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선배, 오늘은 학식 말고 나가서 먹어요.”
“그러든가.”
“태형 선배! 시험 끝나고 뭐 해요? 저랑 같이 영화 봐요.”
“귀찮아.”
“수업 끝나고 저랑 놀아 줘요. 저 버리고 가지 마요…….”
“너 수업 두 개나 남았다며. 싫어.”
“전 저번에 공강에 선배 만나러 나왔었는데!”
“누가 나오래? 네 멋대로 나온 거잖아.”
…이런 식으로, 전정국의 노력은 중간고사가 끝나고, 한 학기의 절반이 지나갈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전정국이 나를 정말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믿지는 않았지만, 전정국의 끈기 하나는 인정해주고 있었고. 이 정도로 시큰둥하게 굴었으면 빈정이 상해서라도 그만둘 법도 한데, 전정국은 처음 나한테 말했던 그 때에 비해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더 정성을 들이고 있으면 들이고 있었지.
가끔은 넌 대체 내 어디가 좋아서 그러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은 결국 항상 시도에서 그쳤다. 그 질문을 하려고 마음먹고 전정국을 쳐다보고 있으면, 나를 마주하고 있는 전정국의 눈이 꼭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착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생각보다는 오래 가는 것 같지만, 그게 전정국이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가와는 별개의 문제였으니까.
“오늘도 붙어 있냐? 지겹지도 않아?”
“네. 완전 좋은데요.”
“너 말고 태형이한테 얘기한 거야. 넌 경밤 준비 안 해?”
“…하고 있어요! 선배 오실 거죠?”
“너 하는 거 봐서.”
그리고, 윤기 선배와는 종종 이렇게 대화(라기에 이번에 내가 한 것이라곤 살짝 눈인사를 한 것뿐이었지만)하는 사이가 되었다. 정작 친해졌어야 했을 1학년 때보다 훨씬 친해진 거였다. 따로 연락을 주고받거나 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마주치면 간단한 안부 정도는 묻는, 어쩌다 같이 밥을 먹어도 어색하지 않을 사이 정도는 됐다. …전정국은 여전히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것에 있어서 전혀 거리낌이 없었고. 윤기 선배가 고생한다는 듯 내 어깨를 톡톡 치고 지나갔고 나는 하하, 하고 웃었다. 그러자 역시나 옆에서 전정국의 시선이 느껴졌다.
“…뭐. 할 말 있으면 해.”
“선배도 경영인의 밤 오면 안 돼요?”
윤기 선배와 대화하면 늘 그렇듯이 전정국은 날 쳐다보고, 그럼 나는 할 말 있으면 하라는 눈으로 전정국을 쳐다보고. 그러면 전정국은 늘 한숨을 내쉬고 아니에요. 하고 말곤 했다. 그럼 나는 그런 전정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뒀었고. 그래서 오늘도 그렇게 될 줄 알았는데, 오늘은 상황이 평소완 조금 달랐다. 전정국이 눈을 살짝 빛내며 나한테 한 질문 때문에. 나는 전정국의 입에서 튀어나온 문장에 살짝 미간을 좁혔다.
“…내가 거길 왜 가.”
“저 진짜 열심히 준비하고 있단 말이에요. 선배가 와주면 너무 기쁠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 전정국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게 만드는 것’ 외에 은근히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있었다. 제 딴에는 티 나지 않게 한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내가 옆에서 직접 당하는 입장에서 볼 때에는 꽤나 표가 나는 거였는데, 그건 바로 나를 과에서 하는 행사에 참여시키려고 하는 거였다.
2학년 학회장으로서 과 사람을 과 행사에 참여시키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하기 싫다는 사람을, 그것도 새내기도 아니고 복학생을 열심히 구슬리면서까지 굳이 과 행사에 참여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다지 보편적인 일은 아니었다. 전정국의 그러한 노력은 과에서 일어나는 일에 조금도 참여하고 싶지 않은 나에 의해 매번 무너졌지만 말이다. 그러니 사실 전정국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그걸 단칼에 거절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고. 그러나 이번에 전정국은 꽤나 굳게 결심한 것 같았다.
