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궁궐 안 모두가 잠든 깊은 밤, 금실로 수놓아진 비단 금침 안에서 태형은 지금 현재 일생일대의 고민을 끌어안고 제 인생에 있어 어쩌면 가장 커다란 결정이 될 지도 모를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느라 쉬이 잠들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디서든 잘 자는 태형을 잠 못 들게 하고 있는 그 고민은 바로 제가 느낀 그 이상한 기시감에 대한 고민이었으니.

비록 지금이야 조선에 떨어져 팔자에도 없는 왕비 행세를 하며 왕을 사모하는 역을 수행하고 있지만, 조선에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아니 조선에 떨어진 이후 꽤 오랜 기간 동안에도 혹시 제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될 줄은, 그러니까 제 성적 지향성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을 하게 될 줄은 태형은 전혀 몰랐으니까. 태형은 가만히 누워 눈을 감았다. 그래. 처음부터 천천히 생각을 해 보자.


 

Q. 언제부터였는가?

A. 잘 모르겠다.(웃음)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정국을 보며 설레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Q. 설렌다고? 그것뿐인가? 그게 좋아한다는 감정인가?

A. 그것 역시 잘 모르겠다. 난 조선에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같은 동아리의 후배 한유라를 좋아하고 있었다. 물론 모종의 이유로 포기하긴 했지만, 분명 그건 좋아하는 감정이 맞았던 거 같은데.


Q. 말에 확신이 없다. 그렇다면 이 고민을 왜 하고 있는 것인가? 정국에게 느끼는 감정과 한유라에게 느꼈던 감정이 다른가?

A. 잘 모르겠지만, 좀 다른 것 같다. 아니다. 비슷한가? 그러고 보니 유라를 봤을 때 설렜던가? 유라가 가까이 와서 웃을 땐 좀 설렜던 거 같긴 한데…….


Q. 대답이 전부 모른다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시발. 태형은 제 스스로와 문답을 이어나가다 이내 반짝 눈을 떴다. 답이 안 나온다. 무언가 확실한 게 없다. 그러나 이상했다.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가 이상했다. 그러니까, , 정국이 지민을 찾아갔었다는 지민의 말에 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냔 말이다.

 

질투…….”

 

태형은 곰곰이 생각하다 저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에 제가 놀라 팔짝 뛰었다. 질투? 내가 왜 질투를 해? 박지민한테? 정국이는 그냥 후밴데? 그냥 후배가, ? 그냥 이제 약간 어? 고민이 있으면 다른 선배한테 찾아가서 술 먹고, ? 고민 상담 할 수도 있는 거지. 그 때는 나랑 사이도 안 좋았었고. 그러면 지민이한테 찾아갔을 수도 있지. 그게 뭐라고. 머리로는 다 이해가 되는데. 전혀 이상할 거 하나 없는 상황인데.

 

그런데 왜,”

 

내 기분이 이렇게 구리냔 말이다. 태형은 입술을 꾹 물었다. 태형이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해도, 2n년간 사회생활을 하면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정국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단순한 후배를 보는 선배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게 그저 후배를 향한 선배의 조금 강렬한 애정인지, 아니면 좋아하는 감정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제가 지금 맡고 있는 중전의 역할에 과몰입을 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전정국은 남녀를 통틀어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예쁘게 생겼긴 했다. 예쁘기만 한가? 잘생기기도 했고, 귀엽기도 하다. 정색하고 수업을 듣거나 과제를 하느라 인상을 찌푸릴 때면 그렇게 남자답고 잘생길 수가 없는데, 저에게 태형이 형,’ 하고 헤실 웃을 때는 또 그렇게 예쁘고 귀여울 수가 없으니까. 그래, 사실 전정국 정도면 남자고 여자고 그게 뭐가 중요아니 이게 아니고. 나 남자를 좋아하나? 여태까지 내가 남자를 좋아했던 경험이 있었나?

그러나 태형이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보려 해도 태형의 과거 연애 기록은 0에 수렴하였으므로 태형은 곧 제 머릿속의 검색창을 종료시킬 수밖에 없었다. 대신 정국의 웃는 얼굴이 다시 불쑥 치고 올라왔다. 아니 이건 왜 자꾸 떠오르는 거야…….

