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좆같은 연애

 

이 비극적인 이야기의 서문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까. 그래, 내가 17살에 했던 첫 연애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물론 내 첫 연애가 17살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연애가 그 연애였고 좆같은연애의 시작 역시 그 연애이기 때문에 편의상 첫 연애라고 칭하도록 하겠다.

나는 잘생겼다. 아니 비극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대놓고 초장부터 이게 무슨 재수 없는 소리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이것은 하늘을 우러러 한 치의 거짓과 과장이 없는 팩트다. 나는 잘생겼다. 나의 이 잘생김은 내가 유치원에 다니고 있을 때부터 빛을 발했는데, 어느 정도냐면 당시 내가 다니던 유치원에는 같은 달의 생일인 아이들을 하루에 몰아 합동 생일 파티를 열어 주는 관습이 존재했는데 그 컨셉이 전통 결혼식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사이비 종교 단체도 아니고 웬 원생들의 의사 따위는 사뿐히 무시하고 치러지는 합동결혼식인가 싶긴 한데, 그 때 나를 포함한 아이들은 어렸으므로 딱히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았고 그 의식은 매 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합동결혼식에 의의를 제기한 아이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나를 사모하던 한 여자아이였다. 내 생일은 12월이었고 그 여자아이는 생일이 12월이 아니었기 때문에 테크니컬리 그 여자아이와 나는 합동결혼식을 치를 수 없었다. 그러나 나를 향한 그 여자아이의 의지는 꽤나 확고했고 절대로 내 옆에 제가 아닌 누군가를 세울 수 없다는 그 아이의 땡깡에 결국 그 아이는 나와 합동결혼식을 치룰 수 있었다. 지금 와서는 그 여자아이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여자아이가 ‘()형아, 나랑 나중에 꼭 결혼해야 해.’ 하는 말에 내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나 역시 그 여자아이가 조금은 마음에 들었던가 보다. (생각해 보니 그 때의 사진이 남아 있을 텐데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모르겠다. 찾게 되면 증거자료로 후첨하겠다.)

, 이야기가 잠시 딴 곳으로 샜는데 아무튼 그 정도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잘생겨서 인기가 많았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유치원과 초등학교 때의 가벼운 썸도 연애로 친다면 첫 연애도 17살이 아니었던 거고. 그러나 언제까지고 지속될 줄만 알았던 나의 이 순탄한 인기 가도와 연애는 내가 17살이 되던 해 시작과 동시에 찬란하게 무너졌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나의 인기 고공행진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고, 나의 연애가 이때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01. 김태형의 사정

 

위에 말했듯이 나는 인기가 많았고 살면서 단 한 번도 고백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밀려드는 고백을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초등학교 때 나를 두고 경쟁하는 여자아이들의 치정싸움에 지친 나는 여자아이들에게서 벗어나겠다는 일념 하에 남자 중학교로 진학했고 여자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혹시 이게 문제였을까? 그렇게 내 연애의 암흑기를 끝내고 나는 공학으로 진학했고 입학한 지 3개월도 안 되어 한 여자아이에게 고백을 받았다. 그 아이는 2반에서 반장을 맡고 있을 만큼 인기 많고 똑똑하고 예쁜 여자애였다. 그 때의 나는 연애가 하고 싶었고, 그 여자아이는 충분히 괜찮았기 때문에 나는 웃으며 그 고백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는 나의 연애 암흑기가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그게 내 진정한 연애 암흑, 아니 칠흑기의 시작일 줄.

 

미안해, 태형아. 우리 헤어지자.’

?

