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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 번외 1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카메라 앞에 서서 연기하는 내 모습이다. 그 때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시끄러운 시장 속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어린 아이였고, 나는 내 키보다 훨씬 큰 카메라와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울어야 했다. 사람들은 나를 보며 내가 울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속에는 엄마 역시 있었다. 내 엄마는 저기 내가 보이는 앞에 있는데, 이곳은 시장도 아닌데. 왜 내가 엄마를 찾으며 울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도 잠시 나는 바로 울음을 터뜨렸고, 감독의 만족스러운 컷 사인이 떨어진 후 날 바라보던 사람들은 날 보고 웃으며 날 칭찬했다. 어린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연기를 잘 할 수 있냐고. 천재임에 틀림없다고. 그리고 그 날 그렇게, 내가 살아가는 평생 동안 내 이름 앞에 놓일 수식어가 결정됐다.

 

*

 

나에게 세상은 두 가지여야 했다. 연기하기 위해 주어진 세상과, 내가 살아가야 할 실제 세상. 좋은 배우는 그 두 가지 세상을 제대로 분리해서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고, 그렇지 못하면, 연기 속 세상이 갉아 먹히든, 현실이 갉아 먹히든 둘 중 하나가 된다. 나의 경우는 후자였다.

내 연기는 훌륭했고, 최고였고, 그 나이 대 아이로서 완벽했다고 모두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행복했다. 모든 걸 가진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이 나를 향해 칭찬을 했다. 어떻게 그 어린 나이에 그런 연기를 하냐고. 그래서 몰랐다. 내가 내 세계를 갉아 먹으며 연기를 하고 있는 줄. 현실과 연기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줄. 사실, 어린 아이에게 그건 애초부터 어려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다. 내 친구들은 모두 드라마에서 알게 된 친구들이었고, 드라마 속 친구들이 내 진짜 친구들이었다. 드라마에서 싸운 친구들은 현실에서도 어색해졌다. 연기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그랬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상을 휩쓸었다. 그 나이에, 내가 맡은 역할에 탈 수 있는 상은 모두. 그렇게 내 세계는 완벽했다. 내가 원하면 뭐든 가질 수 있었다. 당연했다. 모두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탈락이요?”

 

21, 처음으로 성인연기에 도전하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내가 원하는 감독의 새로운 작품. 상업 영화도 아닌 독립 영화. 오디션 같은 건 그냥 피상적인 것뿐이고, 전정국이 먼저 오디션 의사를 밝혀왔다는 것부터 이미 주연은 정해진 거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나 역시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받은 통보는 불합격. 그것도 모든 배역에서.

 

연기에 부족함이 없네요.”

감사합니다.”

그거 칭찬 아닌데.”

 

대학교를 갓 졸업한 감독이랬는데. 나는 오디션장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민윤기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 나를 마주한 사람 모두가 호의적인 표정을 보일 때, 그렇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 민윤기의 그 말 한마디에 오디션장이 술렁인다. 심지어는 민윤기 옆자리에 앉아 있던 메인 작가까지. 그러나 민윤기는 무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연기를 못 하는 건 아닌데,”

…….”

경험하지 못한 건 티가 날 수 밖에 없어요.”

그게 무슨…….”

실패해본 적 없죠.”

…….”

뭔가를 잃어 본 적도 없는 거 같고.”

 

민윤기는 나에게 그랬다. 한 손으론 펜을 돌리면서. 실패? 나는 멍하니 민윤기를 쳐다봤다. 그런 걸 내가 해봤을 리가. 여태까지 원하는 건 뭐든 가질 수 있었는데.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있자 민윤기가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웃었다. 이해해요, 나라도 그랬을 거니까.

 

경험해본 적 없는 걸 연기하는 게 보여요.”

…….”

딱 그 정도의 상실, 적당한 정도의 결핍.”

…….”

그래서 정국 씨는 저희랑은 안 맞을 것 같아요.”

