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세상의 모든 순간에는 소리가 있다. 그리고 태형은 그 모든 순간의 소리를 음악으로 인식했다.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할까. 모든 소음은 박자가 될 수 있고, 모든 소리는 멜로디가 될 수 있으니까. 매 순간마다 기록되는 박자와 멜로디들이 시간이 지나 가라앉고 걸러지고 나면, 태형은 제 기억 속에 흘러가지 않고 남아 있는 소리들에서 음을 꺼내 곡을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제 기억의 용량이 작아져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이미 경험한 많은 감각들에 무뎌져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태형의 뇌리에 남아 있는 소리들은 점점 그 부피를 줄여 갔다. 처음으로 작곡을 배웠을 때는 채 다 음표로 기록하지도 못할 정도로 많았던 소리들은 이제 태형이 기억하려고 노력해야지만 겨우 머물러 있어 줬으니까. 그래서 태형이 제 고충에 대해서 선배들에게, 친구들에게 털어놨을 때 친구들은 그랬다. 그건 당연한 거라고. 감각이 무뎌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고, 기억력이 안 좋아지는 것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거라고. 모두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고, 반쯤은 우스갯소리로 그랬다. 그래서 태형은 그게 자연스러운 일인 줄 알았다. 앞으로는 계속 노력을 해야만 그 감정과 감각들을 기억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김태형이라고 합니다.’

나 몰라요?’

 

정국을 처음 마주하기 전까지는.

 

, 알죠, 어떻게 몰라요, 저 되게 오래 전부터 팬이었는데.’

.’

 

그러고 보면, 정국과의 첫 만남은 그다지 평범하지만은 않았다. 애초에 TV에서 먼저 보고 좋아하던 연예인과의 첫 만남을 어떻게 평범하다고 정의내릴 수 있겠냐마는, 이상하게 그랬다. 공기의 흐름이 달랐다고 할까. 낯설지 않고, 익숙한 느낌. 예전에 만나야 했던 사람을 이제야 만난 것 같은 느낌. 우연찮게 친해진 윤기가 소개해주지 않았더라면 한낱 작곡가와 배우는 만날 일이 없는 인연이었을 텐데, 언젠가는 만났을 거라는 확신. 태형의 말에 정국이 터트린 짧은 탄성에서, 태형은 그런 걸 느꼈었다.

 

초면 아니죠, 우리?’

?’

내 영화 OST 참여한 거, 처음 아니던데.’

 

.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에서의 초면이라면 초면이 아닌 게 맞았으니까. 비록 먼 발치에서였지만 태형은 3년 전 영화의 뒤풀이에서 정국을 마주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 잊을까. 그 때 처음으로 첫눈에 반한다는 감각을 알게 됐는데. 그러나 굳이 그 날을 언급하지 않았던 건, 숨기고 싶은 감정을 가진 사람의 알량한 자존심이었다. 정국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김태형이라는 사람을 만나는 첫 순간일 테니까.

 

맞아요. 모르실 줄 알았는데.’

그 때는 왜 인사 안 했어요? 인사 들은 기억이 없는데. 오래 전부터 팬이었다면서.’

…….’

그 땐 내 팬 아니었어요?’

 

전정국이 이런 성격의 사람이었나? 계속해서 이어지는 정국의 질문에 태형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TV에서 보던 거랑은 좀 다르네, 싶었다. 태형은 살짝 눈을 굴렸다.

 

바빠 보이셔서, 기회가 없기도 했고…….’

…….’

 

잠시 간의 침묵 후 제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이유라기보다는 변명에 가까웠다. 진실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떻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까. 정국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그 때 당시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던 정국의 애인이 불편했다고. 그 앞에 서서 자기소개를 하고, 처음 뵙는다며 팬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고. 정국에게 수많은 영화 관계자 중 제 팬인 한 사람으로 잠시 동안 머리에 앉았다가 잊혀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 전정ㄱ,’

농담이에요. 놀랐어요?’

