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다 울었어요?”

…….”

 

. 나는 아직도 울음의 여운이 남은 코를 훌쩍였다. 전정국은 그런 내 등을 가만가만 토닥이고 있었다. 정신도 못 차리고 한참을 그렇게 주저앉아 울었다. 뭐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엉엉 소리까지 내면서. 정작 울고 있던 전정국은 그런 나 때문에 놀라서 그런 건지 이미 예전에 울음을 그치고 나를 달래 주고 있었는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걸 카타르시스라고 하나. 꽉 막혀 있던 속이 좀 시원해진 것 같았다. 한참 울고 나니 속은 좀 시원해졌는데

 

…….”

…….”

 

나 왜 울었지. 정신을 차리고 나니 뒤늦게 창피함이 미친 듯이 몰려왔다. 나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바닥만 쳐다봤다. 전정국의 손은 여전히 내 등을 토닥이고 있고,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눈알을 굴렸다. , 어떡하지. 이제 뭐라고 하지. 근데 나 아까 뭐라 그랬더라. 나는 방금 전 상황을 다시 찬찬히 되짚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전정국이 나한테 좋아한다고 했고. 미안하다고 했고. 나도 전정국에게 미안하다고 했고, 그리고 또 전정국한테…….

 

그런데 선배.”

…….”

저 좋아해요?”

 

좋아한다고도했지. 나는 미친 듯이 밀려오는 쪽팔림에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 미치겠다. 좋아한다고 했어. 전정국한테. 그것도 울면서. 나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전정국이 어……. 하고 할 말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까진 좋았는데, 그 말을 울면서 할 필요는 없었잖아. 그것도 그렇게 대성통곡을 하면서. 울음으로 잔뜩 얼룩진 내 얼굴이 얼마나 추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 진짜 쪽팔려 죽을 거 같다.

 

태형 선,”

.”

…….”

나 너 좋아해.”

 

, 모르겠다. 어디서 갑자기 그런 용기가 났는지, 나는 날 부르는 전정국의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전정국을 똑바로 마주했다. 사실 용기보단 배짱에 가까웠다. 아직 눈가가 빨갈 텐데. 코도. 그렇지만 뭐 어때. 어차피 전정국은 날 좋아하는데. 모르긴 몰라도 이런 내 모습도 좋다고 할 거다. 아닌가. 나는 눈을 깜박였다. 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말갛게 젖어 있는 전정국의 놀란 눈이 나를 향해 있다.

 

다시 말해줘?”

…….”

, , 좋아해.”

…….”

내가, 전정국 너, 좋아한다

잠깐만요.”

 

전정국의 눈이 느리게 감겼다가, 다시 떠지고. 잠깐 천장을 봤다가, 다시 나를 보고. 꿈인지 확인하려는 듯, 전정국은 제 볼을 살짝 잡아 늘린다. 그러곤 중얼거린다. 이거 꿈 아니겠지. 나는 전정국의 현실감각이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린다. 그리고, 전정국의 눈이 다시 나를 본다.

 

…….”

…….”

태형 선배.”

.”

저 이거 녹음해도 돼요?”

…….”

 

무슨 말을 듣게 될까 잔뜩 긴장하고 있었는데. 전정국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언제나 그렇듯 내 예상을 빗나간다. ?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살짝 벌리고 전정국을 쳐다본다. 하지만 전정국은 진지한 얼굴이다. 나는 그 진지한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하, 하고 웃었다. 전정국은 여전히 진지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맘대로 해.”

잠깐만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전정국은 손을 뻗어 제 침대를 더듬는다. 아마 핸드폰을 찾는 것 같다. 뭐야. 진짜로 녹음하려는 건가? 나는 멍하니 그런 전정국을 쳐다본다. , 찾았다. 중얼거린 전정국이 핸드폰을 두드린다. 나는 그런 전정국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입을 연다. 근데 정국아,

 

안 그래도 되는데.”

?”

이제부터 네가 듣고 싶을 때마다 해 줄 거니까.”

…….”

 

. 전정국의 핸드폰이 전정국의 손에서 떨어지는 소리다. 나는 그런 멍한 전정국의 얼굴에 웃음이 나온다. 표정 한 번 솔직하네. 쟤는 진짜 거짓말은 못 하고 살겠다. 여태까지 전정국이 나를 좋아하는 게 착각일 거라 우겨 왔던 내 자신이 우스울 정도로, 전정국은 정말 온 몸으로 날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고도.

 

선배…….”

.”

이거 꿈이면 저 진짜 죽어요.”

꿈 아니야.”

