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선배오늘은 학식 말고 나가서 먹어요.”

그러든가.”

 


태형 선배시험 끝나고 뭐 해요저랑 같이 영화 봐요.”

귀찮아.”

 


수업 끝나고 저랑 놀아 줘요저 버리고 가지 마요…….”

너 수업 두 개나 남았다며싫어.”

전 저번에 공강에 선배 만나러 나왔었는데!”

누가 나오래네 멋대로 나온 거잖아.”

 


이런 식으로전정국의 노력은 중간고사가 끝나고한 학기의 절반이 지나갈 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나는 여전히 전정국이 나를 정말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믿지는 않았지만전정국의 끈기 하나는 인정해주고 있었고이 정도로 시큰둥하게 굴었으면 빈정이 상해서라도 그만둘 법도 한데전정국은 처음 나한테 말했던 그 때에 비해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오히려 더 정성을 들이고 있으면 들이고 있었지.


가끔은 넌 대체 내 어디가 좋아서 그러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을 때도 있었다하지만 그 질문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은 결국 항상 시도에서 그쳤다그 질문을 하려고 마음먹고 전정국을 쳐다보고 있으면나를 마주하고 있는 전정국의 눈이 꼭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착각하게 만들었기 때문에생각보다는 오래 가는 것 같지만그게 전정국이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가와는 별개의 문제였으니까.

 


오늘도 붙어 있냐지겹지도 않아?”

완전 좋은데요.”

너 말고 태형이한테 얘기한 거야넌 경밤 준비 안 해?”

하고 있어요선배 오실 거죠?”

너 하는 거 봐서.”

 


그리고윤기 선배와는 종종 이렇게 대화(라기에 이번에 내가 한 것이라곤 살짝 눈인사를 한 것뿐이었지만)하는 사이가 되었다정작 친해졌어야 했을 1학년 때보다 훨씬 친해진 거였다따로 연락을 주고받거나 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마주치면 간단한 안부 정도는 묻는어쩌다 같이 밥을 먹어도 어색하지 않을 사이 정도는 됐다전정국은 여전히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널리 알리는 것에 있어서 전혀 거리낌이 없었고윤기 선배가 고생한다는 듯 내 어깨를 톡톡 치고 지나갔고 나는 하하하고 웃었다그러자 역시나 옆에서 전정국의 시선이 느껴졌다.

 


할 말 있으면 해.”

선배도 경영인의 밤 오면 안 돼요?”

 


윤기 선배와 대화하면 늘 그렇듯이 전정국은 날 쳐다보고그럼 나는 할 말 있으면 하라는 눈으로 전정국을 쳐다보고그러면 전정국은 늘 한숨을 내쉬고 아니에요하고 말곤 했다그럼 나는 그런 전정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 뒀었고그래서 오늘도 그렇게 될 줄 알았는데오늘은 상황이 평소완 조금 달랐다전정국이 눈을 살짝 빛내며 나한테 한 질문 때문에나는 전정국의 입에서 튀어나온 문장에 살짝 미간을 좁혔다.

 


내가 거길 왜 가.”

저 진짜 열심히 준비하고 있단 말이에요선배가 와주면 너무 기쁠 것 같아요.”

 


그리고 또 하나전정국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게 만드는 것’ 외에 은근히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있었다제 딴에는 티 나지 않게 한다고 하는 것 같았지만내가 옆에서 직접 당하는 입장에서 볼 때에는 꽤나 표가 나는 거였는데그건 바로 나를 과에서 하는 행사에 참여시키려고 하는 거였다.


2학년 학회장으로서 과 사람을 과 행사에 참여시키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하기 싫다는 사람을그것도 새내기도 아니고 복학생을 열심히 구슬리면서까지 굳이 과 행사에 참여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다지 보편적인 일은 아니었다전정국의 그러한 노력은 과에서 일어나는 일에 조금도 참여하고 싶지 않은 나에 의해 매번 무너졌지만 말이다그러니 사실 전정국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내가 그걸 단칼에 거절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고그러나 이번에 전정국은 꽤나 굳게 결심한 것 같았다.

