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차라리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하지 그랬냐, ?!”

 

시발 진짜 변명을 해도 진짜……. 그렇게 도망치듯 교태전으로 돌아온 이후, 멍하니 앉아 벽을 바라보던 태형은 이내 서안(書案:책을 펴 보거나 글씨를 쓰는 데 필요한 서실용 평좌식 책상)에 제 머리를 박으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세상에 배가 고프다니. 아무리 둘러댈 말이 없기로서니. 그 말이 거기서 그렇게 나올 게 뭐야. 너무 바보 같잖아!! 연기라도 했어야지 멍청아!!! 태형은 입술을 마구 깨물며 서안에 머리를 콩콩 찧다 이내 볼을 대고 스르르 무너졌다.

 

쪽팔려서 이제 어떻게 봐…….”

 

가뜩이나 좋아한다는 감정을 알아채고 난 후에 정국이 얼굴 보는 게 힘들어졌는데, 거기에 쪽팔려서라는 이유까지 덧붙여졌다. 태형은 착잡한 심정에 눈을 감았다. 아직까지도 아까의 열기가 얼굴에 그대로 남은 채였다.

 

그 와중에 또 잘생겨가지고…….”

 

짜증나게. 한 번 보니까 자꾸 보고 싶어지잖아. 태형이 불퉁하게 중얼였다. 정국이 태형에게 그냥 후배였을 때는 잘생겼다는 생각을 가끔(은 아니고 사실 제법 자주)만 했을 뿐이었는데, 좋아한다고 자각하고 나니 태형의 안에서 정국은 킹 갓 제너럴 어쩌구 하여튼 얼굴킹이 되었고 이제 태형은 시도 때도 없이 정국의 얼굴을 떠올리며 멍하니 입을 벌리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정국의 얼굴이 변한 것은 아닐 테니 아마 그만큼 제가 정국을 좋아한단 얘기겠지. 태형은 고개를 돌려 다시 이마를 서안에 기댔다. 열 좀 식히자…….

 

마마, 소인이 들어가도 되겠사옵니까?”

 

태형이 역시나 몽글몽글 떠오르는 정국의 얼굴에다 애써 블러 처리를 하며 가만히 앉아 열을 내리고 있던 그 때였다. 문 밖에서 조그맣게 들리는 상궁의 목소리에 태형은 비척비척 고개를 들어 어, 들어와, 하고 말했다. 그에 문이 열리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태형의 눈이 이내 동그랗게 커졌다. 저게 뭐야?

 

마마, 전하께오서 우육牛肉을 하사하셨습니다.”

?”

뿐 아니라 돈육豚肉과 계육鷄肉을 비롯해 삼과 각종 약재들도 보내셨습니다.”

아니, 갑자기 왜.”

마마께오서 더위에 기력이 쇠하신 것 같아 보이신다고하루빨리 기운을 차리셨으면 하신다고…….”

 

태형은 제 눈앞에 놓인 휘황찬란한 식재료들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현대에 있을 때 엄마의 손에 끌려 간 백화점 식품관에서나 보았던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식재료들이 신선한 태형의 눈앞에서 날 먹어 봐요, 하고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을 채 다물지 못하고 식재료와 상궁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니까이게 지금 다 전정국이 나한테 보낸 거란말인가?

 

마마, 혹 그간 찬이 부실하였

, 아니야 그런 거!”

 

두 손에 가득 들린 신선한 식재료들과는 달리 그간 제가 관리하던 태형의 식단이 부족하였을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들어가고 있는 상궁의 표정에 태형은 벌어지는 입을 간신히 닫고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부족하긴 무슨. 충분했는데. 자취방에서 끓여 먹던 즉석밥이나 라면에 비하면 얼마나 감사하고 따끈한 집밥이었는데.

 

, 그냥 전하께서 나를 너무 아끼셔ㅅ,”

……!”

, 걱정하셔서…….”

 

물에 데친 시금치처럼 시들어버린 상궁의 표정을 풀어주고자 황급히 말을 잇던 태형의 성급한 단어 선택에 상궁의 얼굴이 순간 햇빛을 받은 해바라기처럼 밝아졌고 그에 제 단어 선택의 실수를 자각한 태형은 재빨리 말을 바꿨다. ‘전하께서 나를 너무 아끼셔서라니. 이게 무슨 사랑받는 중전이 행복에 겨워서나 내뱉을 수 있는 염장 대사란 말인가. 그러나 태형의 그러한 정정이 무색하게 상궁의 눈빛은 이미 다시 봄비를 맞은 새싹처럼 파릇초롱해진 후였다.

