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 내가 편의점 프로모션 중에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별로 안 궁금한ㄷ,”

“2+1이야. 2+1.”

아니 그러니까 별로 안 궁금,”

하나만 사면 될 걸 괜히 손해 보는 느낌에 두 개 사게 만들잖아!! 그래서 괜히 돈 더 쓰게 만들고!!”

…….”

그런데 지금 내 기분이 그래.”

…….”

“2+1이네?”

 

 

정국과 태형은 방 안에 나란히 앉아 배우 애호아니 유아인의 성대모사를 하고 있는 지민을 멍하니 쳐다봤다. 낮에 경회루의 누각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눠본 결과, 아무래도 소원나무의 영향으로 정국과 태형, 그리고 지민이 조선에 떨어진 것 같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아니 정국과 태형이 내린 현재까지의 결론이었다. 왕의 소원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 나무가 정말 영험한 것 같다던 신하의 말로 미루어 보아, 그리고 정국과 태형, 왕과 왕비의 접점이 그 소원나무인 것으로 보아 소원 나무가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된 것이다.

 

 

그리고 제 소원은 이루어졌거든요. 저는 태형이 형이 나 좋아하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 형은 소원 뭐 빌었어요?”

, , ?”

 

 

태형은 말을 더듬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소원이라. 태형이 정국의 눈을 피해 눈을 굴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소원 나무에 빈 소원은 한 개가 아니었으니까. 첫째는 밀당 같은 거 안 하는 애인 생기게 해 주세요. 둘째는 이왕이면 그 애인이 예쁘고 귀엽고 청순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셋째는

 

 

, 나 너랑 다시 친해지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정국이와의 오해를 풀고 다시 친해지게 해 달라고 빌었었다. 오해를 다 풀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인사만이라도 하는 사이는 되게. 솔직히 첫 번째랑 두 번째 소원은…….

 

 

진짜요?”

, …….”

 

 

왠지 잔뜩 감동한 것 같은 정국의 눈빛을 슬쩍 피하며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양심에 이제 약간 조금 찔리긴 한다. 솔직히 첫 번째 소원이랑 두 번째 소원이 정국을 생각하고 빈 소원은 아니었으니까. 다만 의도치 않게 밀당 안 하는 여자친구가 아닌 애인이라고 빌었을 뿐. 맹세컨대 의도한 건 아니었다. 누가 알았겠는가, 굉장히 오래 됐다던 그 나무가 그렇게 열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을 줄. 그런데 사실 그렇게 따지면 그 소원도 이루어진 건 맞긴 했다. 전정국. 특기는 (김태형에 한해) 밀기는커녕 인간 전자석 수준으로 끌어당기기, 취미는 예쁘고 귀엽고 청순하기. 잘생김은 보너스, 다정함과 롤츠력은 부가서비스. 태형은 소원나무의 칼 같은 정확함과 소원 이행력에 절로 끄덕여지는 고개를 멈출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로또 맞게 해달라는 소원도 빌걸.

 

 

…….”

정국아…….”

저기 두 분 꽃가루 날리는데 바쁘신 와중에 죄송한데요.”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도 있거든요. 정국과 태형이 서로를 쳐다보며 서서히 가까워지던 찰나, 꼴깝 애정행각을 지켜보고 있던 지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끼어들었다. , 제가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제 앞에서는 좀 작작 해주셨으면 해서요.

 

 

아니 그리고 현대로 돌아갈 방법을 찾은 것 같다며. 그럼 그 소원 나무가 너네 소원을 들어주려고 조선시대로 끌고 왔다는 거야?”

그런 거 같아.”

그럼 나는 왜?!”

 

 

지민이 사자후를 내질렀다. 나는 왜?! 너네는 워크샵 가서 소원 빌었다며. 그럼 나는 왜 떨궈진 건데? 할아버지네 집 가서 낮잠 자고 있던 나는 무슨 죈데? 진짜 2+1이야? 진심이야? 요즘엔 소원에도 프로모션이 있어? 지민이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손을 휘젓자 그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정국이 문득 툭 내뱉었다.

 

 

벌 받은 거죠.”

?! 무슨 벌?!”

