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좆같은 연애

 

이 비극적인 이야기의 서문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까. 그래, 내가 17살에 했던 첫 연애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물론 내 첫 연애가 17살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연애가 그 연애였고 좆같은연애의 시작 역시 그 연애이기 때문에 편의상 첫 연애라고 칭하도록 하겠다.

나는 잘생겼다. 아니 비극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대놓고 초장부터 이게 무슨 재수 없는 소리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이것은 하늘을 우러러 한 치의 거짓과 과장이 없는 팩트다. 나는 잘생겼다. 나의 이 잘생김은 내가 유치원에 다니고 있을 때부터 빛을 발했는데, 어느 정도냐면 당시 내가 다니던 유치원에는 같은 달의 생일인 아이들을 하루에 몰아 합동 생일 파티를 열어 주는 관습이 존재했는데 그 컨셉이 전통 결혼식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사이비 종교 단체도 아니고 웬 원생들의 의사 따위는 사뿐히 무시하고 치러지는 합동결혼식인가 싶긴 한데, 그 때 나를 포함한 아이들은 어렸으므로 딱히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았고 그 의식은 매 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합동결혼식에 의의를 제기한 아이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나를 사모하던 한 여자아이였다. 내 생일은 12월이었고 그 여자아이는 생일이 12월이 아니었기 때문에 테크니컬리 그 여자아이와 나는 합동결혼식을 치를 수 없었다. 그러나 나를 향한 그 여자아이의 의지는 꽤나 확고했고 절대로 내 옆에 제가 아닌 누군가를 세울 수 없다는 그 아이의 땡깡에 결국 그 아이는 나와 합동결혼식을 치룰 수 있었다. 지금 와서는 그 여자아이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여자아이가 ‘()형아, 나랑 나중에 꼭 결혼해야 해.’ 하는 말에 내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나 역시 그 여자아이가 조금은 마음에 들었던가 보다. (생각해 보니 그 때의 사진이 남아 있을 텐데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모르겠다. 찾게 되면 증거자료로 후첨하겠다.)

, 이야기가 잠시 딴 곳으로 샜는데 아무튼 그 정도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잘생겨서 인기가 많았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유치원과 초등학교 때의 가벼운 썸도 연애로 친다면 첫 연애도 17살이 아니었던 거고. 그러나 언제까지고 지속될 줄만 알았던 나의 이 순탄한 인기 가도와 연애는 내가 17살이 되던 해 시작과 동시에 찬란하게 무너졌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나의 인기 고공행진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고, 나의 연애가 이때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01. 김태형의 사정

 

위에 말했듯이 나는 인기가 많았고 살면서 단 한 번도 고백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밀려드는 고백을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초등학교 때 나를 두고 경쟁하는 여자아이들의 치정싸움에 지친 나는 여자아이들에게서 벗어나겠다는 일념 하에 남자 중학교로 진학했고 여자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혹시 이게 문제였을까? 그렇게 내 연애의 암흑기를 끝내고 나는 공학으로 진학했고 입학한 지 3개월도 안 되어 한 여자아이에게 고백을 받았다. 그 아이는 2반에서 반장을 맡고 있을 만큼 인기 많고 똑똑하고 예쁜 여자애였다. 그 때의 나는 연애가 하고 싶었고, 그 여자아이는 충분히 괜찮았기 때문에 나는 웃으며 그 고백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는 나의 연애 암흑기가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그게 내 진정한 연애 암흑, 아니 칠흑기의 시작일 줄.

 

미안해, 태형아. 우리 헤어지자.’

?

 

그 여자아이와 사귄지 정확히 101일이 되던 날이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갑자기 왜? 나는 재빨리 어제의 데이트를 리와인드하기 시작했다. 어제 100일 기념으로 영화를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선물도 주고받고 어둑해진 공원에서 처음으로 로맨틱하게 가벼운 뽀뽀도 했다. (키스까지는 뭔가 부끄러운 마음에 하지 못했다) 그 후엔 여자애의 집 앞까지 데려다 줬지. 여자애는 날 보고 웃으며 조심히 들어가라고 했고, 나 역시 웃으며 뒤돌아섰다. 그리고 집. 모든 게 완벽했는데!? 나는 되감기를 마치고 다시 ()여친을 쳐다봤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선물이 마음에 안 들었나? 아님 영화가? 어제 먹었던 스파게티가 입에 안 맞았나? 필사적으로 말이 되는 이유들을 다 갖다 붙여봤지만 그 중에 납득이 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였다. 그러나 내 어이 털린 얼굴에도 그 여자아이의 표정은 단호했다. 미안해.

 

아니, 이유라도 알려 줘.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미안해.

 

전 여친은 입술을 깨물고, 멍하니 서있는 나의 손에 내가 그녀에게 주었던 100일 반지를 꼭 쥐여 주곤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멀어져 갔다. 나는 차마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내가 차이다니. 그것도 이유도 모르고. 나는 멍하니 내 손에 쥐여진 반지를 내려다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에 이니셜이나 새기지 않는 건데. 나는 반지를 손에 쥐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엎어졌다. 슬픔이나 억울함보단 의아함이 더 컸다. 대체 왜? 좋았는데? 우리 뽀뽀도 했잖아. 키스도 아니니 내 스킬이 부족해서도 아닐 거고. (단순한 입술 박치기에도 스킬이 필요한 것인가?!) 그렇게 나는 그 날 밤을 꼬박 새웠다. 나는 원래 궁금증이 있으면 잠을 잘 못 자는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문자답을 해 봐도 내 궁금증은 혼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 다음 날 친구에게 물어 봐도 그 해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의문은, 꽤나 가까운 시일 내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풀렸다.

 

대박. 니 전 여친, 레즈래.’

 

? 이별의 아픔이 채 씻기기도 전에 들려온 청천벽력에 나는 멍하니 칠판을 쳐다보다 그대로 박지민을 쳐다봤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그러나 박지민의 눈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더 말해보라는 뜻을 담아 박지민을 쳐다봤고 박지민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 학교에 소문 다 났어. 1반 애가 서유진(17, , 태형의 전 여친)이랑 한소희(17, , 3반 반장)랑 불 꺼진 미술실에서 뽀뽀하는 거 봤대.’

말도 안 돼.’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 2반으로 향했다. 설마. 그럴 리가. 5반에서 2반으로 가는,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에이, 헛소문이겠지. 설마. 말도 안 돼. 류의 말들을 생각하며 애써 웃었다. 설마, 나랑 헤어진 이유가 갑작스럽게 성 지향성을 깨달았기 때문이겠어? 그러나 심호흡 후 2반 문을 차분히 열어제낀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3반 반장과 보란 듯이 손을 잡고 있는 내 전 여친이었다. 나와 100일을 사귀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환한 미소를 지은 채로.

 

서유진.

태형아.

잠깐 얘기 좀 해.’

 

나는 나도 모르게 성큼 걸어가 전 여친의 앞에 섰고 내 전 여친은 꽤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봤다. 여전히 손은 한소희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나는 잠시 시선을 꼭 맞잡은 두 손에 두었다가 다시 서유진을 쳐다봤다. 서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인적이 드문 학교 뒤편으로 갔다. 서유진이 나에게 고백을 했던 그 곳으로. 아니 얘는 아는 장소가 여기밖에 없나? 장소 선택을 해도 참. 그러나 나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서유진이 입을 엶과 동시에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미리 말 못 해줘서 미안해.

…….

너무 놀랄 것 같아서 말 못 했어. 나 소희 좋아해.’

 

확인 사살 완료. 나는 뭐라 대꾸도 못한 채 그대로 굳었다. 사실 서유진이 나한테 미안할 건 없다. 이미 헤어진 마당에 뭐가 미안해. 물론 너무나 갑작스럽게 차인데다가 일주일도 안 돼서 새로운 애인을 사귀긴 했지만. 나는 그냥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던 건데 서유진은 그런 내 태도를 다른 쪽으로 해석했던 건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도 몰랐어.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건 줄 알았어. 태형이 너는 멋있고, 예쁘고, 잘생겼으니까. 너랑 사귀다 보면 소희를 잊을 수 있을 줄 알았어.’

…….

그런데너랑 어제 뽀뽀를 하고 나니까 알겠는 거야.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건 소희였다는 걸.

…….

태형이 너에겐 너무 미안해. 뭐라 할 말이 없다…….

 

나는 어이가 없어 절로 벌어지는 입을 채 다물지도 못한 채로 서유진을 쳐다봤다. 딱히 화가 났던 건 아니다. 그냥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뽀뽀가한 중생으로 하여금 자신의 진정한 성 지향성을 깨닫도록 인도했다는 것인가? 내 소중한 첫 뽀뽀가? 이걸 좋아해야 돼, 말아야 돼? 나는 입을 뻐끔뻐끔 움직였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나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고 그래서 나는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는, 찌질한 전 남친의 표본 같은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날 좋아하긴 했니?’

?’

…….’

좋아했어. 친구로.’

…….’

태형아, 넌 정말 나한테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야.’

 

너에게 난 그저 연인이 아닌 우정이 편했을지도 몰라 I’m a love loser너 땜에 너무 아파 너 땜에 너무 아파 너 땜에 너무 아파 헷갈리게 하지 마……. 그 순간 언젠가 들었던 남자 아이돌의 노래 가사가 머릿속에서 재생됐고 나는 고개를 떨궜다. 이 노래가 이렇게 슬픈 노래였던가…….

 

태형아.’

행복해라…….’

