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합궁이라니!!!”

 

태형이 제 볼을 감싸 쥐고 소리쳤다. 머릿속이 과부화 되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합궁! 합궁! 합궁이라니! 그러나 그런 태형의 태도를 설렘 내지는 기대감으로 해석한 듯, 태형 앞의 상궁은 그런 태형을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저리도 좋으실까. 그런 상궁을 알면서도 차마 그거 아니라고 항변할 수도 없는 처지의 태형은 그저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이 속내를 어디 가서 털어놓나!!

우리 합궁일 정해졌대요.’

 

정국은 그 말을 마치고 곧바로 방을 나갔고, 태형은 잠시 제 귀를 의심하여 그대로 앉아 입을 벌렸다. 합궁. 합궁合宮. [명사] 남녀가 성교함. 또는 그런 일. 특히 부부 사이의 성교를 이르는 말. 그러니까, 전정국도 알고 있었던 거다. 합궁일을 조정하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니, 정국이 먼저 그 화제를 꺼냈었던 것도 같았다. 그 땐 그냥 먼 훗날의 일이겠거니 하고 넘겼었는데. 아니 근데 그걸 왜 전정국한테 먼저 말해!! 나한테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정도는 줘야지!!!

 

…….”

마마?”

그래서 합궁일이 언젠데?”

 

태형이 푹 떨구었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사실 태형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정국에게 먼저 말하는 게 맞겠지. 정국도 저와 다름없는 합궁의 당사자일 뿐 아니라 왕이기까지 하다. 왕이 제일 먼저 알지 않으면 누가 제일 먼저 알까. 그러나 괜히 억울한 것은 어쩔 수 없었으니까. 태형은 멍한 머리를 다시 정리했다. 그래. 말이 합궁이지,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사실 합궁이 걱정이었던 것도, 왕이 제 정체를 알까봐서였는데, 이제는 그런 걱정도 없다. 태형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같이 자는 것뿐이다, 한두 번 같이 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어제도 같이 잤으니까 특별히 의미부여 할 필요는 없다. 태형의 묘하게 결연해진 눈빛에 마마께서 정말로 굳게 다짐하셨나 보다 생각한 상궁이 살짝 미소 지었다. 물론, 태형이 다짐을 한 건 맞았다. 그게 상궁이 생각하는 다짐과는 오조 오억 광년쯤 떨어져 있어서 그렇지.

 

사흘 후입니다, 마마.”

, 사흘…….”

 

왜 이렇게 가까워……. 태형이 조용히 읊조렸다. 사흘이면 3일 후. 마음의 준비만 해도 모자란 시간이다. 아무리 의연하려 해도 자꾸만 떨리는 손에 태형이 라마즈 호흡을 했다. 사실 라마즈 호흡이 뭔지 모르지만 그냥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었단 소리다. 아무튼 그런 태형의 말에 상궁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얼마 안 남았지요. 그러니 오늘부터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준비?”

. 튼튼한 원자 아기씨를 회임하기 위한, 또 전하께 최선의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한 준비요, 마마.”

회임최선의 모습…….”

 

하나같이 정말받아들이기 힘든 말들뿐이네. 태형이 머리를 짚었다. 그래. 그까짓 준비하는 척쯤이야. 어차피 진짜로 할 것도 아닌데. 제 눈앞의 펼쳐진 운명을 수용하기로 결심한 태형이 푹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그래서, 뭐부터 해야 하는데?”

 

*

 

마마, 똑바로 보십시오!”

, 아니…….”

 

태형은 자꾸만 저도 모르게 붉어지는 얼굴을 어찌할 수가 없어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의연하려 해도 차마 제 앞에 놓여진 책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아니 이게 뭐야! 태형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합궁 준비라 해서, 회임에 좋은 약이나 먹고 목욕재계나 할 줄 알았던 태형은 제 눈앞에 펼쳐진 의외의 준비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대체 이런 걸 왜 알려주는 건데!

 

회임에 가장 좋은 자세는 주상 전하께오서,”

아니, , 잠깐만!”

마마벌써 다섯 번째이옵니다!”

 

그러니까 태형은 지금, 10대 이후 다시는 마주할 일 없을 줄 알았던 그 교육. 이미 정규 교육 뿐 아니라 시청각 자료를 통해 비정규 교육까지 모두 마스터한 지 오래인 그 교육. 이름하야 성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이 나이에, 이런 곳에서 성교육을 다시 받게 될 줄이야. 그것도 개인 과외로! 태형은 입술을 꼭 물었다. 이런 그림 따위가 아니라 움직이는 영상과 소리로 이미 다 알고 있는 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태형은 마치 이런 행위(?)는 처음 보는 것처럼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Safety Sex, 노콘 노섹!을 필두로 하는 교육만을 받아 왔던 태형은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효율적(?)으로 임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교육은 처음 받아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렇게 적나라한 그림과 언어를 사용하면서. 11, 여자에게.

 

, , 그냥 하면 되는 거 아닐까?! 굳이 이렇게 배워야 할까?”

마마. 튼튼한 원자 아기씨를 회임하기 위해서는 기일 뿐 아니라 마음가짐과 자세 또한,”

, 에헤이-”

 

태형은 황급히 상궁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 뒤에 나올 엄한 말들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10분여 전, 상궁이 살짝 미소 지은 얼굴로 대충 봐도 두꺼워 보이는 책을 들고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했던지라, 태형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무방비한 상태의 태형에게 전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으로 운을 뗀 상궁은 옆에 살짝 붙어 앉더니 대뜸 태형에게 헐벗은 두 남녀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말로만 듣던 춘화春畫. 태형은 조선의 색체 표현이 이렇게 사실적이었는지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 훌륭했다.

 

전하께서 마마의 위로 올라타-”

아 제발…….”

 

시발, 시발, 시발! 태형은 울고 싶어졌다. 정상위, 후배위. 이런 체위들이 조선 시대부터 있었구나. 태형은 입 안쪽 여린 살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런데 그걸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요. 튼튼한 원자 아기씨를 회임하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자세는 정상위라는 것까지 TMI로 알게 된 태형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도 펄쩍펄쩍 뛰었다. 아주 조금 있으면 애무하는 법까지 나오겠어!!! 태형은 제 손에 집히는 베개를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이게 뭐라고, 야동을 접한 10대 소녀처럼 부끄러움을 타느냐는 말이다. 이미 다 알고, 본 것들인데. 그건, 태형이 자꾸 상궁의 말을 들으며 떠올리게 되는 머릿속 그림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 얼굴. 내 위로 올라타는 전정시발!!!!

 

알겠습니다, 마마. 그럼 조금 더 쉬운 것부터 하도록 하지요.”

, 그래.”

 

태형은 살짝 숨을 내쉬었다. 쉬운 거. 그래. 아무리 흘려들으려 해도 자꾸만 생생하게 서라운드로 플레이되는 영상에 태형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 감으니까 더 선명하게 보여, 미친아. 잠시 그런 태형을 응시하던 상궁이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춘화집을 스르륵 넘겨 초반 부분을 펼쳤다. , 마음가짐 같은 게 나오려나. 태형은 슬쩍 눈동자를 굴려 춘화집으로 시선을 옮겼

 

옥경(玉莖)을 입에 담으실 때는, 이를 사용하지 말고 잇몸과 입술로 다정하게

, 잠깐만요1!!!!”

입 안을 향기롭게 하여 혹여나

잠깐만! , 그만하,”

전하께오서 옷고름을 풀어 주실 때는 그저 가만히 있지 마시옵고

 

제발 잠깐만!!!!!!!!!!!!!!!!!!! 그러나 태형의 인지 부조화, 혹은 게슈탈트 붕괴, 혹은 멘붕, 어쨌든 태형의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다 못해 산산이 가루가 되어가거나 말거나 상궁은 더 이상은 봐줄 수 없다는 듯 꿋꿋이 말을 이어나갔다. 태형이 혹여나 눈을 피할세라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옥경이 무엇인지 모르는 태형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무리가 없도록 시각 자료를 충분히 활용하면서.

 

*

 

영혼까지 털린 느낌, 혹은 영혼의 순결을 뺏긴 느낌.

 

이라고, 태형은 지난 사흘을 회고했다. 첫 날부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이어지는 상궁의 표현들로 시작됐던 준비는 하루가 지날수록 그 강도를 높여 가며 진행되었다. 그러니까, 나름의 완급 조절도 했었던 거다. 태형에겐 처음부터 헬게이트 난이도였어서 그렇지.

 

기침하셨습니까, 마마.”

 

태형이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것은 제 손을 가볍게 마사지하며 해사하게 웃는 상궁의 얼굴이었다. 이제는 놀랄 힘도 없는 태형이 며칠 새 핼쓱해진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궁은 태형의 말에 조금 더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날이 밝았습니다, 마마.”

 

그래나의 이 고생도 오늘로 끝이 나고 말이지. 태형이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만 삼키며 제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상궁을 쳐다봤다. 이제 태형은 제 신체의 보안에 대해서는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어차피 중요 부위만 들키지 않으면 됐으니까. 합궁날이 결정된 후부터, 자꾸만 제 몸을 만지려 드는 상궁들에게 사지는 건드려도 좋으니 몸통을 포함해 무릎 위, 팔꿈치 위로는 절대, 손도 대지 않을 것으로 합의를 봤던 것이다. 물론 상궁들의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부분인데!’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항의하는 상궁들에게 태형은 당황한 나머지 내 몸은 오직 전하만이 만질 수 있다!!’고 외쳤고 상궁들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아무 말이나 하게 된다,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한 태형은 이런 말을 한 것은 전정국에겐 죽을 때까지 비밀로 가져갈 것이라 다짐하며 제가 조선에 떨어진 이후 얼마나 비밀이 많은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됐다.

 

연습했던 것들은 모두 기억하고 계시지요, 마마?”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상궁의 말에 태형은 다시 한 번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다마다. 지난 사흘간 하루 종일 그것들만 연습했는데. 어차피 실전에는 하나도 쓸모없겠지만.

그러니까, 태형은 지난 사흘 간 시각 자료들을 통한 간접 수업 뿐 아니라 직접 체험해 보는 시간도 가졌다. 물론 중전의 몸으로 타인과 그런 것들을 실습해 볼 수는 없었으니, 그 비슷한 것들로. 태형은 잠시 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수치스러운 기억에 입술을 깨물었다. 살다 살다 방중술을 연습해 보게 될 줄이야.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의. 태형은 그간 연습했던 것들을 저도 모르게 떠올렸다.

걸을 때 발뒤꿈치 들고 걷기. 이거 정도야 별 거 아니지, 하고 생각했던 태형에게 의외의 복병은 따로 있었다. 바로 옆에서 그 발뒤꿈치를 들고 걷는 것의 효능을 태형의 귀에 꽂아 넣는 상궁의 목소리. ‘허벅지 안쪽 근육과 회음부 쪽 근육이 긴장되어 성감을 높여 줄 수 있으며 전하에게 보다 큰 만족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말에 태형은 잘 걷다 말고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려야 했다. 그뿐만이랴. 금가루가 섞인 소금으로 양치질, 누워서 천을 덮고 한 방울씩 떨어지는 얼음물을 배꼽으로 받기. 그 중에서도 가장 태형의 항마력을 시험했던 것은 혀로 연시 핥기였다. 이건 상궁이 따로 설명을 해 줄 필요도 없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으니까. 태형은 그 순간 가장 쉽고 간단하게 목숨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했었다.

 

소리를 어떻게 내야 전하를

알고 있어, 제발 그만해…….”

 

태형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서 얻은 정보와 지식들은 다시 현대로 돌아간다 해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잊어버리려 해도 말이다. 씻을 수 없는 추억이 되어 버린 사흘간의 준비에 태형은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난 이제 다시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렸어…….

 

오늘은 이제 옷감을 고르시고, 장신구를 고르셔야 합니다. 어서 기침하시지요.”

알겠어…….”

 

태형이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그 날이었다. 자신과, 정국의 첫날밤 아닌 첫날밤.

 

*

 

안 돼, 안 돼, 안 돼!”

오늘은 저도 절대로 양보 못 합니다, 마마.”

 

태형은 단호했으나, 상궁도 오늘만큼은 절대로 양보하지 못하겠다는 듯 단호했다. 태형은 입술을 물었다. 옷감을 고르고, 장신구를 고르고. 마사지를 받고. 한 번 더 중전의 역할에 대해서 세뇌 교육을 받고. 오전 오후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준비를 마치고 나니 날은 어느덧 어둑해져 푸른 끼가 돌았다. 이제 정말 그 시간이 다가오는구나. 태형은 제법 깜깜해진 창밖을 내다보며 멍하니 중얼였다. 오늘이 대망의 그 날이라 그런지, 상궁은 더 이상 엄한 소리를 하지 않았다. 아마 태형이 내성도 없이 그 얘기를 꺼낼 때마다 질겁하니 긴장을 풀라는 작은 배려인 듯 했다. 하지만 정작 복병은 지금부터임을, 태형은 깨달았다. 평소에는 태형의 명령대로 목욕 시중을 들지 않았던 상궁이, 오늘만큼은 반드시 목욕 시중을 들어야겠다고 나선 것이다.

 

안 돼. 이건 진짜 안 돼.”

마마. 마마께서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전하의 손이 닿으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제발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알아서 할게!”

 

어차피 걔는 오늘 밤 내 몸에 손도 안 댈 거라고……. 태형은 답답한 속을 억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낭패였다. 순순히 혼자 목욕을 하게 해 줄 거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상궁은 생각보다도 더 강건했던 것이다. 태형은 소복만 입은 채로 치맛자락을 꽉 말아 쥐었다. 하지만 태형도 절대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절대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어쩌면 태형보다도 상궁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더 안 되는 일이었다.

 

마마. 시간이 촉박하옵니다. 벌써 날이 어두워 졌사온데,”

그러니까 혼자 들어가겠다고. 여태까지 잘 했잖아!”

오늘은 평범한 날이 아니지 않습니까!”

 

태형과 상궁의 신경전이 이어졌다. 이게 무슨 아닌 밤중에 전쟁이야. 태형은 상궁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지난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해결했더라. 그러나 곧이어 떠오른 그 날의 일에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타이밍 좋게 정국이 나타나서 무마됐었지. 그러나 같은 행운을 두 번 바랄 수는 없다. 그것도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오기로 한 시간까지 정해져 있었고. 제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지 꿈에도 모를 정국은 왕이 해야 할 준비로 바쁘겠지. 태형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냥 이대로 그때처럼 밖으로 도망쳐?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게다가 오늘 같이 왕과 왕비의 합궁으로 온 궁궐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날에 왕비가 소복 차림으로 교태전을 뛰쳐나갔다간 뒷일이 어떻게 될지 뻔했다. 중전의 정신이 이상한 것 같다고 소문이 나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오지 않는 방법에 태형이 미간을 좁혔다.

 

마마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서 계실 겁니까. 이러다가 정말,”

꺄악!”

 

상궁이 다시 한 번 더 태형을 다그치려던 그 순간이었다. 밖에서 갑자기 들린 어린 궁녀의 비명소리에 태형과 상궁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 뭐야?! 태형이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교태전은 경복궁 안에서도 가장 깊숙이 있는 곳이었다. 궁녀가 저런 식으로 비명소리를 낼 일이 없는, 아주 안전한 공간이란 뜻이다. 게다가 오늘은 왕이 교태전으로 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철저히 해 놓았을 텐데. 태형과 상궁의 눈이 허공에서 얽혔다. 상궁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듯 의아함과 약간의 불안함이 섞인 표정으로 태형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태형과 상궁이 있는 교태전 내에서도 가장 깊숙이 있는 욕실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젖혀졌다.

 

, 전하!”

전ㅈ,”

 

그리고 나타난 인영에, 태형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제 앞에 있는 상궁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그 문을 열고 나타난 인영은, 여기까지 서둘러 달려온 듯 얼굴이 살짝 발개진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전정국이었다. 태형과 눈이 마주친 정국은 하,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하는 것 같은 느낌의 그 한숨에 태형이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왕이 오기로 한 시간까지는 2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그 시간에 늦었다 해도, 왕이 교태전까지 뛰어 올 일은 없었다. 이 궁궐 안에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시되는 것이 전정국, 그러니까 왕이었으니까. 의외의 인물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상궁이 급히 고개를 숙였고 태형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 전하. 어떻게 여기…….”

.”

 

잠시간의 침묵 후에 상궁이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을 꺼냈고 정국이 그에 조그맣게 감탄사를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벌써 온 거지? 그것도 신하들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급하게. 묻고 싶은 것이 한가득이었으나 꾹꾹 눌러 참은 태형이 정국의 대답을 기다렸다. 왕이 이렇게 직접 달려올 정도면 뭔가 심각한 일이 있었나…….

 

중전이 보고 싶어서…….”

……?”

! , 아니. 잠깐 자리를 비켜 줄 수 있겠나?”

 

그리고 이어진 대답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고 그건 상궁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제가 들은 말이 환청인가를 의심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상궁이 되물었고 정국은 민망한 듯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헛기침을 했다. 저게 무슨 말이야? 보고 싶어서 달려왔다니 그게 무슨…….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정국이 세차게 열어젖힌 문 밖에 서 있는 궁녀들도 방금 제가 들은 말이 환청인가를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정말 말도 안 되는. 그러나 어명은 어명이니. 상궁은 나가기 직전에 놀란, 그러나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는 눈으로 태형을 살짝 돌아봤고 태형은 저도 모른다는 의미로 눈을 깜박였다. 상궁이 문을 닫고 나가고, 방 안에는 소복만 입고 있는 태형과 정국 둘만이 남았다. 태형은 입을 벌리고 눈을 깜박였다. 너 지금 뭐하냐?

 

아니, …….”

……?”

합궁 날에는 상궁들이 꼭 목욕 시중을 들어 준다고 해서,”

?”

그게 관례라고, 지금쯤 중전마마께서도 준비 중일 거라고……. 근데 형은 들키면 안 되니까.”

 

주위에 혹시 들릴까 싶어 두리번거린 정국이 민망한 듯 두서없이 말을 뱉었고 태형은 그런 정국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니까 지금……. 태형은 정국이 뱉은 말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되짚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정체가 들킬까 봐 그게 걱정돼서 준비하다 말고 여기까지 뛰어 왔다는 소리인 건가?

나야 상관없지만, 형은 들키면 안 되잖아요.”

 

여전히 민망한 듯, 낮은 목소리로 정국이 말했다. 태형은 그대로 가만히 멈춰 서 그런 정국을 쳐다봤다. 이거 좀 이상하긴 한데, 그러니까, 되게 당연한 거일수도 있는데. 그냥 여럿도 아니고 단 둘만 조선에 떨어진 거니까 서로 돕는 게 맞는 건데. 이런 상황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너무 이상한데.

 

, 전하, 소인이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오늘 중전의 목욕은 내가 거들어도 되겠느냐.”

? 전하! 어찌 그런……. 감히 어떻게…….”

 

나 왜 설레지?