 

마마…….”

, ?”

소인은 정말

…….”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태형은 이번에도 차마 상궁에게 전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으,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런 태형을 보며 흐뭇하게 웃던 상궁이 이내 그럼 오늘 석반에는 한우를 올릴까요? 하고 발랄하게 물었고 태형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약 주고 병 주고도 아니고. 제 피로의 원인 제공자에게 위로 받는 기분이 묘했다. 아니다. 이런 것들은 위로보다는 효도에 가까운가

 

저기,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전정국 다 컸네. 선배한테 효도도 할 줄 알고까지 생각하던 태형은 순간 떠오른 생각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여태까지 정국의 얼굴을 떠올리고 지워내느라 급급해 아까 정국이 했던 말을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정국이가 아까 분명히

 

왕이랑 왕비랑 절에 가서 고목에 소원을 비는 행사가 매년 있대요. 그런데 대충 말하는 걸 들어 보니까 우리 워크샵 갔던 그 절 같은 거예요. , 우리 워크샵 갔을 때도 소원 들어주는 나무 있었잖아요.’

 

라고 했었지. 아까는 정신이 없어 흘려들었는데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니 태형 제 자신도 그 나무에 소원을 빌었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 나무와 저와 정국이 이 조선에 떨어지게 된 것이 관련이 있는 걸까?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하문하시지요.”

내가 간절히 바랐던 소원 같은 게 있을까?”

?”

 

정말 그 나무가 소원을 들어 준 걸까? 그런데 누구의 소원? 내 소원? 아니면 정국이의 소원? 그것도 아니면 왕과 왕비의 소원? 태형은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래서 상궁에게 물었다. 소원을 말해봐, 내게만 말해봐, 그런데 네 소원 말고 내 소원내 소원을 내가 알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알겠느냐마는, 태형이 현재 제 자신인 왕비의 평소 소원을 알 턱이 없으니까. 하지만 소원이란 생기면 누구에게든 말하고 싶어지는 종류의 것이다. 말하면 이루어진다고도 하지 않는가. 태형은 왕비가 평소 그 말을 신뢰하여 친한 상궁에게 제 소원을 흘렸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태형의 그런 기대와는 달리, 상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마, 그게 무슨…….

 

누군가가 소원을 이루어준다면 내가 바랐을 거 같은 거 말이야.”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마마, 모든 것을 갖고 계신 마마께서 바라셨던 것이라 하면…….”

…….”

마마의 마음이 전하께 전해졌으면 좋겠다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하셨던 것밖에는 생각이 나질 않사옵니다…….”

…….”

마마께서는 늘 성심(聖心:임금의 마음)은 마마를 향해 있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마마의 마음이 주상께 닿았으면 좋겠다 하셨지 않으셨습니까.”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상궁이 말을 이었다. 마마께오선 습관처럼 강녕전을 쳐다보시곤 하셨으니까요, 마마. 그리고 그 말에, 태형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쩌면, 정말 정국이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그 소원 나무 때문에 정국과 제가 이 조선으로 떨어지게 된 거라고.

 

하지만 마마, 그건 모두 옛말이고 이제는 전하께오서도 마마를

그건가 봐.”

?”

왕비의 마음이 왕에게 전해지는 거.”

마마, 그게 무슨…….”

 

그러니까, 내가 정국이를 좋아하는 게. 내가 정국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정국이에게 알리면, 그게 우리가 조선에서 현대로 돌아갈 수 있는 열쇠인가 봐. 태형은 멍하니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조선에 오고, 정국이도 조선에 오고. 내가 정국이를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그걸 정국이에게 말하면…….

 

그럼 나는?”

?”

나는 어떡해?”

마마, 갑자기 무슨…….”

 

제 앞의 상궁이 의아해하거나 말거나, 태형은 멍하니 중얼였다. 그럼 나는 어떡해? 전정국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어 버린 나는. 전정국은 한유라를 좋아하는데. 만약에 내가 전정국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래서 현대로 돌아가게 되면. 그 후에 나는 어떻게 되는 건데?

 

이런 게 어딨어…….”

