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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 번외 2

 

너무 많이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흔들리는 게 무서웠으니까.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나면 끝도 없이 깊은 감정이 될까봐.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나는 김태형에게 좋아한다 말하고 싶었다. 김태형을 안을 때마다 좋아한다는 말이, 좋아한다 말해달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것은 자존심일까, 두려움일까. 차라리 자존심이었으면 좋겠는데. 두려움이면, 내가 너무 비참하잖아.

나는 내 감정의 밑바닥을 보는 게 무서웠고 그냥 그 정도의 감정만 유지하고 싶었다. 욕심내고 싶지 않았고, 욕심을 내다 언젠가는 포기해야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류현이는, 그런 나와 다른 듯 비슷한 사람이었다.

 

나 그 사람 좋아해.”

 

류현이는 내가 스무살 초반에 사귀었던 여자 중 하나로, 류현이를 다시 만난 것은 26살의 겨울이었다. 드라마를 같이 하게 됐고, 어렸을 때 깔끔하게 사귀었다 헤어졌던 사이라 오래 만날 수 있었다. 어차피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었으니 다른 사람보다는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관계를 원하는지 확실히 알고 있는 류현이가 편했으니까. 파트너나 연인이라기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관계.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류현이는 갑자기 나에게 그랬다. 자신의 스폰서를 좋아한다고.

 

무슨 소리야?”

알아. 웃기게 들린다는 거. 그런데 그렇게 됐어.”

이 얘길 왜 나한테 하는데?”

도와줘.”

 

류현이의 스폰서는 한 그룹의 후계자였다. 재벌과 연예인의 스폰 관계는 연예계에선 흔한 일이었지만, 스폰서를 좋아하게 된 류현이의 경우가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어쨌든 류현이와 나는 애초에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헤어지자는 말이 필요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런 얘길 왜 나에게 하냐고, 새삼스럽게 헤어지기라도 하자는 거냐 물으니 류현이는 대뜸 그랬다. 도와달라고.

 

그 사람이 아는지는 몰라.”

…….”

말 한 적은없으니까.”

 

이유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혹시라도 알게 되면 버려질까봐겠지. 류현이의 부탁은 함께 칸쿤을 가 달라는 거였다. 그 사람이 그 곳으로 자길 초대했는데, 어쩐지 기분이 이상하다고. 그러니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자신이 후회할 행동을 하지 않도록 말려달라고 했다. 나는 차마 류현이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좋아하면서, 좋아한다 말도 못 하는 류현이의 모습이 어쩐지 나를 보는 것 같아서. 그리고, 류현이의 짐작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이렇게까지 할 필욘 없잖아…….”

 

류현이가 울었다. 나와 알고 지낸 오랜 기간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 스폰서에겐 약혼녀가 있었고 칸쿤은 그 여자와의 약혼식을 위해 간 거였다. 류현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약혼식장에 도착했고, 약혼식 내내 그 자리를 지켜야만 했다. 자신은 그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확인시켜주는, 그 어떤 말보다도 잔인한 이별 통보.

이틀을 내리 울다가 삼일 째 되는 새벽, 내가 자는 사이에 류현이는 그 남자를 찾아갔었다고 했다. 그리고 붙잡았다고 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그냥 그대로도 만족할 수 있었는데. 아무 말도 안 하고, 티내지 않으려고 꾹 참으면서 옆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는데 왜 그랬냐는 류현이의 말에 그 스폰서는 그 감정 자체가, 그러니까 류현이가 자신을 좋아하는 그 감정 자체가 부담스럽다고 했다고 했다. 가볍게 시작한 가벼운 관계는 그렇게 끝내는 게 가장 좋다고. 류현이의 그 말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김태형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가볍게 시작한 관계는 가볍게 끝내는 게 가장 좋다는 그 말이, 꼭 나와 김태형을 두고 하는 말 같아서.

 

그리고 그 날, 칸쿤에서 돌아와 김태형과 밥을 먹으러 갔던 그 날. 류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김태형이랑 있으니까 무시하려 했는데, 이어 도착한 문자는 내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너 김태형 좋아하지.]

[전화 받아.]

[아니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이게 뭐야.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나는 류현이를 포함해 누구에게도 내가 김태형을 좋아한다고 말 한 적 없었다. 그러니까 지레짐작하는 것일 테고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다. 다만…….

