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정국 번외

 

첫눈에 반한다는 건 영화 속에서나 있는 말인 줄 알았는데주위 사물이 그 사람만 빼고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는 말도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그 사람만 보였다다른 사람은 꼭블러 처리가 된 것처럼 뿌옇게나는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주위에서 반갑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꼭 벽 하나에 가로막힌 것처럼 멀리서 들렸다심장이 두근거렸다.


술김에 군대를 신청해 버린 탓에 1학년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군대를 가야 했다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의문이지만 술이 깨고 난 후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짓이었고그 덕분에제대하고 나면 같이 지낼 친구 하나 제대로 만들어 두지 못했다지금쯤이면 동기들은 아직 군대에 있을 거고그나마 여자 동기들이 좀 남아 있으려나사실 걱정이 되진 않았다어떻게든 되겠지살면서 인간관계 때문에 애를 먹었던 기억은 없다그리고 내 예상은내가 강의실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들어맞았다내가 얼굴을 아는 사람도모르는 사람도 나에게 다가와 친근하게 말을 걸었으니까그런데 강의실의 전부가 나를 향해 호의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와중에그런 강의실의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듯 혼자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처음에는그래서 눈이 갔다.

 

…….”

 

눈이 마주친 것 같았는데나는 헛바람을 삼켰다나 때문에 소란스러워진 강의실이 불편했던 듯그 남자는 살짝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봤다그리고나는 그 순간 그 감정을 경험했다영화에서소설에서드라마에서 자주 묘사되던 그 감정첫눈에 반하는 거나에게 0.5초도 채 머무르지 않았던 그 시선에 내 심장은 쿵 하고 내려앉았다그리고 박동을 빨리 하기 시작했다그 기분이 혼란스러워 나는 눈을 깜박였다처음엔 당황했다이게 뭐지이게 무슨 감정이지옆에서 누군가 날 흔들었다전정국내 말 듣고 있어나는 그 말에 어… 하고 멍청하게 대답했다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처음엔 그게 첫눈에 반한 거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었다.

 

옆에 앉아도 돼요?”

 

무슨 정신으로 수업을 들은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정신을 차려 보니 수업은 끝나 있었고 그제서야 뒤늦게 돌아본 자리에 그 사람은 없었다한 가지 다행인 건 적어도 그 사람을 한 학기 내내 이 수업에서 볼 수 있을 거라는 거그리고 이 수업이 전공이니까같은 학과일지도 모른다는 거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처음 느껴 보는 감정에 기분이 자꾸만 제 멋대로 춤을 췄다그리고 나는 그 사람을 다시 마주쳤다내가 이걸 신청했었는지도 까먹고 있었던 교양 수업에 들어가기 위해 발을 들여 놓은 강의실 안에서아니발견했다찾을 필요도 없었다여전히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혼자 선명했으니까.


머리가 뭐라고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그대로 그 사람 옆에 가서아까처럼 주위 상황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그 사람의 어깨를 두드렸다내 목소리에 그 사람이 고개를 들고눈이 마주치고나는 숨을 참고얼굴이 빨개지진 않았을까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었다그 사람이 입을 열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이 나에게는 수억 년처럼 느껴졌다이미 자리가 있다고 하면 어떡하지싫다고 하면.

 

…….”

 

그 짧은 찰나 동안 별 생각을 다 한 것 같은데다행히도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여 줬다그 사람의 옆자리에 가방을 내리고 자리에 앉는 동안 내내 이 사람에게 뭐라고 말을 걸까그 생각만 했다어떤 말이 가장 자연스러울까어떻게 말을 걸어야 호감을 줄 수 있을까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굳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들이었다항상 사람들은 내가 뭐라 말을 걸기도 전에 나한테 말을 걸어왔고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을 상대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으니까.


크게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내 머릿속에서 완성된 가장 괜찮은 문장을 골라서그 사람을 톡톡 두드렸다내 행동에 그 사람이 귀찮은 듯 이어폰을 귀에서 빼냈다너무 적나라하게 나를 귀찮아하는 것이 보였지만 그대로 포기하고 싶지가 않았다경영학과죠내 질문에 그 사람의 눈과 내 눈이 마주친다나는 말을 잇는다.

