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마마, 감축드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어어어???”

 

정국이 먼저 경회루에서 내려가고,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후 천천히 경회루에서 내려와 멀찍이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궁녀 무리에게 다가간 태형은 제가 가까이 다가서자 눈을 빛내며 자신을 환대하는 분위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형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상궁 하나가 살짝 나서며 감격에 찬 얼굴로 태형을 올려다봤다.

 

소녀는 믿고 있었사옵니다. 언젠가 전하께서 마마의 진심을 알아주실 것이란 것을요.”

?”

이제 다 되었습니다. 이제 마마께서 튼튼한 원자 아기씨만 회임하시게 되면 한 희빈 따위는!”

, 잠깐만!”

 

태형이 황급히 상궁의 말을 가로막았다. 손까지 모아 쥐고 환희에 차 말을 하던 상궁의 말이 멎었다. 태형은 새빨개진 얼굴을 어쩌지도 못 한 채로 손을 휘저으며 말을 더듬었다.

 

,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잠깐 대화한 거,”

분위기가 더없이 화사하셨습니다. 두 분께서 가까이 붙으시어

그건 내가 넘어질까봐 잡아준 것뿐이고,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태형이 손을 휘젓자 그래도 그게 어디야라고 눈으로 말하고 있는 듯 한 상궁은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머리 위에는 밝은 오오라가 계속해서 남겨진 채였다. 사실, 이렇게까지 극구 부인할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 같은데. 설사 그게 진짜 왕이 아니라 해도 어쨌든 이 사람들이 보기에 자신이 모시는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는 건 좋을 테니까. 그러나 어쩐지 얼굴이 홧홧하고 부끄러워져서 태형은 저도 모르게 완강하게 부인하고야 말았던 거였다. 이래서야 내일 밤에 교태전으로 정국이가 오기로 했다는 말을 어떻게 꺼내지. 또 분명 되게 김칫국 마실 것 같은데. 태형이 볼을 긁었다. 어쩐지 일이 꼬인 느낌이었다.

 

뭐 좀 물어봐도 될까?”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태형은 교태전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상궁이 조금 더 고개를 숙이며 하문하시지요, 하고 대답했다. 잠시 눈을 도로록 굴린 태형이 입을 열었다.

 

평소에 정전하께서는 한 희빈을 얼마나 자주 찾으셨어?”

한 희빈…….”

 

자신이 이 조선시대로 떨어지기 전에 왕이 한 희빈을 얼마나 찾았든, 한 희빈은 유라가 아니고 왕은 정국이 아니었으니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궁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왕의 총애를 믿고 그렇게 오만방자할 정도였으면 엄청 자주 들락거렸나? 그러나, 교태전에 들어섰음에도 혹여 누가 들을까 주위를 살피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연 상궁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달에 한 번 정도 찾으셨습니다.”

달에 한 번?”

.”

한 달에 한 번?”

그러하옵니다.”

 

그런데 한 달에 한 번이라니. 태형은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다물며 당황한 것을 숨기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한 달에 한 번? 총애 받는 후궁이라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횟수였다. 부부관계를 한 달에 한 번밖에 하지 않았다는 소린가? 아님 밤에 하는 게 취향이 아니라 낮에 어딘가 다른 곳에서 한아니, 궁궐에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 그나저나 그럼 이 한성왕후란 사람은 그보다도 더 적게 왕을 만났단 소리면, 거의 독수공방 수준이었단 소린데. 도대체 이 왕이란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었던 거지? 태형의 생각이 끝도 없이 가지를 쳐 가며 뻗어가는 와중, 상궁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러니 더더욱 기가 찬 것이지요, 마마. 전하께서 한 달에 한 번밖에 찾지 않는 주제.”

, 난 괜찮으니 계속 말해.”

! 무튼, 전하께서 따로 찾는 후궁이 없으시고, 그나마 찾으시는 후궁이 한 희빈이니 총애 받는다 하긴 하지만, 사실 총애 받는다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지요.”

…….”

 

태형은 교태전 안에 도착해 제 겉옷을 벗기는 상궁의 말을 귀담아 들으며 머리를 굴렸다. 확실히, 달에 한 번은 총애 받는 후궁이라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왕의 일과가 그렇게 바쁜 건가? 아님 성욕이 없는 거? 그것도 아니면 혹시 왕이 게이라거나태형의 생각의 가지가 무성해지고 있을 때, 상궁이 그런 태형의 생각을 다시 멈추게 했다.

