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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스토리 개편 이후에 글 쓰기가 불편해지고 트위터(@milkteaxger)에서 설문조사를 한 결과 (꽤 예전에...) 


포스타입이 압도적으로 높아서 연재처를 옮기게 되었어요ㅠㅁㅠ..


사실 포스타입은 브금 박스가 안 예뻐서 망설였는데... 제가 생각해도 접근성이나 여러 문제에 있어서 포스타입이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조선 로맨스는 18편 완결로 현재 기준 한 편이 남아 있기 때문에 티스토리와 포스타입 모두에 연재될 거지만, 


앞으로 새로 올라오는 글들 (이미 새로 올라온 글도..)과 조선로맨스 외전 등은 모두 포타에만 올라올 예정입니다.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ㅠㅁㅠ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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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지민의 좌절과 제 자신에 대한 회의감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흐르고 날은 바뀌어 어느덧 정국이 말해 놓은 행차 전날 밤이 되었다. 어차피 조선에 오래 있어 봐야 곤란한 상황만 늘어날 뿐 저와 태형의 관계 진전엔 아무런 득이 없을 것 같다고 판단한 정국의 단호한 어명에 의한 결과이기도 했다.

물론 부부이기 때문에 그 핑계로 태형과 매일 밤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좋았지만, 낮 시간에 짬을 내어 부러 태형을 보러 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제는 슬슬 제가 중전을 보러 가겠다 하면 차마 말은 못 해도 ?’ ‘좀 작작…….’하고 눈으로 자신을 패는 신하들의 눈치가 따끔거렸기 때문에. 현대로 돌아가면 곧 방학일 테니 하루 종일, 낮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붙어 있을 수 있는데. 그리고 애초에 밤에 같이 있는 것도, 얼마든지 자취방에서 함께 할 수 있다. 얇은 창호지 너머에서 저와 태형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무언가를 고대하고 있을 상궁들의 눈 없이, 단 둘이서만.

 

 

정국아?”

 

 

솔직히, 밤마다 손만 잡고 자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정작 태형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긴 하지만, 태형이 정국에 대한 감정을 깨닫기 훨씬 전부터 태형을 좋아해 왔던 정국으로서는 지금 이 진도가 거북이, 아니 나무늘보보다도 느린 거였으니까. 입맞춤이며 간단한 스킨십은 할 수 있다 해도, 보는 눈이 많으니 더 이상 진도를 빼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도 있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신하로부터 오늘은 사자가 들어가는 뱀날이니 중전마마께 가신다 해도 절대 하시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듣고 온 참이었으니까. 언제든 하면 좋은 거 아니냐고, 많이 할수록 확률이 올라가는 거 아니냐는 정국의 물음에 신하는 단호한 표정으로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 언제…….

일관(日官)으로부터 날을 받으셔야지요, 전하. 자가 들어가는 뱀날도 안 되고 자가 들어가는 호랑이날도 안 되며 초하루, 그믐, 보름날, 일식, 월식이 있는 날도 안 됩니다.’

…….’

 

 

미친 거 아니야? 그리고 그 말에, 정국은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그거 다 피하면 애초에 할 수 있는 날이 있기는 한 건가? 어차피 저와 태형의 소중한 첫 경험을 8명의 상궁들이 창호지 너머에서 지켜보는 곳에서 치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 말을 들은 정국은 하루빨리 현대로 돌아가고 싶어졌던 것이다. 사실은 닿기만 해도 찌릿찌릿 전류가 통하는데.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정국은 말없이 제 품에 안긴 태형을 조금 더 꽉 끌어안았다. ‘지금 간신히 걷기 시작한 사람한테 나랑 같은 속도로 뛰어달라고 안 해요.’ 제가 일전에 태형에게 뱉은 말이 있기도 했고.

 

 

너 내 말 듣고 있어?”

, ?”

 

 

그렇게 참을 인자를 새기며 제 안의 검은 짐승을 잠재우기 위해 이를 꽉 물던 정국은, 저를 부르는 태형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태형을 쳐다봤다. 너 어디 아파? 표정이……. 그리고 마주한 걱정스러운 태형의 얼굴에, 정국은 어색하게 웃었다. , 아프긴요. 하나도 안 아파요. 뭐라 그랬어요? 잠깐 딴 생각 좀 하느라. 곧바로 해사하게 웃으며 다정히 묻는 말에, 태형은 음. 하고 혀를 살짝 내어 입술을 핥았고.

 

 

? 아니, 별 건 아니고.”

……?”

좀 출출하지 않냐고.”

 

 

정국의 앞에서 이 말을 꺼내긴 좀 민망하긴 했는데, 지금 태형은 민망한 것보다 제 뱃속에서 울리는 위장의 고동소리가 더 컸으므로 살짝 망설이다 이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태형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정국은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형 배고파요?

 

 

아니……. 생각해 보니까 집에 있을 땐 종종 야식도 먹고 그랬는데, 여기 와서는 야식도 한 번도 못 먹고. 밥이 맛있긴 한데 좀 자극적인 거 먹고 싶어.”

 

 

어차피 매운 것은 못 먹는 태형이니, 지금 태형이 말하는 자극적인 것이란 단 것을 의미했다. 수박에도 설탕을 뿌려 먹고, 딸기에도 설탕을 뿌려 먹고. 탄산음료, 특히 콜라에 환장하는 태형이었는데,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런 것들을 하나도 먹지 못했을 테니 지금 태형이 뭔가 단 것을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정국은 태형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럼 상궁들한테 다과 같은 거 가져오라고 할까요?”

아니,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이 밤중에 굳이 상궁들까지 불러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은 태형은(사실은 상궁들이 가져다주는 과자들은 태형이 원하는 그런 자극적인 단맛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정국에게 속삭였다. 그냥 몰래 잠깐 나갔다 오면 안 되나?

 

 

?”

저번처럼. 시찰.”

그건 안 될 거예요.”

 

 

위험하기도 하고, 내전 깊숙이 있는 교태전에서 아예 궁 밖으로 나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까. 정국은 고개를 저었고 그런 정국을 응시하던 태형은 이내 하긴 그렇지. 하고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긴 하다. 혹시라도 밖에 나갔다가 누가 왕과 왕비 얼굴을 알아보기라도 하면. 그래서 나쁜 맘을 먹기라도 하면. 조선에서 다치거나 죽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던 것이 역시나가 되니 풀이 죽은 태형은 괜히 죄 없는 제 옷을 죽죽 잡아당겼다. , 단 거 땡겨. 그리고 그런 태형을 잠시간 응시하던 정국은 이내 무언가 떠오른 듯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생과방 정도면 몰래 다녀올 수 있을 거 같은데.”

생과방?”

여기서 한 5? 정도 걸릴 거예요.”

 

 

그게 뭔데. 어떻게 하는 건데. 태형이 의아한 표정으로 정국을 쳐다보니 정국은 설명을 덧붙였다. 그냥 수라상 차리는 곳이요. 생과방은 디저트. 그리고 정국의 깔끔한 설명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넌 별 걸 다 안다.

 

 

도착하자마자 지리를 파악해 뒀죠. 여차하면 형 데리고 도망쳐야 될까 싶어서.”

. 좀 믿음직한데.”

 

 

어느새 반짝 일어나 저를 일으켜 주려 손을 뻗은 정국의 손을 맞잡으며, 태형은 씩 웃었다. 그러자 정국이 그런 태형을 보고 마주 웃으며 태형의 손가락에 제 손을 엮었다.

 

 

믿고 미래를 맡겨도 될 아주 훌륭한 남편감이죠.”

?”

그냥 잠시 자기 어필 타임 좀 가져봤어요.”

 

 

읏차. 정국의 말에 태형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운 사이 정국은 태형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고,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태형에게 정국은 살짝 가까이 다가왔다. 갑자기 훅 하고 가까워진 정국에 태형은 숨을 삼켰고. 정국은 그런 태형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

 

 

나랑 평생 같이 살자고요.”

 

 

*

 

 

결국 어둠을 틈타 생과방에 몰래 잠입하는 데에 성공한 정국과 태형은 눈에 보이는 조그만 방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내소방과 외소주방에는 간간히 불이 켜져 있기에 아 이대로 실패하는 것인가 했던 걱정과는 달리, 생과방은 쥐새끼 한 마리 없이 고요했다. 어차피 들켜도 왕과 왕비의 신분이니 그리 큰 탈이 날 일은 없을 텐데도 캄캄한 밤중에 사람들 몰래 무언가를 한다고 생각하니 괜히 심장이 두근거려 왔다. 아닌가. 그냥 정국이 옆에 있어서 두근거리는 건가. 태형은 어둠에 적응한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에는 급한 대로 방 촛대에 꽂혀 있던 조그만 초를 든 채로.

 

 

. 뭔가 조금 더 달콤한 게 먹고 싶은데.”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차분히 정리되어 있는, 그마저도 몇 없는 유밀과나 과편 같은 것들뿐이다. 이런 게 먹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나는 뭔가 조금 더 설탕이 잔뜩 들어가 있는,

 

 

이거 엿인 거 같은데.”

.”

 

 

그래, 저런 거. 태형은 정국이 어느 구석에서 찾아낸 기다란 모양의 엿을 반갑게 받아들었다. 유밀과나 과편 같은 고급 한과에 비해 엿은 만들기가 쉽고 값이 싸서 그런지 정작 조선에 온 뒤로는 보지 못했던 거였다. 상궁들이 제게 가져다주는 다과상에서는 본 적이 없었으니, 아마 궁녀들이 몰래 숨겨놓고 먹으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보니까 괜히 반갑네. 태형은 정국에게서 엿을 건네받자마자 앙 하고 엿을 깨물었다.

 

 

근데 그거 엄청 딱딱한 것 같던데 조심,”

!”

 

 

정국의 경고를 채 듣지도 못한 채 반가운 마음에 무작정 엿을 깨문 태형은, 아니나 다를까 정국이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아, 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딱딱하고 거친 엿이 태형의 입 속에서 부러지면서 태형의 이가 태형의 혀끝을 살짝 깨문 탓이었다. 아씨, 아파. 태형은 순간 핑 도는 눈물에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나 맛있으면 혀까지 먹어요?”

지쨔 아흐거드?”

 

 

피 난 거 같아. 엿이 뭐라고, 그걸 급하게 먹다 혀를 깨물고 울상을 짓는 제가 웃긴 듯 킥킥 웃는 정국을 쳐다보며 태형은 베어 물었던 엿을 마저 꼭꼭 씹어 삼킨 후에 정국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지금 웃을 때가 아니야. 이거 봐. 여기 피 났잖아. , 이거 이제 뭐 먹을 때마다 거슬리는…….

 

 

…….”

…….”

 

 

그런데 이 분위기 뭐지? 태형은 한순간에 가라앉은 주변의 분위기에 하던 말을 멈추고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허공에서 정국과 제 시선이 얽힌 순간, 태형은 저도 모르게 한 쪽 손에 쥐고 있던 엿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

 

 

왜 갑자기 이렇게 됐지? 그런 생각을 할 새도 없이, 태형은 저를 응시하고 있는 정국의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을 마주했다. , 혀가 문제였나? 태형은 정국에게 깨물린 상처를 보여주겠다고 살짝 내밀었던 혀를 슬그머니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꼴깍, 침이 절로 삼켜졌다. , 정구기……. , 동공이 풀린 것 같은데. 태형은 저도 모르게 쭈구려 앉았던 몸을 주춤 뒤로 뺐다. 그러나 그런 제 움직임에도 정국의 눈엔 흔들림이 없다. 그 진득한 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 , 정국의 시선이 제 시선을 묶어놓은 것처럼. 말 그대로 단단히 얽혀있는 것처럼. 온 힘을 다해 꽉 쥔 탓에 체온에 녹은 엿이 제 손에 진득히 묻어 끈적거린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어 입술을 핥다가 아차 싶어 다시 입을 앙 다물었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

?”

왜 도망가요.”

 

 

, ? 태형은 유난히 낮게 울리는 정국의 목소리에 떨리는 심장을 간신히 붙잡았다. , 미쳤나봐. 정국의 저런 눈은 처음 본다. 뭐랄까, 진짜 잡히면 잡아먹힐 것 같은 느낌. 호랑이 앞에 선 토끼가 이런 기분일까. 아닌데. 토끼는 정국인데. 태형은 어떻게 하면 이 분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다 이내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아니지. 왜 헤쳐나가? 전정국을 꼬시겠다고 마음먹은 게 고작 며칠 전인데. 물론 지금 정국이 하는 걸로 봐서는 제가 굳이 꼬시지 않아도 될 것 같긴 하지만. 태형은 벌떡 일어나려던 마음을 고쳐먹고 이내 새카맣게 내려앉은 정국의 눈을 응시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태형은 정국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정국은 분명…….

 

 

뭐 해요,”

…….”

혀 안 빼고.”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까.

 

 

*

 

 

…….”

 

 

무슨 정신으로 다시 교태전으로 돌아와 밤을 보내고 절까지 올 준비를 했는지 모르겠다. 태형은 멍하니 제 눈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올려다봤다. 그래, 이 나무. 조선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맞이한 익숙한 풍경에 태형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러니까, 정말, 예상했던 대로 그 나무가 맞았다. 그 절도 맞았고.

 

 

정국이와 오해를 풀고, 다시 친하게 지내게 해 주세요.’

 

 

정말 그 소원 때문이었을까. 태형은 제가 현대에 있을 때 나무에다 대고 빌었던 소원을 떠올렸다. 저만치 앞에서 절의 주지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코코넛 나무 열매 같이 동그란 정국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그 때도, 정국과 저는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같은 조도 아니었고, 어색하다 못해 좋지 않은 사이였으니까. 나무에다 대고 소원을 빈 다음, 태형은 고개를 들어 흘긋 정국을 쳐다봤었다. 정국이 어디쯤에 있는지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시선이 정국에게로 향했으니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신경은 온통 정국을 향해 쏠려 있었으니까. 태형은 눈을 감은 채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비는 정국을 쳐다봤었다. 너는 지금 무슨 소원을 빌고 있을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다 이내 픽 웃었었지.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형이 날 좋아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김태형이, 전정국을 좋아하게 해달라고.’

 

 

그런데, 그 때 제가 궁금해 했던 그 소원이, 제 자신과 관련된 거였다니. 떠올리자 다시 뛰기 시작하는 심장에 태형은 손을 들어 가슴에 가져다 댔다. 언제부터 정국은 자신을 좋아했을까. 아니 그 전에, 언제부터 나는 정국이를 좋아했지? 어쩌면 유라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들도 사실은 정국이를 좋아하고 있었던 거였나? 유라는 쉽게 포기가 됐었는데, 정국이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 때는 그냥 정국이가 너무 좋은 후배고 동생이라.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

 

 

세상에 매일같이 한 방에서 잠들고 뽀뽀하고, 종국에는 키스까지 한 형 동생도 있나. 태형은 어젯밤 정국과 홀린 듯이 입을 맞췄던 것을 떠올리며 떨려오는 심장을 꾹 눌렀다. 어쩌면 진짜, 지민이 제게 했던 말이 정말 맞는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 정말 눈치 없다고. 정국이 저를 좋아하는 것을 몰랐던 건 둘째 치더라도, 제가 정국을 좋아하는지조차 몰랐다니. 이렇게나 많이 좋아하는데.

 

 

지민아…….”

.”

나 심장이 뛰어.”

 

 

전정국. 이름에 꿀을 발라 놓은 건지, 아님 가시가 있는 건지. 부르면 부를수록 달고 심장을 찔러 두근거리게 만든다. 그 사이 주지스님과 이야기를 끝낸 듯, 저만치에서 저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저에게 다가오는 정국을 보며 태형은 제 뒤에서 일산을 들고 있는 지민을 향해 조그맣게 속삭였다. 어떡해. 진짜 시도 때도 없이 막 심장이,

 

 

태형아.”

…….”

심장은원래 뛰어.”

 

 

안 뛰면 죽어. 그러나 요상한 방식으로 제 소원을 들어준 나무와 돌무더기에게 깊은 반감을 가지고 약간 비뚤어져 있는 지민은 감정에 젖은 태형의 귓가에 조그맣게 진실을 속삭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형은 그저 정국을 보며 반짝반짝한 눈을 할 뿐이었지만그리고 지민은 그런 태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집 보내줘……. 지금 별로 해가 쨍쨍하지도 않은데 이 일산은 왜 씌우라는 거야. 조만간 비 올 것 같은데 차라리 우산을 씌우든가. 하고 중얼거리면서.

 

 

중전과 단 둘이 잠시 절을 둘러보고 싶은데.”

 

 

지민이 투덜거리는 사이, 어느새 가까이 온 정국이 태형의 옆에 나란히 서며 주지 스님에게 말했고 스님은 얼마든지 그러시라며 빙긋 웃었다. 곧이어 어명에 의해 요란하고 화려한 왕의 행렬 대부분이 절 밖으로 모습을 감추고, 조용한 절간에는 몇몇의 호위무사와 정국, 그리고 태형만이 남겨졌다. 그리고 그마저도, 정국은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부를 테니 절대로 부르기 전에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 일렀다. 어차피 절 전체를 왕의 군관들이 둘러싸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호위무사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좀 이상하다.”

 

 

조용한 산 깊숙이 위치한 절간은, 정말 말 그대로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더욱이 어명에 의해 모두가 모습을 숨기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아무도 없는 절을 보고 있자니 현대에서 워크샵으로 왔던 그 때의 절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어 보여 태형은 꼭, 이미 제가 현대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주위에 한복을 입은 사람도, 제게 중전이라 부르는 사람도 없으니까.

 

 

혹시 형하고 나만 남겨지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싶었는데, 그건 아니네요.”

아직 왕의 소원이 안 이루어졌잖아. 왕비의 소원도.”

그러게요. 그건 어떻게 하지.”

 

 

정국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동안, 태형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자꾸 기분이 이상하다. 뭔가 잊고 있는 기분. 제 소원은 이루어졌고, 정국이 소원도 이루어졌는데. 왕과 왕비의 소원만 남은 게 맞는데, 뭐랄까…….

 

 

. 비와요.”

 

 

태형이 무언가 찜찜한 기분에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그 때, 정국이 다가와 손바닥을 펴 태형의 위를 가렸다. 태형이 고개를 들자 하늘에서는 정국의 말대로 굵은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소나긴가? 조그맣게 중얼거린 정국이 일단 어디 좀 들어가자며 태형을 잡아끌었다.

 

 

호위무사들 말 되게 잘 듣네.”

 

 

아무리 어명이라지만 비 오는데 우산도 안 갖다 주고. 몇 걸음 옮기지도 않았는데 쏟아져 내리는 비에, 황급히 눈앞에 보이는 열려 있는 창고 안으로 들어선 태형은 조그맣게 중얼였고 태형의 중얼거림을 들은 정국이 피식 웃었다. 이번이 첫 번째도 아니고, 우리가 말 하려고 할 때마다 절대로 오지 말라고 당부해 뒀었으니까 그렇죠.

 

 

그건 그런데.”

그런데 비가 제법 세게 오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유난히 굵다 싶더니, 비는 마치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하늘이 뚫릴 것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정국은 문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창고 문을 닫았다. 열어 놓으면 비 엄청 들이쳐요. 이래서는 우리가 불러도 빗소리 때문에 못 듣겠는데요? 소나기가 아니고 무슨 스콜 같아.

 

 

어쨌든 조만간 그칠 것 같긴 하니까 잠깐만 앉아서 기다리죠 뭐.”

.”

 

 

환한 대낮이라는 시간대가 무색하게, 창고 벽 위에 높이 난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검푸른 회색빛이다. 태형이 멍하니 그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 정국은 곤룡포를 벗어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볏짚 위에 깔고 그 위를 손으로 통통 두드렸다. 여기 앉아요. 생각보다 푹신푹신해요.

 

 

우리 꼭 그거 같다. 소나기.”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그거?”

형은 뭐 그런 대목을 기억해요.”

 

 

어쩐지 어두운 방 안에 단 둘이 앉아 있으니 자연스럽게 손이 얽히고 얼굴이 가까워진다. 언제부터 이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된 건지. 아직 사귀자는 말도 못 들었는데. 아니 그 전에, 좋아한단 말도 제대로 못 들었잖아? 태형은 열어달라는 듯 조그맣게 제 입술을 핥는 정국에 서툴게 숨을 삼켰다. 공기와 함께, 정국의 숨이 들어찼다.

 

 

저번에도 느꼈던 건데.”

 

 

눈이 감기고, 숨이 얽히고. 심장은 간질거리고, 맞잡은 손은 뜨겁고. 한참 동안이나 정신없이 입을 맞추다 호흡이 모자라 여전히 조금 더 깊게 입을 맞춰오려는 정국을 밀어낸 태형이 발개진 얼굴로 숨을 가다듬자, 정국이 그런 태형의 가까이서 눈을 접으며 태형의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진짜 너무 가까워. 정신을 못 차리겠다.

 

 

형 키스 내가 처음이죠.”

 

 

목덜미에 닿는 정국의 손은 뜨겁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호흡은 거칠고. 그 와중에 제 코앞에 있는 정국의 얼굴이 너무 잘생기고 심장 떨려서 머리가 핑 돌았던 태형은 이내 정국의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 뭐라고?

 

 

, 연애 한 번도 안 했다 그랬나.”

, 뭔 소리야!! 누가 그래! 아니거든!! 해 봤거든!! ~전에 해 봤거든!!”

아닌데. 내가 보기엔 내가 처음인데.”

아니라니까? 나 연애 해 봤어! 키스도 많이 해 봤어! 엄청!”

내 앞에서 그렇게 말해도 돼요?”

?”

 

 

괜히 차오르는 쪽팔림에 있지도 않은 키스 경험을 늘어놓던 태형은 순간 들려온, 낮게 가라앉은 정국의 목소리에 눈을 깜박였다. 아니 잠깐만. 갑자기 우리가 왜 싸워? 우리 아까 분명히 영화 찍고 있었는데 갑자기 장르가 호러로 바뀌었잖아……. 태형은 어……. 하고 말꼬리를 늘였다. 그게, 그러니까…….

 

 

너도 그 전에 좋아하는 사람 정도는 있었을 거 아니야? 너 내가 처음이야?!”

 

 

그래서 태형은 외쳤다. 아니 뭐, 누구나 경험 정도는 있잖아. 우리 나이가 몇인데! 물론 태형은 처음이 맞았지만, 불과 1분도 지나기 전에 연애를 해 봤다고, 그것도 많이 해 봤다고 소리친 입장에서 갑자기 정국에게 사실은 나 네가 처음이야, 하고 실토하긴 좀 그러니까. 그리고 태형은 그 기세를 몰아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 보니까 진짜, .

 

 

너나 딱 대. 너 진짜 저번부터 느꼈는데, 너 선수지. 너 몇 명 사귀었어.”

…….”

이거 봐, 말 못하는 거 봐라. 손으로 셀 수도 없,”

그 전에 누굴 좋아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형이 좋아요.”

 

 

? 기세등등한 태도로 정국을 향해 삿대질을 하던 태형은, 그 순간 들려온 정국의 목소리에 그대로 굳었다. 하지만 제 눈앞의 태형이 그대로 굳었거나 말거나, 정국은 태형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형 만나기 전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하나도 기억 안 나요. 모르겠어요.”

…….”

형이랑 말도 안 하고 살 때, 진짜 죽을 것 같았어요. 아니 죽은 것처럼 살았어요.”

 

 

아니 그렇게 말하면 내가 또 할 말이 없잖아……. 태형은 한없이 진지한 정국의 눈에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다 대화가 이렇게 됐지? 분명 방금 전까지 되게가벼운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세찬 빗소리에 정국의 목소리와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제 심장 박동 소리가 섞여 귓가에 울린다.

 

 

태형이 형.”

…….”

진짜 좋아해요.”

 

 

진짜얘 선수 맞는 것 같은데. 태형은 그렇게 생각하며 제 손을 꼭 잡아 오는 정국에 혀를 깨물지 않기 위해 이를 물었다. 아 어떡해. 지금 무슨 말을 하면 심장이 튀어나올 거 같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말없이 저만을 올곧이 응시하는 태형에, 정국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 한유라 좋아한 적 없어요. 입학한 이후로 형만 좋아했으니까. 그런데,”

…….”

형한테는 그냥 내가 한유라 좋아하는 줄 알았던 게 더 나았던 걸 수도 있어요.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면 형은 부담스러울 거니까.”

아닐 걸. 네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으니까.”

…….”

나도 너랑 같은 생각 하고 있거든.”

지금 당장 형 눕히고 키스부터 하고 싶다고요?”

아니, 잠깐만.”

 

 

지금 우리 되게 진지한 분위기였잖아. 태형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정국을 제지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물론 그것도 좋고 다 좋고 좋은데……. 그 전에 풀어야 할 게 있다. 태형은 진지한 눈으로 정국의 팔을 잡았다. 그래. 이거였다. 아까부터 뭔가 계속 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이유. 아직 풀지 못한 오해. 제 소원은, 정국과의 오해를 풀고, 다시 친하게 지내게 해 달라는 거였다. 그냥 모든 걸 없었던 것처럼 덮어 두는 것이 아니라.

