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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 번외 02

 

너 태형이랑 무슨 일 있었냐?”

?”

태형이가 너보고 개새끼라던데.”

 

아니, 뭐라고? 나는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친 박지민 형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왜 이 형 생각을 못 했지. 나는 대답 대신 야작에 지쳐 보이는 박지민 형을 붙잡고 태형이 형이랑 연락이 되냐고 물었다. 개새끼고 뭐고, 일단 그게 제일 중요했으니까.

그 날 이후로 일주일. 나는 김태형의 머리카락 한 올 못 보고 있다. 아니, 이게 말이 돼? 같은 관데. 같은 동아린데. 그동안 그렇게 붙어 다녔는데!! 나는 이를 으득 물었다. 전화는 안 받고, 메신저도 차단을 해버렸는지 읽지도 않고. 기말고사가 가까워져 오는데 같이 듣는 수업은 들어오지도 않고, 동아리도 안 나온다. 아니,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학교 수업까지 빼먹을 일이야? 좋아하지도 않지만, 내가 한유라를 좋아한다는 게 그렇게 충격인가? 그렇게까지 한유라가 중요해? 그렇게 붙어 다녔던 후배를 단 하루 만에 뚝 잘라낼 만큼 한유라를 좋아하는 거냐고!!!!

 

아니, 안 돼. 나 계속 야작하느라 정신없었거든.”

그 말은 언제 들었는데요, 그럼?”

언제더라. 일주일 전이었나.”

 

일주일 전이면 대충 그 사건이 있었던 날이다. . 그럼 그 날 자취방에 안 들어오고 바로 박지민 형네 자취방으로 갔던 건가. 어쨌든 무사히 집에 들어는 갔나 보네. 그건 그렇고. 나는 박지민 형을 똑바로 쳐다봤다. 박지민 형이 내 형형한 눈빛에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진짜 연락 안 되는 거 맞아요?”

내가 거짓말을 왜 해. 근데, 진짜 싸웠어? ? 너 김태형이면 죽고 못 살았잖아.”

…….”

 

그래, 죽고 못 살았지. 그래서 그렇게 좋아하는데도 고백도 못 하고, 옆에서 땅 파고. 그런데 그 결과가 이거라니. 생판 남도 이렇게 말할 정도로 티를 냈는데, 정작 본인은 알지도 못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네가 이해해라. 알잖아, 김태형이 눈치가 없어서 그렇지 나쁜 애는 아냐…….”

 

박지민 형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멀어져 간다.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주일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잔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니, 말할 기회는 줘야 되지 않냐고. 이러는 게 어딨어. 나는 잔뜩 충혈된 눈가를 꾹 눌렀다. 진짜, 너무 어렵다. 김태형 좋아하는 거.

 

*

 

태형 오빠?”

. 넌 연락 돼?”

 

연락이 되지 않은 지 2주일 째. 더 이상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극약처방을 쓰기로 했다. 죽기보다 싫었지만, 제발 아니길 빌었지만, 혹시 한유라라면 김태형이랑 연락이 될까 해서. 김태형 때문에 여기까지 오다니. 난 날 보며 수군거리는 한유라의 친구들을 애써 무시했다. 한유라가 살짝 웃는다.

 

오늘 같이 밥 먹기로 했는데.”

?”

 

물어보면서도, 제발 아니길 바랐는데. 한유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그런다. 오늘 같이 밥을 먹기로 했다고. 진짜, 이쯤 되면 김태형이 원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래. 그러나 내가 이렇게 절망스럽거나 말거나, 한유라는 말을 잇는다.

 

나도 최근에 연락이 안 됐었는데, 어제 갑자기 연락 오셔서 할 말이 있다고, 오늘 밥 같이 먹자고…….”

…….”

그래서 같이 먹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먹을래? 일루 오신다 그랬? 저기 태형 오빠다.”

