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부모님은, 아니,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으니 부모라고 부르기에도 어색한 두 사람은, 책임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더럽게 이기적인 사람들이었다.
Lost Stigma
존재 그 자체만으로 주목을 받는다는 건 축복에 가까울까, 아니면 저주에 가까울까. 태어났을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나는 관심의 대상이었다. 내가 뱃속에 생기고, 태어나고, 첫 울음소리를 내는 그 과정 하나하나에 사람들은 주목했다. 내 존재는 특별했으니까. 청룡 가문의 후계자라는 점이 그랬고, 인간의 태胎를 빌려 태어나는 용이라는 점이 그랬고, 청룡 가문의 청룡이면서도 역사상 처음으로 주작 가문의 피 또한 가지고 있는 아이라는 점에서 그랬다. 존재 자체가 기적인 아이. 내가 인간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그 순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었다.
신수神獸의 힘은 아주 오래 전부터 천계의 신수들에게 선택받은 네 가문의 첫 아이를 통해 전승되어 왔다. 일종의 가업家業같은 거였다. 이 ‘업’은 두 가지를 의미했다. 직업이라는 의미의 업과, 떠맡아야 하는 숙명과도 같은 업. 그러니까, 가문의 첫째 아이로 태어났다면, 그 사람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말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신수의 대리인으로서 평생 그 임무를 다해야만 했으니까.
내 선조들은 착실히 그 임무를 다했다. 몇 대에 걸쳐 평생 동안 문제없이 신수의 대리인으로서 살았고 아이를 낳아 신수의 힘을 물려줬다. 평생 동안 신수의 대리인으로서 살아야 하는 것이 녹록치는 않았겠지만 신수의 대리인이라는 것이 선망 받는 명예로운 자리라는 것과, 자신이 선택받은 명문가의 가주라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하늘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는 않았던가 보다.
내 선조 중 한 명은 신수의 힘을 물려받기를 거부했고, 노한 신수에 의해 힘을 물려줄 아이를 낳기도 전에 명이 끊어졌다. 신수와 인간을 이어주는 존재이기도 했던 그 사람이 사라지고 나자, 청룡 가문은 몰락의 위기에 처했다. 신수의 대리인을 배출해 내며 그 입지를 다져 온 가문이었기에 청룡의 힘을 빌려올 수 없게 되면 몰락의 길을 걷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청룡도 몇 대에 걸쳐 대리인 역할을 충실히 해 온, 제 비호를 아래 있는 가문이 몰락하기를 바라지는 않았기 때문에 청룡은 한 가지 결정을 내리게 된다. 다른 수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청룡은 그 다른 방법들 대신 제일 확실한 방법을 택했다. 현신現身. 대리인을 통해 힘을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제 스스로를 인체화하여 인간의 태를 빌려 태어나도록.
비록 그 대가로 청룡은 다시 태어날 때마다 매번 기억을 잃고 갓난아기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고, 천계에서 가만히 앉아 인세의 대리인들이 보내오는 악귀를 흡수하는 대신 직접 악귀들을 먹어치움으로써 그 능력을 유지시켜야만 했지만 그 대신 인세에서 더 강력한 힘을 쓸 수 있게 되었고 그 덕에 제 비호 아래 있는 가문의 (이제는 제 자신의 가문이기도 한) 위세를 더 공고히 유지시킬 수 있게 되었다.
“도련님, 학교 가실 준비 하셔야지요.”
…뭐, 이런 전설에 가까운 옛날이야기나 하려고 이야기를 시작한 건 아니고.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주목을 받는다는 건, 나의 경우에는 저주에 가까웠다. 아니, 가까운 게 아니라 저주였다.
나는 청룡가의 가주인 아버지와 주작가의 가주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지만, 본디 사신四神가 가주家主끼리의 사랑은 금지되어 있었다. 서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건 맞지만, 각각의 방위를 맡아 수호하면서 상대 가문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만큼 상호 견제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사신과는 전혀 관련 없는 가문의 상대와 혼인해 능력을 물려줄 아이를 낳아야 했기 때문에. 가주끼리의 혼인은 사신가의 피가 섞이는 일이고, 후계자 문제 또한 꼬이기 때문에 금기시됐던 거다.