 

저 사람은 어때?’

누구?’

저 사람 얼굴. 네 스타일 아냐?’

 

칸쿤에서 류현이가 가리키던 사람들이 모두 묘하게 김태형을 닮아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별 생각 없이 내가 그렇다고 대답했던 것들도. 나는 핸드폰을 꾹 쥐었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혼자만의 일이야 상관없지만, 김태형이 연관되어 있다면 말은 달라진다. 잠깐 전화 좀 받고 온다는 내 말에 김태형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오해할 게 뻔하지만 지금은 일단 류현이가 왜 이러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오해야 그 다음에 풀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상황은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

 

미쳤어?”

 

지금 당장 자기한테 와 달라는 류현이의 협박에 가까운 부탁에 김태형까지 혼자 두고 온 나에게 류현이는 그랬다. 자기랑 사귀자고. 아니, 정확히는 사귀는 척을 하자고. 나는 그 말에 허 웃었다. 김태형을 볼모로 날 불러내서 기껏 한다는 말이 뭐? 사귀는 척을 해 달라고? 하지만 류현이의 얼굴은 진지했고 나는 그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김태형이 언론에 드러나는 게 싫을 테니까.”

?”

너랑 김태형이랑 사귀는 사이라고 기자한테 말할 거야. 네가 김태형 좋아하는 거 알아. 진짜로 사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증거야 얼마든지 많겠지.”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쟤가 지금 뭐라는 거야? 하지만 방금 전에 운 것 같은, 잔뜩 짓무른 눈을 하고서도 류현이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 뭐하자는 건데.”

기자가 나랑 그 사람의 사진을 찍었어.”

그래서.”

내가 그 사람이랑 스폰 관계인 걸 알아.”

…….”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다음부터는 굳이 듣지 않아도 뻔했다. 그 남자는 약혼을 앞두고 있었고, 만약 이 건이 터진다면 그 남자에게, 그리고 그 남자의 회사에 치명적일 거고. 어쩌면 약혼에도. 연예인과 재벌의 스폰 관계야 공공연한 비밀이라지만 공식적으로 터지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니까. 그러니까말하자면 류현이는 그걸 덮을 다른 특종이 필요한 거였다. 거기에 가장 적합한 게 나였던 거고. 류현이가 나를 쳐다본다. 나는 이를 물었다.

 

정국아.”

…….”

미안해…….”

 

류현이의 짓무른 눈가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린다. 나는 그런 류현이를 아무 말 없이 쳐다봤다. 지금 류현이는 자신을 위해 스폰 기사를 막으려는 게 아니었다. 오로지 그 사람을 위해서였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버려지고도 그 사람을 위해 그러고 싶어? 나는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류현이가 나를 쳐다본다. 그 눈에,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나도,

 

나는,”

…….”

그 사람이 중요해…….”

 

저렇게 될까.

 

미안해 정국아…….”

 

류현이가 울고 있었다. 류현이의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오늘로 두 번째였다. 그런데 이유는 그 때와 같다. 그 사람 때문에. 그 사람을 좋아해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저렇게 될까.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 때문에 저렇게 힘들어하게 될까. 김태형이 날 좋아하지 않아도, 김태형이 다른 사람 앞에서 웃고 있어도 그 오랜 시간 동안 난 김태형을 놓지 못했는데.

 

미안해…….”

 

류현이의 우는 모습에 내 모습이 겹쳐 보여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열어 놓은 창문에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김태형은, 지금쯤 집에 들어갔을까. 그 와중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류현이 때문에 달려온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자길 두고 간 나 때문에 화가 났을까.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을까.

 

진짜,”

 

만약 지금 김태형의 기분이 좋지 않다면,

 

짜증난다.”

 

그게 나 때문이었으면 좋겠다.

*

 

김태형에겐 차마 연락하지 못 한 채로 며칠이 흘렀다. 연락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변명할 말이 없었으니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해도 어차피 며칠 후엔 류현이와 내 열애설이 나갈 텐데. 내 방안에 틀어박힌 채로, 나는 멍하니 김태형을 생각했다. 몇 번이고 달려 나가고 싶은 것을 참았다. 전화해서 좋아한다고, 사실은 다 아니라고. 전부 다 고백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랬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아서. 김태형을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김태형에게 그걸 전부 다 말하고 나면 정말로 끝도 없이 깊어지게 될 것 같아서. 혼자 남겨지는 건 결국 내가 될 것 같아서.