 

억울해. 왕비 소원은 들어주면서, 왜 내 소원은 안 들어 줘. 태형은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

 

오늘도 그렇단 말이지.”

, 전하. 송구하오나 그렇사옵니다…….”

 

그 날로부터 벌써 5일 째, 태형은 이리저리 정국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최대한 정국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외출을 자제하는가 하면, 정국이 찾아오기라도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정국을 만나주지 않았다. 처음엔 아직 기력이 회복되지 않아 왕을 뵙는 것이 송구하다는 핑계로, 그 다음부턴 자리에 없다는 핑계로. 또 그 다음에는 주무시고 계시다는 핑계로. 아프다는 핑계를 대면 혹시나 제가 간호하겠다고 나설까 봐 제일 쉽고 편한 핑계는 대지도 못한 채로, 태형은 상궁으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게 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전하께 거짓을 고하느냐며 안 된다고 만류하던 상궁도 태형의 간절한 눈빛에 결국 지고 말았고.

 

혹시 그간 중전에게 누가 찾아왔었느냐? 한 희빈이라든가…….”

아뇨, 전하. 전하께오서 명을 내리신 이후로 한 희빈은 교태전 근처에 얼씬도 못 합니다.”

중전에게 변고가 생겼다거나…….”

아닙니다, 전하. 그저 오수에 드시는 시간이 길어지신 것 뿐입니다.”

 

상궁은 왕의 앞에서는 반드시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을 해야 하는 것이 궁궐의 예의인 것에 감사했다. 아니라면 차마 전하의 눈을 바로 보지 못하다 결국은 제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걸 들켰을 테니까. 하늘같은 주상전하께 이렇게 거짓을 고하게 되다니. 상궁은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제가 모시는 중전마마의 간청이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부디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하루빨리 중전이 기력을 차렸으면 좋겠다고 전해주시오.”

그러겠사옵니다, 전하.”

 

이렇게 다정하신 전하께 마마는 왜! 상궁은 남몰래 눈물을 훔치며 허리를 조금 더 숙였다. 왕의 행렬이 교태전에서 서서히 멀어져 가고, 상궁의 시야에서 왕의 행렬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 교태전 안쪽에서 태형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갔어?”

가셨습니다.”

 

, 다행이다……. 태형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나머지 몸을 드러냈고 그런 태형을 상궁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응시했다. 마마, 언제까지 이러실 겁니까……. 그러나 어느새 상궁의 앞으로 온 태형은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미안해, 거짓말 하게 해서.”

소인은 괜찮습니다. 다만…….”

…….”

왜 주상전하를 피하고 계시는 건지, 그 연유만이라도 알려주시면 안되겠사옵니까, 마마.”

…….”

염려가 되어 그렇습니다. 혹 주상전하께 큰 잘못이라도 하신 겁니까?”

잘못…….”

 

상궁의 걱정스러운 말에 태형이 고개를 들어 초점 없는 눈빛으로 상궁을 쳐다봤다. 잘못이라. 잘못이라 한다면 잘못이 있긴 했다. 나에게 잘못이 있다면

 

너무나 많이 사랑한 죄…….”

?”

 

난 너로 인해 그 죄로 인해 눈물로 앓고 있다고이러케……. 태형은 의아한 얼굴의 상궁의 말에 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래, 이게 다 그 망할 소원나무 때문이다. 걔가 이 한성왕후란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애꿎은 제 자신을 조선으로 끌고 오지만 않았어도 나는 현대에서 행복할 수 있었는데. 비록 마음이야 아팠겠지만 전정국을 좋아한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그렇게 외면한 채로 살아갈 수 있었는데!! 태형은 다시 불쑥 치고 올라오는 억울한 마음에 입술을 꼭 물었다. 소원나무 개새끼야…….

 

중전?”

……?!”

 

그런데 태형이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억울한 감정을 삭히고 있던 그 때였다. 태형이 자리하고 있는 몇 걸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고, 태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가 놀라 동그래진 눈을 하고 있는 상궁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제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목소리는, 그러니까…….

 

방금 전에 중전은 오수에 들었다고…….”

