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여기, 대한민국의 평범하지는 않고 평균보다 약간 잘생긴(이라고 본인은 누누이 강조했다) 2n살의 대학생 박지민이 있다. 단언컨대 그는 평생을 평범하게 살아왔고, 조금 특이한 일을 겼었다 해도 p<.05 수준의 역치를 넘지 않는, 통계적으로 지극히 평균의 범주 내에 속하는 일만을 경험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해 왔다. 말인 즉슨, 평범하게 태어나 평범하게 자랐고 여태까지 평범한 인생을 영위해 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

 

웬 생전 처음 보는 한복을 입은 남자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진짜로 날이 서 있는 것 같은 진검을 제 목에 들이대고 있는 바로 지금. 이건 과연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은 수준 내의 이상한 경험이 맞을까? 지민은 제게 겨누어진 진검에게서 느껴지는 살기에 꿀꺽 침을 삼켰다. 옆에는 김태형이 당황한 눈빛으로 그 남자를 제지하고 있었다. 지민은 숨을 살짝 들이쉬었다. 이게 대체무슨 상황이지.

 

, 내시가 맞다. 그러니 그 검을 당장 치우거라!”

…….”

 

그러나 태형의 그런 말에도 호위무사들은 쉬이 칼을 내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태형과 정국의 옆에 그림자처럼 항상 따라 붙어 왔던 호위무사들이었다. 중전의 몸을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내시의 얼굴을 모를 리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지민은 그들에게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일 테니, 아무리 중전의 명령이라 한들 쉬이 경계를 풀 수가 없는 거였다. 이것은 자칫하면 궐내 추문으로 끝나지 않고 왕에 대한 역모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사안이었으니까. 그나마 태형이 저지하였기에 감히 중전 마마에게 손을 댄 이 무뢰한의 손을 당장이라도 잘라버리지 않고 칼을 겨누고만 있는 거였다. 그러니 이제 정국이 나설 차례였다. 정국이 지민의 존재를 증명해주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정국이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할 말을 정리해 채 입을 떼기도 전에, 사지에 몰린 지민은 저도 모르게 먼저 입을 열었다.

 

, 제가!”

……?”

어렸을 때 옆집 누렁이에게 그만!!”

 

먹다 남은 간식 가지고 약을 올리는 게 아니었는데 너무 재밌어서 약을 올리다가 누렁이가 화가 나서 그만…….

지민은 재빨리 디테일을 덧붙였다. 연기의 핵심은 디테일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생존본능이란 이렇듯 대단한 것이다. 지민은 뇌리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아무렇게나 주워섬기며 저도 몰랐던 제 안의 작가적 재능을 가감 없이 펼쳤다. 지민의 상세하고도 구체적인 설명에 지민에게 칼을 겨누고 있던 호위무사의 얼굴이 공감성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그와 동시에 칼이 지민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그리고 그새를 놓치지 않은 태형이 재빨리 어서 칼을 치우래도! 하고 채근했다.

 

, 그래! 그런 비극에도 여기까지 오기 위해 분골쇄신한 아이다. 그것이 대견하여 최근 특채로 등용했다!”

…….”

중전의 말이 맞다. 오늘 시찰도 사실 이 자를 만나러 온 것이니 칼을 내리거라.”

 

지민의 절박한 연기와 태형의 설명, 그리고 결정적으로 정국의 동의까지. 결국 호위무사는 칼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고 한껏 긴장했던 지민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게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야……. 지민이 넋이 나간 채 조용히 읊조렸다.

 

*

 

조선이라고?”

보시다시피.”

뺨 때려 줄까?”

몰래카메…….”

누가 널 몰래카메라 하려고 이 정도 스케일로 정성을 들여.”

 

그건 그렇네. 제가 생각해낸 이 상황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설명들을 모두 성공적으로 반박해낸 태형의 간결하고도 핵심만 짚어내는 말에 지민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과 마찬가지로 지민 역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대학생답게 포기가 빠름특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누굴 고자로 만들어!!”

