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

 

태형은 제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이제는 자취방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대한민국의 햇살이 아닌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조선의 햇살에도 익숙해진 참이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불렸다던 조선의 아침은 정말로 햇살이 부드럽고 새가 지저귀는, 새벽의 공기가 아직은 차가운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조선에 와서 좋은 것이 하나 있다면 시끄러운 핸드폰 알람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 학교에 지각할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아침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손 안에 감기는 부드러운 비단 이불을 만끽하며 여유롭게 눈을 뜰 수 있…….

 

으아악!!!!!!”

잘 잤어요?”

 

태형은 천천히 눈을 뜨자마자 제 눈에 들어차는 전정국의 퀭한 얼굴에 눈곱도 채 떼지 못한 눈을 크게 뜨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정국은 그런 태형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이내 얕게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쓸었다.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 한 채로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정국의 얼굴에 태형의 심장은 또 아침부터 힘차게 뛰고 있었다. 나 진짜 부정맥 아니야? 무슨 이렇게 심장이 시도 때도 없이 뛰어. 태형은 제 심장에 손을 올렸다. 안 돼 아직 쓸 날 많이 남았는데…….

 

너 왜 여기…….”

 

나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어요, 하고 광고를 하고 있는 듯한 정국의 퀭한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던 태형은 말을 잇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문득 떠오른 어젯밤의 기억 때문에. 그러니까 어제가, 합궁일이었지. 그리고 전정국이 내 머리와 옷고름을 풀어 줬었고, , …….

 

그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니죠?”

 

첫키스도 했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제 심장에 얌전히 올려뒀던 손을 올려 제 입에 가져다댔다. 뽀뽀가 아니었다. 키스였다. 키스였다고. 뽀뽀와 키스의 차이가 뭘까요?’ ‘역시 혀의 유무죠!’ 언젠가 지나가듯 봤던 한 남자아이돌의 인터뷰가 태형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명쾌하고 확실한 정의 감사합니다. 그걸 이 상황에 적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태형은 뜨거워지는 얼굴을 통제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 미쳤어. 학교 후배랑. 그것도 남자 후배랑. 키스했다. 그 앞에서 신음소리도 냈다. 차마 문장으로 옮겨 적기도 낯부끄러운 말들에 태형은 입 안쪽 살을 잘근 씹었다. 정국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디 아픈 건 아니죠?”

?”

계속 걱정했잖아요.”

 

그런데 이어지는 정국의 말에, 태형은 고개를 들었다. 정국의 동그란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태형은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니, 그 다음에 어떻게 됐더라. 상궁들은 장지문 너머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그 과도한 친절에 태형은 연기를 해야 했다. 그리고 제 혼신의 발연기에 정국이 도와주겠다며 입을 맞췄고, 그리고,

 

어떻게 된거야?”

 

그리고 어떻게 됐더라? 그 다음의 기억이 없었다. 태형은 재빨리 시선을 내려 제 몸의 상태를 살폈다. 설마, 첫키스에 이어 첫경험까지 한큐에 해결하고 지쳐 잠들었다는 전개는 아니겠지. 그러나 다행히도 등골이 서늘해져 세심히 살핀 제 상태는 저도 모르는 사이 인생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넘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태형의 행동을 응시하던 정국이 입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잠든 사람을 데리고 뭘 해요.”

잠들었다고?”

눈 감는가 싶더니, 갑자기 픽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요?”

 

태형이 멍청히 눈을 깜박였다. 쓰러져? 내가? 잠들었다고? 키스하다가? 설마.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제 마지막 기억은 키스에서 끊겨 있었다. 아니 세상에 키스하다가 잠드는 사람도 있어? 그것도 첫키스인데? 근데 그게 내 얘기래. 태형이 멍하니 입을 벌렸고 정국은 그런 태형의 턱을 받쳐 입을 닫아주며 픽 웃었다. 형이 생각해도 황당하죠? 난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아니, 어떻게, ?”

피곤한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피가 확 몰리면 그럴 수도 있대요.”

 

상궁들이 많이 괴롭혔어요? 정국이 태형을 향해 웃었고 태형은 그 웃음에 다시 멍해지는 머리를 느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첫날밤에 키스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니.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태형은 눈동자를 굴렸다. 아니 그래도 명색이 첫날밤인데. 물론 뭔가를 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고 하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제가 갑자기 쓰러져버린 탓에 정국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싶어 태형은 괜히 미안한 마음이 차올랐다. 제가 그렇게 대책 없이 쓰러져버린 후에 들이닥쳤을 궁녀들을 정국 혼자서 어떻게 해결했을까 싶기도 하고. 결국 잠시 입을 벌렸다, 닫았다를 반복한 태형이 이내 개미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

형이 왜 미안해요?”

아니…….”

형이 미안할 일은 전혀 아니고. 그렇게 힘들었으면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요.”

