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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형은 정국과의 관계가 꼭 저온 화상을 입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따뜻한 줄만 알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깊숙이 파고들어 상처를 입히는 열 같은 관계.

처음에 무엇을 기대하고 정국에게 다가갔던 걸까. 이제 태형은 그것마저도 기억해내기 어려웠다. 섹스 파트너로만 지내는 걸로 만족하려고 정국의 제안을 수락했던 거였나? 아니면, 그렇게 지내다 보면 정국의 마음이 제게 기울까 기대한 거였나. 그것도 아니면, 더 이상 먼발치에서 혼자 정국을 바라보는 게 지쳐서였을까.

 

…….”

 

만약 마지막 이유였다면, 태형은 당장이라도 이 미지근한 관계를 그만두고 정국과 시작한 것을 후회해야 했다. 옆에서 지내다 보면, 마음이 식을 줄 알았던 걸까. 옆에 있는 것이 멀리서 지켜보는 것보다 덜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뭐가 됐든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저온 화상은 자각이 없어 더 위험하니까. 상처가 더 깊어지는 줄도 모르고 따뜻함에 취해 계속 머무르려 하게 되니까. 마치 지금 제 상태처럼.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는 배우 전정국의 소속사 측은 본인 확인 결과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맞다.’고 류현이와의 공식 열애설을 인정했다. 연예계 선남선녀 커플의…….]

 

태형은 전정국와 류현이의 열애설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는 기사를 읽다 이내 인터넷 창을 꺼 버렸다. 기사를 찾기 위해 검색하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모든 포털사이트들이 전정국과 류현이의 열애설을 더 많이 띄우지 못해 안달이었으니까.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만두고 싶지 않다면 그것 역시 거짓말일 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정국을 놓지 못하는 것은, 그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러지 못해서였다. 여태까지 태형이 맺어 왔던 관계들에서 태형이 항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많은 관계들 중에, 분명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보다 제가 상대를 더 좋아했던 적도 많았고, 하룻밤의 인연으로 끝내기에는 아쉬워 관계를 지속해볼까 고민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때마다, 태형은 제 자신을 통제할 수 있었다. 어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태형은 그 상대들보다 항상 제 자신을 우선에 둘 수 있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옅어지는 감정은 그런 태형을 도왔으니까. 그런데 왜.

 

짜증나…….”

 

전정국한테는 그게 되지 않을까. 태형은 눈가에 손을 올렸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너무 오래 좋아해서? 너무 오래 애태워서? 제대로 만난 적도 없을 때, 혼자 먼발치에서 시작한 짝사랑이라서? 마음이 있는 채로 몸을 섞어서? 그러고도 놓지 못해서? 놓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서? 계속 마주쳐야 하니까?

갖다 붙이려면 이유는 많았다. 전정국을 좋아한다는 이유 말고도 제게 전정국이란 존재는 특별했으니까. 그러니 그런 이유들을 다 갖다 붙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게 답이 아니라는 것은 제 자신이 이미 제일 잘 알고 있는데.

 

전화 한 번 정도는 해 줘도 되잖아. 태형은 입술을 짓씹었다. 우울하다가, 허탈하다가, 그 감정도 지나가니 이번엔 억울함이 찾아왔다. 며칠 전까지 나한테 그렇게 말해놓고. 현이 씨를 만나러 간 이후로 아무 연락 없는 전정국이 너무 미워서. 그리고 그게 정말로, 전정국의 안에 김태형이란 사람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알려주는 것 같아서. 사실, 그 정도가 맞겠지만.

누군가 그랬다. 제 살을 깎는 사랑은 하지 말라고. 그 감정은 결국 사람을 닳게 만들어 지치게 한다고. 하지만 태형은 그 사람에게 묻고 싶었다. 제 살을 깎아가면서까지 그 감정을 놓지 못하는 사람이, 그 감정을 가져가고 싶어서 여태껏 갖고 있는 것이겠느냐고. 놓지 못하니까. 놓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것 아니겠냐고.

 

…….”