 

우리 이거 말고도 같은 수업 듣는 거 같은데기업과 경영.”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는데눈치 챘을까최대한 담담하게아무렇지 않게 말하려고 했지만 그게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그 사람이 날 쳐다보고 있는데이렇게 가까이서 본 게 처음이라나는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훑고 있었다눈이 크고속눈썹이 길고오른쪽 눈 밑에 점이 있네그리고

 

…….”

 

미치겠다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이거 좀… 위험한 거 아닌가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다경영학과맞구나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원래 이런 건가첫눈에 반하면원래 이렇게 기분이 막널을 뛰는 건가?

 

“1학년맞죠제가 새내기를 잘 몰라서.”

…….”

소개가 늦었네제 이름은 전정국이에요. 1학년은 맞는데나이는 22. 1학년 1학기 마치고 바로 군대 갔다 와서.”

…….”

이 교양에는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어서 걱정했는데다행이다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친하게 지내요밥 사줄게요.”

괜찮은데.”

내가 너무 들이댔나부담스러워하지는 않아도 돼요그냥 과 선배가 후배 밥 사주는 거니까,”

 

내 이름 같은 건 관심도 없을 걸 아는데 혼자 신나서 떠들었다어떻게 잡은 기횐데놓치기 싫었으니까그 와중에 처음 듣는 목소리가 또 너무 좋고결국 내 보챔에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다그래나한테 관심이 없으면 어때내가 이렇게 관심이 많은데.

 

앞으로 잘 부탁해요.”

 

교수님이 들어오시고그 사람이 앞을 본다나는 그 사람을 조금 더 쳐다보다가한 박자 늦게 앞을 본다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날 싫어하지만… 않으면 좋겠다.

 

*

 

누구?”

이름은 모르겠는데경영학과야새내기눈 크고속눈썹 길고.”

경영학과 새내기는 내가 다 아는데…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는데?”

잘생겼어기업과 경영 때창문 쪽 맨 뒷자리에 앉았었는데

너 태형 선배 말하는 거 같은데?”

 

태형 선배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수업이 끝나고 생각해 보니 난 아직 그 사람의 이름도 모르고 있는 채였다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어떻게 이름도 몰라그래서 다음 수업 시간을 기다리며 과방에 앉아 시간을 죽이던 차에과 회장을 맡고 있는 동기에게 은근슬쩍 이야기를 꺼냈다그 사람에 대해서는 얼굴하고 경영학과라는 것밖에 모르니까혹시 뭐 알 수 있는 게 있을까 싶어서.

 

태형이얘 맞아?”

… 맞아요.”

 

그런데 대답은 의외의 사람에게서 나왔다학생회를 하고 있는 지윤이의 말에주연 선배가 들고 있던 핸드폰을 잠시 뒤적거리더니 나에게 내밀었다나는 주연 선배가 보여준 단체사진 속 환하게 웃고 있는 그 사람을 멍하니 쳐다봤다웃는 모습은 저렇게 생겼구나예쁘다계속 무표정한 얼굴밖에는 못 봐서상상도 못 했는데멍하니 사진을 보고 있으니 주연 선배가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얘 새내기 아냐너보다 선밴데?

 

진짜요?”

내 동기하긴 넌 모르겠네너 입학하기도 전에 군대 갔거든.”

 

새내기가 아니었다고나는 자연스럽게 그 사람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1학년맞죠?’ ‘그냥 선배가 과 후배 밥 사주는 거니까.’ 그리고 얼굴을 붉혔다… 완전 실수한 거잖아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그 사람과 나눴던 대화를 되짚고 있자니 주연 선배가 다시 입을 열었다왜 새내기라고 생각했어태형이가 그렇게 동안인가?

 

1학년 전필 듣고 있으셔가지고……그리고 1학년 맞냐고 물어봤더니 부정을 안 하셔서.”

……걔 1학년은 맞아. 1학기만 다니고 휴학했거든.”

왜요군대?”

… 그건 아닌데…….”

 

주연 선배가 말끝을 흐린다나는 어느새 주연 선배에게 바싹 붙어 앉아 집중하고 있었다주연 선배는 말하기가 곤란한 듯 잠깐 천장을 봤다가옆을 봤다가다시 나를 쳐다본다나는 의아한 표정을 하고 주연 선배를 쳐다본다어차피 학교 다니다 보면 알게 될 거니까주연 선배가 잠시 머뭇대다가 입을 열었다.

 

소문이 이상하게 났었어.”

?”

… 남자한테 고백했다고.”