내가 원하는 것 중에,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김태형은 영원히 쥘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김태형에게 다가가고 싶어질 때마다 스무살의 그 여름이 나를 괴롭혔으니까. 지독히도 앓았던 그 시간들. 욕심을 너무 일찍 알았고, 포기를 너무 늦게 알았던 어린 날의 나. 그래서 가벼운 척을 했다. 계속 다른 사람을 찾았다. 김태형이 나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 정도만. 나도 딱 그 정도의 감정만 유지하고 싶었으니까. 자존심이고, 이기심이라는 걸 알지만 상대방이 나를 원하는 것보다 내가 그 사람을 더 원한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결국 힘들 건 나잖아.

 

…….”

 

하지만 내가 하고 있는 게 최선이 맞을까. 나는 눈을 감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라리 TV를 보면 좀 머릿속이 조용해질까 싶어 TV를 틀었더니 TV 속에선 내 인터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운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들었어요!”

, 촬영은 다 끝났고, 이제 편집 막바지 단계에 있어요.”

 

TV 화면이 물빛처럼 번져서 뿌옇게 보여 나는 눈을 깜박인다.

 

이번 영화가 정국 씨한테 특별하다고 들었어요.”

, 처음으로 시나리오랑 연출에 참여했거든요.”

 

.”

 

나는 멍하니 웃었다. 그러고 보니까, 이것마저도 김태형의 이야기였다. 나 진짜 답이 없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남주인공이 오랜 짝사랑을 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저건 내 얘기였다. 내 이야기이자, 김태형의 이야기. 이번 영화는 너도 시나리오에 참여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윤기 형의 말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게 그거였으니까.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 좋아해.’

…….’

정신 차려 보니까 이미 좋아하고 있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유치한 짓이었다. 일부러 그런 대사를 넣고, 연기연습을 해달라는 핑계로 김태형에게서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아무 의미도 없는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내가 먼저 좋아했어요.’

 

그런 식으로 비겁하게 굴었다. 유치하고, 비겁하고, 한심하게. 좋아한단 말은 감추고 거짓으로. 그래도 그게 안전하니까.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말했다가 되돌아오지 않을 말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나는 손으로 눈가를 꾹 눌렀다. 눈이 시렸다. 심장이 불안하게 뛴다. 목이 메인다. 이런 내가 한심하고, 짜증나고,

 

…….”

 

싫다.

 

…….”

 

그 때였다. 내 핸드폰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핸드폰을 들어올렸다. 쏟아지는 문자와 메신저, 그리고 전화들. . 나는 멍하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결국 류현이와 내 열애설이 보도된 것 같았다. 소속사에도 말하지 않았으니 내 소속사도 지금쯤 뒤집어졌을 게 뻔하고. 나는 하 웃었다. 지금 이렇게 수없이 들어차는 소리와 문자들 속에 김태형의 것은 하나도 없어서. 당연한 건가. 나는 핸드폰을 꺼 버렸다. 머릿속은 이미 충분히 시끄러우니까. 창밖의 붉은 신호등이 깜빡, 깜빡 점멸하는 것이 빗방울에 번져 보였다. 아무런 소음도, 빛도 없는 공간에 빗방울이 창밖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또다시 찾아온,

 

…….”

 

김태형이 없는 여름 장마의 시작이었다.

 

*

 

윤기 형, 나 잠깐 형 핸드폰 좀…….”

 

열애설이 터진 다음 날, 나는 새벽부터 찾아온 매니저 형에게 핸드폰을 빼앗겼다. 사장님의 명령이라고 했다. 내 나이가 몇 살인데 핸드폰을 빼앗느냐고 항변해 봐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잠잠해질 때까지 당분간 연락은 모두 매니저 형을 통해서 하고 자숙하라는 거였다.

