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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달콤한 포도일수록 오래 삭혔을 때 도수가 높은 와인이 된다고 한다.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태형은 그게 역설적이라고 생각했다. 달콤할수록 나중에는 더 독한 술이 된다는 게. 사람을 더 쉽게 취하게 만든다는 게.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거 같아서 그랬어요. 윤기 형 아니었으면 오늘도 나한테 아는 척 안 했을 거 같아서.’

난 이렇게 끝내긴 싫다고요. 어제 너무 좋았거든.’

연락할게요, 받아요.’

위로해달라고 한 적 없는데? 그럼 오늘 내가 다 사면 데이트라고 해 줄 건가?’

나랑 연애할래요?’

이런 관계는 그만 두자면서요. 그러니까 연애해요, 나랑.’

 

정국과의 기억은 달콤하지만은 않았다. 달콤한 것 같다가도 항상 그 끝은 썼고 태형은 언제나 방 안에 앉아 그 쓴 기억을 혼자 곱씹어야만 했으니까. 태형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언제부터 그랬더라. 정국과의 처음은 어땠더라. 언제까지 달콤했고 언제부터 아팠더라. 언제부터 나는 전정국과의 기억을 힘들게 느꼈더라.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인지 머리가 몽롱했다. 밤바람에 눈가가 시렸고, 심장이 뛰었고, 귓가가 울렸다.

 

아무것도 안 바랄게요. 다른 사람이랑 연애해도 좋고, 나랑은 잠만 자도 좋고. 나한테는 눈길도 안 줘도 좋아요. 그러니까,”

…….”

나한테서 도망가려고 하지만 마요.”

 

그렇다면 이 기억은 어떨까. 이건 어떻게 기억될까. 그다지 달콤하지만은 않았던 기억들도 뒤늦게 꺼내보았을 때 지독하리만큼 썼었는데. 너무 독해서 다시 꺼내어 넘길 때마다 목이 따끔거렸는데,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로 아프게 만들었었는데.

 

내가,”

…….”

졌어요.”

 

지금 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지? 어떤 기분이지? 태형은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의 눈이 올곧게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다른 어떤 곳도 아닌, 제 자신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온 세상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주위는 온통 제 심장 박동이 웅웅거리는 소리로만 가득했다. 이 세상에 오롯이 정국과 자신, 둘만 남겨진 것처럼.

 

나는,”

…….”

형이 욕심나요.”

 

태형은 심장에 가만히 제 손을 올렸다. 이건 꿈일 수가 없다. 태형은 멍하니 생각했다. 이런 건 상상해본 적도 없었으니까. 이런 정도까지는 바란 적도 없었으니까. 이건 꿈일 수가 없고, 꿈이 아니어야 하고, 그리고…….

 

나는, 형이 너무 간절하고,”

…….”

갖고 싶어요.”

 

정국의 목소리가 느리게 이어진다. 태형은 손끝을 타고 심장 박동과 함께 전해지는 제 감정을 가늠한다.

 

인정하기 싫었어요. 나는누군가를 욕심내기 싫었어요.”

…….”

내가 영원히 가질 수 없다는 걸 아니까. 내가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사람은 변하고, 언젠가는 나를 떠날 거니까. 그러니까 그걸인정하기 싫어서, 나는 항상 여유롭고 싶고, 휘둘리기 싫고, 완전하고 싶고. 그런데,”

…….”

형이 없으니까…….”

 

정국이 고개를 숙인다. 태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국을 쳐다봤다. 손끝이 뜨거웠다. 심장이 저릿저릿하고, 시큰거리고내가 지금 듣고 있는 게 정국이 하는 말이 맞을까.

 

…….”

…….”

욕심내면 안 돼요?”

 

어느새 차가워진 여름밤의 바람이 선선하게 태형을 훑고 지나갔다. 정국의 향기, 정국의 목소리. 현실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비현실적인 이 상황, 정국이 뱉는 말들, 정국의 감정. 모든 게 몽롱하게 흐릿했다.

 

좋아한다고 말 해 봐요.’

?’

한 번만.’

.’

그냥,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서.’

…….’

빨리요.’

싫어.’

…….’

그런 말을 왜 해,’

…….’

쓸데없이.’

