미국행을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부터 그런 태형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대체 왜? 혹시 돈 때문이야?’

 

귀국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석진을 만나 제 결심을 알렸을 때,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의 석진이 제일 처음 내뱉은 말이 저거였다. 마치 정말로 돈 때문이라면 제가 도와주기라도 할 기세로. 아니, 그럴 기세가 아니고 정말로 그랬을 것이다. 석진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석진이 생각하기에 태형은 한국에 처박힐 인재가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작곡가라는 것이 거리와 장소에 큰 구애를 받는 직업은 아니라 해도, 기회가 주어질 확률과 만나는 사람들이 달라질 거였다. 무리를 해서라도 미국행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순데, 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거야. 제가 고향 내지는 조국에 대한 개념이 태형보다 옅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태형의 결정은 쉬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형은 그런 석진의 말에 웃으며 그랬다. 그런 거 아니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뮤즈?’

비슷해.’

 

이유가 그것 뿐만은 아니었지만, 가장 큰 이유가 그거였다. 정국을 만나고 싶어서. 그 땐 정국을 향한 제 감정이 이렇게까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지만. 아무튼 태형의 그 말에 석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표정은 석연찮은 채로. 하지만 그 이상 석진이 어쩔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태형의 선택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계속해서 아쉬웠던 것은 사실이라. 석진은 의뢰가 들어오자마자 태형을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신이 주신 기회라고. 태형이 제일 좋아하는 감독인데다가, 능력도 좋고, 이번 영화도 태형의 작곡 스타일과 잘 맞았다. 그러니까.

 

, 진짜 할 일 없어?”

 

태형의 말에 석진은 씩 웃었고 작업실 문을 열어주자마자 마주친 낯선 얼굴에 윤기가 그런 석진을 보며 태형에게 눈짓했다. 저거 뭐야? 그에 태형은 윤기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 그러니까 이 형은…….

태형을 꼭 데려가고야 말겠다던 석진의 다짐은 정말 진심이었는지,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태형의 말에도 석진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태형에게 찾아왔다. 아니 시간을 좀 달라니까? 하고 태형이 말하면 석진은 지금은 일하는 중 아니고 그냥 친한 형이 미국에서 놀러 온 건데. 나 버릴 거야?’ 하고 능청을 떨었다. 사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저래 봬도 석진이 꽤 능력 있는 문화·예술 헤드헌터라 작업에 아주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태형은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석진과 함께 있는 시간 동안만큼은 정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고. 사실 그게 가장 컸다.

 

널 만나는 게 내 일이잖아.”

뭔데?”

 

그런데 이렇게 윤기의 작업실까지 따라올 줄이야. 태형은 다시 한 번 석진의 넉살에 감탄했다. 비싼 호텔방을 놔두고 매번 제 집에서 자며 뒹구는 석진에게 오늘은 나가 봐야 한다고 했더니 한다는 말이 따라가도 돼? 였다. 오랜만에 (반은 일 때문이었다 해도) 자신을 만나러 비행기까지 타고 온 석진인데, 이런 저런 일 때문에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한 게 좀 미안하기도 하고 해서 태형은 윤기와의 중간 피드백 회의가 끝나고 밥이라도 사 줄 생각으로 그러라고 했었고. 그런데 설마, 회의 동안은 카페에 있을 줄 알았지.

 

민 감독님이시죠? 작품 많이 봤어요.”

누구신데요.”

미안, 윤기 형. 친한 형인데…….”

애인이야?”

아니!”

 

무슨 그런 말을! 태형이 눈을 키우며 극구 부인했고 윤기는 흠,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어쨌든 네가 아는 사람이라는 거지? 일단 들어와서 얘기하자. 그 말에 석진은 태형보다도 먼저 윤기의 작업실에 들어섰다. 역시나 생글생글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김석진입니다.”

민윤기입니다.”

태형이한테 말씀 많이 듣지는 사실 않았고, 태형이가 작업한 영화 보다가 민 감독님 팬이 됐거든요. 그래서 무례인 줄 알면서도 태형이한테 졸랐습니다. 혹시 큰 실례가 안 된다면 옆에서 조용히 구경해도 될까요?”

…….”

 

석진이 생글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윤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석진의 손을 맞잡았다. , 저 형 거침없는 거 봐. 태형은 그런 석진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언제 봐도 참 대단한 친화력과 넉살이었다. 저 정도는 돼야 뉴욕에서 능력 있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건가.

 

*

 

“Intro는 박자만 조금 조정하고, 테마곡은 그냥 이대로 가도 될 것 같은데? 좋아.”

 

역시 김태형이네. 회의를 끝내며 윤기가 덧붙인 말에, 태형이 살짝 웃었다. 요 며칠 내내 정국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던 터라 제대로 한 게 맞을까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윤기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남주인공이 짝사랑을 하는 역할이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시나리오 속의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으니까. 아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나. 대신 태형은 작업 내내 정국을 떠올려야만 했다.

 

끝났어?”

 

작업실 한켠에서 윤기의 컬렉션들을 구경하고 있던 석진이 몸을 일으키며 가까이 다가와 태형을 뒤에서 감싸 안으며 태형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가, 석진은 이런 스킨십이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그 행동에 식겁하던 태형도 이제는 그 행동에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굳이 물리치진 않게 되었고. 사실, 의식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게 더 맞겠다.

 

…….”

 

그런데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태형이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친 윤기의 동공이 조금, 아니 상당히 많이 흔들리고 있어서. 순간 왜 저러지, 하고 생각했던 태형은 이내 저와 석진의 자세가 윤기가 오해를 하기에 딱 알맞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윤기는 아까 석진을 보고 제 애인이냐고까지 물어봤었으니까. 당황한 태형이 제 허리에 감겨 있는 석진의 팔에 손을 올렸다. , 잠깐만 이것 좀 풀어봐.

 

아 왜애. 나 배고파. 서 있을 힘도 없어. 빨리 밥 먹으러 가자.”

아니, 이거…….”

윤기 형, 나 잠깐 형 핸드폰 좀……,”

 

그 때였다. 그러니까, 태형이 제 허리에 둘러진 석진의 팔을 풀기 위해 힘을 쓰고, 석진은 그런 태형을 더 꼭 껴안으며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고 있던 그 때. 비밀 번호를 빠르게 누르는 소리와 함께 작업실 문이 갑작스럽게 열리더니 인영 하나가 뛰쳐 들어왔고 윤기, 석진, 태형의 시선이 한순간에 새로 들어온 인영에게 닿았다. 그리고,

 

뭐야?”

 

정국과 태형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타이밍도 진짜. 이주일 만에 보는 정국의 얼굴은 여전히 잘생겼고, 멋있고, 설레고. 태형은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정국을 응시했다. 생각지도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마주한 전정국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와중에, 이 다음에 석진과 밥을 먹을 생각으로 옷을 차려 입고 나왔다는 사실만이 태형에게 위안이 되어 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어차피 윤기의 작업실에만 있을 거라 생각하고 후드만 대충 걸치고 나왔을 테니까. 이주일 만에 보는 건데 그런 모습을 정국에게 보여줬다면 정말 죽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잠시간의 적막이 흐르고 태형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정국은 다짜고짜 손을 뻗어 태형의 허리에 감겨 있는 석진의 손을 떼어냈다. 워낙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태형은 몸에 힘을 줄 새도 없이 정국에 의해 석진의 손에서 벗어나 정국의 등 뒤로 숨겨졌다. 석진은 갑자기 일어난 이 상황에 당황한 듯 눈을 깜박이고 있었지만 정국의 얼굴은 풀릴 줄을 몰랐다. 그 와중에 태형은 제 팔을 쥐고 있는 정국의 손이 너무 뜨겁다는 생각을 했다.

 

싫어하잖아요.”

?”

 

여전히 낮게 깔린 목소리로 정국이 석진에게 말했고, 석진은 그런 정국에 멍하니 되물었다. 그러니까, 하필이면 정국이 본 상황이 석진이 태형을 끌어안고 태형이 그런 석진을 떼어 내려고 했던 그 순간이라. 아마도 정국은 석진이 억지로 저를 끌어안고 있었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런 건 아닌데. 그러나 태형이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잠시 이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눈을 굴리던 석진이 이내 아, 하고 짧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김태형 씨랑 무슨 사이신진 몰라도, 싫어하는데 계속 잡고 있는 건 무례한 거,”

무례한 건 그 쪽 아닌가? 무슨 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그렇게 끌고 가고.”

 

정국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웃는 낯의 석진이 말을 이었고 그런 석진의 말에 정국의 표정은 더욱 더 굳어졌다. 그 사이에서 당황한 태형은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 눈을 깜박이고 있었고. 왜 상황이 이렇게 된 거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정국이 갑자기 나타났을 때부터 태형은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져 있었으니까. 그러나 태형이 멍해 있거나 말거나, 석진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

그 쪽이야말로 태형이랑 무슨 사인진 몰라도,”

 

그 말을 끝으로 석진은 정국에게 끌려갔던 태형을 붙잡아 제 쪽으로 당겨 왔다. 한순간에 주말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전쟁 같은 삼각관계의 여주인공이 된 태형은 멍하니 석진을 쳐다봤지만 여전히 웃는 낯의 석진의 시선은 정국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 이 형 왜 이래? 태형은 낯선 석진의 모습에 입을 벌렸다. 석진은 상대방이 아무리 무례하게 굴어도 웃는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넘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상황에 묘한 각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지금 석진의 말투에는 누가 봐도 날이 서 있었다. 정국의 시선이 태형을 잡은 석진의 손에 닿았다가, 다시 석진에게로 향했다.

 

태형이는 나랑 더 친하거든요.”

 

그 말을 하며, 석진은 씩 웃었다. 저 형이 저런 얼굴도 할 줄 알았나. 석진을 알게 된 지 꽤 오래 됐으니 석진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얼굴은 또 처음 보는 거였다. 하긴, 잘 안다고 하기엔 정작 붙어 있는 시간은 얼마 없었긴 했다. 태형은 가만히 제 팔을 쥔 석진의 손을 쳐다봤다. 태형의 시선이 제 손에 닿아 있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석진이 씩 웃으며 손을 풀고 태형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이건 또 뭐 하는 상황이지? 그런 석진의 행동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정국을 쳐다봤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정국의 저런 얼굴도 처음 본다. 대체 왜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당황스러움에 가뜩이나 새하얬던 머리가 점점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자기소개부터 할까요? 저는 뉴욕에서 태형이를 데려가려고 온,”

!”

