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지민의 좌절과 제 자신에 대한 회의감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흐르고 날은 바뀌어 어느덧 정국이 말해 놓은 행차 전날 밤이 되었다. 어차피 조선에 오래 있어 봐야 곤란한 상황만 늘어날 뿐 저와 태형의 관계 진전엔 아무런 득이 없을 것 같다고 판단한 정국의 단호한 어명에 의한 결과이기도 했다.

물론 부부이기 때문에 그 핑계로 태형과 매일 밤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좋았지만, 낮 시간에 짬을 내어 부러 태형을 보러 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제는 슬슬 제가 중전을 보러 가겠다 하면 차마 말은 못 해도 ?’ ‘좀 작작…….’하고 눈으로 자신을 패는 신하들의 눈치가 따끔거렸기 때문에. 현대로 돌아가면 곧 방학일 테니 하루 종일, 낮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붙어 있을 수 있는데. 그리고 애초에 밤에 같이 있는 것도, 얼마든지 자취방에서 함께 할 수 있다. 얇은 창호지 너머에서 저와 태형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무언가를 고대하고 있을 상궁들의 눈 없이, 단 둘이서만.

 

 

정국아?”

 

 

솔직히, 밤마다 손만 잡고 자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정작 태형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긴 하지만, 태형이 정국에 대한 감정을 깨닫기 훨씬 전부터 태형을 좋아해 왔던 정국으로서는 지금 이 진도가 거북이, 아니 나무늘보보다도 느린 거였으니까. 입맞춤이며 간단한 스킨십은 할 수 있다 해도, 보는 눈이 많으니 더 이상 진도를 빼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도 있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신하로부터 오늘은 사자가 들어가는 뱀날이니 중전마마께 가신다 해도 절대 하시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듣고 온 참이었으니까. 언제든 하면 좋은 거 아니냐고, 많이 할수록 확률이 올라가는 거 아니냐는 정국의 물음에 신하는 단호한 표정으로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 언제…….

일관(日官)으로부터 날을 받으셔야지요, 전하. 자가 들어가는 뱀날도 안 되고 자가 들어가는 호랑이날도 안 되며 초하루, 그믐, 보름날, 일식, 월식이 있는 날도 안 됩니다.’

…….’

 

 

미친 거 아니야? 그리고 그 말에, 정국은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그거 다 피하면 애초에 할 수 있는 날이 있기는 한 건가? 어차피 저와 태형의 소중한 첫 경험을 8명의 상궁들이 창호지 너머에서 지켜보는 곳에서 치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 말을 들은 정국은 하루빨리 현대로 돌아가고 싶어졌던 것이다. 사실은 닿기만 해도 찌릿찌릿 전류가 통하는데.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정국은 말없이 제 품에 안긴 태형을 조금 더 꽉 끌어안았다. ‘지금 간신히 걷기 시작한 사람한테 나랑 같은 속도로 뛰어달라고 안 해요.’ 제가 일전에 태형에게 뱉은 말이 있기도 했고.

 

 

너 내 말 듣고 있어?”

, ?”

 

 

그렇게 참을 인자를 새기며 제 안의 검은 짐승을 잠재우기 위해 이를 꽉 물던 정국은, 저를 부르는 태형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태형을 쳐다봤다. 너 어디 아파? 표정이……. 그리고 마주한 걱정스러운 태형의 얼굴에, 정국은 어색하게 웃었다. , 아프긴요. 하나도 안 아파요. 뭐라 그랬어요? 잠깐 딴 생각 좀 하느라. 곧바로 해사하게 웃으며 다정히 묻는 말에, 태형은 음. 하고 혀를 살짝 내어 입술을 핥았고.

 

 

? 아니, 별 건 아니고.”

……?”

좀 출출하지 않냐고.”

 

 

정국의 앞에서 이 말을 꺼내긴 좀 민망하긴 했는데, 지금 태형은 민망한 것보다 제 뱃속에서 울리는 위장의 고동소리가 더 컸으므로 살짝 망설이다 이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태형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정국은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형 배고파요?

 

 

아니……. 생각해 보니까 집에 있을 땐 종종 야식도 먹고 그랬는데, 여기 와서는 야식도 한 번도 못 먹고. 밥이 맛있긴 한데 좀 자극적인 거 먹고 싶어.”

 

 

어차피 매운 것은 못 먹는 태형이니, 지금 태형이 말하는 자극적인 것이란 단 것을 의미했다. 수박에도 설탕을 뿌려 먹고, 딸기에도 설탕을 뿌려 먹고. 탄산음료, 특히 콜라에 환장하는 태형이었는데,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런 것들을 하나도 먹지 못했을 테니 지금 태형이 뭔가 단 것을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정국은 태형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럼 상궁들한테 다과 같은 거 가져오라고 할까요?”

아니,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이 밤중에 굳이 상궁들까지 불러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은 태형은(사실은 상궁들이 가져다주는 과자들은 태형이 원하는 그런 자극적인 단맛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정국에게 속삭였다. 그냥 몰래 잠깐 나갔다 오면 안 되나?

 

 

?”

저번처럼. 시찰.”

그건 안 될 거예요.”

 

 

위험하기도 하고, 내전 깊숙이 있는 교태전에서 아예 궁 밖으로 나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까. 정국은 고개를 저었고 그런 정국을 응시하던 태형은 이내 하긴 그렇지. 하고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긴 하다. 혹시라도 밖에 나갔다가 누가 왕과 왕비 얼굴을 알아보기라도 하면. 그래서 나쁜 맘을 먹기라도 하면. 조선에서 다치거나 죽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던 것이 역시나가 되니 풀이 죽은 태형은 괜히 죄 없는 제 옷을 죽죽 잡아당겼다. , 단 거 땡겨. 그리고 그런 태형을 잠시간 응시하던 정국은 이내 무언가 떠오른 듯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생과방 정도면 몰래 다녀올 수 있을 거 같은데.”

생과방?”

여기서 한 5? 정도 걸릴 거예요.”

 

 

그게 뭔데. 어떻게 하는 건데. 태형이 의아한 표정으로 정국을 쳐다보니 정국은 설명을 덧붙였다. 그냥 수라상 차리는 곳이요. 생과방은 디저트. 그리고 정국의 깔끔한 설명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넌 별 걸 다 안다.

 

 

도착하자마자 지리를 파악해 뒀죠. 여차하면 형 데리고 도망쳐야 될까 싶어서.”

. 좀 믿음직한데.”

 

 

어느새 반짝 일어나 저를 일으켜 주려 손을 뻗은 정국의 손을 맞잡으며, 태형은 씩 웃었다. 그러자 정국이 그런 태형을 보고 마주 웃으며 태형의 손가락에 제 손을 엮었다.

 

 

믿고 미래를 맡겨도 될 아주 훌륭한 남편감이죠.”

?”

그냥 잠시 자기 어필 타임 좀 가져봤어요.”

 

 

읏차. 정국의 말에 태형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운 사이 정국은 태형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고,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태형에게 정국은 살짝 가까이 다가왔다. 갑자기 훅 하고 가까워진 정국에 태형은 숨을 삼켰고. 정국은 그런 태형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

 

 

나랑 평생 같이 살자고요.”

 

 

*

 

 

결국 어둠을 틈타 생과방에 몰래 잠입하는 데에 성공한 정국과 태형은 눈에 보이는 조그만 방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내소방과 외소주방에는 간간히 불이 켜져 있기에 아 이대로 실패하는 것인가 했던 걱정과는 달리, 생과방은 쥐새끼 한 마리 없이 고요했다. 어차피 들켜도 왕과 왕비의 신분이니 그리 큰 탈이 날 일은 없을 텐데도 캄캄한 밤중에 사람들 몰래 무언가를 한다고 생각하니 괜히 심장이 두근거려 왔다. 아닌가. 그냥 정국이 옆에 있어서 두근거리는 건가. 태형은 어둠에 적응한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에는 급한 대로 방 촛대에 꽂혀 있던 조그만 초를 든 채로.

 

 

. 뭔가 조금 더 달콤한 게 먹고 싶은데.”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차분히 정리되어 있는, 그마저도 몇 없는 유밀과나 과편 같은 것들뿐이다. 이런 게 먹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나는 뭔가 조금 더 설탕이 잔뜩 들어가 있는,

 

 

이거 엿인 거 같은데.”

.”

 

 

그래, 저런 거. 태형은 정국이 어느 구석에서 찾아낸 기다란 모양의 엿을 반갑게 받아들었다. 유밀과나 과편 같은 고급 한과에 비해 엿은 만들기가 쉽고 값이 싸서 그런지 정작 조선에 온 뒤로는 보지 못했던 거였다. 상궁들이 제게 가져다주는 다과상에서는 본 적이 없었으니, 아마 궁녀들이 몰래 숨겨놓고 먹으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보니까 괜히 반갑네. 태형은 정국에게서 엿을 건네받자마자 앙 하고 엿을 깨물었다.

 

 

근데 그거 엄청 딱딱한 것 같던데 조심,”

!”

 

 

정국의 경고를 채 듣지도 못한 채 반가운 마음에 무작정 엿을 깨문 태형은, 아니나 다를까 정국이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아, 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딱딱하고 거친 엿이 태형의 입 속에서 부러지면서 태형의 이가 태형의 혀끝을 살짝 깨문 탓이었다. 아씨, 아파. 태형은 순간 핑 도는 눈물에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나 맛있으면 혀까지 먹어요?”

지쨔 아흐거드?”

 

 

피 난 거 같아. 엿이 뭐라고, 그걸 급하게 먹다 혀를 깨물고 울상을 짓는 제가 웃긴 듯 킥킥 웃는 정국을 쳐다보며 태형은 베어 물었던 엿을 마저 꼭꼭 씹어 삼킨 후에 정국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지금 웃을 때가 아니야. 이거 봐. 여기 피 났잖아. , 이거 이제 뭐 먹을 때마다 거슬리는…….

 

 

…….”

…….”

 

 

그런데 이 분위기 뭐지? 태형은 한순간에 가라앉은 주변의 분위기에 하던 말을 멈추고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허공에서 정국과 제 시선이 얽힌 순간, 태형은 저도 모르게 한 쪽 손에 쥐고 있던 엿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

 

 

왜 갑자기 이렇게 됐지? 그런 생각을 할 새도 없이, 태형은 저를 응시하고 있는 정국의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을 마주했다. , 혀가 문제였나? 태형은 정국에게 깨물린 상처를 보여주겠다고 살짝 내밀었던 혀를 슬그머니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꼴깍, 침이 절로 삼켜졌다. , 정구기……. , 동공이 풀린 것 같은데. 태형은 저도 모르게 쭈구려 앉았던 몸을 주춤 뒤로 뺐다. 그러나 그런 제 움직임에도 정국의 눈엔 흔들림이 없다. 그 진득한 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 , 정국의 시선이 제 시선을 묶어놓은 것처럼. 말 그대로 단단히 얽혀있는 것처럼. 온 힘을 다해 꽉 쥔 탓에 체온에 녹은 엿이 제 손에 진득히 묻어 끈적거린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어 입술을 핥다가 아차 싶어 다시 입을 앙 다물었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

?”

왜 도망가요.”

 

 

, ? 태형은 유난히 낮게 울리는 정국의 목소리에 떨리는 심장을 간신히 붙잡았다. , 미쳤나봐. 정국의 저런 눈은 처음 본다. 뭐랄까, 진짜 잡히면 잡아먹힐 것 같은 느낌. 호랑이 앞에 선 토끼가 이런 기분일까. 아닌데. 토끼는 정국인데. 태형은 어떻게 하면 이 분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다 이내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아니지. 왜 헤쳐나가? 전정국을 꼬시겠다고 마음먹은 게 고작 며칠 전인데. 물론 지금 정국이 하는 걸로 봐서는 제가 굳이 꼬시지 않아도 될 것 같긴 하지만. 태형은 벌떡 일어나려던 마음을 고쳐먹고 이내 새카맣게 내려앉은 정국의 눈을 응시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태형은 정국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정국은 분명…….

 

 

뭐 해요,”

…….”

혀 안 빼고.”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까.

 

 

*

 

 

…….”

 

 

무슨 정신으로 다시 교태전으로 돌아와 밤을 보내고 절까지 올 준비를 했는지 모르겠다. 태형은 멍하니 제 눈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올려다봤다. 그래, 이 나무. 조선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맞이한 익숙한 풍경에 태형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러니까, 정말, 예상했던 대로 그 나무가 맞았다. 그 절도 맞았고.

 

 

정국이와 오해를 풀고, 다시 친하게 지내게 해 주세요.’

 

 

정말 그 소원 때문이었을까. 태형은 제가 현대에 있을 때 나무에다 대고 빌었던 소원을 떠올렸다. 저만치 앞에서 절의 주지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코코넛 나무 열매 같이 동그란 정국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그 때도, 정국과 저는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같은 조도 아니었고, 어색하다 못해 좋지 않은 사이였으니까. 나무에다 대고 소원을 빈 다음, 태형은 고개를 들어 흘긋 정국을 쳐다봤었다. 정국이 어디쯤에 있는지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시선이 정국에게로 향했으니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신경은 온통 정국을 향해 쏠려 있었으니까. 태형은 눈을 감은 채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비는 정국을 쳐다봤었다. 너는 지금 무슨 소원을 빌고 있을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다 이내 픽 웃었었지.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형이 날 좋아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김태형이, 전정국을 좋아하게 해달라고.’

 

 

그런데, 그 때 제가 궁금해 했던 그 소원이, 제 자신과 관련된 거였다니. 떠올리자 다시 뛰기 시작하는 심장에 태형은 손을 들어 가슴에 가져다 댔다. 언제부터 정국은 자신을 좋아했을까. 아니 그 전에, 언제부터 나는 정국이를 좋아했지? 어쩌면 유라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들도 사실은 정국이를 좋아하고 있었던 거였나? 유라는 쉽게 포기가 됐었는데, 정국이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 때는 그냥 정국이가 너무 좋은 후배고 동생이라.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

 

 

세상에 매일같이 한 방에서 잠들고 뽀뽀하고, 종국에는 키스까지 한 형 동생도 있나. 태형은 어젯밤 정국과 홀린 듯이 입을 맞췄던 것을 떠올리며 떨려오는 심장을 꾹 눌렀다. 어쩌면 진짜, 지민이 제게 했던 말이 정말 맞는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 정말 눈치 없다고. 정국이 저를 좋아하는 것을 몰랐던 건 둘째 치더라도, 제가 정국을 좋아하는지조차 몰랐다니. 이렇게나 많이 좋아하는데.

 

 

지민아…….”

.”

나 심장이 뛰어.”

 

 

전정국. 이름에 꿀을 발라 놓은 건지, 아님 가시가 있는 건지. 부르면 부를수록 달고 심장을 찔러 두근거리게 만든다. 그 사이 주지스님과 이야기를 끝낸 듯, 저만치에서 저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저에게 다가오는 정국을 보며 태형은 제 뒤에서 일산을 들고 있는 지민을 향해 조그맣게 속삭였다. 어떡해. 진짜 시도 때도 없이 막 심장이,

 

 

태형아.”

…….”

심장은원래 뛰어.”

 

 

안 뛰면 죽어. 그러나 요상한 방식으로 제 소원을 들어준 나무와 돌무더기에게 깊은 반감을 가지고 약간 비뚤어져 있는 지민은 감정에 젖은 태형의 귓가에 조그맣게 진실을 속삭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형은 그저 정국을 보며 반짝반짝한 눈을 할 뿐이었지만그리고 지민은 그런 태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집 보내줘……. 지금 별로 해가 쨍쨍하지도 않은데 이 일산은 왜 씌우라는 거야. 조만간 비 올 것 같은데 차라리 우산을 씌우든가. 하고 중얼거리면서.

 

 

중전과 단 둘이 잠시 절을 둘러보고 싶은데.”

 

 

지민이 투덜거리는 사이, 어느새 가까이 온 정국이 태형의 옆에 나란히 서며 주지 스님에게 말했고 스님은 얼마든지 그러시라며 빙긋 웃었다. 곧이어 어명에 의해 요란하고 화려한 왕의 행렬 대부분이 절 밖으로 모습을 감추고, 조용한 절간에는 몇몇의 호위무사와 정국, 그리고 태형만이 남겨졌다. 그리고 그마저도, 정국은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부를 테니 절대로 부르기 전에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 일렀다. 어차피 절 전체를 왕의 군관들이 둘러싸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호위무사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좀 이상하다.”

 

 

조용한 산 깊숙이 위치한 절간은, 정말 말 그대로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더욱이 어명에 의해 모두가 모습을 숨기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아무도 없는 절을 보고 있자니 현대에서 워크샵으로 왔던 그 때의 절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어 보여 태형은 꼭, 이미 제가 현대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주위에 한복을 입은 사람도, 제게 중전이라 부르는 사람도 없으니까.

 

 

혹시 형하고 나만 남겨지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싶었는데, 그건 아니네요.”

아직 왕의 소원이 안 이루어졌잖아. 왕비의 소원도.”

그러게요. 그건 어떻게 하지.”

 

 

정국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동안, 태형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자꾸 기분이 이상하다. 뭔가 잊고 있는 기분. 제 소원은 이루어졌고, 정국이 소원도 이루어졌는데. 왕과 왕비의 소원만 남은 게 맞는데, 뭐랄까…….

 

 

. 비와요.”

 

 

태형이 무언가 찜찜한 기분에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그 때, 정국이 다가와 손바닥을 펴 태형의 위를 가렸다. 태형이 고개를 들자 하늘에서는 정국의 말대로 굵은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소나긴가? 조그맣게 중얼거린 정국이 일단 어디 좀 들어가자며 태형을 잡아끌었다.

 

 

호위무사들 말 되게 잘 듣네.”

 

 

아무리 어명이라지만 비 오는데 우산도 안 갖다 주고. 몇 걸음 옮기지도 않았는데 쏟아져 내리는 비에, 황급히 눈앞에 보이는 열려 있는 창고 안으로 들어선 태형은 조그맣게 중얼였고 태형의 중얼거림을 들은 정국이 피식 웃었다. 이번이 첫 번째도 아니고, 우리가 말 하려고 할 때마다 절대로 오지 말라고 당부해 뒀었으니까 그렇죠.

 

 

그건 그런데.”

그런데 비가 제법 세게 오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유난히 굵다 싶더니, 비는 마치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하늘이 뚫릴 것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정국은 문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창고 문을 닫았다. 열어 놓으면 비 엄청 들이쳐요. 이래서는 우리가 불러도 빗소리 때문에 못 듣겠는데요? 소나기가 아니고 무슨 스콜 같아.

 

 

어쨌든 조만간 그칠 것 같긴 하니까 잠깐만 앉아서 기다리죠 뭐.”

.”

 

 

환한 대낮이라는 시간대가 무색하게, 창고 벽 위에 높이 난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검푸른 회색빛이다. 태형이 멍하니 그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 정국은 곤룡포를 벗어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볏짚 위에 깔고 그 위를 손으로 통통 두드렸다. 여기 앉아요. 생각보다 푹신푹신해요.

 

 

우리 꼭 그거 같다. 소나기.”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그거?”

형은 뭐 그런 대목을 기억해요.”

 

 

어쩐지 어두운 방 안에 단 둘이 앉아 있으니 자연스럽게 손이 얽히고 얼굴이 가까워진다. 언제부터 이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된 건지. 아직 사귀자는 말도 못 들었는데. 아니 그 전에, 좋아한단 말도 제대로 못 들었잖아? 태형은 열어달라는 듯 조그맣게 제 입술을 핥는 정국에 서툴게 숨을 삼켰다. 공기와 함께, 정국의 숨이 들어찼다.

 

 

저번에도 느꼈던 건데.”

 

 

눈이 감기고, 숨이 얽히고. 심장은 간질거리고, 맞잡은 손은 뜨겁고. 한참 동안이나 정신없이 입을 맞추다 호흡이 모자라 여전히 조금 더 깊게 입을 맞춰오려는 정국을 밀어낸 태형이 발개진 얼굴로 숨을 가다듬자, 정국이 그런 태형의 가까이서 눈을 접으며 태형의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진짜 너무 가까워. 정신을 못 차리겠다.

 

 

형 키스 내가 처음이죠.”

 

 

목덜미에 닿는 정국의 손은 뜨겁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호흡은 거칠고. 그 와중에 제 코앞에 있는 정국의 얼굴이 너무 잘생기고 심장 떨려서 머리가 핑 돌았던 태형은 이내 정국의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 뭐라고?

 

 

, 연애 한 번도 안 했다 그랬나.”

, 뭔 소리야!! 누가 그래! 아니거든!! 해 봤거든!! ~전에 해 봤거든!!”

아닌데. 내가 보기엔 내가 처음인데.”

아니라니까? 나 연애 해 봤어! 키스도 많이 해 봤어! 엄청!”

내 앞에서 그렇게 말해도 돼요?”

?”

 

 

괜히 차오르는 쪽팔림에 있지도 않은 키스 경험을 늘어놓던 태형은 순간 들려온, 낮게 가라앉은 정국의 목소리에 눈을 깜박였다. 아니 잠깐만. 갑자기 우리가 왜 싸워? 우리 아까 분명히 영화 찍고 있었는데 갑자기 장르가 호러로 바뀌었잖아……. 태형은 어……. 하고 말꼬리를 늘였다. 그게, 그러니까…….

 

 

너도 그 전에 좋아하는 사람 정도는 있었을 거 아니야? 너 내가 처음이야?!”

 

 

그래서 태형은 외쳤다. 아니 뭐, 누구나 경험 정도는 있잖아. 우리 나이가 몇인데! 물론 태형은 처음이 맞았지만, 불과 1분도 지나기 전에 연애를 해 봤다고, 그것도 많이 해 봤다고 소리친 입장에서 갑자기 정국에게 사실은 나 네가 처음이야, 하고 실토하긴 좀 그러니까. 그리고 태형은 그 기세를 몰아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 보니까 진짜, .

 

 

너나 딱 대. 너 진짜 저번부터 느꼈는데, 너 선수지. 너 몇 명 사귀었어.”

…….”

이거 봐, 말 못하는 거 봐라. 손으로 셀 수도 없,”

그 전에 누굴 좋아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형이 좋아요.”

 

 

? 기세등등한 태도로 정국을 향해 삿대질을 하던 태형은, 그 순간 들려온 정국의 목소리에 그대로 굳었다. 하지만 제 눈앞의 태형이 그대로 굳었거나 말거나, 정국은 태형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형 만나기 전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하나도 기억 안 나요. 모르겠어요.”

…….”

형이랑 말도 안 하고 살 때, 진짜 죽을 것 같았어요. 아니 죽은 것처럼 살았어요.”

 

 

아니 그렇게 말하면 내가 또 할 말이 없잖아……. 태형은 한없이 진지한 정국의 눈에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다 대화가 이렇게 됐지? 분명 방금 전까지 되게가벼운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세찬 빗소리에 정국의 목소리와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제 심장 박동 소리가 섞여 귓가에 울린다.

 

 

태형이 형.”

…….”

진짜 좋아해요.”

 

 

진짜얘 선수 맞는 것 같은데. 태형은 그렇게 생각하며 제 손을 꼭 잡아 오는 정국에 혀를 깨물지 않기 위해 이를 물었다. 아 어떡해. 지금 무슨 말을 하면 심장이 튀어나올 거 같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말없이 저만을 올곧이 응시하는 태형에, 정국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 한유라 좋아한 적 없어요. 입학한 이후로 형만 좋아했으니까. 그런데,”

…….”

형한테는 그냥 내가 한유라 좋아하는 줄 알았던 게 더 나았던 걸 수도 있어요.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면 형은 부담스러울 거니까.”

아닐 걸. 네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으니까.”

…….”

나도 너랑 같은 생각 하고 있거든.”

지금 당장 형 눕히고 키스부터 하고 싶다고요?”

아니, 잠깐만.”

 

 

지금 우리 되게 진지한 분위기였잖아. 태형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정국을 제지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물론 그것도 좋고 다 좋고 좋은데……. 그 전에 풀어야 할 게 있다. 태형은 진지한 눈으로 정국의 팔을 잡았다. 그래. 이거였다. 아까부터 뭔가 계속 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이유. 아직 풀지 못한 오해. 제 소원은, 정국과의 오해를 풀고, 다시 친하게 지내게 해 달라는 거였다. 그냥 모든 걸 없었던 것처럼 덮어 두는 것이 아니라.

 

 

정국아, 나는 유라를,”

형 입에서 한유라 얘기 나오는 거 싫,”

아 그냥 쫌 들어 이놈시키야!”

 

 

태형이 확 몸을 일으켜 정국의 두 팔을 잡았다. 한순간에 태형에게 두 손을 결박당한 정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정국을 보며, 태형이 말을 이었다.

 

 

나 유라 좋아했어. 맞아.”

…….”

그런데, 그것보다 널 더 좋아했어.”

?”

유라가 너 좋아한다는 거 깨닫고, 바로 포기했다고. 유라는 포기할 수 있었는데, 너는 포기가 안 돼서. 그게 그 때는 그냥 너랑 지낸 시간이 길고 네가 너무 좋은 후배라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

내가 널 좋아해서 그랬던 거야. 네가 너무 좋아서, 너는 도저히 못 잃겠어서.”

 

 

말했다. 혹시 말하고자 하는 걸 다 말하지 못할까 봐, 제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까 봐 숨도 쉬지 않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말한 태형이 말을 마치고 숨을 들이쉬었다. 정국은 그런 태형을 쳐다보며 멍청히 눈을 깜박이고 있었고.

 

 

, 맞다 그리고…….”

…….”

초밥 그거 너랑 내 거였어. 유라 거 아니고. 너랑 나랑 단 둘이! 자취방에서! 오순도순! 나눠 먹으려고! 산 거였다고.”

 

 

진짜 다 말한 것 같은데. 말을 마친 태형이 정국의 팔을 놓고 다시 정자세로 앉았다. 이제야 좀 속이 시원하네. 태형이 뿌듯하게 웃었다. 아직 제 말이 정리가 채 다 되지 않은 듯, 정국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여전히 멍하니 눈을 깜박이고 있는 정국에 태형이 손바닥을 쫙 펴서 정국의 눈앞에 흔든 순간이었다.

 

 

저기요. 정신 좀 차리…….”

, 진짜 좋다.”

 

 

정국이 제게 뻗은 태형의 손을 잡아 그대로 잡아끌어 태형을 끌어안았다. 눈 깜짝할 새에 정국에게 안긴 태형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픽 웃었다. 맞닿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정국의 심장 박동이, 꼭 저만큼 빠르게 뛰고 있어서. 정국이 손을 올려 한 손은 태형의 뒷머리에, 한 손은 태형의 허리에 가져다 대고 꼭 끌어안았다. 정말, 바람 한 톨 들어갈 공간이 없도록.

 

 

형은, 형은 진짜 내가 얼마나 형을 좋아하는지 모를 거예요.”

…….”

진짜 많이 좋아해요.”

정국아.”

 

 

나도 진짜 많이 좋아하는데.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네. 태형은 그렇게 생각하며 정국을 마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정국아, 내가…….

 

 

현대로 가면…….”

…….”

내가 먼저 고백할게.”

…….”

정식으로.”

 

 

좋아한다는 말은 전정국이 먼저 했으니까 사귀자는 말은 내가 하면 되지. 고민할 거 뭐 있나. 태형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떼고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은 할 말을 잊은 듯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고, 그 얼굴에 태형은 씩 웃었다.

 

 

그런데 너 진짜 아까 나한테 키스하고 싶었어?”

. 왜요?”

 

 

정국의 동그란 얼굴이 의아함으로 가득 찬다. 태형은 아니 뭐 그냥, 하고 말꼬리를 늘였다. 정국의 물음표를 가득 담은, 의아한 시선이 따라붙는다.

 

 

내가 그랬잖아.”

…….”

나도 같은 생각일 거라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정국의 입술이 닿는다. 태형은 빙긋 올라가는 입꼬리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

 

 

.”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태형이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태형은 채 뜨지 못한 눈으로 제 얼굴과 몸에 돌돌 감긴 이불을 걷어냈다. , 허리야……. 태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침대에서 잘 자다가 이게 갑자기 무슨 봉변이야?

아직 잠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태형이 볼을 긁었다. 아 진짜 얼마나 요란한 꿈을 꿨길래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그러나 멍하니 읊조리던 태형은, 그 순간 훅 하고 들어차는 기시감에 말을 멈췄다. 아니, 잠깐만. 나 방금 뭐라고,

 

 

침대?!”

 

 

졸음에 눌려 한없이 무거웠던 눈꺼풀이 번쩍 뜨이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태형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 한 눈에 들어오는 조그마한 채광 좋은 방. 옆에는 제가 항상 옆에 두고 잠드는 핸드폰, 익숙한 벽지, 익숙한 가구, 익숙한…….

 

 

내 방…….”

 

 

그러니까 태형이 방금 눈을 뜬 이곳은, 바로 익숙하다 못해 눈을 감고도 훤히 그려낼 수 있는 2018년의 현대. 제 방이었다.

 

 

 

+

드디어(!) BACK TO 현대!!

 

완결까지 한 편!

 

https://milkteaxger.postype.com/


티스토리 개편 후 글쓰기가 불편해져서 포스타입으로 연재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ㅠㅁㅠ

조선로맨스는 완결이 얼마 남지 않아서 (18화 완결) 여기에 끝까지 올려드릴 생각이지만 새로운 글이나 외전 등은 포스타입에 올라오게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 > 조선 로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로맨스 16  (0) 2018.12.31
조선 로맨스 15  (0) 2018.11.13
조선 로맨스 14  (0) 2018.11.07
조선 로맨스 13  (2) 2018.08.15
조선 로맨스 12  (3) 2018.08.01

 

 

16

 

 

. 내가 편의점 프로모션 중에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별로 안 궁금한ㄷ,”

“2+1이야. 2+1.”

아니 그러니까 별로 안 궁금,”

하나만 사면 될 걸 괜히 손해 보는 느낌에 두 개 사게 만들잖아!! 그래서 괜히 돈 더 쓰게 만들고!!”

…….”

그런데 지금 내 기분이 그래.”

…….”

“2+1이네?”

 

 

정국과 태형은 방 안에 나란히 앉아 배우 애호아니 유아인의 성대모사를 하고 있는 지민을 멍하니 쳐다봤다. 낮에 경회루의 누각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눠본 결과, 아무래도 소원나무의 영향으로 정국과 태형, 그리고 지민이 조선에 떨어진 것 같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아니 정국과 태형이 내린 현재까지의 결론이었다. 왕의 소원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 나무가 정말 영험한 것 같다던 신하의 말로 미루어 보아, 그리고 정국과 태형, 왕과 왕비의 접점이 그 소원나무인 것으로 보아 소원 나무가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된 것이다.

 

 

그리고 제 소원은 이루어졌거든요. 저는 태형이 형이 나 좋아하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 형은 소원 뭐 빌었어요?”

, , ?”

 

 

태형은 말을 더듬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소원이라. 태형이 정국의 눈을 피해 눈을 굴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소원 나무에 빈 소원은 한 개가 아니었으니까. 첫째는 밀당 같은 거 안 하는 애인 생기게 해 주세요. 둘째는 이왕이면 그 애인이 예쁘고 귀엽고 청순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셋째는

 

 

, 나 너랑 다시 친해지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정국이와의 오해를 풀고 다시 친해지게 해 달라고 빌었었다. 오해를 다 풀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인사만이라도 하는 사이는 되게. 솔직히 첫 번째랑 두 번째 소원은…….

 

 

진짜요?”

, …….”

 

 

왠지 잔뜩 감동한 것 같은 정국의 눈빛을 슬쩍 피하며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심에 이제 약간 조금 찔리긴 한다. 솔직히 첫 번째 소원이랑 두 번째 소원이 정국을 생각하고 빈 소원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의도치 않게 밀당 안 하는 여자친구가 아닌 애인이라고 빌었을 뿐. 맹세컨대 의도한 건 아니었다. 누가 알았겠는가, 굉장히 오래 됐다던 그 나무가 그렇게 열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 줄. 그런데 사실 그렇게 따지면 그 소원도 이루어진 건 맞긴 했다. 전정국. 특기는 (김태형에 한해) 밀기는커녕 인간 전자석 수준으로 끌어당기기, 취미는 예쁘고 귀엽고 청순하기. 잘생김은 보너스, 다정함과 롤츠력은 부가서비스. 태형은 소원나무의 칼 같은 정확함과 소원 이행력에 절로 끄덕여지는 고개를 멈출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로또 맞게 해달라는 소원도 빌걸.

 

 

…….”

정국아…….”

저기 두 분 꽃가루 날리는데 바쁘신 와중에 죄송한데요.”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있거든요. 정국과 태형이 서로를 쳐다보며 서서히 가까워지던 찰나, 꼴깝 애정행각을 지켜보고 있던 지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끼어들었다. , 제가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제 앞에서는 좀 작작 해주셨으면 해서요.

