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지민의 좌절과 제 자신에 대한 회의감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흐르고 날은 바뀌어 어느덧 정국이 말해 놓은 행차 전날 밤이 되었다. 어차피 조선에 오래 있어 봐야 곤란한 상황만 늘어날 뿐 저와 태형의 관계 진전엔 아무런 득이 없을 것 같다고 판단한 정국의 단호한 어명에 의한 결과이기도 했다.

물론 부부이기 때문에 그 핑계로 태형과 매일 밤 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좋았지만, 낮 시간에 짬을 내어 부러 태형을 보러 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제는 슬슬 제가 중전을 보러 가겠다 하면 차마 말은 못 해도 ?’ ‘좀 작작…….’하고 눈으로 자신을 패는 신하들의 눈치가 따끔거렸기 때문에. 현대로 돌아가면 곧 방학일 테니 하루 종일, 낮이고 밤이고 할 것 없이 붙어 있을 수 있는데. 그리고 애초에 밤에 같이 있는 것도, 얼마든지 자취방에서 함께 할 수 있다. 얇은 창호지 너머에서 저와 태형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하고 무언가를 고대하고 있을 상궁들의 눈 없이, 단 둘이서만.

 

 

정국아?”

 

 

솔직히, 밤마다 손만 잡고 자는 것도 슬슬 한계였다. 정작 태형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긴 하지만, 태형이 정국에 대한 감정을 깨닫기 훨씬 전부터 태형을 좋아해 왔던 정국으로서는 지금 이 진도가 거북이, 아니 나무늘보보다도 느린 거였으니까. 입맞춤이며 간단한 스킨십은 할 수 있다 해도, 보는 눈이 많으니 더 이상 진도를 빼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도 있었다. 당장 오늘만 해도 신하로부터 오늘은 사자가 들어가는 뱀날이니 중전마마께 가신다 해도 절대 하시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듣고 온 참이었으니까. 언제든 하면 좋은 거 아니냐고, 많이 할수록 확률이 올라가는 거 아니냐는 정국의 물음에 신하는 단호한 표정으로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 언제…….

일관(日官)으로부터 날을 받으셔야지요, 전하. 자가 들어가는 뱀날도 안 되고 자가 들어가는 호랑이날도 안 되며 초하루, 그믐, 보름날, 일식, 월식이 있는 날도 안 됩니다.’

…….’

 

 

미친 거 아니야? 그리고 그 말에, 정국은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그거 다 피하면 애초에 할 수 있는 날이 있기는 한 건가? 어차피 저와 태형의 소중한 첫 경험을 8명의 상궁들이 창호지 너머에서 지켜보는 곳에서 치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 말을 들은 정국은 하루빨리 현대로 돌아가고 싶어졌던 것이다. 사실은 닿기만 해도 찌릿찌릿 전류가 통하는데.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정국은 말없이 제 품에 안긴 태형을 조금 더 꽉 끌어안았다. ‘지금 간신히 걷기 시작한 사람한테 나랑 같은 속도로 뛰어달라고 안 해요.’ 제가 일전에 태형에게 뱉은 말이 있기도 했고.

 

 

너 내 말 듣고 있어?”

, ?”

 

 

그렇게 참을 인자를 새기며 제 안의 검은 짐승을 잠재우기 위해 이를 꽉 물던 정국은, 저를 부르는 태형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태형을 쳐다봤다. 너 어디 아파? 표정이……. 그리고 마주한 걱정스러운 태형의 얼굴에, 정국은 어색하게 웃었다. , 아프긴요. 하나도 안 아파요. 뭐라 그랬어요? 잠깐 딴 생각 좀 하느라. 곧바로 해사하게 웃으며 다정히 묻는 말에, 태형은 음. 하고 혀를 살짝 내어 입술을 핥았고.

 

 

? 아니, 별 건 아니고.”

……?”

좀 출출하지 않냐고.”