꼬박 이주일을 소속사에서 굴리는 대로 살았다. 어차피 중요한 일들은 전부 매니저 형을 통해서 연락이 왔고, 그 외엔 의미 없는 관계들뿐이어서 딱히 불편할 것도 없었다. 한 명만 빼놓곤. 어차피 할 수 있는 말도 없으니까 차라리 잘 된 건가. 그렇게 위안해 봐도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한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러다가 그 날, 문득 민윤기가 생각났다. 민윤기를 통해서라면 매니저 형의 눈을 피해 연락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매니저 형을 닦달했다. 나 윤기 형이랑 작업 관련해서 얘기할 거 있어. 윤기 형 작업실로 데려다 줘. 가서 뭐라고 하면서 김태형과 연락할 건지, 김태형한테는 뭐라고 할 건지. 그런 것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그냥 김태형이 보고 싶었다. 머릿속에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뭐야?”

 

무작정 민윤기의 작업실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민윤기가 아닌 김태형이었다. 순간 헛것을 보는 건가 했다. 그러나 곧바로 그의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고 나는 이를 물었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다가가 김태형과 그 남자를 떨어트렸다. 오랜만에 닿는 김태형의 온기에 손끝이 따끔거렸다. 심장 박동이 핏줄을 타고 김태형한테까지 전해질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김태형의 팔을 꼭 쥐었다. 지금 당장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싫어하잖아요. 김태형 씨랑 무슨 사이신진 몰라도, 싫어하는데 계속 잡고 있는 건 무례한 거,”

무례한 건 그 쪽 아닌가? 무슨 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그렇게 끌고 가고.”

…….”

그리고, 그 쪽이야말로 태형이랑 무슨 사인진 몰라도,”

…….”

태형이는 나랑 더 친하거든요.”

 

그리고 그 남자는 김태형을 제 쪽으로 다시 끌어당긴다. 김태형은 쉽게 나에게 끌려온 것처럼, 나에게서 떨어진다. 너무 쉽게. 나는 손을 꼭 말아 쥐었다. 모래를 쥐었다 놓은 것처럼 손 안에서 잡히지 않는 온기가 허전하게 따끔거렸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표정 관리가 안 됐다.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다. 눈앞엔 그토록 바랐던 김태형이 있고, 심장박동이 뇌를 울리고, 나에게 잡혀 있던 듯했던 김태형은 내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가 버렸고. ,

 

그러니까 자기소개부터 할까요? 저는…….”

!”

…….”

, 아니, 석진이 형.”

 

그 때처럼.

 

그만 가자. 배고프다며.”

진이라고 부르는 거 오랜만이네!”

 

그 사람은 김태형을 향해 환하게 웃고, 김태형의 손은 그 사람의 팔을 잡아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김태형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나와 김태형 사이에는 간극이 있고 그 사람과 김태형 사이에는 내가 모르는 시간들이 잔뜩 쌓여 있다. 해야 하는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많은데. 전부 김태형과 관련된 것들로만 나는 가득 차 있는데 김태형은 그런 나에게 눈 한 번 제대로 맞춰 주지 않는다. 속에서 울컥, 뜨거운 실뭉치가 따갑게 날 건드린다. 한 번만,

 

윤기 형, 저 이만 갈게요.”

 

날 봐 주면 안 돼?

 

전정국 너도

 

나는 계속…….

 

잘 지내고.”

 

당신만 생각했는데.

 

…….”

 

결국 김태형이 그 남자의 팔을 잡아끌고 등을 돌리고, 나는 입술을 깨문다. 이대로 보내는 게 맞는데. 그게 내가 원했던 건데. 그냥 이대로 김태형을 보내고, 나는 김태형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고. 김태형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로, 아무 말도 할 필요 없고,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궁금해 하지 않고, 그냥 이렇게…….

 

잘 됐네.”

…….”

나도 윤기 형이랑 밥 먹을 참이었거든요. 이왕 이렇게 된 거,”

 

할 수 있을 리가.

 

같이 먹죠.”

 

김태형이 나를 쳐다본다. 그럼 김태형을 마주보면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

 

아깐 실례했습니다. 태형이 형이 싫어하는 것 같아서 그랬던 건데.”

그럴 수도 있죠. 다른 사람들도 종종 오해하더라구요.”

많이 친하신가 봐요, 태형이 형이랑.”

특별한 사이긴 하죠. 안 지 오래되기도 했고.”