그게……왜요?”

말하자면 복잡한데… 그게 좀 그렇잖아.”

그 선배가 게이라서요그건 아웃팅 시킨 사람이 잘못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모르겠다아무래도 학기 초고그러다 보니까 분위기가 좀 뒤숭숭했어그거 말고도 소문 많았는데사실인지도 모르겠고어쨌든 걔가 남자한테 고백한 건 사실이니까아무래도 아직 인식이 그렇잖아… 뒷소문이 났지주연 선배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고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그게 뭐야그러니까 지금 태형 선배가 피해자였다는 소리잖아내가 계속 인상을 찌푸리고 있으니 주연 선배가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표정이 고쳐지지가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긴 해그렇게 될 것도 아니었던 거 같은데.”

…….”

태형이 보면 안부 좀 전해 줘.”

 

그럴게요나는 억지로 대답하고 입을 다물었다그래서 그렇게 방어적이었던 건가아무하고도 말도 안 하고내가 그런 일을 당한 것도 아닌데 계속 기분이 내려가는 게 이상했다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 때문에 기분이 이렇게 순식간에 오르락내리락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나 이렇게 쉬운 사람이었나괜히 입 안이 썼다.

 

*

 

그 날의 일은결코 의도했던 게 아니었다실수가 맞았다태형 선배를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이었지만이미 상처가 있을 사람에게 그렇게 대놓고 고백할 생각은 정말맹세컨대 단 한줌도 없었다는 말이다.


섣불리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한 순간의 감정으로 가볍게 다가갔다가 선배한테 더 큰 상처를 줄 수도 있으니까내 마음에 대한 확신을 가진 후에 다가가야 할 것 같았다그렇지만 태형 선배와 계속해서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는 거였다태형 선배를 보고 있으면 자꾸 말을 걸고 싶고계속 쳐다보고 있고 싶고옆에 있고 싶고자꾸 생각나고보고 싶고같이 밥 먹고 싶고영화도 보고 싶고손도 잡고 싶고…….

 

이게 좋아하는 게 아니면 뭐야.

 

내 마음에 확신을 가지게 된 건 한 학기의 절반 정도가 지난 후였고고백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기말고사가 끝나기 직전이었다태형 선배를 보고 있으면 자꾸 웃음이 나왔다심장이 뛰고설레고계속 같이 있고 싶고내가 태형 선배를 좋아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고백을 결심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내가 고백해도 될까내 고백이 선배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 때문에그런데 태형 선배를 보고 있으면자꾸 좋아한다는 말이 튀어나왔다다행인지 불행인지 선배는 내 말들을 농담으로만 치부했지만.


선배가 나만 봐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날 볼 때마다 웃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한 번 생기기 시작한 욕심은 끝을 모르고 커졌다내가 선배를 좋아한다는 걸선배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자꾸 잠들기 전에 선배 얼굴이 떠올라서 잠을 제대로 못 자는 날이 많아지고 있던 차였다같이 수업을 듣는 여자 동기 한지윤이 친구와 떠드는 목소리가 우연히 내 귀에 날아와 꽂혔다.

 

태형 선배 진짜 잘생겼지.’

근데 너무 쌀쌀맞지 않아맨날 무표정하고.’

아냐저번에 과 엠티 때문에 얘기해본 적 있는데되게 친절하셨어엠티는 못 갈 거 같다고 되게 미안해하시는데 내가 더 미안하더라.’

진짜?’

그 때 이후로 인사드리면 되게 어색해하면서 받아주신다진짜 귀여워.’

뭐야너 그 선배 좋아해?’

그런 거 같아.’

 

짜증나나는 팔을 모으고 책상에 엎드렸다나한테만 친절했으면 좋겠는데나한테만 웃어줬으면 좋겠고그런데 태형 선배한테 이런 말을 하면 태형 선배는 내 말을 농담으로 치부하면서 무시해 버릴 게 뻔했다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하면태형 선배는 꼭 선을 그었다넌 여기 이상은 못 와하는 것처럼처음에는 그냥 태형 선배랑 친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그건 내 착각이었다그것도 말도 안 되는 착각.