 

태형 오빠!!!! 그 말에 내 고개는 저절로 뒤를 향하고, 그제야 내 시야에 내가 2주 동안 찾아 헤맸던 김태형의 실루엣이 잡혔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얼굴. 그러나 내가 채 움직이기도 전, 김태형은 날 보자마자 뒤를 돌아 도망쳐 버린다. 나는 멍하니 그런 김태형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 왜 그냥 가시지? 둘이 무슨 일 있었어?”

…….”

 

쫓아가야 하는데, 쫓아갈 기력도 없다. 나는 까칠해진 볼을 쓸었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꼬여 버린 건지, 한숨밖에 안 나왔다. 누굴 탓해야 하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한숨에 한유라가 무슨 일 있어? 하고 물어 오는 것이 들렸다.

 

아냐. 난 별로 입맛이 없어서. 그냥 둘이 먹어.”

?”

그리고, 태형이 형 만나면 할 말 있으니까 연락 좀 받으라고 전해주라.”

 

제발. 나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숙였다. 서럽고 억울하고 서운해서 속이 다 쓰렸다.

어쩌다가 내가 한유라한테 이런 부탁까지 하게 됐지. 무엇보다 우울한 건, 누군가를 통해야지만 김태형에게 말을 할 수 있게 된 이 상황이다. 그리고무서워졌다. 만약 이 상황이, 내가 진짜로 김태형한테 고백한 이후에도 이어진다면? 오해가 아니라, 내가 김태형에게 고백했는데 그 이후에도 김태형이 날 죽자고 피해 다니고, 내가 부담스러워져서 작정하고 숨어 버리면. 그럼 어떻게 하지. 지금이야 김태형이 오해 때문에 날 피해 다니고 있는 거라지만, 그 땐 해명할 수도 없을 텐데. 속 쓰리고 목도 아픈데 그 와중에도 김태형이 좋아서. 그래서 더힘들다.

 

*

 

그럼 종강하는 날에 초밥집 앞에서 봐요.”

 

진짜 오랜만에 듣는 김태형의 목소리.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린데도 너무 오랜만이라 울컥했다. 이게 진짜 무슨 짓이야……. 헤어진 연인 사이도 아니고, 목소리로 울컥할 일이냐고.

기말고사가 가까워지기도 했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기 때문에 김태형과 종강하는 날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전화로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오해를 풀려면 아마 고백을 하게 될 것 같은데, 그걸 전화로 할 수는 없잖아.

기말고사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드디어 김태형을 만나는 날에 나는 아침부터 긴장감에 입술을 깨물었었다. 시험 보기 직전에도, 시험보다 오늘 저녁에 김태형을 만날 거라는 사실이 날 더 긴장하게 했으니 말 다 했지.

 

누가 저런 데다 핸드폰을 두고 다녀.”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무거운 전공책은 동방에 두고 가야겠다 싶어 들른 동방엔 아무도 없이 핸드폰 하나만 덩그러니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김태형도 핸드폰 참 여기저기 잘 두고 다녔었는데. 문득 혹시 저거 김태형 핸드폰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살펴보니 김태형의 핸드폰과는 기종이 다르다.

 

김태형 핸드폰이면 뭐, 어쩌게.”

 

괜히 찔리는 마음에 나는 괜히 책상을 쓸며 조그맣게 중얼였다. 어디까지 갈 거냐, 전정국…….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약속 시간은 7, 지금은 630. 내가 기억하고 있는 김태형의 시간표가 정확하다면 김태형의 시험은 오늘 오전에 이미 끝났고, 아마 지금쯤 초밥집으로 향하고 있으려나. 30분 후에 김태형을 만난다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같이 가자고 해볼까. 좀 그런가. 나는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대다 핸드폰을 들었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시험 시간 동안 꺼 놓았던 핸드폰을 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김태형의 문자였다. 약속을 뒤로 미루자는.