 

 

정국의 앞에서 이 말을 꺼내긴 좀 민망하긴 했는데, 지금 태형은 민망한 것보다 제 뱃속에서 울리는 위장의 고동소리가 더 컸으므로 살짝 망설이다 이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태형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정국은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형 배고파요?

 

 

아니……. 생각해 보니까 집에 있을 땐 종종 야식도 먹고 그랬는데, 여기 와서는 야식도 한 번도 못 먹고. 밥이 맛있긴 한데 좀 자극적인 거 먹고 싶어.”

 

 

어차피 매운 것은 못 먹는 태형이니, 지금 태형이 말하는 자극적인 것이란 단 것을 의미했다. 수박에도 설탕을 뿌려 먹고, 딸기에도 설탕을 뿌려 먹고. 탄산음료, 특히 콜라에 환장하는 태형이었는데,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런 것들을 하나도 먹지 못했을 테니 지금 태형이 뭔가 단 것을 찾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정국은 태형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럼 상궁들한테 다과 같은 거 가져오라고 할까요?”

아니,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이 밤중에 굳이 상궁들까지 불러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는 않은 태형은(사실은 상궁들이 가져다주는 과자들은 태형이 원하는 그런 자극적인 단맛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정국에게 속삭였다. 그냥 몰래 잠깐 나갔다 오면 안 되나?

 

 

?”

저번처럼. 시찰.”

그건 안 될 거예요.”

 

 

위험하기도 하고, 내전 깊숙이 있는 교태전에서 아예 궁 밖으로 나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까. 정국은 고개를 저었고 그런 정국을 응시하던 태형은 이내 하긴 그렇지. 하고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긴 하다. 혹시라도 밖에 나갔다가 누가 왕과 왕비 얼굴을 알아보기라도 하면. 그래서 나쁜 맘을 먹기라도 하면. 조선에서 다치거나 죽으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던 것이 역시나가 되니 풀이 죽은 태형은 괜히 죄 없는 제 옷을 죽죽 잡아당겼다. , 단 거 땡겨. 그리고 그런 태형을 잠시간 응시하던 정국은 이내 무언가 떠오른 듯 아, 하고 탄성을 뱉었다.

 

 

생과방 정도면 몰래 다녀올 수 있을 거 같은데.”

생과방?”

여기서 한 5? 정도 걸릴 거예요.”

 

 

그게 뭔데. 어떻게 하는 건데. 태형이 의아한 표정으로 정국을 쳐다보니 정국은 설명을 덧붙였다. 그냥 수라상 차리는 곳이요. 생과방은 디저트. 그리고 정국의 깔끔한 설명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넌 별 걸 다 안다.

 

 

도착하자마자 지리를 파악해 뒀죠. 여차하면 형 데리고 도망쳐야 될까 싶어서.”

. 좀 믿음직한데.”

 

 

어느새 반짝 일어나 저를 일으켜 주려 손을 뻗은 정국의 손을 맞잡으며, 태형은 씩 웃었다. 그러자 정국이 그런 태형을 보고 마주 웃으며 태형의 손가락에 제 손을 엮었다.

 

 

믿고 미래를 맡겨도 될 아주 훌륭한 남편감이죠.”

?”

그냥 잠시 자기 어필 타임 좀 가져봤어요.”

 

 

읏차. 정국의 말에 태형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운 사이 정국은 태형의 손을 붙잡아 일으켰고, 여전히 멍하니 서 있는 태형에게 정국은 살짝 가까이 다가왔다. 갑자기 훅 하고 가까워진 정국에 태형은 숨을 삼켰고. 정국은 그런 태형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

 

 

나랑 평생 같이 살자고요.”