 

무엇보다 비참한 건, 지금 이 순간에도 자꾸만 현관문을 보게 되는 제 자신이다. 혹시라도 정국이 그 문을 열고 들어오길 바라면서.

 

*

 

태형아!”

 

누구를 만나고 싶은 기분은 전혀 아니었는데. 태형의 감정과 상관없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 정국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 동안 작업이 제대로 진척이 될 리 없었지만 태형은 작업실 안에 틀어박혀 이어지지 않는 멜로디만 붙잡고 있었다. 윤기에게서 몇 번이고 전화가 왔지만 태형은 받지 않았다. 윤기의 얼굴을 보고 무슨 말을 하게 될지 제 자신도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정국에 대한 제 마음을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인 윤기의 앞에서 볼썽사납게 펑펑 울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너무 비참하잖아.

 

무슨 일이야, 이렇게 갑자기.”

 

그러나 그런 태형에게도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은 있었다. 정확히는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기 보다 거절할 수 없는 경우가 더 정확하겠다. 미국에서 나 하나 만나려고 날아왔다는데 어떻게 거절해. 태형은 석진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석진이 그런 태형을 와락 끌어안았다. 너 보고 싶어서 왔지!

 

석진은 태형이 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우연히 만난 한국인이었다. 태형이 대학을 다녔던 그 도시에 살았던 건 아니었고, 방학을 맞아 놀러간 휴양 도시에서 만난. 사실 한국인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폐가 있는 것이, 석진은 한국인의 모습을 한 외국인에 가까웠다. 부모님만 한국인일 뿐 그 도시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도시에서 살았으니까. 그렇지만 오랜 외국 유학 생활에 지친 태형에게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고 그러니 태형이 석진을 클럽에서 만나지 않은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석진과 하룻밤을 보내고 이름도 모른 채 그대로 헤어졌을 테니까.

 

여기서는 막 그렇게 껴안으면 사람들이 오해해.”

볼에 뽀뽀하려다가 자제한 건데.”

그건 거기서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태형은 살짝 웃으며 석진을 마주 안았다. 석진은 같이 있으면 즐겁고, 편안한 사람이었다. 석진이 사는 도시와 태형이 대학을 다니는 도시는 꽤 거리가 있었음에도 여름휴가 내내 꽤 친해진 둘은 그 후에도 종종 만나곤 했다. 태형이 귀국을 하고, 석진은 미국으로 취직을 하게 된 이후로는 처음 만나는 것이었지만.

 

형은 여전하네.”

여전히 잘생겼지.”

 

태형의 말에 석진이 씩 웃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인정. 태형도 석진을 따라 마주 웃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러나저러나 오랜만에 만나는 석진은 태형을 웃게 만들었다. 김석진이란 사람 자체가 그랬다. 딱히 알고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태형이 우울하거나 외로울 때마다 석진은 귀신같이 연락을 해 오곤 했다. 그리고 석진을 만나면, 어쨌든 석진과 함께 있는 시간동안은 웃을 수 있었고.

 

타이밍도 좋아.”

?”

아냐. 그런데 회사는 어쩌고 온 거야?”

사실은 나 지금 일하는 중이야.”

?”

 

석진의 캐리어를 살피던 태형이 고개를 들어 석진과 눈을 맞췄다. 석진이 그런 태형을 보고 씩 웃었고 그 웃음에 태형이 미간을 좁혔다.

 

뭐야. 출장 온 거야? 나 보러 왔다더니. 순 사기꾼,”

너 보러 온 거 맞는데?”

……?”

 

태형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일하는 중이라며. 출장 온 거 아니었어? 태형은 석진의 웃음을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석진이 무슨 회사에 다니더라?

 

같은 말이야.”

?”

너 헌팅 하러 왔거든.”

 

빵야. 석진이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흔들며 웃었고, 태형은 그런 석진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

 

진짜?!”

그럼 가짜게.”

 

끼니때가 훨씬 지난 3, 태형과 석진이 발걸음을 옮긴 곳은 태형의 집이나 한적한 카페가 아닌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태형의 몫까지 총 3인분을 시킨 석진은 배고파 죽는 줄 알았다며 제일 먼저 나온 스테이크를 잘라 입에 쏙 넣었다.