그러나 내 부모는 그런 것 따윈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던 모양이다. 내 부모는 둘 다 아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능력을 물려줄 아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첫 아이로 가지는 무모함을 선택했다. 나야 뱃속에 있었기 때문에 몰랐지만 내가 어머니의 복중에 생겨났다는 소식을 들은 내 친가는 내가 태어나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두 신수의 힘을 모두 가지고 태어나는 첫 번째 인간, 아니 용이었기 때문에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인세의 신체가 두 신수의 힘을 감당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나는 태어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 부모는 죽었다. 모두 예정된 일이었다. 청룡은 한 세대에 하나만 존재해야 했으니 내가 태어남과 동시에 아버지가 죽는 건 당연한 거였고, 어머니는 내가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무렵 의사에게서 아이가 당신의 생명력을 먹으며 자라고 있으며, 아이가 태어나는 동시에 당신은 죽을 것이라는 말을 들어 알고 있었다고 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부모는 나를 낳았다. 누군가는 열렬한 부성애와 모성애라고 하겠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난 태어나지 않고 죽었어야 했다. 그리고 날 정말로 위했다면 내 부모는 날 죽였어야 했다.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부모 모두를 죽이게 만들지 말았어야 했으며, 부모를 죽이고 태어난 아이라는 죄책감을 가지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 부모에게 책임감이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평생 귀신을 보고, 퇴마하고, 악귀를 먹는 것을 업으로 지고 살아야 할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더라면. 내 부모는 만나지 말았어야, 아니 적어도 나를 낳지 말았어야 했다. 청룡 가에서 나를 없애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태를 빌려 태어나는 용이자, 청룡 가문의 청룡이면서도 주작 가문의 피 또한 가지고 있는 아이이자,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를 죽인 존재라는 수식어는, 내가 평생 갖고 살아가야 할 낙인이 되었으니까.
01
정국이 태어난 직후부터 시작되었던 주작 가문과 청룡 가문의 미묘한 신경전은 정국이 17살이 되어 본격적으로 퇴마를 시작하기 직전까지 이어졌다. 임신한 채로 주작 가문에서 도망쳐 나와 자신이 주작 가의 가주라는 사실을 숨긴 채 청룡 가문으로 왔던 정국의 어미 탓에, 뒤늦게 제 가문의 차기 가주를 가진 여자가 주작 가문의 가주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청룡 가문은 정국이 태어나기 전까지 주작 가의 가주가 제 집안에 있다는 사실을 숨겼다. 주작 가의 가주가 청룡 가 가주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도. 정국의 존재로 인해 생길 가주의 혼선 문제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결정이었지만, 정국이 태어나기도 전에 죽을 것이라고 청룡 가의 모두가 거의 확신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던 거였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과 바람을 깨고 정국은 건강하게 태어났고, 청룡의 형태로 태어나 청룡 가문이 안심한 것도 잠시 정국은 곧 불의 힘, 그러니까 주작의 힘을 쓰기 시작했다. 사라져버린 가주 때문에 가문이 몰락할 위기에 처해 있던 주작 가가 주작의 힘을 감지한 즉시 청룡 가로 쳐들어 온 것은 달리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청룡 가로 쳐들어 온 주작 가문 사람들이 보게 된 것은 실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용, 청룡의 형태를 띠고 있는 생명체가 주작의 힘을 쓰고 있는 모습. 이해는 안 되지만 청룡 가문이 자신들의 가문을 견제해 주작 가의 후계자를 감춰 놓았다고만 생각했던 주작 가문 사람들은 잠시 동안 할 말을 잃고 그 기묘한 광경을 넋을 놓고 쳐다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건 내가 할 말입니다. 이번 주작 가의 가주는 남자 아니었습니까?’
침묵을 깨고 주작 가의 호주戶主가 말했고, 그에 청룡 가의 호주가 답했지만 그 질문에 주작 가 사람들의 입은 약속이나 한 듯 굳게 다물어졌다. 주작 가문이 이야기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청룡 가문으로서도 그 이상 물을 수 없었다. 그것이 서로의 가문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한 불문율이었으니까. 한동안 그 공간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주작 가문의 사람들은 이내 어떻게 아이가 주작의 힘을 쓰는 걸 알면서도 숨길 수 있냐고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청룡 가의 차기 가주를 밴 여자를 들였을 뿐입니다. 그 여자가 주작 가의 가주라는 건 나중에 알았고.’
‘주작 가와 청룡 가의 피가 섞인 아이라는 걸 알았으면 곧바로 죽였어야지요!’