 

 

정국아, 나는 유라를,”

형 입에서 한유라 얘기 나오는 거 싫,”

아 그냥 쫌 들어 이놈시키야!”

 

 

태형이 확 몸을 일으켜 정국의 두 팔을 잡았다. 한순간에 태형에게 두 손을 결박당한 정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정국을 보며, 태형이 말을 이었다.

 

 

나 유라 좋아했어. 맞아.”

…….”

그런데, 그것보다 널 더 좋아했어.”

?”

유라가 너 좋아한다는 거 깨닫고, 바로 포기했다고. 유라는 포기할 수 있었는데, 너는 포기가 안 돼서. 그게 그 때는 그냥 너랑 지낸 시간이 길고 네가 너무 좋은 후배라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

내가 널 좋아해서 그랬던 거야. 네가 너무 좋아서, 너는 도저히 못 잃겠어서.”

 

 

말했다. 혹시 말하고자 하는 걸 다 말하지 못할까 봐, 제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까 봐 숨도 쉬지 않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말한 태형이 말을 마치고 숨을 들이쉬었다. 정국은 그런 태형을 쳐다보며 멍청히 눈을 깜박이고 있었고.

 

 

, 맞다 그리고…….”

…….”

초밥 그거 너랑 내 거였어. 유라 거 아니고. 너랑 나랑 단 둘이! 자취방에서! 오순도순! 나눠 먹으려고! 산 거였다고.”

 

 

진짜 다 말한 것 같은데. 말을 마친 태형이 정국의 팔을 놓고 다시 정자세로 앉았다. 이제야 좀 속이 시원하네. 태형이 뿌듯하게 웃었다. 아직 제 말이 정리가 채 다 되지 않은 듯, 정국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여전히 멍하니 눈을 깜박이고 있는 정국에 태형이 손바닥을 쫙 펴서 정국의 눈앞에 흔든 순간이었다.

 

 

저기요. 정신 좀 차리…….”

, 진짜 좋다.”

 

 

정국이 제게 뻗은 태형의 손을 잡아 그대로 잡아끌어 태형을 끌어안았다. 눈 깜짝할 새에 정국에게 안긴 태형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픽 웃었다. 맞닿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정국의 심장 박동이, 꼭 저만큼 빠르게 뛰고 있어서. 정국이 손을 올려 한 손은 태형의 뒷머리에, 한 손은 태형의 허리에 가져다 대고 꼭 끌어안았다. 정말, 바람 한 톨 들어갈 공간이 없도록.

 

 

형은, 형은 진짜 내가 얼마나 형을 좋아하는지 모를 거예요.”

…….”

진짜 많이 좋아해요.”

정국아.”

 

 

나도 진짜 많이 좋아하는데.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네. 태형은 그렇게 생각하며 정국을 마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정국아, 내가…….

 

 

현대로 가면…….”

…….”

내가 먼저 고백할게.”

…….”

정식으로.”

 

 

좋아한다는 말은 전정국이 먼저 했으니까 사귀자는 말은 내가 하면 되지. 고민할 거 뭐 있나. 태형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떼고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은 할 말을 잊은 듯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고, 그 얼굴에 태형은 씩 웃었다.

 

 

그런데 너 진짜 아까 나한테 키스하고 싶었어?”

. 왜요?”

 

 

정국의 동그란 얼굴이 의아함으로 가득 찬다. 태형은 아니 뭐 그냥, 하고 말꼬리를 늘였다. 정국의 물음표를 가득 담은, 의아한 시선이 따라붙는다.

 

 

내가 그랬잖아.”

…….”

나도 같은 생각일 거라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정국의 입술이 닿는다. 태형은 빙긋 올라가는 입꼬리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

 

 

.”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태형이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태형은 채 뜨지 못한 눈으로 제 얼굴과 몸에 돌돌 감긴 이불을 걷어냈다. , 허리야……. 태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침대에서 잘 자다가 이게 갑자기 무슨 봉변이야?

아직 잠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태형이 볼을 긁었다. 아 진짜 얼마나 요란한 꿈을 꿨길래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그러나 멍하니 읊조리던 태형은, 그 순간 훅 하고 들어차는 기시감에 말을 멈췄다. 아니, 잠깐만. 나 방금 뭐라고,

 

 

침대?!”

 

 

졸음에 눌려 한없이 무거웠던 눈꺼풀이 번쩍 뜨이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태형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 한 눈에 들어오는 조그마한 채광 좋은 방. 옆에는 제가 항상 옆에 두고 잠드는 핸드폰, 익숙한 벽지, 익숙한 가구, 익숙한…….

 

 

내 방…….”

 

 

그러니까 태형이 방금 눈을 뜬 이곳은, 바로 익숙하다 못해 눈을 감고도 훤히 그려낼 수 있는 2018년의 현대. 제 방이었다.

 

 

 

+

드디어(!) BACK TO 현대!!

 

완결까지 한 편!

 

https://milkteaxger.postype.com/


티스토리 개편 후 글쓰기가 불편해져서 포스타입으로 연재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ㅠㅁㅠ

조선로맨스는 완결이 얼마 남지 않아서 (18화 완결) 여기에 끝까지 올려드릴 생각이지만 새로운 글이나 외전 등은 포스타입에 올라오게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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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내가 편의점 프로모션 중에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별로 안 궁금한ㄷ,”

“2+1이야. 2+1.”

아니 그러니까 별로 안 궁금,”

하나만 사면 될 걸 괜히 손해 보는 느낌에 두 개 사게 만들잖아!! 그래서 괜히 돈 더 쓰게 만들고!!”

…….”

그런데 지금 내 기분이 그래.”

…….”

“2+1이네?”

 

 

정국과 태형은 방 안에 나란히 앉아 배우 애호아니 유아인의 성대모사를 하고 있는 지민을 멍하니 쳐다봤다. 낮에 경회루의 누각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눠본 결과, 아무래도 소원나무의 영향으로 정국과 태형, 그리고 지민이 조선에 떨어진 것 같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아니 정국과 태형이 내린 현재까지의 결론이었다. 왕의 소원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 나무가 정말 영험한 것 같다던 신하의 말로 미루어 보아, 그리고 정국과 태형, 왕과 왕비의 접점이 그 소원나무인 것으로 보아 소원 나무가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된 것이다.

 

 

그리고 제 소원은 이루어졌거든요. 저는 태형이 형이 나 좋아하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 형은 소원 뭐 빌었어요?”

, , ?”

 

 

태형은 말을 더듬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소원이라. 태형이 정국의 눈을 피해 눈을 굴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소원 나무에 빈 소원은 한 개가 아니었으니까. 첫째는 밀당 같은 거 안 하는 애인 생기게 해 주세요. 둘째는 이왕이면 그 애인이 예쁘고 귀엽고 청순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셋째는

 

 

, 나 너랑 다시 친해지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정국이와의 오해를 풀고 다시 친해지게 해 달라고 빌었었다. 오해를 다 풀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인사만이라도 하는 사이는 되게. 솔직히 첫 번째랑 두 번째 소원은…….

 

 

진짜요?”

, …….”

 

 

왠지 잔뜩 감동한 것 같은 정국의 눈빛을 슬쩍 피하며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심에 이제 약간 조금 찔리긴 한다. 솔직히 첫 번째 소원이랑 두 번째 소원이 정국을 생각하고 빈 소원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의도치 않게 밀당 안 하는 여자친구가 아닌 애인이라고 빌었을 뿐. 맹세컨대 의도한 건 아니었다. 누가 알았겠는가, 굉장히 오래 됐다던 그 나무가 그렇게 열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 줄. 그런데 사실 그렇게 따지면 그 소원도 이루어진 건 맞긴 했다. 전정국. 특기는 (김태형에 한해) 밀기는커녕 인간 전자석 수준으로 끌어당기기, 취미는 예쁘고 귀엽고 청순하기. 잘생김은 보너스, 다정함과 롤츠력은 부가서비스. 태형은 소원나무의 칼 같은 정확함과 소원 이행력에 절로 끄덕여지는 고개를 멈출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로또 맞게 해달라는 소원도 빌걸.

 

 

…….”

정국아…….”

저기 두 분 꽃가루 날리는데 바쁘신 와중에 죄송한데요.”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있거든요. 정국과 태형이 서로를 쳐다보며 서서히 가까워지던 찰나, 꼴깝 애정행각을 지켜보고 있던 지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끼어들었다. , 제가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제 앞에서는 좀 작작 해주셨으면 해서요.

 

 

아니 그리고 현대로 돌아갈 방법을 찾은 것 같다며. 그럼 그 소원 나무가 너네 소원을 들어주려고 조선시대로 끌고 왔다는 거야?”

그런 거 같아.”

그럼 나는 왜?!”

 

 

지민이 사자후를 내질렀다. 나는 왜?! 너네는 워크샵 가서 소원 빌었다며. 그럼 나는 왜 떨궈진 건데? 할아버지네 집 가서 낮잠 자고 있던 나는 무슨 죈데? 진짜 2+1이야? 진심이야? 요즘엔 소원에도 프로모션이 있어? 지민이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손을 휘젓자 그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정국이 문득 툭 내뱉었다.

 

 

벌 받은 거죠.”

?! 무슨 벌?!”

 

 

지민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무심하게 말하는 정국을 돌아봤다. 무슨 벌? 그리고 정국의 말에 의문을 품은 것은 태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껏 억울해 보이는 지민의 표정과는 상반되게, 정국은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태형이 형이 저한테 개새끼라 그랬다면서요. 안 그랬다는데?”

?”

…….”

 

 

그리고 정국의 말에 지민의 표정은 의아함에서 어이가 잠시 출타한 얼굴로, 태형의 얼굴은 의아함에서 시선을 한껏 내리깐 얼굴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지금 정국이 하고 있는 말은 아까 낮에 누각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나온 주제였다.

 

 

형 근데 정말 저한테 개새끼라 그랬어요?

? 그게 무슨 말이야?

지민이 형이 그러던데요.

아닌데?! 무슨 소리야!

 

 

그리고 태형은 속으로 조용히 뇌까렸다. 용서해라 친구야. 사랑이 먼저인가 봐.

 

 

그게 무슨아 설마 너 그 날 말하는 거야? . 얘 좀 봐라. 김태형이 너를 얼마나 욕했는데! 이 개새끼, 나쁜 새끼 이러면서…….”

, 내가 언제 또 새끼라 그랬냐그냥 나쁜 놈그랬지…….”

. 김태형. 당신의 양심 혹시 어딘가에 떨어트리진 않으셨습니까? 저기 주인을 잃은 양심이 길가에서 울고 있네요? , 전정국아. 속지 마라. 김태형 이런 놈이다.”

뭐 어때요. 개새끼라 그랬든 씨발 새끼라 그랬든.”

아니 정국아 내가 씨발 새끼라고까진 안 했,”

지금 우리 애기면 됐지. 그죠?”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정국의 웃는 얼굴에서 어딘가 모를 서늘함을 느꼈다.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것은 비단 저뿐만은 아니었던 듯, 아까까지만 해도 한껏 억울함을 표현하며 언성을 높였던 지민도 갑자기 입을 합 다물고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우리 정구기학창시절에 껌 좀 씹었었나? 포스가……. 태형은 저도 모르게 그런 정국의 팔에 살짝 손을 올렸다.

 

 

아니 그래서, , 뭐냐. 현대로 돌아갈 방법을 찾은 거 같다며. 그게 뭔데?”

, 맞아. 그 때 말 하다 말았지. 여기 이거요.”

 

 

잠시간의 시간차 후에 지민은 더듬거리며 말문을 텄고 그에 정국은 품속에 고이 챙겨온 서책을 꺼냈다. 지민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 서책을 쳐다봤다. <日省錄>. 태형은 곧은 서체로 힘 있게 쓰인 글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어쩐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게 우리를 현대로 다시 돌아가게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물론 그 세 글자 중에 태형이 알고 있는 글자는 날 일()자 밖에 없었으므로 뭐라고 써져 있는지 읽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태형이 가만히 속으로 세종대왕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일성록?”

……?”

아니, 일성록이라고 쓰여 있길래.”

 

 

멀뚱히 책을 쳐다보던 지민이 곧이어 아무렇지도 않게 한자를 읽어 냈고 그와 동시에 태형과 정국의 동그래진 눈이 지민을 향했다. 뭐야? 너 이거 읽을 줄 알아? 잠시간의 정적 후에 태형이 눈을 깜박이며 지민을 향해 말했고 지민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뭐……. 나 저번 학기에 한자 수업 들었었잖아.”

아 맞아. A+맞은 유일한 교양?”

 

 

지민은 멋쩍은 듯 볼을 긁었고 태형은 금세 어느 날 갑자기 저와 함께 신청했던 꿀교양을 걷어차고 웬 한자 강독 수업을 덜컥 신청했던 지민을 떠올렸다. 저게 갑자기 허파에 무슨 바람이 들었기에 한자 교양을 신청하나 했었는데.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태형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민을 대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지민의 말에 정국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자 교양?”

? …….”

그거 우리 사촌 누나가 저번 학기에 들었던 거 같은데…….”

 

 

그리고 이어지는 정국의 말에, 태형은 정국을 쳐다봤던 눈을 다시 지민에게로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지민의 얼굴은 어느새 새빨개져 있었고 그와 동시에 제 머릿속에서 가볍게 맞춰지는 퍼즐조각에 태형은 입을 벌렸다. 너 아직도 포기 안 했어?!

 

 

아니! 아니 우연의 일치거든!!”

우연의 일치 좋아하시네. 너 그 교양 나랑 같이 듣겠다고 피씨방까지 갔었잖아!”

형 다음 학기에 나랑 교양 같이 들어요.”

그럴까? 가 아니고! 박지민 너 나한텐 포기했다고,”

어차피 전공도 같은데 시간표를 아예 똑같이 맞추는 건 어때요?”

좋아가 아니고!! 아 정국아 잠깐만!!”

 

 

태형은 눈을 크게 뜨고 지민에게 따지는 자신을 방해하는 정국을 손을 들어 제지했으나 태형의 손은 곧 정국의 손에 의해 깍지 끼워져 내려졌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련의 행동에 태형은 마치 손에 장난감을 쥐어준 아기마냥 온순해져 눈을 깜박였고 정국은 그런 태형에게 웃어 보였다. 다음 학기부터 형이랑 매일 붙어 있을 수 있겠다.

 

 

…….”

 

 

태형은 정국에게 약했다. 그 중에서도 정국의 얼굴에 약했고, 그 중에서도 정국의 웃는 얼굴에 약했다. 고로 지금 저렇게 제 손을 부드럽게 잡아 깍지를 껴 오며 저를 향해 다정하게 웃는 정국은, 한순간에 태형의 머릿속에서 정국 외의 다른 것을 모두 깔끔하게 녹여버리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결국 태형은 잠시 후 정국에게 손을 내맡긴 채로 얌전히 앉아 지민이 일성록을 살펴보는 것을 잠자코 응시했다. 물론 겉으로만 잠잠했을 뿐, 태형의 심장은 튀어나올 것처럼 뛰고 있었다.

 

 

왕비가 왕을 안 좋아했나봐?”

그게 거기 나와 있어요?”

왕이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것 같은데…….”

 

 

지민은 가만히 책을 훑어보더니 이내 한 대목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그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아니 지켜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

라고 쓰여 있어.”

 

 

일기를 쓰랬더니 웬 연애편지를 써 놓으셨더라고. 짧게 덧붙이며 지민이 손가락을 움직여 글자의 마지막 부분을 꾹 눌렀다. 여기서 끊긴 걸로 봐서, 이 이후에 너희가 이곳에 떨어진 것 같은데.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정국과 태형은 그런 지민을 응시했다. 뭐야, 그 눈빛은? 또다시 찾아온 정적에 지민이 미간을 좁혔고 이어 태형이 음, 하고 뜸을 들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금 소설 쓴 거 아니지?”

…….”

, 아니. 너한테 이런 면이 있는 줄은 또 몰랐어가지구.”

 

 

처음으로 쫌 있어 보였어. 태형이 천천히 말을 잇자 정국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중학교 때부터 형이 우리 누나 쫓아다니는 거 봤는데, 지금이 가장 멋있어 보였어요. 그리고 지민은 그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미묘한 뉘앙스에 미간을 좁혔다 이내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미간을 풀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현대로 돌아가는 거니까.

 

 

그런데 잠깐만. 왕비가 왕을 안 좋아했다고? 아닌데? 상궁 말로는 왕이 왕비를 찾지 않는다 했어. 한 희빈에게 빠져서.”

대충 훑어보기만 했지만 희빈 이야기는 여기 없던데? 왕비에 대한 사랑만 절절해 보였어. 아까 말했잖아. 연애편지 읽는 줄 알았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하고 말을 이으려던 태형은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순간 말을 멈췄다.

 

 

달에 한 번 정도 찾으셨습니다.’

달에 한 번?’

.’

한 달에 한 번?’

그러하옵니다.’

 

 

언젠가 상궁과 나누었던 대화. 왕의 총애를 받아 기세등등한 애첩이라면서 정작 왕은 달에 한 번밖에 찾지 않았다니 의아했었던.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태형은 이내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그 때 상궁도 그랬었다. 한 희빈의 아비가 조선 제일의 세도가이니 주상께서 내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 희빈을 찾는 것 같다고. 그럼 그게 정말, 정말로 왕이 왕비에게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 희빈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

아니, 전에 상궁이 그랬거든. 한 희빈의 아비가 조선의 세도가라고. 그래서 내키지 않음에도 부러 한 희빈을 찾는 것 같다고.”

그럼 형 말은 왕이 왕비를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찾지 않았다는 거예요? 한 희빈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아닌가?”

내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한 희빈의 처소에 간 건 그렇다 치고, 굳이 왕비를 멀리할 필요까지 있나? 차라리 왕비의 아버지가 세도가라 사랑하는 첩한테 못 가는 거면 모를까.”

.”

 

 

그것도 또 맞는 말이긴 하네. 정국의 말에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뭐지. 그러나 정국과 태형의 고민은 이내 지민의 목소리에 의해 흩어졌다. 그게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왕의 소원이지.

 

 

전정국 소원 Clear. 김태형 소원도 Clear. 내가 봤을 때 이 소원 나무는 관련된 사람들의 소원을 다 이루어 주는 게 목표인 거 같거든? 그러면 왕이랑 왕비 소원이 이루어지면 우리도 자연스럽게 현대로 돌아가지 않겠냐고.”

그렇지…….”

그럼 정리해 보자. 왕의 소원은 타임슬립?”

그건 아닌 거 같은데.”

그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 둘이아니 근데 이 사람 좀 음흉한데. 단 둘이 뭘 하려고.”

, 부부사이에 뭐가 또 음흉이야!”

 

 

괜히 제 발이 저린 태형은 조그맣게 외쳤고 지민은 그런 태형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그럼, 왕의 소원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라고 치고.

 

 

왕비는? 뭐 들은 거 없어?”

 

 

마마의 마음이 전하께 전해졌으면 좋겠다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하셨던 것밖에는 생각이 나질 않사옵니다.’

마마께서는 늘 성심은 마마를 향해 있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마마의 마음이 주상께 닿았으면 좋겠다 하셨지 않으셨습니까.’

 

 

지민의 말에, 태형은 언젠가 (역시나) 상궁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왕비의 소원. 왕비의 마음이 왕에게 전해지는 것. 제가 상궁에게 왕비가 간절히 바랐던 것이 있을까 물었을 때, 상궁은 그리 답했었다. 태형은 입을 열었다. 왕비의 마음이, 왕한테 전해지는 거.

 

 

?”

상궁이 그랬어. 왕비가 평소에 입버릇처럼 그랬다고. 왕의 마음은 자기를 향해 있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자기 마음이 왕한테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뭐야, 그럼 서로 좋아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 그럼 왜…….”

글쎄.”

 

지민의 말에, 정국은 어깨를 으쓱했고 태형은 그런 정국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남 일 같지가 않아서. 서로 좋아하는데 모종의 이유 때문에 지구 내핵까지 파고들 정도로 삽질을 하고 있었던 게, 꼭 저와 정국을 보는 것 같아서. 태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구나……. 왕이라고 다를 거 없네.

 

 

그런데 어떻게 이뤄줘야 할지 모르겠네. 결국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되는 거 아니야.”

그러게요.”

그 소원나무에 가 보면 뭔가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물론 소원나무가 호랑이는 아니고 소원나무를 잡을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맥락은 같다. 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돌아오고 범인은 이 안에 있고 진실은 언제나 하나라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태형의 말에 정국과 지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가 봐서 나쁠 건 없을 것 같긴 해.

 

 

그럼 조만간 그 절로 행차를 가자고 할게요.”

……. 이제야 좀 뭔가가 풀리는 거 같네.”

 

 

긴장이 풀린 듯, 지민이 바닥에 스르르 풀어졌고 태형 역시 뻣뻣이 세우고 있던 허리를 누그러트렸다. 그러자 정국이 여태껏 태형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빼내 태형의 허리를 살살 쓸었다. 허리 아파요? 주물러 줄까요? 정국의 다정한 말에 태형은 괜히 홧홧해져 오는 얼굴을 조금 더 푹 숙였고. 그러나 그 둘의 다정한 투샷에 지민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허리가 왜 아픈데.”

니가 뭔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그거 아니다.”

내가 뭔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거 같은데?”

진짜 아니에요. 아직은.”

아직?”

 

 

아직.’ 태형은 그 익숙한 부사에 더욱 더 홧홧해지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이를 꾹 물었다. 아직이라니. 아직이라니?! 그럼 뭐 언젠가는, 허리 아플 일을 하겠단 소린가!? 아니 물론 뭐, 언젠가는 하긴 하겠지만, 아니 그런데 우리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 태형은 그 짧고 단순한 단어가 일으킨 한순간의 파동에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진짜 알고 싶지 않다.”

그러면 물어보질 말든가요.”

내가죄인이다…….”

 

 

시발 애인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지민은 남몰래 울음을 삼키며 제 자신을 쓰다듬었다. 세상은 어쩜 이다지도 불공평한지. 쟤네는 소원 이루어 주고, 나는 왜 소원 안 이루어 줘요. 현대로 성공적으로 돌아가고 나면, 나도 그 소원 나무한테 소원이나 빌어 볼까. 소원 뭐 빌지. 뜨끈한 바닥에 벌러덩 누워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생각의 가지를 뻗고 있던 지민은 가지의 끝이 그 생각까지 닿은 순간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야?!”

나 생각났어.”

?”

 

 

그리고 이어, 지민은 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제 소원. 전정국과 김태형이 워크샵에 가서 나무에 빌었다기에 전혀 생각해내지 못했던 제 소원. 지민은 차오르는 억울함에 가뜩이나 도톰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까, 지민은 소원을 빈 적이 있었다. 나무가 아니라, 할아버지네 집 근처에 있는 돌무더기에.

 

 

우리 망개, 여기다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단다.’

 

 

지민은 인자하게 웃으며 말씀하시던 할아버지를 두둥실 떠올렸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 돌무더기에다 대고 소원을 빌었던 제 자신도. 아니 시발 나는 그 돌무더기가 소원나무랑 칭구칭구인 지 몰랐지! 게다가 하필이면 그 때는, 한 학기를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자 교양수업에 출석하며(사실 당연한 것이다) 영혼을 쏟아 부었음에도 마음 속 그녀와 핑크빛 기류를 형성하지 못한 절망감에 사랑이고 뭐고 필요 없으니 부와 명예를 가지겠다고 결심한 때였다. 그러니까, 적게 일하고 많이 벌게 해주세요. 우연히 성공하게 해주세요. 아무런 노력 없이 성과를 이루게 해주세요. 옷으로 출세하게 해주세요. 등이 제 하나뿐인 소원이었던 때. 지민은 여전히 저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태형과 정국에게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특채로 등용했다!’

내가 왜 니 옷고름을 쳐 매 주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건지 설명해봐.’

 

 

왕비…….”

 

 

낮잠 자다 일어나 보니 왕의 최측근이 되었다.(아무런 노력 없이 우연히 성공) 그리고 맡게 된 것이 왕비의 옷을 관리하는 직무.(옷으로 출세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비록 가끔 야근을 하긴 하나 그다지 힘들지는 않고 궁궐에 살며 특별히 신경 써 주는 태형 덕에 맛있는 반찬에 좋은 옷을 입고 호강하는 제 자신(적게 일하고 많이 벌게 해주세요). 지민은 하나하나 기억을 되짚어 손을 꼽으며 제가 빌었던 소원의 달성률에 손을 떨었다. 그러니까, 제가 조선에 떨어진 것은 2+1 소원 프로모션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그러니까,

 

 

씨발…….”