누가 보면 스튜어디스들이 형 굶긴 줄 알겠어. 태형이 웃었다. 석진이라면 뉴욕에서 한국까지, 장장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동안 비즈니스 클래스에 앉아 나오는 기내식이며 간식·안주거리들을 전부 다 놓치지 않고 섭렵했을 게 분명한데, 석진의 배는 아직 모자란 모양이었다.

 

기내식은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아.”

그건 그렇긴 한데.”

암튼 그래서, 생각 있어?”

 

스테이크 한 접시를 깨끗이 비운 석진이 냅킨으로 입가를 꾹 누르며 태형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공항에서 석진이 태형을 헌팅 하러왔다는 말의 뜻은 태형을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였다. 석진은 뉴욕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헤드헌팅 회사의 문화 예술 파트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평소 태형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인 H. M. Big 감독이 이번에 새로 들어가게 될 영화를 맡을 마땅한 영화 작곡가를 찾지 못해 석진에게 의뢰를 해 왔고, 그에 석진은 태형을 추천했다는 것이 석진의 설명이었다.

 

너 그 감독 좋아하잖아.”

좋아한다 뿐이게. 이번에 개봉한 영화도 보러 가려고 했었는데…….”

 

태형은 순간 말을 멈췄다. 석진을 만난 덕에 잠시 잊고 있었던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집에 쳐들어와서는 한다는 말이 우리 영화 보러 가요.’ 였지. 로케 촬영 때문에 미국에 다녀왔다더니, 국내에서는 아직 개봉하지도 않은 H 감독의 영화 포스터를 가져와 흔들며 정국은 그랬었다. 개봉하자마자 보러 가자고. 꼭 자기랑 봐야 한다고. 그러나 정작 국내 개봉일에 전정국은 현이 씨와 칸쿤에 있었지.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덕분에 보통은 늦어도 개봉 다음 날에는 봤을 영화를, 태형은 아직까지도 못 보고 있었다.

 

했었는데?”

아냐.”

 

괜히 목이 타서, 태형은 앞에 있는 컵을 들었다. 나중에 DVD 사서 보면 되지. 그깟 영화가 뭐라고. 태형은 애써 제 자신을 다독였다. 석진도 앞에 있는데 우울해지고 싶지 않았다. 태형에게서 이렇다 할 답이 없자, 석진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뭘 고민해. 좋은 기회 아니야?

 

나 지금 형 덕 보는 거야?”

내가 네 덕 보는 거지. 그 감독이 네 곡 듣더니 엄청 좋아했어. 왜 이런 사람 여태 몰랐냐고.”

진짜?”

그래서 내가 그 때 너 귀국하지 말라고 했잖아. 나랑 같이 미국 가자니까.”

뭐래…….”

 

석진은 얼굴이 살짝 진지해졌지만 태형은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영화 음악 작곡가라는 직업을 살리기에 한국보다는 미국이 훨씬 더 좋긴 했다. 시장 크기 자체가 비교가 안 되니까. 하지만 대학 졸업을 앞두고 거처를 고민하던 태형은 그 즈음 우연히 영화를 보게 됐었다. 정국의 영화. 영화의 주연도 아니고, 주인공의 친구였을 뿐인 조연이었는데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태형의 머릿속에는 온통 정국뿐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사람의 영화에 제 곡을 쓰고 싶다고. 그렇게 태형은 귀국을 결정했다. 뭐 물론, 이유가 그거 하나 뿐은 아니고. 오랜 외국 유학 생활에 지쳐 있던 탓도 있었겠지만.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별 건 아니고.”

?”

영화가 끝날 때까지, 네가 현장에 있었으면 좋겠대.”

?”

 

그 감독 작업 방식이 그래. 좀 피곤한 스타일이긴 하지. 현장에 직접 나와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봐야 좋은 곡 나온다고, 계속 실시간으로 피드백 주고받기도 편하고. 석진이 말을 이었고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런데 뭐, 딱히 문제 될 건 없지 않아? 아예 와서 살라는 것도 아니고.”