‘…우리도 권했습니다만, 가주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정국이 듣는 곳에서 할 말들은 아니었지만, 그 공간에 그것을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주작 가의 호주는 말없이 정국을 쳐다봤다. 무언가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인 게 틀림없었다. 그 여자 하나로 끝날 줄 알았던 주작 가의 불명예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이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주작 가의 호주가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불행히도 주작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다른 아이가 아닌 청룡의 모습을 한, 청룡가의 가의 가주였다. 청룡 가문의 가주와 주작 가문의 가주가 한 사람이라니. 세상 천지에 전례가 없던 일이니 해결할 방도를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하지만 여느 사신 가문이 그렇듯이, 그들에겐 저들이 모시고 있는 신수에게 원귀를 바치고 그를 통해 가문의 명맥을 이을 가주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건 신수의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뿐이었고. 주작 가의 호주가 정국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저 아이가 인간의 형태를 띠게 되었을 때, 주작의 표식이 있다면 1년에 6개월을 우리 가문에서 지내게 하십시오.’
‘…뭐요?’
‘물론 주작 가와 청룡 가에게 주어진 양의 퇴마는 모두 저 아이가 하는 전제 하입니다.’
‘…….’
언뜻 들으면 불공정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주작 가문에 있어서는 한 발 물러선 것이었고 청룡 가문 사람들도 그를 모르지 않았다. 정국이 청룡의 모습을 띠고 있기는 하나 분명 주작 가 가주의 아이이기도 했으며, 그 증거로 주작의 힘을 쓰고 있었으니까. 청룡 가 호주의 시선도 정국에게 가 닿았다. 주작의 표식. 주작의 표식이란 주작 가 가주의 몸에 새겨져 있는 주작 문신을 의미했다. 문신은 신수의 비호 아래 있는 가문의 가주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신체적 특징이었는데, 각 신수의 생김새를 띤 문신은 가주들이 갓난아기였을 때에는 점에 불과했다가 신체가 성장함에 따라서 함께 성장하며 더 뚜렷이 새겨졌다. 다만, 청룡의 경우 일정 나이가 되기 전까지 온 몸이 비늘로 덮여 있기 때문에 그 문신을 확인할 수 없을 뿐.
‘만약 저 아이에게 주작의 표식이 없을 경우에는?’
청룡 가의 호주가 물었다. 정상적인 때라면 가주의 신체에 해당 가문의 표식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가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정상적인’ 때가 아니었으니까. 사실, 지금은 정국이 청룡의 형태를 띠고 있다지만 후에 정국이 인간의 형태를 띠게 되었을 때 정국의 몸에 청룡의 표식이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거였다.
‘저 아이에게 주작의 표식이 없을 경우에는,’
주작의 호주가 말을 이었다.
‘한 달에 한 번.’
‘…….’
‘그 정도는 보내 주셔야지요.’
주작 가 호주의 말이 끝나고, 청룡 가 호주는 잠시 생각한 후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문제였고, 주작 가 호주의 제안은 지금 상황에서 더 이상 최선일 수는 없어 보였다. 그렇게 구두로 약속을 끝내고, 두 가문은 며칠 후 백호 가와 현무 가의 사람까지 모인 앞에서 그 약속을 문서화했다. 동시에 청룡과 주작 가의 가주인 정국이 제대로 퇴마를 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 어느 정도 도움을 줄 것을 백호와 현무 가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정국이 처음으로 인간의 형태를 띨 줄 알게 되었던 그 날, 정국의 몸에 주작의 표식은 없었고 그렇게 정국은 한 달에 한 번, 주작 가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
“우리 음악실에 귀신 나온다는 거 진짜야?”
“주현이가 봤다던데?”
“헐. 그럼 우리 학교에도 청룡 오는 거?”
“이번 청룡 엄청 잘생겼다던데… 실제로 한 번만 보고 싶다.”