, 적응 되게 잘 하던데…….”

그거야 내가 순발력이 좋, !”

, 시끄러.”

 

그러나 납득하는 듯하던 지민은 이내 번뜩 떠오른 상황에 소리를 빽 질렀고 정국은 소리를 지르는 지민의 입에 떡을 쑤셔 넣었다. 소리 좀 낮춰요. 저기까지 다 들리겠네. 정국이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고 태형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그 낯선 모습에 눈을 깜박였다. 정국이가저런 성격이었던가? 저를 대하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정국의 모습에 태형은 괜히 서늘해진 제 목덜미를 쓸었다. 지민은 제 입에 가득 찬 떡 때문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우물거리며 온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고, 정국은 그러거나 말거나 태형이 아까 잔뜩 샀던 과자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태형은, 그런 정국과 지민을 번갈아 쳐다보다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멀찍이 떨어져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호위무사들을 의식하며.

 

그래도 죽는 것보단 고자가 낫잖아.”

그래요. 진짜로 목이 없어지는 것보단 가짜로 그게 없어지는 게 낫지.”

 

? 제 말을 거드는 차분하고 게 이어지는 정국의 목소리에, 태형은 정국을 돌아봤다. 아니 맞는 말이긴 한데……. 태형은 괜히 제 옷깃을 여몄다. 어쩐지 자꾸 주변이 추워지는 것만 같은데……. 태형이 지민을 돌아보자 지민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얼굴이 살짝 하얘져 있었다. 아니다. 손이 살짝 그 쪽으로 가 있는 걸 보니 정국의 태도 때문이 아니라 정국이 한 말 그 자체에 겁먹은 것 같기도 하고…….

 

으브븝!!”

다 먹고 말해.”

그래서 왜 갑자기 조선에 오게 된 건데!!”

 

그리고, 아무리 조선이라 해도 널 만졌다고 왜 내 목을 날려?! 퍼뜩 정신을 차린 후 떡을 꿀꺽 삼킨 뒤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태형을 향해 말을 이어나가던 지민은 태형에게서 느껴지는 무언가 이질적인 기분에 잠시 말을 멈추고 태형을 아래위로 차분히 훑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정국을 보고, 다시 태형을 보고. 다시 정국을 보고, 그리고

 

근데 김태형 너 왜…….”

…….”

여자 옷을…….”

 

지민이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태형은 그제야 아, 하고 제 몸을 더듬었다. 여태껏 계속 중전으로 사는 것에 익숙해져서 제가 여자 옷을 입고 있는 것이 현대의 사람, 그러니까 지민에게 이상해 보일 거라는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지? 사실 나 왕비야? 조선의 국모가 되었어? 태형이 잠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그 침묵을 잘못 이해한 지민이 할 말을 고르기 위해 입을 벌렸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리고 잠시 후, 지민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

취향을 존중한다, 친구야.”

?”

내가 패션디자인 학과잖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나도 여자 옷 보면 참 남자 옷과는 다르게 선택의 폭이 넓구나 생각해 본 적 있고 그런 점이 좀 아쉬웠던 적도 있어. 물론 그렇다고 난 여자 옷을 입어 볼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었지만, 패션학도로서 너의 그 선구적인 발상을 존경하는 바고 그러니까 네가 좋아하는 거라면 난 친구로서 너의 그런 취향을 충분히 존중해 줄 의사가 있…….”

그런 거 아니거든!!”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듣다 못한 태형이 지민의 말을 잘랐고 지민은 말을 하다 멈추고 멀뚱히 태형을 쳐다봤다. 여전히 얼굴엔 안쓰러움이 묻어 있는 채였다. 그럼 뭔데. 그러나 막상 지민의 그 표정에, 태형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굳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사실 내가 조선에서 여장을 하게 됐어. 왜냐면 내가 중전이거든……. 어떻게 말해도 이상해 보이는데?