 

 

아니 그리고 현대로 돌아갈 방법을 찾은 것 같다며. 그럼 그 소원 나무가 너네 소원을 들어주려고 조선시대로 끌고 왔다는 거야?”

그런 거 같아.”

그럼 나는 왜?!”

 

 

지민이 사자후를 내질렀다. 나는 왜?! 너네는 워크샵 가서 소원 빌었다며. 그럼 나는 왜 떨궈진 건데? 할아버지네 집 가서 낮잠 자고 있던 나는 무슨 죈데? 진짜 2+1이야? 진심이야? 요즘엔 소원에도 프로모션이 있어? 지민이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손을 휘젓자 그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정국이 문득 툭 내뱉었다.

 

 

벌 받은 거죠.”

?! 무슨 벌?!”

 

 

지민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무심하게 말하는 정국을 돌아봤다. 무슨 벌? 그리고 정국의 말에 의문을 품은 것은 태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껏 억울해 보이는 지민의 표정과는 상반되게, 정국은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태형이 형이 저한테 개새끼라 그랬다면서요. 안 그랬다는데?”

?”

…….”

 

 

그리고 정국의 말에 지민의 표정은 의아함에서 어이가 잠시 출타한 얼굴로, 태형의 얼굴은 의아함에서 시선을 한껏 내리깐 얼굴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지금 정국이 하고 있는 말은 아까 낮에 누각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나온 주제였다.

 

 

형 근데 정말 저한테 개새끼라 그랬어요?

? 그게 무슨 말이야?

지민이 형이 그러던데요.

아닌데?! 무슨 소리야!

 

 

그리고 태형은 속으로 조용히 뇌까렸다. 용서해라 친구야. 사랑이 먼저인가 봐.

 

 

그게 무슨아 설마 너 그 날 말하는 거야? . 얘 좀 봐라. 김태형이 너를 얼마나 욕했는데! 이 개새끼, 나쁜 새끼 이러면서…….”

, 내가 언제 또 새끼라 그랬냐그냥 나쁜 놈그랬지…….”

. 김태형. 당신의 양심 혹시 어딘가에 떨어트리진 않으셨습니까? 저기 주인을 잃은 양심이 길가에서 울고 있네요? , 전정국아. 속지 마라. 김태형 이런 놈이다.”

뭐 어때요. 개새끼라 그랬든 씨발 새끼라 그랬든.”

아니 정국아 내가 씨발 새끼라고까진 안 했,”

지금 우리 애기면 됐지. 그죠?”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정국의 웃는 얼굴에서 어딘가 모를 서늘함을 느꼈다.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것은 비단 저뿐만은 아니었던 듯, 아까까지만 해도 한껏 억울함을 표현하며 언성을 높였던 지민도 갑자기 입을 합 다물고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우리 정구기학창시절에 껌 좀 씹었었나? 포스가……. 태형은 저도 모르게 그런 정국의 팔에 살짝 손을 올렸다.

 

 

아니 그래서, , 뭐냐. 현대로 돌아갈 방법을 찾은 거 같다며. 그게 뭔데?”

, 맞아. 그 때 말 하다 말았지. 여기 이거요.”

 

 

잠시간의 시간차 후에 지민은 더듬거리며 말문을 텄고 그에 정국은 품속에 고이 챙겨온 서책을 꺼냈다. 지민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 서책을 쳐다봤다. <日省錄>. 태형은 곧은 서체로 힘 있게 쓰인 글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어쩐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게 우리를 현대로 다시 돌아가게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물론 그 세 글자 중에 태형이 알고 있는 글자는 날 일()자 밖에 없었으므로 뭐라고 써져 있는지 읽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태형이 가만히 속으로 세종대왕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일성록?”

……?”

아니, 일성록이라고 쓰여 있길래.”

 

 

멀뚱히 책을 쳐다보던 지민이 곧이어 아무렇지도 않게 한자를 읽어 냈고 그와 동시에 태형과 정국의 동그래진 눈이 지민을 향했다. 뭐야? 너 이거 읽을 줄 알아? 잠시간의 정적 후에 태형이 눈을 깜박이며 지민을 향해 말했고 지민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뭐……. 나 저번 학기에 한자 수업 들었었잖아.”

아 맞아. A+맞은 유일한 교양?”

 

 

지민은 멋쩍은 듯 볼을 긁었고 태형은 금세 어느 날 갑자기 저와 함께 신청했던 꿀교양을 걷어차고 웬 한자 강독 수업을 덜컥 신청했던 지민을 떠올렸다. 저게 갑자기 허파에 무슨 바람이 들었기에 한자 교양을 신청하나 했었는데.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태형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민을 대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지민의 말에 정국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자 교양?”

? …….”

그거 우리 사촌 누나가 저번 학기에 들었던 거 같은데…….”

 

 

그리고 이어지는 정국의 말에, 태형은 정국을 쳐다봤던 눈을 다시 지민에게로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지민의 얼굴은 어느새 새빨개져 있었고 그와 동시에 제 머릿속에서 가볍게 맞춰지는 퍼즐조각에 태형은 입을 벌렸다. 너 아직도 포기 안 했어?!

 

 

아니! 아니 우연의 일치거든!!”

우연의 일치 좋아하시네. 너 그 교양 나랑 같이 듣겠다고 피씨방까지 갔었잖아!”

형 다음 학기에 나랑 교양 같이 들어요.”

그럴까? 가 아니고! 박지민 너 나한텐 포기했다고,”

어차피 전공도 같은데 시간표를 아예 똑같이 맞추는 건 어때요?”

좋아가 아니고!! 아 정국아 잠깐만!!”

 

 

태형은 눈을 크게 뜨고 지민에게 따지는 자신을 방해하는 정국을 손을 들어 제지했으나 태형의 손은 곧 정국의 손에 의해 깍지 끼워져 내려졌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련의 행동에 태형은 마치 손에 장난감을 쥐어준 아기마냥 온순해져 눈을 깜박였고 정국은 그런 태형에게 웃어 보였다. 다음 학기부터 형이랑 매일 붙어 있을 수 있겠다.

 

 

…….”

 

 

태형은 정국에게 약했다. 그 중에서도 정국의 얼굴에 약했고, 그 중에서도 정국의 웃는 얼굴에 약했다. 고로 지금 저렇게 제 손을 부드럽게 잡아 깍지를 껴 오며 저를 향해 다정하게 웃는 정국은, 한순간에 태형의 머릿속에서 정국 외의 다른 것을 모두 깔끔하게 녹여버리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결국 태형은 잠시 후 정국에게 손을 내맡긴 채로 얌전히 앉아 지민이 일성록을 살펴보는 것을 잠자코 응시했다. 물론 겉으로만 잠잠했을 뿐, 태형의 심장은 튀어나올 것처럼 뛰고 있었다.

 

 

왕비가 왕을 안 좋아했나봐?”

그게 거기 나와 있어요?”

왕이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것 같은데…….”

 

 

지민은 가만히 책을 훑어보더니 이내 한 대목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그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아니 지켜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

라고 쓰여 있어.”

 

 

일기를 쓰랬더니 웬 연애편지를 써 놓으셨더라고. 짧게 덧붙이며 지민이 손가락을 움직여 글자의 마지막 부분을 꾹 눌렀다. 여기서 끊긴 걸로 봐서, 이 이후에 너희가 이곳에 떨어진 것 같은데.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정국과 태형은 그런 지민을 응시했다. 뭐야, 그 눈빛은? 또다시 찾아온 정적에 지민이 미간을 좁혔고 이어 태형이 음, 하고 뜸을 들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금 소설 쓴 거 아니지?”

…….”

, 아니. 너한테 이런 면이 있는 줄은 또 몰랐어가지구.”

 

 

처음으로 쫌 있어 보였어. 태형이 천천히 말을 잇자 정국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중학교 때부터 형이 우리 누나 쫓아다니는 거 봤는데, 지금이 가장 멋있어 보였어요. 그리고 지민은 그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미묘한 뉘앙스에 미간을 좁혔다 이내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미간을 풀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현대로 돌아가는 거니까.

 

 

그런데 잠깐만. 왕비가 왕을 안 좋아했다고? 아닌데? 상궁 말로는 왕이 왕비를 찾지 않는다 했어. 한 희빈에게 빠져서.”

대충 훑어보기만 했지만 희빈 이야기는 여기 없던데? 왕비에 대한 사랑만 절절해 보였어. 아까 말했잖아. 연애편지 읽는 줄 알았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하고 말을 이으려던 태형은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순간 말을 멈췄다.

 

 

달에 한 번 정도 찾으셨습니다.’

달에 한 번?’

.’

한 달에 한 번?’

그러하옵니다.’

 

 

언젠가 상궁과 나누었던 대화. 왕의 총애를 받아 기세등등한 애첩이라면서 정작 왕은 달에 한 번밖에 찾지 않았다니 의아했었던.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태형은 이내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그 때 상궁도 그랬었다. 한 희빈의 아비가 조선 제일의 세도가이니 주상께서 내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 희빈을 찾는 것 같다고. 그럼 그게 정말, 정말로 왕이 왕비에게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 희빈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

아니, 전에 상궁이 그랬거든. 한 희빈의 아비가 조선의 세도가라고. 그래서 내키지 않음에도 부러 한 희빈을 찾는 것 같다고.”

그럼 형 말은 왕이 왕비를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찾지 않았다는 거예요? 한 희빈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아닌가?”

내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한 희빈의 처소에 간 건 그렇다 치고, 굳이 왕비를 멀리할 필요까지 있나? 차라리 왕비의 아버지가 세도가라 사랑하는 첩한테 못 가는 거면 모를까.”

.”

 

 

그것도 또 맞는 말이긴 하네. 정국의 말에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뭐지. 그러나 정국과 태형의 고민은 이내 지민의 목소리에 의해 흩어졌다. 그게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왕의 소원이지.

 

 

전정국 소원 Clear. 김태형 소원도 Clear. 내가 봤을 때 이 소원 나무는 관련된 사람들의 소원을 다 이루어 주는 게 목표인 거 같거든? 그러면 왕이랑 왕비 소원이 이루어지면 우리도 자연스럽게 현대로 돌아가지 않겠냐고.”

그렇지…….”

그럼 정리해 보자. 왕의 소원은 타임슬립?”

그건 아닌 거 같은데.”

그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 둘이아니 근데 이 사람 좀 음흉한데. 단 둘이 뭘 하려고.”

, 부부사이에 뭐가 또 음흉이야!”

 

 

괜히 제 발이 저린 태형은 조그맣게 외쳤고 지민은 그런 태형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그럼, 왕의 소원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라고 치고.

 

 

왕비는? 뭐 들은 거 없어?”

 

 

마마의 마음이 전하께 전해졌으면 좋겠다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하셨던 것밖에는 생각이 나질 않사옵니다.’

마마께서는 늘 성심은 마마를 향해 있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마마의 마음이 주상께 닿았으면 좋겠다 하셨지 않으셨습니까.’

 

 

지민의 말에, 태형은 언젠가 (역시나) 상궁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왕비의 소원. 왕비의 마음이 왕에게 전해지는 것. 제가 상궁에게 왕비가 간절히 바랐던 것이 있을까 물었을 때, 상궁은 그리 답했었다. 태형은 입을 열었다. 왕비의 마음이, 왕한테 전해지는 거.

 

 

?”

상궁이 그랬어. 왕비가 평소에 입버릇처럼 그랬다고. 왕의 마음은 자기를 향해 있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자기 마음이 왕한테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뭐야, 그럼 서로 좋아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 그럼 왜…….”

글쎄.”

 

지민의 말에, 정국은 어깨를 으쓱했고 태형은 그런 정국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남 일 같지가 않아서. 서로 좋아하는데 모종의 이유 때문에 지구 내핵까지 파고들 정도로 삽질을 하고 있었던 게, 꼭 저와 정국을 보는 것 같아서. 태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구나……. 왕이라고 다를 거 없네.

 

 

그런데 어떻게 이뤄줘야 할지 모르겠네. 결국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되는 거 아니야.”

그러게요.”

그 소원나무에 가 보면 뭔가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물론 소원나무가 호랑이는 아니고 소원나무를 잡을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맥락은 같다. 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돌아오고 범인은 이 안에 있고 진실은 언제나 하나라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태형의 말에 정국과 지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가 봐서 나쁠 건 없을 것 같긴 해.

 

 

그럼 조만간 그 절로 행차를 가자고 할게요.”

……. 이제야 좀 뭔가가 풀리는 거 같네.”

 

 

긴장이 풀린 듯, 지민이 바닥에 스르르 풀어졌고 태형 역시 뻣뻣이 세우고 있던 허리를 누그러트렸다. 그러자 정국이 여태껏 태형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빼내 태형의 허리를 살살 쓸었다. 허리 아파요? 주물러 줄까요? 정국의 다정한 말에 태형은 괜히 홧홧해져 오는 얼굴을 조금 더 푹 숙였고. 그러나 그 둘의 다정한 투샷에 지민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허리가 왜 아픈데.”

니가 뭔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그거 아니다.”

내가 뭔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거 같은데?”

진짜 아니에요. 아직은.”

아직?”

 

 

아직.’ 태형은 그 익숙한 부사에 더욱 더 홧홧해지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이를 꾹 물었다. 아직이라니. 아직이라니?! 그럼 뭐 언젠가는, 허리 아플 일을 하겠단 소린가!? 아니 물론 뭐, 언젠가는 하긴 하겠지만, 아니 그런데 우리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 태형은 그 짧고 단순한 단어가 일으킨 한순간의 파동에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진짜 알고 싶지 않다.”

그러면 물어보질 말든가요.”

내가죄인이다…….”

 

 

시발 애인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지민은 남몰래 울음을 삼키며 제 자신을 쓰다듬었다. 세상은 어쩜 이다지도 불공평한지. 쟤네는 소원 이루어 주고, 나는 왜 소원 안 이루어 줘요. 현대로 성공적으로 돌아가고 나면, 나도 그 소원 나무한테 소원이나 빌어 볼까. 소원 뭐 빌지. 뜨끈한 바닥에 벌러덩 누워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생각의 가지를 뻗고 있던 지민은 가지의 끝이 그 생각까지 닿은 순간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야?!”

나 생각났어.”

?”

 

 

그리고 이어, 지민은 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제 소원. 전정국과 김태형이 워크샵에 가서 나무에 빌었다기에 전혀 생각해내지 못했던 제 소원. 지민은 차오르는 억울함에 가뜩이나 도톰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까, 지민은 소원을 빈 적이 있었다. 나무가 아니라, 할아버지네 집 근처에 있는 돌무더기에.

 

 

우리 망개, 여기다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단다.’

 

 

지민은 인자하게 웃으며 말씀하시던 할아버지를 두둥실 떠올렸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 돌무더기에다 대고 소원을 빌었던 제 자신도. 아니 시발 나는 그 돌무더기가 소원나무랑 칭구칭구인 지 몰랐지! 게다가 하필이면 그 때는, 한 학기를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자 교양수업에 출석하며(사실 당연한 것이다) 영혼을 쏟아 부었음에도 마음 속 그녀와 핑크빛 기류를 형성하지 못한 절망감에 사랑이고 뭐고 필요 없으니 부와 명예를 가지겠다고 결심한 때였다. 그러니까, 적게 일하고 많이 벌게 해주세요. 우연히 성공하게 해주세요. 아무런 노력 없이 성과를 이루게 해주세요. 옷으로 출세하게 해주세요. 등이 제 하나뿐인 소원이었던 때. 지민은 여전히 저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태형과 정국에게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특채로 등용했다!’

내가 왜 니 옷고름을 쳐 매 주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건지 설명해봐.’

 

 

왕비…….”

 

 

낮잠 자다 일어나 보니 왕의 최측근이 되었다.(아무런 노력 없이 우연히 성공) 그리고 맡게 된 것이 왕비의 옷을 관리하는 직무.(옷으로 출세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비록 가끔 야근을 하긴 하나 그다지 힘들지는 않고 궁궐에 살며 특별히 신경 써 주는 태형 덕에 맛있는 반찬에 좋은 옷을 입고 호강하는 제 자신(적게 일하고 많이 벌게 해주세요). 지민은 하나하나 기억을 되짚어 손을 꼽으며 제가 빌었던 소원의 달성률에 손을 떨었다. 그러니까, 제가 조선에 떨어진 것은 2+1 소원 프로모션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그러니까,

 

 

씨발…….”

 

 

바로 놀랍고도 신묘한 힘을 가진 영험한 돌에 소원을 빈 제 자신 때문 덕분이었던 것이다.

 

 

+


https://milkteaxger.postype.com/


티스토리 개편 후 글쓰기가 불편해져서 포스타입으로 연재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ㅠㅁㅠ

조선로맨스는 완결이 얼마 남지 않아서 (18화 완결) 여기에 끝까지 올려드릴 생각이지만 새로운 글이나 외전 등은 포스타입에 올라오게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 > 조선 로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로맨스 17  (0) 2018.12.31
조선 로맨스 15  (0) 2018.11.13
조선 로맨스 14  (0) 2018.11.07
조선 로맨스 13  (2) 2018.08.15
조선 로맨스 12  (3) 2018.08.01

 



15

 

헷빛은 따스하고, 새들은 부드럽게 조잘대는 아침. 태형은 눈을 감은 채로 이불 속에서 뒤척였다. 조금만 더 자고 싶은데……. 행복한 늦잠을 위해 태형이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다시 꿈속으로 빠져들려는 찰나, 태형은 바로 옆 매우 가까운 곳에서 뒤척이는 기척을 느꼈고 곧이어 조금 묵직한 무게감이 태형의 가슴 위로 닿았다. 뭐지? 따뜻하고 포근한데.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한 태형은 조금 뒤척이다가 이내 무게가 느껴진 쪽으로 돌려 누웠다. 여전히 눈은 감은 채였다. 평소 무언가를 끌어안고 자야만 잠이 드는 버릇이 있는 태형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쪽으로 손을 뻗었고 이내 그 온기가 제 자신을 품어 안는 것을 느꼈다. 포근하고 따뜻하고 안정적인 느낌. 태형은 저도 모르게 잠결에 미소지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딱딱한 게 꼭 커다란 곰 인형 같…….

 

……!”

 

아니, 잠깐. 딱딱? 태형은 그 생각과 함께 반짝 눈을 떴다. 그리고 뜨자마자 숨을 멈췄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몽롱했던 정신이 단번에 맑아졌다. 제 코앞에, literally 정말 문자 그대로 제 코 1mm 앞에 있는 정국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찼기 때문에. 엄마야. 태형은 간신히 비명을 삼키고 눈을 깜박이다 이내 제가 정국의 품 안에 단단히 안겨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리고 제 자신도 정국을 꼭 끌어안고 있다는 것 역시.

뭐야 왜 네가 여기 있어?”

 

그래서 태형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아니, 같이 자는 건 자는 건데, 얘는 왜 날 이렇게 꼭 끌어안고 있고 나는 왜 얘를 이렇게 꼭 끌어안고 있는 거지? 밤새도록 이러고 있었던 건가? 태형은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입술이 맞닿을 것 같은 거리의 얼굴에 제 심장이 아침부터 미친 듯이 뜀박질에 시동을 거는 것을 느꼈다. 정국의 얼굴은 아침부터 보기엔 좀 버거운 얼굴이라고 생각하며. 그러니까 안구 말고 심장에(정국의 얼굴은 눈 건강에는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태형의 목소리에, 정국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태형이 형…….”

 

잔뜩 잠긴 목소리를 하고, 정국이 잠결에 웅얼거리며 웃었다. , 미친. 목소리 왜 저렇게 섹시해. 태형은 숨을 참고 눈을 깜박였다. 전정국 잘생긴 거야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우리 집 탄이도 알고 중동에 무함마드도 아는 사실이지만 이렇게 잠에서 막 깨어나 부스스한 얼굴과 목소리까지 섹시할 필요가 있을까? 누구 좋으라고? 그러나 태형이 그런 정국의 목소리에 뭐라 답하기도 전에, 정국은 태형은 끌어안았던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어 태형을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태형의 코엔 정국의 가슴팍이, 태형의 목덜미엔 정국의 손이 닿았고. 제 뒷목과 윗등을 감싸 안은 정국의 손은 기분 좋게 뜨거웠고, 제 코에 닿은 정국의 가슴팍에선 두근거리는 정국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태형은,

 

…….”

 

지금 이 순간 부정맥에 걸려도 이상할 게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잘 잤어요?”

 

시발, . 진짜. 그렇게 웃지 마. 그렇게 잠긴 목소리로 섹시하고 나른하게 말 걸지 마. 하이틴 드라마에서 뜨거운 첫날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 아침 햇빛을 조명처럼 받으며 아가리 똥내 따윈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처럼 키스하고 모닝 섹스 한 번 더?를 외치는 남주인공처럼(이런 드라마는 없다) 웃지 말라고! 태형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뜀박질을 하고 있는 제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안 돼. 이렇게 아침부터 부정맥으로 하나님 얼굴을 뵙고 오고 싶진 않았다. 태형은 살아야 했다. 살아서 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태형은 슬쩍 정국을 밀어냈다. , , 잠깐만.

 

왜요…….”

잠깐만 이것 좀 풀어봐. 누가 들어오면 어떡해.”

누가 들어오면 어때요? 부부가 서로 좀 껴안고 있겠다는데. 상궁들은 더 좋아할걸요.”

, 부부…….”

 

태형은 정국의 가감 없는 단어 선택에 눈을 빠르게 깜박였으나 그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부부도 맞고, 상궁들이 좋아할 거라는 것도 맞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제 심장과 아침이라 퉁퉁 부었을 제 얼굴이었다. 그 전에야 밤새도록 안주를 집어먹어 퉁퉁 부은 얼굴로 정국과 마주앉아 해장 라면을 끓여 먹어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지금은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고! 그러나 그런 태형의 마음을 알 턱이 없는 정국은 태형의 바르작거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태형이 바르작거릴수록 태형을 더 꼭 껴안아 올 뿐이었다. , 가만히 좀 있어 봐요.

 

아침부터 이러고 있으니까 좋다.”

너 지금 심장 엄청 빠르게 뛰어.”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친 듯이 전력질주를 하고 있는 것이 제 심장 혼자뿐인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일까. 태형은 제 코에 닿은 정국의 가슴팍에서 그대로 느껴지는 정국의 심장 박동에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 없었다. 정국이도 지금 나랑 비슷한가 봐. 태형은 저도 모르게 눈을 스르르 감으며 정국의 품 안으로 조금 더 깊숙이 안겼다

 

.”

 

, 그런 제 자신에 화들짝 놀라 정국을 확 밀쳤다. , , 미쳤나!! 나도 모르게 그만!! 태형은 저도 모르게 끼를 부린 제 자신에 놀란 참이었다. 그리고 졸지에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채 태형에 의해 가슴이 밀쳐진 정국은 놀라 눈을 깜박였다. 왜 그래요?

 

, 일해야지! ! 지금 해가 중천에 떴어!!”

무슨…….”

여봐라!! 거기 밖에 누구 없느냐!!!”

 

아침부터 이런 분홍빛 기류를 맞이하기에는 아직 심장의 준비가 덜 된 태형이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부르자 그제야 조용했던 문 밖에서 예, 마마.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태형은 전하께서 가신다고 하신다!!고 외쳤다. 아직 이불 속에서 태형을 쳐다보고 있던 정국은 얼빠진 표정을 지을 뿐이었고.

 

세숫물을 들일까요?”

, ! 그래!”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문 밖에서 상궁의 대답이 들려옴과 동시에, 태형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이 정신없는 아침을 끝낼 수 있겠구나. 그러나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고 했던가. 태형이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태형은 어느새 일어나 앉은 채 제 옷깃을 끌어당긴 정국에 의해 눈 깜박할 새도 없이 정국의 앞에 마주 앉게 되었다. 그리고, 정말 한순간이었다. 그러니까 갑자기 일어난 일에 태형이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제 이마에 정국의 입술이 닿은 것은.

 

?”

이 정도는 뛰는 거 아니죠?”

…….”

그럼 이따가 봐요.”

 

태형이 뭐라고 반응할 새도 없이, 정국은 다시 한 번 빠르게 태형을 꼭 껴안고 때마침 세숫물을 들고 들어온 상궁에게 손짓을 한 뒤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그런 정국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 상궁은 정국이 방을 나서고 문이 닫히자마자 태형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마마. 어찌 전하께서 그냥 가십니까?”

? 그거야 할 일 하러 가는 거지.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

…….”

? 무슨 일 있어?”

, 혹시 전하와 언쟁이라도 하셨나 해서…….”

 

그렇게 말하는 상궁의 얼굴이 심상치 않아 보여 태형은 상궁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무슨 일이 있냐 물었고 그런 태형의 말에 상궁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리고 이어진 상궁의 말에,

 

아니, 전하의 용안이 조금 붉어져 계셔서 무슨 일이 있으신가 하고요.”

 

태형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 없었다.

 

*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하였습니다. 그 뜻은,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진다는 뜻이지요!’

 

태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에 안심하며 제가 알아 온 푸라토사랑법을 알려주던 상궁의 얼굴을 떠올렸다. 상궁이 직접 발품을 뛰어 요즘 저자에서 가장 유행에 민감하다는 人徶(인별) 金認士(김인사) 선생의 저서 [薰女生情]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薰女生情]

 

추완(椎關): 남녀 단계란 무릇 추천(鞦韆:그네)과 같으니 계속 밀기만 해서도, 계속 당기기만 해서도 안 된다. 적절한 때에 다가가고, 적절한 때에 사내를 애태워야 진정한 薰女라 할 수 있다.

아이건댁(娥利健宅): 눈을 마주쳐 사내의 마음에 예쁘고 이롭고 튼튼한 집을 짓는 방법으로, 눈이 마주치면 눈꼬리를 접어 웃어 사내의 마음에 불을 지펴야 진정한 薰女라 할 수 있다.

교태(嬌態): 사내가 여인의 교태에 약하다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을 터. 허나 이론만 알고 실전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야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런 고로 필자는 교태의 한 가지 예시를 제시하고자 한다. 일명 너구리기술과 곰돌이 한 마리기술이다. 번외로 일합일(一合一)’ 기술도 있다.

[너구리 기술]

 

: 少女 요즈음 눈길이 가는 사내가 생겼습니다.

: 허어. 그것이 누구인고.

: !

: …….

: 구리!><

 

[곰돌이 한 마리 기술]

 

: 곰돌이 한 마리로 육행시(六行詩)를 해 보겠소. 운을 띄워 주시겠소?

: .

 

잠시만. 사실 상궁이 가져온 책자는 꽤 두꺼워 그 뒤에도 몇 개의 기술들이 더 나열되어 있었으나 태형은 차마 더 펼쳐보지 않고 덮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건댁법까지는 그럭저럭 해 볼만 하다고 생각되었으나 그 이후 교태법에 나열되어 있는 것들은 도저히 따라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태형이 서책을 들고 손을 잘게 경련하거나 말거나, 상궁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은 일합일 애교가 좋을 것 같다며 추천까지 해 주고 있었고 그래서 태형은 그런 빛나는 상궁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이 대화를 끝내고자 했다.

 

, 그래. 뭐 나중에 전하를 만나게 되면 해 보,’

아뇨, 마마. 행동하는 지성인이 되셔야 합니다.’

?’

여태껏 항상 전하께오서 마마를 찾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이젠 마마께서 전하께 가실 때가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토록 만나기 어렵다는 인사(認士) 선생까지 친히 만나고 온 상궁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언제 다시 한 희빈이 전하를 홀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찾아온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상궁은 태형이 뭐라 하기도 전에 상궁들을 불러 태형을 먹이고 씻기고 단장시켜 거의 내쫓듯 교태전 밖으로 내보냈다. 나른한 오후, 지루한 오전 정사(政事)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러 경회루를 거닐 때 사랑하는 중전이 그림같이 서 있으면 전하께오서 얼마나 행복하시겠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너무 속보이는 거 아니냐고…….”

 

태형은 잔뜩 기합이 들어가 있는 상궁의 기세에 차마 다시 교태전으로 돌아가자는 말도 꺼내지 못한 채로 경회루의 누각을 서성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왕이 이 시간에 경회루를 산책하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대놓고 이곳에 보란 듯이 서 있는 것은 아무래도 민망하잖아! 밤에 다시 만날 텐데 꼭 그새를 참지 못하고 보고 싶어서 마중 나온 사람도 아니고(맞다)! 어떻게든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려고!(그렇다) 한 시도 떨어져 있지 못하는 커퀴벌레마냥!(정답이다) 서로가 좋아 죽겠는 신혼부부마냥!(바로 그거다)

 

…….”

 

태형은 괜히 누각 아래 있는 상궁들의 눈치를 살피며 누각 가장자리로 슬금슬금 자리를 옮겼다. 아무래도 너무 민망하니까. 자신만 살짝 이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으면 정국이 산책을 나왔다가 이 밑에 상궁들은 그냥 상궁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정국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부끄럽다기보다는, 아무 이유도 없이 정국을 찾아왔다는 것이 아직은 조금 민망했으니까.

 

형 진짜…….’

…….’

짜증나네요.’

 

그렇게 누각 가장자리에 쭈구려 앉아 멍을 때리고 있자니 자연스레 정국이 떠올랐다. 현대에서 있었던 일들도. 유라의 등장 이후로 어딘가 틀어졌던 관계긴 하지만, 정국과 제 관계는 그 날을 기점으로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무너졌었다. 정국과 동방에서 마주친 그 날. 그날 이후 정국과 자신은 서로 인사도 안 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으니까. 태형은 그래서 불안한 거였다. 그토록 친하다고 생각했던 정국과 한 순간에 그렇게 틀어질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었으니까. 유라가 자신이 아닌 정국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태형은 유라를 깔끔히 포기했음에도 정국과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었다.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게 정확하겠다. 그 날, 정국은 태형의 전화를 모두 무시했고 방학이 끝난 후에도 태형과 겹칠 수밖에 없는 전공 필수 수업을 모두 신청하지 않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써 가며 태형을 피하고 태형과는 눈도 마주치려 들지 않았다. 태형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정국의 앞에서, 태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아까 전정국이 너 죽일 듯이 노려보던데.’

 

소원나무에다 소원을 빌고 버스로 돌아오는데, 동기 한 명이 슬그머니 다가와 그랬다. 그 말에, 태형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까지 할 건 뭐야? 그래도 선밴데.’ 이어지는 동기의 말에 태형은 막 버스에 오르고 있는 정국을 살짝 쳐다봤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형 진짜 짜증나네요.’ 그 날 정국의 말이 다시 귓가에 울렸다.

 

어쩔 수 없지 뭐.’

…….’

그래서 정국이랑 유라는 사귀는 거야?’

 

정국이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건 안다. 교수님이 불러 늦을 것 같다고 정국에게 보낸 문자, 제 손에 들려 있던 초밥, 그리고 제 문자대로라면 교수님의 방에 있어야 했을 시간에 동아리방에서 유라와 함께 마주친 정국과 제 자신. 모든 것이 정국이 오해를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국이 그대로 동방을 나가버리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후 정국을 뒤따라나간 태형은 정국을 찾을 수 없었다. 정국이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도 모조리 씹었으니까. 자취방에 찾아가 봤지만 정국은 애초에 자취방에는 들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것 같던데. 걔네 둘이 이상한 교양 수업 같이 듣더라.’

그렇구나.’

 

시험이 끝난 후 동아리방에서 시간을 때우다 물 마시러 나간 차에 교수님을 만났고, 교수님은 이 시간에 시험을 안 보는 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불렀을 거라며 괜찮으면 지금 볼까 물었다. 잠깐 물 마시러 나오느라 핸드폰까지 동방에 두고 나온 태형은 그대로 교수님을 따라갔고 심각한 얘기라도 할 줄 알고 정국과의 약속까지 미루게 만들었던 교수님은 태형에게 간단한 심부름을 시켰다. 그렇게 교수님의 심부름으로 인쇄소에 제본을 맡기고 나니 손목시계는 딱 정국과 만나기로 한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고 태형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초밥집에 갈 게 아니라 초밥집에서 초밥을 포장해 서프라이즈로 정국의 자취방에 가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 태형오빠, 손에 그거 초밥이에요?’

, 태형이형 대박. 한유라가 며칠 전부터 초밥, 초밥 노래 부르던 건 어떻게 알고.’

고마워요, 오빠. 오늘 저 생일이라 지금 술 마시러 갈 건데 오빠도 같이 갈래요?’

 

그러나 초밥을 손에 들고 나서야 동방에 핸드폰을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은 태형은 핸드폰을 가지러 간 동방 앞에서 유라와 후배들을 마주치게 됐다. 정국이와 어색하게 된 이후로 애들이 모여 있을 만 한 시간에는 동방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 태형은 초밥을 뒤로 숨기며 어색하게 웃었으나 이미 후배 중 한명이 태형의 손에 들린 초밥을 눈치 챈 후였고 제 생일이라며 환하게 웃는 유라와 후배들 앞에서 태형은 차마 이 초밥은 네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 초밥이야 가는 길에 다시 사가면 되지. 태형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유라에게 초밥을 안겼다.