귀신이 나타났다고 전부 내가 가는 줄 아나. 야자가 끝난 캄캄한 밤 학교 앞, 하교를 하던 여학생들이 떠드는 소리에 정국이 무심하게 내뱉었다. 물론, 정작 그 말을 한 여학생들은 듣지 못할 만큼 조용하게. 쓸데없이 주목을 받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이제 좀 살 것 같네.”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던 심장이 밖으로 나오니 좀 뚫린 것 같았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정국이 주작 가家에 다녀오는 날이었다. 청룡 가까지 모셔다 드리겠다는 걸 한사코 거부하고 천천히 걸어가는 중이었고. 분명 제 몸에 흐르고 있는 피의 반은 주작 가의 피일 텐데, 정국은 주작 가가 불편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청룡 가에서 살았고 청룡의 힘을 쓰는 것이 더 익숙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것 외에도 정국이 주작 가를 불편해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부모를 죽이고 태어난 아이. 청룡 가의 차기 가주로 태어났다면 자신이 태어남과 동시에 전대 청룡 가주가 죽는 것은 숙명으로 여겨야 한다지만, 주작 가문은 사정이 달랐으니까. 주작 가문은 차기 가주가 태어난다 해도 현 가주가 죽지 않는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는, 그러니까 정국 자신의 경우에는, 제가 태어남으로써 주작 가문의 가주가 죽었다. 아무도 정국의 면전 앞에서 그를 탓하지는 않았지만 그들 입장에서 정국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잘못은 정국이 아니라 주작의 전대 가주였던 정국의 어미가 했다 하더라도.
그래서 그런가. 정국은 주작의 힘을 쓰는 것을 꺼렸다. 태어난 이래로 쭉 청룡 가에서 자랐고 제 자신이 청룡이기 때문인지 제가 쓸 수 있는 주작의 힘이 청룡의 힘보다 약한 것도 있었고, 주작의 힘을 쓸 때마다 남의 것을 훔쳐 쓰는 것만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주작 가문에게 바칠 원귀를 퇴마할 때는 되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주작의 힘만을 사용하라는 주작 가문의 부탁에도 정국은 맨 마지막에만 주작의 힘을 쓰곤 했다. 그 정도야 내 마음대로 해도 되잖아. 정국이 중얼거렸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완전 부럽다. 타고 난 능력으로 평생 먹고 살 수 있고.”
“그러니까. 평생 먹고 살 걱정 없겠지. 요즘엔 위험한 악귀도 별로 없다며.”
“그냥 상징이지, 뭐. 역시 사람은 타고 태어나길 잘 태어나야 돼.”
…아직 그 여학생들의 화제가 청룡에 멈춰 있는 모양이었다. 굳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또렷이 들려오는 대화에 정국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학생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나라를 수호해준다 뭐다 해서 국가 보호도 받지, 연금도 받지.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안 하는 거지 맘만 먹으면 다른 직업도 가질 수 있는 거 아냐?”
“엉. 그… J 어쩌고 하는 외국 가수가 그리폰이랬잖아.”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야 난 그것까진 바라지도 않아. 국중고 들어갈 정도만 돼도 좋겠다.”
하. 정국은 기가 찼다. 그렇게 부러우면 나 대신 이렇게 살든가.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건 정국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국은 그냥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평생이 가도록 그들은 제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제 몸에 새겨져 있을, 목 뒤에서부터 어깨를 타고 허리까지 이어진 커다란 청룡 문신이 괜히 간질거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저런 이야기를 한두 번 듣는 것도 아닌데. 들을 때마다 기분이 안 좋아지는 건 어쩔 수가 없나. 정국은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쓸었다. 그 때였다. 기분 나쁜 한기가 제 몸을 훑고 지나갔다. 정국이 미간을 좁혔다. 제 안에 있는 내장이 그에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악귀가 주변에 있다는 의미였다. 그래. 이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다른 이들과 다르게, 심지어는 다른 사신가의 가주들과도 다르게. 악귀를 먹어치움으로써 허기를 달래야 하는 제 존재. 정국은 제 배를 쓸다 옷깃을 꽉 쥐었다. 이런 제 꼴을 알아도, 아까 그 여자들은 내 처지를 부러워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 제 자신이 우스워 정국은 픽 웃었다. 이 와중에도 제 송곳니는 뾰족해지고 있었다. 악귀를 보다 쉽게 먹어치우기 위한 본능이었다.
“…짜증나.”
제 본능이 가리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정국이 조용히 읊조렸다.
*
“길 잃어버렸어?”
“…….”
“엄마는 어디 있는데?”
…저건 또 뭐야. 정국이 제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인상을 찌푸렸다. 웬 남자 하나가 아무도 없는 길 가운데에 쭈구려 앉아 검은 형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다른 평범한 누군가가 보면 허공에 대화를 하고 있는 정신병자인줄 알 법한 광경이었지만, 정국에게 보이는 것은 조금 달랐다. 그러니까 저 남자는 지금, 악귀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드문 경우였다. 청룡 가의 가주인 저에게조차 악귀는 형체를 띠고 있지 않았다. 그냥 어떠한, 검은 연기 같은 형체로 보일 뿐. 어쩌면 그건 일종의 배려일 수도 있었다. 보통 사람의 형태를 띠고 있는 여타 귀신들을 정국이 먹을 필요는 없었지만, 악귀는 정국이 먹어야 하는 종류의 것이었고 제아무리 사실은 형체가 없는 영혼일 뿐이라 해도 인체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을 먹기는 쉽지 않았을 테니까.
