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

 

태형은 마른 입술을 살짝 혀로 핥았다. 그러지 않으려 했음에도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가 어쩔 수가 없었다. 목욕을 마치고, 화려한 옷을 몇 겹씩 겹쳐 입고. 그 자체만으로도 무거운 가채를 머리에 얹은 뒤 보기만 해도 무거운 장신구들을 몇 개씩 꽃아 넣고. 분칠을 하고, 입술을 바르고. 평소 같았으면 이건 하지 말자, 저건 하지 말자 말이 많았을 태형은 머리에 장신구를 꽂아 넣을 때쯤엔 이미 영혼이 잠시 외출을 나간 상태였기에 그저 가만히 상궁들의 손길을 받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말을 할 기운조차 남아있질 않았으니까.

정국의 말에 얼어버린 듯 멈추었던 심장은 정확히 3초 뒤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태형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타오르는 얼굴에 정국에게 더 대꾸도 못 한 채로 욕실 안으로 도망치듯 몸을 숨겼다. 물속에 코를 박고 죽을까. 여기에 계속 있다가 기절해서 나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코를 박고 죽기에 물속은 너무 답답했고, 기절해서 나가기에 태형은 너무나 건강했다. 결국 온갖 꽃과 향유가 듬뿍 뿌려진 물속에서 편안한 목욕을 즐기고 나와 한층 향기로워진 태형은 제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며 달아오른 볼을 숨겼다. 소복 차림의 촉촉이 젖은 태형을 잠시 응시한 정국은 이내 고개를 돌리고 그럼 이따 봐요, 하고는 방을 나갔고. 태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더 따져 봐야 더 수치스러워지기만 할 텐데. 그냥 묻자. 태형은 제가 현대로 다시 돌아갈 때 쯤, 과거의 기억을 지우는 약이 나와 있기를 바라는 부질없는 소원을 빌었다.

 

…….”

 

그런데 이건 또 뭐야……. 태형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다 이내 포기했다. 합궁을 준비하는 소란스럽고 복잡한 과정들을 다 마치고 난 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쳐버린 몸을 가누며 가만히 앉아 있는 태형에게 상궁은 가까이 다가와 눈을 감으라고 말했다. 태형은 그에 살짝 눈을 감았다, 곧이어 제 눈 위에 닿는 이질적인 감각에 황급히 눈을 떴었다. 뭐 해?!

 

마지막이옵니다, 마마.’

이게 뭔데!?’

꿀입니다, 마마.’

 

꿀을 왜……. 그러나 태형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상궁이 뭐 그런 걸 새삼스럽게 물어보냐는 듯 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합궁날엔 당연히 해야 하는 어떤 관습인 모양이었다. 그럼 여기서 제가 그걸 왜 내 눈에 발라!!’하고 외치는 것은 이상한 일이 될 테고. 결국 태형은 익숙한 척 다시 곱게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세밀한 붓으로 꼼꼼히 제 눈꺼풀에 꿀을 바르는 상궁을, 제 앞에 펼쳐질 미래처럼 깜깜한 시야를 견뎌내면서.

말하자면 섀도우 같은 건가. 하고 생각했던 태형은 이내 제 몸을 부축해 일으키는 상궁들에 아, 내가 스스로 일어날게, 하며 눈을 뜨려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눈이 떠지지 않았으니까. 제 눈에 발랐던 게 가루 같은 것이 아니라 끈끈한 꿀이었음을 실감한 태형이 눈을 감은 채로 눈을 굴렸다. , 뭐지? 합궁 하는 내내 눈을 못 뜨게 하는 게 목적인 건가?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용기는 없는 태형은 결국 상궁들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추정)으로 안내되었다. 마마.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저희 상궁들이 항상 곁에 있을 것입니다. 태형을 방 한가운데에 푹신한 이불 위(역시나 추정)에 앉힌 후 귀에 다정하게 속삭인 상궁은 그 말을 마치고 다시 한 번 태형의 옷매무새와 머리 모양을 다듬어 주더니 이내 방을 나간 듯 방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태형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이라도 뜨고 뭔가를 볼 수 있으면 김장감이 조금은 덜 할 텐데. 눈이 보이지 않으니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더욱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뜨거워질 수 없을 것처럼 뜨거워진 제 얼굴 온도라든가, 세차게 뛰는 심장이라든가. 잔뜩 곤두선 온 몸의 솜털이라든가. 전정국은 언제쯤 들어올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까. 전정국은 이런 꼴을 하고 있는 나를 어떻게 생각아니 이건 왜 생각해. 아무튼. 여러 가지 생각들이 태형의 머릿속에서 얽히고설키는 와중, 잔뜩 예민해진 태형의 귀에 드륵, 하고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미친 것처럼 뛰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문 소리는, 100%, 아니 200%. 전정국일 테니까.