……?”

, 아니, 석진이 형. 그만 가자. 배고프다며.”

 

태형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호칭에 재빨리 말을 고쳤다. ‘은 석진이라는, 외국에서 사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발음을 뺀 석진의 말하자면 영어 이름이었다. 애초에 석진과의 만남 자체가 외국에서였고, 그 이후로도 쭉 외국에서 살았으니 사실 태형에게도 석진이란 이름보다는 이란 호칭이 더 편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서 진, 하고 부르려니 뭔가, 애칭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부러 의식해서 석진이라 부르고 있었던 거였는데 당황하니 익숙한 호칭이 튀어나와 버린 거다. 하필 이런 상황에서. 그러나 그런 태형의 속도 모르고, 석진은 진이라고 부르는 거 오랜만이네!’라며 활짝 웃었다.

그냥 빨리 이 자리를 피하는 게 낫겠어. 태형은 재빨리 석진을 잡아끌었다. 오랜만에 본 정국의 얼굴을 오래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석진과 정국을 한 공간에 같이 오래 두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지금 하마터면 석진이 저를 스카우트하려고 한다는 것을 정국이 알 뻔 했으니까. 정국에겐 그 사실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선뜻 가라고 해도, 가지 말라고 해도, 정국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괜히 마음만 복잡해질 것 같아서

게다가 태형이 생각할 때 지금은 정국을 마주하기에 별로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석진이 옆에 있었고, 옷을 차려 입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편한 옷차림이었고, 정국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묻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많은데.

 

윤기 형, 저 이만 갈게요.”

, 그래. 수고해라. 밥 맛있게 먹고.”

전정국 너도잘 지내고.”

 

잘 지내고가 뭐야. 태형은 제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인사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나중에 보자, 라고 하기엔 뭔가. 저와 정국은 그렇게 당연히 나중에 만남을 기약하는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태형은 한시라도 빨리 이 불편한 공기를 벗어나고 싶어 여전히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석진을 꽉 잡아끌었다.

 

잘 됐네.”

 

하지만, 세상이 언제나 제 뜻대로 돌아가지는 않는 법이다. 태형이 막 윤기의 작업실을 나서려던 그 때, 등 뒤에서 낮게 가라앉은 정국의 목소리가 태형의 귓가에 닿았다. 태형은 순간 숨을 멈추었고, 정국의 목소리가 다시 느리게 이어졌다.

 

나도 윤기 형이랑 밥 먹을 참이었거든요.”

?”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먹죠. 초면에 실례한 것도 있고,

…….”

제가 살 테니까.”

좋아요.”

 

태형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재빨리 뒤를 돈 석진이 웃으며 대답했고 태형은 그대로 굳어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만약 이 세상에 타이밍의 신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자신은 그 신에게 단단히 미움을 산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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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안녕하세요, 전정국입니다.”

김태형입니다.”

 

태형은 세차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제 눈앞에 내밀어진 정국의 손을 맞잡았다. 혹시 빠르게 뛰는 심장을 정국이 눈치 채지는 않을까. 얼굴이 너무 빨개지지는 않았을까. 그것도 아니면 너무 긴장한 나머지 손이 땀으로 축축하지는 않을까. 그 짧은 새에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정국은 그런 태형의 손을 살짝 맞잡은 후 웃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미소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마주 웃었다. , 저야말로.

 

이번에 새로 들어가게 될 작품의 감독이 우연찮게도 학교 선배임을 알게 되었을 때, 태형은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게다가 활동 기간은 겹치지 않았지만 같은 동아리. 비록 과가 달라 말을 섞어 본 적도, 아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넓디넓은 영화계에서 같은 학교에 같은 동아리를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태형에겐 충분한 친밀감의 이유가 되었다. 오랜 외국 유학 생활의 여파로 남은 사소한 애정결핍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태형은 언젠가 예대에서 한 번 마주쳤을 수도 있겠네요!’하고 웃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거지만, 윤기는 그 때 태형이 자신에게 작업을 거는 것인 줄 알았다고 했다.

 

팬이라고?”

. 그래서 완전 설레요.”

신기하네.”

 

? 뭐가요? 제 앞에 놓인 와인 잔을 흔들며 태형이 발그레해진 볼을 하고 윤기에게 물었다. 태형의 적극적인 주도 하에 윤기와 태형은 빠르게 친해졌고 둘은 작업 얘기도 할 겸 종종 이렇게 술을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윤기는 같은 학교의 선배일 뿐 아니라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상대였고, 귀국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아 이렇다 할 친구가 없었던 태형에게는 좋은 말상대였던 것이다.

 

, 전정국 좋아하는 거야 안 좋아하는 애들을 세는 게 더 빠르긴 하지만.”

……?”

너같이 눈을 반짝거리면서 팬이라고 말하는 남자는 없었거든.”

 

윤기는 무심하게 툭 하고 말을 던지는 것이 말버릇이었지만, 가끔 태형의 심장은 그런 윤기의 말에 쿵 내려앉곤 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민윤기는 눈치가 빨랐다. 편하면서도 불편한 점. 태형은 저도 모르게 입에 머금고 있던 와인을 꿀꺽, 넘긴 채 그대로 굳었다. 혹시 들켰을까. 태형에게서 말이 없자, 치즈를 씹던 윤기가 태형을 쳐다봤다. 뭘 그렇게 얼어 있어?

 

아니, , 그냥.”

그럼 뭐, 소개시켜 줄까?”

저한테요? 누구를요? 전정국을요?”

그럼 누구겠어.”

 

태형이 말을 더듬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기를 쳐다보자, 윤기가 그런 태형을 보며 픽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

 

, 그래도 돼요?”

안될 건 뭐야? 너도 이 영화 관계잔데. 쫑파티에서 소개시켜 주면 되겠네.”

 

조금 더 일찍 말했으면 촬영 현장에도 와 보라고 했을 텐데. 윤기가 말을 이었고 태형은 아, 하고 짧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러니까, 그 소개를 말하는 거였구나. 하긴. 그럼 그렇지. 눈치 못 챘나 보다. 태형이 생각하며 동그랗게 키웠던 눈을 살짝 접었다. 그럼 저야 감사하죠. 그 날 뭐 입고 가지. 순간 놀랐던 심장을 진정시키고 나니 머릿속이 설렘으로 가득 찼다. 처음에 생각했던 그 소개는 아니었지만, 인사라도 하게 되는 게 어딘가. 예전에 했던 영화 쫑파티에서 멀찍이서 혼자 일방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영화 스크린이나 TV로나 가까이 볼 수 있었던 사람이다. 적어도 이번에는 간단한 인사말 몇 마디라도 나눠볼 수 있을 거 아니야.

 

만나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지려나.”

? 뭐라고 했어요? 못 들었어요.”

아냐.”

 

윤기가 고개를 돌렸다. 사람 심리라는 게, 옆에서 말려 봐야 괜히 더 불타오르기만 할 뿐, 전혀 소용이 없다는 걸 윤기는 숱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윤기는 와인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태형은 좋은 사람이었다. 외국에서 유학도 했고, 닳고 닳은 사람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 영화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애 같은 순수함이 있는. 그래서 묘하게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그래서 그런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태형은 윤기가 꽤 아끼는 사람의 범주 안에 들어가 있었다. 정국은 좋은 친구고, 좋은 배우이며, 역시나 제 바운더리 안의 사람이지만 그 사실이 꼭 정국이 애인으로서도 좋은 사람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정국은 애인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소개시켜주기엔, 그건 서로를 위해 지양하고 싶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가벼운 파트너라면 모를까.

그러니까. 윤기가 와인을 목 뒤로 넘기고 입을 열었다.

 

그렇게 좋아?”

진짜 오래 전부터 팬이었다니까요.”

잘됐네.”

 

만나 보면 알게 되겠지.

 

*

 

만나 보면 알게 되겠지. 윤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첫 만남부터 태형이 정국을 너무 많이알게 되었다는 거지.

태형은 정국을 만났고, 인사를 나누었고, 우연찮게 자리를 바꾸게 되어 인사를 한 후부터는 거의 정국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고 술을 마셨다. 그날 밤 태형의 기분은 최고조를 달리고 있었고, 그래서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쫑파티가 끝나고 자리가 파했을 때, 태형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태형은 제가 왜 여기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태형은 쏟아져 내려오는 햇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밤새 퍼마신 술에 머리는 울리고, 목은 텁텁하고. 침대 옆 협탁을 더듬어 핸드폰을 확인하려고 했을 때, 제 손에 핸드폰 대신 웬 옷가지가 잡히는 것을 느낀 태형이 가늘게 눈을 떴다. 잠깐만. 내 방 천장이 이렇게 넓었던가?

 

태형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여긴 내 집이 아니다. 그리고 호텔도. 여긴 명백히 누군가가 살던 흔적이 묻어 있는 넓은 오피스텔이었고, 돌아누워 있었기 때문에 옆이 보이진 않지만 옆에는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저와 같이 옷을 벗은 채로.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자 태형은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국에 온 이후로는 처음이라 해도 원나잇이야 종종 했었으니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제 옆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누워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게 누구인지 짐작도 안 갈 정도로 술을 퍼마시고 정신을 잃은 점은 좀그렇긴 하지만. 아무튼. 그러나 그 숱한 하룻밤의 인연들에도 규칙은 있었다. 관계는 제 집에서도, 상대의 집에서도 아닌 호텔에서. 괜히 제 집에서 상대를 떠올리지 않도록.

다른 사람에겐 어떨지 몰라도 태형에게, 누군가를 제 집에 들여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어차피 하룻밤의 인연일 거라면 그 사람에게 제 자신을 알리고 싶지도,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지도 않은, 그런 단순한 이유 말고도. 호텔이야 그 날로 끝이고 수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가는 곳이지만 집은 아니니까. 제 바운더리 안의 영역이니까.

