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다 울었어요?”

…….”

 

. 나는 아직도 울음의 여운이 남은 코를 훌쩍였다. 전정국은 그런 내 등을 가만가만 토닥이고 있었다. 정신도 못 차리고 한참을 그렇게 주저앉아 울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엉엉 소리까지 내면서. 정작 울고 있던 전정국은 그런 나 때문에 놀라서 그런 건지 이미 예전에 울음을 그치고 나를 달래 주고 있었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걸 카타르시스라고 하나. 꽉 막혀 있던 속이 좀 시원해진 것 같았다. 한참 울고 나니 속은 좀 시원해졌는데

 

…….”

…….”

 

나 왜 울었지. 정신을 차리고 나니 뒤늦게 창피함이 미친 듯이 몰려왔다.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닥만 쳐다봤다. 전정국의 손은 여전히 내 등을 토닥이고 있고,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눈알을 굴렸다. , 어떡하지. 이제 뭐라고 하지. 근데 나 아까 뭐라 그랬더라. 나는 방금 전 상황을 다시 찬찬히 되짚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전정국이 나한테 좋아한다고 했고. 미안하다고 했고. 나도 전정국에게 미안하다고 했고, 그리고 또 전정국한테…….

 

그런데 선배.”

…….”

저 좋아해요?”

 

좋아한다고도했지. 나는 미친 듯이 밀려오는 쪽팔림에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 미치겠다. 좋아한다고 했어. 전정국한테. 그것도 울면서. 나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전정국이 어……. 하고 할 말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까진 좋았는데, 그 말을 울면서 할 필요는 없었잖아. 그것도 그렇게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음으로 잔뜩 얼룩진 내 얼굴이 얼마나 추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 진짜 쪽팔려 죽을 거 같다.

 

태형 선,”

.”

…….”

나 너 좋아해.”

 

, 모르겠다. 어디서 갑자기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는 날 부르는 전정국의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전정국을 똑바로 마주했다. 사실 용기보단 배짱에 가까웠다. 아직 눈가가 빨갈 텐데. 코도. 그렇지만 뭐 어때. 어차피 전정국은 날 좋아하는데. 모르긴 몰라도 이런 내 모습도 좋다고 할 거다. 아닌가. 나는 눈을 깜박였다. 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말갛게 젖어 있는 전정국의 놀란 눈이 나를 향해 있다.

 

다시 말해줘?”

…….”

, , 좋아해.”

…….”

내가, 전정국 너, 좋아한다

잠깐만요.”

 

전정국의 눈이 느리게 감겼다가, 다시 떠지고. 잠깐 천장을 봤다가, 다시 나를 보고. 꿈인지 확인하려는 듯, 전정국은 제 볼을 살짝 잡아 늘린다. 그러곤 중얼거린다. 이거 꿈 아니겠지. 나는 전정국의 현실감각이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린다. 그리고, 전정국의 눈이 다시 나를 본다.

 

…….”

…….”

태형 선배.”

.”

저 이거 녹음해도 돼요?”

…….”

 

무슨 말을 듣게 될까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전정국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언제나 그렇듯 내 예상을 빗나간다. ?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살짝 벌리고 전정국을 쳐다본다. 하지만 전정국은 진지한 얼굴이다. 나는 그 진지한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하, 하고 웃었다. 전정국은 여전히 진지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맘대로 해.”

잠깐만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전정국은 손을 뻗어 제 침대를 더듬는다. 아마 핸드폰을 찾는 것 같다. 뭐야. 진짜로 녹음하려는 건가? 나는 멍하니 그런 전정국을 쳐다본다. , 찾았다. 중얼거린 전정국이 핸드폰을 두드린다. 나는 그런 전정국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을 연다. 근데 정국아,

 

안 그래도 되는데.”

?”

이제부터 네가 듣고 싶을 때마다 해 줄 거니까.”

…….”

 

. 전정국의 핸드폰이 전정국의 손에서 떨어지는 소리다. 나는 그런 멍한 전정국의 얼굴에 웃음이 나온다. 표정 한 번 솔직하네. 쟤는 진짜 거짓말은 못 하고 살겠다. 여태까지 전정국이 나를 좋아하는 게 착각일 거라 우겨 왔던 내 자신이 우스울 정도로, 전정국은 정말 온 몸으로 날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고도.

 

선배…….”

.”

이거 꿈이면 저 진짜 죽어요.”

꿈 아니야.”

선배 태형 선배 맞죠?”

맞아.”

제가 죽은 건 아니겠죠?”

아닐 걸.”

 

결국 웃음이 터졌다. 전정국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지만, 웃음이 나오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전정국이 눈을 깜박인다. 쟨 진짜, . 쟬 어떡하지. 그런데 그런 전정국을 좋아하는 난 어떡하지. 내가 웃자 전정국이 선배 웃는 거 너무 오랜만에 봐요. 하고 멍하니 중얼거린다.

 

그래서 싫어?”

좋아요.”

…….”

지금 딱 죽어도 좋을 만큼.”

 

그제서야 전정국이 웃는다. 전정국은 내 웃는 모습이 오랜만이라고 했지만,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전정국의 웃는 모습을 너무 오랜만에 본다. 내 쓸데없는 고집에 시간을 낭비하느라.

 

그 때였다. 바닥에 떨어진 전정국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전정국의 핸드폰으로 향했다. 화면에 커다랗게 민윤기 선배가 떠올랐다. 그러나 전정국은 제 핸드폰엔 시선도 주지 않고 날 쳐다본다. 결국 보다 못한 내가 입을 열었다.

 

너 전화 와.”

안 받아도 돼요.”

윤기 선배잖아. 받아.”

…….”

윤기 선배 막학기에 종총 예약하느라 바빠 보이더라.”

여보세요.”

 

내 말에 전정국은 결국 조용히 통화 버튼을 누른다. 방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한 덕에 수화기 너머로 윤기 선배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 전정국. 너 지금 집이야?! 집이지??

, 집이에요.”

-너 거기 꼼짝 말고 있, 아니 그러니까, 지금 주연이가 그러는데 태형이가 너 집 주소 받아 갔댔거든? 아마 태형이 너한테 갈 거 같으니까 정신 차리고,

지금 저 이미 태형 선배랑 같이 있어요.”

-?

윤기 선배. 안녕하세요…….”

-…….

 

수화기 너머 윤기 선배는 말이 없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 윤기 선배의 당황한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전해졌다. 당황했을 얼굴이 여기까지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전정국이 입을 연다.

 

선배, 고마워요. 제가 밥 비싼 거 살게요.”

-? 어어,

근데 지금 제가 태형 선배랑 되게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었어서요. 제가 나중에 다시 전화 드릴게요.”

-? , . 그래. 그래야지. , 그래. 끊을게!

 

그 말을 끝으로 정말로 뚝 하고 전화가 끊겼고, 전정국은 얕게 한숨을 내쉰 다음 핸드폰을 엎어 놓는다. 그리고 나를 본다. 나는 괜히 또 어색해진 공기에 허공을 쳐다본다. , 그러니까…….

 

그럼……. 난 이제 가 봐야겠다.”

어디 가요?”

?”

 

집 가야지. 나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다 말고 그대로 멈췄다. 내 말에 전정국이 미간을 좁히고 나를 쳐다본다. 나 지금 뭐잘못 말했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었다. 사과 할 거 다 했고, 할 말 다 했고. 그럼 다끝난 거 아닌가?

 

지금 중요한 대화 하고 있었잖아요.”

?”

 

그거 그냥 윤기 선배 전화 끊으려는 핑계 아니었어? 내가 멍하니 묻자 전정국의 미간이 더욱 좁혀진다. 아니요? 저 아직 할 말 많이 남았는데. 그러더니 엉거주춤 일어나려던 나를 붙잡아 다시 앉힌다. 나는 얼떨결에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정국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꿀꺽, 침을 삼킨다. 설마 그 중요한대화라는 게몸의대화는아니겠?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전정국은 음. 뭐부터 하지. 하고 웃으며 나를 본다. 뭘 뭐부터 해. 나는 눈을 깜박인다. 전정국이 입을 연다. 일단,

 

태형 선배.”

, ?”

저랑 사귀어 주실래요?”

 


*


 

얼굴 좋아 보이네.”

그쵸?”

태형이 너도.”

하하…….”

 

전정국이 웃는다. 옆에서 나도 어색하게 웃는다. 윤기 선배는 그런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얕게 한숨을 내쉰다. 바쁜 거 딱 끝나니까 학교 나오는 거 봐. , 너 솔직히 얘기해. 너 감기몸살 그거 다 꾀병이었지? 윤기 선배의 투덜거림에 전정국은 사람 좋게 웃으며 윤기 선배에게 대답한다.

 

에이, 선배. 제가 비싼 밥 살게요.”

내가 살다 살다 막학기에 종총 예약을 다 해보고.”

술도 살게요.”

.”

 

그제서야 윤기 선배가 씩 웃으며 전정국을 툭 친다. 태형이 너도 와. 전정국 홀랑 벗겨 먹자. 윤기 선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좀걱정했는데. 윤기 선배한테는 다 끝난 것처럼 말해 놓고 이렇게 돼서. 그런데 윤기 선배는 그냥 괜찮은 거지? 하고 물을 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맞다. 전정국. 수업 끝나고 잠깐 나 좀 보자.”

? 왜요?”

왜긴 왜야, 새꺄. 종총 때문에 그러지.”

 

참석할 교수님들 명단이랑 학생 명단 대충 나왔어. 보고 확인해. 그거에 대해서 할 말도 좀 있고. 윤기 선배가 무심하게 말했고, 전정국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슬쩍 전정국의 눈치를 본다. 예전 같았으면 또 오라고 했을 텐데, 이번엔 아무 말이 없다. 하긴, 경영인의 밤에서 그 난리가 났으니 오라고 하는 것도 웃기긴 했다.

 

선배, 왜요?”

? , 아냐.”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전정국이 날 돌아보며 그런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혹시 아직도 미안해하고 있으려나.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전정국의 얼굴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니까, 어제. 혹시나 하고 싶다는 대화가 몸의 대화는 아닐까 했던 그 대화는 정말 말 그대로 대화였다. 그냥, 순수한 Conversation.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고해성사에 가까웠지. 전정국의 사귀어달라는 말에, 나는 당연하지. 하고 대답했고, 전정국은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고맙긴 뭐가 고마워. 내가 더 고마워. 내 말에 전정국은 또 그냥 웃었고.


그러고 나서는 전정국의 사과 타임이 이어졌다. 그런 걸 다 일일이 기억하고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술자리에서 나한테 공개적으로 고백했던 거, 경영인의 밤에 오라고 떼를 썼던 거, 몰랐지만 강선우를 마주하게 했던 거, 그런 것들. 내 안에서는 이미 예전에 다 정리가 끝난 것들이었는데, 전정국은 여태까지 전부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전정국은 계속 미안한 표정이었다. 결국 거듭 사과하는 전정국의 모습에 나는 당황해 화제를 돌린답시고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냐는 질문을 던졌고, 그 다음으로는 전정국의 김태형 짝사랑 일대기가 이어졌다.

 

…….”

 

그런데 그걸 듣고 나니, 내가 더 미안해지는 거다. 이런 애한테 내가 여태까지……. 사과를 해야 할 건 전정국이 아니라 나 같은데. 그 후부터 나한테 사과하던 전정국의 얼굴이 계속해서 밟혔다. 내가 경영인의 밤에 간다고 했을 때 기뻐하던 전정국의 얼굴도. 혹시나 나한테 트라우마 하나를 더 줘버린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을 게 뻔한데.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 그렇지만 전정국은 그 이후로 내 앞에서 그 쪽 관련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고 있었다.

 

선배. 무슨 생각 해요?”

, ?”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정신을 차려 보니 수업은 끝나 있었고 사람들은 짐을 챙기고 있다. , 망했다. 시험기간인데 집중 하나도 못 했어. 옆에서 나란히 수업을 들은 전정국도 짐을 챙긴다. 수업 끝나고도 전정국이랑 도서관 가서 같이 시험 공부하기로 했는데. 이래서야 공부가 되려나 모르겠다. 멍하니 앞을 보고 있자니 전정국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선배, 도서관 먼저 가 있을래요? 저 윤기 선배랑 얘기하고 바로 갈게요.”

 

이거 봐. 이렇게, 내가 학과 행사 관련 얘기를 듣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는 걸 보면, 확실하다. 전정국 지금 분명히 혼자 땅 파고 있다.

 

.”

 

그렇지만, 내가 그런 전정국한테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건물을 나섰다. 전정국은 날 배려한다고 저렇게 내 앞에서 학과 행사의 ㅎ자도 안 꺼내는데, 그런 전정국한테 먼저 갑자기 나 진짜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는 것도 웃기잖아. 이미 그 때 얘기했는데 전정국이 별로 믿는 눈치가 아니기도 했고. , 이런 사소한 걸로도 이렇게 답답한데 전정국은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버텼을까. 다시 전정국한테 미안해진다.

 

…….”

 

여전히 멍한 채로 터덜터덜 도서관으로 걸어가던 참이었다.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생각해보니까. 그냥 내가 이번에 종총 간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눈을 깜박였다. 물론 시끄럽고 사람 많은 걸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정도야 뭐. 저번에 경영인의 밤 때도, 강선우를 마주쳐서 그렇지 그 전까지는 괜찮았고.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지?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나는 바로 뒤를 돌아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막 건물로 들어가려는데, 건물 옆 외진 곳에서 전정국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정국과 윤기 선배의 뒷모습이 보였다. 정국아, 하고 부르려는데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말도 안 돼. 양심이 없대요?”

애초에 양심이 있는 새끼였으면 그 사단이 나지도 않았겠지.”

아무튼 싫어요. 안 돼요.”

그럼 어떡해. 아무것도 모르는 1학년이 한 걸. 이제 와서 오지 말라고 해?”

안될 건 또 뭐예요.”

나라고 좋겠냐? 언제 또 1학년들 환심은 사가지고. 징글징글한 새끼.”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심상찮은 분위기에 나는 살짝 몸을 숨기고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전정국은 화를 내고 있고, 윤기 선배도 좀화난 거 같고.

 

아 몰라요. 종총에 강선우 오면 저 진짜 테이블 엎어요.”

엎어라. 안 말려.”

아 선배!!”

아 그럼 어떡해! 1학년이 나한테 와가지고 얼굴을 붉히면서 선배, 다음 학기에 복학하시는 선우 선배도 오신다는데 괜찮죠?’하는데. 내가 거기다 대고 아니? 그 새끼는 씹새끼라 안 되는데?’ 이러냐?!”

그냥 재학생만 된다고 하면 되잖아요!”

이미 그 전에 다음 학기 복학생 와도 되냐길래 그렇다고 한 이후였다고!”

오라고 해.”

태형 선배,”

 

더 이상 들을 것도 없었다. 내 목소리에 윤기 선배와 전정국의 놀란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나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강선우가 종총 오겠대요? 내가 윤기 선배를 향해 묻자, 윤기 선배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전정국이 대답한다.

 

아니, 못 오게 할 거예요.”

? 오라고 해.”

선배.”

그리고 나도 갈게.”

?”

 

내 말이 의외였는지, 전정국의 눈이 아까보다도 커진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복학하면 보게 될 텐데, 퇴학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라고 해. 나도 갈 거니까.”

아니 선배,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제가 못 오게,”

나 괜찮아.”

김태형.”

뭐 어때요. 어차피 다 지난 일인데. 무서울 것도 없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좀굳이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정말로 무섭지는 않았다. 나는 잘못한 거 없고, 약점 잡힐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태형 선배.”

 

전정국이 있으니까.

 


*


 

세미나를 할 때부터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 무색하게, 강선우는 밤 8시가 넘어가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원래 오지 않으려고 했다던 윤기 선배는 내가 걱정됐는지 내 앞에 든든하게 자리해 주고 있었고, 전정국은 교수님하고 대화를 나누면서도 틈이 날 때마다 내 쪽을 쳐다봤다. 그 때마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웃어 보였고.


술자리가 무르익고, 교수님들도 이제 눈치껏 빠져 주시겠다며 일어나신지 10여분 정도가 지난 참이었다. 순간 찬바람이 실내로 들어오고, 누군가 선우 선배!’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향했다. 내 앞에 앉은 윤기 선배의 시선도, 내 옆에 앉은 전정국의 시선도. 강선우는 제 이름을 부른 1학년 여자애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가게 안을 눈으로 훑는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다. 나를 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듯, 강선우의 눈이 살짝 커진다.

 

선우 선배, 여기 앉으세요!”

, 잠깐만. 저기 내 동기랑 인사 좀 하고.”

 

그냥 조용히 꺼질 것이지, 강선우는 또 예의 그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로 천천히 다가온다. , 진짜 저 얼굴은 언제 봐도 토가 쏠리네. 뭣도 모를 때 잠깐이지만 저런 새끼를 좋아했었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쪽팔리고.

 

또 보네.”

…….”

정국이랑 윤기 선배도 있었네요. 태형이 넌 정국이랑 또 붙어 있네? 둘이 되게 친한가 봐?”

. 그냥 가라.”

 

윤기 선배가 낮게 경고하듯 말했고 나는 손으로 전정국의 허벅지를 지그시 눌렀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었다. 괜히 여기서 일을 크게 만들어 봐야 좋을 게 없

 

여전한 줄 알았더니 그래도 1학년 때보단 발전했나 보네. 정국이가 계속 옆에 붙어있는 거 보면. 얼마나 쫓아다닌 거야?”

 

기는 씨발, 개뿔. 나는 듣다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내 팔에 빈 맥주잔이 테이블 위로 쓰러져 요란한 소리를 냈다. 강선우의 시선이 날 따라 올라온다. 윤기 선배와 전정국의 놀란 시선도. 아니, 맥주잔의 요란한 소리 때문인지 그냥 술집 전체의 시선이 나와 강선우에게로 향해 있었다.

 

뭐 하냐, ?”

, 솔직히 말은 바로 하자. 쫓아다니긴 뭘 쫓아다녀. 내가? 너를?”

.”

 

목소리 크기가 조절이 안 됐다. 아니, 안 했다. 들으라면 들으라지. 비겁하게 다른 테이블에는 들리지 않게 조용히 나에게만 속삭이던 강선우는 살짝 당황한다. 내 목소리에 전정국이 내 뒤에서 나를 따라 일어서는 게 느껴졌다. 강선우의 시선이 잠시 내 뒤에 있는 전정국에게 닿았다가, 다시 나를 향한다. 나는 계속 강선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강선우는 그런 나와 전정국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하, 하고 웃었다.

 

진짜 단단히 꼬셨나 보네. 이번엔 얼마나 따라다녔어? 나한테 한 것보다 더 했어?”

누가 누굴 따라다녀. 내가 태형 선배 좋아서 쫓아다녔는데?”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전정국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정국이 반말 하는 건 처음 본다. 나는 놀라 전정국을 돌아봤다. 전정국이 비스듬히 서 강선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전정국이 저런 얼굴도 할 줄 알았나? 처음 보는 냉기 어린 전정국의 얼굴이 낯설어 나는 눈을 깜박였다.

 

? , 전정국.”

…….”

진짜 어이가 없어서. , 김태형. 쟤한테 뭐라 그랬냐?”

강선우. 그만 하지?”

 

결국 보다 못한 윤기 선배까지 자리에서 일어난다. 순식간에 험악해진 종강총회 공기에 술집 안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시선은 전부 이쪽에 고정된 채로. , 진짜 과 행사 참여할 때마다 매번 이렇게 화제의 중심이 되기도 쉽지 않을 텐데. 그 어려운 걸 내가 또 해내고 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강선우가 말을 잇는다.


