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 김태형은 나에게 그냥 그저 그런 평범한 선배들 중 하나였다. 아니다. 처음부터 평범한선배는 아니었지. 그 얼굴을 어떻게 평범하다고 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한 눈에 튀는 얼굴인데. 하지만 그에 대한 내 감상은 그냥 잘생겼네, 정도에서 끝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소리다. 잘생긴 거야 특별한 일도 아니었고 남자가 잘생긴 거랑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니까.

 

정국 번외 01

 

그런 김태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김태형을 처음 본 오티날로부터 이주 정도 후, 엠티에서였다. 나는 나에게로 쏟아지는 관심과 질문들에 대답하기에도 벅찼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내가 먼저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으레 있는 익숙한 일이었다. 정신없이 통성명을 하고, 연락처와 술잔을 주고받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어느 정도 취해 있었고 문득 옆을 보니 내 옆엔 그 때 봤던 그 잘생긴 선배가 앉아 있었다. 그 선배, 그러니까 김태형도 일부러 내 옆에 앉게 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옆에 앉아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지. 김태형은 누군가를 판별할 수 있을 정도로 제정신인 것 같지 않아 보였으니까. 얼굴은 빨개져서, 환하게 웃으며 앞의 누군가와 술잔을 부딪히고 있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김태형의 시선을 따라 앞을 쳐다봤다가 미간을 좁혔다. 내 앞에는, 그러니까 김태형의 앞에는 딱 봐도 이런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학번일 것 같은 남자 선배가 계속해서 김태형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고 김태형은 그걸 계속해서 받아 마시고 있었다. 그제야 주위에서 김태형과 그 선배를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그러니까, 저 선배는 지금 작정하고 김태형에게 술을 먹이고 있는 것이고 김태형은 그걸 모르거나 아니면 거절하지 못해서 계속 받아 마시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게 나랑 무슨 상관. 나는 힘없는 한낱 새내기에 불과했고 설령 나한테 저 고학번으로 보이는 선배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해도 내가 김태형을 도울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괜히 나한테까지 불똥이 튈까 싶어 자리를 옮기려고 했는데.

 

- 잘생긴 후배님이다.”

 

눈이 마주쳤다. 김태형이랑. 나는 눈을 깜박였다. 잘생겼다는 말. 한두 번 들어본 것도 아닌데. 김태형이 나를 보더니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몰랐는데, 김태형은 웃을 때 입이 네모가 됐다. 그리고 속눈썹이 생각보다 길었다. 코끝에 점도 있네. 그리고…….

 

선배, 저도 술 주세요.”

 

예쁘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니, 알긴 알지. 김태형이 예뻐 보여서.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랬다. 김태형이 예뻐 보였다. 예뻐 보였다는 거는, 그러니까, 객관적인 시선으로 판단한 게 아니라 나한테 그래 보였다는 거다. 물론 김태형은 객관적으로 봐도 예쁘지만.

나는 자리에 앉아 김태형에게 계속해서 술을 권하는 선배에게 내 잔을 내밀었다. 충동적으로. 선배가 당황하는 듯 하더니 이내 웃으며 내 잔에도 술을 채웠다. 내 주위가 조용히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김태형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도. 내 잔에 술을 따라주고, 앞의 선배가 다시 김태형을 쳐다본다. 태형아, 안 마셔? 그 말에 김태형이 난처한 듯 웃는다. 억지로 먹이고 있었던 게 맞았던 거다. 주저하던 김태형은 결국 술잔을 들었고 나는 내가 한 번에 마셔 버려 비워진 내 잔 대신 그 잔을 뺏어 들었다.

 

선배, 얼굴이 빨개요.”

?”

더 마시면 속 안 좋으실 것 같은데.”

 

나는 내 영향력을 안다. 20년간 보고 듣고 경험한 게 있으니까. 나는 어딜 가나 내가 의도하거나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무리의 중심에 있었고 우위에 있었다.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편했으니까. 그리고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 내 행동들은, 웬만한 상황에서는 내 의도대로 먹혀 들어갔다.

 

제가 대신 마실게요. 그래도 되죠?”

…….”