 

그런데 정국의 반응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다는 반응이라, 태형은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찡 해 오는 것을 느꼈다. 유라 때문에 조금 어색해지긴 했지만, 정국이 괜히 제가 아꼈던 후배는 아니긴 했던 모양이었다. 전정국 진짜 된 놈 맞구나. 태형은 뿌듯해진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후배 하나는 참 잘 뒀어.

 

앞으로는 피곤하거나 힘들면 나한테 말해줘요, 형도.”

…….”

.”

 

알았죠? 퍽 다정하게 들리는 정국의 목소리에 제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고 있자 확답을 받아내려는 듯 정국의 시선이 진득하게 따라 붙는다. 결국 태형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제가 정국에게도 했던 말인데. 아무 특별할 것 없는, 선후배 사이에 할 수 있는 일상적인 말. 그런데 어쩐지,

 

그럴게.”

 

심장이 간질거리는 것 같다.

 

*

 

마마, 소인들이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십니까…….”

 

정말, 숨이 멎는 줄 알았사옵니다. 그렇게 정국을 보내고, 합궁으로 특별히 준비되었던 방을 떠나 제가 본디 생활했던 방으로 돌아온 태형은 제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버선발로 뛰쳐나와 울상을 짓는 상궁들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랬어? 하긴, 합궁이라고 그렇게 학수고대하며 준비를 했는데 막상 방 안에 들여보냈더니 갑자기 픽 쓰러졌으니 놀랄 법도 했다. 괜히 미안해진 태형이 상궁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자 상궁이 지금은 괜찮으신 거냐며 걱정스런 얼굴로 태형을 살폈고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냥 잠든 거야. 좀 피곤했나 봐.

 

소인들이 마마를 잘 보필했어야 했는데…….”

아냐, 괜찮아.”

전하께서 마마를 직접 살피실 테니 저희는 다 물러가라고 하셔서…….”

?”

 

그런데. 상궁의 말에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던 태형은 처음 듣는 소리에 눈을 키웠다. 그게 무슨 소리야? 계속 옆에 있었던 거 아니었어? 태형이 묻자 상궁은 고개를 저었다.

 

본래대로라면 저희가 마마를 간호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 전하께서 마마와 전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다 물러가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

몇 번이나 저희가 하겠다는데도, 직접 살피시겠다고, 그러니 방 안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워낙 단호히 말씀하셔서 저희도 어쩔 수 없이…….”

 

상궁이 머리를 조아리며 하는 말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제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 그럼 밤새 합궁을 위해 마련된 그 방에서 단 둘만 있었단 건가. 태형은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아니,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간호, 해 줄 수도 있는 거지. 혹시 상궁들이 저를 간호한답시고 제 몸을 만질까봐 상궁들을 모두 물린 것일 거고.

 

하온데 마마…….”

……?”

소인이 중간 중간 혹여 전하께서 잠드셨을까 몰래 보고 왔사온데…….”

, …….”

정말 전하께서는 단 한 시도 한눈을 팔지 않으시고 오직 마마만을 지켜보고 계셨사옵니다.”

…….”

어의가 마마께오선 그저 잠드신 것뿐이라 했을 때 몇 번이고 확인을 받으셨으니 그냥 잠드신 것인 걸 알고 계셨을 텐데, 그 용안에 다정함과 마마를 향한 연정이 어찌나 듬뿍 묻어나는지. 간혹 마마의 이마에 손을 올려 혹여 마마께서 불편하실까 살피시는데 정말 저는…….”

…….”

정말 조선에 양봉업이 따로 필요 없겠다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아까 저를 걱정하며 우울해하던 상궁은 어디로 갔는지, 제 눈앞의 상궁은 그새 제가 다 설렌다는 듯 두 손까지 꼭 모아 쥐고서 태형을 반짝반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태형은 그런 상궁을 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 , 그냥 자네가 보고 싶은 것만 봐서 그런 게 아닐까. 하지만 상궁은 그런 태형의 말에 가당치도 않다는 듯 제 눈은 마치 매의 눈과 같아서 진실만을 본다며 단호했다.

 

진짜?”

진실이고말고요!”

 

결국 볼을 긁은 태형이 상궁에게 슬쩍 물었고 상궁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왜 이렇게 심장에 나비가 날아든 것처럼 간지러운지. 태형은 제 심장께에 손을 갖다 댔다. 왜 이렇게 오늘따라 아무것도 아닌 거에 의미부여가 되지? 후배가 아픈 선배 간호해 줄 수도 있는 건데. 단 둘이. ? 자취방에서. 밤새도록……. 간호해 줄 수도 있는 거아닌? 막 그렇게 막 다정한 눈빛으로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전하께서 정말 마마를 연모하시는가 봅니다.”

그래?”