 

 

*

 

 

결국 어둠을 틈타 생과방에 몰래 잠입하는 데에 성공한 정국과 태형은 눈에 보이는 조그만 방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내소방과 외소주방에는 간간히 불이 켜져 있기에 아 이대로 실패하는 것인가 했던 걱정과는 달리, 생과방은 쥐새끼 한 마리 없이 고요했다. 어차피 들켜도 왕과 왕비의 신분이니 그리 큰 탈이 날 일은 없을 텐데도 캄캄한 밤중에 사람들 몰래 무언가를 한다고 생각하니 괜히 심장이 두근거려 왔다. 아닌가. 그냥 정국이 옆에 있어서 두근거리는 건가. 태형은 어둠에 적응한 눈을 깜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에는 급한 대로 방 촛대에 꽂혀 있던 조그만 초를 든 채로.

 

 

. 뭔가 조금 더 달콤한 게 먹고 싶은데.”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차분히 정리되어 있는, 그마저도 몇 없는 유밀과나 과편 같은 것들뿐이다. 이런 게 먹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나는 뭔가 조금 더 설탕이 잔뜩 들어가 있는,

 

 

이거 엿인 거 같은데.”

.”

 

 

그래, 저런 거. 태형은 정국이 어느 구석에서 찾아낸 기다란 모양의 엿을 반갑게 받아들었다. 유밀과나 과편 같은 고급 한과에 비해 엿은 만들기가 쉽고 값이 싸서 그런지 정작 조선에 온 뒤로는 보지 못했던 거였다. 상궁들이 제게 가져다주는 다과상에서는 본 적이 없었으니, 아마 궁녀들이 몰래 숨겨놓고 먹으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보니까 괜히 반갑네. 태형은 정국에게서 엿을 건네받자마자 앙 하고 엿을 깨물었다.

 

 

근데 그거 엄청 딱딱한 것 같던데 조심,”

!”

 

 

정국의 경고를 채 듣지도 못한 채 반가운 마음에 무작정 엿을 깨문 태형은, 아니나 다를까 정국이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아, 하는 신음소리를 냈다. 딱딱하고 거친 엿이 태형의 입 속에서 부러지면서 태형의 이가 태형의 혀끝을 살짝 깨문 탓이었다. 아씨, 아파. 태형은 순간 핑 도는 눈물에 인상을 찌푸렸다.

 

 

얼마나 맛있으면 혀까지 먹어요?”

지쨔 아흐거드?”

 

 

피 난 거 같아. 엿이 뭐라고, 그걸 급하게 먹다 혀를 깨물고 울상을 짓는 제가 웃긴 듯 킥킥 웃는 정국을 쳐다보며 태형은 베어 물었던 엿을 마저 꼭꼭 씹어 삼킨 후에 정국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지금 웃을 때가 아니야. 이거 봐. 여기 피 났잖아. , 이거 이제 뭐 먹을 때마다 거슬리는…….

 

 

…….”

…….”

 

 

그런데 이 분위기 뭐지? 태형은 한순간에 가라앉은 주변의 분위기에 하던 말을 멈추고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허공에서 정국과 제 시선이 얽힌 순간, 태형은 저도 모르게 한 쪽 손에 쥐고 있던 엿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

 

 

왜 갑자기 이렇게 됐지? 그런 생각을 할 새도 없이, 태형은 저를 응시하고 있는 정국의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을 마주했다. , 혀가 문제였나? 태형은 정국에게 깨물린 상처를 보여주겠다고 살짝 내밀었던 혀를 슬그머니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꼴깍, 침이 절로 삼켜졌다. , 정구기……. , 동공이 풀린 것 같은데. 태형은 저도 모르게 쭈구려 앉았던 몸을 주춤 뒤로 뺐다. 그러나 그런 제 움직임에도 정국의 눈엔 흔들림이 없다. 그 진득한 시선을 피할 수도 없었다. , 정국의 시선이 제 시선을 묶어놓은 것처럼. 말 그대로 단단히 얽혀있는 것처럼. 온 힘을 다해 꽉 쥔 탓에 체온에 녹은 엿이 제 손에 진득히 묻어 끈적거린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어 입술을 핥다가 아차 싶어 다시 입을 앙 다물었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

?”