 

그리고 무언가 미묘한 분위기에 윤기가 입을 연 그 순간, 정국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떠오르며 정국은 낯선 사람에서 제가 알고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 트란퀼로(tranquillo)에서 아니마토(Animato).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알았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 정국과 처음으로 눈을 맞춘 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아마 앞으로 정국과 마주할 시간들 전부가,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거 같아서 그랬어요.’

…….’

윤기 형 아니었으면 오늘도 나한테 아는 척 안 했을 거 같아서.’

 

흘러가지 않는 소리가 되어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거라는 걸.

 

*

 

일찍 알았으면 뭐, 하는 윤기의 웃음 섞인 말에 정국은 살짝 웃으며 저번 영화에서 OST 듣고 너무 좋았는데, 일찍 알았다면 이거보다 더 전의 영화들도 부탁했을 거야. 하고 말했다. 사실 그 날의 감정과 감각이 선명하게 남았다고 해서 구체적인 기억까지 선명한 것은 아니라 그 날 정국이 저에게 뭐라고 했는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확실한 것은 그 이후로 정국은 계속 제 옆에 있었다는 거였다.

 

윤기 형이랑은 언제부터 친했어요? 많이 친해요?’

언제부터 나 좋아했어요?’

유학은 얼마나 오래 했어요?’

내가 왜 좋아요?’

 

, 그리고 선명한 게 또 하나 있다. 신기할 정도로 정국이 제게 질문을 퍼부었다는 거. 보통은 반대의 상황이 정상 아닌가? 보통은 팬이 연예인한테 궁금한 게 많은 거잖아. 그러나 태형은 제가 정국에게 궁금한 것을 질문할 틈도 없이 정국의 질문에 대답하기 바빴다. 사실, 물어볼 틈이 있었다 해도 태형이 가진 질문들은 제 입 밖으로 내보낼 수 없는 것들이 대다수긴 했다.

 

같은 동아리였더라구요. 그 때부터 아는 사이는 아니었는데, 많이 친해졌어요.’

유학하고 있을 때 영화로 처음 알게 됐는데, 그 때부터였던 거 같은데.’

꽤 오래 했죠. 몇 년이나 있었더라.’

그냥 다 좋은데. 연기도 잘 하시고, 잘생기시고……. 하하.’

 

그 땐 그렇게 얼버무렸지만, 사실 태형의 진짜 대답은 그러게요.’였다. 왜 전정국이 좋은지, 태형 자신도 알지 못했으니까. 전정국이 왜 좋을까. 어디가 그렇게 좋았을까. 태형은 손으로 턱을 괴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서, 아직까지도. 이렇게까지.

 

시차 적응 아직 다 안 됐어?”

, .”

피곤해 보이네.”

 

석진이 차가 담긴 컵을 내밀었고 그 순간 태형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더워 죽겠는데 웬 뜨거운 차야. 태형은 툴툴거리면서도 씩 웃으며 컵을 받아들었다. 뜨겁다곤 해도, 손대지 못할 만큼은 아니라 태형은 컵을 손으로 감싸 잡았다. 에어컨 바람이 슬슬 춥게 느껴지던 참이었다.

 

미팅 어땠어?”

좋았지, .”

별로 감흥이 없어 보이네. 안 좋아?”

 

미국에 온 지 일주일. 시차 적응을 하고, 석진의 지인들도 만나고, 가장 중요한 H 감독과의 미팅도 하고. 시차 적응을 하느라 더디게 보냈던 이틀을 제외하면 태형의 일주일은 정말 말 그대로 눈 코 뜰 새 없이 빠르게 지나갔다.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안 좋긴, 영광이지. 태형의 그 말에도 석진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지만.

 

너 미국에 온 이후로 제대로 웃는 걸 본 적이 없는 거 같아.”

…….”

괜히 데려온 건가?”