 

…….”

 

마루를 밟는 조용한 발걸음 소리, 비단옷이 바닥과 닿아 마찰하는 소리. 점점 가까워지는 인기척, 그리고 조금씩 진해지는 익숙한 향기. 전정국의 향기. 태형은 이미 감은 눈을 조금 더 꼭 감았다. 심장아 제발 정신 좀 차려지금 네가 이렇게 뛸 때가 아니란 말이야……. 태형은 가만히 주먹을 꼭 쥐었다. 나중에 진짜로 결혼을 해서 첫날밤을 치르게 된다고 해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떨리는지 그 이유를 태형 자신도 알 수 없었음에도 태형은 제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진짜 기절하는 거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태형이 형.”

…….”

 

정국의 향기가 순간 확 하고 가까워지고, 정국이 제 앞에 앉는 기척이 나고. 그러니까 당연히 제 앞에 앉아 있을 사람은 정국일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이 목소리는 너무나도 당연한 거고 예상한 거였는데. 살면서 몇 만 번은 들었을 익숙한 제 이름인데.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익숙한 정국의 목소리인데. 하나부터 열까지 조금도 새로울 것 없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예상했던 그대로인데 태형은 순간 쿵, 하고 내려앉은 제 심장에 숨을 멈추었다. 전정국의 목소리가 이랬었나? 분명 정국의 목소리가 맞는데.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너무 낯설게 들려서. 태형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

, …….”

머리, 무겁죠. 내려줄게요.”

 

민망한 듯, 조그맣게 헛기침을 한 정국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고 태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감겨져 있는 눈은 답답했지만,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겠다고, 태형은 생각했다. 눈을 뜨고 있었으면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또 한참을 헤맸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다고 감고 있는 건 더 이상하고. 차라리 이렇게 반 강제적으로 감겨져 있으니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

 

태형 자신만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긴장을 한 건 정국도 마찬가지인 듯, 정국도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조선에 떨어진 이후로 이상할 정도로 거침없고 아무렇지 않아 보였었는데. 어느새 제 뒤로 간 정국이 천천히 제 머리에 꽂힌 장신구들을 내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익숙지 않은 듯 순간순간 음, 하고 말끝을 흐리는 목소리도. 태형은 침을 삼키는 제 소리가 혹시나 정국에게 들릴까 조심조심 침을 삼켰다. 너무가까워. 분명 가채랑 장신구 때문에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정국의 숨결이 제 뒷덜미에 닿는 것 같은 오싹한 느낌에 태형이 살짝 몸을 떨었다.

 

…….”

 

왜 그렇게 긴장했냐고, 떨리냐고. 농담이라도 하지. 이상할 정도로 아무 말이 없는 정국에 오히려 애가 타는 쪽은 태형이었다. 그렇다고 제가 먼저 말을 꺼내기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국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태형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정국도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는지 어느새 태형은 무겁게 제 머리를 짓누르던 무게가 한결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 그래. 고맙다고 말을 꺼내야겠다. 태형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간신히 말을 골라 막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제 뒤에서 작게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태형이 눈을 반짝 뜨려다가 실패하고 입을 열었다.

 

너 웃어?”

, 그냥, .”

왜 웃어? 뭐 웃긴 거 있어?”

 

웃어서 기분이 나쁜 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유 모르게 심장이 뛰고, 얼굴이 빨개지고, 모든 감각 하나 하나에 집중이 되다 보니 숨이 막혀서 기절할 것 같았는데 정국은 웃고 있다니. 태형이 반색을 했다. 뭐가 웃긴데? 나도 알려줘. 나 지금 눈 감고 있어서 안 보,

 

형이랑 결혼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어서요.”

 

뭐라고? 신이 나서 말을 이으려던 태형의 입이 한 순간 굳었다. 태형은 잠시 심장의 과부하로 인해 제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전정국 방금 뭐라고 한 거야? 결혼? 태형은 순간 제가 어렸을 적에 집에서 주전자의 물이 다 끓었을 때 나던 삐, 하는 소리가 제 귓가에 메아리치는 것을 경험했다. 방금 내가 헛것을 들은 건가. 태형이 정국의 말에 아무 반응이 없자 정국이 다시 말을 이었다.

 

옛날에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신혼여행 다녀오시더니 그랬거든요. 신혼 첫날밤에 제일 먼저 하는 게 뭔지 아냐고. 너희들이 생각하는 거 다 아니고, 신부 머리 풀어주는 거라고.”

…….”

실삔이랑 고무줄 엄청 많이 사용하고, 스프레이 뿌려서 단단히 고정시켜 놓은 머리라 신부 혼자서는 절대 못 풀어서, 호텔방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침대 위에 앉아서 머리 풀어 주는 거라고.”