 

생일 축하해, 유라야. 그런데 어쩌지. 나는 선약이 있어서.’

뭔데요?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저희 이제 책만 놔두고 바로 갈 거예요.’

? 안에 누구 있나? 문이 열려 있는데?’

? 아니, 나는 잠깐,’

 

핸드폰만 가지러 온 건데. 하지만 태형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갑자기 열린 동아리 방의 문과 갑자기 찾아온 정적 때문에. 태형은 순간의 정적에 자연스럽게 동방 안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 곳엔,

 

태형이 형?’

정국아,’

? 정국이 있었네?’

 

정국이 있었다. 태형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묻고 있는 듯한 정국의 얼굴, 소란스러운 유라와 후배들. 정국의 시선이 저에게서 떨어져 유라의 손에 들린 초밥에 머무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태형이 뭐라 변명하기도 전에, 정국의 시선을 느낀 유라는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 나 오늘 생일이라고 태형 오빠가 사다 줬어. 짱이지.’

, 아니,’

내 생일이라 우리 술 마시러 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 정국아?’

 

태형은 황급히 유라의 말을 가로막았으나 더 이상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사실 저 초밥은 네 것이 아니라 정국이와 내 거고, 나는 네 생일인지도 몰랐다는 말을 생일이라 잔뜩 신나 있는 유라와 후배들 앞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국의 시선이 저에게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태형은 차마 정국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어 정국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그 때, 정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 진짜,’

…….’

짜증나네요.’

 

그리고는 누가 잡을 새도 없이 동방을 빠져나갔다.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 누구도 잘못한 건 없었다. 타이밍이 안 좋았고, 모든 사건들이 교묘하게 어긋났다. 사소한 어긋남이 겹치고 물려 최악의 타이밍을 만들어냈던 것뿐이다. 동방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유라와 후배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하는 것 같았고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태형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정국을 쫓아 동방을 뛰쳐나갔지만 정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다시 동방으로 돌아와 무슨 일이냐고 묻는 후배들에게 대답해 줄 새도 없이 핸드폰을 들고 수도 없이 정국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정국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엉망진창이었다.

 

…….’

 

어쩌면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르는데. 태형은 벤치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정국에게 말하려고 했다. 나는 더 이상 유라를 좋아하지 않으니 네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좋다고. 나는 유라보다 네가 더 소중한 것 같다고. 너랑 이렇게 인사도 안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되고 싶진 않다고.

 

망했어…….’

 

그러나 이번에도 정국과 저는 어긋나버리고 만다. 오히려 새로운 오해만 생겼다. 태형은 핸드폰을 꾹 붙잡았다. 핸드폰은 제 속도 모르고 잠잠하고, 학기가 끝난 학교는 고요하다. 그리고 태형은 생각했다. 그냥, 애초부터 그 정도의 관계였던 건 아닐까.

 

…….’

 

이 정도의 오해로 어그러질 사이였다면, 애초부터 의미 없는 관계였던 건 아닐까. 이 투정엔 전화를 받지 않는 정국에 대한 원망도 조금 섞여 있었다. 그 후배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좋아하는 여자를 포기할 정도로 아꼈던 후배에게 무시당하는 기분이란. 태형은 고개를 떨궜다. 원래 끈끈했던 관계도 이토록 쉽게 망가질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애초에 정국과 제 관계가 그 정도가 아니었던 건지. 그래서 불안하다.

 

태형이 형.”

 

현대로 돌아간다면, 그래서 유라가 다시 나타난다면. 지금 조선에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른 상황들이 다시 돌아온다면. 그러면 정국과의 관계도 다시 삐거덕거리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데 이미 나는그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는데.

 

형이 웬일이에요? 여기까지 오고.”

?”

왜요. 심심해서 왔어요?”

 

언제 온 건지 제가 회상에 빠져 있는 사이 어느새 제 바로 옆에까지 다가온 정국은 태형을 보며 물었고 태형은 정국의 목소리에 빠르게 과거에서 빠져나오며 눈을 깜박였다. 정국의 얼굴이 바로 옆에 있었다. 태형은 그런 정국의 얼굴을 쳐다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럼 왜,”

너 보고 싶어서.”

…….”

 

그리고 그 순간, 저를 보고 있던 정국의 눈이 느리게 깜박여진다. 그리고 정적. 갑자기 찾아온 정적에 당황한 태형이 정신을 차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 너무 진지했나? 이거 아닌가? 이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하지? 태형이 눈을 굴렸다. 그러니까, 그냥 농담처럼 넘어가려면,

 

, 형 와서 좋지? 알아, ,”

.”

?”

좋아 죽겠어요.”

 

, , 그래? 태형은 한없이 진지한, 농담기라고는 쥐똥만큼도 보이지 않는 정국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보고 싶어서 왔단 말은 진심이 맞긴 했지만 저도 모르게 나온, 어쩌다 보니 그냥 튀어나온 말이었는데.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잖아.

 

태어나길 잘했네요,”

 

누각 밑에서 정국과 태형의 분위기를 초조하게 관전하며 지금이 바로 너구리 기술을 사용할 때라고 태형에게 마음속으로 간절히 텔레파시를 보내고 있는 상궁은 꿈에도 모르는 채로, 태형은 정국을 마주 응시했다. 그러니까 그때와는 너무 많은 것이 달라져 버렸다. 알게 된 것이 너무 많았다. 정국이 얼마나 설레게 말하는지, 얼마나 예쁘게 웃는지, 어떻게 키스하는지. 그리고 제가

 

형한테 내가 보고 싶어서 왔다는 소리도 다 듣고.”

 

얼마나 전정국을 좋아하는지.



* 薰女生情 : (薰향초  女여자   生생활  情정보 )

' > 조선 로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로맨스 17  (0) 2018.12.31
조선 로맨스 16  (0) 2018.12.31
조선 로맨스 14  (0) 2018.11.07
조선 로맨스 13  (2) 2018.08.15
조선 로맨스 12  (3) 2018.08.01

 

 

 

 

14

 

 

단언컨대 태형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제 자신이 눈치 없는 편에 속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형은 어렸을 때부터 삼남매의 맏이로서 부모님이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동생들을 챙겼고, 맏이 특유의 책임감과 기민함으로 어머니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형의 특성은 초··고에 진학한 이후에도 빛을 발해, 태형은 친구들 사이에서 분위기 메이커로 통했을 뿐 아니라 담임 선생님의 귀여움까지 도맡는 반의 귀염둥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래서 태형은 고등학교 때 친해진 지민이 저에게 처음으로

 

 

너 진짜 눈치 없다.

 

 

라고 했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더랬다. 아니 내가 왜!? 그러나 지민은 그런 태형의 반응에 혀를 쯧쯧 차며 그랬다.

 

 

그걸 모르는 게 눈치가 없는 거야, 멍청아.

 

 

아니, 멍청이라니?! 멍청이!? [명사] 아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출처: 표준국어대사전)?! Idiot(출처:ET-house 능률 한영사전)?! ばか(출처: 네이버 일본어사전)?! 傻瓜(출처: 에듀월드 표준한한중사전)?!?!?

그날 밤 초록창에서 멍청이의 사전적 뜻까지 검색하며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던 태형은 그러나 지금, 지민이 제게 했던 그 멍청이눈치 없는 새끼’(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았다)라는 말을 곱씹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일정 부분 수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형이 날 좋아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

김태형이, 전정국을 좋아하게 해달라고.”

 

 

변화구도 아닌 꽉 찬 돌직구. 오해의 소지라고는 일말의 여지도 없이 없애버리겠다는 정국의 의지가 엿보이는 주어와 목적어, 서술어가 완벽히 갖춰진 문장의 고백을 떠올리며 태형은 헛숨을 삼켰다. 언제부터였을까. 어떻게 좋아하게 됐을까. 좋아하게 됐을까.

 

 

그럼 형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키스해요?”

 

 

그 말을 생각하면, 그 소란했던 합궁 날부터 정국은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아니, 유라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아니면 조선에 온 후에 자신을 좋아하게 된 건가. 어쩌다가 좋아하게 됐을까. 어쩌다 보니 좋아하게 된 건가. 태형은 방 안에 멍하니 앉아 어젯밤을 떠올렸다. 정국의 입술이 닿고 난 후에 멍하니 정국을 쳐다보는 태형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정국은 태형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살짝 웃었다.

 

 

긴장 풀어요.’

?’

지금 간신히 걷기 시작한 사람한테 나랑 같은 속도로 뛰어달라고 안 해요.’

…….’

지금 형이랑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좋으니까.’

 

 

그러고는 저를 꼭 안아 오는 정국에 태형도 얼결에 그런 정국을 마주 안았더랬다. 여전히 얼굴은 뜨겁고, 심장은 뛰고 있었지만 간신히 정신을 차릴 정도는 됐다. 그건 다행이었다. 지금 와서 그 상황을 다시 자세히 곱씹어 볼 수 있었으니까.

 

 

전정국…….”

 

 

정국의 이름을 되뇌이며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제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어쩐지 아직까지 화끈거리는 것 같다. 태형은 이내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쌌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언제부터지?! 언제부터일까.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분명 정국은 유라를 좋아했었고. 그래서 그 날 과방에서 제게 화를 냈고, 그 이후로 제가 하는 연락도 받지 않았고. 제 연락을 받지 않는 정국에게 연락을 하다가, 하다가, 결국에는 포기하고 쓰린 속을 술로 달래는 동안 정국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렇게 싫어하던 선배와 함께 조선으로 떨어졌을 때는 또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그리고 그 선배가 제 첩도 아닌 정실부인인 것을 알게 됐을 땐? 합궁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땐!?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부정적인 쪽으로는 아무리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생각의 가지가 뻗어나가는 법이다. 그러니까 혹시정국이가 나를 좋아하는 게

 

 

…….”

 

 

착각은 아닐까.

 

 

*

 

 

이런 미친 디그다 새끼.”

 

 

뒷마당에서 팡팡 빨래를 널던 지민(2n, 내시)은 태형이 머뭇거리며 털어 놓은 심오한 고민에 대해 4어절의 문장으로 화답했다. 그에 태형은 그런 지민의 반응에 왜! 하고 항변했지만 지민은 고개를 저으며 잠시 멈추었던 손을 다시 놀리기 시작했다.

 

 

난 또 무슨 심각한 고민이라고.”

심각한 고민이거든?”

증전마마. 그렇게 할 일이 없으시면 소인 빨래 너는 거나 도와주시옵소서.”

그러다가 상궁들이 보면 너만 혼나.”

그르믄 끄즈스든그…….”

 

 

, 진짜! 나 진짜 진지하다니까!? 태형은 한 쌍의 커퀴벌레를 보는 듯한 지민의 눈빛에 제 절박함을 피력했다. 내가 지금 솔로인 네 앞에서 커플 염장을 부리겠다는 게 아니라, 정말 나는 진지하다고! 그러나 그런 태형의 항변에도 지민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걔가 무슨 착각을 해.”

아니, 그렇잖아. 여기 와서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고. 그러니까 그냥 의지가 되는 감정을 좋아한다고 착각한 거 같아. 걔 나 싫어했다니까? 내가 걔가 좋아하는 애 좋아해서,”

누가 누굴 좋아해?”

아니. 암튼. 그랬는데 이렇게 갑자기 날 좋아하게 된다는 게 말이나 돼? 걔 내 연락 싹 다 씹었었는데?”

너도 걔 연락 씹었다며.”

그거는 핸드폰이 망가져서!”

고친 이후로도 연락 안 했잖아.”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안 한 거지…….”

걔도 그랬나 보지.”

 

 

어느새 빨래를 다 널고 찌뿌둥한 허리를 피며 허리를 툭툭 두드린 지민이 바구니를 챙겨 발걸음을 옮겼고 그런 지민을 태형은 졸졸 쫓아갔다. . 지민아. 진짜 아닐까? 진짜 착각하는 거 아닐까? 걔가 날 좋아하는 게 맞을까?

 

 

, 몰라!”

…….”

그리고 야. 걔가 널 좋아하는 게 착각이면 시발, 무슨 착각을 몇,”

?”

아니다. 이건 내 입으로 할 얘긴 아닌 거 같고. 암튼 아니야.”

너 뭐 아는 거 있지?! 말해. 뭔데?”

, 싫어! 니네 사랑싸움에 나 끼지 마. 또 한 번 멱살 잡아봐라. 진짜. 그땐 진짜 둘 다 쌍으로 어디 가둬버릴 거니까.”

너무하네…….”

 

 

태형은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진짜로 시무룩해진 것은 아니었고, 지민이로 하여금 죄책감 내지는 동정심을 끌어내기 위한 연기였다. 그리고 지민은 그런 태형을 한 번 보고, 텅 빈 바구니를 한 번 보고, 하늘을 한 번 보고, 답답해 죽겠는 제 가슴에게 위로의 말을 한 마디 건넨 후 긴 한숨을 내쉬고 태형을 뒤돌아 쳐다봤다. 진짜, 내가 어쩌다가 이런 눈치 없는 새끼(김태형)와 사랑에 눈 먼 새끼(전정국)의 사랑 놀음에 끼게 되어서

 

 

할아버지께선 말씀하셨지.”

?”

안 되면 되게 하라.”

무슨 개소

전정국이 널 좋아하는 게 착각이라고 쳐. 그런데 어쨌든 지금은 널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잖아.”

그렇지?”

그럼 꼬셔.”

?”

널 좋아하게 만들면 되잖아. 정실부인의 힘을 보여줘.”

저기요.”

그냥 니꺼 도장 빡! ? 빼도 박도 못하게 딱! ? ! ? 이 얼마나 좋은 기회냐. 남의 눈치 안 보고 꼬실 수 있고.”

 

 

지민은 주위를 살짝 둘러본 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태형의 어깨를 두드렸다. 유교가 지엄한 조선시대에서 동성연애라니. 이 얼마나 새롭고 특별한 경험이야?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당신이 아니면 누가? 조선시대 궁궐에서 왕을 게이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 지민은 태형을 향해 살짝 윙크하며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알지, 친구?

 

 

호모는 죽지 않아요.”

?”

그럼 난 간다. 따라오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지민은 성큼성큼 걸어 멀어졌고 그런 지민의 뒷모습을 태형은 황망히 쳐다보았다. 온갖 있어 보이는 척은 다 해 놓고 결국 결론은 정국을 꼬시는 거라니. 태형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알지, 친구? 지민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다시 울림과 동시에 지민의 윙크가 떠올라 태형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알긴 뭘 알아, 미친놈아…….”

 

 

뿌듯한 발걸음으로 당당히 걸어가는 지민의 뒷모습을 향해 조그맣게 욕설을 읊조리며.

 

 

*

 

 

별 소득 없이 터덜터덜 교태전으로 돌아온 태형은 방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런 미친 디그다 새끼.’

 

 

어쩌면 지민의 말이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정말로 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인지 모르겠으나 지민은 정국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에 꽤나 확신을 갖고 있는 듯 보였다. 지민은 정국과 단 둘이 술을 마실 정도로 친하니까 그 정도로 확신을 갖고 있다는 건 정국으로부터 무언가 들은 것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럼 꼬셔.’

 

 

그리고 이 말도.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긴 하다. 정국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착각이라면, 착각이 아니게 만들면 되지 않는가?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만들기에 다시 오지 않을 완벽한 기회가 맞긴 했다. 제가 정국을 꼬시겠다 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인원이 몇인가. 상궁들은 정국과 자신의 합궁각을 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지 않은가. 그래서 태형은 반짝 눈을 떴다. 그래. 모 아이돌도 그랬잖아. 고민보다 고라고. 그래서 태형은 짧은 생각을 마치고 곧바로 제 결심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가장 먼저 상궁을 불렀다. 어떻게 하면 정국의 마음을 겟챠할 수 있을까. 차마 그 방법을 지민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으니까.

 

 

성심(聖心)을 사로잡는 방법이요?”

아니 뭐, 성심이라고 할 것까지는 좀 그렇긴 한데 뭐 대충그렇지?”

 

 

그러나 태형이 몇 번이고 연습한 후 쪽팔림을 무릅쓰고 간신히 조그만 목소리로 조언을 구한 것이 무색하게, 앞에 멀뚱히 앉은 상궁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태형을 응시했다. 그리고 태형은 그 대수롭지 않다는 상궁의 표정에 눈을 깜박였다. 뭐 엄청 좋은 수가 있나? 그러나 곧이어 상궁의 입에서 나온 말에, 태형은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마마. 일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성심을 얻기 위해서는 튼튼한 원자 아기씨를 회임하셔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 , 잠깐만,”

세간에는 아녀자란 무릇 가만히 누워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옥경을 더 깊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마께오서 먼저 주상 전하의…….”

아니 잠깐, 스톱!!!!!!!”

스돕이요? 그게 무엇,”

, 아니 잠깐 마, 말을 멈추거라.”

 

 

다급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바다 건너 서국의 언어를 내뱉은 태형은 상궁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의아해하는 틈을 타 상궁의 입을 막는 것에 성공했고 그와 동시에 태형의 머릿속에서 태형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막 상영을 시작하려던 19금 비디오도 가까스로 재생을 멈출 수 있었다. 태형은 새빨개진 얼굴을 제 손을 들어 가렸다. 세상에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야.

 

 

마마갑자기 왜 그러시옵니까.”

, 아니, 무슨 그런 말을 이런 환한 대낮에,”

이미 다 알고 계시는 것이지 않습니까. 혹 제가 가르쳐 드린 것을 주상 전하와 함께,”

, 안 했어!!!!! 안 했다고!!!”

?”

 

 

태형은 여전히 새빨개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소리쳤다. 하긴 뭘 해! 진짜! 아직까지 귓가에 상궁의 목소리가 남아 맴도는 것 같았다. 옥경을 더 깊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게다가 훨씬 더 큰 문제는 처음 상궁으로부터 합궁 교육을 받을 때와는 달리 조금 더 실감(!)나고 생생하게 펼쳐지는 제 머릿속 영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와 지금은 경험의 깊이가 달랐으니까. 감정의 종류도.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이제 태형은 키스할 때 정국이 어떻게 상대를 쳐다보는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국이 어떻게 상대를 껴안는지도, 그리고 또…….

 

 

아악!!!”

마마?”

미쳤다. 어떡해?”

?”

 

 

그리고 그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에 태형은 손을 내려 입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지금 너무 진도가 빠른 거 아니야? 태형은 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생각해 보면, 정국도 저도 사귀자는 말을 꺼낸 적 없으니 정국과 제 사이는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미 뽀뽀에 키스까지 한데다가 원베드 투베개도 아니고 원베드 원이불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아니 아무리 피 끓는 성인 남남이라지만 너무 진도가 빠른 것 아닌가. 게다가 정국과 저 사이에는 풀어야 할 오해까지 남아 있다. 태형은 생각했다. 그래,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중전 마마,”

플라토닉한 게 먼저 필요해.”

푸라토?”

, 아니, 그러니까, 정신적인 사랑?”

마마, 무슨 말씀이신지 소인은 잘…….”

그러니까 내 말은, 이미 몸으로는 갈 데까지(?) 갔으니까, 뭔가 그정신적인그런 게 필요하다는 거지.”

…….”

 

 

태형의 말에, 상궁은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 탄성을 내뱉었고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국이와 나 사이에는 그런 게 필요해. 확신. 믿음. 대화. 그런 거. 생각해보니 좋아한다는 말도 직접적으로 못 들었잖아. 태형이 자신감에 찬 얼굴로 야무지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소인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 아니 뭐 송구할 것까지야,”

소인이 그저 음욕에 눈이 멀어…….”

?”

그럼 제가 그 푸라토를 찾아보겠습니다.”

? 아니 그 전에 뭐라고 한,”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상궁은 덩달아 주먹을 꼭 쥐어 보였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 단호한 얼굴에, 태형은 어, , 그래하고 떨떠름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방금 뭔가 되게 이상한 단어를 들은 것 같은데 착각

 

 

그런데 마마,”

.”

갈 데까지 가셨다는 말씀은,”

?”

주상 전하와 함께 어디 뭐 천당이라도 다녀오셨다는 말씀이신가요?”

 

 

이 아니구나.

 

 

*

 

 

그래서, 제 생각에는 이 일기가 도움이 되어줄 것 같아요.”

일기?”

왕이 매일 썼던 일기래요.”

 

 

정국은 진지한 눈빛으로 품안에 소중히 품고 온 서책을 꺼내들었다. 모두가 잠든(이라고 쓰고 상궁들은 눈빛을 빛내며 깨어 있는 으로 읽는다) , 정국와 태형은 방 안에 마주 앉아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들어오기 전에 정국이 상궁들은 방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으라 엄명을 내리긴 했지만, 혹시 모르는 것이니까. 그리고 정국의 진지한 눈빛을 마주 보며, 태형은 꿀꺽 침을 삼켰다. 딱히 정국이 하는 말이 심각한 사안이었기 때문은 아니고, 야심한 밤, 정국과 제가 같은 방 안에 단 둘이 있다는 것이 자꾸만 의식되었기 때문에. 자꾸만 제 몸을 감아 오는 긴장감에 태형은 살짝 혀를 빼어 입술을 핥았다.

 

 

제가 봤을 때는 우리가 조선으로 오게 된 게, 그 소원 나무랑 연관이 있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왕과 왕비로 오게 되었다는 건, 그러니까 아마도 왕과 왕비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

그런데 문제는 이 일기가 한자랑 옛날 한글이랑 막 섞여 있어서 뭐라고 써져 있는지 읽기가 힘든…….”

…….”

?”

, ?!”

내 말 듣고 있어요?”

 

 

, . , 듣고 있어. 태형이 더듬거리며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눈을 가늘게 뜨는 걸 보니 딱히 정국이 제 말을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잠깐 딱딱하게 굳어 어색하게 웃고 있는 태형과 서책을 번갈아 쳐다본 정국이 이내 얕은 한숨을 내쉬고 서책을 옆에 툭 내려놓았다.

 

 

요즘 많이 피곤해요?”

? , 아냐. 계속 얘기해 봐.”

난 요즘 피곤해요.”

 

 

그러니까 일로 잠깐만 와 봐요. 손에서 서책을 내려놓은 정국이 이내 팔을 벌리며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 태형이 그렇게 말하자 정국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 형 말고 누가 있어요. 그 말에 태형은 아, , 그렇지하고 머쓱하게 말하며 볼을 긁었다. 그러고도 태형이 머뭇거리고 있자, 몸을 살짝 일으켜 태형에게로 가까이 당겨 앉은 정국이 태형을 껴안았다.

 

 

, 좋다…….”

…….”

 

 

그리고 저를 감싸 안는 온기에, 태형은 숨을 참았다. 정국의 턱이 제 어깨에 올려지고, 정국의 손이 천천히 제 허리를 감싸 안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새 정국에게 폭 안긴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정국의 조금은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 소리가 차근차근 귓가에 닿고, 정국의 손이 닿은 모든 부분이 뜨거워진다. 정국의 머리카락이 제 목에 닿아 부드럽게 흩어지고, 정국이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 가까이서 들리고. 평소보다 훨씬 예민해진 모든 감각이 온 몸을 건드리고.

 

 

태형이 형.”

?”

나 안아줘요.”

 

 

그 예민해진 감각에 얼마나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을까. 낮게 가라앉은 정국의 목소리가 태형의 귓가에 안착했다. 꼭 진공관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정국의 목소리는 웅웅 울린다.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 정국의 단단한 손이 태형의 등을 타고 올라와 태형의 목에 닿고,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귓가에 닿고. 태형은 홀린 듯 정국의 등 뒤로 손을 올린다. 그에 정국이 조금 더 힘을 실어 기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생각했다. 혹시 지금이 그 타이밍 아닐까. 그 날의 아직 풀리지 않은 오해를 풀고, 관계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기회.

 

 

정국아.”

?”

 

 

그래서 태형은 정국의 등에 올렸던 손을 들어 저를 단단히 감싸 안고 있는 정국의 팔을 건드렸다. 나 할 말 있는데……. 태형의 목소리에, 살짝 노곤하게 풀린 정국의 눈이 태형을 향했고 태형은 꿀꺽 침을 삼켰다. 뭐부터 얘기해야 할까. 그러니까…….

 

 

, 유라 있잖아.”

…….”

그러니까 나는 그 날 유라를,”

.”

 

 

그러나 태형의 말은 정국의 낮은 목소리에 의해 끊겼고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정국의 온기가 제게서 천천히 떨어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피곤한 듯 제 손으로 눈을 꾹 누른 정국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걔 얘기 지금 안 하면 안 돼요?”

? 아니, 나는 그게 아니라,”

형 입에서 걔 이름 나오는 거 싫어요.”

 

 

정국이 태형에게 눈을 맞췄다. 그리고 그 눈에 태형은 입을 합 다물었다. 난 건가? 정국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요,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이기적이고, 욕심도 많아요.”

…….”

지금도, 제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알면 형 되게 놀랄걸요.”

?”

그런데 참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형도 지금은,”

…….”

나만 생각해 주면 안 돼요?”

 

 

그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되잖아요, 그쵸. 그러고 정국은 태형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태형에게 안겨 왔다. 그 말에 어떻게 계속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지은 죄가 있는데. 결국 태형은 하려던 말을 목 뒤로 넘긴 채 정국을 마주 안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내가 놀란다는 건데?’

 

 

머릿속 한 구석에 차마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 하나 더 늘어난 채로.

 

 

+

 

 

너무 오랜만이라 민망한 수준.... 약간 감도 잃은 거 같고.. 조만간 내가 내 글 정주행해야겠어..ㅠㅋㅋㅋ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열심히 다시.. 써볼게!! 항상 고마워!! 사랑해 보라해ㅠㅠㅠ 켐들 덕분에 힘이 난다!

 

 

https://milkteaxger.postype.com/

' > 조선 로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로맨스 16  (0) 2018.12.31
조선 로맨스 15  (0) 2018.11.13
조선 로맨스 13  (2) 2018.08.15
조선 로맨스 12  (3) 2018.08.01
조선 로맨스 11  (3) 2018.07.27

13

 

차라리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하지 그랬냐, ?!”

 

시발 진짜 변명을 해도 진짜……. 그렇게 도망치듯 교태전으로 돌아온 이후, 멍하니 앉아 벽을 바라보던 태형은 이내 서안(書案:책을 펴 보거나 글씨를 쓰는 데 필요한 서실용 평좌식 책상)에 제 머리를 박으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세상에 배가 고프다니. 아무리 둘러댈 말이 없기로서니. 그 말이 거기서 그렇게 나올 게 뭐야. 너무 바보 같잖아!! 연기라도 했어야지 멍청아!!! 태형은 입술을 마구 깨물며 서안에 머리를 콩콩 찧다 이내 볼을 대고 스르르 무너졌다.

 

쪽팔려서 이제 어떻게 봐…….”

 

가뜩이나 좋아한다는 감정을 알아채고 난 후에 정국이 얼굴 보는 게 힘들어졌는데, 거기에 쪽팔려서라는 이유까지 덧붙여졌다. 태형은 착잡한 심정에 눈을 감았다. 아직까지도 아까의 열기가 얼굴에 그대로 남은 채였다.

 

그 와중에 또 잘생겨가지고…….”

 

짜증나게. 한 번 보니까 자꾸 보고 싶어지잖아. 태형이 불퉁하게 중얼였다. 정국이 태형에게 그냥 후배였을 때는 잘생겼다는 생각을 가끔(은 아니고 사실 제법 자주)만 했을 뿐이었는데, 좋아한다고 자각하고 나니 태형의 안에서 정국은 킹 갓 제너럴 어쩌구 하여튼 얼굴킹이 되었고 이제 태형은 시도 때도 없이 정국의 얼굴을 떠올리며 멍하니 입을 벌리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정국의 얼굴이 변한 것은 아닐 테니 아마 그만큼 제가 정국을 좋아한단 얘기겠지. 태형은 고개를 돌려 다시 이마를 서안에 기댔다. 열 좀 식히자…….

 

마마, 소인이 들어가도 되겠사옵니까?”

 

태형이 역시나 몽글몽글 떠오르는 정국의 얼굴에다 애써 블러 처리를 하며 가만히 앉아 열을 내리고 있던 그 때였다. 문 밖에서 조그맣게 들리는 상궁의 목소리에 태형은 비척비척 고개를 들어 어, 들어와, 하고 말했다. 그에 문이 열리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태형의 눈이 이내 동그랗게 커졌다. 저게 뭐야?

 

마마, 전하께오서 우육牛肉을 하사하셨습니다.”

?”

뿐 아니라 돈육豚肉과 계육鷄肉을 비롯해 삼과 각종 약재들도 보내셨습니다.”

아니, 갑자기 왜.”

마마께오서 더위에 기력이 쇠하신 것 같아 보이신다고하루빨리 기운을 차리셨으면 하신다고…….”

 

태형은 제 눈앞에 놓인 휘황찬란한 식재료들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현대에 있을 때 엄마의 손에 끌려 간 백화점 식품관에서나 보았던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식재료들이 신선한 태형의 눈앞에서 날 먹어 봐요, 하고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을 채 다물지 못하고 식재료와 상궁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니까이게 지금 다 전정국이 나한테 보낸 거란말인가?

 

마마, 혹 그간 찬이 부실하였

, 아니야 그런 거!”

 

두 손에 가득 들린 신선한 식재료들과는 달리 그간 제가 관리하던 태형의 식단이 부족하였을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들어가고 있는 상궁의 표정에 태형은 벌어지는 입을 간신히 닫고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부족하긴 무슨. 충분했는데. 자취방에서 끓여 먹던 즉석밥이나 라면에 비하면 얼마나 감사하고 따끈한 집밥이었는데.

 

, 그냥 전하께서 나를 너무 아끼셔ㅅ,”

……!”

, 걱정하셔서…….”

 

물에 데친 시금치처럼 시들어버린 상궁의 표정을 풀어주고자 황급히 말을 잇던 태형의 성급한 단어 선택에 상궁의 얼굴이 순간 햇빛을 받은 해바라기처럼 밝아졌고 그에 제 단어 선택의 실수를 자각한 태형은 재빨리 말을 바꿨다. ‘전하께서 나를 너무 아끼셔서라니. 이게 무슨 사랑받는 중전이 행복에 겨워서나 내뱉을 수 있는 염장 대사란 말인가. 그러나 태형의 그러한 정정이 무색하게 상궁의 눈빛은 이미 다시 봄비를 맞은 새싹처럼 파릇초롱해진 후였다.

 

마마…….”

, ?”

소인은 정말

…….”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태형은 이번에도 차마 상궁에게 전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으,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런 태형을 보며 흐뭇하게 웃던 상궁이 이내 그럼 오늘 석반에는 한우를 올릴까요? 하고 발랄하게 물었고 태형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약 주고 병 주고도 아니고. 제 피로의 원인 제공자에게 위로 받는 기분이 묘했다. 아니다. 이런 것들은 위로보다는 효도에 가까운가

 

저기,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전정국 다 컸네. 선배한테 효도도 할 줄 알고까지 생각하던 태형은 순간 떠오른 생각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여태까지 정국의 얼굴을 떠올리고 지워내느라 급급해 아까 정국이 했던 말을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정국이가 아까 분명히

 

왕이랑 왕비랑 절에 가서 고목에 소원을 비는 행사가 매년 있대요. 그런데 대충 말하는 걸 들어 보니까 우리 워크샵 갔던 그 절 같은 거예요. , 우리 워크샵 갔을 때도 소원 들어주는 나무 있었잖아요.’

 

라고 했었지. 아까는 정신이 없어 흘려들었는데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니 태형 제 자신도 그 나무에 소원을 빌었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 나무와 저와 정국이 이 조선에 떨어지게 된 것이 관련이 있는 걸까?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하문하시지요.”

내가 간절히 바랐던 소원 같은 게 있을까?”

?”

 

정말 그 나무가 소원을 들어 준 걸까? 그런데 누구의 소원? 내 소원? 아니면 정국이의 소원? 그것도 아니면 왕과 왕비의 소원? 태형은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래서 상궁에게 물었다. 소원을 말해봐, 내게만 말해봐, 그런데 네 소원 말고 내 소원내 소원을 내가 알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알겠느냐마는, 태형이 현재 제 자신인 왕비의 평소 소원을 알 턱이 없으니까. 하지만 소원이란 생기면 누구에게든 말하고 싶어지는 종류의 것이다. 말하면 이루어진다고도 하지 않는가. 태형은 왕비가 평소 그 말을 신뢰하여 친한 상궁에게 제 소원을 흘렸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태형의 그런 기대와는 달리, 상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마, 그게 무슨…….

 

누군가가 소원을 이루어준다면 내가 바랐을 거 같은 거 말이야.”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마마, 모든 것을 갖고 계신 마마께서 바라셨던 것이라 하면…….”

…….”

