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단언컨대 태형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제 자신이 눈치 없는 편에 속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형은 어렸을 때부터 삼남매의 맏이로서 부모님이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알아서 동생들을 챙겼고, 맏이 특유의 책임감과 기민함으로 어머니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형의 특성은 초··고에 진학한 이후에도 빛을 발해, 태형은 친구들 사이에서 분위기 메이커로 통했을 뿐 아니라 담임 선생님의 귀여움까지 도맡는 반의 귀염둥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래서 태형은 고등학교 때 친해진 지민이 저에게 처음으로

 

 

너 진짜 눈치 없다.

 

 

라고 했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더랬다. 아니 내가 왜!? 그러나 지민은 그런 태형의 반응에 혀를 쯧쯧 차며 그랬다.

 

 

그걸 모르는 게 눈치가 없는 거야, 멍청아.

 

 

아니, 멍청이라니?! 멍청이!? [명사] 아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출처: 표준국어대사전)?! Idiot(출처:ET-house 능률 한영사전)?! ばか(출처: 네이버 일본어사전)?! 傻瓜(출처: 에듀월드 표준한한중사전)?!?!?

그날 밤 초록창에서 멍청이의 사전적 뜻까지 검색하며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던 태형은 그러나 지금, 지민이 제게 했던 그 멍청이눈치 없는 새끼’(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았다)라는 말을 곱씹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일정 부분 수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형이 날 좋아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

김태형이, 전정국을 좋아하게 해달라고.”

 

 

변화구도 아닌 꽉 찬 돌직구. 오해의 소지라고는 일말의 여지도 없이 없애버리겠다는 정국의 의지가 엿보이는 주어와 목적어, 서술어가 완벽히 갖춰진 문장의 고백을 떠올리며 태형은 헛숨을 삼켰다. 언제부터였을까. 어떻게 좋아하게 됐을까. 좋아하게 됐을까.

 

 

그럼 형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키스해요?”

 

 

그 말을 생각하면, 그 소란했던 합궁 날부터 정국은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아니, 유라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아니면 조선에 온 후에 자신을 좋아하게 된 건가. 어쩌다가 좋아하게 됐을까. 어쩌다 보니 좋아하게 된 건가. 태형은 방 안에 멍하니 앉아 어젯밤을 떠올렸다. 정국의 입술이 닿고 난 후에 멍하니 정국을 쳐다보는 태형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정국은 태형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살짝 웃었다.

 

 

긴장 풀어요.’

?’

지금 간신히 걷기 시작한 사람한테 나랑 같은 속도로 뛰어달라고 안 해요.’

…….’

지금 형이랑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좋으니까.’

 

 

그러고는 저를 꼭 안아 오는 정국에 태형도 얼결에 그런 정국을 마주 안았더랬다. 여전히 얼굴은 뜨겁고, 심장은 뛰고 있었지만 간신히 정신을 차릴 정도는 됐다. 그건 다행이었다. 지금 와서 그 상황을 다시 자세히 곱씹어 볼 수 있었으니까.

 

 

전정국…….”

 

 

정국의 이름을 되뇌이며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제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어쩐지 아직까지 화끈거리는 것 같다. 태형은 이내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쌌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언제부터지?! 언제부터일까. 그 생각만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분명 정국은 유라를 좋아했었고. 그래서 그 날 과방에서 제게 화를 냈고, 그 이후로 제가 하는 연락도 받지 않았고. 제 연락을 받지 않는 정국에게 연락을 하다가, 하다가, 결국에는 포기하고 쓰린 속을 술로 달래는 동안 정국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렇게 싫어하던 선배와 함께 조선으로 떨어졌을 때는 또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그리고 그 선배가 제 첩도 아닌 정실부인인 것을 알게 됐을 땐? 합궁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땐!?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부정적인 쪽으로는 아무리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생각의 가지가 뻗어나가는 법이다. 그러니까 혹시정국이가 나를 좋아하는 게

 

 

…….”

 

 

착각은 아닐까.

 

 

*

 

 

이런 미친 디그다 새끼.”