 

그런데 그게 엄청 긴장되고, 설레셨대요. 되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정국이 조곤조곤 말을 이어 갔다. 갑자기 그 생각이 나서요. 정국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말을 멈췄다. 그러나 조용하고 차분한 정국과는 다르게, 태형의 심장은 또 미친 듯이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 쟤는 무슨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아니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는 게 맞긴 한데! 자꾸만 연상되려 하는 신혼 첫날밤을, 자신은 애써 무시하려고 하고 있었던 거였는데 그걸 정국은 아무렇지도 않게 화제로 꺼내 놓으니 붉어지는 얼굴은 도리어 모조리 태형의 몫이 되었던 것이다. 태형이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 너는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끔찍?”

그래!”

저랑 결혼하는 게 끔찍해요?”

 

애써 농담으로 넘기려고 한껏 올린 목소리로 받아친 건데, 제 머리에 부드럽게 닿던 정국의 손길이 순간 멎었다. 그리고 들리는 가라앉은 목소리. 태형은 순간 이상해진 공기의 흐름에 하던 말을 멈추었다. 분위기 뭐지. 나 뭐 잘못 말했나. 태형은 다시 입을 열었다.

 

, 아니. 그게 아니라. 무슨 남자 둘이서,”

형 그런 쪽으로 편견 있는 사람이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 왜 나 쓰레기 된 기분이지?? 태형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태형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버둥대자 정국이 가만히 있어요, . 머리 엉켜요. 하고 다시 태형의 머리를 잡았다. 그러나 할 말을 찾지 못한 태형은 계속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러니까, 대한민국은 아직 동성 결혼이 합법화 되지 않았잖아. 내 말은 그게 그러니까…….

 

끔찍하단 건 아니고…….”

…….”

말이 잘못 나왔어. 미안. 나 그런 쪽으로 편견 없어…….”

 

결국 태형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제 동성애에 관한 평소 견해와 함께 말끝을 흐리며 사과하자 정국이 됐어요. 하고 태형의 목을 장난스레 톡 건드렸다. 화난 건 아니구나. 아까 한없이 낮아져 있었던 목소리와는 미묘하게 달라진 정국의 목소리에 태형이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제 머리가 완전히 가벼워졌고, 정국이 제 뒤에서 몸을 일으켜 제 앞으로 앉는 기척이 났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태형은 침을 꿀꺽 삼켰다. , 이제 이렇게 잠들면 되는 건가.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답답하긴 했지만, 어차피 잠들 거면 크게 상관도 없었다. 태형이 치렁치렁한 옷에 감싸져 있는 제 손을 쥐었다 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국의 표정도 읽을 수가 없고. 잠시 머리를 굴리던 태형이 그럼 이제 좀 누울까, 하고 입을 열려던 그 순간이었다.

 

전하. 중전 마마의 눈을 뜨여 주십시오.”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태형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래봤자 감겨 있는 눈 때문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태형의 심장이 다시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기척이 느껴질 만큼 바로 옆은 아니었지만 꽤 가까이서, 500m 정도? 선명하게 들린 목소리. 이 방에 나랑 전정국만 있는 게 아닌가?! 태형이 다시 정국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이게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여기 누구 있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곤히 잘 얘기했으면서 혹시나 제가 말을 편히 하는 것이 밖에 들릴까 태형이 최대한 정국에게 가까이 붙어 조용히 말했다. (물론 눈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거리는 순전히 태형 스스로 가늠한 거였다.)

 

, 찮아요. 방에 우리밖에 없어요. 안 들렸을 거예요.”

그런데 왜 이렇게 가까이서 들려? 밖에 누구 있어?”

형 몰랐어요?”

 

그러나 정국은 도리어 제게 되묻는다. 태형이 뭘? 하고 묻자 정국이 아……. 하고 말끝을 흐렸다. 난 형이 그래서 긴장한 줄 알았는데. 이어지는 정국의 말에 태형은 삽시간에 불안해졌다. 내가 뭘 모르는 거지? 뭘 몰랐기에 내가 긴장을 했어야 했던 걸까. 태형이 불안으로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뒤이어 이어진 정국의 말은,

 

이 방 문 바로 밖에 상궁 8명 있어요.”

 

태형의 넋과 어이, 어처구니가 다함께 손을 잡고 잠시 외출을 다녀오게 하기에 충분했다.

 

*

 

이게 무슨 일이야…….”

 

태형은 멍하니 중얼였다. 아직까지도 정국이 한 말의 충격이 가시질 않고 있었다. ‘저희 상궁들이 항상 곁에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이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내 옆에 있을 거다 뭐 그런 관념적인 얘기가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내 옆에 있겠다는 뜻이었어? 태형은 왠지 모를 배신감에 허허 웃었다.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나는구나. 태형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이 상황에서 뭘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해?