…….”

길면 5개월 정도. 그동안 살 곳은 아마 감독이 준비해 줄 거야. 매번 이렇게 하거든. 아니면 나랑 같이 살아도 되고.”

아니…….”

개런티는 뭐, H 감독인데 당연히.”

 

어때, ? 석진이 씩 웃었지만 태형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5개월씩이나 가 있어야 한다고? 예상과는 다르게 태형이 곧바로 긍정의 대답을 내놓지 않자, 석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완전 좋아할 줄 알았는데. 표정이 안 좋네.”

아니, 좋아. 좋은데…….”

맡고 있는 작업 있어? 지금 당장 오라는 건 아니야. 2주일 정도 시간 있어. 못다 한 작업은 미국 가서 해도 되고.”

…….”

너 잘 생각해. 이거 완전 좋은 기회야. 대박이잖아.”

 

석진의 말은 사실이었다. H 감독이라니. 그 감독이 디렉팅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감독이니 흥행 보장은 물론, 온갖 영화제란 영화제에는 전부 노미네이트 될 것이 뻔했다. 그런 영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비단 태형이 제일 좋아하는 감독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태형의 커리어에도 엄청난 득이 되는 것일 거고.

그런데 계속 마음에 걸리는 얼굴이 있어서. 태형은 제 손을 꼭 쥐었다. 이런 일생일대의 기회 앞에서 고작 그런 게 마음에 걸리다니 제가 생각해도 제 자신이 너무 우습고 어이없지만, 마음은 솔직했다. 전정국. 5개월 동안 미국에 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정국을 5개월 동안 못 본다는 말과 같았다. 물론 지금이라고 해서 매일매일 보는 사이라거나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이는 아니긴 했지만, 그래서 더 문제였다. 차라리 그렇게 시간을 내서 만날 정도로 친한 사이였으면, 정국보고 미국에 오라고 하거나 보고 싶을 때마다 제가 정국을 만나러 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태형과 정국의 관계는 그 정도도 되지 못했으니까.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태형이 그렇게 망설이고만 있자, 그런 태형을 쳐다보던 석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난 꼭 너 데려갈 거야.”

…….”

이참에 아예 눌러 앉으면 더 좋고.”

 

석진의 말에 태형이 뭐라 답을 하려던 순간 타이밍 좋게 석진이 시킨 두 번째 메인 디쉬가 서빙되었고 순간 진지해졌던 석진의 얼굴이 한순간에 확 풀렸다. 일단 먹고 다시 얘기하자. 석진이 씩 웃으며 포크를 들었고 태형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나 꼭 너 데려오겠다고 그 감독이랑 약속했어. 내 커리어를 위해서라도 너 데려가야 돼.

 

라고 석진은 농담 삼아 말했지만, 그 밑에 깔려 있는 석진의 진심을 태형이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석진은 태형이 귀국과 미국행을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부터 그런 태형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대체 왜? 혹시 돈 때문이야?’

 

귀국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석진을 만나 제 결심을 알렸을 때,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의 석진이 제일 처음 내뱉은 말이 저거였다. 마치 정말로 돈 때문이라면 제가 도와주기라도 할 기세로. 아니, 그럴 기세가 아니고 정말로 그랬을 것이다. 석진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석진이 생각하기에 태형은 한국에 처박힐 인재가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작곡가라는 것이 거리와 장소에 큰 구애를 받는 직업은 아니라 해도, 기회가 주어질 확률과 만나는 사람들이 달라질 거였다. 무리를 해서라도 미국행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순데, 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거야. 제가 고향 내지는 조국에 대한 개념이 태형보다 옅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태형의 결정은 쉬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형은 그런 석진의 말에 웃으며 그랬다. 그런 거 아니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뮤즈?’

비슷해.’