 

 

지민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무심하게 말하는 정국을 돌아봤다. 무슨 벌? 그리고 정국의 말에 의문을 품은 것은 태형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껏 억울해 보이는 지민의 표정과는 상반되게, 정국은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태형이 형이 저한테 개새끼라 그랬다면서요. 안 그랬다는데?”

?”

…….”

 

 

그리고 정국의 말에 지민의 표정은 의아함에서 어이가 잠시 출타한 얼굴로, 태형의 얼굴은 의아함에서 시선을 한껏 내리깐 얼굴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면, 지금 정국이 하고 있는 말은 아까 낮에 누각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나온 주제였다.

 

 

형 근데 정말 저한테 개새끼라 그랬어요?

? 그게 무슨 말이야?

지민이 형이 그러던데요.

아닌데?! 무슨 소리야!

 

 

그리고 태형은 속으로 조용히 뇌까렸다. 용서해라 친구야. 사랑이 먼저인가 봐.

 

 

그게 무슨아 설마 너 그 날 말하는 거야? . 얘 좀 봐라. 김태형이 너를 얼마나 욕했는데! 이 개새끼, 나쁜 새끼 이러면서…….”

, 내가 언제 또 새끼라 그랬냐그냥 나쁜 놈그랬지…….”

. 김태형. 당신의 양심 혹시 어딘가에 떨어트리진 않으셨습니까? 저기 주인을 잃은 양심이 길가에서 울고 있네요? , 전정국아. 속지 마라. 김태형 이런 놈이다.”

뭐 어때요. 개새끼라 그랬든 씨발 새끼라 그랬든.”

아니 정국아 내가 씨발 새끼라고까진 안 했,”

지금 우리 애기면 됐지. 그죠?”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정국의 웃는 얼굴에서 어딘가 모를 서늘함을 느꼈다.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것은 비단 저뿐만은 아니었던 듯, 아까까지만 해도 한껏 억울함을 표현하며 언성을 높였던 지민도 갑자기 입을 합 다물고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우리 정구기학창시절에 껌 좀 씹었었나? 포스가……. 태형은 저도 모르게 그런 정국의 팔에 살짝 손을 올렸다.

 

 

아니 그래서, , 뭐냐. 현대로 돌아갈 방법을 찾은 거 같다며. 그게 뭔데?”

, 맞아. 그 때 말 하다 말았지. 여기 이거요.”

 

 

잠시간의 시간차 후에 지민은 더듬거리며 말문을 텄고 그에 정국은 품속에 고이 챙겨온 서책을 꺼냈다. 지민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 서책을 쳐다봤다. <日省錄>. 태형은 곧은 서체로 힘 있게 쓰인 글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어쩐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게 우리를 현대로 다시 돌아가게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물론 그 세 글자 중에 태형이 알고 있는 글자는 날 일()자 밖에 없었으므로 뭐라고 써져 있는지 읽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태형이 가만히 속으로 세종대왕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일성록?”

……?”

아니, 일성록이라고 쓰여 있길래.”

 

 

멀뚱히 책을 쳐다보던 지민이 곧이어 아무렇지도 않게 한자를 읽어 냈고 그와 동시에 태형과 정국의 동그래진 눈이 지민을 향했다. 뭐야? 너 이거 읽을 줄 알아? 잠시간의 정적 후에 태형이 눈을 깜박이며 지민을 향해 말했고 지민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뭐……. 나 저번 학기에 한자 수업 들었었잖아.”

아 맞아. A+맞은 유일한 교양?”

 

 

지민은 멋쩍은 듯 볼을 긁었고 태형은 금세 어느 날 갑자기 저와 함께 신청했던 꿀교양을 걷어차고 웬 한자 강독 수업을 덜컥 신청했던 지민을 떠올렸다. 저게 갑자기 허파에 무슨 바람이 들었기에 한자 교양을 신청하나 했었는데. 그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태형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민을 대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지민의 말에 정국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자 교양?”

? …….”

그거 우리 사촌 누나가 저번 학기에 들었던 거 같은데…….”

 

 

그리고 이어지는 정국의 말에, 태형은 정국을 쳐다봤던 눈을 다시 지민에게로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지민의 얼굴은 어느새 새빨개져 있었고 그와 동시에 제 머릿속에서 가볍게 맞춰지는 퍼즐조각에 태형은 입을 벌렸다. 너 아직도 포기 안 했어?!