그렇게 한 학기가 끝나고나는 방학 내내 태형 선배의 머리카락 한 올 볼 수 없었다연락은 자주 했지만 내가 아무리 떼를 써도 태형 선배는 나를 만나 주지 않았으니까그래서 애가 탔다혹시 그 애가 그 사이에 태형 선배한테 고백한 건 아닐까내가 그렇게 귀찮은가혹시 둘이 사귀게 됐나그럴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걸 알면서도 초조했다그렇게 방학이 끝나고나는 태형 선배를 졸라 태형 선배의 시간표에 맞춰 시간표를 짰다마음 같아서는 똑같은 시간표를 만들고 싶었는데그러면 태형 선배가 날 스토커처럼 볼 것 같아서 자제했다시간표가 달라도 밥은 같이 먹을 수 있으니까.


왜인지 모르겠지만 난 2학년 학회장으로 뽑혔고 나는 그 핑계로 선배를 계속해서 과 행사에 참여시키려고 노력했다선배가 과 사람들하고 어울리길 바랐다질투야 나지만선배가 1학년 때 있었던 일 때문에 아웃사이더를 자청하는 게 자꾸 신경 쓰였다그 소문이 있기 전에는 과 생활을 열심히 했었다는 주연 선배의 말도 한 몫 했다그 때 기억이 계속해서 선배를 괴롭히는 것 같아서오지랖인 걸 알았지만 그래도 선배가 다시 과 사람들하고 어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 선배 좋아하는 것 같아요아니좋아해요.”

 

그런데 그걸 내가 다 망쳐 버린 거다다음 날 아침누구의 자취방인지도 모르는 공간에서 눈을 뜨고 떠오른 첫 기억이 그거였다술에 취해 태형 선배한테 고백한 거그것도 과 전체가 보는 앞에서기억이 나자마자 핸드폰을 붙잡고 태형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태형 선배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메신저 답장도피가 말라서 죽어버릴 거 같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마음 같아서는 한강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미쳤지어떻게 실수를 해도 그딴 실수를 하냐고핸드폰만 붙잡고 벽에 머리를 찧으며 주말을 보내고강의실 밖에서 태형 선배의 첫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그리고태형 선배를 봤다날 봐 주지도 않으면 어쩌나 고민했는데태형 선배는 얘기 좀 하자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 줬다.

 

선배미안해요진짜 그 때 거기서 고백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럼 언젠가 고백을 하려고는 했었다는 거네.”

선배를 좋아하는 건 진심이에요…….”

 

선배의 무심한 말투가 오늘따라 속상했다술 취해서 한 고백이라 그런지태형 선배는 선배를 좋아한다는 내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거기서 고백했던 건 실수가 맞지만선배를 좋아한다는 건 진심이라고 말하고 싶었다선배가 너무 좋아서그런데 선배는 나한테 관심도 없는 거 같고그런데 지윤이가 선배가 좋다고 해서속상해서… 그런데 선배는 제 연락 하나도 안 받고

말이 두서없이 이어졌다이렇게 투정부리듯이 얘기하려고 한 게 아닌데입이랑 머리가 따로 놀았다선배 앞에 있으니까 감정이 주체가 안 됐다이 와중에도 뛰는 심장이 원망스러웠다진짜 무슨 병 걸린 거 같잖아내가 생각해도 내가 한심한데선배는 어떨까.

 

난 네 말 안 믿어.”

…….”

너 그냥 착각하는 거야.”

 

선배는 내 말을 믿지 않는다착각 아닌데선배 보자마자 첫눈에 반했어요쉽게 생각한 거 아니에요선배가 생각하는 것보다 오래 선배를 좋아했어요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선배가 날 쳐다보는 눈에 너무 감정이 없어서자꾸만 숨이 막혔다착각이 아니라고내 감정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라고앵무새처럼 정말로 선배를 좋아한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밖엔 할 수 없다는 게 이렇게 무력하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나 좋아한다는 소문 나 봐야 너한테 좋을 거 없어.”

 

그런데 선배는 나를 걱정한다왜냐고 물었더니 그걸 몰라서 묻냐는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고백한 건 나고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시선을 견뎌내야 했던 건 선밴데선배는 왜 나를 걱정할까속상하고미안하고내 자신이 한심한데 이 와중에도 나를 신경 써 주는 선배가 눈치 없이 너무 좋았다.

 

전 제가 선배 좋아한다는 거전교생이 다 알아도 상관없어요.”

…….”

사실인데 뭐.”

쓸데없는 오기 부리지 마.”

오기 아니에요그럼믿어 줄 거예요?”

?”