 

아쉽네요, 마스크는 내 스타일인데. 민윤기가 웃으며 말했고 나는 그 순간 지금 이 오디션이 비공개 오디션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이미 유명한 배우라는 점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나는 차오르는 쪽팔림을 숨기기 위해 손을 꼭 쥐었다. 옆에서 메인 작가가 민윤기를 쥐고 흔드는 것이 보였다. ‘지금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차요?!’ 자기 딴에는 나에게 안 들리게 한다고 한 것이었겠지만 흥분해서 목소리 조절이 안 된 건지 가까스로 나에게 그 목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민윤기는 여전히 덤덤하게 말했다. ‘우리 영화랑은 안 맞아.’ 나는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자존심이 상했다.

 

왜 결핍이 있어야 돼?”

 

오디션장에서 집으로 차를 타고 가면서 난 그랬다. 차를 몰던 매니저 형이 글쎄……. 하고 말을 얼버무린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아누웠다. 솔직히 쪽팔리고, 자존심 상하고. 그랬다.

 

…….”

 

객기도 맞았고, 괜한 욕심도 맞았다. 그냥 하던 거나 하면 될 걸, 안 해본 걸 해보겠다고. 드라마도 아니고, 상업 영화도 아니고, 이름 없는 감독의 독립영화에. 그것도 해본 적 없는 성격의 역할로. 그러나 보여주고 싶었다. 나도 이제 성인이고, 내가 할 수 없는 건 없다는 걸. 그러나 그 시도는 시작도 못한 채로 망가졌다.

 

그러니까 드라마 하자고 했잖아. 이번에 박소현 작가 드라마에,”

그거 또 고등학생 아들 역할이잖아.”

시청률은 보장된 건데…….”

지겨워.”

정국아.”

 

말하자면 그런 거였다. 따먹지 못할 포도는 넘보지도 말라는 거. 처음부터 매니저 형은 내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걸 원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그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한데, 굳이 새로운 시도를 해야 할까? 나는 이미 가진 게 많고, 내가 뭘 잘 할 수 있는지도 알고. 하지만 그러고 싶었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원한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오기였다. 민윤기 감독의 오디션에서 떨어진 걸, 실패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성인이 된 이후의 첫 연기는 민윤기 감독의 영화여야만 했다.

그 때, 핸드폰이 조용히 진동했다. ‘김지현’. 저번 드라마에서 내 여자 친구 역할을 맡았던 동갑내기 배우. 역시나 드라마가 끝난 후에 자연스럽게 사귀게 된. 그러나 난 핸드폰을 덮어 버렸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

?”

나 휴가 갈래.”

?”

해외. 사람들 별로 없는 곳으로. 가서 좀 쉬다 올래.”

 

그러니까, 일종의 도망이었다. 내가 신경 써야 하는 것들로부터의. 민윤기 감독의 영화에 누가 캐스팅됐는지,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 질 건지, 그런 정보들로부터의. 그리고,

 

내가 돌아오고 싶을 때까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들로부터의 도망.

 

*

 

.”

 

나는 내 앞에 펼쳐진 세상에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진짜 남자들밖에 없네. 나는 슬그머니 인파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시끄러운 소리가 고막을 울려댔다.

 

너 클럽 가지 마. 또 여자 문제 만들기만 해 봐!’

 

매니저 형이 비행기 티켓을 끊어주며 했던 소리였다. 나는 그 말에 그러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그 때는 그냥 정말 사람 없는 비교적 한적한 도시로 가서(완전히 시골은 싫었다) 쉬다 올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는 곧 지루해졌고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푹 쉬려고만 했던 내 생각은 이미 날아간 지 오래였다. 그래서 갔다. 게이 클럽에. 매니저 형과의 약속은 지킨 거였다. 여자 문제는 안 만들어질 테니까.

 

, 한국 사람.”

 

그런데 누가 알았겠냐고. 거기서 그 사람을 만나게 될 줄. 그 때의 나는 클럽 한 구석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어차피 남자는 내 취향도 아니었고, 그냥 시끄럽고 사람 많은 곳에 가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멍하니 스테이지를 지켜보고 있던 나에게, 그 사람이 다가왔다. 그러니까,

 

맞죠, 한국인.”

 

김태형이.

 

진짜 신기하다. 나 여기서 한국인 처음 봐요.”