그래서 태형은 누군가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 있는 집 안의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이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예전에는 아무리 정신이 없었어도 마지막 남은 본능이 그 사람의 집에 가는 것만은 막았었는데. 이 짓도 이제 그만 해야겠네. 읊조린 태형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별다른 인기척이 나지 않는 걸 보니 상대는 아직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누구인지 확인은 해야지…….

 

일어났어요?”

 

그런데, 제 옆에 누워 있는 얼굴이 너무나도 의외라. 그리고 낯선사람이 아니라. 태형은 입을 벌렸다. 잠에서 이제 막 깬 듯, 눈을 부비며 저와 눈을 맞추는 이 사람은, 믿기지 않지만 전정국이었다. 대한민국의 탑 배우이자, 태형이 최근에 작업을 했던 영화의 주인공이자, 어제 처음으로 윤기에게 소개받아 말을 튼. 그리고, 제 짝사랑 상대인.

정국은 굳어 있는 태형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머리 안 아파요? 어제 술 엄청 많이 마시던데.

 

이게 어떻게 된 거…….”

 

태형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허리에서 알싸하게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그래, 이런 얘기를 굳이 물어서 확인 사살을 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모든 정황 증거가 단 한 가지를 가리키고 있는데. 눈앞의 정국은 그런 태형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네? 못 들었어요. 하고 말했지만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정국의 입에서 나오는 우리 잤어요, 류의 말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오늘 받을 충격은 정국의 오피스텔에서 눈을 뜬 것만으로 충분했으니까. 아무리 술을 퍼마시고, 정국에게 호감이 있었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냉큼 자 버릴 수가 있지. 그리고 나야 전정국을 좋아했다지만. 거기에 응해준 전정국은 또 뭐지? 태형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굴리며 뻑뻑한 눈가를 꾹 눌렀다. 머리가 아직까지 지끈거렸다.

 

해장 하러 갈까요? 속 안 쓰려요?”

아니, 그보다…….”

 

정국은 이 상황이 익숙한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 해장을 하러 갈까 묻고. 그런데 그 익숙함이 묘하게 신경 쓰여서. 태형은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은 기지개를 피더니 태형에게 물 갖다 줄까요? 하고 물었고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태형은 제가 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정국에 관한 소문을 들어본 적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자유로운 영혼. 신기할 정도로 그에 대한 나쁜 뒷소문은 없는 편이었지만, 사람들은 전정국만큼 연예인 생활 잘 즐기는 놈도 없을 거야하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했다. 담백한 관계를 즐기고, 마무리도 항상 깔끔하게. 그만큼 배려를 해 준다는 소리겠지, 상대에게도. 태형 역시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문제는, 제가 그런 정국을 감당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거였고. 그래서 이렇게는 시작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

 

태형의 머리가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정국이 다가와 물을 건넸고 태형은 말끝을 흐리며 컵을 받아들었다. 태형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해장은 괜찮아요. 알아서 할게요. 약속이 있어서.”

약속?”

 

정국의 미간이 살짝 접혔지만 태형은 정국의 그런 미묘한 변화를 눈치 챌 만큼 섬세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태형은 말을 이었다. , 어젯밤에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죄송해요, 실수가 많았네요. 그 말에 정국이 아, 하고 감탄을 터뜨렸다. 태형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나 봐요?”

…….”

되게 태연하네. 일어나자마자 약속 갈 정신도 있고.”

 

태연해 보이는 건 그러는 그 쪽도 마찬가지거든요. 태형은 그 말을 삼키며 물컵을 내려놓았다. 살짝 떨리는 손을 혹시나 정국이 눈치 챌까 봐. , 그게 왜요? 최대한 태연한 척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다. 태형은 괜히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냥.”

 

정국이 어깨를 으쓱했다. 태형은 제 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풀었다. 핸드폰이 어디 갔지. 한시라도 빨리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여기 있으니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다. 집안이 온통 정국의 향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심장이 계속 빨리 뛰고 있으니 조금 더 있다가는 정국에게 들킬 것도 같고. 머리도 지끈거리고. 그리고 그 때 태형의 시야에 핸드폰이 들어왔다. 태형의 핸드폰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저절로 그려지는 어젯밤의 풍경에 태형이 얼굴을 붉혔다. 저게대체 왜 저기에 가 있는 거야.

 

, 암튼 그러니까 그냥 없었던 일로 해요. 피차 깔끔하게.”

 

옷을 대충 추슬러 입고, 핸드폰을 챙기는 동안 정국은 그런 태형을 말없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을 뿐 말이 없었다. 하긴, 무슨 말을 할까. 당연한 건데도 묘하게 서운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모든 준비를 빠르게 마친 태형은 현관에 서서 한 번 더 못을 박았다. 괜히 구질구질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 솔직히. 겁이 났다. 무서웠다. 정국을 좋아하니까. 그건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정국의 입에서 우리 사인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듣는 것보다 제 입으로 말하는 게 나으니까. 괜한 자존심이고, 부질없는 짓이라 해도, 태형은 그랬다. 그러나 막 방을 나서려는 태형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정국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이었다.

 

싫은데.”

?”

싫다고요.”

지금 뭐라고,”

난 이렇게 끝내긴 싫다고요. 어제 너무 좋았거든.”

 

태형은 뒤를 돌아 정국을 쳐다 본 그 상태 그대로 굳었다. 내가 지금 헛것을 듣는 건가. 그러나 정국의 얼굴은 여전히 태연하다. 태형은 괜히 아려 오는 것 같은 허리를 짚었다. 뭐가 저렇게 당당해? 아니, 당당하지 않을 건 없나? 태형이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그럼 뭐, 오늘부터 1, 이라도 하자는 건가. 태형이 멍하니 정국을 쳐다보고 있자, 정국이 천천히 태형에게 다가왔다.

 

약속 있다고 했으니까, 오늘은 보내줄게요.”

그게 무슨…….”

나도 깔끔한 거 좋아해요. 그렇다고 없던 일로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고는 씩 웃는다. 그 웃음에 가뜩이나 어지럽던 머리가 배로 혼란스러워졌다. 전정국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태형은 눈앞으로 다가온 정국에 숨을 멈췄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무, 빨리. 혹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연락할게요.”

…….”

받아요.”

 

. 다짐을 받아내듯 꾹 눌러 못 박은 정국이 다시 씩 웃고는 등을 돌렸다. 정국이 그대로 욕실로 모습을 감추고, 태형은 현관에 우두커니 혼자 남겨져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지금뭐가 어떻게 된 거지.

 

*

 

드디어!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남자 전정국씨를 만나보게 됐는데요!”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던 태형은 갑자기 들려 온 익숙한 이름에 고개만 움직여 TV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날 그렇게 정국이 현이 씨에게 가고 난 후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국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지금쯤 현이 씨랑 같이 있을 테니 내 생각 같은 건 안 나는 거겠지. 태형이 입술을 물었다. 연락한다고 한 적도 없는데 기약 없는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제 처지가 우스웠다. 그 와중에도 TV에서 흘러나오는 전정국이란 단어에 반응하는 제 자신도.

 

안녕하세요, 전정국입니다.”

이번에 새로운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들었어요!”

, 촬영은 다 끝났고, 이제 편집 막바지 단계에 있어요.”

 

그러고 보니까 나도 작업해야 하는데. 태형은 작업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다시 눈을 감았다. 이런 기분으로 무슨 작업. 작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태형은 의미 없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소파를 두드렸다. 전정국, 류현이, 김태형. 영화, 작업, 전정국……. 생각은 전정국으로 시작했다가 전정국으로 끝난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결국 그 끝은 전정국으로 이어졌으니까. 이게 뭐야. 태형은 입술을 짓씹었다. 작업을 하는 시간 외에도 전정국은 제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데, 이제는 작업을 하고 있을 동안에도 전정국을 생각해야만 하니까 작업을 하면서 현실을 도피할 수도 없다. 전정국이랑 더 이상 엮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윤기 형이 아무리 부탁하더라도 전정국의 영화를 맡는 게 아니었는데.

 

이번 영화가 정국 씨한테 특별하다고 들었어요.”

, 처음으로 시나리오랑 연출에 참여했거든요. 물론 윤기 형, 아니 민 감독님이 거의 다 했지만요.”

민윤기 감독님하고도 각별한 사이시죠?”

서로한테 특별하죠.”

 

화면 속 전정국이 웃는다. 태형은 TV를 끄려고 리모컨을 집어들었다 결국 다시 내려놓았다. 이렇게라도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꼭 예전에 서로를 알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해서. 혼자 멀찍이서 스치듯이 본 걸 가지고, 첫 눈에 반한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서사로 여태까지 이어질 만큼 지긋지긋하게 짝사랑할 정도로 빠져 버렸던 그 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차라리 그 때가 나았나.”

 

태형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땐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었는데. 전정국의 행동 하나 하나에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의미부여하고, 그러다가 실망하고. 연락을 주고받아서 설렐 일도 없었지만 이렇게 힘들 일도 없었는데. 태형은 리모컨을 꼭 쥐었다. 그 날, 섹파로 지내자는 전정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전정국에게 연락이 올 것 같아서 괜히 핸드폰을 주기적으로 쳐다보는 일도, 아무런 반응 없는 현관문을 쳐다볼 일도 없었겠지. 태형은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TV에서는 계속해서 전정국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럼 이번 영화에 상 욕심도 크시겠네요.”

이번 영화에 애정이 각별한 건 맞는데, 저는 의외로 욕심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정말요? 그건 정말 의외인데요.”

저 욕심 많아 보여요? 하하. 그런데 정말이에요. 어렸을 때 데뷔해서 그런가. 어렸을 땐 욕심이 많았었거든요. 최고가 되고 싶고, 다 내 거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건 다 가져야 하고.”

 

전정국이 살짝 웃고, 리포터도 따라 웃는다. 태형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런데, 욕심을 부린다고 다 제 게 되는 건 아니더라구요.”

…….”

그걸 깨닫고 나니까, 언젠가부터 욕심을 안 부리게 되더라구요. 놓아야 하면 놓을 수 있게.”