 

형이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원래 왕이랑 왕비가 합궁을 할 때는 그렇게 한대요. 그래서…….”

 

정국이 말끝을 흐렸다. 태형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 대체 왜?! 왕과 왕비가 잠자는 와중에 뭐 큰일이라도 날까 봐? 태형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속삭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전하, 마마의 눈을…….”

잠시, 중전과 담소를 나누는 중이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상궁의 말을 끊은 정국이 다시 태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지. 사실 정국도 아주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태형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렇게 긴장한 건 줄 알았는데. 난처한 것은 정국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나도 모를 수가 있지. 상궁들이 말 안 해준 건가. 정국은 입술을 깨물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태형이 하나도 모른다면 앞이 너무 깜깜했다. 어떻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설명해. 그러나 제 앞의 태형은 눈까지 감은 채로 저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꼭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 느낌에 정국이 입술을 핥았다.

 

, 일단 눈부터…….”

, 이거 떠도 되는 거야?”

…….”

 

진짜 하나도 모르나봐. 정국은 볼을 쓸었다. 신부가 초야에 삿된 것을 보지 않게 하려는 의도에서 처음 발라 놓게 되었다는 신부 눈의 꿀은, 신랑이 혀로 핥아 주는 것이 관례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방 안에는 꿀을 녹일 만한 액체 따위는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고.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초야도 아니고, 궁중 예법도 아닌데다가 그 얘기를 해 준 내시도 장난스레 얘기하기에 그냥 지나가듯 한 말인 줄 알았는데. 방에 들어서자 눈을 감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태형에 정국도 조금 당황했었다. 정국은 바짝 마르는 입술을 다시 혀로 핥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정국이라고 이 상황이 긴장되지 않을 리 없었으니까.

 

그럼 뜨게 해 줘. 나 너무 답답해.”

 

. 그런데 내가 하는 말들 밖에 들리지는 않겠지? 그럴 거리는 아니지?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에 기분이 조금 나아진 듯, 한 톤 정도 밝아진 목소리로 태형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고 정국은 그건 아닐 거예요. 거리가 좀 있어서……. 하고 말끝을 흐렸다. 태형이 다행이다, 하고 살짝 웃었다. 태형의 살짝 말려 올라간 입꼬리에 정국이 주먹을 꼭 쥐었다 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긴장해 본 일이 있었나? 수능 때도 이렇게 긴장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뭐 해? 나 빨리 눈 좀 어떻게 해 줘.”

.”

? 이거 너무 답답해.”

 

, 모르겠다. 머리는 핑핑 돌고, 태형은 보채고. 정국은 결국 충동적으로 태형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놀란 듯, 혹은 지금 제 눈가에 닿은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듯, 태형의 몸이 순간 굳었지만 정국은 태형이 뭐라 말을 잇기 전에 혀를 내어 태형의 눈가를 살짝 핥았다. 어차피 다른 방법은 없으니까. 달콤한 꿀이 혀를 통해 뇌까지 전해졌다. 달고, 달고, 달다. 너무 달아서 머릿속이 울리고, 심장이 찌릿했다. 정국은 눈을 감았다. 태형은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정국은 그런 태형의 팔을 저도 모르게 조금 더 꼭 잡았다. 태형이 움직이지 못하게.

 

…….”

 

한 쪽 눈의 꿀이 녹아 없어지고, 다른 쪽 눈으로 입을 옮겨 다른 쪽 눈의 꿀까지 다 녹여 없앤 다음 정국은 손을 들어 제 옷소매로 태형의 눈가를 꾹 눌렀다. 태형은 그때까지도 미동도 않고 있었다. 태형의 눈가를 살살 눌러 녹은 꿀까지 깨끗하게 닦아낸 정국이 손을 내리자, 어느새 눈을 뜬 건지 태형이 원래도 커다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정국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것 같은데.

 

, 지금 뭐…….”

…….”

…….”

 

태형이 저도 모르게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마지막 남은 정신이 지금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안 된다고 알려 준 덕분에 태형은 제 소리를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이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 태형의 입 안에서 울려퍼졌고 그런 태형을 쳐다보며 정국은 꿀꺽 침을 삼켰다. , 나 발로 걷어차이는 거 아닐까.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정국은 긴장한 상태로 가만히 앉아 그런 태형을 응시했다.

 

, 이거, 지금, , …….”

…….”

, , 입으로!”

 

태형이 검지 손가락을 제 눈에 가져다 댔다가 다시 정국의 입술을 향해 뻗었다가를 반복했다. 정국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사실은 저도 충동적으로 저질렀던 거라,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얬다.

 

전하, 해시(亥時:21:30~23:29)가 다 되었습니다. 이제 중전마마의 옷고름을 풀어 주십시오.”