 

태형은 언젠가 나눴던 정국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언젠가 정국은 문득 그랬었다. 좋아한다고 말해 보라고. 정국이 하는 말들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언제나 태형에게 가장 어려운 일들 중 하나였다. 정국이 하는 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 왜 좋아한다고 말해보라는 걸까. 왜 사귀자고 하는 걸까. 왜 나한테 파트너를 하자고 했을까. 정국에게는 항상 선이 있었으니까. 그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걸 태형은 잘 알았으니까. 그렇게 많은 시간들 동안 정국은 태형을 헷갈리게 하면서도 한 번도 태형에게 좋아한다 말한 적 없었으니까. 연애하자고 할 때도, 파트너를 하자고 했을 때도, 헤어지자 했을 때도, 마지막으로 끝냈을 때도. 정국은 한 번도 진심을 보여준 적 없었다. 그러나 지금,

 

좋아해요.”

 

그 어느 때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제가 들었던 그 어느 고백들보다도 정국이 내뱉는 말들이 진심처럼 느껴지는 지금,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오래 전부터,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나는 형을 좋아했어요.”

 

그러니까 전정국이 정말로,

 

한 번만,”

…….”

딱 한 번만 잡혀 줘요.”

…….”

그럼 죽을 때까지 놓지 않을게요. 내가 잡고 있을게요. 죽어도 안 놓칠 테니까…….”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지금,

 

나한테서 도망가지 마요.”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

 

태형은 멍하니 침대에 몸을 누인 채 푸르스름한 빛으로 가득 찬 천장을 쳐다봤다. 고작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인데 아직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대로 굳어버린 듯 태형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때마침 나타난 우진이 정국과 인사를 나눈 후 자연스럽게 저를 데려오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지 모른다. 연회장으로 돌아온 후에도 계속 멍해 있는 저를 집까지 데려다 준 것 역시 우진이었다. 태형은 멍하니 몇 분 전 도착한 우진의 문자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괜찮아요? 그 사람 만난 이후로 계속 멍해 있는 것 같아서혹시 도움 필요하거나 좀 괜찮아지면 말해줘요.]

 

아이러니하게도, 우진의 문자만이 아까 있었던 그 일이 제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라는 유일한 증거가 되어 준다. 눈으로 한 번 더 천천히 문자를 확인한 태형은 이내 핸드폰을 끄고 다시 텅 빈 벽을 쳐다봤다. 아직까지도 심장 박동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 이틀 뒤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요.’

…….’

지금도 간신히 빠져나온 거라서, 그렇다고 그 뒤에 포기하겠다는 뜻은 아니고, 그러니까

…….’

나 한국에 있어서, 형한테 못 올 동안, 천천히 생각해 봐 달란 거예요.’

…….’

부탁할게요.’

 

정국의 목소리가 아직까지 따뜻하게 귀에 남아 웅웅거린다. 공명이 많은, 듣기 좋은 다정한 목소리. 정국은 포기하지 않겠다고, 놓지 않겠다고 했지만 정작 정국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태형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과 같았다. 만약 태형이 정말로, 진심으로 정국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면 정국이 한국에 있는 사이에 숨어버릴 수 있도록. 그걸 정국이 모를 리는 없었을 것이고 그러니까 그 말은 정국이 모든 선택을 태형에게로 넘겨준 것을 의미했다. 다른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모든 진심을 고백하고, 제 모든 것을 태형에게 넘긴 채 오롯이 태형만이 둘의 관계를 정의내릴 수 있도록. 졌다는 말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

 

…….”

 

태형은 몸을 뒤척였다. 가벼운 이불이 부드럽게 몸에 감겼다. 시간이 지나고, 심장박동이 조금 잦아들고, 술기운도 조금 가라앉고 나니 머릿속이 조금씩 맑아졌다. 그래서 태형은 정국을 떠올렸다. 천천히 생각해 봐 달라던 정국의 부탁은 사실 의미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국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태형은 정국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아니, 이미 예전부터 그러지 않으려고 애썼음에도 그러고 있었으니까.

 

좋아해요.’

 

아직까지도 그 음성이 선명하게 남아 울린다.

 

나는 형이 욕심나고, 갖고 싶어요.’

 

그 말들이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순간 정국의 목소리는 진심을 담고 있었고 정국의 모든 것이 진실을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태형은 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일까.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인데. 차마 꿈에서조차 들을 수 없었을 정도로 간절히 바랐던 것들인데. 그 순간 정국은 가볍지도 않았고, 술에 취해 있지도, 장난스럽지도 않았는데.

 

…….”