선배 태형 선배 맞죠?”

맞아.”

제가 죽은 건 아니겠죠?”

아닐 걸.”

 

결국 웃음이 터졌다. 전정국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지만, 웃음이 나오는 걸 어쩔 수가 없었다. 전정국이 눈을 깜박인다. 쟨 진짜, . 쟬 어떡하지. 그런데 그런 전정국을 좋아하는 난 어떡하지. 내가 웃자 전정국이 선배 웃는 거 너무 오랜만에 봐요. 하고 멍하니 중얼거린다.

 

그래서 싫어?”

좋아요.”

…….”

지금 딱 죽어도 좋을 만큼.”

 

그제서야 전정국이 웃는다. 전정국은 내 웃는 모습이 오랜만이라고 했지만,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전정국의 웃는 모습을 너무 오랜만에 본다. 내 쓸데없는 고집에 시간을 낭비하느라.

 

그 때였다. 바닥에 떨어진 전정국의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전정국의 핸드폰으로 향했다. 화면에 커다랗게 민윤기 선배가 떠올랐다. 그러나 전정국은 제 핸드폰엔 시선도 주지 않고 날 쳐다본다. 결국 보다 못한 내가 입을 열었다.

 

너 전화 와.”

안 받아도 돼요.”

윤기 선배잖아. 받아.”

…….”

윤기 선배 막학기에 종총 예약하느라 바빠 보이더라.”

여보세요.”

 

내 말에 전정국은 결국 조용히 통화 버튼을 누른다. 방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한 덕에 수화기 너머로 윤기 선배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 전정국. 너 지금 집이야?! 집이지??

, 집이에요.”

-너 거기 꼼짝 말고 있, 아니 그러니까, 지금 주연이가 그러는데 태형이가 너 집 주소 받아 갔댔거든? 아마 태형이 너한테 갈 거 같으니까 정신 차리고,

지금 저 이미 태형 선배랑 같이 있어요.”

-?

윤기 선배. 안녕하세요…….”

-…….

 

수화기 너머 윤기 선배는 말이 없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 윤기 선배의 당황한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전해졌다. 당황했을 얼굴이 여기까지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전정국이 입을 연다.

 

선배, 고마워요. 제가 밥 비싼 거 살게요.”

-? 어어,

근데 지금 제가 태형 선배랑 되게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었어서요. 제가 나중에 다시 전화 드릴게요.”

-? , . 그래. 그래야지. , 그래. 끊을게!

 

그 말을 끝으로 정말로 뚝 하고 전화가 끊겼고, 전정국은 얕게 한숨을 내쉰 다음 핸드폰을 엎어 놓는다. 그리고 나를 본다. 나는 괜히 또 어색해진 공기에 허공을 쳐다본다. , 그러니까…….

 

그럼……. 난 이제 가 봐야겠다.”

어디 가요?”

?”

 

집 가야지. 나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다 말고 그대로 멈췄다. 내 말에 전정국이 미간을 좁히고 나를 쳐다본다. 나 지금 뭐잘못 말했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었다. 사과 할 거 다 했고, 할 말 다 했고. 그럼 다끝난 거 아닌가?

 

지금 중요한 대화 하고 있었잖아요.”

?”

 

그거 그냥 윤기 선배 전화 끊으려는 핑계 아니었어? 내가 멍하니 묻자 전정국의 미간이 더욱 좁혀진다. 아니요? 저 아직 할 말 많이 남았는데. 그러더니 엉거주춤 일어나려던 나를 붙잡아 다시 앉힌다. 나는 얼떨결에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정국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꿀꺽, 침을 삼킨다. 설마 그 중요한대화라는 게몸의대화는아니겠?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전정국은 음. 뭐부터 하지. 하고 웃으며 나를 본다. 뭘 뭐부터 해. 나는 눈을 깜박인다. 전정국이 입을 연다. 일단,

 

태형 선배.”

, ?”

저랑 사귀어 주실래요?”

 


*


 

얼굴 좋아 보이네.”

그쵸?”

태형이 너도.”

하하…….”

 

전정국이 웃는다. 옆에서 나도 어색하게 웃는다. 윤기 선배는 그런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얕게 한숨을 내쉰다. 바쁜 거 딱 끝나니까 학교 나오는 거 봐. , 너 솔직히 얘기해. 너 감기몸살 그거 다 꾀병이었지? 윤기 선배의 투덜거림에 전정국은 사람 좋게 웃으며 윤기 선배에게 대답한다.

 

에이, 선배. 제가 비싼 밥 살게요.”

내가 살다 살다 막학기에 종총 예약을 다 해보고.”