 

이유가 그것 뿐만은 아니었지만, 가장 큰 이유가 그거였다. 정국을 만나고 싶어서. 그 땐 정국을 향한 제 감정이 이렇게까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지만. 아무튼 태형의 그 말에 석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표정은 석연찮은 채로. 하지만 그 이상 석진이 어쩔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태형의 선택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계속해서 아쉬웠던 것은 사실이라. 석진은 의뢰가 들어오자마자 태형을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신이 주신 기회라고. 태형이 제일 좋아하는 감독인데다가, 능력도 좋고, 이번 영화도 태형의 작곡 스타일과 잘 맞았다. 그러니까.

 

, 진짜 할 일 없어?”

 

태형의 말에 석진은 씩 웃었고 작업실 문을 열어주자마자 마주친 낯선 얼굴에 윤기가 그런 석진을 보며 태형에게 눈짓했다. 저거 뭐야? 그에 태형은 윤기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 그러니까 이 형은…….

태형을 꼭 데려가고야 말겠다던 석진의 다짐은 정말 진심이었는지,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태형의 말에도 석진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태형에게 찾아왔다. 아니 시간을 좀 달라니까? 하고 태형이 말하면 석진은 지금은 일하는 중 아니고 그냥 친한 형이 미국에서 놀러 온 건데. 나 버릴 거야?’ 하고 능청을 떨었다. 사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저래 봬도 석진이 꽤 능력 있는 문화·예술 헤드헌터라 작업에 아주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태형은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석진과 함께 있는 시간 동안만큼은 정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고. 사실 그게 가장 컸다.

 

널 만나는 게 내 일이잖아.”

뭔데?”

 

그런데 이렇게 윤기의 작업실까지 따라올 줄이야. 태형은 다시 한 번 석진의 넉살에 감탄했다. 비싼 호텔방을 놔두고 매번 제 집에서 자며 뒹구는 석진에게 오늘은 나가 봐야 한다고 했더니 한다는 말이 따라가도 돼? 였다. 오랜만에 (반은 일 때문이었다 해도) 자신을 만나러 비행기까지 타고 온 석진인데, 이런 저런 일 때문에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한 게 좀 미안하기도 하고 해서 태형은 윤기와의 중간 피드백 회의가 끝나고 밥이라도 사 줄 생각으로 그러라고 했었고. 그런데 설마, 회의 동안은 카페에 있을 줄 알았지.

 

민 감독님이시죠? 작품 많이 봤어요.”

누구신데요.”

미안, 윤기 형. 친한 형인데…….”

애인이야?”

아니!”

 

무슨 그런 말을! 태형이 눈을 키우며 극구 부인했고 윤기는 흠,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어쨌든 네가 아는 사람이라는 거지? 일단 들어와서 얘기하자. 그 말에 석진은 태형보다도 먼저 윤기의 작업실에 들어섰다. 역시나 생글생글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김석진입니다.”

민윤기입니다.”

태형이한테 말씀 많이 듣지는 사실 않았고, 태형이가 작업한 영화 보다가 민 감독님 팬이 됐거든요. 그래서 무례인 줄 알면서도 태형이한테 졸랐습니다. 혹시 큰 실례가 안 된다면 옆에서 조용히 구경해도 될까요?”

…….”

 

석진이 생글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윤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석진의 손을 맞잡았다. , 저 형 거침없는 거 봐. 태형은 그런 석진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언제 봐도 참 대단한 친화력과 넉살이었다. 저 정도는 돼야 뉴욕에서 능력 있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건가.

 

*

 

“Intro는 박자만 조금 조정하고, 테마곡은 그냥 이대로 가도 될 것 같은데? 좋아.”

 

역시 김태형이네. 회의를 끝내며 윤기가 덧붙인 말에, 태형이 살짝 웃었다. 요 며칠 내내 정국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던 터라 제대로 한 게 맞을까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윤기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남주인공이 짝사랑을 하는 역할이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시나리오 속의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으니까. 아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나. 대신 태형은 작업 내내 정국을 떠올려야만 했다.

 

끝났어?”

 

작업실 한켠에서 윤기의 컬렉션들을 구경하고 있던 석진이 몸을 일으키며 가까이 다가와 태형을 뒤에서 감싸 안으며 태형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가, 석진은 이런 스킨십이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그 행동에 식겁하던 태형도 이제는 그 행동에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굳이 물리치진 않게 되었고. 사실, 의식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게 더 맞겠다.