 

 

바로 놀랍고도 신묘한 힘을 가진 영험한 돌에 소원을 빈 제 자신 때문 덕분이었던 것이다.

 

 

+


https://milkteaxger.postype.com/


티스토리 개편 후 글쓰기가 불편해져서 포스타입으로 연재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ㅠㅁㅠ

조선로맨스는 완결이 얼마 남지 않아서 (18화 완결) 여기에 끝까지 올려드릴 생각이지만 새로운 글이나 외전 등은 포스타입에 올라오게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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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헷빛은 따스하고, 새들은 부드럽게 조잘대는 아침. 태형은 눈을 감은 채로 이불 속에서 뒤척였다. 조금만 더 자고 싶은데……. 행복한 늦잠을 위해 태형이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다시 꿈속으로 빠져들려는 찰나, 태형은 바로 옆 매우 가까운 곳에서 뒤척이는 기척을 느꼈고 곧이어 조금 묵직한 무게감이 태형의 가슴 위로 닿았다. 뭐지? 따뜻하고 포근한데.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한 태형은 조금 뒤척이다가 이내 무게가 느껴진 쪽으로 돌려 누웠다. 여전히 눈은 감은 채였다. 평소 무언가를 끌어안고 자야만 잠이 드는 버릇이 있는 태형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쪽으로 손을 뻗었고 이내 그 온기가 제 자신을 품어 안는 것을 느꼈다. 포근하고 따뜻하고 안정적인 느낌. 태형은 저도 모르게 잠결에 미소지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딱딱한 게 꼭 커다란 곰 인형 같…….

 

……!”

 

아니, 잠깐. 딱딱? 태형은 그 생각과 함께 반짝 눈을 떴다. 그리고 뜨자마자 숨을 멈췄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몽롱했던 정신이 단번에 맑아졌다. 제 코앞에, literally 정말 문자 그대로 제 코 1mm 앞에 있는 정국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찼기 때문에. 엄마야. 태형은 간신히 비명을 삼키고 눈을 깜박이다 이내 제가 정국의 품 안에 단단히 안겨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리고 제 자신도 정국을 꼭 끌어안고 있다는 것 역시.

뭐야 왜 네가 여기 있어?”

 

그래서 태형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아니, 같이 자는 건 자는 건데, 얘는 왜 날 이렇게 꼭 끌어안고 있고 나는 왜 얘를 이렇게 꼭 끌어안고 있는 거지? 밤새도록 이러고 있었던 건가? 태형은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입술이 맞닿을 것 같은 거리의 얼굴에 제 심장이 아침부터 미친 듯이 뜀박질에 시동을 거는 것을 느꼈다. 정국의 얼굴은 아침부터 보기엔 좀 버거운 얼굴이라고 생각하며. 그러니까 안구 말고 심장에(정국의 얼굴은 눈 건강에는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태형의 목소리에, 정국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태형이 형…….”

 

잔뜩 잠긴 목소리를 하고, 정국이 잠결에 웅얼거리며 웃었다. , 미친. 목소리 왜 저렇게 섹시해. 태형은 숨을 참고 눈을 깜박였다. 전정국 잘생긴 거야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우리 집 탄이도 알고 중동에 무함마드도 아는 사실이지만 이렇게 잠에서 막 깨어나 부스스한 얼굴과 목소리까지 섹시할 필요가 있을까? 누구 좋으라고? 그러나 태형이 그런 정국의 목소리에 뭐라 답하기도 전에, 정국은 태형은 끌어안았던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어 태형을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태형의 코엔 정국의 가슴팍이, 태형의 목덜미엔 정국의 손이 닿았고. 제 뒷목과 윗등을 감싸 안은 정국의 손은 기분 좋게 뜨거웠고, 제 코에 닿은 정국의 가슴팍에선 두근거리는 정국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태형은,

 

…….”

 

지금 이 순간 부정맥에 걸려도 이상할 게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잘 잤어요?”

 

시발, . 진짜. 그렇게 웃지 마. 그렇게 잠긴 목소리로 섹시하고 나른하게 말 걸지 마. 하이틴 드라마에서 뜨거운 첫날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 아침 햇빛을 조명처럼 받으며 아가리 똥내 따윈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처럼 키스하고 모닝 섹스 한 번 더?를 외치는 남주인공처럼(이런 드라마는 없다) 웃지 말라고! 태형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뜀박질을 하고 있는 제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안 돼. 이렇게 아침부터 부정맥으로 하나님 얼굴을 뵙고 오고 싶진 않았다. 태형은 살아야 했다. 살아서 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태형은 슬쩍 정국을 밀어냈다. , , 잠깐만.

 

왜요…….”

잠깐만 이것 좀 풀어봐. 누가 들어오면 어떡해.”

누가 들어오면 어때요? 부부가 서로 좀 껴안고 있겠다는데. 상궁들은 더 좋아할걸요.”

, 부부…….”

 

태형은 정국의 가감 없는 단어 선택에 눈을 빠르게 깜박였으나 그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부부도 맞고, 상궁들이 좋아할 거라는 것도 맞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제 심장과 아침이라 퉁퉁 부었을 제 얼굴이었다. 그 전에야 밤새도록 안주를 집어먹어 퉁퉁 부은 얼굴로 정국과 마주앉아 해장 라면을 끓여 먹어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지금은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고! 그러나 그런 태형의 마음을 알 턱이 없는 정국은 태형의 바르작거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태형이 바르작거릴수록 태형을 더 꼭 껴안아 올 뿐이었다. , 가만히 좀 있어 봐요.

 

아침부터 이러고 있으니까 좋다.”

너 지금 심장 엄청 빠르게 뛰어.”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친 듯이 전력질주를 하고 있는 것이 제 심장 혼자뿐인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일까. 태형은 제 코에 닿은 정국의 가슴팍에서 그대로 느껴지는 정국의 심장 박동에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 없었다. 정국이도 지금 나랑 비슷한가 봐. 태형은 저도 모르게 눈을 스르르 감으며 정국의 품 안으로 조금 더 깊숙이 안겼다

 

.”

 

, 그런 제 자신에 화들짝 놀라 정국을 확 밀쳤다. , , 미쳤나!! 나도 모르게 그만!! 태형은 저도 모르게 끼를 부린 제 자신에 놀란 참이었다. 그리고 졸지에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채 태형에 의해 가슴이 밀쳐진 정국은 놀라 눈을 깜박였다. 왜 그래요?

 

, 일해야지! ! 지금 해가 중천에 떴어!!”

무슨…….”

여봐라!! 거기 밖에 누구 없느냐!!!”

 

아침부터 이런 분홍빛 기류를 맞이하기에는 아직 심장의 준비가 덜 된 태형이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부르자 그제야 조용했던 문 밖에서 예, 마마.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태형은 전하께서 가신다고 하신다!!고 외쳤다. 아직 이불 속에서 태형을 쳐다보고 있던 정국은 얼빠진 표정을 지을 뿐이었고.

 

세숫물을 들일까요?”

, ! 그래!”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문 밖에서 상궁의 대답이 들려옴과 동시에, 태형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이 정신없는 아침을 끝낼 수 있겠구나. 그러나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고 했던가. 태형이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태형은 어느새 일어나 앉은 채 제 옷깃을 끌어당긴 정국에 의해 눈 깜박할 새도 없이 정국의 앞에 마주 앉게 되었다. 그리고, 정말 한순간이었다. 그러니까 갑자기 일어난 일에 태형이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제 이마에 정국의 입술이 닿은 것은.

 

?”

이 정도는 뛰는 거 아니죠?”

…….”

그럼 이따가 봐요.”

 

태형이 뭐라고 반응할 새도 없이, 정국은 다시 한 번 빠르게 태형을 꼭 껴안고 때마침 세숫물을 들고 들어온 상궁에게 손짓을 한 뒤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그런 정국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 상궁은 정국이 방을 나서고 문이 닫히자마자 태형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마마. 어찌 전하께서 그냥 가십니까?”

? 그거야 할 일 하러 가는 거지.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

…….”

? 무슨 일 있어?”

, 혹시 전하와 언쟁이라도 하셨나 해서…….”

 

그렇게 말하는 상궁의 얼굴이 심상치 않아 보여 태형은 상궁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무슨 일이 있냐 물었고 그런 태형의 말에 상궁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리고 이어진 상궁의 말에,

 

아니, 전하의 용안이 조금 붉어져 계셔서 무슨 일이 있으신가 하고요.”

 

태형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 없었다.

 

*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하였습니다. 그 뜻은,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진다는 뜻이지요!’

 

태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에 안심하며 제가 알아 온 푸라토사랑법을 알려주던 상궁의 얼굴을 떠올렸다. 상궁이 직접 발품을 뛰어 요즘 저자에서 가장 유행에 민감하다는 人徶(인별) 金認士(김인사) 선생의 저서 [薰女生情]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薰女生情]

 

추완(椎關): 남녀 단계란 무릇 추천(鞦韆:그네)과 같으니 계속 밀기만 해서도, 계속 당기기만 해서도 안 된다. 적절한 때에 다가가고, 적절한 때에 사내를 애태워야 진정한 薰女라 할 수 있다.

아이건댁(娥利健宅): 눈을 마주쳐 사내의 마음에 예쁘고 이롭고 튼튼한 집을 짓는 방법으로, 눈이 마주치면 눈꼬리를 접어 웃어 사내의 마음에 불을 지펴야 진정한 薰女라 할 수 있다.

교태(嬌態): 사내가 여인의 교태에 약하다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을 터. 허나 이론만 알고 실전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야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런 고로 필자는 교태의 한 가지 예시를 제시하고자 한다. 일명 너구리기술과 곰돌이 한 마리기술이다. 번외로 일합일(一合一)’ 기술도 있다.

[너구리 기술]

 

: 少女 요즈음 눈길이 가는 사내가 생겼습니다.

: 허어. 그것이 누구인고.

: !

: …….

: 구리!><

 

[곰돌이 한 마리 기술]

 

: 곰돌이 한 마리로 육행시(六行詩)를 해 보겠소. 운을 띄워 주시겠소?

: .

 

잠시만. 사실 상궁이 가져온 책자는 꽤 두꺼워 그 뒤에도 몇 개의 기술들이 더 나열되어 있었으나 태형은 차마 더 펼쳐보지 않고 덮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건댁법까지는 그럭저럭 해 볼만 하다고 생각되었으나 그 이후 교태법에 나열되어 있는 것들은 도저히 따라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태형이 서책을 들고 손을 잘게 경련하거나 말거나, 상궁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은 일합일 애교가 좋을 것 같다며 추천까지 해 주고 있었고 그래서 태형은 그런 빛나는 상궁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이 대화를 끝내고자 했다.

 

, 그래. 뭐 나중에 전하를 만나게 되면 해 보,’

아뇨, 마마. 행동하는 지성인이 되셔야 합니다.’

?’

여태껏 항상 전하께오서 마마를 찾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이젠 마마께서 전하께 가실 때가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토록 만나기 어렵다는 인사(認士) 선생까지 친히 만나고 온 상궁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언제 다시 한 희빈이 전하를 홀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찾아온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상궁은 태형이 뭐라 하기도 전에 상궁들을 불러 태형을 먹이고 씻기고 단장시켜 거의 내쫓듯 교태전 밖으로 내보냈다. 나른한 오후, 지루한 오전 정사(政事)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러 경회루를 거닐 때 사랑하는 중전이 그림같이 서 있으면 전하께오서 얼마나 행복하시겠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너무 속보이는 거 아니냐고…….”

 

태형은 잔뜩 기합이 들어가 있는 상궁의 기세에 차마 다시 교태전으로 돌아가자는 말도 꺼내지 못한 채로 경회루의 누각을 서성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왕이 이 시간에 경회루를 산책하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대놓고 이곳에 보란 듯이 서 있는 것은 아무래도 민망하잖아! 밤에 다시 만날 텐데 꼭 그새를 참지 못하고 보고 싶어서 마중 나온 사람도 아니고(맞다)! 어떻게든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려고!(그렇다) 한 시도 떨어져 있지 못하는 커퀴벌레마냥!(정답이다) 서로가 좋아 죽겠는 신혼부부마냥!(바로 그거다)

 

…….”

 

태형은 괜히 누각 아래 있는 상궁들의 눈치를 살피며 누각 가장자리로 슬금슬금 자리를 옮겼다. 아무래도 너무 민망하니까. 자신만 살짝 이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으면 정국이 산책을 나왔다가 이 밑에 상궁들은 그냥 상궁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정국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부끄럽다기보다는, 아무 이유도 없이 정국을 찾아왔다는 것이 아직은 조금 민망했으니까.

 

형 진짜…….’

…….’

짜증나네요.’

 

그렇게 누각 가장자리에 쭈구려 앉아 멍을 때리고 있자니 자연스레 정국이 떠올랐다. 현대에서 있었던 일들도. 유라의 등장 이후로 어딘가 틀어졌던 관계긴 하지만, 정국과 제 관계는 그 날을 기점으로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무너졌었다. 정국과 동방에서 마주친 그 날. 그날 이후 정국과 자신은 서로 인사도 안 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으니까. 태형은 그래서 불안한 거였다. 그토록 친하다고 생각했던 정국과 한 순간에 그렇게 틀어질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었으니까. 유라가 자신이 아닌 정국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태형은 유라를 깔끔히 포기했음에도 정국과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었다.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게 정확하겠다. 그 날, 정국은 태형의 전화를 모두 무시했고 방학이 끝난 후에도 태형과 겹칠 수밖에 없는 전공 필수 수업을 모두 신청하지 않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써 가며 태형을 피하고 태형과는 눈도 마주치려 들지 않았다. 태형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정국의 앞에서, 태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아까 전정국이 너 죽일 듯이 노려보던데.’

 

소원나무에다 소원을 빌고 버스로 돌아오는데, 동기 한 명이 슬그머니 다가와 그랬다. 그 말에, 태형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까지 할 건 뭐야? 그래도 선밴데.’ 이어지는 동기의 말에 태형은 막 버스에 오르고 있는 정국을 살짝 쳐다봤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형 진짜 짜증나네요.’ 그 날 정국의 말이 다시 귓가에 울렸다.

 

어쩔 수 없지 뭐.’

…….’

그래서 정국이랑 유라는 사귀는 거야?’

 

정국이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건 안다. 교수님이 불러 늦을 것 같다고 정국에게 보낸 문자, 제 손에 들려 있던 초밥, 그리고 제 문자대로라면 교수님의 방에 있어야 했을 시간에 동아리방에서 유라와 함께 마주친 정국과 제 자신. 모든 것이 정국이 오해를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국이 그대로 동방을 나가버리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후 정국을 뒤따라나간 태형은 정국을 찾을 수 없었다. 정국이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도 모조리 씹었으니까. 자취방에 찾아가 봤지만 정국은 애초에 자취방에는 들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것 같던데. 걔네 둘이 이상한 교양 수업 같이 듣더라.’

그렇구나.’

 

시험이 끝난 후 동아리방에서 시간을 때우다 물 마시러 나간 차에 교수님을 만났고, 교수님은 이 시간에 시험을 안 보는 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불렀을 거라며 괜찮으면 지금 볼까 물었다. 잠깐 물 마시러 나오느라 핸드폰까지 동방에 두고 나온 태형은 그대로 교수님을 따라갔고 심각한 얘기라도 할 줄 알고 정국과의 약속까지 미루게 만들었던 교수님은 태형에게 간단한 심부름을 시켰다. 그렇게 교수님의 심부름으로 인쇄소에 제본을 맡기고 나니 손목시계는 딱 정국과 만나기로 한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고 태형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초밥집에 갈 게 아니라 초밥집에서 초밥을 포장해 서프라이즈로 정국의 자취방에 가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 태형오빠, 손에 그거 초밥이에요?’

, 태형이형 대박. 한유라가 며칠 전부터 초밥, 초밥 노래 부르던 건 어떻게 알고.’

고마워요, 오빠. 오늘 저 생일이라 지금 술 마시러 갈 건데 오빠도 같이 갈래요?’

 

그러나 초밥을 손에 들고 나서야 동방에 핸드폰을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은 태형은 핸드폰을 가지러 간 동방 앞에서 유라와 후배들을 마주치게 됐다. 정국이와 어색하게 된 이후로 애들이 모여 있을 만 한 시간에는 동방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 태형은 초밥을 뒤로 숨기며 어색하게 웃었으나 이미 후배 중 한명이 태형의 손에 들린 초밥을 눈치 챈 후였고 제 생일이라며 환하게 웃는 유라와 후배들 앞에서 태형은 차마 이 초밥은 네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 초밥이야 가는 길에 다시 사가면 되지. 태형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유라에게 초밥을 안겼다.

 

생일 축하해, 유라야. 그런데 어쩌지. 나는 선약이 있어서.’

뭔데요?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저희 이제 책만 놔두고 바로 갈 거예요.’

? 안에 누구 있나? 문이 열려 있는데?’

? 아니, 나는 잠깐,’

 

핸드폰만 가지러 온 건데. 하지만 태형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갑자기 열린 동아리 방의 문과 갑자기 찾아온 정적 때문에. 태형은 순간의 정적에 자연스럽게 동방 안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 곳엔,

 

태형이 형?’

정국아,’

? 정국이 있었네?’

 

정국이 있었다. 태형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묻고 있는 듯한 정국의 얼굴, 소란스러운 유라와 후배들. 정국의 시선이 저에게서 떨어져 유라의 손에 들린 초밥에 머무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태형이 뭐라 변명하기도 전에, 정국의 시선을 느낀 유라는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 나 오늘 생일이라고 태형 오빠가 사다 줬어. 짱이지.’

, 아니,’

내 생일이라 우리 술 마시러 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 정국아?’

 

태형은 황급히 유라의 말을 가로막았으나 더 이상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사실 저 초밥은 네 것이 아니라 정국이와 내 거고, 나는 네 생일인지도 몰랐다는 말을 생일이라 잔뜩 신나 있는 유라와 후배들 앞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국의 시선이 저에게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태형은 차마 정국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어 정국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그 때, 정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 진짜,’

…….’

짜증나네요.’

 

그리고는 누가 잡을 새도 없이 동방을 빠져나갔다.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 누구도 잘못한 건 없었다. 타이밍이 안 좋았고, 모든 사건들이 교묘하게 어긋났다. 사소한 어긋남이 겹치고 물려 최악의 타이밍을 만들어냈던 것뿐이다. 동방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유라와 후배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하는 것 같았고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태형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정국을 쫓아 동방을 뛰쳐나갔지만 정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다시 동방으로 돌아와 무슨 일이냐고 묻는 후배들에게 대답해 줄 새도 없이 핸드폰을 들고 수도 없이 정국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정국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엉망진창이었다.

 

…….’

 

어쩌면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르는데. 태형은 벤치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정국에게 말하려고 했다. 나는 더 이상 유라를 좋아하지 않으니 네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좋다고. 나는 유라보다 네가 더 소중한 것 같다고. 너랑 이렇게 인사도 안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되고 싶진 않다고.

 

망했어…….’

 

그러나 이번에도 정국과 저는 어긋나버리고 만다. 오히려 새로운 오해만 생겼다. 태형은 핸드폰을 꾹 붙잡았다. 핸드폰은 제 속도 모르고 잠잠하고, 학기가 끝난 학교는 고요하다. 그리고 태형은 생각했다. 그냥, 애초부터 그 정도의 관계였던 건 아닐까.

 

…….’

 

이 정도의 오해로 어그러질 사이였다면, 애초부터 의미 없는 관계였던 건 아닐까. 이 투정엔 전화를 받지 않는 정국에 대한 원망도 조금 섞여 있었다. 그 후배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좋아하는 여자를 포기할 정도로 아꼈던 후배에게 무시당하는 기분이란. 태형은 고개를 떨궜다. 원래 끈끈했던 관계도 이토록 쉽게 망가질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애초에 정국과 제 관계가 그 정도가 아니었던 건지. 그래서 불안하다.

 

태형이 형.”

 

현대로 돌아간다면, 그래서 유라가 다시 나타난다면. 지금 조선에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른 상황들이 다시 돌아온다면. 그러면 정국과의 관계도 다시 삐거덕거리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데 이미 나는그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는데.

 

형이 웬일이에요? 여기까지 오고.”

?”

왜요. 심심해서 왔어요?”

 

언제 온 건지 제가 회상에 빠져 있는 사이 어느새 제 바로 옆에까지 다가온 정국은 태형을 보며 물었고 태형은 정국의 목소리에 빠르게 과거에서 빠져나오며 눈을 깜박였다. 정국의 얼굴이 바로 옆에 있었다. 태형은 그런 정국의 얼굴을 쳐다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럼 왜,”

너 보고 싶어서.”

…….”

 

그리고 그 순간, 저를 보고 있던 정국의 눈이 느리게 깜박여진다. 그리고 정적. 갑자기 찾아온 정적에 당황한 태형이 정신을 차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 너무 진지했나? 이거 아닌가? 이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하지? 태형이 눈을 굴렸다. 그러니까, 그냥 농담처럼 넘어가려면,

 

, 형 와서 좋지? 알아, ,”

.”

?”

좋아 죽겠어요.”

 

, , 그래? 태형은 한없이 진지한, 농담기라고는 쥐똥만큼도 보이지 않는 정국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보고 싶어서 왔단 말은 진심이 맞긴 했지만 저도 모르게 나온, 어쩌다 보니 그냥 튀어나온 말이었는데.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잖아.

 

태어나길 잘했네요,”

 

누각 밑에서 정국과 태형의 분위기를 초조하게 관전하며 지금이 바로 너구리 기술을 사용할 때라고 태형에게 마음속으로 간절히 텔레파시를 보내고 있는 상궁은 꿈에도 모르는 채로, 태형은 정국을 마주 응시했다. 그러니까 그때와는 너무 많은 것이 달라져 버렸다. 알게 된 것이 너무 많았다. 정국이 얼마나 설레게 말하는지, 얼마나 예쁘게 웃는지, 어떻게 키스하는지. 그리고 제가

 

형한테 내가 보고 싶어서 왔다는 소리도 다 듣고.”

 

얼마나 전정국을 좋아하는지.



* 薰女生情 : (薰향초  女여자   生생활  情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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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단언컨대 태형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제 자신이 눈치 없는 편에 속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형은 어렸을 때부터 삼남매의 맏이로서 부모님이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동생들을 챙겼고, 맏이 특유의 책임감과 기민함으로 어머니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형의 특성은 초··고에 진학한 이후에도 빛을 발해, 태형은 친구들 사이에서 분위기 메이커로 통했을 뿐 아니라 담임 선생님의 귀여움까지 도맡는 반의 귀염둥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래서 태형은 고등학교 때 친해진 지민이 저에게 처음으로

 

 

너 진짜 눈치 없다.

 

 

라고 했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더랬다. 아니 내가 왜!? 그러나 지민은 그런 태형의 반응에 혀를 쯧쯧 차며 그랬다.

 

 

그걸 모르는 게 눈치가 없는 거야, 멍청아.

 

 

아니, 멍청이라니?! 멍청이!? [명사] 아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출처: 표준국어대사전)?! Idiot(출처:ET-house 능률 한영사전)?! ばか(출처: 네이버 일본어사전)?! 傻瓜(출처: 에듀월드 표준한한중사전)?!?!?

그날 밤 초록창에서 멍청이의 사전적 뜻까지 검색하며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던 태형은 그러나 지금, 지민이 제게 했던 그 멍청이눈치 없는 새끼’(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았다)라는 말을 곱씹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일정 부분 수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형이 날 좋아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

김태형이, 전정국을 좋아하게 해달라고.”

 

 

변화구도 아닌 꽉 찬 돌직구. 오해의 소지라고는 일말의 여지도 없이 없애버리겠다는 정국의 의지가 엿보이는 주어와 목적어, 서술어가 완벽히 갖춰진 문장의 고백을 떠올리며 태형은 헛숨을 삼켰다. 언제부터였을까. 어떻게 좋아하게 됐을까. 좋아하게 됐을까.

 

 

그럼 형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키스해요?”

 

 

그 말을 생각하면, 그 소란했던 합궁 날부터 정국은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아니, 유라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아니면 조선에 온 후에 자신을 좋아하게 된 건가. 어쩌다가 좋아하게 됐을까. 어쩌다 보니 좋아하게 된 건가. 태형은 방 안에 멍하니 앉아 어젯밤을 떠올렸다. 정국의 입술이 닿고 난 후에 멍하니 정국을 쳐다보는 태형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정국은 태형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살짝 웃었다.

 

 

긴장 풀어요.’

?’

지금 간신히 걷기 시작한 사람한테 나랑 같은 속도로 뛰어달라고 안 해요.’

…….’

지금 형이랑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좋으니까.’

 

 

그러고는 저를 꼭 안아 오는 정국에 태형도 얼결에 그런 정국을 마주 안았더랬다. 여전히 얼굴은 뜨겁고, 심장은 뛰고 있었지만 간신히 정신을 차릴 정도는 됐다. 그건 다행이었다. 지금 와서 그 상황을 다시 자세히 곱씹어 볼 수 있었으니까.

