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너 괜찮겠냐.”

뭐가요?”

그냥한 희빈한테 그렇게 막 대하는 거.”

 

이미 머리를 탈출해 자유를 찾은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교태전 안으로 들어와 방 안에 앉은 태형은 잠시 넋을 놓고 천장을 쳐다보다가 정국에게 말했다. 그러나 막상 사고를 친 정국은 천하태평이었다. 형 방 좋네요. 내 방이랑은 되게 다르다. 여자 방이라 그런가.

 

말 돌리지 말고. 이거 진짜 괜찮은 거냐고.”

그게 왜요?”

아니…….”

하루아침에 태도 바뀌었다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요?”

 

아니 뭐 그것도 있고. 태형은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냥 대충 오늘은 중전과 할 말이 있다고, 가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굳이 그렇게 커퀴벌레 같은 모양새를 만천하에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건가그것도 아무리 본인은 아니라지만 유라를 닮은 총애받던 후궁의 앞에서. 태형은 괜히 바닥을 문질렀다. 차마 너 왜 이렇게 나한테 다정하게 굴어? 하고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는 탓이었다.

 

설마 얼굴까지 똑같은 왕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고 사람들이 상상이나 하겠어요?”

…….”

그냥 갑자기 마음이 바뀌셨나보다, 하겠지.”

 

그건 그런데…….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간단하고 단순한 정국의 말에 더 이상 뭐라 물어볼 말이 없었다. 내가 너무 쓸데없이 생각이 많은 건가. 태형이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확실히, 정국의 처지가 저보다는 나은 것 같긴 했다. 옷을 벗긴대도 정국은 거리낄 것이 없으니까. 그치만 나는……. 태형이 제 판판한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들키면 그날로 엿 되는 거다. 태형이 괜히 옷을 꽁꽁 싸맸다.

 

왜 그렇게 몸을 웅크리고 있어요? 추워요?”

…….”

 

결국 묻고 싶었던 것은 묻지 못하고 얼마나 말없이 그러고 있었을까, 정국이 먼저 말문을 텄다. 그러나 태형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제 몸을 조금 더 뒤로 물렸다. 아니 그럼 정말 넌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태형은 정국에게 묻고 싶었다. 태형은 지금 이 상황이 어색해 미칠 것 같았으니까. 왜냐하면, 그렇게 그런 거 아니라고, 그냥 대화만 하는 거라고 말했는데도 태형의 말을 귓등으로 들은 상궁들이 담백했던 교태전 안을 어딘가 묘한 분위기로 바꿔 놓았기 때문에.

화려하게 장식된 나비와 꽃 모양의 촛대, 그 위에 올려진 일렁이는 촛불. 금실로 수놓아진 폭신한 한 쌍의 침구. 어느새 어둑해진 바깥, 아무도 없는 건지 아니면 없는 척을 하는 건지 숨죽은 듯 조용한 주위. 방 안에 남겨진 단 둘. 태형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어디선가 봤던 조선 시대 신방과 똑같았다. 단 둘이 있었던 게 처음도 아닌데, 왜 이리 기분이 이상한지. 분위기라는 게 참 큰 역할을 한다 싶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멀찍이 떨어져 있어요?”

아니…….”

누가 잡아먹어요?”

잡아!!”

 

먹기는 무슨!!!!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정국의 말에 태형이 펄쩍 뛰었다. , 잡아먹다니! 잡아먹다니! 누가 누굴! 호랑이가 토끼를? 사람이 닭을? 얘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태형이 놀라 커다래진 눈으로 정국을 쳐다보자 정국이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요.”

…….”

누가 보면 내가 진짜 형 잡아먹는 줄 알겠네.”

아니, 그 잡아먹는다는 표현 좀…….”

 

태형이 말끝을 흐렸다. 태형은 지금 제 처지도 처지지만, 정국의 태도 때문에 더 혼란스러웠다. 여기 있는 전정국은 태형이 알던 그 전정국이 아닌 것 같았다. 뭐랄까, 조금 더 직설적이라고 해야 할까, 거리낌이 없어졌다고 해야 할까. 내가 알던 전정국은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태형이 알던 전정국이란 의사 표현이 그다지 많지 않고 태형이 먹자는 대로, 가자는 대로, 하자는 대로 순하게 웃으며 따르던 후배였다. 말하자면, 뭐가 좋아? 하고 물으면 다 좋아요. 하고 화사하게 웃는 토끼 같은 애였달까. 그런데 뭔가 지금의 전정국은

 

형이 지금 딱 잡아먹히기 직전에 몰린 것처럼 웅크려 있으니까 그렇죠.”

