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안녕하세요, 전정국입니다.”

김태형입니다.”

 

태형은 세차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제 눈앞에 내밀어진 정국의 손을 맞잡았다. 혹시 빠르게 뛰는 심장을 정국이 눈치 채지는 않을까. 얼굴이 너무 빨개지지는 않았을까. 그것도 아니면 너무 긴장한 나머지 손이 땀으로 축축하지는 않을까. 그 짧은 새에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정국은 그런 태형의 손을 살짝 맞잡은 후 웃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미소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마주 웃었다. , 저야말로.

 

이번에 새로 들어가게 될 작품의 감독이 우연찮게도 학교 선배임을 알게 되었을 때, 태형은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게다가 활동 기간은 겹치지 않았지만 같은 동아리. 비록 과가 달라 말을 섞어 본 적도, 아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넓디넓은 영화계에서 같은 학교에 같은 동아리를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태형에겐 충분한 친밀감의 이유가 되었다. 오랜 외국 유학 생활의 여파로 남은 사소한 애정결핍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태형은 언젠가 예대에서 한 번 마주쳤을 수도 있겠네요!’하고 웃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거지만, 윤기는 그 때 태형이 자신에게 작업을 거는 것인 줄 알았다고 했다.

 

팬이라고?”

. 그래서 완전 설레요.”

신기하네.”

 

? 뭐가요? 제 앞에 놓인 와인 잔을 흔들며 태형이 발그레해진 볼을 하고 윤기에게 물었다. 태형의 적극적인 주도 하에 윤기와 태형은 빠르게 친해졌고 둘은 작업 얘기도 할 겸 종종 이렇게 술을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윤기는 같은 학교의 선배일 뿐 아니라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상대였고, 귀국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아 이렇다 할 친구가 없었던 태형에게는 좋은 말상대였던 것이다.

 

, 전정국 좋아하는 거야 안 좋아하는 애들을 세는 게 더 빠르긴 하지만.”

……?”

너같이 눈을 반짝거리면서 팬이라고 말하는 남자는 없었거든.”

 

윤기는 무심하게 툭 하고 말을 던지는 것이 말버릇이었지만, 가끔 태형의 심장은 그런 윤기의 말에 쿵 내려앉곤 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민윤기는 눈치가 빨랐다. 편하면서도 불편한 점. 태형은 저도 모르게 입에 머금고 있던 와인을 꿀꺽, 넘긴 채 그대로 굳었다. 혹시 들켰을까. 태형에게서 말이 없자, 치즈를 씹던 윤기가 태형을 쳐다봤다. 뭘 그렇게 얼어 있어?

 

아니, , 그냥.”

그럼 뭐, 소개시켜 줄까?”

저한테요? 누구를요? 전정국을요?”

그럼 누구겠어.”

 

태형이 말을 더듬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기를 쳐다보자, 윤기가 그런 태형을 보며 픽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

 

, 그래도 돼요?”

안될 건 뭐야? 너도 이 영화 관계잔데. 쫑파티에서 소개시켜 주면 되겠네.”

 

조금 더 일찍 말했으면 촬영 현장에도 와 보라고 했을 텐데. 윤기가 말을 이었고 태형은 아, 하고 짧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러니까, 그 소개를 말하는 거였구나. 하긴. 그럼 그렇지. 눈치 못 챘나 보다. 태형이 생각하며 동그랗게 키웠던 눈을 살짝 접었다. 그럼 저야 감사하죠. 그 날 뭐 입고 가지. 순간 놀랐던 심장을 진정시키고 나니 머릿속이 설렘으로 가득 찼다. 처음에 생각했던 그 소개는 아니었지만, 인사라도 하게 되는 게 어딘가. 예전에 했던 영화 쫑파티에서 멀찍이서 혼자 일방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영화 스크린이나 TV로나 가까이 볼 수 있었던 사람이다. 적어도 이번에는 간단한 인사말 몇 마디라도 나눠볼 수 있을 거 아니야.

 

만나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지려나.”

? 뭐라고 했어요? 못 들었어요.”

아냐.”

 

윤기가 고개를 돌렸다. 사람 심리라는 게, 옆에서 말려 봐야 괜히 더 불타오르기만 할 뿐, 전혀 소용이 없다는 걸 윤기는 숱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윤기는 와인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태형은 좋은 사람이었다. 외국에서 유학도 했고, 닳고 닳은 사람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 영화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애 같은 순수함이 있는. 그래서 묘하게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그래서 그런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태형은 윤기가 꽤 아끼는 사람의 범주 안에 들어가 있었다. 정국은 좋은 친구고, 좋은 배우이며, 역시나 제 바운더리 안의 사람이지만 그 사실이 꼭 정국이 애인으로서도 좋은 사람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정국은 애인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소개시켜주기엔, 그건 서로를 위해 지양하고 싶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가벼운 파트너라면 모를까.