 

차마 누가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한 채로 얼마나 그렇게 마주 보고 앉아 있었을까, 문 밖에서 상궁의 목소리가 들렸고 태형은 그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의 형태로 되어 있는 것 같은 방 안에는 병풍과 촛불 정도가 은은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 전혀 몰랐는데, 다행히도 사이에 얇은 창호지로 된 문이어서 그렇지 문과 제가 앉아 있는 침구와는 거리가 꽤 있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긴장한 탓에 목소리가 작게 나왔었는데 그 덕에 정국에게 말을 편하게 하는 제 목소리가 밖에 들렸을 것 같진 않았다. 태형이 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쉬다 이내 저를 쳐다보고 있는 정국과 눈을 마주치고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 뭘 봐. 괜히 한 번 투정하는 것은 잊지 않고.

 

전하, 혹 옥체가 편치 않으십,”

, 아니다.”

 

태형과 정국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을 눈치 챘는지 상궁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고 그 목소리에 괜히 화들짝 놀란 태형과 정국의 시선이 다시 맞닿았다. 촛불이라곤 하지만 사방이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궁들이 제법 눈치가 빠른 모양이었다. 저 한지에 구멍 뚫린 건 아니겠지. 설마. 살짝 불안해진 마음에 태형이 살짝 몸을 움직여 창호지를 살펴봤다. 다행히도 그런 무엄한(?) 짓은 저지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옷 안 불편해요?”

…….”

 

잠시간의 침묵 후에 정국이 먼저 말을 꺼냈고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제 옷을 내려다봤다. 안 불편할 리가. 눈이야 겨우 뜨게 됐다지만, 평소에도 치렁치렁하고 무거워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던 왕비의 복은 오늘따라 몇 배는 더 무겁고 불편해 태형은 팔을 움직이는 것도 조금씩 힘겨워지고 있었다. 무슨 옷이 이렇게 화려하고 불편해. 태형이 괜히 입을 삐죽였다. 게다가 웬 옷에 매듭은 이렇게 많은지. 가만히 제 옷을 내려다보던 태형이 이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좀.”

그럼 잠깐만요.”

 

태형의 말을 들은 정국이 살짝 고개를 기울여 태형의 단단히 매어져 있는 옷고름을 살펴보더니 이내 손을 들어 천천히 태형의 옷고름에 가져갔다. 그리고 그 손에 태형은 저절로 흡, 하고 숨을 멈췄다. 팔을 드는 것도 힘든데, 제 스스로 이렇게 복잡하고 무거운 매듭을 풀 수는 없었으니 정국의 손을 빌려야 하겠다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붙어 앉아 정국이 제 옷고름을 풀어 주고 있는 이 상황은 생각보다도 더그러니까…….

태형은 숨을 멈춘 채로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옷들끼리 스치는 비단 소리와 함께 옷이 한 겹씩 벗겨지고 있었다.

 

…….”

 

한 세 겹 쯤 벗겼을까. 정국이 잠시 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왜 갑자기 멈추나 싶어 태형이 살짝 내려다보니 딱 봐도 복잡하고 단단하게 매어져 있는 매듭이 눈에 들어왔다. 정국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다시 손을 움직여 천천히 매듭을 풀었다. 태형이 조그맣게 입술을 벌렸다. 얘 왜 이렇게 여자 한복 고름을 잘 풀어? 되게 많이 풀어 본 솜씬데? 완전 선수아니 한복 잘 벗기는 거 가지고 선수라고 할 수 있나? 그런데 이런 건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태형의 머릿속은 곧 21세기에서 태어나 21세기의 삶을 살아 왔을 정국이 어떻게 이토록 한복 매듭을 익숙하게 풀어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점으로 가득 찼다. 그것도 심지어 여자 한복을. 그래, 생각해 보니까 그 때도. 잠에서 갓 깨서 몽롱했던 주제에 잘도 제 매듭을 매어 줬었다. 그것도 예쁘고 단정하게. 전정국 알고 보니 종갓집 자손이었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여자 한복을! 머리 장신구 풀어 주는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 생각을 마구잡이로 떠올리며 정국의 동그란 뒷통수를 내려다보다 갑자기 차오르는 묘한 배신감, 내지는 억울함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제 옷고름을 푸는 데에 열중하고 있는 정국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 잠깐만 전정국.”

……?”

너 왜 이렇게 옷고름 잘 푸냐?!”

?”

되게 많이 풀어 본 솜씨다?”

 

정국의 동그란 눈이 자신을 향하고,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속에 있는 말을 내뱉고. ? 그리고 뒤이어 그게 무슨 개똥같은 소리냐는 듯한 정국의 시선이 태형에게 닿고.