 

나를 만났을 때 김태형은 이미 취해 있었다. 나는 나에게로 다가온 김태형을 보며 눈을 깜박였다. 그 때는 그냥, 잘생겼다고만 생각했던 거 같다. 매력적인 사람. 김태형은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게, 그러니까 조금은 어색하게 내 옆에 앉았다. 클럽에 자주 오는 사람은 아닌가 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김태형은 내 옆에 앉아 조잘조잘 떠들었다. 평소의 나라면 술 취한 사람의 주정 같은 걸 듣고 싶어 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 날은 이상하게 가만히 앉아 김태형의 말을 듣고 있었다. 김태형의 목소리가 듣기 좋은 탓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김태형은 외롭다고 했다. 가끔은 유학 온 걸 후회한다고도 했다. 힘들어서 다 때려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그러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게 되니까 그럴 수 없다고도.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김태형의 얼굴을 쳐다봤다. 길게 뻗은 속눈썹과, 커다란 눈, 예쁘게 말려 올라간 입술이나 코끝의 점 같은 것들. 그리고 난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김태형의 입술에 내 입술을 맞췄다. 취하지도 않았었는데. 취한 건 내 눈앞에 있는 김태형이었는데. 내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김태형은 내가 입술을 떼고 난 후에도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나는 내가 하고도 놀라 덩달아 김태형을 마주 보고 눈을 깜박였고. 나 지금뭐 한 거지. 그러나 그 순간, 김태형이 웃었다. 그리고 그랬다.

 

나랑 잘래요?”

 

내가 그 순간에 뭐라고 대답했어야 했을까. 나는 갓 성인이었고, 여자친구는 많이 사귀어 봤지만 한 번도 관계를 가져 본 적은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까 원나잇 같은 것도 당연히 안 해 봤고. 그런데 내 첫 경험을 이런 곳에서? 방금 전에 만난, 전혀 모르는 사람이랑? 하지만 김태형이 날 보고 웃는 순간, 그런 것들은 전부 의미 없는 것들이 되어 버렸다. 김태형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이 사람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만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그래서, 어쩌면 이렇게 시작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김태형이 간절했다. 어떤 의미로든.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마, 그 때부터 나는 이미 김태형을 좋아하고 있었던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 날 밤이 완벽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기억나는 건, 처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 나랑 잘래요?’라고 말했던 사람 같지 않게 김태형이 서툴렀다는 것. 그리고 관계를 가지는 내내, 내가 그를 붙잡았다는 것. 이상하게 김태형은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자꾸 내 손 밖으로 빠져나갈 것 같은 느낌. 내가 쥘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나는 몸을 섞는 내내 계속해서 그에게 말했다. 날 기억해 달라고.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다고. 그의 이름을 물었고, 그가 지내고 있는 곳을 물었고, 그의 번호를 물었다. 처음에는 대답하지 않으려 했던 그도 내가 끈질기게 묻자 끝에 가서는 순순히 말해줬었다. 이름은 김태형, 지내고 있는 곳은 이 근처의 호텔, 번호도. 술에 취한 사람을 데리고 관계를 맺는다는 죄책감과 이 사람이 다음 날 아침 오늘의 일을 기억할까 하는 불안감이 그 시간 내내 나를 괴롭혔지만.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내 옆에 김태형은 없었고 나는 그가 내 옆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바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설마. 내가 어제 그렇게 부탁했는데. 하지만 혹시 어젯밤 일이 꿈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김태형은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진 후였다. 혹시 잠깐 나갔다 돌아오려나 싶어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려 봤지만 당연히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텅 빈 방 안에 어젯밤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내 옷가지들과 선명한 내 기억뿐이었다. 그날 오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김태형을 찾으러 시내에 나가 김태형이 말했던 그 호텔을 찾았지만 오늘 아침 이른 체크아웃을 했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라는 안내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나한테 이래?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나에게 남은 건, 정말 내 기억뿐이었다. 어쩌면 나에게 알려 줬던 그 김태형이라는 이름 세 글자조차 전화번호처럼 거짓말이었을지도 모르니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커다란 상실감이 한꺼번에 나를 덮쳤다.

 

…….”

 

인정하기 싫은데. 나는 입술을 꾹 물었다. 내가 또다시 실패했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나는 그 사람을 원했는데, 그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 자존심이 상했다. 인정하기 싫었다. 실패해본 적 없죠.’ 민윤기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왜 그런 걸 해 봐야 하는데. 지금 이게 뭐, 나에게 상실이란 감정을 알려주기 위한 신의 선물, 뭐 그런 거야?