왜 도망가요.”

 

 

, ? 태형은 유난히 낮게 울리는 정국의 목소리에 떨리는 심장을 간신히 붙잡았다. , 미쳤나봐. 정국의 저런 눈은 처음 본다. 뭐랄까, 진짜 잡히면 잡아먹힐 것 같은 느낌. 호랑이 앞에 선 토끼가 이런 기분일까. 아닌데. 토끼는 정국인데. 태형은 어떻게 하면 이 분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 고민하다 이내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아니지. 왜 헤쳐나가? 전정국을 꼬시겠다고 마음먹은 게 고작 며칠 전인데. 물론 지금 정국이 하는 걸로 봐서는 제가 굳이 꼬시지 않아도 될 것 같긴 하지만. 태형은 벌떡 일어나려던 마음을 고쳐먹고 이내 새카맣게 내려앉은 정국의 눈을 응시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태형은 정국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정국은 분명…….

 

 

뭐 해요,”

…….”

혀 안 빼고.”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까.

 

 

*

 

 

…….”

 

 

무슨 정신으로 다시 교태전으로 돌아와 밤을 보내고 절까지 올 준비를 했는지 모르겠다. 태형은 멍하니 제 눈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올려다봤다. 그래, 이 나무. 조선에 떨어진 이후 처음으로 맞이한 익숙한 풍경에 태형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러니까, 정말, 예상했던 대로 그 나무가 맞았다. 그 절도 맞았고.

 

 

정국이와 오해를 풀고, 다시 친하게 지내게 해 주세요.’

 

 

정말 그 소원 때문이었을까. 태형은 제가 현대에 있을 때 나무에다 대고 빌었던 소원을 떠올렸다. 저만치 앞에서 절의 주지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코코넛 나무 열매 같이 동그란 정국의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그 때도, 정국과 저는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같은 조도 아니었고, 어색하다 못해 좋지 않은 사이였으니까. 나무에다 대고 소원을 빈 다음, 태형은 고개를 들어 흘긋 정국을 쳐다봤었다. 정국이 어디쯤에 있는지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시선이 정국에게로 향했으니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어도, 신경은 온통 정국을 향해 쏠려 있었으니까. 태형은 눈을 감은 채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비는 정국을 쳐다봤었다. 너는 지금 무슨 소원을 빌고 있을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다 이내 픽 웃었었지.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형이 날 좋아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김태형이, 전정국을 좋아하게 해달라고.’

 

 

그런데, 그 때 제가 궁금해 했던 그 소원이, 제 자신과 관련된 거였다니. 떠올리자 다시 뛰기 시작하는 심장에 태형은 손을 들어 가슴에 가져다 댔다. 언제부터 정국은 자신을 좋아했을까. 아니 그 전에, 언제부터 나는 정국이를 좋아했지? 어쩌면 유라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들도 사실은 정국이를 좋아하고 있었던 거였나? 유라는 쉽게 포기가 됐었는데, 정국이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그 때는 그냥 정국이가 너무 좋은 후배고 동생이라.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

 

 

세상에 매일같이 한 방에서 잠들고 뽀뽀하고, 종국에는 키스까지 한 형 동생도 있나. 태형은 어젯밤 정국과 홀린 듯이 입을 맞췄던 것을 떠올리며 떨려오는 심장을 꾹 눌렀다. 어쩌면 진짜, 지민이 제게 했던 말이 정말 맞는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 정말 눈치 없다고. 정국이 저를 좋아하는 것을 몰랐던 건 둘째 치더라도, 제가 정국을 좋아하는지조차 몰랐다니. 이렇게나 많이 좋아하는데.

 

 

지민아…….”

.”

나 심장이 뛰어.”