내가 선배 좋아한다는 거온 전교생이 다 알게 돼도 내가 후회하지 않으면믿어 줄 거냐고요.”

…….”

제가 선배 좋아하는 거.”

 

자신 있었다난 태형 선배를 좋아한다나 자신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6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괜히 고민했던 게 아니었다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내 마음에 대한 확신도 있었다그리고내가 이렇게 대놓고 선배를 좋아한다는 걸 티내면선배랑 같은 위치가 되는 거니까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걸 보여주면 선배도 괜찮아지지 않을까그때랑 지금은 다르다고무서워할 필요 없다고.

 

그게 그렇게 중요해?”

저한테는 중요해요.”

네 맘대로 해.”

 

그래서 그랬다내가 선배의 상처를 낫게 해줄 수 있을 줄 알았다그러나 그건 내 자만일 뿐이었다는 걸난 머지않아 깨달았다.

 

*

 

오늘은 유난히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선배는 알까내가 선배를 경영인의 밤 행사에 데려오기 위해 선배를 꼬셨던 말들은 전부 사실 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는 걸딸기 뷔페도선배에게 햄버거를 사주는 것도결국 그만큼 선배를 만날 핑계가 더 생기는 거니까너무 나만 좋은 거 아닌가선배는 귀찮아하는데가끔 양심에 찔리기도 했지만.


그래서 오늘 밤에 선배한테 언제쯤 딸기 뷔페를 먹으러 갈 건지 물어보려고 했다그런데 선배 옆에 갈 틈이 없었다처음 개최하는 행사라 이 사람저 사람에게 전부 연락했던 걸 이런 식으로 후회하게 될 줄이야태형 선배 보고 싶은데간신히 틈을 내 태형 선배를 찾아갔을 때는 이미 태형 선배가 조금 취한 후였다선배가 취한 모습은 처음 보는 거였는데나보다 윤기 선배가 먼저 봤다는 사실이 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태형 선배가 기분 좋아 보이니 그걸로 됐다 싶었다그리고 태형 선배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소란스러운 곳보다 조금 조용한 곳에서태형 선배랑 단둘이 있고 싶어서.

 

너 진짜 나 좋아해?”

 

그런데선배가 그랬다난 한 손으로 선배를 붙들고 편의점을 찾고 있었고선배는 아무 말 없이 그런 나에게 기대 있었다그것만으로도 심장이 간질거렸는데갑자기 선배의 목소리가 들린 거다당연하죠웃으며 대답하려고 선배를 쳐다보는데선배의 눈이 평소완 달랐다나는 멍하니 선배를 쳐다봤다선배는 여전히 날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고나는 그런 선배를 마주 보고 있고날 보면서조금 풀린 눈을 하고선배가 다시 묻는다.

 

너 진짜나 좋아하냐고…….”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게곧바로 나왔을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좋아해요태형 선배진짜 많이 좋아해요셀 수 없을 만큼 많이 했던 말인데나는 멍청하게 눈을 깜박였다심장이 미친 것처럼 뛰었다선배가선배의 눈이 날 향하고 있다는 게이렇게… 머릿속이 하얘질 정도로 기분 좋은 일이었나?

 

태형 선배.”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좋아한다는 말을 꺼내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다태형 선배는 내가 태형 선배를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으니까내가 몇 번이고 좋아한다고 말해도태형 선배는 그냥 웃고 말았으니까태형 선배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나태형 선배가 많이 취한 건가심장은 여전히 빨리 뛰고간질거렸다선배의 입이 다시 열린다나는 숨을 참는다.

 

나는,”

전정국.”

 

누군가 찬물을 끼얹은 바람에 잠에서 깬 기분이다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흐릿한 인영이 조금씩 가까워졌다나는 인영을 파악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그러니까… 저 사람이

 

앞에 설마김태형?”

선우 선배.”

 

선우 선배성이… 박씨였나나는 태형 선배를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줬다내가 1학년 때, 2학년 학회장이었던 선배였다날 유난히 잘 챙겨 줬었는데내가 선우 선배한테도 연락을 했었나하도 많은 사람에게 닥치는 대로 연락을 돌렸던 터라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그건 그렇고어찌 됐든 지금은 선우 선배가 달갑지 않았다태형 선배랑 단둘이 있고 싶었는데게다가 지금 태형 선배가 나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했고.

 

맞네김태형오랜만이다.”