그러니까. 윤기가 와인을 목 뒤로 넘기고 입을 열었다.

 

그렇게 좋아?”

진짜 오래 전부터 팬이었다니까요.”

잘됐네.”

 

만나 보면 알게 되겠지.

 

*

 

만나 보면 알게 되겠지. 윤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첫 만남부터 태형이 정국을 너무 많이알게 되었다는 거지.

태형은 정국을 만났고, 인사를 나누었고, 우연찮게 자리를 바꾸게 되어 인사를 한 후부터는 거의 정국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고 술을 마셨다. 그날 밤 태형의 기분은 최고조를 달리고 있었고, 그래서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쫑파티가 끝나고 자리가 파했을 때, 태형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태형은 제가 왜 여기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태형은 쏟아져 내려오는 햇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밤새 퍼마신 술에 머리는 울리고, 목은 텁텁하고. 침대 옆 협탁을 더듬어 핸드폰을 확인하려고 했을 때, 제 손에 핸드폰 대신 웬 옷가지가 잡히는 것을 느낀 태형이 가늘게 눈을 떴다. 잠깐만. 내 방 천장이 이렇게 넓었던가?

 

태형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여긴 내 집이 아니다. 그리고 호텔도. 여긴 명백히 누군가가 살던 흔적이 묻어 있는 넓은 오피스텔이었고, 돌아누워 있었기 때문에 옆이 보이진 않지만 옆에는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저와 같이 옷을 벗은 채로.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자 태형은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국에 온 이후로는 처음이라 해도 원나잇이야 종종 했었으니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제 옆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누워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게 누구인지 짐작도 안 갈 정도로 술을 퍼마시고 정신을 잃은 점은 좀그렇긴 하지만. 아무튼. 그러나 그 숱한 하룻밤의 인연들에도 규칙은 있었다. 관계는 제 집에서도, 상대의 집에서도 아닌 호텔에서. 괜히 제 집에서 상대를 떠올리지 않도록.

다른 사람에겐 어떨지 몰라도 태형에게, 누군가를 제 집에 들여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어차피 하룻밤의 인연일 거라면 그 사람에게 제 자신을 알리고 싶지도,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지도 않은, 그런 단순한 이유 말고도. 호텔이야 그 날로 끝이고 수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가는 곳이지만 집은 아니니까. 제 바운더리 안의 영역이니까.

그래서 태형은 누군가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 있는 집 안의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이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예전에는 아무리 정신이 없었어도 마지막 남은 본능이 그 사람의 집에 가는 것만은 막았었는데. 이 짓도 이제 그만 해야겠네. 읊조린 태형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별다른 인기척이 나지 않는 걸 보니 상대는 아직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누구인지 확인은 해야지…….

 

일어났어요?”

 

그런데, 제 옆에 누워 있는 얼굴이 너무나도 의외라. 그리고 낯선사람이 아니라. 태형은 입을 벌렸다. 잠에서 이제 막 깬 듯, 눈을 부비며 저와 눈을 맞추는 이 사람은, 믿기지 않지만 전정국이었다. 대한민국의 탑 배우이자, 태형이 최근에 작업을 했던 영화의 주인공이자, 어제 처음으로 윤기에게 소개받아 말을 튼. 그리고, 제 짝사랑 상대인.

정국은 굳어 있는 태형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머리 안 아파요? 어제 술 엄청 많이 마시던데.

 

이게 어떻게 된 거…….”

 

태형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허리에서 알싸하게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그래, 이런 얘기를 굳이 물어서 확인 사살을 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모든 정황 증거가 단 한 가지를 가리키고 있는데. 눈앞의 정국은 그런 태형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네? 못 들었어요. 하고 말했지만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정국의 입에서 나오는 우리 잤어요, 류의 말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오늘 받을 충격은 정국의 오피스텔에서 눈을 뜬 것만으로 충분했으니까. 아무리 술을 퍼마시고, 정국에게 호감이 있었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냉큼 자 버릴 수가 있지. 그리고 나야 전정국을 좋아했다지만. 거기에 응해준 전정국은 또 뭐지? 태형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굴리며 뻑뻑한 눈가를 꾹 눌렀다. 머리가 아직까지 지끈거렸다.

 

해장 하러 갈까요? 속 안 쓰려요?”

