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형 선배.”

 

그 날, 전정국은 꽤 많이 취해 있었다. 원체 주량이 세기도 한데다가 술을 그렇게까지 취할 정도로 마시는 애가 아니었는데, 그날따라 내 앞에 앉은 전정국은 무언가 고민거리가 있는 듯 연거푸 술을 들이켰었다. 나는 그런 전정국에 맞춰 주다가, 말리다가, 결국엔 포기하고 전정국이 술잔을 들 때마다 물과 술을 번갈아 가며 마시고 있었고.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평소의 전정국 같았으면 내가 굳이 말을 시키지 않아도 혼자서 조잘조잘 떠들어 댔을 텐데, 그 날 전정국은 나에게 말을 시키지 않았다. 왜 그러냐고,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겨우 한 학기 동안 말 몇 번 튼 것 가지고 친한 척 오지랖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질까 싶어 관뒀었고. 그래서 나는 그냥 술잔을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면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싶어서. 그래서 문득, 술을 마시다 말고 고개를 들어 나의 눈을 마주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전정국에, 나는 반가움까지 느꼈었다. 이제 왜 그렇게 오늘따라 이상하게 굴었던 건지 이야기를 해 주려나 싶어서. 그런데,

 

저 선배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니, 좋아해요.”

 

한순간이었다. 전정국이 잔뜩 취기가 오른 빨간 얼굴로, 그러나 표정은 한없이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 그 누구도 아닌 제 앞에 앉은 나, 김태형을 똑바로 쳐다보며 뱉은 문장에 온갖 소리들로 시끄럽던 술집 안의 소음이 한 순간에 멎었다. 나는 마시려던 술잔을 채 내려놓지도 못 한 채 그대로 굳었고, 내 눈앞의 전정국은 그 말을 했으니 이제 여한이 없다는 듯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숨 막히는 정적 속 술집 안의 모든 시선이 나를 향했다가, 전정국을 향했다가, 다시 나를 향했다.

 

얘 방금 뭐라고 한 거…….”

 

꽤 오랜 침묵을 뚫고, 3학년 회장 김남준이 입을 열었다.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내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대학 생활이, 다시 한 번 지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오해와 연애

 

내 대학 생활은 시작부터가 꼬여 있었다. 나는 쓸데없이 어린 나이부터 나의 성적 지향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 인간이었고, 그에 따라 방황도 좀 하고, 탈선과 일탈도 좀 했어야 했던 나의 청소년기는 내 특별한 성적 지향성에 대한 고민만으로도 벅차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고뇌와 번민을 하는 것으로만 채워졌다. 여자친구도, 그렇다고 남자친구도 사귈 수 없었던 나는 19년을 그대로 솔로로 지냈고 남들이 연애도 하고, 질풍노도의 시기도 보내는 그 시간들 동안 딱히 이렇다 할 취미 없이 공부만 하며 보냈다. 그렇게 재미없게 살았으니 소위 명문대라 불리는 대학교로부터 무리 없이 합격 통보를 받아낼 수 있었고, 대학 합격이 확정되고 난 후 나는 농담으로라도 친하다고는 하지 못할 내 고등학교 친구들 중 그나마 유일하게 친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박지민과 (시큰둥하게 반응해도 유일하게 나에게 계속 살갑게 말을 붙여 주는 배알 좋은 놈이었는데, 이런 박지민과도 과는 다르지만 같은 학교에 합격하게 되지 않았다면 아마 연락이 끊어졌을 것이다) 처음으로 내 민증을 보여주고 산 맥주를 마시며 결심했다. 대학 생활은, 내 하나밖에 없는 대학 생활은 이렇게 시시하게 보내지 않겠노라고. 연애도 해 볼 것이며, 그 누구보다도 지루하지 않게 보내겠다고.


그래서 나는 노력했다. 과에서 주최하는 모든 행사에 참여했고, 학생회 같은 건 하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내 존재를 과에 어필했다. 그 즈음 나는 내 성적 지향성에 대해 확고한 결론을 내린 상태였고, 연애도 꼭 해 보겠다는 내 목표에 따라 자연히 호감이 가는 사람도 찾게 되었다. 그 때 만난 게 걔였다. 강선우.