 

선우 선배가 태형 선배에게 아는 척을 한다그러고 보니 태형 선배랑 선우 선배랑 동기겠구나나는 멍하니 생각했다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하는 걸 보면사이가 나쁘진 않은 건가윤기 선배 같은 케이스인가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엉켰다.

 

선우 선배진짜 오셨네요.”

진짜 오셨네요라니꼭 오라고 해서 휴가 맞추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최대한 티 나지 않게 말한 거였는데썩 달갑지 않아 했던 게 티가 났던 모양이다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하필 지금이냐고그러나 내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동기 하나가 가게에서 나오더니 날 불렀다교수님이 찾는다면서진짜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나는 태형 선배를 잡았던 손을 살짝 놓았다.

 

선배잠시만요잠깐만 있다가 얘기해요.”

 

그래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모르겠다어차피 분위기는 깨졌고선우 선배가 태형 선배랑 얘기할 동안 나는 교수님과의 대화를 끝내고 오면 되는 거다그리고 선배를 데리고 편의점이든어디든도망가야지핸드폰도 꺼 버릴 거다나는 재빨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1초라도 빨리 교수님과의 대화를 끝내고태형 선배한테 가고 싶어서그러나 교수님과의 대화를 끝내고 다시 밖으로 나온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아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의 태형 선배였다.

 

나 갖고 놀면서 재밌었어?”

 

그런 얼굴은 처음 봤다.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선배를 보면서선배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됐다고 생각했는데그렇게 서럽게 우는 얼굴은 처음이었다우는 선배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혀끝에서 맴도는 말들은 소리가 되어 나가지 못했다숨이 막혔다.

 

내 눈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

 

심장에 추가 달린 것처럼쿵 하고 떨어졌다끝도 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아무 말도 나오지가 않았다이게 무슨 상황인지선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하나도 이해가 되는 게 없는데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뭔가 오해하고 있는 거라고 얘기해야 하는데선배가 우는 얼굴에 머릿속이 새하얬다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한참동안 날 노려보던 선배는 그대로 돌아서서 사라져 버렸다나는 그때까지도 멍하니 서서 선배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선배는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고옆에는 윤기 선배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나는 윤기 선배를 보고 눈을 깜박였다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야 하는데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우두커니 서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데 윤기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선우가 왜 여기 있어?”

?”

니가 불렀냐고.”

선배죄송한데 제가 지금 정신이 없어서,”

김태형아까 전에 강선우하고 마주친 거 아니야?”

 

나는 멍하니 윤기 선배를 쳐다봤다윤기 선배가 그런 나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그게… 왜요불안한 느낌에 내가 이어 물었다태형 선배와 선우 선배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태형 선배가 평소완 달랐다선우 선배가 왔는데도 뒤도 안 돌아보고원래 살가운 사람은 아니라지만선우 선배랑은 동기일 텐데그리고 선우 선배가 태형 선배한테 아는 척도 했고

 

김태형 소문 못 들었어?”

소문이요?”

아니너 안다고 그랬잖아태형이가 강선우한테 고백해서

?”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내 반응에 윤기 선배가 몰랐냐는 듯 나를 쳐다본다그게 무슨 소리에요태형 선배가 선우 선배한테 고백했다고요내 말에 윤기 선배가 잠시 망설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너 김태형이 남자한테 고백했던 거 알지 않았어?

 

아니그게 선우 선배인 줄은

강선우가 너한테 얘기 안 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그런 얘기 한 적 없어요내 말에 윤기 선배의 미간이 더욱 좁혀진다그 새끼가 그럴 리가 없는데자기 스토커 있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

 

스토커요?”

아니진짜 스토커는 아니고,”

스토커 얘기는 한 적 있어요그냥 1학년 때자기 쫓아다녔던 스토커 하나 있었다고과 전체에 소문이 나니까 쪽팔렸는지 휴학했다고

미친 새끼.”

 

윤기 선배가 욕하는 건 처음 봤다내 말에 윤기 선배가 짜증난다는 듯 머리를 털었다나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아 입술을 깨물었다씨발한 번 더 잇새로 욕을 내뱉은 윤기 선배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잇는다.

 

후배한테 선배 뒷담 까는 거 같아서 말 안 했는데이미 니가 알고 있는 줄 알았고.”

…….”

