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보다 냉혹하다. 힘의 서열이 견고하며, 약육강식이 진리이자 율법으로 통하는 사회. 비록 반 정도는 인간이었기에 서로를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야만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선조로부터 몇 만 년을 내려온 본능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니까. 인간들의 신분제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하고, 예외란 있을 수 없는 위계서열. 그것이 수인들의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었다.

그래서. 현석은 제가 유서 깊은 호랑이 가문에서 태어난 것을 일생동안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후회라니, 감히 그런 단어를 입에 올릴 수도 없다. 평생을 자랑으로 여기며 살아왔고 주위에서 떠받드는 소리를 들으며 제 자신이 이 사회의 상위 계층인 것을 만끽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제 막내아들이, 그것도 그냥 호랑이도 아니고 오백 년 만에 태어난 흑호라며 태어날 때부터 세간의 칭송을 받았던, 자신과 같은 A등급도 아닌 S등급을 부여받은 제 막내아들이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한다는 소리가,

 

나 호랑이 안 할래!”

 

라니.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호랑이 가문의 가장 김현석 씨가 수박을 먹다 말고 뒷목 잡고 쓰러지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이 말이다.

 

Fake Love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명문가인 호랑이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ㅇㅇ동에 비싼 땅값이 무색할 만큼 거대한 면적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한옥은, 만지면 부서질까, 바람 불면 날아갈까 애지중지 금지옥엽 업어 키웠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막내아들의 폭탄선언으로 인해 한순간에 발칵 뒤집어졌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호랑이를 안 하겠다니. 물론 본형이란 것이 하고 싶다고 그렇게 되고,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지만 평생을 긍지 높은 호랑이로 살아온 현석에게 막내아들의 호랑이 부정 선언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호랑이 하기 싫다니. 호랑이 안 할 거라니. 남들은 되지 못해 안달인 축복받은 본형을 가지고 어떻게 그런 소릴. 그것도 내 아들이! 현석은 들고 있던 포크까지 떨어트리고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태형을 쳐다봤고 둘째 호랑이 남준은 아, 결국. 하고 중얼거리며 씹던 수박을 마저 씹어 삼켰다.

 

모든 이야기에는 기, , , 결이 있다. 이 이야기에서 태형의 폭탄선언은 전의 단계에 해당한다 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단의 시작이자 원인인 기를 파악하기 위해 몇 주 전, 운명의 그 날로 거슬러 올라가 보도록 하자.

 

 

안녕, 전정국이야. 잘 부탁해.”

 

수인들은 기본적으로 원인들과 섞여서 살아가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겉으로 보기에 태가 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것은 원인들의 시선에서 그런 것일 뿐 같은 수인들끼리는 수인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알아보느냐 물으면 그건 글쎄, 그냥 직감이라고나 할까. 동물의 직감이라는 것이 원래 정확하다지 않는가. 그리고 그 수인을 알아보는 통찰력의 정확도는 먹이사슬의 위에 있을수록, 그러니까 현대 수인 사회의 단어로 얘기하자면 등급이 높을수록 올라갔다. 쉽게 말하자면 S급은 하위 등급의 본형이 무엇인지 여타의 등급들보다 더 잘 알 수 있었다는 소리다. 상대의 본형이 개인지, 고양이인지, 아니면 도마뱀인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힘의 차이 때문에 수인들은 상대가 자신보다 낮은 등급에 속해 있는 수인인지, 아니면 자신보다 높은 등급에 속해 있는 수인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지만, 자신보다 높은 등급의 수인의 본형이 무엇인지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똑똑한 여러분들은 전부 이해를 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한 번 예를 들어 보자면 내가 B 등급의 수인일 경우 상대가 나보다 높은 등급인지는 파악할 수 있으나 상대가 호랑이인지, 뱀인지, 곰인지는 알 수 없었고 따라서 S인지, A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반대로, 상대가 나보다 낮은 등급일 경우 조금만 주의 깊게 살피면 참새인지, 햄스터인지 대강 알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상대의 등급이 무엇인지 대충 가늠할 수 있었다. 사실 뭐, 높은 등급의 경우 굳이 제 본형의 특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으므로 알기 쉬웠지만.

물론 오래 전 수인들이 원인들에 의해 사냥당하고 팔려나갈 적에는 사냥을 피하기 위해 SA등급의 수인들이 BC등급의 수인인 것처럼 변현하는 경우도 있었다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엔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이 경우는 제외하도록 하자. 그도 그럴 것이, 높은 등급일 경우 온갖 선망의 눈빛과 혜택을 독차지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겠는가.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물론 같은 반으로 전학을 왔다는 것은 동갑임을 전제로 깔고 들어가는 것이긴 하지만, 새로 온 전학생은 생글 웃는 낯으로 초면부터 말을 놓는 대범한 학생이었다.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교실 맨 뒷자리에서 졸고 있던 태형은 제 귀에 들어와 꽂히는 맑은 목소리에 느리게 눈을 떴다. 하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소리와 함께 태형이 기지개를 폈다. 선생님이 버젓이 교실 앞쪽에 서 있는 상태에서 상당히 발칙한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아무도 태형에게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딱히 문제아라거나 학교를 주름잡는 일진이라거나 하는 수식어가 붙여져 있지는 않았지만, 이 학교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본형을 가지고 있는 태형은 선생들마저도 쉬이 대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 호랑이라곤 하지만 고양잇과에 속하는 태형에게 아침햇살은 차마 뿌리칠 수 없는 나른한 유혹이었을 테니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라 치자. 어쨌거나 태형은 호랑이 귀가 뾰족 튀어나온 것도 모른 채 큰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들어찬 빛에 제 동공이 점에 가깝도록 작아졌다가 다시 천천히 크기를 키우는 동안 태형은 뾰족 솟아오른 귀를 움직이며 제 잠을 깨운 소리의 근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막 자다 깬 터라 초점이 잘 안 잡히는 눈에 태형이 몇 번 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빈자리에 앉으면 되나요?”