술도 살게요.”

.”

 

그제서야 윤기 선배가 씩 웃으며 전정국을 툭 친다. 태형이 너도 와. 전정국 홀랑 벗겨 먹자. 윤기 선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 좀걱정했는데. 윤기 선배한테는 다 끝난 것처럼 말해 놓고 이렇게 돼서. 그런데 윤기 선배는 그냥 괜찮은 거지? 하고 물을 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맞다. 전정국. 수업 끝나고 잠깐 나 좀 보자.”

? 왜요?”

왜긴 왜야, 새꺄. 종총 때문에 그러지.”

 

참석할 교수님들 명단이랑 학생 명단 대충 나왔어. 보고 확인해. 그거에 대해서 할 말도 좀 있고. 윤기 선배가 무심하게 말했고, 전정국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슬쩍 전정국의 눈치를 본다. 예전 같았으면 또 오라고 했을 텐데, 이번엔 아무 말이 없다. 하긴, 경영인의 밤에서 그 난리가 났으니 오라고 하는 것도 웃기긴 했다.

 

선배, 왜요?”

? , 아냐.”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전정국이 날 돌아보며 그런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혹시 아직도 미안해하고 있으려나.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전정국의 얼굴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니까, 어제. 혹시나 하고 싶다는 대화가 몸의 대화는 아닐까 했던 그 대화는 정말 말 그대로 대화였다. 그냥, 순수한 Conversation. 사실 대화라기보다는 고해성사에 가까웠지. 전정국의 사귀어달라는 말에, 나는 당연하지. 하고 대답했고, 전정국은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고맙긴 뭐가 고마워. 내가 더 고마워. 내 말에 전정국은 또 그냥 웃었고.


그러고 나서는 전정국의 사과 타임이 이어졌다. 그런 걸 다 일일이 기억하고 있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술자리에서 나한테 공개적으로 고백했던 거, 경영인의 밤에 오라고 떼를 썼던 거, 몰랐지만 강선우를 마주하게 했던 거, 그런 것들. 내 안에서는 이미 예전에 다 정리가 끝난 것들이었는데, 전정국은 여태까지 전부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전정국은 계속 미안한 표정이었다. 결국 거듭 사과하는 전정국의 모습에 나는 당황해 화제를 돌린답시고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냐는 질문을 던졌고, 그 다음으로는 전정국의 김태형 짝사랑 일대기가 이어졌다.

 

…….”

 

그런데 그걸 듣고 나니, 내가 더 미안해지는 거다. 이런 애한테 내가 여태까지……. 사과를 해야 할 건 전정국이 아니라 나 같은데. 그 후부터 나한테 사과하던 전정국의 얼굴이 계속해서 밟혔다. 내가 경영인의 밤에 간다고 했을 때 기뻐하던 전정국의 얼굴도. 혹시나 나한테 트라우마 하나를 더 줘버린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을 게 뻔한데.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고. 그렇지만 전정국은 그 이후로 내 앞에서 그 쪽 관련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고 있었다.

 

선배. 무슨 생각 해요?”

, ?”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정신을 차려 보니 수업은 끝나 있었고 사람들은 짐을 챙기고 있다. , 망했다. 시험기간인데 집중 하나도 못 했어. 옆에서 나란히 수업을 들은 전정국도 짐을 챙긴다. 수업 끝나고도 전정국이랑 도서관 가서 같이 시험 공부하기로 했는데. 이래서야 공부가 되려나 모르겠다. 멍하니 앞을 보고 있자니 전정국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선배, 도서관 먼저 가 있을래요? 저 윤기 선배랑 얘기하고 바로 갈게요.”

 

이거 봐. 이렇게, 내가 학과 행사 관련 얘기를 듣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는 걸 보면, 확실하다. 전정국 지금 분명히 혼자 땅 파고 있다.

 

.”

 

그렇지만, 내가 그런 전정국한테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건물을 나섰다. 전정국은 날 배려한다고 저렇게 내 앞에서 학과 행사의 ㅎ자도 안 꺼내는데, 그런 전정국한테 먼저 갑자기 나 진짜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는 것도 웃기잖아. 이미 그 때 얘기했는데 전정국이 별로 믿는 눈치가 아니기도 했고. , 이런 사소한 걸로도 이렇게 답답한데 전정국은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버텼을까. 다시 전정국한테 미안해진다.

 

…….”