 

언제부터 전정국은 나를 좋아했을까. 태형은 멍하니 생각했다. 정국은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전부터, 더 많이 자신을 좋아해 왔다고 했다. 그 오래 전이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제가 정국을 좋아했던 시간들 안이겠지. 태형은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서로 좋아하면서도 서로에게 상처를 줬던 시간들. 여러 이유들을 붙여 가며 마음을 숨기고 감추고 속였던. 그리고 태형은 이불을 꼭 말아 쥐었다. 과거를 천천히 정리하고 나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거 아닐까.

 

애인은 알아요? 형이 나랑 잔 거?’

너 나 좀 그만 괴롭혀.’

미안해요.’

그런 말을 왜 해, 쓸데없이.’

형 가벼운 사람이잖아요.’

너 그러는 거 진짜 짜증나.’

애인은 형이 이렇게 아무하고나 자고 다니는 거 알아요?’

그냥 평생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정국이 제게 했던 뾰족한 말들과, 제가 정국에게 했던 날선 말들이 한꺼번에 뒤엉켰다. 그 속에 진심이 없었다 할지라도,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했더라도 결국 그 말들은 진심 대신 서로에게 전해졌고 서로를 상처입혔었다. 그 기억들을 지울 수 있을까? 심장이 시큰거렸다. 태형은 이불을 조금 더 꼭 말아 쥐었다. 전정국을 좋아하느냐 묻는다면 그건 다시 대답할 필요도 없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정국과 자신은 오랜 기간 서로 좋아하면서도 서로에게 상처를 줬었으니까. 그건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는 소리고 그럼 정국과 자신은 인연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닐까? 이제 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정국을 마주하고 웃을 수 있을까? 아무 생각 없이 정국의 손을 잡을 수 있을까? 과거의 기억이 자신을 갉아먹지는 않을까?

 

…….”

 

자신이 없다. 겁이 났다. 어쩌면 너무 갑자기 찾아온, 오랫동안 바랐던 일이라 그게 당황스러운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태형이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은 행복보다는 무서움에 가까웠다. 정국과의 오래된 기억은 그다지 달콤하지만은 않았음에도 태형을 아프게 할 만큼 독했으니까. 만약 이대로 정국과 연애를 하게 된다면, 나중에 혼자 남겨졌을 때 그 기억들이 얼마나 자신을 아프게 할까. 얼마나 커다란 후유증이 자신을 잡아먹을까. 태형은 눈을 감았다. 어느새 차가워진 바람이 태형의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갔다.

 

*

 

전정국 온 거 같더라.”

 

밤새 뒤척이느라 제대로 자지 못해 부스스한 얼굴을 하고 커피를 내리고 있는데, 아침부터 들이닥친 석진이 그랬다. 태형은 달칵 소리를 내며 끊긴 커피머신에서 컵을 집어들려다 멈칫했고 그런 태형을 보며 석진은 말을 이었다.

 

시사회 때문에 한창 바빠 죽겠는데 지 멋대로 탈주한 거라고, 혹시라도 이틀 뒤에 안 돌아오겠다고 하면 경찰을 불러서라도 돌려보내달라고,”

…….”

민 감독이.”

알아. 어제 연회장에서 봤어.”

파티에서?”

 

태형의 말에 석진이 놀란 눈을 했고 태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뜨거운 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잠시 입을 살짝 벌리고 고개를 갸웃한 석진이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아닌데.”

…….”

공식적으로 초대받은 건 W그룹 정도인가? 근데 뭐, 어떻게든 올 수야 있었겠지. 민 감독 아는 사람이 여기에도 꽤 되니까.”

 

그러고는 잠시 침묵. 그 침묵에 태형은 컵을 내려놓았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그거 말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닐 거 아냐. , 앞으로 어쩔 거냐고? 태형이 조용히 말하자, 석진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솔직히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긴 한데, 그것보다,”

…….”

너 괜찮냐고.”

 

석진의 말에 태형이 순간 멈칫했고 그런 태형을 눈치 챈 석진이 고개를 돌렸다. 너 말하기 불편하면 말 안 해도 돼. 그냥 걱정돼서 왔어. 석진의 목소리가 조용히 이어진다. 태형은 컵 끝을 만작였다. 어젯밤에 잠 한 숨 제대로 자지 못하면서 생각한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수많은 생각들 기저에 공통적으로 깔려 있던 것은 두려움이었다. 그러니까 괜찮냐고 물으면,

 

아니.”

 

괜찮지 않았다.

 

태형아.”