그제서야 제가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자각한 태형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 나 방금 무슨 소리를 한 거야? 그러니까 이건 마치 꼭, 남자친구와 첫날밤을 치루기 위해 온 호텔에서 제 옷을 벗기는 남자친구의 손을 제지하고 자기, 왜 이렇게 능숙해?’ 하고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남자친구를 바라보는 여자 같잖아.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 시바. 이 상황을 어떻게 해명하지? 아니, 전정국이 능숙하건 말건 선수건 말건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태형은 여전히 제 옷고름을 푸는 정국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린 채로 눈을 깜박였다. , 그러니까이건…….

 

, 나는 잘 못 푸는데! , , 하하, . 너 되게 잘 푼다. , 그러니까, , 부러워서……!”

 

시발 부럽긴 뭐가 부러워……. 태형은 제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변명에 그저 눈을 깜박였다. . 하하. 태형이 어색하게 웃음을 늘렸다. 그때까지도 정국은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고 그런 정국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태형은 눈을 굴렸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사촌누나가 우리 학교 패션 디자인과라서요.”

?”

저번에 프로젝트 준비할 때, 제가 도와줬었어요. 모델도 섰었고.”

…….”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 하지 말라구요.”

 

정국은 말을 마치고 다시 고개를 숙였고 태형은 멍하니 그런 정국을 내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제가 정국과 서먹해졌던 기간 동안, 정국이 유라가 아닌 패디과 여자와 사귄다는 소문이 잠깐 돈 적이 있었다. 그 소문에 아니, 그럼 유라는 뭐야? 하고 놀라 태형은 곧바로 패디과를 다니고 있는 제 친구 지민에게 연락해 소문의 진위 여부를 파악했었고. 그런데 지민이 절대 아니라고 단언하기에 헛소문에 시달리는 정국도 참 피곤하겠다 싶었던 적이 있었근데, 잠깐만. 패디과?

 

패디? 우리학교 패디?”

.”

! 나 패디에 아는 사람 있어. 혹시 나랑 같은 학번이야? 그럼 걔랑 동기겠는데?”

알아요. 박지민 형.”

 

문득 떠오른 생각에 태형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지만 정국은 무심하게 태형의 옷고름을 푸는 데 열중이었다.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한 정국의 말에 태형의 눈이 놀람으로 동그래졌다.

 

어떻게 알아? 나 고등학교 친군데?”

예전에 술자리에서 형이 말해줬잖아요.”

내가?”

. 그러면서 그랬어요. ‘우리 운명인가 봐!’”

 

그 말을 하며 정국이 가만히 고개를 들어 태형과 눈을 맞췄고 그 시선에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그랬나? 태형은 어색하게 웃었다. 기억이 없다. 술자리였다니 아마 술에 취해 아무 말이나 했다가 잊어버린 거겠지. 내가 그런 말도 했었구나. 제 딴에는 반가워서 말을 꺼낸 거였는데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정국의 반응에 민망해진 태형이 볼을 긁었다.

 

넌 별 걸 다 기억한다…….”

그걸 어떻게 잊어버려요.”

 

얕게 한숨을 내쉰 정국이 복잡했던 매듭을 다 풀고 태형의 옷을 한 꺼풀 더 벗겼고 태형은 그런가하긴, 사촌누나랑 선배 친구랑 동기면 잊어버리긴 힘들긴 하겠다. 하고 읊조렸다. 그 말에 정국이 잠시 태형을 쳐다봤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형은 좀, 무심한 거 같아요.”

?”

그냥, 좀 불쌍하다구요.”

 

정국이 조용히 말했고 태형은 정국에 말에 어? 내가? 뭐가? 하고 반문했지만 정국은 태형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 됐어요. 하고 태형에게서 손을 뗐다. 그 사이 부지런히도 풀었는지 어느새 태형은 얇은 소복만을 입고 있는 채였고 태형은 다시 한 번 정국의 손재주에 감탄했다. 너 진짜 소질 있는 거 같아.

 

전 원래 다 잘 해요.”

, 그래…….”

 

칭찬이 맞긴 했는데, 그걸 또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꾸하는 정국을 보니 태형은 왠지 짜게 식었다. 그런데 또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 태형은 입맛을 다셨다. 맞는 말이긴 한데 재수가 좀 없긴 하네. 태형은 이 말은 속으로 삼킨 뒤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 전하께오서 중전 마마의 각부(脚部: , 왕비의 다리)를 어수(御手: 왕의 손)로 쓰다듬어 주십시오.”

 

진짜 이 방에 CCTV라도 달아 놓은 거 아니야? 도대체 어떻게 안 건지 옷을 벗기자마자 들리는 상궁의 목소리에 태형이 흠칫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 안에 불을 밝히는 것이라곤 촛불뿐이고 그마저도 5개뿐이라 방 안은 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일 것 같지 않은데, 태형은 상궁의 기민함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나저나 각부? 어수? 이게 다 무슨 말이야? 태형은 정국을 쳐다봤다가 놀라 눈을 키웠다. 쟤 얼굴 왜 저렇게…….

