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헷빛은 따스하고, 새들은 부드럽게 조잘대는 아침. 태형은 눈을 감은 채로 이불 속에서 뒤척였다. 조금만 더 자고 싶은데……. 행복한 늦잠을 위해 태형이 그대로 눈을 감은 채 다시 꿈속으로 빠져들려는 찰나, 태형은 바로 옆 매우 가까운 곳에서 뒤척이는 기척을 느꼈고 곧이어 조금 묵직한 무게감이 태형의 가슴 위로 닿았다. 뭐지? 따뜻하고 포근한데.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생각한 태형은 조금 뒤척이다가 이내 무게가 느껴진 쪽으로 돌려 누웠다. 여전히 눈은 감은 채였다. 평소 무언가를 끌어안고 자야만 잠이 드는 버릇이 있는 태형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쪽으로 손을 뻗었고 이내 그 온기가 제 자신을 품어 안는 것을 느꼈다. 포근하고 따뜻하고 안정적인 느낌. 태형은 저도 모르게 잠결에 미소지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딱딱한 게 꼭 커다란 곰 인형 같…….

 

……!”

 

아니, 잠깐. 딱딱? 태형은 그 생각과 함께 반짝 눈을 떴다. 그리고 뜨자마자 숨을 멈췄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몽롱했던 정신이 단번에 맑아졌다. 제 코앞에, literally 정말 문자 그대로 제 코 1mm 앞에 있는 정국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찼기 때문에. 엄마야. 태형은 간신히 비명을 삼키고 눈을 깜박이다 이내 제가 정국의 품 안에 단단히 안겨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리고 제 자신도 정국을 꼭 끌어안고 있다는 것 역시.

뭐야 왜 네가 여기 있어?”

 

그래서 태형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아니, 같이 자는 건 자는 건데, 얘는 왜 날 이렇게 꼭 끌어안고 있고 나는 왜 얘를 이렇게 꼭 끌어안고 있는 거지? 밤새도록 이러고 있었던 건가? 태형은 조금만 움직여도 바로 입술이 맞닿을 것 같은 거리의 얼굴에 제 심장이 아침부터 미친 듯이 뜀박질에 시동을 거는 것을 느꼈다. 정국의 얼굴은 아침부터 보기엔 좀 버거운 얼굴이라고 생각하며. 그러니까 안구 말고 심장에(정국의 얼굴은 눈 건강에는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태형의 목소리에, 정국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태형이 형…….”

 

잔뜩 잠긴 목소리를 하고, 정국이 잠결에 웅얼거리며 웃었다. , 미친. 목소리 왜 저렇게 섹시해. 태형은 숨을 참고 눈을 깜박였다. 전정국 잘생긴 거야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우리 집 탄이도 알고 중동에 무함마드도 아는 사실이지만 이렇게 잠에서 막 깨어나 부스스한 얼굴과 목소리까지 섹시할 필요가 있을까? 누구 좋으라고? 그러나 태형이 그런 정국의 목소리에 뭐라 답하기도 전에, 정국은 태형은 끌어안았던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어 태형을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태형의 코엔 정국의 가슴팍이, 태형의 목덜미엔 정국의 손이 닿았고. 제 뒷목과 윗등을 감싸 안은 정국의 손은 기분 좋게 뜨거웠고, 제 코에 닿은 정국의 가슴팍에선 두근거리는 정국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태형은,

 

…….”

 

지금 이 순간 부정맥에 걸려도 이상할 게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잘 잤어요?”

 

시발, . 진짜. 그렇게 웃지 마. 그렇게 잠긴 목소리로 섹시하고 나른하게 말 걸지 마. 하이틴 드라마에서 뜨거운 첫날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 아침 햇빛을 조명처럼 받으며 아가리 똥내 따윈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처럼 키스하고 모닝 섹스 한 번 더?를 외치는 남주인공처럼(이런 드라마는 없다) 웃지 말라고! 태형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미친 듯이 뜀박질을 하고 있는 제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안 돼. 이렇게 아침부터 부정맥으로 하나님 얼굴을 뵙고 오고 싶진 않았다. 태형은 살아야 했다. 살아서 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태형은 슬쩍 정국을 밀어냈다. , , 잠깐만.

 

왜요…….”

잠깐만 이것 좀 풀어봐. 누가 들어오면 어떡해.”

누가 들어오면 어때요? 부부가 서로 좀 껴안고 있겠다는데. 상궁들은 더 좋아할걸요.”

, 부부…….”