 

그 여자아이와 사귄지 정확히 101일이 되던 날이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갑자기 왜? 나는 재빨리 어제의 데이트를 리와인드하기 시작했다. 어제 100일 기념으로 영화를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선물도 주고받고 어둑해진 공원에서 처음으로 로맨틱하게 가벼운 뽀뽀도 했다. (키스까지는 뭔가 부끄러운 마음에 하지 못했다) 그 후엔 여자애의 집 앞까지 데려다 줬지. 여자애는 날 보고 웃으며 조심히 들어가라고 했고, 나 역시 웃으며 뒤돌아섰다. 그리고 집. 모든 게 완벽했는데!? 나는 되감기를 마치고 다시 ()여친을 쳐다봤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선물이 마음에 안 들었나? 아님 영화가? 어제 먹었던 스파게티가 입에 안 맞았나? 필사적으로 말이 되는 이유들을 다 갖다 붙여봤지만 그 중에 납득이 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였다. 그러나 내 어이 털린 얼굴에도 그 여자아이의 표정은 단호했다. 미안해.

 

아니, 이유라도 알려 줘.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미안해.

 

전 여친은 입술을 깨물고, 멍하니 서있는 나의 손에 내가 그녀에게 주었던 100일 반지를 꼭 쥐여 주곤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멀어져 갔다. 나는 차마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내가 차이다니. 그것도 이유도 모르고. 나는 멍하니 내 손에 쥐여진 반지를 내려다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에 이니셜이나 새기지 않는 건데. 나는 반지를 손에 쥐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엎어졌다. 슬픔이나 억울함보단 의아함이 더 컸다. 대체 왜? 좋았는데? 우리 뽀뽀도 했잖아. 키스도 아니니 내 스킬이 부족해서도 아닐 거고. (단순한 입술 박치기에도 스킬이 필요한 것인가?!) 그렇게 나는 그 날 밤을 꼬박 새웠다. 나는 원래 궁금증이 있으면 잠을 잘 못 자는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문자답을 해 봐도 내 궁금증은 혼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 다음 날 친구에게 물어 봐도 그 해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의문은, 꽤나 가까운 시일 내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풀렸다.

 

대박. 니 전 여친, 레즈래.’

 

? 이별의 아픔이 채 씻기기도 전에 들려온 청천벽력에 나는 멍하니 칠판을 쳐다보다 그대로 박지민을 쳐다봤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그러나 박지민의 눈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더 말해보라는 뜻을 담아 박지민을 쳐다봤고 박지민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 학교에 소문 다 났어. 1반 애가 서유진(17, , 태형의 전 여친)이랑 한소희(17, , 3반 반장)랑 불 꺼진 미술실에서 뽀뽀하는 거 봤대.’

말도 안 돼.’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 2반으로 향했다. 설마. 그럴 리가. 5반에서 2반으로 가는,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에이, 헛소문이겠지. 설마. 말도 안 돼. 류의 말들을 생각하며 애써 웃었다. 설마, 나랑 헤어진 이유가 갑작스럽게 성 지향성을 깨달았기 때문이겠어? 그러나 심호흡 후 2반 문을 차분히 열어제낀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3반 반장과 보란 듯이 손을 잡고 있는 내 전 여친이었다. 나와 100일을 사귀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환한 미소를 지은 채로.

 

서유진.

태형아.

잠깐 얘기 좀 해.’

 

나는 나도 모르게 성큼 걸어가 전 여친의 앞에 섰고 내 전 여친은 꽤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봤다. 여전히 손은 한소희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나는 잠시 시선을 꼭 맞잡은 두 손에 두었다가 다시 서유진을 쳐다봤다. 서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인적이 드문 학교 뒤편으로 갔다. 서유진이 나에게 고백을 했던 그 곳으로. 아니 얘는 아는 장소가 여기밖에 없나? 장소 선택을 해도 참. 그러나 나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서유진이 입을 엶과 동시에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미리 말 못 해줘서 미안해.

…….

너무 놀랄 것 같아서 말 못 했어. 나 소희 좋아해.’