뭘 그만 해요, 윤기 선배. 선배도 알잖아요. 김태형이 저 좋다고 따라다닌 거.”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그러는 넌 김태형이 너 스토킹했다고 헛소문 퍼트렸잖아.”

헛소문? , 김태형. 니가 말해봐. 그게 헛소문이었어?”

 

뭐래, 미친 새끼가. 나는 입을 벌리고 강선우를 쳐다봤다. 강선우의 말이 하도 어이가 없어 대답을 못 하고 있으니 그런 나를 당황한 것으로 해석한 건지, 강선우의 표정이 살짝 의기양양해진다.

 

김태형도 찔리는 게 있으니까 말을 못 한 거죠. 아니었음 그 때 아니라고 말했겠지. 선배 잘 알지도,”

찔리는 게 있긴 있었지.”

 

더 이상은 못 들어 주겠어서, 나는 강선우의 말을 잘랐다. 윤기 선배를 향했던 강선우의 눈이 다시 나를 본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진짜, 저런 새끼를…….

 

너 같은 걸 좋아했었다는 게 쪽팔려서 말 못했다.”

?”

스토킹? 스토킹 같은 소리 하네. .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누가 누굴 쫓아다녀. 솔직히 쫓아다닌 건 내가 아니라 너지. 너 내가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 친해지려고 하면 득달같이 쫓아와서 훼방 놨잖아. 난 그래서 니가 디나이얼인 줄 알았지.”

 

알고 보니 그냥 개새끼였지만. 숨도 안 쉬고 말했다. 이제야 좀 속이 시원했다. 이렇게까지 한꺼번에 많이 말해본 게 얼마만이더라.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말에 자리에 앉아 있는 1,2학년들이 술렁인다. 강선우도 그걸 느꼈는지 입술을 깨문다. 그리고 나를 노려본다.

 

야 김태형. 너 지금 증거 없다고 없는 말,”

강선우.”

? 민윤기?”

 

윤기 선배가 강선우에게 뭐라 말을 하려던 그 때였다. 입구 쪽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윤기 선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술집 안 시선이 입구 쪽으로 모였다. 인영 하나가 윤기 선배를 향해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들어오고 있었다.

 

. 너 아직도 졸업 안 했냐? , 뭐야. 선우랑 태형이도 있네?”

석진 형.”

 

윤기 선배가 떨떠름하게 석진 선배를 맞았다. 김석진 선배. 내가 1학년 때 학과 조교였던 선배였는데 대학원 갔다더니, 아직도 학교에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그 때도 마주칠 일은 별로 없었는데 그 때 강선우가 1학년 학회장이었고, 강선우 옆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선배였다. 나는 웃고 있는 선배를 향해 살짝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석진 선배가 환하게 웃는다.

 

, 진짜 오랜만이다. 너희가 지금 몇 학년이지?”

석진 형. 지금…….”

선우랑 태형이는 여전히 잘생겼네! 복학한 거지? 하긴, 나 막학기 때 너희가 1학년 1학기였으니까. 잘 지내? , 시간 진짜 빠르다. 강선우 저 자식이 태형이 뒤꽁무니 쫓아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

 

석진 선배의 말에 안 그래도 조용하던 술집 내의 공기가 다시 얼어붙는다. 그러나 석진 선배는 그런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듯, 가까이 다가오더니 해맑게 웃으며 강선우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내리쳤다.

 

짜식. 군대 갔다 오더니 더 잘생겨졌네. 여전히 태형이랑 친한가 보네? 그래. 친하게 지내라. 이제 군대 갔다 오면 남는 건 동기밖에 없다? 하긴, 너희야 워낙 죽고 못 사는 사이였으니까 걱정할 필요도 없겠네.”

아니, 석진 선,”

, 진짜. 난 진짜 처음에 둘이 사귀는 줄 알았다니까? 강선우가 아주 그냥 볼 때마다 그냥 태형이, 태형이 타령을 해가지고. 내가 다 귀찮았는데. 이제 철 좀 들었냐? 태형아, 저 자식 아직도 그러냐?”

 

강선우가 말릴 새도 없이, 석진 선배가 웃으며 말을 다다다 풀어놨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지윤이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석진 선배의 말에 차마 말대꾸는 못 하고 붉으락푸르락 하고 있는 강선우의 얼굴도. 그러나 석진 선배의 눈치 없음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그런 강선우의 어깨를 팡팡 내려치며 웃고 있었다. 저쯤 되면 좀 대단하긴 하다. 물론 나에겐 고마운 일이었지만. 나는 옆에 서 있는 전정국을 힐끔 쳐다봤다. 전정국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잘 안 되는 듯 살짝 미간을 좁히고 석진 선배와 강선우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근데 분위기 왜 이래? , 나 오기 전에 무슨 일 있었어? 그러고 보니까 너넨 왜 일어서 있냐?”

아니에요, 석진 형. 여긴 웬일이에요.”

, 안 교수님이 가방 놓고 왔다고. 나보고 가져다 놓으래서. 내가 교수님의 작은 도비잖냐.”

 

윤기 선배가 웃음을 참느라 이상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석진 선배에게 말을 건다. 잠시 의아해졌던 석진 선배의 표정이 윤기 선배의 말에 다시 환하게 바뀐다. 윤기 선배가 웃으며 안 교수님이 앉았던 자리에서 가방을 가져온다. 여기요. 윤기 선배가 내미는 가방을 받아들며 석진 선배가 이번엔 윤기 선배의 어깨를 팡팡 두드린다.

 

민윤기, 너도 이제 졸업 좀 해라. 언제까지 학교에 있을 거냐?”

안 그래도 이제 막학기예요. 그런데 그게 선배가 할 소리에요?”

, 이렇게 팩트로 때리기 있냐?”

저 졸업하기 전에 술 한 번 마셔야죠, .”

그래야지. , 난 이제 가봐야겠다. 선우야, 태형아. 남은 학교생활 잘 하고. 군대 갔다 오면 남는 건 진짜 동기밖에 없다니까? 잘 해.”

…….”

, 선배. 들어가세요.”

 

강선우는 대답이 없고, 나는 살짝 웃으며 석진 선배에게 고개를 숙였다. 석진 선배가 이렇게 반가운 날이 올 줄이야. 그제야 강선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 것을 눈치 챈 석진 선배가 살짝 당황한 듯, 웃으며 말을 꺼냈다.

 

나 괜히 오지랖 부린 건가? , 너희가 이해해라. 대학원생 되니까 이런 분위기가 너무 부러워서 그래.”

아니에요, . 잘 왔어요.”

 

진짜로. 윤기 선배가 웃으며 석진 선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나가요. 밖에까지 데려다줄게요. , 너도 나와. 윤기 선배가 석진 선배를 밀며, 강선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니, 선배,”

아직도 팔 쪽이 남았냐? 배려해줄 때 오지?”

 

강선우가 뭐라 말하려던 것 같았는데, 윤기 선배가 서늘하게 웃는 낯으로 강선우의 귀에 대고 낮게 읊조렸다. 석진 선배는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그래, 나 데려다 줘라! 하고 있었고. 결국 강선우와 석진 선배, 윤기 선배는 나란히 가게 밖으로 사라졌고, 가게 안은 폭풍이 휘몰아친 여파로 고요했다. 나는 애매해진 이 상황에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전정국도 나를 따라 앉았다. . 난 대체 대형 사고를 몇 번을 치는 걸까. 그것도 과 사람들 다 모인 곳에서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제 나는 정말 학교 다 다녔다.

 

저 선배 이제 쪽팔려서 어떻게 학교 다녀?”

다음 학기에 복학이라고 하지 않았어? 군대로 도망도 못 가겠네.”

몰라나 같으면 자퇴한다.”

 

아님 차라리 군대를 한 번 더 가든가. 옆 테이블에서, 1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저들 딴에는 나에게 들리지 않게 한다고 하는 것 같은데, 워낙 가게 안이 조용하다보니 너무나 뚜렷하게 들리는 소리에 나는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 학교 다 다닌 건 강선우도 마찬가지인 것 같네. 자꾸 웃음이 비져나왔다.

 


*


 

그렇게 폭풍 같았던 종강 총회가 끝나고, 쓰나미 같았던 기말고사도 끝나고,(왜 재앙에 비유했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다) 대학생의 특권인 기나긴 방학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경영인의 밤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것을 눈여겨 본 교수님의 추천으로 대학 축제 준비 위원회에 특별히 스카우트된 누구 덕분에 방학을 한 보람도 없이 매일같이 학교에 출석 도장을 찍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내가 올 필요는 없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다만,

 

선배가 너무 보고 싶어서 일이 안 돼요!!”

 

저 철없는 전정국의 애인일 뿐.

 

태형 선배, 오셨어요.”

. 수고가 많다.”

 

아니에요수고는요……. 같은 연유로, 전정국과 같이 스카우트 되어 전정국과 한 팀으로 일하고 있는 과 회장 소리가 퀭한 얼굴로 날 맞이한다. 나는 그런 소리를 위해 사 온 밀크티를 내밀었고 소리는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들며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긴다. 모르긴 몰라도, 힘든가 보다. 나는 책상에 엎어져 날 쳐다보고 있는 전정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 맞다. 너희 엘티 언제 간다고 그랬지?”

, 26,27,28이요.”

선배, 저 그동안 선배 못 봐서 어떡해요.”

 

책상에 엎어져 날 쳐다보고 있는 전정국 대신, 소리가 달력을 뒤적이며 대답했고, 전정국이 울상을 지으며 중얼거린다. 나는 그런 전정국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는다. . 그럼 같이 못 가겠네. 내 혼잣말에 전정국이 반짝 일어난다. 뭘 같이 못 가요?!

 

? 아니, 별 건 아니고. 석진 선배랑 윤기 선배랑 술 마시기로 했거든. 너 올 수 있으면 오라고 하려고 했지.”

때 그 선배요?”

. 그런데 27일이라서. 안되겠네.”

나 빼고 술…….”

 

그것도 윤기 선배랑 그, 잘생긴 선배랑……. 전정국이 중얼거린다. 나는 아차 싶어 전정국을 본다. 괜히 말했나. 안 되는 거 알면 그냥 말하지 말 걸. 안 그래도 전에 전정국이 한 번, 석진 선배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땐 그냥 아는 선배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는데. 문제는 그 후에도 어쩌다 윤기 선배와의 대화 도중에 석진 선배의 얘기가 나오기라도 하면 전정국이 급 귀를 기울인다는 거에 있었다.


아마도 전정국은 제가 알지 못하는 내 과거가 굉장히 궁금한 것 같았다. 차마 나한테는 못 물어보겠고, 윤기 선배한테 물어보자니 뒤를 캐는 거 같고, 그런 거겠지. 그렇다고 내가 내 입으로 구구절절 얘기를 해 주자니 그것도 이상해서. 그래서 석진 선배랑 윤기 선배가 있는 술자리에 데리고 가려고 했던 거였다. 아마 석진 선배가 자연스럽게 내 과거에 대해서 말해줄 것 같아서. 그리고 그걸 전정국도 아는지, 전정국이 소리를 돌아본다.

 

“소리, 나 엘티…….”

개소리 하지 마.”

 

그러나 전정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리가 전정국의 말을 끊는다. 전정국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그런 전정국을 보다 못한 소리가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 나와 전정국을 쳐다본다. 선배, 진짜 고생이 많아요. 소리가 나에게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는다. 그런 나와 전정국을 번갈아 쳐다보던 소리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 너 나갔다 와.”

?”

선배랑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고.”

? 아냐. 그래도 내가 어떻게,”

나가랄 때 나가.”

 

그리고 다 충전된 다음에 와. 최소 3시간 이상. 알겠어? 소리가 웃는 낯으로, 하지만 이를 악물고. 전정국에게 말한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스트레스가 상당한 모양이었다.

 


*


 

선배 진짜 어려워요.”

?”

 

내가 멍청하게 반문했다. 전정국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진다. 막상 나오긴 했지만 갈 곳은 없고. 그래서 그냥 주변에 있는 카페에 와서 앉아 있는 중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 얼음이 녹아 컵 주변에 물방울이 맺혔다. 축축해. 내 조용한 혼잣말을 들었는지 전정국이 휴지를 내민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야? 뭐가 어려워? 휴지로 물방울을 닦으며 전정국을 쳐다보니 전정국이 한숨을 내쉰다.

 

맨날 봐도 모르겠어요.”

…….”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

진짜.”

 

뭐야,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 혼자만 되게, 초조한 거 같아요. 전정국이 조용히 투덜거렸다. 그런 거 아닌데.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전정국을 쳐다봤다. 왜 또 이러실까. 나는 멍하니 오늘 있었던 일을 되짚어 본다. 별로 이상할 거 없었. 설마. 석진 선배랑 윤기 선배랑 술 약속 잡은 거 때문에 그러나. 나는 전정국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전정국이 그런 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린다. 돌려진 얼굴의 귀 끝이 빨갛다. 그런 전정국의 모습이 귀여워 보인다면 나도 콩깍지가 심각하게 낀 걸까. 나는 피식 웃었다. 내 웃음소리에 전정국의 눈이 다시 나를 향한다.

 

그래도 좋아요.”

…….”

그러니까 선배도,”

.”

나 더 많이 좋아해 줘야 돼요.”

 

알겠죠? 제가 말하고도 부끄러운지 전정국이 손을 올려 제 얼굴을 감싼다. 이미 많이 좋아하고 있는 거 같은데. 내가 중얼거리자 전정국이 손을 내리고 나를 쳐다본다. 빨개진 얼굴에, 눈이 동그래졌고, 입은 약간 벌어져 있다. , 이상한 표정. 내가 웃으며 말하자 전정국이 아, 선배 진짜. 하고 다시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그런 전정국을 쳐다봤다. 어떻게 저렇게 표정에 다 드러나지. 내가 계속 아무 말 없이 웃으며 전정국을 쳐다보고 있으니 전정국이 빼꼼 손가락 사이로 나를 쳐다본다. 그러더니 입술을 빼죽 내민다.

 

아직 멀었어요.”

…….”

나가요. 뭐 먹고 싶어요?”

 

심장이 간질거린다. 분명히 에어컨을 틀어 시원하다 못해 추운 카페 안인데. 왜 이렇게 얼굴이 뜨거운 거야. 일어서면서 주위를 살폈다. 애초에 사람이 별로 없던 카페 안은 각자 자신들의 할 일로 분주했다. 그러니까, 우리 쪽에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정국아.”

?”

 

조용히 손을 뻗어 전정국의 팔을 잡았다. 전정국의 움직임이 순간 멎고, 전정국의 눈이 나를 향한다. 나는 전정국을 마주 본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연다. 물어보고 싶은 거 있으면 물어 봐. 다 대답해 줄게. 내 말에, 전정국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그리고, 그런 전정국을 보며 나는 말을 잇는다.

 

그리고 이건,”

 

나는 손을 내려 전정국의 손을 잡고, 살짝 깍지를 낀다. 애정 표현. 내가 조용히 말하며 씩 웃자 전정국이 나머지 한 쪽 손을 올려 얼굴을 감싼다.

 

죽겠다 진짜…….”

? 방금 뭐라고 했어?”

 

됐어요. 나가자. 전정국이 깍지 낀 내 손을 조금 더 꽉 쥔다전정국의 손은 뜨겁고, 내 심장은 기분 좋게 뛰고. 나는 눈을 감았다. 여름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사족

' > 오해와 연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해와 연애 05  (0) 2018.02.23
오해와 연애 04  (3) 2018.02.17
오해와 연애 03  (3) 2018.02.14
오해와 연애 02  (1) 2018.02.09
오해와 연애 01  (1) 2018.02.08


<가능하다면 BGM을 꼭 틀고 봐주세요..! 연속재생 태그를 걸어놓았으나 잘 안 되는 것 같아요..ㅠ

BGM☜ 요기를 눌러 연속재생 체크하고 봐주시면 감사..♡>



 

 

05

 

어떻게 주말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머리맡에 놓아둔 핸드폰을 확인했다. 울다가, 잠들었다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한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부재중 전화 5, 읽지 않은 메시지 15. 그러나 그 중에 전정국의 이름은 없다. 나는 핸드폰을 엎어 놓았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 몇 시야.”

 

그렇게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나, 집에 와서 주저앉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 강선우를 만나서? 전정국이 나를 배신해서? 아니면, 전정국이, 정말로 나를 좋아했던 게 아니어서?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심장이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왜 전화 안 해.”

 

나는 침대 한켠에 조용히 엎어져 있는 핸드폰을 멍하니 쳐다봤다. 미동도 하지 않는 핸드폰이 원망스러웠다. 나한테 처음으로 고백했을 때는 그렇게 전화를 해대더니, 막상 전화가 오기를 바라고 있을 땐 연락 한 통 없다. 정말, 진짜로 그냥 나를 놀리려고 그랬던 건가. 정말로 강선우가 나에 대해서 했던 말을 듣고 호기심이 생겨서. 정말 그것뿐이었던 걸까.

 

선배를 좋아하는 건 진심이에요.’

저 진짜 선배 좋아해요.’

 

전정국을 마주했던 그 많은 시간들 동안 나에게 좋아한다고 했던 그 말들이 전부 거짓일 수가 있을까. 나를 쳐다보던 전정국의 눈도. 강선우에게 그런 말을 듣고, 혼란스럽고 무서워서 전정국에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정말로 전정국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너무 무서워서. 만약에라도 전정국의 입을 통해 그런 말을 듣게 되면 정말로. 정말로 죽고 싶을 것 같아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왜 전화 안 해, 전정국. 연락해.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그냥, 그런 거 아니라고. 다 내 오해일 뿐이고 강선우랑은 친하지도 않다고…….

 

…….”

 

여기까지 생각하다 내 자신이 비참해 웃음이 나왔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전정국을 좋아하게 됐을까. 내 자신이 우스웠다. 그렇게 다시는 안 좋아할 거라고 다짐했으면서. 그렇게 밀어냈으면서.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다 오해였다고 전정국이 말해주길 바라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불쌍했다.

시간이 지나고, 북받쳤던 감정이 잦아들고. 불도 켜지 않아 깜깜한 방 안에 혼자 앉아 차가워진 머리로 천천히 생각을 했다. 전정국과 나.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과 앞으로 있을 일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잘 된 거 아닐까.

전정국이 나를 진짜로 좋아했던 거든 아니든. 내가 전정국을 좋아하든, 아니든. 세상에 영원한 건 없고 상처받지 않는 관계란 없다. 나는 상처가 무서웠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돼서 느끼게 될 행복한 감정보다, 그 마음이 커졌을 때 내가 감당해야 할 감정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졌으니까. 그러니까…….

 

…….”

 

그냥 이대로, 끝내는 게 최선의 결과 아닐까. 나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전정국이 날 정말로 좋아했던 거라고 치자. 강선우와의 일도, 전부 내가 오해한 것뿐이라고. 그런데, 그러면 그 다음은? 그 다음엔 뭐가 있을까. 나는 배배 꼬인 인간이고 상처받길 무서워하는 인간이다. 그건 변하지 않겠지. 그럼 전정국은? 전정국은 빛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고, 반짝거리는 사람이고,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을 만큼 밝은 사람이다. 상처받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겠지. 이런 날 이해할 수없을 거다. 결국 전정국은 그런 나한테 지쳐가겠지.

 

선배, 진짜 많이 좋아해요.’