아니, 그보다…….”

 

정국은 이 상황이 익숙한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 해장을 하러 갈까 묻고. 그런데 그 익숙함이 묘하게 신경 쓰여서. 태형은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은 기지개를 피더니 태형에게 물 갖다 줄까요? 하고 물었고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태형은 제가 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정국에 관한 소문을 들어본 적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자유로운 영혼. 신기할 정도로 그에 대한 나쁜 뒷소문은 없는 편이었지만, 사람들은 전정국만큼 연예인 생활 잘 즐기는 놈도 없을 거야하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했다. 담백한 관계를 즐기고, 마무리도 항상 깔끔하게. 그만큼 배려를 해 준다는 소리겠지, 상대에게도. 태형 역시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문제는, 제가 그런 정국을 감당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거였고. 그래서 이렇게는 시작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

 

태형의 머리가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정국이 다가와 물을 건넸고 태형은 말끝을 흐리며 컵을 받아들었다. 태형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해장은 괜찮아요. 알아서 할게요. 약속이 있어서.”

약속?”

 

정국의 미간이 살짝 접혔지만 태형은 정국의 그런 미묘한 변화를 눈치 챌 만큼 섬세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태형은 말을 이었다. , 어젯밤에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죄송해요, 실수가 많았네요. 그 말에 정국이 아, 하고 감탄을 터뜨렸다. 태형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나 봐요?”

…….”

되게 태연하네. 일어나자마자 약속 갈 정신도 있고.”

 

태연해 보이는 건 그러는 그 쪽도 마찬가지거든요. 태형은 그 말을 삼키며 물컵을 내려놓았다. 살짝 떨리는 손을 혹시나 정국이 눈치 챌까 봐. , 그게 왜요? 최대한 태연한 척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다. 태형은 괜히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냥.”

 

정국이 어깨를 으쓱했다. 태형은 제 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풀었다. 핸드폰이 어디 갔지. 한시라도 빨리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여기 있으니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다. 집안이 온통 정국의 향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심장이 계속 빨리 뛰고 있으니 조금 더 있다가는 정국에게 들킬 것도 같고. 머리도 지끈거리고. 그리고 그 때 태형의 시야에 핸드폰이 들어왔다. 태형의 핸드폰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저절로 그려지는 어젯밤의 풍경에 태형이 얼굴을 붉혔다. 저게대체 왜 저기에 가 있는 거야.

 

, 암튼 그러니까 그냥 없었던 일로 해요. 피차 깔끔하게.”

 

옷을 대충 추슬러 입고, 핸드폰을 챙기는 동안 정국은 그런 태형을 말없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을 뿐 말이 없었다. 하긴, 무슨 말을 할까. 당연한 건데도 묘하게 서운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모든 준비를 빠르게 마친 태형은 현관에 서서 한 번 더 못을 박았다. 괜히 구질구질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 솔직히. 겁이 났다. 무서웠다. 정국을 좋아하니까. 그건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정국의 입에서 우리 사인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듣는 것보다 제 입으로 말하는 게 나으니까. 괜한 자존심이고, 부질없는 짓이라 해도, 태형은 그랬다. 그러나 막 방을 나서려는 태형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정국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이었다.

 

싫은데.”

?”

싫다고요.”

지금 뭐라고,”

난 이렇게 끝내긴 싫다고요. 어제 너무 좋았거든.”

 

태형은 뒤를 돌아 정국을 쳐다 본 그 상태 그대로 굳었다. 내가 지금 헛것을 듣는 건가. 그러나 정국의 얼굴은 여전히 태연하다. 태형은 괜히 아려 오는 것 같은 허리를 짚었다. 뭐가 저렇게 당당해? 아니, 당당하지 않을 건 없나? 태형이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그럼 뭐, 오늘부터 1, 이라도 하자는 건가. 태형이 멍하니 정국을 쳐다보고 있자, 정국이 천천히 태형에게 다가왔다.

 

약속 있다고 했으니까, 오늘은 보내줄게요.”

그게 무슨…….”

나도 깔끔한 거 좋아해요. 그렇다고 없던 일로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고는 씩 웃는다. 그 웃음에 가뜩이나 어지럽던 머리가 배로 혼란스러워졌다. 전정국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태형은 눈앞으로 다가온 정국에 숨을 멈췄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무, 빨리. 혹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연락할게요.”

…….”

받아요.”

 

. 다짐을 받아내듯 꾹 눌러 못 박은 정국이 다시 씩 웃고는 등을 돌렸다. 정국이 그대로 욕실로 모습을 감추고, 태형은 현관에 우두커니 혼자 남겨져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지금뭐가 어떻게 된 거지.