 

확인 사살 완료. 나는 뭐라 대꾸도 못한 채 그대로 굳었다. 사실 서유진이 나한테 미안할 건 없다. 이미 헤어진 마당에 뭐가 미안해. 물론 너무나 갑작스럽게 차인데다가 일주일도 안 돼서 새로운 애인을 사귀긴 했지만. 나는 그냥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던 건데 서유진은 그런 내 태도를 다른 쪽으로 해석했던 건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도 몰랐어.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건 줄 알았어. 태형이 너는 멋있고, 예쁘고, 잘생겼으니까. 너랑 사귀다 보면 소희를 잊을 수 있을 줄 알았어.’

…….

그런데너랑 어제 뽀뽀를 하고 나니까 알겠는 거야.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건 소희였다는 걸.

…….

태형이 너에겐 너무 미안해. 뭐라 할 말이 없다…….

 

나는 어이가 없어 절로 벌어지는 입을 채 다물지도 못한 채로 서유진을 쳐다봤다. 딱히 화가 났던 건 아니다. 그냥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뽀뽀가한 중생으로 하여금 자신의 진정한 성 지향성을 깨닫도록 인도했다는 것인가? 내 소중한 첫 뽀뽀가? 이걸 좋아해야 돼, 말아야 돼? 나는 입을 뻐끔뻐끔 움직였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나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고 그래서 나는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는, 찌질한 전 남친의 표본 같은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날 좋아하긴 했니?’

?’

…….’

좋아했어. 친구로.’

…….’

태형아, 넌 정말 나한테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야.’

 

너에게 난 그저 연인이 아닌 우정이 편했을지도 몰라 I’m a love loser너 땜에 너무 아파 너 땜에 너무 아파 너 땜에 너무 아파 헷갈리게 하지 마……. 그 순간 언젠가 들었던 남자 아이돌의 노래 가사가 머릿속에서 재생됐고 나는 고개를 떨궜다. 이 노래가 이렇게 슬픈 노래였던가…….

 

태형아.’

행복해라…….’

 

결국 끝까지 인소 남주 같은 모먼트로 나는 눈물을 삼키며 돌아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웬 허세인가 싶은데, 그 땐 그게 최선이었다. 그렇게 둘은 내가 졸업할 때까지도 알콩달콩 사귀었고 나는 그 충격에 한동안 연애를 하지 못했다. 이것이 나의 첫 연애 스토리이다.

 

, 그럼 두 번째로 넘어가 보자. 나의 두 번째 연애는 이듬해 여름이었다. 원래도 잘생긴 걸로 유명했던 나는 레즈의 전 남친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더욱 더 유명해져 전교생이 아는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 학교에서 나는 차마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귈 수 없었다. 사실, 그럴 생각도 못 했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그 일이 나에게는 꽤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상처는 새로운 사랑으로 치유하는 법. 나의 두 번째 여친은 나보다 한 살 연상으로, 독서실에서 만났다. 그녀는 호랑이도 무서워한다는 고3이었지만 처음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고백했고 나는 그 고백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고 3이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데이트를 자주 하지는 못했으나 우린 나름 깨가 쏟아지는 연인이었다. 공부를 하다 잠시 쉬러 나왔을 때 삼각김밥과 라면을 나눠먹으며 사랑을 키우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연인. 그렇게 데이트다운 데이트는 몇 번 하지 못한 채로 그녀는 수능을 치렀고 그녀가 지망하던 모 여대에 붙은 이후 우리는 매일같이 붙어 다니며 데이트를 했다. 그녀가 대학생이 된다는 사실이 조금 불안하기는 했으나 그녀가 여대로 간다는 사실이 나에게 위안이 되어 주었고 그렇게 그녀로 인해 상처만 남은 나의 첫 연애가 치료되는가 싶었다. 그러니까, 3월이 지나 4월의 초입 그녀의 학교 앞 카페에서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받기 전까지는.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

그리고,’

아니,’

여자야.’

 

방금 뭐라고 했……. 나는 그녀가 다니는 여대 앞 카페에 앉아 마시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그대로 다시 컵으로 리필했지만 그녀는 그런 내 모습에도 눈을 피하지 않고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사귀는 건 아니야.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해야 할 것 같았어.’

누나, 그게 무슨 말

미안해, 태형아.’