 


선배제발요소원이에요.”

싫어.”

뒤풀이도 있어요출장 뷔페 부를 건데.”

필요 없어.”

선배애…….”

 


전정국은 제법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본다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한 학기 하고도 반 학기의 시간 동안 전정국과 붙어 다닌 결과인정하긴 싫지만 전정국은 어느 정도 나를 다루는 법을 터득해 나가고 있었다나도 사람이다 보니아무리 냉철하게 전정국을 대하려 노력한다 해도 전정국에게 이런 저런 정이 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는데 그러다보니 가끔 전정국의 부탁을 들어 주는 경우가 종종 생기게 됐고전정국은 그 무선적인 요청 수용의 경우들에서 일종의 규칙을 찾아낸 것이다.

 


제가 햄버거 사드릴게요.”

너는 나를 무슨,”

“10.”

…….”

요즘 딸기 뷔페 한다던데거기 갈까요?”

 


이게 진짜……나는 인상을 구기고 전정국을 쳐다봤다그러나 내 표정에도 전정국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그러니까이게 문제였다전정국이 날 너무 잘 알게 되어 버렸다는 거나는 고개를 돌렸다하지만 전정국은 이미 알고 있을 거였다내가 결국엔 마지못해 전정국의 말을 들어 줄 것이라는 걸.


사실 내가 진짜로 햄버거 10번이나 딸기 뷔페 때문에 전정국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은 아니고내가 전정국의 부탁을 들어주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전정국의 날 쳐다보는 얼굴이었다전정국이 잘생겼다는 건 모두가 알고 인정하는 사실이었고솔직히 얘기하면 가끔 그런 전정국의 얼굴에그리고 나를 대하는 전정국의 태도에 설렐 때도 있었다아니 사실 설레지 않는 게 이상한 거지그렇게 잘 생긴 얼굴을 하고 (비록 그게 본인의 착각일지라도좋아하는 사람을 대하는데 어떻게 한 번도 설레지 않을 수가 있을까뭣도 몰랐던 1학년 때였다면 이미 난 몇 번이고 전정국에게 반했을 거였다.


그러니까내가 전정국의 부탁을 들어주는 경우에는 꼭 전정국의 이 얼굴이 포함되어 있었다날 똑바로 쳐다보면서가끔은 불쌍한 척 눈을 빛내는 저 얼굴저 눈그 얼굴을 몇 초간 쳐다보고 있으면난 결국 백기를 들고 마는 거였다그 사실을 전정국이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겠지만전정국이 정말로 날 설득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예를 들면 수업 끝나고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한다든가집에 가서 먹어도 될 저녁을 굳이 저랑 같이 먹자고 한다든가여러 가지 내가 좋아하는 조건들을 내걸며 꼭 저렇게 나를 쳐다보는 걸로 봐서는 대충 무의식중에라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그냥 나를 쳐다보는 것 뿐 아니라 내가 혹할만한 것들을 제시하면서 나를 꼬드기는 걸 보면 그냥 부가적인 요소로 생각하는 것 같긴 했지만하지만 사실 내가 전정국의 부탁을 들어주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는 다른 게 아니라 전정국의 얼굴이었다는 소리다.

 


태형 선배애.”

…….”

올 거죠?”

 


전정국이 날 보며 웃는다나는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로입술을 깨문다아니방금 했던 말은 취소전정국은내가 제 얼굴에 약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그것도 아주 잘.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애초에 얼마 남지 않았던 경영인의 밤 행사도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전정국이 처음 나에게 경영인의 밤에 참석하면 안 되냐는 질문을 한 이후로 나는 전정국과 5번 같이 밥을 먹었고, 6번을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들었다그 때마다 그 시간들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대화들로 채워졌지만 나는 그 평소와 똑같은 시간들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아니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전정국을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태형 선배.”