 

전정국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내 귓가에 울렸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전정국의 목소리에 내 심장은 두근거렸다. 아직 전정국은 나에게 좋은 기억인가 보다. 나는 픽 웃었다. 그래. 차라리 잘 됐다. 이렇게 마무리하자. 전정국은 정말로 나를 좋아했던 거라고. 그게 걔의 착각이었어도, 나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던 그 수많은 순간들 중에 한번쯤은 진심인 순간이 있지 않았을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좋은 기억은 좋은 기억만으로 남겨두는 게 좋으니까.

 

기나긴 생각에 마침표가 찍힌다. 나는 멍하니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동이 터 오고 있었다.

 

*

 

…….”

 

내 기분이 어떻든, 몸 상태가 어떻든, 학교는 가야 했다. 대학생의 비애였다. 이미 월요일 수업을 빠져버리긴 했지만, 더 이상 빠질 수는 없었으니까. 경영인의 밤 행사가 끝났다는 건 기말고사가 가까워졌다는 뜻이기도 했고. 나는 여전히 멍한 정신을 붙잡고 학교 갈 준비를 마친 뒤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서고 문이 닫히는데, , 하고 낯선 소리가 났다. 문에 무언가 부딪혀 나는 소리였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내 가방이 문고리에 걸려 매달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때 술집에 가방을 놓고 나왔었구나. 정신이 없어서 여태 몰랐다.

 

…….”

 

익숙한 내 가방에, 익숙하지 않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나는 멍하니 멈춰 서 포스트잇을 쳐다봤다. 낯선 듯 익숙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눈가가 시렸다.

 

<선배, 미안해요. 선배한테 뭐라고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선우 선배 일은 죄송해요. 선우 선배를 부른 건 맞는데, 정말 몰랐어요. 선배가 생각하는 것처럼 선배를 놀리려고 그랬던 거 아니에요. 그래도 죄송해요.

 

선배, 내 얼굴 보기 불편해서 학교 안 나오는 거면 제가 수업 안 나갈게요. 정말 죄송해요.>

 

작은 포스트잇 하나에 빽빽하게,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쓴 것 같은 글씨는 누가 쓴 것인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나는 가만히 멈춰 서서 길지도 않은 그 내용을 읽고, 또 읽었다. 눈앞에 나타나지 말랬다고 이렇게 포스트잇으로 써서 붙여 놓은 건가. 고개를 드니 현관문 앞에 나란히 놓여 있는 우유가 눈에 들어왔다. 초코 우유, 딸기 우유. 우유 같은 걸 신청한 기억은 없으니까 아마 저것도전정국이 갖다 놓은 거겠지. 걔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저걸 갖다 놓은 걸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눈가를 비볐다. 눈가가 따끔거렸다. 심장이 쿡쿡 아팠다.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고, 포스트잇을 구겼다. 그리고 가방을 들어 자취방 안에 가져다 놓았다. 우유는 그냥 놔뒀다. 이걸로 됐다. 전정국을 좋은 기억으로 남겨둘 수 있으니까, 더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김태형.”

 

강의실에 도착하니 윤기 선배가 날 맞았다.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저런 윤기 선배의 얼굴은 처음 본다. 나는 살짝 웃어 보였다. 그러나 윤기 선배의 얼굴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너 괜찮아? 윤기 선배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괜찮았다. 달라질 건 없었으니까. 내 반응에 윤기 선배가 입을 다문다. 여전히 표정은 그대로인 채로.

 

저 진짜 괜찮아요. 다 지난 일인데요 뭐.”

내가 주제넘은 건 아는데, 네가 오해하고 있는 거 같아서. 전정국은

몰랐다고요?”

…….”

알아요. 걔가 그럴 애가 아니란 거.”

 

오히려 너무 착해서 탈이지. 내 앞에 나타나지 말랬다고 내가 오해하고 있는 거 뻔히 알면서도 내가 기분 나쁠까 봐 직접 말하지도 못하고. 윤기 선배가 날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끝났어요.”

태형아.”

윤기 선배.”

…….”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근데 저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요.”

 

거짓말이다. 아직도 입 안은 모래를 씹은 것처럼 버석거렸고, 심장 한 켠은 물에 젖은 듯 무거웠으니까. 하지만 괜찮아 질 거니까. 곧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될 거니까.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이렇게 나 걱정해주는 윤기 선배도 있고. 이제 강선우가 무섭지도 않다. 어쨌든, 어떤 식으로든. 그때보단 나았다. 이건 정말이었다.

 

좀 있음 수업 시작할 거 같은데.”

그래.”

 

윤기 선배는 뭐라 더 말을 하고 싶은 듯 머뭇거렸지만 나는 웃으며 말을 잘랐다. 윤기 선배가 내 말에 나를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뒤이어 교수님이 들어오셨고,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하루가 시작됐다.

 

*

 

이번 시험 범위에 이 프린트도 들어가니까, 잃어버리지 말고 잘 챙기세요. 다시 안 나눠줄 거니까.”

 

, 시험범위 또 늘었어. 뒷자리에 앉은 여자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나는 멍하니 나도 모르게 두 장을 챙겨버린 프린트를 쳐다봤다.

그 날로부터 일주일 정도가 흘렀고, 학교는 시험기간에 접어들었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고, 과제를 하고. 모든 게 그 전과 똑같았다. 매일같이 내 옆을 지키던 전정국이 없다는 것만 빼면.

가끔 윤기 선배와 같이 밥을 먹었다. 윤기 선배는 나와 밥을 먹을 때마다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그때마다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전정국 얘기일 게 뻔했으니까. 전정국은 일주일째 학교를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니면 그 쪽지에 쓰여 있던 대로 나랑 같이 듣는 수업만 나오지 않는 건가. 사실 좀 궁금하긴 했는데, 묻진 않았다. 한 번 묻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물어보게 될 거 같아서.

시험 기간은 가까워 오는데, 전정국은 여전히 수업에 나타나지 않는다. 혹시 내 눈에 띄지 않게 오는 건가 싶어 한 번은 맨 뒷자리에 앉아 들어오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눈여겨봤지만 전정국은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전공이야 같이 듣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필기를 구할 수 있다 쳐도, 교양은 내가 알기로 이 수업 내에 전정국이 아는 사람은 나뿐인데. 이래도 괜찮은 건가. 조금 양심에 찔렸다.

 

…….”

 

그래서 나는 지금 경영학과 과방 문 앞에 서 있었다. 손에는 교양 프린트를 들고. 그래. 이 정도야. 그냥 교양을 같이 듣는 과 선배로서 해 줄 수 있는 거지. 끊임없이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직접 전해줄 용기는 없고, 좀 죄송하긴 하지만 윤기 선배더러 전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윤기 선배가 내 전화를 받지 않았고, 수업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민망함을 무릅쓰고 저번에 한 번 말을 텄던 이후로 인사 정도는 하고 지내는 후배에게 윤기 선배의 행방을 물었더니 , 윤기 선배 요즘 종총 준비한다고 바쁘셔가지고. 지금 아마 과방에 계실 거예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종총? 갑자기 웬 종총. 윤기 선배는 학생회 아닐 텐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맙다고 말한 후 지금, 경영학과 과방 앞에 서 있는 거였다.

 

…….”

 

진짜 오랜만이네. 1학년 때는 매일같이 드나들었었는데. 한 때는 익숙했던, 문 앞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경영학과 팻말이 낯설었다. 1학년 때 휴학한 이후로,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칠까 싶어 근처에도 가지 않았었는데. 결국 전정국 때문에 오게 되네. 이 상황이 우스워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 태형아.”

…….”

 

심호흡을 하고, 마악 문을 두드리려던 그 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익숙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박주연. 내 동기였다. 역시나 1학년 때 이후로 마주친 적 없는. 주연이가 당황한 듯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나는 한 박자 늦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 ……. 너는?”

 

그 침묵을 깨고, 주연이가 먼저 말을 걸었고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나야 뭐, 똑같지. 주연이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웃어 보였다. 하하. 그 말을 끝으로 또 어색한 침묵. 잠시 할 말을 찾는 듯 눈을 굴리던 주연이가 입을 열었다.

 

과방 들어가게? 비밀번호 알려줄까? 이미 아나?”

, 아니. 안에 윤기 선배 있어?”

 

주연이의 말에 그제야 내가 과방에 온 이유가 떠올랐다. 나는 할 말이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내 손에 쥐여진 프린트를 흔들었다. 지윤이가 윤기 선배 과방에 있을 거라고 그러던데. 그러나 내 말에 주연이는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윤기 선배 지금 여기 없어. 아마 종총 장소 예약하러 갔을 걸.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윤기 선배가 종총을 예약하러 가? 선배 학생회 아니지 않아?

 

, 원래 정국이가 해야 하는데 걔가 지금,”

……?”

, 진짜 태형이 너 정국이랑 친하지!?”

 

내 질문에 대답하던 주연이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반색을 한다. 나는 어? 하고 반문했지만 주연이의 눈빛은 이미 반짝반짝해져 있었다. 잘 됐다! 나는 주연이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 뭐가 잘 돼?

 

이거 좀 정국이한테 전해 주라.”

??”

아니, 너도 이미 알겠지만 걔가 지금 몸살감기라 집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거든. 근데 걔가 2학년 학회장이잖아. 걔가 영수증 확인하고 싸인해야 되는데.”

 

그래서 직접 갖다 줘야 되는데, 지금 교수님이 나 부르셔가지고. 말을 이으며, 주연이가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오랜만에 봐 놓고 이런 부탁해서 미안한데, 나 한 번만 도와주라. 주연이의 간절해 보이는 표정에 나는 당황해 뒷걸음질 쳤다. , 아니, 나 지금…….

 

, 혹시 바쁜가?”

…….”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괜히 부탁해서 미안. 정국이한텐 내일 가지 뭐.”

 

주연이가 어색하게 웃는다. 나는 멍청하게 아, 하고 주연이를 쳐다봤다. ‘걔가 지금 몸살감기라 집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거든.’ 주연이의 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몸살감기? 전정국이? 그래서 수업에 안 나왔던 건가? 나는 멍하니 멈춰 서 허공을 쳐다봤다. 주연이가 그런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어. 나중에 또 보자, 하고 인사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주연이가 발걸음을 옮긴다. 나는 입술을 깨문다. 그리고,

 

내가 전해줄게.”

?”

정국이 집 주소 뭔데?”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

 

…….”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거지. 나는 멍하니 굳게 닫힌 문을 쳐다봤다. 긴장감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저절로 손이 쥐어졌다. 이 안에 지금 전정국이 있다. 나는 천천히 손을 올려 심장에 갖다 댔다. 진정이 되질 않았다. 왜 이렇게 심장이 뛰지.

 

…….”

 

여전히 심장은 두근거리고, 손은 살짝 떨리고. 나는 숨을 들이쉬고, 눈을 꼭 감은 채 문을 두드렸다. 지어진 지 오래 된 낡은 아파트에는 인터폰이 없었다. 다행이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인터폰으로 전정국이 밖에 서 있는 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면 나는 전정국이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도망쳤을지도 모르니까.

 

…….”

 

그러나 굳게 닫힌 문은 미동도 없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뭐지? 집에 있을 거라고 그랬는데. 나는 다시 한 번 주연이가 카톡으로 보내준 주소를 확인했다. 여기 맞는데.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살짝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굳게 닫혀 있던 것이 무색하게, 문은 쉽게 열렸다. 뭐야. 얘 문도 안 잠가 놓고 사나. 나는 얼떨떨하게 한 걸음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심장은 여전히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신발을 벗었다. 집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고, 전정국의 몸에서 나던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편안하고, 기분 좋은 향. 전정국 자취방은 맞는 거 같은데.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한 걸음 더 방 안으로 들어섰다.

 

…….”

 

. 나는 조그맣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찾을 것도 없이, 현관에서 들어와 조금 몸을 틀자 곧바로 전정국이 시야 안에 들어왔다.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현실감이 없었다. 나는 홀린 듯 천천히 전정국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

 

더 빨리 뛸 수는 없을 것 같았는데, 심장이 아까보다도 빨리 뛰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누워 잠들어 있는 전정국을 쳐다봤다. 감기몸살이라더니, 꽤 많이 아팠던 듯 조금 야윈 얼굴에는 식은땀이 살짝 맺혀 있었다. 잠든 전정국이 조금 불규칙하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색색거리는 전정국의 숨소리만이 방 안에 가득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전정국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윤기 선배?”

 

전정국의 머리카락이 내 손 안에서 부드럽게 흐트러졌다. 여태까지 밖에 있다 온 터라 내 손은 꽤 차가웠는데, 그런 내 손에도 전정국의 이마는 뜨끈뜨끈했다. 일주일 내내 아팠던 건가. 근데 왜 아직도 이렇게 열이 남아 있어. 가만히 손을 올리고 있었더니 그런 내 기척에 잠이 깬 듯, 전정국이 몸을 뒤척였다. 그러고는 눈도 뜨지 못하고 윤기 선배냐 묻는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전정국을 쳐다봤다. 내가 대답이 없자 전정국이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

…….”

꿈인가…….”

 

한동안 나를 멍하니 쳐다보더니,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로 전정국이 조용히 중얼거린다. 나는 그때까지도 숨도 쉬지 못하고 말없이 전정국을 쳐다보고 있었다. 전정국은 멍하니 나를 보다가, 눈을 깜박이고, 살짝 고개를 돌리고 얕게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는다. 나는 그제야 하, 하고 숨을 뱉었다. 잠에서 깬 거 같긴 한데, 전정국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잠깐 전정국을 쳐다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꿈 아니거든.”

태형 선배?!”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전정국이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평소에도 크다고 생각했던 눈인데, 지금 전정국의 눈은 내가 여태까지 본 것 중에 가장 커져 있었다. , , 태형 선배, 여긴 어떻게……. 여전히 놀란 눈으로, 전정국이 말을 더듬는다. 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전정국은 나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제 얼굴에 손을 갖다 댔다가 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더니 침대에서 일어서려 했다. 나는 그런 전정국을 제지했다.

 

그냥 있어.”

, 아니, 태형 선배. 여긴 어떻게, 아니…….”

 

전정국이 당황한다. 잔뜩 잠긴 전정국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걸 자기 자신도 느꼈는지 전정국은 큼, 하고 목을 가다듬는다. 선배가 올 줄 몰랐청소도 못 했는데. 아니, 이게 아니고. 당황한 전정국의 말이 뚝뚝 끊긴다. 나는 전정국의 말에 전정국의 자취방을 눈으로 훑었다. 깨끗한데.

 

내 방보다 깨끗하니까 괜찮아.”

선배한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단 말이에요…….”

 

전정국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전정국은 아직 어딘가 멍해 보였다. 나는 그런 전정국이 귀여워 피식 웃었다. 그러나 전정국은 그런 내 표정을 보지 못 한 모양인지, 여전히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전정국은 지금 머릿속이 새하얘진 듯했다. 내가 그냥 있으라니까 어정쩡하게 앉아 있긴 하지만, 계속해서 방을 살피고 제 몸을 가다듬는다. 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전정국은 나를 쳐다본다.

 

이거 전해 주러 왔어.”

…….”

시험 범위에 들어간대. 그리고 이건 주연이가 전해달라고 해서.”

 

나는 차분히 가방에서 전정국에게 전해 줘야 할 것들을 꺼냈다. 전정국이 멍하니 내가 건네는 종이들을 받아들며 나와 종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정국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 사실에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목소리가 떨려 나온 거 같은데. 전정국이 눈치 챘을까? 나는 슬쩍 전정국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전정국은 여전히 넋이 나간 듯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 그러니까…….

 

몸조리 잘 하고.”

…….”

그럼 나는 이만 가 볼,”

태형 선배.”

?”

 

전해줄 것도 다 전해 줬고. 할 말도 없고. 나는 눈치를 보다 슬쩍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여기 있을 명분이 없으니까. 여전히 침대에 앉아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전정국을 보며, 자연스러운 인사말을 건네고.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잔뜩 가라앉은 전정국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전정국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

…….”

싫어하지 않으면 안 돼요?”

 

숨이 멎었다. 나는 전정국을 쳐다봤다. 전정국의 눈이 날 향하고 있었다. 심장이 귀에 달린 것처럼 심장 박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런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전정국이 천천히 말을 잇는다.

 

선배한테 진짜 미안하고, 내가 너무 한심하고. 그래도 선배한테 사과해야 하는데, 그런데 선배가 저 보기 싫을 것 같아서. 그래서 선배 앞에 안 나타나려고 했는데. 내가 선배라도 내가 미울 거 같아서. 그런데 못 보니까 죽을 거 같아서…….”

 

낮은 목소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길 반복한다. 전정국이 고개를 떨어트린다. 전정국의 목소리가 떨려 나오고 있었다.

 

누워 있는 내내 선배 생각밖에 안 났어요. 선배가 나 미워할 거 아는데, 싫어할 거 아는데. 그래서 계속 선배 생각 안 하려고, 이제 선배 눈에 안 띄려고. 선배한테 더 이상 부담 주기 싫어서. 포기하려고 계속 노력했는데,”

…….”

그게 안 돼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전정국이 고개 숙인 이불 위로, 물방울이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지금…….

 

아무것도 안 바랄게요. 그냥 선배 옆에만 있을게요. 저 지금도 너무 무서운데, 선배 못 볼까 봐. 선배가 나 싫어할까 봐. 이게 마지막일까 봐 진짜 너무 무서워서 숨이 막히는데,”

…….”

선배가 너무 좋아요…….”

 

전정국이 고개를 든다. 전정국의 시선과, 내 시선이 맞닿는다. 나는 숨을 삼켰다. 전정국의 눈이 느리게 깜박여진다. 전정국이 운다. 내 앞에서. 아파서 잔뜩 잠긴 목소리를 하고.

 

처음 본 순간부터,”

…….”

친구로, 선배로. 그렇게만 본 적 없어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갖고 싶다는 생각밖에 못 했어요. 이것도 미안해요, 선배. 그런데 지금 제가 하는 말들, 다 진심이에요…….”

 

두서없이 이어지는 전정국의 고백에도 한 가지 확실하게, 아니 확실하다 못해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것은 있었다.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 전정국이, 나를, 김태형을 좋아한다는 것.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내가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아무 말 없이 그런 전정국을 지켜보고 있는 것뿐이었다. 아무 생각도 안 들었으니까. 머릿속이 새하얬다.

 

선배,”

…….”

나 싫어하지 마요…….”

 

전정국이 나를 올려다본다. 눈에는 잔뜩 눈물방울을 달고서. 현실감이 없었다.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내가 아닐까.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여태까지 뭘 한 걸까. 전정국이 운다. 자길 미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나는 여태까지 전정국한테 무슨 짓을 한 걸까.

 

미안해요, 선배.”

…….”

그런데 선배를 안 좋아하는 게 안 돼요…….”

 

말을 마치고, 전정국이 다시 고개를 숙인다. 숨이 가쁜 듯, 불규칙하게 숨을 몰아쉬면서. 나는 멍하니 그런 전정국을 내려다봤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나 같은 게 뭐가 좋다고.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착각하고 있는 건, 전정국이 아니었다.

 

…….”

 

나였다.

 

선배?”

 

아니, 착각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알고 있으면서 그랬다. 전정국은 날 좋아한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 전정국을 밀어냈다. 무서워서. 내가 받게 될 상처가 무서워서. 내가 상처받기 싫어서, 전정국한테 상처를 줬다. 넌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부정하고 무시하면서. 숨이 들썩였다. 눈가가 시렸다.

 

울어요?”

…….”