 

이렇게. 나는 말끝을 흐리는 김태형의 술잔을 뺏어 들고 그 안의 술을 비운 다음 앞의 선배를 쳐다봤다. 웃으면서. 나는 웃고 있지만 주변은 얼어붙는다. 말은 못 해도 생각은 다들 비슷하겠지. 쟤 대박이다. 내지는 어디 신입생 주제에 버릇없이. 하지만 눈앞의 선배가 나한테 뭐라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새내기들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고, 이미 그만큼의 영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고, 이 선배가 김태형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고 있었던 행동이 바람직한 행동도 아니었고. 거기다가 여긴 신입생들이 선배에게 잘 보여야 할 뿐 아니라 선배들이 후배들에게도 잘 보여야 하는 첫 제대로 된 만남 자리인 첫 엠티고.

그래, 태형이 술도 약한데. 정국아, 너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타이밍 좋게 회장 형이 나서서 말했고 앞의 선배는 벙 찐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 지금 당장 뭐라 말은 못 해도 표정을 보아 하니 아마 나는 저 선배에게 찍힌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뭐. 사실, 저 선배가 지금 당장 나한테 뭐라고 했어도 상관은 없었다. 덕분에 김태형의 시선이 날 향하게 됐으니까.

 

*

 

내 상태가 좀 이상하다는 걸 자각한 것은 그 날 이후로 며칠 되지 않아서였다. 그 다음 날 내 숙취를 걱정하는 회장 형으로부터 그 선배가 김태형에게 죽자고 술을 먹였던 이유가 그 선배가 일방적으로 마음에 들어 하던 여후배 하나가 김태형을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제는 다분히 충동적이었고, 술도 마신 상태였고,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있는 거지, 하고 내 안에서 마무리를 지었기 때문에. 평소에는 귀찮아서 안 했더라도, 술김에 정의로운 행동 한 번 해 볼 수도 있는 거지.

그 날 그렇게 다들 술에 쩐 채로 유야무야 엠티가 마무리되고 주말 내내 나는 김태형을 마주치지 못했으므로 그렇게 김태형이란 존재는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듯했다. 애초에 나는 어떤 사람에게 깊은 주의를 두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 김태형을 마주친 순간,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거다.

 

전정국, 맞지? 그 날 고마웠어.”

 

수업이 시작하기 전 멍하니 강의실에 앉아 앞을 쳐다보고 있는데, 내 옆자리에 인기척이 나더니 이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멍한 시선 그대로 옆을 봤다가 순간 숨을 멈췄다. 그 웃음이 내 눈앞에 있었다. 눈꼬리가 접히고, 입이 네모나게 되는 웃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 날 고마웠다고 말했어야 됐는데, 정신이 없어가지구. 선배가 돼서 후배한테 도움 받았네.”

 

김태형이 나한테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 말은 내 왼쪽 귀로 들어와 오른쪽 귀로 그대로 흘러나갔다. 살면서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은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예뻐 보였던 적도 김태형이 처음이었는데. 누군가가 웃는 얼굴에 이렇게 심장이 뛰어 본 적도 김태형이 처음이다. 심지어 중, 고등학교 때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 키스를 할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몸의 신호들이다. 이 신호들은 날 의아하게 만들었다. 이게 뭐지?

 

선배.”

?”

저 밥 사주세요.”

 

뭐긴 뭐야, 꽂힌 거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내 감정도 모를 만큼 눈치가 없지 않았고 그래서 김태형을 붙잡고 김태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랬다. 밥 사주세요. 이렇게 다짜고짜 밥을 사달라는 후배는 처음이었는지 당황한 것 같은 김태형의 눈이 느리게 깜박여졌다가, 이내 예쁘게 휘었다. 그래, 안 그래도 사 주려고 했었는데! 비싼 거 사줄게. 뭐 먹고 싶어?

 

선배는 뭐 좋아하시는데요?”

? 글쎄…….”

전 다 좋아요.”

 

어차피 중요한 건 음식이 아닌데요, . 그 말은 혀로 꾹 눌러 삼키면서.

 

*

 

김태형과 요 근래 붙어 다니면서 내가 김태형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 목록은 대충 다음과 같다.

1. 김태형은 귀엽다. 2. 김태형은 모태솔로다. 3.김태형은 인기가 많다. 4. 그런데 그걸 정작 본인은 모른다. 5. 그래서 김태형은 자기가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는 줄 안다. 6. 고로 김태형은 눈치가 없다. 7. 그냥 없는 것도 아니고, 없어도 더럽게 없다.

 

, 형은 이상형이 뭐예요?”

? 청순한 사람?”

청순?”

. 귀엽고 청순한 사람.”