 

여전히 멍한 채로 터덜터덜 도서관으로 걸어가던 참이었다.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생각해보니까. 그냥 내가 이번에 종총 간다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눈을 깜박였다. 물론 시끄럽고 사람 많은 걸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정도야 뭐. 저번에 경영인의 밤 때도, 강선우를 마주쳐서 그렇지 그 전까지는 괜찮았고. 왜 진작 이 생각을 못 했지?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나는 바로 뒤를 돌아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막 건물로 들어가려는데, 건물 옆 외진 곳에서 전정국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정국과 윤기 선배의 뒷모습이 보였다. 정국아, 하고 부르려는데 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말도 안 돼. 양심이 없대요?”

애초에 양심이 있는 새끼였으면 그 사단이 나지도 않았겠지.”

아무튼 싫어요. 안 돼요.”

그럼 어떡해. 아무것도 모르는 1학년이 한 걸. 이제 와서 오지 말라고 해?”

안될 건 또 뭐예요.”

나라고 좋겠냐? 언제 또 1학년들 환심은 사가지고. 징글징글한 새끼.”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심상찮은 분위기에 나는 살짝 몸을 숨기고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전정국은 화를 내고 있고, 윤기 선배도 좀화난 거 같고.

 

아 몰라요. 종총에 강선우 오면 저 진짜 테이블 엎어요.”

엎어라. 안 말려.”

아 선배!!”

아 그럼 어떡해! 1학년이 나한테 와가지고 얼굴을 붉히면서 선배, 다음 학기에 복학하시는 선우 선배도 오신다는데 괜찮죠?’하는데. 내가 거기다 대고 아니? 그 새끼는 씹새끼라 안 되는데?’ 이러냐?!”

그냥 재학생만 된다고 하면 되잖아요!”

이미 그 전에 다음 학기 복학생 와도 되냐길래 그렇다고 한 이후였다고!”

오라고 해.”

태형 선배,”

 

더 이상 들을 것도 없었다. 내 목소리에 윤기 선배와 전정국의 놀란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나는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강선우가 종총 오겠대요? 내가 윤기 선배를 향해 묻자, 윤기 선배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전정국이 대답한다.

 

아니, 못 오게 할 거예요.”

? 오라고 해.”

선배.”

그리고 나도 갈게.”

?”

 

내 말이 의외였는지, 전정국의 눈이 아까보다도 커진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복학하면 보게 될 텐데, 퇴학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라고 해. 나도 갈 거니까.”

아니 선배,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제가 못 오게,”

나 괜찮아.”

김태형.”

뭐 어때요. 어차피 다 지난 일인데. 무서울 것도 없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좀굳이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정말로 무섭지는 않았다. 나는 잘못한 거 없고, 약점 잡힐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태형 선배.”

 

전정국이 있으니까.

 


*


 

세미나를 할 때부터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 무색하게, 강선우는 밤 8시가 넘어가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원래 오지 않으려고 했다던 윤기 선배는 내가 걱정됐는지 내 앞에 든든하게 자리해 주고 있었고, 전정국은 교수님하고 대화를 나누면서도 틈이 날 때마다 내 쪽을 쳐다봤다. 그 때마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웃어 보였고.


술자리가 무르익고, 교수님들도 이제 눈치껏 빠져 주시겠다며 일어나신지 10여분 정도가 지난 참이었다. 순간 찬바람이 실내로 들어오고, 누군가 선우 선배!’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향했다. 내 앞에 앉은 윤기 선배의 시선도, 내 옆에 앉은 전정국의 시선도. 강선우는 제 이름을 부른 1학년 여자애를 향해 살짝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가게 안을 눈으로 훑는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다. 나를 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듯, 강선우의 눈이 살짝 커진다.

 

선우 선배, 여기 앉으세요!”

, 잠깐만. 저기 내 동기랑 인사 좀 하고.”

 

그냥 조용히 꺼질 것이지, 강선우는 또 예의 그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로 천천히 다가온다. , 진짜 저 얼굴은 언제 봐도 토가 쏠리네. 뭣도 모를 때 잠깐이지만 저런 새끼를 좋아했었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쪽팔리고.

 

또 보네.”

…….”

정국이랑 윤기 선배도 있었네요. 태형이 넌 정국이랑 또 붙어 있네? 둘이 되게 친한가 봐?”

. 그냥 가라.”

 

윤기 선배가 낮게 경고하듯 말했고 나는 손으로 전정국의 허벅지를 지그시 눌렀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이었다. 괜히 여기서 일을 크게 만들어 봐야 좋을 게 없

 

여전한 줄 알았더니 그래도 1학년 때보단 발전했나 보네. 정국이가 계속 옆에 붙어있는 거 보면. 얼마나 쫓아다닌 거야?”