강선우는 입학과 동시에 소소하게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큰 키에 잘생긴 얼굴. 집안도 좀 사는 것 같았고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덕분에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인기를 끌었고 자연스레 1학년 학회장을 맡게 되었다. 과에 열심히 참가하려고 했던 나와도 자연스럽게 많이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친해졌다. 친구라고는 박지민밖에 없었던 내게 강선우는 뭐든지 처음이었고, 강선우는 그런 나를 신기해하며 잘 챙겨줬다. 나는 내 성적 지향성에 따라 자연히 미팅 같은 건 나가지 않았고 그건 강선우도 마찬가지였다. 나야 게이라서 그렇다지만, 걘 왜? 그래서 나는, 걔도 혹시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선우는 여자동기 및 선배들에게 인기가 폭발적으로 많았음에도 그 누구와도 사귀지 않았다. 오히려 나와 있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이런 상황에서, 걔를 좋아하는 내가 착각하지 않고 버티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신중했던 나는 1학기 내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결론을 내렸다. 강선우도 게이이고,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온 이후 첫 기말고사가 일주일 남짓 남은 어느 날, 나는 학교 앞 어딘가의 술집 안에서 조금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로, 강선우에게 고백했다. 너를 좋아한다고. 강선우는 내 말에 눈을 크게 떴고, 나는 그런 강선우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강선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지옥과 천국을 오갔다. 그리고 그 긴 침묵 후에 걔가 뱉은 말은,

 

너 게이야?’

 

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강선우를 쳐다봤다. 강선우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난 깨달았다. 내가 내 상상 속에서 만들었던 강선우와 현실의 강선우는 아예 다른 사람이었음을. 그는 나를 보기 좋은 장식품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옆에 두면 제 급이 올라가는 명품 같은 걸로. 미팅이나 소개팅에 나가지 않았던 것은 그런 곳에 나가지 않음으로서 제 희소가치를 올리려는 의도에서였고 그 누구와도 사귀지 않았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했던 것도, 과내에 저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급의 친구로 날 골랐던 것이었을 뿐이다. 나를 값비싼 명품쯤으로 보던 강선우의 눈빛은 나의 고백 이후에 달라져 있었다. 저보다 아래의 것을 보는 눈빛으로.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 했었나. 그 말이 지금 이 상황에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선우는 나를 그렇게 봤다. 내 고백이, 걔한테는 차라리 더 잘 된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자신보다 아래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것이었으니까.


그 뒤의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 월요일 아침 학교에 간 나는 나를 향해 수군거리는 동기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김태형 게이래.’ ‘선우한테 고백했다가 차였대.’ 낮은 목소리로 조용하게 말한 것이 전혀 소용없을 정도로 똑똑히 내 귓가를 파고든 말들이었다. 강선우는 사실에 허풍을 섞어 동기에게 고민상담 하듯 그 날의 이야기를 흘렸고 소문은 점점 부풀려져 종국에 이야기는 나에게는 관심도 없는 강선우를 내가 한 학기 내내 스토커처럼 쫓아다닌 것처럼 변해 있었다. 해명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강선우는 이런 사회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제 손바닥 위에 놓고 굴릴 줄 아는 인간이었고, 나는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못한 인간이었다. 동기들은 날 슬금슬금 피했고 나는 어떻게 끝났는지 모를 기말고사를 마치고 바로 휴학했다. 끔찍했던 2주였다.


그리고 나는 반수를 시작했다. 부모님에겐 더 좋은 학교를 가고 싶어서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문제집을 푸는 와중에도 강선우와, 날 보던 동기들의 눈빛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악몽을 꾸다가 땀을 흠뻑 흘리며 잠에서 깨는 것은 일상이었다. 결국 그 해 본 수능에서 나는 더 좋은 대학은커녕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에도 못 올 점수를 받았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복학하지 않았다. 대신 군 휴학을 신청했다. 2년이 지나고 나면, 소문이 수그러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군대를 다녀왔고, 복학했다. 다행히도 강선우는 없었다. 얼핏 듣기로는 2학년까지 다 마치고 군대를 간 것 같았다. 당장 마주칠 일은 없을 거라는 게 위로가 됐다. 학교를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마주치겠지만.


1학년도 채 다니지 못하고 도망치듯 휴학계를 냈기 때문에 23살에 나는 아직도 1학년이었다. 동기들은 전부 2,3학년 수업을 듣고 있을 테니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즐거운 대학 생활을 보내겠다는 1학년 때의 다짐은 이미 빛이 바래 구석에 처박힌 지 오래였고 그냥 조용히, 고등학생 때 그랬던 것처럼 학점이나 잘 받으며 무사히 졸업하는 것만이 내 목표가 되었다.