김태형이 강선우한테 고백한 건 맞아그런데 그 전에 김태형 싸고돌면서 다른 애랑 더 못 친해지게 김태형 옆에 붙어 있던 건 강선우였고.”

그게 무슨…….”

그래 놓고 김태형을 병신 만든 거야자기는 싫었는데걔가 자기가 좋아서 일방적으로 따라다닌 거라고그게 자꾸 부풀려져서 스토커가 된 거고강선우는 그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고.”

…….”

내가 그걸 미리 알았어야 됐는데그 때 한창 시험기간이어서 전혀 몰랐어나중에 보니까 이미 상황은 끝난 뒤더라고김태형은 과에서 이미지 병신 되고 휴학하고강선우는 피해자 되어 있고.”

 

말이 안 나왔다내가 태형 선배한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손이 떨렸다그러니까내가지금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윤기 선배가 나를 툭 쳤다전정국그러나 나에겐 그런 윤기 선배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머릿속이 태형 선배만으로 과부하가 걸려 있었다태형 선배선우 선배고백스토커트라우마문장이 쪼개지고단어가 공중에 흩뿌려졌다그러니까나는 지금태형 선배의 트라우마를 자극한 거다그것도 당사자를 앞에다 불러서단 둘이 있게 한 거다내가.

 

정신 차려너 모르고 그런 거잖…….”

태형 선배가,”

…….”

저보고 자기 갖고 놀면서 재밌었냐고,”

…….”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래요.”

울어?”

 

내가 우는지도 몰랐다심장이 불안하게 뛰고선배한테 미안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눈가가 시렸다눈물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선배가 날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그 오해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보다 태형 선배가 다시 받았을 그 상처가 얼마나 클지 가늠도 못 하겠어서그게 너무……나 자신이 한심했다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주제넘게 군 대가일까그럼 벌은 내가 받아야 하는 건데왜 상처는 태형 선배가 받았을까.

 

… 어쩌다 이렇게 됐냐.”

…….”

일단 이거.”

 

윤기 선배가 복잡한 듯 머릴 쓸더니 나에게 태형 선배의 가방을 건넸다이거 태형이가 두고 간 건데어차피 전해줘야 하는 거니까이거 주면서 말이라도 꺼내봐윤기 선배의 말에 나는 멍하니 윤기 선배를 쳐다봤다호흡이 불안정하게 들썩였다태형 선배가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그랬는데태형 선배를 다시 볼 자신은 없는데사과는 해야 했다태형 선배가 이대로 나를 오해하는 게 걱정돼서가 아니라나한테 배신당했다는 게 태형 선배를 더 괴롭힐까봐그런데 어떻게 태형 선배 앞에 설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나는 멍하니 윤기 선배를 쳐다보다 이내 가방을 받아들었다어떻게든사과해야 했으니까.

 

*

 

차마 태형 선배한테 연락도 하지 못한 채로 밤이 지나고 그 다음 날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간 학교에 태형 선배는 없었다학교를… 온 거 같긴 한데나랑 듣는 수업에는 코빼기도 안 보였다나는 태형 선배에게 주려고 가져온 가방을 괜히 만작였다밤새도록 어떻게 태형 선배한테 말을 꺼내야 할지그것만 생각했는데도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가 않았다애초에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할까속이 쓰렸다태형 선배를 좋아하는데태형 선배를 곤란하게만 만드는 내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

 

그렇게 태형 선배에게 사과하기는커녕 얼굴도 못 본채로 수업이 끝나고윤기 선배에게 물어 태형 선배의 자취방 앞에 찾아갔다학교 앞에 반듯하게 지어진 건물을 올려다보면서심호흡을 했다이 안에 태형 선배가 있을까어떤 말부터 꺼내야 하지건물 벽에 기대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시야 안으로 태형 선배가 들어왔고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태형 선배는 날 보지 못했을 거다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겨우 하루 못 본 건데그 전에는 어떻게 살았지괜히 주먹이 꽉 쥐어졌다솔직히겁이 났다태형 선배가 나한테 어떤 말을 할지태형 선배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지 몰라서어떻게 사과를 해야 하는지도 감이 안 잡혔으니까.