 

그래도 여러분들의 사랑은 욕심 부리고 싶어요! 이번 영화 많이 사랑해주세요! 사뭇 진지해 지는 것 같았던 인터뷰는 전정국의 애교스러운 농담을 끝으로 웃음과 함께 끝났고 전환된 화면은 영화의 짧은 클립과 내용을 보여주며 마무리됐다. 그리고 태형은 TV 전원을 껐다. 그나마 TV의 소음과 빛 덕에 채워지고 있었던 커다란 거실은 텅 빈 듯 적막해졌다. 태형은 그제야 천천히 눈을 떴다. TV를 껐음에도 전정국의 얼굴과 전정국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태형의 머릿속에 짙은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태형은 언젠가 윤기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 날 이후 걸려온 전정국의 전화를 결국 무시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편한 관계로 지내자는 전정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너 전정국 좋아하지.’

, 언제부터 알았어요?’

 

윤기는 전정국 좋아하냐?’고 묻지 않았다. ‘좋아하지.’하고 말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에 가까웠다. 그리고 윤기의 그 확신 어린 말투는 태형이 거짓말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너한테 전정국 소개시켜 주고 나서 네 얼굴 볼 때부터?’

…….’

, 아니다. 확신은 그 때 했고, 내가 전정국 소개시켜 줄까 물었을 때 네 반응 봤을 때부터 예상은 했다.’

안 놀라요?’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말하는 윤기에, 태형은 침착하게 잔을 내려놓고 물었었다. 외국에서야 자신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으니 제가 게이라는 것을 밝히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지만,(애초에 게이 클럽 단골이기도 했다) 한국은 좀 다르다고 들었는데. 한국에서는 처음 하는 커밍아웃인데 그 상대의 반응이 너무나도 무덤덤해서, 태형은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자 윤기가 왜 놀라야 하는데? 하고 되물었다. 태형은 그러니까……. 하고 말끝을 흐렸다.

 

네가 게이라는 거? 아님 전정국을 좋아한다는 거?’

…….’

전자면, 이쪽에선 완벽하게 헤테로인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들어서, 별로. 후자면, 그건 좀 놀랍긴 하네.’

 

그런데 뭐 그렇다고 엄청 놀라울 정도는 아니고. 윤기가 잔을 들며 조용히 말했고 태형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영화 쪽 산업 종사자인 것을 이런 식으로 감사하게 될 줄이야. 커밍아웃에 대한 걱정이 가시고 나니 문득 고개를 드는 궁금증에 태형이 다시 윤기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 놀랍지 않으면서, 전정국을 좋아하는 건 놀랍다니, 그건 무슨 말이지.

 

그런데 제가 전정국 좋아하는 게 왜 놀라울 일이에요?’

걔 소문 알고도 그런 마음이 드나, 싶어서.’

소문?’

그냥, . 소문이라기엔 팩트지. 가벼운 거.’

 

여자건 남자건 3개월을 못 간다고, 유명하잖아. , 나쁘다곤 생각 안 해. 깔끔하게 만났다가 헤어지는 게 얼마나 편하고 좋은 건데. 그런데 왠지 너는 좀.

 

그런 스타일 아닐 거 같아서.’

……

. 혹시 지금 전정국이랑 사귀나?’

 

말을 잇던 윤기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태형에게 물었고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 그럼 다행이고. 괜히 사귀는데 초 친 건가 했네. 이어지는 윤기의 말에 태형은 사귀는 건 아니고, 섹스 파트너긴 하죠. 하는 말은 삼켰다. 아무리 윤기라 해도 그 수많은 가벼운 관계중 하나가 저예요, 하고 굳이 광고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윤기는 눈치가 빠르고, 사람을 잘 파악하는 사람이었다. ‘너는 그런 스타일 아닐 거 같다는 윤기의 말은 사실이었고, 태형은 가벼운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나가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전정국에 대해 그렇게 말했으니, 태형도 알고 있었다. 전정국이 관계에 감정을 무겁게 싣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애초에 모르고 시작한 게 아니었으니 알게 된 후에도 끊지 못했다. 끊을 수가 없었다. 감정의 책임이 모두 제 몫이고, 무거운 감정의 짐도 모두 제 것이 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

 

태형은 멍하니 핸드폰을 들었다. 쌓여 있는 메신저 중에 정국의 것은 없다. 그 사실만 확인하고 다시 핸드폰을 끄려는데, 태형의 시야에 빠르게 올라오고 있는 단톡방의 메시지가 걸렸다. 대학 동아리 동기 단톡방이었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그 방에 들어갔다. 채팅창은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지만 채팅방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대박, 전정국이랑 류현이랑 사귄대.]

[소속사에서 인정했다는데? 사귄지 오래 됐다며.]

[이번에 휴가도 같이 간거래.]

[? 태형이 읽었다. 태형아, 진짜야? 지금 완전 기사 다 났어.]

[아 맞아, 쟤 전정국 영화 한댔지!]

 

동기 하나가 보내 준 기사의 캡처 사진에, 정국은 환하게 웃고 있다. 그 옆에는 현이 씨. 기사의 헤드라인은 전정국-류현이 열애 인정. 태형은 핸드폰의 화면을 껐다. 순식간에 빛이 사라졌다. 태형은 눈을 감았다. 빗방울이 창밖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유난히 일찍 찾아온 세찬 비가 지리한 여름 장마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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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고, 태형은 생각했다. 처음에는 분명히 서로 마주치면 간단히 눈인사만 하는 사이만이라도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사이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됐다. 같이 밥을 먹으면 같이 술을 마시고 싶고, 술을 마시면 눈을 맞추고 얘기하고 싶고. 눈을 맞추고 얘기하고 있으면 키스하고 싶고, 키스하면 자고 싶고. 그러다가 자고 나면, 유치하지만 사랑을 속삭이며 꼭 껴안고 잠들었다가 아침에 같이 눈을 뜨고 싶고.

 

다 왔어요.”

.”

 

태형은 짧은 감탄을 터뜨리며 멍하니 빠져 있던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비싼 차가 좋긴 좋아. 멈추는 것도 몰랐네. 태형이 어색하게 웃으며 안전벨트를 풀자 정국이 씩 웃었다. 그럼 자주 타요. 정국의 실없는 소리에 태형이 됐거든, 하고 짧게 응수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잘 빠진 차에서 내리니 자신에게 모아지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 저 차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알게 되면 더 시끄러워지겠지. 썬팅이 짙게 되어 있으니 그러진 않겠지만, 태형은 혹여나 안에 타고 있는 정국이 보이기라도 할까 봐 재빨리 차 문을 닫았다. 괜한 소란은 딱 질색이었다.

 

, 맞다 형!”

…….”

그런데 형은 왜 내가 나오는 잡지는 안 봐요? 내가 안 나오는 잡지 사기가 더 힘들 텐데.”

…….”

꼭 사 놔요! 나중에 검사할 거니까!”

 

그러나 그런 태형의 노력이 무색하게, 정국은 창문을 내리고는 얼굴을 쏙 내밀어 쓸데없는 소리를 했고, 저에게 모아졌던 시선은 그대로 정국을 향해 개중 정국을 알아본 몇 명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너무나 의도가 투명한 정국의 행동에 태형은 아, 씨발. 하고 조용히 욕을 읊조렸다. 그러니까, 자신을 버리고 윤기와의 약속을 가는 태형에 대한 투정, 내지는 복수. 태형의 살벌한 눈빛에 씩 웃은 정국이 그대로 창문을 올리고 재빨리 차를 몰아 거리를 빠져나갔다. 정국에게 모아졌던 시선은 다시 태형에게로 향한다. 이쯤 되면 정국이 내일 데이트 잊지 마요!’ 라고 외치지 않은 것을 감사해야 하나. 속으로 한 번 더 욕을 읊조린 태형이 걸음을 재촉해 재빨리 건물 안으로 모습을 숨겼다.

 

*

 

그냥 다시 만나면 되잖아.”

미쳤어요?”

 

태형은 태연한 윤기의 태도에 입을 벌리고 테이블을 쿵 쳤다. 그러나 윤기는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고기 먹고 싶다기에 삼겹살집이나 갈 줄 알았더니, 윤기가 태형을 데려온 곳은 멀쩡하다 못해 고급스러움이 넘치는 레스토랑이었다. 이런 곳은 나랑 말고 애인이랑 와야죠. 태형이 투덜거리자 윤기는 네 연애 고민 상담 해 주는 몫이라고 생각해. 가끔은 남이 구워준 스테이크가 먹고 싶은데 이런 곳에 여자 데리고 왔다가 괜히 귀찮아지는 거 싫어. 하고 딱 잘라 말했다. 그게 참 민윤기답다고, 태형은 생각했다.

 

별로 깊게 생각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그게 문제죠. 난 가볍지가 않으니까.”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고 윤기는 밥상머리 앞에서 한숨 쉬지 말라며 작게 잘라진 고기를 포크로 쿡 집었다. 지금 한숨을 안 내쉬게 생겼냐고요, 내가. 짝사랑하는 사람한테서 자꾸 섹파 사이로 돌아가자는 얘기를 듣는데. 태형은 입을 삐죽였다.

첫 경험이 외국 유학 당시 시험이 끝나고 처음으로 갔던 핫한 게이 클럽에서 만난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남자인 만큼, 태형도 자유로운 섹스나 연애에 대해서 보수적인 편은 아니었다. 가끔 몸이 뻐근하면 클럽도 갔고, 한 때는 원나잇도 자주 했었다.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고, 감정이 널을 뛰게 되는 연애보다는 그런 단순한 관계가 훨씬 편했으니까. 그럼 왜 전정국의 지속적인 섹파 제의를 거절하고 있느냐. 그건, 태형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감정의 깊이와 간극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원나잇은 괜찮지만 그 이상으로 이어지는 관계에 감정을 빼놓을 수는 없는 제 자신.

하필 한국인은커녕 동양인도 찾아보기 힘든 도시로 가게 된 외로운 외국 유학 생활이 길었기 때문인지, 태형은 누군가에게 정을 쉽게 주는 편이었다.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쉽게 뿌리치지 못했고, 살이 맞닿으면 맞닿은 시간만큼 어느샌가 제 자신도 모르는 새 감정은 깊어져 있었다. 문제는 그 감정이 항상 상대적이지는 않았다는 거였고. 그 감정의 차이와 간극은 꽤 잔인해서, 몇 번의 속앓이 후에 태형은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니까, 감정이 깊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애초에 그 싹부터 잘라내기로. 매번 클럽에 가서 괜찮은 상대를 찾아야 하는 귀찮음을 감수하더라도, 절대로 주기적으로 만나는 섹스 파트너는 만들지 않을 것.