 

 

전정국. 이름에 꿀을 발라 놓은 건지, 아님 가시가 있는 건지. 부르면 부를수록 달고 심장을 찔러 두근거리게 만든다. 그 사이 주지스님과 이야기를 끝낸 듯, 저만치에서 저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저에게 다가오는 정국을 보며 태형은 제 뒤에서 일산을 들고 있는 지민을 향해 조그맣게 속삭였다. 어떡해. 진짜 시도 때도 없이 막 심장이,

 

 

태형아.”

…….”

심장은원래 뛰어.”

 

 

안 뛰면 죽어. 그러나 요상한 방식으로 제 소원을 들어준 나무와 돌무더기에게 깊은 반감을 가지고 약간 비뚤어져 있는 지민은 감정에 젖은 태형의 귓가에 조그맣게 진실을 속삭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형은 그저 정국을 보며 반짝반짝한 눈을 할 뿐이었지만그리고 지민은 그런 태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집 보내줘……. 지금 별로 해가 쨍쨍하지도 않은데 이 일산은 왜 씌우라는 거야. 조만간 비 올 것 같은데 차라리 우산을 씌우든가. 하고 중얼거리면서.

 

 

중전과 단 둘이 잠시 절을 둘러보고 싶은데.”

 

 

지민이 투덜거리는 사이, 어느새 가까이 온 정국이 태형의 옆에 나란히 서며 주지 스님에게 말했고 스님은 얼마든지 그러시라며 빙긋 웃었다. 곧이어 어명에 의해 요란하고 화려한 왕의 행렬 대부분이 절 밖으로 모습을 감추고, 조용한 절간에는 몇몇의 호위무사와 정국, 그리고 태형만이 남겨졌다. 그리고 그마저도, 정국은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부를 테니 절대로 부르기 전에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 일렀다. 어차피 절 전체를 왕의 군관들이 둘러싸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호위무사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좀 이상하다.”

 

 

조용한 산 깊숙이 위치한 절간은, 정말 말 그대로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더욱이 어명에 의해 모두가 모습을 숨기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아무도 없는 절을 보고 있자니 현대에서 워크샵으로 왔던 그 때의 절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어 보여 태형은 꼭, 이미 제가 현대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주위에 한복을 입은 사람도, 제게 중전이라 부르는 사람도 없으니까.

 

 

혹시 형하고 나만 남겨지면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싶었는데, 그건 아니네요.”

아직 왕의 소원이 안 이루어졌잖아. 왕비의 소원도.”

그러게요. 그건 어떻게 하지.”

 

 

정국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동안, 태형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자꾸 기분이 이상하다. 뭔가 잊고 있는 기분. 제 소원은 이루어졌고, 정국이 소원도 이루어졌는데. 왕과 왕비의 소원만 남은 게 맞는데, 뭐랄까…….

 

 

. 비와요.”

 

 

태형이 무언가 찜찜한 기분에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그 때, 정국이 다가와 손바닥을 펴 태형의 위를 가렸다. 태형이 고개를 들자 하늘에서는 정국의 말대로 굵은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소나긴가? 조그맣게 중얼거린 정국이 일단 어디 좀 들어가자며 태형을 잡아끌었다.

 

 

호위무사들 말 되게 잘 듣네.”

 

 

아무리 어명이라지만 비 오는데 우산도 안 갖다 주고. 몇 걸음 옮기지도 않았는데 쏟아져 내리는 비에, 황급히 눈앞에 보이는 열려 있는 창고 안으로 들어선 태형은 조그맣게 중얼였고 태형의 중얼거림을 들은 정국이 피식 웃었다. 이번이 첫 번째도 아니고, 우리가 말 하려고 할 때마다 절대로 오지 말라고 당부해 뒀었으니까 그렇죠.

 

 

그건 그런데.”