, 전하…….”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향기. 그리고 제 눈앞에 있는 상궁의 떨리는 목소리. 태형은 꿀꺽 침을 삼켰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여태껏 기를 쓰고 피해 왔던, 제가 짝사랑 중인 전정국이라는 걸. 태형이 놀라 그대로 굳어있는 동안, 정국의 향기가 조금 더 가까워졌고 태형은 다시 한 번 꿀꺽 침을 삼켰다. , 어떡하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태형은 눈을 꼭 감았다. 그러니까, 아직은, 전정국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데. 그러나 그런 태형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쪽으로 오는 정국의 발자국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 돼. 아직은 안 돼. 태형은 숨을 합 하고 들이쉬었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그리고 잠시 후 정국의 손이 태형의 어깨에 닿기 직전, 태형은…….

, 마마?!”

……?!”

 

튀었다. 속된 말로 토꼈다. 앞 뒤 잴 것도 없었다. 머릿속에는 그저 지금 당장 정국을 마주할 수는 없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은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제가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는 채로, 태형은 무작정 앞을 향해 뛰었다. 놀라 저를 부르는 상궁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고, 전정국의 향기 역시 멀어져 갔다.

 

김태형 이 대책 없는 새끼야…….”

 

태형은 괜히 찔끔 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최대한 멀리, 빠르게, 정국이 제 모습을 볼 수 없도록 뛰었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 말 그대로

 

이제 난 몰라…….”

()사랑에 미친 멍청이의 뜀박질이었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보게.”

, 송구하옵니다, 전하…….”

예상은 했지만…….”

소인을 죽여 주시옵소서…….”

 

정국은 제 눈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상궁을 쳐다봤다. 솔직히, 예상은 했다. 김태형이 자길 피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우연의 일치겠거니. 요즘 날씨가 너무 덥다 보니 지쳐서 계속 잠을 자는 것이겠거니 스스로 위안하고 있었는데. 정국은 입술을 물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현대에서 있었던 일들이 데자뷰처럼 겹쳐졌다.

 

…….”

전하…….”

일어나 고개를 드시오.”

 

정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의아함과 두려움이 섞인 상궁의 눈과 정국의 눈이 마주쳤다. 그때도, 지금도. 태형은 일방적으로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그 때는 이유라도 예상할 수 있었다지만, 지금은 이유도 알 수 없다. 사실, 이유를 알고 있더라도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겠지만.

 

그러니까, 여태까지 고의로 나를 피해 왔던 거란 말이지…….”

, 전하…….”

내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 부탁이라뇨, 전하. 당치도 않습니다…….”

 

명하시옵소서, 따르겠나이다. 상궁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고 정국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이게 옳은 일인가, 옳지 않은 일인가 생각이 들었지만 이렇게 또 이유도 모른 채로 답답하게 태형과 멀어지기는 죽어도 싫었으니까.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날을 잡아줄 수 있을까.”

?”

중전에겐 알리지 말고.”

전하…….”

자꾸 나를 피하니까.”

…….”

이렇게라도 얼굴을 마주 보고 얘기를 하고 싶어서…….”

 

지금 하는 말이 제 눈앞의 상궁에겐 어떻게 들릴까, 나중에 태형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생각들은 떠올랐다가 곧 사라졌다. 이기적이라면 이기적이겠지만, 애가 닳고 속이 타서 어쩔 수가 없었다. 정국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엄청 한심해 보이겠지. 자길 일부러 피하는 사람을 붙잡아 달라고 부탁하는 꼴이라니. 그건 좀 곤란하다고 거절당해도 할 말 없다. 차마 상궁의 눈을 바로 볼 수 없어, 정국은 고개를 숙였다.

 

전하…….”

…….”

소인,”

…….”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명 받잡겠습니다.”

?”

 

그러나 곧이어 들려온 상궁의 결의에 찬 목소리에, 정국은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깜박였다. 제 눈앞의 상궁은 주먹까지 꼭 쥐어 보이며 단호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단호하고도 결의에 찬 눈빛에 정국은 방금 제가 뭐라 했는지 다시 한 번 돌이켜 보았다. 내가 방금 적장의 목을 가지고 오라는 부탁을 했던가?

 

이 몸의 뼈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빠른 시일 내에 반드시 전하와 마마를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 아니, 뭐 그, 그렇게까지는…….”

그동안의 불충을 용서하소서.”

 

제가 전하의 그 깊고도 넓은, 마치 하해와 같은 중전마마를 향한 애심(愛心)을 잠시 잊고……. 상궁은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결심을 다졌다. 말을 마치고 다시 고개를 숙인 상궁의 등 뒤에서는,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결심의 오오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정국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살펴 가시옵소서, 전하.”