 

석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태형의 앞에 마주 앉았다. 그리고 그런 석진을 바라보던 태형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내가 선택한 건데.”

…….”

여기로 오는 게 최선이었어.”

 

나한테도, 전정국한테도. 태형이 한 박자 늦게 덧붙였다. 최선의 선택이라는 말은, 진실이었고 진심이었지만 석진은 얕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너 정말 괜찮겠어? 그 말에, 태형은 가만히 입에 컵을 가져다 댔다. 괜찮겠냐는 질문에는 진심으로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으니까. 미지근한 온도의 씁쓸한 차가 입술을 적시는 것이 느껴졌다.

 

너 계속 걔 생각 하지.”

…….”

…….”

.”

 

잠시간의 침묵 후, 태형이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바빴던 일주일 동안, 낮에는 정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뉴욕은 바빴고, 정신없었고,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더니 생각나지 않는 것도 같았다.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하는 사람들로만 둘러싸여진 환경도, 정국을 만나기 전의 유학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지게 했으니까.

 

…….”

 

그러나 밤에는.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고, 암막 커튼으로 꽁꽁 가려져 있어 뉴욕의 화려한 불빛이 보이지 않는 밤에는, 태형은 자연스럽게 정국을 떠올렸다. 아니, 떠올린 게 아니라 떠올랐다.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버릇.

 

처음에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려지면 지워내고, 떠오르면 묻어 두려 했다. 그러다가, 4일째 되는 밤부터는, 그냥 내버려 뒀다. 어차피 이제는 볼 일 없는 사이가 될 테니까. 더 이상 떠올릴 순간이 없을 때까지 전부 떠올리고 나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어서. 아니면 무뎌지기라도 할까 싶어서.

가까운 과거에서 먼 과거로, 먼 과거에서 다시 가까운 과거로. 두서없이 떠오르는 정국과 관련된 기억들 속에서 태형은 제가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기억들까지 꺼낼 수 있었다. 정말 이 정도까지 정국과의 모든 순간을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싶을 만큼. 그러다가, 태형은 어쩌면 정국과 제 관계가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틀어질 수 있었을지 모를 순간까지 떠올렸다. 결국엔 또 다른 상처로 남았지만.

 

아무도 없네.’

 

첫 번째는 정국과 파트너 관계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원래부터도 정국과 주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다지만, 요 며칠 유독 정국에게서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던 차였다. 그 날도 그냥 그렇게, 평범하게, 아무 일 없이 흘러갈 줄 알았는데. 그 평범함은 늦은 밤 정국이 태형의 집 문을 두드리면서 깨졌었다.

 

이 시간에 그럼 누가 있어.’

그러게요.’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마셨어?’

 

태형은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 오는 진한 술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서 이렇게 많이 마시고 온 거야. 여기까지는 또 어떻게 온 거야.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놓고, 왜 자기 집이 아니라 내 집에 온 거야. 한순간에 많은 질문들이 떠올랐지만 그 수많은 질문들은 그 순간 내뱉은 정국의 한 마디에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

.’

나랑 연애할래요?’

 

나랑 연애할래요? 정국은 그 말을 하며 씩 웃었다. 차라리 슬픈 얼굴이었다면. 그렇게 장난스럽게 웃지만 않았었다면. 조금만이라도 진지한 얼굴이었다면. 평소 태형을 기분 좋게 만들었던 정국의 향기보다, 술 냄새가 진하지 않았더라면. 그랬으면 그 때 태형의 대답은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너 취했어?’

조금요.’

장난치는 거야?’

글쎄요.’

 

하지만 상황이 그랬다. 태형이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국은 술에 취해 있었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고, 태형은 요 며칠간 아무 연락 없는 정국에 초조해 있었다. 그 때 그냥 모른 척, 그러자고 했으면 뭔가 달라졌을까? 더 비참해졌을까.

 

이런 장난, 치지 마.’

…….’