 

네 말대로라면 어차피 이미 늦은 거 아닌가? 전정국 좋아한다며.”

…….”

다른 사람이랑 붙어먹는 걸 지켜보는 것보단 그냥 섹파라도 되는 게 낫지 않아?”

 

태형은 입을 꾹 다물었다. 윤기의 말이 너무나도 정곡을 찔렀기 때문에, 딱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거랑 그거랑은 다르죠. 잠시간의 침묵 후에, 태형이 말을 이었다. 뭐가 다른데? 어느새 스테이크 한 접시를 깨끗이 비운 윤기의 눈이 태형을 향해 있었다. 태형은 입을 삐죽였다.

 

그냥 자존심이 상하는 건 아니고?”

…….”

걔는 널 섹파로밖에 생각 안 하는데, 너는 걜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게.”

팩트도 너무 직구면 폭력이거든요.”

 

태형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윤기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이 이거였다. 저를 너무 잘 안다는 것.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형 말이 다 맞아요. 그리고 그렇게 계속 만나다 보면, 걜 더 좋아하게 될까봐 무서운 것도 있고. 태형이 결국 속에 있는 말까지 다 털어놓았다. 윤기가 그런 태형을 보며 혀를 찼다. 때 아닌 상사병을 앓고 있는 태형이 조금, 안쓰러운 것도 같았다. 어쩌다 전정국 같은 애한테 빠져서.

 

그럼 차라리 아예 안 보는 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

그건 또 싫고?”

그게 제 마음대로 됐으면 진작에 집 비밀번호 바꿨죠.”

 

윤기로부터 정국을 소개받기 전부터 정국과의 섹스 파트너 관계를 끝낸 지 1년이 지난 지금까지, 태형의 집 비밀번호는 똑같았다. 0215. 태형이 정국을 처음으로 마주한 날짜. 정국은 윤기가 태형을 저에게 소개해 준 그 날을 첫 만남으로 알고 있을 테니 정작 정국은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차라리 처음부터 알려주지 말 걸. 비밀번호 바꾸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바꾸려고 마음먹을 때마다 태형은 결국 문 앞에 주저앉아 버렸다. 자꾸 정국이 그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아서.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정국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 문을 열고 들어와 줬으면 좋겠어서.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소개시켜주지 말 걸 그랬나.”

…….”

그랬으면 차라리 나았을 거 같아?”

 

윤기가 가만히 태형에게 말했고 잠시 윤기를 쳐다보던 태형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정국을 만난 걸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어떨까. 태형은 제 앞에 높여진 샐러드를 의미 없이 뒤적였다. 분명한 건, 윤기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 태형은 정국을 만나고야 말았을 거라는 것이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랬다. 언젠가는 그랬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믿고 싶으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는 몰라도.

정말 제 예감이 맞다면, 윤기가 자연스럽게 정국을 소개시켜 준 건 차라리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 팬이라고 해서 별 생각 없이 정국에게 저를 소개시켜 준 윤기가 무슨 잘못이 있을까. 잘못은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잔뜩 취해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초면에 원나잇을 해 버린 제 자신에게 있지. 태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작부터가 엉켜 있었으니 관계가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에휴, 생각해서 뭐 해. 잠시 멍하니 정국을 생각하던 태형이 이내 정국의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됐고, 이제 일 얘기 합시다. 몇 곡 필요한데요?”

“3. Intro, Outro, 남주인공 테마곡.”

 

태형의 말에 윤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고 윤기의 말에 태형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겨우 세 곡? 나야 고맙긴 한데.

 

갑자기 연락해서 부탁하기에 많이 필요하거나 급하게 필요하거나 둘 중 하나일 줄 알았는데. 둘 다 아니네요?”

사실 이미 곡이랑 작곡진 다 정해져 있었거든.”

 

태형의 말에 윤기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국이 처음으로 성인 주연을 맡으며 대박을 터뜨려 성공적인 성인 연기의 포문을 열게 된 영화가 윤기의 첫 상업 영화 데뷔작이라는 특별한 인연에, 둘은 그 뒤로도 몇 편의 영화를 함께 찍었었다. 그 중의 하나에서 태형이 OST를 맡게 되어 그 때 윤기가 정국을 소개시켜 줬던 거고. 사실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다른 때보다 훨씬 빠르게 가까워진 윤기가 정국의 팬이라는 태형의 말에 신경을 써 주지 않았다면 굳이 작곡가인 태형이 정국을 소개받을 일은 없었을 거였다.

어쨌든. 이어진 말에 태형의 눈이 조금 더 짙은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작곡가가 다 정해져 있었다면 더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제 입으로 말하긴 민망하지만 태형은 이쪽에서는 알아주는 영화 음악 작곡가였고, 들어오는 일거리야 차고도 넘쳤다. 사실 윤기에게서도 이번에 들어가게 될 영화의 음악을 맡아 달라는 눈치를 받았지만, 이미 예전에 받아 놓은 일거리가 넘쳐나는 탓에 고사했었고. 그런데 그렇게 마무리 된 줄 알았던 윤기에게서 며칠 전에 연락이 온 거였다. 이번 영화에 태형의 곡이 꼭 필요하다고. 평소에 아쉬운 소리를 잘 하지 않는 윤기였던지라, 그만큼 급한 일인가 보다 싶어 조금 무리할 각오를 하고 승낙했었는데.

 

그럼 왜…….”

그런데 우리 남주인공께서, 김태형 작곡가님의 곡이 아니면 안 하시겠다고 땡깡을 부리셔서.”

 

살짝 태형의 눈치를 본 윤기가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그 말에, 태형은 순간 멍해지는 머릿속을 느낄 수 있었다. 윤기의 말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거였으니까. 정국의 성격상 장난으로라도 내 덕분에 형 돈 더 많이 벌겠네요.’ 하고 말했을 법도 한데, 윤기에게 부탁을 받고 그 부탁을 수락한 후에도 정국은 별 말이 없었다. 윤기를 만나러 간다는 말을 들은 오늘까지도 정국은 마치 자신도 어디선가 들은 것처럼 형 이번에도 내가 하는 영화 OST 맡았잖아요.’ 하고 말했을 뿐이다. 태형은 가만히 입을 벌리고 허공을 쳐다봤다. 이거 좀이상한 상황 맞지.

 

전정국이 말 안 해?”

오늘도 만났는데 별 말 없었어요. 형 만나러 간다고까지 얘기했는데.”

걔 휴가 간 거 아니었어?”

헤어지고 귀국했대요.”

이번엔 좀 오래 가나 싶더니.”

 

걔가 그럼 그렇지. 윤기가 한숨을 내쉬었고 태형은 어색하게 웃었다. 잠시 그런 태형을 응시하던 윤기가 살짝 고민하는 듯 입술을 깨물다 여전히 멍 해 있는 태형의 손을 툭 건드렸다. 태형아. 사뭇 진지해진 윤기의 목소리에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기를 쳐다봤다.

 

전정국. 좋은 배우고 좋은 놈이지만.”

…….”

좋은 애인은 아냐.”

 

꽤나 고민한 듯 무겁게 이어지는 윤기의 목소리에 태형이 어색하게 웃었다. 윤기가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지는 태형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 표현하진 않아도 윤기가 제 자신과 정국을 모두 아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윤기는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거다. 저 말도, 태형을 위해 진심으로 해 주는 어렵게 꺼낸 말이겠지. 정국과의 애매한 관계에서 상처를 받는 것은 태형, 자신뿐이었으니까. 태형은 그런 윤기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알아요.”

…….”

그러니까 더 이상 안 가려고 하고 있는 거고.”

 

태형은 말을 마치고 샐러드를 입 안에 구겨 넣었다. 그런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태형은 천천히 야채를 씹었다. 지금도 이렇게, 아무런 의미 없을 정국의 행동에 괜히 의미를 부여하면서 심장이 뛰는데. 태형이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지나 드레싱에 잔뜩 절여진 야채가 입 안에서 질척하게 뒹굴었다.

 

*

 

내가 준 넥타이 했네요?”

 

정국과의 약속이 있는 날 저녁. 의식하지 않으려 했음에도 평소보다 일찍 떠진 눈에 태형은 곧바로 작업실로 향했지만 오전 내내 작업에는 진전이 없었다. 당연했다. 머릿속에는 음표와 오선지 대신 정국에 대한 생각들로만 가득 차 있었으니까. 결국 의미 없는 멜로디만 두드리다 작업 창을 닫은 태형은 차라리 드레스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약속 때문에 신경을 썼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정국과의 약속을 일찍부터 준비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도저히 다른 것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정국은 신경도 안 쓰겠지만.

 

그랬나.”

 

그런데 또 귀신같이. 제가 선물해 줬던 넥타이를 알아보는 거다. 사실 정국과 만난다고 부러 정국이 선물해 준 넥타이를 하고 나온 것은 아니었고, 정말로 그게 마음에 들었던 거였는데. , 그래. 이것도 문제였다. 정국이 제 취향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어도 존재 자체가(정확히는 얼굴이) 제 취향인데 정국은 제 옷 취향이나 음식 취향도 귀신같이 잘 알았다. 이래서 그렇게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인기가 많은 건가. 연예인으로서도, 파트너로서도. 괜히 다운되는 기분에 태형이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그런 정국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국은 넥타이 잘 어울린다며 씩 웃었다. 웃지 마. 정들어. 태형(29, 이미 전정국에게 정이 들다 못해 좋아 죽겠는 사람)이 속으로 꿍얼였다.

 

여기 수제 버거가 엄청 맛있대요.”

근데 너 이런 데 와도 돼?”