저 귀엽고 청순하다는 소리 되게 많이 듣는데.”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대놓고 티를 내도 맞아, 정국이 귀엽고 청순해!! 그래서 내가 많이 좋아하잖아!’ 같은 속 편한 소리나 하지. 나는 활짝 웃는 김태형의 얼굴에 입술을 꾹 물었다. 어떻게 눈치가 없어도 저렇게 없지. 진짜 아예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이미 진작에 내가 자길 좋아하는 건 눈치 챘는데 내가 싫어서 모른 척 하는 건가. 솔직히 말하면, 누군가를 먼저 좋아하는 게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건 알겠다. 김태형이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고, 해도 너무한다는 거.

 

너는 왜 사서 고생을 하냐.”

 

고생도 그냥 고생이 아니야. 희대의 눈새 김태형을 좋아하다니. 개고생 가시밭길인데. 내가 고민 끝에 김태형을 짝사랑한다는 말을 털어놓았을 때, 박지민이 형이 오징어를 질겅 씹으며 대꾸한 말이었다.

박지민 형과의 인연은 꽤 오래됐는데, 알고 지낸 기간에 비해 딱히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는 아니었음에도 그에게 내가 김태형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린 걸 보면 내가 그 때 얼마나 절박하고 답답했는가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박지민 형이 내 사촌 누나를 좋아하면서 보일 꼴, 못 보일 꼴을 이미 다 나한테 보인 상태였기 때문에 더 편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박지민 형은 김태형의 의중을 알 수 있는 나의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결국 별 도움은 안 됐지만.

어쨌든 박지민 형과 김태형이 고등학교 때 절친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단 둘이 가진 술자리에서 김태형은 술이 오른 상태로 기분 좋게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다 제 고등학교 친구 얘길 꺼냈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익숙한 이름에 나는 눈을 반짝였었다.

 

진짜? 박지민을 알아?’

. 제 사촌 누나랑 학원 같이 다녔었어요. 그 형이 우리 사촌누나 엄청 따라다녀서 알게 됐는데.’

아 맞아. 걔 학원에 짝사랑하는 애 있댔어. 엄청 유난이었는데. 그게 네 사촌누나였구나.’

지금 같은 과 동기잖아요.’

맞아! . 우리 운명인가 봐!’

 

우리 운명인가 봐.’ 술에 취한 사람이 아무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일이면 제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기억 못할 김태형을 알면서도. 그 말에 나는 또 설레고. 나는 웃는 김태형을 쳐다봤다. 그래도 어쩌겠어.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는데. 이렇게 눈치 없고 너무해도, 그게 김태형이면 평생 지고 살아야지.

 

김태형은, 니가 걜 붙잡고 입술을 들이밀어도 니가 걜 좋아하는지 모를 애야.”

설마.”

 

어쨌거나, 박지민 형은 나한테 그랬다. ‘네가 왜 여태껏 짝사랑으로 마음고생을 안 했는지 알겠다. 김태형 좋아하면서 몰아 하려고 그랬구나.’ 라고. 그 땐 그냥 설마, 하고 말았는데. 신은 역시 공평하시다며 내 어깨를 토닥이는 박지민 형이, 그냥 나를 놀리려고 하는 말인 줄 알았지.

 

*

 

그런데, 이런 법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유라 귀엽지 않아?”

?”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익숙한 게 무서운 거라고. 이렇게 계속 옆에서 맴돌다 보면 부담스럽지 않게, 자연스럽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있겠지. 어차피 김태형은 눈치가 없고, 그래서 주위에 여자도 없고. 그래서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게 실수였을까. 휘몰아치는 중간고사와 플젝 때문에 잠시 정신없던 한 달을 보내고 오랜만에 김태형을 만난 음식점에서, 나에게는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김태형의 수줍은 얼굴. 살짝 들떠있는 목소리. 그러니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같은 얼굴.

 

걔가 누군데요?”

? 우리 동아리 들어온 애. 너랑 동갑이잖아. 한유라.”

 

언제 또 같이 사진까지 찍은 건지. 그럴 필요 없는데 김태형은 친히 핸드폰을 사진첩을 뒤져 그 한유라와 제가 다정하게 찍은 셀카를 보여준다. 그 와중에 김태형 잘 나왔다. 저 여자애만 잘라서 소장하고 싶네. 나는 얼이 빠져 김태형을 쳐다봤다. 그런데, 귀엽다니. 김태형의 입에서 누군가가 귀엽다는 말이 나온 건 처음이라. 나는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요?”

걔가 나 좋아하는 거 같아.”

