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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어떻게 주말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머리맡에 놓아둔 핸드폰을 확인했다. 울다가, 잠들었다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한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다. 부재중 전화 5, 읽지 않은 메시지 15. 그러나 그 중에 전정국의 이름은 없다. 나는 핸드폰을 엎어 놓았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 몇 시야.”

 

그렇게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나, 집에 와서 주저앉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 강선우를 만나서? 전정국이 나를 배신해서? 아니면, 전정국이, 정말로 나를 좋아했던 게 아니어서?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붙잡았다. 심장이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무릎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왜 전화 안 해.”

 

나는 침대 한켠에 조용히 엎어져 있는 핸드폰을 멍하니 쳐다봤다. 미동도 하지 않는 핸드폰이 원망스러웠다. 나한테 처음으로 고백했을 때는 그렇게 전화를 해대더니, 막상 전화가 오기를 바라고 있을 땐 연락 한 통 없다. 정말, 진짜로 그냥 나를 놀리려고 그랬던 건가. 정말로 강선우가 나에 대해서 했던 말을 듣고 호기심이 생겨서. 정말 그것뿐이었던 걸까.

 

선배를 좋아하는 건 진심이에요.’

저 진짜 선배 좋아해요.’

 

전정국을 마주했던 그 많은 시간들 동안 나에게 좋아한다고 했던 그 말들이 전부 거짓일 수가 있을까. 나를 쳐다보던 전정국의 눈도. 강선우에게 그런 말을 듣고, 혼란스럽고 무서워서 전정국에게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정말로 전정국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너무 무서워서. 만약에라도 전정국의 입을 통해 그런 말을 듣게 되면 정말로. 정말로 죽고 싶을 것 같아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왜 전화 안 해, 전정국. 연락해.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그냥, 그런 거 아니라고. 다 내 오해일 뿐이고 강선우랑은 친하지도 않다고…….

 

…….”

 

여기까지 생각하다 내 자신이 비참해 웃음이 나왔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전정국을 좋아하게 됐을까. 내 자신이 우스웠다. 그렇게 다시는 안 좋아할 거라고 다짐했으면서. 그렇게 밀어냈으면서.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다 오해였다고 전정국이 말해주길 바라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불쌍했다.

시간이 지나고, 북받쳤던 감정이 잦아들고. 불도 켜지 않아 깜깜한 방 안에 혼자 앉아 차가워진 머리로 천천히 생각을 했다. 전정국과 나.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과 앞으로 있을 일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잘 된 거 아닐까.

전정국이 나를 진짜로 좋아했던 거든 아니든. 내가 전정국을 좋아하든, 아니든. 세상에 영원한 건 없고 상처받지 않는 관계란 없다. 나는 상처가 무서웠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돼서 느끼게 될 행복한 감정보다, 그 마음이 커졌을 때 내가 감당해야 할 감정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졌으니까. 그러니까…….

 

…….”

 

그냥 이대로, 끝내는 게 최선의 결과 아닐까. 나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전정국이 날 정말로 좋아했던 거라고 치자. 강선우와의 일도, 전부 내가 오해한 것뿐이라고. 그런데, 그러면 그 다음은? 그 다음엔 뭐가 있을까. 나는 배배 꼬인 인간이고 상처받길 무서워하는 인간이다. 그건 변하지 않겠지. 그럼 전정국은? 전정국은 빛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고, 반짝거리는 사람이고,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을 만큼 밝은 사람이다. 상처받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겠지. 이런 날 이해할 수없을 거다. 결국 전정국은 그런 나한테 지쳐가겠지.

 

선배, 진짜 많이 좋아해요.’

 

전정국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내 귓가에 울렸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전정국의 목소리에 내 심장은 두근거렸다. 아직 전정국은 나에게 좋은 기억인가 보다. 나는 픽 웃었다. 그래. 차라리 잘 됐다. 이렇게 마무리하자. 전정국은 정말로 나를 좋아했던 거라고. 그게 걔의 착각이었어도, 나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던 그 수많은 순간들 중에 한번쯤은 진심인 순간이 있지 않았을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좋은 기억은 좋은 기억만으로 남겨두는 게 좋으니까.

 

기나긴 생각에 마침표가 찍힌다. 나는 멍하니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동이 터 오고 있었다.

 

*

 

…….”