 

 

뒷마당에서 팡팡 빨래를 널던 지민(2n, 내시)은 태형이 머뭇거리며 털어 놓은 심오한 고민에 대해 4어절의 문장으로 화답했다. 그에 태형은 그런 지민의 반응에 왜! 하고 항변했지만 지민은 고개를 저으며 잠시 멈추었던 손을 다시 놀리기 시작했다.

 

 

난 또 무슨 심각한 고민이라고.”

심각한 고민이거든?”

증전마마. 그렇게 할 일이 없으시면 소인 빨래 너는 거나 도와주시옵소서.”

그러다가 상궁들이 보면 너만 혼나.”

그르믄 끄즈스든그…….”

 

 

, 진짜! 나 진짜 진지하다니까!? 태형은 한 쌍의 커퀴벌레를 보는 듯한 지민의 눈빛에 제 절박함을 피력했다. 내가 지금 솔로인 네 앞에서 커플 염장을 부리겠다는 게 아니라, 정말 나는 진지하다고! 그러나 그런 태형의 항변에도 지민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걔가 무슨 착각을 해.”

아니, 그렇잖아. 여기 와서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없고. 그러니까 그냥 의지가 되는 감정을 좋아한다고 착각한 거 같아. 걔 나 싫어했다니까? 내가 걔가 좋아하는 애 좋아해서,”

누가 누굴 좋아해?”

아니. 암튼. 그랬는데 이렇게 갑자기 날 좋아하게 된다는 게 말이나 돼? 걔 내 연락 싹 다 씹었었는데?”

너도 걔 연락 씹었다며.”

그거는 핸드폰이 망가져서!”

고친 이후로도 연락 안 했잖아.”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서 안 한 거지…….”

걔도 그랬나 보지.”

 

 

어느새 빨래를 다 널고 찌뿌둥한 허리를 피며 허리를 툭툭 두드린 지민이 바구니를 챙겨 발걸음을 옮겼고 그런 지민을 태형은 졸졸 쫓아갔다. . 지민아. 진짜 아닐까? 진짜 착각하는 거 아닐까? 걔가 날 좋아하는 게 맞을까?

 

 

, 몰라!”

…….”

그리고 야. 걔가 널 좋아하는 게 착각이면 시발, 무슨 착각을 몇,”

?”

아니다. 이건 내 입으로 할 얘긴 아닌 거 같고. 암튼 아니야.”

너 뭐 아는 거 있지?! 말해. 뭔데?”

, 싫어! 니네 사랑싸움에 나 끼지 마. 또 한 번 멱살 잡아봐라. 진짜. 그땐 진짜 둘 다 쌍으로 어디 가둬버릴 거니까.”

너무하네…….”

 

 

태형은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물론 진짜로 시무룩해진 것은 아니었고, 지민이로 하여금 죄책감 내지는 동정심을 끌어내기 위한 연기였다. 그리고 지민은 그런 태형을 한 번 보고, 텅 빈 바구니를 한 번 보고, 하늘을 한 번 보고, 답답해 죽겠는 제 가슴에게 위로의 말을 한 마디 건넨 후 긴 한숨을 내쉬고 태형을 뒤돌아 쳐다봤다. 진짜, 내가 어쩌다가 이런 눈치 없는 새끼(김태형)와 사랑에 눈 먼 새끼(전정국)의 사랑 놀음에 끼게 되어서

 

 

할아버지께선 말씀하셨지.”

?”

안 되면 되게 하라.”

무슨 개소

전정국이 널 좋아하는 게 착각이라고 쳐. 그런데 어쨌든 지금은 널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잖아.”

그렇지?”

그럼 꼬셔.”

?”

널 좋아하게 만들면 되잖아. 정실부인의 힘을 보여줘.”

저기요.”

그냥 니꺼 도장 빡! ? 빼도 박도 못하게 딱! ? ! ? 이 얼마나 좋은 기회냐. 남의 눈치 안 보고 꼬실 수 있고.”

 

 

지민은 주위를 살짝 둘러본 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태형의 어깨를 두드렸다. 유교가 지엄한 조선시대에서 동성연애라니. 이 얼마나 새롭고 특별한 경험이야?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당신이 아니면 누가? 조선시대 궁궐에서 왕을 게이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 지민은 태형을 향해 살짝 윙크하며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알지, 친구?