 

기는 씨발, 개뿔. 나는 듣다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일어서는 바람에 내 팔에 빈 맥주잔이 테이블 위로 쓰러져 요란한 소리를 냈다. 강선우의 시선이 날 따라 올라온다. 윤기 선배와 전정국의 놀란 시선도. 아니, 맥주잔의 요란한 소리 때문인지 그냥 술집 전체의 시선이 나와 강선우에게로 향해 있었다.

 

뭐 하냐, ?”

, 솔직히 말은 바로 하자. 쫓아다니긴 뭘 쫓아다녀. 내가? 너를?”

.”

 

목소리 크기가 조절이 안 됐다. 아니, 안 했다. 들으라면 들으라지. 비겁하게 다른 테이블에는 들리지 않게 조용히 나에게만 속삭이던 강선우는 살짝 당황한다. 내 목소리에 전정국이 내 뒤에서 나를 따라 일어서는 게 느껴졌다. 강선우의 시선이 잠시 내 뒤에 있는 전정국에게 닿았다가, 다시 나를 향한다. 나는 계속 강선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강선우는 그런 나와 전정국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하, 하고 웃었다.

 

진짜 단단히 꼬셨나 보네. 이번엔 얼마나 따라다녔어? 나한테 한 것보다 더 했어?”

누가 누굴 따라다녀. 내가 태형 선배 좋아서 쫓아다녔는데?”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전정국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정국이 반말 하는 건 처음 본다. 나는 놀라 전정국을 돌아봤다. 전정국이 비스듬히 서 강선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전정국이 저런 얼굴도 할 줄 알았나? 처음 보는 냉기 어린 전정국의 얼굴이 낯설어 나는 눈을 깜박였다.

 

? , 전정국.”

…….”

진짜 어이가 없어서. , 김태형. 쟤한테 뭐라 그랬냐?”

강선우. 그만 하지?”

 

결국 보다 못한 윤기 선배까지 자리에서 일어난다. 순식간에 험악해진 종강총회 공기에 술집 안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시선은 전부 이쪽에 고정된 채로. , 진짜 과 행사 참여할 때마다 매번 이렇게 화제의 중심이 되기도 쉽지 않을 텐데. 그 어려운 걸 내가 또 해내고 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강선우가 말을 잇는다.


뭘 그만 해요, 윤기 선배. 선배도 알잖아요. 김태형이 저 좋다고 따라다닌 거.”

그 얘기가 지금 왜 나와? 그러는 넌 김태형이 너 스토킹했다고 헛소문 퍼트렸잖아.”

헛소문? , 김태형. 니가 말해봐. 그게 헛소문이었어?”

 

뭐래, 미친 새끼가. 나는 입을 벌리고 강선우를 쳐다봤다. 강선우의 말이 하도 어이가 없어 대답을 못 하고 있으니 그런 나를 당황한 것으로 해석한 건지, 강선우의 표정이 살짝 의기양양해진다.

 

김태형도 찔리는 게 있으니까 말을 못 한 거죠. 아니었음 그 때 아니라고 말했겠지. 선배 잘 알지도,”

찔리는 게 있긴 있었지.”

 

더 이상은 못 들어 주겠어서, 나는 강선우의 말을 잘랐다. 윤기 선배를 향했던 강선우의 눈이 다시 나를 본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진짜, 저런 새끼를…….

 

너 같은 걸 좋아했었다는 게 쪽팔려서 말 못했다.”

?”

스토킹? 스토킹 같은 소리 하네. . 아까부터 거슬렸는데, 누가 누굴 쫓아다녀. 솔직히 쫓아다닌 건 내가 아니라 너지. 너 내가 너 말고 다른 사람이랑 친해지려고 하면 득달같이 쫓아와서 훼방 놨잖아. 난 그래서 니가 디나이얼인 줄 알았지.”

 

알고 보니 그냥 개새끼였지만. 숨도 안 쉬고 말했다. 이제야 좀 속이 시원했다. 이렇게까지 한꺼번에 많이 말해본 게 얼마만이더라.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말에 자리에 앉아 있는 1,2학년들이 술렁인다. 강선우도 그걸 느꼈는지 입술을 깨문다. 그리고 나를 노려본다.

 

야 김태형. 너 지금 증거 없다고 없는 말,”

강선우.”

? 민윤기?”

 

윤기 선배가 강선우에게 뭐라 말을 하려던 그 때였다. 입구 쪽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윤기 선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술집 안 시선이 입구 쪽으로 모였다. 인영 하나가 윤기 선배를 향해 활짝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며 들어오고 있었다.