다행히도, 내가 신청한 1학년 수업에 내가 아는 얼굴은 없었고 그 사실에 소소하게 감사하며 강의실 한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참이었다. 멍하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강의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자연스레 고개가 소란스러워진 쪽으로 돌아갔다. 소란의 근원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인영 하나가 강의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주위 여자애들이 하는 정국 선배인가 봐.’ ‘, 그 말로만 듣던?’ 따위의 말들이 내 귓가에 가볍게 안착했다. 아직은 어색한 듯 강의실로 들어오며 인사하는, 흐릿했던 인영이 조금 더 선명하게 잡혔다. 어딜 가도 눈에 띌 만한, 잘 생긴 얼굴. ‘잘 지냈어?’ ‘이 수업 들어?’ 하는, 주위에서 건네는 호의 담긴 안부들에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기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저 익숙한 풍경이 꼭, 예전 1학년 때를 떠올리게 했다. 강선우가 꼭 저랬으니까. 어딜 가도 주목을 받았고, 호의 어린 말들을 받았었으니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우스운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불편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쨌든 나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

 

옆에 앉아도 돼요?”

 

그런데 이렇게 다시 마주칠 줄이야. 수강신청에 실패해 별 생각 없이 시간표에 맞춰 넣었던 교양 시간이었다. 나는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나에게 말을 걸어 온 인영을 올려다봤다. 그 얼굴을 기억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 번 보면 잊기 힘들 정도로 잘 생긴 얼굴이었으니까. 나는 잠시 아니라고 할까, 그러라고 할까 고민하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쳐다본 것 같아서였다. 잘 생긴 얼굴이 씩 웃으며 내 옆자리에 자리를 잡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이어폰을 다시 껴도 될까 잠시 고민했다. 수업이 시작하기까지는 7분 이상이 남아 있던 터라 강의실엔 아직 자리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굳이 이 자리에 앉아야 했을까, 얘는. 이 자리가 마음에 든 거라면 다음부터는 다른 자리에 앉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이어폰을 귀에 구겨 넣었다. 더 이상 말을 걸지 말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러나 그 행동은 옆의 인영이 나를 톡톡 두드리면서 무시당했다. 나는 다시 이어폰을 빼고 옆을 쳐다봤다. 잘 생긴 얼굴이 여전히 나를 보며 살짝 웃고 있었다.

 

경영학과죠?”

…….”

우리 이거 말고도 같은 수업 듣는 거 같은데. 기업과 경영.”

 

모를 리가 없었다. 아까 처음으로 얘를 봤던 수업이었으니까. 전필이니 나를 경영학과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 그것도 맞았다. 그런데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을 걸다니, 얘도 참 친화력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무심하게 반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앞의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살갑게 말을 걸어 왔다.

 

“1학년, 맞죠? 제가 새내기를 잘 몰라서.”

…….”

, 소개가 늦었네. 제 이름은 전정국이에요. 1학년은 맞는데, 나이는 22. 1학년 1학기 마치고 바로 군대 갔다 와서.”

 

1학년은 맞는데, 새내기는 아니라서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반응하지 못하고 있으니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신이 나서 묻지도 않은 제 소개를 한다. 나보다 한 살 어린 걸 보니 나보다 1년 후에 입학한 것 같았다. 말하자면 내가 선밴데, 후배를 챙겨 주려는 선배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그냥 가만히 있었다. 굳이 설명하기도 귀찮았고. 어차피 오늘 보고 말 사람인데. 얘를 보고 있으면 자꾸 강선우가 떠올라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얼굴도, 분위기도. 닮은 구석 하나 없는데, 그냥 잘났다는 게, 과내에서 시선을 끄는 존재라는 사실 때문인 것 같았다. 이쯤 되면 피해의식 아닌가 싶다.

 

이 교양에는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친하게 지내요. 밥 사줄게요.”

괜찮은데.”