 

제가 대신 마실게요. 그래도 되죠?’

 

그래. 정국이의 첫인상은 그거였다. 태형의 머릿속에 정국이 잘생긴 신입생에서 전정국으로 바뀐 순간.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정국은 제게 다정했던 것 같다. 태형이 눈알을 도로록 굴렸다. 딱히 해 준 것도 없는데 자신을 엄청 잘 따르는 모습이 무지 귀여웠었는데.

 

나야 상관없지만, 형은 들키면 안 되잖아요.’

형이랑 결혼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어서요.’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 하지 말라구요.’

계속 걱정했잖아요.’

앞으로는 피곤하거나 힘들면 나한테 말해줘요, 형도.’

. 잡을래요?’

 

한 번 떠올리기 시작하니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태형은 촘촘히 엮여 올라오는 정국의 목소리에 가만히 제 손을 심장께에 올렸다. 심장 박동이 차분하게, 그러나 평소보다는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딱 기분 좋게 빠른 정도로.

 

…….”

 

가만히 누워 심장 박동을 느끼던 태형은 이내 저도 모르게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고 보니까, 키스도 했었지. 전정국이랑. 세상에. 후배랑 키스라니. 다시 생각해도 미쳤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지 잘 기억도 안 났다. 기억나는 건 온통 그 때의 감각들뿐이었다. 빙빙 돌아가던 머리, 뜨겁던 얼굴, 미친 듯이 뛰던 심장, 그리고…….

 

형 도와주는 거예요.’

 

전정국의 입술.

 

으악!!!!”

 

태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잔뜩 클로즈업 되어 떠오른 정국의 입술과 그 감촉이 생각나서였다. 미쳤어 김태형!!! 왜 자꾸 생각하는데!!!!! 태형은 어느새 빨개져 있는 제 얼굴을 손부채질로 식히며 방 안을 어수선하게 돌아다녔다. 정신 차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그건 그냥 어쩔 수 없이. 상황이 상황이었으니까. ? 그냥 어쩔 수 없이 한 연기 같은 거…….

 

생각해보니까 괘씸하네?”

 

미친 듯이 떠오르는 정국의 생각을 가라앉히려 아무 이유나 다 갖다 붙이던 태형은 순간 떠오른 생각에 방 안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까. 전정국 이 새끼 완전 선수 아냐?

 

사람이 왜 그렇게 아무한테나 다정해? 유라 좋아하면서?”

 

게다가.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었다지만. 어떻게 선배한테 키스할 생각을 해? 유라 좋아하면서?(2) 태형은 괜히 치고 올라오는 억울함에 입술을 꼭 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제가 설렜던 그 순간들 모두, 어떻게 보면 원인 제공은 전부 전정국이 한 거였다. 그런데 전정국은 한유라 좋아하잖아?(3) 그럼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태형은 제가 정국의 어장 안 싱싱한 활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래. 친했던 선배니까 도와주러 온 건 그렇다 칠 수 있다. 다정하게 대하는 것도 뭐, 천성이 그렇다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뭐? ‘형이랑 결혼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어서요.’? ‘, 잡을래요?’? 이건 완전히 작정하고 꼬실 때 하는 말 아니냐고?!(맞다)

 

그냥 그럴 수 있는 건가?”

 

한껏 열을 내던 태형은 문득 다시 차분해졌다내가 이상한 건가. 남들은 다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정국이가 옷고름을 매 줄 땐 심장이 뛰고, 박지민이 옷고름을 매줄 땐 좀 힘들었던 건 그냥 그 날의 컨디션 차이였던 건가. 내가 너무 연애를 못 해 봐서 저런 것들에 내성이 없고, 정국이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건가? 나 지금 아무것도 아닌 거에 혼자 땅 파고 있는 건가?