 

. 너 아직도 졸업 안 했냐? , 뭐야. 선우랑 태형이도 있네?”

석진 형.”

 

윤기 선배가 떨떠름하게 석진 선배를 맞았다. 김석진 선배. 내가 1학년 때 학과 조교였던 선배였는데 대학원 갔다더니, 아직도 학교에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그 때도 마주칠 일은 별로 없었는데 그 때 강선우가 1학년 학회장이었고, 강선우 옆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선배였다. 나는 웃고 있는 선배를 향해 살짝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석진 선배가 환하게 웃는다.

 

, 진짜 오랜만이다. 너희가 지금 몇 학년이지?”

석진 형. 지금…….”

선우랑 태형이는 여전히 잘생겼네! 복학한 거지? 하긴, 나 막학기 때 너희가 1학년 1학기였으니까. 잘 지내? , 시간 진짜 빠르다. 강선우 저 자식이 태형이 뒤꽁무니 쫓아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

 

석진 선배의 말에 안 그래도 조용하던 술집 내의 공기가 다시 얼어붙는다. 그러나 석진 선배는 그런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듯, 가까이 다가오더니 해맑게 웃으며 강선우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내리쳤다.

 

짜식. 군대 갔다 오더니 더 잘생겨졌네. 여전히 태형이랑 친한가 보네? 그래. 친하게 지내라. 이제 군대 갔다 오면 남는 건 동기밖에 없다? 하긴, 너희야 워낙 죽고 못 사는 사이였으니까 걱정할 필요도 없겠네.”

아니, 석진 선,”

, 진짜. 난 진짜 처음에 둘이 사귀는 줄 알았다니까? 강선우가 아주 그냥 볼 때마다 그냥 태형이, 태형이 타령을 해가지고. 내가 다 귀찮았는데. 이제 철 좀 들었냐? 태형아, 저 자식 아직도 그러냐?”

 

강선우가 말릴 새도 없이, 석진 선배가 웃으며 말을 다다다 풀어놨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지윤이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석진 선배의 말에 차마 말대꾸는 못 하고 붉으락푸르락 하고 있는 강선우의 얼굴도. 그러나 석진 선배의 눈치 없음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그런 강선우의 어깨를 팡팡 내려치며 웃고 있었다. 저쯤 되면 좀 대단하긴 하다. 물론 나에겐 고마운 일이었지만. 나는 옆에 서 있는 전정국을 힐끔 쳐다봤다. 전정국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잘 안 되는 듯 살짝 미간을 좁히고 석진 선배와 강선우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근데 분위기 왜 이래? , 나 오기 전에 무슨 일 있었어? 그러고 보니까 너넨 왜 일어서 있냐?”

아니에요, 석진 형. 여긴 웬일이에요.”

, 안 교수님이 가방 놓고 왔다고. 나보고 가져다 놓으래서. 내가 교수님의 작은 도비잖냐.”

 

윤기 선배가 웃음을 참느라 이상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석진 선배에게 말을 건다. 잠시 의아해졌던 석진 선배의 표정이 윤기 선배의 말에 다시 환하게 바뀐다. 윤기 선배가 웃으며 안 교수님이 앉았던 자리에서 가방을 가져온다. 여기요. 윤기 선배가 내미는 가방을 받아들며 석진 선배가 이번엔 윤기 선배의 어깨를 팡팡 두드린다.

 

민윤기, 너도 이제 졸업 좀 해라. 언제까지 학교에 있을 거냐?”

안 그래도 이제 막학기예요. 그런데 그게 선배가 할 소리에요?”

, 이렇게 팩트로 때리기 있냐?”

저 졸업하기 전에 술 한 번 마셔야죠, .”

그래야지. , 난 이제 가봐야겠다. 선우야, 태형아. 남은 학교생활 잘 하고. 군대 갔다 오면 남는 건 진짜 동기밖에 없다니까? 잘 해.”

…….”

, 선배. 들어가세요.”

 

강선우는 대답이 없고, 나는 살짝 웃으며 석진 선배에게 고개를 숙였다. 석진 선배가 이렇게 반가운 날이 올 줄이야. 그제야 강선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진 것을 눈치 챈 석진 선배가 살짝 당황한 듯, 웃으며 말을 꺼냈다.

 

나 괜히 오지랖 부린 건가? , 너희가 이해해라. 대학원생 되니까 이런 분위기가 너무 부러워서 그래.”

아니에요, . 잘 왔어요.”