 

태형은 정국의 가감 없는 단어 선택에 눈을 빠르게 깜박였으나 그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부부도 맞고, 상궁들이 좋아할 거라는 것도 맞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제 심장과 아침이라 퉁퉁 부었을 제 얼굴이었다. 그 전에야 밤새도록 안주를 집어먹어 퉁퉁 부은 얼굴로 정국과 마주앉아 해장 라면을 끓여 먹어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지금은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고! 그러나 그런 태형의 마음을 알 턱이 없는 정국은 태형의 바르작거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태형이 바르작거릴수록 태형을 더 꼭 껴안아 올 뿐이었다. , 가만히 좀 있어 봐요.

 

아침부터 이러고 있으니까 좋다.”

너 지금 심장 엄청 빠르게 뛰어.”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친 듯이 전력질주를 하고 있는 것이 제 심장 혼자뿐인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일까. 태형은 제 코에 닿은 정국의 가슴팍에서 그대로 느껴지는 정국의 심장 박동에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 없었다. 정국이도 지금 나랑 비슷한가 봐. 태형은 저도 모르게 눈을 스르르 감으며 정국의 품 안으로 조금 더 깊숙이 안겼다

 

.”

 

, 그런 제 자신에 화들짝 놀라 정국을 확 밀쳤다. , , 미쳤나!! 나도 모르게 그만!! 태형은 저도 모르게 끼를 부린 제 자신에 놀란 참이었다. 그리고 졸지에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채 태형에 의해 가슴이 밀쳐진 정국은 놀라 눈을 깜박였다. 왜 그래요?

 

, 일해야지! ! 지금 해가 중천에 떴어!!”

무슨…….”

여봐라!! 거기 밖에 누구 없느냐!!!”

 

아침부터 이런 분홍빛 기류를 맞이하기에는 아직 심장의 준비가 덜 된 태형이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부르자 그제야 조용했던 문 밖에서 예, 마마.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태형은 전하께서 가신다고 하신다!!고 외쳤다. 아직 이불 속에서 태형을 쳐다보고 있던 정국은 얼빠진 표정을 지을 뿐이었고.

 

세숫물을 들일까요?”

, ! 그래!”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문 밖에서 상궁의 대답이 들려옴과 동시에, 태형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이 정신없는 아침을 끝낼 수 있겠구나. 그러나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라고 했던가. 태형이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태형은 어느새 일어나 앉은 채 제 옷깃을 끌어당긴 정국에 의해 눈 깜박할 새도 없이 정국의 앞에 마주 앉게 되었다. 그리고, 정말 한순간이었다. 그러니까 갑자기 일어난 일에 태형이 뭐라 반응할 새도 없이 제 이마에 정국의 입술이 닿은 것은.

 

?”

이 정도는 뛰는 거 아니죠?”

…….”

그럼 이따가 봐요.”

 

태형이 뭐라고 반응할 새도 없이, 정국은 다시 한 번 빠르게 태형을 꼭 껴안고 때마침 세숫물을 들고 들어온 상궁에게 손짓을 한 뒤 몸을 일으켜 방을 나섰다. 그런 정국에게 공손히 인사를 한 상궁은 정국이 방을 나서고 문이 닫히자마자 태형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마마. 어찌 전하께서 그냥 가십니까?”

? 그거야 할 일 하러 가는 거지.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잖아.”

…….”

? 무슨 일 있어?”

, 혹시 전하와 언쟁이라도 하셨나 해서…….”

 

그렇게 말하는 상궁의 얼굴이 심상치 않아 보여 태형은 상궁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무슨 일이 있냐 물었고 그런 태형의 말에 상궁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리고 이어진 상궁의 말에,

 

아니, 전하의 용안이 조금 붉어져 계셔서 무슨 일이 있으신가 하고요.”

 

태형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길 수 없었다.

 

*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하였습니다. 그 뜻은, 몸이 가까워지면 마음도 가까워진다는 뜻이지요!’

 

태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에 안심하며 제가 알아 온 푸라토사랑법을 알려주던 상궁의 얼굴을 떠올렸다. 상궁이 직접 발품을 뛰어 요즘 저자에서 가장 유행에 민감하다는 人徶(인별) 金認士(김인사) 선생의 저서 [薰女生情]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薰女生情]

 

추완(椎關): 남녀 단계란 무릇 추천(鞦韆:그네)과 같으니 계속 밀기만 해서도, 계속 당기기만 해서도 안 된다. 적절한 때에 다가가고, 적절한 때에 사내를 애태워야 진정한 薰女라 할 수 있다.