 

꾹 참고, 무시하고, 눌러 숨겨왔던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전정국의 눈이 놀람으로 커진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가가 시렸다. 눈물이 내 볼을 타고 계속 흘러내렸다. 나는 소리 내어 엉엉 운다. 전정국이 당황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여태까지 뭘 한 걸까, 나는.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선배. 미안해요. 울지 마요…….”

…….”

 

흐어어엉. 이제 나는 아예 목을 놓아 울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상처받은 건 전정국인데. 뭐가 그렇게 무서웠을까, 나는. 영원하지 않으면 어때서. 상처 좀 받으면 어때서. 날 이렇게나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는데. 날 좋아한다고, 이렇게나 많이 얘기해 주는 사람이 있는데. 전정국이 당황해 나에게 다가온다.

 

태형 선배…….”

 

서투르게 나를 안는 온기. 내 등을 토닥이는 손. 따뜻한 체온. 불규칙한 심박. 익숙한 향기.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

 

미안해…….”

? 선배가 뭐가 미안해요. 제가,”

정국아.”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울어서 엉망이 된 호흡에 숨이 불규칙하게 튀어나왔다. 여전히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해야 할 말이 있었다. 해줘야 할 말이 있었다. 내 목소리에 나를 안고 달래던 전정국이 살짝 몸을 떼어내 나를 쳐다본다. 눈물 때문에 번져 흐릿한 눈가에 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다. 전정국이 조금 더 또렷하게 보였다. 전정국의 눈동자가 가까웠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래, 인정하자. 사람들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준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그토록 밀어내고 부정하고 무시해도 나를 올곧이 바라보며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이 사람을. 어느새 정신 차려 보니 내 모든 것을 쥐고 흔들고 가득 채운 이 사람을.

 

너 좋아해.”



나는 전정국을 좋아한다.

 



+

사족


' > 오해와 연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해와 연애 06 完  (5) 2018.03.02
오해와 연애 04  (3) 2018.02.17
오해와 연애 03  (3) 2018.02.14
오해와 연애 02  (1) 2018.02.09
오해와 연애 01  (1) 2018.02.08




04

정국 번외

 

첫눈에 반한다는 건 영화 속에서나 있는 말인 줄 알았는데주위 사물이 그 사람만 빼고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는 말도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그 사람만 보였다다른 사람은 꼭블러 처리가 된 것처럼 뿌옇게나는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주위에서 반갑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꼭 벽 하나에 가로막힌 것처럼 멀리서 들렸다심장이 두근거렸다.


술김에 군대를 신청해 버린 탓에 1학년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군대를 가야 했다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의문이지만 술이 깨고 난 후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짓이었고그 덕분에제대하고 나면 같이 지낼 친구 하나 제대로 만들어 두지 못했다지금쯤이면 동기들은 아직 군대에 있을 거고그나마 여자 동기들이 좀 남아 있으려나사실 걱정이 되진 않았다어떻게든 되겠지살면서 인간관계 때문에 애를 먹었던 기억은 없다그리고 내 예상은내가 강의실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들어맞았다내가 얼굴을 아는 사람도모르는 사람도 나에게 다가와 친근하게 말을 걸었으니까그런데 강의실의 전부가 나를 향해 호의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와중에그런 강의실의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듯 혼자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처음에는그래서 눈이 갔다.

 

…….”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나는 헛바람을 삼켰다나 때문에 소란스러워진 강의실이 불편했던 듯그 남자는 살짝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봤다그리고나는 그 순간 그 감정을 경험했다영화에서소설에서드라마에서 자주 묘사되던 그 감정첫눈에 반하는 거나에게 0.5초도 채 머무르지 않았던 그 시선에 내 심장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그리고 박동을 빨리 하기 시작했다그 기분이 혼란스러워 나는 눈을 깜박였다처음엔 당황했다이게 뭐지이게 무슨 감정이지옆에서 누군가 날 흔들었다전정국내 말 듣고 있어나는 그 말에 어… 하고 멍청하게 대답했다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처음엔 그게 첫눈에 반한 거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었다.

 

옆에 앉아도 돼요?”

 

무슨 정신으로 수업을 들은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정신을 차려 보니 수업은 끝나 있었고 그제서야 뒤늦게 돌아본 자리에 그 사람은 없었다한 가지 다행인 건 적어도 그 사람을 한 학기 내내 이 수업에서 볼 수 있을 거라는 거그리고 이 수업이 전공이니까같은 학과일지도 모른다는 거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처음 느껴 보는 감정에 기분이 자꾸만 제 멋대로 춤을 췄다그리고 나는 그 사람을 다시 마주쳤다내가 이걸 신청했었는지도 까먹고 있었던 교양 수업에 들어가기 위해 발을 들여 놓은 강의실 안에서아니발견했다찾을 필요도 없었다여전히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혼자 선명했으니까.


머리가 뭐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그대로 그 사람 옆에 가서아까처럼 주위 상황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그 사람의 어깨를 두드렸다내 목소리에 그 사람이 고개를 들고눈이 마주치고나는 숨을 참고얼굴이 빨개지진 않았을까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었다그 사람이 입을 열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이 나에게는 수억 년처럼 느껴졌다이미 자리가 있다고 하면 어떡하지싫다고 하면.

 

…….”

 

그 짧은 찰나 동안 별 생각을 다 한 것 같은데다행히도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여 줬다그 사람의 옆자리에 가방을 내리고 자리에 앉는 동안 내내 이 사람에게 뭐라고 말을 걸까그 생각만 했다어떤 말이 가장 자연스러울까어떻게 말을 걸어야 호감을 줄 수 있을까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들이었다항상 사람들은 내가 뭐라 말을 걸기도 전에 나한테 말을 걸어왔고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을 상대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으니까.


크게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내 머릿속에서 완성된 가장 괜찮은 문장을 골라서그 사람을 톡톡 두드렸다내 행동에 그 사람이 귀찮은 듯 이어폰을 귀에서 빼냈다너무 적나라하게 나를 귀찮아하는 것이 보였지만 그대로 포기하고 싶지가 않았다경영학과죠내 질문에 그 사람의 눈과 내 눈이 마주친다나는 말을 잇는다.

 

우리 이거 말고도 같은 수업 듣는 거 같은데기업과 경영.”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는데눈치 챘을까최대한 담담하게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했지만 그게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그 사람이 날 쳐다보고 있는데이렇게 가까이서 본 게 처음이라나는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훑고 있었다눈이 크고속눈썹이 길고오른쪽 눈 밑에 점이 있네그리고

 

…….”

 

미치겠다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이거 좀… 위험한 거 아닌가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다경영학과맞구나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원래 이런 건가첫눈에 반하면원래 이렇게 기분이 막널을 뛰는 건가?

 

“1학년맞죠제가 새내기를 잘 몰라서.”

…….”

소개가 늦었네제 이름은 전정국이에요. 1학년은 맞는데나이는 22. 1학년 1학기 마치고 바로 군대 갔다 와서.”

…….”

이 교양에는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어서 걱정했는데다행이다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친하게 지내요밥 사줄게요.”

괜찮은데.”

내가 너무 들이댔나부담스러워하지는 않아도 돼요그냥 과 선배가 후배 밥 사주는 거니까,”

 

내 이름 같은 건 관심도 없을 걸 아는데 혼자 신나서 떠들었다어떻게 잡은 기횐데놓치기 싫었으니까그 와중에 처음 듣는 목소리가 또 너무 좋고결국 내 보챔에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다그래나한테 관심이 없으면 어때내가 이렇게 관심이 많은데.

 

앞으로 잘 부탁해요.”

 

교수님이 들어오시고그 사람이 앞을 본다나는 그 사람을 조금 더 쳐다보다가한 박자 늦게 앞을 본다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날 싫어하지만… 않으면 좋겠다.

 

*

 

누구?”

이름은 모르겠는데경영학과야새내기눈 크고속눈썹 길고.”

경영학과 새내기는 내가 다 아는데…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는데?”

잘생겼어기업과 경영 때창문 쪽 맨 뒷자리에 앉았었는데

너 태형 선배 말하는 거 같은데?”

 

태형 선배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수업이 끝나고 생각해 보니 난 아직 그 사람의 이름도 모르고 있는 채였다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어떻게 이름도 몰라그래서 다음 수업 시간을 기다리며 과방에 앉아 시간을 죽이던 차에과 회장을 맡고 있는 동기에게 은근슬쩍 이야기를 꺼냈다그 사람에 대해서는 얼굴하고 경영학과라는 것밖에 모르니까혹시 뭐 알 수 있는 게 있을까 싶어서.

 

태형이얘 맞아?”

… 맞아요.”

 

그런데 대답은 의외의 사람에게서 나왔다학생회를 하고 있는 지윤이의 말에주연 선배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잠시 뒤적거리더니 나에게 내밀었다나는 주연 선배가 보여준 단체사진 속 환하게 웃고 있는 그 사람을 멍하니 쳐다봤다웃는 모습은 저렇게 생겼구나예쁘다계속 무표정한 얼굴밖에는 못 봐서상상도 못 했는데멍하니 사진을 보고 있으니 주연 선배가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얘 새내기 아냐너보다 선밴데?

 

진짜요?”

내 동기하긴 넌 모르겠네너 입학하기도 전에 군대 갔거든.”

 

새내기가 아니었다고나는 자연스럽게 그 사람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1학년맞죠?’ ‘그냥 선배가 과 후배 밥 사주는 거니까.’ 그리고 얼굴을 붉혔다… 완전 실수한 거잖아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그 사람과 나눴던 대화를 되짚고 있자니 주연 선배가 다시 입을 열었다왜 새내기라고 생각했어태형이가 그렇게 동안인가?

 

1학년 전필 듣고 있으셔가지고……그리고 1학년 맞냐고 물어봤더니 부정을 안 하셔서.”

……걔 1학년은 맞아. 1학기만 다니고 휴학했거든.”

왜요군대?”

… 그건 아닌데…….”

 

주연 선배가 말끝을 흐린다나는 어느새 주연 선배에게 바싹 붙어 앉아 집중하고 있었다주연 선배는 말하기가 곤란한 듯 잠깐 천장을 봤다가옆을 봤다가다시 나를 쳐다본다나는 의아한 표정을 하고 주연 선배를 쳐다본다어차피 학교 다니다 보면 알게 될 거니까주연 선배가 잠시 머뭇대다가 입을 열었다.

 

소문이 이상하게 났었어.”

?”

… 남자한테 고백했다고.”

그게……왜요?”

말하자면 복잡한데… 그게 좀 그렇잖아.”

그 선배가 게이라서요그건 아웃팅 시킨 사람이 잘못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모르겠다아무래도 학기 초고그러다 보니까 분위기가 좀 뒤숭숭했어그거 말고도 소문 많았는데사실인지도 모르겠고어쨌든 걔가 남자한테 고백한 건 사실이니까아무래도 아직 인식이 그렇잖아… 뒷소문이 났지주연 선배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고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그게 뭐야그러니까 지금 태형 선배가 피해자였다는 소리잖아내가 계속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니 주연 선배가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표정이 고쳐지지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긴 해그렇게 될 것도 아니었던 거 같은데.”

…….”

태형이 보면 안부 좀 전해 줘.”

 

그럴게요나는 억지로 대답하고 입을 다물었다그래서 그렇게 방어적이었던 건가아무하고도 말도 안 하고내가 그런 일을 당한 것도 아닌데 계속 기분이 내려가는 게 이상했다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 때문에 기분이 이렇게 순식간에 오르락내리락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나 이렇게 쉬운 사람이었나괜히 입 안이 썼다.

 

*

 

그 날의 일은결코 의도했던 게 아니었다실수가 맞았다태형 선배를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었지만이미 상처가 있을 사람에게 그렇게 대놓고 고백할 생각은 정말맹세컨대 단 한줌도 없었다는 말이다.


섣불리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한 순간의 감정으로 가볍게 다가갔다가 선배한테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으니까내 마음에 대한 확신을 가진 후에 다가가야 할 것 같았다그렇지만 태형 선배와 계속해서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는 거였다태형 선배를 보고 있으면 자꾸 말을 걸고 싶고계속 쳐다보고 있고 싶고옆에 있고 싶고자꾸 생각나고보고 싶고같이 밥 먹고 싶고영화도 보고 싶고손도 잡고 싶고…….

 

이게 좋아하는 게 아니면 뭐야.

 

내 마음에 확신을 가지게 된 건 한 학기의 절반 정도가 지난 후였고고백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기말고사가 끝나기 직전이었다태형 선배를 보고 있으면 자꾸 웃음이 나왔다심장이 뛰고설레고계속 같이 있고 싶고내가 태형 선배를 좋아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고백을 결심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내가 고백해도 될까내 고백이 선배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 때문에그런데 태형 선배를 보고 있으면자꾸 좋아한다는 말이 튀어나왔다다행인지 불행인지 선배는 내 말들을 농담으로만 치부했지만.


선배가 나만 봐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날 볼 때마다 웃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한 번 생기기 시작한 욕심은 끝을 모르고 커졌다내가 선배를 좋아한다는 걸선배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자꾸 잠들기 전에 선배 얼굴이 떠올라서 잠을 제대로 못 자는 날이 많아지고 있던 차였다같이 수업을 듣는 여자 동기 한지윤이 친구와 떠드는 목소리가 우연히 내 귀에 날아와 꽂혔다.

 

태형 선배 진짜 잘생겼지.’

근데 너무 쌀쌀맞지 않아맨날 무표정하고.’

아냐저번에 과 엠티 때문에 얘기해본 적 있는데되게 친절하셨어엠티는 못 갈 거 같다고 되게 미안해하시는데 내가 더 미안하더라.’

진짜?’

그 때 이후로 인사드리면 되게 어색해하면서 받아주신다진짜 귀여워.’

뭐야너 그 선배 좋아해?’

그런 거 같아.’

 

짜증나나는 팔을 모으고 책상에 엎드렸다나한테만 친절했으면 좋겠는데나한테만 웃어줬으면 좋겠고그런데 태형 선배한테 이런 말을 하면 태형 선배는 내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면서 무시해 버릴 게 뻔했다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하면태형 선배는 꼭 선을 그었다넌 여기 이상은 못 와하는 것처럼처음에는 그냥 태형 선배랑 친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그건 내 착각이었다그것도 말도 안 되는 착각.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나고나는 방학 내내 태형 선배의 머리카락 한 올 볼 수 없었다연락은 자주 했지만 내가 아무리 떼를 써도 태형 선배는 나를 만나 주지 않았으니까그래서 애가 탔다혹시 그 애가 그 사이에 태형 선배한테 고백한 건 아닐까내가 그렇게 귀찮은가혹시 둘이 사귀게 됐나그럴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걸 알면서도 초조했다그렇게 방학이 끝나고나는 태형 선배를 졸라 태형 선배의 시간표에 맞춰 시간표를 짰다마음 같아서는 똑같은 시간표를 만들고 싶었는데그러면 태형 선배가 날 스토커처럼 볼 것 같아서 자제했다시간표가 달라도 밥은 같이 먹을 수 있으니까.


왜인지 모르겠지만 난 2학년 학회장으로 뽑혔고 나는 그 핑계로 선배를 계속해서 과 행사에 참여시키려고 노력했다선배가 과 사람들하고 어울리길 바랐다질투야 나지만선배가 1학년 때 있었던 일 때문에 아웃사이더를 자청하는 게 자꾸 신경 쓰였다그 소문이 있기 전에는 과 생활을 열심히 했었다는 주연 선배의 말도 한 몫 했다그 때 기억이 계속해서 선배를 괴롭히는 것 같아서오지랖인 걸 알았지만 그래도 선배가 다시 과 사람들하고 어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 선배 좋아하는 것 같아요아니좋아해요.”

 

그런데 그걸 내가 다 망쳐 버린 거다다음 날 아침누구의 자취방인지도 모르는 공간에서 눈을 뜨고 떠오른 첫 기억이 그거였다술에 취해 태형 선배한테 고백한 거그것도 과 전체가 보는 앞에서기억이 나자마자 핸드폰을 붙잡고 태형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태형 선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메신저 답장도피가 말라서 죽어버릴 거 같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마음 같아서는 한강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미쳤지어떻게 실수를 해도 그딴 실수를 하냐고핸드폰만 붙잡고 벽에 머리를 찧으며 주말을 보내고강의실 밖에서 태형 선배의 첫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그리고태형 선배를 봤다날 봐 주지도 않으면 어쩌나 고민했는데태형 선배는 얘기 좀 하자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 줬다.

 

선배미안해요진짜 그 때 거기서 고백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럼 언젠가 고백을 하려고는 했었다는 거네.”

선배를 좋아하는 건 진심이에요…….”

 

선배의 무심한 말투가 오늘따라 속상했다술 취해서 한 고백이라 그런지태형 선배는 선배를 좋아한다는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거기서 고백했던 건 실수가 맞지만선배를 좋아한다는 건 진심이라고 말하고 싶었다선배가 너무 좋아서그런데 선배는 나한테 관심도 없는 거 같고그런데 지윤이가 선배가 좋다고 해서속상해서… 그런데 선배는 제 연락 하나도 안 받고

말이 두서없이 이어졌다이렇게 투정부리듯이 얘기하려고 한 게 아닌데입이랑 머리가 따로 놀았다선배 앞에 있으니까 감정이 주체가 안 됐다이 와중에도 뛰는 심장이 원망스러웠다진짜 무슨 병 걸린 거 같잖아내가 생각해도 내가 한심한데선배는 어떨까.

 

난 네 말 안 믿어.”

…….”

너 그냥 착각하는 거야.”

 

선배는 내 말을 믿지 않는다착각 아닌데선배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어요쉽게 생각한 거 아니에요선배가 생각하는 것보다 오래 선배를 좋아했어요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선배가 날 쳐다보는 눈에 너무 감정이 없어서자꾸만 숨이 막혔다착각이 아니라고내 감정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라고앵무새처럼 정말로 선배를 좋아한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밖엔 할 수 없다는 게 이렇게 무력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나 좋아한다는 소문 나 봐야 너한테 좋을 거 없어.”

 

그런데 선배는 나를 걱정한다왜냐고 물었더니 그걸 몰라서 묻냐는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고백한 건 나고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시선을 견뎌내야 했던 건 선밴데선배는 왜 나를 걱정할까속상하고미안하고내 자신이 한심한데 이 와중에도 나를 신경 써 주는 선배가 눈치 없이 너무 좋았다.

 

전 제가 선배 좋아한다는 거전교생이 다 알아도 상관없어요.”

…….”

사실인데 뭐.”

쓸데없는 오기 부리지 마.”

오기 아니에요그럼믿어 줄 거예요?”

?”

내가 선배 좋아한다는 거온 전교생이 다 알게 돼도 내가 후회하지 않으면믿어 줄 거냐고요.”

…….”

제가 선배 좋아하는 거.”

 

자신 있었다난 태형 선배를 좋아한다나 자신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괜히 고민했던 게 아니었다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내 마음에 대한 확신도 있었다그리고내가 이렇게 대놓고 선배를 좋아한다는 걸 티내면선배랑 같은 위치가 되는 거니까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보여주면 선배도 괜찮아지지 않을까그때랑 지금은 다르다고무서워할 필요 없다고.

 

그게 그렇게 중요해?”

저한테는 중요해요.”

네 맘대로 해.”

 

그래서 그랬다내가 선배의 상처를 낫게 해줄 수 있을 줄 알았다그러나 그건 내 자만일 뿐이었다는 걸난 머지않아 깨달았다.