 

[정국아, 전화했는데 전화 안 받네ㅠㅠ 시험 보는 중인가..]

[근데 정국아, 진짜 미안해. 오늘 시험 끝나고 교수님이 갑자기 나 부르셨는데 7시에 보자셔ㅠㅠ 근데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ㅠㅠ 너 너무 많이 기다릴 지도 모르는데 우리 내일 만나자. 내가 초밥 사줄게ㅠㅠ]

 

짜게 식는다는 게 이럴 때 쓰는 표현인가. 나는 황망히 그 문자를 쳐다봤다. 3시에 와 있는 문자였는데, 계속 시험이라 꺼 놔서 이제 본 거였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한순간에 몸이 스르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잠시 내려놓았던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정국아.’

 

김태형의 글씨체도 아니고, 이모티콘도 없는. 기본 서체로 반듯하게 적혀진 내 이름인데 그 글자 위로 이상하게 김태형의 목소리와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정국아, 하고 부르는 김태형의 목소리와 내 이름을 부를 때 김태형의 얼굴. 어떤 얼굴로 이 문자를 적었을까 문득 상상이 되니 괜히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이게 얼마만이야. 김태형한테 문자를 받은 게.

오늘 당장 김태형을 보지 못하는 게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김태형은 이 짧은 문자만으로도 충분히 내 기분을 좋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나 보다. 약속을 미룬 게 자기 때문도 아닌데 미안하다며 내일 밥을 사겠다는 김태형. 나를 정국아, 하고 불러주는 김태형. 나를 생각하면서 이 문자를 보냈을 김태형. 지금 당장 떠오르는 모든 종류의 김태형이 너무 좋아서 심장이 뛰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김태형이 좋냐고 물으면 곧바로 응, 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좋다. 이미 내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한없이 유치해지고, 한없이 치졸해질 만큼, 김태형에 한해서만큼은 이성적인 판단이 잘 되지 않을 정도로 김태형이 좋다.

 

아침부터 보자고 하면 좀 그런가.”

 

나는 핸드폰을 만작였다. 뭐라고 답장하지. 사실, 내일 보면 더 일찍 볼 수 있고, 그러면 더 오랜 시간 같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삐쭉 고개를 내밀었다. 영화 보자고 할까. 이제부터 방학이니 한유라가 방해할 수도 없을 텐데. 서운함 같은 건 이미 예저녁에 사라져 버리고, 내일 일찍부터 김태형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만이 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이거 좀 위험하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됐지.

 

어느덧 밖은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고 나는 나른한 기분에 하품을 했다. 시험도 끝났고, 내일이면 오해도 풀 수 있을 거고.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시간은 정말 오랜만이라 어쩐지 몸이 무거웠다. 동아리방은 조용하고, 아무도 없고. 늘 시끄럽기만 했던 동아리방이 조용한 게 나름 운치가 있어서 슬금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 많고 시끄러운 곳을 좋아하지 않아서, 김태형을 만나기 위해서만 왔던 곳이었는데. 아무도 없을 땐 또 이런 느낌이구나 싶어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금 더 이 한적함을 느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니, 나는 잠깐,”

 

그러니까, 그 익숙하다 못해 누군가가 내 귓가에 붙여 놓은 것처럼 울리던 그 목소리가 바로 문 밖에서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태형이 형?”

정국아,”

? 정국이 있었네?”

 

