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형 진짜 왜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도 아예 제 차로 같이 타고 가자는 석진의 말에 식겁해 우리 밥 먹고 바로 영화 보러 가기로 하지 않았냐며 없는 약속까지 만들어 낸 태형이 차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석진에게 물었다.

아무리 제가 석진을 안 세월에 비해 만난 시간은 짧다고 해도, 또 제가 알던 석진의 성격이 만나지 못했던 몇 년 간 바뀌었다고 해도. 지금 석진의 이러한 행동들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아무리 초면에 정국이 실례를 했다지만 그 웃으면서 내리찍는 화법은 웬 것이며, 방금 전에 그래 놓고 같이 밥 먹으러 가자니까 바로 응하는 건 또 뭐냐고. 그러나 그런 태형의 반응에도 석진은 태연히 차에 시동을 걸 뿐이었다. 뭐가?

 

갑자기 왜 같이 밥을 먹자 그래? 언제 봤다고.”

 

사실 이것 말고도 물어보고 싶은 건 더 많았지만, 다른 질문들은 애써 삼켰다. 혹시라도 제가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었냐 물으면 석진이 그럼 걔는 너한테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하고 되묻기라도 할까 봐. 그러나 그런 제 걱정은 전혀 쓸데없는 것이었음을, 태형은 석진의 차가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잠시 말없이 정면을 응시하던 석진이 입을 연 순간 알게 되었다.

 

쟤지?”

?”

네 뮤즈.”

?”

너 한국으로 돌아가게 한 사람.”

 

생각지도 못했던 석진의 말에 태형은 그대로 굳어 눈만 깜박였다. 그런 태형의 얼굴을 쳐다보던 석진은 이내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씩 웃으며 다시 정면을 쳐다봤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태형은 멍하니 그런 석진을 쳐다봤다. 뭐야, 이 형?

 

마스크는 좋네. 이름이 전정국이었던가.”

어떻게…….”

민 감독 영화에 심심찮게 나오던데. 연기도 곧잘 하고.”

 

태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형이 이렇게 눈치가 빨랐나? 아니면 내 행동이 그렇게 티가 났던 건가. 석진이 제 감정을 어디까지 눈치 챈 것인지 알 수 없어 태형은 손을 꼭 쥐었다. 석진의 말을 듣고 나니 석진의 이상했던 행동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석진은 처음부터 제가 귀국하는 것을 의아해했고, 자연히 제가 귀국을 결정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인 그 뮤즈에 대해 궁금해 했다. 정국과의 사이가 애매해져버린 후 태형이 정국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그걸 알아챈 후에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마음 한 구석에 계속 궁금증은 남아 있었을 테고. 태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뒤따라오고 있는 정국의 차를 쳐다봤다. 이대로 석진과 정국을 같은 공간 안에 둬도 괜찮을까?

 

그리고 지금도, 망설이는 이유가 저 애 때문인 것 같고.”

아니 형, 그건 아니,”

 

태형이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석진의 차가 부드럽게 멈췄고 씩 웃은 석진이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발렛 파킹 직원에게 키를 맡기고 태형이 앉아 있는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려는 직원을 제지한 후 친히 조수석 문을 열어 태형을 에스코트했다. 그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얼떨결에 석진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나온 태형이 눈을 깜박였다. 석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때, 석진의 얼굴이 확 하고 가까워졌다. 태형은 순간 숨을 멈췄다. 석진의 목소리가 가깝고 조용하게 귓가에 울렸다. 그러니까,

 

쟤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그러는데,”

…….”

나 조금만 놀려도 되지?”

 

? 그러나 태형이 석진에게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석진은 제 뒤를 향해 씩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에 태형이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정국과 눈이 마주친다. 태형이 꿀꺽, 침을 삼켰다. 진짜 이대로,

 

금방 따라 왔네요. 정국 씨, 여기 괜찮죠? 일부러 가까운 곳으로 왔는데.”

, .”

 

같이 있어도 괜찮은 거냐고.

 

*

 

아깐 실례했습니다. 태형이 형이 싫어하는 것 같아서 그랬던 건데.”

그럴 수도 있죠. 다른 사람들도 종종 오해하더라구요.”

많이 친하신가 봐요, 태형이 형이랑.”