“선배, 제발요. 소원이에요.”
“싫어.”
“뒤풀이도 있어요. 출장 뷔페 부를 건데.”
“필요 없어.”
“선배애…….”
전정국은 제법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한 학기 하고도 반 학기의 시간 동안 전정국과 붙어 다닌 결과, 인정하긴 싫지만 전정국은 어느 정도 나를 다루는 법을 터득해 나가고 있었다. 나도 사람이다 보니, 아무리 냉철하게 전정국을 대하려 노력한다 해도 전정국에게 이런 저런 정이 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는데 그러다보니 가끔 전정국의 부탁을 들어 주는 경우가 종종 생기게 됐고, 전정국은 그 무선적인 요청 수용의 경우들에서 일종의 규칙을 찾아낸 것이다.
“제가 햄버거 사드릴게요.”
“…야, 너는 나를 무슨,”
“10번.”
“…….”
“요즘 딸기 뷔페 한다던데, 거기 갈까요?”
이게 진짜……. 나는 인상을 구기고 전정국을 쳐다봤다. 그러나 내 표정에도 전정국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게 문제였다. 전정국이 날 너무 잘 알게 되어 버렸다는 거. 나는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전정국은 이미 알고 있을 거였다. 내가 결국엔 마지못해 전정국의 말을 들어 줄 것이라는 걸.
사실 내가 진짜로 햄버거 10번이나 딸기 뷔페 때문에 전정국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고, 내가 전정국의 부탁을 들어주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전정국의 날 쳐다보는 얼굴’이었다. 전정국이 잘생겼다는 건 모두가 알고 인정하는 사실이었고, 솔직히 얘기하면 가끔 그런 전정국의 얼굴에, 그리고 나를 대하는 전정국의 태도에 설렐 때도 있었다. 아니 사실 설레지 않는 게 이상한 거지. 그렇게 잘 생긴 얼굴을 하고 (비록 그게 본인의 착각일지라도) 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는데 어떻게 한 번도 설레지 않을 수가 있을까. 뭣도 몰랐던 1학년 때였다면 이미 난 몇 번이고 전정국에게 반했을 거였다.
그러니까, 내가 전정국의 부탁을 들어주는 경우에는 꼭 전정국의 ‘이 얼굴’이 포함되어 있었다. 날 똑바로 쳐다보면서, 가끔은 불쌍한 척 눈을 빛내는 저 얼굴. 저 눈. 그 얼굴을 몇 초간 쳐다보고 있으면, 난 결국 백기를 들고 마는 거였다. 그 사실을 전정국이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정국이 정말로 날 설득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예를 들면 수업 끝나고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다든가, 집에 가서 먹어도 될 저녁을 굳이 저랑 같이 먹자고 한다든가) 여러 가지 내가 좋아하는 조건들을 내걸며 꼭 저렇게 나를 쳐다보는 걸로 봐서는 대충 무의식중에라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냥 나를 쳐다보는 것 뿐 아니라 내가 혹할만한 것들을 제시하면서 나를 꼬드기는 걸 보면 그냥 부가적인 요소로 생각하는 것 같긴 했지만. 하지만 사실 내가 전정국의 부탁을 들어주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는 다른 게 아니라 전정국의 얼굴이었다는 소리다.
“태형 선배애.”
“…….”
“올 거죠?”
전정국이 날 보며 웃는다. 나는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로, 입술을 깨문다. …아니, 방금 했던 말은 취소. 전정국은, 내가 제 얼굴에 약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잘.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애초에 얼마 남지 않았던 경영인의 밤 행사도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전정국이 처음 나에게 경영인의 밤에 참석하면 안 되냐는 질문을 한 이후로 나는 전정국과 5번 같이 밥을 먹었고, 6번을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들었다. 그 때마다 그 시간들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대화들로 채워졌지만 나는 그 평소와 똑같은 시간들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전정국을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태형 선배.”