어쨌든, 저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정국은 팔짱을 낀 채로 비스듬히 서 악귀와의 대화에 여념이 없는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영안靈眼이 트인 사람인가? 사실 귀신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는 그다지 희귀한 경우는 아니었다. 거리에 널려 있는 점집들만 봐도. 그러나 제 눈에 검은 형체로 보이는 걸 봐서, 그리고 아까 제 몸을 훑고 지나갔던 더러운 기운으로 봐서, 저 검은 형체는 악귀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악귀와 대화를 한다? 이건 상황이 좀 다르다는 것을 의미했다.
“데려다 달라고?”
“…….”
“집이 어딘데?”
아무래도 남자에게는 악귀가 어린 아이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정국은 혀를 찼다. 저거 멍청이 아니야? 상식적으로 어린 애가 이 밤중에 인적 없는 외진 곳에서 혼자 길을 잃었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정국이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던 그 때였다. 검은 형체와 계속해서 대화를 하던 남자가 한 걸음 앞으로 몸을 기울였고, 그와 동시에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히 서 있던 가로등이 살짝, 흔들렸다. 정국이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뭐라 생각할 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악!”
“아.”
첫 번째 소리는 제 눈앞으로 갑자기 쿵, 하고 쓰러져 버린 가로등 때문에 놀란 남자가 낸 비명소리였고, 두 번째 소리는 달려가 남자를 감싸 뒤로 끌어당긴 정국이 놀라 낸 소리였다. 갑자기 쓰러져 버린 가로등 때문에 놀란 게 아니었다. 제가 뭐라 생각하기도 전에 움직인 제 몸에 놀란 거였다. 혹시 악귀에게 홀린 것인가, 아니면 악귀와 한 패는 아닌가. 멀찍이 서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던 정국은 가로등이 이상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걸 감지한 즉시 남자에게 달려갔다. 머리에서 판단하고 내린 결정이 아니었다. 저도 모르게 한 행동에 정국이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지금 뭐 한 거지, 나.
“뭐, 뭐야?”
“…….”
얼떨결에 정국에게 안겨 땅바닥에 주저앉은 형태가 된 남자가 놀란 눈으로 정국을 돌아봤다. 아, 눈 마주쳤다. 정국이 눈을 깜박였다. 남자는 여전히 놀란 듯 정국과 제 앞에 쓰러진 가로등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이거 왜 갑자기 쓰러진 거야? 남자가 정국에게 던지는 말인지, 아니면 놀라 혼잣말을 하는 것인지 모를 질문을 하며 더듬거렸다. 정국은 그때까지도 멍하니 남자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 놀란 심장이 아직까지 잦아들지 않고 있었다. 계속해서 정국과 가로등을 번갈아 쳐다보던 남자가 아직까지 넋을 놓고 남자를 쳐다보고 있는 정국을 툭툭 건드렸다. 저기요, 정신 좀 차려요.
“아, 맞다.”
“정신이 들었어요?”
“…도망갔네.”
“도망가요? 누가요?”
남자의 부름에 순간적으로 퍼뜩 정신을 차린 정국이 검은 형체가 있던 곳을 돌아봤을 때에는, 이미 검은 형체는 자취를 감추고 난 후였다. 정국이 입맛을 다셨다. 너무 오래 넋을 놓고 있었다. 남자야 가로등에 깔려 크게 다치든 말든, 그 악귀를 먼저 잡아 제 허기를 달랬어야 했는데. 갑자기 나도 모르고 있던 내 안의 정의감이 불타올랐나. 생전 안 하던 짓을 하고. 정국이 여전히 두근거리는 제 심장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가, 이내 몸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정국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정국이 그런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제가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바라고 정국을 쳐다보고 있었던 남자는, 정국이 대답을 하지 않자 이내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그 꼬마, 사라졌네. 길 잃어버렸다고 했는데.”
“…….”
“…근데 뭘 그렇게 보는데요. 그렇게 쳐다보고 있을 거면 나 일어서는 거나 도와주든가.”