 

괜찮아. 애써 무마하려 하지 않아도 돼. 나는…….”

태형이 형이 왕비라서 그래요.”

?”

 

뭐라 변명을 해야 하긴 하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 사이 정국이 (역시나)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 말에, 지민의 눈은 커다랗게 동그래져 정국을 향했다. ?! 왕비?!

 

왕비라니, 그럼 왕은 누군데?”

저요.”

……?”

 

이게 무슨 갑자기 분위기 조선왕조실록이 아니고. 지민은 정확히 0.7초간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입을 합 다물었다. 내가 지금 헛것을 듣는 건가? 아님 얘네가 지금 날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건가. 사실 타임슬립도 아니고 정말 그냥 평범한 대학생을 상대로 하는 방송국 특집 몰래카메라라던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아는데, 꿈도 아니고 몰카도 아니에요.”

아니, 말이 안 되잖아!!”

정 못 믿겠으면 아까 그 사람한테 가서 사실 나 내시 아니라고 말해보든가요.”

 

아니 그건 좀……. 지민이 말끝을 흐렸다. 제 눈앞에 펼쳐진 이 상황을 믿지 못해 벌떡 일어났던 지민은 슬쩍 다시 앉아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자신은 조선에 떨어졌고, 정국과 태형도 조선에 떨어졌다. 그리고 태형이 여자 옷을 입고 있기에 물어보니 조선의 왕비란다. 그리고? 왕은 전정국.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개판이네…….”

…….”

언제부터 조선 왕실이 이렇게 개족보가 됐어?”

 

나한텐 말도 안 해주고? 내가 한국사 하느라 얼마나 쌔가 빠졌는데……. 문득 제가 쳤던 수능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온 지민이 다시 한 번 태형을 훑었다. 조선에도 남색이 있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설마 왕비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을 줄이야. 조선이 생각보다 많이 개방적인 나라였구까지 생각하던 지민이 문득 눈을 깜박였다. 아니,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남자가 왕비는 좀혹시 설마…….

 

김태형 너 여ㅈ…….”

아니야.”

 

그 뒤로 어떤 말이 나올지 예상한 태형이 지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말을 막았다. 그거 아니야. 나 건실해. 태형의 단호하고 확신에 찬 눈빛에 지민이 아, 하고 감탄을 터뜨렸다. , 그래……. 다행이네. 친구의 신체적 안위에 대한 안도의 말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상황 이해됐으면, 뭐 좀 물어봐도 되냐?”

 

결국 지민이 천천히 제가 처한 상황에 납득하며 다시 한 번 상황을 반추하고 있는 동안, 태형이 조심스레 물었다. 여태까지는 정국과 저만 이곳에 떨어진 줄 알았는데. 지민도 왔다는 것은 무언가 연관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쩌면 지민의 등장이 현대로 돌아가게 해 줄 단서일지도 모른다. 물론 조선에서의 생활이 싫다거나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다거나 뭐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언제까지고 조선에 눌러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뭔데?”

너 어쩌다가 여기 왔어?”

 

태형이 꿀꺽, 침을 삼켰다. 정말 도움이 될까? 정국과 자신은 겹치는 것이 하도 많아 무엇이 정국과 저를 조선에 떨어지게 했는지 알기 힘들었다. 같은 과, 같은 동아리, 그리고 한유라까지. 한 희빈이 한유라와 몹시 닮은 것으로 보아 혹시 한유라가 얽혀 있지 않을까 했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한 희빈은 이 시대의 사람이었고, 지독히도 저를 싫어하고 있으니 어떻게 뭐라 떠 볼 수도 없었다. 게다가 어쩐지 정국은 한 희빈에게 물어보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나 왜 여기 왔는데?”

짚이는 거 없어?”

없어. 전혀. 나 되게 착하게 살았는데…….”