전정국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처음 만났을 그 때부터 지금까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선배. 혹은 태형 선배. 그러나 그 목소리에 대한 내 반응은 처음과는 분명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에는 분명 귀찮고, 피하고 싶고, 가끔은 대단하다고만 느껴졌던 그 목소리가 지금은 기다려졌고, 안 보이면 찾게 됐고, 가끔은 설렜다. 그러니까.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어쩌면. 전정국이 나를 좋아하는 게 진심은 아닐까. 얘가 정말로, 진짜로, 진심으로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거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전정국이 나를, 김태형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길 바라게 됐다.
이쯤 되면 바보가 아닌 이상 내 마음을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었고. 나는 전정국을 좋아하게 됐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포기가 빠른 만큼 인정도 빠른 사람이었고 생각보다 쉽게 전정국을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전정국이 나를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기 때문에 전정국에게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조금 더 신중하고 싶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전정국이 나를 진심으로 좋아할 가능성의 퍼센테이지를 내 안에서 자꾸만 늘려 가고 있었다. 불가항력이었다.
“…….”
그래서 나는 또 멍청하게, 지금 현재 2학년 학회장 전정국이 열심히 준비한 경영인의 밤 행사에 자리해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앉아 있는 중이었다. 나로서는 크나큰 결심이었다. 그토록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내 동기들은 대부분 아직 군대에 가 있거나 현재 3,4학년에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경영인의 밤이 경영학과의 가장 큰 행사인 만큼 나는 몇 명의 동기들을 마주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마주한 동기들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불행 중 다행으로 내 앞에 앉은 윤기 선배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전정국은 나를 경영인의 밤에 초대하려고 애쓴 게 무색할 만큼 나와 대화 한 마디 제대로 나눌 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술잔을 부딪치며 그런 전정국을 힐끔힐끔 훔쳐봤다. 전정국은 교수님, 새로 들어온 새내기들 할 거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이미 졸업한 선배들에게까지 쉴 새 없이 불려 다니는 중이었다. 경영인의 밤에 참석한 모두가 전정국과 대화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계속 내 옆에 붙어 있었으면서 언제 저렇게 다른 사람들과 친해졌나 신기할 정도로.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렇게 보니까 되게 멀리 있는 사람 같네. 나는 괜히 씁쓸한 기분이 되어 목구멍으로 술을 넘겼다. 소주가 유난히 썼다.
그러고 보면, 전정국은 신기한 사람이었다. 혼자 있어도 반짝반짝 빛나면서 시선을 끄는데, 옆에 사람이 있으면 더 눈에 띄고 반짝거렸다. 그러면서도 그 옆에 있는 사람까지 밝게 만들어 줬다. 내가 옆에 있어도 그럴까? 나는 쓴 입술을 혀로 핥았다. 똑같이 고백했으면서도, 나와는 달리 과에서 도태되지 않고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게 억울하면서도 한편으론 신기했던 적이 있었다. 저런 점이 나와는 다른 점일까. 나도 전정국에 옆에 있으면 밝아 보일까?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윤기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정국 뚫어지겠다.”
“…네!?”
“전정국 말로는 지가 혼자 짝사랑하는 거라던데. 아닌가 보네.”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윤기 선배가 픽 웃으며 내 술잔에 술을 채워 준다. 나는 윤기 선배의 말을 혹시 누군가 들었을까 습관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은 서로 얘기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우리 테이블에 귀를 기울일 여유 따윈 없어 보였다. 하긴, 윤기 선배가 아무 때나 이런 말을 할 사람은 아니긴 했다. 나는 조용히 윤기 선배가 따라준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나도 모르는 새 꽤 마셨는지 조금씩 취기가 올랐다. 얼굴이 기분 좋게 뜨끈했다. 윤기 선배가 너 술 약했던가? 하고 물어 오기에 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사실 술이 세다고는 못 할 주량이었지만 그냥 오늘은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래야 용기가 생길 것 같았다.
“아, 진짜 너무 정신없다.”
“…….”
“미안해요, 선배. 내가 불러 놓고. 계속 오려고 했는데 자꾸 일이 생겨서….”
