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

 

숨을 크게 들이쉬고 강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예상했던 대로 기묘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 감각이 너무나도 익숙해서, 나는 입술을 물었다. 그 때와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나를 가까이 아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나를 향해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나는 천천히 걸어가 늘 앉던 강의실 끄트머리에 앉았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을 하고 있지만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저번 학기에 이어 이번 학기에도 2학년 전공 필수 2개와 교양 하나(내가 신청한 것을 전정국이 따라 신청했다)가 전정국과 겹쳤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금 이 수업은 전정국과는 겹치지 않는 전공 수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총에서 있었던 일은 화제인 모양인지 주위에서 나를 힐끔대는 것이 느껴졌지만.

 

오기 싫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상황이었으니까 오기 싫었는데, 휴학하고 복학한 지 한학기만에 다시 휴학을 할 수는 없었고, 휴학을 할 수 있다 해도 이 소문이 다시 수그러들 때까지 휴학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일이었고,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그냥 온 거였다.

 

그 날 그렇게 개총이 파한 이후, 나는 주말 내내 전정국에게서 오는 연락을 싸그리 무시했다. 전화는 받지 않았고, 카톡은 미리보기로 뜨는 것조차 읽지 않았다. 종국에는 아예 핸드폰을 꺼 버렸다. 어차피 연락 올 사람도 없고.

 

처음에는 화가 났다. 내 좆같은 과거를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든 모르든 안 그래도 아직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 과 안에서 조용히 살고 싶었던 나를 비슷한 상황에 빠트린 전정국이 미웠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한 건지도 이해가 안 됐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고 화가 가라앉고 나자 신기했다. 물론 내가 강선우처럼 쓰레기 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애초에 고백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은 건 전정국이었으니 그럴 수도 없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고백하고 끝난 사이에 나한테 계속해서 연락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니. 역시 대단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랑은 별개로 나는 이제 내가 곧 마주해야 할 상황들이 충분히 좆같았으므로 이 상황을 어떻게 또 견뎌내야 할지를 생각해야 했다. 유경험자니까 그때보단 좀 나으려나. 허탈해서 웃음이 나왔다. 조용히 살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또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그것도 똑같이 과 내 최고 유명인사와.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강선우와의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러고 나니 자연히 지금 내 상황과 그때의 상황이 겹쳐 보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번에 고백 받은 것은 나고, 고백한 것은 전정국이라는 거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때 강선우에게 피해가 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은근히 추켜세워져 졌으면 추켜세워져 졌지. 그럼 이번에도 그럴까? 전정국은 게이새끼로 낙인찍히고 나는그런데 문제는 나도 게이라는 거지. 그리고 그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고. 몰랐대도 이제는 다들 알게 됐을 테니까. 그 때의 소문을 아는 내 동기들에 의해.

 

…….”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될 대로 돼라였다.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아웃사이더가 되고 싶었고, 이제 와서 학교생활에 미련도 없었다. 전정국이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걔가 저지른 거니 책임도 알아서 지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는 차분히 잠에 들었다. 핸드폰은 여전히 꺼 둔 채로. 그리고 학교에 왔다. 연락 올 사람이 없다는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는데, 핸드폰을 꺼도 일상생활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렇게 나를 힐끔대는 사람들을 무시하며 수업을 듣고, 다음 수업으로 가기 위해 강의실을 나서려는데 누군가가 나를 붙잡아 오는 것이 느껴졌다. 전정국이었다. 놀라울 건 없어서, 나는 무심히 전정국의 얼굴을 쳐다보고, 시선을 내려 전정국에게 잡힌 내 손을 쳐다봤다. . 아파. 내 무미건조한 말에 가뜩이나 불안으로 가득했던 전정국의 눈이 꼭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변했다. 비에 맞은 강아지 같았다. 토끼나.

 

선배…….”

…….”

잠깐 얘기 좀 해요.”

 

얘기. 해야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한숨을 부정적으로 해석한 건지 내 앞의 전정국이 안절부절 못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말고, 좀 조용한 데로 가자.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전정국은 가만히 있어도 시선을 끄는 사람인데, 불과 3일 전에 있었던 가십 때문에 현재 경영대 내 가장 핫한 인물일 나와 전정국의 투샷에 복도의 모든 시선이 나와 전정국에게 꽂힌 탓이었다.