 

의미부여 하지 마.”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당연히 느낄 수 있는, 아무것도 아닌 아쉬움일 뿐이다. 상실감 같은 게 아니라. 나는 내 자신에게 중얼였다. 처음이었으니까. 좋았으니까. 그래서 지금 조금 아쉬운 감정이 드는 것 뿐, 조금만 지나면 잊어버릴 가벼운 감정일 것이다.

애초에 말이 안 되잖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이렇게 빨리 좋아하게 될 리가 없으니까.

 

*

 

여름휴가에서 돌아오고, 여름의 열기가 가시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될 때까지 나는 아무런 오디션도 보지 않았다. 처음에는 왜 그러냐며 나를 들볶던 매니저 형도 이내 포기한 듯 쉬고 싶을 때까지 쉬라며 날 내버려 두었다. 데뷔한 후로 한 번도 세 달 이상 쉬어 본 적이 없으니 아마 내가 지친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지쳤다라. 그런가? 지쳐서 그런 건가?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너무 오랫동안 쉬지 않아서, 그래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다가도 짜증나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그 해 연말, 처음으로 아무런 시상식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로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나는 여름을 생각했다. 여름, 휴가, 바다, 소음, 그리고,

 

김태형.”

 

내가 맞았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시간이 지나자 김태형은 연해져 갔다. 지금에 와선 얼굴도 제대로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너무 희미해져 그 날 있었던 일이 꿈같을 정도로. 그러면서도 가끔씩 생각나긴 했다. 딱히 매개체가 없어도, 문득 문득. 얼굴이 어땠더라. 목소리가 어땠더라. 향기가 어땠더라. 제대로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떠올릴 때마다 이상하게 짜증이 났다. 몸 한구석이 간지러운 느낌. 아마 내 첫 경험이었어서 그런 건가. 나는 침대에 엎드려 있던 몸을 돌려 천장을 쳐다봤다. 그 사람도 나를 기억할까? 가끔 이렇게 김태형을 떠올리게 되면, 이 생각도 자연스럽게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그 사람도 가끔씩 나를 이렇게 떠올리고 그럴까. 나는 눈을 감았다.

 

짜증나…….”

 

김태형을 떠올린다고 해서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심장이 욱신거린다거나 울고 싶다거나 견딜 수 없는 건 아니니까 좋아했던 게 아닌 건 맞을 텐데.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왜 자꾸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걸까. 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서 그런가. 너무 오래 쉬었나. 그치만 아직 아무것도 하기가 싫은데. 그냥 계속 침대에 누워 자고만 싶다.

 

평생 이렇게 떠오르면 어떡하지.”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는지 짓눌린 입술이 욱신거려서 손을 내 입술에 가져다 댔다. 막 울고 싶은 건 아닌데, 심장이 아픈 건 아닌데. 못 견디게 보고 싶고 싶은 것도 아닌데 그냥,

 

짜증나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잖아.

 

*

 

그동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어요?”

 

민윤기 감독이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민윤기 감독의 첫 번째 상업 영화. 꼬박 1년을 쉬고, 이제는 슬슬 새 작품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을 때 운명은 운명인지 민윤기 감독이 새로운 작품에 들어간다는 정보를 매니저 형이 가지고 왔다. 사실, 그 때까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 않았다면 나한테 말하지도 않았겠지. 어차피 떨어질 오디션이라도 한 번 보라는 심정이었을 거다.

 

“1년 동안 쉬었다더니 연기 연습만 엄청 했나.”

…….”

표정이 훨씬 더 복잡해졌네.”

 

나는 민윤기 감독을 쳐다봤다. 민윤기 감독은 살짝 웃고 있었다. 그 옆의 작가진들도. 나는 눈을 깜박였다. 저번에 민윤기 감독 앞에 섰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이건 나도 잘 아는 익숙한 분위기였다. 그러니까,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뻔한 결과일 때.

 

더 볼 것도 없네.”

…….”

앞으로 잘 부탁해요.”