 

 

전정국…….”

 

 

정국의 이름을 되뇌이며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제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어쩐지 아직까지 화끈거리는 것 같다. 태형은 이내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쌌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언제부터지?! 언제부터일까.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분명 정국은 유라를 좋아했었고. 그래서 그 날 과방에서 제게 화를 냈고, 그 이후로 제가 하는 연락도 받지 않았고. 제 연락을 받지 않는 정국에게 연락을 하다가, 하다가, 결국에는 포기하고 쓰린 속을 술로 달래는 동안 정국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렇게 싫어하던 선배와 함께 조선으로 떨어졌을 때는 또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그리고 그 선배가 제 첩도 아닌 정실부인인 것을 알게 됐을 땐? 합궁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땐!?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부정적인 쪽으로는 아무리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생각의 가지가 뻗어나가는 법이다. 그러니까 혹시정국이가 나를 좋아하는 게

 

 

…….”

 

 

착각은 아닐까.

 

 

*

 

 

이런 미친 디그다 새끼.”

 

 

뒷마당에서 팡팡 빨래를 널던 지민(2n, 내시)은 태형이 머뭇거리며 털어 놓은 심오한 고민에 대해 4어절의 문장으로 화답했다. 그에 태형은 그런 지민의 반응에 왜! 하고 항변했지만 지민은 고개를 저으며 잠시 멈추었던 손을 다시 놀리기 시작했다.

 

 

난 또 무슨 심각한 고민이라고.”

심각한 고민이거든?”

증전마마. 그렇게 할 일이 없으시면 소인 빨래 너는 거나 도와주시옵소서.”

그러다가 상궁들이 보면 너만 혼나.”

그르믄 끄즈스든그…….”

 

 

, 진짜! 나 진짜 진지하다니까!? 태형은 한 쌍의 커퀴벌레를 보는 듯한 지민의 눈빛에 제 절박함을 피력했다. 내가 지금 솔로인 네 앞에서 커플 염장을 부리겠다는 게 아니라, 정말 나는 진지하다고! 그러나 그런 태형의 항변에도 지민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걔가 무슨 착각을 해.”

아니, 그렇잖아. 여기 와서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고. 그러니까 그냥 의지가 되는 감정을 좋아한다고 착각한 거 같아. 걔 나 싫어했다니까? 내가 걔가 좋아하는 애 좋아해서,”

누가 누굴 좋아해?”

아니. 암튼. 그랬는데 이렇게 갑자기 날 좋아하게 된다는 게 말이나 돼? 걔 내 연락 싹 다 씹었었는데?”

너도 걔 연락 씹었다며.”

그거는 핸드폰이 망가져서!”

고친 이후로도 연락 안 했잖아.”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안 한 거지…….”

걔도 그랬나 보지.”

 

 

어느새 빨래를 다 널고 찌뿌둥한 허리를 피며 허리를 툭툭 두드린 지민이 바구니를 챙겨 발걸음을 옮겼고 그런 지민을 태형은 졸졸 쫓아갔다. . 지민아. 진짜 아닐까? 진짜 착각하는 거 아닐까? 걔가 날 좋아하는 게 맞을까?

 

 

, 몰라!”

…….”

그리고 야. 걔가 널 좋아하는 게 착각이면 시발, 무슨 착각을 몇,”

?”

아니다. 이건 내 입으로 할 얘긴 아닌 거 같고. 암튼 아니야.”

너 뭐 아는 거 있지?! 말해. 뭔데?”

, 싫어! 니네 사랑싸움에 나 끼지 마. 또 한 번 멱살 잡아봐라. 진짜. 그땐 진짜 둘 다 쌍으로 어디 가둬버릴 거니까.”

너무하네…….”

 

 

태형은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진짜로 시무룩해진 것은 아니었고, 지민이로 하여금 죄책감 내지는 동정심을 끌어내기 위한 연기였다. 그리고 지민은 그런 태형을 한 번 보고, 텅 빈 바구니를 한 번 보고, 하늘을 한 번 보고, 답답해 죽겠는 제 가슴에게 위로의 말을 한 마디 건넨 후 긴 한숨을 내쉬고 태형을 뒤돌아 쳐다봤다. 진짜, 내가 어쩌다가 이런 눈치 없는 새끼(김태형)와 사랑에 눈 먼 새끼(전정국)의 사랑 놀음에 끼게 되어서

 

 

할아버지께선 말씀하셨지.”

?”

안 되면 되게 하라.”

무슨 개소

전정국이 널 좋아하는 게 착각이라고 쳐. 그런데 어쨌든 지금은 널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잖아.”

그렇지?”

그럼 꼬셔.”

?”

널 좋아하게 만들면 되잖아. 정실부인의 힘을 보여줘.”

저기요.”

그냥 니꺼 도장 빡! ? 빼도 박도 못하게 딱! ? ! ? 이 얼마나 좋은 기회냐. 남의 눈치 안 보고 꼬실 수 있고.”

 

 

지민은 주위를 살짝 둘러본 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태형의 어깨를 두드렸다. 유교가 지엄한 조선시대에서 동성연애라니. 이 얼마나 새롭고 특별한 경험이야?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당신이 아니면 누가? 조선시대 궁궐에서 왕을 게이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 지민은 태형을 향해 살짝 윙크하며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알지, 친구?

 

 

호모는 죽지 않아요.”

?”

그럼 난 간다. 따라오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지민은 성큼성큼 걸어 멀어졌고 그런 지민의 뒷모습을 태형은 황망히 쳐다보았다. 온갖 있어 보이는 척은 다 해 놓고 결국 결론은 정국을 꼬시는 거라니. 태형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알지, 친구? 지민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다시 울림과 동시에 지민의 윙크가 떠올라 태형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알긴 뭘 알아, 미친놈아…….”

 

 

뿌듯한 발걸음으로 당당히 걸어가는 지민의 뒷모습을 향해 조그맣게 욕설을 읊조리며.

 

 

*

 

 

별 소득 없이 터덜터덜 교태전으로 돌아온 태형은 방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런 미친 디그다 새끼.’

 

 

어쩌면 지민의 말이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정말로 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인지 모르겠으나 지민은 정국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에 꽤나 확신을 갖고 있는 듯 보였다. 지민은 정국과 단 둘이 술을 마실 정도로 친하니까 그 정도로 확신을 갖고 있다는 건 정국으로부터 무언가 들은 것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럼 꼬셔.’

 

 

그리고 이 말도.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긴 하다. 정국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착각이라면, 착각이 아니게 만들면 되지 않는가?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만들기에 다시 오지 않을 완벽한 기회가 맞긴 했다. 제가 정국을 꼬시겠다 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인원이 몇인가. 상궁들은 정국과 자신의 합궁각을 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지 않은가. 그래서 태형은 반짝 눈을 떴다. 그래. 모 아이돌도 그랬잖아. 고민보다 고라고. 그래서 태형은 짧은 생각을 마치고 곧바로 제 결심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가장 먼저 상궁을 불렀다. 어떻게 하면 정국의 마음을 겟챠할 수 있을까. 차마 그 방법을 지민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으니까.

 

 

성심(聖心)을 사로잡는 방법이요?”

아니 뭐, 성심이라고 할 것까지는 좀 그렇긴 한데 뭐 대충그렇지?”

 

 

그러나 태형이 몇 번이고 연습한 후 쪽팔림을 무릅쓰고 간신히 조그만 목소리로 조언을 구한 것이 무색하게, 앞에 멀뚱히 앉은 상궁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태형을 응시했다. 그리고 태형은 그 대수롭지 않다는 상궁의 표정에 눈을 깜박였다. 뭐 엄청 좋은 수가 있나? 그러나 곧이어 상궁의 입에서 나온 말에, 태형은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마마. 일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성심을 얻기 위해서는 튼튼한 원자 아기씨를 회임하셔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 , 잠깐만,”

세간에는 아녀자란 무릇 가만히 누워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옥경을 더 깊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마께오서 먼저 주상 전하의…….”

아니 잠깐, 스톱!!!!!!!”

스돕이요? 그게 무엇,”

, 아니 잠깐 마, 말을 멈추거라.”

 

 

다급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바다 건너 서국의 언어를 내뱉은 태형은 상궁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의아해하는 틈을 타 상궁의 입을 막는 것에 성공했고 그와 동시에 태형의 머릿속에서 태형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막 상영을 시작하려던 19금 비디오도 가까스로 재생을 멈출 수 있었다. 태형은 새빨개진 얼굴을 제 손을 들어 가렸다. 세상에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야.

 

 

마마갑자기 왜 그러시옵니까.”

, 아니, 무슨 그런 말을 이런 환한 대낮에,”

이미 다 알고 계시는 것이지 않습니까. 혹 제가 가르쳐 드린 것을 주상 전하와 함께,”

, 안 했어!!!!! 안 했다고!!!”

?”

 

 

태형은 여전히 새빨개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소리쳤다. 하긴 뭘 해! 진짜! 아직까지 귓가에 상궁의 목소리가 남아 맴도는 것 같았다. 옥경을 더 깊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게다가 훨씬 더 큰 문제는 처음 상궁으로부터 합궁 교육을 받을 때와는 달리 조금 더 실감(!)나고 생생하게 펼쳐지는 제 머릿속 영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와 지금은 경험의 깊이가 달랐으니까. 감정의 종류도.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이제 태형은 키스할 때 정국이 어떻게 상대를 쳐다보는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국이 어떻게 상대를 껴안는지도, 그리고 또…….

 

 

아악!!!”

마마?”

미쳤다. 어떡해?”

?”

 

 

그리고 그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에 태형은 손을 내려 입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지금 너무 진도가 빠른 거 아니야? 태형은 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생각해 보면, 정국도 저도 사귀자는 말을 꺼낸 적 없으니 정국과 제 사이는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미 뽀뽀에 키스까지 한데다가 원베드 투베개도 아니고 원베드 원이불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아니 아무리 피 끓는 성인 남남이라지만 너무 진도가 빠른 것 아닌가. 게다가 정국과 저 사이에는 풀어야 할 오해까지 남아 있다. 태형은 생각했다. 그래,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중전 마마,”

플라토닉한 게 먼저 필요해.”

푸라토?”

, 아니, 그러니까, 정신적인 사랑?”

마마, 무슨 말씀이신지 소인은 잘…….”

그러니까 내 말은, 이미 몸으로는 갈 데까지(?) 갔으니까, 뭔가 그정신적인그런 게 필요하다는 거지.”

…….”

 

 

태형의 말에, 상궁은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 탄성을 내뱉었고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국이와 나 사이에는 그런 게 필요해. 확신. 믿음. 대화. 그런 거. 생각해보니 좋아한다는 말도 직접적으로 못 들었잖아. 태형이 자신감에 찬 얼굴로 야무지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소인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 아니 뭐 송구할 것까지야,”

소인이 그저 음욕에 눈이 멀어…….”

?”

그럼 제가 그 푸라토를 찾아보겠습니다.”

? 아니 그 전에 뭐라고 한,”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상궁은 덩달아 주먹을 꼭 쥐어 보였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 단호한 얼굴에, 태형은 어, , 그래하고 떨떠름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방금 뭔가 되게 이상한 단어를 들은 것 같은데 착각

 

 

그런데 마마,”

.”

갈 데까지 가셨다는 말씀은,”

?”

주상 전하와 함께 어디 뭐 천당이라도 다녀오셨다는 말씀이신가요?”

 

 

이 아니구나.

 

 

*

 

 

그래서, 제 생각에는 이 일기가 도움이 되어줄 것 같아요.”

일기?”

왕이 매일 썼던 일기래요.”

 

 

정국은 진지한 눈빛으로 품안에 소중히 품고 온 서책을 꺼내들었다. 모두가 잠든(이라고 쓰고 상궁들은 눈빛을 빛내며 깨어 있는 으로 읽는다) , 정국와 태형은 방 안에 마주 앉아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들어오기 전에 정국이 상궁들은 방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으라 엄명을 내리긴 했지만, 혹시 모르는 것이니까. 그리고 정국의 진지한 눈빛을 마주 보며, 태형은 꿀꺽 침을 삼켰다. 딱히 정국이 하는 말이 심각한 사안이었기 때문은 아니고, 야심한 밤, 정국과 제가 같은 방 안에 단 둘이 있다는 것이 자꾸만 의식되었기 때문에. 자꾸만 제 몸을 감아 오는 긴장감에 태형은 살짝 혀를 빼어 입술을 핥았다.

 

 

제가 봤을 때는 우리가 조선으로 오게 된 게, 그 소원 나무랑 연관이 있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왕과 왕비로 오게 되었다는 건, 그러니까 아마도 왕과 왕비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

그런데 문제는 이 일기가 한자랑 옛날 한글이랑 막 섞여 있어서 뭐라고 써져 있는지 읽기가 힘든…….”

…….”

?”

, ?!”

내 말 듣고 있어요?”

 

 

, . , 듣고 있어. 태형이 더듬거리며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눈을 가늘게 뜨는 걸 보니 딱히 정국이 제 말을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잠깐 딱딱하게 굳어 어색하게 웃고 있는 태형과 서책을 번갈아 쳐다본 정국이 이내 얕은 한숨을 내쉬고 서책을 옆에 툭 내려놓았다.

 

 

요즘 많이 피곤해요?”

? , 아냐. 계속 얘기해 봐.”

난 요즘 피곤해요.”

 

 

그러니까 일로 잠깐만 와 봐요. 손에서 서책을 내려놓은 정국이 이내 팔을 벌리며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 태형이 그렇게 말하자 정국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 형 말고 누가 있어요. 그 말에 태형은 아, , 그렇지하고 머쓱하게 말하며 볼을 긁었다. 그러고도 태형이 머뭇거리고 있자, 몸을 살짝 일으켜 태형에게로 가까이 당겨 앉은 정국이 태형을 껴안았다.

 

 

, 좋다…….”

…….”

 

 

그리고 저를 감싸 안는 온기에, 태형은 숨을 참았다. 정국의 턱이 제 어깨에 올려지고, 정국의 손이 천천히 제 허리를 감싸 안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새 정국에게 폭 안긴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정국의 조금은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 소리가 차근차근 귓가에 닿고, 정국의 손이 닿은 모든 부분이 뜨거워진다. 정국의 머리카락이 제 목에 닿아 부드럽게 흩어지고, 정국이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 가까이서 들리고. 평소보다 훨씬 예민해진 모든 감각이 온 몸을 건드리고.

 

 

태형이 형.”

?”

나 안아줘요.”

 

 

그 예민해진 감각에 얼마나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을까. 낮게 가라앉은 정국의 목소리가 태형의 귓가에 안착했다. 꼭 진공관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정국의 목소리는 웅웅 울린다.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 정국의 단단한 손이 태형의 등을 타고 올라와 태형의 목에 닿고,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귓가에 닿고. 태형은 홀린 듯 정국의 등 뒤로 손을 올린다. 그에 정국이 조금 더 힘을 실어 기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생각했다. 혹시 지금이 그 타이밍 아닐까. 그 날의 아직 풀리지 않은 오해를 풀고, 관계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기회.

 

 

정국아.”

?”

 

 

그래서 태형은 정국의 등에 올렸던 손을 들어 저를 단단히 감싸 안고 있는 정국의 팔을 건드렸다. 나 할 말 있는데……. 태형의 목소리에, 살짝 노곤하게 풀린 정국의 눈이 태형을 향했고 태형은 꿀꺽 침을 삼켰다. 뭐부터 얘기해야 할까. 그러니까…….

 

 

, 유라 있잖아.”

…….”

그러니까 나는 그 날 유라를,”

.”

 

 

그러나 태형의 말은 정국의 낮은 목소리에 의해 끊겼고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정국의 온기가 제게서 천천히 떨어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피곤한 듯 제 손으로 눈을 꾹 누른 정국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걔 얘기 지금 안 하면 안 돼요?”

? 아니, 나는 그게 아니라,”

형 입에서 걔 이름 나오는 거 싫어요.”

 

 

정국이 태형에게 눈을 맞췄다. 그리고 그 눈에 태형은 입을 합 다물었다. 난 건가? 정국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요,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이기적이고, 욕심도 많아요.”

…….”

지금도, 제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알면 형 되게 놀랄걸요.”

?”

그런데 참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형도 지금은,”

…….”

나만 생각해 주면 안 돼요?”

 

 

그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되잖아요, 그쵸. 그러고 정국은 태형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태형에게 안겨 왔다. 그 말에 어떻게 계속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지은 죄가 있는데. 결국 태형은 하려던 말을 목 뒤로 넘긴 채 정국을 마주 안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내가 놀란다는 건데?’

 

 

머릿속 한 구석에 차마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 하나 더 늘어난 채로.

 

 

+

 

 

너무 오랜만이라 민망한 수준.... 약간 감도 잃은 거 같고.. 조만간 내가 내 글 정주행해야겠어..ㅠㅋㅋㅋ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열심히 다시.. 써볼게!! 항상 고마워!! 사랑해 보라해ㅠㅠㅠ 켐들 덕분에 힘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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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로맨스 11  (3) 2018.07.27

안 읽으셔도 전혀 무방한 후기,,,


본편에도 적어뒀지만 저에게 굉장히 의미가 큰,, 두번째 완결,,, 사실 오해와연애는 어떻게 끝냈는지도 모르게 빠르게 썼더라구요 그 때의 나 어떻게 했던 거니


우선,, 여름밤의 온도는 너무 시작한지 오래 돼서 (대구리를 박는다) 처음에 뭘 보고 싶어서 시작한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무려 4월 30일...!! 거진 4개월을 끌었네요.

 

변명하자면,, 조선로맨스랑 동시연재를 하고 있었고,, 7월 전에는 거의,, 일주일에 한 편씩 올렸었답니다,, 그런데 이번 여름에 제가 너무,, 힘들었어요,,


어,, 글 얘기로 가 보자면,


글을 쓰면서, 태형이의 입장에서 주로 글이 전개되었는데, 여온에서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건 같은 상황도 상대에게는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거였어요.

그러니까 처음에 짝사랑을 하는 태형이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정국이의 행동들이 원망스럽고 알쏭달쏭하고 이해할 수 없는 그런 거였는데,

정국이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태형이 역시 정국이에게 그랬다는 거.

결국 자존심이나 이것저것 다른것들 때문에 정국이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건 태형이도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원래 자기 감정이 깊을 때는 상대방의 감정을 잘 모르게 되잖아요.

내가 좋아해서 착각하는 건가 싶고 착각하지 않으려고 오히려 더 부정하고.

오히려 좋아하면 그 사람의 생각을 파악하는 게 훨씬 더 어렵고. 

그걸 표현하고 싶었는데 잘 됐는지는 모르겠네요.


그래서 똑같은 상황을 정국이의 시점에서 봤을 때랑, 태형이의 시점에서 봤을 때로 나눈 건데,

읽으시는 분들이 잘 따라와,, 주셨을까,,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제 욕심이 너무 컸던 걸지도요.



하지만 결국에 국뷔들은 자존심과 생각, 서로를 제외한 다른 것들은 전부 내려놓고,, 고백했죠,,

다 필요 없고 서로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정한 것,,


정국이가 먼저 졌다고 말하긴 했지만, 결국 태형이도 석진이나 정국이의 말이 아닌 자기만의 선택으로 정국이에게 달려간 거였고요.

결국 선택은 자기가 하는 거니까요!


오해와 연애가 제 정국이에 대한 취향을 갈아넣은 거였다면 여름밤의 온도는 제 서술 취향? 문체 취향? 을 갈아넣은 글이었습니다.

묘사나,, 비유나,, 감각들이나,, 사실 더 자세하게 파고 싶었는데 기력이 딸려서,,허허

하 근데 진짜 제 어휘력의 부족과 능력의 부족을 많이 느낀 글이었어요.

쓰면서 아아악 다 지우고 싶어!!!! 라는 생각도 엄청,, 했었고,,, 올리면서도 만족스럽지 않은 편이 만족스러운,, 편이 있긴 있었나? 아무튼 더 많았구요.

그렇지만 그것 역시 제 역량이겠죠,, 쓰다보면,, 나아지겠지,,


음,, 그렇습니다. 


편당 글자수도 되게 많아요,, A때는 안 그랬는데 갑자기 왜..?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욕심이 많아져서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정국이의 태형이에 대한 마음은 A를 쓸 때부터 정해져 있었던 거였기 때문에 완결을 보신 다음에 다시 처음부터 읽으시면 정국이의 행동들이나 말들이 좀 다르게 보이시지 않을까 싶어요! 정국이 대사를 쓸 때마다 그걸 염두에 두고 썼었거든요 ㅎㅎ

사실 지금 다시 보면 가볍긴 했어도 티 엄청 냈구나 싶으실지도,,


실제로 정국이가 가벼웠던 건 사실이고 가볍게 굴려고 노력했던 거니까요.



정국이는 완전히 가질 수 없는 걸 욕심내는 것 자체를 무서워했던 사람이고, 태형이는 외로움을 무서워하고 싫어했던 사람입니다. 

어찌보면 아무것도 아닌,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건데 그게 약간 틀어진 첫만남과 여러 오해와 자존심이 얽히고 섥혀서 무한 쌍방 삽질이 되었던 거죠,,

원래 사람 일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나요 하하하하



조금 쉬고, 여유가 생겼을 때 다시 찾아뵐게요!!>ㅅ< 항상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TMI :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그래도 여름이 완전히 다 가기 전에 끝낸 것 같아서 신납니다! 겨울에 여름밤의 온도를 연재하고 싶진 않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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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우스 오른쪽 누르고 연속재생을 클릭한 후 읽어주세요!!)





I

 

달콤한 포도일수록 오래 삭혔을 때 도수가 높은 와인이 된다고 한다.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태형은 그게 역설적이라고 생각했다. 달콤할수록 나중에는 더 독한 술이 된다는 게. 사람을 더 쉽게 취하게 만든다는 게.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거 같아서 그랬어요. 윤기 형 아니었으면 오늘도 나한테 아는 척 안 했을 거 같아서.’

난 이렇게 끝내긴 싫다고요. 어제 너무 좋았거든.’

연락할게요, 받아요.’

위로해달라고 한 적 없는데? 그럼 오늘 내가 다 사면 데이트라고 해 줄 건가?’

나랑 연애할래요?’

이런 관계는 그만 두자면서요. 그러니까 연애해요, 나랑.’

 

정국과의 기억은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달콤한 것 같다가도 항상 그 끝은 썼고 태형은 언제나 방 안에 앉아 그 쓴 기억을 혼자 곱씹어야만 했으니까. 태형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언제부터 그랬더라. 정국과의 처음은 어땠더라. 언제까지 달콤했고 언제부터 아팠더라. 언제부터 나는 전정국과의 기억을 힘들게 느꼈더라.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인지 머리가 몽롱했다. 밤바람에 눈가가 시렸고, 심장이 뛰었고, 귓가가 울렸다.

 

아무것도 안 바랄게요. 다른 사람이랑 연애해도 좋고, 나랑은 잠만 자도 좋고. 나한테는 눈길도 안 줘도 좋아요. 그러니까,”

…….”

나한테서 도망가려고 하지만 마요.”

 

그렇다면 이 기억은 어떨까. 이건 어떻게 기억될까. 그다지 달콤하지만은 않았던 기억들도 뒤늦게 꺼내보았을 때 지독하리만큼 썼었는데. 너무 독해서 다시 꺼내어 넘길 때마다 목이 따끔거렸는데,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아프게 만들었었는데.

 

내가,”

…….”

졌어요.”

 

지금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지? 어떤 기분이지? 태형은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의 눈이 올곧게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다른 어떤 곳도 아닌, 제 자신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온 세상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주위는 온통 제 심장 박동이 웅웅거리는 소리로만 가득했다. 이 세상에 오롯이 정국과 자신, 둘만 남겨진 것처럼.

 

나는,”

…….”

형이 욕심나요.”

 

태형은 심장에 가만히 제 손을 올렸다. 이건 꿈일 수가 없다. 태형은 멍하니 생각했다. 이런 건 상상해본 적도 없었으니까. 이런 정도까지는 바란 적도 없었으니까. 이건 꿈일 수가 없고, 꿈이 아니어야 하고, 그리고…….

 

나는, 형이 너무 간절하고,”

…….”

갖고 싶어요.”

 

정국의 목소리가 느리게 이어진다. 태형은 손끝을 타고 심장 박동과 함께 전해지는 제 감정을 가늠한다.

 

인정하기 싫었어요. 나는누군가를 욕심내기 싫었어요.”

…….”

내가 영원히 가질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내가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사람은 변하고, 언젠가는 나를 떠날 거니까. 그러니까 그걸인정하기 싫어서, 나는 항상 여유롭고 싶고, 휘둘리기 싫고, 완전하고 싶고. 그런데,”

…….”

형이 없으니까…….”

 

정국이 고개를 숙인다. 태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국을 쳐다봤다. 손끝이 뜨거웠다. 심장이 저릿저릿하고, 시큰거리고내가 지금 듣고 있는 게 정국이 하는 말이 맞을까.