그런데 비가 제법 세게 오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유난히 굵다 싶더니, 비는 마치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하늘이 뚫릴 것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정국은 문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창고 문을 닫았다. 열어 놓으면 비 엄청 들이쳐요. 이래서는 우리가 불러도 빗소리 때문에 못 듣겠는데요? 소나기가 아니고 무슨 스콜 같아.

 

 

어쨌든 조만간 그칠 것 같긴 하니까 잠깐만 앉아서 기다리죠 뭐.”

.”

 

 

환한 대낮이라는 시간대가 무색하게, 창고 벽 위에 높이 난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검푸른 회색빛이다. 태형이 멍하니 그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 정국은 곤룡포를 벗어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볏짚 위에 깔고 그 위를 손으로 통통 두드렸다. 여기 앉아요. 생각보다 푹신푹신해요.

 

 

우리 꼭 그거 같다. 소나기.”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그거?”

형은 뭐 그런 대목을 기억해요.”

 

 

어쩐지 어두운 방 안에 단 둘이 앉아 있으니 자연스럽게 손이 얽히고 얼굴이 가까워진다. 언제부터 이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된 건지. 아직 사귀자는 말도 못 들었는데. 아니 그 전에, 좋아한단 말도 제대로 못 들었잖아? 태형은 열어달라는 듯 조그맣게 제 입술을 핥는 정국에 서툴게 숨을 삼켰다. 공기와 함께, 정국의 숨이 들어찼다.

 

 

저번에도 느꼈던 건데.”

 

 

눈이 감기고, 숨이 얽히고. 심장은 간질거리고, 맞잡은 손은 뜨겁고. 한참 동안이나 정신없이 입을 맞추다 호흡이 모자라 여전히 조금 더 깊게 입을 맞춰오려는 정국을 밀어낸 태형이 발개진 얼굴로 숨을 가다듬자, 정국이 그런 태형의 가까이서 눈을 접으며 태형의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진짜 너무 가까워. 정신을 못 차리겠다.

 

 

형 키스 내가 처음이죠.”

 

 

목덜미에 닿는 정국의 손은 뜨겁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호흡은 거칠고. 그 와중에 제 코앞에 있는 정국의 얼굴이 너무 잘생기고 심장 떨려서 머리가 핑 돌았던 태형은 이내 정국의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 뭐라고?

 

 

, 연애 한 번도 안 했다 그랬나.”

, 뭔 소리야!! 누가 그래! 아니거든!! 해 봤거든!! ~전에 해 봤거든!!”

아닌데. 내가 보기엔 내가 처음인데.”

아니라니까? 나 연애 해 봤어! 키스도 많이 해 봤어! 엄청!”

내 앞에서 그렇게 말해도 돼요?”

?”

 

 

괜히 차오르는 쪽팔림에 있지도 않은 키스 경험을 늘어놓던 태형은 순간 들려온, 낮게 가라앉은 정국의 목소리에 눈을 깜박였다. 아니 잠깐만. 갑자기 우리가 왜 싸워? 우리 아까 분명히 영화 찍고 있었는데 갑자기 장르가 호러로 바뀌었잖아……. 태형은 어……. 하고 말꼬리를 늘였다. 그게, 그러니까…….

 

 

너도 그 전에 좋아하는 사람 정도는 있었을 거 아니야? 너 내가 처음이야?!”

 

 

그래서 태형은 외쳤다. 아니 뭐, 누구나 경험 정도는 있잖아. 우리 나이가 몇인데! 물론 태형은 처음이 맞았지만, 불과 1분도 지나기 전에 연애를 해 봤다고, 그것도 많이 해 봤다고 소리친 입장에서 갑자기 정국에게 사실은 나 네가 처음이야, 하고 실토하긴 좀 그러니까. 그리고 태형은 그 기세를 몰아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 보니까 진짜, .

 

 

너나 딱 대. 너 진짜 저번부터 느꼈는데, 너 선수지. 너 몇 명 사귀었어.”

…….”