 

그러니까, 왜 이런 거에 괜히 기분이 실실 좋아지냐는 말이다. 태형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려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에게 챙김 받는다는 게 기분이 좋은 건가. 아니면 사이가 안 좋아졌던, 원래는 엄청 친했던 후배와 다시 친해지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은 건가. 그것도 아니면,

 

, 그리고 전하께서 마마가 그 때까지 기운을 차리실 수 있으시다면,”

…….”

사흘 후에 전하께서 야간 시찰을 나가실 때 동행하지 않으시겠냐고 마마께 여쭤 보라 하셨습니다.”

…….”

전하께오서 이러신 적은 정말, 처음이옵니다, 마마.”

 

그냥 전정국이 좋은 건가.

 

*

 

정국와 태형의 첫 합궁 아닌 합궁이 있고 난 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정말 괜찮다고 했는데도 상궁들은 태형이 바람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부서질까 애지중지 대했고 그런 상궁들이 약간은 부담스러우면서도 사실 편한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라. 태형은 나름 만족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 날 이후 태형은 한 번도 정국을 볼 수 없었지만 그 이유는 상궁들이 충분히 이해가 가도록 설명을 해 주었다. 최근 합궁을 준비하느라 궁 전체가 들썩였기 때문에 조금 밀린 정사를 해결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거였다. 조선으로 떨어지기 전에는 인사도 안 하고 지냈던 사이면서, 그새 또 매일 보는 일상에 적응된 것인지 하루가 머다하고 보던 정국을 보지 못하니 조금 허전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지만 태형은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다. 사실 그래봐야 3일이었고, 오늘 밤에 정국과 함께 궁 밖으로 야간 시찰을 다녀오기로 했으니까. 태형은 아침에 눈을 뜬 이후부터 계속 하이 텐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마, 오늘따라 안색이 밝으십니다. 혹 오늘 밤 전하를 뵙기 때문입니까?”

, 아니거든!!”

이리도 중전 마마와 주상 전하의 사이가 좋으시니, 지밀상궁에게 언질하여 다음 합궁일을 빨리 정하여야겠습니다. 이대로라면 정말 튼튼한 아기씨를 회임하실 것 같사옵

에헤이!!”

 

대낮부터 그 무슨 낯부끄러운 소린가!! 태형은 괜히 찔리는 마음에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거 아니고 그냥 밖에 나가서 좋은 거야!! 태형은 재빨리 덧붙였지만 사실 제 자신도 왜 때문에 이렇게 아침부터 기분이 좋은 것인지는 확실히 알지 못했다. 정국을 만나서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니면 외출을 나가서 기분이 좋은 건지. 궁 안 생활이 답답했던 것도 맞고, 밖에 나가 보고 싶었던 것도 맞지만 뭐랄까그것 외에도 미묘한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달까. 태형은 애써 떠오르는 얼굴을 지우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밖에 나가서 좋은 거야. 밖에 나가서. 끊임없이 제 자신에게 세뇌하면서.

 

마마…….”

 

신난 태형이 조찬을 물리고 읽지도 못하는 한문으로 가득 찬 책을 뒤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상궁 하나가 제 옆에 있던 상궁에게 다가와 뭐라 귓속말을 하더니, 이내 상궁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무언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은 흐름에 태형이 구경하고 있던 책을 덮고 상궁의 안색을 살폈다. 아침부터 태형과 함께 내리 밝았던 상궁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져 있었다. 뭐지? 갑자기 살짝 내려앉은 분위기에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 있어?”

다름이 아니오라…….”

 

그러니까, 상궁이 전해 온 사건의 전말은 대략 이러했다.

요 근래 왕이, 그러니까 정국이 한 희빈을 전혀 찾지 않았던 관계로 한 희빈과 한 희빈의 아비는 꽤 불만이 쌓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한 달에 한 번 찾았다지만 명색이 애첩인데. 게다가 그냥 아무도 안 찾은 거였으면 왕께서 요즘 그냥 그 쪽(?)에 관심이 없으신가보다, 했을 텐데 오히려 교태전은 평소보다 더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아무 일도 없었지만) 최근의 합방까지. 한 희빈은 결국 질투에 눈이 멀어 조선 최고의 세도가인 제 아버지에게 불평을 했고, 그에 한 희빈의 아버지는 억지로 날을 받아 상선(尙膳 : 내시부의 우두머리)에게 왕을 한 희빈의 처소로 모셔 오도록 약속을 받아냈고, 우연찮게도 그 날이 오늘, 그러니까 정국과 태형이 야간 시찰을 나가기로 한 날이었다는 것이다.

 

해서아마도 오늘 밤 전하께오서는 희빈의 처소에 가지 않으실까 싶사옵니다.”

…….”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두근두근 기분 좋게 떠올랐던 기분이 한 순간에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렇구나. 태형이 중얼였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데, 납득도 하는데. 어쩐지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 서운? 아쉬운 게 아니라 서운? 태형은 저도 모르게 떠올린 단어에 옷 아래의 손가락을 꼼질였다. 서운하다니, 누구한테? 그냥 밖에 나가기로 했는데 못 나가게 돼서, 그게 아쉬운 거 아닌가? 뭐가 서운한 거지.