 

결국 끝까지 인소 남주 같은 모먼트로 나는 눈물을 삼키며 돌아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웬 허세인가 싶은데, 그 땐 그게 최선이었다. 그렇게 둘은 내가 졸업할 때까지도 알콩달콩 사귀었고 나는 그 충격에 한동안 연애를 하지 못했다. 이것이 나의 첫 연애 스토리이다.

 

, 그럼 두 번째로 넘어가 보자. 나의 두 번째 연애는 이듬해 여름이었다. 원래도 잘생긴 걸로 유명했던 나는 레즈의 전 남친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더욱 더 유명해져 전교생이 아는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 학교에서 나는 차마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귈 수 없었다. 사실, 그럴 생각도 못 했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그 일이 나에게는 꽤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상처는 새로운 사랑으로 치유하는 법. 나의 두 번째 여친은 나보다 한 살 연상으로, 독서실에서 만났다. 그녀는 호랑이도 무서워한다는 고3이었지만 처음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고백했고 나는 그 고백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고 3이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데이트를 자주 하지는 못했으나 우린 나름 깨가 쏟아지는 연인이었다. 공부를 하다 잠시 쉬러 나왔을 때 삼각김밥과 라면을 나눠먹으며 사랑을 키우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연인. 그렇게 데이트다운 데이트는 몇 번 하지 못한 채로 그녀는 수능을 치렀고 그녀가 지망하던 모 여대에 붙은 이후 우리는 매일같이 붙어 다니며 데이트를 했다. 그녀가 대학생이 된다는 사실이 조금 불안하기는 했으나 그녀가 여대로 간다는 사실이 나에게 위안이 되어 주었고 그렇게 그녀로 인해 상처만 남은 나의 첫 연애가 치료되는가 싶었다. 그러니까, 3월이 지나 4월의 초입 그녀의 학교 앞 카페에서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받기 전까지는.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

그리고,’

아니,’

여자야.’

 

방금 뭐라고 했……. 나는 그녀가 다니는 여대 앞 카페에 앉아 마시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그대로 다시 컵으로 리필했지만 그녀는 그런 내 모습에도 눈을 피하지 않고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사귀는 건 아니야.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해야 할 것 같았어.’

누나, 그게 무슨 말

미안해, 태형아.’

 

세상이 나한테 이럴 수가 있을까? 신은 정녕 나를 버린 것인가? 여대로 가서 안심했더니. 여대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미팅 한 번 나가지 않기에 내심 안심하고 좋아하고 있었더니. 세상에 여대로 간 것이 가장 큰 위험 요소였을 줄이야.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고 2분 전까지만 해도 내 여친이었던 전 여친은 여긴 내가 낼게,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이 때, 나는 또 하나의 명대사를 남기게 된다.

 

날 갖고 논 거예요?’

태형아.’

…….’

 

너 담담 그저 당당 날 차 빵빵 뭐니 뭐니 난 네게 뭐니……. 장난해 너 도대체 내가 뭐야 만만해? 날 갖고 노는 거야……. 1년 전의 악몽이 다시 나를 슬금슬금 휘감기 시작했다. 그 남자아이돌의 노래 역시 다시 내 머릿속에서 리플레이되기 시작했고. 이쯤 되면 내 인생의 주제가다.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에 당황한 전 여친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 거 아냐, 태형아. 널 정말 좋아했어. 단지…….’

…….’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너무 뒤늦게 깨달아서 그런 거야. 다 내 잘못이야.’

 

내 전 여친은 날 위로했고 나는 결국 고개를 떨궜다. 시발 이게 뭐야……. 이거 컬투쇼에 제보해도 되겠다고……. 그러나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까. 게다가 아예 다른 성별을 좋아한다는데. 나는 결국 그렇게 그녀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현타가 온 나는 그렇게 고3 생활을 도 닦는 수도승처럼 보낼 수 있었고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며 공부에만 전념했다. 그 덕분에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고. 아무튼 그 악몽 같은 연애사를 뒤로하고 대학교 입학식과 미터, 새터를 치르면서 나는 다시금 새로운 희망에 부풀었다. 그래, 고등학교는 고등학교로 미뤄 두고, 이제 새로운 역사를 쓰는 거다.

 

그래서 나는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내 상대를 찾아 나섰다. 이번에는 정말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자애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나의 인기는 역시나 식을 줄을 몰랐으므로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많았고 미팅에 나갈 때마다 나는 거의 모두에게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신중했다. 얼마나 신중했느냐면 1년이 지나도록 연애를 하지 않을 정도로 신중했다. 그 누구를 봐도 자꾸만 태형아, 미안해. 사실 나 여자 좋아해.’하고 말할 것만 같아서. 그러나 내가 2학년이 되던 해 3월에 나간 미팅에서, 나는 나에게 유난히 강력하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었고, 결국 내가 고백을 하려고 했던 날 그녀에게 고백 받았다. 1년 동안 열심히 고민한 만큼, 그리고 나에게 그렇게나 열정적으로 대시를 한 만큼, 이 사람만큼은 정말로 나를 좋아해서. 남자인 나를 좋아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내 세 번째 연애를 시작했다.

그녀와의 연애 역시 순조로웠다. 함께 벚꽃 축제를 즐기고, 놀이공원으로 데이트도 가고. 술도 마시고, 맛집도 찾아다니고. 전혀 이상할 것 없는 평범한 대학생의 연애. 그래, 이것으로 나의 징크스와 악몽이 끝나는구나. 성인의 연애라기엔 스킨십의 진도가 조금 느린 것 같긴 했지만 나 역시 키스도 못 해본 채였고 그녀 역시 풋풋한 새내기였기에 나는 그것을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이 바로 불행의 전조일 줄.

 

오빠, 미안해.’

…….’

 

대학생활의 꽃이라는 축제가 열리기 직전, 정확히 말하면 하루 전 날이었다. 축제 때 언제 만나 뭘 할지까지 다 정해 놨는데 축제 전날 밤, 나는 그녀에게서 이별을 통보받았다. 이번엔 학교 앞 작은 술집이었다. 나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트렸고 쇠로 만들어진 젓가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오빠가 놀랄 거 아는데, 사실 나…….’

여자 좋아해?’

어떻게 알았어?’

 

, 시발. 나는 나도 모르게 욕을 읊조렸다. 물론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한 것은 아니고, 속으로. 이제는 눈물도 안 나왔다. 이쯤 되면 난 거의 뭐의사나 다름없는 거 아닌가? 혹시 당신의 성적 지향성이 궁금하신가요? 확신이 안 서신다구요? 국비대학교 입구 1번 출구에서 김태형을 찾아주세요! 쉽고 빠르게 판단해 드립니다!

 

여기 젓가락 좀 새로 주세요.’

 

나는 놀란 눈의 그녀를 앞에 두고 자연스럽게 젓가락을 새로 주문해 눈앞의 닭발을 집었다. 모든 것이 놀랍도록 차분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예상했던 바다. 내 차분하고 침착한 태도에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티가 났어?’

아니. 네가 말하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어.’

그럼 어떻게…….’

 

내가 레즈들만 골라 사귀는 쓸데없고 필요 없는 능력이 하나 있거든. 나는 그 말은 애써 목 뒤로 삼키며 소주잔을 들었다. 목이 탔다. 속도 탔다. 진짜 사업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디나이얼들이여 나에게 오라 내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내가 아무 말 없이 닭발을 씹자 그녀는 내 눈치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사실 알고는 있었어. 그런데 인정하기 싫었어. 그래서미팅도 나가 보고

나 좋아하는 척도 하고.’

좋아하는 척은 아니었어! 정말 좋아했어. 그냥,’

나보다 여자가 더 좋았던 거겠지.’

…….’

 

그래. 알아. 다 이해해. 나는 부처의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마지막 한 잔을 내 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간적으로 이 자리는 네가 사라. 어이없는 상황도 세 번이나 겪어 보니 내성이 생겼는지 나는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동작들을 수행했다. 가방을 챙기고, 겉옷을 챙기고, 뒤를 돌아 술집을 빠져나간다. 혹시 이건 오랜 기간 나를 두고 촬영하는 예능 프로그램 같은 건 아닐까? 트루먼 쇼 그런 거그게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이럴 수가 있나이게 내가 바랐던 연애 꿈파란만장 love story 다 어디 갔나……Drama에 나온 주인공들 다 저리 가라 터덜터덜 자취방으로 향하는 내 머릿속에선 그 남자아이돌의 노래가 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

 

시이이이이이이발!!!!!!!”

 

나는 울먹이며 테이블을 손으로 쿵 내리쳤다. 시끄러운 주점 안의 시선이 잠시 나에게 닿았지만 사람들은 이내 흥미를 잃고 다시 자신들의 화제에 집중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테이블을 쿵 쳤다. 이번에는 내 손이 아닌 머리로. 내 앞에 앉아 있던 박지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운명인가 봐. 받아들여라,”

무슨 운명!? 뭐 이따위 좆같은 운명이 다 있어?!”

 

한 번은 우연이다. 두 번은 우연의 일치다. 그런데 세 번은?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박지민과 함께 내 앞에 앉아 있던 김남준이 내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김남준은 내 대학 동기로, 내 이 비극적인 연애사를 전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사실 김남준에게도 말하려고 말한 것은 아니었는데, 새터에서 술에 취한 내가 과대였던 김남준에게 내 과거 연애사를 주절주절 얘기하면서 친해지게 됐다. 정확히 말하면 내 술주정을 들어준 유일한 이가 김남준이었다.

 

태형이 많이 취했네.”

안 취했어!!”