갑자기 들이닥친 여러 명의 무리에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별안간 동방의 문이 열리고, 고요하던 동아리방이 시끄러워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정국이도 오늘 시험 끝났구나! 여기서 뭐해? 우리 지금 술 마시러 갈 건데 같이 갈래? 그러나 나는 나에게로 쏟아지는 여러 명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대신,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인영을 쳐다봤다. 왜 김태형이 지금 여기 있지? 지금 시간은 710. 김태형이 아까 나에게 보낸 문자에 따르면 김태형은 지금 이 동아리방이 아닌 교수님의 방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왜 김태형은 동아리방 안에 있으며 우리 지금 술 마시러 갈 거라는 사람들과 함께 들어온 걸까. 김태형과 한유라. 한유라와 김태형. 그리고 한유라의 손에 들린, 오늘 김태형과 만나기로 했던 그 초밥 집의 종이봉투. 그리고 당황한 듯한 김태형의 표정. 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것들이 의미하는 건 뭘까. 좋았던 기분이 슬금슬금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종이봉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그런 내 얼굴을 보던 한유라가 종이봉투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 나 오늘 생일이라고 태형 오빠가 사다 줬어. 짱이지.”

, 아니,”

내가 며칠 전부터 초밥 먹고 싶다고 그랬었거든.”

…….”

 

한유라의 말에 김태형이 아, 하고 입을 벌렸지만 이미 한유라의 말은 귀를 통해 내 머릿속에 닿은 후였다. 나는 멍하니 김태형을 쳐다봤고 김태형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설마.

 

내 생일이라 우리 술 마시러 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 정국아?”

 

한유라 생일 파티에 가려고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야?

 

정국아?”

 

그리고 그 순간, 내 귓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김태형을 쳐다봤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기 때문에 생긴 그 요란한 소리에 동방 안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집중되었고 김태형의 시선 역시 나에게로 향했다. 그 때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내가 거울을 보진 못했으니 알 수 없지만, 좋진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건 나와 눈을 맞추게 된 김태형의 표정에서도 추측해낼 수 있는 거였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진짜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형 진짜…….”

…….”

짜증나네요.”

 

김태형을 쳐다봤다가, 한유라가 들고 있는 종이봉투를 쳐다봤다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내가 한 거라곤 김태형을 좋아한 것뿐인데. 문득 치고 올라오는 자괴감과 허탈함에 나는 머리를 짚었다. 그리고 내뱉었다. 내가 한 말에 김태형이 뭐라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리는 것이 보였지만 이번만큼은 정말로 김태형의 목소리가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 가방을 챙겼다. 진짜 거지같은 하루의 마무리네. 그리고 그대로 동아리방을 나섰다. 내 뒤에서 동기들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 중의 김태형의 것은 없다. 그래, 무슨 말을 하겠어. 상황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데. 나는 어금니를 까득 물었다.

 

*

 

그 날, 그 후에 내가 했던 행동들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뿐더러 그 일을 곱씹어 생각하는 것은 내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으니 짧게 묘사하고 넘어가자. 그 날 밤 나는 박지민 형을 찾아가 거의 울부짖으며 미친 듯이 술을 마셨고, 너만 차단 기능 있는 줄 아냐, 나도 있다! 고 외치며 김태형을 차단했고. 내가 김태형을 차단한 것은 까맣게 잊고서 김태형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는다며 핸드폰을 붙잡고 징징거렸고, 보다 못한 박지민 형이 내 핸드폰을 뺏자 핸드폰 대신 박지민 형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는 것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 날 김태형을 차단한 것은 내가 그나마 그 날 했던 짓 중 가장 잘한 것으로 평가되는데,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김태형에게 전화를 걸어 뭐라고 울부짖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술에 쩐 채로 이틀을 보내고,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유럽행 비행기 티켓을 끊은 것이었다. 당장 떠날 수 있는 것으로.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었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러면 한 순간 미쳐서 김태형을 찾아가 대체 걔가 어디가 좋냐고 따져 묻기라도 할 것 같았으니까. 그런 추태까지는 부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그 방학 동안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혼자만의 이별 여행이 아니라 마음 정리 여행을 떠났다.

 

*

 

즉흥적으로 떠났던 마음 정리 여행은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이 있긴 뭐가 있었겠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랬겠지) 정확히 개강 날 오전에 귀국하는 일정으로 마무리됐다. 나중에 가서야 수강신청을 고려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으므로 수강신청 또한 망해 전필 과목들은 전부 실패한, 요상한 교양들로 가득 찬 시간표를 갖고서.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덕에 바로 전 학기에 김태형과 붙어 다니다시피 했던 시간표와는 다르게 김태형과는 겹치는 수업이 하나도 없게 됐고.