 

소녀의 짧은 소견으론 말입니다, 마마.”

, !”

한 희빈의 아비가 조선 제일의 세도가이지 않습니까.”

, 그렇지.”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아무래도 전하께서 그 때문에 내키지 않음에도 한 희빈을 찾으시는 건 아닐까 합니다.”

 

. 태형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생각보다 쉽게 풀린 의문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왕도 희빈이 좋아서 찾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지.

태형이 이토록 희빈과 왕, 그리고 한성왕후의 관계를 궁금해 하는 것은 비단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혹시 정국과 제가 조선시대로 나란히 떨어진 이유가, 왕과 왕비의 좋지 않은 사이와 관련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했던 정국의 말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일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좋지 않은 왕과 왕비의 관계, 좋지 않은 정국과 저의 관계. 그것도 현대에서는 유라 때문에, 조선시대에선 한 희빈때문은 아닌가? 아무튼. 무언가의 이유 때문에. 단서라곤 하나도 없으니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태형은 문득 잔뜩 무거운 한복에 짓눌렸던 제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제 몸에 걸친 옷이 얇디얇은 소복뿐이라는 것도. 그리고 계속 저와 대화를 나누던 상궁의 팔에,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한복이 걸쳐져 있다는 것

 

, , , 잠깐만!!”

?”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마마?”

 

너무 당황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존댓말까지 쓴 태형의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태형의 옷을 벗기던 상궁의 얼굴이 의아해졌다. 태형은 어느새 두 팔로 제 가슴을 감싸고 상궁으로부터 멀어진 후였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벗기고 있는 줄도 몰랐다. 큰일 날 뻔 했네! 절대 제 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형에, 당황한 것은 상궁이었다. 갑자기 왜 저래…….

 

산보를 다녀오셨으니 환복(換服)하셔야지요, 마마.”

, 어디까지 벗기려고!”

그야 당연히 속곳까지

, !”

 

태형이 질겁을 했다. 속곳이라니! 속옷이라니! 절대로 안 될 말이었다. 그랬다가는 제가 남자라는 것이 만천하에 알려질 터였다. 미쳤다고 그걸 눈뜨고 볼 수야 없지. 태형이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돌아라, 김태형의 두뇌!

 

주상 전하를 만나고 왔더니 몹시 피곤하구나! 오늘은 일찍 잠에 들어야겠으니 이대로 입고 자겠다!”

그래도…….”

, 그거 잠시 다녀왔다고 그렇게 바로 옷을 바꿔 입으면 낭비 아니겠느냐! 이것도 모두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난 괜찮다!”

마마…….”

 

아무 핑계나 되는 대로 주워섬긴 태형이 말을 마치고 상궁의 눈치를 봤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뱉은 그 말이 놀랍게도 통한 것인지, 태형을 보는 상궁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져 있었다. 태형이 꿀꺽, 침을 삼켰다. 마마소인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제가 마마의 하해와 같은 깊은 뜻을 모르고……. 그리고 이어진 상궁의 말에 태형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 그래. 백성들을 위하는 국모가 되어야지.

 

그럼 침구를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그래…….”

 

좀 자자. 잠이 필요하다. 의도치 않게 백성을 제 몸처럼 아끼는 참된 국모가 된 태형이 지친 목소리로 중얼였다.

 

*

 

마마!!!!”

, 괜찮다고!!!!!”

아니되옵니다!!! 어서 이리 오시옵소서!!!!”

 

그러니까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이냐면, 사건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조선으로 떨어진 후 길디길었던 첫 날이 무사히(?) 지나가고, 오전의 일과까지 무사히 마친 태형은 슬쩍 상궁의 눈치를 봤다. 정국이 이따 저녁에 오기로 했다고, 말을 하긴 해야 할 텐데, 아직까지도 그 타이밍을 잡지 못한 거였다. 점심 먹기 전에 해야지, 점심 먹은 후에 해야지. 자신을 바라보는 그 환희 서린 눈빛이 부담스러워 계속해서 미루기만 하던 태형은 결국 저녁까지 알뜰히 챙겨 먹은 후 일찌감치 침구를 준비할까요? 하고 묻는 상궁의 눈치를 보며 어렵사리 운을 떼었다. 그러니까, 오늘 주상 전하께서 오시기로 하셨

 

아니, 마마! 그걸 왜!’