 

진짜로. 윤기 선배가 웃으며 석진 선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나가요. 밖에까지 데려다줄게요. , 너도 나와. 윤기 선배가 석진 선배를 밀며, 강선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니, 선배,”

아직도 팔 쪽이 남았냐? 배려해줄 때 오지?”

 

강선우가 뭐라 말하려던 것 같았는데, 윤기 선배가 서늘하게 웃는 낯으로 강선우의 귀에 대고 낮게 읊조렸다. 석진 선배는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그래, 나 데려다 줘라! 하고 있었고. 결국 강선우와 석진 선배, 윤기 선배는 나란히 가게 밖으로 사라졌고, 가게 안은 폭풍이 휘몰아친 여파로 고요했다. 나는 애매해진 이 상황에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어색하게 자리에 앉았다. 전정국도 나를 따라 앉았다. . 난 대체 대형 사고를 몇 번을 치는 걸까. 그것도 과 사람들 다 모인 곳에서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제 나는 정말 학교 다 다녔다.

 

저 선배 이제 쪽팔려서 어떻게 학교 다녀?”

다음 학기에 복학이라고 하지 않았어? 군대로 도망도 못 가겠네.”

몰라나 같으면 자퇴한다.”

 

아님 차라리 군대를 한 번 더 가든가. 옆 테이블에서, 1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저들 딴에는 나에게 들리지 않게 한다고 하는 것 같은데, 워낙 가게 안이 조용하다보니 너무나 뚜렷하게 들리는 소리에 나는 조용히 술잔을 들었다. 학교 다 다닌 건 강선우도 마찬가지인 것 같네. 자꾸 웃음이 비져나왔다.

 


*


 

그렇게 폭풍 같았던 종강 총회가 끝나고, 쓰나미 같았던 기말고사도 끝나고,(왜 재앙에 비유했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겠다) 대학생의 특권인 기나긴 방학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경영인의 밤 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것을 눈여겨 본 교수님의 추천으로 대학 축제 준비 위원회에 특별히 스카우트된 누구 덕분에 방학을 한 보람도 없이 매일같이 학교에 출석 도장을 찍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내가 올 필요는 없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다만,

 

선배가 너무 보고 싶어서 일이 안 돼요!!”

 

저 철없는 전정국의 애인일 뿐.

 

태형 선배, 오셨어요.”

. 수고가 많다.”

 

아니에요수고는요……. 같은 연유로, 전정국과 같이 스카우트 되어 전정국과 한 팀으로 일하고 있는 과 회장 소리가 퀭한 얼굴로 날 맞이한다. 나는 그런 소리를 위해 사 온 밀크티를 내밀었고 소리는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들며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옮긴다. 모르긴 몰라도, 힘든가 보다. 나는 책상에 엎어져 날 쳐다보고 있는 전정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 맞다. 너희 엘티 언제 간다고 그랬지?”

, 26,27,28이요.”

선배, 저 그동안 선배 못 봐서 어떡해요.”

 

책상에 엎어져 날 쳐다보고 있는 전정국 대신, 소리가 달력을 뒤적이며 대답했고, 전정국이 울상을 지으며 중얼거린다. 나는 그런 전정국의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는다. . 그럼 같이 못 가겠네. 내 혼잣말에 전정국이 반짝 일어난다. 뭘 같이 못 가요?!

 

? 아니, 별 건 아니고. 석진 선배랑 윤기 선배랑 술 마시기로 했거든. 너 올 수 있으면 오라고 하려고 했지.”

때 그 선배요?”

. 그런데 27일이라서. 안되겠네.”

나 빼고 술…….”

 

그것도 윤기 선배랑 그, 잘생긴 선배랑……. 전정국이 중얼거린다. 나는 아차 싶어 전정국을 본다. 괜히 말했나. 안 되는 거 알면 그냥 말하지 말 걸. 안 그래도 전에 전정국이 한 번, 석진 선배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땐 그냥 아는 선배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는데. 문제는 그 후에도 어쩌다 윤기 선배와의 대화 도중에 석진 선배의 얘기가 나오기라도 하면 전정국이 급 귀를 기울인다는 거에 있었다.


아마도 전정국은 제가 알지 못하는 내 과거가 굉장히 궁금한 것 같았다. 차마 나한테는 못 물어보겠고, 윤기 선배한테 물어보자니 뒤를 캐는 거 같고, 그런 거겠지. 그렇다고 내가 내 입으로 구구절절 얘기를 해 주자니 그것도 이상해서. 그래서 석진 선배랑 윤기 선배가 있는 술자리에 데리고 가려고 했던 거였다. 아마 석진 선배가 자연스럽게 내 과거에 대해서 말해줄 것 같아서. 그리고 그걸 전정국도 아는지, 전정국이 소리를 돌아본다.