 

…….”

…….”

욕심내면 안 돼요?”

 

어느새 차가워진 여름밤의 바람이 선선하게 태형을 훑고 지나갔다. 정국의 향기, 정국의 목소리. 현실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비현실적인 이 상황, 정국이 뱉는 말들, 정국의 감정. 모든 게 몽롱하게 흐릿했다.

 

좋아한다고 말 해 봐요.’

?’

한 번만.’

.’

그냥,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서.’

…….’

빨리요.’

싫어.’

…….’

그런 말을 왜 해,’

…….’

쓸데없이.’

 

태형은 언젠가 나눴던 정국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언젠가 정국은 문득 그랬었다. 좋아한다고 말해 보라고. 정국이 하는 말들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언제나 태형에게 가장 어려운 일들 중 하나였다. 정국이 하는 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 왜 좋아한다고 말해보라는 걸까. 왜 사귀자고 하는 걸까. 왜 나한테 파트너를 하자고 했을까. 정국에게는 항상 선이 있었으니까. 그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걸 태형은 잘 알았으니까. 그렇게 많은 시간들 동안 정국은 태형을 헷갈리게 하면서도 한 번도 태형에게 좋아한다 말한 적 없었으니까. 연애하자고 할 때도, 파트너를 하자고 했을 때도, 헤어지자 했을 때도, 마지막으로 끝냈을 때도. 정국은 한 번도 진심을 보여준 적 없었다. 그러나 지금,

 

좋아해요.”

 

그 어느 때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제가 들었던 그 어느 고백들보다도 정국이 내뱉는 말들이 진심처럼 느껴지는 지금,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 전부터,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나는 형을 좋아했어요.”

 

그러니까 전정국이 정말로,

 

한 번만,”

…….”

딱 한 번만 잡혀 줘요.”

…….”

그럼 죽을 때까지 놓지 않을게요. 내가 잡고 있을게요. 죽어도 안 놓칠 테니까…….”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지금,

 

나한테서 도망가지 마요.”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

 

태형은 멍하니 침대에 몸을 누인 채 푸르스름한 빛으로 가득 찬 천장을 쳐다봤다. 고작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인데 아직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대로 굳어버린 듯 태형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때마침 나타난 우진이 정국과 인사를 나눈 후 자연스럽게 저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지 모른다. 연회장으로 돌아온 후에도 계속 멍해 있는 저를 집까지 데려다 준 것 역시 우진이었다. 태형은 멍하니 몇 분 전 도착한 우진의 문자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괜찮아요? 그 사람 만난 이후로 계속 멍해 있는 것 같아서혹시 도움 필요하거나 좀 괜찮아지면 말해줘요.]

 

아이러니하게도, 우진의 문자만이 아까 있었던 그 일이 제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라는 유일한 증거가 되어 준다. 눈으로 한 번 더 천천히 문자를 확인한 태형은 이내 핸드폰을 끄고 다시 텅 빈 벽을 쳐다봤다. 아직까지도 심장 박동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 이틀 뒤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요.’

…….’

지금도 간신히 빠져나온 거라서, 그렇다고 그 뒤에 포기하겠다는 뜻은 아니고, 그러니까

…….’

나 한국에 있어서, 형한테 못 올 동안, 천천히 생각해 봐 달란 거예요.’

…….’

부탁할게요.’

 

정국의 목소리가 아직까지 따뜻하게 귀에 남아 웅웅거린다. 공명이 많은, 듣기 좋은 다정한 목소리. 정국은 포기하지 않겠다고, 놓지 않겠다고 했지만 정작 정국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태형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과 같았다. 만약 태형이 정말로, 진심으로 정국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면 정국이 한국에 있는 사이에 숨어버릴 수 있도록. 그걸 정국이 모를 리는 없었을 것이고 그러니까 그 말은 정국이 모든 선택을 태형에게로 넘겨준 것을 의미했다.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모든 진심을 고백하고, 제 모든 것을 태형에게 넘긴 채 오롯이 태형만이 둘의 관계를 정의내릴 수 있도록. 졌다는 말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

 

태형은 몸을 뒤척였다. 가벼운 이불이 부드럽게 몸에 감겼다. 시간이 지나고, 심장박동이 조금 잦아들고, 술기운도 조금 가라앉고 나니 머릿속이 조금씩 맑아졌다. 그래서 태형은 정국을 떠올렸다. 천천히 생각해 봐 달라던 정국의 부탁은 사실 의미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국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태형은 정국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아니, 이미 예전부터 그러지 않으려고 애썼음에도 그러고 있었으니까.

 

좋아해요.’

 

아직까지도 그 음성이 선명하게 남아 울린다.

 

나는 형이 욕심나고, 갖고 싶어요.’

 

그 말들이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순간 정국의 목소리는 진심을 담고 있었고 정국의 모든 것이 진실을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태형은 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일까.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인데. 차마 꿈에서조차 들을 수 없었을 정도로 간절히 바랐던 것들인데. 그 순간 정국은 가볍지도 않았고, 술에 취해 있지도, 장난스럽지도 않았는데.

 

…….”

 

언제부터 전정국은 나를 좋아했을까. 태형은 멍하니 생각했다. 정국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전부터, 더 많이 자신을 좋아해 왔다고 했다. 그 오래 전이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제가 정국을 좋아했던 시간들 안이겠지. 태형은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서로 좋아하면서도 서로에게 상처를 줬던 시간들. 여러 이유들을 붙여 가며 마음을 숨기고 감추고 속였던. 그리고 태형은 이불을 꼭 말아 쥐었다. 과거를 천천히 정리하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거 아닐까.

 

애인은 알아요? 형이 나랑 잔 거?’

너 나 좀 그만 괴롭혀.’

미안해요.’

그런 말을 왜 해, 쓸데없이.’

형 가벼운 사람이잖아요.’

너 그러는 거 진짜 짜증나.’

애인은 형이 이렇게 아무하고나 자고 다니는 거 알아요?’

그냥 평생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정국이 제게 했던 뾰족한 말들과, 제가 정국에게 했던 날선 말들이 한꺼번에 뒤엉켰다. 그 속에 진심이 없었다 할지라도,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했더라도 결국 그 말들은 진심 대신 서로에게 전해졌고 서로를 상처입혔었다. 그 기억들을 지울 수 있을까? 심장이 시큰거렸다. 태형은 이불을 조금 더 꼭 말아 쥐었다. 전정국을 좋아하느냐 묻는다면 그건 다시 대답할 필요도 없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국과 자신은 오랜 기간 서로 좋아하면서도 서로에게 상처를 줬었으니까. 그건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는 소리고 그럼 정국과 자신은 인연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닐까? 이제 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정국을 마주하고 웃을 수 있을까? 아무 생각 없이 정국의 손을 잡을 수 있을까? 과거의 기억이 자신을 갉아먹지는 않을까?

 

…….”

 

자신이 없다. 겁이 났다. 어쩌면 너무 갑자기 찾아온, 오랫동안 바랐던 일이라 그게 당황스러운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태형이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은 행복보다는 무서움에 가까웠다. 정국과의 오래된 기억은 그다지 달콤하지만은 않았음에도 태형을 아프게 할 만큼 독했으니까. 만약 이대로 정국과 연애를 하게 된다면, 나중에 혼자 남겨졌을 때 그 기억들이 얼마나 자신을 아프게 할까. 얼마나 커다란 후유증이 자신을 잡아먹을까. 태형은 눈을 감았다. 어느새 차가워진 바람이 태형의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

 

전정국 온 거 같더라.”

 

밤새 뒤척이느라 제대로 자지 못해 부스스한 얼굴을 하고 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아침부터 들이닥친 석진이 그랬다. 태형은 달칵 소리를 내며 끊긴 커피머신에서 컵을 집어들려다 멈칫했고 그런 태형을 보며 석진은 말을 이었다.

 

시사회 때문에 한창 바빠 죽겠는데 지 멋대로 탈주한 거라고, 혹시라도 이틀 뒤에 안 돌아오겠다고 하면 경찰을 불러서라도 돌려보내달라고,”

…….”

민 감독이.”

알아. 어제 연회장에서 봤어.”

파티에서?”

 

태형의 말에 석진이 놀란 눈을 했고 태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뜨거운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잠시 입을 살짝 벌리고 고개를 갸웃한 석진이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아닌데.”

…….”

공식적으로 초대받은 건 W그룹 정도인가? 근데 뭐, 어떻게든 올 수야 있었겠지. 민 감독 아는 사람이 여기에도 꽤 되니까.”

 

그러고는 잠시 침묵. 그 침묵에 태형은 컵을 내려놓았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그거 말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거 아냐. , 앞으로 어쩔 거냐고? 태형이 조용히 말하자, 석진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솔직히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긴 한데, 그것보다,”

…….”

너 괜찮냐고.”

 

석진의 말에 태형이 순간 멈칫했고 그런 태형을 눈치 챈 석진이 고개를 돌렸다. 너 말하기 불편하면 말 안 해도 돼. 그냥 걱정돼서 왔어. 석진의 목소리가 조용히 이어진다. 태형은 컵 끝을 만작였다. 어젯밤에 잠 한 숨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생각한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수많은 생각들 기저에 공통적으로 깔려 있던 것은 두려움이었다. 그러니까 괜찮냐고 물으면,

 

아니.”

 

괜찮지 않았다.

 

태형아.”

너무 오래 끌었어. 시작부터 잘못됐는데, 그 이후로도 계속 꼬여있기만 했잖아.”

 

아무도 용기를 내서 꼬인 매듭을 풀려 하지 않았다. 서로 피하기만 했고, 오랜 시간 방치되었던 그 꼬인 매듭은 아마 지금쯤 녹이 슬어 손을 댈 수조차 없게 되었을 것이다. 태형은 자신이 없었다. 그 꼬인 매듭을 무시할 자신이.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없으리라는 자신이. 정국과 사귀게 되면, 계속해서 불안해하게 되지 않을까? 여태까지 정국과의 관계가 그랬으니까. 항상 놓고 싶었지만 놓지 못했고, 끊고 싶었지만 끊지 못했고. 겨우 마음 정리가 다 되어 간다고 생각할 즈음, 정국은 다시 나타나 태형이 애써 묻어놓고 흐려지게 했던 것들을 한순간에 뒤집어놓았다. 너무 쉽게.

 

…….”

 

정국을 좋아하면서, 너무 많은 감정들이 닳았다. 너무 많은 것들을 생각해야 했다. 그 소모들이 버겁고, 그 후에 감당해야 할 것들이 무서웠다.

 

내일 모레 오후 155분 비행기래.”

?”

아니 그냥 뭐, 궁금할 수도 있잖아. 한국 직항 시간표가 어떻게 되나~ 난 가끔 궁금하더라고.”

 

향수병 때문인가? 한국에 발붙이고 산 기간보다 안 그런 기간이 더 긴데 이게 참 피라는 게 무서워, 그치? 갑자기 난데없이 비행기 시간을 내뱉더니, 석진이 능청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태형이 눈을 깜박였다. 석진이 그런 태형을 보며 씩 웃었다.

 

가끔은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게 도움이 안 될 때도 있더라고. , 그런 말도 있잖아. 철이 없으면 사는 게 즐겁다고.”

…….”

그래서 내가 인생을 즐겁게 살잖아. 뭐 내가 생각 쫌 안 한다고 세상이 두 쪽 나는 것도 아니고.”

 

뜬금없는 석진의 생각 타령에 태형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그런 태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석진은 말을 이었다.

 

결국은 네 마음대로 하는 거지.”

…….”

배고프다. 나 햄버거 포장해 왔는데. 모닝 햄버거 콜?”

 

종이 봉지를 가볍게 흔들며, 석진이 웃었다.

 

*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정국은 바쁘게 움직였다. 본 목적이야 태형을 찾으러 온 것이었지만 어쨌든 영화 홍보 차 왔다는 핑계가 있었으니까. 이틀간 많은 파티에 참여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 날 이후 단 한 번도 태형의 모습은 볼 수는 없었다. 류현이에게 듣기로는 태형이 이런 종류의 파티에 곧잘 참석한다고 했었는데.

그 날, 그러니까 윤기에게 전화를 걸어 태형을 찾은 날, 자다 깬 목소리로 윤기는 태형이 지금 H 감독의 영화에 참여하기 위해 석진을 따라 미국에 갔다는 것만 알 뿐 다른 것은 모른다고 했다. 윤기를 닦달해 석진의 연락처까지 알아낸 후 자존심까지 굽혀 가며 전화를 걸었지만 석진에게선 알아서 하라는 대답만이 돌아왔었고. 그나마 H 감독의 영화라는 힌트만을 잡고 제 인맥을 쥐 잡듯이 잡았지만 아무런 단서는 나오지 않았었는데, 의외의 곳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거다.

 

‘H 감독 찾는 거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열애설 보도가 난 후 아예 연락을 끊고 있었던 류현이로부터 온 문자였다. 그 대상이 류현이라는 것이 꺼림칙했지만 H 감독, 아니 태형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류현이는 제 스폰서의 그룹이 예전에 H 감독의 영화에 투자한 적이 있다고, 그 정도의 부탁은 대신 해줄 수 있다고 했다. 네가 왜 날 위해 그렇게까지 하냐는 질문에 류현이는 간단하게 답했다.

 

원해서 한 건 아니었더라도 날 도와줬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류현이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이게 미안함을 표현하는 류현이의 방식이라는 것을 모르진 않았다. 그룹의 스폰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하더라도 스폰서 본인과의 관계는 끊어진 상태에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테니까.

W그룹을 등에 지고 거기에 정국의 네임밸류까지 얹으니 미국에서 열리는 영화 관련 행사에 참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초대장을 건네주며, 류현이는 그랬다. 진심으로 잘 되길 바란다고.

 

…….”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오늘까지, 정국은 태형의 머리카락 한 올 볼 수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거고, 예상했던 건데도 못내 씁쓸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다. 이제 한국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다시 미국으로 올 수 있게 되었을 때, 태형이 저를 피하지 않고 여전히 미국에 머무르고 있기만을 바라야 하는 건가. 정국은 손을 꽉 쥐었다. 꾹 다문 입술이 욱신거렸다. 혹시, 그 때 만났던 게 마지막은 아니었을까.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의 가지가 뻗어나갔다. 만약 그렇다면, 그 때 조금 더 얘기할 걸. 조금 더

 

…….”

 

매달릴걸.

 

…….”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계속해서 후회가 남는다. 너무 오랫동안 말들을 쌓아놓기만 해서일까. 정국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슬슬 검색대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시간이었다. 체크인은 이미 예전에 마쳤지만 어쩐지 이대로 미국을 떠나면 이제 더 이상 태형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의미 없이 서성이고 있던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을 피해 오기로 예정되어 있던 파티에도 오지 않았던 태형이 공항에 올 리가. 정국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국 돌아가면 입술 다 부르텄다고 혼나겠네. 정국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 더 전광판을 확인하고, 괜히 다시 한 번 더 입구 쪽을 보고.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정국이 발걸음을 내딛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전정국.”

 

익숙한 목소리가 정국의 귓가에 닿았고 그 순간 정국은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곳엔,

 

나한테 할 말 없냐 그랬지.”

 

태형이 있었다. 정국은 눈을 깜박였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정국은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알싸한 감각이 전해졌다. 아픈 감각이 이토록 반갑게 느껴질 줄이야. 뛰어 왔는지 살짝 가쁘게 쉬고 있던 숨을 몰아 쉰 태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있어. 있었어. 사실은 그 때도 있었고 지금도,”

…….”

많아.”

 

그 날 그렇게 석진이 돌아간 뒤로, 태형은 혼자 멍하니 앉아 생각했다. 정국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태형 자신을 생각했다. 정국과의 과거를 후회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을 떠올렸다. 정국을 만난 이후로 태형은 과거만을 생각했었으니까. 정국과의 처음을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이 달라졌을까? 그 수많은 시간들 동안 내가 한번이라도 솔직했었다면 이렇게 돌아오지는 않았을까.

 

니가 그랬지, 네 생각 해 달라고.”

…….”

그런데 석진이 형은 나보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라 그러더라.”

…….”

그래서,”

…….”

둘 다 안 했어.”

 

태형이 고개를 들어 정국을 마주했다. 정국은 가만히 멈춰 서서 그런 태형을 쳐다봤다. 태형이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생각한 것들을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 말들이 다 솔직하게 전달될 수 있을까. 오래 묵혀 왔던 말들이 온전하게 정국에게로 닿을 수 있을까. 태형이 숨을 살짝 들이쉬었다.

 

내가 너를 알게 된 이후로는 내 생각보다는 네 생각을 더 많이 했었거든.”

…….”

그래서 이번에는 이틀 동안 내 생각만 엄청 많이 했어.”

 

그런 때가 있다. 일상의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이 갑자기 새롭게 다가오는 때. 이틀을 멍하니 생각만 하다가 문득 창밖을 봤을 때, 태형은 그 순간 여름이 끝났다는 것을 느꼈다. 바람이 선선했고, 창밖은 온통 여름의 향이 아닌 가을의 향으로 가득했다. 감정의 종류와는 상관없이 시간은 흐르고 기억은 쌓인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생각했다. 만약 지금의 달콤했던 기억이 오래되어서 나중에 꺼냈을 때 쓰디 쓴 기억으로 변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래서 결론을 내렸는데,”

 

지금 말해야 한다고.

 

잡혀줄게.”

 

전정국에게,

 

나 놓지 마.”

 

좋아한다고 말해야 한다고.

 

욕심 내도 돼.”

 

그러니까 지금 잡아야 했다. 더 이상 정국이 없는 시간들이 쌓이지 않게. 어차피 쌓이는 기억들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콤할 수 있게. 정국을 만난 이후로 이미 제 모든 음악의 출처는 정국이었으며 모든 계절은 정국으로 인해 의미를 가졌으니까. 부정한다고 아니게 될 명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태형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했다. 혹시 나중에 쓴 기억을 혼자 곱씹게 된다 할지라도, 지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욕심내기로. 태형은 말을 마치고 다시 입술을 물었다. 정국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국의 눈이 느리게 깜박여진다. 내 말이 제대로 전해진 거 맞나? 제가 할 말을 다 끝냈음에도 이어지는 침묵에 태형이 한 걸음 정국에게 다가간 순간이었다.

 

…….”

 

정국이 그대로 태형을 붙잡아 안았다. 순식간에 정국에게 안긴 태형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가 이내 얕은 숨을 내쉬고 천천히 정국을 마주 안았다. 그러자 정국이 조금 더 저를 세게 안아 오는 것이 느껴졌다.

 

다행이다.”

 

그리고 태형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로, 정국은 조용히 그렇게 중얼였다. 정국의 향기에 파묻혀 있던 태형이 뭐가, 하고 응수하자 정국이 살짝 몸을 떼어내고는 태형을 보며 씩 웃었다.

 

욕심내도 된다고 해 줘서요.”

……?”

어차피 나, 형 포기 못 했을 텐데. 이제 마음 놓고 집착해도 된단 거잖아요.”

…….”

 

정국의 낮은 목소리에, 태형이 빠르게 눈을 두 번 깜박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 번 더 태형의 얼굴을 꼼꼼히 눈으로 도장 찍은 정국이 다시 태형을 끌어안았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태형이 정국을 밀어냈다. 태형의 움직임에 한 번 더 태형을 꼭 안았다 힘을 푼 정국이 왜 그러냐는 듯 태형을 쳐다봤고 태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그런 스타일이야?”

뭐가요?”

집착하는 스타일이냐고.”

몰랐어요?”

…….”

나 소유욕 엄청 강해요. 그래서 형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여태까지 숨겼던 건데.”

 

그러고는 씩 웃는다. 그 당당함에 태형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그 때, 때마침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태형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주위의 시선이 모두 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런 시선이 익숙할 정국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태형은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빠르게 뒷걸음질 쳤고 정국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태형은 붉게 변한 제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며 나머지 한 손으로는 정국을 밀어냈다.

 

너 이제 들어가.”

너무 매몰찬 거 아니에요?”

너 비행기 놓치면 윤기 형한테 나 죽어.”

애인이 죽는데 제가 가만히 있겠어요?”

애인…….”

 

정국이 아무렇지도 않게 뱉는 그 단어에, 태형의 얼굴은 더 붉어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이렇게 쉽게 애인이라는 단어로 서로를 묶을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었는데, 너무 멀리 돌아왔다는 걸. 여전히 붉은 얼굴을 한 채로, 가려진 손가락 사이로 태형이 빼꼼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은 여전히 자신을 올곧이 쳐다보고 있다. 가라는데 가지도 않고. 결국 얕은 한숨을 내쉰 태형이 손을 내리고 정국을 쳐다봤다. 그래, 남들이 좀 보면 어때. 나중에 윤기 형한테 잔소리 좀 듣지 뭐. 태형의 한숨에 눈이 동그랗게 된 정국이 보여서, 태형이 살짝 웃었다.

 

전정국.”

?”

좋아해.”

 

정국에게는 처음 하는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태형은 더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정국의 볼을 잡았다. 갑자기 닿아 오는 태형의 온기에 정국이 눈을 깜박였지만 태형은 그저 씩 웃고,

 

……!”

 

제 입술을 정국의 입술에 붙였다. 이 공항에 있는 누군가는 정국을 알아보겠지만, 이 순간 그런 것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태형의 눈이 감기고, 놀라 동그래졌던 정국의 눈도 이내 사르르 접힌다. 주위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조금 더 커지고, 곧이어 찰칵 하는 소리까지 들려왔지만 정국은 태형을 밀어내는 대신 태형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지금 중요한 건 태형이 처음으로 제게 잡혀 주었다는 것뿐이니까.

영화 홍보 하나는 끝내주게 되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정국이 조금 더 태형을 제 쪽으로 당겨 끌어안았다. 맞닿은 입술 끝으로, 태형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길었던 여름의 끝과 함께 찾아온, 연애의 시작이었다.


 


+안 읽으셔도 무방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는 TMI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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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정국 번외 2

 

너무 많이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흔들리는 게 무서웠으니까.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나면 끝도 없이 깊은 감정이 될까봐.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나는 김태형에게 좋아한다 말하고 싶었다. 김태형을 안을 때마다 좋아한다는 말이, 좋아한다 말해달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은 자존심일까, 두려움일까. 차라리 자존심이었으면 좋겠는데. 두려움이면, 내가 너무 비참하잖아.

나는 내 감정의 밑바닥을 보는 게 무서웠고 그냥 그 정도의 감정만 유지하고 싶었다. 욕심내고 싶지 않았고, 욕심을 내다 언젠가는 포기해야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류현이는, 그런 나와 다른 듯 비슷한 사람이었다.

 

나 그 사람 좋아해.”

 

류현이는 내가 스무살 초반에 사귀었던 여자 중 하나로, 류현이를 다시 만난 것은 26살의 겨울이었다. 드라마를 같이 하게 됐고, 어렸을 때 깔끔하게 사귀었다 헤어졌던 사이라 오래 만날 수 있었다. 어차피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었으니 다른 사람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관계를 원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 류현이가 편했으니까. 파트너나 연인이라기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관계.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류현이는 갑자기 나에게 그랬다. 자신의 스폰서를 좋아한다고.

 

무슨 소리야?”

알아. 웃기게 들린다는 거. 그런데 그렇게 됐어.”

이 얘길 왜 나한테 하는데?”

도와줘.”

 

류현이의 스폰서는 한 그룹의 후계자였다. 재벌과 연예인의 스폰 관계는 연예계에선 흔한 일이었지만, 스폰서를 좋아하게 된 류현이의 경우가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어쨌든 류현이와 나는 애초에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헤어지자는 말이 필요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런 얘길 왜 나에게 하냐고, 새삼스럽게 헤어지기라도 하자는 거냐 물으니 류현이는 대뜸 그랬다. 도와달라고.

 

그 사람이 아는지는 몰라.”

…….”

말 한 적은없으니까.”

 

이유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혹시라도 알게 되면 버려질까봐겠지. 류현이의 부탁은 함께 칸쿤을 가 달라는 거였다. 그 사람이 그 곳으로 자길 초대했는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다고. 그러니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이 후회할 행동을 하지 않도록 말려달라고 했다. 나는 차마 류현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좋아하면서, 좋아한다 말도 못 하는 류현이의 모습이 어쩐지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그리고, 류현이의 짐작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이렇게까지 할 필욘 없잖아…….”

 

류현이가 울었다. 나와 알고 지낸 오랜 기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 스폰서에겐 약혼녀가 있었고 칸쿤은 그 여자와의 약혼식을 위해 간 거였다. 류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약혼식장에 도착했고, 약혼식 내내 그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자신은 그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그 어떤 말보다도 잔인한 이별 통보.