 

시발 어쩌다가 조선에 떨어져서 팔자에도 없는 고자 코스프레나 하고 있고. 지민이 꽤나 억울한 듯 웅얼거렸지만 지민이 그러거나 말거나. 태형은 끙, 하고 팔짱을 꼈다. 그럼 대체 뭐지? 무슨 연관성이지? 태형이 골몰하고 있는 사이, 정국이 그런 태형을 도우려는 듯 입을 열었다.

 

여기로 오기 전 마지막 기억이 뭔데요?”

마지막 기억?”

뭐 하고 있었냐구요.”

할아버지 댁 갔다가,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소화도 시킬 겸 등산 갔다가낮잠?”

…….”

 

한마디로 아무것도 안 했다는 소린데. 지민의 말에 태형이 조금 더 크게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쉽사리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아 보이네. 태형이 웅얼거리며 미간을 좁히자 정국이 태형의 등을 살짝 두드렸다. 이유가 없진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언젠가 돌아갈 방법이 생기겠죠. 설마 평생 여기 있겠어요.

 

아니…….”

 

정국의 위로에 태형이 고개를 들었다. 사실, 언젠가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리고 제가 없는 현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살짝 불안하긴 해도 조선에서 살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스트레스도 없고, 해야 할 것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딱히 걱정하고 있는 건 아닌데…….”

 

그 날 이후 이제 평생 인사도 못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정국과 이렇게 편하게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할 수도 있게 됐고. 막상 정국은 지민에게 말하느라 제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지만, 태형은 어쩐지 간질거리는 기분에 고개를 숙였다. 상황이 어쨌든, 이유야 어쨌든. 정국과 이렇게 다시 웃으며 대화할 수 있게 된 이 상황이 태형은 좋았다. 이전에나 지금에나, 정국은 태형에게 특별한 후배였으니까. 고등학교 때까지 이렇다 할 동아리 생활을 하지 않았던 태형에게 처음 생긴 제대로 된 후배였고, 많은 동아리원 중에서도 자신을 유난히 잘 따르던 후배였다. 뭐 꼭 처음 생긴 자신을 잘 따르는 후배였기 때문만은 아니고, 그냥 정국 자체가 특별했던 거지만. 왜 특별했냐고 물으면 글쎄, 태형도 알 수 없었다. 그냥 정국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잘 해주고 싶고, 웃는 얼굴이 보고 싶고.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그래서 그 때도, 제가 처음으로 좋아한다고 자각했던 유라를 쉽게 포기할 수 있었던 거였으니까.

 

태형이 형.”

 

정국을 위해.

 

*

 

비록 조선에 떨어진 이유나 현대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것에 대해서는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이 상황에서 지민은 태형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긴 했다. 외로운 궁중 생활에 자신의 편이 되어줄 한 줄기 빛같은 의미에서는 아니고, 지극히 실용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로.

 

내가 왜 니 옷고름을 쳐 매 주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건지 설명해봐.”

내시라서?”

시발…….”

 

지민이 태형의 풀어헤쳐진 옷고름 앞에 서서 주먹을 쥐며 읊조렸다. 조선에 온 지 이틀, 지민은 등장한지 단 하루 만에 그 누구보다도 중전의 가까이에서 중전의 의복을 맡아 관리하는 요직을 꿰차는 기염을 토하며 궁궐 안 사람들에게 세상살이에 있어 인맥의 중요성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딱히 본인이 원한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사실, 제아무리 내시라 한들 내시 역시 남자이기 때문에 보통 상황이었다면 그런 근직(近職)을 내시가 맡는 것은 절대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겠지만 정국, 그러니까 왕의 동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취업의 기쁨도 잠시, 지민은 이내 제가 해야 할 일이 태형의 옷을 다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쟤는 왕빈데, 나는 내시네?’류의 것은 물론 아니고(지민은 왕비의 자리까지 탐할 정도로 권력욕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2년간 열심히 공부한 것을 처음으로 실전에 적용할 수 있게 된 기회가 하필 김태형의 옷 관리라는 것에 대한 현타였다. 내가 이러려고 패디과에 왔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다들 첫 취업 내지는 인턴에 대한 로망 정도는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로망이 제 절친한 친구의 옷 관리하는 것으로 깨부숴지다니!