마마의 마음이 전하께 전해졌으면 좋겠다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하셨던 것밖에는 생각이 나질 않사옵니다…….”

…….”

마마께서는 늘 성심(聖心:임금의 마음)은 마마를 향해 있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마마의 마음이 주상께 닿았으면 좋겠다 하셨지 않으셨습니까.”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상궁이 말을 이었다. 마마께오선 습관처럼 강녕전을 쳐다보시곤 하셨으니까요, 마마. 그리고 그 말에, 태형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쩌면, 정말 정국이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그 소원 나무 때문에 정국과 제가 이 조선으로 떨어지게 된 거라고.

 

하지만 마마, 그건 모두 옛말이고 이제는 전하께오서도 마마를

그건가 봐.”

?”

왕비의 마음이 왕에게 전해지는 거.”

마마, 그게 무슨…….”

 

그러니까, 내가 정국이를 좋아하는 게. 내가 정국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정국이에게 알리면, 그게 우리가 조선에서 현대로 돌아갈 수 있는 열쇠인가 봐. 태형은 멍하니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조선에 오고, 정국이도 조선에 오고. 내가 정국이를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그걸 정국이에게 말하면…….

 

그럼 나는?”

?”

나는 어떡해?”

마마, 갑자기 무슨…….”

 

제 앞의 상궁이 의아해하거나 말거나, 태형은 멍하니 중얼였다. 그럼 나는 어떡해? 전정국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어 버린 나는. 전정국은 한유라를 좋아하는데. 만약에 내가 전정국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래서 현대로 돌아가게 되면. 그 후에 나는 어떻게 되는 건데?

 

이런 게 어딨어…….”

 

억울해. 왕비 소원은 들어주면서, 왜 내 소원은 안 들어 줘. 태형은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

 

오늘도 그렇단 말이지.”

, 전하. 송구하오나 그렇사옵니다…….”

 

그 날로부터 벌써 5일 째, 태형은 이리저리 정국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최대한 정국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외출을 자제하는가 하면, 정국이 찾아오기라도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정국을 만나주지 않았다. 처음엔 아직 기력이 회복되지 않아 왕을 뵙는 것이 송구하다는 핑계로, 그 다음부턴 자리에 없다는 핑계로. 또 그 다음에는 주무시고 계시다는 핑계로. 아프다는 핑계를 대면 혹시나 제가 간호하겠다고 나설까 봐 제일 쉽고 편한 핑계는 대지도 못한 채로, 태형은 상궁으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게 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전하께 거짓을 고하느냐며 안 된다고 만류하던 상궁도 태형의 간절한 눈빛에 결국 지고 말았고.

 

혹시 그간 중전에게 누가 찾아왔었느냐? 한 희빈이라든가…….”

아뇨, 전하. 전하께오서 명을 내리신 이후로 한 희빈은 교태전 근처에 얼씬도 못 합니다.”

중전에게 변고가 생겼다거나…….”

아닙니다, 전하. 그저 오수에 드시는 시간이 길어지신 것 뿐입니다.”

 

상궁은 왕의 앞에서는 반드시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을 해야 하는 것이 궁궐의 예의인 것에 감사했다. 아니라면 차마 전하의 눈을 바로 보지 못하다 결국은 제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걸 들켰을 테니까. 하늘같은 주상전하께 이렇게 거짓을 고하게 되다니. 상궁은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제가 모시는 중전마마의 간청이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부디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하루빨리 중전이 기력을 차렸으면 좋겠다고 전해주시오.”

그러겠사옵니다, 전하.”

 

이렇게 다정하신 전하께 마마는 왜! 상궁은 남몰래 눈물을 훔치며 허리를 조금 더 숙였다. 왕의 행렬이 교태전에서 서서히 멀어져 가고, 상궁의 시야에서 왕의 행렬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 교태전 안쪽에서 태형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갔어?”

가셨습니다.”

 

, 다행이다……. 태형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나머지 몸을 드러냈고 그런 태형을 상궁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응시했다. 마마, 언제까지 이러실 겁니까……. 그러나 어느새 상궁의 앞으로 온 태형은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미안해, 거짓말 하게 해서.”

소인은 괜찮습니다. 다만…….”

…….”

왜 주상전하를 피하고 계시는 건지, 그 연유만이라도 알려주시면 안되겠사옵니까, 마마.”

…….”

염려가 되어 그렇습니다. 혹 주상전하께 큰 잘못이라도 하신 겁니까?”

잘못…….”

 

상궁의 걱정스러운 말에 태형이 고개를 들어 초점 없는 눈빛으로 상궁을 쳐다봤다. 잘못이라. 잘못이라 한다면 잘못이 있긴 했다. 나에게 잘못이 있다면

 

너무나 많이 사랑한 죄…….”

?”

 

난 너로 인해 그 죄로 인해 눈물로 앓고 있다고이러케……. 태형은 의아한 얼굴의 상궁의 말에 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래, 이게 다 그 망할 소원나무 때문이다. 걔가 이 한성왕후란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애꿎은 제 자신을 조선으로 끌고 오지만 않았어도 나는 현대에서 행복할 수 있었는데. 비록 마음이야 아팠겠지만 전정국을 좋아한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그렇게 외면한 채로 살아갈 수 있었는데!! 태형은 다시 불쑥 치고 올라오는 억울한 마음에 입술을 꼭 물었다. 소원나무 개새끼야…….

 

중전?”

……?!”

 

그런데 태형이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억울한 감정을 삭히고 있던 그 때였다. 태형이 자리하고 있는 몇 걸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고, 태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가 놀라 동그래진 눈을 하고 있는 상궁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제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목소리는, 그러니까…….

 

방금 전에 중전은 오수에 들었다고…….”

, 전하…….”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향기. 그리고 제 눈앞에 있는 상궁의 떨리는 목소리. 태형은 꿀꺽 침을 삼켰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여태껏 기를 쓰고 피해 왔던, 제가 짝사랑 중인 전정국이라는 걸. 태형이 놀라 그대로 굳어있는 동안, 정국의 향기가 조금 더 가까워졌고 태형은 다시 한 번 꿀꺽 침을 삼켰다. , 어떡하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태형은 눈을 꼭 감았다. 그러니까, 아직은, 전정국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데. 그러나 그런 태형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쪽으로 오는 정국의 발자국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 돼. 아직은 안 돼. 태형은 숨을 합 하고 들이쉬었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그리고 잠시 후 정국의 손이 태형의 어깨에 닿기 직전, 태형은…….

, 마마?!”

……?!”

 

튀었다. 속된 말로 토꼈다. 앞 뒤 잴 것도 없었다. 머릿속에는 그저 지금 당장 정국을 마주할 수는 없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은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제가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는 채로, 태형은 무작정 앞을 향해 뛰었다. 놀라 저를 부르는 상궁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고, 전정국의 향기 역시 멀어져 갔다.

 

김태형 이 대책 없는 새끼야…….”

 

태형은 괜히 찔끔 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최대한 멀리, 빠르게, 정국이 제 모습을 볼 수 없도록 뛰었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 말 그대로

 

이제 난 몰라…….”

()사랑에 미친 멍청이의 뜀박질이었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보게.”

, 송구하옵니다, 전하…….”

예상은 했지만…….”

소인을 죽여 주시옵소서…….”

 

정국은 제 눈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상궁을 쳐다봤다. 솔직히, 예상은 했다. 김태형이 자길 피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우연의 일치겠거니. 요즘 날씨가 너무 덥다 보니 지쳐서 계속 잠을 자는 것이겠거니 스스로 위안하고 있었는데. 정국은 입술을 물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현대에서 있었던 일들이 데자뷰처럼 겹쳐졌다.

 

…….”

전하…….”

일어나 고개를 드시오.”

 

정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의아함과 두려움이 섞인 상궁의 눈과 정국의 눈이 마주쳤다. 그때도, 지금도. 태형은 일방적으로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그 때는 이유라도 예상할 수 있었다지만, 지금은 이유도 알 수 없다. 사실, 이유를 알고 있더라도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겠지만.

 

그러니까, 여태까지 고의로 나를 피해 왔던 거란 말이지…….”

, 전하…….”

내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 부탁이라뇨, 전하. 당치도 않습니다…….”

 

명하시옵소서, 따르겠나이다. 상궁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고 정국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이게 옳은 일인가, 옳지 않은 일인가 생각이 들었지만 이렇게 또 이유도 모른 채로 답답하게 태형과 멀어지기는 죽어도 싫었으니까.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날을 잡아줄 수 있을까.”

?”

중전에겐 알리지 말고.”

전하…….”

자꾸 나를 피하니까.”

…….”

이렇게라도 얼굴을 마주 보고 얘기를 하고 싶어서…….”

 

지금 하는 말이 제 눈앞의 상궁에겐 어떻게 들릴까, 나중에 태형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생각들은 떠올랐다가 곧 사라졌다. 이기적이라면 이기적이겠지만, 애가 닳고 속이 타서 어쩔 수가 없었다. 정국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엄청 한심해 보이겠지. 자길 일부러 피하는 사람을 붙잡아 달라고 부탁하는 꼴이라니. 그건 좀 곤란하다고 거절당해도 할 말 없다. 차마 상궁의 눈을 바로 볼 수 없어, 정국은 고개를 숙였다.

 

전하…….”

…….”

소인,”

…….”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명 받잡겠습니다.”

?”

 

그러나 곧이어 들려온 상궁의 결의에 찬 목소리에, 정국은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깜박였다. 제 눈앞의 상궁은 주먹까지 꼭 쥐어 보이며 단호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단호하고도 결의에 찬 눈빛에 정국은 방금 제가 뭐라 했는지 다시 한 번 돌이켜 보았다. 내가 방금 적장의 목을 가지고 오라는 부탁을 했던가?

 

이 몸의 뼈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빠른 시일 내에 반드시 전하와 마마를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 아니, 뭐 그, 그렇게까지는…….”

그동안의 불충을 용서하소서.”

 

제가 전하의 그 깊고도 넓은, 마치 하해와 같은 중전마마를 향한 애심(愛心)을 잠시 잊고……. 상궁은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결심을 다졌다. 말을 마치고 다시 고개를 숙인 상궁의 등 뒤에서는,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결심의 오오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정국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살펴 가시옵소서, 전하.”

 

끝까지 결의에 찬 목소리로 고개를 숙인 상궁을 뒤로하고, 정국은 얼떨떨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낱 상궁이 이토록 충성심이 깊을 줄이야최후의 순간,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뛰어 들어가는 장수의 기백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국은 다시 떠오르는 그 눈빛에 살짝 몸을 떨었다. 태형이 형 그렇게 안 봤는데…….

 

상궁들한테는 엄청 FM 스타일인가?”

 

*

 

왜 이리 소란이야?”

, 마마!”

 

그렇게 어떤 의미에서의 사랑의 도주를 한 지 이틀, 태형은 그 날 이후 깊게 잠들지 못해 퀭한 눈으로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아침부터 교태전이 평소답지 않게 소란스러웠다. 태형은 채 뜨지 못한 눈을 비볐다. 아침부터 무슨 일 있는 건가.

 

마마, 기침하셨습니까. 목욕물을 받아놓을까요?”

아침부터? 그런데 오늘 무슨 날이야? 왜 이렇게 다들 바빠 보여?”

, ,

……?”

날이 좋으니까요! 간만에 새 단장이나 해볼까 하고……. , 마마께서도 새로운 기분으로 하루를 맞이하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유난히 떨리는 상궁의 목소리, 쉬이 마주치지 못하는 두 눈. 어딘가 어색한, 저 문장. 태형은 멍하니 상궁을 쳐다봤다. 상궁의 태도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태형은 아직 채 잠에서 깨지 못한 두뇌를 빠르게 돌렸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봤을 때 상궁은 지금…….

 

많이 바쁘구나.”

?”

붙잡아놔서 미안. 목욕물 받아줘. 목욕은 내가 혼자 할게.”

 

태형은 채 다 못 뜬 눈을 부비며 상궁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와 동시에 잠시 빠르게 돌아갔던 CPU도 종료시켰다. 늘 고생이 많아. 적절한 인사는 잊지 않고. 그러나 혹시 제가 한 거짓말이 들켰을까를 걱정하던 상궁은 그런 태형의 격려에도 멍하니 태형을 쳐다볼 뿐이었다. 우리 마마님늘 생각하는 거지만 참 선하시고다정하시고

 

? 나 얼굴에 뭐 묻었어?”

 

눈치가 없으시구나…….

 

*

 

벌써?”

요즘 마마께서 기력이 없으시니, 그럴 땐 일찍 침소에 드시는 게 좋사옵니다.”

그래도아직 술시(戌時19~21)밖에 안 됐는데…….”

…….”

역시 일찍 자는 게 건강해지는 지름길이겠지? 그래, 자자!”

 

오늘 상궁 이상해무서워제 말에 눈에 띄게 딱딱해지는 상궁의 표정에 태형은 금세 꼬리를 내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침부터 청소를 열심히 하더니 많이 피곤했나제가 순순히 방으로 들어가자 다시 풀리는 상궁의 표정에 태형은 영 께름칙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채 슬금슬금 상궁이 준비해 놓은 이불 위로 올라섰다. 상궁이 문을 닫고 물러나고, 방 안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태형은 이부자리에 가만히 누워 오지 않는 잠에 눈을 깜박였다. 목욕물에 향유를 얼마나 들이부었는지 아침에 한 목욕인데도 아직까지 온 몸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아니, 가만.

 

이 촛대 뭐지?”

 

태형은 익숙한 듯 낯선 촛대와, 평소와는 다른 침실의 분위기에 이불 위에 뉘였던 몸을 반짝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하긴 했다. 아무리 제가 궁중의 일들에 대해 잘 모른다 해도,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던 적은 여태까지 없었다. 그러니까그 말인 즉슨오늘은 뭔가 특별한 날이라는 것인데교태전에 특별한 날이란…….

 

뭔가 기분이 쎄한데…….”

 

태형은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쩐지 등 뒤가 서늘했다. 그러고 보니 이 분위기낯설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러니까…….

 

주상 전하 납시오!”

……?!”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태형이 방문을 열어젖히려던 바로 그 순간, 태형의 손이 닿기도 전에 문이 열렸고 태형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 내시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제 눈앞에 등장한 그 사람때문에. 그러니까,

 

, …….”

 

요 며칠 태형의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던 그 사람. 계속해서 태형을 잠 못 들게 만들었던 그 사람. 자나깨나 태형의 눈앞에서 어른거리던 그 사람.

 

오랜만이네요,”

 

잘생기고, 예쁘고, 귀엽고, 하여간 이 세상 좋은 형용사는 다 같다 붙여도 모자람이 없는 그 얼굴.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태형이 가장 보고 싶으면서도 가장 피하고 싶었던 그 사람,

 

중전.”

 

전정국 때문에.

 

*

 

…….”

 

배신자……. 태형은 제 아랫입술을 세게 감쳐물었다. 배신자……. 환하게 웃는 상궁의 얼굴이 눈앞에 어렴풋이 스쳐지나갔다. 배신자……. 하하하하하 중전마마아아 행복하시옵소서어어어 들어본 적 없는 상큼한 상궁의 목소리까지 저절로 재생되어 귓가에 울렸다. 태형은 정국을 보자마자 달아오른 제 얼굴을 가라앉히기 위해 정국을 등지고 앉아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태형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미치겠다 별들아…☆★

 

.”

…….”

나 안 볼 거예요?”

 

등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정국의 목소리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리려다가 아직 제 얼굴이 뜨거운 것을 자각하곤 간신히 참았다. 그리곤 고개를 더 숙였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제 감정을 자각하지 못했을 때에도 이런 분위기에 정국과 단 둘이 남겨졌을 때 죽을 것 같았는데, 감정을 자각하고 난 후에 정국과 이렇게 단 둘이 방 안에 남겨지게 되었으니 지금 태형의 상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냥 차라리죽여줘……. 좀 진정이 되면 무슨 말이라도 꺼내 볼 텐데, 지금 섣불리 말을 꺼냈다간 딸꾹질이 튀어나올 것 같아 태형은 입술을 부러 더 꾹 물었다.

 

…….”

 

그리고 그 때, 정국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태형은 그 소리에 제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태형은 슬쩍 몸을 돌려 정국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 곳엔, 여태까지 제가 봐 왔던 전정국 중에 가장 굳은 얼굴을 한 전정국이 있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지금난 건가?

 

갑자기 왜 나 피하는데요.”

…….”

이제 나랑 말도 섞기 싫어요?”

,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거 아니면 나 좀 보고 얘기해요.”

 

태형이 제 말을 부정하자마자, 정국은 태형의 팔을 잡아 제 쪽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긴다. 그 바람에 제가 채 힘을 쓰기도 전에 휙 하고 돌려 앉혀진 태형이 눈을 깜박였다. 그 순간 태형의 시야에 정국이 가득 들어찼고 태형은 지금 당장 제 심장이 터져 죽는대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태형을 모르는 정국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있긴 있었지내 인생 최대의 지각변동을 일으킨 일이내가 널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거든 내가……. 태형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차마 입 밖으론 꺼낼 수 없는 말이 목에 걸려 태형을 간지럽게 했다. 그냥 대충 얼버무리고 이 상황을 무마해야 하는데,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 얘가 좀 뒤로 갔으면 좋겠는데. 날 놔주든가. 태형이 정국의 시선을 피했다. 정국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머리가 핑핑 돌았다.

 

말 안 해줄 거예요?”

, 그런 게 있어!”

…….”

넌 몰라도 돼.”

…….”

 

그 말을 마치고, 태형이 정국의 손에 제 손을 겹쳐 정국의 손을 떼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 이제야 좀 살겠네. 뒤로 물러선 다음 숨을 몰아쉰 태형이 잠시 눈을 도르륵 굴리다 문득 이상해진 분위기에 정국을 쳐다봤다. 왜 아무 말이 없지……. 그러나 태형의 눈이 정국을 향한 그 순간, 태형은 저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쉬어야 했다. 정국이, 그 때 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날. 한유라의 생일날, 과방에서 봤던 정국의 그 얼굴.

 

형 되게 상처받게 말하네요.”

,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네가 굳이 알 필요가 없…….”

형이 지금 왜 날 피하는지 제가 아니면 누가 알아야 하는데요?”

?”

누구냐고요, 그 새끼가.”

 

, 아니 왜 말이 또 그렇게……. 태형은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정국은 쉬이 물러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지금 태형이 왜 자신을 피하는지, 대답을 꼭 듣고야 말겠다는 얼굴. 태형은 제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국이 화화났나?

 

아니 잠깐만.”

?”

근데 왜 네가 화내?!”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태형은 문득 차오른 억울함에 반짝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 지금 전정국이 나한테 화를 낼 처지야? 불쌍한 건 난데? 한유라 좋아했다가 포기하고. 이젠 전정국 좋아했다가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건 난데. 왜 나한테 화내? 태형이 눈을 세모나게 떴다. 왜 나한테 화내는데?! 세상 억울한 건 난데!

 

화 낸 거 아니에요. 기분이 안 좋은 거지.”

왜 기분이 안 좋은데? 겨우 내가 너 피한 거 때문에?”

겨우아니. 그게 겨우도 아니지만. 제가 요즘 기분 좋을 일이 뭐가 있는데요. 한창 썸 타고 있었는데 방해꾼이 끼어들질 않나, 갑자기

아니 잠깐만.”

……?”

너 썸 타고 있었어?!”

? .”

누구랑?!”

 

태형은 경악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어느새 억울함과 분노는 휘발되고, 머릿속은 온통 충격으로 가득 찼다. 전정국이 썸을 타고 있었다니! 대체 누구랑? 충격과 공포다 그지 깽깽이들아! 왜 내 허락도 없이? 아니 쟤가 썸타는데 내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지 않지! 내가 정실부인이잖아!

태형의 머릿속은 한순간에 혼란스러워졌다. 대충 태형의 머릿속은 크게 두 가지 붕당으로 나뉘어졌는데, ‘전정국이 썸을 타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야파와, ‘당연히 나랑 상관있지 내가 정실부인인데파가 그것이었고 그 외에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를 궁금해 하는 오하원칙 파, ‘정실부인이라니 미쳤냐, 김태형?’ ,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용을 중시하는 소수의 다 됐고 배고파 정도가 있었다. 아무튼, 태형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묻자 정국은 그 표정에 되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형 그걸 지금 몰라서 물어요? 그 말에 태형은 입을 벌렸다. 몰라서 묻냐니. 그럼 알고 묻겠니. 태형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내가 알아야 하는 사람이라면…….

 

설마 한유

형이랑요.”

?!”

 

설마 한유라, 하고 말하려던 태형의 말은 태형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싹둑 잘라먹은 정국의 목소리에 의해 이상하게 마무리되었다. ?! 하고 의미 모를 탄성을 내지른 태형은 그대로 멈추어 입을 벌렸다. 형이요? 무슨 형이요? 설마 지금 네가 말하는 그 형이 나

 

형이랑 저랑 썸 타고 있었잖아요.”

…….”

밤도 같이 보내고. 뽀뽀도 하고. , 키스였구나. 아무튼. 최근엔 데이트도 하고. 비록 중간에 불청객이 끼어들긴 했지만.”

…….”

 

그랬구나내가 너랑 썸을 타고 있었? 아 정말? 난 오늘 처음 알았네…….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래, 생각해 보니 그러긴 했다. 정국과 자신은 소위 말하는 연인들이 하는 행동을 전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저를 괴롭히던 묘한 기시감의 정체가 이것이었나? 태형은 뭐라 차마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반박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게다가 정국의 얼굴이 너무나도 태연해서. 결국 태형은 잠시 눈을 깜박이며 살짝 웃고 있는 정국의 얼굴을 쳐다보다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 언제부터?”

언제부터더라. 쫌 됐는데.”

…….”

조선에 떨어지고 한 일주일째부터였나?”

…….”

 

그랬구나……. 태형은 멍청하게 읊조렸다. 나랑 전정국이랑 썸을 타고 있었구아니, 이게 아니지!! 멍하니 정국의 말을 납득하던 태형은 다시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근데 썸은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타는 거 아니야!? 나야 물론 전정국을 좋아한다지만. 전정국은아니, 그것보다. 내가 자길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데?!

 

, 그런데 써, 썸은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타는 거 아니야!?”

형 저 좋아하잖아요.”

언제 알았어?! 아니, 어떻게 알았어?!”

 

괜히 어설프게 침착한 척 뱉은 태형의 말에 정국은 태연하게 대답했고, 태형의 침착한 척은 단 3초도 버티지 못하고 박살났다. , , 그거 어떻게 알았어?! 나도 안지 얼마 안 됐는데?! 말한 적도 없는데?! 태형은 여태까지 제가 정국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정국에게 소리쳤다. 사실, 이제 와서 숨긴다고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좀 됐어요.”

 

아 좀 됐어? 알게 됐으면 나도 좀 알려 주고 그러지 그랬냐……. 난 그것도 모르고 괜히 고민했

 

원래 좋아하는 사람 태도는 신경 써서 보게 되잖아요.”

가 아니고 너 나 좋아해?!?!?!?!”

 

충격에 충격에 충격. 태형은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만큼 입을 벌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다 무슨 소리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가 짝사랑하는 상대와 썸을 타고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짝사랑 상대가 자길 좋아한단다. 태형은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 , 좋아, 아니, 내가 널 좋아, 네가 나를 좋아하고너도 나를 좋아하고우린 서로 좋아하는데 그 누구도 말을 안해요링딩동 링딩동 링디기디기 딩딩딩 가나다라마바사 하쿠나마타타

 

형은 진짜 아무것도 모르네요.”

?”

그럼 형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키스해요?”

아니, 그건 어쩔 수 없이,”

저랑 키스를 어쩔 수 없이 했다고요?”

아니 그니까,”

형은 어쩔 수 없으면 키스도 막 해요?”

, 정국아!!!”

 

나 얘 무서워. 태형은 다시 심각해지려는 정국의 얼굴에 다급하게 정국의 이름을 외쳤다. 정국과 제가 썸을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 2. 정국이 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지 1. 태형은 행복해할 틈도 없이 코너에 몰아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래 참았으니까. 정국은 태형을 만나 반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으니까. 말해주고 싶은 마음도, 해주고 싶은 것도 많다. 물론, 그중엔 이토록 빙빙 돌아오게 만든 태형의 눈치 없음에 대한 복수도 조금.

 

, 좋았어!!”

?”

너랑 한 키스! 좋았어! 물론 그 때는 내가 널 좋아하는지 몰랐지만, 좋아하니까 한 거야. 그리고 좋았어. 그러니까 다른 사람하고는 안 할 거야!”

…….”

, 그게 중요한 거 아닐까?!”

 

말은 바로 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한 건 아니라고. 무슨 말인지 자신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좋았으니까! 좋았다. 그럼 된 거 아니야? 태형은 재빨리 말을 이어나갔다. 정국과 오해가 쌓이는 건 이제 더 이상은 싫었다. 정확한 의미 전달의 중요성을 이미 경험한 바 있는 태형이 정국을 똑바로 응시했다. 정국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저게 무슨의미지. 정국의 얼굴에 떠오른 미묘한 표정을 해석하기 위해 태형이 멍하니 정국을 쳐다보자, 정국이 곧이어 씩 웃었다.

 

.”

?”

태형이 형.”

.”

지금 나 꼬시는 거예요?”

?”

 

정국의 얼굴이 훅 하고 가까워진다. 태형은 꿀꺽, 침을 삼켰다. 꼬시긴 누가. 꼬시는 건 지금 네 얼굴이 날 꼬시고 있는데, 정국아……. 태형은 아랫입술 안쪽을 꾹 깨물며 눈을 깜박였다. 지금그러니까이 분위기는그건가? 키스각?

 

태형이 형.”

.”

제가 그 나무에, 무슨 소원 빌었는지 알아요?”

…….”

…….”

몰라…….”

 

태형의 개미만한 목소리가 가까스로 공기를 울리고, 정국이 조금 더 가까이 태형에게 다가왔다. 태형의 코와, 정국의 코가 닿을락 말락, 아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맞닿아 있었다. 태형은 자꾸만 놓아지려 하는 제 정신줄을 간신히 붙잡으며 정국을 마주 보기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이 순간을, 꼭 기억해두고 싶었으니까. 그런 태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국이 사르르 눈꼬리를 접었다. 제가 무슨 소원을 빌었냐면요…….

 

형이 날 좋아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

김태형이, 전정국을 좋아하게 해달라고.”

…….”

 

태형은 코앞에서 느껴지는 정국의 향기에 제 손을 꼭 쥐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그리고 곧이어, 정국의 손이 태형의 손에 닿는다. 정국은 태형의 손을 풀어 태형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넣었다. 마약을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달콤하고 몽롱해서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기분. 태형이 정국을 쳐다봤다. 코가 닿고, 숨이 닿고, 그리고…….

 

지금 이루어 진 거 맞죠,”

 

입술이 닿는다.

 

제 소원.”

 

정국의 입술이, 태형의 입술에.  

' > 조선 로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로맨스 15  (0) 2018.11.13
조선 로맨스 14  (0) 2018.11.07
조선 로맨스 12  (3) 2018.08.01
조선 로맨스 11  (3) 2018.07.27
조선 로맨스 10  (7) 2018.06.29

12

 

궁궐 안 모두가 잠든 깊은 밤, 금실로 수놓아진 비단 금침 안에서 태형은 지금 현재 일생일대의 고민을 끌어안고 제 인생에 있어 어쩌면 가장 커다란 결정이 될 지도 모를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느라 쉬이 잠들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디서든 잘 자는 태형을 잠 못 들게 하고 있는 그 고민은 바로 제가 느낀 그 이상한 기시감에 대한 고민이었으니.

비록 지금이야 조선에 떨어져 팔자에도 없는 왕비 행세를 하며 왕을 사모하는 역을 수행하고 있지만, 조선에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아니 조선에 떨어진 이후 꽤 오랜 기간 동안에도 혹시 제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될 줄은, 그러니까 제 성적 지향성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을 하게 될 줄은 태형은 전혀 몰랐으니까. 태형은 가만히 누워 눈을 감았다. 그래. 처음부터 천천히 생각을 해 보자.


 

Q. 언제부터였는가?

A. 잘 모르겠다.(웃음)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정국을 보며 설레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Q. 설렌다고? 그것뿐인가? 그게 좋아한다는 감정인가?

A. 그것 역시 잘 모르겠다. 난 조선에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같은 동아리의 후배 한유라를 좋아하고 있었다. 물론 모종의 이유로 포기하긴 했지만, 분명 그건 좋아하는 감정이 맞았던 거 같은데.


Q. 말에 확신이 없다. 그렇다면 이 고민을 왜 하고 있는 것인가? 정국에게 느끼는 감정과 한유라에게 느꼈던 감정이 다른가?

A. 잘 모르겠지만, 좀 다른 것 같다. 아니다. 비슷한가? 그러고 보니 유라를 봤을 때 설렜던가? 유라가 가까이 와서 웃을 땐 좀 설렜던 거 같긴 한데…….


Q. 대답이 전부 모른다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시발. 태형은 제 스스로와 문답을 이어나가다 이내 반짝 눈을 떴다. 답이 안 나온다. 무언가 확실한 게 없다. 그러나 이상했다.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가 이상했다. 그러니까, , 정국이 지민을 찾아갔었다는 지민의 말에 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냔 말이다.

 

질투…….”

 

태형은 곰곰이 생각하다 저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에 제가 놀라 팔짝 뛰었다. 질투? 내가 왜 질투를 해? 박지민한테? 정국이는 그냥 후밴데? 그냥 후배가, ? 그냥 이제 약간 어? 고민이 있으면 다른 선배한테 찾아가서 술 먹고, ? 고민 상담 할 수도 있는 거지. 그 때는 나랑 사이도 안 좋았었고. 그러면 지민이한테 찾아갔을 수도 있지. 그게 뭐라고. 머리로는 다 이해가 되는데. 전혀 이상할 거 하나 없는 상황인데.

 

그런데 왜,”

 

내 기분이 이렇게 구리냔 말이다. 태형은 입술을 꾹 물었다. 태형이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해도, 2n년간 사회생활을 하면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정국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단순한 후배를 보는 선배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게 그저 후배를 향한 선배의 조금 강렬한 애정인지, 아니면 좋아하는 감정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제가 지금 맡고 있는 중전의 역할에 과몰입을 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전정국은 남녀를 통틀어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예쁘게 생겼긴 했다. 예쁘기만 한가? 잘생기기도 했고, 귀엽기도 하다. 정색하고 수업을 듣거나 과제를 하느라 인상을 찌푸릴 때면 그렇게 남자답고 잘생길 수가 없는데, 저에게 태형이 형,’ 하고 헤실 웃을 때는 또 그렇게 예쁘고 귀여울 수가 없으니까. 그래, 사실 전정국 정도면 남자고 여자고 그게 뭐가 중요아니 이게 아니고. 나 남자를 좋아하나? 여태까지 내가 남자를 좋아했던 경험이 있었나?

그러나 태형이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보려 해도 태형의 과거 연애 기록은 0에 수렴하였으므로 태형은 곧 제 머릿속의 검색창을 종료시킬 수밖에 없었다. 대신 정국의 웃는 얼굴이 다시 불쑥 치고 올라왔다. 아니 이건 왜 자꾸 떠오르는 거야…….

 

제가 대신 마실게요. 그래도 되죠?’

 

그래. 정국이의 첫인상은 그거였다. 태형의 머릿속에 정국이 잘생긴 신입생에서 전정국으로 바뀐 순간.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정국은 제게 다정했던 것 같다. 태형이 눈알을 도로록 굴렸다. 딱히 해 준 것도 없는데 자신을 엄청 잘 따르는 모습이 무지 귀여웠었는데.

 

나야 상관없지만, 형은 들키면 안 되잖아요.’

형이랑 결혼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어서요.’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 하지 말라구요.’

계속 걱정했잖아요.’

앞으로는 피곤하거나 힘들면 나한테 말해줘요, 형도.’

. 잡을래요?’

 

한 번 떠올리기 시작하니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태형은 촘촘히 엮여 올라오는 정국의 목소리에 가만히 제 손을 심장께에 올렸다. 심장 박동이 차분하게, 그러나 평소보다는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딱 기분 좋게 빠른 정도로.

 

…….”

 

가만히 누워 심장 박동을 느끼던 태형은 이내 저도 모르게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고 보니까, 키스도 했었지. 전정국이랑. 세상에. 후배랑 키스라니. 다시 생각해도 미쳤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지 잘 기억도 안 났다. 기억나는 건 온통 그 때의 감각들뿐이었다. 빙빙 돌아가던 머리, 뜨겁던 얼굴, 미친 듯이 뛰던 심장, 그리고…….

 

형 도와주는 거예요.’

 

전정국의 입술.

 

으악!!!!”