 

*

 

드디어!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남자 전정국씨를 만나보게 됐는데요!”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던 태형은 갑자기 들려 온 익숙한 이름에 고개만 움직여 TV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날 그렇게 정국이 현이 씨에게 가고 난 후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국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지금쯤 현이 씨랑 같이 있을 테니 내 생각 같은 건 안 나는 거겠지. 태형이 입술을 물었다. 연락한다고 한 적도 없는데 기약 없는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제 처지가 우스웠다. 그 와중에도 TV에서 흘러나오는 전정국이란 단어에 반응하는 제 자신도.

 

안녕하세요, 전정국입니다.”

이번에 새로운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들었어요!”

, 촬영은 다 끝났고, 이제 편집 막바지 단계에 있어요.”

 

그러고 보니까 나도 작업해야 하는데. 태형은 작업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다시 눈을 감았다. 이런 기분으로 무슨 작업. 작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태형은 의미 없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소파를 두드렸다. 전정국, 류현이, 김태형. 영화, 작업, 전정국……. 생각은 전정국으로 시작했다가 전정국으로 끝난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결국 그 끝은 전정국으로 이어졌으니까. 이게 뭐야. 태형은 입술을 짓씹었다. 작업을 하는 시간 외에도 전정국은 제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데, 이제는 작업을 하고 있을 동안에도 전정국을 생각해야만 하니까 작업을 하면서 현실을 도피할 수도 없다. 전정국이랑 더 이상 엮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윤기 형이 아무리 부탁하더라도 전정국의 영화를 맡는 게 아니었는데.

 

이번 영화가 정국 씨한테 특별하다고 들었어요.”

, 처음으로 시나리오랑 연출에 참여했거든요. 물론 윤기 형, 아니 민 감독님이 거의 다 했지만요.”

민윤기 감독님하고도 각별한 사이시죠?”

서로한테 특별하죠.”

 

화면 속 전정국이 웃는다. 태형은 TV를 끄려고 리모컨을 집어들었다 결국 다시 내려놓았다. 이렇게라도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꼭 예전에 서로를 알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해서. 혼자 멀찍이서 스치듯이 본 걸 가지고, 첫 눈에 반한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서사로 여태까지 이어질 만큼 지긋지긋하게 짝사랑할 정도로 빠져 버렸던 그 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차라리 그 때가 나았나.”

 

태형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땐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었는데. 전정국의 행동 하나 하나에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의미부여하고, 그러다가 실망하고. 연락을 주고받아서 설렐 일도 없었지만 이렇게 힘들 일도 없었는데. 태형은 리모컨을 꼭 쥐었다. 그 날, 섹파로 지내자는 전정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전정국에게 연락이 올 것 같아서 괜히 핸드폰을 주기적으로 쳐다보는 일도, 아무런 반응 없는 현관문을 쳐다볼 일도 없었겠지. 태형은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TV에서는 계속해서 전정국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럼 이번 영화에 상 욕심도 크시겠네요.”

이번 영화에 애정이 각별한 건 맞는데, 저는 의외로 욕심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정말요? 그건 정말 의외인데요.”

저 욕심 많아 보여요? 하하. 그런데 정말이에요. 어렸을 때 데뷔해서 그런가. 어렸을 땐 욕심이 많았었거든요. 최고가 되고 싶고, 다 내 거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건 다 가져야 하고.”

 

전정국이 살짝 웃고, 리포터도 따라 웃는다. 태형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런데, 욕심을 부린다고 다 제 게 되는 건 아니더라구요.”

…….”

그걸 깨닫고 나니까, 언젠가부터 욕심을 안 부리게 되더라구요. 놓아야 하면 놓을 수 있게.”

 

그래도 여러분들의 사랑은 욕심 부리고 싶어요! 이번 영화 많이 사랑해주세요! 사뭇 진지해 지는 것 같았던 인터뷰는 전정국의 애교스러운 농담을 끝으로 웃음과 함께 끝났고 전환된 화면은 영화의 짧은 클립과 내용을 보여주며 마무리됐다. 그리고 태형은 TV 전원을 껐다. 그나마 TV의 소음과 빛 덕에 채워지고 있었던 커다란 거실은 텅 빈 듯 적막해졌다. 태형은 그제야 천천히 눈을 떴다. TV를 껐음에도 전정국의 얼굴과 전정국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태형의 머릿속에 짙은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태형은 언젠가 윤기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 날 이후 걸려온 전정국의 전화를 결국 무시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편한 관계로 지내자는 전정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너 전정국 좋아하지.’