특별한 사이긴 하죠. 안 지 오래되기도 했고.”

제가 괜히 두 분 식사하시는 데 끼어든 건가요?”

괜찮아요. 태형이랑은 뭐, 맨날 같이 먹는데요. 오랜만에 여럿이서 먹으니까 좋네요.”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모르겠네. 태형은 제 몫의 파스타를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분명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화인데 왜 이렇게 숨이 턱턱 막히는지. 태형은 파스타 대신 핑퐁처럼 주고받아지는 대화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 장소에서 긴장하고 있는 것은 태형밖에 없는 듯, 평화로운 평일 오후의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전부 안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태형이 앉아 있는 이 테이블도 마찬가지였고. 그게 설사 표면적인 것뿐일지라도 말이다.

 

태형이 형한테 이렇게 친한 형이 있는 줄 몰랐네요. 태형이 형 주변 사람은 대충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 그거 좀 이상하게 들리는 거 알아요?”

 

쿨럭. 태형은 저도 모르게 작게 기침을 했다. 정국의 시선이 잠시 태형에게 닿았다가 다시 석진에게로 향했지만 태형은 그런 정국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불안한 눈빛으로 석진을 쳐다봤다. 이 형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그런 태형의 불안함에는 아랑곳 않고, 석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꼭 자기 애인 주변 사람 견제하는 것 같잖아요.”

그게 무슨…….”

근데 그럴 리는 없으니까.”

 

진짜 이 형이 어디까지 하려고! 태형은 입술을 꼭 문 채로 석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꽤 세게 찌른다고 찌른 거였는데, 석진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정국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프지도 않나? 태형은 불안한 눈빛으로 정국을 쳐다봤지만 정국의 시선은 자신을 향해 있지 않았고 마지막 희망으로 쳐다본 윤기 역시 이 상황이 흥미로운 듯 그런 석진과 정국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네. 태형은 속 타는 마음에 물컵을 꼭 쥐었다. 아무래도 이 레스토랑을 나가자마자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약국에 가는 것이 될 듯싶었다. 방금 먹은 파스타가 얹힐 것은 분명해 보였으니까. 빨리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 태형이 꿀꺽, 침을 삼켰다.

 

왜 그럴 리가 없,”

아무튼 뭐, 대답을 하자면,”

…….”

제가 쭉 뉴욕에 있었어서 그럴 거예요. 뉴욕 살거든요. 지금은 태형이 보러 잠깐 온 거고.”

, 그럼 다시 돌아가시는 건가요?”

. 그래야죠. 그래서 제가 지금 태형이한테 잘 보여야 돼요. 태형이 뉴욕으로 데려가려면.”

!”

 

. 태형이 한 박자 늦게 짧은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지만 이미 석진의 말은 정국에게 닿은 후였고, 그 말을 들은 정국의 시선 역시 태형에게 닿은 후였다. 태형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김석진 진짜. 아군이야 적군이야. 태형은 으득 이를 물었다. 확실한 건, 아군이든 적군이든 지금 김석진은 시한폭탄과 같다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진짜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릴 기세였다. 태형은 석진의 허벅지를 꾹 눌렀다. 그만 해, 제발…….

 

태형이 형을 뉴욕으로 왜…….”

, 그건 H 감독 영화

, 영화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이번엔 늦지 않게, 태형이 석진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으며 외쳤다. 다행히도 석진의 짧은 비명은 태형의 큰 목소리에 묻혔고 태형은 그런 석진을 향해 어둡게 웃어 보였다. 흐즈 믈르그 흐쓸튼드……. 그러나 그런 태형의 표정에도 석진은 아프지도 않은지 빙글빙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태형이 입술을 꾹 물었다. 이 형 진짜 왜 이래? 태형이 석진을 향해 최대한 티 나지 않게 눈을 부라리고 있을 때쯤, 정국이 입을 열었다.

 

영화?”

, , 영화! 밥 먹고 영화 보기로 했거든. 예약해 둔 시간이 좀 촉박할 것 같아서! , 하하, !”

“H 감독은 무슨 말,”

태형이가 H 감독을 제일 좋아하잖아요. 근데 최근 개봉작을 아직 못 봤다고 해서. 그거 보러 가려고 했거든요.”