 

그러나 태형의 말을 채 끝맺어지기도 전에, 태형의 말은 상궁의 놀란 목소리에 의해 가로막혔다. ‘마마!’ 하고 감동 어린 눈빛으로 저를 쳐다볼 줄 알았던 태형은 상궁의 예상외의 태도에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 상궁의 눈은 뭐랄까다급함? 경악? 그런 것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왜 저러지? 좋은 거 아닌가? 태형은 어리둥절했다. 상궁의 태도가 너무나도 초조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 후, 태형은 그 이유를 알게 됨과 동시에 상궁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마마!!!! 목욕물을 받아 놓았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아니, 아니, 그런 것 때문에 오는 게 아니라니까!”

마마!!!!!!! 지금부터 준비하여도 늦었사옵니다! 전하께 항상 향기롭고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드려야지요!!!”

괜찮아!!!!”

마마!!!!!!!!!!!”

 

잠깐의 침묵 후에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간 상궁은, 태형이 채 이유를 물어보기도 전에 다시 장지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대여섯 명의 상궁들과 함께. 태형은 문을 박차고 들어온 그 상궁들을 멍하니 쳐다봤다. 뭐야? 이 분위기? 그리고 잠시 후, 태형은 다짜고짜 저를 욕탕으로 데려가 옷을 벗기려 드는 여자들을 피해 도망쳐 다니고 있는 것이다.

 

마마, 분칠도 해야 하고, 환복도 하셔야 하고, 장신구도마마! 제발!!”

아 내가 괜찮다니까!!”

 

내가 안 괜찮아!!!!!! 온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상궁은 내적 쌍욕을 하고 있는 듯 했고 태형은 이제 반쯤 목숨을 걸고 달리고 있었다. 저 눈빛은 진심이다. 잡히면 빼도 박도 못하고 끌려갈 것이다. 옷만 벗겨지는 게 아니라 살가죽까지 벗겨버릴 기세였다. 사자 앞의 토끼 내지는 목욕탕 때수건을 들고 있는 엄마 앞의 아이가 된 태형은 결국 교태전 대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후였다.

 

마마! 어디까지 가시

어머.”

…….”

 

그러나 태형이 교태전 대문을 막 박차고 나간 그 순간 마주한 아주 익숙한, 그러나 낯선 얼굴에 태형은 그대로 멈춰 서 굳어버렸고, 뒤따라 태형을 잡으러 쫓아오던 상궁도 옆에 나란히 멈춰 섰다. 태형의 앞에는 살짝 놀란 눈을 한 유라, 아니 한 희빈이 서 있었다. 태형은 숨을 몰아쉬었다. 온 힘을 다해 달리다가 막 멈춰 선 터라 심장이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중전 마마께서 어찌…….”

…….”

이리도 체통을 지키시지 않고.”

 

그러나 살짝 놀란 듯 하던 희빈의 얼굴은 금세 여유로운 웃음으로 바뀌었다. 괜히 책잡힐 짓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근 하루 만에 태형은 이미 한성왕후란 사람에게 일종의 동질감 내지는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아랫것들에게 치이는 인생이란. 상황 자체가 동정심도 좀 들고, 아무래도 지금은 제 자신이 그 본인이다 보니 아예 따로 떼놓고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랫것들이 보고 흉을 볼까 두렵습니다.”

…….”

 

흉은 지금 네가 보고 있잖아……. 태형은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제가 봐도 지금 제 꼴은 모로 보나 한 나라의 국모와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가채도 얹지 않고 버선발로 건물을 뛰쳐나와 잔뜩 뛴 탓에 얼굴은 발그레했고 호흡까지 불규칙했다. 한 희빈이 아닌 누가 봤어도 혀를 찼을 만 한 모양새였다.

 

어찌 이리 체통을 못 지키십니까. 이러니 전하께서도…….”