 

 

아니! 아니 우연의 일치거든!!”

우연의 일치 좋아하시네. 너 그 교양 나랑 같이 듣겠다고 피씨방까지 갔었잖아!”

형 다음 학기에 나랑 교양 같이 들어요.”

그럴까? 가 아니고! 박지민 너 나한텐 포기했다고,”

어차피 전공도 같은데 시간표를 아예 똑같이 맞추는 건 어때요?”

좋아가 아니고!! 아 정국아 잠깐만!!”

 

 

태형은 눈을 크게 뜨고 지민에게 따지는 자신을 방해하는 정국을 손을 들어 제지했으나 태형의 손은 곧 정국의 손에 의해 깍지 끼워져 내려졌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일련의 행동에 태형은 마치 손에 장난감을 쥐어준 아기마냥 온순해져 눈을 깜박였고 정국은 그런 태형에게 웃어 보였다. 다음 학기부터 형이랑 매일 붙어 있을 수 있겠다.

 

 

…….”

 

 

태형은 정국에게 약했다. 그 중에서도 정국의 얼굴에 약했고, 그 중에서도 정국의 웃는 얼굴에 약했다. 고로 지금 저렇게 제 손을 부드럽게 잡아 깍지를 껴 오며 저를 향해 다정하게 웃는 정국은, 한순간에 태형의 머릿속에서 정국 외의 다른 것을 모두 깔끔하게 녹여버리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결국 태형은 잠시 후 정국에게 손을 내맡긴 채로 얌전히 앉아 지민이 일성록을 살펴보는 것을 잠자코 응시했다. 물론 겉으로만 잠잠했을 뿐, 태형의 심장은 튀어나올 것처럼 뛰고 있었다.

 

 

왕비가 왕을 안 좋아했나봐?”

그게 거기 나와 있어요?”

왕이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것 같은데…….”

 

 

지민은 가만히 책을 훑어보더니 이내 한 대목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그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아니 지켜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

라고 쓰여 있어.”

 

 

일기를 쓰랬더니 웬 연애편지를 써 놓으셨더라고. 짧게 덧붙이며 지민이 손가락을 움직여 글자의 마지막 부분을 꾹 눌렀다. 여기서 끊긴 걸로 봐서, 이 이후에 너희가 이곳에 떨어진 것 같은데.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정국과 태형은 그런 지민을 응시했다. 뭐야, 그 눈빛은? 또다시 찾아온 정적에 지민이 미간을 좁혔고 이어 태형이 음, 하고 뜸을 들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금 소설 쓴 거 아니지?”

…….”

, 아니. 너한테 이런 면이 있는 줄은 또 몰랐어가지구.”

 

 

처음으로 쫌 있어 보였어. 태형이 천천히 말을 잇자 정국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중학교 때부터 형이 우리 누나 쫓아다니는 거 봤는데, 지금이 가장 멋있어 보였어요. 그리고 지민은 그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미묘한 뉘앙스에 미간을 좁혔다 이내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미간을 풀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현대로 돌아가는 거니까.

 

 

그런데 잠깐만. 왕비가 왕을 안 좋아했다고? 아닌데? 상궁 말로는 왕이 왕비를 찾지 않는다 했어. 한 희빈에게 빠져서.”

대충 훑어보기만 했지만 희빈 이야기는 여기 없던데? 왕비에 대한 사랑만 절절해 보였어. 아까 말했잖아. 연애편지 읽는 줄 알았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하고 말을 이으려던 태형은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순간 말을 멈췄다.

 

 

달에 한 번 정도 찾으셨습니다.’

달에 한 번?’

.’

한 달에 한 번?’

그러하옵니다.’

 

 

언젠가 상궁과 나누었던 대화. 왕의 총애를 받아 기세등등한 애첩이라면서 정작 왕은 달에 한 번밖에 찾지 않았다니 의아했었던.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태형은 이내 아,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그 때 상궁도 그랬었다. 한 희빈의 아비가 조선 제일의 세도가이니 주상께서 내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 희빈을 찾는 것 같다고. 그럼 그게 정말, 정말로 왕이 왕비에게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 희빈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

아니, 전에 상궁이 그랬거든. 한 희빈의 아비가 조선의 세도가라고. 그래서 내키지 않음에도 부러 한 희빈을 찾는 것 같다고.”