 

세상이 나한테 이럴 수가 있을까? 신은 정녕 나를 버린 것인가? 여대로 가서 안심했더니. 여대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미팅 한 번 나가지 않기에 내심 안심하고 좋아하고 있었더니. 세상에 여대로 간 것이 가장 큰 위험 요소였을 줄이야.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고 2분 전까지만 해도 내 여친이었던 전 여친은 여긴 내가 낼게,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이 때, 나는 또 하나의 명대사를 남기게 된다.

 

날 갖고 논 거예요?’

태형아.’

…….’

 

너 담담 그저 당당 날 차 빵빵 뭐니 뭐니 난 네게 뭐니……. 장난해 너 도대체 내가 뭐야 만만해? 날 갖고 노는 거야……. 1년 전의 악몽이 다시 나를 슬금슬금 휘감기 시작했다. 그 남자아이돌의 노래 역시 다시 내 머릿속에서 리플레이되기 시작했고. 이쯤 되면 내 인생의 주제가다.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에 당황한 전 여친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 거 아냐, 태형아. 널 정말 좋아했어. 단지…….’

…….’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너무 뒤늦게 깨달아서 그런 거야. 다 내 잘못이야.’

 

내 전 여친은 날 위로했고 나는 결국 고개를 떨궜다. 시발 이게 뭐야……. 이거 컬투쇼에 제보해도 되겠다고……. 그러나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까. 게다가 아예 다른 성별을 좋아한다는데. 나는 결국 그렇게 그녀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현타가 온 나는 그렇게 고3 생활을 도 닦는 수도승처럼 보낼 수 있었고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며 공부에만 전념했다. 그 덕분에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고. 아무튼 그 악몽 같은 연애사를 뒤로하고 대학교 입학식과 미터, 새터를 치르면서 나는 다시금 새로운 희망에 부풀었다. 그래, 고등학교는 고등학교로 미뤄 두고, 이제 새로운 역사를 쓰는 거다.

 

그래서 나는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내 상대를 찾아 나섰다. 이번에는 정말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자애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나의 인기는 역시나 식을 줄을 몰랐으므로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많았고 미팅에 나갈 때마다 나는 거의 모두에게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신중했다. 얼마나 신중했느냐면 1년이 지나도록 연애를 하지 않을 정도로 신중했다. 그 누구를 봐도 자꾸만 태형아, 미안해. 사실 나 여자 좋아해.’하고 말할 것만 같아서. 그러나 내가 2학년이 되던 해 3월에 나간 미팅에서, 나는 나에게 유난히 강력하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었고, 결국 내가 고백을 하려고 했던 날 그녀에게 고백 받았다. 1년 동안 열심히 고민한 만큼, 그리고 나에게 그렇게나 열정적으로 대시를 한 만큼, 이 사람만큼은 정말로 나를 좋아해서. 남자인 나를 좋아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내 세 번째 연애를 시작했다.

그녀와의 연애 역시 순조로웠다. 함께 벚꽃 축제를 즐기고, 놀이공원으로 데이트도 가고. 술도 마시고, 맛집도 찾아다니고. 전혀 이상할 것 없는 평범한 대학생의 연애. 그래, 이것으로 나의 징크스와 악몽이 끝나는구나. 성인의 연애라기엔 스킨십의 진도가 조금 느린 것 같긴 했지만 나 역시 키스도 못 해본 채였고 그녀 역시 풋풋한 새내기였기에 나는 그것을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이 바로 불행의 전조일 줄.

 

오빠, 미안해.’

…….’

 

대학생활의 꽃이라는 축제가 열리기 직전, 정확히 말하면 하루 전 날이었다. 축제 때 언제 만나 뭘 할지까지 다 정해 놨는데 축제 전날 밤, 나는 그녀에게서 이별을 통보받았다. 이번엔 학교 앞 작은 술집이었다. 나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트렸고 쇠로 만들어진 젓가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오빠가 놀랄 거 아는데, 사실 나…….’