 

*

 

선배, 미안해요. 진짜 그 때 거기서 고백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럼 언젠가 고백을 하려고는 했었다는 거네.”

선배를 좋아하는 건 진심이에요…….”

 

조용한 곳을 찾고 찾다 결국 온 곳이 건물 뒤 으슥한 곳이었다. 그 때까지 아무 말이 없던 전정국은 내가 담벼락에 기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하자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꺼낸 말이 저거다. ‘거기서 고백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선배를 좋아하는 건 진심이에요.’. 그 와중에도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전정국의 순수함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생각보다도 더 대단한 놈이었다.

 

선배가 너무 좋아서, 그런데 선배는 나한테 관심도 없는 거 같고. 그런데 지윤이가 선배가 좋다고 해서, 속상해서그런데 선배는 제 연락 하나도 안 받고,”

 

전정국의 말이 두서없이 이어졌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윤이는 또 누구고, 얘는 왜 여기서 제 마음을 고백하고 있는 걸까. 할 말이 있다는 게 이거였나. 나는 전정국의 말을 잘랐다. 하고 싶다는 말이 그거야? 내 무뚝뚝한 말에 전정국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축 처진 귀와 꼬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선배 곤란하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정말 진심이에요. 제가 그러면 안 됐는데,”

…….”

그치만 선배를 좋아한다고 했던 건 진심이에요. 지금 당장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술 취해서 마음에도 없는 얘기를 한 건 아니,”

정국아.”

 

나는 전정국의 말을 끊고 전정국을 쳐다봤다. 전정국의 커다란 눈이 나를 향했다.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전정국이 어려 보였다. 순간적인 착각을 진심과 혼동하는 게 틀림없었으니까. 그냥, 전정국은 누군가에게 이렇게 매달려 본 적이 처음이었던 거다. 자기를 싫어하는 것 같은 사람이 신기해서 다가왔다가, 그 사람이 천천히 마음을 열어 가는 게 기분 좋았겠지. 그래서 그 기분 좋은 감정을 좋아하는 감정이랑 착각한 거다. 어젯밤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난 네 말 안 믿어.”

…….”

너 그냥 착각하는 거야.”

 

호기심, 단순한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호감, 신기함. 그런 것들이랑. 나는 가볍게 얼굴을 쓸었다. 입 안이 썼다. 내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전정국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선배 혹시 화났어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안 났어. 화가 났었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아니었으니까. 그 말에 전정국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 눈을 맞추며 나를 불렀다. 태형 선배. 마주친 전정국의 눈은 내가 전정국을 마주했던 그 어느 때보다도 가라앉아 있었다. 그 생소함에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저 제 감정도 모를 정도로 바보 아니에요.”

…….”

어떻게 하면 믿어 줄 건데요?”

…….”

남준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저랑 선배랑 무슨 사이냐고.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선배랑 저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냥 그랬어요. 나 혼자 선배 좋아하는 거라고.”

 

. 나는 전정국의 대담함에 입을 벌렸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니. 그것도 술 취해서 그냥 헛소리한 거라고 넘길 수 있었던 걸, 다시 한 번 못을 박았다니. 그러나 나의 그런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정국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선배하고 얘기 한 후에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선배가 전화를 안 받아서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말했어요. 선배한테 피해 안 가게 하려면 그게 제일 나을 것 같아서. 사실이기도 하고.”

…….”

제가 부담스러우면, 그냥저 무시하시면 돼요. 그럼 소문 같은 건 금방 없어질 거예요. 제가 일방적으로 선배 좋아한 거고, 선배는 아무 잘못 없으니까. 제가 책임질게요.”

 

글쎄. 그런 걸로 소문이 쉽게 없어질 것 같진 않은데. 더더군다나 그 전정국이 날 좋아하는 거면. 그러나 나는 굳이 이 말을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다. 말해봐야 전정국의 죄책감만 커질 테니까. 이미 내 안에선 정리가 끝난 상황이었고,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전정국은 여전히 날 쳐다보고 있었다. 할 말 다 끝났으면 갈게. 내 말에 전정국이 입이 조그맣게 벌어졌다가, 닫혔다가, 다시 벌어졌다. 무언가 할 말이 남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할 말 있으면 해. 하고 말했다. 피곤했다. 이미 이번 수업은 늦어버린 것 같으니 어딘가로 가서 한숨 잘 생각이었다. 밥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 말에, 잠시 머뭇대던 전정국이 입을 열었다. 선배,

 

다 괜찮은데, 제가 잘못한 거니까 감당할 수 있는데.”