 

 

호모는 죽지 않아요.”

?”

그럼 난 간다. 따라오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지민은 성큼성큼 걸어 멀어졌고 그런 지민의 뒷모습을 태형은 황망히 쳐다보았다. 온갖 있어 보이는 척은 다 해 놓고 결국 결론은 정국을 꼬시는 거라니. 태형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알지, 친구? 지민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다시 울림과 동시에 지민의 윙크가 떠올라 태형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알긴 뭘 알아, 미친놈아…….”

 

 

뿌듯한 발걸음으로 당당히 걸어가는 지민의 뒷모습을 향해 조그맣게 욕설을 읊조리며.

 

 

*

 

 

별 소득 없이 터덜터덜 교태전으로 돌아온 태형은 방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런 미친 디그다 새끼.’

 

 

어쩌면 지민의 말이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정말로 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인지 모르겠으나 지민은 정국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에 꽤나 확신을 갖고 있는 듯 보였다. 지민은 정국과 단 둘이 술을 마실 정도로 친하니까 그 정도로 확신을 갖고 있다는 건 정국으로부터 무언가 들은 것이 있기 때문이겠지.

 

 

그럼 꼬셔.’

 

 

그리고 이 말도.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긴 하다. 정국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착각이라면, 착각이 아니게 만들면 되지 않는가?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 만들기에 다시 오지 않을 완벽한 기회가 맞긴 했다. 제가 정국을 꼬시겠다 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인원이 몇인가. 상궁들은 정국과 자신의 합궁각을 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지 않은가. 그래서 태형은 반짝 눈을 떴다. 그래. 모 아이돌도 그랬잖아. 고민보다 고라고. 그래서 태형은 짧은 생각을 마치고 곧바로 제 결심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가장 먼저 상궁을 불렀다. 어떻게 하면 정국의 마음을 겟챠할 수 있을까. 차마 그 방법을 지민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으니까.

 

 

성심(聖心)을 사로잡는 방법이요?”

아니 뭐, 성심이라고 할 것까지는 좀 그렇긴 한데 뭐 대충그렇지?”

 

 

그러나 태형이 몇 번이고 연습한 후 쪽팔림을 무릅쓰고 간신히 조그만 목소리로 조언을 구한 것이 무색하게, 앞에 멀뚱히 앉은 상궁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태형을 응시했다. 그리고 태형은 그 대수롭지 않다는 상궁의 표정에 눈을 깜박였다. 뭐 엄청 좋은 수가 있나? 그러나 곧이어 상궁의 입에서 나온 말에, 태형은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마마. 일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성심을 얻기 위해서는 튼튼한 원자 아기씨를 회임하셔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 , 잠깐만,”

세간에는 아녀자란 무릇 가만히 누워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옥경을 더 깊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마마께오서 먼저 주상 전하의…….”

아니 잠깐, 스톱!!!!!!!”

스돕이요? 그게 무엇,”

, 아니 잠깐 마, 말을 멈추거라.”

 

 

다급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바다 건너 서국의 언어를 내뱉은 태형은 상궁이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의아해하는 틈을 타 상궁의 입을 막는 것에 성공했고 그와 동시에 태형의 머릿속에서 태형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막 상영을 시작하려던 19금 비디오도 가까스로 재생을 멈출 수 있었다. 태형은 새빨개진 얼굴을 제 손을 들어 가렸다. 세상에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야.

 

 

마마갑자기 왜 그러시옵니까.”

, 아니, 무슨 그런 말을 이런 환한 대낮에,”

이미 다 알고 계시는 것이지 않습니까. 혹 제가 가르쳐 드린 것을 주상 전하와 함께,”

, 안 했어!!!!! 안 했다고!!!”

?”

 

 

태형은 여전히 새빨개진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소리쳤다. 하긴 뭘 해! 진짜! 아직까지 귓가에 상궁의 목소리가 남아 맴도는 것 같았다. 옥경을 더 깊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게다가 훨씬 더 큰 문제는 처음 상궁으로부터 합궁 교육을 받을 때와는 달리 조금 더 실감(!)나고 생생하게 펼쳐지는 제 머릿속 영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와 지금은 경험의 깊이가 달랐으니까. 감정의 종류도.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이제 태형은 키스할 때 정국이 어떻게 상대를 쳐다보는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정국이 어떻게 상대를 껴안는지도, 그리고 또…….