 

태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잔뜩 클로즈업 되어 떠오른 정국의 입술과 그 감촉이 생각나서였다. 미쳤어 김태형!!! 왜 자꾸 생각하는데!!!!! 태형은 어느새 빨개져 있는 제 얼굴을 손부채질로 식히며 방 안을 어수선하게 돌아다녔다. 정신 차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그건 그냥 어쩔 수 없이. 상황이 상황이었으니까. ? 그냥 어쩔 수 없이 한 연기 같은 거…….

 

생각해보니까 괘씸하네?”

 

미친 듯이 떠오르는 정국의 생각을 가라앉히려 아무 이유나 다 갖다 붙이던 태형은 순간 떠오른 생각에 방 안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까. 전정국 이 새끼 완전 선수 아냐?

 

사람이 왜 그렇게 아무한테나 다정해? 유라 좋아하면서?”

 

게다가.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었다지만. 어떻게 선배한테 키스할 생각을 해? 유라 좋아하면서?(2) 태형은 괜히 치고 올라오는 억울함에 입술을 꼭 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제가 설렜던 그 순간들 모두, 어떻게 보면 원인 제공은 전부 전정국이 한 거였다. 그런데 전정국은 한유라 좋아하잖아?(3) 그럼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태형은 제가 정국의 어장 안 싱싱한 활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래. 친했던 선배니까 도와주러 온 건 그렇다 칠 수 있다. 다정하게 대하는 것도 뭐, 천성이 그렇다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뭐? ‘형이랑 결혼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어서요.’? ‘, 잡을래요?’? 이건 완전히 작정하고 꼬실 때 하는 말 아니냐고?!(맞다)

 

그냥 그럴 수 있는 건가?”

 

한껏 열을 내던 태형은 문득 다시 차분해졌다내가 이상한 건가. 남들은 다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정국이가 옷고름을 매 줄 땐 심장이 뛰고, 박지민이 옷고름을 매줄 땐 좀 힘들었던 건 그냥 그 날의 컨디션 차이였던 건가. 내가 너무 연애를 못 해 봐서 저런 것들에 내성이 없고, 정국이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건가? 나 지금 아무것도 아닌 거에 혼자 땅 파고 있는 건가?

태형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러한 태형의 의식의 흐름과 행동이 혹자가 보기에는 답답하다고 여겨질 수 있겠으나 원래 제 3자가 보기에는 명확하다 못해 UHD화질로 선명한 그림도 당사자가 보기에는 흐리멍덩해 보일 수 있는 것이 짝사랑이란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그래서 태형은 결국 제 가슴을 꽉 메우는 답답함에 방문 앞으로 다가섰다. 아무래도 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형은 방문을 열어젖히려던 손을 멈추었다. 지금 제가 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분명 밖에 앉아 있는 상궁들이 저를 따라 나올 텐데, 태형은 지금 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을뿐더러 굳이 상궁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

 

그래서 태형의 시선은 자연스레 제 눈앞에 있는 문 대신 바람이 솔솔 새어 들어오고 있는, 살짝 열린 꽤 커 보이는 창으로 옮겨졌다. 저거, 내 몸 하나는 충분히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홀린 듯 창가로 다가선 태형은 잠시 뒤를 한 번 돌아보고, 문가를 쳐다봤다. 아까부터 제가 조금 큰 소리를 내도 아무 기척이 없는 것이, 아무래도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당직을 서고 있는 상궁들도 졸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금방 돌아올 거고, 멀리 나갈 것도 아니니까. 태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으아아!”

 

그러나 한 번 더 뒤를 살핀 후 창을 밟고 몸을 밖으로 빼자마자, 태형은 미처 보지 못한 코너에서 갑자기 등장한 누군가와 부딪혀 중심을 잃었고 그대로 몸이 기우뚱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 넘어질 것 같…….

 

…….”

…….”

 

그러나 쿵, 하고 마룻바닥으로 그대로 추락해 큰 소리와 함께 고통이 찾아올 것이란 태형의 예상과는 다르게, 꽤나 푹신하고 편안한, 흡사 과학적인 침대 같은 느낌이 대신 태형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꾹 감았던 눈을 뜬 태형은 제 앞에, 정확히는 밑에 깔린 인영에 눈을 깜박였다.

 

편안하냐?”

…….”

 

지민은 옷감을 한아름 끌어안은 채 그대로 마룻바닥에 뻗어 태형을 올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태형이 느꼈던 편안하고 푹신한 감촉은 지민이 두 손 잔뜩 들고 있던 옷감의 감촉이었다. 물론, 그 밑에 깔린 지민도 태형의 푹신함에 한 몫을 했겠지만. 어쨌든 태형은 제 바로 코앞에 있는 지민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바로 그 때, 태형은 무언가 기시감을 느꼈다. 이 상황, 언젠가 비슷한 것을 경험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안 비키냐? 편안한 김에 아주 망자의 길도 편안하게 걷게 해줘?”

.”

.”

너 지금 기분이 어때?”

 

? 지민은 제 위에 올라탄 채로 코앞에서 멍하니 묻는 태형의 질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걸까. 갑자기 오밤중에 창문으로 튀어나와 저를 깔고 앉은 것도 모자라 비키지도 않고 있는 지금 이 상황에서의 내 기분을 묻는 건가 이 새끼?

 

네가 나를 깔고 누운 지금?”

.”

니 숨결이 내 코앞에서 느껴지는 지금?”

.”

좆같은데.”

그치! 좆같지!”

 

시발 저 반응은 또 뭐야……. 분명 험한 말을 내뱉었음에도 깨달음을 얻은 듯 환해지는 태형의 얼굴에 지민은 제 기분이 한층 더 더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좆같다는 게 저리 기뻐할 일인가? 안 그래도 조선에 와서 야작은 없겠구나 기뻐했던 것도 잠시 팔자에도 없는 야근을 떠맡은 탓에 평소보다도 더 진한 다크서클을 함유한 지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나저나 얘 왜 안 비키고 있는 거야. 지금 온 몸에 힘이 안 들어가서 밀치기도 귀찮은…….

 

그게 보통 친구 사이에 정상 반응인 거겠지?”

…….”

막 심장이 뛰거나 얼굴이 빨개지거나 그런 건 정상이 아닌 거지?!”

…….”

 

뭐요? 그러나 이어지는 태형의 말을 들은 지민은 창백해지는 제 얼굴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태형에게서 벗어나고자 꿈틀꿈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얘 지금 뭐라는 거야? 옷감을 잔뜩 쥔 두 팔을 태형이 깔고 앉아 있지만 않았어도 지민은 두 손을 제 가슴 위로 올려 방어 태세를 취했을 거였다. 심장이 뛰어? 얼굴이 빨개져? 설마 그거 지금 네 기분을 묘사하고 있는 거? 아니 시발 이 새끼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 해도 저렇게 얌전히 왕비 행세를 하고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러냐.”

…….”

 

갑자기 말이 없어진 지민에 이상함을 느낀 태형이 새하얗게 질린 지민의 얼굴을 쳐다보다 이내 떠오른 생각에 그 즉시 질색을 하고 소리를 지르며 지민의 위에서 내려왔다. !!!!!!! 아니거든!!! 지금은 나도 좆같거든!!!!!

 

, 그래?”

 

그럼 다행이고. 태형이 후다닥 내려옴과 동시에 재빨리 몸을 일으킨 지민이 흩어진 옷감을 주워모으며 진심으로 중얼였다. 내가 너 여자 옷 입는 거에 편견이 없다곤 했지만 그게 내가 그쪽 세계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었거든. 나는 네가 또 잘못 받아들인 줄 알았지. 위험(?)에서 벗어나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조그맣게 중얼거리던 지민은 그 순간 문득 고개를 드는 기시감에 말을 멈췄다. 아니, 잠깐만. ‘지금은나도 좆같거든? 그럼, 다른 때는 뭐, 설렜단 소리야? 그러나 지민이 고개를 들어 태형을 쳐다봤을 때, 지민은 물어보기도 전에 태형의 표정과 어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태형은 어딘가 깨달음을 찾은 표정으로 지민을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지민아,”

…….”

나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지민은 옷감을 가득 끌어안은 채로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형을 쳐다봤다. 아까야 정신이 없어서 되도 않는 오해를 잠시 하긴 했지만,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긴 했고, 지민은 본디 타고나기를 눈치가 빠르게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새삼스레 조선에서 태형에게 그 친구 사이에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 심장이 뛰고’ ‘얼굴이 빨개지는현상이 나타날 경우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는 추론을 쉽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설마 저 친구가 궁녀를 지칭하는 건 아닐 거고. 모든 정황과 근거들을 조합해 봤을 때, 태형이 지금 말하고 있는 상대는 단 한명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즉 이 상황은,

 

나 큰일 난 거 같아 지민아…….”

 

조선에서 호모가 빗발친다…….

 

*

 

말도 안 돼.”

 

태형은 제 손을 제 볼에 갖다 대며 짜부시켰다. 말도 안 돼. 태형의 입에서 정확히 12번째 같은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리고 그 말에 지민은 제 귀가 잠시 동안 로그아웃해주길 간절히 빌었다. 저 멀리서 상궁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태형을 밀치고 욕을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이 14번째 말도 안 돼,를 반복했다.

태형이 이렇게 일을 하고 있는 지민을 찾아와 지민을 붙잡고 하소연을 하고 있는 연유는 단 하나였다. 어젯밤 지민을 깔고 누운 그 사건 이후, 태형은 결국 제 감정을 자각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여태까지는 비교할 대상이 없어 긴가민가했는데 지민을 통해 비슷한 상황에 놓이고 나니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아니, 사실 솔직히 말하면 여태까지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명백한 거였다. 제가 남자를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을 못 해봐서, 그동안은 유라를 좋아했으니까, 조선에 떨어진 이후 왕비가 되어 정신이 없었으니까 등등의 꽤 그럴듯한 변명에도 가려지지 않는 확실한 감정. 그러니까, 어젯밤 태형은 인정하고야 만 것이다.

 

내가,”

 

김태형이,

 

정국이를,”

 

전정국을,

 

좋아하나봐.”

 

좋아한다고.

 

나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 호모새끼들아……. 그러나 그 깊고 긴 고뇌 끝에 내려진 태형의 결론이, 지민에겐 TMI에 불과했으므로 지민은 입을 꾹 다문 채로 빨래를 널며 다시 한 번 상궁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내가 저 상궁들 몰래 김태형을 한 대 치는 데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지민은 저와 태형을 쳐다보고 있는 상궁들의 형형한 눈빛에 곧 그 확률이 0이다 못해 마이너스인 것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지민의 머릿속에선 김태형 이 새끼 일부러 내가 지한테 욕 못 하게 하려고 상궁들 데리고 온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몽글몽글 솟아나기 시작했다.

 

증즌므므.”

?”

끄즈즈스읍스스.”

…….”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옆에서 사랑타령이야. 지민은 상궁들에게는 들리지 않게끔 작은 목소리로 복화술을 사용하여 웃는 낯으로 태형에게 읊조렸다. 그러니까 결국 지금 전정국 김태형 서로를 좋아하는 거 아니야. 이런 커퀴새끼들. 속으로 생각하며 지민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빨래를 털었다. 지민은 둘이 지지고 볶든 사귀든 결혼을 하든 저와는 하등 상관이 없으니 제발 그냥 제 눈앞에서 사라져 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태형과 정국이 그간 얼마나 오랜 시간 어떻게 삽질을 해 왔는지 모르는 지민에게는 태형과 정국의 이러한 반응들이 그저 하찮게만 보일 뿐이었으니까.

 

, 그렇게 쉽게 말 할 문제가 아니야. 정국이는 한유라를,”

주상 전하 납시오!”

 

그러나 그런 지민의 시큰둥한 반응에 태형이 울상을 지으며 지민을 붙잡고 한탄을 시작하려던 바로 그 참이었다. 야간 시찰 이후 밀린 정사를 보느라 한동안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정국의 등장을 알리는 내시의 목소리가 태형과 지민의 귓가에 닿았고 태형은 순간 쿵 하고 내려앉는 제 심장을 느꼈다. 아직 정국을 마주치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그 전에도 알게 모르게 정국을 의식하고는 있었지만 자각을 하고 나니 이젠 정정국의 자만 들어도 괜히 심장이 뛰었던 것이다. 태형은 고개를 숙일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굳어 지민을 쳐다봤다. 제 등 뒤에서 여러 명의 사람이 걸어오는 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민은 그런 태형의 허리를 쿡 찔렀다. 뭐 해, 고개 안 숙여그리고 그 찌름에 정신을 차린 태형이 고개를 숙인 순간, 정국의 향기가 확 하고 가까워졌다.

 

, 고개 들어도 돼요.”

 

늘 그랬듯이 저와 정국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신하들을 저 멀리 물린 채 혼자 다가온 정국이 태형에게 말했지만 태형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얼굴이 새빨개져 있을 거라는 것은 뻔했으니까. 화끈거리는 제 얼굴이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세상에. 언제 이렇게 좋아하게 된 거야? 왜 여태 몰랐지? 어떻게 여태 몰랐지? 태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심장이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유라를 좋아하던 때와는 쨉도 안 되는 감정의 쓰나미였다.

 

?”

, 김태형. 뭐해.”

, , !”

 

, 날씨가 덥네. 태형은 부러 정국과 눈을 맞추지 않고 눈을 도르륵 굴리며 고개를 들었다. 정국이 그런 저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으나 뭐라 변명을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에 태형은 애써 그런 정국을 외면했다.

 

태형이 형, 왜 내 눈을 안,”

, 바쁘다더니!”

…….”

여기까진 웬 일이야?”

 

태형이 재빨리 정국의 말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그런 태형의 태도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정국은 무어라 말을 보태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어차피 여기서 더 캐물어봐야 태형이 순순히 진짜 이유를 알려 주지는 않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넘어가는 건 넘어가는 거고. 그거와는 별개로 괜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눈도 안 맞춰 주고.

 

, 확실한 건 아닌데, 현대로 돌아갈 단서를 찾은 것 같아서요.”

?!”

 

정국의 말에 태형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지민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가 이내 상궁들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정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지민의 눈은 조선에 온 이래로 가장 밝게 빛나고 있었다. 누가 보면 조선에 제일 먼저 도착해 오랜 기간 있었던 사람인 줄 알 정도로. 그러나 정작 정국이 말을 꺼낸 순간 태형은 멍해지는 머리에 눈을 깜박였다. 현대로 돌아갈 단서? 그러나 그런 태형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민은 그게 뭔지 빨리 말해 보라며 정국을 채근했다.

 

유독 저랑 친하게 지내는, 아니지. 저랑 친하게 지낸 게 아니라 왕이랑 친하게 지냈던 것 같은 내시가 하나 있었거든요.”

…….”

그런데 오늘 저한테 뜬금없이 그러는 거예요. 정말로 그 나무가 영험한 것 같다고.”

“‘그 나무’?”

그래서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니까, 왕이랑 왕비랑 절에 가서 고목에 소원을 비는 행사가 매년 있대요. 그런데 대충 말하는 걸 들어 보니까 우리 워크샵 갔던 그 절 같은 거예요. , 우리 워크샵 갔을 때도 소원 들어주는 나무 있었잖아요.”

대박.”

 

지민은 정국의 말끝마다 반응하며 예능프로가 탐낼 리액션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태형은 정국의 말을 듣는 내내 멍한 상태로 멈춰 있었다. 소원 나무, 조선, 현대, 그리고 귀환. 어렴풋이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이 뭍으로 올라오니 머리가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시끄럽게 뛰던 심장은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고 태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정국과 눈을 맞췄다. 태형이 정국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계속 시선을 딴 곳에 두고 있던 내내 정국은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는지 태형이 정국에게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태형은 정국의 눈을 마주할 수 있었고 정국의 까만 동공에 제가 가득 들어찬 그 순간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태형이 형?”

 

좋아한다. 나는 전정국을 좋아한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엄청 많이, 김태형은 전정국을 좋아한다. 차마 부정할 수도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에 태형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불안감이 태형의 울대를 타고 울컥 넘어왔다. 혹시, 이대로 현대로 돌아가게 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

 

, 김태형. 너 왜 그래?”

 

전정국은 한유라를 좋아하고, 김태형은 한유라와 전정국을 방해하는 인물 1. 후배와 짝사랑하는 상대를 놓고 꼴사납게 경쟁하다가 사이까지 틀어져버린 선배와 후배 사이로. 태형은 저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정국의 얼굴을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떨어트렸다. 조선에서야 유라도 없고, 공동의 목적이 있으니 연합을 했다지만, 이 관계가 과연 현대에 가서도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태형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토록 친하다고 생각했던 정국과도 단 한 순간 만에 사이가 틀어져 버렸는데, 또 그러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으니까. 게다가, 어찌어찌 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해도, 유라와 정국이 잘 되는 것을 바로 옆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지켜볼 수 있을까? 유라의 경우에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쉽게 유라를 포기할 수 있었지만, 과연 정국도 그럴 수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지금 제가 정국을 좋아하는 감정이 유라를 좋아했던 것보다 훨씬 강렬한 감정이라는 건 알겠는데. 이것도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어디 아픈 건 아니?”

 

대답 없는 태형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정국의 손이 태형의 이마에 닿았고 태형은 그 다정한 온기에 괜히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니야, 그냥 잠깐너무 더워서. 제가 생각하기에도 빈곤한 변명에 태형이 고개를 숙였다. 속이 답답하다. 분명 현대로 가는 단서를 찾게 된 건 좋은 일인데. 언제까지고 조선에 눌러 앉아 있을 수는 없었는데. 정국이도, 지민이도. 전부 한시라도 빨리 조선에서 벗어나 현대로 가고 싶을 텐데.

 

, 근데 나 갑자기 배가 고파서……. 나중에 얘기하자.”

 

현대로 돌아갔을 때, 정국이 없는 일상이 너무 허전하면 어떡하지 태형은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내뱉고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


사실 이 편에 넣고 싶었던 내용은 따로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밀렸네요ㅠㅅㅠ

날씨가 너무.. 더워서.. 스프라이트 샤워를.. 드리고 싶었는데..

그래도 되게 빨리 오지 않았나요..?

이제 완결이 머지 않은 것 같아서 박차를 가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편 :




' > 조선 로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로맨스 14  (0) 2018.11.07
조선 로맨스 13  (2) 2018.08.15
조선 로맨스 11  (3) 2018.07.27
조선 로맨스 10  (7) 2018.06.29
조선 로맨스 09  (2) 2018.06.15



11

 

여기, 대한민국의 평범하지는 않고 평균보다 약간 잘생긴(이라고 본인은 누누이 강조했다) 2n살의 대학생 박지민이 있다. 단언컨대 그는 평생을 평범하게 살아왔고, 조금 특이한 일을 겼었다 해도 p<.05 수준의 역치를 넘지 않는, 통계적으로 지극히 평균의 범주 내에 속하는 일만을 경험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해 왔다. 말인 즉슨, 평범하게 태어나 평범하게 자랐고 여태까지 평범한 인생을 영위해 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

 

웬 생전 처음 보는 한복을 입은 남자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진짜로 날이 서 있는 것 같은 진검을 제 목에 들이대고 있는 바로 지금. 이건 과연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은 수준 내의 이상한 경험이 맞을까? 지민은 제게 겨누어진 진검에게서 느껴지는 살기에 꿀꺽 침을 삼켰다. 옆에는 김태형이 당황한 눈빛으로 그 남자를 제지하고 있었다. 지민은 숨을 살짝 들이쉬었다. 이게 대체무슨 상황이지.

 

, 내시가 맞다. 그러니 그 검을 당장 치우거라!”

…….”

 

그러나 태형의 그런 말에도 호위무사들은 쉬이 칼을 내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태형과 정국의 옆에 그림자처럼 항상 따라 붙어 왔던 호위무사들이었다. 중전의 몸을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내시의 얼굴을 모를 리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지민은 그들에게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일 테니, 아무리 중전의 명령이라 한들 쉬이 경계를 풀 수가 없는 거였다. 이것은 자칫하면 궐내 추문으로 끝나지 않고 왕에 대한 역모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사안이었으니까. 그나마 태형이 저지하였기에 감히 중전 마마에게 손을 댄 이 무뢰한의 손을 당장이라도 잘라버리지 않고 칼을 겨누고만 있는 거였다. 그러니 이제 정국이 나설 차례였다. 정국이 지민의 존재를 증명해주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정국이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할 말을 정리해 채 입을 떼기도 전에, 사지에 몰린 지민은 저도 모르게 먼저 입을 열었다.

 

, 제가!”

……?”

어렸을 때 옆집 누렁이에게 그만!!”

 

먹다 남은 간식 가지고 약을 올리는 게 아니었는데 너무 재밌어서 약을 올리다가 누렁이가 화가 나서 그만…….

지민은 재빨리 디테일을 덧붙였다. 연기의 핵심은 디테일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생존본능이란 이렇듯 대단한 것이다. 지민은 뇌리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아무렇게나 주워섬기며 저도 몰랐던 제 안의 작가적 재능을 가감 없이 펼쳤다. 지민의 상세하고도 구체적인 설명에 지민에게 칼을 겨누고 있던 호위무사의 얼굴이 공감성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그와 동시에 칼이 지민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그리고 그새를 놓치지 않은 태형이 재빨리 어서 칼을 치우래도! 하고 채근했다.

 

, 그래! 그런 비극에도 여기까지 오기 위해 분골쇄신한 아이다. 그것이 대견하여 최근 특채로 등용했다!”

…….”

중전의 말이 맞다. 오늘 시찰도 사실 이 자를 만나러 온 것이니 칼을 내리거라.”

 

지민의 절박한 연기와 태형의 설명, 그리고 결정적으로 정국의 동의까지. 결국 호위무사는 칼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고 한껏 긴장했던 지민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게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야……. 지민이 넋이 나간 채 조용히 읊조렸다.

 

*

 

조선이라고?”

보시다시피.”

뺨 때려 줄까?”

몰래카메…….”

누가 널 몰래카메라 하려고 이 정도 스케일로 정성을 들여.”

 

그건 그렇네. 제가 생각해낸 이 상황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설명들을 모두 성공적으로 반박해낸 태형의 간결하고도 핵심만 짚어내는 말에 지민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과 마찬가지로 지민 역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대학생답게 포기가 빠름특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누굴 고자로 만들어!!”

, 적응 되게 잘 하던데…….”

그거야 내가 순발력이 좋, !”

, 시끄러.”

 

그러나 납득하는 듯하던 지민은 이내 번뜩 떠오른 상황에 소리를 빽 질렀고 정국은 소리를 지르는 지민의 입에 떡을 쑤셔 넣었다. 소리 좀 낮춰요. 저기까지 다 들리겠네. 정국이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고 태형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그 낯선 모습에 눈을 깜박였다. 정국이가저런 성격이었던가? 저를 대하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정국의 모습에 태형은 괜히 서늘해진 제 목덜미를 쓸었다. 지민은 제 입에 가득 찬 떡 때문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우물거리며 온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고, 정국은 그러거나 말거나 태형이 아까 잔뜩 샀던 과자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태형은, 그런 정국과 지민을 번갈아 쳐다보다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멀찍이 떨어져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호위무사들을 의식하며.

 

그래도 죽는 것보단 고자가 낫잖아.”

그래요. 진짜로 목이 없어지는 것보단 가짜로 그게 없어지는 게 낫지.”

 

? 제 말을 거드는 차분하고 게 이어지는 정국의 목소리에, 태형은 정국을 돌아봤다. 아니 맞는 말이긴 한데……. 태형은 괜히 제 옷깃을 여몄다. 어쩐지 자꾸 주변이 추워지는 것만 같은데……. 태형이 지민을 돌아보자 지민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얼굴이 살짝 하얘져 있었다. 아니다. 손이 살짝 그 쪽으로 가 있는 걸 보니 정국의 태도 때문이 아니라 정국이 한 말 그 자체에 겁먹은 것 같기도 하고…….

 

으브븝!!”

다 먹고 말해.”

그래서 왜 갑자기 조선에 오게 된 건데!!”

 

그리고, 아무리 조선이라 해도 널 만졌다고 왜 내 목을 날려?! 퍼뜩 정신을 차린 후 떡을 꿀꺽 삼킨 뒤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태형을 향해 말을 이어나가던 지민은 태형에게서 느껴지는 무언가 이질적인 기분에 잠시 말을 멈추고 태형을 아래위로 차분히 훑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정국을 보고, 다시 태형을 보고. 다시 정국을 보고, 그리고

 

근데 김태형 너 왜…….”

…….”

여자 옷을…….”

 

지민이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태형은 그제야 아, 하고 제 몸을 더듬었다. 여태껏 계속 중전으로 사는 것에 익숙해져서 제가 여자 옷을 입고 있는 것이 현대의 사람, 그러니까 지민에게 이상해 보일 거라는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지? 사실 나 왕비야? 조선의 국모가 되었어? 태형이 잠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그 침묵을 잘못 이해한 지민이 할 말을 고르기 위해 입을 벌렸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리고 잠시 후, 지민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

취향을 존중한다, 친구야.”

?”

내가 패션디자인 학과잖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나도 여자 옷 보면 참 남자 옷과는 다르게 선택의 폭이 넓구나 생각해 본 적 있고 그런 점이 좀 아쉬웠던 적도 있어. 물론 그렇다고 난 여자 옷을 입어 볼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었지만, 패션학도로서 너의 그 선구적인 발상을 존경하는 바고 그러니까 네가 좋아하는 거라면 난 친구로서 너의 그런 취향을 충분히 존중해 줄 의사가 있…….”

그런 거 아니거든!!”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듣다 못한 태형이 지민의 말을 잘랐고 지민은 말을 하다 멈추고 멀뚱히 태형을 쳐다봤다. 여전히 얼굴엔 안쓰러움이 묻어 있는 채였다. 그럼 뭔데. 그러나 막상 지민의 그 표정에, 태형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굳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사실 내가 조선에서 여장을 하게 됐어. 왜냐면 내가 중전이거든……. 어떻게 말해도 이상해 보이는데?

 

괜찮아. 애써 무마하려 하지 않아도 돼. 나는…….”

태형이 형이 왕비라서 그래요.”

?”

 

뭐라 변명을 해야 하긴 하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 사이 정국이 (역시나)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 말에, 지민의 눈은 커다랗게 동그래져 정국을 향했다. ?! 왕비?!

 

왕비라니, 그럼 왕은 누군데?”

저요.”

……?”

 

이게 무슨 갑자기 분위기 조선왕조실록이 아니고. 지민은 정확히 0.7초간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입을 합 다물었다. 내가 지금 헛것을 듣는 건가? 아님 얘네가 지금 날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건가. 사실 타임슬립도 아니고 정말 그냥 평범한 대학생을 상대로 하는 방송국 특집 몰래카메라라던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아는데, 꿈도 아니고 몰카도 아니에요.”

아니, 말이 안 되잖아!!”

정 못 믿겠으면 아까 그 사람한테 가서 사실 나 내시 아니라고 말해보든가요.”

 

아니 그건 좀……. 지민이 말끝을 흐렸다. 제 눈앞에 펼쳐진 이 상황을 믿지 못해 벌떡 일어났던 지민은 슬쩍 다시 앉아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자신은 조선에 떨어졌고, 정국과 태형도 조선에 떨어졌다. 그리고 태형이 여자 옷을 입고 있기에 물어보니 조선의 왕비란다. 그리고? 왕은 전정국.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개판이네…….”

…….”

언제부터 조선 왕실이 이렇게 개족보가 됐어?”

 

나한텐 말도 안 해주고? 내가 한국사 하느라 얼마나 쌔가 빠졌는데……. 문득 제가 쳤던 수능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온 지민이 다시 한 번 태형을 훑었다. 조선에도 남색이 있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설마 왕비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을 줄이야. 조선이 생각보다 많이 개방적인 나라였구까지 생각하던 지민이 문득 눈을 깜박였다. 아니,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남자가 왕비는 좀혹시 설마…….

 

김태형 너 여ㅈ…….”

아니야.”

 

그 뒤로 어떤 말이 나올지 예상한 태형이 지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말을 막았다. 그거 아니야. 나 건실해. 태형의 단호하고 확신에 찬 눈빛에 지민이 아, 하고 감탄을 터뜨렸다. , 그래……. 다행이네. 친구의 신체적 안위에 대한 안도의 말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상황 이해됐으면, 뭐 좀 물어봐도 되냐?”

 

결국 지민이 천천히 제가 처한 상황에 납득하며 다시 한 번 상황을 반추하고 있는 동안, 태형이 조심스레 물었다. 여태까지는 정국과 저만 이곳에 떨어진 줄 알았는데. 지민도 왔다는 것은 무언가 연관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쩌면 지민의 등장이 현대로 돌아가게 해 줄 단서일지도 모른다. 물론 조선에서의 생활이 싫다거나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다거나 뭐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언제까지고 조선에 눌러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뭔데?”

너 어쩌다가 여기 왔어?”

 

태형이 꿀꺽, 침을 삼켰다. 정말 도움이 될까? 정국과 자신은 겹치는 것이 하도 많아 무엇이 정국과 저를 조선에 떨어지게 했는지 알기 힘들었다. 같은 과, 같은 동아리, 그리고 한유라까지. 한 희빈이 한유라와 몹시 닮은 것으로 보아 혹시 한유라가 얽혀 있지 않을까 했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한 희빈은 이 시대의 사람이었고, 지독히도 저를 싫어하고 있으니 어떻게 뭐라 떠 볼 수도 없었다. 게다가 어쩐지 정국은 한 희빈에게 물어보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나 왜 여기 왔는데?”

짚이는 거 없어?”

없어. 전혀. 나 되게 착하게 살았는데…….”

 

시발 어쩌다가 조선에 떨어져서 팔자에도 없는 고자 코스프레나 하고 있고. 지민이 꽤나 억울한 듯 웅얼거렸지만 지민이 그러거나 말거나. 태형은 끙, 하고 팔짱을 꼈다. 그럼 대체 뭐지? 무슨 연관성이지? 태형이 골몰하고 있는 사이, 정국이 그런 태형을 도우려는 듯 입을 열었다.

 

여기로 오기 전 마지막 기억이 뭔데요?”

마지막 기억?”

뭐 하고 있었냐구요.”

할아버지 댁 갔다가,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소화도 시킬 겸 등산 갔다가낮잠?”

…….”

 

한마디로 아무것도 안 했다는 소린데. 지민의 말에 태형이 조금 더 크게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쉽사리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아 보이네. 태형이 웅얼거리며 미간을 좁히자 정국이 태형의 등을 살짝 두드렸다. 이유가 없진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언젠가 돌아갈 방법이 생기겠죠. 설마 평생 여기 있겠어요.

 

아니…….”

 

정국의 위로에 태형이 고개를 들었다. 사실, 언젠가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리고 제가 없는 현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살짝 불안하긴 해도 조선에서 살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스트레스도 없고, 해야 할 것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딱히 걱정하고 있는 건 아닌데…….”

 

그 날 이후 이제 평생 인사도 못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정국과 이렇게 편하게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할 수도 있게 됐고. 막상 정국은 지민에게 말하느라 제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지만, 태형은 어쩐지 간질거리는 기분에 고개를 숙였다. 상황이 어쨌든, 이유야 어쨌든. 정국과 이렇게 다시 웃으며 대화할 수 있게 된 이 상황이 태형은 좋았다. 이전에나 지금에나, 정국은 태형에게 특별한 후배였으니까. 고등학교 때까지 이렇다 할 동아리 생활을 하지 않았던 태형에게 처음 생긴 제대로 된 후배였고, 많은 동아리원 중에서도 자신을 유난히 잘 따르던 후배였다. 뭐 꼭 처음 생긴 자신을 잘 따르는 후배였기 때문만은 아니고, 그냥 정국 자체가 특별했던 거지만. 왜 특별했냐고 물으면 글쎄, 태형도 알 수 없었다. 그냥 정국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잘 해주고 싶고, 웃는 얼굴이 보고 싶고.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그래서 그 때도, 제가 처음으로 좋아한다고 자각했던 유라를 쉽게 포기할 수 있었던 거였으니까.

 

태형이 형.”

 

정국을 위해.

 

*

 

비록 조선에 떨어진 이유나 현대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것에 대해서는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이 상황에서 지민은 태형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긴 했다. 외로운 궁중 생활에 자신의 편이 되어줄 한 줄기 빛같은 의미에서는 아니고, 지극히 실용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로.

 

내가 왜 니 옷고름을 쳐 매 주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건지 설명해봐.”

내시라서?”

시발…….”