 

끝까지 결의에 찬 목소리로 고개를 숙인 상궁을 뒤로하고, 정국은 얼떨떨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낱 상궁이 이토록 충성심이 깊을 줄이야최후의 순간,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뛰어 들어가는 장수의 기백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국은 다시 떠오르는 그 눈빛에 살짝 몸을 떨었다. 태형이 형 그렇게 안 봤는데…….

 

상궁들한테는 엄청 FM 스타일인가?”

 

*

 

왜 이리 소란이야?”

, 마마!”

 

그렇게 어떤 의미에서의 사랑의 도주를 한 지 이틀, 태형은 그 날 이후 깊게 잠들지 못해 퀭한 눈으로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아침부터 교태전이 평소답지 않게 소란스러웠다. 태형은 채 뜨지 못한 눈을 비볐다. 아침부터 무슨 일 있는 건가.

 

마마, 기침하셨습니까. 목욕물을 받아놓을까요?”

아침부터? 그런데 오늘 무슨 날이야? 왜 이렇게 다들 바빠 보여?”

, ,

……?”

날이 좋으니까요! 간만에 새 단장이나 해볼까 하고……. , 마마께서도 새로운 기분으로 하루를 맞이하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유난히 떨리는 상궁의 목소리, 쉬이 마주치지 못하는 두 눈. 어딘가 어색한, 저 문장. 태형은 멍하니 상궁을 쳐다봤다. 상궁의 태도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태형은 아직 채 잠에서 깨지 못한 두뇌를 빠르게 돌렸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봤을 때 상궁은 지금…….

 

많이 바쁘구나.”

?”

붙잡아놔서 미안. 목욕물 받아줘. 목욕은 내가 혼자 할게.”

 

태형은 채 다 못 뜬 눈을 부비며 상궁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와 동시에 잠시 빠르게 돌아갔던 CPU도 종료시켰다. 늘 고생이 많아. 적절한 인사는 잊지 않고. 그러나 혹시 제가 한 거짓말이 들켰을까를 걱정하던 상궁은 그런 태형의 격려에도 멍하니 태형을 쳐다볼 뿐이었다. 우리 마마님늘 생각하는 거지만 참 선하시고다정하시고

 

? 나 얼굴에 뭐 묻었어?”

 

눈치가 없으시구나…….

 

*

 

벌써?”

요즘 마마께서 기력이 없으시니, 그럴 땐 일찍 침소에 드시는 게 좋사옵니다.”

그래도아직 술시(戌時19~21)밖에 안 됐는데…….”

…….”

역시 일찍 자는 게 건강해지는 지름길이겠지? 그래, 자자!”

 

오늘 상궁 이상해무서워제 말에 눈에 띄게 딱딱해지는 상궁의 표정에 태형은 금세 꼬리를 내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침부터 청소를 열심히 하더니 많이 피곤했나제가 순순히 방으로 들어가자 다시 풀리는 상궁의 표정에 태형은 영 께름칙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채 슬금슬금 상궁이 준비해 놓은 이불 위로 올라섰다. 상궁이 문을 닫고 물러나고, 방 안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태형은 이부자리에 가만히 누워 오지 않는 잠에 눈을 깜박였다. 목욕물에 향유를 얼마나 들이부었는지 아침에 한 목욕인데도 아직까지 온 몸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아니, 가만.

 

이 촛대 뭐지?”

 

태형은 익숙한 듯 낯선 촛대와, 평소와는 다른 침실의 분위기에 이불 위에 뉘였던 몸을 반짝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하긴 했다. 아무리 제가 궁중의 일들에 대해 잘 모른다 해도,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던 적은 여태까지 없었다. 그러니까그 말인 즉슨오늘은 뭔가 특별한 날이라는 것인데교태전에 특별한 날이란…….

 

뭔가 기분이 쎄한데…….”

 

태형은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쩐지 등 뒤가 서늘했다. 그러고 보니 이 분위기낯설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러니까…….

 

주상 전하 납시오!”

……?!”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태형이 방문을 열어젖히려던 바로 그 순간, 태형의 손이 닿기도 전에 문이 열렸고 태형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 내시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제 눈앞에 등장한 그 사람때문에. 그러니까,

 

, …….”

 

요 며칠 태형의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던 그 사람. 계속해서 태형을 잠 못 들게 만들었던 그 사람. 자나깨나 태형의 눈앞에서 어른거리던 그 사람.