 

내 기분이 어떻든, 몸 상태가 어떻든, 학교는 가야 했다. 대학생의 비애였다. 이미 월요일 수업을 빠져버리긴 했지만, 더 이상 빠질 수는 없었으니까. 경영인의 밤 행사가 끝났다는 건 기말고사가 가까워졌다는 뜻이기도 했고. 나는 여전히 멍한 정신을 붙잡고 학교 갈 준비를 마친 뒤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서고 문이 닫히는데, , 하고 낯선 소리가 났다. 문에 무언가 부딪혀 나는 소리였다. 나는 뒤를 돌아봤다. 내 가방이 문고리에 걸려 매달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때 술집에 가방을 놓고 나왔었구나. 정신이 없어서 여태 몰랐다.

 

…….”

 

익숙한 내 가방에, 익숙하지 않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나는 멍하니 멈춰 서 포스트잇을 쳐다봤다. 낯선 듯 익숙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눈가가 시렸다.

 

<선배, 미안해요. 선배한테 뭐라고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선우 선배 일은 죄송해요. 선우 선배를 부른 건 맞는데, 정말 몰랐어요. 선배가 생각하는 것처럼 선배를 놀리려고 그랬던 거 아니에요. 그래도 죄송해요.

 

선배, 내 얼굴 보기 불편해서 학교 안 나오는 거면 제가 수업 안 나갈게요. 정말 죄송해요.>

 

작은 포스트잇 하나에 빽빽하게,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쓴 것 같은 글씨는 누가 쓴 것인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나는 가만히 멈춰 서서 길지도 않은 그 내용을 읽고, 또 읽었다. 눈앞에 나타나지 말랬다고 이렇게 포스트잇으로 써서 붙여 놓은 건가. 고개를 드니 현관문 앞에 나란히 놓여 있는 우유가 눈에 들어왔다. 초코 우유, 딸기 우유. 우유 같은 걸 신청한 기억은 없으니까 아마 저것도전정국이 갖다 놓은 거겠지. 걔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저걸 갖다 놓은 걸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는 눈가를 비볐다. 눈가가 따끔거렸다. 심장이 쿡쿡 아팠다.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고, 포스트잇을 구겼다. 그리고 가방을 들어 자취방 안에 가져다 놓았다. 우유는 그냥 놔뒀다. 이걸로 됐다. 전정국을 좋은 기억으로 남겨둘 수 있으니까, 더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김태형.”

 

강의실에 도착하니 윤기 선배가 날 맞았다.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저런 윤기 선배의 얼굴은 처음 본다. 나는 살짝 웃어 보였다. 그러나 윤기 선배의 얼굴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너 괜찮아? 윤기 선배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괜찮았다. 달라질 건 없었으니까. 내 반응에 윤기 선배가 입을 다문다. 여전히 표정은 그대로인 채로.

 

저 진짜 괜찮아요. 다 지난 일인데요 뭐.”

내가 주제넘은 건 아는데, 네가 오해하고 있는 거 같아서. 전정국은

몰랐다고요?”

…….”

알아요. 걔가 그럴 애가 아니란 거.”

 

오히려 너무 착해서 탈이지. 내 앞에 나타나지 말랬다고 내가 오해하고 있는 거 뻔히 알면서도 내가 기분 나쁠까 봐 직접 말하지도 못하고. 윤기 선배가 날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끝났어요.”

태형아.”

윤기 선배.”

…….”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근데 저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요.”

 

거짓말이다. 아직도 입 안은 모래를 씹은 것처럼 버석거렸고, 심장 한 켠은 물에 젖은 듯 무거웠으니까. 하지만 괜찮아 질 거니까. 곧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될 거니까.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이렇게 나 걱정해주는 윤기 선배도 있고. 이제 강선우가 무섭지도 않다. 어쨌든, 어떤 식으로든. 그때보단 나았다. 이건 정말이었다.

 

좀 있음 수업 시작할 거 같은데.”

그래.”

 

윤기 선배는 뭐라 더 말을 하고 싶은 듯 머뭇거렸지만 나는 웃으며 말을 잘랐다. 윤기 선배가 내 말에 나를 쳐다보더니, 한숨을 쉬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뒤이어 교수님이 들어오셨고,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하루가 시작됐다.

 

*

 

이번 시험 범위에 이 프린트도 들어가니까, 잃어버리지 말고 잘 챙기세요. 다시 안 나눠줄 거니까.”