 

이제야 좀 제 의도를 이해한 것인지 처음으로 석진이 태형을 거들었고 태형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영화. H 감독 영화 보러 가기로 했거든. 태형은 석진의 말을 반복하며 괜히 볼을 긁었다. 지금 태형의 머릿속에는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석진이 눈치를 좀 챈 것 같아 다행이긴 해도, 태형은 한 번도 석진에게 정국에 대해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었으니 석진은 악의 없이 실수를 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태형은 오랜만에 정국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굳이 석진이 도와주지 않아도 말이다.

 

, 다 먹었지? 이제 슬슬 일어나자. 진짜로 영화 시간 늦겠다.”

그거 그냥 취소하면 안 돼? 이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좀 실례잖아.”

…….”

 

바로 이렇게. 태형이 석진의 옷깃을 살짝 잡아끌며 말했지만 석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눈치를 챈 것 같았는데, 그냥 착각이었나? 태형은 애가 타는 마음에 입술을 꼭 짓씹었다. 김석진 진짜, 도와주질 않네. 아무래도 석진에게 정국과 제 관계에 대해 제대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굳이 정국을 화제로 꺼내놓고 싶지 않아 말하지 않았던 것이 이런 상황을 불러올 줄이야. 태형은 어떻게 하면 석진에게 지금 당장 이 곳을 나가고 싶다는 제 뜻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이 앞에서 대놓고 나가자고 할 수도 없고, 문자를 보낼 수도 없고…….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잠시 고민하던 태형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짧게 생각해 본 결과 가장 최선의 선택은 화장실을 가는 척 자리를 떠서 석진에게 전화를 거는 거였다. 나중에 설명할 테니 일단 나오자고 직접적으로 말할 생각이었다. 정국과 윤기의 앞에서는 아무리 간접적으로 눈치를 줘도 석진은 눈치를 챌 것 같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석진과 윤기, 그리고 정국의 시선이 잠시 태형에게 닿았고 태형은 제가 이 셋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 잠시 동안 혹여 석진이 허튼 말을 할까 석진의 어깨를 부러 꾹 눌렀다. 제발 3분만 입 닥치고 있어……. 차마 입으로 내뱉진 못하고, 눈을 통해 석진에게 간절한 텔레파시를 보낸 태형이 잰 걸음으로 테이블을 나섰다. 그 와중에 레스토랑은 또 쓸데없이 커다래서. 화장실까지 가는 그 짧은 거리가 태형에겐 꼭 천릿길처럼 느껴졌다.

 

*

 

.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오늘은 이만 가자. 알겠지?”

 

태형은 두 손으로 핸드폰을 붙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너 돌아오면 가자. 석진의 이 말이 이토록 반갑게 느껴질 일인가. ‘내 이름 말하지 말고 잠자코 듣고만 있어.’로 시작한 짧은 통화 끝에, 마침내 얻어낸 그 대답에 태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드디어 벗어날 수 있겠구나. 오늘 정국을 마주한 이후로 계속해서 답답하게 조여 왔던 숨통이 이제야 좀 트이는 느낌이었다.

 

언제까지 이래야 되냐.”

 

전화를 끊고, 차가운 물에 손을 씻고 나니 그제서야 좀 돌아오는 것 같은 정신에 태형이 멍하니 거울을 쳐다보며 중얼였다. 알고 있다. 이렇게 피하기만 해서 해결될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마주하기가 무섭다는 핑계로 벌써 몇 년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만 있으니까. 태형은 제 손에 닿아 있는 차가운 물방울을 응시했다.

그렇지만. 핑계라고 하면 핑계지만. 태형은 손을 문질렀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정국도 답을 주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확실한 감정, 애매한 관계. 그 간극 사이에서 태형은 끊임없이 상처받았고 그걸 정국이 모르지는 않았을 거라고 태형은 생각했다. 어쩌면 답을 주지 않는 것이, 그게 답인 걸까. 몇 년째 유지되고 있는 이 한없이 가벼운 관계가, 정국이 제게 줄 수 있는 가장 무거운 감정인 걸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리 끝없이 물어도 혼자서는 답을 낼 수 없었지만.