 

오랜만이네요,”

 

잘생기고, 예쁘고, 귀엽고, 하여간 이 세상 좋은 형용사는 다 같다 붙여도 모자람이 없는 그 얼굴.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태형이 가장 보고 싶으면서도 가장 피하고 싶었던 그 사람,

 

중전.”

 

전정국 때문에.

 

*

 

…….”

 

배신자……. 태형은 제 아랫입술을 세게 감쳐물었다. 배신자……. 환하게 웃는 상궁의 얼굴이 눈앞에 어렴풋이 스쳐지나갔다. 배신자……. 하하하하하 중전마마아아 행복하시옵소서어어어 들어본 적 없는 상큼한 상궁의 목소리까지 저절로 재생되어 귓가에 울렸다. 태형은 정국을 보자마자 달아오른 제 얼굴을 가라앉히기 위해 정국을 등지고 앉아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태형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미치겠다 별들아…☆★

 

.”

…….”

나 안 볼 거예요?”

 

등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정국의 목소리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리려다가 아직 제 얼굴이 뜨거운 것을 자각하곤 간신히 참았다. 그리곤 고개를 더 숙였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제 감정을 자각하지 못했을 때에도 이런 분위기에 정국과 단 둘이 남겨졌을 때 죽을 것 같았는데, 감정을 자각하고 난 후에 정국과 이렇게 단 둘이 방 안에 남겨지게 되었으니 지금 태형의 상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냥 차라리죽여줘……. 좀 진정이 되면 무슨 말이라도 꺼내 볼 텐데, 지금 섣불리 말을 꺼냈다간 딸꾹질이 튀어나올 것 같아 태형은 입술을 부러 더 꾹 물었다.

 

…….”

 

그리고 그 때, 정국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태형은 그 소리에 제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태형은 슬쩍 몸을 돌려 정국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 곳엔, 여태까지 제가 봐 왔던 전정국 중에 가장 굳은 얼굴을 한 전정국이 있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지금난 건가?

 

갑자기 왜 나 피하는데요.”

…….”

이제 나랑 말도 섞기 싫어요?”

,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거 아니면 나 좀 보고 얘기해요.”

 

태형이 제 말을 부정하자마자, 정국은 태형의 팔을 잡아 제 쪽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긴다. 그 바람에 제가 채 힘을 쓰기도 전에 휙 하고 돌려 앉혀진 태형이 눈을 깜박였다. 그 순간 태형의 시야에 정국이 가득 들어찼고 태형은 지금 당장 제 심장이 터져 죽는대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태형을 모르는 정국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있긴 있었지내 인생 최대의 지각변동을 일으킨 일이내가 널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거든 내가……. 태형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차마 입 밖으론 꺼낼 수 없는 말이 목에 걸려 태형을 간지럽게 했다. 그냥 대충 얼버무리고 이 상황을 무마해야 하는데,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 얘가 좀 뒤로 갔으면 좋겠는데. 날 놔주든가. 태형이 정국의 시선을 피했다. 정국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머리가 핑핑 돌았다.

 

말 안 해줄 거예요?”

, 그런 게 있어!”

…….”

넌 몰라도 돼.”

…….”

 

그 말을 마치고, 태형이 정국의 손에 제 손을 겹쳐 정국의 손을 떼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 이제야 좀 살겠네. 뒤로 물러선 다음 숨을 몰아쉰 태형이 잠시 눈을 도르륵 굴리다 문득 이상해진 분위기에 정국을 쳐다봤다. 왜 아무 말이 없지……. 그러나 태형의 눈이 정국을 향한 그 순간, 태형은 저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쉬어야 했다. 정국이, 그 때 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날. 한유라의 생일날, 과방에서 봤던 정국의 그 얼굴.

 

형 되게 상처받게 말하네요.”

,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네가 굳이 알 필요가 없…….”

형이 지금 왜 날 피하는지 제가 아니면 누가 알아야 하는데요?”

?”

누구냐고요, 그 새끼가.”

 

, 아니 왜 말이 또 그렇게……. 태형은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정국은 쉬이 물러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지금 태형이 왜 자신을 피하는지, 대답을 꼭 듣고야 말겠다는 얼굴. 태형은 제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국이 화화났나?

 

아니 잠깐만.”

?”