 


전정국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처음 만났을 그 때부터 지금까지 달라진 것이 없었다선배혹은 태형 선배그러나 그 목소리에 대한 내 반응은 처음과는 분명 많이 달라져 있었다처음에는 분명 귀찮고피하고 싶고가끔은 대단하다고만 느껴졌던 그 목소리가 지금은 기다려졌고안 보이면 찾게 됐고가끔은 설렜다그러니까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어쩌면전정국이 나를 좋아하는 게 진심은 아닐까얘가 정말로진짜로진심으로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거다아니솔직히 말하면전정국이 나를김태형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이길 바라게 됐다.


이쯤 되면 바보가 아닌 이상 내 마음을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었고나는 전정국을 좋아하게 됐다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나는 포기가 빠른 만큼 인정도 빠른 사람이었고 생각보다 쉽게 전정국을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했다그러나 전정국이 나를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기 때문에 전정국에게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조금 더 신중하고 싶었으니까그럼에도 불구하고나는 계속해서 전정국이 나를 진심으로 좋아할 가능성의 퍼센테이지를 내 안에서 자꾸만 늘려 가고 있었다불가항력이었다.

 


…….”

 


그래서 나는 또 멍청하게지금 현재 2학년 학회장 전정국이 열심히 준비한 경영인의 밤 행사에 자리해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앉아 있는 중이었다나로서는 크나큰 결심이었다그토록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내 동기들은 대부분 아직 군대에 가 있거나 현재 3,4학년에 재학 중이었기 때문에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경영인의 밤이 경영학과의 가장 큰 행사인 만큼 나는 몇 명의 동기들을 마주해야만 했기 때문이다그 마주한 동기들과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불행 중 다행으로 내 앞에 앉은 윤기 선배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전정국은 나를 경영인의 밤에 초대하려고 애쓴 게 무색할 만큼 나와 대화 한 마디 제대로 나눌 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나는 기계적으로 술잔을 부딪치며 그런 전정국을 힐끔힐끔 훔쳐봤다전정국은 교수님새로 들어온 새내기들 할 거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심지어는 이미 졸업한 선배들에게까지 쉴 새 없이 불려 다니는 중이었다경영인의 밤에 참석한 모두가 전정국과 대화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계속 내 옆에 붙어 있었으면서 언제 저렇게 다른 사람들과 친해졌나 신기할 정도로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이렇게 보니까 되게 멀리 있는 사람 같네나는 괜히 씁쓸한 기분이 되어 목구멍으로 술을 넘겼다소주가 유난히 썼다.


그러고 보면전정국은 신기한 사람이었다혼자 있어도 반짝반짝 빛나면서 시선을 끄는데옆에 사람이 있으면 더 눈에 띄고 반짝거렸다그러면서도 그 옆에 있는 사람까지 밝게 만들어 줬다내가 옆에 있어도 그럴까나는 쓴 입술을 혀로 핥았다똑같이 고백했으면서도나와는 달리 과에서 도태되지 않고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게 억울하면서도 한편으론 신기했던 적이 있었다저런 점이 나와는 다른 점일까나도 전정국에 옆에 있으면 밝아 보일까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옆에서 윤기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정국 뚫어지겠다.”

!?”

전정국 말로는 지가 혼자 짝사랑하는 거라던데아닌가 보네.”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윤기 선배가 픽 웃으며 내 술잔에 술을 채워 준다나는 윤기 선배의 말을 혹시 누군가 들었을까 습관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사람들은 서로 얘기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우리 테이블에 귀를 기울일 여유 따윈 없어 보였다하긴윤기 선배가 아무 때나 이런 말을 할 사람은 아니긴 했다나는 조용히 윤기 선배가 따라준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나도 모르는 새 꽤 마셨는지 조금씩 취기가 올랐다얼굴이 기분 좋게 뜨끈했다윤기 선배가 너 술 약했던가하고 물어 오기에 나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사실 술이 세다고는 못 할 주량이었지만 그냥 오늘은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그래야 용기가 생길 것 같았다.

 


진짜 너무 정신없다.”

…….”

미안해요선배내가 불러 놓고계속 오려고 했는데 자꾸 일이 생겨서.”