아. 정국이 짧은 감탄사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끙, 하더니 정국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맞닿은 손이 따뜻했다. 묘한 기분에 정국이 한쪽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정국의 도움으로 몸을 일으킨 남자가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정국은 그때까지도 멍하니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주위를 살핀 남자가 이내 정국을 돌아봤다. 여기 있던 꼬마 못 봤어요?
“…꼬마?”
“아, 감사하다는 인사를 못 드렸네. 놀라가지고.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살았어요.”
근데 여기 있던 꼬마 못 보셨어요? 정국은 태연한 남자의 태도에 기가 차 허, 하고 웃었다. 방금 진짜 크게 다칠 뻔 한 건데, 뭐가 저렇게 태연해? 게다가 지금은 저를 죽이려고 했던 악귀 걱정이나 하고 앉았다. 정국이 대답 없이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 남자는 멋쩍은 듯 볼을 긁었다. 놀라서 도망갔나? …이런 헛소리나 하면서. 정국이 그런 남자를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방금 죽을 뻔 한 건데.”
“…네?”
“생각보다 멀쩡해 보여서.”
“아… 익숙한 일이라서요.”
남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정국은 그런 남자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는 정국이 목숨 걸고 구해줬는데 감사하단 말을 제대로 안 해서 기분이 불편한 거라고 생각한 듯, 정국의 눈치를 보며 한 번 더 감사하다고 말을 꺼냈다.
“아니, 그… 어렸을 때부터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서. 좀 무뎌졌나 봐요. 진짜로 감사해요.”
“…이거 그 악…꼬마가 그런 건데.”
“네?”
원래 이런 상황에서 정국은 가타부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말을 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저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퍼부어댔고, 주위는 금세 시끄러워졌으니까. 그러다가 누군가 제가 청룡 가의 가주라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하면 상황은 더 악화되었고. 그러나 지금, 정국은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다. 남자의 눈이 동그래지는 게 보였다. 이제야 좀 놀라는 건가. 정국은 그런 남자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 꼬마 어디 갔냐면서. 그거, 꼬마가 아니라 악귀야. 그 악귀가 너 죽이려고 한 거고.”
“아…….”
…아? 아아? 그게 끝이야?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 달리 무심한 남자의 반응에, 오히려 의아해진 것은 정국 쪽이었다. 정국이 의아한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거나 말거나, 남자는 제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긴가민가했는데. 그리고 이어진 남자의 말에, 정국이 다시 허 웃었다. 진짜,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안 무서워? 악귄데.”
“저한테는 꼬마로 보였으니까…….”
“죽을 뻔 했는데?”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 아니 그런데 왜 반말이세요?”
…아. 정국이 멍하니 감탄사를 터뜨렸다. 남자는 차분히 정국의 질문에 대답을 하다 이내 미간을 좁히고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이 도르륵 눈을 굴렸다. 그러고 보니, 반말하고 있었구나. 어딜 가든 제가 저자세로 있어야 할 일은 여태까지 없었다보니 자연스럽게 든 버릇이었다. …남자가 저보다 어려보이는 것도 한 몫 했고.
정국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남자를 쳐다보고 있자, 그런 정국을 한동안 가만히 쳐다보던 남자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뭐, 생명의 은인한테 반말 가지고 뭐라 하는 것도 웃기긴 했다. 잠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대로 가야 하나? 그래도 되나? 남자는 슬쩍 정국의 눈치를 봤다. 정국은 여전히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왜 저렇게 봐. 멋쩍어진 남자가 눈알을 굴리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는 그 쪽은 귀신이 안 무서우신가 봐요.”
“…….”
“그쪽도 되게, 아무렇지 않아 보이시는데.”
“귀신이 무섭냐고…….”
이런 질문은 또 처음이다. 남자의 질문에 정국이 픽 웃었다. 남자는 여전히 어색하게 웃으며 정국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여태까지 계속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이제야 정국의 눈에 남자의 얼굴이 찬찬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속눈썹이 유난히 긴, 커다란 눈이 저를 보고 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정국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귀신이…….”
“…….”
“…무서울 리가 없죠.”
“…….”
“저는 그걸 잡아먹고 사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 입으로 직접 꺼내본 말이 혀끝에서 낯설게 뒹굴었다. 제 말에 남자의 눈이 천천히 놀람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정국의 입꼬리가 예쁘게 휘었다.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Lost Stigma 02 (1) | 2018.03.0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