 

술 취한 이의 술주정이 아니라, 정말 나는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말짱했다. 내가 아무리 술에 약하다 해도 맥주 한 병으로 취하지는 않으니까. 다만, 나는 그냥 술에 취하고 싶은 기분이었을 뿐이었다. 술기운을 빌려 울고 싶을 뿐이었다. 누가 나를 욕해, 난 어제 차였는데. 그것도 세 번 다 같은 이유로!! 같은 일을 당하지 않게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내 잘못도 아닌데!!!!!

 

그래, 그래. 안 취했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안 취했다고!!!”

뭐야, 벌써 가게? 너네 학교 축제 재밌다며.”

 

김남준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고 박지민은 내 앞에서 아쉬운 소리를 했다. 근데 나 정말 안 취했는데그런데

 

나 혼자 있기 싫어…….”

…….”

외로워…….”

 

나는 김남준의 옷깃을 잡고 징징대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정말로 취한 것은 아니고, 평소보다 조금 더 솔직해졌을 뿐이다. 외로운 건 사실이었으니까. 연애를 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사실상 유치원 때 이후로 나에게 진실 된 사랑을 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 아닌가. 외로웠다. 지독하게 외로웠다.

 

그럼 오늘만 내 자취방에서 자고 가든가.”

흐엉…….”

진짜 가게?”

 

김남준이 깊은 한숨과 함께 마지못해 말했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집까지 버스 타고 가기 귀찮았던 것도 있다. 그렇게 자리를 정리하려 하니 못내 아쉬운 듯한 박지민이 진짜 가게? 하고 물었고 김남준은 어차피 더 이상 할 것도 없잖아. 하고 말했다.

 

저기서 뭐 무대 하는 거 같던데?”

무대?”

그거라도 보고 가면 안 돼?”

오늘 연예인 안 와. 오늘은 그냥 애들 끼 콘테스트 할 걸.”

, 완전 보고 싶어.”

 

박지민이 김남준을 초롱초롱하게 쳐다보며 말했고 김남준은 어느새 말짱하게 앉아 있는 나를 한 번 보고, 초롱초롱한 눈을 한 박지민을 한 번 보고, 시계를 한 번 본 후에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적으로 극혐하는 눈빛이 그의 얼굴에 스쳐지나갔던 것으로 보아 박지민의 초롱초롱한 눈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고, 그저 김남준이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류의 인간이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박지민을 선두로 한창 불타오르고 있는 야외극장으로 향했고, 그리고, 나는 보고야 말았다.

 

.”

춤 잘 추네.”

 

그녀를. 그러니까 조금 더 상세히 말하자면, 커다란 무대 위 그보다 더 큰 존재감으로 살랑거리는 치마를 입고, 찰랑거리는 길고 까만 생머리를 하고, 그와 대비되어 극적인 효과를 이루는 하얀 피부를 가진, 동그랗고 예쁜 눈망울의 그녀를.

내가 그 무대 앞에 막 도착했을 때 그녀는 레드벨벳의 러시안 룰렛과 아이오아이의 너무너무너무 댄스 메들리를 추고 있었고 그 짧은 순간 동안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나는,

 

쟤 누구야?”

 

그녀에게 한눈에 반하고 만 것이다.

 

저거 전정아 같은데.”

전정아?”

, 맞네. 지금 공대 애들 무대 할 시간이네. 공대 여자 댄스팀.”

 

나는 김남준을 쳐다봤다가, 다시 무대를 쳐다봤다.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분위기에 무대 앞에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으므로 무대를 가까이에서 볼 순 없었지만 멀리서 봐도 확연한 것은 있었다. 전정아의 아름다움. 나는 절로 초롱초롱해지는 눈을 조금 더 크게 떴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막 걸그룹 댄스를 끝낸 그녀에게 사회자가 다가가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 소리는 내게 들리지 않았다.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다 무뎌지는 것 같았다. 나만 빼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

 

급하게 준비한 무댄데도 완벽했는데요! 혹시 더 보여주실 것이 있나요?”

근데 이상하네. 전정아 머리가 저렇게 길었나? 내 기억으론 단발이었는데.”

넌 쟤를 어떻게 알아? 너 사회대잖아.”

전정아 유명해. 공대여신.”

 

내가 멍을 때리고 있는 동안 김남준과 박지민이 대화를 나누었고 나는 그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무대를 응시했다. 사회자가 전정아에게 마이크를 내밀었지만 전정아는 사회자의 귀에 대고 뭐라 중얼였고 그에 사회자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대화를 한 거지?

 

공대 여자 댄스팀 Wolf에서 특별히 준비한 무대가 있다고 하는데요!”

…….”

박지윤의 성인식’! 음악 주세요!!!”

 

빨간 불이 탁 하고 켜지고, 익숙하고 끈적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하얀 얼굴에 동그란 눈의 전정아가 무대 양 사이드에 있는 커다란 전광판에 잡힌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운명이야.”

?”

나 결심했어.”

 

여태까지 내 그 좆같았던 연애의 기록은, 지금 이 순간 전정아를 만나기 위해서였음을. 시선은 여전히 무대에 고정한 채로, 나는 김남준의 팔과 박지민의 팔을 꽉 잡았다. 남준아. 지민아. 더 이상 나는 나에게 고백하는 여자들과 사귀지 않을래. 이번엔 내가 먼저 고백할 거야. 내가 쟁취해 낸 사랑과 연애를 하겠어.

 

얘 뭐라는 거야?”

내일 보자.”

? , , ! 김태형!!!!!! 어디 가!!!!”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어마어마한 인파를 뚫고 무대 뒤, 전정아가 무대를 마치고 내려올 것이라 추정되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부정하진 않겠다. 술에 취하진 않았으나, 술이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결단을 조금 더 쉽게 내리게 했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확신에 차 있었다. 내가 쟁취해 낸 사랑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동안의 연애는 전부 이 순간, 그러니까 전정아를 만나기 위한 포석일 뿐이었다고. 드디어 진정한 사랑이 나에게 찾아온 거라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때 열심히 풀어댔던 논리야 놀자가 울고 갈 무논리적 추론이었으나, 그 때의 나에게 그 깨달음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부피를 측정하는 법을 알아내고 외쳤다던 유레카와 같았다. 그러니까, 그만큼 나는 그녀를 운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이다.

 

.”

…….”

저기!”

 

전속력으로 달린 탓에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술기운에 머리끝이 살짝 뜨겁고. 그리고, 무작정 달려 도착한 곳에는 정말 운명처럼. 그녀가, 전정아가. 무대 뒤도 아니었다. 무대에서 조금 떨어진 수돗가에서. 나는 그녀를 마주했다. 그래, 그 땐 이것도 운명인 줄 알았다. 소란스러운 무대와 주점을 뒤로하고, 학교 전체가 시끄러운 축제 한 가운데 유일하게 인적이 드물었던 그 수돗가. 주황 조명이 부드럽게 그녀와 나를 비추고 있던 그 공간. 그녀를 찾아온 건 맞지만 백스테이지로 가기도 전에 이렇게 마주치게 되었다는 게, 정말 그 때의 나에겐 운명, 숙명, 필연처럼 느껴졌다. 지구가 우릴 위해 움직여 준 줄 알았다.

 

, 그러니까…….”

……?”

번호 좀 주세요!!!”

 

주황 조명에도 빛을 발하는 하얀 피부, 검고 긴 생머리, 동그랗게 빛나는 예쁜 눈동자. 그 눈동자가 나를 향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외쳤고, 내 머릿속은 포화 상태였다. 귓가는 온통 내 심장박동 소리로 가득 찼다. 그래서, 그 때의 나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게 무슨…….”

, 그러니까, 혹시 남자친구가 없으시다면,”

아니,”

 

그녀의 목소리가 여자의 것이라기엔 조금 굵고, 치마를 입은 그녀의 자세가 조금 어색하고. 그녀의 어깨를 타고 내려와 가슴까지 닿는 길고 새카만 머리카락이 어딘가 조금 인조적이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내가,

 

제가 그쪽한테,”

 

그 누구의 의지도 아닌 오롯이 나 혼자만의 의지로. 다른 누구의 손도 아닌 내 손으로 직접,

 

첫눈에 반했거든요…….”

 

좆 같은연애의 포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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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ke Love  (2) 2018.05.31



동물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보다 냉혹하다. 힘의 서열이 견고하며, 약육강식이 진리이자 율법으로 통하는 사회. 비록 반 정도는 인간이었기에 서로를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야만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선조로부터 몇 만 년을 내려온 본능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니까. 인간들의 신분제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하고, 예외란 있을 수 없는 위계서열. 그것이 수인들의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었다.

그래서. 현석은 제가 유서 깊은 호랑이 가문에서 태어난 것을 일생동안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후회라니, 감히 그런 단어를 입에 올릴 수도 없다. 평생을 자랑으로 여기며 살아왔고 주위에서 떠받드는 소리를 들으며 제 자신이 이 사회의 상위 계층인 것을 만끽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제 막내아들이, 그것도 그냥 호랑이도 아니고 오백 년 만에 태어난 흑호라며 태어날 때부터 세간의 칭송을 받았던, 자신과 같은 A등급도 아닌 S등급을 부여받은 제 막내아들이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한다는 소리가,

 

나 호랑이 안 할래!”

 

라니.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호랑이 가문의 가장 김현석 씨가 수박을 먹다 말고 뒷목 잡고 쓰러지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이 말이다.