 

늑대 같다. 그것도 먹잇감을 한입에 집어삼키기 위해 기회만 엿보고 있는. 태형이 꿀꺽 침을 삼켰다. 왜 갑자기 이렇게 분위기가 바뀌어 버린 건지 태형은 알 턱이 없었다. 낯가림이 끝난 건가? 아니, 2년 동안 그렇게 붙어 다녔는데도 낯을 가리고 있었던 거야? 아님, 어차피 유라 때문에 사이가 틀어졌으니 막 나가겠다, 이건가? 태형은 도로록 눈알을 굴렸다. 그렇게 붙어 다녔다지만 유라 일이 있고 난 후에는 인사도 제대로 안 하는 사이가 됐으니, 사실 말이 아주 안 되는 가설은 아니긴 했다. 진짜 볼 장 다 봤다 이건가괜히 서운해진 태형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또 무슨 생각해요? 혼자.”

, 아니…….”

“?”

그냥너 성격이 뭔가 내가 알던 성격이랑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서?”

 

우물쭈물하던 태형이 정국의 얼굴은 차마 쳐다보지도 못 한 채로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가뜩이나 여기 떨어진 후로 외롭고 서러운 일이 많은데, 같이 떨어져서 알게 모르게 위안이 됐던 정국까지 제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으니 더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나 혼자 그냥 뚝 낙오된 기분이랄까. 아니 사실 낙오된 건 맞는데……. 태형이 바닥을 좀 더 세게 문질렀다. 어째 되게 나보다 어린 애한테 투정부리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됐네. 그러나 민망함을 무릅쓰고 말을 꺼낸 태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국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 진짜 어이없었나 보다. 이 와중에 이런 투정이나 부리고. 잠시 정국의 대답을 기다리던 태형은 민망해져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하하. 아니야, 그냥 해 본 말

그냥,”

…….”

별로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돼서요.”

 

뭐가? 정국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대답에 태형이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소용이 없었다는 걸 알게 돼서? 뭐가 소용이 없는데? 정국의 말엔 주어가 없었다. 태형이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태형이 주어를 궁금해하거나 말거나, 말을 마친 정국은 몸을 일으켜 태형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정국을 올려다봤다. , 뭐야?

 

형이 이쪽으론 안 올 것 같아서.”

…….”

거리가 너무 멀잖아요.”

 

그러더니 제 눈앞에 털썩 주저앉는다. 등 뒤엔 경첩, 코앞엔 전정국으로 앞뒤가 막혀 버린 태형이 꿀꺽, 침을 삼켰다. 차마 가까이 오지 말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대화 하자는 건데. 대화하기엔 너무 머니까 가까이 온 걸 텐데. 괜히 유난을 피우는 게 더 이상한 것 같아서. 아니 그런데 그냥 대화하는데 이렇게까지 가까울 필요가 있나그냥 조금 거리를 두고 있으면 안 되나……. 심장이 이유 없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뭐, 이렇게 가까이 앉았던 일이 처음은 아닌데, 왜 이렇게 의식이 되는 건지 진짜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 !”

 

차마 정국의 눈은 못 보겠어서, 정국의 목울대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태형이 갑자기 들린 정국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정국이 그 동그란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급 더워지는 것 같았다. 얼굴이 빨개졌을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게 더 이상한데!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국은 그런 태형의 상태를 눈치 채지 못한 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 왜 오게 됐는지, 형은 뭐 잡히는 거 없어요?”

…….”

?”

 

, ! 태형이 잡생각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잘게 떨었다. 집중하자, 김태형! 괜히 홧홧 달아오르는 얼굴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태형이 제 볼을 가볍게 쳤다.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정신 차려!

 

전혀 없어. 너는?”

…….”

있어?”

저는 버스에서 잠들어 있다가 여기로 오게 됐다니까요.”

 

아 맞다 그랬지. 태형이 멍하니 중얼였다. 정국이 어깨를 으쓱였다. 형은 자취방에서 낮잠 자다가 끌려왔다고 했고. 저는 버스에서 자다가 여기 왔고. 그럼 잠을 계속 자야 하나? 멍하니 중얼거리는 정국에 태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왠지 아닐 것 같은데.

 

그렇게 쉽게?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여기 오게 된 걸 텐데.”

그런가.”

게다가 우리 이미 한 번 잤잖아.”

…….”

, ?”

 

갑자기 말없이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정국에 태형이 말을 더듬었다. 갑자기 뭔가 또 눈빛이 달라졌다. 아직 채 진정되지 않았던 심장이 다시 박동을 빨리 하려는 것 같았다. 태형은 2n년간 함께 했던 제 심장이 이렇게 워커홀릭이었는지 오늘 처음 알고 있는 중이었다. 도대체가 쉴 틈 없이 필요 이상으로 열일한다. 좀 쉬엄 쉬엄 해도 될 텐데.

 

아니에요. 형 말이 맞네요. 이미 여기서 하룻밤 지났죠.”

! ! , 맞아. 아까 한 희빈 봤지? 진짜 유라 닮지 않았어?”

