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여러 믿지 못할 일들이 벌어진다고 듣긴 들었었다. 그러니까, 비과학적인 일들. 이를 테면 귀신이라든가. 아니면 염력이나 독심술을 쓰는 초능력자라든가. 외계인이라든가. …아니다, 외계인은 아닌가?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대충 넘어가자. 아무튼. 그러니까. TV를 통해, 뉴스를 통해. 혹은 인터넷을 통해. 태형도 심심치 않게 그런 얘기들을 접했었다. 타임머신의 개발이 사실은 이미 성공했는데 국가에서 사용을 막고 있다거나, 15년 동안 실종됐었는데 15년 후에 다시 찾은 사람을 보니 하나도 늙지 않았다거나. 그런 거. 태형은 그런 인터넷 글들을 읽으며 몇 번은 신기해하고, 몇 번은 주작이라며 투덜거렸었다. 그러나 그런 글들을 한 번도 진지하게 읽어 본 적은 없었다. 말하자면, 신기해했든, 투덜거렸든. 어떤 경우에도 인터넷에 널린 그런 글들은 태형에게 그냥 심심풀이 땅콩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리라고는, 꿈에도, 정말 죽었다 깨어나도 상상하지 못했었다는 뜻이다. 그것도 태형, 제 자신에게.
“…여긴 어디…….”
그러나 태형은 지금 제 눈을 의심했다. 나 뭐 하다가… 이렇게 됐지? 태형은 눈을 끔벅였다. 한 숨 낮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익숙한 천장이 아니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대들보. 높은 천장. 우리 집이 이렇게 한옥 느낌이 났었나…? 태형이 멍하니 생각하다 눈을 빠르게 두 번 깜박였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태형은 후다닥 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태형의 시야에 들어찬 것은 제가 몇 분 전 잠이 들었던 익숙한 제 방의 풍경이 아니었다. 화려하게 장식된 병풍, 금실로 수놓아진 이불. 넓은 방과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는 햇살. 이 풍경은, 그러니까.
“사극…?”
그래. 태형이 즐겨 보곤 했던 사극 드라마 안에서나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나 아직 꿈꾸고 있나? 태형은 제 볼을 살짝 잡아 늘렸다. 통증이 느껴졌다. 꿈이 아니다. 이번에 태형은 제 뺨을 살짝 때렸다. 아프다. 꿈이 아니다. 태형은 제 볼을 꼬집고 때리다가, 문득 제가 입고 있는 옷이 과하게 무겁고 바스락거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제 옷을 보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린 순간, 태형은 끄어어,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제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몇 분 전 태형이 입고 잠들었던 후드와 청바지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태형이 지금 입고 있는 옷 역시, 사극에서나 볼 법한, 치렁치렁하고 화려한 금실이 수놓아진,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고급 원단의 한복이었다. 아니, 한복?! 왜!? 내가?!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태형은 제가 입고 있는 한복을 펄럭여 봤다. 없다. 밑에가. 그러니까, 태형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그냥 한복이 아니었다. 태형은 지금 치마를 입고 있었다. 아니 왜?! 태형은 다시 한 번 제 뺨을 쳤다. 아팠다. 그리고 잠시 후, 태형은 입을 벌렸다. 그리고,
“이게 뭐야아!!!!!!!!!!!!!!!!!!!!!!!!!!”
소리질렀다. 아주 크게.
조선 로맨스
“마마, 왜 그러십…!”
“뭐, 뭐야, 누구세요!! 뭐야!!”
태형은 제 팔을 X자로 포개 몸을 가리며 여전히 소리를 꽥꽥 질러댔다. 태형이 지른 소리에 놀란 눈을 하고 장지문을 열어젖힌, 역시나 한복을 입고 있는 여자들은 그런 태형을 보고 눈을 끔벅였다. 마, 마마…? 그러나 태형의 심장은 갑자기 쳐들어온 그 여자들로 인해 더더욱 빨리 뛰고 있었다. 이게 다 뭐야, 뭐야, 뭐야?! 왜 갑자기 어디서 막 튀어나오는 거야?! 태형이 뒷걸음질을 치다 제 치맛자락을 밟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러자 멀찍이 서서 당황스러운 눈으로 태형을 쳐다보고 있던 여자들은 태형이 미처 뭐라고 할 새도 없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왔다.
“마, 마마. 괜찮으십니까…!”
“아, 아니. 잠깐만요.”