얼마나 그렇게 윤기 선배와 마주보고 술을 마시고 있었을까. 어느덧 9시가 넘어 가 있었다. 나는 적당히 취해 알딸딸한 상태였고 전정국은 이제야 좀 숨 돌릴 틈이 생긴 건지 곧장 내 옆으로 와 앉았다. 나는 그런 전정국을 쳐다봤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평소보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시야가 조금 흐린 것도 같고.
“선배 술 많이 마셨어요? 얼굴이 빨개요.”
“…….”
술 때문이다. 술 때문에 얼굴도 빨갛고, 심장도 빨리 뛰고. 속이 꼭 울렁거리는 것 같은 게, 나한테 가까이 다가오며 내 볼에 손을 갖다 대는 전정국의 손 때문이 아니라, 술 때문에. 전정국은 그런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더니 컵에 물을 따라 나에게 건넨다. 선배, 마셔요. 괜찮아요? 잠깐 바람 쐬러 나갈까요? 나는 순순히 물을 받아 마시며 멍하니 테이블 위 소주잔을 쳐다봤다. 아직 마시지 않은 소주가 잔에 담겨 찰랑거렸다. 내 심장 박동도, 꼭 소주가 찰랑거리는 것처럼 조그맣게 찰랑거렸다. 감정이 자꾸 들쑥날쑥, 제 멋대로 넘실거렸다. 진짜, 나 진짜… 진짜 전정국 좋아하나 봐.
“쟤 많이 마신 거 같더라. 가서 초코우유라도 사 줘.”
“그래야겠다. 잠깐 자리 좀 비울게요.”
그런 나를 눈치 챘는지 윤기 선배가 입을 뗀다. 전정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부축해 세웠다. 선배, 잠깐만 바람 쐬고 와요.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 사실, 그렇게 많이 마신 건 아닌데. 아니다, 많이 마신 건가. 1학년 그 날 이후로, 술을 취할 만큼 마신 적이 없었다. 애초에 술자리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하기도 했고. 술을 이렇게 취할 정도로 마신 게 오랜만이라서 그런 건가. 취기가 더 빨리 찾아왔다. 술 때문인지, 기분도 평소보다 높아져 있었다. 나는 전정국의 손에 이끌려 술집 밖으로 나왔다. 실내는 더웠는데, 밖에 나오니 밤바람이 기분 좋을 만큼 차가웠다. 감정은 여전히 파도처럼 넘실대고, 옆에 있는 전정국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나고. 전정국이 나에게 하는 말들은 다정하고, 꼭 전정국이 날 정말로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래서.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랬다. 다정한 말투로 날 걱정하고 있는 전정국의 팔을 붙잡았다. 편의점을 찾던 전정국이 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전정국을 똑바로 응시했다. 심장이 뛴다.
“전정국.”
“네.”
“너 진짜 나 좋아해?”
내 말에, 전정국의 눈이 커진다. 나는 계속해서 전정국을 쳐다본다. 지금 이 상황이 얼떨떨한 듯, 전정국은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기를 반복한다. 나는 내가 쥐고 있는 전정국의 팔을 조금 더 세게 쥔다.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는데도 얼굴이 더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초코 우유라도 마시고 말을 꺼낼 걸 그랬나. 지금 나한테서 술 냄새 나면 어떡하지. 전정국한테서는 이렇게 좋은 향기가 나는데. 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진짜, 나 좋아하냐고…….”
“태형 선배.”
“나는,”
“전정국.”
너 좋아해. …라고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내 뒤에서 전정국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전정국을 잡고 있던 나의 손에 힘이 풀렸다. 나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날 향하고 있던 전정국의 시선이 내 뒤에 있는 사람에게 가 닿았다.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 목소리는, 내가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설마. 착각이겠지.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한순간에 술이 깼다. 나는 차마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아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기분 좋게 뛰고 있던 심장이, 지금은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앞에 설마, 김태형?”
“…선우 선배.”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그때까지도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아니길 바랐는데, 전정국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익숙한 단어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릴 뻔한 것을 간신히 버텨냈다. 선우 선배. 전정국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원망스럽게 들렸던 적은 처음이었다. 달콤한 꿈을 꾸고 있다가, 한순간에 현실로 내동댕이쳐진 기분.