여자 좋아해?’

어떻게 알았어?’

 

, 시발. 나는 나도 모르게 욕을 읊조렸다. 물론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한 것은 아니고, 속으로. 이제는 눈물도 안 나왔다. 이쯤 되면 난 거의 뭐의사나 다름없는 거 아닌가? 혹시 당신의 성적 지향성이 궁금하신가요? 확신이 안 서신다구요? 국비대학교 입구 1번 출구에서 김태형을 찾아주세요! 쉽고 빠르게 판단해 드립니다!

 

여기 젓가락 좀 새로 주세요.’

 

나는 놀란 눈의 그녀를 앞에 두고 자연스럽게 젓가락을 새로 주문해 눈앞의 닭발을 집었다. 모든 것이 놀랍도록 차분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예상했던 바다. 내 차분하고 침착한 태도에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티가 났어?’

아니. 네가 말하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어.’

그럼 어떻게…….’

 

내가 레즈들만 골라 사귀는 쓸데없고 필요 없는 능력이 하나 있거든. 나는 그 말은 애써 목 뒤로 삼키며 소주잔을 들었다. 목이 탔다. 속도 탔다. 진짜 사업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디나이얼들이여 나에게 오라 내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내가 아무 말 없이 닭발을 씹자 그녀는 내 눈치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사실 알고는 있었어. 그런데 인정하기 싫었어. 그래서미팅도 나가 보고

나 좋아하는 척도 하고.’

좋아하는 척은 아니었어! 정말 좋아했어. 그냥,’

나보다 여자가 더 좋았던 거겠지.’

…….’

 

그래. 알아. 다 이해해. 나는 부처의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마지막 한 잔을 내 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간적으로 이 자리는 네가 사라. 어이없는 상황도 세 번이나 겪어 보니 내성이 생겼는지 나는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동작들을 수행했다. 가방을 챙기고, 겉옷을 챙기고, 뒤를 돌아 술집을 빠져나간다. 혹시 이건 오랜 기간 나를 두고 촬영하는 예능 프로그램 같은 건 아닐까? 트루먼 쇼 그런 거그게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이럴 수가 있나이게 내가 바랐던 연애 꿈파란만장 love story 다 어디 갔나……Drama에 나온 주인공들 다 저리 가라 터덜터덜 자취방으로 향하는 내 머릿속에선 그 남자아이돌의 노래가 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

 

시이이이이이이발!!!!!!!”

 

나는 울먹이며 테이블을 손으로 쿵 내리쳤다. 시끄러운 주점 안의 시선이 잠시 나에게 닿았지만 사람들은 이내 흥미를 잃고 다시 자신들의 화제에 집중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테이블을 쿵 쳤다. 이번에는 내 손이 아닌 머리로. 내 앞에 앉아 있던 박지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운명인가 봐. 받아들여라,”

무슨 운명!? 뭐 이따위 좆같은 운명이 다 있어?!”

 

한 번은 우연이다. 두 번은 우연의 일치다. 그런데 세 번은?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박지민과 함께 내 앞에 앉아 있던 김남준이 내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김남준은 내 대학 동기로, 내 이 비극적인 연애사를 전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사실 김남준에게도 말하려고 말한 것은 아니었는데, 새터에서 술에 취한 내가 과대였던 김남준에게 내 과거 연애사를 주절주절 얘기하면서 친해지게 됐다. 정확히 말하면 내 술주정을 들어준 유일한 이가 김남준이었다.

 

태형이 많이 취했네.”

안 취했어!!”

 

술 취한 이의 술주정이 아니라, 정말 나는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말짱했다. 내가 아무리 술에 약하다 해도 맥주 한 병으로 취하지는 않으니까. 다만, 나는 그냥 술에 취하고 싶은 기분이었을 뿐이었다. 술기운을 빌려 울고 싶을 뿐이었다. 누가 나를 욕해, 난 어제 차였는데. 그것도 세 번 다 같은 이유로!! 같은 일을 당하지 않게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내 잘못도 아닌데!!!!!