태형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러한 태형의 의식의 흐름과 행동이 혹자가 보기에는 답답하다고 여겨질 수 있겠으나 원래 제 3자가 보기에는 명확하다 못해 UHD화질로 선명한 그림도 당사자가 보기에는 흐리멍덩해 보일 수 있는 것이 짝사랑이란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그래서 태형은 결국 제 가슴을 꽉 메우는 답답함에 방문 앞으로 다가섰다. 아무래도 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형은 방문을 열어젖히려던 손을 멈추었다. 지금 제가 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분명 밖에 앉아 있는 상궁들이 저를 따라 나올 텐데, 태형은 지금 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을뿐더러 굳이 상궁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

 

그래서 태형의 시선은 자연스레 제 눈앞에 있는 문 대신 바람이 솔솔 새어 들어오고 있는, 살짝 열린 꽤 커 보이는 창으로 옮겨졌다. 저거, 내 몸 하나는 충분히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홀린 듯 창가로 다가선 태형은 잠시 뒤를 한 번 돌아보고, 문가를 쳐다봤다. 아까부터 제가 조금 큰 소리를 내도 아무 기척이 없는 것이, 아무래도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당직을 서고 있는 상궁들도 졸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금방 돌아올 거고, 멀리 나갈 것도 아니니까. 태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으아아!”

 

그러나 한 번 더 뒤를 살핀 후 창을 밟고 몸을 밖으로 빼자마자, 태형은 미처 보지 못한 코너에서 갑자기 등장한 누군가와 부딪혀 중심을 잃었고 그대로 몸이 기우뚱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 넘어질 것 같…….

 

…….”

…….”

 

그러나 쿵, 하고 마룻바닥으로 그대로 추락해 큰 소리와 함께 고통이 찾아올 것이란 태형의 예상과는 다르게, 꽤나 푹신하고 편안한, 흡사 과학적인 침대 같은 느낌이 대신 태형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꾹 감았던 눈을 뜬 태형은 제 앞에, 정확히는 밑에 깔린 인영에 눈을 깜박였다.

 

편안하냐?”

…….”

 

지민은 옷감을 한아름 끌어안은 채 그대로 마룻바닥에 뻗어 태형을 올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태형이 느꼈던 편안하고 푹신한 감촉은 지민이 두 손 잔뜩 들고 있던 옷감의 감촉이었다. 물론, 그 밑에 깔린 지민도 태형의 푹신함에 한 몫을 했겠지만. 어쨌든 태형은 제 바로 코앞에 있는 지민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바로 그 때, 태형은 무언가 기시감을 느꼈다. 이 상황, 언젠가 비슷한 것을 경험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안 비키냐? 편안한 김에 아주 망자의 길도 편안하게 걷게 해줘?”

.”

.”

너 지금 기분이 어때?”

 

? 지민은 제 위에 올라탄 채로 코앞에서 멍하니 묻는 태형의 질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걸까. 갑자기 오밤중에 창문으로 튀어나와 저를 깔고 앉은 것도 모자라 비키지도 않고 있는 지금 이 상황에서의 내 기분을 묻는 건가 이 새끼?

 

네가 나를 깔고 누운 지금?”

.”

니 숨결이 내 코앞에서 느껴지는 지금?”

.”

좆같은데.”

그치! 좆같지!”

 

시발 저 반응은 또 뭐야……. 분명 험한 말을 내뱉었음에도 깨달음을 얻은 듯 환해지는 태형의 얼굴에 지민은 제 기분이 한층 더 더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좆같다는 게 저리 기뻐할 일인가? 안 그래도 조선에 와서 야작은 없겠구나 기뻐했던 것도 잠시 팔자에도 없는 야근을 떠맡은 탓에 평소보다도 더 진한 다크서클을 함유한 지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나저나 얘 왜 안 비키고 있는 거야. 지금 온 몸에 힘이 안 들어가서 밀치기도 귀찮은…….

 

그게 보통 친구 사이에 정상 반응인 거겠지?”

…….”

막 심장이 뛰거나 얼굴이 빨개지거나 그런 건 정상이 아닌 거지?!”

…….”