 

*

 

오늘은 유난히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선배는 알까내가 선배를 경영인의 밤 행사에 데려오기 위해 선배를 꼬셨던 말들은 전부 사실 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는 걸딸기 뷔페도선배에게 햄버거를 사주는 것도결국 그만큼 선배를 만날 핑계가 더 생기는 거니까너무 나만 좋은 거 아닌가선배는 귀찮아하는데가끔 양심에 찔리기도 했지만.


그래서 오늘 밤에 선배한테 언제쯤 딸기 뷔페를 먹으러 갈 건지 물어보려고 했다그런데 선배 옆에 갈 틈이 없었다처음 개최하는 행사라 이 사람저 사람에게 전부 연락했던 걸 이런 식으로 후회하게 될 줄이야태형 선배 보고 싶은데간신히 틈을 내 태형 선배를 찾아갔을 때는 이미 태형 선배가 조금 취한 후였다선배가 취한 모습은 처음 보는 거였는데나보다 윤기 선배가 먼저 봤다는 사실이 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태형 선배가 기분 좋아 보이니 그걸로 됐다 싶었다그리고 태형 선배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소란스러운 곳보다 조금 조용한 곳에서태형 선배랑 단둘이 있고 싶어서.

 

너 진짜 나 좋아해?”

 

그런데선배가 그랬다난 한 손으로 선배를 붙들고 편의점을 찾고 있었고선배는 아무 말 없이 그런 나에게 기대 있었다그것만으로도 심장이 간질거렸는데갑자기 선배의 목소리가 들린 거다당연하죠웃으며 대답하려고 선배를 쳐다보는데선배의 눈이 평소완 달랐다나는 멍하니 선배를 쳐다봤다선배는 여전히 날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고나는 그런 선배를 마주 보고 있고날 보면서조금 풀린 눈을 하고선배가 다시 묻는다.

 

너 진짜나 좋아하냐고…….”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게곧바로 나왔을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좋아해요태형 선배진짜 많이 좋아해요셀 수 없을 만큼 많이 했던 말인데나는 멍청하게 눈을 깜박였다심장이 미친 것처럼 뛰었다선배가선배의 눈이 날 향하고 있다는 게이렇게… 머릿속이 하얘질 정도로 기분 좋은 일이었나?

 

태형 선배.”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좋아한다는 말을 꺼내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다태형 선배는 내가 태형 선배를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으니까내가 몇 번이고 좋아한다고 말해도태형 선배는 그냥 웃고 말았으니까태형 선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나태형 선배가 많이 취한 건가심장은 여전히 빨리 뛰고간질거렸다선배의 입이 다시 열린다나는 숨을 참는다.

 

나는,”

전정국.”

 

누군가 찬물을 끼얹은 바람에 잠에서 깬 기분이다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흐릿한 인영이 조금씩 가까워졌다나는 인영을 파악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그러니까… 저 사람이

 

앞에 설마김태형?”

선우 선배.”

 

선우 선배성이… 박씨였나나는 태형 선배를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줬다내가 1학년 때, 2학년 학회장이었던 선배였다날 유난히 잘 챙겨 줬었는데내가 선우 선배한테도 연락을 했었나하도 많은 사람에게 닥치는 대로 연락을 돌렸던 터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그건 그렇고어찌 됐든 지금은 선우 선배가 달갑지 않았다태형 선배랑 단둘이 있고 싶었는데게다가 지금 태형 선배가 나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했고.

 

맞네김태형오랜만이다.”

 

선우 선배가 태형 선배에게 아는 척을 한다그러고 보니 태형 선배랑 선우 선배랑 동기겠구나나는 멍하니 생각했다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하는 걸 보면사이가 나쁘진 않은 건가윤기 선배 같은 케이스인가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엉켰다.

 

선우 선배진짜 오셨네요.”

진짜 오셨네요라니꼭 오라고 해서 휴가 맞추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최대한 티 나지 않게 말한 거였는데썩 달갑지 않아 했던 게 티가 났던 모양이다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하필 지금이냐고그러나 내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동기 하나가 가게에서 나오더니 날 불렀다교수님이 찾는다면서진짜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나는 태형 선배를 잡았던 손을 살짝 놓았다.

 

선배잠시만요잠깐만 있다가 얘기해요.”

 

그래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모르겠다어차피 분위기는 깨졌고선우 선배가 태형 선배랑 얘기할 동안 나는 교수님과의 대화를 끝내고 오면 되는 거다그리고 선배를 데리고 편의점이든어디든도망가야지핸드폰도 꺼 버릴 거다나는 재빨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1초라도 빨리 교수님과의 대화를 끝내고태형 선배한테 가고 싶어서그러나 교수님과의 대화를 끝내고 다시 밖으로 나온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아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의 태형 선배였다.

 

나 갖고 놀면서 재밌었어?”

 

그런 얼굴은 처음 봤다.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선배를 보면서선배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됐다고 생각했는데그렇게 서럽게 우는 얼굴은 처음이었다우는 선배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혀끝에서 맴도는 말들은 소리가 되어 나가지 못했다숨이 막혔다.

 

내 눈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

 

심장에 추가 달린 것처럼쿵 하고 떨어졌다끝도 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아무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이게 무슨 상황인지선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하나도 이해가 되는 게 없는데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뭔가 오해하고 있는 거라고 얘기해야 하는데선배가 우는 얼굴에 머릿속이 새하얬다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한참동안 날 노려보던 선배는 그대로 돌아서서 사라져 버렸다나는 그때까지도 멍하니 서서 선배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선배는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고옆에는 윤기 선배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나는 윤기 선배를 보고 눈을 깜박였다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야 하는데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우두커니 서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데 윤기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선우가 왜 여기 있어?”

?”

니가 불렀냐고.”

선배죄송한데 제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김태형아까 전에 강선우하고 마주친 거 아니야?”

 

나는 멍하니 윤기 선배를 쳐다봤다윤기 선배가 그런 나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그게… 왜요불안한 느낌에 내가 이어 물었다태형 선배와 선우 선배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태형 선배가 평소완 달랐다선우 선배가 왔는데도 뒤도 안 돌아보고원래 살가운 사람은 아니라지만선우 선배랑은 동기일 텐데그리고 선우 선배가 태형 선배한테 아는 척도 했고

 

김태형 소문 못 들었어?”

소문이요?”

아니너 안다고 그랬잖아태형이가 강선우한테 고백해서

?”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내 반응에 윤기 선배가 몰랐냐는 듯 나를 쳐다본다그게 무슨 소리에요태형 선배가 선우 선배한테 고백했다고요내 말에 윤기 선배가 잠시 망설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너 김태형이 남자한테 고백했던 거 알지 않았어?

 

아니그게 선우 선배인 줄은

강선우가 너한테 얘기 안 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그런 얘기 한 적 없어요내 말에 윤기 선배의 미간이 더욱 좁혀진다그 새끼가 그럴 리가 없는데자기 스토커 있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

 

스토커요?”

아니진짜 스토커는 아니고,”

스토커 얘기는 한 적 있어요그냥 1학년 때자기 쫓아다녔던 스토커 하나 있었다고과 전체에 소문이 나니까 쪽팔렸는지 휴학했다고

미친 새끼.”

 

윤기 선배가 욕하는 건 처음 봤다내 말에 윤기 선배가 짜증난다는 듯 머리를 털었다나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아 입술을 깨물었다씨발한 번 더 잇새로 욕을 내뱉은 윤기 선배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잇는다.

 

후배한테 선배 뒷담 까는 거 같아서 말 안 했는데이미 니가 알고 있는 줄 알았고.”

…….”

김태형이 강선우한테 고백한 건 맞아그런데 그 전에 김태형 싸고돌면서 다른 애랑 더 못 친해지게 김태형 옆에 붙어 있던 건 강선우였고.”

그게 무슨…….”

그래 놓고 김태형을 병신 만든 거야자기는 싫었는데걔가 자기가 좋아서 일방적으로 따라다닌 거라고그게 자꾸 부풀려져서 스토커가 된 거고강선우는 그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고.”

…….”

내가 그걸 미리 알았어야 됐는데그 때 한창 시험기간이어서 전혀 몰랐어나중에 보니까 이미 상황은 끝난 뒤더라고김태형은 과에서 이미지 병신 되고 휴학하고강선우는 피해자 되어 있고.”

 

말이 안 나왔다내가 태형 선배한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손이 떨렸다그러니까내가지금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윤기 선배가 나를 툭 쳤다전정국그러나 나에겐 그런 윤기 선배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머릿속이 태형 선배만으로 과부하가 걸려 있었다태형 선배선우 선배고백스토커트라우마문장이 쪼개지고단어가 공중에 흩뿌려졌다그러니까나는 지금태형 선배의 트라우마를 자극한 거다그것도 당사자를 앞에다 불러서단 둘이 있게 한 거다내가.

 

정신 차려너 모르고 그런 거잖…….”

태형 선배가,”

…….”

저보고 자기 갖고 놀면서 재밌었냐고,”

…….”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래요.”

울어?”

 

내가 우는지도 몰랐다심장이 불안하게 뛰고선배한테 미안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눈가가 시렸다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선배가 날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그 오해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보다 태형 선배가 다시 받았을 그 상처가 얼마나 클지 가늠도 못 하겠어서그게 너무……나 자신이 한심했다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주제넘게 군 대가일까그럼 벌은 내가 받아야 하는 건데왜 상처는 태형 선배가 받았을까.

 

… 어쩌다 이렇게 됐냐.”

…….”

일단 이거.”

 

윤기 선배가 복잡한 듯 머릴 쓸더니 나에게 태형 선배의 가방을 건넸다이거 태형이가 두고 간 건데어차피 전해줘야 하는 거니까이거 주면서 말이라도 꺼내봐윤기 선배의 말에 나는 멍하니 윤기 선배를 쳐다봤다호흡이 불안정하게 들썩였다태형 선배가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그랬는데태형 선배를 다시 볼 자신은 없는데사과는 해야 했다태형 선배가 이대로 나를 오해하는 게 걱정돼서가 아니라나한테 배신당했다는 게 태형 선배를 더 괴롭힐까봐그런데 어떻게 태형 선배 앞에 설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나는 멍하니 윤기 선배를 쳐다보다 이내 가방을 받아들었다어떻게든사과해야 했으니까.

 

*

 

차마 태형 선배한테 연락도 하지 못한 채로 밤이 지나고 그 다음 날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간 학교에 태형 선배는 없었다학교를… 온 거 같긴 한데나랑 듣는 수업에는 코빼기도 안 보였다나는 태형 선배에게 주려고 가져온 가방을 괜히 만작였다밤새도록 어떻게 태형 선배한테 말을 꺼내야 할지그것만 생각했는데도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애초에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할까속이 쓰렸다태형 선배를 좋아하는데태형 선배를 곤란하게만 만드는 내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

 

그렇게 태형 선배에게 사과하기는커녕 얼굴도 못 본채로 수업이 끝나고윤기 선배에게 물어 태형 선배의 자취방 앞에 찾아갔다학교 앞에 반듯하게 지어진 건물을 올려다보면서심호흡을 했다이 안에 태형 선배가 있을까어떤 말부터 꺼내야 하지건물 벽에 기대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시야 안으로 태형 선배가 들어왔고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태형 선배는 날 보지 못했을 거다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겨우 하루 못 본 건데그 전에는 어떻게 살았지괜히 주먹이 꽉 쥐어졌다솔직히겁이 났다태형 선배가 나한테 어떤 말을 할지태형 선배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 몰라서어떻게 사과를 해야 하는지도 감이 안 잡혔으니까.


괜히 핸드폰을 들었다가내려놨다가를 반복하다가땅바닥에 앉아 있다가일어섰다가입술은 하도 깨물어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태형 선배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태형 선배가 날 노려보며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던 말이 연달아 떠올랐다진짜… 한심하다내가 그러고 있는 동안 해는 져서 하늘이 깜깜해져 있었다해가 지니 쌀쌀해져 얇게 입고 온 옷이 무색하게 몸이 살짝 떨렸다요 근래 경영인의 밤이다 뭐다 해서 정신도 없었고태형 선배 때문에 제대로 자지 못한 몸이 악을 썼다그런데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가방도 전해 줘야 하고태형 선배한테 사과도 해야 하고그리고… 태형 선배가 보고 싶었다.

 

…….”

 

얼마나 거기서 그러고 있었던 건지깜깜했던 하늘에 푸른빛이 돌기 시작했다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해가 뜨고 있었다지금 몇 시야핸드폰을 확인하니 배터리가 달랑달랑한 핸드폰이 새벽 5시를 보여줬다나는 한숨을 내쉬었다결국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 눈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


태형 선배에게 사과하는 게 무서운 게 아니었다태형 선배가 나한테 뭐라고 할까봐 무서운 것도무서운 건내가 태형 선배의 앞에 나타나는 게선배한테 더 큰 상처가 될까봐내가 다시 그 악몽을 불러오는 기폭제가 될까봐그게 무서웠다나는 쭈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추운 곳에서 오래 있었던 몸이 아우성을 쳤다눈은 뻑뻑하고목이 잠겨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나는 잠시 망설이다 편의점으로 갔다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포스트잇이랑볼펜이랑초코 우유랑 딸기 우유를 샀다그리고 천천히 적어 내려갔다미안하다고선배한테 상처를 줄 생각은 절대 아니었다고선우 선배를 부른 건 맞지만 정말 몰랐다고.


몇 번이나 적었다가 지우고너덜너덜해진 포스트잇을 버리고몇 번이나 수정해서 결국 7시가 다 돼서야 포스트잇을 완성했다그리고 집 문 앞에 우유와 함께 가방을 걸어 뒀다나는 계단 쪽에 숨어 선배가 나오기만을 기다렸고얼마나 기다렸을까선배가 문을 열고 나왔고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선배가 가방을 발견했다포스트잇도선배의 시선이 가방에 머물렀다가포스트잇을 읽었다가우유에 멈췄다선배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애가 탔다나는 불안하게 뛰는 심장에 손을 올렸다선배가 피곤한 듯 눈가를 부빈다잠시 우두커니 멈춰 서서 우유를 쳐다보던 선배가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가방을 챙기고포스트잇을 구겨 버린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닌데누가 쿡쿡 찌르는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선배는 집 안으로 들어가 내가 전해준 가방을 놓고다시 밖으로 나온다그리고 다시 우유를 쳐다보고발걸음을 옮겼다우유는 그냥 그대로 놓아둔 채로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눈이 시리고머리가 지끈거렸다그게 내가 기억하는 그 날의 마지막이었다.

 

*

 

눈을 떴을 땐병원 천장이 보였다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윤기 선배가 한심하단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여기… 어디에요내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그렇게 묻자 윤기 선배가 내 팔에 꽂혀 있는 주삿바늘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응급실멍청한 놈아.”

…….”

가지가지 한다너도.”

…….”

스트레스랑 수면부족이 원인이래몸살기운도 있고.”

 

윤기 선배가 한숨을 내쉬었다계단에 쓰러져 있던 걸동네 주민이 신고해서 데려왔어너 학교 안 왔길래 전화했더니 의사가 받아서 응급실이라 그래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이어지는 윤기 선배의 말에 나는 죄송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그런 나를 쳐다보던 윤기 선배가 이내 내 머리를 툭 쳤다.

 

나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어.”

그래도…….”

정신 차렸으면 이거만 다 맞고 퇴원하면 돼당분간 집에서 푹 쉬래.”

 

태형 선배는요묻고 싶은데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그런 나를 눈치 챘는지 윤기 선배가 태형이는 학교 나왔더라너 여기 있는 건 몰라사과는 했냐하고 물었다나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받아주진 않은 거 같지만사과를 하긴… 했으니까선배가 내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너나 태형이나고생하네.”

…….”

괜찮아질 거야.”

 

뭐가 어떻게 괜찮아진다는 걸까괜찮아질 수 있을까태형 선배를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할 수 있을까나는 고개를 숙였다속이 답답했다.




 

' > 오해와 연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해와 연애 06 完  (5) 2018.03.02
오해와 연애 05  (0) 2018.02.23
오해와 연애 03  (3) 2018.02.14
오해와 연애 02  (1) 2018.02.09
오해와 연애 01  (1) 2018.02.08




03

 


선배오늘은 학식 말고 나가서 먹어요.”

그러든가.”

 


태형 선배시험 끝나고 뭐 해요저랑 같이 영화 봐요.”

귀찮아.”

 


수업 끝나고 저랑 놀아 줘요저 버리고 가지 마요…….”

너 수업 두 개나 남았다며싫어.”

전 저번에 공강에 선배 만나러 나왔었는데!”

누가 나오래네 멋대로 나온 거잖아.”

 


이런 식으로전정국의 노력은 중간고사가 끝나고한 학기의 절반이 지나갈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나는 여전히 전정국이 나를 정말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믿지는 않았지만전정국의 끈기 하나는 인정해주고 있었고이 정도로 시큰둥하게 굴었으면 빈정이 상해서라도 그만둘 법도 한데전정국은 처음 나한테 말했던 그 때에 비해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오히려 더 정성을 들이고 있으면 들이고 있었지.


가끔은 넌 대체 내 어디가 좋아서 그러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을 때도 있었다하지만 그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은 결국 항상 시도에서 그쳤다그 질문을 하려고 마음먹고 전정국을 쳐다보고 있으면나를 마주하고 있는 전정국의 눈이 꼭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착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에생각보다는 오래 가는 것 같지만그게 전정국이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가와는 별개의 문제였으니까.

 


오늘도 붙어 있냐지겹지도 않아?”

완전 좋은데요.”

너 말고 태형이한테 얘기한 거야넌 경밤 준비 안 해?”

하고 있어요선배 오실 거죠?”

너 하는 거 봐서.”

 


그리고윤기 선배와는 종종 이렇게 대화(라기에 이번에 내가 한 것이라곤 살짝 눈인사를 한 것뿐이었지만)하는 사이가 되었다정작 친해졌어야 했을 1학년 때보다 훨씬 친해진 거였다따로 연락을 주고받거나 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마주치면 간단한 안부 정도는 묻는어쩌다 같이 밥을 먹어도 어색하지 않을 사이 정도는 됐다전정국은 여전히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것에 있어서 전혀 거리낌이 없었고윤기 선배가 고생한다는 듯 내 어깨를 톡톡 치고 지나갔고 나는 하하하고 웃었다그러자 역시나 옆에서 전정국의 시선이 느껴졌다.

 


할 말 있으면 해.”

선배도 경영인의 밤 오면 안 돼요?”

 


윤기 선배와 대화하면 늘 그렇듯이 전정국은 날 쳐다보고그럼 나는 할 말 있으면 하라는 눈으로 전정국을 쳐다보고그러면 전정국은 늘 한숨을 내쉬고 아니에요하고 말곤 했다그럼 나는 그런 전정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뒀었고그래서 오늘도 그렇게 될 줄 알았는데오늘은 상황이 평소완 조금 달랐다전정국이 눈을 살짝 빛내며 나한테 한 질문 때문에나는 전정국의 입에서 튀어나온 문장에 살짝 미간을 좁혔다.

 


내가 거길 왜 가.”

저 진짜 열심히 준비하고 있단 말이에요선배가 와주면 너무 기쁠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전정국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게 만드는 것’ 외에 은근히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있었다제 딴에는 티 나지 않게 한다고 하는 것 같았지만내가 옆에서 직접 당하는 입장에서 볼 때에는 꽤나 표가 나는 거였는데그건 바로 나를 과에서 하는 행사에 참여시키려고 하는 거였다.