 

마마?”

, ?”

오늘 다과상에 유밀과를 올릴까요?”

 

유밀과는 태형이 좋아하는 달달한 과자로, 요 근래 합궁을 앞두고 상궁이 먹지 못하게 했던 것이었다. 제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슬그머니 묻는 상궁의 마음에 태형은 살짝 웃어 보였다. 그래, 서운하고 아쉬울 게 뭐가 있어. 어차피 한 희빈은 유라가 아니고 야간 시찰이야 나중에 또 나가면 되지. 그렇게 애써 달래 보아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지만.

 

*

 

그런데 왜.

 

전하, 소녀에게 어찌 이러십니까!”

 

태형은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렇게 어딘가 서운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일찍 잠자리에 들려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상궁 하나가 방으로 뛰쳐 들어오더니 태형을 불렀다. 마마, 잠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고. 그래서 무슨 일인가 싶어 교태전 안뜰로 뛰어 나온 태형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지금쯤 한 희빈의 처소에 있어야 할 정국과, 역시나 한 희빈의 처소에 있어야 할 한 희빈이었다. 너희가 왜 거기서 나와?태형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눈을 깜박였다. 마침 나와 있었던 교태전의 상궁들이 태형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 중전 마마. 오셨습니까. 상궁들 역시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어찌 이러다니. 내가 중전을 찾는 것이 희빈에게 어찌 이러냐는 소리를 들을 만 한 일인가?”

전하!”

그보다도, 어째 교태전에 올 때마다 매번 중전의 얼굴보다도 희빈의 얼굴을 먼저 보는 것 같소.”

…….”

희빈이 이리도 중전을 친애하는지 몰랐는데.”

 

태형은 살짝 낯선 정국의 굳은 얼굴에 정국에게 한 걸음 다가서려다 그대로 멈추었다. 제가 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국은 한껏 억울한 표정의 희빈에게 한없이 차가운 얼굴로 차가운 말을 내뱉고 있었다. 정국은 천천히 나긋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에는 명백히 뼈가 있었고 그를 희빈도 느꼈는지 한 희빈은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한 희빈의 뒤에서 한 희빈의 상궁들 역시 서로 눈치를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고. 태형은 조금 멀찍이 서서 그 장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박였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조차 태형은 모르는 채였으니까. 그 순간, 얕게 한숨을 내쉰 정국이 주위를 둘러보다 태형과 눈이 마주쳤고 태형은 흡,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저렇게 냉한 표정의 정국은 처음 본다.

 

중전. 여기서 뭐 하십니까. 채비하지 않고.”

?”

나와 야간 시찰을 나가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정국의 입에서 나온 말은 또 의외의 것이어서. 그거 오늘 취소되었다고 아까 상궁이 그랬……. 태형이 정국의 말에도 멀거니 눈만 깜박이고 있자 정국이 살짝 웃으며 다가와 태형의 어깨를 보란 듯이 감쌌다. . 지금 한 희빈이 보고 있지 않나? 저를 감싸는 온기에 태형이 저도 모르게 한 희빈에게 시선을 던지자 역시나 정국과 태형을 향해 있던 한 희빈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이 보여, 태형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이게 뭐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지.

 

너 지금 뭐 해?”

뭐가요?”

오늘 한 희빈한테 가기로 했다며.”

 

결국 태형이 상궁과 희빈에겐 닿지 않게끔 고개를 한껏 정국에게 기울여 속삭였다. 남들이 보면 저기서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고 있는 한 희빈에게 보란 듯이 다정하게 귓속말하는 부부 내외로 보이겠지만 그런 사실이 태형의 머릿속에까지 닿을 새는 없었다. 태형은 그저 이 상황이 당황스러울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태형과 달리, 역시나 정국은 태평했다.

 

형이랑 약속이 먼저였잖아요. 저건 지 멋대로 잡은 거고. 애초에 나는 약속한 적도 없는데.”

아니 그래도…….”

근데 형은 왜 준비 하나도 안 하고 있었어요?”

아니, 나는 당연히 오늘 파토난 줄 알았지!”

제가 형이랑 한 약속을 깨고 한 희빈한테 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 아니 말이 또 그렇게 되나? 태형은 되려 눈을 크게 뜨고 물어 오는 정국에 말끝을 흐렸다. 아니 뭐 딱히 그렇다기보단한 희빈의 아버지가 세도가라 했으니까. 아무리 너라도 그걸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건데…….

 

내가 형 같은 줄 알아요…….”

? 뭐라고? 못 들었어.”