 

, 시험범위 또 늘었어. 뒷자리에 앉은 여자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나는 멍하니 나도 모르게 두 장을 챙겨버린 프린트를 쳐다봤다.

그 날로부터 일주일 정도가 흘렀고, 학교는 시험기간에 접어들었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수업을 듣고, 점심을 먹고, 과제를 하고. 모든 게 그 전과 똑같았다. 매일같이 내 옆을 지키던 전정국이 없다는 것만 빼면.

가끔 윤기 선배와 같이 밥을 먹었다. 윤기 선배는 나와 밥을 먹을 때마다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그때마다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전정국 얘기일 게 뻔했으니까. 전정국은 일주일째 학교를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니면 그 쪽지에 쓰여 있던 대로 나랑 같이 듣는 수업만 나오지 않는 건가. 사실 좀 궁금하긴 했는데, 묻진 않았다. 한 번 묻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물어보게 될 거 같아서.

시험 기간은 가까워 오는데, 전정국은 여전히 수업에 나타나지 않는다. 혹시 내 눈에 띄지 않게 오는 건가 싶어 한 번은 맨 뒷자리에 앉아 들어오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눈여겨봤지만 전정국은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전공이야 같이 듣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필기를 구할 수 있다 쳐도, 교양은 내가 알기로 이 수업 내에 전정국이 아는 사람은 나뿐인데. 이래도 괜찮은 건가. 조금 양심에 찔렸다.

 

…….”

 

그래서 나는 지금 경영학과 과방 문 앞에 서 있었다. 손에는 교양 프린트를 들고. 그래. 이 정도야. 그냥 교양을 같이 듣는 과 선배로서 해 줄 수 있는 거지. 끊임없이 자기합리화를 하면서. 직접 전해줄 용기는 없고, 좀 죄송하긴 하지만 윤기 선배더러 전해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윤기 선배가 내 전화를 받지 않았고, 수업에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민망함을 무릅쓰고 저번에 한 번 말을 텄던 이후로 인사 정도는 하고 지내는 후배에게 윤기 선배의 행방을 물었더니 , 윤기 선배 요즘 종총 준비한다고 바쁘셔가지고. 지금 아마 과방에 계실 거예요.’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종총? 갑자기 웬 종총. 윤기 선배는 학생회 아닐 텐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맙다고 말한 후 지금, 경영학과 과방 앞에 서 있는 거였다.

 

…….”

 

진짜 오랜만이네. 1학년 때는 매일같이 드나들었었는데. 한 때는 익숙했던, 문 앞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경영학과 팻말이 낯설었다. 1학년 때 휴학한 이후로,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칠까 싶어 근처에도 가지 않았었는데. 결국 전정국 때문에 오게 되네. 이 상황이 우스워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 태형아.”

…….”

 

심호흡을 하고, 마악 문을 두드리려던 그 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익숙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박주연. 내 동기였다. 역시나 1학년 때 이후로 마주친 적 없는. 주연이가 당황한 듯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나는 한 박자 늦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 ……. 너는?”

 

그 침묵을 깨고, 주연이가 먼저 말을 걸었고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나야 뭐, 똑같지. 주연이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웃어 보였다. 하하. 그 말을 끝으로 또 어색한 침묵. 잠시 할 말을 찾는 듯 눈을 굴리던 주연이가 입을 열었다.

 

과방 들어가게? 비밀번호 알려줄까? 이미 아나?”

, 아니. 안에 윤기 선배 있어?”

 

주연이의 말에 그제야 내가 과방에 온 이유가 떠올랐다. 나는 할 말이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내 손에 쥐여진 프린트를 흔들었다. 지윤이가 윤기 선배 과방에 있을 거라고 그러던데. 그러나 내 말에 주연이는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윤기 선배 지금 여기 없어. 아마 종총 장소 예약하러 갔을 걸.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윤기 선배가 종총을 예약하러 가? 선배 학생회 아니지 않아?

 

, 원래 정국이가 해야 하는데 걔가 지금,”

……?”

, 진짜 태형이 너 정국이랑 친하지!?”

 

내 질문에 대답하던 주연이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반색을 한다. 나는 어? 하고 반문했지만 주연이의 눈빛은 이미 반짝반짝해져 있었다. 잘 됐다! 나는 주연이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 뭐가 잘 돼?