아이건댁(娥利健宅): 눈을 마주쳐 사내의 마음에 예쁘고 이롭고 튼튼한 집을 짓는 방법으로, 눈이 마주치면 눈꼬리를 접어 웃어 사내의 마음에 불을 지펴야 진정한 薰女라 할 수 있다.

교태(嬌態): 사내가 여인의 교태에 약하다는 것은 모두들 알고 있을 터. 허나 이론만 알고 실전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야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그런 고로 필자는 교태의 한 가지 예시를 제시하고자 한다. 일명 너구리기술과 곰돌이 한 마리기술이다. 번외로 일합일(一合一)’ 기술도 있다.

[너구리 기술]

 

: 少女 요즈음 눈길이 가는 사내가 생겼습니다.

: 허어. 그것이 누구인고.

: !

: …….

: 구리!><

 

[곰돌이 한 마리 기술]

 

: 곰돌이 한 마리로 육행시(六行詩)를 해 보겠소. 운을 띄워 주시겠소?

: .

 

잠시만. 사실 상궁이 가져온 책자는 꽤 두꺼워 그 뒤에도 몇 개의 기술들이 더 나열되어 있었으나 태형은 차마 더 펼쳐보지 않고 덮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건댁법까지는 그럭저럭 해 볼만 하다고 생각되었으나 그 이후 교태법에 나열되어 있는 것들은 도저히 따라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태형이 서책을 들고 손을 잘게 경련하거나 말거나, 상궁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은 일합일 애교가 좋을 것 같다며 추천까지 해 주고 있었고 그래서 태형은 그런 빛나는 상궁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이 대화를 끝내고자 했다.

 

, 그래. 뭐 나중에 전하를 만나게 되면 해 보,’

아뇨, 마마. 행동하는 지성인이 되셔야 합니다.’

?’

여태껏 항상 전하께오서 마마를 찾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이젠 마마께서 전하께 가실 때가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토록 만나기 어렵다는 인사(認士) 선생까지 친히 만나고 온 상궁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언제 다시 한 희빈이 전하를 홀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찾아온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상궁은 태형이 뭐라 하기도 전에 상궁들을 불러 태형을 먹이고 씻기고 단장시켜 거의 내쫓듯 교태전 밖으로 내보냈다. 나른한 오후, 지루한 오전 정사(政事)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러 경회루를 거닐 때 사랑하는 중전이 그림같이 서 있으면 전하께오서 얼마나 행복하시겠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너무 속보이는 거 아니냐고…….”

 

태형은 잔뜩 기합이 들어가 있는 상궁의 기세에 차마 다시 교태전으로 돌아가자는 말도 꺼내지 못한 채로 경회루의 누각을 서성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왕이 이 시간에 경회루를 산책하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대놓고 이곳에 보란 듯이 서 있는 것은 아무래도 민망하잖아! 밤에 다시 만날 텐데 꼭 그새를 참지 못하고 보고 싶어서 마중 나온 사람도 아니고(맞다)! 어떻게든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려고!(그렇다) 한 시도 떨어져 있지 못하는 커퀴벌레마냥!(정답이다) 서로가 좋아 죽겠는 신혼부부마냥!(바로 그거다)

 

…….”

 

태형은 괜히 누각 아래 있는 상궁들의 눈치를 살피며 누각 가장자리로 슬금슬금 자리를 옮겼다. 아무래도 너무 민망하니까. 자신만 살짝 이쪽 구석에 찌그러져 있으면 정국이 산책을 나왔다가 이 밑에 상궁들은 그냥 상궁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신경 쓰지 않고 지나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정국의 얼굴을 마주하는 게 부끄럽다기보다는, 아무 이유도 없이 정국을 찾아왔다는 것이 아직은 조금 민망했으니까.

 

형 진짜…….’

…….’

짜증나네요.’

 

그렇게 누각 가장자리에 쭈구려 앉아 멍을 때리고 있자니 자연스레 정국이 떠올랐다. 현대에서 있었던 일들도. 유라의 등장 이후로 어딘가 틀어졌던 관계긴 하지만, 정국과 제 관계는 그 날을 기점으로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무너졌었다. 정국과 동방에서 마주친 그 날. 그날 이후 정국과 자신은 서로 인사도 안 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으니까. 태형은 그래서 불안한 거였다. 그토록 친하다고 생각했던 정국과 한 순간에 그렇게 틀어질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었으니까. 유라가 자신이 아닌 정국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태형은 유라를 깔끔히 포기했음에도 정국과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었다.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게 정확하겠다. 그 날, 정국은 태형의 전화를 모두 무시했고 방학이 끝난 후에도 태형과 겹칠 수밖에 없는 전공 필수 수업을 모두 신청하지 않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써 가며 태형을 피하고 태형과는 눈도 마주치려 들지 않았다. 태형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정국의 앞에서, 태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아까 전정국이 너 죽일 듯이 노려보던데.’