 

…….”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정국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물음이었다. 정국은 태형에게 태양 같았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정국은 빛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결국 태형은 언제나 시선을 빼앗겼으니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떠올랐고 냉정해지려 해도 차가워지지 않았다. 정국에 대한 지리한 이 감정은 한동안 보지 않으면 사그라진 듯 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생겨났다. 태형이 물기 묻은 손으로 제 눈가를 꾹 누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눈가가 시렸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고, 머리 아프고. 한 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고 나면,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자. 그리고 찬찬히 생각을 해 보는 거다. 정국과의 관계에 대해서. 사실, 답은 정해져 있겠지만.

 

…….”

 

그러니까, 정말로 그러려고 했다. 외면하지 않고, 정국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했다.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태형 스스로. 혼자 깊이 생각하고 결론을 내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태형이 형.”

 

태형은 그 자리에 멈춰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진정되었던 심장이 다시 뛰고, 조금 트였던 숨통이 다시 꽉 답답해져 오기 시작했다.

 

잠깐 얘기 좀 해요.”

 

코너를 돌아 화장실을 빠져나온 그 순간 마주한, 벽에 기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전정국 때문에.

 

*

 

나한테 할 말 없어요?”

 

여기선 좀 그렇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자는 정국의 말에 비상구 계단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 얼마나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을까. 태형은 정국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침묵의 시간 동안 정국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태형은 입을 꾹 다물고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존심이라면 자존심이고, 무서움이라면 무서움이다. 그러나 그 침묵을 깨고 제 귓가에 닿은 정국의 목소리에, 태형은 결국 고개를 들어 정국을 마주했다. 태형이 말없이 바닥을 쳐다보고 있는 내내, 정국의 시선은 줄곧 태형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태형이 고개를 들자마자 둘의 시선은 공중에서 얽혔다. 평소 같았으면 그 눈에 생각이 멎었을 태형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태형은 입을 벌렸다.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닌, 어이없음의 감정에 자연스레 나온 반응이었다.

 

너는,”

 

나한테 할 말 없어? 그러나 뒤에 딸려 나와야 했던 단어들은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대신 태형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태형의 모습에 정국의 미간이 작게 좁혀졌지만 태형은 눈치 채지 못했다. 태형은 주먹을 꼭 쥐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고, 눈가가 시려 왔다. 여기서 울면 진짜 답 없는 거야, 김태형. 참아. 태형이 제 자신을 다독였다. 이렇게 눈물이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정국의 앞에 서면 감정이 널을 뛰어서 통제가 힘들어졌다. 그러나 이제 태형은 정국을 보면 널을 뛰는 감정에 익숙해지다 못해 그런 자신을 달래는 것도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게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아이러니한 것은, 그 널뛰는 감정을 통제하진 못해도 간신히 숨기고 감출 수 있는 것 역시 정국의 앞에서였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제가 정국에게 갖고 있는 감정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정국과의 이런 가벼운 관계마저 끊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태형으로 하여금 감정을 숨길 수 있게 했으니까.

 

없어.”

 

그래서 태형은 그렇게 대답했다. 정국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묻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따지고 싶은 것도, 화내고 싶은 것도. 그러나 태형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말들과 감정 중에 정국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다 제 감정을 나타내는 것들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럴 자격이 태형에겐 없었으니까. 뭐라고 물어볼 수 있을까. 왜 나한테 연락 안 했냐고? 현이 씨랑은 진짜 사귀는 거냐고? 태형은 시린 눈가를 꾹 눌렀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 누적된 피로와 감정이 같이 태형을 짓누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도 없어요?”

전정국.”

…….”

없어. 너한테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그거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태형은 한 글자 한 글자 혀로 꾹꾹 눌러 말했다. 정국이 원망스러웠다. 왜 자꾸 가만히 있어도 힘든 사람을 건드려.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난 이미 충분히 힘든데. 내 감정의 무게도 감당하지 못해서 버거운데. 나한테는 명확한 대답 한 번 준 적 없으면서 나한테서 무슨 말을 기대하는데. 태형이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의 표정은 읽을 수가 없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답답한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둘 다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그 날 레스토랑에 형 혼자 두고 간 거 미안해요.”

…….”

…….”

할 말은 그게 다고?”