 

이거 좀 정국이한테 전해 주라.”

??”

아니, 너도 이미 알겠지만 걔가 지금 몸살감기라 집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거든. 근데 걔가 2학년 학회장이잖아. 걔가 영수증 확인하고 싸인해야 되는데.”

 

그래서 직접 갖다 줘야 되는데, 지금 교수님이 나 부르셔가지고. 말을 이으며, 주연이가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오랜만에 봐 놓고 이런 부탁해서 미안한데, 나 한 번만 도와주라. 주연이의 간절해 보이는 표정에 나는 당황해 뒷걸음질 쳤다. , 아니, 나 지금…….

 

, 혹시 바쁜가?”

…….”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괜히 부탁해서 미안. 정국이한텐 내일 가지 뭐.”

 

주연이가 어색하게 웃는다. 나는 멍청하게 아, 하고 주연이를 쳐다봤다. ‘걔가 지금 몸살감기라 집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거든.’ 주연이의 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몸살감기? 전정국이? 그래서 수업에 안 나왔던 건가? 나는 멍하니 멈춰 서 허공을 쳐다봤다. 주연이가 그런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어. 나중에 또 보자, 하고 인사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주연이가 발걸음을 옮긴다. 나는 입술을 깨문다. 그리고,

 

내가 전해줄게.”

?”

정국이 집 주소 뭔데?”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

 

…….”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거지. 나는 멍하니 굳게 닫힌 문을 쳐다봤다. 긴장감에 심장이 두근거리고, 저절로 손이 쥐어졌다. 이 안에 지금 전정국이 있다. 나는 천천히 손을 올려 심장에 갖다 댔다. 진정이 되질 않았다. 왜 이렇게 심장이 뛰지.

 

…….”

 

여전히 심장은 두근거리고, 손은 살짝 떨리고. 나는 숨을 들이쉬고, 눈을 꼭 감은 채 문을 두드렸다. 지어진 지 오래 된 낡은 아파트에는 인터폰이 없었다. 다행이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인터폰으로 전정국이 밖에 서 있는 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면 나는 전정국이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도망쳤을지도 모르니까.

 

…….”

 

그러나 굳게 닫힌 문은 미동도 없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뭐지? 집에 있을 거라고 그랬는데. 나는 다시 한 번 주연이가 카톡으로 보내준 주소를 확인했다. 여기 맞는데.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이내 살짝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굳게 닫혀 있던 것이 무색하게, 문은 쉽게 열렸다. 뭐야. 얘 문도 안 잠가 놓고 사나. 나는 얼떨떨하게 한 걸음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심장은 여전히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신발을 벗었다. 집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고, 전정국의 몸에서 나던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편안하고, 기분 좋은 향. 전정국 자취방은 맞는 거 같은데.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한 걸음 더 방 안으로 들어섰다.

 

…….”

 

. 나는 조그맣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찾을 것도 없이, 현관에서 들어와 조금 몸을 틀자 곧바로 전정국이 시야 안에 들어왔다.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현실감이 없었다. 나는 홀린 듯 천천히 전정국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

 

더 빨리 뛸 수는 없을 것 같았는데, 심장이 아까보다도 빨리 뛰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누워 잠들어 있는 전정국을 쳐다봤다. 감기몸살이라더니, 꽤 많이 아팠던 듯 조금 야윈 얼굴에는 식은땀이 살짝 맺혀 있었다. 잠든 전정국이 조금 불규칙하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색색거리는 전정국의 숨소리만이 방 안에 가득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전정국의 이마에 손을 갖다 댔다.

 

윤기 선배?”

 

전정국의 머리카락이 내 손 안에서 부드럽게 흐트러졌다. 여태까지 밖에 있다 온 터라 내 손은 꽤 차가웠는데, 그런 내 손에도 전정국의 이마는 뜨끈뜨끈했다. 일주일 내내 아팠던 건가. 근데 왜 아직도 이렇게 열이 남아 있어. 가만히 손을 올리고 있었더니 그런 내 기척에 잠이 깬 듯, 전정국이 몸을 뒤척였다. 그러고는 눈도 뜨지 못하고 윤기 선배냐 묻는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전정국을 쳐다봤다. 내가 대답이 없자 전정국이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

…….”

꿈인가…….”