 

 

아악!!!”

마마?”

미쳤다. 어떡해?”

?”

 

 

그리고 그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에 태형은 손을 내려 입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지금 너무 진도가 빠른 거 아니야? 태형은 손톱을 잘근 깨물었다. 생각해 보면, 정국도 저도 사귀자는 말을 꺼낸 적 없으니 정국과 제 사이는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미 뽀뽀에 키스까지 한데다가 원베드 투베개도 아니고 원베드 원이불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아니 아무리 피 끓는 성인 남남이라지만 너무 진도가 빠른 것 아닌가. 게다가 정국과 저 사이에는 풀어야 할 오해까지 남아 있다. 태형은 생각했다. 그래,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중전 마마,”

플라토닉한 게 먼저 필요해.”

푸라토?”

, 아니, 그러니까, 정신적인 사랑?”

마마, 무슨 말씀이신지 소인은 잘…….”

그러니까 내 말은, 이미 몸으로는 갈 데까지(?) 갔으니까, 뭔가 그정신적인그런 게 필요하다는 거지.”

…….”

 

 

태형의 말에, 상궁은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 탄성을 내뱉었고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국이와 나 사이에는 그런 게 필요해. 확신. 믿음. 대화. 그런 거. 생각해보니 좋아한다는 말도 직접적으로 못 들었잖아. 태형이 자신감에 찬 얼굴로 야무지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송구하옵니다, 마마. 소인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 아니 뭐 송구할 것까지야,”

소인이 그저 음욕에 눈이 멀어…….”

?”

그럼 제가 그 푸라토를 찾아보겠습니다.”

? 아니 그 전에 뭐라고 한,”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상궁은 덩달아 주먹을 꼭 쥐어 보였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그 단호한 얼굴에, 태형은 어, , 그래하고 떨떠름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방금 뭔가 되게 이상한 단어를 들은 것 같은데 착각

 

 

그런데 마마,”

.”

갈 데까지 가셨다는 말씀은,”

?”

주상 전하와 함께 어디 뭐 천당이라도 다녀오셨다는 말씀이신가요?”

 

 

이 아니구나.

 

 

*

 

 

그래서, 제 생각에는 이 일기가 도움이 되어줄 것 같아요.”

일기?”

왕이 매일 썼던 일기래요.”

 

 

정국은 진지한 눈빛으로 품안에 소중히 품고 온 서책을 꺼내들었다. 모두가 잠든(이라고 쓰고 상궁들은 눈빛을 빛내며 깨어 있는 으로 읽는다) , 정국와 태형은 방 안에 마주 앉아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들어오기 전에 정국이 상궁들은 방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으라 엄명을 내리긴 했지만, 혹시 모르는 것이니까. 그리고 정국의 진지한 눈빛을 마주 보며, 태형은 꿀꺽 침을 삼켰다. 딱히 정국이 하는 말이 심각한 사안이었기 때문은 아니고, 야심한 밤, 정국과 제가 같은 방 안에 단 둘이 있다는 것이 자꾸만 의식되었기 때문에. 자꾸만 제 몸을 감아 오는 긴장감에 태형은 살짝 혀를 빼어 입술을 핥았다.

 

 

제가 봤을 때는 우리가 조선으로 오게 된 게, 그 소원 나무랑 연관이 있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왕과 왕비로 오게 되었다는 건, 그러니까 아마도 왕과 왕비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

그런데 문제는 이 일기가 한자랑 옛날 한글이랑 막 섞여 있어서 뭐라고 써져 있는지 읽기가 힘든…….”

…….”

?”

, ?!”

내 말 듣고 있어요?”

 

 

, . , 듣고 있어. 태형이 더듬거리며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눈을 가늘게 뜨는 걸 보니 딱히 정국이 제 말을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잠깐 딱딱하게 굳어 어색하게 웃고 있는 태형과 서책을 번갈아 쳐다본 정국이 이내 얕은 한숨을 내쉬고 서책을 옆에 툭 내려놓았다.