한 달이 넘는 여행 기간 동안,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그 유명한 격언은 대충 들어맞는 듯 했다. 물론 처음 2주는 힘들었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무뎌진 건지 아니면 진정이 된 건지 점차 괜찮아졌으니까.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시간표 덕에 학교에서도 김태형을 마주치지 못했으니 김태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고 그에 미루어 보아 나는 그럭저럭 정리가 됐다고 믿었다. 그래서 새롭게 태어나자는 의미로 핸드폰도 바꾸고, 번호도 바꾸고.

그러니까 진짜로, 그렇게 마무리된 줄 알았다. 수강 정정 후에 갑자기 내가 듣는 이상한 교양을 평소에 듣고 싶었던 강의라 칭하며 수강 신청한 한유라를 봤을 때도 아무 생각이 안 들었으니까. 그래. 한유라가 잘못한 게 뭐가 있을까. 모든 것은 신의 뜻이고 그냥 김태형과 나는 안 될 인연이었던 거겠지. 내게 강 같은 평화…….

그러니까 나는 그 때 당시 이런 게 해탈의 경지, 더 이상의 어떠한 고통도 없는 상태, 다른 말로 득도 혹은 열반에 들었다는 것일까 생각하며 이참에 불교에 귀의나 해 볼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나중에 나와 한유라가 단 둘이 이상한 교양을 듣고 있는 것과 김태형과 한유라가 아직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 날 있었던 일이 카더라 통신에 의해 부풀려져 나와 김태형, 그리고 한유라가 세상에 둘도 없을 핫한 삼각 캠퍼스 치정극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굳이 해명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아마 그 때 내 머리 뒤에는 광배가 비치고 있지 않았었을까 싶다.

 

이건 여기다 두면 돼?”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것이 몇 가지 있었으니.

 

, 김태형 땡큐.”

 

내가 생각보다도 더 순정남이었다는 사실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쉽게 식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오랜만에 본 김태형이 내 상상 속의 김태형보다 더 귀엽고 예쁘고 잘생겼었다는 것.

 

전정국, 안 가?”

 

몇 달 만이지? 나는 멍하니 서서 날짜를 세며 워크샵에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는 김태형을 쳐다봤다. 그런 나를 이상하게 생각한 동기가 와서 나를 툭 칠 때까지. 그러니까, 또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던 거다. .

 

씨발…….”

뭐야, 왜 갑자기 욕해?”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나는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이 느껴졌다. 옆에서 무슨 일이냐며 나를 흔드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런 게 어디 있어. 다 끝났는데.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해탈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김태형을 본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뭐 해? 너네 안 타?”

몰라요. 전정국 갑자기 욕하더니 이래요.”

? 너 어디 아프냐?”

전정국 아까 태형이 형 쳐다보.”

 

나는 아직 김태형을 좋아한다는 걸.

 

. 너 태형이 형이랑 같이 가는 거 싫어서 그래?”

…….”

소문이 진짜였구나. 그래도 야, 삼일만 참아봐.”

 

싫긴 씨발. 좋아서, 김태형이 너무 좋아서 탈인데. 나는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여전히 고개는 숙인 채로. 옆에서 동기 놈이 학교생활 잘 하기에 별 일 아닌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다며 나를 위로하는 것이 들려왔다. 그래나도 내가 해탈한 줄 알았지. 진짜로 득도한 줄 알았지. 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열반에 오른 줄 알았지.

 

해탈은 지랄.”