 

너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

…….”

저 상궁이 뭐라 그랬는데?”

 

태형은 가만히 상궁의 말을 다시 되짚어 봤다. 각부를 어수로 쓰다듬가만 있어 봐봐. 쓰다듬다. 어수. 어수는 저도 알고 있는 단어였다. 손 수(). 그럼 손으로 쓰다듬어라. 중전의뭐를? 하나하나 맞춰져 가는 단어 조각에 태형의 얼굴이 천천히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상궁은 지금

 

미친…….”

 

애무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 거야?! 태형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얼굴이 화끈거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니,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로? 왜 상궁이 8명씩이나 필요한가 했더니. 왕과 왕비를 지켜 주는 거라면 그냥 문 밖에 있어도 될 것 같다 생각하긴 했는데. 설마 지금 성교육을 실시간으로 시켜 주려고 상궁들이 8명이나 밖에 앉아 있는 거야? 진짜? 태형이 새어나가려는 비명소리를 제 손으로 막아내며 정국을 쳐다봤다. 그러나 아까까지 아무렇지도 않던 정국은 어디로 갔는지, 정국은 귀 끝까지 새빨개진 채로 차마 태형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태형은 그 와중에도 놀라 눈을 깜박였다. . 나 전정국 부끄러워 하는 거 처음 봐.

 

진짜로? 진짜?”

형 몰랐어요?”

 

태형이 조그맣게 정국에게 묻자 다시 되묻는 정국에 태형은 입을 벌렸다. 진짜로? 왕과 왕비란 원래 이런 거야? 이렇게 사생활도 없고 뭣도 없고 실시간으로 부부 관계를 가지는 것까지 다 들려줘야 하는 거냐고.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태형은 이내 떠오르는 생각에 비명을 삼켰다. 잠깐만. 그러면아무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오늘 밤은그러니까뭐라도 해야한다는건가?

 

너는 알고 있었어?”

…….”

알고 있었어!? 그런데 여기 들어오면 어떡해!!!”

 

태형이 상궁에게는 들리지 않는 선에서 가장 커다랗게 정국에게 소리쳤다. , , !! 이 상황을 어떻게 하려고! 태형은 제 손에 땀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 미친. 아무리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다지만.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바로 바로 제지(?)가 들어오는 상황에서 어떻게 아무 거사(?)도 안 치르고 나갈 수 있을까. 태형은 다시 세차게 뛰기 시작한 제 심장을 느끼며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아니, 어떻게 해? 어떻게 해야 해?

 

형도 알고 있는 줄 알아서, 생각이 있나 보다 했죠.”

, 나는!!!”

형도 교육 받았을 거 아니에요.”

내가 받은 교육은!!!”

 

내가 받은 교육은 왕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방법들뿐이었거든!!!! 이 말은 차마 내뱉지 못한 태형이 그대로 입을 벌린 채로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은 계속 말해보라는 듯 태형을 쳐다봤으나 태형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어버버 말끝을 흐렸다. 그러니까, 진짜아니여기서얘랑?

 

?”

말도 안 돼.”

 

2n살의 모태솔로 김태형. 이런 곳에서 라이벌이었던 학교 후배와 첫 경험을 치르게 되는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레이터의 나레이션에 태형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미친 소리 하지 마!!!!!! 태형은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생각해내라, 생각해내라 김태형. 넌 할 수 있다. 네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배워 왔던 모든 것을 떠올려라. 태형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인간의 뇌란 이다지도 정직해서. 태형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지식들이라곤 요 근래 거의 세뇌되다시피 교육받았던 중전으로서의 교육들뿐이었다. 그 사실에 태형은 다시 한 번 절망감을 맛보아야 했다. 내가 수억 들어가며 2n년간 받았던 모든 고등 교육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왜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가. (보통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태형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리빙 포인트] 음식이 싱거울 때는 소금을 뿌리면 좋다. 이건 왜 떠오르는 거야도와줘요 리빙 포인트…….

 

. 괜찮아요?”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아무렇게나 주워섬기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태형은 저를 흔드는 정국의 목소리에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여기서 기절하면 될까? 정국아, 형 뒷목 좀 쳐줄래? 사람 뒷목에는 연수가 있어서, 여길 되게 세게 치면 기절할 수 있대

태형의 생각은 한없이 뻗어나가 (C+을 받은) 교양으로 들었던 인체의 신비에 관한 대학 강의까지 닿았고 태형은 그 강의 내용 중 제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연수에 관한 지식까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대신 세게 치면 안 돼그럼 죽을 수도 있어. 아니, 이 상황엔 차라리 죽는 게 나을까?

 

정신 차려요, …….”