 

한동안 나를 멍하니 쳐다보더니,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로 전정국이 조용히 중얼거린다. 나는 그때까지도 숨도 쉬지 못하고 말없이 전정국을 쳐다보고 있었다. 전정국은 멍하니 나를 보다가, 눈을 깜박이고, 살짝 고개를 돌리고 얕게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는다. 나는 그제야 하, 하고 숨을 뱉었다. 잠에서 깬 거 같긴 한데, 전정국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잠깐 전정국을 쳐다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꿈 아니거든.”

태형 선배?!”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전정국이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평소에도 크다고 생각했던 눈인데, 지금 전정국의 눈은 내가 여태까지 본 것 중에 가장 커져 있었다. , , 태형 선배, 여긴 어떻게……. 여전히 놀란 눈으로, 전정국이 말을 더듬는다. 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전정국은 나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제 얼굴에 손을 갖다 댔다가 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더니 침대에서 일어서려 했다. 나는 그런 전정국을 제지했다.

 

그냥 있어.”

, 아니, 태형 선배. 여긴 어떻게, 아니…….”

 

전정국이 당황한다. 잔뜩 잠긴 전정국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걸 자기 자신도 느꼈는지 전정국은 큼, 하고 목을 가다듬는다. 선배가 올 줄 몰랐청소도 못 했는데. 아니, 이게 아니고. 당황한 전정국의 말이 뚝뚝 끊긴다. 나는 전정국의 말에 전정국의 자취방을 눈으로 훑었다. 깨끗한데.

 

내 방보다 깨끗하니까 괜찮아.”

선배한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단 말이에요…….”

 

전정국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전정국은 아직 어딘가 멍해 보였다. 나는 그런 전정국이 귀여워 피식 웃었다. 그러나 전정국은 그런 내 표정을 보지 못 한 모양인지, 여전히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전정국은 지금 머릿속이 새하얘진 듯했다. 내가 그냥 있으라니까 어정쩡하게 앉아 있긴 하지만, 계속해서 방을 살피고 제 몸을 가다듬는다. 나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전정국은 나를 쳐다본다.

 

이거 전해 주러 왔어.”

…….”

시험 범위에 들어간대. 그리고 이건 주연이가 전해달라고 해서.”

 

나는 차분히 가방에서 전정국에게 전해 줘야 할 것들을 꺼냈다. 전정국이 멍하니 내가 건네는 종이들을 받아들며 나와 종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정국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 사실에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목소리가 떨려 나온 거 같은데. 전정국이 눈치 챘을까? 나는 슬쩍 전정국의 눈치를 봤다. 그러나 전정국은 여전히 넋이 나간 듯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 그러니까…….

 

몸조리 잘 하고.”

…….”

그럼 나는 이만 가 볼,”

태형 선배.”

?”

 

전해줄 것도 다 전해 줬고. 할 말도 없고. 나는 눈치를 보다 슬쩍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여기 있을 명분이 없으니까. 여전히 침대에 앉아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는 전정국을 보며, 자연스러운 인사말을 건네고.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잔뜩 가라앉은 전정국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전정국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

…….”

싫어하지 않으면 안 돼요?”

 

숨이 멎었다. 나는 전정국을 쳐다봤다. 전정국의 눈이 날 향하고 있었다. 심장이 귀에 달린 것처럼 심장 박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런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전정국이 천천히 말을 잇는다.

 

선배한테 진짜 미안하고, 내가 너무 한심하고. 그래도 선배한테 사과해야 하는데, 그런데 선배가 저 보기 싫을 것 같아서. 그래서 선배 앞에 안 나타나려고 했는데. 내가 선배라도 내가 미울 거 같아서. 그런데 못 보니까 죽을 거 같아서…….”

 

낮은 목소리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길 반복한다. 전정국이 고개를 떨어트린다. 전정국의 목소리가 떨려 나오고 있었다.

 

누워 있는 내내 선배 생각밖에 안 났어요. 선배가 나 미워할 거 아는데, 싫어할 거 아는데. 그래서 계속 선배 생각 안 하려고, 이제 선배 눈에 안 띄려고. 선배한테 더 이상 부담 주기 싫어서. 포기하려고 계속 노력했는데,”

…….”

그게 안 돼요…….”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전정국이 고개 숙인 이불 위로, 물방울이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지금…….