제가 괜히 두 분 식사하시는 데 끼어든 건가요?”

괜찮아요. 태형이랑은 뭐, 맨날 같이 먹는데요. 오랜만에 여럿이서 먹으니까 좋네요.”

 

김석진이라는 사람은 사사건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었다. 김태형과 어떤 사이인지 제대로 말해주지는 않으면서, 한 순간도 틈을 내어주지 않는다. 그를 떠 보기 위해 한 질문들은 전부 빗겨나가고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들만 돌아온다. 그러다가 그가 한 말에, 나는 순간 숨을 멈추었다.

 

그래서 제가 지금 태형이한테 잘 보여야 돼요. 태형이 뉴욕으로 데려가려면.”

 

뉴욕? 나는 김태형을 쳐다봤다. 하지만 김태형의 시선은 날 향해 있지 않다. 김태형은 나를 마주친 그 순간부터 계속 불안해 보였다. 왜 불안해하는 건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서, 그게 내 기분을 계속해서 바닥으로 치닫게 만들고 있었고. 아마도 내가 김석진의 앞에서 나와 자신의 관계를 말해버릴까 봐. 나는 이를 물었다. 뉴욕으로 데려간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도망가려고, ? 그 때처럼?

 

태형이 형을 뉴욕으로 왜…….”

, 그건 H 감독 영화

, 영화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그러나 김석진이 제대로 된 말을 하기도 전에, 김태형은 말을 가로챈다. 아직 뉴욕에 대한 제대로 된 답을 듣지도 못했는데 영화라는 단어가 다시 내 심기를 건드린다. 태형이가 H 감독을 제일 좋아하잖아요. 근데 최근 개봉작을 아직 못 봤다고 해서. 그거 보러 가려고 했거든요. 꾹 물고 있었던 입술이 송곳니에 눌려 짓이겨진다. 혀끝으로 씁쓸한 피 맛이 느껴졌다. H감독의 영화. 내가 김태형에게 보러 가자고 했었던 거. 왜 하필……. 우연이라면 이런 거지같은 우연이 있을 수도 있을까.

 

, 다 먹었지? 이제 슬슬 일어나자. 진짜로 영화 시간 늦겠다.”

그거 그냥 취소하면 안 돼? 이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좀 실례잖아.”

 

더 거지 같은 사실은, 김태형이 자꾸만 이 자리를 피하려고 하고 있다는 거였다. 김태형은 지금 누가 봐도 불안해 보였고, 그에 반해 오히려 김석진은 여유롭다. 그 사실이 못 견디게 힘들었다. 자꾸만 초조하게 만들었다. 김태형이 나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숨기고 싶어 한다는 게. 내가 김태형에게 불안함이 된다는 게. 김태형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나라는 게.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결국 김태형은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는 그런 김태형을 눈으로 좇지만 김태형은 끝끝내 나에게 시선 한 가닥 주지 않는다. 나는 다시 김석진을 쳐다본다. 김석진은 나를 보며 웃고 있다. 뭐가 저렇게 여유로울까. 김태형은 당신 때문에 저렇게 불안해하는데. 그에게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그 후에도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그렇게 하면, 김태형과 저 사람의 관계는 끝날까. 그렇게 되면, 혹시, 나에게도 다시 기회가 올까. 김태형이 나를떠나지 않을까.

 

정국 씨?”

…….”

 

그러나 나는 이미 안다. 그런 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거라는 걸. 어차피 김태형은 나를 보지 않을 거고,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고, 나는 김태형을 잡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이렇게 아무것도 묻지 말아야 하는데.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 하는데. 김태형이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면, 내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간다면 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건데. 그러나 아까 김태형을 작업실에서 마주친 이후로 내 몸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나한테 할 말 없어요?”

 

화장실을 가는 길목에 얼마나 기대어 서 있었을까, 김태형이 보였다. 그리고 김태형이 보이자마자, 나는 김태형을 붙잡고 물었다. 나한테 할 말 없냐고, 나한테 해주고 싶은 말 없냐고. 나는 많았는데. 궁금한 게 너무 많았는데.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내 열애설에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기분이 나빴는지,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았는지. 나를 원망하지는 않았는지, 내가 궁금하지는 않았는지.