아침에,’

 

다시 얘기해주면 안 돼? 그렇게 묻고 싶었다. 술 취해서 말고, 장난스럽게 말고. 맨 정신으로, 지금보단 진지한 얼굴로. 다시 한 번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내 얼굴 어떻게 보려고.’

 

그러나 태형의 입에서는 그 말 대신 다른 말이 나왔다. 그리고 태형은 돌아섰다. 내 침대에 올라올 생각 하지 말고, 자고 갈 거면 소파에서 자고 가든가. 그렇게 말했다. 돌아보지도 않고. 어두웠던 집 안에, 오롯이 밝았던 현관 불이 꺼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태형은 돌아보지 않았다.

 

 

잘 잤어요?’

 

그리고 다음 날, 일부러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나간 거실엔 멀쩡한 얼굴의 정국이 앉아 있었다.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어젯밤 일이 꿈이 아니었구나. 그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럼? 뭔가 달라졌을까? 태형이 멍하니 정국을 쳐다보고 서 있자, 정국이 어색하게 웃었다. 왜 그렇게 봐요.

 

어제, 미안해요.’

…….’

내가 실수했죠.’

 

차라리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으면 지금보단 나았을까. 태형은 쿵 떨어지는 심장에 입술을 깨물었다. 실수. 사과. 어제의 일이 그렇게 마무리된다. 정국이 천천히 일어나 태형에게 다가왔다. 기분 많이 나빴어요?

 

요즘 좀,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

술만 마시면 자꾸 헛소리를 하더라구요. 그냥 잊어버려요.’

 

헛소리. 태형은 그 말에 쓰게 웃었다. 그 말이 그 무엇보다도 제게 미안해해야 할 말이라는 걸, 정국은 알까. 아마 죽어도 모르겠지. 태형이 피곤한 눈가를 손으로 꾹 눌렀다. 이젠, 연기를 해야 할 차례다.

 

알았으면 됐네.’

…….’

술 깼으면 가.’

화난 거 아니죠?’

내가 화를 왜 내.’

 

짧게 주고받아지는 대화 속에 진심은 없다. 태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돌아섰다. 나 작업해야 돼. 그 말을 끝으로 태형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건 태형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자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정국이 제 시야 안에서 사라지기 전에, 제가 먼저 정국의 시야 밖으로 벗어나는 것.

 

한심하다, 진짜.’

 

태형이 중얼였다.

 

*

 

태형아, 너 사람 만나볼래?”

 

뉴욕에 온 지 이주일하고도 반이 지난 때였다. 점심을 먹던 석진이 문득 꺼낸 말에, 태형은 물을 마시다 사래가 들려 기침을 했다. 뭐라고? 아직 기침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태형이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니, 그냥. 그 때, 크랭크인 파티 갔을 때. 너 소개시켜 달란 사람이 있었거든.”

무슨 뜻으로?”

여러 가지?”

 

석진이 고기를 마저 입 안으로 구겨 넣으며 태형을 쳐다봤다. 부담 갖진 말고. 그 사람도 꼭 그런 의미로만 소개시켜달란 건 아니었으니까. 석진의 이어진 말에 태형이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말이야, 그게.

 

일단은 작업 관련으로 소개해달란 거였어. 너 모를 때도, 내가 걔한테 네 곡 나온 영화 보여주니까 관심 있어 했었거든. 그런데 여러 가지라고 말한 건, 혹시나 부담스러우면 미리 거절하라고. 그 쪽으로 아주 뜻이 없어 보이진 않았거든. 눈빛이.”

 

내가 걜 몇 년을 봤는데. 말 안 해도 다 알지. 석진이 살짝 웃으며 말했고 태형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직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럴 생각도 못 했고. 태형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석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애 괜찮아. 진중하니. 아마 네가 부담스러워하면 바로 그만둘 거고. 사실 알아두면 좋은 애긴 하거든.”

…….”