…….”

선배가, 제가 한 고백이 착각이라고 생각하는 건 싫어요.”

.”

저 진짜 선배 좋아해요.”

너 진짜

 

대단하다. 나는 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 반응에 전정국은 미간을 좁혔다. 나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꼭 어린아이가 칭얼대는 것 같잖아. 나는 찬찬히 전정국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기분 탓인진 몰라도 그 사이에 전정국의 얼굴이 조금 핼쑥해진 것도 같았다. 내 시선에 전정국은 입술을 깨문다. 전정국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제 마음을 착각이라고 말해서, 억울해 하고 있을까? 아니면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고 있을까.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살았을 거고, 일생을 살아오면서 대부분의 일들은 제 뜻대로 되어 왔을 전정국이 지금 이렇게 애타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문득 전정국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어쩌다가 나 같은 애랑 엮여서.

 

나 좋아한다는 소문 나 봐야 너한테 좋을 거 없어.”

왜요?”

 

몰라서 묻냐? 나는 눈으로 그렇게 물었다. 내 눈빛의 의미를 알아챈 듯, 전정국의 잘생긴 미간이 조금 더 좁혀졌다.

 

전 제가 선배 좋아한다는 거, 전교생이 다 알아도 상관없어요.”

…….”

사실인데 뭐.”

쓸데없는 오기 부리지 마.”

 

나는 건조하게 내뱉었다. 전정국은 어리다. 그리고 아직 뭘 모른다. 이런 간단한 대화에서도 전정국이 그동안 빛, 그것도 아주 밝은 빛 아래에서만 살아왔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전정국은 여전히 날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더 말할 수 있을까. 어차피 지금 전정국에겐 들리지도 않을 텐데. 내가 전정국의 눈을 피하자 전정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기 아니에요. 그럼, 믿어 줄 거예요?”

?”

내가 선배 좋아한다는 거, 온 전교생이 다 알게 돼도 내가 후회하지 않으면, 믿어 줄 거냐고요.”

…….”

제가 선배 좋아하는 거.”

 

쟤는 왜 저렇게 저거에 집착할까. 내가 괜찮다는데, 왜 제가 나서서 제 인생을 꼬려고 드는 거냔 말이다. 나는 다시 전정국을 쳐다봤다. 평소와는 다르게 가라앉아 있는 전정국의 눈빛은 단호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저한테는 중요해요.”

네 맘대로 해.”

 

이미 한 번 게이라고 소문났던 거, 두 번 난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전정국이 김남준에게 다시 한 번 못을 박은 만큼, 전정국이 나를 좋아한다는 소문은 어차피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고 전정국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내가 인정하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 것처럼, 자꾸 아니라고, 아니라고 하면 오기로라도 더 좋아한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그냥 그렇게 말했다. 전정국같은 애가, 순간적인 감정에 더 이상의 감정 소모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정말로, 내가 바란 것은 단지 그뿐이었다.

 

*

 

선배!”

 

그러나, 그 때의 나는 잠시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전정국이 생각보다도 더 대단하고, 대담한 놈이라는 것을. 나는 강의실 문 앞에 멍하니 서서 내가 늘 앉던 자리 옆자리에 앉아 나를 부르며 해맑게 웃는 전정국을 쳐다봤다. 자연히 강의실 안 시선이 나에게 모아졌다. 나는 얼떨떨하게 한 손을 올려 그런 전정국에게 응답했다. ,

 

어디 가요, 선배. 맨날 여기 앉았잖아요.”

 

그러고는 늘 앉았던 그 자리를 피해 다른 쪽 구석으로 가 앉으려는데, 그런 나에게 전정국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자리에 앉다 말고 전정국을 얼떨떨하게 올려다봤다. 교양에서야 상대적으로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수강 정정 전부터 내 옆자리를 꿰찬 전정국 때문에 어쩌다 보니 매일같이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들었다지만, 전공에서는 전정국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후배들과 동기들이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넘쳐났으므로 학기 초, 내가 강의실에 들어서기 전부터 전정국의 근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수업 직전에 들어와 수업이 끝난 직후에 바로 나가기 편한 문 근처 맨 뒷자리에 앉았고 전정국은 맨 앞쪽 가운데에 앉다 보니 자연히 교양에서 같이 앉아 수업을 듣고, 일주일에 세 번 이상 같이 밥을 먹어도 전공 강의실에서는 친한 티를 낼 일이 별로 없었는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붙어 다니다 보니 학기 말에는 나에게서 전정국을 찾는 사람이 꽤 있었지만), 지금 전정국의 행동은 그런 불문율을 깨는 것이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대충 그런 뜻을 담아 전정국을 올려다봤지만 전정국은 그런 내 눈빛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여전히 생글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여기가 좋으면 여기에 앉을까요?”