 

그래, 그래. 안 취했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안 취했다고!!!”

뭐야, 벌써 가게? 너네 학교 축제 재밌다며.”

 

김남준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고 박지민은 내 앞에서 아쉬운 소리를 했다. 근데 나 정말 안 취했는데그런데

 

나 혼자 있기 싫어…….”

…….”

외로워…….”

 

나는 김남준의 옷깃을 잡고 징징대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정말로 취한 것은 아니고, 평소보다 조금 더 솔직해졌을 뿐이다. 외로운 건 사실이었으니까. 연애를 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사실상 유치원 때 이후로 나에게 진실 된 사랑을 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 아닌가. 외로웠다. 지독하게 외로웠다.

 

그럼 오늘만 내 자취방에서 자고 가든가.”

흐엉…….”

진짜 가게?”

 

김남준이 깊은 한숨과 함께 마지못해 말했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집까지 버스 타고 가기 귀찮았던 것도 있다. 그렇게 자리를 정리하려 하니 못내 아쉬운 듯한 박지민이 진짜 가게? 하고 물었고 김남준은 어차피 더 이상 할 것도 없잖아. 하고 말했다.

 

저기서 뭐 무대 하는 거 같던데?”

무대?”

그거라도 보고 가면 안 돼?”

오늘 연예인 안 와. 오늘은 그냥 애들 끼 콘테스트 할 걸.”

, 완전 보고 싶어.”

 

박지민이 김남준을 초롱초롱하게 쳐다보며 말했고 김남준은 어느새 말짱하게 앉아 있는 나를 한 번 보고, 초롱초롱한 눈을 한 박지민을 한 번 보고, 시계를 한 번 본 후에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적으로 극혐하는 눈빛이 그의 얼굴에 스쳐지나갔던 것으로 보아 박지민의 초롱초롱한 눈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고, 그저 김남준이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류의 인간이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박지민을 선두로 한창 불타오르고 있는 야외극장으로 향했고, 그리고, 나는 보고야 말았다.

 

.”

춤 잘 추네.”

 

그녀를. 그러니까 조금 더 상세히 말하자면, 커다란 무대 위 그보다 더 큰 존재감으로 살랑거리는 치마를 입고, 찰랑거리는 길고 까만 생머리를 하고, 그와 대비되어 극적인 효과를 이루는 하얀 피부를 가진, 동그랗고 예쁜 눈망울의 그녀를.

내가 그 무대 앞에 막 도착했을 때 그녀는 레드벨벳의 러시안 룰렛과 아이오아이의 너무너무너무 댄스 메들리를 추고 있었고 그 짧은 순간 동안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나는,

 

쟤 누구야?”

 

그녀에게 한눈에 반하고 만 것이다.

 

저거 전정아 같은데.”

전정아?”

, 맞네. 지금 공대 애들 무대 할 시간이네. 공대 여자 댄스팀.”

 

나는 김남준을 쳐다봤다가, 다시 무대를 쳐다봤다.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분위기에 무대 앞에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으므로 무대를 가까이에서 볼 순 없었지만 멀리서 봐도 확연한 것은 있었다. 전정아의 아름다움. 나는 절로 초롱초롱해지는 눈을 조금 더 크게 떴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막 걸그룹 댄스를 끝낸 그녀에게 사회자가 다가가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 소리는 내게 들리지 않았다.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다 무뎌지는 것 같았다. 나만 빼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

 

급하게 준비한 무댄데도 완벽했는데요! 혹시 더 보여주실 것이 있나요?”

근데 이상하네. 전정아 머리가 저렇게 길었나? 내 기억으론 단발이었는데.”

넌 쟤를 어떻게 알아? 너 사회대잖아.”

전정아 유명해. 공대여신.”

 

내가 멍을 때리고 있는 동안 김남준과 박지민이 대화를 나누었고 나는 그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무대를 응시했다. 사회자가 전정아에게 마이크를 내밀었지만 전정아는 사회자의 귀에 대고 뭐라 중얼였고 그에 사회자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대화를 한 거지?