 

…….”

 

그런데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태형이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친 윤기의 동공이 조금, 아니 상당히 많이 흔들리고 있어서. 순간 왜 저러지, 하고 생각했던 태형은 이내 저와 석진의 자세가 윤기가 오해를 하기에 딱 알맞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윤기는 아까 석진을 보고 제 애인이냐고까지 물어봤었으니까. 당황한 태형이 제 허리에 감겨 있는 석진의 팔에 손을 올렸다. , 잠깐만 이것 좀 풀어봐.

 

아 왜애. 나 배고파. 서 있을 힘도 없어. 빨리 밥 먹으러 가자.”

아니, 이거…….”

윤기 형, 나 잠깐 형 핸드폰 좀……,”

 

그 때였다. 그러니까, 태형이 제 허리에 둘러진 석진의 팔을 풀기 위해 힘을 쓰고, 석진은 그런 태형을 더 꼭 껴안으며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고 있던 그 때. 비밀 번호를 빠르게 누르는 소리와 함께 작업실 문이 갑작스럽게 열리더니 인영 하나가 뛰쳐 들어왔고 윤기, 석진, 태형의 시선이 한순간에 새로 들어온 인영에게 닿았다. 그리고,

 

뭐야?”

 

정국과 태형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타이밍도 진짜. 이주일 만에 보는 정국의 얼굴은 여전히 잘생겼고, 멋있고, 설레고. 태형은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정국을 응시했다. 생각지도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마주한 전정국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와중에, 이 다음에 석진과 밥을 먹을 생각으로 옷을 차려 입고 나왔다는 사실만이 태형에게 위안이 되어 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어차피 윤기의 작업실에만 있을 거라 생각하고 후드만 대충 걸치고 나왔을 테니까. 이주일 만에 보는 건데 그런 모습을 정국에게 보여줬다면 정말 죽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잠시간의 적막이 흐르고 태형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정국은 다짜고짜 손을 뻗어 태형의 허리에 감겨 있는 석진의 손을 떼어냈다. 워낙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태형은 몸에 힘을 줄 새도 없이 정국에 의해 석진의 손에서 벗어나 정국의 등 뒤로 숨겨졌다. 석진은 갑자기 일어난 이 상황에 당황한 듯 눈을 깜박이고 있었지만 정국의 얼굴은 풀릴 줄을 몰랐다. 그 와중에 태형은 제 팔을 쥐고 있는 정국의 손이 너무 뜨겁다는 생각을 했다.

 

싫어하잖아요.”

?”

 

여전히 낮게 깔린 목소리로 정국이 석진에게 말했고, 석진은 그런 정국에 멍하니 되물었다. 그러니까, 하필이면 정국이 본 상황이 석진이 태형을 끌어안고 태형이 그런 석진을 떼어 내려고 했던 그 순간이라. 아마도 정국은 석진이 억지로 저를 끌어안고 있었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런 건 아닌데. 그러나 태형이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잠시 이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눈을 굴리던 석진이 이내 아, 하고 짧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김태형 씨랑 무슨 사이신진 몰라도, 싫어하는데 계속 잡고 있는 건 무례한 거,”

무례한 건 그 쪽 아닌가? 무슨 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그렇게 끌고 가고.”

 

정국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웃는 낯의 석진이 말을 이었고 그런 석진의 말에 정국의 표정은 더욱 더 굳어졌다. 그 사이에서 당황한 태형은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 눈을 깜박이고 있었고. 왜 상황이 이렇게 된 거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정국이 갑자기 나타났을 때부터 태형은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져 있었으니까. 그러나 태형이 멍해 있거나 말거나, 석진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

그 쪽이야말로 태형이랑 무슨 사인진 몰라도,”

 

그 말을 끝으로 석진은 정국에게 끌려갔던 태형을 붙잡아 제 쪽으로 당겨 왔다. 한순간에 주말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전쟁 같은 삼각관계의 여주인공이 된 태형은 멍하니 석진을 쳐다봤지만 여전히 웃는 낯의 석진의 시선은 정국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 이 형 왜 이래? 태형은 낯선 석진의 모습에 입을 벌렸다. 석진은 상대방이 아무리 무례하게 굴어도 웃는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넘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상황에 묘한 각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지금 석진의 말투에는 누가 봐도 날이 서 있었다. 정국의 시선이 태형을 잡은 석진의 손에 닿았다가, 다시 석진에게로 향했다.