 

지민이 태형의 풀어헤쳐진 옷고름 앞에 서서 주먹을 쥐며 읊조렸다. 조선에 온 지 이틀, 지민은 등장한지 단 하루 만에 그 누구보다도 중전의 가까이에서 중전의 의복을 맡아 관리하는 요직을 꿰차는 기염을 토하며 궁궐 안 사람들에게 세상살이에 있어 인맥의 중요성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딱히 본인이 원한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사실, 제아무리 내시라 한들 내시 역시 남자이기 때문에 보통 상황이었다면 그런 근직(近職)을 내시가 맡는 것은 절대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겠지만 정국, 그러니까 왕의 동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취업의 기쁨도 잠시, 지민은 이내 제가 해야 할 일이 태형의 옷을 다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쟤는 왕빈데, 나는 내시네?’류의 것은 물론 아니고(지민은 왕비의 자리까지 탐할 정도로 권력욕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2년간 열심히 공부한 것을 처음으로 실전에 적용할 수 있게 된 기회가 하필 김태형의 옷 관리라는 것에 대한 현타였다. 내가 이러려고 패디과에 왔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다들 첫 취업 내지는 인턴에 대한 로망 정도는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로망이 제 절친한 친구의 옷 관리하는 것으로 깨부숴지다니!

 

나는 뭐 좋은 줄 아냐…….”

 

그러나 지민의 그런 투덜거림에 억울한 것은 태형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태형도 이 상황이 뭐 그닥 그렇게 많이 달가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주한, 오늘 입을 옷을 들고 들어온 똥 씹은 표정의 지민에 태형도 남몰래 한숨을 내쉰 차였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더 이상 궁녀에게 제 몸을 맡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 정도일까. 낯선 여자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 어색하기도 했고, 제가 입고 있는 옷을 정돈하는 일이니만큼 제가 남자인 것을 들키기라도 할까 그동안 조마조마하긴 했었으니까. 물론 뭐,

 

너 숨 쉬지 마, 시발. 숨결 느껴지니까.”

 

작업 특성상 지민과 얼굴을 매일 가까이 해야만 하는 것이 퍽 달갑지만은 않긴 했지만 말이다. 태형이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거든. 하고 이를 악물고 대꾸하며 숨을 흡 들이쉬었다. 이상하네. 정국이가 매 줄 때는 이렇게까지 항마력이 딸리진 않았었는데정국이는 박지민처럼 투덜거리지 않고 담백하게 군말 없이 해 줬어서 그런 건가. 태형은 지민이 제 옷고름을 매어주는 동안 몇 번이고 욕을 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주먹을 쥐었다. 참아, 참아.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

 

다 됐다.”

 

억겁 같았던 몇 초가 지난 후, 짧은 한숨과 함께 지민이 떨어져 나갔고 태형은 참았던 숨을 파 내쉬었다. 이 짓을 매일 아침 해야 하는 거야? 태형이 참담하게 중얼이자 그에 조그맣게 욕을 읊조리던 지민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태형을 쳐다봤다. , 맞다 그러고 보니까 너.

 

전정국이랑 싸웠다 하지 않았냐.”

…….”

어쩌다가 둘이 같이 있게 된 거야? 그것도 부부로.”

 

세상에 한 여자를 두고 싸우던 남자 둘이 극적 타결을 서로와 결혼하는 것으로 볼 줄이야. 솔로몬도 미처 생각하지 못할 완벽한 합의가 아닐 수 없지 않은가. 지민은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지민의 그 말에, 태형은 그런 거 아니야, 하고 지민의 앞에 주저앉았다.

 

그냥 와 보니까 이미 부부였어.”

…….”

…….”

하긴. 설마 너네 의지로 결혼하진 않았겠지.”

 

와 보니 이미 부부였다니. 잠시 어이없음에 멍하니 입을 벌리고 눈을 깜박이던 지민은 이내 이미 부부였다는 설명이 와서 결혼했다는 설명보다 합리적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말하지만 지민은 납득(포기)이 빠른 편이었다.

 

그래서, 화해는 했고?”

화해?”

너네 둘 싸웠었던 거 아니었어? 서로 인사도 안 하고 지냈다며. 너 나한테 전정국 개새끼라고 그랬잖아. 그러고 보니까 그 때 왜 그랬냐? 난 아직 너네 왜 싸웠는지도 몰라.”

…….”

 

지민의 말에 태형이 조그맣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정국과 그렇게 된 이후, 지민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정신이 없기도 했고, 그 날 정국에게 충격의 형과 사이가 틀어지는 한이 있어도 유라를 포기할 순 없다발언을 듣고 정신없이 지민을 찾아가 지민의 멱살을 잡고 엉엉 운 이후, 지민을 포함한 타인에게 정국에 대한 말을 일절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날의 기억은 제게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으니까.

 

화해는안 했는데.”

뭐야, 그럼 여전히 냉전 중인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화해를 안 했다기 보다싸운 적도 없었던 것 같은 분위기랄까. 태형이 조그맣게 읊조렸다. 그 말에, 지민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싸운 적도 없었던 거 같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냥, 정국이가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을 안 해.”

그 날?”

 

태형의 말에 지민이 되물었다. ‘그 날이라니. 무슨 날? 태형과 정국의 관계에 있어 지민이 떠올릴 수 있는 날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태형이 울면서 저를 찾아와 멱살을 잡은 날, 그리고 정국이 역시나 울면서 저를 찾아와 멱살을 잡은 날. , 지민은 영문도 모른 채 울면서 저를 찾아온 태형과 정국에게 두 번이나 멱살을 잡히고 술 상대가 되어 줬던 것이다. 아니 그러고 보니까 근데 진짜 이것들이…….

 

생각해 보니까 열받네? , 너나 전정국이나, 나를 무슨 호구로 아냐? 뭔 일만 터졌다 하면 나한테 와!”

?”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도 안 해주고! 무작정 쳐들어와가지고 술만 마시고 가고! ? 나 야작하는데!! 내 자취방이 너네 고민상담소야?! ?! 내가 상담사냐고!”

정국이도 너 찾아왔었어?”

 

딱히 설명할 말이 없어 가만히 지민의 말을 듣고만 있던 태형이 지민의 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정국이 제 자취방에 찾아와 단 둘이 술을 마셨다는 지민의 말을 들은 그 순간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정국이가 너 자취방에 왔었다고? 둘이 그렇게 친해? 그러고 보니, 태형은 정국에게도 제가 모르는 다른 친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여태까지는 해 본 적이 없었다. 정국을 알게 된 이후로 태형과 정국은 주중 주말 가리지 않고 붙어 다녔기 때문에 과내에서도 거의 샴쌍둥이라 불릴 정도였고, 정국과 사이가 틀어지고 난 후에는 부러 정국과 관련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었으니까. 그래, 생각해 보니까 정국에게도 분명 제가 모르는 친구들이 있을 거였다. 그리고 제가 모르는 사생활도. 그러니까 정국은 그들과 얘기도 하고, 어쩌면 고민 상담도 하고, 또 어쩌면 그들 중 누군가와는 사귀었을 수도 있고…….

 

넌 지금 이 상황에 그게 묻고 싶냐?”

아니, 둘이 아는 사이라는 건 들었는데자취방에 찾아가서 술 마실 정도로 친한 줄은 몰랐어. 많이 친해?”

아니 그니까 지금 그게 나한테 물어볼 말이냐고…….”

그럼 뭘 물어봐야 하는데?”

 

사실 물어보고 싶은 건 이것 말고도 많았다. 지금 이 순간 태형은 정국에 대한 궁금증이 갑자기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앗기 때문에. 얼마나 친해? 언제부터 친해? 왜 친해? 그럼 너 정국이에 대해서 이제 약간 좀 많이 알아? 등등. 이유는 자기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태형은 지금 호기심 천국 상태였다. 그런데 박지민이 지금 이런 걸 물어보길 원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그럼 뭐지? 태형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였고 그 순진무구한 태형의 눈빛에 지민은 그 순간 제 뇌 안의 어이와 어처구니가 사이좋게 손을 잡고 외출을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김태형이 희대의 눈새이기 때문에 전정국과 여태까지 이어지지 않은 것이, 그래서 제가 일찍이 전정국과 김태형의 사이와 서사를 아는 둘의 교집합 친구 No.1이 되지 않은 것이,

 

너네 진짜 짜증난다…….”

 

어쩌면 저에게는 다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 ?”

 

그러니까, 여태까지는 말이다.



+


태형이는 과연 성공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인가!

오랜만에 왔는데 별 내용 없이 분량상 애매한 곳에서 끊기네요ㅠㅅㅠ.. 

다음 편은 최대한 빨리 갖고 오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민망)

' > 조선 로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로맨스 13  (2) 2018.08.15
조선 로맨스 12  (3) 2018.08.01
조선 로맨스 10  (7) 2018.06.29
조선 로맨스 09  (2) 2018.06.15
조선 로맨스 08  (4) 2018.06.08

10

 

정국 번외 02

 

너 태형이랑 무슨 일 있었냐?”

?”

태형이가 너보고 개새끼라던데.”

 

아니, 뭐라고? 나는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친 박지민 형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왜 이 형 생각을 못 했지. 나는 대답 대신 야작에 지쳐 보이는 박지민 형을 붙잡고 태형이 형이랑 연락이 되냐고 물었다. 개새끼고 뭐고, 일단 그게 제일 중요했으니까.

그 날 이후로 일주일. 나는 김태형의 머리카락 한 올 못 보고 있다. 아니, 이게 말이 돼? 같은 관데. 같은 동아린데. 그동안 그렇게 붙어 다녔는데!! 나는 이를 으득 물었다. 전화는 안 받고, 메신저도 차단을 해버렸는지 읽지도 않고. 기말고사가 가까워져 오는데 같이 듣는 수업은 들어오지도 않고, 동아리도 안 나온다. 아니,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학교 수업까지 빼먹을 일이야? 좋아하지도 않지만, 내가 한유라를 좋아한다는 게 그렇게 충격인가? 그렇게까지 한유라가 중요해? 그렇게 붙어 다녔던 후배를 단 하루 만에 뚝 잘라낼 만큼 한유라를 좋아하는 거냐고!!!!

 

아니, 안 돼. 나 계속 야작하느라 정신없었거든.”

그 말은 언제 들었는데요, 그럼?”

언제더라. 일주일 전이었나.”

 

일주일 전이면 대충 그 사건이 있었던 날이다. . 그럼 그 날 자취방에 안 들어오고 바로 박지민 형네 자취방으로 갔던 건가. 어쨌든 무사히 집에 들어는 갔나 보네. 그건 그렇고. 나는 박지민 형을 똑바로 쳐다봤다. 박지민 형이 내 형형한 눈빛에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진짜 연락 안 되는 거 맞아요?”

내가 거짓말을 왜 해. 근데, 진짜 싸웠어? ? 너 김태형이면 죽고 못 살았잖아.”

…….”

 

그래, 죽고 못 살았지. 그래서 그렇게 좋아하는데도 고백도 못 하고, 옆에서 땅 파고. 그런데 그 결과가 이거라니. 생판 남도 이렇게 말할 정도로 티를 냈는데, 정작 본인은 알지도 못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네가 이해해라. 알잖아, 김태형이 눈치가 없어서 그렇지 나쁜 애는 아냐…….”

 

박지민 형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멀어져 간다.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주일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잔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니, 말할 기회는 줘야 되지 않냐고. 이러는 게 어딨어. 나는 잔뜩 충혈된 눈가를 꾹 눌렀다. 진짜, 너무 어렵다. 김태형 좋아하는 거.

 

*

 

태형 오빠?”

. 넌 연락 돼?”

 

연락이 되지 않은 지 2주일 째. 더 이상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극약처방을 쓰기로 했다. 죽기보다 싫었지만, 제발 아니길 빌었지만, 혹시 한유라라면 김태형이랑 연락이 될까 해서. 김태형 때문에 여기까지 오다니. 난 날 보며 수군거리는 한유라의 친구들을 애써 무시했다. 한유라가 살짝 웃는다.

 

오늘 같이 밥 먹기로 했는데.”

?”

 

물어보면서도, 제발 아니길 바랐는데. 한유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그런다. 오늘 같이 밥을 먹기로 했다고. 진짜, 이쯤 되면 김태형이 원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래. 그러나 내가 이렇게 절망스럽거나 말거나, 한유라는 말을 잇는다.

 

나도 최근에 연락이 안 됐었는데, 어제 갑자기 연락 오셔서 할 말이 있다고, 오늘 밥 같이 먹자고…….”

…….”

그래서 같이 먹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먹을래? 일루 오신다 그랬? 저기 태형 오빠다.”

 

태형 오빠!!!! 그 말에 내 고개는 저절로 뒤를 향하고, 그제야 내 시야에 내가 2주 동안 찾아 헤맸던 김태형의 실루엣이 잡혔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얼굴. 그러나 내가 채 움직이기도 전, 김태형은 날 보자마자 뒤를 돌아 도망쳐 버린다. 나는 멍하니 그런 김태형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 왜 그냥 가시지? 둘이 무슨 일 있었어?”

…….”

 

쫓아가야 하는데, 쫓아갈 기력도 없다. 나는 까칠해진 볼을 쓸었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꼬여 버린 건지, 한숨밖에 안 나왔다. 누굴 탓해야 하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한숨에 한유라가 무슨 일 있어? 하고 물어 오는 것이 들렸다.

 

아냐. 난 별로 입맛이 없어서. 그냥 둘이 먹어.”

?”

그리고, 태형이 형 만나면 할 말 있으니까 연락 좀 받으라고 전해주라.”

 

제발. 나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숙였다. 서럽고 억울하고 서운해서 속이 다 쓰렸다.

어쩌다가 내가 한유라한테 이런 부탁까지 하게 됐지. 무엇보다 우울한 건, 누군가를 통해야지만 김태형에게 말을 할 수 있게 된 이 상황이다. 그리고무서워졌다. 만약 이 상황이, 내가 진짜로 김태형한테 고백한 이후에도 이어진다면? 오해가 아니라, 내가 김태형에게 고백했는데 그 이후에도 김태형이 날 죽자고 피해 다니고, 내가 부담스러워져서 작정하고 숨어 버리면. 그럼 어떻게 하지. 지금이야 김태형이 오해 때문에 날 피해 다니고 있는 거라지만, 그 땐 해명할 수도 없을 텐데. 속 쓰리고 목도 아픈데 그 와중에도 김태형이 좋아서. 그래서 더힘들다.

 

*

 

그럼 종강하는 날에 초밥집 앞에서 봐요.”

 

진짜 오랜만에 듣는 김태형의 목소리.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린데도 너무 오랜만이라 울컥했다. 이게 진짜 무슨 짓이야……. 헤어진 연인 사이도 아니고, 목소리로 울컥할 일이냐고.

기말고사가 가까워지기도 했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기 때문에 김태형과 종강하는 날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전화로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오해를 풀려면 아마 고백을 하게 될 것 같은데, 그걸 전화로 할 수는 없잖아.

기말고사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드디어 김태형을 만나는 날에 나는 아침부터 긴장감에 입술을 깨물었었다. 시험 보기 직전에도, 시험보다 오늘 저녁에 김태형을 만날 거라는 사실이 날 더 긴장하게 했으니 말 다 했지.

 

누가 저런 데다 핸드폰을 두고 다녀.”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무거운 전공책은 동방에 두고 가야겠다 싶어 들른 동방엔 아무도 없이 핸드폰 하나만 덩그러니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김태형도 핸드폰 참 여기저기 잘 두고 다녔었는데. 문득 혹시 저거 김태형 핸드폰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살펴보니 김태형의 핸드폰과는 기종이 다르다.

 

김태형 핸드폰이면 뭐, 어쩌게.”

 

괜히 찔리는 마음에 나는 괜히 책상을 쓸며 조그맣게 중얼였다. 어디까지 갈 거냐, 전정국…….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약속 시간은 7, 지금은 630. 내가 기억하고 있는 김태형의 시간표가 정확하다면 김태형의 시험은 오늘 오전에 이미 끝났고, 아마 지금쯤 초밥집으로 향하고 있으려나. 30분 후에 김태형을 만난다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같이 가자고 해볼까. 좀 그런가. 나는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대다 핸드폰을 들었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시험 시간 동안 꺼 놓았던 핸드폰을 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김태형의 문자였다. 약속을 뒤로 미루자는.

 

[정국아, 전화했는데 전화 안 받네ㅠㅠ 시험 보는 중인가..]

[근데 정국아, 진짜 미안해. 오늘 시험 끝나고 교수님이 갑자기 나 부르셨는데 7시에 보자셔ㅠㅠ 근데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ㅠㅠ 너 너무 많이 기다릴 지도 모르는데 우리 내일 만나자. 내가 초밥 사줄게ㅠㅠ]

 

짜게 식는다는 게 이럴 때 쓰는 표현인가. 나는 황망히 그 문자를 쳐다봤다. 3시에 와 있는 문자였는데, 계속 시험이라 꺼 놔서 이제 본 거였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한순간에 몸이 스르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잠시 내려놓았던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정국아.’

 

김태형의 글씨체도 아니고, 이모티콘도 없는. 기본 서체로 반듯하게 적혀진 내 이름인데 그 글자 위로 이상하게 김태형의 목소리와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정국아, 하고 부르는 김태형의 목소리와 내 이름을 부를 때 김태형의 얼굴. 어떤 얼굴로 이 문자를 적었을까 문득 상상이 되니 괜히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이게 얼마만이야. 김태형한테 문자를 받은 게.

오늘 당장 김태형을 보지 못하는 게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김태형은 이 짧은 문자만으로도 충분히 내 기분을 좋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나 보다. 약속을 미룬 게 자기 때문도 아닌데 미안하다며 내일 밥을 사겠다는 김태형. 나를 정국아, 하고 불러주는 김태형. 나를 생각하면서 이 문자를 보냈을 김태형. 지금 당장 떠오르는 모든 종류의 김태형이 너무 좋아서 심장이 뛰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김태형이 좋냐고 물으면 곧바로 응, 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좋다. 이미 내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한없이 유치해지고, 한없이 치졸해질 만큼, 김태형에 한해서만큼은 이성적인 판단이 잘 되지 않을 정도로 김태형이 좋다.

 

아침부터 보자고 하면 좀 그런가.”

 

나는 핸드폰을 만작였다. 뭐라고 답장하지. 사실, 내일 보면 더 일찍 볼 수 있고, 그러면 더 오랜 시간 같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삐쭉 고개를 내밀었다. 영화 보자고 할까. 이제부터 방학이니 한유라가 방해할 수도 없을 텐데. 서운함 같은 건 이미 예저녁에 사라져 버리고, 내일 일찍부터 김태형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만이 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이거 좀 위험하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됐지.

 

어느덧 밖은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고 나는 나른한 기분에 하품을 했다. 시험도 끝났고, 내일이면 오해도 풀 수 있을 거고.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시간은 정말 오랜만이라 어쩐지 몸이 무거웠다. 동아리방은 조용하고, 아무도 없고. 늘 시끄럽기만 했던 동아리방이 조용한 게 나름 운치가 있어서 슬금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 많고 시끄러운 곳을 좋아하지 않아서, 김태형을 만나기 위해서만 왔던 곳이었는데. 아무도 없을 땐 또 이런 느낌이구나 싶어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금 더 이 한적함을 느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니, 나는 잠깐,”

 

그러니까, 그 익숙하다 못해 누군가가 내 귓가에 붙여 놓은 것처럼 울리던 그 목소리가 바로 문 밖에서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태형이 형?”

정국아,”

? 정국이 있었네?”

 

갑자기 들이닥친 여러 명의 무리에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별안간 동방의 문이 열리고, 고요하던 동아리방이 시끄러워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정국이도 오늘 시험 끝났구나! 여기서 뭐해? 우리 지금 술 마시러 갈 건데 같이 갈래? 그러나 나는 나에게로 쏟아지는 여러 명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대신,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인영을 쳐다봤다. 왜 김태형이 지금 여기 있지? 지금 시간은 710. 김태형이 아까 나에게 보낸 문자에 따르면 김태형은 지금 이 동아리방이 아닌 교수님의 방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왜 김태형은 동아리방 안에 있으며 우리 지금 술 마시러 갈 거라는 사람들과 함께 들어온 걸까. 김태형과 한유라. 한유라와 김태형. 그리고 한유라의 손에 들린, 오늘 김태형과 만나기로 했던 그 초밥 집의 종이봉투. 그리고 당황한 듯한 김태형의 표정. 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것들이 의미하는 건 뭘까. 좋았던 기분이 슬금슬금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종이봉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그런 내 얼굴을 보던 한유라가 종이봉투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 나 오늘 생일이라고 태형 오빠가 사다 줬어. 짱이지.”

, 아니,”

내가 며칠 전부터 초밥 먹고 싶다고 그랬었거든.”

…….”

 

한유라의 말에 김태형이 아, 하고 입을 벌렸지만 이미 한유라의 말은 귀를 통해 내 머릿속에 닿은 후였다. 나는 멍하니 김태형을 쳐다봤고 김태형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설마.

 

내 생일이라 우리 술 마시러 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 정국아?”

 

한유라 생일 파티에 가려고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야?

 

정국아?”

 

그리고 그 순간, 내 귓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김태형을 쳐다봤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기 때문에 생긴 그 요란한 소리에 동방 안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집중되었고 김태형의 시선 역시 나에게로 향했다. 그 때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내가 거울을 보진 못했으니 알 수 없지만, 좋진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건 나와 눈을 맞추게 된 김태형의 표정에서도 추측해낼 수 있는 거였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진짜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형 진짜…….”

…….”

짜증나네요.”

 

김태형을 쳐다봤다가, 한유라가 들고 있는 종이봉투를 쳐다봤다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내가 한 거라곤 김태형을 좋아한 것뿐인데. 문득 치고 올라오는 자괴감과 허탈함에 나는 머리를 짚었다. 그리고 내뱉었다. 내가 한 말에 김태형이 뭐라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리는 것이 보였지만 이번만큼은 정말로 김태형의 목소리가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 가방을 챙겼다. 진짜 거지같은 하루의 마무리네. 그리고 그대로 동아리방을 나섰다. 내 뒤에서 동기들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 중의 김태형의 것은 없다. 그래, 무슨 말을 하겠어. 상황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데. 나는 어금니를 까득 물었다.

 

*

 

그 날, 그 후에 내가 했던 행동들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뿐더러 그 일을 곱씹어 생각하는 것은 내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으니 짧게 묘사하고 넘어가자. 그 날 밤 나는 박지민 형을 찾아가 거의 울부짖으며 미친 듯이 술을 마셨고, 너만 차단 기능 있는 줄 아냐, 나도 있다! 고 외치며 김태형을 차단했고. 내가 김태형을 차단한 것은 까맣게 잊고서 김태형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는다며 핸드폰을 붙잡고 징징거렸고, 보다 못한 박지민 형이 내 핸드폰을 뺏자 핸드폰 대신 박지민 형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는 것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 날 김태형을 차단한 것은 내가 그나마 그 날 했던 짓 중 가장 잘한 것으로 평가되는데,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김태형에게 전화를 걸어 뭐라고 울부짖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술에 쩐 채로 이틀을 보내고,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유럽행 비행기 티켓을 끊은 것이었다. 당장 떠날 수 있는 것으로.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었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러면 한 순간 미쳐서 김태형을 찾아가 대체 걔가 어디가 좋냐고 따져 묻기라도 할 것 같았으니까. 그런 추태까지는 부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그 방학 동안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혼자만의 이별 여행이 아니라 마음 정리 여행을 떠났다.

 

*

 

즉흥적으로 떠났던 마음 정리 여행은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이 있긴 뭐가 있었겠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랬겠지) 정확히 개강 날 오전에 귀국하는 일정으로 마무리됐다. 나중에 가서야 수강신청을 고려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으므로 수강신청 또한 망해 전필 과목들은 전부 실패한, 요상한 교양들로 가득 찬 시간표를 갖고서.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덕에 바로 전 학기에 김태형과 붙어 다니다시피 했던 시간표와는 다르게 김태형과는 겹치는 수업이 하나도 없게 됐고.

한 달이 넘는 여행 기간 동안,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그 유명한 격언은 대충 들어맞는 듯 했다. 물론 처음 2주는 힘들었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무뎌진 건지 아니면 진정이 된 건지 점차 괜찮아졌으니까.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시간표 덕에 학교에서도 김태형을 마주치지 못했으니 김태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고 그에 미루어 보아 나는 그럭저럭 정리가 됐다고 믿었다. 그래서 새롭게 태어나자는 의미로 핸드폰도 바꾸고, 번호도 바꾸고.

그러니까 진짜로, 그렇게 마무리된 줄 알았다. 수강 정정 후에 갑자기 내가 듣는 이상한 교양을 평소에 듣고 싶었던 강의라 칭하며 수강 신청한 한유라를 봤을 때도 아무 생각이 안 들었으니까. 그래. 한유라가 잘못한 게 뭐가 있을까. 모든 것은 신의 뜻이고 그냥 김태형과 나는 안 될 인연이었던 거겠지. 내게 강 같은 평화…….

그러니까 나는 그 때 당시 이런 게 해탈의 경지, 더 이상의 어떠한 고통도 없는 상태, 다른 말로 득도 혹은 열반에 들었다는 것일까 생각하며 이참에 불교에 귀의나 해 볼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나중에 나와 한유라가 단 둘이 이상한 교양을 듣고 있는 것과 김태형과 한유라가 아직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 날 있었던 일이 카더라 통신에 의해 부풀려져 나와 김태형, 그리고 한유라가 세상에 둘도 없을 핫한 삼각 캠퍼스 치정극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굳이 해명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아마 그 때 내 머리 뒤에는 광배가 비치고 있지 않았었을까 싶다.

 

이건 여기다 두면 돼?”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것이 몇 가지 있었으니.

 

, 김태형 땡큐.”

 

내가 생각보다도 더 순정남이었다는 사실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쉽게 식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오랜만에 본 김태형이 내 상상 속의 김태형보다 더 귀엽고 예쁘고 잘생겼었다는 것.

 

전정국, 안 가?”

 

몇 달 만이지? 나는 멍하니 서서 날짜를 세며 워크샵에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는 김태형을 쳐다봤다. 그런 나를 이상하게 생각한 동기가 와서 나를 툭 칠 때까지. 그러니까, 또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던 거다. .

 

씨발…….”

뭐야, 왜 갑자기 욕해?”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나는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이 느껴졌다. 옆에서 무슨 일이냐며 나를 흔드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런 게 어디 있어. 다 끝났는데.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해탈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김태형을 본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뭐 해? 너네 안 타?”

몰라요. 전정국 갑자기 욕하더니 이래요.”

? 너 어디 아프냐?”

전정국 아까 태형이 형 쳐다보.”

 

나는 아직 김태형을 좋아한다는 걸.

 

. 너 태형이 형이랑 같이 가는 거 싫어서 그래?”

…….”

소문이 진짜였구나. 그래도 야, 삼일만 참아봐.”

 

싫긴 씨발. 좋아서, 김태형이 너무 좋아서 탈인데. 나는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여전히 고개는 숙인 채로. 옆에서 동기 놈이 학교생활 잘 하기에 별 일 아닌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다며 나를 위로하는 것이 들려왔다. 그래나도 내가 해탈한 줄 알았지. 진짜로 득도한 줄 알았지. 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열반에 오른 줄 알았지.

 

해탈은 지랄.”

 

나는 나직하게 중얼였다. 해탈이며 열반은 무이대로 불교에 귀의했다간 내가 김태형을 두고 하는 생각들에 부처님이 친히 음행죄로 지옥에 끌고 갈 판인데내 험한 말에 나를 토닥이던 동기 놈이 살짝 몸을 움츠리거나 말거나, 나는 한 번 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버스로 향했다. , 순정 순정 누가 말했나, 김태형을 좋아하는 전정국이 말했지…….

 

*

 

그 후 워크샵 장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학술 답사를 빙자한 관광을 하는 내내 내 시선은 줄곧 김태형을 향해 있었지만 나는 김태형과 단 둘이 대화할 만한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사실, 버스에서 내린 이후로 조가 나뉘는 바람에 대화할 타이밍은커녕 김태형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조가 갈리니 잠드는 방도 갈리고, 관광 일정도 전부 갈렸으니까. 결국 23일의 일정이 끝나 마지막 일정이 될 때까지 김태형과 말 한마디 섞어보지 못한 나는 애가 타 죽을 지경이었다. 사실, 김태형과 말을 섞을 기회가 생긴다 해도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 이 나무는 이 사찰의 자랑으로, 조선시대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나무입니다. 600년이 넘었다고 해요.”

 

나는 가이드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있는 김태형을 쳐다봤다. 쉽게 사람들을 모아서 버스에 태우기 위함인지 23일 내내 조로 나뉘어 진행되었던 일정은 마지막 일정만큼은 전원이 모여서 진행됐고 나는 혹시나 하고 기대했지만 역시나였다. 김태형은 저만치 앞에서 내가 끼어들 틈 없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말 이대로 말 한마디 못 해보고 워크샵이 끝나는 건가. 신이시여, 이러는 게 어딨어요. 이럴 거면 차라리 김태형을 내 눈앞에 나타나게 하지 말든가요. 나는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앞에서는 가이드가 방긋방긋 웃으며 열심히 설명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해서, 이 나무는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도 소원을 들어주는 영험한 나무로 통했다고 합니다. 왕과 왕비마저도 와서 소원을 비는 것이 연례 행사였다고 하니 말 다 했죠.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소원이 있다면 속는 셈 치고 한 번 빌어 보시고, 다 같이 버스에 탑승하는 걸로 할게요.”

 

가이드는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고, 나는 무심코 가이드가 말했던 나무를 올려다봤다. 고개를 들어 쳐다봐야 할 정도로 커다랗고 오래되어 보이는 나무. 멍하니 나무를 쳐다보고 있자니 옆에서 동기가 나를 툭 치는 것이 느껴졌다.

 

소원 뭐 빌 거야?”

무슨 소원.”

가이드 말 못 들었어? 소원 들어주는 나무라잖아. 근데 이런 거 어딜 가나 하나씩은 꼭 있는 듯.”

소원?”

난 여자친구 생기게 해달라고 빌어야지.”

 

어딜 가나 하나씩은 꼭 있는 것 같다고 궁시렁거릴 땐 언제고, 옆의 동기는 눈까지 감고 조그맣게 소원을 중얼이고 있었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김태형 쪽을 향했다. 잠시 나무를 쳐다보기 전까지 줄곧 쳐다보고 있었으니 찾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동그란 머리통이 금세 내 눈에 들어찼다. 김태형은 내 옆의 동기처럼 소원을 빌고 있는 듯, 눈을 감고 입을 중얼이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지, 거리가 멀어서 들리지는 않았지만.

 

…….”

 

나는 다시 나무를 쳐다봤다. 소원. 나는 다시 김태형을 본다. 눈을 감는 것으로는 부족했는지 김태형은 손까지 모으고 소원을 중얼이고 있다. 대체 무슨 소원을 빌고 있기에 저렇게 손까지 모으고 열심인지. 나는 입술을 물었다. 그 소원 안에 내가 들어있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그냥, 한유라랑 잘 되게 해주세요 뭐 이딴 거만 아니었음 좋겠다. 그럼 너무 질투 날 것 같으니까.

 

소원…….”

 

나는 조그맣게 중얼였다. 사실 나에게 소원이라 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천지신명님. 아시죠? 제 소원은 하나예요. 나는 조용히 손을 모았다. 대체 김태형이 뭐라고, 이까짓 나무 앞에서 이렇게 온 맘을 다해 빌어야 하나 피실 웃음이 새어나오긴 했지만, 나는 곧 다시 표정을 굳혔다.

 

김태형이 저를 좋아하게 해주세요.’

 

나는 어느새 나도 모르게 감긴 눈을 조금 더 꼭 감았다. 간절하고 간절한 소원. 1학년 처음 입학하고, 엠티에서 김태형을 처음 봤을 때부터 품어 왔던 올곧고 솔직하고 대쪽 같은 순정. 청순한 사람이 이상형이라 하기에 팔자에도 없는 청순한 연하 남친 코스프레까지 하게 만들었지만, 어디서 굴러들어왔는지 모를 여우한테 뺏긴 내 첫사랑. 워크샵에 온 이후로도 은근히 나를 피하는 것 같은 김태형에 혹시 내 존재가 김태형을 힘들게 할까 차마 제대로 말도 못 걸 만큼 소중했다. 이런 건 하나도 모르겠지. 바보 같은 김태형. 한유라가 어딜 봐서 청순이야. 생각하다 보니 또 괜히 열이 올라 나는 모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두고 봐. 진짜, 기회만 생기면 청순이고 뭐고.

 

다 빌었으면 가자!!”

 

콱 잡아먹어 버릴 거야. 눈을 뜨고 김태형 쪽을 쳐다보니 어느새 기도를 끝냈는지 다른 선배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김태형이 보여 나는 이를 물었다. (김태형을 향한 형형한 눈빛에 옆의 동기가 희대의 삼각관계에 에피소드를 한 가지 더 추가하고 있었음은 정국이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다시 눈앞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내 간절한 소원을 이런 초목이 알기나 할까. 나는 괜히 그 나무를 째려봤다.

 

두고 볼 거예요.”