 

공대 여자 댄스팀 Wolf에서 특별히 준비한 무대가 있다고 하는데요!”

…….”

박지윤의 성인식’! 음악 주세요!!!”

 

빨간 불이 탁 하고 켜지고, 익숙하고 끈적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하얀 얼굴에 동그란 눈의 전정아가 무대 양 사이드에 있는 커다란 전광판에 잡힌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운명이야.”

?”

나 결심했어.”

 

여태까지 내 그 좆같았던 연애의 기록은, 지금 이 순간 전정아를 만나기 위해서였음을. 시선은 여전히 무대에 고정한 채로, 나는 김남준의 팔과 박지민의 팔을 꽉 잡았다. 남준아. 지민아. 더 이상 나는 나에게 고백하는 여자들과 사귀지 않을래. 이번엔 내가 먼저 고백할 거야. 내가 쟁취해 낸 사랑과 연애를 하겠어.

 

얘 뭐라는 거야?”

내일 보자.”

? , , ! 김태형!!!!!! 어디 가!!!!”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어마어마한 인파를 뚫고 무대 뒤, 전정아가 무대를 마치고 내려올 것이라 추정되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부정하진 않겠다. 술에 취하진 않았으나, 술이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결단을 조금 더 쉽게 내리게 했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확신에 차 있었다. 내가 쟁취해 낸 사랑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동안의 연애는 전부 이 순간, 그러니까 전정아를 만나기 위한 포석일 뿐이었다고. 드디어 진정한 사랑이 나에게 찾아온 거라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때 열심히 풀어댔던 논리야 놀자가 울고 갈 무논리적 추론이었으나, 그 때의 나에게 그 깨달음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부피를 측정하는 법을 알아내고 외쳤다던 유레카와 같았다. 그러니까, 그만큼 나는 그녀를 운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이다.

 

.”

…….”

저기!”

 

전속력으로 달린 탓에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술기운에 머리끝이 살짝 뜨겁고. 그리고, 무작정 달려 도착한 곳에는 정말 운명처럼. 그녀가, 전정아가. 무대 뒤도 아니었다. 무대에서 조금 떨어진 수돗가에서. 나는 그녀를 마주했다. 그래, 그 땐 이것도 운명인 줄 알았다. 소란스러운 무대와 주점을 뒤로하고, 학교 전체가 시끄러운 축제 한 가운데 유일하게 인적이 드물었던 그 수돗가. 주황 조명이 부드럽게 그녀와 나를 비추고 있던 그 공간. 그녀를 찾아온 건 맞지만 백스테이지로 가기도 전에 이렇게 마주치게 되었다는 게, 정말 그 때의 나에겐 운명, 숙명, 필연처럼 느껴졌다. 지구가 우릴 위해 움직여 준 줄 알았다.

 

, 그러니까…….”

……?”

번호 좀 주세요!!!”

 

주황 조명에도 빛을 발하는 하얀 피부, 검고 긴 생머리, 동그랗게 빛나는 예쁜 눈동자. 그 눈동자가 나를 향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외쳤고, 내 머릿속은 포화 상태였다. 귓가는 온통 내 심장박동 소리로 가득 찼다. 그래서, 그 때의 나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게 무슨…….”

, 그러니까, 혹시 남자친구가 없으시다면,”

아니,”

 

그녀의 목소리가 여자의 것이라기엔 조금 굵고, 치마를 입은 그녀의 자세가 조금 어색하고. 그녀의 어깨를 타고 내려와 가슴까지 닿는 길고 새카만 머리카락이 어딘가 조금 인조적이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내가,

 

제가 그쪽한테,”

 

그 누구의 의지도 아닌 오롯이 나 혼자만의 의지로. 다른 누구의 손도 아닌 내 손으로 직접,

 

첫눈에 반했거든요…….”

 

좆 같은연애의 포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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