애가 성격이 좋아서, 관계자들이 다 좋아해. , 말 안 했구나. 걘 배우. 5년찬데, 연기도 잘 하고, 감독들 사이에서 평도 좋아. 이번 영화 주연이라, 영화 올라가고 나면 아마 확 뜰 거야.”

…….”

만나만 봐.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잖아.”

아니, 아깐 나한테 다른 맘 있어 보인다며.”

애인이나 친구나 종이 한 장 차이지 뭐. 이제 앞으로 계속 미국에 있을 거라며. 그럼 친구도 만들어야지.”

 

그건 그런데태형은 어색하게 웃었다. 앞으로 계속 미국에 있을 거라며. 분명 뉴욕에 오기 전, 제 입으로 석진에게 했던 말이고 스스로 한 결심인데 그 사실이 아직까지도 낯설게 느껴졌다. 태형은 물컵을 내려놓았다. 어쩐지 혀끝이 썼다.

 

*

 

안녕하세요. 진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요.”

 

그 때 석진의 말에 확실하게 동의를 했던 기억은 없는데. 태형은 저에게 말을 걸어 온 훤칠한 남자에 눈을 깜박였다. 미국에 온 지 3주째, 석진은 종종 태형을 파티에 데려가곤 했다. 주로 영화 쪽 관계자들이 많이 참석하는 파티인데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집에 박혀 있는 것보단 밖에 나가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태형도 순순히 응해주고 있던 차였고. 그런데 이렇게뒤통수를 칠 줄이야. 태형이 어색하게 웃으며 제게 내밀어진 남자의 손을 맞잡았다. 태형도 이 사람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지. 이번 영화의 남자 주인공인데.

 

……. 만나서 반가워요. 저번에 인사를 못 드렸네요.”

제가 먼저 인사드렸어야 했는데요. , 진이라고 부르시면 돼요. 한국 이름이 한우진이라.”

 

한우진이라고 발음하는 남자의 한국어 발음이 어색했다. 애초에 영어로 말을 걸기도 했고, 지금 보니 우진의 얼굴은 완전한 한국인이라기엔 조금 이국적이었다. 혼혈인가? 태형이 멍하니 생각하며 저보다 훨씬 큰 우진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우진이 그런 태형의 시선에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미국인이세요. 태어나기도 미국에서 태어났고, 그래서 한국어는 잘 못해요.”

…….”

혹시 제가 불편하신 건…….”

, 아니에요!”

 

태형이 살짝 웃었다. 정국을 만난 이후,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 다가오는 상대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 자체를 하게 된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말이 부자연스럽게 나왔다. 정국과도 처음에 이랬을까?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정국을 떠올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생각하지 말자. 태형은 다시 우진을 쳐다봤다. 두 눈에 가득 담긴 호의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신기하고 낯설었다. 혹시 헛된 착각을 품게 할까 봐, 정국의 표정을 추측하는 것은 항상 포기했었으니까. 태형이 웃는 얼굴을 하자 긴장으로 살짝 굳어 있던 우진의 얼굴이 풀리는 것이 보여서, 태형은 조금 더 눈을 접었다. 대화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 발코니에서 불어 오는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진이, 그러니까 석진이 태형 얘기 많이 했어요. 작업한 영화들도 보여 줬고.”

그랬어요?”

. 그런데 너무 좋은 거예요. 이런 말 하면 좀 그런가? 영화에서 음악이 그렇게 큰 역할을 하는 지 처음 알게 됐어요.”

, 정말요?”

지금 제 얘기, 재미없진 않죠?”

 

초조해하는 것도 느껴진다. 태형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이런 기분이 너무 오랜만이라. 그러자 우진이 그런 태형을 쳐다보다 이내 따라 웃었다.

 

, 그런데 아무것도 안 마셔요?”

, 깜박하고. 바 어디 있어요?”

제가 가져다줄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는…….”

잠시만요!”