 

뭐요? 그러나 이어지는 태형의 말을 들은 지민은 창백해지는 제 얼굴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태형에게서 벗어나고자 꿈틀꿈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얘 지금 뭐라는 거야? 옷감을 잔뜩 쥔 두 팔을 태형이 깔고 앉아 있지만 않았어도 지민은 두 손을 제 가슴 위로 올려 방어 태세를 취했을 거였다. 심장이 뛰어? 얼굴이 빨개져? 설마 그거 지금 네 기분을 묘사하고 있는 거? 아니 시발 이 새끼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 해도 저렇게 얌전히 왕비 행세를 하고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러냐.”

…….”

 

갑자기 말이 없어진 지민에 이상함을 느낀 태형이 새하얗게 질린 지민의 얼굴을 쳐다보다 이내 떠오른 생각에 그 즉시 질색을 하고 소리를 지르며 지민의 위에서 내려왔다. !!!!!!! 아니거든!!! 지금은 나도 좆같거든!!!!!

 

, 그래?”

 

그럼 다행이고. 태형이 후다닥 내려옴과 동시에 재빨리 몸을 일으킨 지민이 흩어진 옷감을 주워모으며 진심으로 중얼였다. 내가 너 여자 옷 입는 거에 편견이 없다곤 했지만 그게 내가 그쪽 세계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었거든. 나는 네가 또 잘못 받아들인 줄 알았지. 위험(?)에서 벗어나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조그맣게 중얼거리던 지민은 그 순간 문득 고개를 드는 기시감에 말을 멈췄다. 아니, 잠깐만. ‘지금은나도 좆같거든? 그럼, 다른 때는 뭐, 설렜단 소리야? 그러나 지민이 고개를 들어 태형을 쳐다봤을 때, 지민은 물어보기도 전에 태형의 표정과 어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태형은 어딘가 깨달음을 찾은 표정으로 지민을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지민아,”

…….”

나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지민은 옷감을 가득 끌어안은 채로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형을 쳐다봤다. 아까야 정신이 없어서 되도 않는 오해를 잠시 하긴 했지만,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긴 했고, 지민은 본디 타고나기를 눈치가 빠르게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새삼스레 조선에서 태형에게 그 친구 사이에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 심장이 뛰고’ ‘얼굴이 빨개지는현상이 나타날 경우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는 추론을 쉽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설마 저 친구가 궁녀를 지칭하는 건 아닐 거고. 모든 정황과 근거들을 조합해 봤을 때, 태형이 지금 말하고 있는 상대는 단 한명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즉 이 상황은,

 

나 큰일 난 거 같아 지민아…….”

 

조선에서 호모가 빗발친다…….

 

*

 

말도 안 돼.”

 

태형은 제 손을 제 볼에 갖다 대며 짜부시켰다. 말도 안 돼. 태형의 입에서 정확히 12번째 같은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리고 그 말에 지민은 제 귀가 잠시 동안 로그아웃해주길 간절히 빌었다. 저 멀리서 상궁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태형을 밀치고 욕을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이 14번째 말도 안 돼,를 반복했다.

태형이 이렇게 일을 하고 있는 지민을 찾아와 지민을 붙잡고 하소연을 하고 있는 연유는 단 하나였다. 어젯밤 지민을 깔고 누운 그 사건 이후, 태형은 결국 제 감정을 자각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여태까지는 비교할 대상이 없어 긴가민가했는데 지민을 통해 비슷한 상황에 놓이고 나니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아니, 사실 솔직히 말하면 여태까지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명백한 거였다. 제가 남자를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을 못 해봐서, 그동안은 유라를 좋아했으니까, 조선에 떨어진 이후 왕비가 되어 정신이 없었으니까 등등의 꽤 그럴듯한 변명에도 가려지지 않는 확실한 감정. 그러니까, 어젯밤 태형은 인정하고야 만 것이다.

 

내가,”

 

김태형이,

 

정국이를,”

 

전정국을,

 

좋아하나봐.”

 

좋아한다고.