 

태형은 빨라지고 있는 제 심장 박동을 느끼며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정국의 시선이 지금 저를 향하고 있지 않다는 거였다. 어떻게 핑계를 대야 상궁들이 태형의 목욕 시중을 들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듯, 정국은 살짝 찌푸린 미간을 하고 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정국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면, 이유 없이 빨개진 제 얼굴을 봤을 테니까. 태형은 두근두근 뛰는 제 심장께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댔다. 대체 왜…….

 

, 전하! 그래도…….”

중전이!”

…….”

그런 말도 하지 않았느냐!”

?”

중전의 몸은 나만 만질 수 있다고!”

……!”

 

라고?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순간, 태형은 빠르게 뛰던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너 방금 뭐라그랬그러나 태형이 그대로 굳어 버렸거나 말거나, 정국은 조근히 말을 이어 나갔다.

 

중전의 뜻이 그렇다면, 나만 중전을 도울 수 있지 않겠느냐.”

, 황공하옵니다, 전하!”

 

태형이 그렇게 혼자 하겠다 할 때에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더니, 정국의 말 한 마디에 상궁들은 바로 수긍했다. 그러나 그런 상궁들의 태도에 태형이 배신감을 느낄 새도 없이, 태형은 지금 온통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바로 상궁의 말을 듣고 살짝 웃으며 저를 돌아보는 정국의 얼굴. 태형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 , !

 

, 그거, 어떻게, 어디서 들었어?”

? 뭐가요? 그나저나 형. 이제,”

, 내가, 내 몸 너만 만질 수 있다고, ,”

, 그냥 신하들이 말해주던데요. 그건 그렇고 이제 씻어요, .”

아니, , !!!!”

걱정 마요. 안 볼 테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태형은 말을 채 잇지 못한 채로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태형이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마치고, 정국은 뿌듯한 얼굴로 살짝 웃으며 뒤를 돌았다. 태형은 탕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갈 생각도 못한 채로, 정국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린 그 상태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태형은 만약 제 손에 지금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면. 그래서 초록창에 검색을 해 볼 수 있었다면.

 

시바아아알……!”

 

가장 빠르고 고통 없이 죽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지 검색했을 거란 뜻이다.





*옥경(玉莖·임금의 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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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고, 태형은 생각했다. 처음에는 분명히 서로 마주치면 간단히 눈인사만 하는 사이만이라도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사이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됐다. 같이 밥을 먹으면 같이 술을 마시고 싶고, 술을 마시면 눈을 맞추고 얘기하고 싶고. 눈을 맞추고 얘기하고 있으면 키스하고 싶고, 키스하면 자고 싶고. 그러다가 자고 나면, 유치하지만 사랑을 속삭이며 꼭 껴안고 잠들었다가 아침에 같이 눈을 뜨고 싶고.

 

다 왔어요.”

.”

 

태형은 짧은 감탄을 터뜨리며 멍하니 빠져 있던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비싼 차가 좋긴 좋아. 멈추는 것도 몰랐네. 태형이 어색하게 웃으며 안전벨트를 풀자 정국이 씩 웃었다. 그럼 자주 타요. 정국의 실없는 소리에 태형이 됐거든, 하고 짧게 응수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잘 빠진 차에서 내리니 자신에게 모아지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 저 차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알게 되면 더 시끄러워지겠지. 썬팅이 짙게 되어 있으니 그러진 않겠지만, 태형은 혹여나 안에 타고 있는 정국이 보이기라도 할까 봐 재빨리 차 문을 닫았다. 괜한 소란은 딱 질색이었다.

 

, 맞다 형!”

…….”

그런데 형은 왜 내가 나오는 잡지는 안 봐요? 내가 안 나오는 잡지 사기가 더 힘들 텐데.”

…….”

꼭 사 놔요! 나중에 검사할 거니까!”

 

그러나 그런 태형의 노력이 무색하게, 정국은 창문을 내리고는 얼굴을 쏙 내밀어 쓸데없는 소리를 했고, 저에게 모아졌던 시선은 그대로 정국을 향해 개중 정국을 알아본 몇 명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너무나 의도가 투명한 정국의 행동에 태형은 아, 씨발. 하고 조용히 욕을 읊조렸다. 그러니까, 자신을 버리고 윤기와의 약속을 가는 태형에 대한 투정, 내지는 복수. 태형의 살벌한 눈빛에 씩 웃은 정국이 그대로 창문을 올리고 재빨리 차를 몰아 거리를 빠져나갔다. 정국에게 모아졌던 시선은 다시 태형에게로 향한다. 이쯤 되면 정국이 내일 데이트 잊지 마요!’ 라고 외치지 않은 것을 감사해야 하나. 속으로 한 번 더 욕을 읊조린 태형이 걸음을 재촉해 재빨리 건물 안으로 모습을 숨겼다.

 

*

 

그냥 다시 만나면 되잖아.”

미쳤어요?”

 

태형은 태연한 윤기의 태도에 입을 벌리고 테이블을 쿵 쳤다. 그러나 윤기는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고기 먹고 싶다기에 삼겹살집이나 갈 줄 알았더니, 윤기가 태형을 데려온 곳은 멀쩡하다 못해 고급스러움이 넘치는 레스토랑이었다. 이런 곳은 나랑 말고 애인이랑 와야죠. 태형이 투덜거리자 윤기는 네 연애 고민 상담 해 주는 몫이라고 생각해. 가끔은 남이 구워준 스테이크가 먹고 싶은데 이런 곳에 여자 데리고 왔다가 괜히 귀찮아지는 거 싫어. 하고 딱 잘라 말했다. 그게 참 민윤기답다고, 태형은 생각했다.

 

별로 깊게 생각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그게 문제죠. 난 가볍지가 않으니까.”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고 윤기는 밥상머리 앞에서 한숨 쉬지 말라며 작게 잘라진 고기를 포크로 쿡 집었다. 지금 한숨을 안 내쉬게 생겼냐고요, 내가. 짝사랑하는 사람한테서 자꾸 섹파 사이로 돌아가자는 얘기를 듣는데. 태형은 입을 삐죽였다.

첫 경험이 외국 유학 당시 시험이 끝나고 처음으로 갔던 핫한 게이 클럽에서 만난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남자인 만큼, 태형도 자유로운 섹스나 연애에 대해서 보수적인 편은 아니었다. 가끔 몸이 뻐근하면 클럽도 갔고, 한 때는 원나잇도 자주 했었다.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고, 감정이 널을 뛰게 되는 연애보다는 그런 단순한 관계가 훨씬 편했으니까. 그럼 왜 전정국의 지속적인 섹파 제의를 거절하고 있느냐. 그건, 태형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감정의 깊이와 간극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원나잇은 괜찮지만 그 이상으로 이어지는 관계에 감정을 빼놓을 수는 없는 제 자신.

하필 한국인은커녕 동양인도 찾아보기 힘든 도시로 가게 된 외로운 외국 유학 생활이 길었기 때문인지, 태형은 누군가에게 정을 쉽게 주는 편이었다.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쉽게 뿌리치지 못했고, 살이 맞닿으면 맞닿은 시간만큼 어느샌가 제 자신도 모르는 새 감정은 깊어져 있었다. 문제는 그 감정이 항상 상대적이지는 않았다는 거였고. 그 감정의 차이와 간극은 꽤 잔인해서, 몇 번의 속앓이 후에 태형은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니까, 감정이 깊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애초에 그 싹부터 잘라내기로. 매번 클럽에 가서 괜찮은 상대를 찾아야 하는 귀찮음을 감수하더라도, 절대로 주기적으로 만나는 섹스 파트너는 만들지 않을 것.

 

네 말대로라면 어차피 이미 늦은 거 아닌가? 전정국 좋아한다며.”

…….”

다른 사람이랑 붙어먹는 걸 지켜보는 것보단 그냥 섹파라도 되는 게 낫지 않아?”

 

태형은 입을 꾹 다물었다. 윤기의 말이 너무나도 정곡을 찔렀기 때문에, 딱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거랑 그거랑은 다르죠. 잠시간의 침묵 후에, 태형이 말을 이었다. 뭐가 다른데? 어느새 스테이크 한 접시를 깨끗이 비운 윤기의 눈이 태형을 향해 있었다. 태형은 입을 삐죽였다.

 

그냥 자존심이 상하는 건 아니고?”

…….”

걔는 널 섹파로밖에 생각 안 하는데, 너는 걜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게.”

팩트도 너무 직구면 폭력이거든요.”

 

태형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윤기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이 이거였다. 저를 너무 잘 안다는 것.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형 말이 다 맞아요. 그리고 그렇게 계속 만나다 보면, 걜 더 좋아하게 될까봐 무서운 것도 있고. 태형이 결국 속에 있는 말까지 다 털어놓았다. 윤기가 그런 태형을 보며 혀를 찼다. 때 아닌 상사병을 앓고 있는 태형이 조금, 안쓰러운 것도 같았다. 어쩌다 전정국 같은 애한테 빠져서.

 

그럼 차라리 아예 안 보는 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

그건 또 싫고?”

그게 제 마음대로 됐으면 진작에 집 비밀번호 바꿨죠.”

 

윤기로부터 정국을 소개받기 전부터 정국과의 섹스 파트너 관계를 끝낸 지 1년이 지난 지금까지, 태형의 집 비밀번호는 똑같았다. 0215. 태형이 정국을 처음으로 마주한 날짜. 정국은 윤기가 태형을 저에게 소개해 준 그 날을 첫 만남으로 알고 있을 테니 정작 정국은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차라리 처음부터 알려주지 말 걸. 비밀번호 바꾸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바꾸려고 마음먹을 때마다 태형은 결국 문 앞에 주저앉아 버렸다. 자꾸 정국이 그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아서.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정국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 문을 열고 들어와 줬으면 좋겠어서.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소개시켜주지 말 걸 그랬나.”

…….”

그랬으면 차라리 나았을 거 같아?”

 

윤기가 가만히 태형에게 말했고 잠시 윤기를 쳐다보던 태형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정국을 만난 걸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어떨까. 태형은 제 앞에 높여진 샐러드를 의미 없이 뒤적였다. 분명한 건, 윤기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 태형은 정국을 만나고야 말았을 거라는 것이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랬다. 언젠가는 그랬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믿고 싶으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는 몰라도.

정말 제 예감이 맞다면, 윤기가 자연스럽게 정국을 소개시켜 준 건 차라리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 팬이라고 해서 별 생각 없이 정국에게 저를 소개시켜 준 윤기가 무슨 잘못이 있을까. 잘못은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잔뜩 취해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초면에 원나잇을 해 버린 제 자신에게 있지. 태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작부터가 엉켜 있었으니 관계가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에휴, 생각해서 뭐 해. 잠시 멍하니 정국을 생각하던 태형이 이내 정국의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됐고, 이제 일 얘기 합시다. 몇 곡 필요한데요?”

“3. Intro, Outro, 남주인공 테마곡.”

 

태형의 말에 윤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고 윤기의 말에 태형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겨우 세 곡? 나야 고맙긴 한데.

 

갑자기 연락해서 부탁하기에 많이 필요하거나 급하게 필요하거나 둘 중 하나일 줄 알았는데. 둘 다 아니네요?”

사실 이미 곡이랑 작곡진 다 정해져 있었거든.”

 

태형의 말에 윤기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국이 처음으로 성인 주연을 맡으며 대박을 터뜨려 성공적인 성인 연기의 포문을 열게 된 영화가 윤기의 첫 상업 영화 데뷔작이라는 특별한 인연에, 둘은 그 뒤로도 몇 편의 영화를 함께 찍었었다. 그 중의 하나에서 태형이 OST를 맡게 되어 그 때 윤기가 정국을 소개시켜 줬던 거고. 사실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다른 때보다 훨씬 빠르게 가까워진 윤기가 정국의 팬이라는 태형의 말에 신경을 써 주지 않았다면 굳이 작곡가인 태형이 정국을 소개받을 일은 없었을 거였다.

어쨌든. 이어진 말에 태형의 눈이 조금 더 짙은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작곡가가 다 정해져 있었다면 더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제 입으로 말하긴 민망하지만 태형은 이쪽에서는 알아주는 영화 음악 작곡가였고, 들어오는 일거리야 차고도 넘쳤다. 사실 윤기에게서도 이번에 들어가게 될 영화의 음악을 맡아 달라는 눈치를 받았지만, 이미 예전에 받아 놓은 일거리가 넘쳐나는 탓에 고사했었고. 그런데 그렇게 마무리 된 줄 알았던 윤기에게서 며칠 전에 연락이 온 거였다. 이번 영화에 태형의 곡이 꼭 필요하다고. 평소에 아쉬운 소리를 잘 하지 않는 윤기였던지라, 그만큼 급한 일인가 보다 싶어 조금 무리할 각오를 하고 승낙했었는데.

 

그럼 왜…….”

그런데 우리 남주인공께서, 김태형 작곡가님의 곡이 아니면 안 하시겠다고 땡깡을 부리셔서.”

 

살짝 태형의 눈치를 본 윤기가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그 말에, 태형은 순간 멍해지는 머릿속을 느낄 수 있었다. 윤기의 말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거였으니까. 정국의 성격상 장난으로라도 내 덕분에 형 돈 더 많이 벌겠네요.’ 하고 말했을 법도 한데, 윤기에게 부탁을 받고 그 부탁을 수락한 후에도 정국은 별 말이 없었다. 윤기를 만나러 간다는 말을 들은 오늘까지도 정국은 마치 자신도 어디선가 들은 것처럼 형 이번에도 내가 하는 영화 OST 맡았잖아요.’ 하고 말했을 뿐이다. 태형은 가만히 입을 벌리고 허공을 쳐다봤다. 이거 좀이상한 상황 맞지.

 

전정국이 말 안 해?”

오늘도 만났는데 별 말 없었어요. 형 만나러 간다고까지 얘기했는데.”

걔 휴가 간 거 아니었어?”

헤어지고 귀국했대요.”

이번엔 좀 오래 가나 싶더니.”

 

걔가 그럼 그렇지. 윤기가 한숨을 내쉬었고 태형은 어색하게 웃었다. 잠시 그런 태형을 응시하던 윤기가 살짝 고민하는 듯 입술을 깨물다 여전히 멍 해 있는 태형의 손을 툭 건드렸다. 태형아. 사뭇 진지해진 윤기의 목소리에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기를 쳐다봤다.

 

전정국. 좋은 배우고 좋은 놈이지만.”

…….”

좋은 애인은 아냐.”

 

꽤나 고민한 듯 무겁게 이어지는 윤기의 목소리에 태형이 어색하게 웃었다. 윤기가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지는 태형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 표현하진 않아도 윤기가 제 자신과 정국을 모두 아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윤기는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거다. 저 말도, 태형을 위해 진심으로 해 주는 어렵게 꺼낸 말이겠지. 정국과의 애매한 관계에서 상처를 받는 것은 태형, 자신뿐이었으니까. 태형은 그런 윤기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알아요.”

…….”

그러니까 더 이상 안 가려고 하고 있는 거고.”

 

태형은 말을 마치고 샐러드를 입 안에 구겨 넣었다. 그런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태형은 천천히 야채를 씹었다. 지금도 이렇게, 아무런 의미 없을 정국의 행동에 괜히 의미를 부여하면서 심장이 뛰는데. 태형이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지나 드레싱에 잔뜩 절여진 야채가 입 안에서 질척하게 뒹굴었다.

 

*

 

내가 준 넥타이 했네요?”

 

정국과의 약속이 있는 날 저녁. 의식하지 않으려 했음에도 평소보다 일찍 떠진 눈에 태형은 곧바로 작업실로 향했지만 오전 내내 작업에는 진전이 없었다. 당연했다. 머릿속에는 음표와 오선지 대신 정국에 대한 생각들로만 가득 차 있었으니까. 결국 의미 없는 멜로디만 두드리다 작업 창을 닫은 태형은 차라리 드레스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약속 때문에 신경을 썼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정국과의 약속을 일찍부터 준비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도저히 다른 것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정국은 신경도 안 쓰겠지만.

 

그랬나.”

 

그런데 또 귀신같이. 제가 선물해 줬던 넥타이를 알아보는 거다. 사실 정국과 만난다고 부러 정국이 선물해 준 넥타이를 하고 나온 것은 아니었고, 정말로 그게 마음에 들었던 거였는데. , 그래. 이것도 문제였다. 정국이 제 취향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어도 존재 자체가(정확히는 얼굴이) 제 취향인데 정국은 제 옷 취향이나 음식 취향도 귀신같이 잘 알았다. 이래서 그렇게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인기가 많은 건가. 연예인으로서도, 파트너로서도. 괜히 다운되는 기분에 태형이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그런 정국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국은 넥타이 잘 어울린다며 씩 웃었다. 웃지 마. 정들어. 태형(29, 이미 전정국에게 정이 들다 못해 좋아 죽겠는 사람)이 속으로 꿍얼였다.

 

여기 수제 버거가 엄청 맛있대요.”

근데 너 이런 데 와도 돼?”

 

정국이 태형을 데려온 곳은 태형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던 수제버거집이었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간 태형은 의외의 풍경에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스테이크나 파스타 같은 것보다 햄버거를 훨씬 더 좋아하는 태형으로서는 다른 곳보다도 이 수제 버거 집이 좋은 선택일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정국의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이렇게 뻥 뚫린 인테리어로 되어 있는데다 유명하기까지 한 햄버거 집은 생각도 못 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여기 와 보고 싶었던 건 또 어떻게 알았대. 알고 그랬다기보다는 그냥 별 생각 없이 고른 곳이었겠지만.

 

뭐 어때요. 연예인은 햄버거도 못 먹나?”

아니,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알아보잖,”

형이랑 있는데 뭐 어때요.”

 

스캔들 같은 거라도 나면 어쩌려고, 하고 말을 이으려던 태형은 정국의 말에 입을 합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전정국도 남자고, 저도 남자고. 제가 정국을 좋아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니 괜히 찔려서 그렇지 정국과 저의 관계는 몇 번쯤 같이 밥을 먹어도 전혀 스캔들이 날 일이 없는 사이였다. 게다가 지금은 정국이 주연을 맡아 촬영하고 있는 영화의 OST까지 맡게 되었으니까. 스캔들이야 현이 씨 같은 사람이랑 밥을 먹어야 나는 거겠지.

괜히 한 번 더 정국과 제 사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인을 받은 느낌에 태형이 제 머리를 살짝 헝클어트렸다. 속상해할 일도 아닌데 괜히 속이 상해서, 그게 더 속이 상했다. 이래서 연애가 하기 싫었던 거였는데. 끝없는 감정 소모. 그런데 심지어 이건 연애도 아니고 일방적인 짝사랑이야. 태형이 입술을 물었다.

 

여기 싫어요?”

아냐. 먹자.”