 

태형의 홍채가 새로운 전학생에게 초점을 맞추는 데 성공했을 즈음, 새로운 전학생은 해사하게 웃으며 선생님을 쳐다봤다. 빈자리. 이 반 전체에 빈자리는 없었다. 다만 혹여 태형이 불편할까 싶어 태형의 옆자리에 빈 책상과 걸상을 가져다 놓은 공간만이 존재했을 뿐. 아마도 눈치 없고 대범한 저 전학생은 태형의 옆자리를 빈자리라 칭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당돌한 말에 선생이 아,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우리의 대범한 전학생,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선생님이 말끝을 흐리거나 말거나 교실을 가로질러 태형의 앞에 섰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태형은 갑자기 가까워진 인물에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런 태형에게 전학생은 예의 그 해사한 웃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안녕, 넌 이름이 뭐야?”

 

나한테 이렇게 거침없이 대한 수인은 네가 처음이야, 같은 진부한 전개의 스토리는 아니고, 그냥 태형의 홍채가 간신히 초점을 맞춰 HD 화질로 꽉 차게 시야에 들어찬 그 전학생의 얼굴이 너무 잘생기고 예쁘고 귀엽고 다 해먹어서. 성형외과 의사선생님이 이건 제가 본 바, 완벽한 얼굴이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박수를 칠 것 같은 예쁘게 쌍커풀 진 동그란 눈에 오똑한 코, 오밀조밀 예쁜 입술까지. 다시 말해 이건 정말 본 적이 없는 그런 완벽한 제 취향의 얼굴이어서.

 

앞으로 잘 부탁해.”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그 무난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사말을 내 앞으로의 미래를 너에게 헌납하고 싶어로 멋대로 바꿔 듣고 싶게 만드는 그 달콤한 목소리에, 대한민국 천연기념물에 지정된 명문 호랑이 가문의 막내 S등급 흑호 김태형은 이 그린 듯 잘생긴 전학생에게 한 눈에 반해버리고 만 것이다.

 

 

토끼야.”

?”

토끼라고.”

 

밥먹다말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이 고기가 토끼 고기라고? 잘생긴 전학생이 태형의 심장에 불을 지핀 그 날의 점심시간, 태형은 제 오랜 친구 지민과 밥을 먹다가 젓가락을 꼭 쥐었다. 토끼니까 아마 등급은 C. 근데 진짜 잘생겼어.

태형의 두서없는 스토리텔링에 지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지금 뭐, 수인 얘기하는 건가. 태형의 오래된 친구인 지민은 강아지 수인으로 등급은 C에 해당했다. 원래대로라면 S등급인 호랑이 태형과 C등급인 개 지민은 친구가 되기 힘들 수도 있었겠으나 태형이 워낙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아 하는 것도 있었고, 흑호라는 제 본형 때문에 초등학생 꼬꼬마 당시 또래 아이들이 태형을 피했을 때 태형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와 준 유일한 이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지민이었기 때문에 태형은 지민에게 알게 모르게 꽤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 연유와 시간들로 지민은 지금까지도 태형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고.

아무튼, 지민은 지금 태형이 하고 있는 말의 주어가 제 식판 위에 놓인 고기가 아니라는 것에 안심하며 젓가락으로 고기 완자를 쿡 찍어 입에 넣었다. 토끼 고기는 먹기 싫어. 토끼는 너무 귀엽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토끼 타령이야? 네 반에 토끼가 있었나?”

내 짝궁이야.”

전학 왔나 보네.”

 

태형과 붙어 지낸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지민은 태형의 두서없고 설명 없는 스토리텔링 기법에도 귀신같이 태형의 말을 알아듣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태형이 제 가족과 저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 대한 말을 꺼내는 것은 그토록 오래 태형의 옆을 지켜 온 지민에게도 생소한 것이라, 지민은 곧 흥미를 보였다. 토끼인데 잘생겼다고? 이름이 뭔데?

 

토끼는 뭘 좋아하지? 상추 주면 좋아할까?”

당근 좋아하지 않을까?”

그냥 맨 당근을 먹어?”

 

제가 던진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는 태형은 이미 익숙했다. 궁금한 거야 그냥 제가 직접 알아보면 되고. 지금 태형은 눈앞에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고기가 있음에도 새로 전학 왔다는 그 토깽이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상태이니. 지민은 자연스럽게 태형의 질문에 장단을 맞췄다. 몰라. 동물농장 보니까 되게 잘 먹던데. 수인은 좀 다르려나? 너도 사료 먹진 않잖아. , 그거 욕이거든? 그럼 걔도 당근 싫어하면 어떡해.

 

물어 보면 되지.”

?”

물어봐. 뭐 좋아하냐고.”

 

사실 당연한 건데. 태형은 지민이 마치 지혜의 왕 솔로몬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민을 쳐다봤다. 그래, 물어 보면 되는 거였어. 워낙 호랑이 가문에서 태형을 어화둥둥 짜란다짜란다 키운 터라 태형은 어딘가 모르게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좋게 말하면 귀여운 거고. 나쁘게 말해도 김태형이니까 귀엽다. 태형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야무지게 주먹을 쥐었다. 걔가 좋다고 하는 건 전부 갖다 줄 거야.

 

완전 결혼이라도 할 기세네.”

결혼…….”

나 이 고기 먹어도 돼?”

완전 좋다.”

?”

 

슬그머니 태형의 식판에 담긴 고기 완자를 가져가려던 지민은 태형의 말에 손을 멈추고 눈을 똥그랗게 떴다. 그냥 농담 삼아 한 말이었는데!? 그러나 태형의 눈은 이미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래 맞아. 이건 운명이야. 나 그 토끼를 반려로 삼을래!

 

오늘 처음 봤다며.”

첫눈에 반했어.”

.”

 

사실, 원인들과 다르게 수인들의 결혼 시기는 꽤 빠른 편이었다. 반이 동물이니만큼 종족 번식에 관한 본능이 강했으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하는 것은 부지기수였고 빠른 경우 고등학생 때 결혼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태형이 누군가를 반려로 정했다고 하는 것이 막 그렇게 엄청나게 이상하고 섣부른 것은 아니긴 했다. 문제는,

 

토끼라며.”

.”

호랑이랑 토끼가 어떻게 반려가 돼?”