 

소원나무에다 소원을 빌고 버스로 돌아오는데, 동기 한 명이 슬그머니 다가와 그랬다. 그 말에, 태형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까지 할 건 뭐야? 그래도 선밴데.’ 이어지는 동기의 말에 태형은 막 버스에 오르고 있는 정국을 살짝 쳐다봤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형 진짜 짜증나네요.’ 그 날 정국의 말이 다시 귓가에 울렸다.

 

어쩔 수 없지 뭐.’

…….’

그래서 정국이랑 유라는 사귀는 거야?’

 

정국이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건 안다. 교수님이 불러 늦을 것 같다고 정국에게 보낸 문자, 제 손에 들려 있던 초밥, 그리고 제 문자대로라면 교수님의 방에 있어야 했을 시간에 동아리방에서 유라와 함께 마주친 정국과 제 자신. 모든 것이 정국이 오해를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국이 그대로 동방을 나가버리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후 정국을 뒤따라나간 태형은 정국을 찾을 수 없었다. 정국이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도 모조리 씹었으니까. 자취방에 찾아가 봤지만 정국은 애초에 자취방에는 들른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 것 같던데. 걔네 둘이 이상한 교양 수업 같이 듣더라.’

그렇구나.’

 

시험이 끝난 후 동아리방에서 시간을 때우다 물 마시러 나간 차에 교수님을 만났고, 교수님은 이 시간에 시험을 안 보는 줄 알았다면 좀 더 일찍 불렀을 거라며 괜찮으면 지금 볼까 물었다. 잠깐 물 마시러 나오느라 핸드폰까지 동방에 두고 나온 태형은 그대로 교수님을 따라갔고 심각한 얘기라도 할 줄 알고 정국과의 약속까지 미루게 만들었던 교수님은 태형에게 간단한 심부름을 시켰다. 그렇게 교수님의 심부름으로 인쇄소에 제본을 맡기고 나니 손목시계는 딱 정국과 만나기로 한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고 태형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초밥집에 갈 게 아니라 초밥집에서 초밥을 포장해 서프라이즈로 정국의 자취방에 가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 태형오빠, 손에 그거 초밥이에요?’

, 태형이형 대박. 한유라가 며칠 전부터 초밥, 초밥 노래 부르던 건 어떻게 알고.’

고마워요, 오빠. 오늘 저 생일이라 지금 술 마시러 갈 건데 오빠도 같이 갈래요?’

 

그러나 초밥을 손에 들고 나서야 동방에 핸드폰을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은 태형은 핸드폰을 가지러 간 동방 앞에서 유라와 후배들을 마주치게 됐다. 정국이와 어색하게 된 이후로 애들이 모여 있을 만 한 시간에는 동방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 태형은 초밥을 뒤로 숨기며 어색하게 웃었으나 이미 후배 중 한명이 태형의 손에 들린 초밥을 눈치 챈 후였고 제 생일이라며 환하게 웃는 유라와 후배들 앞에서 태형은 차마 이 초밥은 네 것이 아니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 초밥이야 가는 길에 다시 사가면 되지. 태형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유라에게 초밥을 안겼다.

 

생일 축하해, 유라야. 그런데 어쩌지. 나는 선약이 있어서.’

뭔데요?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저희 이제 책만 놔두고 바로 갈 거예요.’

? 안에 누구 있나? 문이 열려 있는데?’

? 아니, 나는 잠깐,’

 

핸드폰만 가지러 온 건데. 하지만 태형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갑자기 열린 동아리 방의 문과 갑자기 찾아온 정적 때문에. 태형은 순간의 정적에 자연스럽게 동방 안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 곳엔,

 

태형이 형?’

정국아,’

? 정국이 있었네?’

 

정국이 있었다. 태형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묻고 있는 듯한 정국의 얼굴, 소란스러운 유라와 후배들. 정국의 시선이 저에게서 떨어져 유라의 손에 들린 초밥에 머무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태형이 뭐라 변명하기도 전에, 정국의 시선을 느낀 유라는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 나 오늘 생일이라고 태형 오빠가 사다 줬어. 짱이지.’

, 아니,’

내 생일이라 우리 술 마시러 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 정국아?’