 

제 표정이 눈에 띄게 안 좋아진 것을 느꼈는지, 옆에서 정국이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목소리가 들렸고 태형은 애써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이런 말을 정국에게 할 수는 없으니까. 한 번 더 태형을 흘긋 쳐다본 정국은 뭐라 한 번 더 말을 걸려는 것 같았으나 마침 종업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고 태형은 고개를 돌렸다. 종업원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마도 전정국 때문에.

 

전정국으로 예약하셨죠? 두 자리.”

.”

이 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약속 잡은 게 어제 밤인데, 그 짧은 새 예약까지 해 둔 모양이었는지 안내를 받아 자리하게 된 곳은 커다란 창이 옆으로 나 있는 자리였다. 좋은 자리도 예약했네. 태형이 속으로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형 뭐 먹을래요?”

…….”

 

태형이 메뉴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버거 자체는 A세트가 마음에 드는데, 사이드메뉴는 D세트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혹시 사이드메뉴를 바꿀 수 있을까 싶어 메뉴판을 훑으니 매정하게도 사이드 메뉴 변경 불가가 버젓이 쓰여 있다. 태형이 습관적으로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둘 중 뭘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정국을 흘긋 쳐다보니 메뉴판에는 관심도 없는 눈치였다. 두 개 시켜서 나눠 먹자고 하면 좀 그런가. 결국 끙, 하고 고민하던 태형이 메뉴판 위에 A세트를 손으로 짚었다.

 

나 이거.”

그럼 A세트랑 D세트 주세요.”

 

. 태형이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살짝 놀라 정국을 쳐다보니 정국은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냥 우연의 일치인가? 괜히 찔리는 느낌에 태형이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네, 진짜.

 

어제 윤기 형이랑은 뭐 했어요?”

그냥 밥 먹었는데.”

뭐 먹었는데요?”

 

그런 건 왜 물어봐? 태형이 살짝 미간을 좁히며 대꾸하자 정국이 그냥, 궁금하잖아요. 하고 웃었다.

 

이틀 연속으로 다른 사람이랑 데이트 하고.”

이게 데이트냐? 그냥 저녁 뜯기는 거지.”

뜯기다뇨. 너무하네.”

네가 애인이랑 헤어지는 바람에 내가 위로해 주는 거잖아. 내 돈 쓰면서.”

위로해달라고 한 적 없는데? 그럼 오늘 내가 다 사면 데이트라고 해 줄 건가?”

 

뭐래. 태형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정국을 쳐다봤다. 누가 배우 아니랄까봐 대사는 잘 치네. 속으로 생각하며 태형이 제 앞의 물을 들이켰다. 어차피 원하는 건 그냥 나랑 자는 거면서, 정국은 자꾸 저렇게 사람을 헷갈리게 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한테도 다 저러겠지만. 한없이 가벼운 전정국. 태형은 그런 정국의 잘생긴 얼굴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어쩌다 저 얼굴에 낚여가지고. 태형은 차라리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정국의 의중을 다 알고 있어도 정국의 저런 말과 얼굴에는 내성이 없었으니까.

 

스테이크 먹었어.”

. 스테이크.”

…….”

그런데 형은 스테이크보다 버거가 더 좋죠?”

 

그런데 화제는 왜 다시 이쪽으로 회귀하는가. 태형은 입술을 물었다. 정국이 하는 말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 싸움인 건가? 내가 어제 자기 버리고 윤기 형한테 갔다고? 태형은 눈을 굴렸다. 그냥 그렇다고 하면 끝날 대화긴 한데. 실제로도 스테이크보다는 여기가 더 좋고. 그러나 괜히 지고 싶지 않았다. 태형은 아니? 하고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정국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진다.

 

거기가 분위기 더 좋았는데.”

거짓말.”

스테이크랑 햄버거랑 비교가 되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태형이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정국을 당당히 마주하기에는 양심에 찔렸으므로. 그러자 정국이 흠, 하고 팔짱을 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기분이 안 좋다는 명백한 의사표현. . 어쩌라고. 태형이 괜히 속으로 투덜거렸다.

 

진짜 민윤기랑 사귀어요?”

뭐라고?”

아님 섹파?”

.”

날 두고?”

 

, 왜 또 화제가 그리로 가. 애써 돌린 보람도 없이 원점으로 돌아간 대화에 태형이 정국과 눈을 맞췄다. 그러나 정국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대체 왜 저래? 태형도 덩달아 미간을 좁혔다. 눈치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왜 애먼 윤기 형한테 불똥이 튀냔 말이다. 태형이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니거든. 윤기 형은 그런 사람 아니야.”

그럼 난 그런 사람이고?”

말꼬리 잡지 마.”

그럼 더 문제 될 거 없잖아요. 나랑 자자니까요?”

싫다니까. 너 자꾸 이러면 나 진짜,”

나 못해요?”

그런 문제가 아니,”

좋아했잖아.”

. 글쎄.”

그럼 민윤기 좋아해요?”

!!!”

 

결국 태형이 저도 모르게 쾅, 하고 테이블을 치고는 놀라 주위의 눈치를 봤다. 저도 모르게 커진 목소리가 주위에 들렸을까봐. 탁 트인 가게 안이었지만 다행히 테이블 사이가 꽤 떨어져 있는 데다 그나마 자리가 외진 곳이어서 그런지 주위에 들렸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정작 정국은 정말로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답답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나만큼 답답할까.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왜 궁금한데. 태형의 한층 낮아진 목소리에 정국이 말을 이었다.


나한테도 이유는 알려줘야죠. 그 때도 형이 일방적으로 끝냈잖아요. 난 이유도 모르고.”

그 땐 아무 말 없었잖아, 너도.”

그거야 형이 잠수를 탔으니까!”

 

사실, 태형도 찔리는 것은 있었다. 정국과의 섹스 파트너 관계를 이어가다가 도저히 이렇겐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태형이 일방적으로 관계를 끝낸 게 맞으니까. 그것도 매너 없이 한창 영화를 촬영하고 있을 정국에게 문자로. 그리고는 그대로 해외로 잠수. 그러나 태형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정국의 얼굴을 보면 도저히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계속 감정 없는 파트너 관계를 이어 갈 수도 없고. 정국의 말에 살짝 어깨를 움츠렸던 태형은 이내 문득 떠오른 생각에 다시 눈을 똑바로 떴다. 왜냐하면, 태형에게도 할 말이 아주 없는 것은 또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이주일 간의 잠수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계기가, 타국에서 접하게 된 유명 모델과 정국의 열애설이었다. 아무리 섹파에 불과했다지만 태형과의 관계가 끝난 지 이주일 만에.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호텔로 들어가는 두 남녀의 실루엣. 그 사진을 본 순간 얼마나 열이 올랐는지, 태형은 곧바로 귀국 비행기 티켓을 끊었었다.

 

민윤기 좋아하냐고요.”

 

그러나 어차피 다 지난 얘기고. 그 이후로도 정국은 공식적으로는 한 번, 비공식적으로는 세 번 정도 이별을 겪었다. 아마 원나잇까지 합하면 더 많겠지. 섹파도 이별로 치나? 아무튼. 태형이 입을 삐죽였다. 헤어지자마자 모델이랑 호텔 간 건 자기면서, 이제 와서 왜 이러는데? 빈정대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태형은 그 말을 간신히 혀끝으로 밀어 삼켜냈다. 괜히 치졸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뭐가 됐든, 태형은 순순히 정국이 원하는 대답을 내어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그럼 이렇게 가볍게 형 건드리는 짓 안 하죠.”

 

그래서 퉁명스레 내뱉은 말에 돌아오는 대답이 어쩌면 의외의 것이어서, 태형은 순간 쿵 하고 떨어진 제 심장을 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눈치 챘을까. 흘긋 정국의 눈치를 보니 정국이 눈치를 챈 것 같진 않았다. 속으로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태형이 괜히 바짝 마르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가벼운 건 아냐?”

당연하죠.”

 

정국의 대답은 단순명료하게 떨어졌다. 태형은 괜히 물컵을 꼭 쥐었다. 그래. 알긴 아는구나. 날 대하는 네 태도가 엄청 가볍다는 거. 그러니까, 알고도 그런다는 거지. 그리고 내가 윤기 형을 좋아하면 바로 그만둘 수 있을 정도로, 쉽다는 거지. 태형이 입 안쪽 여린 살을 잘근 씹었다. 어째 지고 싶지 않아 말을 하면 할수록 피해는 태형 자신만 입는 것 같은 느낌이다.

태형과 정국이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는 사이, 때마침 종업원이 손에 그릇을 들고 천천히 다가왔고 태형은 재빨리 표정을 풀었다. 이 와중에도 혹시 정국이 구설수에 오를까 싶어서. 아 정말. 이렇게 사려 깊은 사람이 또 어딨어. 태형은 살짝 웃으며 햄버거를 건네받았고 정국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런데 D세트를 받은 정국이 햄버거로 손을 뻗는 대신 제 세트에 있는 감자를 들어 태형의 A 세트에 있는 샐러드와 바꿔 가져가는 것이다.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국을 쳐다봤다. 너 지금 뭐 하냐? 그러자 정국이 아무렇지도 않게 제 앞에 놓인 콜라를 마시며 응수했다.

 

형 풀 안 먹잖아요. 버거에는 감자튀김이라고 입에 달고 살았으면서.”

그건 그런데…….”

나 체중 관리도 해야 하니까, 겸사겸사.”

 

체중 관리 하는 놈이 햄버거 먹냐. 태형은 멍하니 생각하며 제 앞에 놓여진 감자튀김을 쳐다봤다. 제 심장 박동이 기분 좋게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 태형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런 건 좀

 

…….”

 

반칙이잖아. 태형은 빨개졌을 얼굴을 숨기기 위해 콜라를 들이켰다. 탄산이 목을 따끔따끔 쏘아대다가 식도를 타고 심장까지 따끔거리게 했다. 진짜, 쓸데없이 기억력은 좋아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 이렇게 해 줄 것을 아는데. 그냥 저런 매너가 몸에 밴 앤데. 그러나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괜히 기대감이 조금씩 커지는 것도. 태형이 버거를 한 입 물었다. 어제 푹 젖어 질척거렸던 야채와는 달리 양상추가 기분 좋게 아삭거렸다.

 

작업은 잘 돼 가요?”

 

직전의 대화가 애매하게 끝나서 살짝 어색해진 분위기에 뭐라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정국이 먼저 입을 열었다. 태형은 버거를 씹다 말고 정국을 쳐다봤다. 그래. 이것도 있었지. 자기가 부탁해 놓고, 나한테 말 안 한 거. 평소 같았으면 별 거 아니라고 치부하고 그냥 넘어갔을 텐데, 그게 전정국이 되니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지금 물어볼까. 그냥, 네가 부탁한 거라며. 왜 말 안 했어? 하고 자연스럽게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고민하던 태형이 살짝 정국의 눈치를 보다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정국의 핸드폰이 가볍게 진동하며 제 존재를 알렸다. 잠깐만요, 하고 뒤집어 놓았던 핸드폰을 확인한 정국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리고, 태형은 제 입술을 살짝 물었다. 진동하던 핸드폰 위에, 잠깐 반짝이고 있었던 익숙한 이름 때문에.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잠시 핸드폰을 보다가 입술을 깨문 정국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고 태형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까지 기분 좋게 뛰던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류현이’. 정국의 바로 전 여친 이름. 그리고 어쩌면잠시 후에 전 여친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는 이름. 갑자기 입맛이 떨어져 태형은 햄버거를 내려놓고 콜라를 들었다. 얼음이 녹아 스테인레스 잔 밖으로 맺힌 물방울이 차갑게 태형의 손에 닿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태형은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정작 흐른 시간은 2분여 남짓인데 꼭 2시간이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테이블이 멀어 느껴지지 않던 소음도 왜인지 아까보다 훨씬 크게 들려서 혼자가 된 느낌을 가중시켰다. 헤어진 사이에,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을까. 태형은 어느새 바닥을 보이는 콜라잔을 내려놓았다. 차가운 음료를 한 번에 많이 마신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태형이 의미 없이 메신저를 확인하고 있을 때, 정국이 다시 돌아왔다. 살짝 난처한 얼굴을 하고.

 

.”

가 봐야 돼?”

 

정국은 제 자리에 제대로 앉지도 못 한 채로 태형의 눈치를 봤다. 정국이 나가서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아니, 살짝 굳은 얼굴로 현이 씨로부터 오는 전화를 응시했을 때부터 어쩌면 예상하고 있었다. 태형은 숨을 살짝 들이쉬었다. 가 봐. 급한 일인 것 같은데.

 

미안해요, . 여긴 내가 낼게요.”

당연히 그래야지. 헤어진 것도 아닌데.”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하지 말지. 아니길 바라고 넌지시 던진 말은 칼이 되어 태형을 찌른다. 태형은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소 같았으면 빈말로라도 집까지 데려다 줄게요.’하고 말했을 정국인데, 이번에는 그런 말도 없었다. 정말 급하긴 한가 보네. 반도 먹지 못한 버거를 뒤로 하고 계산대에 선 정국을 기다리면서 태형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 못한 배가 허전했다.

계산을 마치고 내려가면서, 정국은 한 번 더 미안하다고 말했고 태형은 대충 손을 들어 손짓했다. 나중에 제가 더 비싼 거 사줄게요. 정국의 말에 태형은 됐어, 하고 건물 밖으로 나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정국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그제서야 현실감이 들었다. 정국은 현이 씨에게 갔고, 자신은 혼자 남았다. 태형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서서 거리를 쳐다봤다. 거리는 어느새 어둑해져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낮에 제법 더웠던 날씨 때문에 얇고 입게 나온 것이 실수였는지 차가워진 기온에 태형이 살짝 몸을 떨었다. 아직 5월인데. 낮에 더웠다고 이렇게 얇게 입고 나오는 바보가 여기 있네. 태형이 중얼였다.

 

헤어진 것도 아니면서 나보고 자쟤. 나쁜 새끼.”

 

늘 이런 식이었다. 혼자 착각하고, 기대하고, 결국엔 혼자 남겨지고. 태형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선선한 바람이 태형을 감싸 돌고 지나갔다. 언제쯤이면 착각하지 않을 수 있게 될까. 여름은 아직 멀었는데.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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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술 사줘요.”

깜짝이야…….”

 


갑자기 방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소리에 태형이 놀라 쓰고 있던 헤드폰을 내려놓았다. 집 안에 딸려 있는 작업실이었지만 새벽까지 작업을 하다, 침대가 있는 침실까지 가기가 귀찮을 때 잘 용도로 작업실 안에 가져다 두었던 싱글킹 사이즈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인영에 태형이 미간을 좁혔다. 분명히 작업 중 팻말이 걸려 있을 땐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혼자 사는 집임에도 불구하고 작업실 방문 앞에 달아 놓은 작업 중이라는, 필요 이상으로 친절한 팻말은 단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 사람이 그 팻말에 쓰인 한글의 의미를 전혀 존중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걸어 놓은 이래로 단 한 번도 제 몫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태형은 제 침대에 누운 인영을 세게 째려봤다. 너 안 일어나?

 


작업실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

나가.”

 


태형이 세모눈을 하고 방문 밖을 가리켰다. 허리에 손까지 올리고, 제법 매서운 눈을 한 태형 때문에 침대에 누워 한 번 더 수울-하고 떼를 써 보려다가, 결국 못이기는 척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누워서 더 떼를 써 봐야 태형이 제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고, 오히려 역효과만 더 일으킬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의외일 만큼 관대하면서, 작업실에 대해서만큼은 태형은 단호했다. 결국 어깨를 으쓱하고 밖으로 나가자, 태형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제 신성한 작업실에 제멋대로 쳐들어온 불청객을 내쫓고, 하던 작업을 대충 마무리한 뒤 거실로 나오자 불청객은 어느새 자연스레 소파에 앉아 탁자에 놓여진 잡지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아주 자기 집이 따로 없네. 불청객 쪽으로 한 번 시선을 던진 태형은 그대로 부엌으로 가 커피를 내렸다. 오늘 오후에 약속 나가기 전에 곡 하나는 끝내려고 어젯밤을 그대로 샜더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제 마무리만 하면 됐었는데.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 때문에 아무래도 오늘 약속 전까지 끝내기는 무리지 싶다. 어느새 다 내려진 커피를 머그컵에 담아 들고 거실로 나간 태형이 입을 열었다.

 


현이 씨랑 칸쿤 간다더니. 왜 여기 있어?”

헤어졌어요.”

.”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헤어져? 태형이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자 불청객은 어깨를 으쓱한다. 상대가 요즘 주가가 치솟는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인 만큼 이번에는 좀 오래 가는가 싶더니. 역시나 100일을 제대로 못 넘긴다. 태형이 무심코 커피에 입을 댔다가 아뜨, 하고 다시 내려놓았다. 잠이 부족해서 머리가 몽롱했다.

 


찬 거야, 차인 거야?”

둘 다?”

그게 뭐야.”

몰라. 술 사줘요.”

스케줄까지 다 빼고 100일 여행 계획하기에 이번엔 좀 진지한가 했더니.”

 


절대 안 된다는 매니저의 말에도 꼭 가야 한다고 생떼를 부리던 모습이 아직도 훤한데.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지금 매니저랑 대판 싸우고 얻어낸 금쪽같은 일주일간의 휴가를 3일 만에 박살내고 기껏 온 곳이 내 집이란 말이지. 그러나 제 눈앞의 인영은 태형의 한숨에도 태평했다. 그렇죠. 그러니까 술 사줘요. 앵무새도 아니고, 계속해서 따라 붙는 술 사달라는 말에 결국 태형이 다시 미간을 좁혔다.

 


돈도 많은 게, 왜 자꾸 나한테 술을 사달래?”

. 우리 사이가 이것밖에 안 돼요? 실연당한 사람한테 술도 못 사주나?”

보나마나 네가 잘못했겠지!”

 


태형이 잔을 제법 세게 내려놨다. 그 모습에도 눈 깜짝 않는다. 저런 게 지금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핫한 배우라니. 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 한숨이 나왔다.

전정국. 나이는 27, 6살 때 스크린으로 데뷔해 그 때부터 쭉 쉬지 않고 연기를 해 온 국민 배우. 어린 나이에는 아역상을 휩쓸고, 커서는 남우주연상과 대상을 휩쓸고. 마의 청소년기도 훌륭하게 넘겼으며 나이에 비해 연차가 높다 보니 자칫 식상해졌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연기력과 그에 걸맞은 화려한 필모그래피로 운과 실력을 두루 갖춘 이시대의 아이콘이자 선망의 대상. 뭐뭐하고 싶은 남자, 하면 1위를 가져가는 건 예사였고 연예인들의 연예인, 연예인들의 이상형에 심심찮게 뽑히는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그의 화려한 이력에 대해 얘기하자면 밤을 새도 모자랄 정도로 끝도 없는 사람.

 


그래서 이번에는 왜 헤어졌는데?”

지나가는 여자 가리키면서 쟤 너 스타일 아니냐길래, 그렇다고 했어요.”

…….”

그럼 자고 싶냐길래, 그렇다고 했고.”

미친…….”