 

태형은 S등급의 호랑이이고, 새로운 전학생은 아마도 C등급일 토끼라는 거였다. 현대 수인 사회는 등급 간의 결혼을 엄격하게 법으로 막아놓고 있었다. 종족 간의 결혼은 상관없어도 (파충류와 포유류의 결혼 같은) 등급 간의 결혼은 안 됐다. 견고한 위계 서열 사회를 지키려는 의도에서는 아니고,(굳이 법으로 막아놓지 않아도 위계 서열은 지켜졌으니) 보통 SA등급에 속하는 육식 동물과 B, C등급에 속하는 초식 동물들이 결혼할 경우 본형의 날에 생길 수 있는 자체검열을 막기 위해서였다. 위에 반 정도는 인간이었기에 서로를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야만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기술해놓긴 했지만, 그 말은 나머지 반은 동물이란 뜻이고 세상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는 법이니까.

 

왜 안 돼?”

 

그러나 그런 복잡한 먹이사슬에 기반을 둔 법 따위야 태형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원래 천국에 있는 사람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하고 싶으면 해야 했고, 여태까지는 그게 됐다. 그러니 내가 결혼하고 싶으면 하는 거다. 물론 결혼을 혼자 할 수는 없으니 짝궁의 동의도 필요하겠지만.

다시 말해, 태형은 지금 제 짝궁 토끼만 동의한다면 그 토끼를 반려로 삼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민은 눈을 깜박였다. 등급이 등급이니만큼 딱히 이 세계의 규칙 따위를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 애인 걸 알고 있긴 했지만……. 이번 일은 정말로 가능할지 지민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래, 화이팅.”

 

그게 가능하든 아니든 지민이 신경 쓸 바는 아니라. 지민은 그냥 본디 자신 말고는 딱히 타인을 신경 쓰지 않던 태형의 변화가 신기할 뿐이었다. 뭐 어쩌면 김태형이라면 진짜로 가능하게 만들지도 모르고. 지민은 그런 태형을 응원하며 태형이 손도 대지 않은 고기 완자를 낼름 집어먹었다. 대체 얼마나 잘생겼길래 천하의 김태형이 저렇게 관심을 가지나. 고기 완자를 꼭꼭 씹어 삼키며, 지민은 눈을 빛냈다.

 

*

 

당근 좋아해?”

 

웬 당근. 정국은 제 눈앞에 서 수줍게 야채 선물 세트를 내밀고 있는 태형을 쳐다봤다. 초면의 짝궁에게 야채 선물 세트라니. 그런 기발한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아니 그보다, 학교에 있었던 거 아니었나? 학교 매점에서 이런 걸 팔아? 그 와중에 정국은 태형이 수줍게 내민 야채 다발이 꼭 꽃다발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상추와 양배추, 치커리와 케일로 화려하게 장식된 꽃다발은 정 중앙에 당근이 화룡점정으로 꽂혀 있었다. 그런데 나 이런 거 안 먹는데. 그렇지만 그 야채 다발을 정중히 거절하기엔 그것을 건넨 이가 너무 귀엽고 예뻐서. 정국은 제 취향 따위는 꿀꺽 삼키고 환하게 웃으며 야채 다발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 토끼가 내 선물을 받아줬어. 당근 좋아하나 봐. 태형은 정국의 환한 웃음에 마주 웃었다. 정국이 제 선물을 받아준 것이 너무 기뻐서 태형은 금방이라도 뿅, 하고 뾰족한 귀가 솟아오를 것 같았다. 그러나 정국은 받아든 야채 다발을 바로 섭취하는 대신 제 가방에 소중히 꽃아 두었다. 하긴, 점심시간이 막 지났으니 배부르려나. 관대한 태형은 뿌듯한 마음으로 정국의 옆자리에 앉았다. 원래 누가 옆에 앉아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태형이지만, 정국이니까 좋았다.

 

어디서 전학 왔어?”

 

잠깐 앉아서 숨을 고른 태형은 이내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정국과 친해지기.

정국에게 선물로 줄 야채 다발을 퀵으로 주문한 후 점심시간 내내 태형은 지민과 앉아 대본을 짰다. 무슨 대본이냐면 토끼 짝궁과 친해지기 대작전’. 위해서도 말했듯 그 나이 먹고도 태형은 사람을 대하는 것이(정확히 얘기하면 사람이 아니라 수인이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그 사실은 큰 상관이 없으므로 편의상 사람이라 칭하도록 하겠다) 서툴렀으므로 지민은 A to Z까지 태형을 가르쳐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 태형은 그냥 짝궁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제 평생의 반려로 점찍은 이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이었으니까. 아주 치밀하고 계획적인 플랜이 필요했다.

 

나 중국에서 왔어.”

너 중국 사람이야?”

아니. 사정이 있어서, 한국 사람인데 어렸을 때 중국으로 가서 중국에서 살다가 온 거야.”

 

그렇구나.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다음에 뭐라고 말해야 됐더라. 하지만 문제는 태형이 그 치밀하고 계획적인 대본을 전부 기억할 만큼 세심하지 않다는 데에 있었다. 태형은 눈동자를 굴렸다. 어렸을 때 초식 동물들이 저만 보면 무서워서 슬슬 피했던 아픈 기억이 있는 태형은 기억나지도 않는 대본을 떠올리는 대신 조심스럽게 정국을 살폈다. 혹시 얘도 날 무서워하지 않을까? 그러나 정국은 전혀 그런 기색 없이 웃으며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 준 야채 다발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태형은 곧바로 이어진 정국의 말에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넌 고양이지?”

?”

아까 귀 봤어. 검은 고양이. 귀여워.”

 

중국에서 살다 와서 그런가. 정국은 거리낌이 없었다. 중국이면 대충 같은 문화권 아닌가? 원래 중국 수인들은 이렇게 본형을 막 물어보고 그러나? 태형은 잠시 입을 벌렸다. 아니 뭐 사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형을 숨기려는 시도는 해 본 적이 없었고 수시로 본형의 특징을 드러낼 만큼 본형을 묻는 것이 저에게 큰 실례는 아니었지만 (애초에 태형이 티를 내기 전에 이미 상대는 태형이 그 유명한 흑호임을 알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건 어디까지나 태형이 호랑이, 그러니까 수인 사회의 상위 계층이기 때문이었고 보통은 첫 만남에 이렇게 직접적으로 본형을 묻는 경우는 잘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제 본형이 숨기고 싶은 약점일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제 눈앞의 정국은 그 동그란 눈을 살짝 접어 웃고 있었다. 한 치의 때도 묻어 있지 않은 것 같은 저 순수한 웃음.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

역시, 그렇구나. 앞으로 잘 부탁해.”