근데 왜 네가 화내?!”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태형은 문득 차오른 억울함에 반짝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 지금 전정국이 나한테 화를 낼 처지야? 불쌍한 건 난데? 한유라 좋아했다가 포기하고. 이젠 전정국 좋아했다가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건 난데. 왜 나한테 화내? 태형이 눈을 세모나게 떴다. 왜 나한테 화내는데?! 세상 억울한 건 난데!

 

화 낸 거 아니에요. 기분이 안 좋은 거지.”

왜 기분이 안 좋은데? 겨우 내가 너 피한 거 때문에?”

겨우아니. 그게 겨우도 아니지만. 제가 요즘 기분 좋을 일이 뭐가 있는데요. 한창 썸 타고 있었는데 방해꾼이 끼어들질 않나, 갑자기

아니 잠깐만.”

……?”

너 썸 타고 있었어?!”

? .”

누구랑?!”

 

태형은 경악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어느새 억울함과 분노는 휘발되고, 머릿속은 온통 충격으로 가득 찼다. 전정국이 썸을 타고 있었다니! 대체 누구랑? 충격과 공포다 그지 깽깽이들아! 왜 내 허락도 없이? 아니 쟤가 썸타는데 내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지 않지! 내가 정실부인이잖아!

태형의 머릿속은 한순간에 혼란스러워졌다. 대충 태형의 머릿속은 크게 두 가지 붕당으로 나뉘어졌는데, ‘전정국이 썸을 타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야파와, ‘당연히 나랑 상관있지 내가 정실부인인데파가 그것이었고 그 외에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를 궁금해 하는 오하원칙 파, ‘정실부인이라니 미쳤냐, 김태형?’ ,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용을 중시하는 소수의 다 됐고 배고파 정도가 있었다. 아무튼, 태형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묻자 정국은 그 표정에 되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형 그걸 지금 몰라서 물어요? 그 말에 태형은 입을 벌렸다. 몰라서 묻냐니. 그럼 알고 묻겠니. 태형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내가 알아야 하는 사람이라면…….

 

설마 한유

형이랑요.”

?!”

 

설마 한유라, 하고 말하려던 태형의 말은 태형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싹둑 잘라먹은 정국의 목소리에 의해 이상하게 마무리되었다. ?! 하고 의미 모를 탄성을 내지른 태형은 그대로 멈추어 입을 벌렸다. 형이요? 무슨 형이요? 설마 지금 네가 말하는 그 형이 나

 

형이랑 저랑 썸 타고 있었잖아요.”

…….”

밤도 같이 보내고. 뽀뽀도 하고. , 키스였구나. 아무튼. 최근엔 데이트도 하고. 비록 중간에 불청객이 끼어들긴 했지만.”

…….”

 

그랬구나내가 너랑 썸을 타고 있었? 아 정말? 난 오늘 처음 알았네…….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래, 생각해 보니 그러긴 했다. 정국과 자신은 소위 말하는 연인들이 하는 행동을 전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저를 괴롭히던 묘한 기시감의 정체가 이것이었나? 태형은 뭐라 차마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반박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게다가 정국의 얼굴이 너무나도 태연해서. 결국 태형은 잠시 눈을 깜박이며 살짝 웃고 있는 정국의 얼굴을 쳐다보다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 언제부터?”

언제부터더라. 쫌 됐는데.”

…….”

조선에 떨어지고 한 일주일째부터였나?”

…….”

 

그랬구나……. 태형은 멍청하게 읊조렸다. 나랑 전정국이랑 썸을 타고 있었구아니, 이게 아니지!! 멍하니 정국의 말을 납득하던 태형은 다시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근데 썸은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타는 거 아니야!? 나야 물론 전정국을 좋아한다지만. 전정국은아니, 그것보다. 내가 자길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데?!

 

, 그런데 써, 썸은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타는 거 아니야!?”

형 저 좋아하잖아요.”

언제 알았어?! 아니, 어떻게 알았어?!”

 

괜히 어설프게 침착한 척 뱉은 태형의 말에 정국은 태연하게 대답했고, 태형의 침착한 척은 단 3초도 버티지 못하고 박살났다. , , 그거 어떻게 알았어?! 나도 안지 얼마 안 됐는데?! 말한 적도 없는데?! 태형은 여태까지 제가 정국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정국에게 소리쳤다. 사실, 이제 와서 숨긴다고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좀 됐어요.”