그럼 형 말은 왕이 왕비를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찾지 않았다는 거예요? 한 희빈 아버지 눈치를 보느라?”

아닌가?”

내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한 희빈의 처소에 간 건 그렇다 치고, 굳이 왕비를 멀리할 필요까지 있나? 차라리 왕비의 아버지가 세도가라 사랑하는 첩한테 못 가는 거면 모를까.”

.”

 

 

그것도 또 맞는 말이긴 하네. 정국의 말에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뭐지. 그러나 정국과 태형의 고민은 이내 지민의 목소리에 의해 흩어졌다. 그게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왕의 소원이지.

 

 

전정국 소원 Clear. 김태형 소원도 Clear. 내가 봤을 때 이 소원 나무는 관련된 사람들의 소원을 다 이루어 주는 게 목표인 거 같거든? 그러면 왕이랑 왕비 소원이 이루어지면 우리도 자연스럽게 현대로 돌아가지 않겠냐고.”

그렇지…….”

그럼 정리해 보자. 왕의 소원은 타임슬립?”

그건 아닌 거 같은데.”

그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 둘이아니 근데 이 사람 좀 음흉한데. 단 둘이 뭘 하려고.”

, 부부사이에 뭐가 또 음흉이야!”

 

 

괜히 제 발이 저린 태형은 조그맣게 외쳤고 지민은 그런 태형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그럼, 왕의 소원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라고 치고.

 

 

왕비는? 뭐 들은 거 없어?”

 

 

마마의 마음이 전하께 전해졌으면 좋겠다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하셨던 것밖에는 생각이 나질 않사옵니다.’

마마께서는 늘 성심은 마마를 향해 있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마마의 마음이 주상께 닿았으면 좋겠다 하셨지 않으셨습니까.’

 

 

지민의 말에, 태형은 언젠가 (역시나) 상궁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왕비의 소원. 왕비의 마음이 왕에게 전해지는 것. 제가 상궁에게 왕비가 간절히 바랐던 것이 있을까 물었을 때, 상궁은 그리 답했었다. 태형은 입을 열었다. 왕비의 마음이, 왕한테 전해지는 거.

 

 

?”

상궁이 그랬어. 왕비가 평소에 입버릇처럼 그랬다고. 왕의 마음은 자기를 향해 있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자기 마음이 왕한테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뭐야, 그럼 서로 좋아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 그럼 왜…….”

글쎄.”

 

지민의 말에, 정국은 어깨를 으쓱했고 태형은 그런 정국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남 일 같지가 않아서. 서로 좋아하는데 모종의 이유 때문에 지구 내핵까지 파고들 정도로 삽질을 하고 있었던 게, 꼭 저와 정국을 보는 것 같아서. 태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구나……. 왕이라고 다를 거 없네.

 

 

그런데 어떻게 이뤄줘야 할지 모르겠네. 결국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되는 거 아니야.”

그러게요.”

그 소원나무에 가 보면 뭔가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물론 소원나무가 호랑이는 아니고 소원나무를 잡을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맥락은 같다. 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돌아오고 범인은 이 안에 있고 진실은 언제나 하나라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태형의 말에 정국과 지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가 봐서 나쁠 건 없을 것 같긴 해.

 

 

그럼 조만간 그 절로 행차를 가자고 할게요.”

……. 이제야 좀 뭔가가 풀리는 거 같네.”

 

 

긴장이 풀린 듯, 지민이 바닥에 스르르 풀어졌고 태형 역시 뻣뻣이 세우고 있던 허리를 누그러트렸다. 그러자 정국이 여태껏 태형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을 빼내 태형의 허리를 살살 쓸었다. 허리 아파요? 주물러 줄까요? 정국의 다정한 말에 태형은 괜히 홧홧해져 오는 얼굴을 조금 더 푹 숙였고. 그러나 그 둘의 다정한 투샷에 지민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허리가 왜 아픈데.”

니가 뭔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그거 아니다.”

내가 뭔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는 거 같은데?”

진짜 아니에요. 아직은.”

아직?”