 

그리고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제가 고양이임을 긍정하는 답변을 내놓고야 말았다. 아니 사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많이) 큰 고양이여서 그렇지. 그러나 차마 제 눈앞의 귀여운 토끼에게 제가 사실은 네가 알고 있듯 작고 귀여운 검은 고양이가 아니라 흑호임을 밝힐 용기가 태형에겐 없었다. 그러다가 도망가면 어떡해. 나 무서워하면 어떡해. 결국 태형은 환하게 웃으며 내민 정국의 손을 붙잡고 마주 웃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절대로 제 본형을 드러내지 말아야겠다 다짐하면서.

 

*

 

자 이쯤에서 필자는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다.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는 좋아하는 사람과 마음이 가까워지는 거리가 가장 빠르다고 생각한다. (빛 아닌가요?) (여기 이과반이니?) 그렇기 때문에 태형과 정국이 가까워지는 속도는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과 비례하지 않았다. 태형이 자신의 본형을 속일 만큼 정국에게 한 눈에 반했다는 사실은 앞에 기술한 바 있으므로 생략하고, 사실 빈자리에 앉으면 되나요?’때부터 마음속에 태형을 점찍어 두었던 우리의 대범한 전학생 전정국도 태형에게 첫눈에 반했으므로 둘의 친밀도 함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상공을 향해 치솟았다.

혹자는 이러한 빠른 전개가 필자가 이 둘이 사랑에 빠지는 디테일한 여정을 쓰기 귀찮아서 개연성 따위는 우주스타 BT21에게 줘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여러분들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김태형과 전정국이 서로에게 사랑에 빠지는 것에 개연성 따위는 필요 없음을. 그냥 둘이 서로를 만나게 되면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은 수학의 공식 종교의 율법 우주의 섭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둘이 어떻게 사랑을 키워갔는가에 대한 묘사는 과감히 생략하도록 하고 그렇게 둘은 손을 잡고 사랑을 속삭이고 뽀뽀를 하고 오늘부터 1, 넌 내꺼 난 니꺼 하는 사이가 되었다.

태형과 정국의 나이 방년 19, 성인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나이로 앞에서 기술한 바 있듯 수인들로 하여금 미래를 약속하기에 그다지 어린 나이가 아니었으므로 둘은 이윽고 미래를 약속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정국은 태형만 보면 그 매력적인 앞니를 보이며 환하게 웃었고 태형도 그런 정국을 보며 마주 웃었다. 문제는, 제 하나뿐인 반려 정국이 아직도 제 정체를 호랑이가 아닌 고양이로 알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토끼랑 결혼하겠다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제 막내 동생이 고민이 있다기에 세상에 그게 대체 무슨 고민일까 싶어 하던 일도 때려 치고 당장 집으로 달려온 석진과 남준은 태형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토끼에게 빠진 호랑이라니. 로미오와 줄리엣도 와서 한 수 배우고 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아닌가.

 

아니, 태형아. 이건 말도 안 돼. 그러니까 이건…….”

사랑이 아니라 식욕 아니고?”

!”

아니야!”

 

순서대로 남준, 석진, 다시 남준, 그리고 태형. 남준이 태형에게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말을 고르는 새에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석진이 말했고 남준은 그런 석진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적나라하게 말하면 어떡해, 애 상처받게! 그러나 태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사랑이야! 그 단호한 입매에 석진과 남준은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러니까 형들이 도와줘. 아부지가 허락 안 하실 거 아니야.”

아니, 아버지가 허락하시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고…….”

나 진짜 첫눈에 반했어. 이런 감정은 처음이야.”

 

남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태생이 고귀하고 특별한 태형이었던지라 태형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구혼은 물밀 듯 밀려 들어왔었지만 아버지는 그런 정략적인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며 태형에게 반려를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고 모두 물렸었다. 그러나 태형이 나이를 먹고 반려에 눈을 뜰 나이가 되어도 애인은커녕 제대로 된 친구도 지민밖에 없을 만큼 하도 남들에게 관심이 없기에 저래서 번식은 하겠나 싶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반려를 찾았다고 저들에게 폭탄선언을 할 줄이야. 그것도 초식동물이랑! 토끼랑! 본형으로 변하면 한입에 쏙일 토깽이랑!!

 

아니, 잠깐만 태형아. 얼마나 됐는데.”

반 년.”

반 년?!”

 

아니 반 년 동안 연애를 했는데 그동안 몰랐단 말이야!? 반년이면 100일도 넘었잖아!!! 100일이 뭐야 200일이 가까워지잖아! 남준과 석진은 다시 한 번 입을 벌렸다. 꼭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지만 석진과 남준이 놀랄 일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토끼가, 너 안 무서워 해? 보통은 호랑이라 하면 무서워할 텐데.”

그게…….”

……?”

내가 나 고양이라고 했어…….”

 

간신히 다시 정신줄을 다잡은 남준이 태형에게 물었고 그에 이어진 태형의 고해성사에 둘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야 말았다. 심지어 사기까지 쳤어?!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를 해 보면, 호랑이가 토끼를 반려로 맞이하고 싶어 하는데, 먹이 사슬 상, 그리고 수인 사회의 법규 상 그것은 금지되어 있다. 그래도 먹이 사슬을 초월한 사랑이라고 좀 포장을 하려 했더니 정작 그 토끼는 호랑이가 고양이인 줄 안단다. 이걸 어디서부터 풀어야 돼? 석진과 남준은 할 말을 잃고 대책 없는 제 막내 동생을 쳐다봤다. 태형아, 지금 이걸 우리한테 말하면 우리보고 뭘 어쩌란 거야…….

 

결혼하고 나서 밝히면 되지 않을까?”

그거 사기결혼이야.”

어차피 사기죄 기소는 못 할 걸.”

 

법 위에 호랑이 가문 있다. 남준이 태형을 설득하려고 꺼낸 말에 눈치 없는 석진은 무심히 대꾸했고 남준은 석진을 째려봤다. , , ! 그제서야 아 맞다, 하고 중얼인 석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태형아. 토끼면 결혼은 못 해…….