 

나는 뭐 좋은 줄 아냐…….”

 

그러나 지민의 그런 투덜거림에 억울한 것은 태형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태형도 이 상황이 뭐 그닥 그렇게 많이 달가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주한, 오늘 입을 옷을 들고 들어온 똥 씹은 표정의 지민에 태형도 남몰래 한숨을 내쉰 차였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더 이상 궁녀에게 제 몸을 맡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 정도일까. 낯선 여자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 어색하기도 했고, 제가 입고 있는 옷을 정돈하는 일이니만큼 제가 남자인 것을 들키기라도 할까 그동안 조마조마하긴 했었으니까. 물론 뭐,

 

너 숨 쉬지 마, 시발. 숨결 느껴지니까.”

 

작업 특성상 지민과 얼굴을 매일 가까이 해야만 하는 것이 퍽 달갑지만은 않긴 했지만 말이다. 태형이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거든. 하고 이를 악물고 대꾸하며 숨을 흡 들이쉬었다. 이상하네. 정국이가 매 줄 때는 이렇게까지 항마력이 딸리진 않았었는데정국이는 박지민처럼 투덜거리지 않고 담백하게 군말 없이 해 줬어서 그런 건가. 태형은 지민이 제 옷고름을 매어주는 동안 몇 번이고 욕을 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주먹을 쥐었다. 참아, 참아.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

 

다 됐다.”

 

억겁 같았던 몇 초가 지난 후, 짧은 한숨과 함께 지민이 떨어져 나갔고 태형은 참았던 숨을 파 내쉬었다. 이 짓을 매일 아침 해야 하는 거야? 태형이 참담하게 중얼이자 그에 조그맣게 욕을 읊조리던 지민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태형을 쳐다봤다. , 맞다 그러고 보니까 너.

 

전정국이랑 싸웠다 하지 않았냐.”

…….”

어쩌다가 둘이 같이 있게 된 거야? 그것도 부부로.”

 

세상에 한 여자를 두고 싸우던 남자 둘이 극적 타결을 서로와 결혼하는 것으로 볼 줄이야. 솔로몬도 미처 생각하지 못할 완벽한 합의가 아닐 수 없지 않은가. 지민은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지민의 그 말에, 태형은 그런 거 아니야, 하고 지민의 앞에 주저앉았다.

 

그냥 와 보니까 이미 부부였어.”

…….”

…….”

하긴. 설마 너네 의지로 결혼하진 않았겠지.”

 

와 보니 이미 부부였다니. 잠시 어이없음에 멍하니 입을 벌리고 눈을 깜박이던 지민은 이내 이미 부부였다는 설명이 와서 결혼했다는 설명보다 합리적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말하지만 지민은 납득(포기)이 빠른 편이었다.

 

그래서, 화해는 했고?”

화해?”

너네 둘 싸웠었던 거 아니었어? 서로 인사도 안 하고 지냈다며. 너 나한테 전정국 개새끼라고 그랬잖아. 그러고 보니까 그 때 왜 그랬냐? 난 아직 너네 왜 싸웠는지도 몰라.”

…….”

 

지민의 말에 태형이 조그맣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정국과 그렇게 된 이후, 지민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정신이 없기도 했고, 그 날 정국에게 충격의 형과 사이가 틀어지는 한이 있어도 유라를 포기할 순 없다발언을 듣고 정신없이 지민을 찾아가 지민의 멱살을 잡고 엉엉 운 이후, 지민을 포함한 타인에게 정국에 대한 말을 일절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날의 기억은 제게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으니까.

 

화해는안 했는데.”