 


그런데 전정국에 열광하는 그 사람들은 알까. 전정국이 사실은 이런 놈이라는 걸. 태형은 머리를 짚었다. 그런 태형의 반응에도 눈앞의 정국은 태연했다. 그랬더니 헤어지자던데요. 더 이상 간단할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끝난 정국의 설명에 태형은 입을 벌렸다. 그게 무슨 둘 다야. 그냥 네가 찬 거지! 그것도 상대에 대한 예의라곤 쥐뿔도 없이!

 


요즘은 쓰레기가 말도 하네.”

, 그게 아니라.”

 


정국이 다시 소파에 늘어졌다. 태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그런 태형을 바라보던 정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처음엔 아니라고 했죠. 그 정도 눈치도 없을까봐.”

그런데.”

남자고 여자고 지나갈 때마다 물어보는데, 이쯤 되면 내 입에서 그렇다는 말이 나오길 바라고 있는 거 같기도 하고.”

그거야 니가-”

근데 또 걔가 짚는 사람마다 귀신같이 내 스타일이어서.”

…….”

원하는 게 쓰리썸인가? 근데 난 그건 별로거든요.”

 


태형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렸다. 사위 삼고 싶은 남자 1, 결혼하고 싶은 남자 1. 여름휴가를 같이 보내고 싶은 남자 1위라는 타이틀이 정국의 위에서 반짝거리다 우르르 부서져 내렸다. 결혼을 하고 사위를 삼고 여름휴가를 같이 보내고 싶기는 개뿔. 현실은 여름휴가 갔다가 싸우고 헤어진 남자고, 결혼했다간 인생 말아먹기 딱 좋은 남자 1위일 텐데. 그러나 그런 태형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국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헤어졌어요.

 


그리고 넌 귀국하고?”

니가 갈래, 내가 갈까. 그러기에 내가 간다고 했어요.”

잘 했다…….”

차이고, 호텔에서도 쫓겨나고. 형한테 술 얻어먹을 자격은 충분하지 않아요?”

차이긴. 네가 하도 못미더우니까 계속 물어본 걸 거 아냐. 계속 아니라고 대답해 줬어야지.”

 


이 쉽고 간단한 걸 정국은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다 알면서 그냥 그렇게 해주기가 싫은 걸까. 정국이 바보도 아니고, 아마 마지막 선택지가 그 답일 거였다.정국은 원래 그랬으니까. 그 상대가 누구든 인연에 연연해하지 않고, 복잡하고 귀찮은 건 싫어하고. 맺고 끊음이 확실하고 깔끔했다. 그러니 정글 같은 연예계에서 저렇게 자유롭게 살아도 더러운 뒷소문이 나지 않는 거겠지. 태형은 어느새 적당히 식은 머그컵을 다시 들었고 정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형이랑 할 때가 제일 좋았는데.”

푸흡!”

 


그리고 이어진 말에, 태형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보람도 없이 그 커피를 그대로 쏟아냈다. 콜록, 콜록, 콜록. 커피가 적당히 식어서 천만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입천장이 홀라당 다 까졌을 것이다. 그 사실에 감사하며 태형은 새빨개진 얼굴로 입가에 묻은 커피를 닦아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나온 말에 태형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정작 말을 꺼낸 정국은 태연했다.

 


, 그냥 다시 나랑 자면 안 돼요?”

그런 소리 하지 말랬지.”

형만한 사람이 없어요.”

.”

 


태형이 세차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사뭇 진지한 얼굴로 정국을 쳐다봤다. 하지만 정국은 그런 태형의 표정에도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대체 왜 싫다는 거예요?

 


형도 지금 사귀는 사람 없다면서요.”

그거랑 상관없어.”

그럼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나?”

전정국.”

설마, 날 두고.”

.”

 


태형이 표정을 굳히고 낮은 목소리로 정국을 불렀다. 이런 화제는 불편했다. 태형이 부러 머그컵을 소리 나게 탁자 위에 올려놨다. 그만 하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는 정국이 눈썹을 찌푸렸다. 정국의 입이 다물어지는 것을 확인한 태형이 얕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머그컵을 쥐었다. 이제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밤을 새는 작업도 자제해야 될 듯싶었다. 오늘 약속 나가서 제대로 정신 차릴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태형이 벽에 걸린 시계를 흘긋 쳐다봤다. 슬슬 정국을 내보내고 약속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나 오늘 약속 있어. 술 먹고 싶으면 나중에 약속 잡고 와.”

누구랑요?”

윤기 형.”

?”

 


누구와의 약속이냐 물어보는 정국의 목소리에 대답해 주지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괜히 대화가 길어져 봐야 피곤할 것 같아 그냥 순순히 대답했더니 꽤 불만인 듯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형은 몸을 돌려 다시 싱크대 쪽으로 향했다. 애초에 잠을 깨려고 내린 커피였는데, 정국의 말에 잠이 전부 달아나 버렸으니 이제는 카페인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약속이 있다는 태형의 말에도 정국은 일어나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실연의 슬픔에 잠긴 나보다 민윤기가 더 중요해요?”

.”

너무하다-”

 


윤기는 태형의 오래된 형으로, 정국과는 친한 형, 동생 사이였다. 애초에 태형과 윤기가 알게 된 계기가 정국의 영화를 함께 하게 된 것이었으니 오래되기로는 저보다 정국과 윤기의 사이가 더 오래 됐을 텐데, 그래서 그런지 정국은 윤기가 저보다 4살이나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심심찮게 윤기를 윤기 형이라는 호칭 대신 민윤기, 하고 불렀다. 윤기가 그 사실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나가, 빨리. 나 준비해야 돼.”

진짜 나 버리고 가려고?”

버리긴 누가. 그러기에 누가 멋대로 집에 쳐들어오래? 집에 나 없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으면 이 집에서 혼자서 쓸쓸히 형 기다렸겠지.”

주인도 없는 집에 누가 함부로 들어와도 된댔는데?”

그런 말은 집 비밀번호나 바꾼 다음에 하지?”

정신이 없어서 그랬어. 조만간 진짜 바꿀 거야.”

“1년 동안?”

 


정곡을 찔린 태형이 입을 꾹 다물었다. 태형은 정국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정말로 몸을 돌려 싱크대에 컵을 집어넣었다. 이제 정국이 뭐라 하든 절대로 반응하지 않을 참이었다. 일일이 대꾸해 주다 보면 결국 끝에 가서 지는 것은 언제나 태형 자신이었으니까. 태형이 말없이 침실로 들어가자 정국이 그제서야 소파에서 일어나 태형을 졸졸 쫓아왔다.

 


사귀는 중은 아니고, 썸타는 중인가?”

…….”

민윤기와의 약속이 날 버리고 갈 정도로 소중한 약속이란 말이지.”

…….”

몸 정도 있는 나를 버리고.”

…….”

, 형이랑 자고 싶다.”

!!!!!!!!”

 


결국 듣다듣다 폭발한 태형이 고개를 휙 돌렸다. 너 진짜 안 나가냐? 주거 불법침입으로 고소해 버린다!! 태형이 소리를 지르자 정국이 고개를 으쓱했다. 그럼 다음 날 신문 헤드라인은 전정국의 비밀스러운 연인이겠네요. 신문 1면엔 내 얼굴이랑 형 얼굴이랑 나란히.

 


너 안 꺼져?!”

검색어 1위하겠다. 이번에 새로 들어갈 영화 홍보엔 좋겠네. 형 이번에도 내가 하는 영화 OST 맡았잖아요.”

욕실까지 따라 들어올 거냐고!”

, 들켰어요? 아깝다. 자연스러웠는데.”

 


너 진짜……. 태형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고 정국은 그런 태형을 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태형은 그런 정국을 노려봤다. 이 상황에도 저 얼굴은 너무 멀끔하게 잘 생긴 완벽한 제 취향이라. 그게 너무 약올랐다. 태형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진짜 현관 비밀번호를 바꿔야겠어. 올해 안에만 벌써 50번은 넘게 한 다짐이었다.

 


그럼 내일. 나 저녁이랑 술 사주기. 그럼 오늘은 물러날게요.”

내가 왜!”

그럼 민윤기 약속 가기 전에 경찰서 들러서 나 신고하고 가든가.”

아오…….”

 


태형이 이를 갈았다. 정말이지. 더 이상 전정국과 엮이고 싶지 않은데, 정국은 제 뜻대로 움직여 줄 생각이 개미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태형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이 씩 웃었다. 씻고 나와요. 약속 장소까지 데려다 줄게요. 정국의 말에, 태형은 한숨을 쉬고 욕실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옷을 벗고,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가 찬물을 맞으면서 태형은 제 자신이 한심해 눈을 감았다. 매번 같은 패턴인데도 어쩜 그렇게 매번 넘어가는지, 제가 생각해도 우스웠다.

 


바보냐, 김태형…….”

 


그러나 그건 어쩔 수가 없는 것이기도 했다. 태형에게 정국은 불가항력이었으며, 정국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그건 정국을 제외하면 아무도 함부로 들어오지 않을 작업실에 굳이 작업 중 팻말을 붙여 놓은 이유이기도 했고, 넓디넓은 집에 멀쩡한 더블 사이즈 침대를 놔두고 작업실에 놓여 있는 싱글 킹 침대에서 잠이 드는 것이 더 편한 이유이기도 했으며,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1년이 지나도록 현관문 비밀 번호를 다시 태형 혼자만 아는 것으로 바꾸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정국의 말이 태형에게 절대적인 이유는,

 


짜증나…….”

 


3년 전 태형이 처음으로 단독 OST를 맡은 영화이자 정국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의 뒤풀이에서 정국을 처음 마주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짝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누구를? 김태형이, 전정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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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포기 못 해요. 아니, 안 해요.’

나랑 어색해져도?’

.’

 

 

 

너 진짜후회 안 해? 태형이 고개를 숙이고 물었지만 앞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 안 해요. 결국 태형은 입술을 깨문다. 너 어떻게 그렇게 단칼에 딱 잘라 말 할 수가 있어? 차마 그 말은 하지 못 한 채로.

 

 

안 돼…….”

 

 

 

. 태형의 눈이 번뜩 뜨였다.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갑자기 눈으로 가득 들어찬 햇빛에 태형이 눈을 찌푸렸다. 꿈이었구나. 태형이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다시 돌이켜 봐도 악몽인 꿈이다. 태형이 다시 눈을 감으며 살짝 옆으로 돌아누웠다. 조금만 더 잘래. 예기치 못하게 깨어 버린 단잠에, 태형이 막 다시 잠으로 빠져들려던 참이었다.

 

 

……?”

뭐야…….”

, 전정국?!”

 

 

 

무심코 뻗은 제 손에 잡히는, 익숙하지 않은 온기에 태형이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제 시야에 가득 차게 들어오는 것은 전정국의 잘생긴 얼굴이다. 태형이 헉, 하고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뭐지?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지? 그 전에야 전정국의 자취방에서든 제 자취방에서든 같이 눈을 뜨는 것은 놀랄 것도 없는 일상이었다지만, 그 사건 이후로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러니 꽤나 오랜만에 마주하는 눈 뜨자마자 보이는 전정국의 얼굴은 태형에게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형 깼어요?”

너 왜 여기,”

마마- 기침하실 시간이옵니다.”

 

 

 

아직 눈을 채 뜨지 못한 정국을 향해 태형이 의문의 말을 던지려던 그 때, 문 밖에서 저를 부르는 상궁의 목소리가 들렸고 태형은 그제서야 아, 하고 얕은 감탄을 뱉었다. , 여기 대한민국 아니지 참……. 나 타임슬립 했었지. 제가 생각하면서도 현실이 더 꿈같아 태형이 마른세수를 했다. 마마, 소인이 들어가도 되겠사옵니까. 평소와는 다르게 묘하게 설렘이 묻어 있는 상궁의 목소리에 태형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상궁의 설레발에는 그냥 적응해야 될 듯싶었다. 사실, 이렇게 정국이 대놓고 태형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이 상황에서, 상궁이 오해를 하지 않는 것이 더 부자연스러운 일일 거였다. 저였어도 제가 모시는 마마가 주상 전하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면 기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까. 잠시 제 옷매무새를 살피고 정국을 흘긋 쳐다본 태형이 어, 괜찮아. 하고 중얼였다. 다행히도(?), 아니 당연하게도! 간밤에는 아무 일도 없었는지 태형은 속옷은 물론이고 소복에 치마, 당의까지 전부 갖춰 입고 있었다. 이렇게 불편한 옷을 입고 용케도 단잠을 잤네. 태형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상궁 둘이 조심스럽게 장지문을 열며 소리 없이 들어왔다.

 

 

, 주상 전하께오서 아직,”

원래 쟤

?”

주상께서는 잠에서 쉬이 깨지 않으신다.”

 

 

 

 

쟤 제대로 깨우려면 30분은 공들여야 한다, 고 말하려던 태형이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한 나라의 국왕에게 쟤라니. 상궁들이 들으면 기절할 테니까.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태형은 이내 저를 면밀히 살피고 있는 상궁들의 시선을 캐치했다. 상궁은 태형을 한 번, 아직 이불 속에 누워 있는 정국을 한 번 번갈아 쳐다보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태형이 고개를 들어 장지문 밖을 쳐다봤다. 역시나. 상궁 대여섯 명이 방 안쪽을 힐끔대다 태형과 눈이 마주치자 후다닥 장지문 밖으로 모습을 숨긴다. 태형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 진짜…….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아는데,”

…….”

그거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어.”

 

 

 

그 말에 상궁은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에이 뭐야……. 입 밖으로 내지만 않았다 뿐이지, 온 몸과 얼굴로 표현하는 그 말에 태형은 비언어적 표현의 적나라함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어쨌든 그 솔직한 모습에, 태형이 뭐! !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이 한성왕후란 사람은 꽤 좋은 윗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상궁들이 편히 대하며 진심으로 한성왕후가 잘 되기를 바라는 걸 보면. 왠지 모르게 뿌듯해지는 기분을 애써 물리치며 태형이 슬쩍 정국을 내려다봤다. 아까 형 깼어요?’ 한 것은 잠결에 한 말이었는지, 정국은 아직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태형이 얕게 한숨을 내쉰 후 정국을 살살 흔들었다.

 

 

 

일어나

…….”

시옵소서 즈은하…….”

 

 

 

지켜보고 있는 저 상궁만 아니었어도……. 태형이 이를 악물고 미소를 지으며 정국을 흔들었지만 역시나, 정국은 일어나지 않았다. 태형은 결국 정국을 꼬집기 위해 이불 밑으로 손을 넣었다. 원래 같았으면 야!! 일어나!! 하면서 세차게 흔들어 깨웠을 텐데. 여기서는 그러면 안 될 테니까. 태형이 정국을 꼬집기 위해 손을 정국의 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전정국 깨우는 데에는 팔 안쪽 여린 살을 꼬집는 게 직빵이지. 내적 미소를 지은 태형이 슬쩍 웃으며 정국의 살을 잡은 그 때였다.

 

 

 

아파…….”

.”

하지 마요…….”

 

 

 

정국의 살을 잡아 막 힘을 주려던 그 찰나에, 태형이 뭘 하려는지 잠결에도 깨달았는지, 정국이 그대로 태형의 손목을 잡아 태형을 끌어당겼다. 순간적으로 확 잡아당겨진 터라 어떻게 힘도 제대로 주지 못 한 채로 졸지에 정국의 위에 털푸덕 엎어진 태형은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정국은 그런 태형의 허리 위로 팔을 감아 토닥일 뿐이었다. 더 잘래요…….

 

 

 

아니, 이 미친…….”

……!”

졸려…….”

 

 

 

순서대로 태형의 읊조림, 상궁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정국의 목소리. 태형은 욕을 뱉을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태형은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 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전정국이 태형이 형, 이라고 헛소리라도 하게 되면……. 태형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전하, 제발 일어나세요……. 하지만 태형의 간절한 속삭임에도 정국은 여전히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잠결이라 전하, 라는 호칭이 저를 부르는 것이라고 인식하지 못 하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태형의 허리에 감긴 정국의 손은 풀릴 줄을 몰랐다. 이 자식 이거 진짜 안 되겠네. 어디서 이런 이상한 잠버릇은 배워 온 거야? 태형은 힐끔 상궁들의 눈치를 봤다. 상궁들은 왕과 왕비의 모닝 애정 행각을 차마 대놓고는 보지 못 한 채 옷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태형은 그 옷 위로 힐끔힐끔 보이는 매의 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결연함이 돋보이는 눈빛. 이 상황에서 전정국의 뺨을 때리거나 물리적인 힘을 쓸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가지뿐이지.

 

 

. 전정국…….”

 

 

 

태형은 몸에 힘을 주고 얼굴을 정국의 귓가에 갖다 댔다. 훤한 대낮에 이불 위에서 저와 정국이 지금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는지는 머릿속까지 닿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 의식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붉어져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태형은 어금니를 물었다. 제발 좀 일어나라, 이 자식아…….

 

 

 

정국아…….”

…….”

제발 좀 일어나, !!”

 

 

 

 

상궁들의 귀에까지는 들리지 않게, 그러나 최대한 크게. 정국의 귓가에 다이렉트로 꽂히게끔 최대한 정국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소리친 태형이 입술을 떼며 정국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천만 다행히도 이름을 부른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정국은 초점 없는 눈동자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무슨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아니고 이게 뭐야! 입가에 경련이 이는 것 같았지만 태형은 저와 정국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궁들을 의식하여 정국을 향해 최대한 환하게 웃어 보였다. ....... 입모양으로 그렇게 말한 태형이 이번에는 제 손을 정국의 볼에 갖다 댔다. 힘겹게 뜨게 만든 눈이 다시 감길까봐 아예 못을 박아 두려는 거였다.

 

 

 

일어나셨습니까, 즈은하…….”

 

 

 

그러면서 태형은 정국의 볼을 감싸 안는 척 하며 손가락으로 정국의 볼을 세차게 꼬집었다. ! 정국이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린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태형이 ㅎ……

 

 

 

, 전하께서 기침하셨다! 사람을 부르거라. 곧 가신다 하니까!”

 

 

태형이 형, 이라는 소리가 나오기 전에 정국의 말을 가로막은 태형은 상궁들을 향해 눈짓을 했고 상궁들은 솟아오른 광대를 채 숨기지 못하며 예, 명 받잡겠사옵니다 마마, 하고는 물러갔다. 장지문이 닫히고, 태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대환장파티야. 정국은 여전히 제 위에 있는 태형이 믿기지 않는 듯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태형이 형 왜 여기꿈 아니었…….

 

 

 

정신 차려! 여기 대한민국 아니잖아!”

……?”

아오 진짜.”

 

 

 

태형이 눈을 세모나게 뜨며 정국의 볼을 잡아 늘렸다. 너 아침에 정신없어 하는 거 아는데, 지금 네 정신 챙겨줄 여력 없다. 혹시나 들렸을까 한 번 더 장지문 쪽을 쳐다본 태형이 어느새 힘이 풀린 정국의 팔을 풀고 정국의 위에서 내려왔다. 온 몸에 힘을 주고 있었더니 근육이 욱신거릴 정도였다. 한동안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정국은 정신이 들었는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태형은 흐트러진 제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었다. 한복의 자도 모르는 태형이라 별 의미는 없었지만.