 

 

아직.’ 태형은 그 익숙한 부사에 더욱 더 홧홧해지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이를 꾹 물었다. 아직이라니. 아직이라니?! 그럼 뭐 언젠가는, 허리 아플 일을 하겠단 소린가!? 아니 물론 뭐, 언젠가는 하긴 하겠지만, 아니 그런데 우리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 태형은 그 짧고 단순한 단어가 일으킨 한순간의 파동에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진짜 알고 싶지 않다.”

그러면 물어보질 말든가요.”

내가죄인이다…….”

 

 

시발 애인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지민은 남몰래 울음을 삼키며 제 자신을 쓰다듬었다. 세상은 어쩜 이다지도 불공평한지. 쟤네는 소원 이루어 주고, 나는 왜 소원 안 이루어 줘요. 현대로 성공적으로 돌아가고 나면, 나도 그 소원 나무한테 소원이나 빌어 볼까. 소원 뭐 빌지. 뜨끈한 바닥에 벌러덩 누워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생각의 가지를 뻗고 있던 지민은 가지의 끝이 그 생각까지 닿은 순간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야?!”

나 생각났어.”

?”

 

 

그리고 이어, 지민은 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제 소원. 전정국과 김태형이 워크샵에 가서 나무에 빌었다기에 전혀 생각해내지 못했던 제 소원. 지민은 차오르는 억울함에 가뜩이나 도톰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까, 지민은 소원을 빈 적이 있었다. 나무가 아니라, 할아버지네 집 근처에 있는 돌무더기에.

 

 

우리 망개, 여기다가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단다.’

 

 

지민은 인자하게 웃으며 말씀하시던 할아버지를 두둥실 떠올렸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 돌무더기에다 대고 소원을 빌었던 제 자신도. 아니 시발 나는 그 돌무더기가 소원나무랑 칭구칭구인 지 몰랐지! 게다가 하필이면 그 때는, 한 학기를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한자 교양수업에 출석하며(사실 당연한 것이다) 영혼을 쏟아 부었음에도 마음 속 그녀와 핑크빛 기류를 형성하지 못한 절망감에 사랑이고 뭐고 필요 없으니 부와 명예를 가지겠다고 결심한 때였다. 그러니까, 적게 일하고 많이 벌게 해주세요. 우연히 성공하게 해주세요. 아무런 노력 없이 성과를 이루게 해주세요. 옷으로 출세하게 해주세요. 등이 제 하나뿐인 소원이었던 때. 지민은 여전히 저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태형과 정국에게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특채로 등용했다!’

내가 왜 니 옷고름을 쳐 매 주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건지 설명해봐.’

 

 

왕비…….”

 

 

낮잠 자다 일어나 보니 왕의 최측근이 되었다.(아무런 노력 없이 우연히 성공) 그리고 맡게 된 것이 왕비의 옷을 관리하는 직무.(옷으로 출세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비록 가끔 야근을 하긴 하나 그다지 힘들지는 않고 궁궐에 살며 특별히 신경 써 주는 태형 덕에 맛있는 반찬에 좋은 옷을 입고 호강하는 제 자신(적게 일하고 많이 벌게 해주세요). 지민은 하나하나 기억을 되짚어 손을 꼽으며 제가 빌었던 소원의 달성률에 손을 떨었다. 그러니까, 제가 조선에 떨어진 것은 2+1 소원 프로모션 같은 것 때문이 아니라, 그러니까,

 

 

씨발…….”

 

 

바로 놀랍고도 신묘한 힘을 가진 영험한 돌에 소원을 빈 제 자신 때문 덕분이었던 것이다.

 

 

+


https://milkteaxger.postype.com/


티스토리 개편 후 글쓰기가 불편해져서 포스타입으로 연재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ㅠㅁㅠ

조선로맨스는 완결이 얼마 남지 않아서 (18화 완결) 여기에 끝까지 올려드릴 생각이지만 새로운 글이나 외전 등은 포스타입에 올라오게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 > 조선 로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로맨스 17  (0) 2018.12.31
조선 로맨스 15  (0) 2018.11.13
조선 로맨스 14  (0) 2018.11.07
조선 로맨스 13  (2) 2018.08.15
조선 로맨스 12  (3) 2018.08.0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