“맞네, 김태형. 오랜만이다.”
“선우 선배, 진짜 오셨네요.”
“진짜 오셨네요, 라니. 꼭 오라고 해서 휴가 맞추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휴가? 꼭 오라고 했다고? 이게 무슨 말이지. 나는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전정국을 쳐다봤지만 전정국의 시선은 날 향해 있지 않았다. 강선우. 내 악몽. 그 악몽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겨우 잊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 1학년 때의 유령이 다시 날 슬금슬금 휘감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혹시 다시 마주친다 하더라도 의연하게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내 착각이고 오만이었다는 걸 난 지금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마주하게 된 강선우가 너무 무서워서, 그래서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토할 것 같았다. 나는 전정국을 쳐다봤다. 날 보는 전정국을 마주하면, 조금 덜 무서울 것 같았는데.
“정국아, 교수님이 부르셔.”
“…아.”
…전정국의 시선은 날 향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 여자 한 명이 가게 밖으로 나오며 전정국을 불렀고 강선우를 향해 있던 전정국의 시선은 그대로 그 여자에게로 옮겨 갔다. 손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무서웠다. 이 순간이 꿈이길 간절히 바랐다. 그 날 이후 내내 날 괴롭혔던 악몽이길 바랐다. 지독한 악몽이었으면. 그래서 꿈에서 깨고 나면, 그냥 아무 일도 없이, 평소와 다를 것 없이. 그냥 아침부터 재수가 없었던 것뿐이라고 말하면서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선배, 잠시만요. 잠깐만 있다가 얘기해요.”
“…….”
그런데 전정국은 천천히 등을 돌려 나에게서 멀어진다. 나는 그런 전정국을 차마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봤다. 내 어깨 위에는 여전히 그 악몽이 손을 올리고 있었고, 아까까진 기분 좋게 불던 바람이 지금은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분 좋게 찰랑이던 심장 박동도 이미 굳어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강선우의 손이 내 어깨에서 떨어졌다. 꽉 문 입술이 아프다고 느낄 새도 없이 강선우의 얼굴이 내 시야에 들어찼다. 오랜만에 보는 강선우는 그 때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러니까 여전히 키가 컸고, 짧은 머리지만 잘생겼고, 그리고 여전히…
“넌 하나도 안 변했나 보다?”
“…….”
“이번엔 쟤야? 전정국?”
…좆같았다. 나는 강선우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인상을 구겼다. 강선우의 거지같음이 무서움을 이겼다. 차라리 다행인 건가. 나는 생각보다는 떨리지 않는, 그러나 여전히 평소보다는 바짝 긴장하고 있는 내 모습을 숨기기 위해 손을 꼭 말아 쥐었다. 강선우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 되뇌었다. 강선우는 상대할 가치가 없는 새끼라고. 그냥 무시하라고. 하지만 이대로 가기엔 억울했다. 어차피 이젠 무서울 것도 없고.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그러는 너도 여전해?”
“…뭐?”
“여전히 급 따져서 사람 나누고 무시하냐고.”
내 말에 강선우의 여유롭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진다. 그 위로, 전정국의 얼굴이 순간 떠올랐다 사라졌다. 왜 지금 이 순간에 걔 얼굴이 떠올랐는지는 모를 일이다. 계속 옆에 있다 보니 그 대담함이 옮았나. 꼭 전정국을 비추고 있던 빛 한 줄기를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강선우는 말이 없었고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내가 가게 안으로 막 들어가려는 찰나, 뒤에서 들려온 강선우의 목소리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대단하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
“아니, 전정국이 너한테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으니까 내가 대단한 건가?”
…뭐?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틀어 강선우를 쳐다봤다. 어느새 웃는 얼굴을 되찾은 강선우가 날 여유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강선우의 그런 얼굴에 신경을 쓸 처지가 못 됐다. 나는 인상을 구겼다. 이게 강선우를 더 기쁘게 만들 거라는 생각까지는 닿지도 못했다. 누가 한 대 세게 치고 간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강선우는 그런 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국이랑 나랑 친했어. 넌 모르겠지만.”