 

 

 

꿈인 줄 알았어요.”

, 나도 꿈이었으면 좋겠는데 아니야. 사람 불렀으니까 정신 차려.”

근데 형 뭐해요.”

 

 

 

 

태형은 간밤에 풀려 버린 제 옷고름을 다시 매는 데에 열중이었다. 이대로 있자니 꼴도 사나웠고, 가만히 있으면 상궁이 매어 주겠지만 상궁의 손에 몸을 맡기는 것이 영 꺼림칙했던 탓이었다. 무엇보다도, 괜히 흐트러진 한복이 이상한 기분을 들게 한 것이 가장 컸다.

그러나 21세기에서 태어나 21세기의 삶을 살아 온 태형이 한복의 옷고름을 제대로 맬 줄 알 리가 만무했으므로 그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한복을 입어 본 경험이라곤 유치원 때 생일파티를 했던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심지어 그 때도 옷고름은 엄마가 매어 줬었고. 태형이 옷고름을 붙잡고 낑낑거리고 있자 정신을 차리려는 듯 마른세수를 하던 정국이 이리 봐요. 하고는 태형의 가까이로 붙어 앉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태형은 정국의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제 바로 앞에 있는 정국에 혀를 깨물 뻔 했고. 아니, 얘는 무슨 말 좀 하고 가까이 오지!

 

 

 

 

이렇게 하는 거예요.”

 

 

 

 

태형이 놀란 제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는 사이 어느새 깔끔하게 태형의 옷고름을 매어준 정국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태형은 그 말에 제 옷고름을 내려다보고는 작게 감탄했다. , 뭐야? 얘 손끝이 왜 이렇게 야무져? 아니, 것보다 여자 옷고름 매는 방법은 어디서 배운 거야……. 상궁이 매어준 것만큼 깔끔하고 단정하게 매인 옷고름에 태형이 괜히 제 가슴팍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정국이 여전히 제대로 동그랗게 뜨지 못한 눈을 비비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정도는 배워 놔요.”

…….”

맨날 내가 매 줄 수는 없잖아요.”

 

 

 

 

뭐래! 간신히 진정시켰던 심장 박동이 무색하게 태형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번부터 느꼈던 건데, 전정국은 이상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데에 소질이 있었다. 그게 무슨 신혼부부 넥타이 매 주는 아내 같은 소리냐고. 태형이 돼, 됐거든! 하고 응수했고 그에 정국이 뭐라 입을 열려던 차에 장지문 바깥에서 전하, 기침하셨습니까.’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국은 마지막으로 기지개를 크게 핀 후에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 또 피곤한 하루 시작이네. 정국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

 

 

 

그러고 보니, 왕비의 일과란 별 것 없어서(원래는 내명부를 다스려야 하지만 희한하게도 이 왕은 부인이 아직 두명뿐이어서 딱히 할 것이 없었다) 귀찮을 일은 그다지 없었는데, 왕의 일과는 좀 다르려나. 태형은 피곤한 얼굴로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정국을 멍하니 쳐다봤다. 자신이야 여자 한복을 입고 있어야 한다는 것만 빼면 나름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데, 정국은 팔자에도 없는 왕 노릇을 해야 하니 얼마나 정신없을까 싶었다. 마냥 부러울 일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태형이 입맛을 다셨다. 여럿도 아니고 단 둘만 조선에 떨어지니 괜히 애틋함과 동지애가 생기는 것 같았다. 원래는 친한 사이이기도 했고. 선배로서 후배한테 뭔가 도움이 되어 줘야 할 것 같고……. 잠시 눈알을 굴린 태형이 결국 마악 발걸음을 떼려는 정국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하루도 힘내고!”

……?”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 해!”

 

 

 

 

태형의 목소리에, 정국이 사뭇 놀란 눈으로 태형을 쳐다봤고 그 눈에 태형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 지금 무슨 소릴 한 거지? 무슨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덕담을 한 거야? 태형은 제 얼굴이 파라락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국이 하도 친근하게 굴어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저와 정국의 관계는 이렇게 덕담을 주고받을 만 한 관계도 아니었다. 아마 정국도 그래서 저렇게 의아한 눈을 하고 있는 거겠지. 태형은 민망함에 눈을 깜박였다. 정국의 시선과 태형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괜히 나댔다. 쪽팔려!!

정국의 시선을 피하지도,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 한 채로 태형은 그대로 굳어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이 상황을 무마해야 하지? 뭐라고 둘러대지? 아니 근데 이게 뭐 둘러댈 상황이야? 그냥 선배로서 덕담 좀 해 주면 안 되는 건가? 아무리 우리 사이가 나빠졌기로서니…….

 

 

 

 

알겠어요.”

?”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면서요. 그러겠다구요.”

, …….”

방금 놀란 건, 형한테 그런 말 들은 게 되게 오랜만 같아서.”

 

 

 

 

정국이 조곤히 말을 이었다. 오해하고 있는 건 귀신같이 또 어떻게 알았대. 태형은 괜히 심장이 간질거려 입을 다물었다. , 그래서 놀란 표정 지은 거였구나. 난 또……. 괜히 정국을 탓하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태형은 어색하게 웃었다.

 

 

 

 

.”

?”

아니에요. 고맙다고요.”

 

 

 

 

방금 전정국이 뭐라 한 것 같았는데. 태형이 어? 하고 눈을 크게 뜨자 정국이 고개를 저었다. , 이제 진짜 가야겠다. 형도 오늘 하루 힘내요. 사이좋게 덕담을 주고받은 태형과 정국이 손을 흔들었다. 영락없는 부부의 모양새였으나 정작 둘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짜로 나가려는 듯, 정국이 발걸음을 옮겼고 태형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쉬운 게 없다, 정말. 그리고 그 때, 막 장지문을 열고 나가려던 정국이 순간 멈춰 서 태형을 돌아봤다그리고 그 이후 정국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문장은,

 

 

 

 

아 맞다.”

…….”

우리 합궁일 정해졌대요.”

 

 

 

 

모처럼 기분 좋게 시작한 태형의 하루를 똥간에 처박기에 완벽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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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너 괜찮겠냐.”

뭐가요?”

그냥한 희빈한테 그렇게 막 대하는 거.”

 

이미 머리를 탈출해 자유를 찾은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교태전 안으로 들어와 방 안에 앉은 태형은 잠시 넋을 놓고 천장을 쳐다보다가 정국에게 말했다. 그러나 막상 사고를 친 정국은 천하태평이었다. 형 방 좋네요. 내 방이랑은 되게 다르다. 여자 방이라 그런가.

 

말 돌리지 말고. 이거 진짜 괜찮은 거냐고.”

그게 왜요?”

아니…….”

하루아침에 태도 바뀌었다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요?”

 

아니 뭐 그것도 있고. 태형은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냥 대충 오늘은 중전과 할 말이 있다고, 가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굳이 그렇게 커퀴벌레 같은 모양새를 만천하에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건가그것도 아무리 본인은 아니라지만 유라를 닮은 총애받던 후궁의 앞에서. 태형은 괜히 바닥을 문질렀다. 차마 너 왜 이렇게 나한테 다정하게 굴어? 하고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는 탓이었다.

 

설마 얼굴까지 똑같은 왕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고 사람들이 상상이나 하겠어요?”

…….”

그냥 갑자기 마음이 바뀌셨나보다, 하겠지.”

 

그건 그런데…….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간단하고 단순한 정국의 말에 더 이상 뭐라 물어볼 말이 없었다. 내가 너무 쓸데없이 생각이 많은 건가. 태형이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확실히, 정국의 처지가 저보다는 나은 것 같긴 했다. 옷을 벗긴대도 정국은 거리낄 것이 없으니까. 그치만 나는……. 태형이 제 판판한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들키면 그날로 엿 되는 거다. 태형이 괜히 옷을 꽁꽁 싸맸다.

 

왜 그렇게 몸을 웅크리고 있어요? 추워요?”

…….”

 

결국 묻고 싶었던 것은 묻지 못하고 얼마나 말없이 그러고 있었을까, 정국이 먼저 말문을 텄다. 그러나 태형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제 몸을 조금 더 뒤로 물렸다. 아니 그럼 정말 넌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태형은 정국에게 묻고 싶었다. 태형은 지금 이 상황이 어색해 미칠 것 같았으니까. 왜냐하면, 그렇게 그런 거 아니라고, 그냥 대화만 하는 거라고 말했는데도 태형의 말을 귓등으로 들은 상궁들이 담백했던 교태전 안을 어딘가 묘한 분위기로 바꿔 놓았기 때문에.

화려하게 장식된 나비와 꽃 모양의 촛대, 그 위에 올려진 일렁이는 촛불. 금실로 수놓아진 폭신한 한 쌍의 침구. 어느새 어둑해진 바깥, 아무도 없는 건지 아니면 없는 척을 하는 건지 숨죽은 듯 조용한 주위. 방 안에 남겨진 단 둘. 태형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어디선가 봤던 조선 시대 신방과 똑같았다. 단 둘이 있었던 게 처음도 아닌데, 왜 이리 기분이 이상한지. 분위기라는 게 참 큰 역할을 한다 싶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멀찍이 떨어져 있어요?”

아니…….”

누가 잡아먹어요?”

잡아!!”

 

먹기는 무슨!!!!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정국의 말에 태형이 펄쩍 뛰었다. , 잡아먹다니! 잡아먹다니! 누가 누굴! 호랑이가 토끼를? 사람이 닭을? 얘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태형이 놀라 커다래진 눈으로 정국을 쳐다보자 정국이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요.”

…….”

누가 보면 내가 진짜 형 잡아먹는 줄 알겠네.”

아니, 그 잡아먹는다는 표현 좀…….”

 

태형이 말끝을 흐렸다. 태형은 지금 제 처지도 처지지만, 정국의 태도 때문에 더 혼란스러웠다. 여기 있는 전정국은 태형이 알던 그 전정국이 아닌 것 같았다. 뭐랄까, 조금 더 직설적이라고 해야 할까, 거리낌이 없어졌다고 해야 할까. 내가 알던 전정국은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태형이 알던 전정국이란 의사 표현이 그다지 많지 않고 태형이 먹자는 대로, 가자는 대로, 하자는 대로 순하게 웃으며 따르던 후배였다. 말하자면, 뭐가 좋아? 하고 물으면 다 좋아요. 하고 화사하게 웃는 토끼 같은 애였달까. 그런데 뭔가 지금의 전정국은

 

형이 지금 딱 잡아먹히기 직전에 몰린 것처럼 웅크려 있으니까 그렇죠.”

 

늑대 같다. 그것도 먹잇감을 한입에 집어삼키기 위해 기회만 엿보고 있는. 태형이 꿀꺽 침을 삼켰다. 왜 갑자기 이렇게 분위기가 바뀌어 버린 건지 태형은 알 턱이 없었다. 낯가림이 끝난 건가? 아니, 2년 동안 그렇게 붙어 다녔는데도 낯을 가리고 있었던 거야? 아님, 어차피 유라 때문에 사이가 틀어졌으니 막 나가겠다, 이건가? 태형은 도로록 눈알을 굴렸다. 그렇게 붙어 다녔다지만 유라 일이 있고 난 후에는 인사도 제대로 안 하는 사이가 됐으니, 사실 말이 아주 안 되는 가설은 아니긴 했다. 진짜 볼 장 다 봤다 이건가괜히 서운해진 태형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또 무슨 생각해요? 혼자.”

, 아니…….”

“?”

그냥너 성격이 뭔가 내가 알던 성격이랑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서?”

 

우물쭈물하던 태형이 정국의 얼굴은 차마 쳐다보지도 못 한 채로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가뜩이나 여기 떨어진 후로 외롭고 서러운 일이 많은데, 같이 떨어져서 알게 모르게 위안이 됐던 정국까지 제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으니 더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나 혼자 그냥 뚝 낙오된 기분이랄까. 아니 사실 낙오된 건 맞는데……. 태형이 바닥을 좀 더 세게 문질렀다. 어째 되게 나보다 어린 애한테 투정부리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됐네. 그러나 민망함을 무릅쓰고 말을 꺼낸 태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국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 진짜 어이없었나 보다. 이 와중에 이런 투정이나 부리고. 잠시 정국의 대답을 기다리던 태형은 민망해져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하하. 아니야, 그냥 해 본 말

그냥,”

…….”

별로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돼서요.”

 

뭐가? 정국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대답에 태형이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소용이 없었다는 걸 알게 돼서? 뭐가 소용이 없는데? 정국의 말엔 주어가 없었다. 태형이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태형이 주어를 궁금해하거나 말거나, 말을 마친 정국은 몸을 일으켜 태형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정국을 올려다봤다. , 뭐야?

 

형이 이쪽으론 안 올 것 같아서.”

…….”

거리가 너무 멀잖아요.”

 

그러더니 제 눈앞에 털썩 주저앉는다. 등 뒤엔 경첩, 코앞엔 전정국으로 앞뒤가 막혀 버린 태형이 꿀꺽, 침을 삼켰다. 차마 가까이 오지 말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대화 하자는 건데. 대화하기엔 너무 머니까 가까이 온 걸 텐데. 괜히 유난을 피우는 게 더 이상한 것 같아서. 아니 그런데 그냥 대화하는데 이렇게까지 가까울 필요가 있나그냥 조금 거리를 두고 있으면 안 되나……. 심장이 이유 없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뭐, 이렇게 가까이 앉았던 일이 처음은 아닌데, 왜 이렇게 의식이 되는 건지 진짜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 !”

 

차마 정국의 눈은 못 보겠어서, 정국의 목울대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태형이 갑자기 들린 정국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정국이 그 동그란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급 더워지는 것 같았다. 얼굴이 빨개졌을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게 더 이상한데!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국은 그런 태형의 상태를 눈치 채지 못한 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 왜 오게 됐는지, 형은 뭐 잡히는 거 없어요?”

…….”

?”

 

, ! 태형이 잡생각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잘게 떨었다. 집중하자, 김태형! 괜히 홧홧 달아오르는 얼굴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태형이 제 볼을 가볍게 쳤다.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정신 차려!

 

전혀 없어. 너는?”

…….”

있어?”

저는 버스에서 잠들어 있다가 여기로 오게 됐다니까요.”

 

아 맞다 그랬지. 태형이 멍하니 중얼였다. 정국이 어깨를 으쓱였다. 형은 자취방에서 낮잠 자다가 끌려왔다고 했고. 저는 버스에서 자다가 여기 왔고. 그럼 잠을 계속 자야 하나? 멍하니 중얼거리는 정국에 태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왠지 아닐 것 같은데.

 

그렇게 쉽게?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여기 오게 된 걸 텐데.”

그런가.”

게다가 우리 이미 한 번 잤잖아.”

…….”

, ?”

 

갑자기 말없이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정국에 태형이 말을 더듬었다. 갑자기 뭔가 또 눈빛이 달라졌다. 아직 채 진정되지 않았던 심장이 다시 박동을 빨리 하려는 것 같았다. 태형은 2n년간 함께 했던 제 심장이 이렇게 워커홀릭이었는지 오늘 처음 알고 있는 중이었다. 도대체가 쉴 틈 없이 필요 이상으로 열일한다. 좀 쉬엄 쉬엄 해도 될 텐데.

 

아니에요. 형 말이 맞네요. 이미 여기서 하룻밤 지났죠.”

! ! , 맞아. 아까 한 희빈 봤지? 진짜 유라 닮지 않았어?”

닮았더라고요.”

그런데 유라는 아니야. 그 사람은 한 희빈이야. 그건 그럼 왜 그런 걸까? 그럼 다른 사람들도 또 닮은 사람들이 있을까?”

…….”

우리 말고 또 떨어진 사람이 있는 건가?”

그건 아닐 것 같아요.”

 

제 딴에는 나름 가능성 있는 가설을 제시한 거였는데, 제가 말을 꺼내자마자 딱 아니라고 단칼에 자르는 정국에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러자 정국이 음, 하고 말을 늘렸다. 태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뭐 아는 거 있어?”

아뇨. 그냥. 왠지. 원래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봐도, 여러 명이 타임슬립을 하진 않잖아요. 끽해야 두 명 아닌가?”

그런가.”

 

역시, 전정국도 별 거 없네. 결국 드라마나 영화를 기반으로 한 추리였다. 하긴, 쟤라고 뭐 별 수 있겠나. 버스에서 잠들었다가 끌려왔다는데.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잡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단서라든가, 특별한 점이라든가. 태형이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해야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갈 수는 있는 걸까. 눈앞이 깜깜했다.

 

사실 그런 생각도 해 보긴 했거든.”

뭘요?”

아니그게…….”

 

태형이 고개를 숙였다. 차마 제 입으로 말을 꺼내기가 참 뭐했다. 기나긴 밤 동안, 태형도 생각이란 걸 해 봤었다. 제가 처음 여기 떨어진 후부터 지금까지 쭉. 그러다 보니 문득 뭔가 떠오르는 게 하나 있긴 했다. 제가 이곳으로 떨어지고 난 후, 제일 처음 들었던 말. 그러나 태형은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게, 그러니까, 진짜.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

 

……. 혹시 왕이랑 중전의 사이가 좋아져야 하는 그런 건가…….”

……?”

아니!! 아니!! 그니까!! 내가 여기 와서 제일 처음 들은 말이 그거였거든! 원자 아기씨를 회임해야 한다고!!”

…….”

아니, 그렇잖아! 원래 막, ? , 왕이랑 왕비랑, 이렇게, 사이가 좋아야 좋은 거잖아! 후궁 말고! 정실 부인이랑 막, 금슬이 좋아야, 가정이 평화롭고 사회가 평화롭고 나라가 평화롭고! 백성들이 행복하고! ! 왕실 싸움 같은 거 안 일어나고!”

 

막 후궁이 기가 세가지고 막, 그러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그런 거잖아!! 장희빈! ?! !!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태형이 아무 말이나 뱉기 시작했다. , 괜히 말했어! 그냥 말 하지 말걸. 혹시나 해서 꺼냈던 건데, 역시 이건 아니겠지!? 태형이 정국의 얼굴은 채 바라보지도 못한 채 어색하게 웃었다. 미쳤다, 김태형. 어쩌자고 그런 말을 꺼냈냐!!! 태형이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고 있을 동안에도 정국은 아무 말이 없었다. 태형은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 진짜, 시간을 딱 3분만 돌리고 싶다…….

 

, 역시 아니겠지? 하하. 그래. 그렇겠지. 나는 여자가 아니니까 임신도 못 하고. 그냥 해 본 말이야! 아하하!”

진짜 그건가?”

?”