 

방금 정국이 뭐라 투덜거린 것 같았는데. 태형은 되물었지만 아녜요. 하고 말을 뚝 끊어 버리는 정국에 태형 역시 입을 삐쭉 내밀었다. 아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태형은 자꾸만 눈치 없이 올라가려 하는 입꼬리를 내리느라 무진 애를 썼다. 분명히 꼬인 상황인 것이 틀림없는데. 한 희빈이 저렇게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도 자꾸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느새 교태전 안, 태형의 방까지 도달한 정국이 태형을 감싸고 있던 팔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계속 어깨가 감싸인 채로 왔구나. 어느새 정국이 저에게 하는 스킨십이 익숙해진 것 같아 태형은 입맛을 다셨다. 아니 뭐, 별 거 아닌 스킨십이긴 한데…….

 

그 용안에 다정함과 마마를 향한 연정이 어찌나 듬뿍 묻어나는지.

 

자꾸만 그 말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태형은 자꾸만 귓가에 메아리쳐 들리는 상궁의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그 상궁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거라니까. 정신 차려, 김태형! 괜히 손바닥을 펴 제 볼을 가볍게 두드린 태형이 잠시 상궁이 제가 입을 옷을 준비하러 간 사이 어색해진 공기에 잠시 눈을 굴리다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유라, 아니 희빈한테 잘 해줘.”

?”

아니, 그러니까. 너 좋아하잖아.”

형이 지금 걔 걱정할 처지예요?”

 

사실, 딱히 진심은 아니었고. 괜히 한 번 던져본 거였다. 그런데 그에 대답하는 정국의 말투가 또 삐딱하다. 제 딴에는 나름 정국을 위한답시고 한 말인데. 괜히 찔끔한 태형이 아, 아니! 하고 말을 더듬었다.

 

아니, 내 말은,”

그리고 걔가 저 좋아하는 거지 제가 좋아하는 건 걔가 아닌데 왜 잘해줘요, 제가. 아니, 생각해보니까 나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왕을 좋아하는 거지.”

 

아니 근데 왜 화를 내구 그르냐……. 묘하게 뾰족한 정국의 말투에 태형은 차마 대꾸는 하지 못하고 입을 삐죽였다. 하긴 정국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정국이 좋아하는 건 현대의 한유라지 조선의 한 희빈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어쨌든 한 희빈이랑 한유라가 우연이라기엔 좀 많이, 심하게 닮았으니까 한 말이었는데한 희빈의 아버지가 권력가이기도 하고……. 태형이 우물쭈물 손가락을 꼼질대자 그런 태형을 지켜보던 정국이 폭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준비하고 나와요. 이러다 야시장 문 다 닫겠다.”

야시장?”

. 형이 예전에 뭐, 대만인가. 야시장 가보고 싶다고 그랬잖아요. 대만은 아니지만.”

 

, 내가 쟤한테 그런 말도 했었나. 태형은 볼을 긁었다. 대만 야시장, 평소에 태형이 가보고 싶어 했던 곳이긴 했다. 그런데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쟤 기억력 엄청 좋네. 태형이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한 희빈이고 한유라고. 정국의 말대로 어차피 지금 태형이 신경 쓸 바는 아니긴 했다. 전정국이 알아서 하겠지. 정국이 말을 끝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궁이 태형이 야간 시찰에 입고 나갈 옷을 준비해 들어왔고, 태형은 옷 입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상궁의 말을 애써 뿌리친 채 낑낑거리며 혼자 옷을 주워 입었다. 아무래도 매번 정국이 도와줄 수는 없으니 혼자서라도 어떻게든 한복을 입는 법을 익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태형의 이러한 고민은 머지않아 태형도, 정국도 생각지 못했던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사실 머지않아, 라고 표현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금방. 그러니까, 태형과 정국이 호위무사를 너덧명을 데리고 야간시찰을 나갔던 그 날 밤에. 그러니까, 상황은 대략 이렇게 전개되었다.

 

*

 

우와. 나 야시장 처음 와 봐.”

 

태형은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기분이 좋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야간 시찰을 나오지 못할 것 같아 살짝 서운했던 거였는데, 정국과 함께 밤 외출을 나올 수 있게 된 데다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야시장이 제 눈앞에 펼쳐져 있다. 이거야말로 조선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평생 보지 못했을 장면 아닐까. 태형은 연신 감탄을 터뜨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비록 전기로 빛나는 화려한 조명은 없지만, 은은한 불빛에 왁자지껄한 상인들의 목소리는 분명 그만의 낭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길 잃어버려요.”

 

명색이 왕과 왕비였기에 호위무사를 대동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고작 너덧명으로 이루어진 호위무사는 태형과 정국을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는 대신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태형과 정국이 조그맣게 대화하는 목소리는 듣지 못할 만큼의 거리를 두고. 방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움직여야 할 때는 항상 지척에 상궁들을 대동해야만 했던 궁궐 안에 비하면 이 정도는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로운 기분이라, 태형은 활짝 웃었다. 완전 신기해. 그냥 야시장 같은데, 사람들 다 한복 입고 있어.