닮았더라고요.”

그런데 유라는 아니야. 그 사람은 한 희빈이야. 그건 그럼 왜 그런 걸까? 그럼 다른 사람들도 또 닮은 사람들이 있을까?”

…….”

우리 말고 또 떨어진 사람이 있는 건가?”

그건 아닐 것 같아요.”

 

제 딴에는 나름 가능성 있는 가설을 제시한 거였는데, 제가 말을 꺼내자마자 딱 아니라고 단칼에 자르는 정국에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러자 정국이 음, 하고 말을 늘렸다. 태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뭐 아는 거 있어?”

아뇨. 그냥. 왠지. 원래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봐도, 여러 명이 타임슬립을 하진 않잖아요. 끽해야 두 명 아닌가?”

그런가.”

 

역시, 전정국도 별 거 없네. 결국 드라마나 영화를 기반으로 한 추리였다. 하긴, 쟤라고 뭐 별 수 있겠나. 버스에서 잠들었다가 끌려왔다는데.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잡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단서라든가, 특별한 점이라든가. 태형이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해야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갈 수는 있는 걸까. 눈앞이 깜깜했다.

 

사실 그런 생각도 해 보긴 했거든.”

뭘요?”

아니그게…….”

 

태형이 고개를 숙였다. 차마 제 입으로 말을 꺼내기가 참 뭐했다. 기나긴 밤 동안, 태형도 생각이란 걸 해 봤었다. 제가 처음 여기 떨어진 후부터 지금까지 쭉. 그러다 보니 문득 뭔가 떠오르는 게 하나 있긴 했다. 제가 이곳으로 떨어지고 난 후, 제일 처음 들었던 말. 그러나 태형은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게, 그러니까, 진짜.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

 

……. 혹시 왕이랑 중전의 사이가 좋아져야 하는 그런 건가…….”

……?”

아니!! 아니!! 그니까!! 내가 여기 와서 제일 처음 들은 말이 그거였거든! 원자 아기씨를 회임해야 한다고!!”

…….”

아니, 그렇잖아! 원래 막, ? , 왕이랑 왕비랑, 이렇게, 사이가 좋아야 좋은 거잖아! 후궁 말고! 정실 부인이랑 막, 금슬이 좋아야, 가정이 평화롭고 사회가 평화롭고 나라가 평화롭고! 백성들이 행복하고! ! 왕실 싸움 같은 거 안 일어나고!”

 

막 후궁이 기가 세가지고 막, 그러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그런 거잖아!! 장희빈! ?! !!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태형이 아무 말이나 뱉기 시작했다. , 괜히 말했어! 그냥 말 하지 말걸. 혹시나 해서 꺼냈던 건데, 역시 이건 아니겠지!? 태형이 정국의 얼굴은 채 바라보지도 못한 채 어색하게 웃었다. 미쳤다, 김태형. 어쩌자고 그런 말을 꺼냈냐!!! 태형이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고 있을 동안에도 정국은 아무 말이 없었다. 태형은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 진짜, 시간을 딱 3분만 돌리고 싶다…….

 

, 역시 아니겠지? 하하. 그래. 그렇겠지. 나는 여자가 아니니까 임신도 못 하고. 그냥 해 본 말이야! 아하하!”

진짜 그건가?”

?”

 

어떻게든 이 사태를 수습하려 과장되게 파하하 웃으며 정국의 어깨를 토닥이려던 태형의 몸짓이 순간 멎었다. 갑자기 제 코앞으로 얼굴을 슥 드민 정국 때문이었다. , 미친. 너무 가까워……. 태형은 아무 말도 못하고 굳어 눈을 깜박였다. 누가 뒤에서 톡, 하고 밀면 바로 입이 맞닿을 거리였다. 심장이 순간 멈췄다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 , 뭐야!!

 

…….”

…….”

농담이에요, .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요.”

 

새하얘진 머릿속에 태형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시선은 정국에게 고정한 채로 눈만 깜박인지 얼마나 지났을까. 픽 웃은 정국이 태형의 얼굴에 닿을락, 말락 하던 제 얼굴을 다시 천천히 물리며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태형은 그제서야 푸하, 하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심장은 아직까지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

…….”

뭐야, 진짜 놀랐어요?”

 

그래 이 개자식아……. 온 몸에 힘이 풀린 태형이 제 뒤의 경첩에 툭 하고 등을 기댔다. 서 있었으면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았을 거였다. 얼굴이 더 이상 뜨거워질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져 있었다. 미친. 태형은 제 심장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 지금 박동 수 재면 300도 넘을 거 같아. 태형은 멍하니 언젠가 봤던 예능 속의 심장박동을 재는 기계를 떠올렸다. 이게 예능이었다면……. 정말 평생 박제감이었으리라. 허구헌날 붙어 다녔던 후배놈이 얼굴 좀 들이밀었다고 이렇게 빨리 뛰는 심장이라니.