 

Fake Love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명문가인 호랑이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ㅇㅇ동에 비싼 땅값이 무색할 만큼 거대한 면적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한옥은, 만지면 부서질까, 바람 불면 날아갈까 애지중지 금지옥엽 업어 키웠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막내아들의 폭탄선언으로 인해 한순간에 발칵 뒤집어졌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호랑이를 안 하겠다니. 물론 본형이란 것이 하고 싶다고 그렇게 되고,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지만 평생을 긍지 높은 호랑이로 살아온 현석에게 막내아들의 호랑이 부정 선언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호랑이 하기 싫다니. 호랑이 안 할 거라니. 남들은 되지 못해 안달인 축복받은 본형을 가지고 어떻게 그런 소릴. 그것도 내 아들이! 현석은 들고 있던 포크까지 떨어트리고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태형을 쳐다봤고 둘째 호랑이 남준은 아, 결국. 하고 중얼거리며 씹던 수박을 마저 씹어 삼켰다.

 

모든 이야기에는 기, , , 결이 있다. 이 이야기에서 태형의 폭탄선언은 전의 단계에 해당한다 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단의 시작이자 원인인 기를 파악하기 위해 몇 주 전, 운명의 그 날로 거슬러 올라가 보도록 하자.

 

 

안녕, 전정국이야. 잘 부탁해.”

 

수인들은 기본적으로 원인들과 섞여서 살아가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겉으로 보기에 태가 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것은 원인들의 시선에서 그런 것일 뿐 같은 수인들끼리는 수인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알아보느냐 물으면 그건 글쎄, 그냥 직감이라고나 할까. 동물의 직감이라는 것이 원래 정확하다지 않는가. 그리고 그 수인을 알아보는 통찰력의 정확도는 먹이사슬의 위에 있을수록, 그러니까 현대 수인 사회의 단어로 얘기하자면 등급이 높을수록 올라갔다. 쉽게 말하자면 S급은 하위 등급의 본형이 무엇인지 여타의 등급들보다 더 잘 알 수 있었다는 소리다. 상대의 본형이 개인지, 고양이인지, 아니면 도마뱀인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힘의 차이 때문에 수인들은 상대가 자신보다 낮은 등급에 속해 있는 수인인지, 아니면 자신보다 높은 등급에 속해 있는 수인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지만, 자신보다 높은 등급의 수인의 본형이 무엇인지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똑똑한 여러분들은 전부 이해를 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한 번 예를 들어 보자면 내가 B 등급의 수인일 경우 상대가 나보다 높은 등급인지는 파악할 수 있으나 상대가 호랑이인지, 뱀인지, 곰인지는 알 수 없었고 따라서 S인지, A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반대로, 상대가 나보다 낮은 등급일 경우 조금만 주의 깊게 살피면 참새인지, 햄스터인지 대강 알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상대의 등급이 무엇인지 대충 가늠할 수 있었다. 사실 뭐, 높은 등급의 경우 굳이 제 본형의 특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으므로 알기 쉬웠지만.

물론 오래 전 수인들이 원인들에 의해 사냥당하고 팔려나갈 적에는 사냥을 피하기 위해 SA등급의 수인들이 BC등급의 수인인 것처럼 변현하는 경우도 있었다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엔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이 경우는 제외하도록 하자. 그도 그럴 것이, 높은 등급일 경우 온갖 선망의 눈빛과 혜택을 독차지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겠는가.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물론 같은 반으로 전학을 왔다는 것은 동갑임을 전제로 깔고 들어가는 것이긴 하지만, 새로 온 전학생은 생글 웃는 낯으로 초면부터 말을 놓는 대범한 학생이었다.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교실 맨 뒷자리에서 졸고 있던 태형은 제 귀에 들어와 꽂히는 맑은 목소리에 느리게 눈을 떴다. 하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소리와 함께 태형이 기지개를 폈다. 선생님이 버젓이 교실 앞쪽에 서 있는 상태에서 상당히 발칙한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아무도 태형에게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딱히 문제아라거나 학교를 주름잡는 일진이라거나 하는 수식어가 붙여져 있지는 않았지만, 이 학교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본형을 가지고 있는 태형은 선생들마저도 쉬이 대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 호랑이라곤 하지만 고양잇과에 속하는 태형에게 아침햇살은 차마 뿌리칠 수 없는 나른한 유혹이었을 테니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라 치자. 어쨌거나 태형은 호랑이 귀가 뾰족 튀어나온 것도 모른 채 큰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들어찬 빛에 제 동공이 점에 가깝도록 작아졌다가 다시 천천히 크기를 키우는 동안 태형은 뾰족 솟아오른 귀를 움직이며 제 잠을 깨운 소리의 근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막 자다 깬 터라 초점이 잘 안 잡히는 눈에 태형이 몇 번 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빈자리에 앉으면 되나요?”

 

태형의 홍채가 새로운 전학생에게 초점을 맞추는 데 성공했을 즈음, 새로운 전학생은 해사하게 웃으며 선생님을 쳐다봤다. 빈자리. 이 반 전체에 빈자리는 없었다. 다만 혹여 태형이 불편할까 싶어 태형의 옆자리에 빈 책상과 걸상을 가져다 놓은 공간만이 존재했을 뿐. 아마도 눈치 없고 대범한 저 전학생은 태형의 옆자리를 빈자리라 칭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당돌한 말에 선생이 아,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우리의 대범한 전학생,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선생님이 말끝을 흐리거나 말거나 교실을 가로질러 태형의 앞에 섰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태형은 갑자기 가까워진 인물에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런 태형에게 전학생은 예의 그 해사한 웃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안녕, 넌 이름이 뭐야?”

 

나한테 이렇게 거침없이 대한 수인은 네가 처음이야, 같은 진부한 전개의 스토리는 아니고, 그냥 태형의 홍채가 간신히 초점을 맞춰 HD 화질로 꽉 차게 시야에 들어찬 그 전학생의 얼굴이 너무 잘생기고 예쁘고 귀엽고 다 해먹어서. 성형외과 의사선생님이 이건 제가 본 바, 완벽한 얼굴이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박수를 칠 것 같은 예쁘게 쌍커풀 진 동그란 눈에 오똑한 코, 오밀조밀 예쁜 입술까지. 다시 말해 이건 정말 본 적이 없는 그런 완벽한 제 취향의 얼굴이어서.

 

앞으로 잘 부탁해.”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그 무난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사말을 내 앞으로의 미래를 너에게 헌납하고 싶어로 멋대로 바꿔 듣고 싶게 만드는 그 달콤한 목소리에, 대한민국 천연기념물에 지정된 명문 호랑이 가문의 막내 S등급 흑호 김태형은 이 그린 듯 잘생긴 전학생에게 한 눈에 반해버리고 만 것이다.

 

 

토끼야.”

?”

토끼라고.”

 

밥먹다말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이 고기가 토끼 고기라고? 잘생긴 전학생이 태형의 심장에 불을 지핀 그 날의 점심시간, 태형은 제 오랜 친구 지민과 밥을 먹다가 젓가락을 꼭 쥐었다. 토끼니까 아마 등급은 C. 근데 진짜 잘생겼어.

태형의 두서없는 스토리텔링에 지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지금 뭐, 수인 얘기하는 건가. 태형의 오래된 친구인 지민은 강아지 수인으로 등급은 C에 해당했다. 원래대로라면 S등급인 호랑이 태형과 C등급인 개 지민은 친구가 되기 힘들 수도 있었겠으나 태형이 워낙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아 하는 것도 있었고, 흑호라는 제 본형 때문에 초등학생 꼬꼬마 당시 또래 아이들이 태형을 피했을 때 태형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와 준 유일한 이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지민이었기 때문에 태형은 지민에게 알게 모르게 꽤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 연유와 시간들로 지민은 지금까지도 태형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고.

아무튼, 지민은 지금 태형이 하고 있는 말의 주어가 제 식판 위에 놓인 고기가 아니라는 것에 안심하며 젓가락으로 고기 완자를 쿡 찍어 입에 넣었다. 토끼 고기는 먹기 싫어. 토끼는 너무 귀엽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토끼 타령이야? 네 반에 토끼가 있었나?”

내 짝궁이야.”

전학 왔나 보네.”

 

태형과 붙어 지낸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지민은 태형의 두서없고 설명 없는 스토리텔링 기법에도 귀신같이 태형의 말을 알아듣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태형이 제 가족과 저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 대한 말을 꺼내는 것은 그토록 오래 태형의 옆을 지켜 온 지민에게도 생소한 것이라, 지민은 곧 흥미를 보였다. 토끼인데 잘생겼다고? 이름이 뭔데?

 

토끼는 뭘 좋아하지? 상추 주면 좋아할까?”

당근 좋아하지 않을까?”

그냥 맨 당근을 먹어?”

 

제가 던진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는 태형은 이미 익숙했다. 궁금한 거야 그냥 제가 직접 알아보면 되고. 지금 태형은 눈앞에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고기가 있음에도 새로 전학 왔다는 그 토깽이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상태이니. 지민은 자연스럽게 태형의 질문에 장단을 맞췄다. 몰라. 동물농장 보니까 되게 잘 먹던데. 수인은 좀 다르려나? 너도 사료 먹진 않잖아. , 그거 욕이거든? 그럼 걔도 당근 싫어하면 어떡해.

 

물어 보면 되지.”

?”

물어봐. 뭐 좋아하냐고.”

 

사실 당연한 건데. 태형은 지민이 마치 지혜의 왕 솔로몬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민을 쳐다봤다. 그래, 물어 보면 되는 거였어. 워낙 호랑이 가문에서 태형을 어화둥둥 짜란다짜란다 키운 터라 태형은 어딘가 모르게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좋게 말하면 귀여운 거고. 나쁘게 말해도 김태형이니까 귀엽다. 태형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야무지게 주먹을 쥐었다. 걔가 좋다고 하는 건 전부 갖다 줄 거야.