 

우진은 태형이 말리기도 전에 발코니를 나섰고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이내 웃어버렸다. 누군가의 호감을 사고 싶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솔직한 행동을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어쩌면 정국과 저도 이렇게 시작했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럼 연애할래요?’

 

두 번째. 태형이 생각하는 관계의 전환점이 될 수 있었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순간은 파트너로 지내게 되고도 시간이 꽤 지난 후였다. 태형이 처음으로 정국에게 파트너를 그만두자고 했던 날. 이런 관계는 그만하는 게 어떻겠냐는 태형의 말에, 정국은 그랬다. 연애할래요? 태형의 눈을 쳐다보면서.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런 관계는 그만 두자면서요. 그러니까 연애.’

진심이야?’

글쎄요.’

 

그 때, 태형은 처음 정국이 제게 연애하자고 했던 날을 떠올렸다. 그 때도 정국은 장난이냐는 태형의 물음에 글쎄요.’하고 답했었다. 그리고 그 날을 떠올림과 동시에, 박동을 빨리 하려던 태형의 심장이 멈추었다.

 

다를 거 없잖아요, 지금이랑.’

장난치지 마.’

왜 장난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생각해 보면, 그때와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정국은 술에 취해있지 않았고, 한동안 연락이 두절된 상태도 아니었으며, 정국의 몸에선 술 냄새 대신 태형이 좋아하는 정국의 향이 나고 있었으니까. 그 날, 태형이 바랐던 모든 것. 그러나 문제는 그 때와 달라진 것이 또 있었다는 거였다. 태형이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런 소리 하지 마.’

…….’

그러려고 만나는 거 아니잖아, 우리.’

 

그래서 태형은 부러 차갑게 말했다. 그 날에 받은 상처가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 태형을 괴롭히고 있었으니까. 태형의 말에 정국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정국을 쳐다보고 있던 태형은 먼저 정국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렇게, 그 날의 일은 없던 것이 됐고.

 

 

무슨 생각해요?”

.”


다시 한 번, 우진의 목소리에 의해 태형의 상념이 깨졌다. 서둘러 왔는지 우진의 볼이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태형은 그런 우진을 쳐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또 저도 모르게 정국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태형은 우진의 손에 들린 세 개의 잔을 쳐다봤다. 뭘 저렇게 많이 갖고 왔지.

 

,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제가 마시고 있던 게 도수가 조금 높은 거라서. 혹시 몰라서 낮은 것도 가져왔는데…….”

…….”

 

태형이 조그맣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되게 다정하네. 아니, 이럴 땐 섬세하다고 하는 건가. 태형은 웃으며 다른 잔을 받아들려다 이내 우진이 들고 있던 잔과 똑같은 잔을 받아들었다. 우진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고 태형은 고개를 으쓱했다.

 

이 술이 맛있어서 마시고 있던 거 아니에요?”

그건 그런데, 술 잘 못 하신다고…….”

오랜만이라서, 별 일 있겠어요.”

…….”

 

우진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보인다. 태형은 달콤하면서 쓴 액체를 넘기며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웃었다. 시원한 바람, 안정된 분위기. 어쩌면꼭 매듭짓지 않아도 이렇게 흐려져 갈 수도 있을까. 태형은 멍하니 우진을 쳐다봤다. 어쩌면그러니까 어쩌면

 

밤바람이 참 좋죠. 한여름 같지 않게.”

 

이렇게 그냥, 그 위로 시간의 무게를 쌓아가다 보면, 그렇게 자연스럽게 덮여질 수도 있을까.

 

*

 

! 여기 있었네. S감독이 찾아.”

? 갑자기?”

소개시켜줄 사람이 있대. , 너 좋아하는 영화 감ㄷ, 일행이 계셨네.”

전 괜찮으니까 가 봐요.”

 

태형은 웃으며 우진을 살짝 밀었다. 우진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망설이다 이내 태형에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야기만 하고 금방 올게요. 그 말에, 태형은 난 신경 쓰지 말고 대화하고 오라는 뜻으로 살짝 웃어 보였다.