“…….”
“당연히 내 스토커에 대해서도 얘기해 줬지. 뭐 그런 사람이 다 있냐고 그러더라고.”
“…….”
“그때는 별로 관심 없어 보이더니, 직접 보니 관심이 생겼나 보네. 나도 내 얘기에 그렇게 관심 가질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는지, 잇새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심장이 불안정하게 뛰었다. 강선우의 말을 믿지 말라고, 강선우는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떠들어대던 내 안의 소리는 애초에 전정국 같은 애가 날 진짜로 좋아할 리가 없었는데 대체 뭘 기대했던 거냐고 빈정거리는 내 안의 소리에 의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전정국에게 빌려 왔다고 생각했던 빛은 어느새 그림자가 되어 다시 내 몸을 타고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전정국과 강선우. 강선우에게 고백했던 나와, 나에게 고백한 전정국. 같은 곳에서. 이게 그냥 우연의 일치일까? 혹시 그런 건 아닐까. 그러니까, 전정국이,
“태형 선배.”
“난 이만 안에 들어갈게. 이따 보자.”
“아, 선우 선배. 네, 들어가세요.”
…나를 놀리기 위해 내가 강선우에게 고백했던 그 곳에서 나에게 고백한 거라면. 나한테 했던 말들이 다 거짓말이고, 나를 오늘 강선우가 오기로 되어 있었던 이곳에 데려오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던 거라면. 그렇게 생각하니 퍼즐이 딱 들어맞았다. 나는 손을 꽉 쥐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감정이 주체가 안 됐다. 태형 선배, 하고 나를 부르는 전정국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그러니까, 이게 다…
“선배, 죄송해요. 많이 늦었죠. 그동안 선우 선배랑 얘기 많이 했…”
“재밌었어?”
“네?”
“나 갖고 놀면서, 재밌었냐고.”
나는 고개를 들어 전정국을 마주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걸 간신히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정신일 수가 없었다. 배신감, 창피함, 비참함…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를 잠식시켜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지옥이었다.
“넌 내가 우습지?”
“…선배.”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인기 많고. 사람들은 네 말 한마디면 껌벅 죽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냥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했다. 말했다기보다 내뱉는 것에 가까웠다.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다.
“무서울 게 없었겠지. 그래서 심심했어? 심심하던 차에 과에 호모새끼 하나 있다니까 호기심이 생겨서 한 번 건드려 보고 싶었어?”
“그게 무슨,”
“씨발, 날 얼마나 좆같이 봤으면.”
참으려고 했는데,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울음이 새어나왔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좆같아. 안 그래도 비참한데. 안 그래도 최악인데. 그래도 여태까지 누군가의 앞에서 울었던 적은 없었는데. 지옥이었다. 악몽이었다. 그냥 다 사라져버렸으면 싶었다. 한 번 터진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재밌었겠지. 뒤에서 얼마나 웃겼을까.”
안 그런 척, 절대 마음을 열지 않을 것처럼 굴어도 제 뜻대로 움직여 주는 내가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결국엔 내가 강선우한테 그랬던 것처럼, 저를 좋아하게 된 걸 알고 얼마나 뒤에서 웃었을까. 나는 고개를 숙였다. 쪽팔리고 비참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필. 왜 하필 오늘일까. 왜 하필 전정국일까. 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그런데도 온 거였는데. 전정국 때문에. 내가 전정국을 좋아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그 순간에도. 전정국이 정말로 날 좋아하는 거라고 믿고 싶어 했던 그 순간에도. 내가 전정국에게 고백하려고 했던 그 순간에도 전정국은 속으로 웃고 있었을까? 아니면 언제쯤 이 연극을 끝낼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을까.
“네가 바라는 대로 다 됐네.”
“선배.”
“내 눈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
“…….”
“진짜 죽여버리고 싶을 거 같으니까.”
연극은 끝났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이게 내 현실이었으니까.
+
해피 발렌타인데이! 인데... 오해와 연애 속 국뷔들은... 흑흑...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참을게... 다음 편은 정국이 번외가 될 예정이야! 금방 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