이틀을 내리 울다가 삼일 째 되는 새벽, 내가 자는 사이에 류현이는 그 남자를 찾아갔었다고 했다. 그리고 붙잡았다고 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그냥 그대로도 만족할 수 있었는데. 아무 말도 안 하고, 티내지 않으려고 꾹 참으면서 옆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는데 왜 그랬냐는 류현이의 말에 그 스폰서는 그 감정 자체가, 그러니까 류현이가 자신을 좋아하는 그 감정 자체가 부담스럽다고 했다고 했다. 가볍게 시작한 가벼운 관계는 그렇게 끝내는 게 가장 좋다고. 류현이의 그 말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김태형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가볍게 시작한 관계는 가볍게 끝내는 게 가장 좋다는 그 말이, 꼭 나와 김태형을 두고 하는 말 같아서.

 

그리고 그 날, 칸쿤에서 돌아와 김태형과 밥을 먹으러 갔던 그 날. 류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김태형이랑 있으니까 무시하려 했는데, 이어 도착한 문자는 내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너 김태형 좋아하지.]

[전화 받아.]

[아니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이게 뭐야.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나는 류현이를 포함해 누구에게도 내가 김태형을 좋아한다고 말 한 적 없었다. 그러니까 지레짐작하는 것일 테고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다. 다만…….

 

저 사람은 어때?’

누구?’

저 사람 얼굴. 네 스타일 아냐?’

 

칸쿤에서 류현이가 가리키던 사람들이 모두 묘하게 김태형을 닮아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별 생각 없이 내가 그렇다고 대답했던 것들도. 나는 핸드폰을 꾹 쥐었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혼자만의 일이야 상관없지만, 김태형이 연관되어 있다면 말은 달라진다. 잠깐 전화 좀 받고 온다는 내 말에 김태형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오해할 게 뻔하지만 지금은 일단 류현이가 왜 이러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오해야 그 다음에 풀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상황은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

 

미쳤어?”

 

지금 당장 자기한테 와 달라는 류현이의 협박에 가까운 부탁에 김태형까지 혼자 두고 온 나에게 류현이는 그랬다. 자기랑 사귀자고. 아니, 정확히는 사귀는 척을 하자고. 나는 그 말에 허 웃었다. 김태형을 볼모로 날 불러내서 기껏 한다는 말이 뭐? 사귀는 척을 해 달라고? 하지만 류현이의 얼굴은 진지했고 나는 그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김태형이 언론에 드러나는 게 싫을 테니까.”

?”

너랑 김태형이랑 사귀는 사이라고 기자한테 말할 거야. 네가 김태형 좋아하는 거 알아. 진짜로 사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증거야 얼마든지 많겠지.”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쟤가 지금 뭐라는 거야? 하지만 방금 전에 운 것 같은, 잔뜩 짓무른 눈을 하고서도 류현이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 뭐하자는 건데.”

기자가 나랑 그 사람의 사진을 찍었어.”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이랑 스폰 관계인 걸 알아.”

…….”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다음부터는 굳이 듣지 않아도 뻔했다. 그 남자는 약혼을 앞두고 있었고, 만약 이 건이 터진다면 그 남자에게, 그리고 그 남자의 회사에 치명적일 거고. 어쩌면 약혼에도. 연예인과 재벌의 스폰 관계야 공공연한 비밀이라지만 공식적으로 터지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니까. 그러니까말하자면 류현이는 그걸 덮을 다른 특종이 필요한 거였다. 거기에 가장 적합한 게 나였던 거고. 류현이가 나를 쳐다본다. 나는 이를 물었다.

 

정국아.”

…….”

미안해…….”

 

류현이의 짓무른 눈가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는 그런 류현이를 아무 말 없이 쳐다봤다. 지금 류현이는 자신을 위해 스폰 기사를 막으려는 게 아니었다. 오로지 그 사람을 위해서였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버려지고도 그 사람을 위해 그러고 싶어? 나는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류현이가 나를 쳐다본다. 그 눈에,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나도,

 

나는,”

…….”

그 사람이 중요해…….”

 

저렇게 될까.

 

미안해 정국아…….”

 

류현이가 울고 있었다. 류현이의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오늘로 두 번째였다. 그런데 이유는 그 때와 같다. 그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해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저렇게 될까.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 때문에 저렇게 힘들어하게 될까. 김태형이 날 좋아하지 않아도, 김태형이 다른 사람 앞에서 웃고 있어도 그 오랜 시간 동안 난 김태형을 놓지 못했는데.

 

미안해…….”

 

류현이의 우는 모습에 내 모습이 겹쳐 보여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열어 놓은 창문에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김태형은, 지금쯤 집에 들어갔을까.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류현이 때문에 달려온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자길 두고 간 나 때문에 화가 났을까.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을까.

 

진짜,”

 

만약 지금 김태형의 기분이 좋지 않다면,

 

짜증난다.”

 

그게 나 때문이었으면 좋겠다.

*

 

김태형에겐 차마 연락하지 못 한 채로 며칠이 흘렀다. 연락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변명할 말이 없었으니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해도 어차피 며칠 후엔 류현이와 내 열애설이 나갈 텐데. 내 방안에 틀어박힌 채로, 나는 멍하니 김태형을 생각했다. 몇 번이고 달려 나가고 싶은 것을 참았다. 전화해서 좋아한다고, 사실은 다 아니라고. 전부 다 고백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랬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아서. 김태형을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김태형에게 그걸 전부 다 말하고 나면 정말로 끝도 없이 깊어지게 될 것 같아서. 혼자 남겨지는 건 결국 내가 될 것 같아서.

내가 원하는 것 중에,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김태형은 영원히 쥘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김태형에게 다가가고 싶어질 때마다 스무살의 그 여름이 나를 괴롭혔으니까. 지독히도 앓았던 그 시간들. 욕심을 너무 일찍 알았고, 포기를 너무 늦게 알았던 어린 날의 나. 그래서 가벼운 척을 했다. 계속 다른 사람을 찾았다. 김태형이 나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 정도만. 나도 딱 그 정도의 감정만 유지하고 싶었으니까. 자존심이고, 이기심이라는 걸 알지만 상대방이 나를 원하는 것보다 내가 그 사람을 더 원한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결국 힘들 건 나잖아.

 

…….”

 

하지만 내가 하고 있는 게 최선이 맞을까. 나는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라리 TV를 보면 좀 머릿속이 조용해질까 싶어 TV를 틀었더니 TV 속에선 내 인터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운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들었어요!”

, 촬영은 다 끝났고, 이제 편집 막바지 단계에 있어요.”

 

TV 화면이 물빛처럼 번져서 뿌옇게 보여 나는 눈을 깜박인다.

 

이번 영화가 정국 씨한테 특별하다고 들었어요.”

, 처음으로 시나리오랑 연출에 참여했거든요.”

 

.”

 

나는 멍하니 웃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것마저도 김태형의 이야기였다. 나 진짜 답이 없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남주인공이 오랜 짝사랑을 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저건 내 얘기였다. 내 이야기이자, 김태형의 이야기. 이번 영화는 너도 시나리오에 참여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윤기 형의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게 그거였으니까.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 좋아해.’

…….’

정신 차려 보니까 이미 좋아하고 있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유치한 짓이었다. 일부러 그런 대사를 넣고, 연기연습을 해달라는 핑계로 김태형에게서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아무 의미도 없는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내가 먼저 좋아했어요.’

 

그런 식으로 비겁하게 굴었다. 유치하고, 비겁하고, 한심하게. 좋아한단 말은 감추고 거짓으로. 그래도 그게 안전하니까.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말했다가 되돌아오지 않을 말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나는 손으로 눈가를 꾹 눌렀다. 눈이 시렸다. 심장이 불안하게 뛴다. 목이 메인다. 이런 내가 한심하고, 짜증나고,

 

…….”

 

싫다.

 

…….”

 

그 때였다. 내 핸드폰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쏟아지는 문자와 메신저, 그리고 전화들. . 나는 멍하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결국 류현이와 내 열애설이 보도된 것 같았다. 소속사에도 말하지 않았으니 내 소속사도 지금쯤 뒤집어졌을 게 뻔하고. 나는 하 웃었다. 지금 이렇게 수없이 들어차는 소리와 문자들 속에 김태형의 것은 하나도 없어서. 당연한 건가. 나는 핸드폰을 꺼 버렸다. 머릿속은 이미 충분히 시끄러우니까. 창밖의 붉은 신호등이 깜빡, 깜빡 점멸하는 것이 빗방울에 번져 보였다. 아무런 소음도, 빛도 없는 공간에 빗방울이 창밖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또다시 찾아온,

 

…….”

 

김태형이 없는 여름 장마의 시작이었다.

 

*

 

윤기 형, 나 잠깐 형 핸드폰 좀…….”

 

열애설이 터진 다음 날, 나는 새벽부터 찾아온 매니저 형에게 핸드폰을 빼앗겼다. 사장님의 명령이라고 했다. 내 나이가 몇 살인데 핸드폰을 빼앗느냐고 항변해 봐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잠잠해질 때까지 당분간 연락은 모두 매니저 형을 통해서 하고 자숙하라는 거였다.

꼬박 이주일을 소속사에서 굴리는 대로 살았다. 어차피 중요한 일들은 전부 매니저 형을 통해서 연락이 왔고, 그 외엔 의미 없는 관계들뿐이어서 딱히 불편할 것도 없었다. 한 명만 빼놓곤. 어차피 할 수 있는 말도 없으니까 차라리 잘 된 건가. 그렇게 위안해 봐도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러다가 그 날, 문득 민윤기가 생각났다. 민윤기를 통해서라면 매니저 형의 눈을 피해 연락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매니저 형을 닦달했다. 나 윤기 형이랑 작업 관련해서 얘기할 거 있어. 윤기 형 작업실로 데려다 줘. 가서 뭐라고 하면서 김태형과 연락할 건지, 김태형한테는 뭐라고 할 건지. 그런 것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그냥 김태형이 보고 싶었다. 머릿속에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뭐야?”

 

무작정 민윤기의 작업실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민윤기가 아닌 김태형이었다. 순간 헛것을 보는 건가 했다. 그러나 곧바로 그의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고 나는 이를 물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다가가 김태형과 그 남자를 떨어트렸다. 오랜만에 닿는 김태형의 온기에 손끝이 따끔거렸다. 심장 박동이 핏줄을 타고 김태형한테까지 전해질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김태형의 팔을 꼭 쥐었다. 지금 당장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싫어하잖아요. 김태형 씨랑 무슨 사이신진 몰라도, 싫어하는데 계속 잡고 있는 건 무례한 거,”

무례한 건 그 쪽 아닌가? 무슨 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그렇게 끌고 가고.”

…….”

그리고, 그 쪽이야말로 태형이랑 무슨 사인진 몰라도,”

…….”

태형이는 나랑 더 친하거든요.”

 

그리고 그 남자는 김태형을 제 쪽으로 다시 끌어당긴다. 김태형은 쉽게 나에게 끌려온 것처럼, 나에게서 떨어진다. 너무 쉽게. 나는 손을 꼭 말아 쥐었다. 모래를 쥐었다 놓은 것처럼 손 안에서 잡히지 않는 온기가 허전하게 따끔거렸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표정 관리가 안 됐다.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눈앞엔 그토록 바랐던 김태형이 있고, 심장박동이 뇌를 울리고, 나에게 잡혀 있던 듯했던 김태형은 내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렸고. ,

 

그러니까 자기소개부터 할까요? 저는…….”

!”

…….”

, 아니, 석진이 형.”

 

그 때처럼.

 

그만 가자. 배고프다며.”

진이라고 부르는 거 오랜만이네!”

 

그 사람은 김태형을 향해 환하게 웃고, 김태형의 손은 그 사람의 팔을 잡아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김태형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나와 김태형 사이에는 간극이 있고 그 사람과 김태형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시간들이 잔뜩 쌓여 있다. 해야 하는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많은데. 전부 김태형과 관련된 것들로만 나는 가득 차 있는데 김태형은 그런 나에게 눈 한 번 제대로 맞춰 주지 않는다. 속에서 울컥, 뜨거운 실뭉치가 따갑게 날 건드린다. 한 번만,

 

윤기 형, 저 이만 갈게요.”

 

날 봐 주면 안 돼?

 

전정국 너도

 

나는 계속…….

 

잘 지내고.”

 

당신만 생각했는데.

 

…….”

 

결국 김태형이 그 남자의 팔을 잡아끌고 등을 돌리고, 나는 입술을 깨문다. 이대로 보내는 게 맞는데. 그게 내가 원했던 건데. 그냥 이대로 김태형을 보내고, 나는 김태형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고. 김태형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로, 아무 말도 할 필요 없고,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궁금해 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잘 됐네.”

…….”

나도 윤기 형이랑 밥 먹을 참이었거든요. 이왕 이렇게 된 거,”

 

할 수 있을 리가.

 

같이 먹죠.”

 

김태형이 나를 쳐다본다. 그럼 김태형을 마주보면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

 

아깐 실례했습니다. 태형이 형이 싫어하는 것 같아서 그랬던 건데.”

그럴 수도 있죠. 다른 사람들도 종종 오해하더라구요.”

많이 친하신가 봐요, 태형이 형이랑.”

특별한 사이긴 하죠. 안 지 오래되기도 했고.”

제가 괜히 두 분 식사하시는 데 끼어든 건가요?”

괜찮아요. 태형이랑은 뭐, 맨날 같이 먹는데요. 오랜만에 여럿이서 먹으니까 좋네요.”

 

김석진이라는 사람은 사사건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었다. 김태형과 어떤 사이인지 제대로 말해주지는 않으면서, 한 순간도 틈을 내어주지 않는다. 그를 떠 보기 위해 한 질문들은 전부 빗겨나가고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들만 돌아온다. 그러다가 그가 한 말에, 나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래서 제가 지금 태형이한테 잘 보여야 돼요. 태형이 뉴욕으로 데려가려면.”

 

뉴욕? 나는 김태형을 쳐다봤다. 하지만 김태형의 시선은 날 향해 있지 않다. 김태형은 나를 마주친 그 순간부터 계속 불안해 보였다. 왜 불안해하는 건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서, 그게 내 기분을 계속해서 바닥으로 치닫게 만들고 있었고. 아마도 내가 김석진의 앞에서 나와 자신의 관계를 말해버릴까 봐. 나는 이를 물었다. 뉴욕으로 데려간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도망가려고, ? 그 때처럼?

 

태형이 형을 뉴욕으로 왜…….”

, 그건 H 감독 영화

, 영화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그러나 김석진이 제대로 된 말을 하기도 전에, 김태형은 말을 가로챈다. 아직 뉴욕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듣지도 못했는데 영화라는 단어가 다시 내 심기를 건드린다. 태형이가 H 감독을 제일 좋아하잖아요. 근데 최근 개봉작을 아직 못 봤다고 해서. 그거 보러 가려고 했거든요. 꾹 물고 있었던 입술이 송곳니에 눌려 짓이겨진다. 혀끝으로 씁쓸한 피 맛이 느껴졌다. H감독의 영화. 내가 김태형에게 보러 가자고 했었던 거. 왜 하필……. 우연이라면 이런 거지같은 우연이 있을 수도 있을까.

 

, 다 먹었지? 이제 슬슬 일어나자. 진짜로 영화 시간 늦겠다.”

그거 그냥 취소하면 안 돼? 이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좀 실례잖아.”

 

더 거지 같은 사실은, 김태형이 자꾸만 이 자리를 피하려고 하고 있다는 거였다. 김태형은 지금 누가 봐도 불안해 보였고, 그에 반해 오히려 김석진은 여유롭다. 그 사실이 못 견디게 힘들었다. 자꾸만 초조하게 만들었다. 김태형이 나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숨기고 싶어 한다는 게. 내가 김태형에게 불안함이 된다는 게. 김태형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나라는 게.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결국 김태형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는 그런 김태형을 눈으로 좇지만 김태형은 끝끝내 나에게 시선 한 가닥 주지 않는다. 나는 다시 김석진을 쳐다본다. 김석진은 나를 보며 웃고 있다. 뭐가 저렇게 여유로울까. 김태형은 당신 때문에 저렇게 불안해하는데. 그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그 후에도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그렇게 하면, 김태형과 저 사람의 관계는 끝날까. 그렇게 되면, 혹시, 나에게도 다시 기회가 올까. 김태형이 나를떠나지 않을까.

 

정국 씨?”

…….”

 

그러나 나는 이미 안다. 그런 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거라는 걸. 어차피 김태형은 나를 보지 않을 거고,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고, 나는 김태형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이렇게 아무것도 묻지 말아야 하는데.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 하는데. 김태형이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면, 내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간다면 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데. 그러나 아까 김태형을 작업실에서 마주친 이후로 내 몸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나한테 할 말 없어요?”

 

화장실을 가는 길목에 얼마나 기대어 서 있었을까, 김태형이 보였다. 그리고 김태형이 보이자마자, 나는 김태형을 붙잡고 물었다. 나한테 할 말 없냐고, 나한테 해주고 싶은 말 없냐고. 나는 많았는데. 궁금한 게 너무 많았는데.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내 열애설에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기분이 나빴는지,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았는지. 나를 원망하지는 않았는지, 내가 궁금하지는 않았는지.

 

없어.”

하고 싶은 말도 없어요?”

 

그 사람은 누군지, 왜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인지. 나는,

 

전정국.”

…….”

없어. 너한테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그거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안 되는지.

 

…….”

 

그러나 나를 바라보지 않는 김태형의 표정은 충분히 그 대답이 되어 준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짜증스런 표정. 피곤한 것 같은 태도.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 날 레스토랑에 형 혼자 두고 간 거 미안해요.”

 

정도. 그리고 나는 입을 다문다. 김태형이 나를 쳐다본다. 지친 듯 한 눈. 피곤한 표정. 이 자리가 불편하다는 걸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태형을 놓을 수가 없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할 말은 그게 다고?”

…….”

 

말을 해버릴까. 좋아한다고. 그 기사들은 전부 거짓이고, 어쩔 수가 없었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내 자존심이었다고. 무서웠다고.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인정하기 싫었다고. 언젠가는 나 혼자 그 감정의 무게를 다 감당해야 할 것 같아서 무서웠다고. 욕심내지 않으면, 그래서 갖지 않으면 잃을 필요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태형이 형.”

전정국.”

 

당신을 좋아한다고.

 

너 나 좀 그만 괴롭혀.”

 

그러나 내 말들이 소리가 되기 전에, 김태형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닿는다. 나는 김태형을 쳐다본다. 김태형의 눈은 날 향해 있지 않고, 내 심장은 내려앉는다.

 

나한테 사과는 왜 해? 왜 자꾸 찾아와? 왜 자꾸 앞에서 거슬리게 알짱거려. 지금도, 왜 불러내는데. 밥은 왜 같이 먹자고 하는데. 너 그러는 거 진짜 짜증나.”

…….”

그냥 평생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머리가 멍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김태형이 나에게 하는 말들이 전부 다 현실일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 상관없으니까 나 좀 내버려 둬.”

…….”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하자.”

 

김태형의 차가운 말이 날카롭게 나를 찌르고, 혀를 굳힌다. 뭘 그만 해.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내가 뭘 했는데. 나는나는 아직 아무것도 말한 적 없는데. 내가 김태형에게 원하는 것들을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 없는데. 무서워서, 자존심이 상해서, 김태형이 도망갈까 봐, 이루어지지 않을까 봐온갖 이유를 다 갖다 붙이면서 입 밖으로 꺼낸 적 없었는데. 그런데 김태형은 또 도망가려고 한다. 그냥 이대로 옆에 있어주길 바라는 게, 그게 그렇게 큰 바람이야? 나는 이를 악문다. 눈앞의 김태형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 사람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나는 그랬다. 내가 김태형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 대신, 준비하지 않았던 말을 했다. 꽉 아문 턱에 힘이 들어간다. 김태형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닿고,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지만 김태형은 나에게서 돌아선다. .

 

맨날 가볍게 굴었잖아요. 형 가벼운 사람이잖아요. 왜 그 사람한테는 안 그래요?”

전정국.”

, 애인은 뉴욕에 따로 있으니까, 애인 몰래 그냥 즐긴 건가?”

 

그래서 나는 또 날카로운 말을 하고, 김태형은 나를 돌아보고. 이게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몸은 말을 멈추지 않고.

 

난 그것도 모르고. 민윤기 좋아하냐고나 묻고 있었네.”

.”

애인이 곧 뉴욕에서 돌아올 거라서,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이제야 이해가 되네.”

 

말의 온도가 차갑다. 머리가 멈춘 채로 나는 차가운 말을 내뱉는다. 이 말들이 김태형에게 상처가 될까?

 

애인은 알아요? 형이 나랑 잔 거?”

…….”

형이 이렇게 아무하고나 자고 다니는 거. 나랑 섹스 파트너 관계였던 거 다 아

태형아!”

 

내가 하는 한심한 말들을 김태형이 가만히 전부 듣고만 있던 그 때,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내 귓가를 울리고 김태형의 시선이 내 뒤로 향한다. 그리고 나는 손을 말아 쥔다. 차라리 다행일까. 나도 내가 하고 있는 말들을 멈출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하필 저 사람일까. 왜 하필 지금, 여기일까. 김석진이 나를 지나쳐 김태형에게 다가간다. 나는 멍하니 김태형을 감싸는 김석진을 쳐다본다. 그제서야 김태형의 새하얗게 질렸던 표정이 조금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진짜 영화에 늦을 것 같아서. 이만 태형이를 데려가도 될까요?”

…….”

할 말 끝났어. 가자.”

 

김석진이 나를 향해 웃으며 말하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리고, 잠시 후에 김태형이 대답한다. 나는 눈을 깜박인다. 김석진이 김태형을 붙든 채로 내 옆을 지나가고, 김태형이 멀어져 가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렇게,

 

…….”

 

김태형과의 마지막이 끝났다.

 

*

 

무슨 정신으로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윤기 형을 만났던가? 매니저 형이 집에 데려다 줬던가? 아니면 그냥 혼자 돌아왔을까.

꼬박 이주일을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매니저 형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핸드폰은 나에게 돌아온 지 오래였지만 방 안 어딘가에 처박아 둔 채로 아무 연락도 받지 않았다. 머리가 아팠다. 하도 말을 하지 않으니 목도 잠겼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몰랐다. 낮과 밤이 섞이고, 소음과 노랫소리가 섞이고, 온갖 감정들이 전부 뒤섞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고 TV를 보다가,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다가, 결국은 김태형을 생각했다.

 

…….”

 

차라리 잘 된 거라고 생각하려 했다. 여태까지 버텨왔으니까. 깊어지지 않으려고, 무거워지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벽을 치고 거리를 두고 도망다녔으니까. 그 결과로 김태형은 내 눈앞에서 사라졌고, 내가 찾지 않으면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김태형은 연예인도 아니고 꼭 마주쳐야 하는 사람도 아니니까 내가 찾지 않으면, 내가 먼저 찾아가지 않으면 영원히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내가 아닌 누군가와 평범하게 살겠지. 그럼 내 감정도 언젠가는 잦아들 거고 나는 그렇게 김태형을 잊을 거고, 감정도 기억도 흐려질 거고, 그러니까…….

 

씨발.”

 

나는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확 몸을 일으킨 탓에 머리가 시큰했다. 나도 모르게 꽉 깨물고 있었던 입술에서 짭짤한 맛이 났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나는 시큰거리는 눈에 손을 올렸다. 김태형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감정이 잦아들 거라고? 기억이 흐려질 거라고?

 

…….”

 

김태형을 좋아하는 것은 내 습관이 된 지 오래였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만 김태형을 떠올린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냥 그 감정이 선명해지는 것일 뿐 사라졌던 게 아니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이제는 김태형을 제외하고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감정이 습관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을 의미했다. 매 여름 나는 김태형을 생각했었다. 그 날의 온도, 그 날의 감정, 그 날의 기억, 그 날의 김태형. 김태형을 만난 이후로 김태형을 생각하지 않고 보낸 여름은 없었다. 애초에 불가능했는데. 왜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왜 버텼을까. 왜 자존심을 끝까지 가지고 있었을까. 심장이 시큰거렸다. 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을까. 그냥 솔직하게 말할걸. 자존심이든, 두려움이든 뭐든 그냥 좋아한다고 할 걸. 그 수많은 시간동안 어쩌면 한 순간은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솔직하게…….

 

…….”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침대에서 벗어났다.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김태형이 김석진을 좋아하든 말든, 이미 내가 늦었든 아니든. 어차피 후회할 거라면 말해야 했다. 나는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휴대폰을 들어 민윤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어지는 연결음 소리가 꼭, 뚝뚝 끊어져 내리는 장맛비같이 느껴졌다.

 

-여보세요?

윤기 형.”

-갑자기 뭐야, 이 새벽에.