이거 봐, 말 못하는 거 봐라. 손으로 셀 수도 없,”

그 전에 누굴 좋아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형이 좋아요.”

 

 

? 기세등등한 태도로 정국을 향해 삿대질을 하던 태형은, 그 순간 들려온 정국의 목소리에 그대로 굳었다. 하지만 제 눈앞의 태형이 그대로 굳었거나 말거나, 정국은 태형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형 만나기 전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하나도 기억 안 나요. 모르겠어요.”

…….”

형이랑 말도 안 하고 살 때, 진짜 죽을 것 같았어요. 아니 죽은 것처럼 살았어요.”

 

 

아니 그렇게 말하면 내가 또 할 말이 없잖아……. 태형은 한없이 진지한 정국의 눈에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다 대화가 이렇게 됐지? 분명 방금 전까지 되게가벼운 분위기였던 것 같은데. 세찬 빗소리에 정국의 목소리와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제 심장 박동 소리가 섞여 귓가에 울린다.

 

 

태형이 형.”

…….”

진짜 좋아해요.”

 

 

진짜얘 선수 맞는 것 같은데. 태형은 그렇게 생각하며 제 손을 꼭 잡아 오는 정국에 혀를 깨물지 않기 위해 이를 물었다. 아 어떡해. 지금 무슨 말을 하면 심장이 튀어나올 거 같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말없이 저만을 올곧이 응시하는 태형에, 정국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 한유라 좋아한 적 없어요. 입학한 이후로 형만 좋아했으니까. 그런데,”

…….”

형한테는 그냥 내가 한유라 좋아하는 줄 알았던 게 더 나았던 걸 수도 있어요.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면 형은 부담스러울 거니까.”

아닐 걸. 네가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으니까.”

…….”

나도 너랑 같은 생각 하고 있거든.”

지금 당장 형 눕히고 키스부터 하고 싶다고요?”

아니, 잠깐만.”

 

 

지금 우리 되게 진지한 분위기였잖아. 태형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정국을 제지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물론 그것도 좋고 다 좋고 좋은데……. 그 전에 풀어야 할 게 있다. 태형은 진지한 눈으로 정국의 팔을 잡았다. 그래. 이거였다. 아까부터 뭔가 계속 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이유. 아직 풀지 못한 오해. 제 소원은, 정국과의 오해를 풀고, 다시 친하게 지내게 해 달라는 거였다. 그냥 모든 걸 없었던 것처럼 덮어 두는 것이 아니라.

 

 

정국아, 나는 유라를,”

형 입에서 한유라 얘기 나오는 거 싫,”

아 그냥 쫌 들어 이놈시키야!”

 

 

태형이 확 몸을 일으켜 정국의 두 팔을 잡았다. 한순간에 태형에게 두 손을 결박당한 정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정국을 보며, 태형이 말을 이었다.

 

 

나 유라 좋아했어. 맞아.”

…….”

그런데, 그것보다 널 더 좋아했어.”

?”

유라가 너 좋아한다는 거 깨닫고, 바로 포기했다고. 유라는 포기할 수 있었는데, 너는 포기가 안 돼서. 그게 그 때는 그냥 너랑 지낸 시간이 길고 네가 너무 좋은 후배라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

내가 널 좋아해서 그랬던 거야. 네가 너무 좋아서, 너는 도저히 못 잃겠어서.”

 

 

말했다. 혹시 말하고자 하는 걸 다 말하지 못할까 봐, 제 마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까 봐 숨도 쉬지 않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말한 태형이 말을 마치고 숨을 들이쉬었다. 정국은 그런 태형을 쳐다보며 멍청히 눈을 깜박이고 있었고.

 

 

, 맞다 그리고…….”

…….”

초밥 그거 너랑 내 거였어. 유라 거 아니고. 너랑 나랑 단 둘이! 자취방에서! 오순도순! 나눠 먹으려고! 산 거였다고.”