 

아무것도 안 바랄게요. 그냥 선배 옆에만 있을게요. 저 지금도 너무 무서운데, 선배 못 볼까 봐. 선배가 나 싫어할까 봐. 이게 마지막일까 봐 진짜 너무 무서워서 숨이 막히는데,”

…….”

선배가 너무 좋아요…….”

 

전정국이 고개를 든다. 전정국의 시선과, 내 시선이 맞닿는다. 나는 숨을 삼켰다. 전정국의 눈이 느리게 깜박여진다. 전정국이 운다. 내 앞에서. 아파서 잔뜩 잠긴 목소리를 하고.

 

처음 본 순간부터,”

…….”

친구로, 선배로. 그렇게만 본 적 없어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갖고 싶다는 생각밖에 못 했어요. 이것도 미안해요, 선배. 그런데 지금 제가 하는 말들, 다 진심이에요…….”

 

두서없이 이어지는 전정국의 고백에도 한 가지 확실하게, 아니 확실하다 못해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것은 있었다. 내 눈 앞에 있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 전정국이, 나를, 김태형을 좋아한다는 것.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내가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아무 말 없이 그런 전정국을 지켜보고 있는 것뿐이었다. 아무 생각도 안 들었으니까. 머릿속이 새하얬다.

 

선배,”

…….”

나 싫어하지 마요…….”

 

전정국이 나를 올려다본다. 눈에는 잔뜩 눈물방울을 달고서. 현실감이 없었다.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내가 아닐까.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여태까지 뭘 한 걸까. 전정국이 운다. 자길 미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나는 여태까지 전정국한테 무슨 짓을 한 걸까.

 

미안해요, 선배.”

…….”

그런데 선배를 안 좋아하는 게 안 돼요…….”

 

말을 마치고, 전정국이 다시 고개를 숙인다. 숨이 가쁜 듯, 불규칙하게 숨을 몰아쉬면서. 나는 멍하니 그런 전정국을 내려다봤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나 같은 게 뭐가 좋다고.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착각하고 있는 건, 전정국이 아니었다.

 

…….”

 

나였다.

 

선배?”

 

아니, 착각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알고 있으면서 그랬다. 전정국은 날 좋아한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 전정국을 밀어냈다. 무서워서. 내가 받게 될 상처가 무서워서. 내가 상처받기 싫어서, 전정국한테 상처를 줬다. 넌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부정하고 무시하면서. 숨이 들썩였다. 눈가가 시렸다.

 

울어요?”

…….”

 

꾹 참고, 무시하고, 눌러 숨겨왔던 것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전정국의 눈이 놀람으로 커진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가가 시렸다. 눈물이 내 볼을 타고 계속 흘러내렸다. 나는 소리 내어 엉엉 운다. 전정국이 당황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여태까지 뭘 한 걸까, 나는.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 선배. 미안해요. 울지 마요…….”

…….”

 

흐어어엉. 이제 나는 아예 목을 놓아 울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상처받은 건 전정국인데. 뭐가 그렇게 무서웠을까, 나는. 영원하지 않으면 어때서. 상처 좀 받으면 어때서. 날 이렇게나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는데. 날 좋아한다고, 이렇게나 많이 얘기해 주는 사람이 있는데. 전정국이 당황해 나에게 다가온다.

 

태형 선배…….”

 

서투르게 나를 안는 온기. 내 등을 토닥이는 손. 따뜻한 체온. 불규칙한 심박. 익숙한 향기. 그리고 다정한 목소리.

 

미안해…….”

? 선배가 뭐가 미안해요. 제가,”

정국아.”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울어서 엉망이 된 호흡에 숨이 불규칙하게 튀어나왔다. 여전히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해야 할 말이 있었다. 해줘야 할 말이 있었다. 내 목소리에 나를 안고 달래던 전정국이 살짝 몸을 떼어내 나를 쳐다본다. 눈물 때문에 번져 흐릿한 눈가에 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뜬다. 전정국이 조금 더 또렷하게 보였다. 전정국의 눈동자가 가까웠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래, 인정하자. 사람들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준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그토록 밀어내고 부정하고 무시해도 나를 올곧이 바라보며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이 사람을. 어느새 정신 차려 보니 내 모든 것을 쥐고 흔들고 가득 채운 이 사람을.

 

너 좋아해.”



나는 전정국을 좋아한다.

 



+

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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