 

어떻게든 이 사태를 수습하려 과장되게 파하하 웃으며 정국의 어깨를 토닥이려던 태형의 몸짓이 순간 멎었다. 갑자기 제 코앞으로 얼굴을 슥 드민 정국 때문이었다. , 미친. 너무 가까워……. 태형은 아무 말도 못하고 굳어 눈을 깜박였다. 누가 뒤에서 톡, 하고 밀면 바로 입이 맞닿을 거리였다. 심장이 순간 멈췄다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 , 뭐야!!

 

…….”

…….”

농담이에요, .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요.”

 

새하얘진 머릿속에 태형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시선은 정국에게 고정한 채로 눈만 깜박인지 얼마나 지났을까. 픽 웃은 정국이 태형의 얼굴에 닿을락, 말락 하던 제 얼굴을 다시 천천히 물리며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태형은 그제서야 푸하, 하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심장은 아직까지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

…….”

뭐야, 진짜 놀랐어요?”

 

그래 이 개자식아……. 온 몸에 힘이 풀린 태형이 제 뒤의 경첩에 툭 하고 등을 기댔다. 서 있었으면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았을 거였다. 얼굴이 더 이상 뜨거워질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져 있었다. 미친. 태형은 제 심장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 지금 박동 수 재면 300도 넘을 거 같아. 태형은 멍하니 언젠가 봤던 예능 속의 심장박동을 재는 기계를 떠올렸다. 이게 예능이었다면……. 정말 평생 박제감이었으리라. 허구헌날 붙어 다녔던 후배놈이 얼굴 좀 들이밀었다고 이렇게 빨리 뛰는 심장이라니.

 

진짜 그건가?”

!!!!!!!!!”

, , 정신 차렸어요?”

이게 진짜 날 갖고 노네!!!!!”

 

정국의 낮은 중얼거림에 태형이 벌떡 일어나서 빽 소리를 질렀다. 정신을 차린 태형에 정국이 방긋 웃었다. 형 얼굴 진짜 빨개요. 그렇게 놀랐어요? 자신은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겠는데, 너무나도 멀쩡해 보이는 정국에 태형은 약이 올라 죽을 것 같았다. 저 새끼 저거 완전 선수잖아!! 유라야!! 속으면 안 돼!!!! 태형은 내적 고함을 질렀다. 김태형!!! 너도 정신 차려!!!!

 

너 저번부터 진짜, 나 그만 갖고 놀아라!!”

제가 언제 형을 갖고 놀았어요?”

?”

 

정국이 태형을 올려다보며 태연한 얼굴로 말했고 태형은 어이가 없어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너 그걸 몰라서 물어?? 태형이 어이가 털린 얼굴로 묻자 정국이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 가지고 뭐.

 

너 대박이다…….”

뭐가요.”

, 말을 말자.”

형 말이 진짜일지도 몰라서 그랬던 건데.”

 

온 몸에 힘이 풀린 태형이 제 옆에 깔린 이불에 머리를 대고 털썩 누웠다. 짧은 시간 동안 온 기력을 전부 전정국에게 뺏긴 기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국은 그런 태형을 쳐다보며 조용히 중얼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정국의 그 말에, 태형이 픽 웃었다.

 

진짜 그거면, . 어쩌게.”

, 필요하다면 하는 거죠.”

얘 진짜 위험한 애네.”

 

태형이 놀란 눈으로 반쯤 고개를 들어 정국과 시선을 맞췄다. 내가 널 그렇게 키웠어?! 너 그렇게 문란한 애였니!? 태형이 입을 뻐끔거리자 정국이 아, 뭐래요. 하고 입을 삐쭉였다.

 

뭐긴 뭐야! 난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어!!”

누가 누굴 키워요.”

아무튼 그건 아닐 거야. 남자가 임신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

타입슬립하는 건 말이 되고요?”

.”

 

끔찍한 소리 하지 마. 경악한 표정으로 정국을 보며, 태형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현대로 돌아가고 싶다지만, 그렇다고 이 나이에, 남자의 몸으로, 조선에서. 임신을 하고 싶은 마음은 개미 코딱지만큼도 없었다. 임신이 될 리도 없겠지만 아무튼!!

 

어쨌든 뭐, 임신은 답이 아닐 거 같긴 해요. 임신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리고 그럴 거였으면 형이 여자의 몸으로 왔다든가 했겠지.”

, 너 끔찍한 소리 좀…….”

근데 형이 누나 아니랬으니까.”

 

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태형의 말이 길게 늘어졌다. 갑자기 풀린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따뜻한 바닥과 푹신한 침구 때문인지,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눈이 깜박깜박 감기기 시작했다. 태형은 손을 들어 눈가를 비볐다. , 뭔가 더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얻은 게 없는데…….

 

아직 여기 떨어진 지 하루밖에 안 지났잖아요. 조금 더 있다 보면 뭔가 단서가 보일

…….”

형 자요?”

…….”

 

태형이 거의 감긴 눈으로 꾸물꾸물 움직였다. 머리만 푹신하고 몸은 그대로 바닥에 있는 채라 등이 배길 텐데도 그 불편함이 태형의 수마를 물리치진 못했다. 태형은 빠르게 RAM 수면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정국이 허, 하고 웃었다. 뭐야, 이 형…….

 

. 올라와서 자요.”

…….”

…….”

 

그러나 정국의 말이 태형의 의식 속에 박히기도 전에, 태형의 뇌는 이미 수면 상태로 접어든 후였다. 결국 얕은 한숨을 내쉰 정국이 읏차, 하고 일어나 태형을 살짝 끌어 이불 위로 올려놨다. 뭐 이렇게 빨리 잠들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랑 대화하고 있었으면서.

 

이러고 있으니까 꼭 옛날 같네.”

 

그러고 보면, 개총이든, 회식이든, 단 둘이 술을 먹은 날이든. 술을 먹은 날이면 태형은 항상 이렇게 대화하다가도 곧바로 잠에 들곤 했었다. 그럼 잠든 태형을 업어다가 제 자취방에 누이는 것은 항상 제 몫이었고. 문득 떠오른 옛날 생각에 정국이 픽 웃었다. 어느새 깊게 잠든 태형이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잘 자요, .”

 

태형의 가슴께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 준 정국이 이불을 살짝 토닥이며 말했다. 조선에서의 두 번째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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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마마, 감축드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어어어???”

 

정국이 먼저 경회루에서 내려가고,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후 천천히 경회루에서 내려와 멀찍이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궁녀 무리에게 다가간 태형은 제가 가까이 다가서자 눈을 빛내며 자신을 환대하는 분위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형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상궁 하나가 살짝 나서며 감격에 찬 얼굴로 태형을 올려다봤다.

 

소녀는 믿고 있었사옵니다. 언젠가 전하께서 마마의 진심을 알아주실 것이란 것을요.”

?”

이제 다 되었습니다. 이제 마마께서 튼튼한 원자 아기씨만 회임하시게 되면 한 희빈 따위는!”

, 잠깐만!”

 

태형이 황급히 상궁의 말을 가로막았다. 손까지 모아 쥐고 환희에 차 말을 하던 상궁의 말이 멎었다. 태형은 새빨개진 얼굴을 어쩌지도 못 한 채로 손을 휘저으며 말을 더듬었다.

 

,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잠깐 대화한 거,”

분위기가 더없이 화사하셨습니다. 두 분께서 가까이 붙으시어

그건 내가 넘어질까봐 잡아준 것뿐이고,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태형이 손을 휘젓자 그래도 그게 어디야라고 눈으로 말하고 있는 듯 한 상궁은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머리 위에는 밝은 오오라가 계속해서 남겨진 채였다. 사실, 이렇게까지 극구 부인할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 같은데. 설사 그게 진짜 왕이 아니라 해도 어쨌든 이 사람들이 보기에 자신이 모시는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는 건 좋을 테니까. 그러나 어쩐지 얼굴이 홧홧하고 부끄러워져서 태형은 저도 모르게 완강하게 부인하고야 말았던 거였다. 이래서야 내일 밤에 교태전으로 정국이가 오기로 했다는 말을 어떻게 꺼내지. 또 분명 되게 김칫국 마실 것 같은데. 태형이 볼을 긁었다. 어쩐지 일이 꼬인 느낌이었다.

 

뭐 좀 물어봐도 될까?”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태형은 교태전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상궁이 조금 더 고개를 숙이며 하문하시지요, 하고 대답했다. 잠시 눈을 도로록 굴린 태형이 입을 열었다.

 

평소에 정전하께서는 한 희빈을 얼마나 자주 찾으셨어?”

한 희빈…….”

 

자신이 이 조선시대로 떨어지기 전에 왕이 한 희빈을 얼마나 찾았든, 한 희빈은 유라가 아니고 왕은 정국이 아니었으니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궁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왕의 총애를 믿고 그렇게 오만방자할 정도였으면 엄청 자주 들락거렸나? 그러나, 교태전에 들어섰음에도 혹여 누가 들을까 주위를 살피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연 상궁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달에 한 번 정도 찾으셨습니다.”

달에 한 번?”

.”

한 달에 한 번?”

그러하옵니다.”

 

그런데 한 달에 한 번이라니. 태형은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다물며 당황한 것을 숨기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한 달에 한 번? 총애 받는 후궁이라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횟수였다. 부부관계를 한 달에 한 번밖에 하지 않았다는 소린가? 아님 밤에 하는 게 취향이 아니라 낮에 어딘가 다른 곳에서 한아니, 궁궐에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 그나저나 그럼 이 한성왕후란 사람은 그보다도 더 적게 왕을 만났단 소리면, 거의 독수공방 수준이었단 소린데. 도대체 이 왕이란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었던 거지? 태형의 생각이 끝도 없이 가지를 쳐 가며 뻗어가는 와중, 상궁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러니 더더욱 기가 찬 것이지요, 마마. 전하께서 한 달에 한 번밖에 찾지 않는 주제.”

, 난 괜찮으니 계속 말해.”

! 무튼, 전하께서 따로 찾는 후궁이 없으시고, 그나마 찾으시는 후궁이 한 희빈이니 총애 받는다 하긴 하지만, 사실 총애 받는다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지요.”

…….”

 

태형은 교태전 안에 도착해 제 겉옷을 벗기는 상궁의 말을 귀담아 들으며 머리를 굴렸다. 확실히, 달에 한 번은 총애 받는 후궁이라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왕의 일과가 그렇게 바쁜 건가? 아님 성욕이 없는 거? 그것도 아니면 혹시 왕이 게이라거나태형의 생각의 가지가 무성해지고 있을 때, 상궁이 그런 태형의 생각을 다시 멈추게 했다.

 

소녀의 짧은 소견으론 말입니다, 마마.”

, !”

한 희빈의 아비가 조선 제일의 세도가이지 않습니까.”

, 그렇지.”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아무래도 전하께서 그 때문에 내키지 않음에도 한 희빈을 찾으시는 건 아닐까 합니다.”

 

. 태형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생각보다 쉽게 풀린 의문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왕도 희빈이 좋아서 찾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지.

태형이 이토록 희빈과 왕, 그리고 한성왕후의 관계를 궁금해 하는 것은 비단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혹시 정국과 제가 조선시대로 나란히 떨어진 이유가, 왕과 왕비의 좋지 않은 사이와 관련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했던 정국의 말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일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좋지 않은 왕과 왕비의 관계, 좋지 않은 정국과 저의 관계. 그것도 현대에서는 유라 때문에, 조선시대에선 한 희빈때문은 아닌가? 아무튼. 무언가의 이유 때문에. 단서라곤 하나도 없으니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태형은 문득 잔뜩 무거운 한복에 짓눌렸던 제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제 몸에 걸친 옷이 얇디얇은 소복뿐이라는 것도. 그리고 계속 저와 대화를 나누던 상궁의 팔에,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한복이 걸쳐져 있다는 것

 

, , , 잠깐만!!”

?”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마마?”

 

너무 당황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존댓말까지 쓴 태형의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태형의 옷을 벗기던 상궁의 얼굴이 의아해졌다. 태형은 어느새 두 팔로 제 가슴을 감싸고 상궁으로부터 멀어진 후였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벗기고 있는 줄도 몰랐다. 큰일 날 뻔 했네! 절대 제 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형에, 당황한 것은 상궁이었다. 갑자기 왜 저래…….

 

산보를 다녀오셨으니 환복(換服)하셔야지요, 마마.”

, 어디까지 벗기려고!”

그야 당연히 속곳까지

, !”

 

태형이 질겁을 했다. 속곳이라니! 속옷이라니! 절대로 안 될 말이었다. 그랬다가는 제가 남자라는 것이 만천하에 알려질 터였다. 미쳤다고 그걸 눈뜨고 볼 수야 없지. 태형이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돌아라, 김태형의 두뇌!

 

주상 전하를 만나고 왔더니 몹시 피곤하구나! 오늘은 일찍 잠에 들어야겠으니 이대로 입고 자겠다!”

그래도…….”

, 그거 잠시 다녀왔다고 그렇게 바로 옷을 바꿔 입으면 낭비 아니겠느냐! 이것도 모두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난 괜찮다!”

마마…….”

 

아무 핑계나 되는 대로 주워섬긴 태형이 말을 마치고 상궁의 눈치를 봤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뱉은 그 말이 놀랍게도 통한 것인지, 태형을 보는 상궁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져 있었다. 태형이 꿀꺽, 침을 삼켰다. 마마소인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제가 마마의 하해와 같은 깊은 뜻을 모르고……. 그리고 이어진 상궁의 말에 태형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 그래. 백성들을 위하는 국모가 되어야지.

 

그럼 침구를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그래…….”

 

좀 자자. 잠이 필요하다. 의도치 않게 백성을 제 몸처럼 아끼는 참된 국모가 된 태형이 지친 목소리로 중얼였다.

 

*

 

마마!!!!”

, 괜찮다고!!!!!”

아니되옵니다!!! 어서 이리 오시옵소서!!!!”

 

그러니까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이냐면, 사건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조선으로 떨어진 후 길디길었던 첫 날이 무사히(?) 지나가고, 오전의 일과까지 무사히 마친 태형은 슬쩍 상궁의 눈치를 봤다. 정국이 이따 저녁에 오기로 했다고, 말을 하긴 해야 할 텐데, 아직까지도 그 타이밍을 잡지 못한 거였다. 점심 먹기 전에 해야지, 점심 먹은 후에 해야지. 자신을 바라보는 그 환희 서린 눈빛이 부담스러워 계속해서 미루기만 하던 태형은 결국 저녁까지 알뜰히 챙겨 먹은 후 일찌감치 침구를 준비할까요? 하고 묻는 상궁의 눈치를 보며 어렵사리 운을 떼었다. 그러니까, 오늘 주상 전하께서 오시기로 하셨

 

아니, 마마! 그걸 왜!’

 

그러나 태형의 말을 채 끝맺어지기도 전에, 태형의 말은 상궁의 놀란 목소리에 의해 가로막혔다. ‘마마!’ 하고 감동 어린 눈빛으로 저를 쳐다볼 줄 알았던 태형은 상궁의 예상외의 태도에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 상궁의 눈은 뭐랄까다급함? 경악? 그런 것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왜 저러지? 좋은 거 아닌가? 태형은 어리둥절했다. 상궁의 태도가 너무나도 초조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 후, 태형은 그 이유를 알게 됨과 동시에 상궁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마마!!!! 목욕물을 받아 놓았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아니, 아니, 그런 것 때문에 오는 게 아니라니까!”

마마!!!!!!! 지금부터 준비하여도 늦었사옵니다! 전하께 항상 향기롭고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드려야지요!!!”

괜찮아!!!!”

마마!!!!!!!!!!!”

 

잠깐의 침묵 후에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간 상궁은, 태형이 채 이유를 물어보기도 전에 다시 장지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대여섯 명의 상궁들과 함께. 태형은 문을 박차고 들어온 그 상궁들을 멍하니 쳐다봤다. 뭐야? 이 분위기? 그리고 잠시 후, 태형은 다짜고짜 저를 욕탕으로 데려가 옷을 벗기려 드는 여자들을 피해 도망쳐 다니고 있는 것이다.

 

마마, 분칠도 해야 하고, 환복도 하셔야 하고, 장신구도마마! 제발!!”

아 내가 괜찮다니까!!”

 

내가 안 괜찮아!!!!!! 온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상궁은 내적 쌍욕을 하고 있는 듯 했고 태형은 이제 반쯤 목숨을 걸고 달리고 있었다. 저 눈빛은 진심이다. 잡히면 빼도 박도 못하고 끌려갈 것이다. 옷만 벗겨지는 게 아니라 살가죽까지 벗겨버릴 기세였다. 사자 앞의 토끼 내지는 목욕탕 때수건을 들고 있는 엄마 앞의 아이가 된 태형은 결국 교태전 대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후였다.

 

마마! 어디까지 가시

어머.”

…….”

 

그러나 태형이 교태전 대문을 막 박차고 나간 그 순간 마주한 아주 익숙한, 그러나 낯선 얼굴에 태형은 그대로 멈춰 서 굳어버렸고, 뒤따라 태형을 잡으러 쫓아오던 상궁도 옆에 나란히 멈춰 섰다. 태형의 앞에는 살짝 놀란 눈을 한 유라, 아니 한 희빈이 서 있었다. 태형은 숨을 몰아쉬었다. 온 힘을 다해 달리다가 막 멈춰 선 터라 심장이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중전 마마께서 어찌…….”

…….”

이리도 체통을 지키시지 않고.”

 

그러나 살짝 놀란 듯 하던 희빈의 얼굴은 금세 여유로운 웃음으로 바뀌었다. 괜히 책잡힐 짓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근 하루 만에 태형은 이미 한성왕후란 사람에게 일종의 동질감 내지는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아랫것들에게 치이는 인생이란. 상황 자체가 동정심도 좀 들고, 아무래도 지금은 제 자신이 그 본인이다 보니 아예 따로 떼놓고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랫것들이 보고 흉을 볼까 두렵습니다.”

…….”

 

흉은 지금 네가 보고 있잖아……. 태형은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제가 봐도 지금 제 꼴은 모로 보나 한 나라의 국모와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가채도 얹지 않고 버선발로 건물을 뛰쳐나와 잔뜩 뛴 탓에 얼굴은 발그레했고 호흡까지 불규칙했다. 한 희빈이 아닌 누가 봤어도 혀를 찼을 만 한 모양새였다.

 

어찌 이리 체통을 못 지키십니까. 이러니 전하께서도…….”

한 희빈!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제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한 희빈은 계속해서 태형을 비웃었고 보다 못한 상궁이 희빈의 말을 가로막았지만 태형은 괜히 서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아니 내 기분이 왜 이러지. 저 사람이 아무리 나한테 뭐라고 해 봐야 그건 한성왕후란 사람에게 하는 말이고, 한 희빈이 하는 말들도 나에겐 전혀 타격이 없다. 나에게 저렇게 면박을 주는 사람도 유라가 아니라 유라와 닮은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르려 해도 왜인지 계속해서 서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영문도 모르고 조선시대에 떨어진 것도 서러운데, 한 나라의 중전인데다가, 나름 적응해 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자신을 적나라하게 싫어하는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듣는 것에는 면역이 없었던 것이다. 태형은 입술을 꼭 물었다.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리도 체통을 지키지 못하시는 걸 보니 교태전의 주인이 바뀔 날이 정말로 머지않았나 봅

이렇게 버선발로 뛰쳐나와 맞이할 만큼 우리 중전이 과인을 기다렸나 봅니다.”