한 희빈!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제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한 희빈은 계속해서 태형을 비웃었고 보다 못한 상궁이 희빈의 말을 가로막았지만 태형은 괜히 서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아니 내 기분이 왜 이러지. 저 사람이 아무리 나한테 뭐라고 해 봐야 그건 한성왕후란 사람에게 하는 말이고, 한 희빈이 하는 말들도 나에겐 전혀 타격이 없다. 나에게 저렇게 면박을 주는 사람도 유라가 아니라 유라와 닮은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르려 해도 왜인지 계속해서 서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영문도 모르고 조선시대에 떨어진 것도 서러운데, 한 나라의 중전인데다가, 나름 적응해 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자신을 적나라하게 싫어하는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듣는 것에는 면역이 없었던 것이다. 태형은 입술을 꼭 물었다.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리도 체통을 지키지 못하시는 걸 보니 교태전의 주인이 바뀔 날이 정말로 머지않았나 봅

이렇게 버선발로 뛰쳐나와 맞이할 만큼 우리 중전이 과인을 기다렸나 봅니다.”

 

그 때였다. 한 희빈의 말이 멎음과 동시에 제 뒤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태형은 고개를 들어 뒤를 쳐다봤고 이어 놀람으로 눈이 커다래졌다. 언제 온 것인지, 기척도 없이 가까이 온 정국이 살짝 웃으며 제 어깨를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태형이 저를 보는 것을 눈치 챈 정국이 그런 태형을 조금 더 꽉 끌어안으며 태형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 전하…….”

희빈은 교태전엔 어인 일이오? 이렇게 늦은 시각에.”

, 저는…….”

그나저나 우리 중전은 이렇게 대문까지 나와 나를 반길 만큼 내가 좋소?”

…….”

우리 중전이 이리도 과인을 좋아해 주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얘 왜 이래……. 태형은 서러웠던 것도 잊고 정국을 쳐다봤다. 어느새 나오려던 눈물은 자취를 감춘 후였다. 제가 먼저 희빈에게 질문을 해 놓고, 희빈이 당황하여 하는 말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다시 전에 없는 따뜻한 눈빛으로 저를 보는 정국에 태형은 입을 벌렸다. 전정국이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잘 할 수 있는 애였던가. 태형은 지금 처음으로 제가 걸치고 있는 한복이 치렁치렁한 것을 감사히 여겼다. 손가락이 곱아가고 있는 것을 숨길 수 있으니까. 태형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 그렇습니까…….

 

희빈은, 아직 중전에게 볼 일이 남았나?”

, 전하…….”

아니라면 우린 이만 들어가 봐도 되겠소? 날이 아직 추운데, 우리 중전이 나를 반기느라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여 병이 들까 걱정돼서.”

 

그놈의 우리 중전’. 태형은 몸을 작게 떨었다. 정말, 전정국이 이토록 연기를 잘 하는 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새내기 장기자랑 때 춤 말고 연기를 시킬걸 그랬지. 대상은 따 놓은 당상이었을 텐데. 어차피 춤으로도 대상은 탔으니까 상관없나……. 태형이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며 힐긋 한 희빈을 쳐다봤다. 한 희빈의 얼굴은 놀람과 당혹스러움, 부끄러움 같은 것들로 범벅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달에 한 번이었어도 총애 받는 후궁이었다는데 이런 취급은 처음이겠지. 태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태형은 아직 정국의 품에 안겨 있는 채였다.

 

…….”

, 그럼 소녀는 이만…….”

…….”

물러가겠사옵니다, 전하…….”

 

한참동안을 멍하니 서 정국과 태형을 번갈아 보던 한 희빈은 문득 정신을 차렸는지 급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말을 전했고 정국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는 그렇게 악바리를 쓰더니 전정국 앞에서는 얌전한 고양이가 따로 없네. 태형은 이제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살짝 눈을 감았다…가, 번뜩 떠오른 생각에 제 옆에 있는 상궁을 쳐다봤다. 정국이 오늘 밤에 처소에 오기로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난리를 쳤는데, 제가 봐도 다정해서 손가락이 곱을 것 같은 달달함을 과시하는 왕을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라이브로 시청한 상궁의 반응이 어떨지 상상이 갔기 때문이다. 아마 또 좋아가지고 미소를 지으며

 

…….”

…….”

 

망했다. 태형은 다시 고개를 돌려 차라리 정국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 태형은 그 어구의 뜻이 무엇인지 지금 이 순간 생생히 깨달았다. 저와 정국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 그 상궁의 얼굴은 마치, 이번에 터진 최애컾의 떡밥이 전무후무 역대급인 동인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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