2학년 학회장으로서 과 사람을 과 행사에 참여시키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하기 싫다는 사람을그것도 새내기도 아니고 복학생을 열심히 구슬리면서까지 굳이 과 행사에 참여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다지 보편적인 일은 아니었다전정국의 그러한 노력은 과에서 일어나는 일에 조금도 참여하고 싶지 않은 나에 의해 매번 무너졌지만 말이다그러니 사실 전정국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내가 그걸 단칼에 거절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고그러나 이번에 전정국은 꽤나 굳게 결심한 것 같았다.

 


선배제발요소원이에요.”

싫어.”

뒤풀이도 있어요출장 뷔페 부를 건데.”

필요 없어.”

선배애…….”

 


전정국은 제법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한 학기 하고도 반 학기의 시간 동안 전정국과 붙어 다닌 결과인정하긴 싫지만 전정국은 어느 정도 나를 다루는 법을 터득해 나가고 있었다나도 사람이다 보니아무리 냉철하게 전정국을 대하려 노력한다 해도 전정국에게 이런 저런 정이 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는데 그러다보니 가끔 전정국의 부탁을 들어 주는 경우가 종종 생기게 됐고전정국은 그 무선적인 요청 수용의 경우들에서 일종의 규칙을 찾아낸 것이다.

 


제가 햄버거 사드릴게요.”

너는 나를 무슨,”

“10.”

…….”

요즘 딸기 뷔페 한다던데거기 갈까요?”

 


이게 진짜……나는 인상을 구기고 전정국을 쳐다봤다그러나 내 표정에도 전정국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그러니까이게 문제였다전정국이 날 너무 잘 알게 되어 버렸다는 거나는 고개를 돌렸다하지만 전정국은 이미 알고 있을 거였다내가 결국엔 마지못해 전정국의 말을 들어 줄 것이라는 걸.


사실 내가 진짜로 햄버거 10번이나 딸기 뷔페 때문에 전정국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고내가 전정국의 부탁을 들어주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전정국의 날 쳐다보는 얼굴이었다전정국이 잘생겼다는 건 모두가 알고 인정하는 사실이었고솔직히 얘기하면 가끔 그런 전정국의 얼굴에그리고 나를 대하는 전정국의 태도에 설렐 때도 있었다아니 사실 설레지 않는 게 이상한 거지그렇게 잘 생긴 얼굴을 하고 (비록 그게 본인의 착각일지라도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는데 어떻게 한 번도 설레지 않을 수가 있을까뭣도 몰랐던 1학년 때였다면 이미 난 몇 번이고 전정국에게 반했을 거였다.


그러니까내가 전정국의 부탁을 들어주는 경우에는 꼭 전정국의 이 얼굴이 포함되어 있었다날 똑바로 쳐다보면서가끔은 불쌍한 척 눈을 빛내는 저 얼굴저 눈그 얼굴을 몇 초간 쳐다보고 있으면난 결국 백기를 들고 마는 거였다그 사실을 전정국이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겠지만전정국이 정말로 날 설득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예를 들면 수업 끝나고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다든가집에 가서 먹어도 될 저녁을 굳이 저랑 같이 먹자고 한다든가여러 가지 내가 좋아하는 조건들을 내걸며 꼭 저렇게 나를 쳐다보는 걸로 봐서는 대충 무의식중에라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그냥 나를 쳐다보는 것 뿐 아니라 내가 혹할만한 것들을 제시하면서 나를 꼬드기는 걸 보면 그냥 부가적인 요소로 생각하는 것 같긴 했지만하지만 사실 내가 전정국의 부탁을 들어주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는 다른 게 아니라 전정국의 얼굴이었다는 소리다.

 


태형 선배애.”

…….”

올 거죠?”

 


전정국이 날 보며 웃는다나는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로입술을 깨문다아니방금 했던 말은 취소전정국은내가 제 얼굴에 약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그것도 아주 잘.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애초에 얼마 남지 않았던 경영인의 밤 행사도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전정국이 처음 나에게 경영인의 밤에 참석하면 안 되냐는 질문을 한 이후로 나는 전정국과 5번 같이 밥을 먹었고, 6번을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들었다그 때마다 그 시간들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대화들로 채워졌지만 나는 그 평소와 똑같은 시간들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아니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전정국을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태형 선배.”

 


전정국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처음 만났을 그 때부터 지금까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선배혹은 태형 선배그러나 그 목소리에 대한 내 반응은 처음과는 분명 많이 달라져 있었다처음에는 분명 귀찮고피하고 싶고가끔은 대단하다고만 느껴졌던 그 목소리가 지금은 기다려졌고안 보이면 찾게 됐고가끔은 설렜다그러니까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어쩌면전정국이 나를 좋아하는 게 진심은 아닐까얘가 정말로진짜로진심으로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거다아니솔직히 말하면전정국이 나를김태형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길 바라게 됐다.


이쯤 되면 바보가 아닌 이상 내 마음을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었고나는 전정국을 좋아하게 됐다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나는 포기가 빠른 만큼 인정도 빠른 사람이었고 생각보다 쉽게 전정국을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했다그러나 전정국이 나를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기 때문에 전정국에게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조금 더 신중하고 싶었으니까그럼에도 불구하고나는 계속해서 전정국이 나를 진심으로 좋아할 가능성의 퍼센테이지를 내 안에서 자꾸만 늘려 가고 있었다불가항력이었다.

 


…….”

 


그래서 나는 또 멍청하게지금 현재 2학년 학회장 전정국이 열심히 준비한 경영인의 밤 행사에 자리해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앉아 있는 중이었다나로서는 크나큰 결심이었다그토록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내 동기들은 대부분 아직 군대에 가 있거나 현재 3,4학년에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경영인의 밤이 경영학과의 가장 큰 행사인 만큼 나는 몇 명의 동기들을 마주해야만 했기 때문이다그 마주한 동기들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불행 중 다행으로 내 앞에 앉은 윤기 선배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전정국은 나를 경영인의 밤에 초대하려고 애쓴 게 무색할 만큼 나와 대화 한 마디 제대로 나눌 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나는 기계적으로 술잔을 부딪치며 그런 전정국을 힐끔힐끔 훔쳐봤다전정국은 교수님새로 들어온 새내기들 할 거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심지어는 이미 졸업한 선배들에게까지 쉴 새 없이 불려 다니는 중이었다경영인의 밤에 참석한 모두가 전정국과 대화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계속 내 옆에 붙어 있었으면서 언제 저렇게 다른 사람들과 친해졌나 신기할 정도로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이렇게 보니까 되게 멀리 있는 사람 같네나는 괜히 씁쓸한 기분이 되어 목구멍으로 술을 넘겼다소주가 유난히 썼다.


그러고 보면전정국은 신기한 사람이었다혼자 있어도 반짝반짝 빛나면서 시선을 끄는데옆에 사람이 있으면 더 눈에 띄고 반짝거렸다그러면서도 그 옆에 있는 사람까지 밝게 만들어 줬다내가 옆에 있어도 그럴까나는 쓴 입술을 혀로 핥았다똑같이 고백했으면서도나와는 달리 과에서 도태되지 않고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게 억울하면서도 한편으론 신기했던 적이 있었다저런 점이 나와는 다른 점일까나도 전정국에 옆에 있으면 밝아 보일까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옆에서 윤기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정국 뚫어지겠다.”

!?”

전정국 말로는 지가 혼자 짝사랑하는 거라던데아닌가 보네.”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윤기 선배가 픽 웃으며 내 술잔에 술을 채워 준다나는 윤기 선배의 말을 혹시 누군가 들었을까 습관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사람들은 서로 얘기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우리 테이블에 귀를 기울일 여유 따윈 없어 보였다하긴윤기 선배가 아무 때나 이런 말을 할 사람은 아니긴 했다나는 조용히 윤기 선배가 따라준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나도 모르는 새 꽤 마셨는지 조금씩 취기가 올랐다얼굴이 기분 좋게 뜨끈했다윤기 선배가 너 술 약했던가하고 물어 오기에 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사실 술이 세다고는 못 할 주량이었지만 그냥 오늘은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그래야 용기가 생길 것 같았다.

 


진짜 너무 정신없다.”

…….”

미안해요선배내가 불러 놓고계속 오려고 했는데 자꾸 일이 생겨서.”

 


얼마나 그렇게 윤기 선배와 마주보고 술을 마시고 있었을까어느덧 9시가 넘어 가 있었다나는 적당히 취해 알딸딸한 상태였고 전정국은 이제야 좀 숨 돌릴 틈이 생긴 건지 곧장 내 옆으로 와 앉았다나는 그런 전정국을 쳐다봤다술을 마셔서 그런가평소보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시야가 조금 흐린 것도 같고.

 


선배 술 많이 마셨어요얼굴이 빨개요.”

…….”

 


술 때문이다술 때문에 얼굴도 빨갛고심장도 빨리 뛰고속이 꼭 울렁거리는 것 같은 게나한테 가까이 다가오며 내 볼에 손을 갖다 대는 전정국의 손 때문이 아니라술 때문에전정국은 그런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더니 컵에 물을 따라 나에게 건넨다선배마셔요괜찮아요잠깐 바람 쐬러 나갈까요나는 순순히 물을 받아 마시며 멍하니 테이블 위 소주잔을 쳐다봤다아직 마시지 않은 소주가 잔에 담겨 찰랑거렸다내 심장 박동도꼭 소주가 찰랑거리는 것처럼 조그맣게 찰랑거렸다감정이 자꾸 들쑥날쑥제 멋대로 넘실거렸다진짜나 진짜… 진짜 전정국 좋아하나 봐.

 


쟤 많이 마신 거 같더라가서 초코우유라도 사 줘.”

그래야겠다잠깐 자리 좀 비울게요.”

 


그런 나를 눈치 챘는지 윤기 선배가 입을 뗀다전정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부축해 세웠다선배잠깐만 바람 쐬고 와요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사실그렇게 많이 마신 건 아닌데아니다많이 마신 건가. 1학년 그 날 이후로술을 취할 만큼 마신 적이 없었다애초에 술자리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하기도 했고술을 이렇게 취할 정도로 마신 게 오랜만이라서 그런 건가취기가 더 빨리 찾아왔다술 때문인지기분도 평소보다 높아져 있었다나는 전정국의 손에 이끌려 술집 밖으로 나왔다실내는 더웠는데밖에 나오니 밤바람이 기분 좋을 만큼 차가웠다감정은 여전히 파도처럼 넘실대고옆에 있는 전정국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나고전정국이 나에게 하는 말들은 다정하고꼭 전정국이 날 정말로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지고그래서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랬다다정한 말투로 날 걱정하고 있는 전정국의 팔을 붙잡았다편의점을 찾던 전정국이 눈이 나를 향했다나는 전정국을 똑바로 응시했다심장이 뛴다.

 


전정국.”

.”

너 진짜 나 좋아해?”

 


내 말에전정국의 눈이 커진다나는 계속해서 전정국을 쳐다본다지금 이 상황이 얼떨떨한 듯전정국은 입을 벌렸다가다시 다물기를 반복한다나는 내가 쥐고 있는 전정국의 팔을 조금 더 세게 쥔다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는데도 얼굴이 더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초코 우유라도 마시고 말을 꺼낼 걸 그랬나지금 나한테서 술 냄새 나면 어떡하지전정국한테서는 이렇게 좋은 향기가 나는데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진짜나 좋아하냐고…….”

태형 선배.”

나는,”

전정국.”

 


너 좋아해라고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내 뒤에서 전정국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순간 전정국을 잡고 있던 나의 손에 힘이 풀렸다나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날 향하고 있던 전정국의 시선이 내 뒤에 있는 사람에게 가 닿았다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설마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이 목소리는내가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설마착각이겠지유리가 깨지는 것처럼한순간에 술이 깼다나는 차마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아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기분 좋게 뛰고 있던 심장이지금은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앞에 설마김태형?”

선우 선배.”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나는 그때까지도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아니길 바랐는데전정국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익숙한 단어에나는 다리에 힘이 풀릴 뻔한 것을 간신히 버텨냈다선우 선배전정국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원망스럽게 들렸던 적은 처음이었다달콤한 꿈을 꾸고 있다가한순간에 현실로 내동댕이쳐진 기분.

 


맞네김태형오랜만이다.”

선우 선배진짜 오셨네요.”

진짜 오셨네요라니꼭 오라고 해서 휴가 맞추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휴가꼭 오라고 했다고이게 무슨 말이지나는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전정국을 쳐다봤지만 전정국의 시선은 날 향해 있지 않았다강선우내 악몽그 악몽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겨우 잊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 1학년 때의 유령이 다시 날 슬금슬금 휘감고 있었다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혹시 다시 마주친다 하더라도 의연하게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내 착각이고 오만이었다는 걸 난 지금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마주하게 된 강선우가 너무 무서워서그래서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토할 것 같았다나는 전정국을 쳐다봤다날 보는 전정국을 마주하면조금 덜 무서울 것 같았는데.

 


정국아교수님이 부르셔.”

.”

 


전정국의 시선은 날 향해 있지 않았다그리고 그 때여자 한 명이 가게 밖으로 나오며 전정국을 불렀고 강선우를 향해 있던 전정국의 시선은 그대로 그 여자에게로 옮겨 갔다손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무서웠다이 순간이 꿈이길 간절히 바랐다그 날 이후 내내 날 괴롭혔던 악몽이길 바랐다지독한 악몽이었으면그래서 꿈에서 깨고 나면그냥 아무 일도 없이평소와 다를 것 없이그냥 아침부터 재수가 없었던 것뿐이라고 말하면서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선배잠시만요잠깐만 있다가 얘기해요.”

…….”

 


그런데 전정국은 천천히 등을 돌려 나에게서 멀어진다나는 그런 전정국을 차마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봤다내 어깨 위에는 여전히 그 악몽이 손을 올리고 있었고아까까진 기분 좋게 불던 바람이 지금은 소름끼치게 느껴졌다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기분 좋게 찰랑이던 심장 박동도 이미 굳어버린 지 오래였다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자연스럽게 강선우의 손이 내 어깨에서 떨어졌다꽉 문 입술이 아프다고 느낄 새도 없이 강선우의 얼굴이 내 시야에 들어찼다오랜만에 보는 강선우는 그 때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그러니까 여전히 키가 컸고짧은 머리지만 잘생겼고그리고 여전히

 


넌 하나도 안 변했나 보다?”

…….”

이번엔 쟤야전정국?”


좆같았다나는 강선우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인상을 구겼다강선우의 거지같음이 무서움을 이겼다차라리 다행인 건가나는 생각보다는 떨리지 않는그러나 여전히 평소보다는 바짝 긴장하고 있는 내 모습을 숨기기 위해 손을 꼭 말아 쥐었다강선우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나는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내 자신에게 되뇌었다강선우는 상대할 가치가 없는 새끼라고그냥 무시하라고하지만 이대로 가기엔 억울했다어차피 이젠 무서울 것도 없고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그러는 너도 여전해?”

?”

여전히 급 따져서 사람 나누고 무시하냐고.”

 


내 말에 강선우의 여유롭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진다그 위로전정국의 얼굴이 순간 떠올랐다 사라졌다왜 지금 이 순간에 걔 얼굴이 떠올랐는지는 모를 일이다계속 옆에 있다 보니 그 대담함이 옮았나꼭 전정국을 비추고 있던 빛 한 줄기를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강선우는 말이 없었고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그러나 내가 가게 안으로 막 들어가려는 찰나뒤에서 들려온 강선우의 목소리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대단하네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

아니전정국이 너한테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으니까 내가 대단한 건가?”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틀어 강선우를 쳐다봤다어느새 웃는 얼굴을 되찾은 강선우가 날 여유롭게 쳐다보고 있었다그러나 지금 나는 강선우의 그런 얼굴에 신경을 쓸 처지가 못 됐다나는 인상을 구겼다이게 강선우를 더 기쁘게 만들 거라는 생각까지는 닿지도 못했다누가 한 대 세게 치고 간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강선우는 그런 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국이랑 나랑 친했어넌 모르겠지만.”

…….”

당연히 내 스토커에 대해서도 얘기해 줬지뭐 그런 사람이 다 있냐고 그러더라고.”

…….”

그때는 별로 관심 없어 보이더니직접 보니 관심이 생겼나 보네나도 내 얘기에 그렇게 관심 가질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는지잇새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심장이 불안정하게 뛰었다강선우의 말을 믿지 말라고강선우는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떠들어대던 내 안의 소리는 애초에 전정국 같은 애가 날 진짜로 좋아할 리가 없었는데 대체 뭘 기대했던 거냐고 빈정거리는 내 안의 소리에 의해 사라진 지 오래였다전정국에게 빌려 왔다고 생각했던 빛은 어느새 그림자가 되어 다시 내 몸을 타고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전정국과 강선우강선우에게 고백했던 나와나에게 고백한 전정국같은 곳에서이게 그냥 우연의 일치일까혹시 그런 건 아닐까그러니까전정국이,

 


태형 선배.”

난 이만 안에 들어갈게이따 보자.”

선우 선배들어가세요.”

 


나를 놀리기 위해 내가 강선우에게 고백했던 그 곳에서 나에게 고백한 거라면나한테 했던 말들이 다 거짓말이고나를 오늘 강선우가 오기로 되어 있었던 이곳에 데려오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던 거라면그렇게 생각하니 퍼즐이 딱 들어맞았다나는 손을 꽉 쥐었다손이 덜덜 떨렸다감정이 주체가 안 됐다태형 선배하고 나를 부르는 전정국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그러니까이게 다

 


선배죄송해요많이 늦었죠그동안 선우 선배랑 얘기 많이 했

재밌었어?”

?”

나 갖고 놀면서재밌었냐고.”

 


나는 고개를 들어 전정국을 마주했다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걸 간신히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제정신이 아니었다제정신일 수가 없었다배신감창피함비참함…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를 잠식시켜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지옥이었다.

 


넌 내가 우습지?”

선배.”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인기 많고사람들은 네 말 한마디면 껌벅 죽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그냥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했다말했다기보다 내뱉는 것에 가까웠다목소리가 떨려 나왔다머릿속이 엉망진창이다.

 


무서울 게 없었겠지그래서 심심했어심심하던 차에 과에 호모새끼 하나 있다니까 호기심이 생겨서 한 번 건드려 보고 싶었어?”

그게 무슨,”

씨발날 얼마나 좆같이 봤으면.”

 


참으려고 했는데버틸 수가 없었다결국 울음이 새어나왔다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좆같아안 그래도 비참한데안 그래도 최악인데그래도 여태까지 누군가의 앞에서 울었던 적은 없었는데지옥이었다악몽이었다그냥 다 사라져버렸으면 싶었다한 번 터진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재밌었겠지뒤에서 얼마나 웃겼을까.”

 


안 그런 척절대 마음을 열지 않을 것처럼 굴어도 제 뜻대로 움직여 주는 내가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결국엔 내가 강선우한테 그랬던 것처럼저를 좋아하게 된 걸 알고 얼마나 뒤에서 웃었을까나는 고개를 숙였다쪽팔리고 비참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하필왜 하필 오늘일까왜 하필 전정국일까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 않으려고 했었는데그런데도 온 거였는데전정국 때문에내가 전정국을 좋아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그 순간에도전정국이 정말로 날 좋아하는 거라고 믿고 싶어 했던 그 순간에도내가 전정국에게 고백하려고 했던 그 순간에도 전정국은 속으로 웃고 있었을까아니면 언제쯤 이 연극을 끝낼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을까.

 


네가 바라는 대로 다 됐네.”

선배.”

내 눈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

…….”

진짜 죽여버리고 싶을 거 같으니까.”

 


연극은 끝났다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처음부터 이게 내 현실이었으니까.   