 

태형은 기다렸다. 그러나 정국에게선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뭐라고 설명해 주면 좋을 텐데. 그럴 일이 있었다고. 사과만 하지 말고, 이유를 말해 주면 좋을 텐데. 너를 부른 사람이 류현이라서라는 이유 말고, 내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유가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끝끝내 정국의 입에서는 그 이유가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나는 김태형이고, 걔는 류현이니까. 그 이유만으로도 전정국에겐 충분한 이유가 될 테니까. 생각해 보면 그랬다. 정국은 싸웠던 연인과 화해하기 위해 자리를 뜬 것뿐이고, 갑자기 자리를 뜨게 된 것에 대해 태형에게 사과도 했다. 그 때 정국의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태형에게 구구절절 설명해야 할 의무가 정국에겐 없다. 하지만.

 

…….”

 

굳이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었을까. 차라리아무 말도 하지 말지. 사과하지 말지. 이렇게 다른 이유를 얘기해줄 것처럼, 그 날 일을 설명해줄 것처럼 날 여기로 데려오지 말지. 기대하게 만들지 말지. 태형은 하도 깨물어 아려 오는 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감정은 깊은 바다와 같았다. 옅은 바람에 수면은 흔들리지만 바다 속 싶은 곳은 미동하지 않는 것처럼. 정국을 향한 태형의 감정이 그랬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수면에 파동이 그어지지만, 몇 번씩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어도 결국 깊은 곳에 있는 무거운 감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태형의 바다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다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진동은 무거운 감정을 뿌리 채 흔들리게 하고 있었다. 쌓아 왔던 감정은 이미 금이 잔뜩 가 있었고 조그만 진동에도 금방 부서질 수 있는 상태가 된 지 오래였으니까.

 

태형이 형.”

전정국.”

 

한계였다. 태형은 지금 흔들리고 있었다. 모든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태형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흔들리고, 부서지고, 끌어올려졌다 내팽겨쳐졌다. 태형이 숨을 몰아쉬었다.

 

너 나 좀 그만 괴롭혀.”

…….”

나한테 사과는 왜 해? 왜 자꾸 찾아와? 왜 자꾸 앞에서 거슬리게 알짱거려. 지금도, 왜 불러내는데. 밥은 왜 같이 먹자고 하는데. 너 그러는 거 진짜 짜증나.”

…….”

 

한여름의 태양. 눈이 부시게 빛나서 시선을 빼앗기고 어디에 있든 바라보게 되는 여름날의 햇빛. 하지만 한여름의 태양은 눈부신 만큼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바라볼 순 있어도, 그 옆에 다가갈 수도, 같이 걸을 수도 없게. 태형은 이제 정국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그냥 멀리 있을걸. 다가가지 말걸. 욕심내지 말걸. 멀찍이 제 환상 속에서 정국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만족할걸.

 

그냥 평생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후회됐다. 석진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냥 상상 속으로 남겨놓고, 가까이 다가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태형은 꾸역꾸역 올라오는 감정들을 간신히 눌러냈다. 나는 너만을 위한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지금의 나는 다 네가 있어야만 의미가 있게 됐어. 내가 화내는 것도, 실망하는 것도. 우울한 것도 행복한 것도 다 너 때문이고 내 모든 감정들을 네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 내가 싫어. 답이 없는 고민을 계속해야 되는 것도 싫어. 지쳤어. 그만 하고 싶은데 그만 할 수 없는 것도 싫어. 지긋지긋한 기대. 지리한 감정의 반복.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라 태형의 목울대가 울렸다.

 

다 상관없으니까 나 좀 내버려 둬.”

그러나 그 수많은 말 대신 태형이 내뱉은 말은 나 좀 내버려 두라는 말이었다. 이건 자존심일까, 무서움일까. 알 수 없다. 그냥, 너무 지쳤다. 태형은 고개를 들어 정국을 마주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하자.”

 

목소리가 떨려 나오진 않았을까. 태형은 제가 뱉은 목소리가 최대한 담백했길 빌었다. 아무렇지도 않았길 빌었다. 정국을 좋아하면서 익숙해진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연기가 이 순간 최대로 빛을 발하길 간절히 빌었다.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 사람 때문에 그래요?”