 

 

진짜 다 말한 것 같은데. 말을 마친 태형이 정국의 팔을 놓고 다시 정자세로 앉았다. 이제야 좀 속이 시원하네. 태형이 뿌듯하게 웃었다. 아직 제 말이 정리가 채 다 되지 않은 듯, 정국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여전히 멍하니 눈을 깜박이고 있는 정국에 태형이 손바닥을 쫙 펴서 정국의 눈앞에 흔든 순간이었다.

 

 

저기요. 정신 좀 차리…….”

, 진짜 좋다.”

 

 

정국이 제게 뻗은 태형의 손을 잡아 그대로 잡아끌어 태형을 끌어안았다. 눈 깜짝할 새에 정국에게 안긴 태형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픽 웃었다. 맞닿은 가슴에서 느껴지는 정국의 심장 박동이, 꼭 저만큼 빠르게 뛰고 있어서. 정국이 손을 올려 한 손은 태형의 뒷머리에, 한 손은 태형의 허리에 가져다 대고 꼭 끌어안았다. 정말, 바람 한 톨 들어갈 공간이 없도록.

 

 

형은, 형은 진짜 내가 얼마나 형을 좋아하는지 모를 거예요.”

…….”

진짜 많이 좋아해요.”

정국아.”

 

 

나도 진짜 많이 좋아하는데.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네. 태형은 그렇게 생각하며 정국을 마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정국아, 내가…….

 

 

현대로 가면…….”

…….”

내가 먼저 고백할게.”

…….”

정식으로.”

 

 

좋아한다는 말은 전정국이 먼저 했으니까 사귀자는 말은 내가 하면 되지. 고민할 거 뭐 있나. 태형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떼고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은 할 말을 잊은 듯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고, 그 얼굴에 태형은 씩 웃었다.

 

 

그런데 너 진짜 아까 나한테 키스하고 싶었어?”

. 왜요?”

 

 

정국의 동그란 얼굴이 의아함으로 가득 찬다. 태형은 아니 뭐 그냥, 하고 말꼬리를 늘였다. 정국의 물음표를 가득 담은, 의아한 시선이 따라붙는다.

 

 

내가 그랬잖아.”

…….”

나도 같은 생각일 거라고.”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정국의 입술이 닿는다. 태형은 빙긋 올라가는 입꼬리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

 

 

.”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태형이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태형은 채 뜨지 못한 눈으로 제 얼굴과 몸에 돌돌 감긴 이불을 걷어냈다. , 허리야……. 태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침대에서 잘 자다가 이게 갑자기 무슨 봉변이야?

아직 잠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태형이 볼을 긁었다. 아 진짜 얼마나 요란한 꿈을 꿨길래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그러나 멍하니 읊조리던 태형은, 그 순간 훅 하고 들어차는 기시감에 말을 멈췄다. 아니, 잠깐만. 나 방금 뭐라고,

 

 

침대?!”

 

 

졸음에 눌려 한없이 무거웠던 눈꺼풀이 번쩍 뜨이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태형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 한 눈에 들어오는 조그마한 채광 좋은 방. 옆에는 제가 항상 옆에 두고 잠드는 핸드폰, 익숙한 벽지, 익숙한 가구, 익숙한…….

 

 

내 방…….”

 

 

그러니까 태형이 방금 눈을 뜬 이곳은, 바로 익숙하다 못해 눈을 감고도 훤히 그려낼 수 있는 2018년의 현대. 제 방이었다.

 

 

 

+

드디어(!) BACK TO 현대!!

 

완결까지 한 편!

 

https://milkteaxger.postype.com/


티스토리 개편 후 글쓰기가 불편해져서 포스타입으로 연재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ㅠㅁㅠ

조선로맨스는 완결이 얼마 남지 않아서 (18화 완결) 여기에 끝까지 올려드릴 생각이지만 새로운 글이나 외전 등은 포스타입에 올라오게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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