 

완전 결혼이라도 할 기세네.”

결혼…….”

나 이 고기 먹어도 돼?”

완전 좋다.”

?”

 

슬그머니 태형의 식판에 담긴 고기 완자를 가져가려던 지민은 태형의 말에 손을 멈추고 눈을 똥그랗게 떴다. 그냥 농담 삼아 한 말이었는데!? 그러나 태형의 눈은 이미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래 맞아. 이건 운명이야. 나 그 토끼를 반려로 삼을래!

 

오늘 처음 봤다며.”

첫눈에 반했어.”

.”

 

사실, 원인들과 다르게 수인들의 결혼 시기는 꽤 빠른 편이었다. 반이 동물이니만큼 종족 번식에 관한 본능이 강했으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하는 것은 부지기수였고 빠른 경우 고등학생 때 결혼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태형이 누군가를 반려로 정했다고 하는 것이 막 그렇게 엄청나게 이상하고 섣부른 것은 아니긴 했다. 문제는,

 

토끼라며.”

.”

호랑이랑 토끼가 어떻게 반려가 돼?”

 

태형은 S등급의 호랑이이고, 새로운 전학생은 아마도 C등급일 토끼라는 거였다. 현대 수인 사회는 등급 간의 결혼을 엄격하게 법으로 막아놓고 있었다. 종족 간의 결혼은 상관없어도 (파충류와 포유류의 결혼 같은) 등급 간의 결혼은 안 됐다. 견고한 위계 서열 사회를 지키려는 의도에서는 아니고,(굳이 법으로 막아놓지 않아도 위계 서열은 지켜졌으니) 보통 SA등급에 속하는 육식 동물과 B, C등급에 속하는 초식 동물들이 결혼할 경우 본형의 날에 생길 수 있는 자체검열을 막기 위해서였다. 위에 반 정도는 인간이었기에 서로를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야만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기술해놓긴 했지만, 그 말은 나머지 반은 동물이란 뜻이고 세상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는 법이니까.

 

왜 안 돼?”

 

그러나 그런 복잡한 먹이사슬에 기반을 둔 법 따위야 태형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원래 천국에 있는 사람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하고 싶으면 해야 했고, 여태까지는 그게 됐다. 그러니 내가 결혼하고 싶으면 하는 거다. 물론 결혼을 혼자 할 수는 없으니 짝궁의 동의도 필요하겠지만.

다시 말해, 태형은 지금 제 짝궁 토끼만 동의한다면 그 토끼를 반려로 삼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민은 눈을 깜박였다. 등급이 등급이니만큼 딱히 이 세계의 규칙 따위를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 애인 걸 알고 있긴 했지만……. 이번 일은 정말로 가능할지 지민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래, 화이팅.”

 

그게 가능하든 아니든 지민이 신경 쓸 바는 아니라. 지민은 그냥 본디 자신 말고는 딱히 타인을 신경 쓰지 않던 태형의 변화가 신기할 뿐이었다. 뭐 어쩌면 김태형이라면 진짜로 가능하게 만들지도 모르고. 지민은 그런 태형을 응원하며 태형이 손도 대지 않은 고기 완자를 낼름 집어먹었다. 대체 얼마나 잘생겼길래 천하의 김태형이 저렇게 관심을 가지나. 고기 완자를 꼭꼭 씹어 삼키며, 지민은 눈을 빛냈다.

 

*

 

당근 좋아해?”

 

웬 당근. 정국은 제 눈앞에 서 수줍게 야채 선물 세트를 내밀고 있는 태형을 쳐다봤다. 초면의 짝궁에게 야채 선물 세트라니. 그런 기발한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아니 그보다, 학교에 있었던 거 아니었나? 학교 매점에서 이런 걸 팔아? 그 와중에 정국은 태형이 수줍게 내민 야채 다발이 꼭 꽃다발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상추와 양배추, 치커리와 케일로 화려하게 장식된 꽃다발은 정 중앙에 당근이 화룡점정으로 꽂혀 있었다. 그런데 나 이런 거 안 먹는데. 그렇지만 그 야채 다발을 정중히 거절하기엔 그것을 건넨 이가 너무 귀엽고 예뻐서. 정국은 제 취향 따위는 꿀꺽 삼키고 환하게 웃으며 야채 다발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 토끼가 내 선물을 받아줬어. 당근 좋아하나 봐. 태형은 정국의 환한 웃음에 마주 웃었다. 정국이 제 선물을 받아준 것이 너무 기뻐서 태형은 금방이라도 뿅, 하고 뾰족한 귀가 솟아오를 것 같았다. 그러나 정국은 받아든 야채 다발을 바로 섭취하는 대신 제 가방에 소중히 꽃아 두었다. 하긴, 점심시간이 막 지났으니 배부르려나. 관대한 태형은 뿌듯한 마음으로 정국의 옆자리에 앉았다. 원래 누가 옆에 앉아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태형이지만, 정국이니까 좋았다.

 

어디서 전학 왔어?”

 

잠깐 앉아서 숨을 고른 태형은 이내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정국과 친해지기.

정국에게 선물로 줄 야채 다발을 퀵으로 주문한 후 점심시간 내내 태형은 지민과 앉아 대본을 짰다. 무슨 대본이냐면 토끼 짝궁과 친해지기 대작전’. 위해서도 말했듯 그 나이 먹고도 태형은 사람을 대하는 것이(정확히 얘기하면 사람이 아니라 수인이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그 사실은 큰 상관이 없으므로 편의상 사람이라 칭하도록 하겠다) 서툴렀으므로 지민은 A to Z까지 태형을 가르쳐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 태형은 그냥 짝궁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제 평생의 반려로 점찍은 이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이었으니까. 아주 치밀하고 계획적인 플랜이 필요했다.

 

나 중국에서 왔어.”

너 중국 사람이야?”

아니. 사정이 있어서, 한국 사람인데 어렸을 때 중국으로 가서 중국에서 살다가 온 거야.”

 

그렇구나.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다음에 뭐라고 말해야 됐더라. 하지만 문제는 태형이 그 치밀하고 계획적인 대본을 전부 기억할 만큼 세심하지 않다는 데에 있었다. 태형은 눈동자를 굴렸다. 어렸을 때 초식 동물들이 저만 보면 무서워서 슬슬 피했던 아픈 기억이 있는 태형은 기억나지도 않는 대본을 떠올리는 대신 조심스럽게 정국을 살폈다. 혹시 얘도 날 무서워하지 않을까? 그러나 정국은 전혀 그런 기색 없이 웃으며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 준 야채 다발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태형은 곧바로 이어진 정국의 말에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넌 고양이지?”

?”

아까 귀 봤어. 검은 고양이. 귀여워.”

 

중국에서 살다 와서 그런가. 정국은 거리낌이 없었다. 중국이면 대충 같은 문화권 아닌가? 원래 중국 수인들은 이렇게 본형을 막 물어보고 그러나? 태형은 잠시 입을 벌렸다. 아니 뭐 사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형을 숨기려는 시도는 해 본 적이 없었고 수시로 본형의 특징을 드러낼 만큼 본형을 묻는 것이 저에게 큰 실례는 아니었지만 (애초에 태형이 티를 내기 전에 이미 상대는 태형이 그 유명한 흑호임을 알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건 어디까지나 태형이 호랑이, 그러니까 수인 사회의 상위 계층이기 때문이었고 보통은 첫 만남에 이렇게 직접적으로 본형을 묻는 경우는 잘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제 본형이 숨기고 싶은 약점일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제 눈앞의 정국은 그 동그란 눈을 살짝 접어 웃고 있었다. 한 치의 때도 묻어 있지 않은 것 같은 저 순수한 웃음.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

역시, 그렇구나. 앞으로 잘 부탁해.”

 

그리고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제가 고양이임을 긍정하는 답변을 내놓고야 말았다. 아니 사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많이) 큰 고양이여서 그렇지. 그러나 차마 제 눈앞의 귀여운 토끼에게 제가 사실은 네가 알고 있듯 작고 귀여운 검은 고양이가 아니라 흑호임을 밝힐 용기가 태형에겐 없었다. 그러다가 도망가면 어떡해. 나 무서워하면 어떡해. 결국 태형은 환하게 웃으며 내민 정국의 손을 붙잡고 마주 웃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절대로 제 본형을 드러내지 말아야겠다 다짐하면서.

 

*

 

자 이쯤에서 필자는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다.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는 좋아하는 사람과 마음이 가까워지는 거리가 가장 빠르다고 생각한다. (빛 아닌가요?) (여기 이과반이니?) 그렇기 때문에 태형과 정국이 가까워지는 속도는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과 비례하지 않았다. 태형이 자신의 본형을 속일 만큼 정국에게 한 눈에 반했다는 사실은 앞에 기술한 바 있으므로 생략하고, 사실 빈자리에 앉으면 되나요?’때부터 마음속에 태형을 점찍어 두었던 우리의 대범한 전학생 전정국도 태형에게 첫눈에 반했으므로 둘의 친밀도 함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상공을 향해 치솟았다.

혹자는 이러한 빠른 전개가 필자가 이 둘이 사랑에 빠지는 디테일한 여정을 쓰기 귀찮아서 개연성 따위는 우주스타 BT21에게 줘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여러분들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김태형과 전정국이 서로에게 사랑에 빠지는 것에 개연성 따위는 필요 없음을. 그냥 둘이 서로를 만나게 되면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은 수학의 공식 종교의 율법 우주의 섭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둘이 어떻게 사랑을 키워갔는가에 대한 묘사는 과감히 생략하도록 하고 그렇게 둘은 손을 잡고 사랑을 속삭이고 뽀뽀를 하고 오늘부터 1, 넌 내꺼 난 니꺼 하는 사이가 되었다.