뭐야, 그럼 여전히 냉전 중인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화해를 안 했다기 보다싸운 적도 없었던 것 같은 분위기랄까. 태형이 조그맣게 읊조렸다. 그 말에, 지민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싸운 적도 없었던 거 같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냥, 정국이가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을 안 해.”

그 날?”

 

태형의 말에 지민이 되물었다. ‘그 날이라니. 무슨 날? 태형과 정국의 관계에 있어 지민이 떠올릴 수 있는 날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태형이 울면서 저를 찾아와 멱살을 잡은 날, 그리고 정국이 역시나 울면서 저를 찾아와 멱살을 잡은 날. , 지민은 영문도 모른 채 울면서 저를 찾아온 태형과 정국에게 두 번이나 멱살을 잡히고 술 상대가 되어 줬던 것이다. 아니 그러고 보니까 근데 진짜 이것들이…….

 

생각해 보니까 열받네? , 너나 전정국이나, 나를 무슨 호구로 아냐? 뭔 일만 터졌다 하면 나한테 와!”

?”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도 안 해주고! 무작정 쳐들어와가지고 술만 마시고 가고! ? 나 야작하는데!! 내 자취방이 너네 고민상담소야?! ?! 내가 상담사냐고!”

정국이도 너 찾아왔었어?”

 

딱히 설명할 말이 없어 가만히 지민의 말을 듣고만 있던 태형이 지민의 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정국이 제 자취방에 찾아와 단 둘이 술을 마셨다는 지민의 말을 들은 그 순간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정국이가 너 자취방에 왔었다고? 둘이 그렇게 친해? 그러고 보니, 태형은 정국에게도 제가 모르는 다른 친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여태까지는 해 본 적이 없었다. 정국을 알게 된 이후로 태형과 정국은 주중 주말 가리지 않고 붙어 다녔기 때문에 과내에서도 거의 샴쌍둥이라 불릴 정도였고, 정국과 사이가 틀어지고 난 후에는 부러 정국과 관련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었으니까. 그래, 생각해 보니까 정국에게도 분명 제가 모르는 친구들이 있을 거였다. 그리고 제가 모르는 사생활도. 그러니까 정국은 그들과 얘기도 하고, 어쩌면 고민 상담도 하고, 또 어쩌면 그들 중 누군가와는 사귀었을 수도 있고…….

 

넌 지금 이 상황에 그게 묻고 싶냐?”

아니, 둘이 아는 사이라는 건 들었는데자취방에 찾아가서 술 마실 정도로 친한 줄은 몰랐어. 많이 친해?”

아니 그니까 지금 그게 나한테 물어볼 말이냐고…….”

그럼 뭘 물어봐야 하는데?”

 

사실 물어보고 싶은 건 이것 말고도 많았다. 지금 이 순간 태형은 정국에 대한 궁금증이 갑자기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앗기 때문에. 얼마나 친해? 언제부터 친해? 왜 친해? 그럼 너 정국이에 대해서 이제 약간 좀 많이 알아? 등등. 이유는 자기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태형은 지금 호기심 천국 상태였다. 그런데 박지민이 지금 이런 걸 물어보길 원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그럼 뭐지? 태형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였고 그 순진무구한 태형의 눈빛에 지민은 그 순간 제 뇌 안의 어이와 어처구니가 사이좋게 손을 잡고 외출을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김태형이 희대의 눈새이기 때문에 전정국과 여태까지 이어지지 않은 것이, 그래서 제가 일찍이 전정국과 김태형의 사이와 서사를 아는 둘의 교집합 친구 No.1이 되지 않은 것이,

 

너네 진짜 짜증난다…….”

 

어쩌면 저에게는 다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 ?”

 

그러니까, 여태까지는 말이다.



+


태형이는 과연 성공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인가!

오랜만에 왔는데 별 내용 없이 분량상 애매한 곳에서 끊기네요ㅠㅅㅠ.. 

다음 편은 최대한 빨리 갖고 오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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