 

내 소원 들어주나, 안 들어주나. 그 와중에도 혹시 반말을 하면 괘씸죄로 들어줄 소원도 안 들어줄까 싶어 존댓말을 하다 내 자신이 어이가 없어 픽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렇게 미쳐가는구나, 전정국. 나는 다시 김태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김태형은 여전히 웃으며 버스에 올라타려 하고 있었다. 문드러지는 내 마음도 모르고.

 

안 가냐?”

 

멍하니 김태형을 쳐다보고 있자니 내 옆의 동기가 나를 툭 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젠 하다하다 나무한테까지 화풀이냐. 진짜 중증이다, 전정국.

 

어떡하냐 나…….”

? 뭐가?”

 

이러다가 진짜 평생 수절하고 살아야 되는 거 아니냐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하나님 부처님 예수님.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진짜 정말.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기회가 생긴다면,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아무리 눈치가 없는 김태형이라도 눈치 채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절대로 한 톨만큼의 오해도 없게, 다 솔직하게 표현할게요.

 

내가 진짜,”

 

좋아한다고.

 

?”

 

그러니까 나 좀 좋아해 달라고



+


이렇게 해서 조선에서 빠꾸없는 전정국이 되었다는 후문..

이렇게 번외가 끝이 났네요! 다음 편부터는 다시 조선입니다 'ㅅ'

그 전 편들에서 나 나름 열심히 떡밥을 뿌려 놨었는데, 지금 다시 찾아보는 것도 나름 재밌지 않을까..싶..습니다..(아님 말구.. 소금소금)


사실 이번 편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조금 더 있는데.. 그건 앞으로 또 차차 알게 되는 걸로..☆

그러니 그냥 지민이의 말을 인용하며 끝낼게요...


태형이가 눈치가 더럽게 없어서 그렇지 나쁜 애는 아냐…….



' > 조선 로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로맨스 12  (3) 2018.08.01
조선 로맨스 11  (3) 2018.07.27
조선 로맨스 09  (2) 2018.06.15
조선 로맨스 08  (4) 2018.06.08
조선 로맨스 07  (3) 2018.05.17

09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 김태형은 나에게 그냥 그저 그런 평범한 선배들 중 하나였다. 아니다. 처음부터 평범한선배는 아니었지. 그 얼굴을 어떻게 평범하다고 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한 눈에 튀는 얼굴인데. 하지만 그에 대한 내 감상은 그냥 잘생겼네, 정도에서 끝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소리다. 잘생긴 거야 특별한 일도 아니었고 남자가 잘생긴 거랑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니까.

 

정국 번외 01

 

그런 김태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김태형을 처음 본 오티날로부터 이주 정도 후, 엠티에서였다. 나는 나에게로 쏟아지는 관심과 질문들에 대답하기에도 벅찼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내가 먼저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으레 있는 익숙한 일이었다. 정신없이 통성명을 하고, 연락처와 술잔을 주고받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어느 정도 취해 있었고 문득 옆을 보니 내 옆엔 그 때 봤던 그 잘생긴 선배가 앉아 있었다. 그 선배, 그러니까 김태형도 일부러 내 옆에 앉게 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옆에 앉아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지. 김태형은 누군가를 판별할 수 있을 정도로 제정신인 것 같지 않아 보였으니까. 얼굴은 빨개져서, 환하게 웃으며 앞의 누군가와 술잔을 부딪히고 있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김태형의 시선을 따라 앞을 쳐다봤다가 미간을 좁혔다. 내 앞에는, 그러니까 김태형의 앞에는 딱 봐도 이런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학번일 것 같은 남자 선배가 계속해서 김태형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고 김태형은 그걸 계속해서 받아 마시고 있었다. 그제야 주위에서 김태형과 그 선배를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그러니까, 저 선배는 지금 작정하고 김태형에게 술을 먹이고 있는 것이고 김태형은 그걸 모르거나 아니면 거절하지 못해서 계속 받아 마시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게 나랑 무슨 상관. 나는 힘없는 한낱 새내기에 불과했고 설령 나한테 저 고학번으로 보이는 선배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해도 내가 김태형을 도울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괜히 나한테까지 불똥이 튈까 싶어 자리를 옮기려고 했는데.

 

- 잘생긴 후배님이다.”

 

눈이 마주쳤다. 김태형이랑. 나는 눈을 깜박였다. 잘생겼다는 말. 한두 번 들어본 것도 아닌데. 김태형이 나를 보더니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몰랐는데, 김태형은 웃을 때 입이 네모가 됐다. 그리고 속눈썹이 생각보다 길었다. 코끝에 점도 있네. 그리고…….

 

선배, 저도 술 주세요.”

 

예쁘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니, 알긴 알지. 김태형이 예뻐 보여서.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랬다. 김태형이 예뻐 보였다. 예뻐 보였다는 거는, 그러니까, 객관적인 시선으로 판단한 게 아니라 나한테 그래 보였다는 거다. 물론 김태형은 객관적으로 봐도 예쁘지만.

나는 자리에 앉아 김태형에게 계속해서 술을 권하는 선배에게 내 잔을 내밀었다. 충동적으로. 선배가 당황하는 듯 하더니 이내 웃으며 내 잔에도 술을 채웠다. 내 주위가 조용히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김태형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도. 내 잔에 술을 따라주고, 앞의 선배가 다시 김태형을 쳐다본다. 태형아, 안 마셔? 그 말에 김태형이 난처한 듯 웃는다. 억지로 먹이고 있었던 게 맞았던 거다. 주저하던 김태형은 결국 술잔을 들었고 나는 내가 한 번에 마셔 버려 비워진 내 잔 대신 그 잔을 뺏어 들었다.

 

선배, 얼굴이 빨개요.”

?”

더 마시면 속 안 좋으실 것 같은데.”

 

나는 내 영향력을 안다. 20년간 보고 듣고 경험한 게 있으니까. 나는 어딜 가나 내가 의도하거나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무리의 중심에 있었고 우위에 있었다.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편했으니까. 그리고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 내 행동들은, 웬만한 상황에서는 내 의도대로 먹혀 들어갔다.

 

제가 대신 마실게요. 그래도 되죠?”

…….”

 

이렇게. 나는 말끝을 흐리는 김태형의 술잔을 뺏어 들고 그 안의 술을 비운 다음 앞의 선배를 쳐다봤다. 웃으면서. 나는 웃고 있지만 주변은 얼어붙는다. 말은 못 해도 생각은 다들 비슷하겠지. 쟤 대박이다. 내지는 어디 신입생 주제에 버릇없이. 하지만 눈앞의 선배가 나한테 뭐라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새내기들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고, 이미 그만큼의 영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고, 이 선배가 김태형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고 있었던 행동이 바람직한 행동도 아니었고. 거기다가 여긴 신입생들이 선배에게 잘 보여야 할 뿐 아니라 선배들이 후배들에게도 잘 보여야 하는 첫 제대로 된 만남 자리인 첫 엠티고.

그래, 태형이 술도 약한데. 정국아, 너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타이밍 좋게 회장 형이 나서서 말했고 앞의 선배는 벙 찐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 지금 당장 뭐라 말은 못 해도 표정을 보아 하니 아마 나는 저 선배에게 찍힌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뭐. 사실, 저 선배가 지금 당장 나한테 뭐라고 했어도 상관은 없었다. 덕분에 김태형의 시선이 날 향하게 됐으니까.

 

*

 

내 상태가 좀 이상하다는 걸 자각한 것은 그 날 이후로 며칠 되지 않아서였다. 그 다음 날 내 숙취를 걱정하는 회장 형으로부터 그 선배가 김태형에게 죽자고 술을 먹였던 이유가 그 선배가 일방적으로 마음에 들어 하던 여후배 하나가 김태형을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제는 다분히 충동적이었고, 술도 마신 상태였고,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있는 거지, 하고 내 안에서 마무리를 지었기 때문에. 평소에는 귀찮아서 안 했더라도, 술김에 정의로운 행동 한 번 해 볼 수도 있는 거지.

그 날 그렇게 다들 술에 쩐 채로 유야무야 엠티가 마무리되고 주말 내내 나는 김태형을 마주치지 못했으므로 그렇게 김태형이란 존재는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듯했다. 애초에 나는 어떤 사람에게 깊은 주의를 두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 김태형을 마주친 순간,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거다.

 

전정국, 맞지? 그 날 고마웠어.”

 

수업이 시작하기 전 멍하니 강의실에 앉아 앞을 쳐다보고 있는데, 내 옆자리에 인기척이 나더니 이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멍한 시선 그대로 옆을 봤다가 순간 숨을 멈췄다. 그 웃음이 내 눈앞에 있었다. 눈꼬리가 접히고, 입이 네모나게 되는 웃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 날 고마웠다고 말했어야 됐는데, 정신이 없어가지구. 선배가 돼서 후배한테 도움 받았네.”

 

김태형이 나한테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 말은 내 왼쪽 귀로 들어와 오른쪽 귀로 그대로 흘러나갔다. 살면서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은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예뻐 보였던 적도 김태형이 처음이었는데. 누군가가 웃는 얼굴에 이렇게 심장이 뛰어 본 적도 김태형이 처음이다. 심지어 중, 고등학교 때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 키스를 할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몸의 신호들이다. 이 신호들은 날 의아하게 만들었다. 이게 뭐지?

 

선배.”

?”

저 밥 사주세요.”

 

뭐긴 뭐야, 꽂힌 거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내 감정도 모를 만큼 눈치가 없지 않았고 그래서 김태형을 붙잡고 김태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랬다. 밥 사주세요. 이렇게 다짜고짜 밥을 사달라는 후배는 처음이었는지 당황한 것 같은 김태형의 눈이 느리게 깜박여졌다가, 이내 예쁘게 휘었다. 그래, 안 그래도 사 주려고 했었는데! 비싼 거 사줄게. 뭐 먹고 싶어?

 

선배는 뭐 좋아하시는데요?”

? 글쎄…….”

전 다 좋아요.”

 

어차피 중요한 건 음식이 아닌데요, . 그 말은 혀로 꾹 눌러 삼키면서.

 

*

 

김태형과 요 근래 붙어 다니면서 내가 김태형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 목록은 대충 다음과 같다.

1. 김태형은 귀엽다. 2. 김태형은 모태솔로다. 3.김태형은 인기가 많다. 4. 그런데 그걸 정작 본인은 모른다. 5. 그래서 김태형은 자기가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는 줄 안다. 6. 고로 김태형은 눈치가 없다. 7. 그냥 없는 것도 아니고, 없어도 더럽게 없다.

 

, 형은 이상형이 뭐예요?”

? 청순한 사람?”

청순?”

. 귀엽고 청순한 사람.”

저 귀엽고 청순하다는 소리 되게 많이 듣는데.”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대놓고 티를 내도 맞아, 정국이 귀엽고 청순해!! 그래서 내가 많이 좋아하잖아!’ 같은 속 편한 소리나 하지. 나는 활짝 웃는 김태형의 얼굴에 입술을 꾹 물었다. 어떻게 눈치가 없어도 저렇게 없지. 진짜 아예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이미 진작에 내가 자길 좋아하는 건 눈치 챘는데 내가 싫어서 모른 척 하는 건가. 솔직히 말하면, 누군가를 먼저 좋아하는 게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건 알겠다. 김태형이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고, 해도 너무한다는 거.

 

너는 왜 사서 고생을 하냐.”

 

고생도 그냥 고생이 아니야. 희대의 눈새 김태형을 좋아하다니. 개고생 가시밭길인데. 내가 고민 끝에 김태형을 짝사랑한다는 말을 털어놓았을 때, 박지민이 형이 오징어를 질겅 씹으며 대꾸한 말이었다.

박지민 형과의 인연은 꽤 오래됐는데, 알고 지낸 기간에 비해 딱히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는 아니었음에도 그에게 내가 김태형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린 걸 보면 내가 그 때 얼마나 절박하고 답답했는가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박지민 형이 내 사촌 누나를 좋아하면서 보일 꼴, 못 보일 꼴을 이미 다 나한테 보인 상태였기 때문에 더 편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박지민 형은 김태형의 의중을 알 수 있는 나의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결국 별 도움은 안 됐지만.

어쨌든 박지민 형과 김태형이 고등학교 때 절친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단 둘이 가진 술자리에서 김태형은 술이 오른 상태로 기분 좋게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다 제 고등학교 친구 얘길 꺼냈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익숙한 이름에 나는 눈을 반짝였었다.

 

진짜? 박지민을 알아?’

. 제 사촌 누나랑 학원 같이 다녔었어요. 그 형이 우리 사촌누나 엄청 따라다녀서 알게 됐는데.’

아 맞아. 걔 학원에 짝사랑하는 애 있댔어. 엄청 유난이었는데. 그게 네 사촌누나였구나.’

지금 같은 과 동기잖아요.’

맞아! . 우리 운명인가 봐!’

 

우리 운명인가 봐.’ 술에 취한 사람이 아무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일이면 제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기억 못할 김태형을 알면서도. 그 말에 나는 또 설레고. 나는 웃는 김태형을 쳐다봤다. 그래도 어쩌겠어.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는데. 이렇게 눈치 없고 너무해도, 그게 김태형이면 평생 지고 살아야지.

 

김태형은, 니가 걜 붙잡고 입술을 들이밀어도 니가 걜 좋아하는지 모를 애야.”

설마.”

 

어쨌거나, 박지민 형은 나한테 그랬다. ‘네가 왜 여태껏 짝사랑으로 마음고생을 안 했는지 알겠다. 김태형 좋아하면서 몰아 하려고 그랬구나.’ 라고. 그 땐 그냥 설마, 하고 말았는데. 신은 역시 공평하시다며 내 어깨를 토닥이는 박지민 형이, 그냥 나를 놀리려고 하는 말인 줄 알았지.

 

*

 

그런데, 이런 법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유라 귀엽지 않아?”

?”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익숙한 게 무서운 거라고. 이렇게 계속 옆에서 맴돌다 보면 부담스럽지 않게, 자연스럽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있겠지. 어차피 김태형은 눈치가 없고, 그래서 주위에 여자도 없고. 그래서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게 실수였을까. 휘몰아치는 중간고사와 플젝 때문에 잠시 정신없던 한 달을 보내고 오랜만에 김태형을 만난 음식점에서, 나에게는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김태형의 수줍은 얼굴. 살짝 들떠있는 목소리. 그러니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같은 얼굴.

 

걔가 누군데요?”

? 우리 동아리 들어온 애. 너랑 동갑이잖아. 한유라.”

 

언제 또 같이 사진까지 찍은 건지. 그럴 필요 없는데 김태형은 친히 핸드폰을 사진첩을 뒤져 그 한유라와 제가 다정하게 찍은 셀카를 보여준다. 그 와중에 김태형 잘 나왔다. 저 여자애만 잘라서 소장하고 싶네. 나는 얼이 빠져 김태형을 쳐다봤다. 그런데, 귀엽다니. 김태형의 입에서 누군가가 귀엽다는 말이 나온 건 처음이라. 나는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요?”

걔가 나 좋아하는 거 같아.”

…….”

 

말도 안 돼.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그렇게 티를 낼 때는 죽어도 모르더니, 걘 대체 어떻게 했기에 김태형한테서 이런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거지? 내가 할 말을 잃고 눈만 깜박이고 있던 그 때, 갑자기 내 뒤에서 높은 톤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그 목소리가 김태형의 이름을 불렀고, 그 순간 김태형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태형 오빠! , 정국이도 있었네?”

 

걔구나.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듯 낯선 얼굴의 여자애가 날 보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딱히 주변인들에게 관심을 두는 성격은 아니라 잘 몰랐는데 (게다가 요즘 내 신경은 온통 김태형에게만 쏠려 있었으니), 말을 듣고 보니 몇 번 동아리에서 본 것도 같았다. 옆에 앉아도 되지? 그러라고 한 적도 없는데, 그 여자애, 아니 한유라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내 옆에 앉는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내 옆의 한유라를 보는 김태형의 얼굴이, 너무 솔직하게 김태형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어서.

 

둘이 밥 먹으러 온 거예요? 잘 됐다. 오늘 혼밥할 뻔 했는데.”

 

잘 되긴 뭐가.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내 앞의 김태형은 눈치도 없이 아, 진짜? 잘 됐네, 우리랑 같이 먹자. 하고 대답하고 있다. 같이 밥 먹는 것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그동안 플젝이다 중간고사다 뭐다 해서 오랜만에 단 둘이 만난 거였는데. 하긴, 김태형에게 뭘 기대하겠어. 나는 얕게 한숨을 내쉬고 메뉴판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한유라가 환하게 웃으며 고마워, 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정국이랑은 밥 처음 먹는 거 같아. 같은 동아린데도 얼굴 보기가 힘들더라.”

, 그동안 바빠서.”

, 태형 선배한테 얘기 들었어. 이번주부터는 나오는 거지?”

 

친화력이 좋은 건지, 넉살이 좋은 건지. 내 말투가 꽤 무뚝뚝했을 텐데도 한유라는 살갑게 말을 붙여 왔다. 그 와중에 나는 또 언제 둘이 만나 내 얘기를 한 건지가 신경 쓰이고. 아무리 사랑이 유치한 거라지만 이렇게 유치해질 필요까지 있나. 박지민 형이 내 사촌 누나를 쫓아다닐 때 뭐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는데 지금 내가 딱 그 꼴이다. 문득 고개를 드는 자괴감에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밥 다 먹고 뭐 해요? 오빠 이제 수업 끝 아니에요?”

. 나 오늘 정국이랑 영화 보려구.”

우와! 뭐 보세요?”

킹스맨 2.”

저도 그거 보고 싶었는데!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 , 그래, .”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대화에 김태형은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승낙해 버린 다음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본다. , 괜찮아? 하는 눈빛. 나는 그 눈빛에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을 리가. 오랜만에 단 둘이 데이트였는데,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이 반가울 리 없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내가 아니, 안 괜찮아요.’ 할 수도 없고. 김태형은 당황한 것 같고. 그래.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했지. 대체 어떻게 했기에 김태형 입에서 나 좋아하나 봐소리가 나오게 만들었는지 알아나 보자.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 또 환해지는 김태형의 얼굴이 미우면서도 좋아 죽을 만큼 예뻐서. 나도 참 중증이다.

 

*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것은 그 날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은 후였다. 그 날 이후로 한유라는 나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여 왔고, 인문대 건물과 공대 건물이 꽤 떨어져 있음에도 나는 심심치 않게 공대 건물 근처에서 한유라를 마주쳤다. 아무리 내가 타인에게 무신경하다 해도, 내가 한유라를 마주치는 상황은 그 역치를 넘어서는 횟수였다. 그리고 매번 와 있는 메신저. 이런 이상한 흐름이 며칠쯤 이어지고 난 후, 나는 상황이 돌아가는 판국을 알아챘다. 아주 개 같은 상황.

 

정국아, 안녕. 또 만났네. 밥 먹으러 가?”

아니. 수업.”

 

짜증나. 나는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한유라를 쳐다봤지만 한유라는 그런 나를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연신 생글생글 웃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한유라는 관심이 있었다. 김태형한테 말고, 나한테. 그 날 영화관에서 굳이 김태형과 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가운데 앉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는 삐딱하게 서 그런 한유라를 쳐다봤다. 뭐 하자는 거야, 지금.

 

, 진짜? 태형 오빠가 지금 너랑 밥 먹으러 간다던데?”

…….”

그래서 같이 가자고 하려고 했는데.”


시발. 나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누가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 그랬을까. 그 말을 한 사람은 천성이 선한 사람이었던 게 분명하다. 웃는 얼굴에 침을 왜 못 뱉어. 나는 욕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하지만 난 그냥 삐딱하게 서서 한유라를 쳐다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는 것은, 한유라 때문이 아니라 김태형 때문에. 저렇게 생글 웃는 낯이 김태형을 웃게 하니까. 짜증나지만. 한유라가 나한테 고백을 한 것도 아니고, 김태형이 종종 얘기를 꺼내는 걸로 봐선 김태형한테도 꾸준히 연락하고 있는 거 같은데. 거기다 대고 김태형한테 한유라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가 없는 거다. 상황이 복잡했다.

 

같이 갈 거지?”

…….”

 

그러니까, 한유라가 보통이 아니란 얘기다. 대체 김태형은 있는 게 뭘까. 눈치도 없고, 보는 눈도 없고. 청순한 애가 이상형이라며. 그 말 때문에 누구는 성질 죽이고 팔자에도 없는 착하고 청순한 후배 코스프레하며 사는데. 얘가 뭐가 청순해. 꼬리 백만개는 달린 여우구만.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

 

정국아, 나 물어볼 게 있는데…….”

?”

 

그런데 내가 간과했던 게 있었다. 김태형의 마음. 내 자취방에서 김태형과 맥주를 몇 캔 마시고 나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어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던 때였다. 그날따라 김태형은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왜 그렇게 많이 사 온 건지, 나는 과제가 있어서 많이 못 마신다는데도 김태형은 그럼 내가 다 마시지 뭐! 하고는 정말로 그 많은 캔들을 다 비워냈다. 그 때, 김태형이 나에게 뭔가 할 말이 있었다는 걸 눈치 챘어야 했는데.

 

넌 누구 짝사랑해본 적 있어?”

?”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노트북 모니터에 고정시켰던 시선을 떼고 김태형을 쳐다봤다. 그러나 김태형의 시선은 날 향해 있지 않았다. 품에는 내 베개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손에는 맥주 캔을 꼭 쥐고. 우물쭈물 입을 뗀다. 나는 잠시 그런 김태형의 (귀여운) 모양새를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눈치 챈건가. 심장이 조금 뛰었다.

 

있죠. 저라고 없겠어요.”

진짜? 그 사람도 알아? 네가 그 사람 좋아하는 거?”

…….”

 

원래 몰랐는데, 지금은 좀 아는 것도 같아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 그렇게 말했고 김태형의 얼굴은 미묘하게 변한다. 그러니까, 지금이 타이밍인가. 나는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노트북을 덮었다. 지금 과제가 중요한가. 김태형이 중요하지. 그러나 내 대답에 날 쳐다볼 줄 알았던 김태형은 날 쳐다보는 대신 맥주 한 캔을 더 깠다. 이미 충분히 많이 마신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김태형을 말리지는 못했다. 혹시 술이 김태형에게 용기를 주고 있는 건가 싶어서. 그 때 만약 김태형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그렇게 다른 줄 알았다면 목숨 걸고 막았을 텐데.

 

그럼 너도 이해하겠네? 짝사랑이 얼마나 힘든 건지.”

그렇죠?”

그럼 너내가 한유라 좋아하는 거 알지.”

?”

 

나는 김태형의 입에서 튀어나온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혹시 그럼 너 짝사랑하는 사람이 나야?’ 그럼 너 나 좋아해?’까진 아니어도, ‘그 사람은 널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라든가, ‘지금도 좋아해?’정도의 말이 나올 줄 알았던 나는 순간 머리가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그 얘기가 여기서 왜…….

 

그런데 너 왜 맨날 나 방해해?”

 

? 나는 김태형의 외침에 그대로 굳어 김태형을 쳐다봤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누가 누굴 방해해? 내가 김태형을? 그러나 김태형은 술을 잔뜩 먹어 발개진 얼굴로 억울한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지금?

 

나도 이런 말 하기 싫었어. 그런데 맨날, 나랑 유라랑 밥 먹으러 가면 따라 오고. 영화 보러 가도 따라 오고. 유라랑 나랑 만나고 있는데 누구랑 카톡하냐고 물어보면 너랑 하고 있고. 유라는 맨날 네 얘기만 하고!”

 

김태형이 이렇게 말이 빨랐나 싶을 정도로 김태형 입에서는 단어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나는 멍하니 그 단어들을 주워섬기고 있었다. 내가 방해해? 김태형이랑 한유라 사이를? 기도 안 찰 말이었다. 방해하는 건 한유라가 나랑 김태형 사이를 방해하고 있는 거지. 원래 밥도 나랑만 먹었잖아. 영화도 나랑만 봤고. 한유라랑 카톡한 건 한유라가 계속 동아리 관련 질문으로 날 귀찮게 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8시간 10시간에 한 번씩 답장했는데. 그리고 한유라가 계속 내 얘기만 하는 건,

 

좋아하니까요!!!”

 

좋아하니까. 김태형 말고 나를. 하나도 안 좋고 짜증만 나지만, 걔가 날 좋아하니까. 그런데 나는 김태형을 좋아하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빽 소리를 내뱉었다. 그래, 고백을 내뱉었다’.

실수였다. 이렇게 고백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술도 마셨고, 기대하고 있었던 게 한 순간에 이렇게 무너지니 순간 머리가 휙 돌았던 거다. 게다가 김태형이 날 방해꾼 취급했잖아! 나는 김태형을 똑바로 쳐다봤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지. 내가 방해라니. 방해받아서 빡치는 게 누군데. 참고 있는 게 누군데. 서럽고 짜증나고 서운하고 죽겠는데 참고 있는 게 누군데! 다 형 좋아해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건데 어떻게 나한테!

 

?”

…….”

, 좋아한다고?”

 

예상했던 대로, 김태형은 놀란 토끼눈을 한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술 취한 채로, 자취방에서, 과제하다 말고 멋없고 무드 없게 고백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나 싶어 속이 상했다. 좀 참을 걸. 그런데 어떡하겠나. 너무 오래 잠가 놓은 감정이라 한 번 터지니 주체가 안 된다. 나는 말없이 김태형을 쳐다봤고 김태형은 그런 나를 쳐다봤다. 여전히 눈은 동그랗게 뜬 채로.

 

진심이야?”

진심이에요.”

포기 못 하겠어?”

포기하기엔 이미 너무 좋아해요.”

…….”

포기 못 해요. 아니, 안 해요.”

 

그런데 엎질러진 물을 어떡하겠어. 나는 김태형에게 조금 다가갔다. 김태형은 여전히 충격이 큰지 입을 벌리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하긴, 충격이긴 하겠지. 그렇게 티를 내도 몰랐는데. 말 잘 듣는 후배라고만 생각했던 내가 자길 좋아한다니, 충격이긴 할 거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면, 이제부터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면 된다. 어차피 난 포기할 생각도 없고, 포기도 안 되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김태형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무서운 건 사실이라. 차마 김태형의 얼굴을 제대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말없이 앉아만 있었을까, 김태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랑 어색해져도?”

.”

나랑 사이가 틀어져도?”

당연, ?”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무심코 대답하다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마주한 김태형의 눈가가 빨갛다. 나는 당황해 입을 벌렸다. , 울어? 그러나 내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김태형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여전히 눈을 크게 뜬 채로 그런 김태형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잠깐만, 지금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설마

 

, 이제 나한테 아는 척 하지 마.”

 

지금 내가 한 그 좋아한다는 말을 내가 한유라를 좋아한다고 착각한 거야?! 그러나 내가 생각 정리를 끝내기도 전에 김태형은 자취방을 나가 버렸다. 여전히 눈가는 빨간 채로. 아니, 눈치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나는 얼이 빠져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다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일어났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오해를 해도 무슨 별 거지같은 오해를 하고 있잖아!!

 

태형이 형!!!!”

 

그러나 김태형은 눈치는 더럽게 없는 주제에 행동은 재빨랐다. 술도 엄청 마셨을 텐데, 택시라도 탄 건지 김태형은 이미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전화도 안 받고, 메신저도 안 받고. 결국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김태형의 자취방까지 찾아가봤지만 김태형은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술까지 마신 사람이 대체 어딜 간 거야. 그러나 작정하고 내 연락을 다 씹는 김태형은 아무리 전화를 하고 메신저를 보내도 묵묵부답이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아 진짜 설마…….

 

나 차단한 거냐고…….”

 

그러니까, 이게 나의 첫 고백에 대한 기억이다.


+


정국이의 다정함은 태형이 한정


삽질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


~대환장파티는 번외 02로 이어집니다~

' > 조선 로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로맨스 11  (3) 2018.07.27
조선 로맨스 10  (7) 2018.06.29
조선 로맨스 08  (4) 2018.06.08
조선 로맨스 07  (3) 2018.05.17
조선 로맨스 06  (1) 2018.05.06



08

 

…….”

 

태형은 제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이제는 자취방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대한민국의 햇살이 아닌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조선의 햇살에도 익숙해진 참이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불렸다던 조선의 아침은 정말로 햇살이 부드럽고 새가 지저귀는, 새벽의 공기가 아직은 차가운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조선에 와서 좋은 것이 하나 있다면 시끄러운 핸드폰 알람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 학교에 지각할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아침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손 안에 감기는 부드러운 비단 이불을 만끽하며 여유롭게 눈을 뜰 수 있…….

 

으아악!!!!!!”

잘 잤어요?”

 

태형은 천천히 눈을 뜨자마자 제 눈에 들어차는 전정국의 퀭한 얼굴에 눈곱도 채 떼지 못한 눈을 크게 뜨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정국은 그런 태형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이내 얕게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쓸었다.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 한 채로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정국의 얼굴에 태형의 심장은 또 아침부터 힘차게 뛰고 있었다. 나 진짜 부정맥 아니야? 무슨 이렇게 심장이 시도 때도 없이 뛰어. 태형은 제 심장에 손을 올렸다. 안 돼 아직 쓸 날 많이 남았는데…….

 

너 왜 여기…….”

 

나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어요, 하고 광고를 하고 있는 듯한 정국의 퀭한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던 태형은 말을 잇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문득 떠오른 어젯밤의 기억 때문에. 그러니까 어제가, 합궁일이었지. 그리고 전정국이 내 머리와 옷고름을 풀어 줬었고, , …….

 

그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니죠?”

 

첫키스도 했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제 심장에 얌전히 올려뒀던 손을 올려 제 입에 가져다댔다. 뽀뽀가 아니었다. 키스였다. 키스였다고. 뽀뽀와 키스의 차이가 뭘까요?’ ‘역시 혀의 유무죠!’ 언젠가 지나가듯 봤던 한 남자아이돌의 인터뷰가 태형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명쾌하고 확실한 정의 감사합니다. 그걸 이 상황에 적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태형은 뜨거워지는 얼굴을 통제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 미쳤어. 학교 후배랑. 그것도 남자 후배랑. 키스했다. 그 앞에서 신음소리도 냈다. 차마 문장으로 옮겨 적기도 낯부끄러운 말들에 태형은 입 안쪽 살을 잘근 씹었다. 정국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디 아픈 건 아니죠?”

?”

계속 걱정했잖아요.”

 

그런데 이어지는 정국의 말에, 태형은 고개를 들었다. 정국의 동그란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태형은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니, 그 다음에 어떻게 됐더라. 상궁들은 장지문 너머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그 과도한 친절에 태형은 연기를 해야 했다. 그리고 제 혼신의 발연기에 정국이 도와주겠다며 입을 맞췄고, 그리고,

 

어떻게 된거야?”

 

그리고 어떻게 됐더라? 그 다음의 기억이 없었다. 태형은 재빨리 시선을 내려 제 몸의 상태를 살폈다. 설마, 첫키스에 이어 첫경험까지 한큐에 해결하고 지쳐 잠들었다는 전개는 아니겠지. 그러나 다행히도 등골이 서늘해져 세심히 살핀 제 상태는 저도 모르는 사이 인생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넘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태형의 행동을 응시하던 정국이 입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잠든 사람을 데리고 뭘 해요.”

잠들었다고?”

눈 감는가 싶더니, 갑자기 픽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요?”

 

태형이 멍청히 눈을 깜박였다. 쓰러져? 내가? 잠들었다고? 키스하다가? 설마.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제 마지막 기억은 키스에서 끊겨 있었다. 아니 세상에 키스하다가 잠드는 사람도 있어? 그것도 첫키스인데? 근데 그게 내 얘기래. 태형이 멍하니 입을 벌렸고 정국은 그런 태형의 턱을 받쳐 입을 닫아주며 픽 웃었다. 형이 생각해도 황당하죠? 난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아니, 어떻게, ?”

피곤한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피가 확 몰리면 그럴 수도 있대요.”

 

상궁들이 많이 괴롭혔어요? 정국이 태형을 향해 웃었고 태형은 그 웃음에 다시 멍해지는 머리를 느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첫날밤에 키스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니.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태형은 눈동자를 굴렸다. 아니 그래도 명색이 첫날밤인데. 물론 뭔가를 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고 하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제가 갑자기 쓰러져버린 탓에 정국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싶어 태형은 괜히 미안한 마음이 차올랐다. 제가 그렇게 대책 없이 쓰러져버린 후에 들이닥쳤을 궁녀들을 정국 혼자서 어떻게 해결했을까 싶기도 하고. 결국 잠시 입을 벌렸다, 닫았다를 반복한 태형이 이내 개미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

형이 왜 미안해요?”

아니…….”

형이 미안할 일은 전혀 아니고. 그렇게 힘들었으면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요.”

 

그런데 정국의 반응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다는 반응이라, 태형은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찡 해 오는 것을 느꼈다. 유라 때문에 조금 어색해지긴 했지만, 정국이 괜히 제가 아꼈던 후배는 아니긴 했던 모양이었다. 전정국 진짜 된 놈 맞구나. 태형은 뿌듯해진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후배 하나는 참 잘 뒀어.