우진이 멀어져 가고, 태형은 얕게 숨을 몰아쉬었다. 생각보다 편안하고 유쾌했지만 어쨌든 처음 보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딱히 낯을 가리지 않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는 태형에게도 많은 기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으니까. 바람이나 좀 더 쐴까. 태형은 아예 건물 밖으로 나섰다. 화려한 조명이 켜져 있는 시끄러웠던 홀과는 다르게 고요하고 은은한 불빛의 정원이 시원한 여름밤에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앞으로 더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우진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의 기저에 있는 의미를, 태형이 모르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술을 마셔 뜨끈해진 볼을 감싸며 태형은 천천히 걸었다. 도수가 꽤 높은 술을, 기분이 좋아 조금 빨리 마셨던 게 지금에서야 몰아오는 기분. 그런데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태형은 살짝 미소 지었다.

우진은 편안한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야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지 아는 사람이었고, 어떻게 해야 자신이 매력적으로 비치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태형은 우진에게서 매력을 느꼈다. 좋은 사람이라던 석진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그 잠깐 사이에도 우진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정하고, 솔직한 사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모두 내보여주는 사람.

 

편안할까.”

 

우진과 연애를 하게 된다면. 태형이 조그맣게 중얼였다. 연애. 안정적이고 편안한 연애. 연애가 꼭 설레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굳이 죽도록 상대가 보고 싶고, 좋아하는 마음이 벅차오르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도. 그런 것도 연애의 한 종류니까. 그래서. 그러니까. 우진이라면, 그런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속 끓이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이대로 우진과 연애를 하게 되면, 정국을 잊을 수 있을까. 술기운에 머리가 살짝 어지러웠다. 태형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눈을 감았다. 여름밤의 향기가 짙어졌다. , 꿈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쉬고. 태형은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숨을 멈추었다.

 

김태형.”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정국의 목소리가 태형의 귓가를 울리고, 익숙해서 심장을 벼랑 끝으로 떨어트리는 그 향기가 바람에 실려 태형에게 닿는다. 이건, 환상일까? 태형은 홀린 듯 제 눈앞에 서있는 인영을 바라봤다. 오늘 하루 종일 전정국만 생각했던 내가, 그러면서 자꾸 지워내려고 애쓰는 내가 너무 안타까워서. 술에 취한 내 자신이 나에게 주는 위로 같은 걸까?

 

태형이 형.”

…….”

아무것도 안 바랄게요. 다른 사람이랑 연애해도 좋고, 나랑은 잠만 자도 좋고. 나한테는 눈길도 안 줘도 좋아요. 그러니까,”

 

현실감이 없었다. 술에 취해 흐려진 시야가 태형의 머릿속처럼 울렁였다. 정국이 태형에게 느릿하게 다가오고, 여름밤의 농도보다 정국의 농도가 더 짙어진다. 태형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그런 정국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한테서 도망가려고 하지만 마요.

 

태형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눈을 감았다 떠도 전정국은 사라지지 않는다. 더 또렷해지고, 가까워지고, 짙어질 뿐이다. 이 감각들이 전부 환상이라면 이건 위로가 아니라 벌이었다. 내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제가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할 상실감이, 태형은 벌써부터 무서웠으니까.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국이 한 걸음 더 가까이 태형에게 다가갔다. 태형은 숨쉬는 것도 잊은 채 정국을 쳐다봤다. 꿈일까, 환상일까. 전정국이 손을 뻗어 내 팔을 잡고, 따뜻한 체온이 내 살갗에 닿고. 심장이 박동을 빨리 하기 시작했는데. 그런데 내 눈앞의 전정국이 전부 내 환상이라면,

 

내가,”

 

전정국이 하고 있는 이 모든 말들도 전부,

 

졌어요.”

 

내 바람이 만들어 낸 것들일까.



+


다음 편은 정국 번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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