 

태형이는 나랑 더 친하거든요.”

 

그 말을 하며, 석진은 씩 웃었다. 저 형이 저런 얼굴도 할 줄 알았나. 석진을 알게 된 지 꽤 오래 됐으니 석진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얼굴은 또 처음 보는 거였다. 하긴, 잘 안다고 하기엔 정작 붙어 있는 시간은 얼마 없었긴 했다. 태형은 가만히 제 팔을 쥔 석진의 손을 쳐다봤다. 태형의 시선이 제 손에 닿아 있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석진이 씩 웃으며 손을 풀고 태형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이건 또 뭐 하는 상황이지? 그런 석진의 행동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정국을 쳐다봤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정국의 저런 얼굴도 처음 본다. 대체 왜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당황스러움에 가뜩이나 새하얬던 머리가 점점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자기소개부터 할까요? 저는 뉴욕에서 태형이를 데려가려고 온,”

!”

……?”

, 아니, 석진이 형. 그만 가자. 배고프다며.”

 

태형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호칭에 재빨리 말을 고쳤다. ‘은 석진이라는, 외국에서 사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발음을 뺀 석진의 말하자면 영어 이름이었다. 애초에 석진과의 만남 자체가 외국에서였고, 그 이후로도 쭉 외국에서 살았으니 사실 태형에게도 석진이란 이름보다는 이란 호칭이 더 편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서 진, 하고 부르려니 뭔가, 애칭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부러 의식해서 석진이라 부르고 있었던 거였는데 당황하니 익숙한 호칭이 튀어나와 버린 거다. 하필 이런 상황에서. 그러나 그런 태형의 속도 모르고, 석진은 진이라고 부르는 거 오랜만이네!’라며 활짝 웃었다.

그냥 빨리 이 자리를 피하는 게 낫겠어. 태형은 재빨리 석진을 잡아끌었다. 오랜만에 본 정국의 얼굴을 오래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석진과 정국을 한 공간에 같이 오래 두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지금 하마터면 석진이 저를 스카우트하려고 한다는 것을 정국이 알 뻔 했으니까. 정국에겐 그 사실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선뜻 가라고 해도, 가지 말라고 해도, 정국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괜히 마음만 복잡해질 것 같아서

게다가 태형이 생각할 때 지금은 정국을 마주하기에 별로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석진이 옆에 있었고, 옷을 차려 입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편한 옷차림이었고, 정국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묻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많은데.

 

윤기 형, 저 이만 갈게요.”

, 그래. 수고해라. 밥 맛있게 먹고.”

전정국 너도잘 지내고.”

 

잘 지내고가 뭐야. 태형은 제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인사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나중에 보자, 라고 하기엔 뭔가. 저와 정국은 그렇게 당연히 나중에 만남을 기약하는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태형은 한시라도 빨리 이 불편한 공기를 벗어나고 싶어 여전히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석진을 꽉 잡아끌었다.

 

잘 됐네.”

 

하지만, 세상이 언제나 제 뜻대로 돌아가지는 않는 법이다. 태형이 막 윤기의 작업실을 나서려던 그 때, 등 뒤에서 낮게 가라앉은 정국의 목소리가 태형의 귓가에 닿았다. 태형은 순간 숨을 멈추었고, 정국의 목소리가 다시 느리게 이어졌다.

 

나도 윤기 형이랑 밥 먹을 참이었거든요.”

?”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먹죠. 초면에 실례한 것도 있고,

…….”

제가 살 테니까.”

좋아요.”

 

태형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재빨리 뒤를 돈 석진이 웃으며 대답했고 태형은 그대로 굳어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만약 이 세상에 타이밍의 신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자신은 그 신에게 단단히 미움을 산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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