+


해피 발렌타인데이! 인데... 오해와 연애 속 국뷔들은... 흑흑...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참을게... 다음 편은 정국이 번외가 될 예정이야! 금방 올게!!!

' > 오해와 연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해와 연애 06 完  (5) 2018.03.02
오해와 연애 05  (0) 2018.02.23
오해와 연애 04  (3) 2018.02.17
오해와 연애 02  (1) 2018.02.09
오해와 연애 01  (1) 2018.02.08

 

02

 

…….”

 

숨을 크게 들이쉬고 강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예상했던 대로 기묘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 감각이 너무나도 익숙해서, 나는 입술을 물었다. 그 때와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나를 가까이 아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나를 향해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나는 천천히 걸어가 늘 앉던 강의실 끄트머리에 앉았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을 하고 있지만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저번 학기에 이어 이번 학기에도 2학년 전공 필수 2개와 교양 하나(내가 신청한 것을 전정국이 따라 신청했다)가 전정국과 겹쳤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금 이 수업은 전정국과는 겹치지 않는 전공 수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총에서 있었던 일은 화제인 모양인지 주위에서 나를 힐끔대는 것이 느껴졌지만.

 

오기 싫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상황이었으니까 오기 싫었는데, 휴학하고 복학한 지 한학기만에 다시 휴학을 할 수는 없었고, 휴학을 할 수 있다 해도 이 소문이 다시 수그러들 때까지 휴학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일이었고,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그냥 온 거였다.

 

그 날 그렇게 개총이 파한 이후, 나는 주말 내내 전정국에게서 오는 연락을 싸그리 무시했다. 전화는 받지 않았고, 카톡은 미리보기로 뜨는 것조차 읽지 않았다. 종국에는 아예 핸드폰을 꺼 버렸다. 어차피 연락 올 사람도 없고.

 

처음에는 화가 났다. 내 좆같은 과거를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든 모르든 안 그래도 아직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 과 안에서 조용히 살고 싶었던 나를 비슷한 상황에 빠트린 전정국이 미웠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한 건지도 이해가 안 됐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고 화가 가라앉고 나자 신기했다. 물론 내가 강선우처럼 쓰레기 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애초에 고백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은 건 전정국이었으니 그럴 수도 없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고백하고 끝난 사이에 나한테 계속해서 연락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니. 역시 대단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랑은 별개로 나는 이제 내가 곧 마주해야 할 상황들이 충분히 좆같았으므로 이 상황을 어떻게 또 견뎌내야 할지를 생각해야 했다. 유경험자니까 그때보단 좀 나으려나. 허탈해서 웃음이 나왔다. 조용히 살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또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그것도 똑같이 과 내 최고 유명인사와.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강선우와의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러고 나니 자연히 지금 내 상황과 그때의 상황이 겹쳐 보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번에 고백 받은 것은 나고, 고백한 것은 전정국이라는 거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때 강선우에게 피해가 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은근히 추켜세워져 졌으면 추켜세워져 졌지. 그럼 이번에도 그럴까? 전정국은 게이새끼로 낙인찍히고 나는그런데 문제는 나도 게이라는 거지. 그리고 그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고. 몰랐대도 이제는 다들 알게 됐을 테니까. 그 때의 소문을 아는 내 동기들에 의해.

 

…….”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될 대로 돼라였다.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아웃사이더가 되고 싶었고, 이제 와서 학교생활에 미련도 없었다. 전정국이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걔가 저지른 거니 책임도 알아서 지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는 차분히 잠에 들었다. 핸드폰은 여전히 꺼 둔 채로. 그리고 학교에 왔다. 연락 올 사람이 없다는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는데, 핸드폰을 꺼도 일상생활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렇게 나를 힐끔대는 사람들을 무시하며 수업을 듣고, 다음 수업으로 가기 위해 강의실을 나서려는데 누군가가 나를 붙잡아 오는 것이 느껴졌다. 전정국이었다. 놀라울 건 없어서, 나는 무심히 전정국의 얼굴을 쳐다보고, 시선을 내려 전정국에게 잡힌 내 손을 쳐다봤다. . 아파. 내 무미건조한 말에 가뜩이나 불안으로 가득했던 전정국의 눈이 꼭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변했다. 비에 맞은 강아지 같았다. 토끼나.

 

선배…….”

…….”

잠깐 얘기 좀 해요.”

 

얘기. 해야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한숨을 부정적으로 해석한 건지 내 앞의 전정국이 안절부절 못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말고, 좀 조용한 데로 가자.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전정국은 가만히 있어도 시선을 끄는 사람인데, 불과 3일 전에 있었던 가십 때문에 현재 경영대 내 가장 핫한 인물일 나와 전정국의 투샷에 복도의 모든 시선이 나와 전정국에게 꽂힌 탓이었다.

 

*

 

선배, 미안해요. 진짜 그 때 거기서 고백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럼 언젠가 고백을 하려고는 했었다는 거네.”

선배를 좋아하는 건 진심이에요…….”

 

조용한 곳을 찾고 찾다 결국 온 곳이 건물 뒤 으슥한 곳이었다. 그 때까지 아무 말이 없던 전정국은 내가 담벼락에 기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하자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꺼낸 말이 저거다. ‘거기서 고백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선배를 좋아하는 건 진심이에요.’. 그 와중에도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전정국의 순수함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생각보다도 더 대단한 놈이었다.

 

선배가 너무 좋아서, 그런데 선배는 나한테 관심도 없는 거 같고. 그런데 지윤이가 선배가 좋다고 해서, 속상해서그런데 선배는 제 연락 하나도 안 받고,”

 

전정국의 말이 두서없이 이어졌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윤이는 또 누구고, 얘는 왜 여기서 제 마음을 고백하고 있는 걸까. 할 말이 있다는 게 이거였나. 나는 전정국의 말을 잘랐다. 하고 싶다는 말이 그거야? 내 무뚝뚝한 말에 전정국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축 처진 귀와 꼬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선배 곤란하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정말 진심이에요. 제가 그러면 안 됐는데,”

…….”

그치만 선배를 좋아한다고 했던 건 진심이에요. 지금 당장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술 취해서 마음에도 없는 얘기를 한 건 아니,”

정국아.”

 

나는 전정국의 말을 끊고 전정국을 쳐다봤다. 전정국의 커다란 눈이 나를 향했다.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전정국이 어려 보였다. 순간적인 착각을 진심과 혼동하는 게 틀림없었으니까. 그냥, 전정국은 누군가에게 이렇게 매달려 본 적이 처음이었던 거다. 자기를 싫어하는 것 같은 사람이 신기해서 다가왔다가, 그 사람이 천천히 마음을 열어 가는 게 기분 좋았겠지. 그래서 그 기분 좋은 감정을 좋아하는 감정이랑 착각한 거다. 어젯밤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난 네 말 안 믿어.”

…….”

너 그냥 착각하는 거야.”

 

호기심, 단순한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호감, 신기함. 그런 것들이랑. 나는 가볍게 얼굴을 쓸었다. 입 안이 썼다. 내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전정국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선배 혹시 화났어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안 났어. 화가 났었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아니었으니까. 그 말에 전정국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 눈을 맞추며 나를 불렀다. 태형 선배. 마주친 전정국의 눈은 내가 전정국을 마주했던 그 어느 때보다도 가라앉아 있었다. 그 생소함에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저 제 감정도 모를 정도로 바보 아니에요.”

…….”

어떻게 하면 믿어 줄 건데요?”

…….”

남준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저랑 선배랑 무슨 사이냐고.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선배랑 저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냥 그랬어요. 나 혼자 선배 좋아하는 거라고.”

 

. 나는 전정국의 대담함에 입을 벌렸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니. 그것도 술 취해서 그냥 헛소리한 거라고 넘길 수 있었던 걸, 다시 한 번 못을 박았다니. 그러나 나의 그런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정국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선배하고 얘기 한 후에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선배가 전화를 안 받아서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말했어요. 선배한테 피해 안 가게 하려면 그게 제일 나을 것 같아서. 사실이기도 하고.”

…….”

제가 부담스러우면, 그냥저 무시하시면 돼요. 그럼 소문 같은 건 금방 없어질 거예요. 제가 일방적으로 선배 좋아한 거고, 선배는 아무 잘못 없으니까. 제가 책임질게요.”

 

글쎄. 그런 걸로 소문이 쉽게 없어질 것 같진 않은데. 더더군다나 그 전정국이 날 좋아하는 거면. 그러나 나는 굳이 이 말을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다. 말해봐야 전정국의 죄책감만 커질 테니까. 이미 내 안에선 정리가 끝난 상황이었고,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전정국은 여전히 날 쳐다보고 있었다. 할 말 다 끝났으면 갈게. 내 말에 전정국이 입이 조그맣게 벌어졌다가, 닫혔다가, 다시 벌어졌다. 무언가 할 말이 남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할 말 있으면 해. 하고 말했다. 피곤했다. 이미 이번 수업은 늦어버린 것 같으니 어딘가로 가서 한숨 잘 생각이었다. 밥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 말에, 잠시 머뭇대던 전정국이 입을 열었다. 선배,

 

다 괜찮은데, 제가 잘못한 거니까 감당할 수 있는데.”

…….”

선배가, 제가 한 고백이 착각이라고 생각하는 건 싫어요.”

.”

저 진짜 선배 좋아해요.”

너 진짜

 

대단하다. 나는 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 반응에 전정국은 미간을 좁혔다. 나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꼭 어린아이가 칭얼대는 것 같잖아. 나는 찬찬히 전정국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기분 탓인진 몰라도 그 사이에 전정국의 얼굴이 조금 핼쑥해진 것도 같았다. 내 시선에 전정국은 입술을 깨문다. 전정국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제 마음을 착각이라고 말해서, 억울해 하고 있을까? 아니면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고 있을까.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살았을 거고, 일생을 살아오면서 대부분의 일들은 제 뜻대로 되어 왔을 전정국이 지금 이렇게 애타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문득 전정국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어쩌다가 나 같은 애랑 엮여서.

 

나 좋아한다는 소문 나 봐야 너한테 좋을 거 없어.”

왜요?”

 

몰라서 묻냐? 나는 눈으로 그렇게 물었다. 내 눈빛의 의미를 알아챈 듯, 전정국의 잘생긴 미간이 조금 더 좁혀졌다.

 

전 제가 선배 좋아한다는 거, 전교생이 다 알아도 상관없어요.”

…….”

사실인데 뭐.”

쓸데없는 오기 부리지 마.”

 

나는 건조하게 내뱉었다. 전정국은 어리다. 그리고 아직 뭘 모른다. 이런 간단한 대화에서도 전정국이 그동안 빛, 그것도 아주 밝은 빛 아래에서만 살아왔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전정국은 여전히 날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더 말할 수 있을까. 어차피 지금 전정국에겐 들리지도 않을 텐데. 내가 전정국의 눈을 피하자 전정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기 아니에요. 그럼, 믿어 줄 거예요?”

?”

내가 선배 좋아한다는 거, 온 전교생이 다 알게 돼도 내가 후회하지 않으면, 믿어 줄 거냐고요.”

…….”

제가 선배 좋아하는 거.”

 

쟤는 왜 저렇게 저거에 집착할까. 내가 괜찮다는데, 왜 제가 나서서 제 인생을 꼬려고 드는 거냔 말이다. 나는 다시 전정국을 쳐다봤다. 평소와는 다르게 가라앉아 있는 전정국의 눈빛은 단호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저한테는 중요해요.”

네 맘대로 해.”

 

이미 한 번 게이라고 소문났던 거, 두 번 난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전정국이 김남준에게 다시 한 번 못을 박은 만큼, 전정국이 나를 좋아한다는 소문은 어차피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고 전정국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내가 인정하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 것처럼, 자꾸 아니라고, 아니라고 하면 오기로라도 더 좋아한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그냥 그렇게 말했다. 전정국같은 애가, 순간적인 감정에 더 이상의 감정 소모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정말로, 내가 바란 것은 단지 그뿐이었다.

 

*

 

선배!”

 

그러나, 그 때의 나는 잠시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전정국이 생각보다도 더 대단하고, 대담한 놈이라는 것을. 나는 강의실 문 앞에 멍하니 서서 내가 늘 앉던 자리 옆자리에 앉아 나를 부르며 해맑게 웃는 전정국을 쳐다봤다. 자연히 강의실 안 시선이 나에게 모아졌다. 나는 얼떨떨하게 한 손을 올려 그런 전정국에게 응답했다. ,

 

어디 가요, 선배. 맨날 여기 앉았잖아요.”

 

그러고는 늘 앉았던 그 자리를 피해 다른 쪽 구석으로 가 앉으려는데, 그런 나에게 전정국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자리에 앉다 말고 전정국을 얼떨떨하게 올려다봤다. 교양에서야 상대적으로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수강 정정 전부터 내 옆자리를 꿰찬 전정국 때문에 어쩌다 보니 매일같이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들었다지만, 전공에서는 전정국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후배들과 동기들이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넘쳐났으므로 학기 초, 내가 강의실에 들어서기 전부터 전정국의 근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수업 직전에 들어와 수업이 끝난 직후에 바로 나가기 편한 문 근처 맨 뒷자리에 앉았고 전정국은 맨 앞쪽 가운데에 앉다 보니 자연히 교양에서 같이 앉아 수업을 듣고, 일주일에 세 번 이상 같이 밥을 먹어도 전공 강의실에서는 친한 티를 낼 일이 별로 없었는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붙어 다니다 보니 학기 말에는 나에게서 전정국을 찾는 사람이 꽤 있었지만), 지금 전정국의 행동은 그런 불문율을 깨는 것이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대충 그런 뜻을 담아 전정국을 올려다봤지만 전정국은 그런 내 눈빛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여전히 생글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여기가 좋으면 여기에 앉을까요?”

…….”

잠시만요, 가방 가지고 올게요.”

, 아니.”

 

나는 나와 전정국에게 모아진 강의실 안의 시선을 느끼며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당황스럽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내 눈빛에 전정국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그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문득 어제 전정국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내가 선배 좋아한다는 거, 전교생이 다 알아도 제가 후회하지 않으면 믿어 줄 거예요?’. 그러니까, 전교생이 다 알아도가 정말말 뜻 그대로의 의미였던 건가. 나는 갑자기 등 뒤로 끼치는 한기에 잘게 몸을 떨었다.

 

뭐야, 전정국. 둘이 사귀기로 한 거야?”

아뇨, 그냥 저 혼자 좋아하는 건데요.”

와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렇게 어정쩡한 상태로 멈춰 있는데, 선배 하나가 들어오면서 무심하게 던진 말에 전정국은 더 이상 간단할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대답한다. 그 대답에 선배는 역시나 담백하게 와우,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고. 저 선배는 나도 아는 선배였다. 민윤기. 강선우와의 일로 과 전체가 들썩거렸을 당시 2학년 학회장이었는데, 모두가 나에게 집중하며 힐끗거릴 때 유일하게 무심했던 선배였다. 딱히 나를 배려해서라기보다는 그냥 본인이 세상일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았지만 그 때의 나에게는 꽤 위안이 되었던 존재였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민윤기 선배를 쳐다보고 있자니 윤기 선배가 그런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나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갑자기 마주친 시선이 나는 아, 하고 멍청한 소리나 냈고.

 

태형이 오랜만이네.”

러게요. 선배 잘 지내셨어요?”

나야 뭐, 인턴이다 뭐다 정신없었지. 이 수업 들어?”

.”

자주 보겠네. 나 졸업하기 전에 밥이나 한 번 먹자.”

!”

 

오랜만이라는 인사에 그러게요, 하고만 대답하고 말기에는 어색해 잘 지내셨냐고 안부를 물었는데, 생각보다도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그 때. 그러니까 그 사건이 있었을 때 학교를 다니고 있던 사람하고는 처음 마주치는 거였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대하는 윤기 선배의 태도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윤기 선배가 픽 웃고는 나를 지나쳐 자리에 가 앉았다. 물론 그 때의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아니 오히려 윤기 선배가 소수인 거겠지만, 그래도 그 때의 나를 알고 있는 사람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대화할 수 있구나 싶어 기분이 조금, 괜찮아졌다.

 

선배.”

, ?”

가방 가져올게요.”

 

과거의 감상에 빠져 그렇게 멍하니 윤기 선배를 눈으로 좇고 있었는데, 옆에서 전정국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정국을 돌아보니 조금 굳은 얼굴로 나에게 말하고는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까까지만 해도 생글생글 웃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표정이 굳었지? 멍하니 생각하다가 이내 혹시, 하는 생각에까지 닿는다. 혹시 내가 민윤기 선배 조금 쳐다보고 있었다고 질투하는 건가? 설마?

 

선배.”

?”

 

내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가방을 가져와 내 옆에 자리 잡은 전정국이 잠시 머뭇대다가 말을 꺼낸다. 왜 갑자기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거지. 나는 자꾸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전정국의 질투에 대한 것을 잊어버리려 애썼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 그러니까, 이런 거 가지고 질투하는 거면 진짜진짜 날 좋아하는 거 같잖아. 나는 어정쩡하게 전정국을 쳐다본다. 전정국은 그런 나와 눈을 맞추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이내 입을 연다.

 

제 고백 거절한 이유가 혹시,”

…….”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어서 그런 건…….”

…….”

 

전정국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 전정국 대박.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쓸데없이 진지한 얼굴인 이유가,

 

아니죠?”

 

질투맞나 보다.

 


' > 오해와 연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해와 연애 06 完  (5) 2018.03.02
오해와 연애 05  (0) 2018.02.23
오해와 연애 04  (3) 2018.02.17
오해와 연애 03  (3) 2018.02.14
오해와 연애 01  (1) 2018.02.08




태형 선배.”

 

그 날, 전정국은 꽤 많이 취해 있었다. 원체 주량이 세기도 한데다가 술을 그렇게까지 취할 정도로 마시는 애가 아니었는데, 그날따라 내 앞에 앉은 전정국은 무언가 고민거리가 있는 듯 연거푸 술을 들이켰었다. 나는 그런 전정국에 맞춰 주다가, 말리다가, 결국엔 포기하고 전정국이 술잔을 들 때마다 물과 술을 번갈아 가며 마시고 있었고.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평소의 전정국 같았으면 내가 굳이 말을 시키지 않아도 혼자서 조잘조잘 떠들어 댔을 텐데, 그 날 전정국은 나에게 말을 시키지 않았다. 왜 그러냐고,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겨우 한 학기 동안 말 몇 번 튼 것 가지고 친한 척 오지랖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질까 싶어 관뒀었고. 그래서 나는 그냥 술잔을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면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싶어서. 그래서 문득, 술을 마시다 말고 고개를 들어 나의 눈을 마주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전정국에, 나는 반가움까지 느꼈었다. 이제 왜 그렇게 오늘따라 이상하게 굴었던 건지 이야기를 해 주려나 싶어서. 그런데,

 

저 선배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니, 좋아해요.”

 

한순간이었다. 전정국이 잔뜩 취기가 오른 빨간 얼굴로, 그러나 표정은 한없이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 그 누구도 아닌 제 앞에 앉은 나, 김태형을 똑바로 쳐다보며 뱉은 문장에 온갖 소리들로 시끄럽던 술집 안의 소음이 한 순간에 멎었다. 나는 마시려던 술잔을 채 내려놓지도 못 한 채 그대로 굳었고, 내 눈앞의 전정국은 그 말을 했으니 이제 여한이 없다는 듯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숨 막히는 정적 속 술집 안의 모든 시선이 나를 향했다가, 전정국을 향했다가, 다시 나를 향했다.

 

얘 방금 뭐라고 한 거…….”