태형과 정국의 나이 방년 19, 성인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나이로 앞에서 기술한 바 있듯 수인들로 하여금 미래를 약속하기에 그다지 어린 나이가 아니었으므로 둘은 이윽고 미래를 약속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정국은 태형만 보면 그 매력적인 앞니를 보이며 환하게 웃었고 태형도 그런 정국을 보며 마주 웃었다. 문제는, 제 하나뿐인 반려 정국이 아직도 제 정체를 호랑이가 아닌 고양이로 알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토끼랑 결혼하겠다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제 막내 동생이 고민이 있다기에 세상에 그게 대체 무슨 고민일까 싶어 하던 일도 때려 치고 당장 집으로 달려온 석진과 남준은 태형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토끼에게 빠진 호랑이라니. 로미오와 줄리엣도 와서 한 수 배우고 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아닌가.

 

아니, 태형아. 이건 말도 안 돼. 그러니까 이건…….”

사랑이 아니라 식욕 아니고?”

!”

아니야!”

 

순서대로 남준, 석진, 다시 남준, 그리고 태형. 남준이 태형에게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말을 고르는 새에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석진이 말했고 남준은 그런 석진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적나라하게 말하면 어떡해, 애 상처받게! 그러나 태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사랑이야! 그 단호한 입매에 석진과 남준은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러니까 형들이 도와줘. 아부지가 허락 안 하실 거 아니야.”

아니, 아버지가 허락하시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고…….”

나 진짜 첫눈에 반했어. 이런 감정은 처음이야.”

 

남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태생이 고귀하고 특별한 태형이었던지라 태형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구혼은 물밀 듯 밀려 들어왔었지만 아버지는 그런 정략적인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며 태형에게 반려를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고 모두 물렸었다. 그러나 태형이 나이를 먹고 반려에 눈을 뜰 나이가 되어도 애인은커녕 제대로 된 친구도 지민밖에 없을 만큼 하도 남들에게 관심이 없기에 저래서 번식은 하겠나 싶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반려를 찾았다고 저들에게 폭탄선언을 할 줄이야. 그것도 초식동물이랑! 토끼랑! 본형으로 변하면 한입에 쏙일 토깽이랑!!

 

아니, 잠깐만 태형아. 얼마나 됐는데.”

반 년.”

반 년?!”

 

아니 반 년 동안 연애를 했는데 그동안 몰랐단 말이야!? 반년이면 100일도 넘었잖아!!! 100일이 뭐야 200일이 가까워지잖아! 남준과 석진은 다시 한 번 입을 벌렸다. 꼭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지만 석진과 남준이 놀랄 일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토끼가, 너 안 무서워 해? 보통은 호랑이라 하면 무서워할 텐데.”

그게…….”

……?”

내가 나 고양이라고 했어…….”

 

간신히 다시 정신줄을 다잡은 남준이 태형에게 물었고 그에 이어진 태형의 고해성사에 둘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야 말았다. 심지어 사기까지 쳤어?!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를 해 보면, 호랑이가 토끼를 반려로 맞이하고 싶어 하는데, 먹이 사슬 상, 그리고 수인 사회의 법규 상 그것은 금지되어 있다. 그래도 먹이 사슬을 초월한 사랑이라고 좀 포장을 하려 했더니 정작 그 토끼는 호랑이가 고양이인 줄 안단다. 이걸 어디서부터 풀어야 돼? 석진과 남준은 할 말을 잃고 대책 없는 제 막내 동생을 쳐다봤다. 태형아, 지금 이걸 우리한테 말하면 우리보고 뭘 어쩌란 거야…….

 

결혼하고 나서 밝히면 되지 않을까?”

그거 사기결혼이야.”

어차피 사기죄 기소는 못 할 걸.”

 

법 위에 호랑이 가문 있다. 남준이 태형을 설득하려고 꺼낸 말에 눈치 없는 석진은 무심히 대꾸했고 남준은 석진을 째려봤다. , , ! 그제서야 아 맞다, 하고 중얼인 석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태형아. 토끼면 결혼은 못 해…….

 

형들이 아버지를 설득하고, 아버지가 법을 고치면 되지 않을까?”

태형아, 우리가 아무리 호랑이라지만 그렇게까지 막나갈 순 없어.”

 

그러면 이 사회에 법은 왜 있고 경찰은 왜 있겠어. 물론 그 경찰 라인이랑 법 라인도 전부 다 우리 손 안에 있지만……. 뒷 문장은 삼킨 남준이 다정하게 태형에게 말했고 태형은 눈썹을 늘어트렸다. 그런데 진짜 나 걔가 너무 좋은데. 꼭 반려로 맞고 싶은데.

 

아니, 호랑이가 토끼한테 사랑을 느낄 수가 없을 텐데.”

식욕이랑 헷갈리는 거라니까? 그런 경우 종종 있다고 책에서 본 적 있어.”

사랑이라고!”

아니 태형아. 걔는 네가 호랑이인줄도 모른다며.”

그거는!”

 

태형이 말끝을 흐렸다. 제일 찔리는 구석을 남준이 훅 짚었기 때문이다. 남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석진의 말대로 태형은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호랑이가 토끼에게 사랑을 느낀다니. 그건 말이 안 됐다. 이게 무슨 인간이 치킨에게 사랑을 느끼는 소리란 말인가.

 

솔직하게 말하면 받아들여 줄 거야…….”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냐. 본형의 날에는 어떻게 할 건데?”

 

본형의 날. 3년을 주기로 찾아오는 본형의 날에 수인들은 각자 동물의 모습으로 돌아가 원기를 충전해야만 했다. 그 날에 수인들은 수인獸人이 아니라 였다. 짐승.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놓아버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날에 수인들은 각자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꼭 지켜져야 하는 절대 법규였고.

 

배 안 고파. 안 잡아먹으면 되잖아.”

 

하지만 그런 남준의 이성적인 설득에 순순히 넘어갈 태형이 아니었다. 이미 태형은 사랑에 눈멀고 귀 먼 상태였으니까. 태형은 지금 이게 사랑이 아니면 므어가 사랑!을 외치고 있었다. 아니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토깽이길래 애를 저렇게 만들어 놓은 거야!? 석진과 남준은 멀거니 태형을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해야 저 어린 막내 동생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을까.

 

태형아 너 고기 좋아하잖아. 걘 풀 먹고 살아. 식탁에서 같이 밥을 못 먹을 걸?”

나도 풀 먹으면 돼.”

 

그게 무슨 고양이 풀 뜯어먹는 소리야!!! 우리 조상님도 마늘과 쑥만 먹다가 뛰쳐나왔는데! 조상의 얼을 헤칠 셈이니!! 남준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으나 태형의 단호하고 반짝거리는 눈빛을 꺾을 수는 없었다. 옛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다. 물론 태형이 남준과 석진의 자식은 아니었으나 남준과 석진 또한 부모 못지않게 태형을 어화둥둥 업어 키웠으니 그런 태형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고작 몇 시간만의 공방전 끝에 석진과 남준은 태형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그 말에 태형은 고마워, 혀엉! 역시 형들밖에 없어!를 외쳤다.

 

그래도 태형아. 아버지가 허락해 주실 지도 문제지만, 그 전에 그 토끼한테는 분명히 말을 해야 돼.”

?”

그래. 걔도 알 건 알아야지. 그건 그 토끼한테도 나쁜 짓 하는 거야.”

…….”

이건 약속해. .”

 

그러나 남준은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래, 아직 그 토끼가 태형이 호랑이인지 모른다고 했으니. 어쩌면 그 토끼가 태형이 호랑이인 것을 알면 알아서 도망쳐 줄지도 모른다.

남준의 눈빛은 단호했고 옆에서 석진도 그런 남준을 거들었다. 그 두 사람의 단호함에 태형은 주춤했다. 남준과 석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다른 건 몰라도 거짓말이 나쁜 것은 알고 있다. 심지어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제 반려에게. 태형은 결국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어. 말할게. 태형의 대답에 남준은 약속, 이라며 새끼손가락을 태형에게 내밀었고 태형은 느린 몸짓으로 제 새끼손가락을 남준의 새끼손가락에 걸었다. 약속.

 

그래. 그럼 나중에 한 번 데려와. 얼굴은 봐야지.”

.”

 

태형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고 남준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그만 가서 자. 내일 학교 가야지. 석진의 말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긴 후 방을 나섰고 석진은 남준을 돌아봤다.

 

태형이 진짜 괜찮은 거야?”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

아마 태형이 호랑이인 거 알면 그 토끼가 도망치지 않을까.”

태형이 슬퍼하겠네.”

 

석진이 안쓰러운 듯 말했고 남준이 으음, 하고 낮게 신음했다. 그래도, 어차피 식욕과 사랑을 착각하는 것일 테니 잠깐 슬프고 지나가는 게 낫다. S급과 C급의 결합은 말이 안 되니까. 태형이 수인인 이상 끝이 정해져 있는 결말이었다. 그러니까, 남준과 석진은 그저 그 토끼가 제 연인이 호랑이인 것을 알고도 결혼하겠다고 설치는 정신 나간 토깽이가 아니기만을 빌었다.

 

 

, 우리는 다시 이 이야기의 처음인 으로 돌아간다. 현석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금지옥엽 업어 키웠던 태형에게 저도 모르게 삿대질을 했고 태형은 그럼에도 현석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태형의 눈에는 평범한 인간은 쳐다보기만 해도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던 호랑이의 안광이 쓸데없이 깃들어 있었다. 그만큼 단호하고 결연했다는 소리다. 현석은 처음 보는 제 막내아들의 기백에 눈을 깜박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태형아.”