 

민윤기 감독이 일어서서 내 앞으로 와 손을 내밀었고 나는 내밀어진 손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성공한 거다, 결국엔. 이거 봐. 내가 원하는 것 중에 내가 가질 수 없는 건 없잖아. 나는 민윤기 감독의 손을 마주 잡았다.

민윤기는 여러모로 신기한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는 내가 왜 처음에 하필 민윤기 감독의 영화에 그렇게 출연하고 싶어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인연이 있다면 이런 걸까 싶을 정도로. 민윤기는 적당한 선 안에서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굳이 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고,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은 물어보지 않는 사람. 그래서 편했다. 내 모든 것을 알려주지 않아도 되니까. 많은 것을 말할 수 있게 만들어 주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깊은 감정들을 곱씹어 생각하지 않아도 되게 해 주니까. 민윤기와의 첫 번째 작업이 끝나고, 나는 제일 먼저 김태형을 만났던 그 곳으로 갔다. 그 일을 마무리 짓고 싶어서 반, 그 때는 실패했던 오디션을 이번엔 성공했던 것처럼, 혹시 다시 김태형을 만날 수 있을까 싶어서 반.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때는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곳에 김태형은 없었고 나는 내 자신이 어이가 없어 웃었다. 당연한 거였는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애초에 그렇게 마주쳤던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부터가 바보 같은 거였지.

그리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는 그냥 이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이젠 얼굴도 기억나지 않고 감정도 흐려졌다고. 여기까지 굳이 와본 건 그냥 가벼운 미련 같은 거고, 막상 와 보니까 아무렇지도 않다고. 제대로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끝내 버려서, 그 여파가 길었던 것뿐이라고. 그건 일종의 자기 세뇌 같은 거였다. 실패를 인정하기 싫은 자존심. 그래도 그 효과는 꽤 괜찮아서, 그 후로 몇 년이 흐르는 동안 내가 찍었던 영화에 나오는 OST 중에 마음에 들었던 한 노래 작곡가의 이름이 김태형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재밌는 우연의 일치네 웃을 수 있었다. 나는 스무살 이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가벼운 연애를 여러 번 했고, 모든 게 그 전과 똑같았다. 나는 내가 원하는 모든 걸 가질 수 있었고, 실패하지 않았고, 완벽했으니까. 그러나 그건 모두 내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은, 정말 한순간이었다.

 

*

 

인사해. 여긴 이번 영화 OST 맡아 주신 김태형 작곡가님, 여긴 배우 전정국.”

처음 뵙겠습니다. 김태형이라고 합니다.”

 

나는 멍하니 김태형을 쳐다봤다. 설마. 진짜? 김태형이 웃으며 나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그러니까, 진짜 김태형이. 그 현실감이 없는 명제에 나는 내밀어진 손을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로 김태형을 쳐다보고만 있다가 민윤기가 뭐 하냐는 듯 나를 치자 그제서야 눈을 깜박였다. 희미해졌다고 생각했던, 아니 희미해지다 못해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얼굴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한순간에 다시 선명해진다. 그 때와 조금 다른 듯 똑같은 색과 모양, 농도로.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내 눈앞에 있는 인영은 환상이라기에는 너무 선명했다.

 

나 몰라요?”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랬다. 나 몰라요? 난 당신을 아는데. 아주 오래 전에 만났잖아요, 우리. 그러나 내 눈앞의 김태형은 내 말에 당황하는 눈치다. 설마. 기억 못 하는 거야? 어이가 없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그 긴 시간을 버렸는데. 그런데 김태형은 오래전부터 내 팬이었다는 소리나 하고 있다. 오래 전이라니. 언제부터? 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모르는 척을 하는 건가, 정말 모르는 건가.

 

초면 아니죠, 우리?”

?”

내 영화 OST 참여한 거, 처음 아니던데.”

, 맞아요. 모르실 줄 알았는데.”

 

당황으로 물들었던 김태형의 한순간에 환해진다. 혹시나 해서 던져본 질문에 김태형은 너무나도 쉽게 대답한다. 그러니까, 정말 모르는 거다.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거다. 나는 어이가 없어 허 웃었다. 잊어버린 거야? 그렇게 쉽게?

 

그 때는 왜 인사 안 했어요? 인사 들은 기억이 없는데. 오래 전부터 팬이었다면서.’