지금,”

 

내가 김태형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멀리 떨어져 있는다고, 잊으려 한다고, 부정하고 무시한다고 흐려지고 잊혀질 감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김태형이 김석진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래서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나는 김태형을 좋아한다고. 나는 김태형이 갖고 싶고, 욕심나고, 김태형이 내 옆에만 있어 줬으면 좋겠고, 김태형이,

 

김태형 어디 있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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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정국 번외 1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카메라 앞에 서서 연기하는 내 모습이다. 그 때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시끄러운 시장 속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어린 아이였고, 나는 내 키보다 훨씬 큰 카메라와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울어야 했다. 사람들은 나를 보며 내가 울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속에는 엄마 역시 있었다. 내 엄마는 저기 내가 보이는 앞에 있는데, 이곳은 시장도 아닌데. 왜 내가 엄마를 찾으며 울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도 잠시 나는 바로 울음을 터뜨렸고, 감독의 만족스러운 컷 사인이 떨어진 후 날 바라보던 사람들은 날 보고 웃으며 날 칭찬했다. 어린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연기를 잘 할 수 있냐고. 천재임에 틀림없다고. 그리고 그 날 그렇게, 내가 살아가는 평생 동안 내 이름 앞에 놓일 수식어가 결정됐다.

 

*

 

나에게 세상은 두 가지여야 했다. 연기하기 위해 주어진 세상과, 내가 살아가야 할 실제 세상. 좋은 배우는 그 두 가지 세상을 제대로 분리해서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고, 그렇지 못하면, 연기 속 세상이 갉아 먹히든, 현실이 갉아 먹히든 둘 중 하나가 된다. 나의 경우는 후자였다.

내 연기는 훌륭했고, 최고였고, 그 나이 대 아이로서 완벽했다고 모두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행복했다. 모든 걸 가진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이 나를 향해 칭찬을 했다.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연기를 하냐고. 그래서 몰랐다. 내가 내 세계를 갉아 먹으며 연기를 하고 있는 줄. 현실과 연기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줄. 사실, 어린 아이에게 그건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다. 내 친구들은 모두 드라마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었고, 드라마 속 친구들이 내 진짜 친구들이었다. 드라마에서 싸운 친구들은 현실에서도 어색해졌다. 연기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랬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상을 휩쓸었다. 그 나이에, 내가 맡은 역할에 탈 수 있는 상은 모두. 그렇게 내 세계는 완벽했다. 내가 원하면 뭐든 가질 수 있었다. 당연했다. 모두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탈락이요?”

 

21, 처음으로 성인연기에 도전하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내가 원하는 감독의 새로운 작품. 상업 영화도 아닌 독립 영화. 오디션 같은 건 그냥 피상적인 것뿐이고, 전정국이 먼저 오디션 의사를 밝혀왔다는 것부터 이미 주연은 정해진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나 역시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받은 통보는 불합격. 그것도 모든 배역에서.

 

연기에 부족함이 없네요.”

감사합니다.”

그거 칭찬 아닌데.”

 

대학교를 갓 졸업한 감독이랬는데. 나는 오디션장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민윤기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 나를 마주한 사람 모두가 호의적인 표정을 보일 때, 그렇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 민윤기의 그 말 한마디에 오디션장이 술렁인다. 심지어는 민윤기 옆자리에 앉아 있던 메인 작가까지. 그러나 민윤기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연기를 못 하는 건 아닌데,”

…….”

경험하지 못한 건 티가 날 수 밖에 없어요.”

그게 무슨…….”

실패해본 적 없죠.”

…….”

뭔가를 잃어 본 적도 없는 거 같고.”

 

민윤기는 나에게 그랬다. 한 손으론 펜을 돌리면서. 실패? 나는 멍하니 민윤기를 쳐다봤다. 그런 걸 내가 해봤을 리가. 여태까지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었는데.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있자 민윤기가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이해해요, 나라도 그랬을 거니까.

 

경험해본 적 없는 걸 연기하는 게 보여요.”

…….”

딱 그 정도의 상실, 적당한 정도의 결핍.”

…….”

그래서 정국 씨는 저희랑은 안 맞을 것 같아요.”

 

아쉽네요, 마스크는 내 스타일인데. 민윤기가 웃으며 말했고 나는 그 순간 지금 이 오디션이 비공개 오디션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이미 유명한 배우라는 점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나는 차오르는 쪽팔림을 숨기기 위해 손을 꼭 쥐었다. 옆에서 메인 작가가 민윤기를 쥐고 흔드는 것이 보였다. ‘지금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차요?!’ 자기 딴에는 나에게 안 들리게 한다고 한 것이었겠지만 흥분해서 목소리 조절이 안 된 건지 가까스로 나에게 그 목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민윤기는 여전히 덤덤하게 말했다. ‘우리 영화랑은 안 맞아.’ 나는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자존심이 상했다.

 

왜 결핍이 있어야 돼?”

 

오디션장에서 집으로 차를 타고 가면서 난 그랬다. 차를 몰던 매니저 형이 글쎄……. 하고 말을 얼버무린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아누웠다. 솔직히 쪽팔리고, 자존심 상하고. 그랬다.

 

…….”

 

객기도 맞았고, 괜한 욕심도 맞았다. 그냥 하던 거나 하면 될 걸, 안 해본 걸 해보겠다고. 드라마도 아니고, 상업 영화도 아니고, 이름 없는 감독의 독립영화에. 그것도 해본 적 없는 성격의 역할로. 그러나 보여주고 싶었다. 나도 이제 성인이고, 내가 할 수 없는 건 없다는 걸. 그러나 그 시도는 시작도 못한 채로 망가졌다.

 

그러니까 드라마 하자고 했잖아. 이번에 박소현 작가 드라마에,”

그거 또 고등학생 아들 역할이잖아.”

시청률은 보장된 건데…….”

지겨워.”

정국아.”

 

말하자면 그런 거였다. 따먹지 못할 포도는 넘보지도 말라는 거. 처음부터 매니저 형은 내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걸 원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한데, 굳이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할까? 나는 이미 가진 게 많고, 내가 뭘 잘 할 수 있는지도 알고. 하지만 그러고 싶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원한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오기였다. 민윤기 감독의 오디션에서 떨어진 걸, 실패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성인이 된 이후의 첫 연기는 민윤기 감독의 영화여야만 했다.

그 때, 핸드폰이 조용히 진동했다. ‘김지현’. 저번 드라마에서 내 여자 친구 역할을 맡았던 동갑내기 배우. 역시나 드라마가 끝난 후에 자연스럽게 사귀게 된. 그러나 난 핸드폰을 덮어 버렸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

?”

나 휴가 갈래.”

?”

해외. 사람들 별로 없는 곳으로. 가서 좀 쉬다 올래.”

 

그러니까, 일종의 도망이었다. 내가 신경 써야 하는 것들로부터의. 민윤기 감독의 영화에 누가 캐스팅됐는지,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 질 건지, 그런 정보들로부터의. 그리고,

 

내가 돌아오고 싶을 때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들로부터의 도망.

 

*

 

.”

 

나는 내 앞에 펼쳐진 세상에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진짜 남자들밖에 없네. 나는 슬그머니 인파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시끄러운 소리가 고막을 울려댔다.

 

너 클럽 가지 마. 또 여자 문제 만들기만 해 봐!’

 

매니저 형이 비행기 티켓을 끊어주며 했던 소리였다. 나는 그 말에 그러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그 때는 그냥 정말 사람 없는 비교적 한적한 도시로 가서(완전히 시골은 싫었다) 쉬다 올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는 곧 지루해졌고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푹 쉬려고만 했던 내 생각은 이미 날아간 지 오래였다. 그래서 갔다. 게이 클럽에. 매니저 형과의 약속은 지킨 거였다. 여자 문제는 안 만들어질 테니까.

 

, 한국 사람.”

 

그런데 누가 알았겠냐고. 거기서 그 사람을 만나게 될 줄. 그 때의 나는 클럽 한 구석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차피 남자는 내 취향도 아니었고, 그냥 시끄럽고 사람 많은 곳에 가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멍하니 스테이지를 지켜보고 있던 나에게, 그 사람이 다가왔다. 그러니까,

 

맞죠, 한국인.”

 

김태형이.

 

진짜 신기하다. 나 여기서 한국인 처음 봐요.”

 

나를 만났을 때 김태형은 이미 취해 있었다. 나는 나에게로 다가온 김태형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 때는 그냥, 잘생겼다고만 생각했던 거 같다. 매력적인 사람. 김태형은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게, 그러니까 조금은 어색하게 내 옆에 앉았다. 클럽에 자주 오는 사람은 아닌가 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김태형은 내 옆에 앉아 조잘조잘 떠들었다. 평소의 나라면 술 취한 사람의 주정 같은 걸 듣고 싶어 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 날은 이상하게 가만히 앉아 김태형의 말을 듣고 있었다. 김태형의 목소리가 듣기 좋은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김태형은 외롭다고 했다. 가끔은 유학 온 걸 후회한다고도 했다. 힘들어서 다 때려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그러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게 되니까 그럴 수 없다고도.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김태형의 얼굴을 쳐다봤다. 길게 뻗은 속눈썹과, 커다란 눈, 예쁘게 말려 올라간 입술이나 코끝의 점 같은 것들. 그리고 난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김태형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췄다. 취하지도 않았었는데. 취한 건 내 눈앞에 있는 김태형이었는데. 내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김태형은 내가 입술을 떼고 난 후에도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나는 내가 하고도 놀라 덩달아 김태형을 마주 보고 눈을 깜박였고. 나 지금뭐 한 거지. 그러나 그 순간, 김태형이 웃었다. 그리고 그랬다.

 

나랑 잘래요?”

 

내가 그 순간에 뭐라고 대답했어야 했을까. 나는 갓 성인이었고, 여자친구는 많이 사귀어 봤지만 한 번도 관계를 가져 본 적은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까 원나잇 같은 것도 당연히 안 해 봤고. 그런데 내 첫 경험을 이런 곳에서? 방금 전에 만난, 전혀 모르는 사람이랑? 하지만 김태형이 날 보고 웃는 순간, 그런 것들은 전부 의미 없는 것들이 되어 버렸다. 김태형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이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만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래서, 어쩌면 이렇게 시작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김태형이 간절했다. 어떤 의미로든.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마, 그 때부터 나는 이미 김태형을 좋아하고 있었던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날 밤이 완벽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기억나는 건, 처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 나랑 잘래요?’라고 말했던 사람 같지 않게 김태형이 서툴렀다는 것. 그리고 관계를 가지는 내내, 내가 그를 붙잡았다는 것. 이상하게 김태형은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자꾸 내 손 밖으로 빠져나갈 것 같은 느낌. 내가 쥘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나는 몸을 섞는 내내 계속해서 그에게 말했다. 날 기억해 달라고.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고. 그의 이름을 물었고, 그가 지내고 있는 곳을 물었고, 그의 번호를 물었다. 처음에는 대답하지 않으려 했던 그도 내가 끈질기게 묻자 끝에 가서는 순순히 말해줬었다. 이름은 김태형, 지내고 있는 곳은 이 근처의 호텔, 번호도. 술에 취한 사람을 데리고 관계를 맺는다는 죄책감과 이 사람이 다음 날 아침 오늘의 일을 기억할까 하는 불안감이 그 시간 내내 나를 괴롭혔지만.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내 옆에 김태형은 없었고 나는 그가 내 옆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바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설마. 내가 어제 그렇게 부탁했는데. 하지만 혹시 어젯밤 일이 꿈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김태형은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진 후였다. 혹시 잠깐 나갔다 돌아오려나 싶어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려 봤지만 당연히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텅 빈 방 안에 어젯밤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내 옷가지들과 선명한 내 기억뿐이었다. 그날 오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김태형을 찾으러 시내에 나가 김태형이 말했던 그 호텔을 찾았지만 오늘 아침 이른 체크아웃을 했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라는 안내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나한테 이래?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남은 건, 정말 내 기억뿐이었다. 어쩌면 나에게 알려 줬던 그 김태형이라는 이름 세 글자조차 전화번호처럼 거짓말이었을지도 모르니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상실감이 한꺼번에 나를 덮쳤다.

 

…….”

 

인정하기 싫은데.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내가 또다시 실패했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나는 그 사람을 원했는데, 그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 자존심이 상했다. 인정하기 싫었다. 실패해본 적 없죠.’ 민윤기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왜 그런 걸 해 봐야 하는데. 지금 이게 뭐, 나에게 상실이란 감정을 알려주기 위한 신의 선물, 뭐 그런 거야?

 

의미부여 하지 마.”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당연히 느낄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아쉬움일 뿐이다. 상실감 같은 게 아니라. 나는 내 자신에게 중얼였다. 처음이었으니까. 좋았으니까. 그래서 지금 조금 아쉬운 감정이 드는 것 뿐, 조금만 지나면 잊어버릴 가벼운 감정일 것이다.

애초에 말이 안 되잖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이렇게 빨리 좋아하게 될 리가 없으니까.

 

*

 

여름휴가에서 돌아오고, 여름의 열기가 가시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될 때까지 나는 아무런 오디션도 보지 않았다. 처음에는 왜 그러냐며 나를 들볶던 매니저 형도 이내 포기한 듯 쉬고 싶을 때까지 쉬라며 날 내버려 두었다. 데뷔한 후로 한 번도 세 달 이상 쉬어 본 적이 없으니 아마 내가 지친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지쳤다라. 그런가? 지쳐서 그런 건가?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너무 오랫동안 쉬지 않아서, 그래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다가도 짜증나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 해 연말, 처음으로 아무런 시상식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로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나는 여름을 생각했다. 여름, 휴가, 바다, 소음, 그리고,

 

김태형.”

 

내가 맞았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시간이 지나자 김태형은 연해져 갔다. 지금에 와선 얼굴도 제대로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너무 희미해져 그 날 있었던 일이 꿈같을 정도로. 그러면서도 가끔씩 생각나긴 했다. 딱히 매개체가 없어도, 문득 문득. 얼굴이 어땠더라. 목소리가 어땠더라. 향기가 어땠더라. 제대로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떠올릴 때마다 이상하게 짜증이 났다. 몸 한구석이 간지러운 느낌. 아마 내 첫 경험이었어서 그런 건가. 나는 침대에 엎드려 있던 몸을 돌려 천장을 쳐다봤다. 그 사람도 나를 기억할까? 가끔 이렇게 김태형을 떠올리게 되면, 이 생각도 자연스럽게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그 사람도 가끔씩 나를 이렇게 떠올리고 그럴까. 나는 눈을 감았다.

 

짜증나…….”

 

김태형을 떠올린다고 해서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심장이 욱신거린다거나 울고 싶다거나 견딜 수 없는 건 아니니까 좋아했던 게 아닌 건 맞을 텐데.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왜 자꾸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걸까.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그런가. 너무 오래 쉬었나. 그치만 아직 아무것도 하기가 싫은데. 그냥 계속 침대에 누워 자고만 싶다.

 

평생 이렇게 떠오르면 어떡하지.”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는지 짓눌린 입술이 욱신거려서 손을 내 입술에 가져다 댔다. 막 울고 싶은 건 아닌데, 심장이 아픈 건 아닌데. 못 견디게 보고 싶고 싶은 것도 아닌데 그냥,

 

짜증나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잖아.

 

*

 

그동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어요?”

 

민윤기 감독이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민윤기 감독의 첫 번째 상업 영화. 꼬박 1년을 쉬고, 이제는 슬슬 새 작품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을 때 운명은 운명인지 민윤기 감독이 새로운 작품에 들어간다는 정보를 매니저 형이 가지고 왔다. 사실, 그 때까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 않았다면 나한테 말하지도 않았겠지. 어차피 떨어질 오디션이라도 한 번 보라는 심정이었을 거다.

 

“1년 동안 쉬었다더니 연기 연습만 엄청 했나.”

…….”

표정이 훨씬 더 복잡해졌네.”

 

나는 민윤기 감독을 쳐다봤다. 민윤기 감독은 살짝 웃고 있었다. 그 옆의 작가진들도. 나는 눈을 깜박였다. 저번에 민윤기 감독 앞에 섰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이건 나도 잘 아는 익숙한 분위기였다. 그러니까,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뻔한 결과일 때.

 

더 볼 것도 없네.”

…….”

앞으로 잘 부탁해요.”

 

민윤기 감독이 일어서서 내 앞으로 와 손을 내밀었고 나는 내밀어진 손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성공한 거다, 결국엔. 이거 봐. 내가 원하는 것 중에 내가 가질 수 없는 건 없잖아. 나는 민윤기 감독의 손을 마주 잡았다.

민윤기는 여러모로 신기한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는 내가 왜 처음에 하필 민윤기 감독의 영화에 그렇게 출연하고 싶어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인연이 있다면 이런 걸까 싶을 정도로. 민윤기는 적당한 선 안에서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굳이 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고,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은 물어보지 않는 사람. 그래서 편했다. 내 모든 것을 알려주지 않아도 되니까.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게 만들어 주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깊은 감정들을 곱씹어 생각하지 않아도 되게 해 주니까. 민윤기와의 첫 번째 작업이 끝나고, 나는 제일 먼저 김태형을 만났던 그 곳으로 갔다. 그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서 반, 그 때는 실패했던 오디션을 이번엔 성공했던 것처럼, 혹시 다시 김태형을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반.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때는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곳에 김태형은 없었고 나는 내 자신이 어이가 없어 웃었다. 당연한 거였는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애초에 그렇게 마주쳤던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부터가 바보 같은 거였지.

그리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그냥 이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젠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감정도 흐려졌다고. 여기까지 굳이 와본 건 그냥 가벼운 미련 같은 거고, 막상 와 보니까 아무렇지도 않다고. 제대로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끝내 버려서, 그 여파가 길었던 것뿐이라고. 그건 일종의 자기 세뇌 같은 거였다. 실패를 인정하기 싫은 자존심. 그래도 그 효과는 꽤 괜찮아서, 그 후로 몇 년이 흐르는 동안 내가 찍었던 영화에 나오는 OST 중에 마음에 들었던 한 노래 작곡가의 이름이 김태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재밌는 우연의 일치네 웃을 수 있었다. 나는 스무살 이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가벼운 연애를 여러 번 했고, 모든 게 그 전과 똑같았다.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걸 가질 수 있었고, 실패하지 않았고, 완벽했으니까. 그러나 그건 모두 내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은, 정말 한순간이었다.

 

*

 

인사해. 여긴 이번 영화 OST 맡아 주신 김태형 작곡가님, 여긴 배우 전정국.”

처음 뵙겠습니다. 김태형이라고 합니다.”

 

나는 멍하니 김태형을 쳐다봤다. 설마. 진짜? 김태형이 웃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그러니까, 진짜 김태형이. 그 현실감이 없는 명제에 나는 내밀어진 손을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김태형을 쳐다보고만 있다가 민윤기가 뭐 하냐는 듯 나를 치자 그제서야 눈을 깜박였다. 희미해졌다고 생각했던, 아니 희미해지다 못해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얼굴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한순간에 다시 선명해진다. 그 때와 조금 다른 듯 똑같은 색과 모양, 농도로.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내 눈앞에 있는 인영은 환상이라기에는 너무 선명했다.

 

나 몰라요?”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랬다. 나 몰라요? 난 당신을 아는데. 아주 오래 전에 만났잖아요, 우리. 그러나 내 눈앞의 김태형은 내 말에 당황하는 눈치다. 설마. 기억 못 하는 거야? 어이가 없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그 긴 시간을 버렸는데. 그런데 김태형은 오래전부터 내 팬이었다는 소리나 하고 있다. 오래 전이라니. 언제부터? 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모르는 척을 하는 건가, 정말 모르는 건가.

 

초면 아니죠, 우리?”

?”

내 영화 OST 참여한 거, 처음 아니던데.”

, 맞아요. 모르실 줄 알았는데.”

 

당황으로 물들었던 김태형의 한순간에 환해진다. 혹시나 해서 던져본 질문에 김태형은 너무나도 쉽게 대답한다. 그러니까, 정말 모르는 거다.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다. 나는 어이가 없어 허 웃었다. 잊어버린 거야? 그렇게 쉽게?

 

그 때는 왜 인사 안 했어요? 인사 들은 기억이 없는데. 오래 전부터 팬이었다면서.’

 

그래서 부러 짓궂게 말했다. 반쯤은 진심이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김태형이 자꾸 떠올라서 짜증났는데, 김태형은 날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었을 테니까. 내가 문득문득 김태형을 떠올리던 나날들 동안, 김태형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내가 아니었을 테니까. 나는 김태형을 찾으려고 노력했는데, 김태형은 날 알게 된 후에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으니까. 한순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었다. 이건 좋아서 이러는 건가? 그런데 왜 이런 감정이 들지? 이미 예전에 다 끝난 일인데. 의미부여 할 필요 없었던 일인데. 그냥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해서 질질 끌었던 것뿐이었는데. 그러니까 이 감정은 그냥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거 같아서 그랬어요.”

…….”

윤기 형 아니었으면 오늘도 나한테 아는 척 안 했을 거 같아서.”

 

씨발. 나는 속으로 욕을 읊조린다. 자꾸만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해서. 내 앞의 김태형이 웃는다. 그리고 난 깨닫는다. 말도 안 되는 합리화는 애초에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결국, 이건, 좋아하는 감정이다. 좋아하는 감정이었다. 나는 김태형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고. 그냥 오래된 미련은 무슨.

오랫동안 쌓아 올렸던 벽은 그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나는 그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희미해졌던 감정은 희미해진 게 아니라 오래된 기억이라 먼지가 쌓였던 거였다. 조그만 흔들림에도 먼지들은 모두 떨어져 나가고 그만큼 다시 선명해진 기억이 고개를 든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무서워졌던 거다.

 

김태형씨.”

 

그 감정이.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난 내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시작했던 사회생활이 그걸 알려줬으니까. 나는 소유욕이 심했고, 내가 원하는 건 뭐든 가져야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내가 다 가질 수는 없으니까. 노력해도 안 되는 건 분명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나 자신을 속이는 거였다. 방법은 쉬웠다. 거리를 두면 됐다. 그만큼 원하지 않도록. 그만큼 원하기 전에. 그런데 김태형은, 그 오랜 시간들 동안에도 잊혀지지 않았던 사람이었으니까. 사실은 간신히 희미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기억이었으니까. 그래서 무서웠다. 거리를 두려고 했는데, 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계속해서 날 속여 왔는데 나도 모르게 나는 계속 김태형을 생각했고 조금만 방심하면 머릿속은 온통 김태형으로 가득 찼었으니까.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몸을 섞어도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김태형으로 회귀하게 됐었으니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런 감정은 나를 여유롭지 못하게 만들 게 뻔하니까.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는 감정보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이 무거우면 내가 힘들 걸 아니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 나는 김태형을 놓지 못했지만.

그 날, 김태형은 나와 자신이 관계를 가진 줄 알지만 사실 그 날 김태형과는 아무 일도 없었다. 김태형은 잔뜩 취해 있었고, 나는 그런 김태형을 부축해 내 집으로 데려왔을 뿐이다. 이미 한 번 잘못 시작했었던 관계를 또 같은 식으로 잘못 시작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냥 없었던 일로 해요. 피차 깔끔하게.”

 

이 상황이 익숙한 것 같은 김태형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 짜증났다. 그러고 보면 그 때도 그랬었지. 날 두고 도망갔었지. 그리고 지금도 그러려고 하고 있고. 없었던 일? 웃음도 안 나왔다. 없었던 일이 되는 건 그 때 한 번으로 족하다. 김태형의 말에 제대로 시작하고 싶었던 내 다짐은 변색되고 나는 뾰족한 말을 뱉는다. 가벼운 관계, 가벼운 감정. 그런 걸 당신만 할 줄 아는 건 아니야.

 

나도 깔끔한 거 좋아해요. 그렇다고 없던 일로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서 나는 그런 식으로 김태형을 잡았다. 차라리 그 때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했으면 이렇게 멀리 돌아올 필요는 없었을까.



+





한 편에 다 올리려고 했는데ㅠㅅㅠ 너무 길어져서… (잘랐는데도 11000자가 넘어가는 어마무시한 분량)

다음 편은 최대한 빨리 오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항상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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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세상의 모든 순간에는 소리가 있다. 그리고 태형은 그 모든 순간의 소리를 음악으로 인식했다.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할까. 모든 소음은 박자가 될 수 있고, 모든 소리는 멜로디가 될 수 있으니까. 매 순간마다 기록되는 박자와 멜로디들이 시간이 지나 가라앉고 걸러지고 나면, 태형은 제 기억 속에 흘러가지 않고 남아 있는 소리들에서 음을 꺼내 곡을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제 기억의 용량이 작아져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이미 경험한 많은 감각들에 무뎌져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태형의 뇌리에 남아 있는 소리들은 점점 그 부피를 줄여 갔다. 처음으로 작곡을 배웠을 때는 채 다 음표로 기록하지도 못할 정도로 많았던 소리들은 이제 태형이 기억하려고 노력해야지만 겨우 머물러 있어 줬으니까. 그래서 태형이 제 고충에 대해서 선배들에게, 친구들에게 털어놨을 때 친구들은 그랬다. 그건 당연한 거라고. 감각이 무뎌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고, 기억력이 안 좋아지는 것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거라고. 모두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고, 반쯤은 우스갯소리로 그랬다. 그래서 태형은 그게 자연스러운 일인 줄 알았다. 앞으로는 계속 노력을 해야만 그 감정과 감각들을 기억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태형이라고 합니다.’