 

나는 나직하게 중얼였다. 해탈이며 열반은 무이대로 불교에 귀의했다간 내가 김태형을 두고 하는 생각들에 부처님이 친히 음행죄로 지옥에 끌고 갈 판인데내 험한 말에 나를 토닥이던 동기 놈이 살짝 몸을 움츠리거나 말거나, 나는 한 번 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버스로 향했다. , 순정 순정 누가 말했나, 김태형을 좋아하는 전정국이 말했지…….

 

*

 

그 후 워크샵 장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학술 답사를 빙자한 관광을 하는 내내 내 시선은 줄곧 김태형을 향해 있었지만 나는 김태형과 단 둘이 대화할 만한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사실, 버스에서 내린 이후로 조가 나뉘는 바람에 대화할 타이밍은커녕 김태형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조가 갈리니 잠드는 방도 갈리고, 관광 일정도 전부 갈렸으니까. 결국 23일의 일정이 끝나 마지막 일정이 될 때까지 김태형과 말 한마디 섞어보지 못한 나는 애가 타 죽을 지경이었다. 사실, 김태형과 말을 섞을 기회가 생긴다 해도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 이 나무는 이 사찰의 자랑으로, 조선시대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나무입니다. 600년이 넘었다고 해요.”

 

나는 가이드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있는 김태형을 쳐다봤다. 쉽게 사람들을 모아서 버스에 태우기 위함인지 23일 내내 조로 나뉘어 진행되었던 일정은 마지막 일정만큼은 전원이 모여서 진행됐고 나는 혹시나 하고 기대했지만 역시나였다. 김태형은 저만치 앞에서 내가 끼어들 틈 없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말 이대로 말 한마디 못 해보고 워크샵이 끝나는 건가. 신이시여, 이러는 게 어딨어요. 이럴 거면 차라리 김태형을 내 눈앞에 나타나게 하지 말든가요. 나는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앞에서는 가이드가 방긋방긋 웃으며 열심히 설명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해서, 이 나무는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도 소원을 들어주는 영험한 나무로 통했다고 합니다. 왕과 왕비마저도 와서 소원을 비는 것이 연례 행사였다고 하니 말 다 했죠.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소원이 있다면 속는 셈 치고 한 번 빌어 보시고, 다 같이 버스에 탑승하는 걸로 할게요.”

 

가이드는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고, 나는 무심코 가이드가 말했던 나무를 올려다봤다. 고개를 들어 쳐다봐야 할 정도로 커다랗고 오래되어 보이는 나무. 멍하니 나무를 쳐다보고 있자니 옆에서 동기가 나를 툭 치는 것이 느껴졌다.

 

소원 뭐 빌 거야?”

무슨 소원.”

가이드 말 못 들었어? 소원 들어주는 나무라잖아. 근데 이런 거 어딜 가나 하나씩은 꼭 있는 듯.”

소원?”

난 여자친구 생기게 해달라고 빌어야지.”

 

어딜 가나 하나씩은 꼭 있는 것 같다고 궁시렁거릴 땐 언제고, 옆의 동기는 눈까지 감고 조그맣게 소원을 중얼이고 있었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김태형 쪽을 향했다. 잠시 나무를 쳐다보기 전까지 줄곧 쳐다보고 있었으니 찾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동그란 머리통이 금세 내 눈에 들어찼다. 김태형은 내 옆의 동기처럼 소원을 빌고 있는 듯, 눈을 감고 입을 중얼이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지, 거리가 멀어서 들리지는 않았지만.

 

…….”

 

나는 다시 나무를 쳐다봤다. 소원. 나는 다시 김태형을 본다. 눈을 감는 것으로는 부족했는지 김태형은 손까지 모으고 소원을 중얼이고 있다. 대체 무슨 소원을 빌고 있기에 저렇게 손까지 모으고 열심인지. 나는 입술을 물었다. 그 소원 안에 내가 들어있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그냥, 한유라랑 잘 되게 해주세요 뭐 이딴 거만 아니었음 좋겠다. 그럼 너무 질투 날 것 같으니까.