, 내가 너무 들이댔나?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아도 돼요. 그냥 과 선배가 후배 밥 사주는 거니까,”

 

전정국이 당황하며 말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나는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다시 앞을 봤다. 수업 내내 전정국이 옆에서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꼭 대형견이 주인 눈치 보는 것처럼. 나 같은 거 별로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얘도 참 인생 피곤하게 산다 싶었다. 이 정도로 싸가지 없게 대했으면 그냥 무시할 법도 한데. 뭐가 아쉬워서. 수업이 끝나고, 나가려고 짐을 챙기는 동안에도 옆에서 안절부절 못 하고 있길래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부담스러운 거 아니라고. 그냥 정말로 괜찮아서 그런 거라고. 그러자 아하고 멍청한 소리를 낸다. 그 후에 뭔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긴 했는데, 그냥 먼저 가볍게 목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어딜 가도 시선을 끄는 사람의 옆에 있어 봤자 피곤해지기만 한다. 주목받는 기분은, 1학년 때 느낀 걸로 충분했다.

 

*

 

태형 선배!”

 

그러나 어쩐 이유에서인지, 전정국은 나를 쉽사리 놓아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정정 기간 동안 교양이든 전공이든 출석하지 않았고 정정기간이 끝난 후에도 전정국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수업 시간이 시작하기 직전에 강의실에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았는데, 전공에서는 그럭저럭 성공하는 듯 보였던 내 전략이 교양에서 전정국이 내가 강의실에 들어섬과 동시에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탓에 산산이 부서져 내렸기 때문이다. 꽤 큰 목소리로 날 부른 탓에 나는 순간적으로 온 강의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고 결국에는 천천히 전정국의 옆자리에 가 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새 호칭까지 변한 후였다. 얘는 웃는 얼굴로 사람 엿 먹이기가 취미인가. 본인은 전혀 악의가 없는 것 같지만.

 

왜 저한테 말 안 했어요. 저 진짜 선배가 새내기인 줄 알고

…….”

그 땐 죄송했어요, 진짜. 제가 밥 살게요.”

 

아니 얘는 밥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나는 역시나 괜찮다는 말로 전정국의 제안을 가볍게 밀어내려 했지만 전정국의 눈빛은 단호했다. 선배, 진짜 죄송해요. 밥 사게 해 주세요. 제가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요. 그 간절함이 깃든 단호함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밥 한 번 먹고 떨어지게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오늘은 얼떨결에 전정국의 옆자리에 앉았지만, 다음부터는 반드시 따로 앉을 거라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선배!”

 

하지만 전정국은 내 생각보다 끈질기고 눈치도 없는 놈이었다. 아무리 늦게,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강의실에 들어와도 전정국은 쉬는 시간 내내 강의실 문만 쳐다보고 있는 건지 내가 들어오는 걸 귀신같이 알아챘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나를 부르며 나를 위해 제 옆자리를 맡아두었음을 어필했다. 이쯤 되니 쟤의 정신세계가 궁금해졌다. 첫 날은 아는 사람이 없어 나에게 아는 척을 했다 해도, 지금은 (전정국이 이 교양을 듣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강 정정 기간에 이 교양을 넣은) 같은 과 여자 동기 및 후배들이 꽤 있는데도 굳이 왜 나를 제 옆자리에 앉히려고 하냐는 거다. 그 여자애들의 부러움과 의아함이 섞인 시선을 받고 있자니 절로 피곤해졌다. 그래서 언젠가는 전정국에게 내 자리 굳이 안 맡아줘도 돼, 하고 말했더니 이 자리 별로예요? 나름 꿀자리 잡으려고 한 건데그럼 선배는 어디가 좋아요?’ 하고 눈치 없이 물어 오는 것이다. 그 순수한 호의를 차마, ‘나 너랑 같이 앉고 싶지 않아.’ 하고 뿌리칠 수가 없었다.

 

선배는 학식이 왜 좋아요?”

 