 

그래서 부러 짓궂게 말했다. 반쯤은 진심이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김태형이 자꾸 떠올라서 짜증났는데, 김태형은 날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었을 테니까. 내가 문득문득 김태형을 떠올리던 나날들 동안, 김태형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은 내가 아니었을 테니까. 나는 김태형을 찾으려고 노력했는데, 김태형은 날 알게 된 후에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으니까. 한순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심장이 마구잡이로 뛰었다. 이건 좋아서 이러는 건가? 그런데 왜 이런 감정이 들지? 이미 예전에 다 끝난 일인데. 의미부여 할 필요 없었던 일인데. 그냥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해서 질질 끌었던 것뿐이었는데. 그러니까 이 감정은 그냥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거 같아서 그랬어요.”

…….”

윤기 형 아니었으면 오늘도 나한테 아는 척 안 했을 거 같아서.”

 

씨발. 나는 속으로 욕을 읊조린다. 자꾸만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심해서. 내 앞의 김태형이 웃는다. 그리고 난 깨닫는다. 말도 안 되는 합리화는 애초에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결국, 이건, 좋아하는 감정이다. 좋아하는 감정이었다. 나는 김태형을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하고. 그냥 오래된 미련은 무슨.

오랫동안 쌓아 올렸던 벽은 그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고, 나는 그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희미해졌던 감정은 희미해진 게 아니라 오래된 기억이라 먼지가 쌓였던 거였다. 조그만 흔들림에도 먼지들은 모두 떨어져 나가고 그만큼 다시 선명해진 기억이 고개를 든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무서워졌던 거다.

 

김태형씨.”

 

그 감정이.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난 내 약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아주 어렸을 때 시작했던 사회생활이 그걸 알려줬으니까. 나는 소유욕이 심했고, 내가 원하는 건 뭐든 가져야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내가 다 가질 수는 없으니까. 노력해도 안 되는 건 분명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은 나 자신을 속이는 거였다. 방법은 쉬웠다. 거리를 두면 됐다. 그만큼 원하지 않도록. 그만큼 원하기 전에. 그런데 김태형은, 그 오랜 시간들 동안에도 잊혀지지 않았던 사람이었으니까. 사실은 간신히 희미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기억이었으니까. 그래서 무서웠다. 거리를 두려고 했는데, 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계속해서 날 속여 왔는데 나도 모르게 나는 계속 김태형을 생각했고 조금만 방심하면 머릿속은 온통 김태형으로 가득 찼었으니까. 다른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몸을 섞어도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김태형으로 회귀하게 됐었으니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런 감정은 나를 여유롭지 못하게 만들 게 뻔하니까.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는 감정보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이 무거우면 내가 힘들 걸 아니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 나는 김태형을 놓지 못했지만.

그 날, 김태형은 나와 자신이 관계를 가진 줄 알지만 사실 그 날 김태형과는 아무 일도 없었다. 김태형은 잔뜩 취해 있었고, 나는 그런 김태형을 부축해 내 집으로 데려왔을 뿐이다. 이미 한 번 잘못 시작했었던 관계를 또 같은 식으로 잘못 시작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냥 없었던 일로 해요. 피차 깔끔하게.”

 

이 상황이 익숙한 것 같은 김태형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다. 짜증났다. 그러고 보면 그 때도 그랬었지. 날 두고 도망갔었지. 그리고 지금도 그러려고 하고 있고. 없었던 일? 웃음도 안 나왔다. 없었던 일이 되는 건 그 때 한 번으로 족하다. 김태형의 말에 제대로 시작하고 싶었던 내 다짐은 변색되고 나는 뾰족한 말을 뱉는다. 가벼운 관계, 가벼운 감정. 그런 걸 당신만 할 줄 아는 건 아니야.

 

나도 깔끔한 거 좋아해요. 그렇다고 없던 일로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서 나는 그런 식으로 김태형을 잡았다. 차라리 그 때 좋아한다고 솔직하게 말했으면 이렇게 멀리 돌아올 필요는 없었을까.



+





한 편에 다 올리려고 했는데ㅠㅅㅠ 너무 길어져서… (잘랐는데도 11000자가 넘어가는 어마무시한 분량)

다음 편은 최대한 빨리 오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항상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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