너무 오래 끌었어. 시작부터 잘못됐는데, 그 이후로도 계속 꼬여있기만 했잖아.”

 

아무도 용기를 내서 꼬인 매듭을 풀려 하지 않았다. 서로 피하기만 했고, 오랜 시간 방치되었던 그 꼬인 매듭은 아마 지금쯤 녹이 슬어 손을 댈 수조차 없게 되었을 것이다. 태형은 자신이 없었다. 그 꼬인 매듭을 무시할 자신이.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없으리라는 자신이. 정국과 사귀게 되면, 계속해서 불안해하게 되지 않을까? 여태까지 정국과의 관계가 그랬으니까. 항상 놓고 싶었지만 놓지 못했고, 끊고 싶었지만 끊지 못했고. 겨우 마음 정리가 다 되어 간다고 생각할 즈음, 정국은 다시 나타나 태형이 애써 묻어놓고 흐려지게 했던 것들을 한순간에 뒤집어놓았다. 너무 쉽게.

 

…….”

 

정국을 좋아하면서, 너무 많은 감정들이 닳았다. 너무 많은 것들을 생각해야 했다. 그 소모들이 버겁고, 그 후에 감당해야 할 것들이 무서웠다.

 

내일 모레 오후 155분 비행기래.”

?”

아니 그냥 뭐, 궁금할 수도 있잖아. 한국 직항 시간표가 어떻게 되나~ 난 가끔 궁금하더라고.”

 

향수병 때문인가? 한국에 발붙이고 산 기간보다 안 그런 기간이 더 긴데 이게 참 피라는 게 무서워, 그치? 갑자기 난데없이 비행기 시간을 내뱉더니, 석진이 능청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태형이 눈을 깜박였다. 석진이 그런 태형을 보며 씩 웃었다.

 

가끔은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게 도움이 안 될 때도 있더라고. , 그런 말도 있잖아. 철이 없으면 사는 게 즐겁다고.”

…….”

그래서 내가 인생을 즐겁게 살잖아. 뭐 내가 생각 쫌 안 한다고 세상이 두 쪽 나는 것도 아니고.”

 

뜬금없는 석진의 생각 타령에 태형이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그런 태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석진은 말을 이었다.

 

결국은 네 마음대로 하는 거지.”

…….”

배고프다. 나 햄버거 포장해 왔는데. 모닝 햄버거 콜?”

 

종이 봉지를 가볍게 흔들며, 석진이 웃었다.

 

*

 

이틀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정국은 바쁘게 움직였다. 본 목적이야 태형을 찾으러 온 것이었지만 어쨌든 영화 홍보 차 왔다는 핑계가 있었으니까. 이틀간 많은 파티에 참여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나 그 날 이후 단 한 번도 태형의 모습은 볼 수는 없었다. 류현이에게 듣기로는 태형이 이런 종류의 파티에 곧잘 참석한다고 했었는데.

그 날, 그러니까 윤기에게 전화를 걸어 태형을 찾은 날, 자다 깬 목소리로 윤기는 태형이 지금 H 감독의 영화에 참여하기 위해 석진을 따라 미국에 갔다는 것만 알 뿐 다른 것은 모른다고 했다. 윤기를 닦달해 석진의 연락처까지 알아낸 후 자존심까지 굽혀 가며 전화를 걸었지만 석진에게선 알아서 하라는 대답만이 돌아왔었고. 그나마 H 감독의 영화라는 힌트만을 잡고 제 인맥을 쥐 잡듯이 잡았지만 아무런 단서는 나오지 않았었는데, 의외의 곳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거다.

 

‘H 감독 찾는 거면 내가 도와줄 수 있어.’

 

열애설 보도가 난 후 아예 연락을 끊고 있었던 류현이로부터 온 문자였다. 그 대상이 류현이라는 것이 꺼림칙했지만 H 감독, 아니 태형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류현이는 제 스폰서의 그룹이 예전에 H 감독의 영화에 투자한 적이 있다고, 그 정도의 부탁은 대신 해줄 수 있다고 했다. 네가 왜 날 위해 그렇게까지 하냐는 질문에 류현이는 간단하게 답했다.

 

원해서 한 건 아니었더라도 날 도와줬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류현이의 목소리에는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이게 미안함을 표현하는 류현이의 방식이라는 것을 모르진 않았다. 그룹의 스폰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하더라도 스폰서 본인과의 관계는 끊어진 상태에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테니까.