 

없어.”

하고 싶은 말도 없어요?”

 

그 사람은 누군지, 왜 내가 아니라 그 사람인지. 나는,

 

전정국.”

…….”

없어. 너한테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그거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안 되는지.

 

…….”

 

그러나 나를 바라보지 않는 김태형의 표정은 충분히 그 대답이 되어 준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짜증스런 표정. 피곤한 것 같은 태도.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곤,

 

그 날 레스토랑에 형 혼자 두고 간 거 미안해요.”

 

정도. 그리고 나는 입을 다문다. 김태형이 나를 쳐다본다. 지친 듯 한 눈. 피곤한 표정. 이 자리가 불편하다는 걸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김태형을 놓을 수가 없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할 말은 그게 다고?”

…….”

 

말을 해버릴까. 좋아한다고. 그 기사들은 전부 거짓이고, 어쩔 수가 없었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내 자존심이었다고. 무서웠다고.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인정하기 싫었다고. 언젠가는 나 혼자 그 감정의 무게를 다 감당해야 할 것 같아서 무서웠다고. 욕심내지 않으면, 그래서 갖지 않으면 잃을 필요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태형이 형.”

전정국.”

 

당신을 좋아한다고.

 

너 나 좀 그만 괴롭혀.”

 

그러나 내 말들이 소리가 되기 전에, 김태형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닿는다. 나는 김태형을 쳐다본다. 김태형의 눈은 날 향해 있지 않고, 내 심장은 내려앉는다.

 

나한테 사과는 왜 해? 왜 자꾸 찾아와? 왜 자꾸 앞에서 거슬리게 알짱거려. 지금도, 왜 불러내는데. 밥은 왜 같이 먹자고 하는데. 너 그러는 거 진짜 짜증나.”

…….”

그냥 평생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머리가 멍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김태형이 나에게 하는 말들이 전부 다 현실일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 상관없으니까 나 좀 내버려 둬.”

…….”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하자.”

 

김태형의 차가운 말이 날카롭게 나를 찌르고, 혀를 굳힌다. 뭘 그만 해.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내가 뭘 했는데. 나는나는 아직 아무것도 말한 적 없는데. 내가 김태형에게 원하는 것들을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 없는데. 무서워서, 자존심이 상해서, 김태형이 도망갈까 봐, 이루어지지 않을까 봐온갖 이유를 다 갖다 붙이면서 입 밖으로 꺼낸 적 없었는데. 그런데 김태형은 또 도망가려고 한다. 그냥 이대로 옆에 있어주길 바라는 게, 그게 그렇게 큰 바람이야? 나는 이를 악문다. 눈앞의 김태형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 사람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나는 그랬다. 내가 김태형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 대신, 준비하지 않았던 말을 했다. 꽉 아문 턱에 힘이 들어간다. 김태형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닿고, 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지만 김태형은 나에게서 돌아선다. .

 

맨날 가볍게 굴었잖아요. 형 가벼운 사람이잖아요. 왜 그 사람한테는 안 그래요?”

전정국.”

, 애인은 뉴욕에 따로 있으니까, 애인 몰래 그냥 즐긴 건가?”

 

그래서 나는 또 날카로운 말을 하고, 김태형은 나를 돌아보고. 이게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몸은 말을 멈추지 않고.

 

난 그것도 모르고. 민윤기 좋아하냐고나 묻고 있었네.”

.”

애인이 곧 뉴욕에서 돌아올 거라서,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이제야 이해가 되네.”

 

말의 온도가 차갑다. 머리가 멈춘 채로 나는 차가운 말을 내뱉는다. 이 말들이 김태형에게 상처가 될까?

 

애인은 알아요? 형이 나랑 잔 거?”

…….”

형이 이렇게 아무하고나 자고 다니는 거. 나랑 섹스 파트너 관계였던 거 다 아

태형아!”

 

내가 하는 한심한 말들을 김태형이 가만히 전부 듣고만 있던 그 때,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내 귓가를 울리고 김태형의 시선이 내 뒤로 향한다. 그리고 나는 손을 말아 쥔다. 차라리 다행일까. 나도 내가 하고 있는 말들을 멈출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왜 하필 저 사람일까. 왜 하필 지금, 여기일까. 김석진이 나를 지나쳐 김태형에게 다가간다. 나는 멍하니 김태형을 감싸는 김석진을 쳐다본다. 그제서야 김태형의 새하얗게 질렸던 표정이 조금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진짜 영화에 늦을 것 같아서. 이만 태형이를 데려가도 될까요?”