 

 

요즘 많이 피곤해요?”

? , 아냐. 계속 얘기해 봐.”

난 요즘 피곤해요.”

 

 

그러니까 일로 잠깐만 와 봐요. 손에서 서책을 내려놓은 정국이 이내 팔을 벌리며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 태형이 그렇게 말하자 정국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 형 말고 누가 있어요. 그 말에 태형은 아, , 그렇지하고 머쓱하게 말하며 볼을 긁었다. 그러고도 태형이 머뭇거리고 있자, 몸을 살짝 일으켜 태형에게로 가까이 당겨 앉은 정국이 태형을 껴안았다.

 

 

, 좋다…….”

…….”

 

 

그리고 저를 감싸 안는 온기에, 태형은 숨을 참았다. 정국의 턱이 제 어깨에 올려지고, 정국의 손이 천천히 제 허리를 감싸 안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새 정국에게 폭 안긴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정국의 조금은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 소리가 차근차근 귓가에 닿고, 정국의 손이 닿은 모든 부분이 뜨거워진다. 정국의 머리카락이 제 목에 닿아 부드럽게 흩어지고, 정국이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 가까이서 들리고. 평소보다 훨씬 예민해진 모든 감각이 온 몸을 건드리고.

 

 

태형이 형.”

?”

나 안아줘요.”

 

 

그 예민해진 감각에 얼마나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을까. 낮게 가라앉은 정국의 목소리가 태형의 귓가에 안착했다. 꼭 진공관 안에 들어있는 것처럼, 정국의 목소리는 웅웅 울린다.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 정국의 단단한 손이 태형의 등을 타고 올라와 태형의 목에 닿고,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귓가에 닿고. 태형은 홀린 듯 정국의 등 뒤로 손을 올린다. 그에 정국이 조금 더 힘을 실어 기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생각했다. 혹시 지금이 그 타이밍 아닐까. 그 날의 아직 풀리지 않은 오해를 풀고, 관계의 확신을 얻을 수 있는 기회.

 

 

정국아.”

?”

 

 

그래서 태형은 정국의 등에 올렸던 손을 들어 저를 단단히 감싸 안고 있는 정국의 팔을 건드렸다. 나 할 말 있는데……. 태형의 목소리에, 살짝 노곤하게 풀린 정국의 눈이 태형을 향했고 태형은 꿀꺽 침을 삼켰다. 뭐부터 얘기해야 할까. 그러니까…….

 

 

, 유라 있잖아.”

…….”

그러니까 나는 그 날 유라를,”

.”

 

 

그러나 태형의 말은 정국의 낮은 목소리에 의해 끊겼고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정국의 온기가 제게서 천천히 떨어져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피곤한 듯 제 손으로 눈을 꾹 누른 정국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걔 얘기 지금 안 하면 안 돼요?”

? 아니, 나는 그게 아니라,”

형 입에서 걔 이름 나오는 거 싫어요.”

 

 

정국이 태형에게 눈을 맞췄다. 그리고 그 눈에 태형은 입을 합 다물었다. 난 건가? 정국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요,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이기적이고, 욕심도 많아요.”

…….”

지금도, 제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알면 형 되게 놀랄걸요.”

?”

그런데 참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형도 지금은,”

…….”

나만 생각해 주면 안 돼요?”

 

 

그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되잖아요, 그쵸. 그러고 정국은 태형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태형에게 안겨 왔다. 그 말에 어떻게 계속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지은 죄가 있는데. 결국 태형은 하려던 말을 목 뒤로 넘긴 채 정국을 마주 안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내가 놀란다는 건데?’

 

 

머릿속 한 구석에 차마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 하나 더 늘어난 채로.

 

 

+

 

 

너무 오랜만이라 민망한 수준.... 약간 감도 잃은 거 같고.. 조만간 내가 내 글 정주행해야겠어..ㅠㅋㅋㅋ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열심히 다시.. 써볼게!! 항상 고마워!! 사랑해 보라해ㅠㅠㅠ 켐들 덕분에 힘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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