 


얼마나 그렇게 윤기 선배와 마주보고 술을 마시고 있었을까어느덧 9시가 넘어 가 있었다나는 적당히 취해 알딸딸한 상태였고 전정국은 이제야 좀 숨 돌릴 틈이 생긴 건지 곧장 내 옆으로 와 앉았다나는 그런 전정국을 쳐다봤다술을 마셔서 그런가평소보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시야가 조금 흐린 것도 같고.

 


선배 술 많이 마셨어요얼굴이 빨개요.”

…….”

 


술 때문이다술 때문에 얼굴도 빨갛고심장도 빨리 뛰고속이 꼭 울렁거리는 것 같은 게나한테 가까이 다가오며 내 볼에 손을 갖다 대는 전정국의 손 때문이 아니라술 때문에전정국은 그런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더니 컵에 물을 따라 나에게 건넨다선배마셔요괜찮아요잠깐 바람 쐬러 나갈까요나는 순순히 물을 받아 마시며 멍하니 테이블 위 소주잔을 쳐다봤다아직 마시지 않은 소주가 잔에 담겨 찰랑거렸다내 심장 박동도꼭 소주가 찰랑거리는 것처럼 조그맣게 찰랑거렸다감정이 자꾸 들쑥날쑥제 멋대로 넘실거렸다진짜나 진짜… 진짜 전정국 좋아하나 봐.

 


쟤 많이 마신 거 같더라가서 초코우유라도 사 줘.”

그래야겠다잠깐 자리 좀 비울게요.”

 


그런 나를 눈치 챘는지 윤기 선배가 입을 뗀다전정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부축해 세웠다선배잠깐만 바람 쐬고 와요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사실그렇게 많이 마신 건 아닌데아니다많이 마신 건가. 1학년 그 날 이후로술을 취할 만큼 마신 적이 없었다애초에 술자리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하기도 했고술을 이렇게 취할 정도로 마신 게 오랜만이라서 그런 건가취기가 더 빨리 찾아왔다술 때문인지기분도 평소보다 높아져 있었다나는 전정국의 손에 이끌려 술집 밖으로 나왔다실내는 더웠는데밖에 나오니 밤바람이 기분 좋을 만큼 차가웠다감정은 여전히 파도처럼 넘실대고옆에 있는 전정국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나고전정국이 나에게 하는 말들은 다정하고꼭 전정국이 날 정말로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지고그래서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랬다다정한 말투로 날 걱정하고 있는 전정국의 팔을 붙잡았다편의점을 찾던 전정국이 눈이 나를 향했다나는 전정국을 똑바로 응시했다심장이 뛴다.

 


전정국.”

.”

너 진짜 나 좋아해?”

 


내 말에전정국의 눈이 커진다나는 계속해서 전정국을 쳐다본다지금 이 상황이 얼떨떨한 듯전정국은 입을 벌렸다가다시 다물기를 반복한다나는 내가 쥐고 있는 전정국의 팔을 조금 더 세게 쥔다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는데도 얼굴이 더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초코 우유라도 마시고 말을 꺼낼 걸 그랬나지금 나한테서 술 냄새 나면 어떡하지전정국한테서는 이렇게 좋은 향기가 나는데이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진짜나 좋아하냐고…….”

태형 선배.”

나는,”

전정국.”

 


너 좋아해라고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내 뒤에서 전정국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순간 전정국을 잡고 있던 나의 손에 힘이 풀렸다나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날 향하고 있던 전정국의 시선이 내 뒤에 있는 사람에게 가 닿았다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설마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이 목소리는내가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설마착각이겠지유리가 깨지는 것처럼한순간에 술이 깼다나는 차마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아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기분 좋게 뛰고 있던 심장이지금은 불안하게 뛰고 있었다.

 


앞에 설마김태형?”

선우 선배.”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나는 그때까지도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아니길 바랐는데전정국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익숙한 단어에나는 다리에 힘이 풀릴 뻔한 것을 간신히 버텨냈다선우 선배전정국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이렇게까지 원망스럽게 들렸던 적은 처음이었다달콤한 꿈을 꾸고 있다가한순간에 현실로 내동댕이쳐진 기분.

 


맞네김태형오랜만이다.”