 

진짜 그건가?”

!!!!!!!!!”

, , 정신 차렸어요?”

이게 진짜 날 갖고 노네!!!!!”

 

정국의 낮은 중얼거림에 태형이 벌떡 일어나서 빽 소리를 질렀다. 정신을 차린 태형에 정국이 방긋 웃었다. 형 얼굴 진짜 빨개요. 그렇게 놀랐어요? 자신은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겠는데, 너무나도 멀쩡해 보이는 정국에 태형은 약이 올라 죽을 것 같았다. 저 새끼 저거 완전 선수잖아!! 유라야!! 속으면 안 돼!!!! 태형은 내적 고함을 질렀다. 김태형!!! 너도 정신 차려!!!!

 

너 저번부터 진짜, 나 그만 갖고 놀아라!!”

제가 언제 형을 갖고 놀았어요?”

?”

 

정국이 태형을 올려다보며 태연한 얼굴로 말했고 태형은 어이가 없어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너 그걸 몰라서 물어?? 태형이 어이가 털린 얼굴로 묻자 정국이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 가지고 뭐.

 

너 대박이다…….”

뭐가요.”

, 말을 말자.”

형 말이 진짜일지도 몰라서 그랬던 건데.”

 

온 몸에 힘이 풀린 태형이 제 옆에 깔린 이불에 머리를 대고 털썩 누웠다. 짧은 시간 동안 온 기력을 전부 전정국에게 뺏긴 기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국은 그런 태형을 쳐다보며 조용히 중얼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정국의 그 말에, 태형이 픽 웃었다.

 

진짜 그거면, . 어쩌게.”

, 필요하다면 하는 거죠.”

얘 진짜 위험한 애네.”

 

태형이 놀란 눈으로 반쯤 고개를 들어 정국과 시선을 맞췄다. 내가 널 그렇게 키웠어?! 너 그렇게 문란한 애였니!? 태형이 입을 뻐끔거리자 정국이 아, 뭐래요. 하고 입을 삐쭉였다.

 

뭐긴 뭐야! 난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어!!”

누가 누굴 키워요.”

아무튼 그건 아닐 거야. 남자가 임신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

타입슬립하는 건 말이 되고요?”

.”

 

끔찍한 소리 하지 마. 경악한 표정으로 정국을 보며, 태형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현대로 돌아가고 싶다지만, 그렇다고 이 나이에, 남자의 몸으로, 조선에서. 임신을 하고 싶은 마음은 개미 코딱지만큼도 없었다. 임신이 될 리도 없겠지만 아무튼!!

 

어쨌든 뭐, 임신은 답이 아닐 거 같긴 해요. 임신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리고 그럴 거였으면 형이 여자의 몸으로 왔다든가 했겠지.”

, 너 끔찍한 소리 좀…….”

근데 형이 누나 아니랬으니까.”

 

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태형의 말이 길게 늘어졌다. 갑자기 풀린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따뜻한 바닥과 푹신한 침구 때문인지,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눈이 깜박깜박 감기기 시작했다. 태형은 손을 들어 눈가를 비볐다. , 뭔가 더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얻은 게 없는데…….

 

아직 여기 떨어진 지 하루밖에 안 지났잖아요. 조금 더 있다 보면 뭔가 단서가 보일

…….”

형 자요?”

…….”

 

태형이 거의 감긴 눈으로 꾸물꾸물 움직였다. 머리만 푹신하고 몸은 그대로 바닥에 있는 채라 등이 배길 텐데도 그 불편함이 태형의 수마를 물리치진 못했다. 태형은 빠르게 RAM 수면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정국이 허, 하고 웃었다. 뭐야, 이 형…….

 

. 올라와서 자요.”

…….”

…….”

 

그러나 정국의 말이 태형의 의식 속에 박히기도 전에, 태형의 뇌는 이미 수면 상태로 접어든 후였다. 결국 얕은 한숨을 내쉰 정국이 읏차, 하고 일어나 태형을 살짝 끌어 이불 위로 올려놨다. 뭐 이렇게 빨리 잠들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랑 대화하고 있었으면서.

 

이러고 있으니까 꼭 옛날 같네.”

 

그러고 보면, 개총이든, 회식이든, 단 둘이 술을 먹은 날이든. 술을 먹은 날이면 태형은 항상 이렇게 대화하다가도 곧바로 잠에 들곤 했었다. 그럼 잠든 태형을 업어다가 제 자취방에 누이는 것은 항상 제 몫이었고. 문득 떠오른 옛날 생각에 정국이 픽 웃었다. 어느새 깊게 잠든 태형이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잘 자요, .”

 

태형의 가슴께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 준 정국이 이불을 살짝 토닥이며 말했다. 조선에서의 두 번째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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