…….”

잠시만요, 가방 가지고 올게요.”

, 아니.”

 

나는 나와 전정국에게 모아진 강의실 안의 시선을 느끼며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당황스럽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내 눈빛에 전정국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그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문득 어제 전정국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내가 선배 좋아한다는 거, 전교생이 다 알아도 제가 후회하지 않으면 믿어 줄 거예요?’. 그러니까, 전교생이 다 알아도가 정말말 뜻 그대로의 의미였던 건가. 나는 갑자기 등 뒤로 끼치는 한기에 잘게 몸을 떨었다.

 

뭐야, 전정국. 둘이 사귀기로 한 거야?”

아뇨, 그냥 저 혼자 좋아하는 건데요.”

와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렇게 어정쩡한 상태로 멈춰 있는데, 선배 하나가 들어오면서 무심하게 던진 말에 전정국은 더 이상 간단할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대답한다. 그 대답에 선배는 역시나 담백하게 와우,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고. 저 선배는 나도 아는 선배였다. 민윤기. 강선우와의 일로 과 전체가 들썩거렸을 당시 2학년 학회장이었는데, 모두가 나에게 집중하며 힐끗거릴 때 유일하게 무심했던 선배였다. 딱히 나를 배려해서라기보다는 그냥 본인이 세상일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았지만 그 때의 나에게는 꽤 위안이 되었던 존재였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민윤기 선배를 쳐다보고 있자니 윤기 선배가 그런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나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갑자기 마주친 시선이 나는 아, 하고 멍청한 소리나 냈고.

 

태형이 오랜만이네.”

러게요. 선배 잘 지내셨어요?”

나야 뭐, 인턴이다 뭐다 정신없었지. 이 수업 들어?”

.”

자주 보겠네. 나 졸업하기 전에 밥이나 한 번 먹자.”

!”

 

오랜만이라는 인사에 그러게요, 하고만 대답하고 말기에는 어색해 잘 지내셨냐고 안부를 물었는데, 생각보다도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그 때. 그러니까 그 사건이 있었을 때 학교를 다니고 있던 사람하고는 처음 마주치는 거였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대하는 윤기 선배의 태도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윤기 선배가 픽 웃고는 나를 지나쳐 자리에 가 앉았다. 물론 그 때의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아니 오히려 윤기 선배가 소수인 거겠지만, 그래도 그 때의 나를 알고 있는 사람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대화할 수 있구나 싶어 기분이 조금, 괜찮아졌다.

 

선배.”

, ?”

가방 가져올게요.”

 

과거의 감상에 빠져 그렇게 멍하니 윤기 선배를 눈으로 좇고 있었는데, 옆에서 전정국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정국을 돌아보니 조금 굳은 얼굴로 나에게 말하고는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까까지만 해도 생글생글 웃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표정이 굳었지? 멍하니 생각하다가 이내 혹시, 하는 생각에까지 닿는다. 혹시 내가 민윤기 선배 조금 쳐다보고 있었다고 질투하는 건가? 설마?

 

선배.”

?”

 

내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가방을 가져와 내 옆에 자리 잡은 전정국이 잠시 머뭇대다가 말을 꺼낸다. 왜 갑자기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거지. 나는 자꾸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전정국의 질투에 대한 것을 잊어버리려 애썼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 그러니까, 이런 거 가지고 질투하는 거면 진짜진짜 날 좋아하는 거 같잖아. 나는 어정쩡하게 전정국을 쳐다본다. 전정국은 그런 나와 눈을 맞추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이내 입을 연다.

 

제 고백 거절한 이유가 혹시,”

…….”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어서 그런 건…….”

…….”

 

전정국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 전정국 대박.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쓸데없이 진지한 얼굴인 이유가,

 

아니죠?”

 

질투맞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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