선우 선배진짜 오셨네요.”

진짜 오셨네요라니꼭 오라고 해서 휴가 맞추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휴가꼭 오라고 했다고이게 무슨 말이지나는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전정국을 쳐다봤지만 전정국의 시선은 날 향해 있지 않았다강선우내 악몽그 악몽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겨우 잊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 1학년 때의 유령이 다시 날 슬금슬금 휘감고 있었다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혹시 다시 마주친다 하더라도 의연하게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건 내 착각이고 오만이었다는 걸 난 지금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마주하게 된 강선우가 너무 무서워서그래서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토할 것 같았다나는 전정국을 쳐다봤다날 보는 전정국을 마주하면조금 덜 무서울 것 같았는데.

 


정국아교수님이 부르셔.”

.”

 


전정국의 시선은 날 향해 있지 않았다그리고 그 때여자 한 명이 가게 밖으로 나오며 전정국을 불렀고 강선우를 향해 있던 전정국의 시선은 그대로 그 여자에게로 옮겨 갔다손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무서웠다이 순간이 꿈이길 간절히 바랐다그 날 이후 내내 날 괴롭혔던 악몽이길 바랐다지독한 악몽이었으면그래서 꿈에서 깨고 나면그냥 아무 일도 없이평소와 다를 것 없이그냥 아침부터 재수가 없었던 것뿐이라고 말하면서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선배잠시만요잠깐만 있다가 얘기해요.”

…….”

 


그런데 전정국은 천천히 등을 돌려 나에게서 멀어진다나는 그런 전정국을 차마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봤다내 어깨 위에는 여전히 그 악몽이 손을 올리고 있었고아까까진 기분 좋게 불던 바람이 지금은 소름끼치게 느껴졌다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기분 좋게 찰랑이던 심장 박동도 이미 굳어버린 지 오래였다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자연스럽게 강선우의 손이 내 어깨에서 떨어졌다꽉 문 입술이 아프다고 느낄 새도 없이 강선우의 얼굴이 내 시야에 들어찼다오랜만에 보는 강선우는 그 때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그러니까 여전히 키가 컸고짧은 머리지만 잘생겼고그리고 여전히

 


넌 하나도 안 변했나 보다?”

…….”

이번엔 쟤야전정국?”


좆같았다나는 강선우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인상을 구겼다강선우의 거지같음이 무서움을 이겼다차라리 다행인 건가나는 생각보다는 떨리지 않는그러나 여전히 평소보다는 바짝 긴장하고 있는 내 모습을 숨기기 위해 손을 꼭 말아 쥐었다강선우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나는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 내 자신에게 되뇌었다강선우는 상대할 가치가 없는 새끼라고그냥 무시하라고하지만 이대로 가기엔 억울했다어차피 이젠 무서울 것도 없고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그러는 너도 여전해?”

?”

여전히 급 따져서 사람 나누고 무시하냐고.”

 


내 말에 강선우의 여유롭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진다그 위로전정국의 얼굴이 순간 떠올랐다 사라졌다왜 지금 이 순간에 걔 얼굴이 떠올랐는지는 모를 일이다계속 옆에 있다 보니 그 대담함이 옮았나꼭 전정국을 비추고 있던 빛 한 줄기를 내가 손에 쥐고 있는 기분이었다강선우는 말이 없었고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그러나 내가 가게 안으로 막 들어가려는 찰나뒤에서 들려온 강선우의 목소리가 내 발목을 붙잡았다.

 


대단하네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

아니전정국이 너한테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으니까 내가 대단한 건가?”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틀어 강선우를 쳐다봤다어느새 웃는 얼굴을 되찾은 강선우가 날 여유롭게 쳐다보고 있었다그러나 지금 나는 강선우의 그런 얼굴에 신경을 쓸 처지가 못 됐다나는 인상을 구겼다이게 강선우를 더 기쁘게 만들 거라는 생각까지는 닿지도 못했다누가 한 대 세게 치고 간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강선우는 그런 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정국이랑 나랑 친했어넌 모르겠지만.”

…….”