태형아, 말을 똑바로 해야지. 호랑이 안 할래, 가 아니고 토끼랑 결혼할래.”

, 맞아. 토끼랑 결혼할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현석은 1차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2차 충격의 쓰나미를 맛보았다. 남준은 옆에서 수박을 씹으며 차분하게 태형의 말을 수정해 주었고 태형은 수긍하고 말을 고쳤다. 현석은 그런 남준을 쳐다봤다가 다시 태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토끼? 무슨 토끼?

 

태형이한테 반려로 삼고 싶은 상대가 생겼대요. 그런데 그게 같은 반 토끼.”

토끼?!”

. 엄청 귀여워요. 아부지도 보면 좋아할 거야.”

 

아닐 걸……. 남준은 눈을 도르륵 굴렸다. 현석은 아직도 토끼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입만 뻐끔대고 있었다. 아니, , 일단 태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호랑이 부정 선언은 아니었으니 그건 다행이긴 한데. 뒤이어 나온 말도 쉬이 넘길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 현석은 냉정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태형아, 토끼랑 호랑이는,”

그거 이미 내가 말 했어요 아버지.”

사랑과 식욕을,”

그건 석진이 형이 이미 했고.”

그런데도 반려로 맞겠다고?”

.”

 

태형의 눈빛은 역시나 쓸데없이 올곧았고 그 눈빛에 현석은 할 말을 잃었다. 현석이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깜박이고 있자, 그런 현석과 태형을 번갈아 쳐다보던 남준이 이내 포크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설득이 안 돼요, 아버지. 완전 확고해. 반년이나 사귀었대요.

 

…….”

그런데 김태형. 너 걔한테 너 호랑이라는 거 말은 했고?”

…….”

 

남준은 이 때 당연히 태형에게서 긍정의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태형이 입을 꾹 다무는 것이다. 태형의 그런 태도에 되려 당황한 것은 남준이었다. 아니, 저 얼굴은 뭐야? 설마.

 

너 아직도 말 안 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진짜 결혼하고 말 할 생각이었어?!”

, 아니, 형아.”

뭐라고?!!?! 호랑이인 걸 말을 안 해?!”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현석이 부러 쾅 소리를 내며 거실 테이블을 치며 일어났고 그 소리에 놀란 태형의 귀가 뾱 튀어나왔다. 이거 이거, 안 되겠네!! 현석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짐짓 엄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고 남준은 그런 현석을 올려다봤다. 아니 아버지, 갑자기 왜…….

 

호랑이인 걸 숨기면 안 되지! 내일 당장 그 토끼를 봐야겠다!!”

아버지!!!!”

아니, 아버지, 아버지가 왜…….”

 

물론 사안이 사안이라지만. 남준은 현석의 오버액션에 당황했다. 굳이 바쁜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가기까지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그 토끼를 집으로 부르든지. 아니면 태형으로 하여금 제 정체를 밝히게 하든지. 그렇게 하면 될 것인데. 물론 태형은 이미 한 번 제 말을 듣지 않은 전적이 있었지만. 태형은 예상치 못한 현석의 반응에 당황한 눈치였고 현석은 단호한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당황해 하얘졌던 남준의 머리에 생각 한 줄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버지 혹시…….

 

태형이 너, 내일 학교에 아버지랑 같이 가!”

 

토끼고 나발이고, 목석같던 셋째 아들 김태형의 마음을 뺏어 버린 그 상대의 얼굴이 궁금해서 이러시는 건가?

 

*

 

, 김 회장님. 여기는 어쩐 일로…….”

 

그날 밤, 태형은 안 된다고, 토끼에게는 제가 직접 말할 거라고 울며불며 떼를 썼지만 단호한 현석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다음 날 아침 퉁퉁 부은 얼굴로 현석과 함께 등교한 태형은 등교하자마자 제 교실로 가는 대신 교무실로 끌려갔다. 옆에는 현석을 대동하고서.

 

여기, 우리 태형이가 반려로 맞고 싶어 하는 토끼가 있다던데.”

아부지!!”

 

거칠 것도 없었다. 현석은 바로 본론부터 꺼냈고 그 말에 교무실은 한 차례 술렁였다. 토끼? 태형이 흑호 아니야? 그런데 반려로 토끼를 맞아?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교무실의 반응에 현석은 미간을 좁혔다.

 

최근에 전학을 왔다고, 이름은…….”

 

현석은 순간 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현석은 태형이 반려로 맞고 싶어 하는 그 토깽이의 이름도 모르고 있는 채였다. 태형은 퉁퉁 부은 얼굴로 현석을 째려봤고 현석은 그런 태형의 얼굴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밤새 운 것 같은 얼굴이 안쓰럽긴 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형의 마음을 겟챠해버린 그 토끼의 얼굴이 궁금해서 여기까지 친히 행차하긴 했지만…….

 

여기 3반 검은 고양이가 누굽니까!”

아버지!!!”

 

그 때였다. 교무실의 문이 태형과 현석이 들어왔을 때처럼 힘차게 열렸고 그와 동시에 낮고 큰 목소리가 교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현석과 태형에게 고정되었던 시선은 교무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새로운 인영에게 모아졌고 태형과 현석의 시선도 그를 따라 교무실의 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전 장관님?”

아니, 김 회장님?”

 

현석이 놀란 눈으로 먼저 말문을 텄고, 뒤이어 역시나 놀란 얼굴의 전 장관이라 불린 남자가 마주 인사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여러분들도 예상하셨듯 우리의 대범한 전학생 정국이 놀란 눈으로 태형을 바라보고 서 있었고.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순간 교무실이 적막으로 가득 찼다.

 

전 장관님. 아드님 일로 중국에 가셨다더니 여긴 어쩐 일로.”

, 일이 다 끝나서 온 지 좀 됐습니다. 복직은 아직이지만. 그나저나 김 회장님이야말로 여긴 어쩐 일로…….”

, 저는 아들 녀석 때문에…….”

 

하하하. 허허허. 현석과 전 장관은 제법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영문을 모르는 정국과 태형, 그리고 교무실의 선생님들은 눈을 끔뻑이며 그런 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잡아먹을 것처럼 들이닥쳐서는 왜 갑자기 친목 도모를……. 그러나 그 둘을 제외한 나머지들의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졌거나 말거나, 전 장관과 현석은 말을 이었다.

 

, 저도 아들 놈 때문에. 아니 글쎄, 아들놈이 고양이를 반려로 맞겠다지 뭡니까.”

고양이를요? 저런.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뱀과 고양이라니 가당키나 합니까.”

그러니까 말입니다. 게다가 우리 정국이는아니, 그보다. 김 회장님 아드님이면 그 몇 백 년만의 흑호라던……. 무슨 사고라도…….”

, 그게. 우리 태형이가 토끼랑 결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

 

현석은 말을 하다 말고 순간 훅 들어차는 기시감에 말을 멈췄다. 잠깐만. 이 느낌 이거 뭐지? 뭔가 되게 이상한 느낌인데. 그리고 그 순간 전 장관도 같은 것을 느낀 듯 현석을 쳐다보던 시선을 돌려 제 아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현석과 전 장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 정국과 태형이 있었다.

 

호랑이!?”

!?!?!”

 

뭐야?! 나한텐 고양이랬잖아! 고양이랬으면서!!! 정국은 온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태형 역시 너 토끼!!!!! 하고 비언어적 표현을 내뿜고 있었다. 아니, 그렇지만. 태형은 재빨리 이성을 되찾았다. 아무리 변현이 가능하다 해도, 본형이 뱀이라면 토끼로 변현을 할 수는 없었다. 그건 기본적인 거였으니까. A 등급에 속하는 뱀이라면 C에 속하는 도마뱀이나 개구리 같은 걸로 변현을 할 수 있는 거였다. 그런데 제가 느낀 정국은, 분명 토끼였다. 포유류였단 말이다. 파충류가 아니라!!!!

 

, , !”

잠깐만. 정국아. 너 설마 그 검은 고양이가 김 회장님 아드님이냐?”

고양이……. 흑호…….”

태형아, 너 왜 전 장관님 아드님을 토끼라고…….”

세상에 검은 호랑이도 있어요?! 그런 게 어딨어!”

 

멍하니 흑호를 중얼이던 정국이 외쳤고 전 장관은 머리를 짚었다. 정국은 꽤나 놀란 듯 동공이 확 열려 있었다. 흑호라니. 검은 호랑이라니.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다. 사실 태형이 흑호라는 것은 꽤나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지만, 거의 갓난아기 때 중국으로 넘어갔던 정국은 태형의 존재를, 그러니까 흑호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 태형이 첫 만남때 보여 주었던 검은 귀와 태형에게서 느껴지는 고양잇과의 기운을 당연히 검은 고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고. 그러고 보니 고양이 치고는 귀가 좀 둥글다 싶긴 했다. 아니, 그래도. 검은 호랑이보다는 그냥 귀가 좀 둥근 고양이가 더 현실성이 있으니까.

 

저기 계시잖아. 무슨 실례니. 그리고 정국아.”

…….”

네가 할 말은 아닌 거 같다.”