괜히 핸드폰을 들었다가내려놨다가를 반복하다가땅바닥에 앉아 있다가일어섰다가입술은 하도 깨물어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태형 선배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태형 선배가 날 노려보며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던 말이 연달아 떠올랐다진짜… 한심하다내가 그러고 있는 동안 해는 져서 하늘이 깜깜해져 있었다해가 지니 쌀쌀해져 얇게 입고 온 옷이 무색하게 몸이 살짝 떨렸다요 근래 경영인의 밤이다 뭐다 해서 정신도 없었고태형 선배 때문에 제대로 자지 못한 몸이 악을 썼다그런데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가방도 전해 줘야 하고태형 선배한테 사과도 해야 하고그리고… 태형 선배가 보고 싶었다.

 

…….”

 

얼마나 거기서 그러고 있었던 건지깜깜했던 하늘에 푸른빛이 돌기 시작했다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해가 뜨고 있었다지금 몇 시야핸드폰을 확인하니 배터리가 달랑달랑한 핸드폰이 새벽 5시를 보여줬다나는 한숨을 내쉬었다결국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 눈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마.’


태형 선배에게 사과하는 게 무서운 게 아니었다태형 선배가 나한테 뭐라고 할까봐 무서운 것도무서운 건내가 태형 선배의 앞에 나타나는 게선배한테 더 큰 상처가 될까봐내가 다시 그 악몽을 불러오는 기폭제가 될까봐그게 무서웠다나는 쭈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추운 곳에서 오래 있었던 몸이 아우성을 쳤다눈은 뻑뻑하고목이 잠겨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나는 잠시 망설이다 편의점으로 갔다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포스트잇이랑볼펜이랑초코 우유랑 딸기 우유를 샀다그리고 천천히 적어 내려갔다미안하다고선배한테 상처를 줄 생각은 절대 아니었다고선우 선배를 부른 건 맞지만 정말 몰랐다고.


몇 번이나 적었다가 지우고너덜너덜해진 포스트잇을 버리고몇 번이나 수정해서 결국 7시가 다 돼서야 포스트잇을 완성했다그리고 집 문 앞에 우유와 함께 가방을 걸어 뒀다나는 계단 쪽에 숨어 선배가 나오기만을 기다렸고얼마나 기다렸을까선배가 문을 열고 나왔고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선배가 가방을 발견했다포스트잇도선배의 시선이 가방에 머물렀다가포스트잇을 읽었다가우유에 멈췄다선배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애가 탔다나는 불안하게 뛰는 심장에 손을 올렸다선배가 피곤한 듯 눈가를 부빈다잠시 우두커니 멈춰 서서 우유를 쳐다보던 선배가 한숨을 내쉬었다그리고가방을 챙기고포스트잇을 구겨 버린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닌데누가 쿡쿡 찌르는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선배는 집 안으로 들어가 내가 전해준 가방을 놓고다시 밖으로 나온다그리고 다시 우유를 쳐다보고발걸음을 옮겼다우유는 그냥 그대로 놓아둔 채로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눈이 시리고머리가 지끈거렸다그게 내가 기억하는 그 날의 마지막이었다.

 

*

 

눈을 떴을 땐병원 천장이 보였다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윤기 선배가 한심하단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여기… 어디에요내가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그렇게 묻자 윤기 선배가 내 팔에 꽂혀 있는 주삿바늘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응급실멍청한 놈아.”

…….”

가지가지 한다너도.”

…….”

스트레스랑 수면부족이 원인이래몸살기운도 있고.”

 

윤기 선배가 한숨을 내쉬었다계단에 쓰러져 있던 걸동네 주민이 신고해서 데려왔어너 학교 안 왔길래 전화했더니 의사가 받아서 응급실이라 그래서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이어지는 윤기 선배의 말에 나는 죄송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그런 나를 쳐다보던 윤기 선배가 이내 내 머리를 툭 쳤다.

 

나한테 미안할 게 뭐가 있어.”

그래도…….”

정신 차렸으면 이거만 다 맞고 퇴원하면 돼당분간 집에서 푹 쉬래.”

 

태형 선배는요묻고 싶은데 차마 입이 열리지 않았다그런 나를 눈치 챘는지 윤기 선배가 태형이는 학교 나왔더라너 여기 있는 건 몰라사과는 했냐하고 물었다나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받아주진 않은 거 같지만사과를 하긴… 했으니까선배가 내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너나 태형이나고생하네.”

…….”

괜찮아질 거야.”

 

뭐가 어떻게 괜찮아진다는 걸까괜찮아질 수 있을까태형 선배를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할 수 있을까나는 고개를 숙였다속이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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