…….”

 

말도 안 돼.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그렇게 티를 낼 때는 죽어도 모르더니, 걘 대체 어떻게 했기에 김태형한테서 이런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거지? 내가 할 말을 잃고 눈만 깜박이고 있던 그 때, 갑자기 내 뒤에서 높은 톤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그 목소리가 김태형의 이름을 불렀고, 그 순간 김태형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태형 오빠! , 정국이도 있었네?”

 

걔구나.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듯 낯선 얼굴의 여자애가 날 보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딱히 주변인들에게 관심을 두는 성격은 아니라 잘 몰랐는데 (게다가 요즘 내 신경은 온통 김태형에게만 쏠려 있었으니), 말을 듣고 보니 몇 번 동아리에서 본 것도 같았다. 옆에 앉아도 되지? 그러라고 한 적도 없는데, 그 여자애, 아니 한유라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내 옆에 앉는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내 옆의 한유라를 보는 김태형의 얼굴이, 너무 솔직하게 김태형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어서.

 

둘이 밥 먹으러 온 거예요? 잘 됐다. 오늘 혼밥할 뻔 했는데.”

 

잘 되긴 뭐가.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내 앞의 김태형은 눈치도 없이 아, 진짜? 잘 됐네, 우리랑 같이 먹자. 하고 대답하고 있다. 같이 밥 먹는 것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그동안 플젝이다 중간고사다 뭐다 해서 오랜만에 단 둘이 만난 거였는데. 하긴, 김태형에게 뭘 기대하겠어. 나는 얕게 한숨을 내쉬고 메뉴판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한유라가 환하게 웃으며 고마워, 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정국이랑은 밥 처음 먹는 거 같아. 같은 동아린데도 얼굴 보기가 힘들더라.”

, 그동안 바빠서.”

, 태형 선배한테 얘기 들었어. 이번주부터는 나오는 거지?”

 

친화력이 좋은 건지, 넉살이 좋은 건지. 내 말투가 꽤 무뚝뚝했을 텐데도 한유라는 살갑게 말을 붙여 왔다. 그 와중에 나는 또 언제 둘이 만나 내 얘기를 한 건지가 신경 쓰이고. 아무리 사랑이 유치한 거라지만 이렇게 유치해질 필요까지 있나. 박지민 형이 내 사촌 누나를 쫓아다닐 때 뭐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는데 지금 내가 딱 그 꼴이다. 문득 고개를 드는 자괴감에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밥 다 먹고 뭐 해요? 오빠 이제 수업 끝 아니에요?”

. 나 오늘 정국이랑 영화 보려구.”

우와! 뭐 보세요?”

킹스맨 2.”

저도 그거 보고 싶었는데!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 , 그래, .”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대화에 김태형은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승낙해 버린 다음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본다. , 괜찮아? 하는 눈빛. 나는 그 눈빛에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을 리가. 오랜만에 단 둘이 데이트였는데,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이 반가울 리 없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내가 아니, 안 괜찮아요.’ 할 수도 없고. 김태형은 당황한 것 같고. 그래.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했지. 대체 어떻게 했기에 김태형 입에서 나 좋아하나 봐소리가 나오게 만들었는지 알아나 보자.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 또 환해지는 김태형의 얼굴이 미우면서도 좋아 죽을 만큼 예뻐서. 나도 참 중증이다.

 

*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것은 그 날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은 후였다. 그 날 이후로 한유라는 나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여 왔고, 인문대 건물과 공대 건물이 꽤 떨어져 있음에도 나는 심심치 않게 공대 건물 근처에서 한유라를 마주쳤다. 아무리 내가 타인에게 무신경하다 해도, 내가 한유라를 마주치는 상황은 그 역치를 넘어서는 횟수였다. 그리고 매번 와 있는 메신저. 이런 이상한 흐름이 며칠쯤 이어지고 난 후, 나는 상황이 돌아가는 판국을 알아챘다. 아주 개 같은 상황.

 

정국아, 안녕. 또 만났네. 밥 먹으러 가?”

아니. 수업.”

 

짜증나. 나는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한유라를 쳐다봤지만 한유라는 그런 나를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연신 생글생글 웃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한유라는 관심이 있었다. 김태형한테 말고, 나한테. 그 날 영화관에서 굳이 김태형과 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가운데 앉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는 삐딱하게 서 그런 한유라를 쳐다봤다. 뭐 하자는 거야, 지금.