 

형들이 아버지를 설득하고, 아버지가 법을 고치면 되지 않을까?”

태형아, 우리가 아무리 호랑이라지만 그렇게까지 막나갈 순 없어.”

 

그러면 이 사회에 법은 왜 있고 경찰은 왜 있겠어. 물론 그 경찰 라인이랑 법 라인도 전부 다 우리 손 안에 있지만……. 뒷 문장은 삼킨 남준이 다정하게 태형에게 말했고 태형은 눈썹을 늘어트렸다. 그런데 진짜 나 걔가 너무 좋은데. 꼭 반려로 맞고 싶은데.

 

아니, 호랑이가 토끼한테 사랑을 느낄 수가 없을 텐데.”

식욕이랑 헷갈리는 거라니까? 그런 경우 종종 있다고 책에서 본 적 있어.”

사랑이라고!”

아니 태형아. 걔는 네가 호랑이인줄도 모른다며.”

그거는!”

 

태형이 말끝을 흐렸다. 제일 찔리는 구석을 남준이 훅 짚었기 때문이다. 남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석진의 말대로 태형은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호랑이가 토끼에게 사랑을 느낀다니. 그건 말이 안 됐다. 이게 무슨 인간이 치킨에게 사랑을 느끼는 소리란 말인가.

 

솔직하게 말하면 받아들여 줄 거야…….”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냐. 본형의 날에는 어떻게 할 건데?”

 

본형의 날. 3년을 주기로 찾아오는 본형의 날에 수인들은 각자 동물의 모습으로 돌아가 원기를 충전해야만 했다. 그 날에 수인들은 수인獸人이 아니라 였다. 짐승.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놓아버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날에 수인들은 각자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꼭 지켜져야 하는 절대 법규였고.

 

배 안 고파. 안 잡아먹으면 되잖아.”

 

하지만 그런 남준의 이성적인 설득에 순순히 넘어갈 태형이 아니었다. 이미 태형은 사랑에 눈멀고 귀 먼 상태였으니까. 태형은 지금 이게 사랑이 아니면 므어가 사랑!을 외치고 있었다. 아니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토깽이길래 애를 저렇게 만들어 놓은 거야!? 석진과 남준은 멀거니 태형을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해야 저 어린 막내 동생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을까.

 

태형아 너 고기 좋아하잖아. 걘 풀 먹고 살아. 식탁에서 같이 밥을 못 먹을 걸?”

나도 풀 먹으면 돼.”

 

그게 무슨 고양이 풀 뜯어먹는 소리야!!! 우리 조상님도 마늘과 쑥만 먹다가 뛰쳐나왔는데! 조상의 얼을 헤칠 셈이니!! 남준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으나 태형의 단호하고 반짝거리는 눈빛을 꺾을 수는 없었다. 옛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다. 물론 태형이 남준과 석진의 자식은 아니었으나 남준과 석진 또한 부모 못지않게 태형을 어화둥둥 업어 키웠으니 그런 태형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고작 몇 시간만의 공방전 끝에 석진과 남준은 태형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그 말에 태형은 고마워, 혀엉! 역시 형들밖에 없어!를 외쳤다.

 

그래도 태형아. 아버지가 허락해 주실 지도 문제지만, 그 전에 그 토끼한테는 분명히 말을 해야 돼.”

?”

그래. 걔도 알 건 알아야지. 그건 그 토끼한테도 나쁜 짓 하는 거야.”

…….”

이건 약속해. .”

 

그러나 남준은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래, 아직 그 토끼가 태형이 호랑이인지 모른다고 했으니. 어쩌면 그 토끼가 태형이 호랑이인 것을 알면 알아서 도망쳐 줄지도 모른다.

남준의 눈빛은 단호했고 옆에서 석진도 그런 남준을 거들었다. 그 두 사람의 단호함에 태형은 주춤했다. 남준과 석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다른 건 몰라도 거짓말이 나쁜 것은 알고 있다. 심지어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제 반려에게. 태형은 결국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어. 말할게. 태형의 대답에 남준은 약속, 이라며 새끼손가락을 태형에게 내밀었고 태형은 느린 몸짓으로 제 새끼손가락을 남준의 새끼손가락에 걸었다. 약속.

 

그래. 그럼 나중에 한 번 데려와. 얼굴은 봐야지.”

.”

 

태형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고 남준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그만 가서 자. 내일 학교 가야지. 석진의 말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긴 후 방을 나섰고 석진은 남준을 돌아봤다.

 

태형이 진짜 괜찮은 거야?”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

아마 태형이 호랑이인 거 알면 그 토끼가 도망치지 않을까.”

태형이 슬퍼하겠네.”

 

석진이 안쓰러운 듯 말했고 남준이 으음, 하고 낮게 신음했다. 그래도, 어차피 식욕과 사랑을 착각하는 것일 테니 잠깐 슬프고 지나가는 게 낫다. S급과 C급의 결합은 말이 안 되니까. 태형이 수인인 이상 끝이 정해져 있는 결말이었다. 그러니까, 남준과 석진은 그저 그 토끼가 제 연인이 호랑이인 것을 알고도 결혼하겠다고 설치는 정신 나간 토깽이가 아니기만을 빌었다.

 

 

, 우리는 다시 이 이야기의 처음인 으로 돌아간다. 현석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금지옥엽 업어 키웠던 태형에게 저도 모르게 삿대질을 했고 태형은 그럼에도 현석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태형의 눈에는 평범한 인간은 쳐다보기만 해도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던 호랑이의 안광이 쓸데없이 깃들어 있었다. 그만큼 단호하고 결연했다는 소리다. 현석은 처음 보는 제 막내아들의 기백에 눈을 깜박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태형아.”

태형아, 말을 똑바로 해야지. 호랑이 안 할래, 가 아니고 토끼랑 결혼할래.”

, 맞아. 토끼랑 결혼할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현석은 1차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2차 충격의 쓰나미를 맛보았다. 남준은 옆에서 수박을 씹으며 차분하게 태형의 말을 수정해 주었고 태형은 수긍하고 말을 고쳤다. 현석은 그런 남준을 쳐다봤다가 다시 태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토끼? 무슨 토끼?