 

아 좀 됐어? 알게 됐으면 나도 좀 알려 주고 그러지 그랬냐……. 난 그것도 모르고 괜히 고민했

 

원래 좋아하는 사람 태도는 신경 써서 보게 되잖아요.”

가 아니고 너 나 좋아해?!?!?!?!”

 

충격에 충격에 충격. 태형은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만큼 입을 벌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다 무슨 소리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가 짝사랑하는 상대와 썸을 타고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짝사랑 상대가 자길 좋아한단다. 태형은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 , 좋아, 아니, 내가 널 좋아, 네가 나를 좋아하고너도 나를 좋아하고우린 서로 좋아하는데 그 누구도 말을 안해요링딩동 링딩동 링디기디기 딩딩딩 가나다라마바사 하쿠나마타타

 

형은 진짜 아무것도 모르네요.”

?”

그럼 형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키스해요?”

아니, 그건 어쩔 수 없이,”

저랑 키스를 어쩔 수 없이 했다고요?”

아니 그니까,”

형은 어쩔 수 없으면 키스도 막 해요?”

, 정국아!!!”

 

나 얘 무서워. 태형은 다시 심각해지려는 정국의 얼굴에 다급하게 정국의 이름을 외쳤다. 정국과 제가 썸을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 2. 정국이 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지 1. 태형은 행복해할 틈도 없이 코너에 몰아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래 참았으니까. 정국은 태형을 만나 반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으니까. 말해주고 싶은 마음도, 해주고 싶은 것도 많다. 물론, 그중엔 이토록 빙빙 돌아오게 만든 태형의 눈치 없음에 대한 복수도 조금.

 

, 좋았어!!”

?”

너랑 한 키스! 좋았어! 물론 그 때는 내가 널 좋아하는지 몰랐지만, 좋아하니까 한 거야. 그리고 좋았어. 그러니까 다른 사람하고는 안 할 거야!”

…….”

, 그게 중요한 거 아닐까?!”

 

말은 바로 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한 건 아니라고. 무슨 말인지 자신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좋았으니까! 좋았다. 그럼 된 거 아니야? 태형은 재빨리 말을 이어나갔다. 정국과 오해가 쌓이는 건 이제 더 이상은 싫었다. 정확한 의미 전달의 중요성을 이미 경험한 바 있는 태형이 정국을 똑바로 응시했다. 정국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저게 무슨의미지. 정국의 얼굴에 떠오른 미묘한 표정을 해석하기 위해 태형이 멍하니 정국을 쳐다보자, 정국이 곧이어 씩 웃었다.

 

.”

?”

태형이 형.”

.”

지금 나 꼬시는 거예요?”

?”

 

정국의 얼굴이 훅 하고 가까워진다. 태형은 꿀꺽, 침을 삼켰다. 꼬시긴 누가. 꼬시는 건 지금 네 얼굴이 날 꼬시고 있는데, 정국아……. 태형은 아랫입술 안쪽을 꾹 깨물며 눈을 깜박였다. 지금그러니까이 분위기는그건가? 키스각?

 

태형이 형.”

.”

제가 그 나무에, 무슨 소원 빌었는지 알아요?”

…….”

…….”

몰라…….”

 

태형의 개미만한 목소리가 가까스로 공기를 울리고, 정국이 조금 더 가까이 태형에게 다가왔다. 태형의 코와, 정국의 코가 닿을락 말락, 아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맞닿아 있었다. 태형은 자꾸만 놓아지려 하는 제 정신줄을 간신히 붙잡으며 정국을 마주 보기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이 순간을, 꼭 기억해두고 싶었으니까. 그런 태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국이 사르르 눈꼬리를 접었다. 제가 무슨 소원을 빌었냐면요…….

 

형이 날 좋아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

김태형이, 전정국을 좋아하게 해달라고.”

…….”

 

태형은 코앞에서 느껴지는 정국의 향기에 제 손을 꼭 쥐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그리고 곧이어, 정국의 손이 태형의 손에 닿는다. 정국은 태형의 손을 풀어 태형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넣었다. 마약을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달콤하고 몽롱해서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기분. 태형이 정국을 쳐다봤다. 코가 닿고, 숨이 닿고, 그리고…….

 

지금 이루어 진 거 맞죠,”

 

입술이 닿는다.

 

제 소원.”

 

정국의 입술이, 태형의 입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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