나 몰라요?’

 

정국을 처음 마주하기 전까지는.

 

, 알죠, 어떻게 몰라요, 저 되게 오래 전부터 팬이었는데.’

.’

 

그러고 보면, 정국과의 첫 만남은 그다지 평범하지만은 않았다. 애초에 TV에서 먼저 보고 좋아하던 연예인과의 첫 만남을 어떻게 평범하다고 정의내릴 수 있겠냐마는, 이상하게 그랬다. 공기의 흐름이 달랐다고 할까. 낯설지 않고, 익숙한 느낌. 예전에 만나야 했던 사람을 이제야 만난 것 같은 느낌. 우연찮게 친해진 윤기가 소개해주지 않았더라면 한낱 작곡가와 배우는 만날 일이 없는 인연이었을 텐데, 언젠가는 만났을 거라는 확신. 태형의 말에 정국이 터트린 짧은 탄성에서, 태형은 그런 걸 느꼈었다.

 

초면 아니죠, 우리?’

?’

내 영화 OST 참여한 거, 처음 아니던데.’

 

.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의 초면이라면 초면이 아닌 게 맞았으니까. 비록 먼 발치에서였지만 태형은 3년 전 영화의 뒤풀이에서 정국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 잊을까. 그 때 처음으로 첫눈에 반한다는 감각을 알게 됐는데. 그러나 굳이 그 날을 언급하지 않았던 건, 숨기고 싶은 감정을 가진 사람의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정국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김태형이라는 사람을 만나는 첫 순간일 테니까.

 

맞아요. 모르실 줄 알았는데.’

그 때는 왜 인사 안 했어요? 인사 들은 기억이 없는데. 오래 전부터 팬이었다면서.’

…….’

그 땐 내 팬 아니었어요?’

 

전정국이 이런 성격의 사람이었나? 계속해서 이어지는 정국의 질문에 태형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TV에서 보던 거랑은 좀 다르네, 싶었다. 태형은 살짝 눈을 굴렸다.

 

바빠 보이셔서, 기회가 없기도 했고…….’

…….’

 

잠시 간의 침묵 후 제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이유라기보다는 변명에 가까웠다. 진실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 정국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그 때 당시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던 정국의 애인이 불편했다고. 그 앞에 서서 자기소개를 하고, 처음 뵙는다며 팬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고. 정국에게 수많은 영화 관계자 중 제 팬인 한 사람으로 잠시 동안 머리에 앉았다가 잊혀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 전정ㄱ,’

농담이에요. 놀랐어요?’

 

그리고 무언가 미묘한 분위기에 윤기가 입을 연 그 순간, 정국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떠오르며 정국은 낯선 사람에서 제가 알고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 트란퀼로(tranquillo)에서 아니마토(Animato).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알았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 정국과 처음으로 눈을 맞춘 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아마 앞으로 정국과 마주할 시간들 전부가,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거 같아서 그랬어요.’

…….’

윤기 형 아니었으면 오늘도 나한테 아는 척 안 했을 거 같아서.’

 

흘러가지 않는 소리가 되어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거라는 걸.

 

*

 

일찍 알았으면 뭐, 하는 윤기의 웃음 섞인 말에 정국은 살짝 웃으며 저번 영화에서 OST 듣고 너무 좋았는데, 일찍 알았다면 이거보다 더 전의 영화들도 부탁했을 거야. 하고 말했다. 사실 그 날의 감정과 감각이 선명하게 남았다고 해서 구체적인 기억까지 선명한 것은 아니라 그 날 정국이 저에게 뭐라고 했는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확실한 것은 그 이후로 정국은 계속 제 옆에 있었다는 거였다.

 

윤기 형이랑은 언제부터 친했어요? 많이 친해요?’

언제부터 나 좋아했어요?’

유학은 얼마나 오래 했어요?’

내가 왜 좋아요?’

 

, 그리고 선명한 게 또 하나 있다. 신기할 정도로 정국이 제게 질문을 퍼부었다는 거. 보통은 반대의 상황이 정상 아닌가? 보통은 팬이 연예인한테 궁금한 게 많은 거잖아. 그러나 태형은 제가 정국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할 틈도 없이 정국의 질문에 대답하기 바빴다. 사실, 물어볼 틈이 있었다 해도 태형이 가진 질문들은 제 입 밖으로 내보낼 수 없는 것들이 대다수긴 했다.

 

같은 동아리였더라구요. 그 때부터 아는 사이는 아니었는데, 많이 친해졌어요.’

유학하고 있을 때 영화로 처음 알게 됐는데, 그 때부터였던 거 같은데.’

꽤 오래 했죠. 몇 년이나 있었더라.’

그냥 다 좋은데. 연기도 잘 하시고, 잘생기시고……. 하하.’

 

그 땐 그렇게 얼버무렸지만, 사실 태형의 진짜 대답은 그러게요.’였다. 왜 전정국이 좋은지, 태형 자신도 알지 못했으니까. 전정국이 왜 좋을까. 어디가 그렇게 좋았을까. 태형은 손으로 턱을 괴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아직까지도. 이렇게까지.

 

시차 적응 아직 다 안 됐어?”

, .”

피곤해 보이네.”

 

석진이 차가 담긴 컵을 내밀었고 그 순간 태형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더워 죽겠는데 웬 뜨거운 차야. 태형은 툴툴거리면서도 씩 웃으며 컵을 받아들었다. 뜨겁다곤 해도, 손대지 못할 만큼은 아니라 태형은 컵을 손으로 감싸 잡았다. 에어컨 바람이 슬슬 춥게 느껴지던 참이었다.

 

미팅 어땠어?”

좋았지, .”

별로 감흥이 없어 보이네. 안 좋아?”

 

미국에 온 지 일주일. 시차 적응을 하고, 석진의 지인들도 만나고, 가장 중요한 H 감독과의 미팅도 하고. 시차 적응을 하느라 더디게 보냈던 이틀을 제외하면 태형의 일주일은 정말 말 그대로 눈 코 뜰 새 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안 좋긴, 영광이지. 태형의 그 말에도 석진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지만.

 

너 미국에 온 이후로 제대로 웃는 걸 본 적이 없는 거 같아.”

…….”

괜히 데려온 건가?”

 

석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태형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그런 석진을 바라보던 태형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내가 선택한 건데.”

…….”

여기로 오는 게 최선이었어.”

 

나한테도, 전정국한테도. 태형이 한 박자 늦게 덧붙였다. 최선의 선택이라는 말은, 진실이었고 진심이었지만 석진은 얕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너 정말 괜찮겠어? 그 말에, 태형은 가만히 입에 컵을 가져다 댔다. 괜찮겠냐는 질문에는 진심으로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으니까. 미지근한 온도의 씁쓸한 차가 입술을 적시는 것이 느껴졌다.

 

너 계속 걔 생각 하지.”

…….”

…….”

.”

 

잠시간의 침묵 후, 태형이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바빴던 일주일 동안, 낮에는 정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뉴욕은 바빴고, 정신없었고,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더니 생각나지 않는 것도 같았다.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하는 사람들로만 둘러싸여진 환경도, 정국을 만나기 전의 유학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지게 했으니까.

 

…….”

 

그러나 밤에는.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고, 암막 커튼으로 꽁꽁 가려져 있어 뉴욕의 화려한 불빛이 보이지 않는 밤에는, 태형은 자연스럽게 정국을 떠올렸다. 아니, 떠올린 게 아니라 떠올랐다.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버릇.

 

처음에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려지면 지워내고, 떠오르면 묻어 두려 했다. 그러다가, 4일째 되는 밤부터는, 그냥 내버려 뒀다. 어차피 이제는 볼 일 없는 사이가 될 테니까. 더 이상 떠올릴 순간이 없을 때까지 전부 떠올리고 나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어서. 아니면 무뎌지기라도 할까 싶어서.

가까운 과거에서 먼 과거로, 먼 과거에서 다시 가까운 과거로. 두서없이 떠오르는 정국과 관련된 기억들 속에서 태형은 제가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기억들까지 꺼낼 수 있었다. 정말 이 정도까지 정국과의 모든 순간을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싶을 만큼. 그러다가, 태형은 어쩌면 정국과 제 관계가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틀어질 수 있었을지 모를 순간까지 떠올렸다. 결국엔 또 다른 상처로 남았지만.

 

아무도 없네.’

 

첫 번째는 정국과 파트너 관계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원래부터도 정국과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다지만, 요 며칠 유독 정국에게서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던 차였다. 그 날도 그냥 그렇게, 평범하게, 아무 일 없이 흘러갈 줄 알았는데. 그 평범함은 늦은 밤 정국이 태형의 집 문을 두드리면서 깨졌었다.

 

이 시간에 그럼 누가 있어.’

그러게요.’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

 

태형은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 오는 진한 술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서 이렇게 많이 마시고 온 거야. 여기까지는 또 어떻게 온 거야.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놓고, 왜 자기 집이 아니라 내 집에 온 거야. 한순간에 많은 질문들이 떠올랐지만 그 수많은 질문들은 그 순간 내뱉은 정국의 한 마디에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

.’

나랑 연애할래요?’

 

나랑 연애할래요? 정국은 그 말을 하며 씩 웃었다. 차라리 슬픈 얼굴이었다면. 그렇게 장난스럽게 웃지만 않았었다면. 조금만이라도 진지한 얼굴이었다면. 평소 태형을 기분 좋게 만들었던 정국의 향기보다, 술 냄새가 진하지 않았더라면. 그랬으면 그 때 태형의 대답은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너 취했어?’

조금요.’

장난치는 거야?’

글쎄요.’

 

하지만 상황이 그랬다. 태형이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국은 술에 취해 있었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고, 태형은 요 며칠간 아무 연락 없는 정국에 초조해 있었다. 그 때 그냥 모른 척, 그러자고 했으면 뭔가 달라졌을까? 더 비참해졌을까.

 

이런 장난, 치지 마.’

…….’

아침에,’

 

다시 얘기해주면 안 돼? 그렇게 묻고 싶었다. 술 취해서 말고, 장난스럽게 말고. 맨 정신으로, 지금보단 진지한 얼굴로. 다시 한 번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내 얼굴 어떻게 보려고.’

 

그러나 태형의 입에서는 그 말 대신 다른 말이 나왔다. 그리고 태형은 돌아섰다. 내 침대에 올라올 생각 하지 말고, 자고 갈 거면 소파에서 자고 가든가. 그렇게 말했다. 돌아보지도 않고. 어두웠던 집 안에, 오롯이 밝았던 현관 불이 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태형은 돌아보지 않았다.

 

 

잘 잤어요?’

 

그리고 다음 날, 일부러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나간 거실엔 멀쩡한 얼굴의 정국이 앉아 있었다.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어젯밤 일이 꿈이 아니었구나.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럼? 뭔가 달라졌을까? 태형이 멍하니 정국을 쳐다보고 서 있자, 정국이 어색하게 웃었다. 왜 그렇게 봐요.

 

어제, 미안해요.’

…….’

내가 실수했죠.’

 

차라리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으면 지금보단 나았을까. 태형은 쿵 떨어지는 심장에 입술을 깨물었다. 실수. 사과. 어제의 일이 그렇게 마무리된다. 정국이 천천히 일어나 태형에게 다가왔다. 기분 많이 나빴어요?

 

요즘 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

술만 마시면 자꾸 헛소리를 하더라구요. 그냥 잊어버려요.’

 

헛소리. 태형은 그 말에 쓰게 웃었다. 그 말이 그 무엇보다도 제게 미안해해야 할 말이라는 걸, 정국은 알까. 아마 죽어도 모르겠지. 태형이 피곤한 눈가를 손으로 꾹 눌렀다. 이젠, 연기를 해야 할 차례다.

 

알았으면 됐네.’

…….’

술 깼으면 가.’

화난 거 아니죠?’

내가 화를 왜 내.’

 

짧게 주고받아지는 대화 속에 진심은 없다. 태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돌아섰다. 나 작업해야 돼. 그 말을 끝으로 태형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건 태형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자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정국이 제 시야 안에서 사라지기 전에, 제가 먼저 정국의 시야 밖으로 벗어나는 것.

 

한심하다, 진짜.’

 

태형이 중얼였다.

 

*

 

태형아, 너 사람 만나볼래?”

 

뉴욕에 온 지 이주일하고도 반이 지난 때였다. 점심을 먹던 석진이 문득 꺼낸 말에, 태형은 물을 마시다 사래가 들려 기침을 했다. 뭐라고? 아직 기침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태형이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니, 그냥. 그 때, 크랭크인 파티 갔을 때. 너 소개시켜 달란 사람이 있었거든.”

무슨 뜻으로?”

여러 가지?”

 

석진이 고기를 마저 입 안으로 구겨 넣으며 태형을 쳐다봤다. 부담 갖진 말고. 그 사람도 꼭 그런 의미로만 소개시켜달란 건 아니었으니까. 석진의 이어진 말에 태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야, 그게.

 

일단은 작업 관련으로 소개해달란 거였어. 너 모를 때도, 내가 걔한테 네 곡 나온 영화 보여주니까 관심 있어 했었거든. 그런데 여러 가지라고 말한 건, 혹시나 부담스러우면 미리 거절하라고. 그 쪽으로 아주 뜻이 없어 보이진 않았거든. 눈빛이.”

 

내가 걜 몇 년을 봤는데. 말 안 해도 다 알지. 석진이 살짝 웃으며 말했고 태형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럴 생각도 못 했고. 태형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석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애 괜찮아. 진중하니. 아마 네가 부담스러워하면 바로 그만둘 거고. 사실 알아두면 좋은 애긴 하거든.”

…….”

애가 성격이 좋아서, 관계자들이 다 좋아해. , 말 안 했구나. 걘 배우. 5년찬데, 연기도 잘 하고, 감독들 사이에서 평도 좋아. 이번 영화 주연이라, 영화 올라가고 나면 아마 확 뜰 거야.”

…….”

만나만 봐.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잖아.”

아니, 아깐 나한테 다른 맘 있어 보인다며.”

애인이나 친구나 종이 한 장 차이지 뭐. 이제 앞으로 계속 미국에 있을 거라며. 그럼 친구도 만들어야지.”

 

그건 그런데태형은 어색하게 웃었다. 앞으로 계속 미국에 있을 거라며. 분명 뉴욕에 오기 전, 제 입으로 석진에게 했던 말이고 스스로 한 결심인데 그 사실이 아직까지도 낯설게 느껴졌다. 태형은 물컵을 내려놓았다. 어쩐지 혀끝이 썼다.

 

*

 

안녕하세요. 진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 때 석진의 말에 확실하게 동의를 했던 기억은 없는데. 태형은 저에게 말을 걸어 온 훤칠한 남자에 눈을 깜박였다. 미국에 온 지 3주째, 석진은 종종 태형을 파티에 데려가곤 했다. 주로 영화 쪽 관계자들이 많이 참석하는 파티인데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집에 박혀 있는 것보단 밖에 나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태형도 순순히 응해주고 있던 차였고. 그런데 이렇게뒤통수를 칠 줄이야. 태형이 어색하게 웃으며 제게 내밀어진 남자의 손을 맞잡았다. 태형도 이 사람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지. 이번 영화의 남자 주인공인데.

 

……. 만나서 반가워요. 저번에 인사를 못 드렸네요.”

제가 먼저 인사드렸어야 했는데요. , 진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한국 이름이 한우진이라.”

 

한우진이라고 발음하는 남자의 한국어 발음이 어색했다. 애초에 영어로 말을 걸기도 했고, 지금 보니 우진의 얼굴은 완전한 한국인이라기엔 조금 이국적이었다. 혼혈인가? 태형이 멍하니 생각하며 저보다 훨씬 큰 우진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우진이 그런 태형의 시선에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미국인이세요. 태어나기도 미국에서 태어났고, 그래서 한국어는 잘 못해요.”

…….”

혹시 제가 불편하신 건…….”

, 아니에요!”

 

태형이 살짝 웃었다. 정국을 만난 이후,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다가오는 상대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 자체를 하게 된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말이 부자연스럽게 나왔다. 정국과도 처음에 이랬을까?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정국을 떠올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태형은 다시 우진을 쳐다봤다. 두 눈에 가득 담긴 호의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신기하고 낯설었다. 혹시 헛된 착각을 품게 할까 봐, 정국의 표정을 추측하는 것은 항상 포기했었으니까. 태형이 웃는 얼굴을 하자 긴장으로 살짝 굳어 있던 우진의 얼굴이 풀리는 것이 보여서, 태형은 조금 더 눈을 접었다. 대화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 발코니에서 불어 오는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진이, 그러니까 석진이 태형 얘기 많이 했어요. 작업한 영화들도 보여 줬고.”

그랬어요?”

. 그런데 너무 좋은 거예요. 이런 말 하면 좀 그런가? 영화에서 음악이 그렇게 큰 역할을 하는 지 처음 알게 됐어요.”

, 정말요?”

지금 제 얘기, 재미없진 않죠?”

 

초조해하는 것도 느껴진다. 태형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런 기분이 너무 오랜만이라. 그러자 우진이 그런 태형을 쳐다보다 이내 따라 웃었다.

 

, 그런데 아무것도 안 마셔요?”

, 깜박하고. 바 어디 있어요?”

제가 가져다줄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는…….”

잠시만요!”

 

우진은 태형이 말리기도 전에 발코니를 나섰고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이내 웃어버렸다. 누군가의 호감을 사고 싶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솔직한 행동을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어쩌면 정국과 저도 이렇게 시작했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럼 연애할래요?’

 

두 번째. 태형이 생각하는 관계의 전환점이 될 수 있었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순간은 파트너로 지내게 되고도 시간이 꽤 지난 후였다. 태형이 처음으로 정국에게 파트너를 그만두자고 했던 날. 이런 관계는 그만하는 게 어떻겠냐는 태형의 말에, 정국은 그랬다. 연애할래요? 태형의 눈을 쳐다보면서.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런 관계는 그만 두자면서요. 그러니까 연애.’

진심이야?’

글쎄요.’

 

그 때, 태형은 처음 정국이 제게 연애하자고 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 때도 정국은 장난이냐는 태형의 물음에 글쎄요.’하고 답했었다. 그리고 그 날을 떠올림과 동시에, 박동을 빨리 하려던 태형의 심장이 멈추었다.

 

다를 거 없잖아요, 지금이랑.’

장난치지 마.’

왜 장난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생각해 보면, 그때와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정국은 술에 취해있지 않았고, 한동안 연락이 두절된 상태도 아니었으며, 정국의 몸에선 술 냄새 대신 태형이 좋아하는 정국의 향이 나고 있었으니까. 그 날, 태형이 바랐던 모든 것. 그러나 문제는 그 때와 달라진 것이 또 있었다는 거였다. 태형이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런 소리 하지 마.’

…….’

그러려고 만나는 거 아니잖아, 우리.’

 

그래서 태형은 부러 차갑게 말했다. 그 날에 받은 상처가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 태형을 괴롭히고 있었으니까. 태형의 말에 정국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정국을 쳐다보고 있던 태형은 먼저 정국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렇게, 그 날의 일은 없던 것이 됐고.

 

 

무슨 생각해요?”

.”


다시 한 번, 우진의 목소리에 의해 태형의 상념이 깨졌다. 서둘러 왔는지 우진의 볼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태형은 그런 우진을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또 저도 모르게 정국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태형은 우진의 손에 들린 세 개의 잔을 쳐다봤다. 뭘 저렇게 많이 갖고 왔지.

 

,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제가 마시고 있던 게 도수가 조금 높은 거라서. 혹시 몰라서 낮은 것도 가져왔는데…….”

…….”

 

태형이 조그맣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되게 다정하네. 아니, 이럴 땐 섬세하다고 하는 건가. 태형은 웃으며 다른 잔을 받아들려다 이내 우진이 들고 있던 잔과 똑같은 잔을 받아들었다. 우진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태형은 고개를 으쓱했다.

 

이 술이 맛있어서 마시고 있던 거 아니에요?”

그건 그런데, 술 잘 못 하신다고…….”

오랜만이라서, 별 일 있겠어요.”

…….”

 

우진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보인다. 태형은 달콤하면서 쓴 액체를 넘기며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웃었다. 시원한 바람, 안정된 분위기. 어쩌면꼭 매듭짓지 않아도 이렇게 흐려져 갈 수도 있을까. 태형은 멍하니 우진을 쳐다봤다. 어쩌면그러니까 어쩌면

 

밤바람이 참 좋죠. 한여름 같지 않게.”

 

이렇게 그냥, 그 위로 시간의 무게를 쌓아가다 보면, 그렇게 자연스럽게 덮여질 수도 있을까.

 

*

 

! 여기 있었네. S감독이 찾아.”

? 갑자기?”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대. , 너 좋아하는 영화 감ㄷ, 일행이 계셨네.”

전 괜찮으니까 가 봐요.”

 

태형은 웃으며 우진을 살짝 밀었다. 우진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망설이다 이내 태형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야기만 하고 금방 올게요. 그 말에, 태형은 난 신경 쓰지 말고 대화하고 오라는 뜻으로 살짝 웃어 보였다.

우진이 멀어져 가고, 태형은 얕게 숨을 몰아쉬었다. 생각보다 편안하고 유쾌했지만 어쨌든 처음 보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딱히 낯을 가리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태형에게도 많은 기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으니까. 바람이나 좀 더 쐴까. 태형은 아예 건물 밖으로 나섰다. 화려한 조명이 켜져 있는 시끄러웠던 홀과는 다르게 고요하고 은은한 불빛의 정원이 시원한 여름밤에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앞으로 더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우진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의 기저에 있는 의미를, 태형이 모르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술을 마셔 뜨끈해진 볼을 감싸며 태형은 천천히 걸었다. 도수가 꽤 높은 술을, 기분이 좋아 조금 빨리 마셨던 게 지금에서야 몰아오는 기분. 그런데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태형은 살짝 미소 지었다.

우진은 편안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야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지 아는 사람이었고, 어떻게 해야 자신이 매력적으로 비치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태형은 우진에게서 매력을 느꼈다. 좋은 사람이라던 석진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그 잠깐 사이에도 우진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정하고, 솔직한 사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모두 내보여주는 사람.

 

편안할까.”

 

우진과 연애를 하게 된다면. 태형이 조그맣게 중얼였다. 연애. 안정적이고 편안한 연애. 연애가 꼭 설레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굳이 죽도록 상대가 보고 싶고, 좋아하는 마음이 벅차오르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도. 그런 것도 연애의 한 종류니까. 그래서. 그러니까. 우진이라면, 그런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속 끓이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이대로 우진과 연애를 하게 되면, 정국을 잊을 수 있을까. 술기운에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태형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눈을 감았다. 여름밤의 향기가 짙어졌다. , 꿈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쉬고. 태형은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숨을 멈추었다.

 

김태형.”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정국의 목소리가 태형의 귓가를 울리고, 익숙해서 심장을 벼랑 끝으로 떨어트리는 그 향기가 바람에 실려 태형에게 닿는다. 이건, 환상일까? 태형은 홀린 듯 제 눈앞에 서있는 인영을 바라봤다. 오늘 하루 종일 전정국만 생각했던 내가, 그러면서 자꾸 지워내려고 애쓰는 내가 너무 안타까워서. 술에 취한 내 자신이 나에게 주는 위로 같은 걸까?

 

태형이 형.”

…….”

아무것도 안 바랄게요. 다른 사람이랑 연애해도 좋고, 나랑은 잠만 자도 좋고. 나한테는 눈길도 안 줘도 좋아요. 그러니까,”

 

현실감이 없었다. 술에 취해 흐려진 시야가 태형의 머릿속처럼 울렁였다. 정국이 태형에게 느릿하게 다가오고, 여름밤의 농도보다 정국의 농도가 더 짙어진다. 태형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그런 정국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한테서 도망가려고 하지만 마요.

 

태형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눈을 감았다 떠도 전정국은 사라지지 않는다. 더 또렷해지고, 가까워지고, 짙어질 뿐이다. 이 감각들이 전부 환상이라면 이건 위로가 아니라 벌이었다. 내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제가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할 상실감이, 태형은 벌써부터 무서웠으니까.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국이 한 걸음 더 가까이 태형에게 다가갔다. 태형은 숨쉬는 것도 잊은 채 정국을 쳐다봤다. 꿈일까, 환상일까. 전정국이 손을 뻗어 내 팔을 잡고, 따뜻한 체온이 내 살갗에 닿고. 심장이 박동을 빨리 하기 시작했는데. 그런데 내 눈앞의 전정국이 전부 내 환상이라면,

 

내가,”

 

전정국이 하고 있는 이 모든 말들도 전부,

 

졌어요.”

 

내 바람이 만들어 낸 것들일까.



+


다음 편은 정국 번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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