 

저건 뭐야?”

저거 과일아 형! 그러다가 진짜 길 잃어버린다니까요.”

 

게다가 적응했다곤 하지만 언제나 불편했던 치렁치렁한 여자 한복을 벗고 입은 야간 시찰복은 여자의 의복보단 남자의 의복에 가까워서, 태형은 훨씬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밤바람은 시원하고, 기분은 자유롭고, 몸 역시 가볍고. 태형의 기분은 지금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고 할까. 그래서 태형은 조심하라는 정국의 말에도 끝도 없이 이어진 상점들을 기웃대며 연신 두리번거렸다. 조선에 떨어진 이후로는 처음 느껴 보는 광경이었다. 사람도 많고, 시끄럽고. 꼭 학교 축제 같다. 태형이 중얼거렸다. 여자친구랑 학교 축제 구경하는 게 로망이었는데. 이러다가 슬쩍 손도 잡고, 서로 맛있는 거 사서 먹여주기도 하고…….

 

으악!”

, 미안합니다~!”

 

태형이 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그 때였다. 누군가가 태형을 퍽 치고 지나갔고 그 반동에 태형의 몸이 휘청였다. 태형을 치고 지나간 남자는 태형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대충 사과한 채 휙 하고 지나쳤고 태형은 바닥에 나동그라져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뭐야, 완전 고의로 치고 지나간 것 같은데!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이가 없어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태형이 눈만 깜박이고 있자, 인파에 밀려 살짝 뒤에서 태형을 뒤쫓아 오고 있던 정국이 재빨리 태형에게 다가왔다.

 

그러길래 조심하랬잖아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아니, 저 사람이 나 일부러 치고 지나갔,”

 

태형이 뭐라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정국이 태형의 팔을 잡아 힘주어 태형을 일으켜 세웠다. 아니, 진짜. 내가 연약한 게 아니고 저 사람이 어깨빵을 친 거라니까? 태형이 억울한 듯 꿍얼대자 정국이 살짝 웃으며 그런 태형의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주며 입을 열었다.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요. 바빴나 보죠. 사람 잃어버리기 딱 좋겠네.”

앞으로 조심할게.”

.”

 

정국이 제 몸을 툭툭 털어 주는 것도 그렇고, 일으켜 세워 준 것도 그렇고. 다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인데 정국이 해 주니 괜히 기분이 묘했다. 6살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 태형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정국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몇 번이고 조심하랬는데 내가 그 말 안 듣고 기웃대다가 넘어져서 짜증났나? 태형이 살짝 정국의 눈치를 보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던 정국의 눈이 순간 태형을 향했다. . 눈 마주쳤어. 순간 마주친 눈에 태형은 숨을 삼켰다. 어쩐지 기분이 좀,

 

.”

?”

잡을래요?”

 

이상해. 태형은 제게 내밀어진 정국의 손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정국을 쳐다봤다. 그러나 정국의 시선은 태형을 향해 있지 않았다. 왜 날 안 보고 얘기하지? 그러나 정국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 없는 것은 태형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뭐라고. 태형은 괜히 간질거리는 것 같은 느낌에 입 안 쪽 여린 살을 꾹 깨물었다. 이게 참, 분위기라는 게 무섭다. 태형은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분명히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친했을 땐 장난으로 껴안고 어깨동무도 했던 사이에 손잡는 게 뭐 대수라고.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많으니까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잡는 거라는 걸 알고 있어도. 아무리 머리로는 이해를 한다 해도.

 

…….”

 

그렇게 내 얼굴 쳐다보지도 못하고 손만 내밀면, 괜히 나까지 부끄러워지잖아. 태형은 제게 내밀어진 손을 잡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게 무슨 연애 초반에 스킨십 진도 나가는 커플 같은 텐션이지.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러고 보면, 태형은 계기야 어쨌든 정국과 처음 한 것이 되게 많다는 것을 실감했다. 비단 조선에 떨어지기 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조선에 떨어진 이후론 더더욱. 이렇게 손을 잡고 걷는 것도, 야시장에 온 것도. 그리고 또 첫키스도 전정국이랑 했고…….

 

으아악.”

왜 그래요?”

? , 아냐.”

 

갑자기 첫키스가 왜 떠오르는데! 그건 무효지! 태형은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잊어버려 김태형. 그건 연기였어. 어쩔 수 없는 거였다고. 태형은 애써 제 자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드는 제 안의 또 다른 자아가 질문을 던진다. 그럼 지금은 뭔데? 굳이 손잡고 걸을 필요 있어? 그냥 가까이만 걸으면 되지. 태형은 입술을 깨문다. 그러게. 이건 뭘까. 태형도 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잡은 건데.

 

.”

, ?!”

저거 먹을래요?”