전정국은 나에게 끝없이 말을 걸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대답해주고. 수업을 핑계로 연락을 주고받고, 같이 과제를 하고 밥을 사주고, 얻어먹고. 그러기를 몇 달,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나와 전정국은 어느새 일주일에 세 번 꼴로 밥을 같이 먹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단언컨대 내가 원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전정국이 배알도 없는 놈이라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난 최대한 무뚝뚝하게 전정국을 대했고 가끔은 내가 생각해도 내가 너무 싸가지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전정국은 그런 나를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그냥 그게 내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건 그런 나를 왜 굳이 제 옆에 두려고 하냐는 거였다. 뭐가 아쉬워서. 가끔 전정국은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요 선배저랑 밥 좀 먹어 줘요.’ 라는 말을 나와 같이 밥을 먹기 위한 이유로 제시했지만 그게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과 동기·후배들도 알고, 하다못해 저기 지나가는 개새끼도 아는 사실이었다. 전정국이 먹자고만 하면, 아니 굳이 먹자고 하지 않아도 전정국과 밥을 같이 먹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과 안팎으로 넘쳐났으니까. 그러나 저기 너랑 밥 먹고 싶어서 며칠째 타이밍만 노리고 있는 쟤랑 먹어.’라고 말할 정도로 오지랖이 넓지 않은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것이다. 한 학기의 절반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자니 이제 과 내에서 나는 전정국과 한 쌍으로 통했다. 걔하고는 고작 수업 두 개밖에 겹치지 않는데 전정국이 아기오리마냥 나를 쫓아다닌 결과였다. 주목을 받지 않고 싶었던 나로서는 아주 거지같은 상황이었고.

 

멀리 나가기 귀찮아.”

그래도 가끔은 밖에 나가서 맛있는 거 먹어요! 제가 살게요.”

다른 애랑 가서 먹어.”

선배랑 먹고 싶으니까 그렇죠~”

 

쟤는 진짜 밸이라는 게 없나? 전정국은 이 정도는 익숙하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볶음밥을 입에 욱여넣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볶음밥을 씹다 말고 전정국을 쳐다봤다. 이쯤 되니 전정국이 대단하게까지 느껴졌다. 이렇게 싸가지 없게 구는 사람에게 저렇게까지 대할 수 있는 전정국의 인성에 박수를 쳐 주고 싶을 정도였다.

 

네 맘대로 해라

? 진짜요? 먹어 줄 거예요? 앗싸. 집에 가서 맛집 검색해야지!”

 

선배가 먹고 감탄할 정도로 맛있는 집으로 알아 올게요! 내 말이 마치 A+을 주겠다는 교수의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뻐하며, 전정국은 제 앞에 놓인 돈가스를 열심히 썰었다. 그런 전정국이 어이없으면서도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쟤는 내가 어디가 저렇게 좋을까. 대단한 정성이다.

 

선배 지금 웃은 거예요?”

…….”

선배 웃는 거 처음 보는 거 같아요

 

짱이다. 사진 찍어도 돼요? 반짝반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하는 말에 나는 다시 표정을 굳혔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거나 먹어. 그 말에 전정국은 다시 시무룩해져 돈가스를 썰었다. 금세 다시 회복하고 조잘대긴 했지만.


그러니까, 전정국은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는 애였다. 주목 받는 것이 익숙하고, 어딜 가나 사랑받는 아이. 좋은 집안, 좋은 학교, 잘생긴 얼굴, 밝은 성격. 그 어느 곳에 가도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겠지. 그러니까 나 같이 배배 꼬인 인간한테도 인정을 베풀 수 있는 거일 거고. 그래서 혹시나 전정국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연애 감정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나에게 이렇게 달라붙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전정국은 누군가가 자기를 정말로 미워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하는 거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학번은 달라도 학년은 같은, 같이 복학한 처지에 과에 어울리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을 수도 있고. 전정국 같은 인간은 누군가가 무리에서 떨어져 있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니까.

 

왜 그렇게 봐요?”

밥 안 먹냐?”

 

그렇게 내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고 나니, 전정국을 대하는 게 훨씬 더 쉬워졌다. 시종일관 얼굴을 굳히고 있어서 그런지, 우려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대로라면 그냥 적당히 전정국과 어울리면서 조용히 학교생활을 해 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걸어 주는 전정국의 마음씀씀이가 기특하기도 했고.

 

선배가 그렇게 절 보고 있는데 어떻게 밥을 먹어요.”

…….”

심장 떨려서.”

 

그래서 나는 이런 전정국의 말들을 전부 농담으로 치부했었다. 전정국은 아쉬울 거 하나 없는, 정도正道의 길만을 걸어왔고, 걸어 갈 사람이었으니까. 배배 꼬인 나와는 다른.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에게 반하는 일 같은 건, 정말로 일어날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듬해 봄 만장일치로 떠맡듯 2학년 학회장을 맡게 된 전정국이, 가지 않겠다는 나를 며칠에 걸쳐 설득해서 오게 만든, 그것도 내가 강선우에게 고백했던 그 술집에서 진행된 1학기 개강총회에서 술에 취해 나에게 고백하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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