 

태형이한테 반려로 삼고 싶은 상대가 생겼대요. 그런데 그게 같은 반 토끼.”

토끼?!”

. 엄청 귀여워요. 아부지도 보면 좋아할 거야.”

 

아닐 걸……. 남준은 눈을 도르륵 굴렸다. 현석은 아직도 토끼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입만 뻐끔대고 있었다. 아니, , 일단 태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호랑이 부정 선언은 아니었으니 그건 다행이긴 한데. 뒤이어 나온 말도 쉬이 넘길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 현석은 냉정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태형아, 토끼랑 호랑이는,”

그거 이미 내가 말 했어요 아버지.”

사랑과 식욕을,”

그건 석진이 형이 이미 했고.”

그런데도 반려로 맞겠다고?”

.”

 

태형의 눈빛은 역시나 쓸데없이 올곧았고 그 눈빛에 현석은 할 말을 잃었다. 현석이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깜박이고 있자, 그런 현석과 태형을 번갈아 쳐다보던 남준이 이내 포크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설득이 안 돼요, 아버지. 완전 확고해. 반년이나 사귀었대요.

 

…….”

그런데 김태형. 너 걔한테 너 호랑이라는 거 말은 했고?”

…….”

 

남준은 이 때 당연히 태형에게서 긍정의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태형이 입을 꾹 다무는 것이다. 태형의 그런 태도에 되려 당황한 것은 남준이었다. 아니, 저 얼굴은 뭐야? 설마.

 

너 아직도 말 안 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진짜 결혼하고 말 할 생각이었어?!”

, 아니, 형아.”

뭐라고?!!?! 호랑이인 걸 말을 안 해?!”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현석이 부러 쾅 소리를 내며 거실 테이블을 치며 일어났고 그 소리에 놀란 태형의 귀가 뾱 튀어나왔다. 이거 이거, 안 되겠네!! 현석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짐짓 엄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고 남준은 그런 현석을 올려다봤다. 아니 아버지, 갑자기 왜…….

 

호랑이인 걸 숨기면 안 되지! 내일 당장 그 토끼를 봐야겠다!!”

아버지!!!!”

아니, 아버지, 아버지가 왜…….”

 

물론 사안이 사안이라지만. 남준은 현석의 오버액션에 당황했다. 굳이 바쁜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가기까지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그 토끼를 집으로 부르든지. 아니면 태형으로 하여금 제 정체를 밝히게 하든지. 그렇게 하면 될 것인데. 물론 태형은 이미 한 번 제 말을 듣지 않은 전적이 있었지만. 태형은 예상치 못한 현석의 반응에 당황한 눈치였고 현석은 단호한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당황해 하얘졌던 남준의 머리에 생각 한 줄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버지 혹시…….

 

태형이 너, 내일 학교에 아버지랑 같이 가!”

 

토끼고 나발이고, 목석같던 셋째 아들 김태형의 마음을 뺏어 버린 그 상대의 얼굴이 궁금해서 이러시는 건가?

 

*

 

, 김 회장님. 여기는 어쩐 일로…….”

 

그날 밤, 태형은 안 된다고, 토끼에게는 제가 직접 말할 거라고 울며불며 떼를 썼지만 단호한 현석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다음 날 아침 퉁퉁 부은 얼굴로 현석과 함께 등교한 태형은 등교하자마자 제 교실로 가는 대신 교무실로 끌려갔다. 옆에는 현석을 대동하고서.

 

여기, 우리 태형이가 반려로 맞고 싶어 하는 토끼가 있다던데.”

아부지!!”

 

거칠 것도 없었다. 현석은 바로 본론부터 꺼냈고 그 말에 교무실은 한 차례 술렁였다. 토끼? 태형이 흑호 아니야? 그런데 반려로 토끼를 맞아?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교무실의 반응에 현석은 미간을 좁혔다.

 

최근에 전학을 왔다고, 이름은…….”

 

현석은 순간 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현석은 태형이 반려로 맞고 싶어 하는 그 토깽이의 이름도 모르고 있는 채였다. 태형은 퉁퉁 부은 얼굴로 현석을 째려봤고 현석은 그런 태형의 얼굴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밤새 운 것 같은 얼굴이 안쓰럽긴 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형의 마음을 겟챠해버린 그 토끼의 얼굴이 궁금해서 여기까지 친히 행차하긴 했지만…….

 

여기 3반 검은 고양이가 누굽니까!”

아버지!!!”

 

그 때였다. 교무실의 문이 태형과 현석이 들어왔을 때처럼 힘차게 열렸고 그와 동시에 낮고 큰 목소리가 교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현석과 태형에게 고정되었던 시선은 교무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새로운 인영에게 모아졌고 태형과 현석의 시선도 그를 따라 교무실의 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전 장관님?”

아니, 김 회장님?”

 

현석이 놀란 눈으로 먼저 말문을 텄고, 뒤이어 역시나 놀란 얼굴의 전 장관이라 불린 남자가 마주 인사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여러분들도 예상하셨듯 우리의 대범한 전학생 정국이 놀란 눈으로 태형을 바라보고 서 있었고.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순간 교무실이 적막으로 가득 찼다.

 

전 장관님. 아드님 일로 중국에 가셨다더니 여긴 어쩐 일로.”

, 일이 다 끝나서 온 지 좀 됐습니다. 복직은 아직이지만. 그나저나 김 회장님이야말로 여긴 어쩐 일로…….”

, 저는 아들 녀석 때문에…….”

 

하하하. 허허허. 현석과 전 장관은 제법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영문을 모르는 정국과 태형, 그리고 교무실의 선생님들은 눈을 끔뻑이며 그런 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잡아먹을 것처럼 들이닥쳐서는 왜 갑자기 친목 도모를……. 그러나 그 둘을 제외한 나머지들의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졌거나 말거나, 전 장관과 현석은 말을 이었다.

 

, 저도 아들 놈 때문에. 아니 글쎄, 아들놈이 고양이를 반려로 맞겠다지 뭡니까.”

고양이를요? 저런.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뱀과 고양이라니 가당키나 합니까.”

그러니까 말입니다. 게다가 우리 정국이는아니, 그보다. 김 회장님 아드님이면 그 몇 백 년만의 흑호라던……. 무슨 사고라도…….”