, 언제부터 알았어요?’

 

윤기는 전정국 좋아하냐?’고 묻지 않았다. ‘좋아하지.’하고 말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에 가까웠다. 그리고 윤기의 그 확신 어린 말투는 태형이 거짓말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너한테 전정국 소개시켜 주고 나서 네 얼굴 볼 때부터?’

…….’

, 아니다. 확신은 그 때 했고, 내가 전정국 소개시켜 줄까 물었을 때 네 반응 봤을 때부터 예상은 했다.’

안 놀라요?’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말하는 윤기에, 태형은 침착하게 잔을 내려놓고 물었었다. 외국에서야 자신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으니 제가 게이라는 것을 밝히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지만,(애초에 게이 클럽 단골이기도 했다) 한국은 좀 다르다고 들었는데. 한국에서는 처음 하는 커밍아웃인데 그 상대의 반응이 너무나도 무덤덤해서, 태형은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자 윤기가 왜 놀라야 하는데? 하고 되물었다. 태형은 그러니까……. 하고 말끝을 흐렸다.

 

네가 게이라는 거? 아님 전정국을 좋아한다는 거?’

…….’

전자면, 이쪽에선 완벽하게 헤테로인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들어서, 별로. 후자면, 그건 좀 놀랍긴 하네.’

 

그런데 뭐 그렇다고 엄청 놀라울 정도는 아니고. 윤기가 잔을 들며 조용히 말했고 태형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영화 쪽 산업 종사자인 것을 이런 식으로 감사하게 될 줄이야. 커밍아웃에 대한 걱정이 가시고 나니 문득 고개를 드는 궁금증에 태형이 다시 윤기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 놀랍지 않으면서, 전정국을 좋아하는 건 놀랍다니, 그건 무슨 말이지.

 

그런데 제가 전정국 좋아하는 게 왜 놀라울 일이에요?’

걔 소문 알고도 그런 마음이 드나, 싶어서.’

소문?’

그냥, . 소문이라기엔 팩트지. 가벼운 거.’

 

여자건 남자건 3개월을 못 간다고, 유명하잖아. , 나쁘다곤 생각 안 해. 깔끔하게 만났다가 헤어지는 게 얼마나 편하고 좋은 건데. 그런데 왠지 너는 좀.

 

그런 스타일 아닐 거 같아서.’

……

. 혹시 지금 전정국이랑 사귀나?’

 

말을 잇던 윤기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태형에게 물었고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 그럼 다행이고. 괜히 사귀는데 초 친 건가 했네. 이어지는 윤기의 말에 태형은 사귀는 건 아니고, 섹스 파트너긴 하죠. 하는 말은 삼켰다. 아무리 윤기라 해도 그 수많은 가벼운 관계중 하나가 저예요, 하고 굳이 광고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윤기는 눈치가 빠르고, 사람을 잘 파악하는 사람이었다. ‘너는 그런 스타일 아닐 거 같다는 윤기의 말은 사실이었고, 태형은 가벼운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나가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전정국에 대해 그렇게 말했으니, 태형도 알고 있었다. 전정국이 관계에 감정을 무겁게 싣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애초에 모르고 시작한 게 아니었으니 알게 된 후에도 끊지 못했다. 끊을 수가 없었다. 감정의 책임이 모두 제 몫이고, 무거운 감정의 짐도 모두 제 것이 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

 

태형은 멍하니 핸드폰을 들었다. 쌓여 있는 메신저 중에 정국의 것은 없다. 그 사실만 확인하고 다시 핸드폰을 끄려는데, 태형의 시야에 빠르게 올라오고 있는 단톡방의 메시지가 걸렸다. 대학 동아리 동기 단톡방이었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그 방에 들어갔다. 채팅창은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지만 채팅방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대박, 전정국이랑 류현이랑 사귄대.]

[소속사에서 인정했다는데? 사귄지 오래 됐다며.]

[이번에 휴가도 같이 간거래.]

[? 태형이 읽었다. 태형아, 진짜야? 지금 완전 기사 다 났어.]

[아 맞아, 쟤 전정국 영화 한댔지!]

 

동기 하나가 보내 준 기사의 캡처 사진에, 정국은 환하게 웃고 있다. 그 옆에는 현이 씨. 기사의 헤드라인은 전정국-류현이 열애 인정. 태형은 핸드폰의 화면을 껐다. 순식간에 빛이 사라졌다. 태형은 눈을 감았다. 빗방울이 창밖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유난히 일찍 찾아온 세찬 비가 지리한 여름 장마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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