 

나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 호모새끼들아……. 그러나 그 깊고 긴 고뇌 끝에 내려진 태형의 결론이, 지민에겐 TMI에 불과했으므로 지민은 입을 꾹 다문 채로 빨래를 널며 다시 한 번 상궁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내가 저 상궁들 몰래 김태형을 한 대 치는 데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지민은 저와 태형을 쳐다보고 있는 상궁들의 형형한 눈빛에 곧 그 확률이 0이다 못해 마이너스인 것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지민의 머릿속에선 김태형 이 새끼 일부러 내가 지한테 욕 못 하게 하려고 상궁들 데리고 온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몽글몽글 솟아나기 시작했다.

 

증즌므므.”

?”

끄즈즈스읍스스.”

…….”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옆에서 사랑타령이야. 지민은 상궁들에게는 들리지 않게끔 작은 목소리로 복화술을 사용하여 웃는 낯으로 태형에게 읊조렸다. 그러니까 결국 지금 전정국 김태형 서로를 좋아하는 거 아니야. 이런 커퀴새끼들. 속으로 생각하며 지민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빨래를 털었다. 지민은 둘이 지지고 볶든 사귀든 결혼을 하든 저와는 하등 상관이 없으니 제발 그냥 제 눈앞에서 사라져 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태형과 정국이 그간 얼마나 오랜 시간 어떻게 삽질을 해 왔는지 모르는 지민에게는 태형과 정국의 이러한 반응들이 그저 하찮게만 보일 뿐이었으니까.

 

, 그렇게 쉽게 말 할 문제가 아니야. 정국이는 한유라를,”

주상 전하 납시오!”

 

그러나 그런 지민의 시큰둥한 반응에 태형이 울상을 지으며 지민을 붙잡고 한탄을 시작하려던 바로 그 참이었다. 야간 시찰 이후 밀린 정사를 보느라 한동안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정국의 등장을 알리는 내시의 목소리가 태형과 지민의 귓가에 닿았고 태형은 순간 쿵 하고 내려앉는 제 심장을 느꼈다. 아직 정국을 마주치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그 전에도 알게 모르게 정국을 의식하고는 있었지만 자각을 하고 나니 이젠 정정국의 자만 들어도 괜히 심장이 뛰었던 것이다. 태형은 고개를 숙일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굳어 지민을 쳐다봤다. 제 등 뒤에서 여러 명의 사람이 걸어오는 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민은 그런 태형의 허리를 쿡 찔렀다. 뭐 해, 고개 안 숙여그리고 그 찌름에 정신을 차린 태형이 고개를 숙인 순간, 정국의 향기가 확 하고 가까워졌다.

 

, 고개 들어도 돼요.”

 

늘 그랬듯이 저와 정국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신하들을 저 멀리 물린 채 혼자 다가온 정국이 태형에게 말했지만 태형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얼굴이 새빨개져 있을 거라는 것은 뻔했으니까. 화끈거리는 제 얼굴이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세상에. 언제 이렇게 좋아하게 된 거야? 왜 여태 몰랐지? 어떻게 여태 몰랐지? 태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심장이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유라를 좋아하던 때와는 쨉도 안 되는 감정의 쓰나미였다.

 

?”

, 김태형. 뭐해.”

, , !”

 

, 날씨가 덥네. 태형은 부러 정국과 눈을 맞추지 않고 눈을 도르륵 굴리며 고개를 들었다. 정국이 그런 저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으나 뭐라 변명을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에 태형은 애써 그런 정국을 외면했다.

 

태형이 형, 왜 내 눈을 안,”

, 바쁘다더니!”

…….”

여기까진 웬 일이야?”

 

태형이 재빨리 정국의 말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그런 태형의 태도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정국은 무어라 말을 보태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어차피 여기서 더 캐물어봐야 태형이 순순히 진짜 이유를 알려 주지는 않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넘어가는 건 넘어가는 거고. 그거와는 별개로 괜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눈도 안 맞춰 주고.

 

, 확실한 건 아닌데, 현대로 돌아갈 단서를 찾은 것 같아서요.”

?!”