 

정국이 태형을 데려온 곳은 태형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던 수제버거집이었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간 태형은 의외의 풍경에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스테이크나 파스타 같은 것보다 햄버거를 훨씬 더 좋아하는 태형으로서는 다른 곳보다도 이 수제 버거 집이 좋은 선택일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정국의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이렇게 뻥 뚫린 인테리어로 되어 있는데다 유명하기까지 한 햄버거 집은 생각도 못 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여기 와 보고 싶었던 건 또 어떻게 알았대. 알고 그랬다기보다는 그냥 별 생각 없이 고른 곳이었겠지만.

 

뭐 어때요. 연예인은 햄버거도 못 먹나?”

아니,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알아보잖,”

형이랑 있는데 뭐 어때요.”

 

스캔들 같은 거라도 나면 어쩌려고, 하고 말을 이으려던 태형은 정국의 말에 입을 합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전정국도 남자고, 저도 남자고. 제가 정국을 좋아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니 괜히 찔려서 그렇지 정국과 저의 관계는 몇 번쯤 같이 밥을 먹어도 전혀 스캔들이 날 일이 없는 사이였다. 게다가 지금은 정국이 주연을 맡아 촬영하고 있는 영화의 OST까지 맡게 되었으니까. 스캔들이야 현이 씨 같은 사람이랑 밥을 먹어야 나는 거겠지.

괜히 한 번 더 정국과 제 사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인을 받은 느낌에 태형이 제 머리를 살짝 헝클어트렸다. 속상해할 일도 아닌데 괜히 속이 상해서, 그게 더 속이 상했다. 이래서 연애가 하기 싫었던 거였는데. 끝없는 감정 소모. 그런데 심지어 이건 연애도 아니고 일방적인 짝사랑이야. 태형이 입술을 물었다.

 

여기 싫어요?”

아냐. 먹자.”

 

제 표정이 눈에 띄게 안 좋아진 것을 느꼈는지, 옆에서 정국이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목소리가 들렸고 태형은 애써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이런 말을 정국에게 할 수는 없으니까. 한 번 더 태형을 흘긋 쳐다본 정국은 뭐라 한 번 더 말을 걸려는 것 같았으나 마침 종업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고 태형은 고개를 돌렸다. 종업원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마도 전정국 때문에.

 

전정국으로 예약하셨죠? 두 자리.”

.”

이 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약속 잡은 게 어제 밤인데, 그 짧은 새 예약까지 해 둔 모양이었는지 안내를 받아 자리하게 된 곳은 커다란 창이 옆으로 나 있는 자리였다. 좋은 자리도 예약했네. 태형이 속으로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형 뭐 먹을래요?”

…….”

 

태형이 메뉴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버거 자체는 A세트가 마음에 드는데, 사이드메뉴는 D세트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혹시 사이드메뉴를 바꿀 수 있을까 싶어 메뉴판을 훑으니 매정하게도 사이드 메뉴 변경 불가가 버젓이 쓰여 있다. 태형이 습관적으로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둘 중 뭘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정국을 흘긋 쳐다보니 메뉴판에는 관심도 없는 눈치였다. 두 개 시켜서 나눠 먹자고 하면 좀 그런가. 결국 끙, 하고 고민하던 태형이 메뉴판 위에 A세트를 손으로 짚었다.

 

나 이거.”

그럼 A세트랑 D세트 주세요.”

 

. 태형이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살짝 놀라 정국을 쳐다보니 정국은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냥 우연의 일치인가? 괜히 찔리는 느낌에 태형이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네, 진짜.

 

어제 윤기 형이랑은 뭐 했어요?”

그냥 밥 먹었는데.”

뭐 먹었는데요?”

 

그런 건 왜 물어봐? 태형이 살짝 미간을 좁히며 대꾸하자 정국이 그냥, 궁금하잖아요. 하고 웃었다.

 

이틀 연속으로 다른 사람이랑 데이트 하고.”

이게 데이트냐? 그냥 저녁 뜯기는 거지.”

뜯기다뇨. 너무하네.”

네가 애인이랑 헤어지는 바람에 내가 위로해 주는 거잖아. 내 돈 쓰면서.”

위로해달라고 한 적 없는데? 그럼 오늘 내가 다 사면 데이트라고 해 줄 건가?”

 

뭐래. 태형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정국을 쳐다봤다. 누가 배우 아니랄까봐 대사는 잘 치네. 속으로 생각하며 태형이 제 앞의 물을 들이켰다. 어차피 원하는 건 그냥 나랑 자는 거면서, 정국은 자꾸 저렇게 사람을 헷갈리게 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한테도 다 저러겠지만. 한없이 가벼운 전정국. 태형은 그런 정국의 잘생긴 얼굴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어쩌다 저 얼굴에 낚여가지고. 태형은 차라리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정국의 의중을 다 알고 있어도 정국의 저런 말과 얼굴에는 내성이 없었으니까.

 

스테이크 먹었어.”

. 스테이크.”

…….”

그런데 형은 스테이크보다 버거가 더 좋죠?”

 

그런데 화제는 왜 다시 이쪽으로 회귀하는가. 태형은 입술을 물었다. 정국이 하는 말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 싸움인 건가? 내가 어제 자기 버리고 윤기 형한테 갔다고? 태형은 눈을 굴렸다. 그냥 그렇다고 하면 끝날 대화긴 한데. 실제로도 스테이크보다는 여기가 더 좋고. 그러나 괜히 지고 싶지 않았다. 태형은 아니? 하고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정국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진다.

 

거기가 분위기 더 좋았는데.”

거짓말.”

스테이크랑 햄버거랑 비교가 되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태형이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정국을 당당히 마주하기에는 양심에 찔렸으므로. 그러자 정국이 흠, 하고 팔짱을 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기분이 안 좋다는 명백한 의사표현. . 어쩌라고. 태형이 괜히 속으로 투덜거렸다.

 

진짜 민윤기랑 사귀어요?”

뭐라고?”

아님 섹파?”

.”

날 두고?”

 

, 왜 또 화제가 그리로 가. 애써 돌린 보람도 없이 원점으로 돌아간 대화에 태형이 정국과 눈을 맞췄다. 그러나 정국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대체 왜 저래? 태형도 덩달아 미간을 좁혔다. 눈치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왜 애먼 윤기 형한테 불똥이 튀냔 말이다. 태형이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니거든. 윤기 형은 그런 사람 아니야.”

그럼 난 그런 사람이고?”

말꼬리 잡지 마.”

그럼 더 문제 될 거 없잖아요. 나랑 자자니까요?”

싫다니까. 너 자꾸 이러면 나 진짜,”

나 못해요?”

그런 문제가 아니,”

좋아했잖아.”

. 글쎄.”

그럼 민윤기 좋아해요?”

!!!”

 

결국 태형이 저도 모르게 쾅, 하고 테이블을 치고는 놀라 주위의 눈치를 봤다. 저도 모르게 커진 목소리가 주위에 들렸을까봐. 탁 트인 가게 안이었지만 다행히 테이블 사이가 꽤 떨어져 있는 데다 그나마 자리가 외진 곳이어서 그런지 주위에 들렸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정작 정국은 정말로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답답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나만큼 답답할까.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왜 궁금한데. 태형의 한층 낮아진 목소리에 정국이 말을 이었다.


나한테도 이유는 알려줘야죠. 그 때도 형이 일방적으로 끝냈잖아요. 난 이유도 모르고.”

그 땐 아무 말 없었잖아, 너도.”

그거야 형이 잠수를 탔으니까!”

 

사실, 태형도 찔리는 것은 있었다. 정국과의 섹스 파트너 관계를 이어가다가 도저히 이렇겐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태형이 일방적으로 관계를 끝낸 게 맞으니까. 그것도 매너 없이 한창 영화를 촬영하고 있을 정국에게 문자로. 그리고는 그대로 해외로 잠수. 그러나 태형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정국의 얼굴을 보면 도저히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계속 감정 없는 파트너 관계를 이어 갈 수도 없고. 정국의 말에 살짝 어깨를 움츠렸던 태형은 이내 문득 떠오른 생각에 다시 눈을 똑바로 떴다. 왜냐하면, 태형에게도 할 말이 아주 없는 것은 또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이주일 간의 잠수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계기가, 타국에서 접하게 된 유명 모델과 정국의 열애설이었다. 아무리 섹파에 불과했다지만 태형과의 관계가 끝난 지 이주일 만에.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호텔로 들어가는 두 남녀의 실루엣. 그 사진을 본 순간 얼마나 열이 올랐는지, 태형은 곧바로 귀국 비행기 티켓을 끊었었다.

 

민윤기 좋아하냐고요.”

 

그러나 어차피 다 지난 얘기고. 그 이후로도 정국은 공식적으로는 한 번, 비공식적으로는 세 번 정도 이별을 겪었다. 아마 원나잇까지 합하면 더 많겠지. 섹파도 이별로 치나? 아무튼. 태형이 입을 삐죽였다. 헤어지자마자 모델이랑 호텔 간 건 자기면서, 이제 와서 왜 이러는데? 빈정대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태형은 그 말을 간신히 혀끝으로 밀어 삼켜냈다. 괜히 치졸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뭐가 됐든, 태형은 순순히 정국이 원하는 대답을 내어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그럼 이렇게 가볍게 형 건드리는 짓 안 하죠.”

 

그래서 퉁명스레 내뱉은 말에 돌아오는 대답이 어쩌면 의외의 것이어서, 태형은 순간 쿵 하고 떨어진 제 심장을 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눈치 챘을까. 흘긋 정국의 눈치를 보니 정국이 눈치를 챈 것 같진 않았다. 속으로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태형이 괜히 바짝 마르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가벼운 건 아냐?”

당연하죠.”

 

정국의 대답은 단순명료하게 떨어졌다. 태형은 괜히 물컵을 꼭 쥐었다. 그래. 알긴 아는구나. 날 대하는 네 태도가 엄청 가볍다는 거. 그러니까, 알고도 그런다는 거지. 그리고 내가 윤기 형을 좋아하면 바로 그만둘 수 있을 정도로, 쉽다는 거지. 태형이 입 안쪽 여린 살을 잘근 씹었다. 어째 지고 싶지 않아 말을 하면 할수록 피해는 태형 자신만 입는 것 같은 느낌이다.