W그룹을 등에 지고 거기에 정국의 네임밸류까지 얹으니 미국에서 열리는 영화 관련 행사에 참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초대장을 건네주며, 류현이는 그랬다. 진심으로 잘 되길 바란다고.

 

…….”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오늘까지, 정국은 태형의 머리카락 한 올 볼 수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거고, 예상했던 건데도 못내 씁쓸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다. 이제 한국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다시 미국으로 올 수 있게 되었을 때, 태형이 저를 피하지 않고 여전히 미국에 머무르고 있기만을 바라야 하는 건가. 정국은 손을 꽉 쥐었다. 꾹 다문 입술이 욱신거렸다. 혹시, 그 때 만났던 게 마지막은 아니었을까.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건 아닐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의 가지가 뻗어나갔다. 만약 그렇다면, 그 때 조금 더 얘기할 걸. 조금 더

 

…….”

 

매달릴걸.

 

…….”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계속해서 후회가 남는다. 너무 오랫동안 말들을 쌓아놓기만 해서일까. 정국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슬슬 검색대 안으로 들어가 봐야 할 시간이었다. 체크인은 이미 예전에 마쳤지만 어쩐지 이대로 미국을 떠나면 이제 더 이상 태형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의미 없이 서성이고 있던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을 피해 오기로 예정되어 있던 파티에도 오지 않았던 태형이 공항에 올 리가. 정국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국 돌아가면 입술 다 부르텄다고 혼나겠네. 정국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 더 전광판을 확인하고, 괜히 다시 한 번 더 입구 쪽을 보고.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뜬 정국이 발걸음을 내딛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전정국.”

 

익숙한 목소리가 정국의 귓가에 닿았고 그 순간 정국은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곳엔,

 

나한테 할 말 없냐 그랬지.”

 

태형이 있었다. 정국은 눈을 깜박였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정국은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알싸한 감각이 전해졌다. 아픈 감각이 이토록 반갑게 느껴질 줄이야. 뛰어 왔는지 살짝 가쁘게 쉬고 있던 숨을 몰아 쉰 태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있어. 있었어. 사실은 그 때도 있었고 지금도,”

…….”

많아.”

 

그 날 그렇게 석진이 돌아간 뒤로, 태형은 혼자 멍하니 앉아 생각했다. 정국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태형 자신을 생각했다. 정국과의 과거를 후회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신을 떠올렸다. 정국을 만난 이후로 태형은 과거만을 생각했었으니까. 정국과의 처음을 그렇게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이 달라졌을까? 그 수많은 시간들 동안 내가 한번이라도 솔직했었다면 이렇게 돌아오지는 않았을까.

 

니가 그랬지, 네 생각 해 달라고.”

…….”

그런데 석진이 형은 나보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라 그러더라.”

…….”

그래서,”

…….”

둘 다 안 했어.”

 

태형이 고개를 들어 정국을 마주했다. 정국은 가만히 멈춰 서서 그런 태형을 쳐다봤다. 태형이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생각한 것들을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 말들이 다 솔직하게 전달될 수 있을까. 오래 묵혀 왔던 말들이 온전하게 정국에게로 닿을 수 있을까. 태형이 숨을 살짝 들이쉬었다.

 

내가 너를 알게 된 이후로는 내 생각보다는 네 생각을 더 많이 했었거든.”

…….”

그래서 이번에는 이틀 동안 내 생각만 엄청 많이 했어.”

 

그런 때가 있다. 일상의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이 갑자기 새롭게 다가오는 때. 이틀을 멍하니 생각만 하다가 문득 창밖을 봤을 때, 태형은 그 순간 여름이 끝났다는 것을 느꼈다. 바람이 선선했고, 창밖은 온통 여름의 향이 아닌 가을의 향으로 가득했다. 감정의 종류와는 상관없이 시간은 흐르고 기억은 쌓인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생각했다. 만약 지금의 달콤했던 기억이 오래되어서 나중에 꺼냈을 때 쓰디 쓴 기억으로 변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래서 결론을 내렸는데,”

 

지금 말해야 한다고.

 

잡혀줄게.”

 

전정국에게,

 

나 놓지 마.”

 

좋아한다고 말해야 한다고.

 

욕심 내도 돼.”