 

태형은 황급히 유라의 말을 가로막았으나 더 이상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사실 저 초밥은 네 것이 아니라 정국이와 내 거고, 나는 네 생일인지도 몰랐다는 말을 생일이라 잔뜩 신나 있는 유라와 후배들 앞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정국의 시선이 저에게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태형은 차마 정국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없어 정국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그 때, 정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 진짜,’

…….’

짜증나네요.’

 

그리고는 누가 잡을 새도 없이 동방을 빠져나갔다.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 누구도 잘못한 건 없었다. 타이밍이 안 좋았고, 모든 사건들이 교묘하게 어긋났다. 사소한 어긋남이 겹치고 물려 최악의 타이밍을 만들어냈던 것뿐이다. 동방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유라와 후배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하는 것 같았고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태형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정국을 쫓아 동방을 뛰쳐나갔지만 정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다시 동방으로 돌아와 무슨 일이냐고 묻는 후배들에게 대답해 줄 새도 없이 핸드폰을 들고 수도 없이 정국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정국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엉망진창이었다.

 

…….’

 

어쩌면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르는데. 태형은 벤치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정국에게 말하려고 했다. 나는 더 이상 유라를 좋아하지 않으니 네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좋다고. 나는 유라보다 네가 더 소중한 것 같다고. 너랑 이렇게 인사도 안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되고 싶진 않다고.

 

망했어…….’

 

그러나 이번에도 정국과 저는 어긋나버리고 만다. 오히려 새로운 오해만 생겼다. 태형은 핸드폰을 꾹 붙잡았다. 핸드폰은 제 속도 모르고 잠잠하고, 학기가 끝난 학교는 고요하다. 그리고 태형은 생각했다. 그냥, 애초부터 그 정도의 관계였던 건 아닐까.

 

…….’

 

이 정도의 오해로 어그러질 사이였다면, 애초부터 의미 없는 관계였던 건 아닐까. 이 투정엔 전화를 받지 않는 정국에 대한 원망도 조금 섞여 있었다. 그 후배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좋아하는 여자를 포기할 정도로 아꼈던 후배에게 무시당하는 기분이란. 태형은 고개를 떨궜다. 원래 끈끈했던 관계도 이토록 쉽게 망가질 수 있는 건지, 아니면 애초에 정국과 제 관계가 그 정도가 아니었던 건지. 그래서 불안하다.

 

태형이 형.”

 

현대로 돌아간다면, 그래서 유라가 다시 나타난다면. 지금 조선에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른 상황들이 다시 돌아온다면. 그러면 정국과의 관계도 다시 삐거덕거리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데 이미 나는그때와는 많이 달라져 있는데.

 

형이 웬일이에요? 여기까지 오고.”

?”

왜요. 심심해서 왔어요?”

 

언제 온 건지 제가 회상에 빠져 있는 사이 어느새 제 바로 옆에까지 다가온 정국은 태형을 보며 물었고 태형은 정국의 목소리에 빠르게 과거에서 빠져나오며 눈을 깜박였다. 정국의 얼굴이 바로 옆에 있었다. 태형은 그런 정국의 얼굴을 쳐다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럼 왜,”

너 보고 싶어서.”

…….”

 

그리고 그 순간, 저를 보고 있던 정국의 눈이 느리게 깜박여진다. 그리고 정적. 갑자기 찾아온 정적에 당황한 태형이 정신을 차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 너무 진지했나? 이거 아닌가? 이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하지? 태형이 눈을 굴렸다. 그러니까, 그냥 농담처럼 넘어가려면,

 

, 형 와서 좋지? 알아, ,”

.”

?”

좋아 죽겠어요.”

 

, , 그래? 태형은 한없이 진지한, 농담기라고는 쥐똥만큼도 보이지 않는 정국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을 깜박였다. 보고 싶어서 왔단 말은 진심이 맞긴 했지만 저도 모르게 나온, 어쩌다 보니 그냥 튀어나온 말이었는데.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잖아.

 

태어나길 잘했네요,”

 

누각 밑에서 정국과 태형의 분위기를 초조하게 관전하며 지금이 바로 너구리 기술을 사용할 때라고 태형에게 마음속으로 간절히 텔레파시를 보내고 있는 상궁은 꿈에도 모르는 채로, 태형은 정국을 마주 응시했다. 그러니까 그때와는 너무 많은 것이 달라져 버렸다. 알게 된 것이 너무 많았다. 정국이 얼마나 설레게 말하는지, 얼마나 예쁘게 웃는지, 어떻게 키스하는지. 그리고 제가

 

형한테 내가 보고 싶어서 왔다는 소리도 다 듣고.”

 

얼마나 전정국을 좋아하는지.



* 薰女生情 : (薰향초  女여자   生생활  情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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