 

정국이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태형을 쳐다봤지만 태형은 여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정국아내가 그런 쪽으로 편견이 없다고 하긴 했지만 그게 내가 이 상황에서 이렇게 첫날밤을 치르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거든적어도 있잖아, 사람과의 스킨십에는 단계라는 게 있잖아

 

.”

 

결국 보다 못한 정국이 태형의 눈앞에 박수를 쳤고 태형은 그제야 초점 없는 눈동자를 정국에게 맞췄다. , 어차피 저 사람들 우리 못 봐요. 그러니까 그냥 연기만 하면 돼요. 정국의 말에 태형이 응? 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였다. 연기? 무슨 연기?

 

. 신음 소리 낼 수 있어요?”

?”

 

정국이 한참을 머뭇대다 천천히 입을 열었고 태형은 그 말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신음소리요?

그러고 보니, 태형이 아까 떠올렸던 정보들 중에 생각나는 것이 있긴 했다. ‘중전으로서의 성교육’. 가장 아름답고 예쁜 소리를 내는 법. 왕을 조금 더 달아오르게 하는 법. 태형은 더는 불타오를 수 없을 것 같았던 제 얼굴이 더욱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지금 나보고연기를 하라는……?

 

방법이 없잖아요.”

그냥 네가 내 뒷목을 치는 게 낫지 않을

…….”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정국의 무언의 눈빛이 너무나 잘 느껴져서, 태형은 입을 다물었다. 심장이 벌렁거려서 죽을 것 같은데. 태형은 눈을 꼭 감았다. 저번에 어떻게 신음소리를 내라고 그랬더라. 그러니까 중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면서 가장 아름답게 낼 수 있는 소리는…….

 

…….”

…….”

 

두 눈을 꼭 감고, 죽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아내면서. 문 밖의 상궁이 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소리를 낸 거였는데, 앞의 정국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에 살짝 실눈을 떠 정국을 쳐다보니 정국은 지금 뭐 한 거냐는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다. 이게 최선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정국의 눈에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시발, 내가 신음 소리를 내 본 적이 있었어야지!

 

, 그건…….”

전하. 중전마마를 조금 더 어루만져 주십시오.”

…….”

 

제 신음소리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정국뿐만이 아닌 듯, 장지문 밖의 상궁이 역시나 말을 꺼냈고 태형은 억울한 표정으로 정국을 쳐다봤다. 아니, 나도 제대로 하고 싶은데!!!!! 니가 함 해 보든가!!!!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아내면서.

 

중전 마마께서 많이 긴장하신 듯 합니다. 전하. 중전마마의 구순에 접문하여 주시지요.”

 

구순? 접문? ? 문을 접으라고? 이번에는 저번과 달리 해석할 수 없는 한자들에 태형이 정국을 쳐다봤다. 그러나 정국은 저와 달리 저 한자를 알고 있는 듯, 얼굴이 조금 더 붉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거 야한 말이구나. 무슨 말인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물어보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은 느낌에 태형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정상적인(?) 신음소리를 낼 수 있을까. 흐읏, 이 아니고 흐응이었나.

 

.”

?”

 

태형이 보다 나은 신음소리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을 때, 정국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태형을 불렀고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정국을 쳐다봤다. 그런데 쟤 왜 저렇게뭔가 표정이

 

너 무슨 생각 하

형 도와주는 거예요.”

? 그게 무슨…….”

 

태형이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태형은 놀라 제 눈의 크기를 키웠다. 그리고 제 눈앞, 아니 그보다 더 가까이 있는 정국의 감긴 속눈썹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지금태형은 멍하니 제가 느끼고, 보고 있는 감각을 정리했다. 눈앞에 있는 정국의 감은 눈. 제 볼을 붙잡은 정국의 손. 그리고 제 입술에 닿은 정국의 입술. 그리고

 

,”

 

제 소리를 먹고 들어가는 정국의 혀. [SYSTEM : ‘김태형님의 뇌 기능을 정지합니다.] 태형은 멍하니 제 머릿속에서 울리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생각을 멈추었다. 그러니까, 너무 투 머치. 태형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너무 너무한 상황이었다, 지금 이 상황은.

 

흐아,”

 

그 와중에 도와주는 거라던 정국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정국은 중간 중간 숨 쉴 틈을 만들어 주며 태형으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소리를 낼 수 있게 했다. 문 밖의 상궁들도 이번에는 별 말이 없었고. 태형은 텅 빈 제 머릿속에 멍하니 떠오르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

 

전 원래 다 잘 해요.’

 

그러니까…….

 

흐읏.”

 

전정국의 말은 진짜였다고.

 

(口脣: 입술)

(接吻: 입맞춤)



왕과 왕비가 합궁을 하는 날에 상궁들이 저렇게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은 팩트이지만 눈에 꿀은... 진짜 있는 관습인지는 확실치 않다는데.. 너무 좋아서 넣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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