 

앞으로는 피곤하거나 힘들면 나한테 말해줘요, 형도.”

…….”

.”

 

알았죠? 퍽 다정하게 들리는 정국의 목소리에 제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고 있자 확답을 받아내려는 듯 정국의 시선이 진득하게 따라 붙는다. 결국 태형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제가 정국에게도 했던 말인데. 아무 특별할 것 없는, 선후배 사이에 할 수 있는 일상적인 말. 그런데 어쩐지,

 

그럴게.”

 

심장이 간질거리는 것 같다.

 

*

 

마마, 소인들이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십니까…….”

 

정말, 숨이 멎는 줄 알았사옵니다. 그렇게 정국을 보내고, 합궁으로 특별히 준비되었던 방을 떠나 제가 본디 생활했던 방으로 돌아온 태형은 제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버선발로 뛰쳐나와 울상을 짓는 상궁들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랬어? 하긴, 합궁이라고 그렇게 학수고대하며 준비를 했는데 막상 방 안에 들여보냈더니 갑자기 픽 쓰러졌으니 놀랄 법도 했다. 괜히 미안해진 태형이 상궁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자 상궁이 지금은 괜찮으신 거냐며 걱정스런 얼굴로 태형을 살폈고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냥 잠든 거야. 좀 피곤했나 봐.

 

소인들이 마마를 잘 보필했어야 했는데…….”

아냐, 괜찮아.”

전하께서 마마를 직접 살피실 테니 저희는 다 물러가라고 하셔서…….”

?”

 

그런데. 상궁의 말에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던 태형은 처음 듣는 소리에 눈을 키웠다. 그게 무슨 소리야? 계속 옆에 있었던 거 아니었어? 태형이 묻자 상궁은 고개를 저었다.

 

본래대로라면 저희가 마마를 간호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 전하께서 마마와 전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다 물러가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

몇 번이나 저희가 하겠다는데도, 직접 살피시겠다고, 그러니 방 안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워낙 단호히 말씀하셔서 저희도 어쩔 수 없이…….”

 

상궁이 머리를 조아리며 하는 말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제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 그럼 밤새 합궁을 위해 마련된 그 방에서 단 둘만 있었단 건가. 태형은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아니,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간호, 해 줄 수도 있는 거지. 혹시 상궁들이 저를 간호한답시고 제 몸을 만질까봐 상궁들을 모두 물린 것일 거고.

 

하온데 마마…….”

……?”

소인이 중간 중간 혹여 전하께서 잠드셨을까 몰래 보고 왔사온데…….”

, …….”

정말 전하께서는 단 한 시도 한눈을 팔지 않으시고 오직 마마만을 지켜보고 계셨사옵니다.”

…….”

어의가 마마께오선 그저 잠드신 것뿐이라 했을 때 몇 번이고 확인을 받으셨으니 그냥 잠드신 것인 걸 알고 계셨을 텐데, 그 용안에 다정함과 마마를 향한 연정이 어찌나 듬뿍 묻어나는지. 간혹 마마의 이마에 손을 올려 혹여 마마께서 불편하실까 살피시는데 정말 저는…….”

…….”

정말 조선에 양봉업이 따로 필요 없겠다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아까 저를 걱정하며 우울해하던 상궁은 어디로 갔는지, 제 눈앞의 상궁은 그새 제가 다 설렌다는 듯 두 손까지 꼭 모아 쥐고서 태형을 반짝반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태형은 그런 상궁을 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 , 그냥 자네가 보고 싶은 것만 봐서 그런 게 아닐까. 하지만 상궁은 그런 태형의 말에 가당치도 않다는 듯 제 눈은 마치 매의 눈과 같아서 진실만을 본다며 단호했다.

 

진짜?”

진실이고말고요!”

 

결국 볼을 긁은 태형이 상궁에게 슬쩍 물었고 상궁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왜 이렇게 심장에 나비가 날아든 것처럼 간지러운지. 태형은 제 심장께에 손을 갖다 댔다. 왜 이렇게 오늘따라 아무것도 아닌 거에 의미부여가 되지? 후배가 아픈 선배 간호해 줄 수도 있는 건데. 단 둘이. ? 자취방에서. 밤새도록……. 간호해 줄 수도 있는 거아닌? 막 그렇게 막 다정한 눈빛으로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전하께서 정말 마마를 연모하시는가 봅니다.”

그래?”

 

그러니까, 왜 이런 거에 괜히 기분이 실실 좋아지냐는 말이다. 태형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려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에게 챙김 받는다는 게 기분이 좋은 건가. 아니면 사이가 안 좋아졌던, 원래는 엄청 친했던 후배와 다시 친해지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은 건가. 그것도 아니면,

 

, 그리고 전하께서 마마가 그 때까지 기운을 차리실 수 있으시다면,”

…….”

사흘 후에 전하께서 야간 시찰을 나가실 때 동행하지 않으시겠냐고 마마께 여쭤 보라 하셨습니다.”

…….”

전하께오서 이러신 적은 정말, 처음이옵니다, 마마.”

 

그냥 전정국이 좋은 건가.

 

*

 

정국와 태형의 첫 합궁 아닌 합궁이 있고 난 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정말 괜찮다고 했는데도 상궁들은 태형이 바람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부서질까 애지중지 대했고 그런 상궁들이 약간은 부담스러우면서도 사실 편한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라. 태형은 나름 만족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 날 이후 태형은 한 번도 정국을 볼 수 없었지만 그 이유는 상궁들이 충분히 이해가 가도록 설명을 해 주었다. 최근 합궁을 준비하느라 궁 전체가 들썩였기 때문에 조금 밀린 정사를 해결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거였다. 조선으로 떨어지기 전에는 인사도 안 하고 지냈던 사이면서, 그새 또 매일 보는 일상에 적응된 것인지 하루가 머다하고 보던 정국을 보지 못하니 조금 허전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지만 태형은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다. 사실 그래봐야 3일이었고, 오늘 밤에 정국과 함께 궁 밖으로 야간 시찰을 다녀오기로 했으니까. 태형은 아침에 눈을 뜬 이후부터 계속 하이 텐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마, 오늘따라 안색이 밝으십니다. 혹 오늘 밤 전하를 뵙기 때문입니까?”

, 아니거든!!”

이리도 중전 마마와 주상 전하의 사이가 좋으시니, 지밀상궁에게 언질하여 다음 합궁일을 빨리 정하여야겠습니다. 이대로라면 정말 튼튼한 아기씨를 회임하실 것 같사옵

에헤이!!”

 

대낮부터 그 무슨 낯부끄러운 소린가!! 태형은 괜히 찔리는 마음에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거 아니고 그냥 밖에 나가서 좋은 거야!! 태형은 재빨리 덧붙였지만 사실 제 자신도 왜 때문에 이렇게 아침부터 기분이 좋은 것인지는 확실히 알지 못했다. 정국을 만나서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니면 외출을 나가서 기분이 좋은 건지. 궁 안 생활이 답답했던 것도 맞고, 밖에 나가 보고 싶었던 것도 맞지만 뭐랄까그것 외에도 미묘한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달까. 태형은 애써 떠오르는 얼굴을 지우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밖에 나가서 좋은 거야. 밖에 나가서. 끊임없이 제 자신에게 세뇌하면서.

 

마마…….”

 

신난 태형이 조찬을 물리고 읽지도 못하는 한문으로 가득 찬 책을 뒤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상궁 하나가 제 옆에 있던 상궁에게 다가와 뭐라 귓속말을 하더니, 이내 상궁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무언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은 흐름에 태형이 구경하고 있던 책을 덮고 상궁의 안색을 살폈다. 아침부터 태형과 함께 내리 밝았던 상궁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져 있었다. 뭐지? 갑자기 살짝 내려앉은 분위기에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 있어?”

다름이 아니오라…….”

 

그러니까, 상궁이 전해 온 사건의 전말은 대략 이러했다.

요 근래 왕이, 그러니까 정국이 한 희빈을 전혀 찾지 않았던 관계로 한 희빈과 한 희빈의 아비는 꽤 불만이 쌓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한 달에 한 번 찾았다지만 명색이 애첩인데. 게다가 그냥 아무도 안 찾은 거였으면 왕께서 요즘 그냥 그 쪽(?)에 관심이 없으신가보다, 했을 텐데 오히려 교태전은 평소보다 더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아무 일도 없었지만) 최근의 합방까지. 한 희빈은 결국 질투에 눈이 멀어 조선 최고의 세도가인 제 아버지에게 불평을 했고, 그에 한 희빈의 아버지는 억지로 날을 받아 상선(尙膳 : 내시부의 우두머리)에게 왕을 한 희빈의 처소로 모셔 오도록 약속을 받아냈고, 우연찮게도 그 날이 오늘, 그러니까 정국과 태형이 야간 시찰을 나가기로 한 날이었다는 것이다.

 

해서아마도 오늘 밤 전하께오서는 희빈의 처소에 가지 않으실까 싶사옵니다.”

…….”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두근두근 기분 좋게 떠올랐던 기분이 한 순간에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렇구나. 태형이 중얼였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데, 납득도 하는데. 어쩐지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 서운? 아쉬운 게 아니라 서운? 태형은 저도 모르게 떠올린 단어에 옷 아래의 손가락을 꼼질였다. 서운하다니, 누구한테? 그냥 밖에 나가기로 했는데 못 나가게 돼서, 그게 아쉬운 거 아닌가? 뭐가 서운한 거지.

 

마마?”

, ?”

오늘 다과상에 유밀과를 올릴까요?”

 

유밀과는 태형이 좋아하는 달달한 과자로, 요 근래 합궁을 앞두고 상궁이 먹지 못하게 했던 것이었다. 제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슬그머니 묻는 상궁의 마음에 태형은 살짝 웃어 보였다. 그래, 서운하고 아쉬울 게 뭐가 있어. 어차피 한 희빈은 유라가 아니고 야간 시찰이야 나중에 또 나가면 되지. 그렇게 애써 달래 보아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지만.

 

*

 

그런데 왜.

 

전하, 소녀에게 어찌 이러십니까!”

 

태형은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렇게 어딘가 서운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일찍 잠자리에 들려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상궁 하나가 방으로 뛰쳐 들어오더니 태형을 불렀다. 마마, 잠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고. 그래서 무슨 일인가 싶어 교태전 안뜰로 뛰어 나온 태형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지금쯤 한 희빈의 처소에 있어야 할 정국과, 역시나 한 희빈의 처소에 있어야 할 한 희빈이었다. 너희가 왜 거기서 나와?태형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눈을 깜박였다. 마침 나와 있었던 교태전의 상궁들이 태형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 중전 마마. 오셨습니까. 상궁들 역시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어찌 이러다니. 내가 중전을 찾는 것이 희빈에게 어찌 이러냐는 소리를 들을 만 한 일인가?”

전하!”

그보다도, 어째 교태전에 올 때마다 매번 중전의 얼굴보다도 희빈의 얼굴을 먼저 보는 것 같소.”

…….”

희빈이 이리도 중전을 친애하는지 몰랐는데.”

 

태형은 살짝 낯선 정국의 굳은 얼굴에 정국에게 한 걸음 다가서려다 그대로 멈추었다. 제가 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국은 한껏 억울한 표정의 희빈에게 한없이 차가운 얼굴로 차가운 말을 내뱉고 있었다. 정국은 천천히 나긋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에는 명백히 뼈가 있었고 그를 희빈도 느꼈는지 한 희빈은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한 희빈의 뒤에서 한 희빈의 상궁들 역시 서로 눈치를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고. 태형은 조금 멀찍이 서서 그 장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박였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조차 태형은 모르는 채였으니까. 그 순간, 얕게 한숨을 내쉰 정국이 주위를 둘러보다 태형과 눈이 마주쳤고 태형은 흡,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저렇게 냉한 표정의 정국은 처음 본다.

 

중전. 여기서 뭐 하십니까. 채비하지 않고.”

?”

나와 야간 시찰을 나가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정국의 입에서 나온 말은 또 의외의 것이어서. 그거 오늘 취소되었다고 아까 상궁이 그랬……. 태형이 정국의 말에도 멀거니 눈만 깜박이고 있자 정국이 살짝 웃으며 다가와 태형의 어깨를 보란 듯이 감쌌다. . 지금 한 희빈이 보고 있지 않나? 저를 감싸는 온기에 태형이 저도 모르게 한 희빈에게 시선을 던지자 역시나 정국과 태형을 향해 있던 한 희빈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이 보여, 태형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이게 뭐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지.

 

너 지금 뭐 해?”

뭐가요?”

오늘 한 희빈한테 가기로 했다며.”

 

결국 태형이 상궁과 희빈에겐 닿지 않게끔 고개를 한껏 정국에게 기울여 속삭였다. 남들이 보면 저기서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고 있는 한 희빈에게 보란 듯이 다정하게 귓속말하는 부부 내외로 보이겠지만 그런 사실이 태형의 머릿속에까지 닿을 새는 없었다. 태형은 그저 이 상황이 당황스러울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태형과 달리, 역시나 정국은 태평했다.

 

형이랑 약속이 먼저였잖아요. 저건 지 멋대로 잡은 거고. 애초에 나는 약속한 적도 없는데.”

아니 그래도…….”

근데 형은 왜 준비 하나도 안 하고 있었어요?”

아니, 나는 당연히 오늘 파토난 줄 알았지!”

제가 형이랑 한 약속을 깨고 한 희빈한테 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 아니 말이 또 그렇게 되나? 태형은 되려 눈을 크게 뜨고 물어 오는 정국에 말끝을 흐렸다. 아니 뭐 딱히 그렇다기보단한 희빈의 아버지가 세도가라 했으니까. 아무리 너라도 그걸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건데…….

 

내가 형 같은 줄 알아요…….”

? 뭐라고? 못 들었어.”

 

방금 정국이 뭐라 투덜거린 것 같았는데. 태형은 되물었지만 아녜요. 하고 말을 뚝 끊어 버리는 정국에 태형 역시 입을 삐쭉 내밀었다. 아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태형은 자꾸만 눈치 없이 올라가려 하는 입꼬리를 내리느라 무진 애를 썼다. 분명히 꼬인 상황인 것이 틀림없는데. 한 희빈이 저렇게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도 자꾸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느새 교태전 안, 태형의 방까지 도달한 정국이 태형을 감싸고 있던 팔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계속 어깨가 감싸인 채로 왔구나. 어느새 정국이 저에게 하는 스킨십이 익숙해진 것 같아 태형은 입맛을 다셨다. 아니 뭐, 별 거 아닌 스킨십이긴 한데…….

 

그 용안에 다정함과 마마를 향한 연정이 어찌나 듬뿍 묻어나는지.

 

자꾸만 그 말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태형은 자꾸만 귓가에 메아리쳐 들리는 상궁의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그 상궁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거라니까. 정신 차려, 김태형! 괜히 손바닥을 펴 제 볼을 가볍게 두드린 태형이 잠시 상궁이 제가 입을 옷을 준비하러 간 사이 어색해진 공기에 잠시 눈을 굴리다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유라, 아니 희빈한테 잘 해줘.”

?”

아니, 그러니까. 너 좋아하잖아.”

형이 지금 걔 걱정할 처지예요?”

 

사실, 딱히 진심은 아니었고. 괜히 한 번 던져본 거였다. 그런데 그에 대답하는 정국의 말투가 또 삐딱하다. 제 딴에는 나름 정국을 위한답시고 한 말인데. 괜히 찔끔한 태형이 아, 아니! 하고 말을 더듬었다.

 

아니, 내 말은,”

그리고 걔가 저 좋아하는 거지 제가 좋아하는 건 걔가 아닌데 왜 잘해줘요, 제가. 아니, 생각해보니까 나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왕을 좋아하는 거지.”

 

아니 근데 왜 화를 내구 그르냐……. 묘하게 뾰족한 정국의 말투에 태형은 차마 대꾸는 하지 못하고 입을 삐죽였다. 하긴 정국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정국이 좋아하는 건 현대의 한유라지 조선의 한 희빈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어쨌든 한 희빈이랑 한유라가 우연이라기엔 좀 많이, 심하게 닮았으니까 한 말이었는데한 희빈의 아버지가 권력가이기도 하고……. 태형이 우물쭈물 손가락을 꼼질대자 그런 태형을 지켜보던 정국이 폭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준비하고 나와요. 이러다 야시장 문 다 닫겠다.”

야시장?”

. 형이 예전에 뭐, 대만인가. 야시장 가보고 싶다고 그랬잖아요. 대만은 아니지만.”

 

, 내가 쟤한테 그런 말도 했었나. 태형은 볼을 긁었다. 대만 야시장, 평소에 태형이 가보고 싶어 했던 곳이긴 했다. 그런데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쟤 기억력 엄청 좋네. 태형이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한 희빈이고 한유라고. 정국의 말대로 어차피 지금 태형이 신경 쓸 바는 아니긴 했다. 전정국이 알아서 하겠지. 정국이 말을 끝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궁이 태형이 야간 시찰에 입고 나갈 옷을 준비해 들어왔고, 태형은 옷 입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상궁의 말을 애써 뿌리친 채 낑낑거리며 혼자 옷을 주워 입었다. 아무래도 매번 정국이 도와줄 수는 없으니 혼자서라도 어떻게든 한복을 입는 법을 익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태형의 이러한 고민은 머지않아 태형도, 정국도 생각지 못했던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사실 머지않아, 라고 표현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금방. 그러니까, 태형과 정국이 호위무사를 너덧명을 데리고 야간시찰을 나갔던 그 날 밤에. 그러니까, 상황은 대략 이렇게 전개되었다.

 

*

 

우와. 나 야시장 처음 와 봐.”

 

태형은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기분이 좋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야간 시찰을 나오지 못할 것 같아 살짝 서운했던 거였는데, 정국과 함께 밤 외출을 나올 수 있게 된 데다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야시장이 제 눈앞에 펼쳐져 있다. 이거야말로 조선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평생 보지 못했을 장면 아닐까. 태형은 연신 감탄을 터뜨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비록 전기로 빛나는 화려한 조명은 없지만, 은은한 불빛에 왁자지껄한 상인들의 목소리는 분명 그만의 낭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길 잃어버려요.”

 

명색이 왕과 왕비였기에 호위무사를 대동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고작 너덧명으로 이루어진 호위무사는 태형과 정국을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는 대신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태형과 정국이 조그맣게 대화하는 목소리는 듣지 못할 만큼의 거리를 두고. 방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움직여야 할 때는 항상 지척에 상궁들을 대동해야만 했던 궁궐 안에 비하면 이 정도는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로운 기분이라, 태형은 활짝 웃었다. 완전 신기해. 그냥 야시장 같은데, 사람들 다 한복 입고 있어.

 

저건 뭐야?”

저거 과일아 형! 그러다가 진짜 길 잃어버린다니까요.”

 

게다가 적응했다곤 하지만 언제나 불편했던 치렁치렁한 여자 한복을 벗고 입은 야간 시찰복은 여자의 의복보단 남자의 의복에 가까워서, 태형은 훨씬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밤바람은 시원하고, 기분은 자유롭고, 몸 역시 가볍고. 태형의 기분은 지금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고 할까. 그래서 태형은 조심하라는 정국의 말에도 끝도 없이 이어진 상점들을 기웃대며 연신 두리번거렸다. 조선에 떨어진 이후로는 처음 느껴 보는 광경이었다. 사람도 많고, 시끄럽고. 꼭 학교 축제 같다. 태형이 중얼거렸다. 여자친구랑 학교 축제 구경하는 게 로망이었는데. 이러다가 슬쩍 손도 잡고, 서로 맛있는 거 사서 먹여주기도 하고…….

 

으악!”

, 미안합니다~!”

 

태형이 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그 때였다. 누군가가 태형을 퍽 치고 지나갔고 그 반동에 태형의 몸이 휘청였다. 태형을 치고 지나간 남자는 태형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대충 사과한 채 휙 하고 지나쳤고 태형은 바닥에 나동그라져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뭐야, 완전 고의로 치고 지나간 것 같은데!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이가 없어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태형이 눈만 깜박이고 있자, 인파에 밀려 살짝 뒤에서 태형을 뒤쫓아 오고 있던 정국이 재빨리 태형에게 다가왔다.

 

그러길래 조심하랬잖아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아니, 저 사람이 나 일부러 치고 지나갔,”

 

태형이 뭐라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정국이 태형의 팔을 잡아 힘주어 태형을 일으켜 세웠다. 아니, 진짜. 내가 연약한 게 아니고 저 사람이 어깨빵을 친 거라니까? 태형이 억울한 듯 꿍얼대자 정국이 살짝 웃으며 그런 태형의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주며 입을 열었다.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요. 바빴나 보죠. 사람 잃어버리기 딱 좋겠네.”

앞으로 조심할게.”

.”

 

정국이 제 몸을 툭툭 털어 주는 것도 그렇고, 일으켜 세워 준 것도 그렇고. 다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인데 정국이 해 주니 괜히 기분이 묘했다. 6살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 태형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정국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몇 번이고 조심하랬는데 내가 그 말 안 듣고 기웃대다가 넘어져서 짜증났나? 태형이 살짝 정국의 눈치를 보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던 정국의 눈이 순간 태형을 향했다. . 눈 마주쳤어. 순간 마주친 눈에 태형은 숨을 삼켰다. 어쩐지 기분이 좀,

 

.”

?”

잡을래요?”

 

이상해. 태형은 제게 내밀어진 정국의 손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정국을 쳐다봤다. 그러나 정국의 시선은 태형을 향해 있지 않았다. 왜 날 안 보고 얘기하지? 그러나 정국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 없는 것은 태형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뭐라고. 태형은 괜히 간질거리는 것 같은 느낌에 입 안 쪽 여린 살을 꾹 깨물었다. 이게 참, 분위기라는 게 무섭다. 태형은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분명히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친했을 땐 장난으로 껴안고 어깨동무도 했던 사이에 손잡는 게 뭐 대수라고.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많으니까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잡는 거라는 걸 알고 있어도. 아무리 머리로는 이해를 한다 해도.

 

…….”

 

그렇게 내 얼굴 쳐다보지도 못하고 손만 내밀면, 괜히 나까지 부끄러워지잖아. 태형은 제게 내밀어진 손을 잡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게 무슨 연애 초반에 스킨십 진도 나가는 커플 같은 텐션이지.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러고 보면, 태형은 계기야 어쨌든 정국과 처음 한 것이 되게 많다는 것을 실감했다. 비단 조선에 떨어지기 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조선에 떨어진 이후론 더더욱. 이렇게 손을 잡고 걷는 것도, 야시장에 온 것도. 그리고 또 첫키스도 전정국이랑 했고…….

 

으아악.”

왜 그래요?”

? , 아냐.”

 

갑자기 첫키스가 왜 떠오르는데! 그건 무효지! 태형은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잊어버려 김태형. 그건 연기였어. 어쩔 수 없는 거였다고. 태형은 애써 제 자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드는 제 안의 또 다른 자아가 질문을 던진다. 그럼 지금은 뭔데? 굳이 손잡고 걸을 필요 있어? 그냥 가까이만 걸으면 되지. 태형은 입술을 깨문다. 그러게. 이건 뭘까. 태형도 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잡은 건데.

 

.”

, ?!”

저거 먹을래요?”

태형이 제 안의 또 다른 자아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정국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제야 태형은 깊은 고뇌에서 벗어나 정국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국이 가리킨 것은 꿀이 발라진 딸기였다. 전정국은 제가 딸기를 가장 좋아하는 걸 알고 저걸 짚은 걸까, 아니면……. 태형은 무의식적으로 또 정국의 생각을 하다 이내 제 볼을 짝 쳤다. 이런 거에 하나하나 의미부여 하지 말라고! 이러다가 아주 숨 쉬는 거에도 의미부여하겠어! 태형은 자꾸만 떠오르는 생각을 잊으려 부러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먹을래!! 먹어!! 다 먹자!!

 

그거 다 먹을 수 있겠어요?”

 

그리고 잠시 후, 정국은 태형의 두 손 가득 담긴 먹을거리들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딸기꼬치, 닭구이, , 꿀이 발라진 과자, 유과까지. 다 먹을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음식들은, 태형이 욕심을 부려 가득가득 산 것들이었다. 혹시 상궁들이 형 굶겼어요? 정국의 말에 태형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정국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서, 그때마다 충동적으로 음식들을 샀다. 제가 사려고 할 때마다 명색이 왕인데 이 정도는 낼 수 있다며 정국이 계산한 탓에 제가 산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이 말은 죽어도 못 하지. 태형은 다 먹을 수 있어, 하고 괜히 큰 소리를 쳤다.

 

…….”

 

그러나 태형이 차마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제 손이 단 두 개뿐이라는 거였다. 한 손에는 떡을, 한 손에는 꼬치를. 그리고 끌어안은 품에는 과자가 담긴 봉투를. 막상 먹으려고 하니 옴짝달싹 할 수 없을 정도로 태형은 무작정 손에 집히는 대로 사고 보았던 것이다. 결국 살짝 한숨을 내쉰 정국이 태형의 손에 들린 딸기 꼬치를 뺏어 들었다. , 고마워. 태형이 대신 들어주려나보다, 하고 생각하며 감사의 말을 하려던 그 때였다.

 

.”

?”

 

아니, 들어주려는 거 아니었나? 태형은 갑자기 제 입에 들이밀어진 딸기 꼬치에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입을 벌리라는 듯 아, 하고 말한 정국은 안 먹고 뭐 하냐는 표정이다. 결국 태형은 얼떨결에 정국이 내민 딸기 꼬치의 딸기 한 알을 입으로 쏙 베어 물었다. 그러자 정국이 잘 먹네, 하고 웃는다. 태형은 괜히 귀가 뜨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에 딸기를 꼭꼭 씹었다. 아니, 내가 음식들을 그렇게 소중하게 품고 있었나. 들어주는 게 아니라 먹여 주다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태형이 딸기를 다 씹어 삼키자 정국이 태형이 먹기 편하도록 딸기를 위로 밀어 올린 뒤 다시 한 번 태형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걸 또 태형은 받아먹었고. 그러니까, 말하자면 태형은 지금 자각하지 못한 채 얼떨결에 제 로망을 실현 중에 있었던 것이다. 야시장에서 맛있는 거 먹여 주기. 비록 그 상대가 여자친구가 아닌 후배긴 했지만……. 아니 그러고 보니 손도 잡았잖아?!

 

무슨 생각해요, .”

, ?”

 

[SYSTEM] ‘김태형님의 캠퍼스의 로망퀘스트 달성! 저도 모르는 새에 머리 위에 반짝반짝 빛나는 퀘스트 완료 타이틀을 달아버린 태형은 입 안에 가득 찬 달콤한 과즙을 혀로 핥았다. 그 와중에 또 딸기 꼬치는 엄청나게 달아서. 그 달콤한 감각은 태형의 혈관을 타고 올라가 태형을 대책 없이 기분 좋게 만들었다. 달고, 시원하고, 따뜻하고. 그 묘한 감각에 태형은 또 심장이 간지럽고. 꼭 마치 제가 영화 속 한 장면의 주인공 같은 느낌…….

 

도둑이야!!!!”

 

그러나 태형이 기분 좋게 정국이 건넨 떡을 한 입 딱 베어 물었을 때였다. 바로 지척에서 들리는 고함 소리에 태형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고, 태형의 눈은 금세 그 크기를 키웠다. 태형이 돌아본 곳에는 한 아주머니가 도둑이라며 소리를 치고 있었고, 한 남자가 재빨리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 그러고 보니까 나 가져왔던 돈주머니가 없어!!”

 

낯설지 않은 얼굴이다. 태형은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음식들을 우수수 떨어트리고 제 몸을 더듬었다. 혹시나가 역시나. 태형이 야간 시찰을 나가기 전 상궁이 단디 챙겨 주었던 엽전이 가득 들어 있던 돈주머니가 없었다. 제가 사는 것마다 정국이 다 돈을 내버려서 몰랐는데, 어쩐지 몸이 지나치게 가볍더라. 그게 옷 때문이 아니라 동전 무게였을 줄이야. 태형은 먹다 만 떡까지 마저 떨어트리며 입을 벌렸다. , , 저 사람!! 아까 나랑 부딪혔던 사람이잖아!!!!

 

마마, 무슨 일이십니까!”

, 저 사람이 내 돈!!!”

 

태형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뒤에서 걷고 있던 호위무사들이 달려왔고 태형은 도망치고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삿대질을 했다. , 저 놈이 내 돈을 훔쳐갔어!!! 그 말에 호위무사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아니, 어디서 감히 중전 마마의 패물을! 그러더니 호위무사들은 그 남자를 뒤쫓아 뛰기 시작했고 태형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 손에 잡히는 것을 붙잡았다. , 진짜 나 왜 이렇게 둔하지?!

 

아니 그, , , 잠깐만…….”

, 나 진짜 바본가 봐.”

 

태형이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제가 떨어트린 음식물들이 눈에 들어와, 태형은 더욱 더 울상을 지었다. 가뜩이나 소란스러웠던 거리는 도둑의 등장으로 더욱 더 소란스러워졌고, 태형의 뇌는 떨어진 음식물들과, 잃어버린 돈과, 제 자신의 정신없음에 과부하에 걸린 상태였다. 조선에 와서 나름 잘 적응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사고를 치다니. 물론 제 잘못은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제 자신이 원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사람들이 쫓아갔잖아요. 잡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잠깐만…….”

.”

 

태형이 고개를 숙이고 시선은 음식물들에 고정한 채 제 자신을 탓하고 있던 차였다. 제 정수리 바로 위에서 떨어지는 정국의 목소리에 태형이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태형은 화들짝 놀라 헉, 소리와 함께 확 몸을 띄웠다. 제 얼굴 바로 위에 있는 정국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그리고 태형의 얼굴 역시. 놀라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제 가까이에 있는 정국을 붙잡고 한탄을 했던 것이다. 의도치 않게 정국의 멱살을 잡았던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아니, 그게, 내 의도는 네 멱살을 잡으려 했던 게 아니라…….

 

아니, 알아요. 그냥 너무 가까워서 그랬어요.”

, 진짜 미안.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런 사람이 뭔데. 태형은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당황한 상태였다. 사실 멱살이라기보다는 가슴팍을 잡은 것에 가까웠지만. 태형은 왜 그 순간 제 손이 갑자기 그리로 갔는지 알 수 없어 손을 쥐었다 폈다. 아니 왜 그리로 갔니 내 손아……. 태형과 정국 사이에는 몇 초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그 분위기를 깨 줄 호위무사는 소매치기를 잡으러 떠난 후였다. 아니 그런데 그깟 소매치기 잡겠다고 왕이랑 왕비를 내팽겨치고 달려 나가는 호위무사도 있나. 몇 명은 남아서 우릴 호위해야 하는 거 아니야? 가득 차오르는 민망함에 태형이 괜히 속으로 호위무사를 탓하며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찼다. 바로 옆에서 정국이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를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을까. 호위무사를 기다려야 하니 어디로 가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호위무사가 사라진 곳만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던 태형이 결국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입을 연 그 때였다.

 

저기, 정국아.”

김태형?!”

, 뭐야?!”

 

정국이 채 대답을 들려주기도 전에, 조선에 온 뒤로는 정국을 제외한 사람에게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제 이름이 들리며 제 손이 누군가에 의해 확 낚아채졌다. 제 손을 갑자기 강하게 붙잡아 오는 누군가의 손길에 태형은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부여잡고 뒤를 돌아보았고 그 곳엔,

 

박지민?!”

 

태형의 고등학교 친구이자, 정국의 사촌누나의 동기. 태형과 정국이 재학 중인 대학교의 패션디자인학과를 다니는,

 

, 왜 그런 꼴을 하

, 아니 나으리!!!!! 잡았습니다아!!!!!!”

가만, 너 전정ㄱ

지민이 형?”

아니, 박지민, 근데 너 지금 나 이렇게 잡으면 안 되는

아니, 그런데 마마, 아니 마님, 그 자는!”

 

그리고 이제는 그 사이 타이밍 좋게도 도둑을 때려잡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달려오던 호위무사들의 표정이, 지엄하고 고귀하신 중전 마마의 손을 붙잡고 있는 웬 사내놈을 보고 험악해지는 것을 본 태형의 임기응변에 의해 졸지에 새로운 직업을 하나 갖게 된,

 

아니, 잠깐, 잠깐만. 그러니까 이 자는!”

이 건방진 놈이!”

, , 새로 들어온!!”

새로? 뭘 새로?”

내시다!!!”

 

뉴비 내시 지민이 있었다.



+


이번 편은.. 살짝.. 쉬어가는 화..



다음 편은 정국이 번외이자 과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편이 될 예정입니다!! XD


' > 조선 로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로맨스 10  (7) 2018.06.29
조선 로맨스 09  (2) 2018.06.15
조선 로맨스 07  (3) 2018.05.17
조선 로맨스 06  (1) 2018.05.06
조선 로맨스 05  (0) 2018.04.2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