 

그러니까 지금 잡아야 했다. 더 이상 정국이 없는 시간들이 쌓이지 않게. 어차피 쌓이는 기억들이라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콤할 수 있게. 정국을 만난 이후로 이미 제 모든 음악의 출처는 정국이었으며 모든 계절은 정국으로 인해 의미를 가졌으니까. 부정한다고 아니게 될 명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태형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했다. 혹시 나중에 쓴 기억을 혼자 곱씹게 된다 할지라도, 지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욕심내기로. 태형은 말을 마치고 다시 입술을 물었다. 정국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국의 눈이 느리게 깜박여진다. 내 말이 제대로 전해진 거 맞나? 제가 할 말을 다 끝냈음에도 이어지는 침묵에 태형이 한 걸음 정국에게 다가간 순간이었다.

 

…….”

 

정국이 그대로 태형을 붙잡아 안았다. 순식간에 정국에게 안긴 태형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가 이내 얕은 숨을 내쉬고 천천히 정국을 마주 안았다. 그러자 정국이 조금 더 저를 세게 안아 오는 것이 느껴졌다.

 

다행이다.”

 

그리고 태형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로, 정국은 조용히 그렇게 중얼였다. 정국의 향기에 파묻혀 있던 태형이 뭐가, 하고 응수하자 정국이 살짝 몸을 떼어내고는 태형을 보며 씩 웃었다.

 

욕심내도 된다고 해 줘서요.”

……?”

어차피 나, 형 포기 못 했을 텐데. 이제 마음 놓고 집착해도 된단 거잖아요.”

…….”

 

정국의 낮은 목소리에, 태형이 빠르게 눈을 두 번 깜박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 번 더 태형의 얼굴을 꼼꼼히 눈으로 도장 찍은 정국이 다시 태형을 끌어안았고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태형이 정국을 밀어냈다. 태형의 움직임에 한 번 더 태형을 꼭 안았다 힘을 푼 정국이 왜 그러냐는 듯 태형을 쳐다봤고 태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그런 스타일이야?”

뭐가요?”

집착하는 스타일이냐고.”

몰랐어요?”

…….”

나 소유욕 엄청 강해요. 그래서 형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여태까지 숨겼던 건데.”

 

그러고는 씩 웃는다. 그 당당함에 태형이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그 때, 때마침 들려오는 수군거림에 태형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주위의 시선이 모두 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런 시선이 익숙할 정국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태형은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빠르게 뒷걸음질 쳤고 정국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태형은 붉게 변한 제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며 나머지 한 손으로는 정국을 밀어냈다.

 

너 이제 들어가.”

너무 매몰찬 거 아니에요?”

너 비행기 놓치면 윤기 형한테 나 죽어.”

애인이 죽는데 제가 가만히 있겠어요?”

애인…….”

 

정국이 아무렇지도 않게 뱉는 그 단어에, 태형의 얼굴은 더 붉어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이렇게 쉽게 애인이라는 단어로 서로를 묶을 수 있는 사이가 될 수 있었는데, 너무 멀리 돌아왔다는 걸. 여전히 붉은 얼굴을 한 채로, 가려진 손가락 사이로 태형이 빼꼼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은 여전히 자신을 올곧이 쳐다보고 있다. 가라는데 가지도 않고. 결국 얕은 한숨을 내쉰 태형이 손을 내리고 정국을 쳐다봤다. 그래, 남들이 좀 보면 어때. 나중에 윤기 형한테 잔소리 좀 듣지 뭐. 태형의 한숨에 눈이 동그랗게 된 정국이 보여서, 태형이 살짝 웃었다.

 

전정국.”

?”

좋아해.”

 

정국에게는 처음 하는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태형은 더는 생각하지 않고 손을 뻗어 정국의 볼을 잡았다. 갑자기 닿아 오는 태형의 온기에 정국이 눈을 깜박였지만 태형은 그저 씩 웃고,

 

……!”

 

제 입술을 정국의 입술에 붙였다. 이 공항에 있는 누군가는 정국을 알아보겠지만, 이 순간 그런 것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태형의 눈이 감기고, 놀라 동그래졌던 정국의 눈도 이내 사르르 접힌다. 주위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조금 더 커지고, 곧이어 찰칵 하는 소리까지 들려왔지만 정국은 태형을 밀어내는 대신 태형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지금 중요한 건 태형이 처음으로 제게 잡혀 주었다는 것뿐이니까.

영화 홍보 하나는 끝내주게 되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정국이 조금 더 태형을 제 쪽으로 당겨 끌어안았다. 맞닿은 입술 끝으로, 태형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길었던 여름의 끝과 함께 찾아온, 연애의 시작이었다.


 


+안 읽으셔도 무방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는 TMI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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