태형과 정국이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는 사이, 때마침 종업원이 손에 그릇을 들고 천천히 다가왔고 태형은 재빨리 표정을 풀었다. 이 와중에도 혹시 정국이 구설수에 오를까 싶어서. 아 정말. 이렇게 사려 깊은 사람이 또 어딨어. 태형은 살짝 웃으며 햄버거를 건네받았고 정국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런데 D세트를 받은 정국이 햄버거로 손을 뻗는 대신 제 세트에 있는 감자를 들어 태형의 A 세트에 있는 샐러드와 바꿔 가져가는 것이다.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국을 쳐다봤다. 너 지금 뭐 하냐? 그러자 정국이 아무렇지도 않게 제 앞에 놓인 콜라를 마시며 응수했다.

 

형 풀 안 먹잖아요. 버거에는 감자튀김이라고 입에 달고 살았으면서.”

그건 그런데…….”

나 체중 관리도 해야 하니까, 겸사겸사.”

 

체중 관리 하는 놈이 햄버거 먹냐. 태형은 멍하니 생각하며 제 앞에 놓여진 감자튀김을 쳐다봤다. 제 심장 박동이 기분 좋게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 태형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런 건 좀

 

…….”

 

반칙이잖아. 태형은 빨개졌을 얼굴을 숨기기 위해 콜라를 들이켰다. 탄산이 목을 따끔따끔 쏘아대다가 식도를 타고 심장까지 따끔거리게 했다. 진짜, 쓸데없이 기억력은 좋아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 이렇게 해 줄 것을 아는데. 그냥 저런 매너가 몸에 밴 앤데. 그러나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괜히 기대감이 조금씩 커지는 것도. 태형이 버거를 한 입 물었다. 어제 푹 젖어 질척거렸던 야채와는 달리 양상추가 기분 좋게 아삭거렸다.

 

작업은 잘 돼 가요?”

 

직전의 대화가 애매하게 끝나서 살짝 어색해진 분위기에 뭐라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정국이 먼저 입을 열었다. 태형은 버거를 씹다 말고 정국을 쳐다봤다. 그래. 이것도 있었지. 자기가 부탁해 놓고, 나한테 말 안 한 거. 평소 같았으면 별 거 아니라고 치부하고 그냥 넘어갔을 텐데, 그게 전정국이 되니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지금 물어볼까. 그냥, 네가 부탁한 거라며. 왜 말 안 했어? 하고 자연스럽게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고민하던 태형이 살짝 정국의 눈치를 보다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정국의 핸드폰이 가볍게 진동하며 제 존재를 알렸다. 잠깐만요, 하고 뒤집어 놓았던 핸드폰을 확인한 정국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리고, 태형은 제 입술을 살짝 물었다. 진동하던 핸드폰 위에, 잠깐 반짝이고 있었던 익숙한 이름 때문에.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잠시 핸드폰을 보다가 입술을 깨문 정국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고 태형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까지 기분 좋게 뛰던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류현이’. 정국의 바로 전 여친 이름. 그리고 어쩌면잠시 후에 전 여친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는 이름. 갑자기 입맛이 떨어져 태형은 햄버거를 내려놓고 콜라를 들었다. 얼음이 녹아 스테인레스 잔 밖으로 맺힌 물방울이 차갑게 태형의 손에 닿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태형은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정작 흐른 시간은 2분여 남짓인데 꼭 2시간이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테이블이 멀어 느껴지지 않던 소음도 왜인지 아까보다 훨씬 크게 들려서 혼자가 된 느낌을 가중시켰다. 헤어진 사이에,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을까. 태형은 어느새 바닥을 보이는 콜라잔을 내려놓았다. 차가운 음료를 한 번에 많이 마신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태형이 의미 없이 메신저를 확인하고 있을 때, 정국이 다시 돌아왔다. 살짝 난처한 얼굴을 하고.

 

.”

가 봐야 돼?”

 

정국은 제 자리에 제대로 앉지도 못 한 채로 태형의 눈치를 봤다. 정국이 나가서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아니, 살짝 굳은 얼굴로 현이 씨로부터 오는 전화를 응시했을 때부터 어쩌면 예상하고 있었다. 태형은 숨을 살짝 들이쉬었다. 가 봐. 급한 일인 것 같은데.

 

미안해요, . 여긴 내가 낼게요.”

당연히 그래야지. 헤어진 것도 아닌데.”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하지 말지. 아니길 바라고 넌지시 던진 말은 칼이 되어 태형을 찌른다. 태형은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소 같았으면 빈말로라도 집까지 데려다 줄게요.’하고 말했을 정국인데, 이번에는 그런 말도 없었다. 정말 급하긴 한가 보네. 반도 먹지 못한 버거를 뒤로 하고 계산대에 선 정국을 기다리면서 태형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 못한 배가 허전했다.

계산을 마치고 내려가면서, 정국은 한 번 더 미안하다고 말했고 태형은 대충 손을 들어 손짓했다. 나중에 제가 더 비싼 거 사줄게요. 정국의 말에 태형은 됐어, 하고 건물 밖으로 나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정국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그제서야 현실감이 들었다. 정국은 현이 씨에게 갔고, 자신은 혼자 남았다. 태형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서서 거리를 쳐다봤다. 거리는 어느새 어둑해져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낮에 제법 더웠던 날씨 때문에 얇고 입게 나온 것이 실수였는지 차가워진 기온에 태형이 살짝 몸을 떨었다. 아직 5월인데. 낮에 더웠다고 이렇게 얇게 입고 나오는 바보가 여기 있네. 태형이 중얼였다.

 

헤어진 것도 아니면서 나보고 자쟤. 나쁜 새끼.”

 

늘 이런 식이었다. 혼자 착각하고, 기대하고, 결국엔 혼자 남겨지고. 태형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선선한 바람이 태형을 감싸 돌고 지나갔다. 언제쯤이면 착각하지 않을 수 있게 될까. 여름은 아직 멀었는데.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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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술 사줘요.”

깜짝이야…….”

 


갑자기 방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소리에 태형이 놀라 쓰고 있던 헤드폰을 내려놓았다. 집 안에 딸려 있는 작업실이었지만 새벽까지 작업을 하다, 침대가 있는 침실까지 가기가 귀찮을 때 잘 용도로 작업실 안에 가져다 두었던 싱글킹 사이즈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인영에 태형이 미간을 좁혔다. 분명히 작업 중 팻말이 걸려 있을 땐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혼자 사는 집임에도 불구하고 작업실 방문 앞에 달아 놓은 작업 중이라는, 필요 이상으로 친절한 팻말은 단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 사람이 그 팻말에 쓰인 한글의 의미를 전혀 존중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걸어 놓은 이래로 단 한 번도 제 몫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태형은 제 침대에 누운 인영을 세게 째려봤다. 너 안 일어나?

 


작업실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

나가.”

 


태형이 세모눈을 하고 방문 밖을 가리켰다. 허리에 손까지 올리고, 제법 매서운 눈을 한 태형 때문에 침대에 누워 한 번 더 수울-하고 떼를 써 보려다가, 결국 못이기는 척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누워서 더 떼를 써 봐야 태형이 제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고, 오히려 역효과만 더 일으킬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의외일 만큼 관대하면서, 작업실에 대해서만큼은 태형은 단호했다. 결국 어깨를 으쓱하고 밖으로 나가자, 태형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제 신성한 작업실에 제멋대로 쳐들어온 불청객을 내쫓고, 하던 작업을 대충 마무리한 뒤 거실로 나오자 불청객은 어느새 자연스레 소파에 앉아 탁자에 놓여진 잡지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아주 자기 집이 따로 없네. 불청객 쪽으로 한 번 시선을 던진 태형은 그대로 부엌으로 가 커피를 내렸다. 오늘 오후에 약속 나가기 전에 곡 하나는 끝내려고 어젯밤을 그대로 샜더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제 마무리만 하면 됐었는데.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 때문에 아무래도 오늘 약속 전까지 끝내기는 무리지 싶다. 어느새 다 내려진 커피를 머그컵에 담아 들고 거실로 나간 태형이 입을 열었다.

 


현이 씨랑 칸쿤 간다더니. 왜 여기 있어?”

헤어졌어요.”

.”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헤어져? 태형이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자 불청객은 어깨를 으쓱한다. 상대가 요즘 주가가 치솟는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인 만큼 이번에는 좀 오래 가는가 싶더니. 역시나 100일을 제대로 못 넘긴다. 태형이 무심코 커피에 입을 댔다가 아뜨, 하고 다시 내려놓았다. 잠이 부족해서 머리가 몽롱했다.

 


찬 거야, 차인 거야?”

둘 다?”

그게 뭐야.”

몰라. 술 사줘요.”

스케줄까지 다 빼고 100일 여행 계획하기에 이번엔 좀 진지한가 했더니.”

 


절대 안 된다는 매니저의 말에도 꼭 가야 한다고 생떼를 부리던 모습이 아직도 훤한데.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지금 매니저랑 대판 싸우고 얻어낸 금쪽같은 일주일간의 휴가를 3일 만에 박살내고 기껏 온 곳이 내 집이란 말이지. 그러나 제 눈앞의 인영은 태형의 한숨에도 태평했다. 그렇죠. 그러니까 술 사줘요. 앵무새도 아니고, 계속해서 따라 붙는 술 사달라는 말에 결국 태형이 다시 미간을 좁혔다.

 


돈도 많은 게, 왜 자꾸 나한테 술을 사달래?”

. 우리 사이가 이것밖에 안 돼요? 실연당한 사람한테 술도 못 사주나?”

보나마나 네가 잘못했겠지!”

 


태형이 잔을 제법 세게 내려놨다. 그 모습에도 눈 깜짝 않는다. 저런 게 지금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핫한 배우라니. 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 한숨이 나왔다.

전정국. 나이는 27, 6살 때 스크린으로 데뷔해 그 때부터 쭉 쉬지 않고 연기를 해 온 국민 배우. 어린 나이에는 아역상을 휩쓸고, 커서는 남우주연상과 대상을 휩쓸고. 마의 청소년기도 훌륭하게 넘겼으며 나이에 비해 연차가 높다 보니 자칫 식상해졌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연기력과 그에 걸맞은 화려한 필모그래피로 운과 실력을 두루 갖춘 이시대의 아이콘이자 선망의 대상. 뭐뭐하고 싶은 남자, 하면 1위를 가져가는 건 예사였고 연예인들의 연예인, 연예인들의 이상형에 심심찮게 뽑히는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그의 화려한 이력에 대해 얘기하자면 밤을 새도 모자랄 정도로 끝도 없는 사람.