, 그게. 우리 태형이가 토끼랑 결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

 

현석은 말을 하다 말고 순간 훅 들어차는 기시감에 말을 멈췄다. 잠깐만. 이 느낌 이거 뭐지? 뭔가 되게 이상한 느낌인데. 그리고 그 순간 전 장관도 같은 것을 느낀 듯 현석을 쳐다보던 시선을 돌려 제 아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현석과 전 장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 정국과 태형이 있었다.

 

호랑이!?”

!?!?!”

 

뭐야?! 나한텐 고양이랬잖아! 고양이랬으면서!!! 정국은 온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태형 역시 너 토끼!!!!! 하고 비언어적 표현을 내뿜고 있었다. 아니, 그렇지만. 태형은 재빨리 이성을 되찾았다. 아무리 변현이 가능하다 해도, 본형이 뱀이라면 토끼로 변현을 할 수는 없었다. 그건 기본적인 거였으니까. A 등급에 속하는 뱀이라면 C에 속하는 도마뱀이나 개구리 같은 걸로 변현을 할 수 있는 거였다. 그런데 제가 느낀 정국은, 분명 토끼였다. 포유류였단 말이다. 파충류가 아니라!!!!

 

, , !”

잠깐만. 정국아. 너 설마 그 검은 고양이가 김 회장님 아드님이냐?”

고양이……. 흑호…….”

태형아, 너 왜 전 장관님 아드님을 토끼라고…….”

세상에 검은 호랑이도 있어요?! 그런 게 어딨어!”

 

멍하니 흑호를 중얼이던 정국이 외쳤고 전 장관은 머리를 짚었다. 정국은 꽤나 놀란 듯 동공이 확 열려 있었다. 흑호라니. 검은 호랑이라니.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다. 사실 태형이 흑호라는 것은 꽤나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지만, 거의 갓난아기 때 중국으로 넘어갔던 정국은 태형의 존재를, 그러니까 흑호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 태형이 첫 만남때 보여 주었던 검은 귀와 태형에게서 느껴지는 고양잇과의 기운을 당연히 검은 고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고. 그러고 보니 고양이 치고는 귀가 좀 둥글다 싶긴 했다. 아니, 그래도. 검은 호랑이보다는 그냥 귀가 좀 둥근 고양이가 더 현실성이 있으니까.

 

저기 계시잖아. 무슨 실례니. 그리고 정국아.”

…….”

네가 할 말은 아닌 거 같다.”

 

이게 무슨 소리야. 태형에게 왜 뱀을 토끼로 착각한 거냐고 물으려던 현석은 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태형이 바보도 아니고. 무려 S급에 속하는 흑호인데. A급인 뱀의 본형을 몰랐다고? 이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바로 알 수 있는 거였다. 흑호처럼 모르는 이가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뱀이 희귀한 종도 아니고. 그리고 의문점은 하나 더 있었다. 뱀이면 파충류인데. 토끼라니. 그런데 전 장관의 옆에 서 있는 정국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토끼가 맞아서. 현석은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돌연변이? 입양? 설마. 그런데 그 순간 문득, 현석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 가지가 있었다. 뱀에게서 토끼 돌연변이가 나올 수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전 장관이 뭐가 아쉬워서 C급의 토끼를 입양할까. 후원을 하면 했지. 그러면 남은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제가 태어난 이래로, 아니 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태어난 이래로도 나타난 적이 없어 생각지도 못했던 그 경우.

 

김 회장님. 잠시 따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래야겠지요.”

 

현석은 꿀꺽, 침을 삼켰다. 전 장관의 동공이 얇은 비늘 모양으로 좁혀졌다.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해 있는 교무실의 모두를 남겨두고, 전 장관이 먼저 교무실을 나섰고 현석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우두커니 남겨진 태형과 정국은 여전히 멍하니 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은서로에게 서로가 사기를 친 상황, 쌍방 사기이다.

잠깐 얘기 좀 해.”

 

침묵을 깨고 태형이 먼저 입을 열었고 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평화롭던 아침의 교무실에는 선생님들만이 벙 찐 채로 남겨졌다.

 

*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너 토끼잖아.”

그러는 너는. 너 고양이라며!”

호랑이도 고양이거든!!”

지금 그게 말이 되는 변명이라고 생각해?”

 

정국이 짐짓 엄한 척 태형에게 말했고 순간 움츠러들었던 태형은 이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는 너는!! !! !! 토끼!!!

 

나느은! 사정이 있었고!”

사정은 무슨 사정! 나한텐 말을 했어야지. 아니 그보다 너, 정체가 뭐야?!”

 

태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뱀이 왜 토끼 흉내를 내!? 아니, 어떻게 토끼 흉내를 낸 거야?! 태형의 말에 정국은 동그란 눈을 깜박였다. 지금까지도, 태형은 정국에게서 토끼를 느끼고 있었다. 분명 토끼가 맞았다. 19,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이었지만 단 한 번도 본형을 잘못 느낀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형은 S급이었으니까. 제게 본형을 숨길 수 있는 수인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제 눈앞에 있는 이 사랑스럽고 잘생기고 예쁜 생물체는 대체 뭐냔 말이다!

 

결혼은 어차피 스무 살이 넘어야 할 수 있으니까…….”

?! 그럼 결혼할 때까지 숨기려고 했단 말이야?!”

 

지도 그럴 생각이었으면서. 태형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그런 태형에 정국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뭐, 그 전에 말할 수 있으면 말하려고 하긴 했는데. 네가 겁먹고 도망갈까 봐……. 그리고 아버지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고…….

 

아니 일단 다 필요 없고. 너 뱀은 맞아?”

맞을 걸?”

맞을 걸은 또 뭐야.”

일단 제일 비슷한 건 뱀이야.”

그게 무슨 소린데. 너 뭔데?”

 

태형의 말에 잠시 주위를 살피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정국이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각을 느꼈다. 내리누르는 듯 한 압도적인 감각.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나 느낄 수 있는, 태형을 만난 수인들은 태형을 만날 때마다 느꼈을 익숙한 감각이겠지만 태형은 처음 느끼는. 태형은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의 동공이 세로로 좁혀졌다. 태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정국이 제 본형을 드러내는 모습을 쳐다봤다. 정확히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러니까뱀은 맞는 것 같은데그런데 뱀한테이 있었던가……?