…….”

할 말 끝났어. 가자.”

 

김석진이 나를 향해 웃으며 말하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리고, 잠시 후에 김태형이 대답한다. 나는 눈을 깜박인다. 김석진이 김태형을 붙든 채로 내 옆을 지나가고, 김태형이 멀어져 가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렇게,

 

…….”

 

김태형과의 마지막이 끝났다.

 

*

 

무슨 정신으로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윤기 형을 만났던가? 매니저 형이 집에 데려다 줬던가? 아니면 그냥 혼자 돌아왔을까.

꼬박 이주일을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매니저 형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핸드폰은 나에게 돌아온 지 오래였지만 방 안 어딘가에 처박아 둔 채로 아무 연락도 받지 않았다. 머리가 아팠다. 하도 말을 하지 않으니 목도 잠겼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몰랐다. 낮과 밤이 섞이고, 소음과 노랫소리가 섞이고, 온갖 감정들이 전부 뒤섞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먹고 TV를 보다가,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다가, 결국은 김태형을 생각했다.

 

…….”

 

차라리 잘 된 거라고 생각하려 했다. 여태까지 버텨왔으니까. 깊어지지 않으려고, 무거워지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벽을 치고 거리를 두고 도망다녔으니까. 그 결과로 김태형은 내 눈앞에서 사라졌고, 내가 찾지 않으면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김태형은 연예인도 아니고 꼭 마주쳐야 하는 사람도 아니니까 내가 찾지 않으면, 내가 먼저 찾아가지 않으면 영원히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내가 아닌 누군가와 평범하게 살겠지. 그럼 내 감정도 언젠가는 잦아들 거고 나는 그렇게 김태형을 잊을 거고, 감정도 기억도 흐려질 거고, 그러니까…….

 

씨발.”

 

나는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확 몸을 일으킨 탓에 머리가 시큰했다. 나도 모르게 꽉 깨물고 있었던 입술에서 짭짤한 맛이 났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나는 시큰거리는 눈에 손을 올렸다. 김태형을 잊을 수 있을 거라고? 감정이 잦아들 거라고? 기억이 흐려질 거라고?

 

…….”

 

김태형을 좋아하는 것은 내 습관이 된 지 오래였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만 김태형을 떠올린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냥 그 감정이 선명해지는 것일 뿐 사라졌던 게 아니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이제는 김태형을 제외하고는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감정이 습관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을 의미했다. 매 여름 나는 김태형을 생각했었다. 그 날의 온도, 그 날의 감정, 그 날의 기억, 그 날의 김태형. 김태형을 만난 이후로 김태형을 생각하지 않고 보낸 여름은 없었다. 애초에 불가능했는데. 왜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왜 버텼을까. 왜 자존심을 끝까지 가지고 있었을까. 심장이 시큰거렸다. 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을까. 그냥 솔직하게 말할걸. 자존심이든, 두려움이든 뭐든 그냥 좋아한다고 할 걸. 그 수많은 시간동안 어쩌면 한 순간은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솔직하게…….

 

…….”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침대에서 벗어났다.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김태형이 김석진을 좋아하든 말든, 이미 내가 늦었든 아니든. 어차피 후회할 거라면 말해야 했다. 나는 방구석에 처박혀 있던 휴대폰을 들어 민윤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어지는 연결음 소리가 꼭, 뚝뚝 끊어져 내리는 장맛비같이 느껴졌다.

 

-여보세요?

윤기 형.”

-갑자기 뭐야, 이 새벽에.

지금,”

 

내가 김태형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멀리 떨어져 있는다고, 잊으려 한다고, 부정하고 무시한다고 흐려지고 잊혀질 감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김태형이 김석진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래서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다고. 나는 김태형을 좋아한다고. 나는 김태형이 갖고 싶고, 욕심나고, 김태형이 내 옆에만 있어 줬으면 좋겠고, 김태형이,

 

김태형 어디 있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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