태형이 제 안의 또 다른 자아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정국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제야 태형은 깊은 고뇌에서 벗어나 정국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국이 가리킨 것은 꿀이 발라진 딸기였다. 전정국은 제가 딸기를 가장 좋아하는 걸 알고 저걸 짚은 걸까, 아니면……. 태형은 무의식적으로 또 정국의 생각을 하다 이내 제 볼을 짝 쳤다. 이런 거에 하나하나 의미부여 하지 말라고! 이러다가 아주 숨 쉬는 거에도 의미부여하겠어! 태형은 자꾸만 떠오르는 생각을 잊으려 부러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먹을래!! 먹어!! 다 먹자!!

 

그거 다 먹을 수 있겠어요?”

 

그리고 잠시 후, 정국은 태형의 두 손 가득 담긴 먹을거리들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딸기꼬치, 닭구이, , 꿀이 발라진 과자, 유과까지. 다 먹을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음식들은, 태형이 욕심을 부려 가득가득 산 것들이었다. 혹시 상궁들이 형 굶겼어요? 정국의 말에 태형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정국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서, 그때마다 충동적으로 음식들을 샀다. 제가 사려고 할 때마다 명색이 왕인데 이 정도는 낼 수 있다며 정국이 계산한 탓에 제가 산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이 말은 죽어도 못 하지. 태형은 다 먹을 수 있어, 하고 괜히 큰 소리를 쳤다.

 

…….”

 

그러나 태형이 차마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제 손이 단 두 개뿐이라는 거였다. 한 손에는 떡을, 한 손에는 꼬치를. 그리고 끌어안은 품에는 과자가 담긴 봉투를. 막상 먹으려고 하니 옴짝달싹 할 수 없을 정도로 태형은 무작정 손에 집히는 대로 사고 보았던 것이다. 결국 살짝 한숨을 내쉰 정국이 태형의 손에 들린 딸기 꼬치를 뺏어 들었다. , 고마워. 태형이 대신 들어주려나보다, 하고 생각하며 감사의 말을 하려던 그 때였다.

 

.”

?”

 

아니, 들어주려는 거 아니었나? 태형은 갑자기 제 입에 들이밀어진 딸기 꼬치에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입을 벌리라는 듯 아, 하고 말한 정국은 안 먹고 뭐 하냐는 표정이다. 결국 태형은 얼떨결에 정국이 내민 딸기 꼬치의 딸기 한 알을 입으로 쏙 베어 물었다. 그러자 정국이 잘 먹네, 하고 웃는다. 태형은 괜히 귀가 뜨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에 딸기를 꼭꼭 씹었다. 아니, 내가 음식들을 그렇게 소중하게 품고 있었나. 들어주는 게 아니라 먹여 주다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태형이 딸기를 다 씹어 삼키자 정국이 태형이 먹기 편하도록 딸기를 위로 밀어 올린 뒤 다시 한 번 태형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걸 또 태형은 받아먹었고. 그러니까, 말하자면 태형은 지금 자각하지 못한 채 얼떨결에 제 로망을 실현 중에 있었던 것이다. 야시장에서 맛있는 거 먹여 주기. 비록 그 상대가 여자친구가 아닌 후배긴 했지만……. 아니 그러고 보니 손도 잡았잖아?!

 

무슨 생각해요, .”

, ?”

 

[SYSTEM] ‘김태형님의 캠퍼스의 로망퀘스트 달성! 저도 모르는 새에 머리 위에 반짝반짝 빛나는 퀘스트 완료 타이틀을 달아버린 태형은 입 안에 가득 찬 달콤한 과즙을 혀로 핥았다. 그 와중에 또 딸기 꼬치는 엄청나게 달아서. 그 달콤한 감각은 태형의 혈관을 타고 올라가 태형을 대책 없이 기분 좋게 만들었다. 달고, 시원하고, 따뜻하고. 그 묘한 감각에 태형은 또 심장이 간지럽고. 꼭 마치 제가 영화 속 한 장면의 주인공 같은 느낌…….

 

도둑이야!!!!”

 

그러나 태형이 기분 좋게 정국이 건넨 떡을 한 입 딱 베어 물었을 때였다. 바로 지척에서 들리는 고함 소리에 태형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고, 태형의 눈은 금세 그 크기를 키웠다. 태형이 돌아본 곳에는 한 아주머니가 도둑이라며 소리를 치고 있었고, 한 남자가 재빨리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 그러고 보니까 나 가져왔던 돈주머니가 없어!!”

 

낯설지 않은 얼굴이다. 태형은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음식들을 우수수 떨어트리고 제 몸을 더듬었다. 혹시나가 역시나. 태형이 야간 시찰을 나가기 전 상궁이 단디 챙겨 주었던 엽전이 가득 들어 있던 돈주머니가 없었다. 제가 사는 것마다 정국이 다 돈을 내버려서 몰랐는데, 어쩐지 몸이 지나치게 가볍더라. 그게 옷 때문이 아니라 동전 무게였을 줄이야. 태형은 먹다 만 떡까지 마저 떨어트리며 입을 벌렸다. , , 저 사람!! 아까 나랑 부딪혔던 사람이잖아!!!!