 

그 때였다. 한 희빈의 말이 멎음과 동시에 제 뒤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태형은 고개를 들어 뒤를 쳐다봤고 이어 놀람으로 눈이 커다래졌다. 언제 온 것인지, 기척도 없이 가까이 온 정국이 살짝 웃으며 제 어깨를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태형이 저를 보는 것을 눈치 챈 정국이 그런 태형을 조금 더 꽉 끌어안으며 태형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 전하…….”

희빈은 교태전엔 어인 일이오? 이렇게 늦은 시각에.”

, 저는…….”

그나저나 우리 중전은 이렇게 대문까지 나와 나를 반길 만큼 내가 좋소?”

…….”

우리 중전이 이리도 과인을 좋아해 주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얘 왜 이래……. 태형은 서러웠던 것도 잊고 정국을 쳐다봤다. 어느새 나오려던 눈물은 자취를 감춘 후였다. 제가 먼저 희빈에게 질문을 해 놓고, 희빈이 당황하여 하는 말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다시 전에 없는 따뜻한 눈빛으로 저를 보는 정국에 태형은 입을 벌렸다. 전정국이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잘 할 수 있는 애였던가. 태형은 지금 처음으로 제가 걸치고 있는 한복이 치렁치렁한 것을 감사히 여겼다. 손가락이 곱아가고 있는 것을 숨길 수 있으니까. 태형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 그렇습니까…….

 

희빈은, 아직 중전에게 볼 일이 남았나?”

, 전하…….”

아니라면 우린 이만 들어가 봐도 되겠소? 날이 아직 추운데, 우리 중전이 나를 반기느라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여 병이 들까 걱정돼서.”

 

그놈의 우리 중전’. 태형은 몸을 작게 떨었다. 정말, 전정국이 이토록 연기를 잘 하는 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새내기 장기자랑 때 춤 말고 연기를 시킬걸 그랬지. 대상은 따 놓은 당상이었을 텐데. 어차피 춤으로도 대상은 탔으니까 상관없나……. 태형이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며 힐긋 한 희빈을 쳐다봤다. 한 희빈의 얼굴은 놀람과 당혹스러움, 부끄러움 같은 것들로 범벅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달에 한 번이었어도 총애 받는 후궁이었다는데 이런 취급은 처음이겠지. 태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태형은 아직 정국의 품에 안겨 있는 채였다.

 

…….”

, 그럼 소녀는 이만…….”

…….”

물러가겠사옵니다, 전하…….”

 

한참동안을 멍하니 서 정국과 태형을 번갈아 보던 한 희빈은 문득 정신을 차렸는지 급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말을 전했고 정국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는 그렇게 악바리를 쓰더니 전정국 앞에서는 얌전한 고양이가 따로 없네. 태형은 이제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살짝 눈을 감았다…가, 번뜩 떠오른 생각에 제 옆에 있는 상궁을 쳐다봤다. 정국이 오늘 밤에 처소에 오기로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난리를 쳤는데, 제가 봐도 다정해서 손가락이 곱을 것 같은 달달함을 과시하는 왕을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라이브로 시청한 상궁의 반응이 어떨지 상상이 갔기 때문이다. 아마 또 좋아가지고 미소를 지으며

 

…….”

…….”

 

망했다. 태형은 다시 고개를 돌려 차라리 정국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 태형은 그 어구의 뜻이 무엇인지 지금 이 순간 생생히 깨달았다. 저와 정국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 그 상궁의 얼굴은 마치, 이번에 터진 최애컾의 떡밥이 전무후무 역대급인 동인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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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그래이제 알겠어태형은 속으로 중얼였다이제야 태형은 제가 뜬금없이 이 조선시대로 떨어진 이유를 깨달았다이것은 세상이 제게 날리는 엿이었다수없이 많은 빅엿을 먹이겠다는 뜻이었다그게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었다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

왜 말을 하다 말지?”

 


정국아니 왕이 빙긋 웃었다시발웃는 것까지 전정국이랑 똑같아태형은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무슨 놈의 스토리가 이따위인 것일까장르가 궁중 로맨스인줄 알았더니 궁중 치정물이었던 것으로도 모자라제가 치정을 펼쳐야 할 상대는 제 짝사랑이고치정을 통해 얻어내야 할 인물은 제 라이벌이다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태형은 죽고 싶어져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정실부인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첩하고만 놀아난다기에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었다한량에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놈팽이일 줄 알았더니제 눈앞의 인물은 정국을 닮아아니다정국이 이 사람을 닮은 건가아무튼훤칠하니 잘생겼다동그란 눈과 서글서글한 인상태형은 간신히 벌려진 입을 다물었다제 눈앞의 왕은 여전히 살짝 웃고 있었다태형도 입 꼬리를 끌어올려 어색하게 웃었다.

 


… … …….”

 


사실태형과 정국이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아니오히려 그 반대였지태형은 정국이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정국이라면 죽고 못 살 정도로 정국을 아꼈고그런 태형을 정국도 곧잘 따라 둘은 칙칙한 공대의 훈훈한 투샷으로 손꼽히곤 했었다둘은 틈만 나면 붙어 다녔고항간에 사실은 둘이 사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았을 정도였으니그러나 그 소문은 1년을 채 가지 못했다태형과 정국이 있는 동아리에, 2학기부터 들어오게 된 다른 과 후배 한유라의 등장 때문에.

 


한유라는 인문대의 여신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로예쁜 얼굴로 유명했다성격은… 모른다굳이 소문이 나지 않은 걸로 보아서는 좋지도나쁘지도 않겠다고 대충 추측할 수 있었을 뿐이다유라는 예뻤고, (남자)선배들에게 예쁨을 한 몸에 받았다남자들만 득시글한 공대 위주로 편성된 동아리에서한유라의 존재는 단연 돋보였다태형과 정국이 든 동아리는 꽤나 학술적인 것으로 인문대 사람들과는 오억 광년쯤 떨어져 있었기 때문그래서 태형과 정국 같은 훈훈한 남자가 둘이나 있음에도 여타의 여자들이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던 것이었다.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새로운 신입생이 들어와 반가운 마음뿐이었다태형은 유라에게 친절하게 대했고유라도 태형을 곧잘 따랐다금세 유라는 정국과 태형의 일상에 끼어들었고 그 전에는 늘 둘이서 했던 것들을 차츰 셋이서 하게 되었다상황은 대략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선배오늘 뭐 해요?’

나 오늘 정국이랑 영화 보기로 했는데?’

우와뭐 보세요?’

킹스맨2.’

저도 그거 보고 싶었는데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그래.’

 


이런 식으로유라는 계속해서 둘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고태형은 그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정국은 그 상황이 퍽 달가운 것 같지는 않은 눈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별 말을 하지는 않았고그때까지만 해도 태형에게 유라는 그저 후배 1, 여자와는 연이 없었던 태형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서투르게 대해도 계속해서 다정한 성별이 여자인 인간일 뿐이었다그러는 와중에도 유라는 끊임없이 태형에게 눈웃음을 쳤고꼭 달라붙어 애교를 부렸다문제는남중 남고를 나와 공대에 진학한 태형은이런 것에 면역이 없었다는 거다그 잘난 얼굴을 가지고도 여자와 이렇다 할 역사를 쓰지 못한 이유였다태형은 그 때마다 얼굴이 빨개지기 일쑤였고유라는 그런 태형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게임 끝혹시 유라가 날 좋아하나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태형은 언젠가부터 유라를 보면 심장이 뛰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그런 태형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 챈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한 몸처럼 붙어 다니는 정국이었다그리고 어느 날정국은 태형을 불러내어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지?”

.”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태형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어느새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건지제 얼굴 바로 앞에 있는 정국의 얼굴을 한 왕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그리고태형은 제 몸이 기우뚱 기울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망할 놈의 치마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무겁고 치렁치렁한 한복은 아직 태형에게 마음을 채 다 열지 않은 모양이었다다시 한 번 치마 끝단을 밟은 태형이 어어하는 소리와 함께 팔을 휘저었다넘어진!

 


으잉.”

무슨 생각을 하기에.”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머릿속에서 삐용삐용 하고 적신호가 켜졌다너무 가깝다아까도 가까웠는데지금은 더 가까웠다무엇이정국아니 왕의 얼굴이그리고 태형은 그 순간 왕의 팔과 손이 제 허리에 감겨 있음을 감지했다그러니까태형이 넘어지기 직전에 왕이 제 팔을 뻗어 태형의 허리를 감아 잡아챈 거였다태형이 흡하고 숨을 멈추었다너무심각하게 가까웠다왕이 그런 태형을 보고 픽 웃고는 살짝 힘을 주어 태형을 바로 세워 주었다그제서야 태형은 숨을 몰아 쉴 수 있었다태형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얼굴이 뜨거웠다온통 새빨개져 있을 게 분명했다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오늘따라 중전이 평소와 많이 다른 것 같은데.”

…….”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목소리에 태형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아 안심하고 있었는데그래도 부부는 부부였는지 그 짧은 새에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챈 모양이었다태형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뭐라 둘러대야 할지 알 수 없었다태형의 머릿속은 이미 과열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태형이 멍하니 제 눈앞의 인영을 쳐다보고 있는 새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자꾸 고개를 숙이고

…….”

중전은 나랑 있는 것이 많이 불편하신가 봅니다.”

 


묘하게 서운한 티가 묻어 있는 목소리태형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런 게 아닙니다그렇게 내뱉고 나니 그럼 뭐냐는 듯 저를 쳐다보는 왕의 얼굴에 태형은 입 안쪽 여린 살을 잘근 깨물었다사이가 안 좋다더니다 거짓부렁이었나말투 하나하나행동 하나하나 어디 한 군데 다정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게다가 제가 고개 좀 숙이고 있었다고 서운한 듯 말하기까지어떻게 봐도 금슬 좋은 부부인데태형이 입을 열었다닫았다를 반복했다뭐라고 말해야 하지무슨 말을 해야 가장 자연스러울까?

 


나랑 있는 것이 불편

그럴 리가요!”

 


태형이 재빨리 말을 가로막았다불안함에 심장이 두근거렸다태형의 다급한 목소리에 왕의 눈이 놀란 듯 느리게 깜박여졌다태형이 살짝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너무 좋아서심장이 두근거려서

…….”

떨려서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부끄러운 듯 소매로 입가를 가리는 연기까지 해낸 태형이 슬쩍 왕의 눈치를 봤다왕은 그대로 멈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성공 한 건가태형이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소매로 가린 입가는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쪽팔려 죽을 것 같다아까 경회루 위로 올라오면서 왕이 중전과 단 둘이 있고 싶다며 사람들을 물린 것이 천만다행이었다같은 남자한테 이딴 수줍은 고백이라니게다가 그냥 남자도 아니고아무리 본인은 아니라지만 전정국을 닮은 남자한테태형은 눈을 감았다이불킥 백 년 감이다태형은 이제 이 상황이 몰래카메라거나 예능이 아니기를 바라야 하는 처지가 됐다왜냐하면 이 사실을그러니까 정국을 닮은 왕에게 이런 부끄러운 듯 수줍은 고백을 했다는 사실을 저 말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사실만이 태형에게 단 한 가지 위로가 되어 주

 


.”

……?”

 


그러나 순간 들려온웃음을 참는 듯한 묘한 소리에 태형이 내렸던 눈을 들어 눈앞의 왕을 쳐다봤다왕은 저를 쳐다보면서 입술까지 깨물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왜 저래저렇게 좋은가어리둥절해진 태형이 멍하니 그런 왕을 쳐다봤다잠시 숨을 고른 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엇이 그리 좋은 것인데?”

?”

무엇이 그리 좋아서 떨릴 정도냐 물었다.”

그야 당연히 주상 전ㅎ

난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제가 얼마나

그 날 이후로 연락도 다 씹고아는 척도 안 하길래.”

 


씹어뭘 씹어태형은 순간 뇌가 멈추는 소리를 들었다중전이 왕의 연락을 씹… 그래도 되는 건가아니 그보다 씹다니육포나 고기를 씹는 게 아니라 연락을 씹다니연락을 씹는다는 관용어가 조선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관용어였던가조선시대에도 연락을 씹는다는 힙한 표현을 썼던 건가태형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왕을 쳐다보자 왕의 입이 다시 천천히 열렸다.

 


뭘 그리 놀라요태형 형나 모르겠어요?”

 


형이란다왕이 중전에게태형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삿대질을 했다너무 놀란 입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어하는 이상한 소리만 냈다그럼 안 놀라겠니날 배신 때린믿었던 후배가 하루아침에 내 남편이 됐는데그 말을 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태형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

 


정신이 좀 들어요?”

전ㅎ아니 너!”

…….”

전정국?!”

 


잠시간의 멍때림 후 정신을 차린 태형이 제 앞의 왕아니 전정국을 보고 삿대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주위 신하들이 봤다면 기함을 할 행태였지만 태형의 사고는 거기까지 닿지 못했다정국이 그런 태형을 보며 씩 웃었다정신이 들었네요형이 저 기억 못 하는 줄 알았잖아요.

 


너 전정국?!”

.”

내 후배!?”

.”

“21세기에 살고 있는 K대 기계공학과 전정국?!”

학번까지 불러 드려요저 맞다니까요태형이 형.”

…….”

태형 누나?”

아니거든!!”

 


정국의 말에 태형이 눈을 키우며 빽 소리를 질렀다그렇구나난 또 혹시나정국의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에 더 대수로워진 것은 태형이었다너 언제아니너 왜 말 안 했어!!!! 태형이 빽빽 소리를 질렀다.

 


당연히 형도 알고 있는 줄 알았죠옆에 사람들 있으니까 연기하는 줄 알았는데.”

그럼 너 나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어?!”

그래서 여기 올라올 때 신하들 다 가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너!!”

 


그럼 날 보던 그 다정하고 따스한 눈빛은 뭐야아니 것보다경회루에 올라오고 나서도 정국은 계속해서 말투가 이상했다계속해서 연기를 하고 있었단 소리다아니 도대체 왜?! 태형은 무엇부터 따져 물어야 할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심장이 쿵쾅거렸다게다가지금 태형은 21세기에서 보던 선배 김태형의 모습이 아니라 조선시대 중전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화려한 가채에 치렁치렁한 여자한복게다가 부끄러운 듯 수줍은 고백까지!! 세상에서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상대에게 그 모든 것을 들켜 버린 태형은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게다가 전정국은 왜 왕이냔 말이다내시도신하도 아닌왕이라니!!

 


너 왜 왕이야!”

?”

 


그래서모든 의문과 궁금증들을 제치고 태형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그거였다너 왜 왕이야?! 왜 니가 왕이야?! 난 중전인데!? 태형의 억울함을 잔뜩 담은 눈이 그대로 정국에게 꽂혔다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정국의 눈매가 애매하게 접혔다.

 


글쎄요그럼 형은 왜 왕비예요?”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저도 몰라요워크샵 끝나고 집 가는 길에 버스에서 자다 일어났더니 이렇게 되어 있던데요.”

 


넌 버스에서 자다 일어났니태형은 순식간에 멍한 얼굴이 되었다버스에서 자다가 깨 보니 타임슬립이었다니쟤도 참 정신없었겠다 싶었다자취방에서 낮잠 자다가 끌려온 나는 양반이라 해야 되나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그러자 정국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근데 형 생각보다 잘 어울리네요.”

…….”

처음에 나한테 부인이 있다기에 누군가 했는데형이었을 줄이야.”

 


그러니까 이거 지금 욕이지주저앉은 제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제 앞에 꿇어앉은 정국이 태형을 찬찬히 훑으며 한 말에태형은 넓은 한복 단을 펄럭이며 성질을 부리려 했다한복이 무겁고 이미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탓에 앙탈을 부리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지만정국이 신기한 듯 태형의 머리 위에 올려져 있는 장신구들을 만작였다이거 진짜예요?

 


몰라아니 그보다 너너 왜 다 알고 있으면서 계속 연기했어?!”

제가 뭘요?”

여기 올라오고 난 다음에도 너 계속 왕인 척 했잖아!!”

형도 계속 연기하길래 장단 맞춰 준 건데.”

 


정국이 몸을 일으켜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태형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태형은 어이가 없어 입을 뻐끔거렸다그거야나는네가 전정국이 아니라 여기 시대 사람인 줄 알고 그런 거지태형이 성질을 버럭 내고는 제게 내밀어진 정국의 손을 팩 뿌리쳤다그러나 당당했던 그 뿌리침과는 다르게혼자 힘으로 일어나려니 아까 주저앉을 때 한복을 깔고 넘어진 것인지 몸이 일으켜지지가 않았다태형이 낑낑거리자 정국이 얕게 한숨을 내쉬며 태형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계속 앉아 있고 싶은 거예요?”

너 나는 어떻게 알아봤는데?!”

제가 형을 왜 못 알아봐요?”

 


붙어 다닌 시간이 얼만데정국이 가채를 쓰고 있는 태형이 신기한 듯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며 말했다갑자기 가까워진 정국에 태형이 히익하고 몸을 뒤로 물렀다가까이 오지 마!

 


아니그런 말이 아니잖아내가 진짜 여기 사람이었으면 어쩌려고?”

그 얼굴을 하고요?”

너 그거 무슨 뜻이냐?”

 


태형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묻자 정국이 어깨를 으쓱이며 살짝 웃었다.

 


그래서 좀 자세히 봤었는데나 보자마자 형이 그랬잖아요. ‘!’”

…….”

그러고 얼굴을 가리질 않나허둥지둥하질 않나어딜 봐도 매일 보는 남편 얼굴 보는 부인 모습은 아니라서형이구나 했죠아니 그리고 뭣보다 너무 똑같이 생겼잖아요.”

똑같이 생겼다고 다 우리 같은 처지는 아니야너 한 희빈 못 봤어?”

 


태형이 눈을 반짝였다이곳으로 떨어진 후로 제가 누군가보다 뭔가를 더 아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괜히 목소리가 높아졌다너 못 봤구나태형의 말에 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제 부인 본 건 형이 처음이에요.

 


부인…….”

…….”

이라고 하지 마새꺄!!”

 


누가 니 부인이야!! 태형이 버럭 소리를 쳤다괜히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온몸에 닭살이 돋는 느낌에 태형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그런 태형을 보며 정국이 웃었다왜요맞잖아요그 말에태형은 입을 벌렸다전정국이 원래 저런 성격이었던가그러나 정국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뭔가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지긴 했지만지금은 그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태형이 입을 열었다.

 


나도 우연히 만났는데한 희빈유라랑 똑같이 생겼어난 처음에 유라도 같이 떨어진 줄 알았다니까.”