 

이게 무슨 소리야. 태형에게 왜 뱀을 토끼로 착각한 거냐고 물으려던 현석은 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태형이 바보도 아니고. 무려 S급에 속하는 흑호인데. A급인 뱀의 본형을 몰랐다고? 이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바로 알 수 있는 거였다. 흑호처럼 모르는 이가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뱀이 희귀한 종도 아니고. 그리고 의문점은 하나 더 있었다. 뱀이면 파충류인데. 토끼라니. 그런데 전 장관의 옆에 서 있는 정국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토끼가 맞아서. 현석은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돌연변이? 입양? 설마. 그런데 그 순간 문득, 현석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 가지가 있었다. 뱀에게서 토끼 돌연변이가 나올 수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전 장관이 뭐가 아쉬워서 C급의 토끼를 입양할까. 후원을 하면 했지. 그러면 남은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제가 태어난 이래로, 아니 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태어난 이래로도 나타난 적이 없어 생각지도 못했던 그 경우.

 

김 회장님. 잠시 따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래야겠지요.”

 

현석은 꿀꺽, 침을 삼켰다. 전 장관의 동공이 얇은 비늘 모양으로 좁혀졌다.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해 있는 교무실의 모두를 남겨두고, 전 장관이 먼저 교무실을 나섰고 현석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우두커니 남겨진 태형과 정국은 여전히 멍하니 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은서로에게 서로가 사기를 친 상황, 쌍방 사기이다.

잠깐 얘기 좀 해.”

 

침묵을 깨고 태형이 먼저 입을 열었고 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평화롭던 아침의 교무실에는 선생님들만이 벙 찐 채로 남겨졌다.

 

*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너 토끼잖아.”

그러는 너는. 너 고양이라며!”

호랑이도 고양이거든!!”

지금 그게 말이 되는 변명이라고 생각해?”

 

정국이 짐짓 엄한 척 태형에게 말했고 순간 움츠러들었던 태형은 이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는 너는!! !! !! 토끼!!!

 

나느은! 사정이 있었고!”

사정은 무슨 사정! 나한텐 말을 했어야지. 아니 그보다 너, 정체가 뭐야?!”

 

태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뱀이 왜 토끼 흉내를 내!? 아니, 어떻게 토끼 흉내를 낸 거야?! 태형의 말에 정국은 동그란 눈을 깜박였다. 지금까지도, 태형은 정국에게서 토끼를 느끼고 있었다. 분명 토끼가 맞았다. 19,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이었지만 단 한 번도 본형을 잘못 느낀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형은 S급이었으니까. 제게 본형을 숨길 수 있는 수인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제 눈앞에 있는 이 사랑스럽고 잘생기고 예쁜 생물체는 대체 뭐냔 말이다!

 

결혼은 어차피 스무 살이 넘어야 할 수 있으니까…….”

?! 그럼 결혼할 때까지 숨기려고 했단 말이야?!”

 

지도 그럴 생각이었으면서. 태형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그런 태형에 정국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뭐, 그 전에 말할 수 있으면 말하려고 하긴 했는데. 네가 겁먹고 도망갈까 봐……. 그리고 아버지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고…….

 

아니 일단 다 필요 없고. 너 뱀은 맞아?”

맞을 걸?”

맞을 걸은 또 뭐야.”

일단 제일 비슷한 건 뱀이야.”

그게 무슨 소린데. 너 뭔데?”

 

태형의 말에 잠시 주위를 살피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정국이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각을 느꼈다. 내리누르는 듯 한 압도적인 감각.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나 느낄 수 있는, 태형을 만난 수인들은 태형을 만날 때마다 느꼈을 익숙한 감각이겠지만 태형은 처음 느끼는. 태형은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의 동공이 세로로 좁혀졌다. 태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정국이 제 본형을 드러내는 모습을 쳐다봤다. 정확히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러니까뱀은 맞는 것 같은데그런데 뱀한테이 있었던가……?

 

저거 뭐야?”

 

태형이 간신히 손을 들어 정국의 머리에 길게 솟아난 뿔을 가리켰다. ? 웬 뿔. 눈을 보니 뱀인데 왜 뱀한테 뿔이 달렸지? 뿔이 달린 동물은 사슴이나소나그런 건데. 아니면…….

 

…….”

아니 누가 뿔인 걸 몰라서 물어?!”

…….”

 

정국이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이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차피 보여줄 거 다 보여준 마당에 망설이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정국이 제 볼을 살짝 긁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때문에 중국에 갔었던 건데. 나 전에 마지막으로 나타났던 곳이 중국이라고 해서.”

…….”

…….”

설마 ㅇ…….”

, 맞아.”

 

정국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정국의 등급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 생각해서 설명하지 않았던. 한 세대에 존재했던 경우보다 존재하지 않았던 경우가 훨씬 더 많았던. 몇 천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다는 전설의 등급. 워낙 희귀해 전설의 동물이라 불리는 본형을 타고 태어난 수인에게만 주어지는 그 등급.

 

용이야.”

 

SS급 되시겠다.

 

 

용이란 것이, 워낙 오래 전에 나타났다 사라진 터라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고, 사실 그 기록이 진짜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던 탓에 수인 사회는 용을 인어나 구미호 같은 전설적인 동물로만 여겼다. 전래 동화에나 등장하는 그런 걸로. 하지만 정국이 태어난 해, 정국의 머리 위에 선명하게 솟아난 뿔을 보고 대한민국 수인 협회장(대충 인간 사회의 대통령)은 용이란 것은 사실 실존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제 자신이 S급임에도 불구, 느껴지는 이 감각은 저보다 높은 등급을 가진 수인만이 줄 수 있는 것이었으니.

SS급이란 것은 그냥 상징적인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협회장은 알 수 없었고 다른 나라의 협회장들과도 의논을 할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아무리 수인과 원인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현대사회라지만. 용은 좀 차원이 달랐으니까. 정국의 존재가 세간에 알려지면 원인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도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용의 탄생은 극비에 부쳐졌다. 사회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냥 뱀의 가문에서 아들이 태어난 것으로 하고, 일단 마지막으로 용이 있었다던 중국에 가서 자료를 좀 모아 보자고 극비리에 합의를 끝낸 뱀의 가문과 협회장은 그렇게 정국의 탄생을 비밀에 부쳤다. 그리고 19. 대한민국의 수인 협회장은 SS급의 등장을 알릴 준비를 모두 마쳤고 그에 따라 정국 역시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냥 뜬금없이 사실은 용이 있었습니다!! 개꿀잼몰카! 하고 용의 등장을 알리긴 좀 그러니 정국의 20살 생일에 대대적으로 발표를 하는 것으로 하고, 그 때까지는 제 존재를 밝히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정국에게는 굳이 파충류가 아닌 종으로 변현을 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그리고 정국은 토끼를 택했다. , 토끼라면 그 누가 봐도 용을 떠올릴 수는 없을 테니. 어차피 용을 눈치 채지 못할 의도로 하는 변현이니 무엇이든 상관 없었으리라. 그런데 왜 하필 토끼야? 정국의 정체가 공개되고 난 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태형은 정국에게 물었다. 제 하나뿐인 반려가 토끼가 아닌 용이었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런데 왜 하필 토끼냔 말이다. 용이면, ? . 그럴 듯 한 걸로 바꾸지.

 

?”

아니 그냥. 다른 것도 많잖아. 늑대 같은 거 할 수도 있고.”

 

저 같으면 적어도 A급으로 변현을 했을 것이다. , 어차피 실 등급이 SS인데 재벌이 서민 체험하는 느낌으로다가 토끼를 택했을 수도 있지만, 뜬금이 없어도 너무 뜬금이 없지 않나. 생긴 모습이 뱀이나 늑대보다는 토끼를 닮아서 그런 건가? 태형은 정국의 얼굴을 살피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살짝 튀어나온 이빨이나 땡그란 눈 같은 것이 토끼를 좀 닮은 것도 같,

 

내 뿔 모양,”

……?

토끼 귀 같지 않아?”

?”

그래서 토끼 했어.”

…….

 

아니 전혀. 별로. 차라리 네 얼굴이 토끼를 닮아서 토끼를 했다고 하는 게 더 설득력 있는데. 태형이 그 말을 삼키며 아, 하하. 하고 웃었다. 세상에 그딴 이유로 변현을 하는 수인도 있다니. 제 반려지만, 어쩌면 앞으로의 삶이 조금, 고달플 수도 있겠다고 태형은 그 순간 생각했다.

 

아무튼. 그렇게 교무실에 한바탕 폭풍을 몰고 왔던 전 장관과 현석은 비밀의 대화 끝에 악수를 나누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돈. , 저야말로. SS급과 S급의 결합이라니. 이보다 더 완벽할 수가 있을까. 그것도 의도한 바가 아니라 연애결혼이다. 둘은 무려 서로를 C급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서로를 반려로 맞겠다며 땡깡을 부리지 않았는가.

물론 태형과 정국은 서로에게 뒤통수를 사이좋게 얻어맞은 것이 되었으나 쌍방 과실이니 그냥 퉁 치는 것으로 한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고, 전 장관도 좋고, 현석도 좋고. 태형과 정국은 두말할 것 없이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굳이 이 상황에서 서로를 속인 것을 가지고 감정이 상해 봐야 의미가 없으니까. 게다가 속인 것도 서로가 정체를 알면 상대가 겁먹고 도망갈까봐였다. 원래 동물들의 소유욕이 좀 그렇다.

그렇게 둘이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으로 이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이 이야기의 목표와 주제가 전정국과 김태형이 성대하게 맺어지는 것이었으니까.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지만 목표와 주제를 달성했으니 그런 대로 만족한다. 중요한 것은 전정국와 김태형이 서로를 반려로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 결혼도 하기 전에 서로가 연기에 꽤나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태형과 정국이 알게 모르게 남다른 각오를 다졌다는 것은 우리끼리만 알고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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