 

꽤 오랜 침묵을 뚫고, 3학년 회장 김남준이 입을 열었다.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내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대학 생활이, 다시 한 번 지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오해와 연애

 

내 대학 생활은 시작부터가 꼬여 있었다. 나는 쓸데없이 어린 나이부터 나의 성적 지향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 인간이었고, 그에 따라 방황도 좀 하고, 탈선과 일탈도 좀 했어야 했던 나의 청소년기는 내 특별한 성적 지향성에 대한 고민만으로도 벅차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고뇌와 번민을 하는 것으로만 채워졌다. 여자친구도, 그렇다고 남자친구도 사귈 수 없었던 나는 19년을 그대로 솔로로 지냈고 남들이 연애도 하고, 질풍노도의 시기도 보내는 그 시간들 동안 딱히 이렇다 할 취미 없이 공부만 하며 보냈다. 그렇게 재미없게 살았으니 소위 명문대라 불리는 대학교로부터 무리 없이 합격 통보를 받아낼 수 있었고, 대학 합격이 확정되고 난 후 나는 농담으로라도 친하다고는 하지 못할 내 고등학교 친구들 중 그나마 유일하게 친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박지민과 (시큰둥하게 반응해도 유일하게 나에게 계속 살갑게 말을 붙여 주는 배알 좋은 놈이었는데, 이런 박지민과도 과는 다르지만 같은 학교에 합격하게 되지 않았다면 아마 연락이 끊어졌을 것이다) 처음으로 내 민증을 보여주고 산 맥주를 마시며 결심했다. 대학 생활은, 내 하나밖에 없는 대학 생활은 이렇게 시시하게 보내지 않겠노라고. 연애도 해 볼 것이며, 그 누구보다도 지루하지 않게 보내겠다고.


그래서 나는 노력했다. 과에서 주최하는 모든 행사에 참여했고, 학생회 같은 건 하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내 존재를 과에 어필했다. 그 즈음 나는 내 성적 지향성에 대해 확고한 결론을 내린 상태였고, 연애도 꼭 해 보겠다는 내 목표에 따라 자연히 호감이 가는 사람도 찾게 되었다. 그 때 만난 게 걔였다. 강선우.


강선우는 입학과 동시에 소소하게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큰 키에 잘생긴 얼굴. 집안도 좀 사는 것 같았고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덕분에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인기를 끌었고 자연스레 1학년 학회장을 맡게 되었다. 과에 열심히 참가하려고 했던 나와도 자연스럽게 많이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친해졌다. 친구라고는 박지민밖에 없었던 내게 강선우는 뭐든지 처음이었고, 강선우는 그런 나를 신기해하며 잘 챙겨줬다. 나는 내 성적 지향성에 따라 자연히 미팅 같은 건 나가지 않았고 그건 강선우도 마찬가지였다. 나야 게이라서 그렇다지만, 걘 왜? 그래서 나는, 걔도 혹시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선우는 여자동기 및 선배들에게 인기가 폭발적으로 많았음에도 그 누구와도 사귀지 않았다. 오히려 나와 있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이런 상황에서, 걔를 좋아하는 내가 착각하지 않고 버티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신중했던 나는 1학기 내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결론을 내렸다. 강선우도 게이이고,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온 이후 첫 기말고사가 일주일 남짓 남은 어느 날, 나는 학교 앞 어딘가의 술집 안에서 조금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로, 강선우에게 고백했다. 너를 좋아한다고. 강선우는 내 말에 눈을 크게 떴고, 나는 그런 강선우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강선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지옥과 천국을 오갔다. 그리고 그 긴 침묵 후에 걔가 뱉은 말은,

 

너 게이야?’

 

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강선우를 쳐다봤다. 강선우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난 깨달았다. 내가 내 상상 속에서 만들었던 강선우와 현실의 강선우는 아예 다른 사람이었음을. 그는 나를 보기 좋은 장식품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옆에 두면 제 급이 올라가는 명품 같은 걸로. 미팅이나 소개팅에 나가지 않았던 것은 그런 곳에 나가지 않음으로서 제 희소가치를 올리려는 의도에서였고 그 누구와도 사귀지 않았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했던 것도, 과내에 저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급의 친구로 날 골랐던 것이었을 뿐이다. 나를 값비싼 명품쯤으로 보던 강선우의 눈빛은 나의 고백 이후에 달라져 있었다. 저보다 아래의 것을 보는 눈빛으로.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 했었나. 그 말이 지금 이 상황에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선우는 나를 그렇게 봤다. 내 고백이, 걔한테는 차라리 더 잘 된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자신보다 아래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것이었으니까.


그 뒤의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 월요일 아침 학교에 간 나는 나를 향해 수군거리는 동기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김태형 게이래.’ ‘선우한테 고백했다가 차였대.’ 낮은 목소리로 조용하게 말한 것이 전혀 소용없을 정도로 똑똑히 내 귓가를 파고든 말들이었다. 강선우는 사실에 허풍을 섞어 동기에게 고민상담 하듯 그 날의 이야기를 흘렸고 소문은 점점 부풀려져 종국에 이야기는 나에게는 관심도 없는 강선우를 내가 한 학기 내내 스토커처럼 쫓아다닌 것처럼 변해 있었다. 해명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강선우는 이런 사회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제 손바닥 위에 놓고 굴릴 줄 아는 인간이었고, 나는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못한 인간이었다. 동기들은 날 슬금슬금 피했고 나는 어떻게 끝났는지 모를 기말고사를 마치고 바로 휴학했다. 끔찍했던 2주였다.


그리고 나는 반수를 시작했다. 부모님에겐 더 좋은 학교를 가고 싶어서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문제집을 푸는 와중에도 강선우와, 날 보던 동기들의 눈빛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악몽을 꾸다가 땀을 흠뻑 흘리며 잠에서 깨는 것은 일상이었다. 결국 그 해 본 수능에서 나는 더 좋은 대학은커녕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에도 못 올 점수를 받았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복학하지 않았다. 대신 군 휴학을 신청했다. 2년이 지나고 나면, 소문이 수그러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군대를 다녀왔고, 복학했다. 다행히도 강선우는 없었다. 얼핏 듣기로는 2학년까지 다 마치고 군대를 간 것 같았다. 당장 마주칠 일은 없을 거라는 게 위로가 됐다. 학교를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마주치겠지만.


1학년도 채 다니지 못하고 도망치듯 휴학계를 냈기 때문에 23살에 나는 아직도 1학년이었다. 동기들은 전부 2,3학년 수업을 듣고 있을 테니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즐거운 대학 생활을 보내겠다는 1학년 때의 다짐은 이미 빛이 바래 구석에 처박힌 지 오래였고 그냥 조용히, 고등학생 때 그랬던 것처럼 학점이나 잘 받으며 무사히 졸업하는 것만이 내 목표가 되었다.


다행히도, 내가 신청한 1학년 수업에 내가 아는 얼굴은 없었고 그 사실에 소소하게 감사하며 강의실 한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참이었다. 멍하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강의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자연스레 고개가 소란스러워진 쪽으로 돌아갔다. 소란의 근원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인영 하나가 강의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주위 여자애들이 하는 정국 선배인가 봐.’ ‘, 그 말로만 듣던?’ 따위의 말들이 내 귓가에 가볍게 안착했다. 아직은 어색한 듯 강의실로 들어오며 인사하는, 흐릿했던 인영이 조금 더 선명하게 잡혔다. 어딜 가도 눈에 띌 만한, 잘 생긴 얼굴. ‘잘 지냈어?’ ‘이 수업 들어?’ 하는, 주위에서 건네는 호의 담긴 안부들에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기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저 익숙한 풍경이 꼭, 예전 1학년 때를 떠올리게 했다. 강선우가 꼭 저랬으니까. 어딜 가도 주목을 받았고, 호의 어린 말들을 받았었으니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우스운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불편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쨌든 나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

 

옆에 앉아도 돼요?”

 

그런데 이렇게 다시 마주칠 줄이야. 수강신청에 실패해 별 생각 없이 시간표에 맞춰 넣었던 교양 시간이었다. 나는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나에게 말을 걸어 온 인영을 올려다봤다. 그 얼굴을 기억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 번 보면 잊기 힘들 정도로 잘 생긴 얼굴이었으니까. 나는 잠시 아니라고 할까, 그러라고 할까 고민하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쳐다본 것 같아서였다. 잘 생긴 얼굴이 씩 웃으며 내 옆자리에 자리를 잡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이어폰을 다시 껴도 될까 잠시 고민했다. 수업이 시작하기까지는 7분 이상이 남아 있던 터라 강의실엔 아직 자리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굳이 이 자리에 앉아야 했을까, 얘는. 이 자리가 마음에 든 거라면 다음부터는 다른 자리에 앉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이어폰을 귀에 구겨 넣었다. 더 이상 말을 걸지 말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러나 그 행동은 옆의 인영이 나를 톡톡 두드리면서 무시당했다. 나는 다시 이어폰을 빼고 옆을 쳐다봤다. 잘 생긴 얼굴이 여전히 나를 보며 살짝 웃고 있었다.

 

경영학과죠?”

…….”

우리 이거 말고도 같은 수업 듣는 거 같은데. 기업과 경영.”

 

모를 리가 없었다. 아까 처음으로 얘를 봤던 수업이었으니까. 전필이니 나를 경영학과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 그것도 맞았다. 그런데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을 걸다니, 얘도 참 친화력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무심하게 반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앞의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살갑게 말을 걸어 왔다.

 

“1학년, 맞죠? 제가 새내기를 잘 몰라서.”

…….”

, 소개가 늦었네. 제 이름은 전정국이에요. 1학년은 맞는데, 나이는 22. 1학년 1학기 마치고 바로 군대 갔다 와서.”

 

1학년은 맞는데, 새내기는 아니라서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반응하지 못하고 있으니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신이 나서 묻지도 않은 제 소개를 한다. 나보다 한 살 어린 걸 보니 나보다 1년 후에 입학한 것 같았다. 말하자면 내가 선밴데, 후배를 챙겨 주려는 선배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그냥 가만히 있었다. 굳이 설명하기도 귀찮았고. 어차피 오늘 보고 말 사람인데. 얘를 보고 있으면 자꾸 강선우가 떠올라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얼굴도, 분위기도. 닮은 구석 하나 없는데, 그냥 잘났다는 게, 과내에서 시선을 끄는 존재라는 사실 때문인 것 같았다. 이쯤 되면 피해의식 아닌가 싶다.

 

이 교양에는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친하게 지내요. 밥 사줄게요.”

괜찮은데.”

, 내가 너무 들이댔나?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아도 돼요. 그냥 과 선배가 후배 밥 사주는 거니까,”

 

전정국이 당황하며 말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나는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다시 앞을 봤다. 수업 내내 전정국이 옆에서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꼭 대형견이 주인 눈치 보는 것처럼. 나 같은 거 별로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얘도 참 인생 피곤하게 산다 싶었다. 이 정도로 싸가지 없게 대했으면 그냥 무시할 법도 한데. 뭐가 아쉬워서. 수업이 끝나고, 나가려고 짐을 챙기는 동안에도 옆에서 안절부절 못 하고 있길래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부담스러운 거 아니라고. 그냥 정말로 괜찮아서 그런 거라고. 그러자 아하고 멍청한 소리를 낸다. 그 후에 뭔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긴 했는데, 그냥 먼저 가볍게 목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어딜 가도 시선을 끄는 사람의 옆에 있어 봤자 피곤해지기만 한다. 주목받는 기분은, 1학년 때 느낀 걸로 충분했다.

 

*

 

태형 선배!”

 

그러나 어쩐 이유에서인지, 전정국은 나를 쉽사리 놓아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정정 기간 동안 교양이든 전공이든 출석하지 않았고 정정기간이 끝난 후에도 전정국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수업 시간이 시작하기 직전에 강의실에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았는데, 전공에서는 그럭저럭 성공하는 듯 보였던 내 전략이 교양에서 전정국이 내가 강의실에 들어섬과 동시에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탓에 산산이 부서져 내렸기 때문이다. 꽤 큰 목소리로 날 부른 탓에 나는 순간적으로 온 강의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고 결국에는 천천히 전정국의 옆자리에 가 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새 호칭까지 변한 후였다. 얘는 웃는 얼굴로 사람 엿 먹이기가 취미인가. 본인은 전혀 악의가 없는 것 같지만.

 

왜 저한테 말 안 했어요. 저 진짜 선배가 새내기인 줄 알고

…….”

그 땐 죄송했어요, 진짜. 제가 밥 살게요.”

 

아니 얘는 밥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나는 역시나 괜찮다는 말로 전정국의 제안을 가볍게 밀어내려 했지만 전정국의 눈빛은 단호했다. 선배, 진짜 죄송해요. 밥 사게 해 주세요. 제가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요. 그 간절함이 깃든 단호함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밥 한 번 먹고 떨어지게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오늘은 얼떨결에 전정국의 옆자리에 앉았지만, 다음부터는 반드시 따로 앉을 거라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선배!”

 

하지만 전정국은 내 생각보다 끈질기고 눈치도 없는 놈이었다. 아무리 늦게,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강의실에 들어와도 전정국은 쉬는 시간 내내 강의실 문만 쳐다보고 있는 건지 내가 들어오는 걸 귀신같이 알아챘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나를 부르며 나를 위해 제 옆자리를 맡아두었음을 어필했다. 이쯤 되니 쟤의 정신세계가 궁금해졌다. 첫 날은 아는 사람이 없어 나에게 아는 척을 했다 해도, 지금은 (전정국이 이 교양을 듣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강 정정 기간에 이 교양을 넣은) 같은 과 여자 동기 및 후배들이 꽤 있는데도 굳이 왜 나를 제 옆자리에 앉히려고 하냐는 거다. 그 여자애들의 부러움과 의아함이 섞인 시선을 받고 있자니 절로 피곤해졌다. 그래서 언젠가는 전정국에게 내 자리 굳이 안 맡아줘도 돼, 하고 말했더니 이 자리 별로예요? 나름 꿀자리 잡으려고 한 건데그럼 선배는 어디가 좋아요?’ 하고 눈치 없이 물어 오는 것이다. 그 순수한 호의를 차마, ‘나 너랑 같이 앉고 싶지 않아.’ 하고 뿌리칠 수가 없었다.

 

선배는 학식이 왜 좋아요?”

 

전정국은 나에게 끝없이 말을 걸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대답해주고. 수업을 핑계로 연락을 주고받고, 같이 과제를 하고 밥을 사주고, 얻어먹고. 그러기를 몇 달,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나와 전정국은 어느새 일주일에 세 번 꼴로 밥을 같이 먹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단언컨대 내가 원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전정국이 배알도 없는 놈이라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난 최대한 무뚝뚝하게 전정국을 대했고 가끔은 내가 생각해도 내가 너무 싸가지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전정국은 그런 나를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그냥 그게 내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건 그런 나를 왜 굳이 제 옆에 두려고 하냐는 거였다. 뭐가 아쉬워서. 가끔 전정국은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요 선배저랑 밥 좀 먹어 줘요.’ 라는 말을 나와 같이 밥을 먹기 위한 이유로 제시했지만 그게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과 동기·후배들도 알고, 하다못해 저기 지나가는 개새끼도 아는 사실이었다. 전정국이 먹자고만 하면, 아니 굳이 먹자고 하지 않아도 전정국과 밥을 같이 먹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과 안팎으로 넘쳐났으니까. 그러나 저기 너랑 밥 먹고 싶어서 며칠째 타이밍만 노리고 있는 쟤랑 먹어.’라고 말할 정도로 오지랖이 넓지 않은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것이다. 한 학기의 절반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자니 이제 과 내에서 나는 전정국과 한 쌍으로 통했다. 걔하고는 고작 수업 두 개밖에 겹치지 않는데 전정국이 아기오리마냥 나를 쫓아다닌 결과였다. 주목을 받지 않고 싶었던 나로서는 아주 거지같은 상황이었고.

 

멀리 나가기 귀찮아.”

그래도 가끔은 밖에 나가서 맛있는 거 먹어요! 제가 살게요.”

다른 애랑 가서 먹어.”

선배랑 먹고 싶으니까 그렇죠~”

 

쟤는 진짜 밸이라는 게 없나? 전정국은 이 정도는 익숙하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볶음밥을 입에 욱여넣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볶음밥을 씹다 말고 전정국을 쳐다봤다. 이쯤 되니 전정국이 대단하게까지 느껴졌다. 이렇게 싸가지 없게 구는 사람에게 저렇게까지 대할 수 있는 전정국의 인성에 박수를 쳐 주고 싶을 정도였다.

 

네 맘대로 해라

? 진짜요? 먹어 줄 거예요? 앗싸. 집에 가서 맛집 검색해야지!”

 

선배가 먹고 감탄할 정도로 맛있는 집으로 알아 올게요! 내 말이 마치 A+을 주겠다는 교수의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뻐하며, 전정국은 제 앞에 놓인 돈가스를 열심히 썰었다. 그런 전정국이 어이없으면서도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쟤는 내가 어디가 저렇게 좋을까. 대단한 정성이다.

 

선배 지금 웃은 거예요?”

…….”

선배 웃는 거 처음 보는 거 같아요

 

짱이다. 사진 찍어도 돼요? 반짝반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하는 말에 나는 다시 표정을 굳혔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거나 먹어. 그 말에 전정국은 다시 시무룩해져 돈가스를 썰었다. 금세 다시 회복하고 조잘대긴 했지만.


그러니까, 전정국은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는 애였다. 주목 받는 것이 익숙하고, 어딜 가나 사랑받는 아이. 좋은 집안, 좋은 학교, 잘생긴 얼굴, 밝은 성격. 그 어느 곳에 가도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겠지. 그러니까 나 같이 배배 꼬인 인간한테도 인정을 베풀 수 있는 거일 거고. 그래서 혹시나 전정국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연애 감정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나에게 이렇게 달라붙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전정국은 누군가가 자기를 정말로 미워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하는 거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학번은 달라도 학년은 같은, 같이 복학한 처지에 과에 어울리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을 수도 있고. 전정국 같은 인간은 누군가가 무리에서 떨어져 있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니까.

 

왜 그렇게 봐요?”

밥 안 먹냐?”

 

그렇게 내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고 나니, 전정국을 대하는 게 훨씬 더 쉬워졌다. 시종일관 얼굴을 굳히고 있어서 그런지, 우려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대로라면 그냥 적당히 전정국과 어울리면서 조용히 학교생활을 해 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걸어 주는 전정국의 마음씀씀이가 기특하기도 했고.

 

선배가 그렇게 절 보고 있는데 어떻게 밥을 먹어요.”

…….”

심장 떨려서.”

 

그래서 나는 이런 전정국의 말들을 전부 농담으로 치부했었다. 전정국은 아쉬울 거 하나 없는, 정도正道의 길만을 걸어왔고, 걸어 갈 사람이었으니까. 배배 꼬인 나와는 다른.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에게 반하는 일 같은 건, 정말로 일어날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듬해 봄 만장일치로 떠맡듯 2학년 학회장을 맡게 된 전정국이, 가지 않겠다는 나를 며칠에 걸쳐 설득해서 오게 만든, 그것도 내가 강선우에게 고백했던 그 술집에서 진행된 1학기 개강총회에서 술에 취해 나에게 고백하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 > 오해와 연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해와 연애 06 完  (5) 2018.03.02
오해와 연애 05  (0) 2018.02.23
오해와 연애 04  (3) 2018.02.17
오해와 연애 03  (3) 2018.02.14
오해와 연애 02  (1) 2018.02.0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