?”

 

태형의 말에 정국은 아무 말이 없었고 태형은 눈을 감았다 떴다. 해야 할 말은 다 했기 때문에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하고 싶은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머리가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정국의 시야 밖에서 사라지고, 제 시야에서 정국을 몰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태형이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린 그 순간 들린 정국의 목소리에 태형은 발을 멈췄다. 정국의 목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맨날 가볍게 굴었잖아요. 형 가벼운 사람이잖아요. 왜 그 사람한테는 안 그래요?”

전정국.”

. 애인은 뉴욕에 따로 있으니까, 애인 몰래 그냥 즐긴 건가?”

 

태형이 몸을 돌려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은 비스듬히 서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태형이 눈을 깜박였다. 저런 표정의 전정국은 처음이다. 저렇게 날선 말을 하는 전정국도.

 

난 그것도 모르고. 민윤기 좋아하냐고나 묻고 있었네.”

.”

애인이 곧 뉴욕에서 돌아올 거라서,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이제야 이해가 되네.”

 

정국의 온도가 너무 차가워서, 태형은 침을 삼켰다. 정국과의 관계가 좋게 마무리될 수 없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질 줄은 몰랐는데. 정국의 입에서 쏟아지는 날선 말들은 이미 너덜해져 더 이상 상처가 날 수 없을 것 같았던 감정에도 생채기를 낸다.

 

애인은 알아요? 형이 나랑 잔 거?”

…….”

형이 이렇게 아무하고나 자고 다니는 거. 나랑 섹스 파트너 관계였던 거 다 아

태형아!”

 

그 때였다. 비상구 문이 열리고, 환한 빛과 함께 석진의 목소리가 태형의 귓가에 닿았다. 태형은 고개를 들어 석진을 쳐다봤다. 석진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태형은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고 석진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챈 듯 여기 있었네, 하며 태형과 정국에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곧이어 석진이 태형을 감쌌고 그걸 본 정국은 입술을 꾹 물었다. 석진이 조심스럽게 태형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냐는 의미였다. 태형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진짜 영화에 늦을 것 같아서. 이만 태형이를 데려가도 될까요?”

…….”

할 말 끝났어. 가자.”

 

대답이 없는 정국 대신, 태형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 짧은 단어를 내뱉는 데에도 심장이 울컥하고 눈이 시렸다. 최악의 날에 하는 최악의 마무리. 이보다 더 거지같은 결말도 있을까. 태형이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걸어 올라갈 동안에도 정국은 끝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너 괜찮아?”

…….”

너 짐 내가 다 챙겨 나왔어. 얼른 차로 가자. 너 얼굴 진짜 안 좋

.”

 

태형이 눈가를 짚었다. 나 다 끝났어. 엘리베이터 안, 정국이 없는 곳. 정국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 도착하자 그제서야 꾹 눌러 왔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게 무슨 소리냐 묻는 석진의 말에 태형은 대답하지 못했다. 온 몸이 전부 욱신거렸다. 머리도, 눈가도, 입술도, 심장부터 발끝까지 모두. 제 울음에 석진이 당황해 저를 도닥이는 것이 느껴졌다. 태형은 주르륵 무너져 내렸다. 진짜 끝났다. 모든 것이.

 

그게 무슨 소리야, 뭐가 끝나. 태형아.”

…….”

, 태형아. 왜 그래. 너 괜찮아? 물이라도 갖다 줄

…….”

 

단어가 울음 때문에 뚝뚝 끊겨져 나왔다. 태형은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뱉어냈다. 정말 다 끝났다. 제가 생각했던 최악의 결말보다도 더 최악으로. 석진이 괜찮냐고 물어 오며 제 등을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안 괜찮다. 괜찮을 수가 없었다. 모든 소리가 소음으로 대치되어 귓가를 찢어질 듯이 울리고 있는데. 아직도 그 차가운 목소리와 얼굴이 계속해서 눈가를 울리는데. 태형이 울음에 푹 젖은 목소리로 숨을 헐떡였다. ,

 

, 듣고 있어.”

미국 갈래…….”

?”

나 미국 갈래 형…….”

 

모든 것이 끝났다. 제 감정도, 정국과의 관계도.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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