 

소원…….”

 

나는 조그맣게 중얼였다. 사실 나에게 소원이라 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천지신명님. 아시죠? 제 소원은 하나예요. 나는 조용히 손을 모았다. 대체 김태형이 뭐라고, 이까짓 나무 앞에서 이렇게 온 맘을 다해 빌어야 하나 피실 웃음이 새어나오긴 했지만, 나는 곧 다시 표정을 굳혔다.

 

김태형이 저를 좋아하게 해주세요.’

 

나는 어느새 나도 모르게 감긴 눈을 조금 더 꼭 감았다. 간절하고 간절한 소원. 1학년 처음 입학하고, 엠티에서 김태형을 처음 봤을 때부터 품어 왔던 올곧고 솔직하고 대쪽 같은 순정. 청순한 사람이 이상형이라 하기에 팔자에도 없는 청순한 연하 남친 코스프레까지 하게 만들었지만, 어디서 굴러들어왔는지 모를 여우한테 뺏긴 내 첫사랑. 워크샵에 온 이후로도 은근히 나를 피하는 것 같은 김태형에 혹시 내 존재가 김태형을 힘들게 할까 차마 제대로 말도 못 걸 만큼 소중했다. 이런 건 하나도 모르겠지. 바보 같은 김태형. 한유라가 어딜 봐서 청순이야. 생각하다 보니 또 괜히 열이 올라 나는 모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두고 봐. 진짜, 기회만 생기면 청순이고 뭐고.

 

다 빌었으면 가자!!”

 

콱 잡아먹어 버릴 거야. 눈을 뜨고 김태형 쪽을 쳐다보니 어느새 기도를 끝냈는지 다른 선배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김태형이 보여 나는 이를 물었다. (김태형을 향한 형형한 눈빛에 옆의 동기가 희대의 삼각관계에 에피소드를 한 가지 더 추가하고 있었음은 정국이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다시 눈앞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내 간절한 소원을 이런 초목이 알기나 할까. 나는 괜히 그 나무를 째려봤다.

 

두고 볼 거예요.”

 

내 소원 들어주나, 안 들어주나. 그 와중에도 혹시 반말을 하면 괘씸죄로 들어줄 소원도 안 들어줄까 싶어 존댓말을 하다 내 자신이 어이가 없어 픽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렇게 미쳐가는구나, 전정국. 나는 다시 김태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김태형은 여전히 웃으며 버스에 올라타려 하고 있었다. 문드러지는 내 마음도 모르고.

 

안 가냐?”

 

멍하니 김태형을 쳐다보고 있자니 내 옆의 동기가 나를 툭 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젠 하다하다 나무한테까지 화풀이냐. 진짜 중증이다, 전정국.

 

어떡하냐 나…….”

? 뭐가?”

 

이러다가 진짜 평생 수절하고 살아야 되는 거 아니냐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하나님 부처님 예수님.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진짜 정말.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기회가 생긴다면,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아무리 눈치가 없는 김태형이라도 눈치 채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절대로 한 톨만큼의 오해도 없게, 다 솔직하게 표현할게요.

 

내가 진짜,”

 

좋아한다고.

 

?”

 

그러니까 나 좀 좋아해 달라고



+


이렇게 해서 조선에서 빠꾸없는 전정국이 되었다는 후문..

이렇게 번외가 끝이 났네요! 다음 편부터는 다시 조선입니다 'ㅅ'

그 전 편들에서 나 나름 열심히 떡밥을 뿌려 놨었는데, 지금 다시 찾아보는 것도 나름 재밌지 않을까..싶..습니다..(아님 말구.. 소금소금)


사실 이번 편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조금 더 있는데.. 그건 앞으로 또 차차 알게 되는 걸로..☆

그러니 그냥 지민이의 말을 인용하며 끝낼게요...


태형이가 눈치가 더럽게 없어서 그렇지 나쁜 애는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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