 

, 진짜? 태형 오빠가 지금 너랑 밥 먹으러 간다던데?”

…….”

그래서 같이 가자고 하려고 했는데.”


시발. 나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누가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 그랬을까. 그 말을 한 사람은 천성이 선한 사람이었던 게 분명하다. 웃는 얼굴에 침을 왜 못 뱉어. 나는 욕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하지만 난 그냥 삐딱하게 서서 한유라를 쳐다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는 것은, 한유라 때문이 아니라 김태형 때문에. 저렇게 생글 웃는 낯이 김태형을 웃게 하니까. 짜증나지만. 한유라가 나한테 고백을 한 것도 아니고, 김태형이 종종 얘기를 꺼내는 걸로 봐선 김태형한테도 꾸준히 연락하고 있는 거 같은데. 거기다 대고 김태형한테 한유라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가 없는 거다. 상황이 복잡했다.

 

같이 갈 거지?”

…….”

 

그러니까, 한유라가 보통이 아니란 얘기다. 대체 김태형은 있는 게 뭘까. 눈치도 없고, 보는 눈도 없고. 청순한 애가 이상형이라며. 그 말 때문에 누구는 성질 죽이고 팔자에도 없는 착하고 청순한 후배 코스프레하며 사는데. 얘가 뭐가 청순해. 꼬리 백만개는 달린 여우구만.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

 

정국아, 나 물어볼 게 있는데…….”

?”

 

그런데 내가 간과했던 게 있었다. 김태형의 마음. 내 자취방에서 김태형과 맥주를 몇 캔 마시고 나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어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던 때였다. 그날따라 김태형은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왜 그렇게 많이 사 온 건지, 나는 과제가 있어서 많이 못 마신다는데도 김태형은 그럼 내가 다 마시지 뭐! 하고는 정말로 그 많은 캔들을 다 비워냈다. 그 때, 김태형이 나에게 뭔가 할 말이 있었다는 걸 눈치 챘어야 했는데.

 

넌 누구 짝사랑해본 적 있어?”

?”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노트북 모니터에 고정시켰던 시선을 떼고 김태형을 쳐다봤다. 그러나 김태형의 시선은 날 향해 있지 않았다. 품에는 내 베개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손에는 맥주 캔을 꼭 쥐고. 우물쭈물 입을 뗀다. 나는 잠시 그런 김태형의 (귀여운) 모양새를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눈치 챈건가. 심장이 조금 뛰었다.

 

있죠. 저라고 없겠어요.”

진짜? 그 사람도 알아? 네가 그 사람 좋아하는 거?”

…….”

 

원래 몰랐는데, 지금은 좀 아는 것도 같아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 그렇게 말했고 김태형의 얼굴은 미묘하게 변한다. 그러니까, 지금이 타이밍인가. 나는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노트북을 덮었다. 지금 과제가 중요한가. 김태형이 중요하지. 그러나 내 대답에 날 쳐다볼 줄 알았던 김태형은 날 쳐다보는 대신 맥주 한 캔을 더 깠다. 이미 충분히 많이 마신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김태형을 말리지는 못했다. 혹시 술이 김태형에게 용기를 주고 있는 건가 싶어서. 그 때 만약 김태형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그렇게 다른 줄 알았다면 목숨 걸고 막았을 텐데.

 

그럼 너도 이해하겠네? 짝사랑이 얼마나 힘든 건지.”

그렇죠?”

그럼 너내가 한유라 좋아하는 거 알지.”

?”

 

나는 김태형의 입에서 튀어나온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혹시 그럼 너 짝사랑하는 사람이 나야?’ 그럼 너 나 좋아해?’까진 아니어도, ‘그 사람은 널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라든가, ‘지금도 좋아해?’정도의 말이 나올 줄 알았던 나는 순간 머리가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그 얘기가 여기서 왜…….

 

그런데 너 왜 맨날 나 방해해?”

 

? 나는 김태형의 외침에 그대로 굳어 김태형을 쳐다봤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누가 누굴 방해해? 내가 김태형을? 그러나 김태형은 술을 잔뜩 먹어 발개진 얼굴로 억울한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지금?

 

나도 이런 말 하기 싫었어. 그런데 맨날, 나랑 유라랑 밥 먹으러 가면 따라 오고. 영화 보러 가도 따라 오고. 유라랑 나랑 만나고 있는데 누구랑 카톡하냐고 물어보면 너랑 하고 있고. 유라는 맨날 네 얘기만 하고!”