“혹 좋지 않은 꿈을 꾸셨습니,”
“아니.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자신을 부축해 일으키려는 여자들의 손에 붙들려 버둥거리던 태형이 제 팔을 조심스레 붙들고 있는 여자를 붙잡고 물었다. 서프라이즈? 드라마? 아니, 내가 배우도 아닌데 무슨 드라마야. 그럼 뭐, 생일 기념 몰래카메라? 무슨 말을 갖다 붙여도 말이 되지 않았다. 연예인도 아니고, 한낱 일개 대학생인 자신을 이렇게까지 큰 스케일로 몰래카메라를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느냔 말이다. (그리고 생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분명 태형은 자신의 자취방에서 잠들어 있었다.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곤히 자긴 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들어다 옮기고 옷을 벗기고 이렇게 척 봐도 복잡해 보이는 옷을 입혀다 눕힐 때까지 잠에서 깨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상식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 투성이다. 태형은 입을 다물질 못했다. 그러나 태형이 쳐다본 궁녀는 되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마를 부축해 드리고 있사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긴 어디에요?! 왜 제가 여기 있어요?!”
“마마께서 오수(午睡)에 들고 싶다 하셔서 막 이부자리를 준비해 드린 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곳은 교태전, 마마의 침소입니다, 마마…….”
“교태전이요?!”
태형은 제 기억을 더듬었다. 워낙 오래 전이라 제대로 기억이 나진 않지만, 교태전. 어딘가 익숙한 단어였다. 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들어 봤던 것 같은데. 태형이 여전히 입을 벌린 채 여자를 쳐다봤다. 경복궁. 강녕전. 교태전. 가만. 교태전? …그거 왕비의 침실 아니야?
문득 떠오른 생각에 태형이 다시 눈을 크게 키웠다.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아무리 역사 쪽에 무지한 태형이라지만, 태형도 여태껏 살면서 보고 들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태형이 여태까지 봐 왔던 드라마에서 남자가 이런 치렁치렁하고 화려한 ‘치마’를 입고 있었던 적은 없었다. 남자가! 몰래카메라든, 드라마든, 예능이 됐든. 뭐가 됐든 간에 남자한테 이런 치렁치렁한 한복을 입혀 놓다니. 이게 무슨! 그러나 제 팔을 붙든 여자는 여전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 마마…? 태형은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니, 이게 다 무슨…….
“이거 그러니까, 뭐, 예능 같은 거예요? 몰래카메라? 일반인 대상으로 하는?”
“…마마, 무슨 말씀이신지…….”
태형은 당황스러운 표정의 여자를 보고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제 뺨을 쳤다. 그러자 제 팔을 붙들고 있던 여자들의 얼굴이 한꺼번에 놀람으로 물들었다.
“꿈은 아닌데.”
“마마!!!!”
“어어, 왜, 왜 이래요?!”
“마마, 이러시면 안 되옵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굳건히 하셔야지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였으니 전하께서도 곧 희빈에게서 마음이 뜨실 겁니다.”
“아니,”
“게다가 곧 합방 기일이 다가오지 않습니까. 대전 상궁이 기일 중의 기일이라 하였으니 필히 그 날에 회임을 하시어…….”
“회임?!?!”
태형의 눈이 더 이상 커다래질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래졌다. 목소리 또한 크고 높았다. 태형의 목소리에 놀란 듯, 여자 또한 뒤로 주춤 물러섰다. 태형이 여자의 두 팔을 덥석 잡았다. 여자가 히끅, 하고 딸꾹질을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태형은 지금 그런 것에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회임이라니. 회임이라니! 임신 말하는 거 아닌가?!
“임신이요?!”
“예, 마마. 그 날에 꼭 회임을 하시어 튼튼한 원자 아기씨를…”
“아니, 남자…”
가 어떻게 임신을 해요! 하고 따져 물으려던 태형의 입이 한 순간 일자로 다물어졌다.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 때문이었다. 혹시 이게 실제 상황이라면…? 그러니까, 정말 말도 안 되지만. 꿈도 아니고 몰래카메라나, 예능 같은 것도 아니라면. 정말 제가… 그, 타임 워프를 해서 조선시대에 떡 떨궈진 것이라면. 그리고 설마 지금 제 자신이…
“내, 내가 누구죠?”
“…예?”
“내가 누구냐 물었습니다.”
태형이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목소리를 내리깔고, 언젠가 봤던 사극 안에서의 말투를 어설프게 따라하며 물었다. 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했다. 아직까지도 미친 듯이 뛰는 심장과 복잡한 머릿속을 가다듬으며 태형이 더듬더듬 물었다. 혹시 이 상황을 누군가가 아주 작은 소형 카메라로 다 찍고 있고, 카메라 너머 상황실에서 지금 제 모습을 보며 킬킬대고 있다 하더라도, 혹시나라도. 만에 하나라도 이 상황이 예능이 아니라 다큐라면, 태형은 정신을 차려야 했다.
“마마께서는…….”
“…….”
꿀꺽. 태형은 침을 삼켰다. 태형은 가만히 눈을 깜박이며 여자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여자의 눈에 살짝 의아함이 스치더니, 이내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그 여자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 태형은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주상 전하의 어진 배필이시자, 조선의 하나뿐인 국모이신,”
“…….”
“한성왕후이시지요.”
…미친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