 

마마, 무슨 일이십니까!”

, 저 사람이 내 돈!!!”

 

태형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뒤에서 걷고 있던 호위무사들이 달려왔고 태형은 도망치고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삿대질을 했다. , 저 놈이 내 돈을 훔쳐갔어!!! 그 말에 호위무사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아니, 어디서 감히 중전 마마의 패물을! 그러더니 호위무사들은 그 남자를 뒤쫓아 뛰기 시작했고 태형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 손에 잡히는 것을 붙잡았다. , 진짜 나 왜 이렇게 둔하지?!

 

아니 그, , , 잠깐만…….”

, 나 진짜 바본가 봐.”

 

태형이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제가 떨어트린 음식물들이 눈에 들어와, 태형은 더욱 더 울상을 지었다. 가뜩이나 소란스러웠던 거리는 도둑의 등장으로 더욱 더 소란스러워졌고, 태형의 뇌는 떨어진 음식물들과, 잃어버린 돈과, 제 자신의 정신없음에 과부하에 걸린 상태였다. 조선에 와서 나름 잘 적응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사고를 치다니. 물론 제 잘못은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제 자신이 원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사람들이 쫓아갔잖아요. 잡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잠깐만…….”

.”

 

태형이 고개를 숙이고 시선은 음식물들에 고정한 채 제 자신을 탓하고 있던 차였다. 제 정수리 바로 위에서 떨어지는 정국의 목소리에 태형이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태형은 화들짝 놀라 헉, 소리와 함께 확 몸을 띄웠다. 제 얼굴 바로 위에 있는 정국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그리고 태형의 얼굴 역시. 놀라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제 가까이에 있는 정국을 붙잡고 한탄을 했던 것이다. 의도치 않게 정국의 멱살을 잡았던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아니, 그게, 내 의도는 네 멱살을 잡으려 했던 게 아니라…….

 

아니, 알아요. 그냥 너무 가까워서 그랬어요.”

, 진짜 미안.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런 사람이 뭔데. 태형은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당황한 상태였다. 사실 멱살이라기보다는 가슴팍을 잡은 것에 가까웠지만. 태형은 왜 그 순간 제 손이 갑자기 그리로 갔는지 알 수 없어 손을 쥐었다 폈다. 아니 왜 그리로 갔니 내 손아……. 태형과 정국 사이에는 몇 초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그 분위기를 깨 줄 호위무사는 소매치기를 잡으러 떠난 후였다. 아니 그런데 그깟 소매치기 잡겠다고 왕이랑 왕비를 내팽겨치고 달려 나가는 호위무사도 있나. 몇 명은 남아서 우릴 호위해야 하는 거 아니야? 가득 차오르는 민망함에 태형이 괜히 속으로 호위무사를 탓하며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찼다. 바로 옆에서 정국이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를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을까. 호위무사를 기다려야 하니 어디로 가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호위무사가 사라진 곳만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던 태형이 결국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입을 연 그 때였다.

 

저기, 정국아.”

김태형?!”

, 뭐야?!”

 

정국이 채 대답을 들려주기도 전에, 조선에 온 뒤로는 정국을 제외한 사람에게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제 이름이 들리며 제 손이 누군가에 의해 확 낚아채졌다. 제 손을 갑자기 강하게 붙잡아 오는 누군가의 손길에 태형은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부여잡고 뒤를 돌아보았고 그 곳엔,

 

박지민?!”

 

태형의 고등학교 친구이자, 정국의 사촌누나의 동기. 태형과 정국이 재학 중인 대학교의 패션디자인학과를 다니는,

 

, 왜 그런 꼴을 하

, 아니 나으리!!!!! 잡았습니다아!!!!!!”

가만, 너 전정ㄱ

지민이 형?”

아니, 박지민, 근데 너 지금 나 이렇게 잡으면 안 되는

아니, 그런데 마마, 아니 마님, 그 자는!”

 

그리고 이제는 그 사이 타이밍 좋게도 도둑을 때려잡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달려오던 호위무사들의 표정이, 지엄하고 고귀하신 중전 마마의 손을 붙잡고 있는 웬 사내놈을 보고 험악해지는 것을 본 태형의 임기응변에 의해 졸지에 새로운 직업을 하나 갖게 된,

 

아니, 잠깐, 잠깐만. 그러니까 이 자는!”

이 건방진 놈이!”

, , 새로 들어온!!”

새로? 뭘 새로?”

내시다!!!”

 

뉴비 내시 지민이 있었다.



+


이번 편은.. 살짝.. 쉬어가는 화..



다음 편은 정국이 번외이자 과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편이 될 예정입니다!! X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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