 


그래서 이번에는 왜 헤어졌는데?”

지나가는 여자 가리키면서 쟤 너 스타일 아니냐길래, 그렇다고 했어요.”

…….”

그럼 자고 싶냐길래, 그렇다고 했고.”

미친…….”

 


그런데 전정국에 열광하는 그 사람들은 알까. 전정국이 사실은 이런 놈이라는 걸. 태형은 머리를 짚었다. 그런 태형의 반응에도 눈앞의 정국은 태연했다. 그랬더니 헤어지자던데요. 더 이상 간단할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끝난 정국의 설명에 태형은 입을 벌렸다. 그게 무슨 둘 다야. 그냥 네가 찬 거지! 그것도 상대에 대한 예의라곤 쥐뿔도 없이!

 


요즘은 쓰레기가 말도 하네.”

, 그게 아니라.”

 


정국이 다시 소파에 늘어졌다. 태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그런 태형을 바라보던 정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처음엔 아니라고 했죠. 그 정도 눈치도 없을까봐.”

그런데.”

남자고 여자고 지나갈 때마다 물어보는데, 이쯤 되면 내 입에서 그렇다는 말이 나오길 바라고 있는 거 같기도 하고.”

그거야 니가-”

근데 또 걔가 짚는 사람마다 귀신같이 내 스타일이어서.”

…….”

원하는 게 쓰리썸인가? 근데 난 그건 별로거든요.”

 


태형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렸다. 사위 삼고 싶은 남자 1, 결혼하고 싶은 남자 1. 여름휴가를 같이 보내고 싶은 남자 1위라는 타이틀이 정국의 위에서 반짝거리다 우르르 부서져 내렸다. 결혼을 하고 사위를 삼고 여름휴가를 같이 보내고 싶기는 개뿔. 현실은 여름휴가 갔다가 싸우고 헤어진 남자고, 결혼했다간 인생 말아먹기 딱 좋은 남자 1위일 텐데. 그러나 그런 태형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국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헤어졌어요.

 


그리고 넌 귀국하고?”

니가 갈래, 내가 갈까. 그러기에 내가 간다고 했어요.”

잘 했다…….”

차이고, 호텔에서도 쫓겨나고. 형한테 술 얻어먹을 자격은 충분하지 않아요?”

차이긴. 네가 하도 못미더우니까 계속 물어본 걸 거 아냐. 계속 아니라고 대답해 줬어야지.”

 


이 쉽고 간단한 걸 정국은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다 알면서 그냥 그렇게 해주기가 싫은 걸까. 정국이 바보도 아니고, 아마 마지막 선택지가 그 답일 거였다.정국은 원래 그랬으니까. 그 상대가 누구든 인연에 연연해하지 않고, 복잡하고 귀찮은 건 싫어하고. 맺고 끊음이 확실하고 깔끔했다. 그러니 정글 같은 연예계에서 저렇게 자유롭게 살아도 더러운 뒷소문이 나지 않는 거겠지. 태형은 어느새 적당히 식은 머그컵을 다시 들었고 정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형이랑 할 때가 제일 좋았는데.”

푸흡!”

 


그리고 이어진 말에, 태형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보람도 없이 그 커피를 그대로 쏟아냈다. 콜록, 콜록, 콜록. 커피가 적당히 식어서 천만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입천장이 홀라당 다 까졌을 것이다. 그 사실에 감사하며 태형은 새빨개진 얼굴로 입가에 묻은 커피를 닦아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나온 말에 태형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정작 말을 꺼낸 정국은 태연했다.

 


, 그냥 다시 나랑 자면 안 돼요?”

그런 소리 하지 말랬지.”

형만한 사람이 없어요.”

.”

 


태형이 세차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사뭇 진지한 얼굴로 정국을 쳐다봤다. 하지만 정국은 그런 태형의 표정에도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대체 왜 싫다는 거예요?

 


형도 지금 사귀는 사람 없다면서요.”

그거랑 상관없어.”

그럼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나?”

전정국.”

설마, 날 두고.”

.”

 


태형이 표정을 굳히고 낮은 목소리로 정국을 불렀다. 이런 화제는 불편했다. 태형이 부러 머그컵을 소리 나게 탁자 위에 올려놨다. 그만 하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는 정국이 눈썹을 찌푸렸다. 정국의 입이 다물어지는 것을 확인한 태형이 얕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머그컵을 쥐었다. 이제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밤을 새는 작업도 자제해야 될 듯싶었다. 오늘 약속 나가서 제대로 정신 차릴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태형이 벽에 걸린 시계를 흘긋 쳐다봤다. 슬슬 정국을 내보내고 약속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나 오늘 약속 있어. 술 먹고 싶으면 나중에 약속 잡고 와.”

누구랑요?”

윤기 형.”

?”

 


누구와의 약속이냐 물어보는 정국의 목소리에 대답해 주지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괜히 대화가 길어져 봐야 피곤할 것 같아 그냥 순순히 대답했더니 꽤 불만인 듯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형은 몸을 돌려 다시 싱크대 쪽으로 향했다. 애초에 잠을 깨려고 내린 커피였는데, 정국의 말에 잠이 전부 달아나 버렸으니 이제는 카페인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약속이 있다는 태형의 말에도 정국은 일어나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실연의 슬픔에 잠긴 나보다 민윤기가 더 중요해요?”

.”

너무하다-”

 


윤기는 태형의 오래된 형으로, 정국과는 친한 형, 동생 사이였다. 애초에 태형과 윤기가 알게 된 계기가 정국의 영화를 함께 하게 된 것이었으니 오래되기로는 저보다 정국과 윤기의 사이가 더 오래 됐을 텐데, 그래서 그런지 정국은 윤기가 저보다 4살이나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심심찮게 윤기를 윤기 형이라는 호칭 대신 민윤기, 하고 불렀다. 윤기가 그 사실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나가, 빨리. 나 준비해야 돼.”

진짜 나 버리고 가려고?”

버리긴 누가. 그러기에 누가 멋대로 집에 쳐들어오래? 집에 나 없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으면 이 집에서 혼자서 쓸쓸히 형 기다렸겠지.”

주인도 없는 집에 누가 함부로 들어와도 된댔는데?”

그런 말은 집 비밀번호나 바꾼 다음에 하지?”

정신이 없어서 그랬어. 조만간 진짜 바꿀 거야.”

“1년 동안?”

 


정곡을 찔린 태형이 입을 꾹 다물었다. 태형은 정국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정말로 몸을 돌려 싱크대에 컵을 집어넣었다. 이제 정국이 뭐라 하든 절대로 반응하지 않을 참이었다. 일일이 대꾸해 주다 보면 결국 끝에 가서 지는 것은 언제나 태형 자신이었으니까. 태형이 말없이 침실로 들어가자 정국이 그제서야 소파에서 일어나 태형을 졸졸 쫓아왔다.

 


사귀는 중은 아니고, 썸타는 중인가?”

…….”

민윤기와의 약속이 날 버리고 갈 정도로 소중한 약속이란 말이지.”

…….”

몸 정도 있는 나를 버리고.”

…….”

, 형이랑 자고 싶다.”

!!!!!!!!”

 


결국 듣다듣다 폭발한 태형이 고개를 휙 돌렸다. 너 진짜 안 나가냐? 주거 불법침입으로 고소해 버린다!! 태형이 소리를 지르자 정국이 고개를 으쓱했다. 그럼 다음 날 신문 헤드라인은 전정국의 비밀스러운 연인이겠네요. 신문 1면엔 내 얼굴이랑 형 얼굴이랑 나란히.

 


너 안 꺼져?!”

검색어 1위하겠다. 이번에 새로 들어갈 영화 홍보엔 좋겠네. 형 이번에도 내가 하는 영화 OST 맡았잖아요.”

욕실까지 따라 들어올 거냐고!”

, 들켰어요? 아깝다. 자연스러웠는데.”

 


너 진짜……. 태형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고 정국은 그런 태형을 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태형은 그런 정국을 노려봤다. 이 상황에도 저 얼굴은 너무 멀끔하게 잘 생긴 완벽한 제 취향이라. 그게 너무 약올랐다. 태형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진짜 현관 비밀번호를 바꿔야겠어. 올해 안에만 벌써 50번은 넘게 한 다짐이었다.

 


그럼 내일. 나 저녁이랑 술 사주기. 그럼 오늘은 물러날게요.”

내가 왜!”

그럼 민윤기 약속 가기 전에 경찰서 들러서 나 신고하고 가든가.”

아오…….”

 


태형이 이를 갈았다. 정말이지. 더 이상 전정국과 엮이고 싶지 않은데, 정국은 제 뜻대로 움직여 줄 생각이 개미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태형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이 씩 웃었다. 씻고 나와요. 약속 장소까지 데려다 줄게요. 정국의 말에, 태형은 한숨을 쉬고 욕실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옷을 벗고,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가 찬물을 맞으면서 태형은 제 자신이 한심해 눈을 감았다. 매번 같은 패턴인데도 어쩜 그렇게 매번 넘어가는지, 제가 생각해도 우스웠다.

 


바보냐, 김태형…….”

 


그러나 그건 어쩔 수가 없는 것이기도 했다. 태형에게 정국은 불가항력이었으며, 정국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그건 정국을 제외하면 아무도 함부로 들어오지 않을 작업실에 굳이 작업 중 팻말을 붙여 놓은 이유이기도 했고, 넓디넓은 집에 멀쩡한 더블 사이즈 침대를 놔두고 작업실에 놓여 있는 싱글 킹 침대에서 잠이 드는 것이 더 편한 이유이기도 했으며,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1년이 지나도록 현관문 비밀 번호를 다시 태형 혼자만 아는 것으로 바꾸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정국의 말이 태형에게 절대적인 이유는,

 


짜증나…….”

 


3년 전 태형이 처음으로 단독 OST를 맡은 영화이자 정국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의 뒤풀이에서 정국을 처음 마주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짝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누구를? 김태형이, 전정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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