 

김태형이 이렇게 말이 빨랐나 싶을 정도로 김태형 입에서는 단어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나는 멍하니 그 단어들을 주워섬기고 있었다. 내가 방해해? 김태형이랑 한유라 사이를? 기도 안 찰 말이었다. 방해하는 건 한유라가 나랑 김태형 사이를 방해하고 있는 거지. 원래 밥도 나랑만 먹었잖아. 영화도 나랑만 봤고. 한유라랑 카톡한 건 한유라가 계속 동아리 관련 질문으로 날 귀찮게 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8시간 10시간에 한 번씩 답장했는데. 그리고 한유라가 계속 내 얘기만 하는 건,

 

좋아하니까요!!!”

 

좋아하니까. 김태형 말고 나를. 하나도 안 좋고 짜증만 나지만, 걔가 날 좋아하니까. 그런데 나는 김태형을 좋아하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빽 소리를 내뱉었다. 그래, 고백을 내뱉었다’.

실수였다. 이렇게 고백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술도 마셨고, 기대하고 있었던 게 한 순간에 이렇게 무너지니 순간 머리가 휙 돌았던 거다. 게다가 김태형이 날 방해꾼 취급했잖아! 나는 김태형을 똑바로 쳐다봤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지. 내가 방해라니. 방해받아서 빡치는 게 누군데. 참고 있는 게 누군데. 서럽고 짜증나고 서운하고 죽겠는데 참고 있는 게 누군데! 다 형 좋아해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건데 어떻게 나한테!

 

?”

…….”

, 좋아한다고?”

 

예상했던 대로, 김태형은 놀란 토끼눈을 한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술 취한 채로, 자취방에서, 과제하다 말고 멋없고 무드 없게 고백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나 싶어 속이 상했다. 좀 참을 걸. 그런데 어떡하겠나. 너무 오래 잠가 놓은 감정이라 한 번 터지니 주체가 안 된다. 나는 말없이 김태형을 쳐다봤고 김태형은 그런 나를 쳐다봤다. 여전히 눈은 동그랗게 뜬 채로.

 

진심이야?”

진심이에요.”

포기 못 하겠어?”

포기하기엔 이미 너무 좋아해요.”

…….”

포기 못 해요. 아니, 안 해요.”

 

그런데 엎질러진 물을 어떡하겠어. 나는 김태형에게 조금 다가갔다. 김태형은 여전히 충격이 큰지 입을 벌리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하긴, 충격이긴 하겠지. 그렇게 티를 내도 몰랐는데. 말 잘 듣는 후배라고만 생각했던 내가 자길 좋아한다니, 충격이긴 할 거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면, 이제부터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면 된다. 어차피 난 포기할 생각도 없고, 포기도 안 되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김태형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무서운 건 사실이라. 차마 김태형의 얼굴을 제대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말없이 앉아만 있었을까, 김태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랑 어색해져도?”

.”

나랑 사이가 틀어져도?”

당연, ?”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무심코 대답하다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마주한 김태형의 눈가가 빨갛다. 나는 당황해 입을 벌렸다. , 울어? 그러나 내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김태형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여전히 눈을 크게 뜬 채로 그런 김태형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잠깐만, 지금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설마

 

, 이제 나한테 아는 척 하지 마.”

 

지금 내가 한 그 좋아한다는 말을 내가 한유라를 좋아한다고 착각한 거야?! 그러나 내가 생각 정리를 끝내기도 전에 김태형은 자취방을 나가 버렸다. 여전히 눈가는 빨간 채로. 아니, 눈치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나는 얼이 빠져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다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일어났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오해를 해도 무슨 별 거지같은 오해를 하고 있잖아!!

 

태형이 형!!!!”

 

그러나 김태형은 눈치는 더럽게 없는 주제에 행동은 재빨랐다. 술도 엄청 마셨을 텐데, 택시라도 탄 건지 김태형은 이미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전화도 안 받고, 메신저도 안 받고. 결국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김태형의 자취방까지 찾아가봤지만 김태형은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술까지 마신 사람이 대체 어딜 간 거야. 그러나 작정하고 내 연락을 다 씹는 김태형은 아무리 전화를 하고 메신저를 보내도 묵묵부답이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아 진짜 설마…….

 

나 차단한 거냐고…….”

 

그러니까, 이게 나의 첫 고백에 대한 기억이다.


+


정국이의 다정함은 태형이 한정


삽질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


~대환장파티는 번외 0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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