 

“소리, 나 엘티…….”

개소리 하지 마.”

 

그러나 전정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리가 전정국의 말을 끊는다. 전정국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그런 전정국을 보다 못한 소리가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 나와 전정국을 쳐다본다. 선배, 진짜 고생이 많아요. 소리가 나에게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는다. 그런 나와 전정국을 번갈아 쳐다보던 소리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 너 나갔다 와.”

?”

선배랑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고.”

? 아냐. 그래도 내가 어떻게,”

나가랄 때 나가.”

 

그리고 다 충전된 다음에 와. 최소 3시간 이상. 알겠어? 소리가 웃는 낯으로, 하지만 이를 악물고. 전정국에게 말한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스트레스가 상당한 모양이었다.

 


*


 

선배 진짜 어려워요.”

?”

 

내가 멍청하게 반문했다. 전정국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진다. 막상 나오긴 했지만 갈 곳은 없고. 그래서 그냥 주변에 있는 카페에 와서 앉아 있는 중이었다. 손에 들고 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 얼음이 녹아 컵 주변에 물방울이 맺혔다. 축축해. 내 조용한 혼잣말을 들었는지 전정국이 휴지를 내민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야? 뭐가 어려워? 휴지로 물방울을 닦으며 전정국을 쳐다보니 전정국이 한숨을 내쉰다.

 

맨날 봐도 모르겠어요.”

…….”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

진짜.”

 

뭐야,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선배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 혼자만 되게, 초조한 거 같아요. 전정국이 조용히 투덜거렸다. 그런 거 아닌데.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전정국을 쳐다봤다. 왜 또 이러실까. 나는 멍하니 오늘 있었던 일을 되짚어 본다. 별로 이상할 거 없었. 설마. 석진 선배랑 윤기 선배랑 술 약속 잡은 거 때문에 그러나. 나는 전정국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전정국이 그런 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린다. 돌려진 얼굴의 귀 끝이 빨갛다. 그런 전정국의 모습이 귀여워 보인다면 나도 콩깍지가 심각하게 낀 걸까. 나는 피식 웃었다. 내 웃음소리에 전정국의 눈이 다시 나를 향한다.

 

그래도 좋아요.”

…….”

그러니까 선배도,”

.”

나 더 많이 좋아해 줘야 돼요.”

 

알겠죠? 제가 말하고도 부끄러운지 전정국이 손을 올려 제 얼굴을 감싼다. 이미 많이 좋아하고 있는 거 같은데. 내가 중얼거리자 전정국이 손을 내리고 나를 쳐다본다. 빨개진 얼굴에, 눈이 동그래졌고, 입은 약간 벌어져 있다. , 이상한 표정. 내가 웃으며 말하자 전정국이 아, 선배 진짜. 하고 다시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그런 전정국을 쳐다봤다. 어떻게 저렇게 표정에 다 드러나지. 내가 계속 아무 말 없이 웃으며 전정국을 쳐다보고 있으니 전정국이 빼꼼 손가락 사이로 나를 쳐다본다. 그러더니 입술을 빼죽 내민다.

 

아직 멀었어요.”

…….”

나가요. 뭐 먹고 싶어요?”

 

심장이 간질거린다. 분명히 에어컨을 틀어 시원하다 못해 추운 카페 안인데. 왜 이렇게 얼굴이 뜨거운 거야. 일어서면서 주위를 살폈다. 애초에 사람이 별로 없던 카페 안은 각자 자신들의 할 일로 분주했다. 그러니까, 우리 쪽에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정국아.”

?”

 

조용히 손을 뻗어 전정국의 팔을 잡았다. 전정국의 움직임이 순간 멎고, 전정국의 눈이 나를 향한다. 나는 전정국을 마주 본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연다. 물어보고 싶은 거 있으면 물어 봐. 다 대답해 줄게. 내 말에, 전정국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그리고, 그런 전정국을 보며 나는 말을 잇는다.

 

그리고 이건,”

 

나는 손을 내려 전정국의 손을 잡고, 살짝 깍지를 낀다. 애정 표현. 내가 조용히 말하며 씩 웃자 전정국이 나머지 한 쪽 손을 올려 얼굴을 감싼다.

 

죽겠다 진짜…….”

? 방금 뭐라고 했어?”

 

됐어요. 나가자. 전정국이 깍지 낀 내 손을 조금 더 꽉 쥔다전정국의 손은 뜨겁고, 내 심장은 기분 좋게 뛰고. 나는 눈을 감았다. 여름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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