 

저거 뭐야?”

 

태형이 간신히 손을 들어 정국의 머리에 길게 솟아난 뿔을 가리켰다. ? 웬 뿔. 눈을 보니 뱀인데 왜 뱀한테 뿔이 달렸지? 뿔이 달린 동물은 사슴이나소나그런 건데. 아니면…….

 

…….”

아니 누가 뿔인 걸 몰라서 물어?!”

…….”

 

정국이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이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차피 보여줄 거 다 보여준 마당에 망설이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정국이 제 볼을 살짝 긁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때문에 중국에 갔었던 건데. 나 전에 마지막으로 나타났던 곳이 중국이라고 해서.”

…….”

…….”

설마 ㅇ…….”

, 맞아.”

 

정국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정국의 등급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 생각해서 설명하지 않았던. 한 세대에 존재했던 경우보다 존재하지 않았던 경우가 훨씬 더 많았던. 몇 천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다는 전설의 등급. 워낙 희귀해 전설의 동물이라 불리는 본형을 타고 태어난 수인에게만 주어지는 그 등급.

 

용이야.”

 

SS급 되시겠다.

 

 

용이란 것이, 워낙 오래 전에 나타났다 사라진 터라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고, 사실 그 기록이 진짜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던 탓에 수인 사회는 용을 인어나 구미호 같은 전설적인 동물로만 여겼다. 전래 동화에나 등장하는 그런 걸로. 하지만 정국이 태어난 해, 정국의 머리 위에 선명하게 솟아난 뿔을 보고 대한민국 수인 협회장(대충 인간 사회의 대통령)은 용이란 것은 사실 실존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제 자신이 S급임에도 불구, 느껴지는 이 감각은 저보다 높은 등급을 가진 수인만이 줄 수 있는 것이었으니.

SS급이란 것은 그냥 상징적인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협회장은 알 수 없었고 다른 나라의 협회장들과도 의논을 할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아무리 수인과 원인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현대사회라지만. 용은 좀 차원이 달랐으니까. 정국의 존재가 세간에 알려지면 원인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도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용의 탄생은 극비에 부쳐졌다. 사회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냥 뱀의 가문에서 아들이 태어난 것으로 하고, 일단 마지막으로 용이 있었다던 중국에 가서 자료를 좀 모아 보자고 극비리에 합의를 끝낸 뱀의 가문과 협회장은 그렇게 정국의 탄생을 비밀에 부쳤다. 그리고 19. 대한민국의 수인 협회장은 SS급의 등장을 알릴 준비를 모두 마쳤고 그에 따라 정국 역시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냥 뜬금없이 사실은 용이 있었습니다!! 개꿀잼몰카! 하고 용의 등장을 알리긴 좀 그러니 정국의 20살 생일에 대대적으로 발표를 하는 것으로 하고, 그 때까지는 제 존재를 밝히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정국에게는 굳이 파충류가 아닌 종으로 변현을 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그리고 정국은 토끼를 택했다. , 토끼라면 그 누가 봐도 용을 떠올릴 수는 없을 테니. 어차피 용을 눈치 채지 못할 의도로 하는 변현이니 무엇이든 상관 없었으리라. 그런데 왜 하필 토끼야? 정국의 정체가 공개되고 난 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태형은 정국에게 물었다. 제 하나뿐인 반려가 토끼가 아닌 용이었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런데 왜 하필 토끼냔 말이다. 용이면, ? . 그럴 듯 한 걸로 바꾸지.

 

?”

아니 그냥. 다른 것도 많잖아. 늑대 같은 거 할 수도 있고.”

 

저 같으면 적어도 A급으로 변현을 했을 것이다. , 어차피 실 등급이 SS인데 재벌이 서민 체험하는 느낌으로다가 토끼를 택했을 수도 있지만, 뜬금이 없어도 너무 뜬금이 없지 않나. 생긴 모습이 뱀이나 늑대보다는 토끼를 닮아서 그런 건가? 태형은 정국의 얼굴을 살피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살짝 튀어나온 이빨이나 땡그란 눈 같은 것이 토끼를 좀 닮은 것도 같,

 

내 뿔 모양,”

……?

토끼 귀 같지 않아?”

?”

그래서 토끼 했어.”

…….

 

아니 전혀. 별로. 차라리 네 얼굴이 토끼를 닮아서 토끼를 했다고 하는 게 더 설득력 있는데. 태형이 그 말을 삼키며 아, 하하. 하고 웃었다. 세상에 그딴 이유로 변현을 하는 수인도 있다니. 제 반려지만, 어쩌면 앞으로의 삶이 조금, 고달플 수도 있겠다고 태형은 그 순간 생각했다.

 

아무튼. 그렇게 교무실에 한바탕 폭풍을 몰고 왔던 전 장관과 현석은 비밀의 대화 끝에 악수를 나누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돈. , 저야말로. SS급과 S급의 결합이라니. 이보다 더 완벽할 수가 있을까. 그것도 의도한 바가 아니라 연애결혼이다. 둘은 무려 서로를 C급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서로를 반려로 맞겠다며 땡깡을 부리지 않았는가.

물론 태형과 정국은 서로에게 뒤통수를 사이좋게 얻어맞은 것이 되었으나 쌍방 과실이니 그냥 퉁 치는 것으로 한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고, 전 장관도 좋고, 현석도 좋고. 태형과 정국은 두말할 것 없이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굳이 이 상황에서 서로를 속인 것을 가지고 감정이 상해 봐야 의미가 없으니까. 게다가 속인 것도 서로가 정체를 알면 상대가 겁먹고 도망갈까봐였다. 원래 동물들의 소유욕이 좀 그렇다.

그렇게 둘이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으로 이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이 이야기의 목표와 주제가 전정국과 김태형이 성대하게 맺어지는 것이었으니까.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지만 목표와 주제를 달성했으니 그런 대로 만족한다. 중요한 것은 전정국와 김태형이 서로를 반려로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 결혼도 하기 전에 서로가 연기에 꽤나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태형과 정국이 알게 모르게 남다른 각오를 다졌다는 것은 우리끼리만 알고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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