 

정국의 말에 태형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지민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가 이내 상궁들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정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지민의 눈은 조선에 온 이래로 가장 밝게 빛나고 있었다. 누가 보면 조선에 제일 먼저 도착해 오랜 기간 있었던 사람인 줄 알 정도로. 그러나 정작 정국이 말을 꺼낸 순간 태형은 멍해지는 머리에 눈을 깜박였다. 현대로 돌아갈 단서? 그러나 그런 태형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민은 그게 뭔지 빨리 말해 보라며 정국을 채근했다.

 

유독 저랑 친하게 지내는, 아니지. 저랑 친하게 지낸 게 아니라 왕이랑 친하게 지냈던 것 같은 내시가 하나 있었거든요.”

…….”

그런데 오늘 저한테 뜬금없이 그러는 거예요. 정말로 그 나무가 영험한 것 같다고.”

“‘그 나무’?”

그래서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니까, 왕이랑 왕비랑 절에 가서 고목에 소원을 비는 행사가 매년 있대요. 그런데 대충 말하는 걸 들어 보니까 우리 워크샵 갔던 그 절 같은 거예요. , 우리 워크샵 갔을 때도 소원 들어주는 나무 있었잖아요.”

대박.”

 

지민은 정국의 말끝마다 반응하며 예능프로가 탐낼 리액션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태형은 정국의 말을 듣는 내내 멍한 상태로 멈춰 있었다. 소원 나무, 조선, 현대, 그리고 귀환. 어렴풋이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이 뭍으로 올라오니 머리가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시끄럽게 뛰던 심장은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고 태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정국과 눈을 맞췄다. 태형이 정국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계속 시선을 딴 곳에 두고 있던 내내 정국은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는지 태형이 정국에게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태형은 정국의 눈을 마주할 수 있었고 정국의 까만 동공에 제가 가득 들어찬 그 순간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태형이 형?”

 

좋아한다. 나는 전정국을 좋아한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엄청 많이, 김태형은 전정국을 좋아한다. 차마 부정할 수도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에 태형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불안감이 태형의 울대를 타고 울컥 넘어왔다. 혹시, 이대로 현대로 돌아가게 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

 

, 김태형. 너 왜 그래?”

 

전정국은 한유라를 좋아하고, 김태형은 한유라와 전정국을 방해하는 인물 1. 후배와 짝사랑하는 상대를 놓고 꼴사납게 경쟁하다가 사이까지 틀어져버린 선배와 후배 사이로. 태형은 저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정국의 얼굴을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떨어트렸다. 조선에서야 유라도 없고, 공동의 목적이 있으니 연합을 했다지만, 이 관계가 과연 현대에 가서도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태형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토록 친하다고 생각했던 정국과도 단 한 순간 만에 사이가 틀어져 버렸는데, 또 그러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으니까. 게다가, 어찌어찌 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해도, 유라와 정국이 잘 되는 것을 바로 옆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지켜볼 수 있을까? 유라의 경우에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쉽게 유라를 포기할 수 있었지만, 과연 정국도 그럴 수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지금 제가 정국을 좋아하는 감정이 유라를 좋아했던 것보다 훨씬 강렬한 감정이라는 건 알겠는데. 이것도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어디 아픈 건 아니?”

 

대답 없는 태형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정국의 손이 태형의 이마에 닿았고 태형은 그 다정한 온기에 괜히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니야, 그냥 잠깐너무 더워서. 제가 생각하기에도 빈곤한 변명에 태형이 고개를 숙였다. 속이 답답하다. 분명 현대로 가는 단서를 찾게 된 건 좋은 일인데. 언제까지고 조선에 눌러 앉아 있을 수는 없었는데. 정국이도, 지민이도. 전부 한시라도 빨리 조선에서 벗어나 현대로 가고 싶을 텐데.

 

, 근데 나 갑자기 배가 고파서……. 나중에 얘기하자.”

 

현대로 돌아갔을 때, 정국이 없는 일상이 너무 허전하면 어떡하지 태형은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내뱉고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


사실 이 편에 넣고 싶었던 내용은 따로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밀렸네요ㅠㅅㅠ

날씨가 너무.. 더워서.. 스프라이트 샤워를.. 드리고 싶었는데..

그래도 되게 빨리 오지 않았나요..?

이제 완결이 머지 않은 것 같아서 박차를 가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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