당연히 내 스토커에 대해서도 얘기해 줬지뭐 그런 사람이 다 있냐고 그러더라고.”

…….”

그때는 별로 관심 없어 보이더니직접 보니 관심이 생겼나 보네나도 내 얘기에 그렇게 관심 가질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는지잇새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심장이 불안정하게 뛰었다강선우의 말을 믿지 말라고강선우는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떠들어대던 내 안의 소리는 애초에 전정국 같은 애가 날 진짜로 좋아할 리가 없었는데 대체 뭘 기대했던 거냐고 빈정거리는 내 안의 소리에 의해 사라진 지 오래였다전정국에게 빌려 왔다고 생각했던 빛은 어느새 그림자가 되어 다시 내 몸을 타고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전정국과 강선우강선우에게 고백했던 나와나에게 고백한 전정국같은 곳에서이게 그냥 우연의 일치일까혹시 그런 건 아닐까그러니까전정국이,

 


태형 선배.”

난 이만 안에 들어갈게이따 보자.”

선우 선배들어가세요.”

 


나를 놀리기 위해 내가 강선우에게 고백했던 그 곳에서 나에게 고백한 거라면나한테 했던 말들이 다 거짓말이고나를 오늘 강선우가 오기로 되어 있었던 이곳에 데려오기 위해 그렇게 애를 썼던 거라면그렇게 생각하니 퍼즐이 딱 들어맞았다나는 손을 꽉 쥐었다손이 덜덜 떨렸다감정이 주체가 안 됐다태형 선배하고 나를 부르는 전정국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그러니까이게 다

 


선배죄송해요많이 늦었죠그동안 선우 선배랑 얘기 많이 했

재밌었어?”

?”

나 갖고 놀면서재밌었냐고.”

 


나는 고개를 들어 전정국을 마주했다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걸 간신히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제정신이 아니었다제정신일 수가 없었다배신감창피함비참함…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를 잠식시켜 끌어내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지옥이었다.

 


넌 내가 우습지?”

선배.”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인기 많고사람들은 네 말 한마디면 껌벅 죽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그냥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했다말했다기보다 내뱉는 것에 가까웠다목소리가 떨려 나왔다머릿속이 엉망진창이다.

 


무서울 게 없었겠지그래서 심심했어심심하던 차에 과에 호모새끼 하나 있다니까 호기심이 생겨서 한 번 건드려 보고 싶었어?”

그게 무슨,”

씨발날 얼마나 좆같이 봤으면.”

 


참으려고 했는데버틸 수가 없었다결국 울음이 새어나왔다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좆같아안 그래도 비참한데안 그래도 최악인데그래도 여태까지 누군가의 앞에서 울었던 적은 없었는데지옥이었다악몽이었다그냥 다 사라져버렸으면 싶었다한 번 터진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재밌었겠지뒤에서 얼마나 웃겼을까.”

 


안 그런 척절대 마음을 열지 않을 것처럼 굴어도 제 뜻대로 움직여 주는 내가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결국엔 내가 강선우한테 그랬던 것처럼저를 좋아하게 된 걸 알고 얼마나 뒤에서 웃었을까나는 고개를 숙였다쪽팔리고 비참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하필왜 하필 오늘일까왜 하필 전정국일까다시는 이런 곳에 오지 않으려고 했었는데그런데도 온 거였는데전정국 때문에내가 전정국을 좋아하지 않으려고 애쓰던 그 순간에도전정국이 정말로 날 좋아하는 거라고 믿고 싶어 했던 그 순간에도내가 전정국에게 고백하려고 했던 그 순간에도 전정국은 속으로 웃고 있었을까아니면 언제쯤 이 연극을 끝낼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을까.

 


네가 바라는 대로 다 됐네.”

선배.”

내 눈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

…….”

진짜 죽여버리고 싶을 거 같으니까.”

 


연극은 끝났다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처음부터 이게 내 현실이었으니까.   



+


해피 발렌타인데이! 인데... 오해와 연애 속 국뷔들은... 흑흑...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참을게... 다음 편은 정국이 번외가 될 예정이야! 금방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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