한유라요?”

유라.”

…….”

 


정국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태형은 입술을 삐죽였다아 괜히 말했나진짜 유라는 아니라지만유라랑 정말 똑같이 닮은 사람인데정국은 그런 한 희빈의 남편이고 자신은… …됐다태형은 여전히 주저앉아 정국의 표정을 살폈다그러나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정국은 이내 다시 태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그러니까 걔는 타임슬립을 한 건 아니라는 거죠?

 


아쉽냐모처럼 공식적으로 연인이 될 수 있었는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요.”


그런데 형 계속 그렇게 앉아있을 거예요거기 편해요태형의 질문을 간단히 일축한 정국이 태형에게 물었고 태형은 아아니그건 아닌데…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아까 그렇게 당차게 정국의 손을 뿌리쳐 놓고 혼자 못 일어나겠어… 따위의 약한 말을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던 탓이다하지만 그런 태형을 눈치챈 듯정국이 픽 웃더니 태형이 뭐라 하기도 전에 태형에게 다가와 태형을 끌어안듯이 안아 태형을 일으켰다태형의 얼굴은 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누가 막 함부로 내 몸에 손 대래!”

뭘 이 정도 가지고부부 사이에.”

부부 사이는 무슨이 나라 중전이랑 왕이 부부지 너랑 내가 부부냐!?”

지금은 그렇잖아요.”

왜 하필 또 너야!!”

 


태형이 홧김에 소리쳤다하지만 진심이었다왜 하필 전정국인가여자로 타입슬립한 것도 억울한데왜 전정국은 왕이고내 남편은 전정국이냔 말이다그것도 유라를 첩으로 두고 있는유라와 정국을 두고 치정을 벌일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던 태형은 암담해졌다이게 뭐야…….

 


근데 형은 내가 왕이어서 좋아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미쳤냐?”

아니그렇잖아요들어보니까 조만간 합방 있다던데형이 누나 아니라면서요.”

그건……!”

 


태형이 입을 벌렸다정국은 진심으로 궁금한 듯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입을 벌렸지만 할 말은 없는 태형이 입을 뻐끔거렸다맞는 말이다아무리 아프다고 버텼다 한들그 변명이 통했을지도 모르고언제까지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거였다그러면… 전정국이 왕그러니까 내 남편인 걸 감사해야 하나…….

 


그러게.”

그쵸?”

 


태형의 멍한 대답에 정국이 씩 웃었다그 모습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지만 태형은 입을 꾹 다물었다그래긍정적으로 생각하자생판 모르는 사람이 남편인 것보다야 전정국이 남편인 게 낫아냐생판 남이 나은 거 같기도 한…….

 


아악!!!”

왜 그래요?”

몰라…….”

 


태형이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그래도 다행인 건 다행인 거다혼자보단 둘이 낫긴 나으니까어찌 됐든 현재에서 과거로 떨어진 것이 저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위안이 되어 줬다그게 설령 사이 안 좋은 후배전정국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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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태형은 여자를 꽉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풀었다아니정확히는 온몸에 힘이 빠져 스르르 풀렸다 하는 게 더 맞겠다그리고 태형은 털썩 주저앉았다태형을 부축하고 있던 여자 몇이 앗하는 소리를 내며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태형은 넋이 나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태형의 초점 잃은 두 눈동자가 허공을 향했다왕후요중전중전마마왕비?

 


마마…….”

 


여자가 조그맣게 태형을 불렀으나 태형은 대답하지 못했다아니언제부터 조선이 이렇게 개방적인 나라였지언제부터 남자가 중전 자리를 꿰찰 수 있게 되었던 거야내가 배운 조선의 역사는 다 거짓부렁이었던 건가우리나라가 동성애에 이렇게 오래 전부터 개방적이었어게다가 조선의 의료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기에 남자보고 임신을 하라 하는 건가태형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의문들이 한꺼번에 뒹굴었다하나부터 열까지 이해도 안 되고말도 안 됐다태형이 입을 껌벅였다어디서부터무엇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옆에서 여자들이 그런 태형을 보며 안절부절 못해 하는 게 느껴졌다태형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정신 차리자김태형.

 


… 국모라 하면……여자…….”

?”

남자도 국모가 될 수 있…….”

마마…….”

지 않겠죠하하.”

 


그래서 은근슬쩍 물어보려 했다남자도 조선의 국모가 될 수 있나요그러나 태형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여자의 얼굴이 경악에 가까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어의를 부를까요하고다른 여자가 제 옆의 여자에게 속삭이는 것이 태형의 귓가에 닿았다태형은 정신을 차렸다그러니까지금 제가 와 있는 이곳이판타지 세계는 아닌 모양이었다남자는 중전이 될 수 없다회임도 할 수 없을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불가능한 것이 조선시대에서 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그런데 왜!? 설마!? 태형은 재빨리 제 손을 뻗어 제 가슴팍을 만졌다편편하다여자의 몸이 아니다그러니까평소의 제 몸과 다를 것이 없었다는 뜻이다태형은 조금 더 확실하게 확인해 보기 위해그러니까 중요 부위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 흠칫 굳었다. 8개의 눈동자가 저를 향해 있었다태형은 아하하하고는 괜히 치맛자락을 쓰다듬었다비단이 참 좋네그 말에도 8개의 눈동자는 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마마정말 괜찮으십니까…….

 


…….”

마마.”

남자가… 교태전에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될까?”

사지가 찢겨 성 밖에 걸리겠지요마마.”

 


미친태형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절대 말하면 안 된다태형은 아하하 웃으며 괜히 치맛자락을 끌어당겼다혹시나제가 남자라는 것이 밝혀지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 싶었다그런데 남자라는 것이 밝혀지면 이곳에서 나가기 전에 이 세상에서 먼저 하직하게 생겼다태형은 손을 저었다아하하내가 묻는 것이 너무 많았구나악몽을 꿔서됐으니 이만 나가 보거라그러나 태형의 말에도 여자들은 요지부동이었다마마어의를 불러들일까요하고 정말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그도 그럴 것이그들은 태형이 소리를 질러 들어왔다그리고 들어온 곳에서저들이 모시는 중전 마마께서 웬 헛소리만 하고 있으니정신이 오락가락 하고 있다고 생각할 만도 했다태형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어 보였다.

 


괜찮다잠시 악몽을 꿔서 그렇대도.”

마마…….”

나가라고.”

 


나 지금 내 몸의 안위를 살펴봐야 한단 말이다태형이 차마 이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제서야 여자들은 마지못해 발걸음을 뗐다혹여 편찮으시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밖에 있겠나이다그렇게 그들이 나가고장지문까지 꼭 닫힌 것을 확인한 태형이 주위를 살폈다아무도 없지넓디넓은 방 안에는 창호지를 뚫고 들어온 햇살뿐이 없었다태형은 그래도 못미더워 슬쩍 일어나 제 뒤에 있던 병풍 뒤로 들어가 섰다그리고 치마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신체의 안위를 확인했다.

 


있네.”

 


있어있다고태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그렇지설마하루아침에 조선시대로 떨어진 것도 모자라 강제로 성별까지 바뀌었을라고태형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쥔 채 터덜터덜 제가 누워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게 뭐야…….”

 


그렇지만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뭐가 이렇게 제멋대로야아니보통 드라마 같은 거 보면 막차에 치이거나우물에 빠지거나벼랑에서 떨어지거나하다못해 뭐넘어지기라도 해야 이런 곳으로 떨어지던데태형은 어이가 없었다태형의 마지막 현대에서의 기억은 과에서 워크샵을 다녀오는 바람에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잔뜩 지친 채 제 자취방에 쓰러지듯 누워 낮잠에 빠져든 것이었다무슨 놈의 타임 슬립이 자는 사람 머리채를 잡아가지고 끌고 와?! 뭐 이런 개연성도 없고 감동도 없는 뜬금없는 타임 슬립이 다 있냐고태형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그 때 마신 술에 뭐가 있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그렇다면 과 전체가 조선으로 왔어야 했다교수님이며 동기들이며 선배 후배들 모두그런데 보통 드라마나 소설 같은 거 보면 대량으로 타임슬립을 하진 않던데태형이 멍하니 중얼거렸다드라마나 소설 따위를 근거 삼아 추측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우습기는 했지만이런 일을 겪어 본 후기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으니 드라마나 소설을 바탕으로 추리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그럼 내가 뭐원한 같은 걸 샀나곰곰이 고민해 봐도 딱히 없었다그냥 평범한 대한민국의 대학생으로서 살아왔을 뿐이다그럼 대체 왜!!!!

 


아니그리고 이건 또 뭐야.”

 


태형이 두 번째로 어이가 털려 버린 부분이었다한 나라의 국모로 타임슬립이라니그것도 남자가!! 역사서에 길이길이 남을 수치였다아니이런 건 적지도 않으려나태형은 어이가 없어 허허 웃었다아니왕도 아니고평범한 사람도 아니고왕자도 아니고귀족도 아니고내시… 아냐내시보단 나은 건가암튼왕비가 뭐야!! 왕비가!! 태형은 괜히 섬세하게 수놓아진 치맛자락을 펄럭였다그 와중에 손에 닿는 비단의 감촉이 쓸데없이 좋았다도대체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그 어느 드라마나 소설을 봐도 남자가 한 나라의 국모로 타임슬립을 했던 경우는 없었으니까쓸데없이 이런 곳에서 특별하고 난리야태형이 억울한 듯 중얼였다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 내가 남자인 걸 들키면 안 되겠지.”

 


사지가 찢겨 성 밖에 걸리겠지요마마여자의 목소리가 태형의 귓가에 이명처럼 울렸고 태형은 순간 온 몸에 한기가 끼쳐 몸을 떨었다뜬금없이 조선시대에 떨어진 것도 억울한데 오자마자 사지가 찢겨 죽을 수는 없었다혹시 죽어야만 돌아갈 수 있는 건가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그 모험을 감수하기에는 너무 위험이 컸다아까 뺨 때렸을 때 아팠던 거 보니까 고통은 그대로인 것 같던데아니야그건 안 돼태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차라리 몰래카메라여서 지금쯤 와하하 웃으며 동기들이 쳐들어왔으면 좋겠다고태형은 멍하니 생각했다하지만 태형은 눈치가 제법 빠른 편이었다이 상황은 실제 상황이다애초에 제가 잠든 사이에 이렇게 복잡한 옷을 껴입힐 수는 없었을 것이다게다가 아까 마주한 그 눈들그 눈은 연기 따위가 아니었다진심이었어물론 뭐메소드 배우들을 섭외했을 수도 있지만여러 가지 상황들을 고려해 봤을 때 그것보단 믿기지 않지만 차라리 조선시대로 타임슬립을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다태형은 혹시나 싶어 옆을 두리번대다 경첩을 발견하고 재빨리 거울을 쳐다봤다혹시 얼굴이 바뀌었나 싶어서하지만 얼굴은 대학생의 태형 그대로였다옷이 화려하고 예뻐서 그렇지분명 남자의 얼굴이었다는 소리다종종 예쁘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이 나라 왕도 취향 참……태형이 중얼거렸다근데 또 이렇게 보니까 제법 여자 같

 


기는 무슨!!! 정신 차려!!”

 


태형은 저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질렀다그 소리에 장지문 너머에서 마마괜찮으십니까하는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태형은 아아아괜찮아벌레가 있어서하고 급히 얼버무렸다사지가 찢겨 성 밖에 전시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니 최대한 몸을 사려야 했다어의는 물론이고 저 상궁처럼 보이는 여자들과도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가능할지 모르겠지만태형은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아까는 그래도 있어야 할 것이 그 자리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어쩌면 그게 다행인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

 


아냐그래도 만약에 있어야 될 게 없었으면 나는… 도저히 버티지 못했을 거야.”

 


태형은 꿀꺽 침을 삼켰다머리가 지끈거렸다일단 살아남아야 한다살아남아야 현대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든뭘 하든 하는 것이다태형이 야무지게 주먹을 쥐었다.

 


하나님제가 태어나서 하나님을 믿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딱히 나쁜 짓은 안 하고 살았었는데요……어찌하여 저한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그래도 억울한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

 


마마산보 나가실 시진이옵니다.”

 


태형이 제 신체의 안위(?)를 확인하고 한 숨 돌린 후 상황 정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자신을 부르는 상궁의 목소리에 태형은 번뜩 고개를 들었다산보산보라면 산책 말하는 건가원래 한 나라의 왕비는 산책 나가는 시간도 정해져 있는 건가쉬는 시간만 있으면 자취방에 엎어져 뒹굴거리기 바빴던 태형에게는 생소한 시간이었지만 태형은 어어어하고 얼버무렸다그리고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이 상태로 나가도 될 것인가아니면 무슨 핑계를 대고서라도 나가지 말아야 할 것인가.

 


마마?”

, 곧 나가마!”

 


이렇게 하는 거 맞나태형은 대충 대답하고는 끙차하고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어차피 마주쳐야 할 상황이라면 미리 나가서 대충이라도 파악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다분위기 파악이라도 좀 해 두자산보라면 뭐딱히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겠지.

 


*



저 오만방자한 것.

 


그런데 이렇게떡하니 사람을그것도 요주의 인물을 마주칠 줄이야태형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교태전을 나서서 상궁 몇을 거느리고 발걸음을 뗀 지 얼마 되지 않아(그 와중에 태형은 치렁치렁한 한복을 입고 걷는 것에 적응했다태형은 제 자신이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태형은 한 무리의 여자들을 발견했다옆에서 한 희빈의 무리들인 것 같습니다하고 상궁 하나가 태형에게 속삭였다한 희빈태형이 묻자 상궁이 고개를 끄덕이며 교태전 근처에는 오지 말라 일렀거늘전하의 총애를 받더니 오만방자해진 모양이옵니다하고 덧붙였다한 희빈무언가 익숙한 단어에 태형은 기억을 더듬어 한 희빈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 냈다아까 정신없던 와중에 상궁 하나가 화무어쩌고 하며 회임을 해야 한다고 했었지그럼 저 여자가… 태형은 꿀꺽침을 삼켰다그 때한 희빈 무리가 태형을 발견하고 태형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상궁 하나가 옆에서 저저런하고 혀를 차는 것이 들려왔다.

 


유라?”

 


그런데그 요주의 인물이 아는 얼굴일 줄이야태형은 눈을 깜박였다태형을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걸어와 가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 한 희빈의 얼굴을태형은 알고 있었다모를 수가 없었다태형이 아껴 마지않던 후배 하나와 사이가 망가지면서까지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던 동아리 후배한유라였으니까태형은 어어하며 어설프게 희빈아니 유라의 인사를 받았다혹시 유라도 나처럼 조선시대에 떨어진 건가?! 반가움과 의아함이 동시에 들었다그런데 뭔가… 평소의 유라와는 다른 느낌태형은 제 몸을 훑고 지나가는 위화감에 몸을 살짝 떨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중전 마마.”

마마께서 요즘 도통 제 알현을 윤허하여 주지 않으셔서 말이지요.”

그럼교태전을 희빈 마마의 집인 양 들락거리는 것이 정상입니까?”

 


태형이 뭐라 하기도 전에상궁이 재빨리 말을 가로막았다그 말에 유라가 한 쪽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명백한 비웃음태형은 순간 입을 합 다물었다한복을 입고말투가 좀 요상하게 변한 것 외에는 분명 유란데유라가 맞는데엄청난 위화감이 태형을 덮쳤다순간어쩌면 저 한 희빈이란 사람은 유라가 아니라… 유라의 조상… 아무튼 그냥 닮은 사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태형은 일단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다.

 


교태전의 주인이란 계속 바뀌는 것 아니겠습니까?”

뭐라!”

그리고전하께서 찾으시지 않아 교태전이 적적해하고 있을 텐데저라도 자주 걸음하여야 덜 외롭지 않겠습니까.”

오만방자한!”

 


정작 태형은 아무 생각이 없는데옆의 상궁이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태형은 좀 진정하라고 말해 주고 싶었으나 일단 입을 가만히 닫고 있었다보아하니 저 한 희빈이란 사람도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았다임금의 총애를 등에 업고 오만방자하다더니 정말인가보네희빈이란 사람이 중전에게 저렇게 대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태형이 가만 머리를 굴렸다사랑받는 첩사랑받지 못하는 정실부인드라마나 소설에서 많이 접했던 레퍼토리였다아마 정말로 그한성왕후란 사람이 들었으면 꽤 타격이 컸겠지하지만,

 


내가 죽으면 교태전의 주인은 당연히 바뀌겠지.”

마마!”

그런데 내가 그쪽보다는 오래 살 것 같은데사람이 욕심이 많으면 단명하거든.”

 


태형이 입은 타격은 0, 제로였다지금의 태형으로서는 그 전하란 사람이 자신을 찾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은 거니까하지만 저렇게 윗사람을 대놓고 비꼬는 한 희빈이란 사람의 행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아서태형은 저도 모르게 한 마디 했다혹시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그 생각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어차피 저 한 희빈도 딱히 예의를 갖추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

 


 한 희빈이 입술을 꼭 깨물더니 휙 하고 몸을 돌렸다그러더니 제 상궁들에게 가자하고는 작별 인사도 없이 멀어져 갔다쟤도 참 인생 피곤하게 사네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이것으로 확실해졌다한 희빈은 현대의 한유라가 아니었다잠깐이지만 혹시이 타임 슬립의 이유가 제가 짝사랑하는 유라와 이어지기 위한뭐 그런 건 아니었을까 하는 핑크빛 상상을 했었다궁중 로맨스뭐 그런 거 있잖아하지만 그 상상은 채 5분도 가지 못해 산산조각났다저 유라를 꼭 빼닮은 한 희빈은 저와 궁중 로맨스를 펼칠 생각이 개미 똥만큼도 없어 보였으니까하긴중전과 첩의 로맨스라니제가 생각해도 좀 웃기긴 했다그게 무슨 막장드라마란 말인가애초에 남자가 중전으로 타임슬립한 이 상황에서 뭔 막장을 더 따지겠느냐마는순식간에 궁중 로맨스에서 사랑과 전쟁으로 바뀌어 버린 장르에 태형은 참담해졌다뭐 이래……?



마마…….”

나 뭐 잘못한 건가?”



그 순간옆에서 들려오는 상궁의 목소리에 태형은 황급히 상궁을 돌아보았다너무 성질대로 했나아닌데나름 성질 죽인 거였는데태형이 지레 겁을 먹고 상궁을 쳐다보자 상궁이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요마마항상 저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계셔서 제가 다 안타까웠었는데마마…….

 


잘하셨습니다마마.”

…….”

 


상궁이 벅찬 듯 눈을 깜박였다그 한성왕후란 사람은 참 현모양처의 표본이었나 보네이런 것 가지고 감동을 다 먹고태형이 애매하게 볼을 긁었다이번에야 어찌 잘 넘어갔지만 본래 한성왕후란 사람의 성격이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태형도 앞으로 조금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태형이 아하하웃었다그런가태형이 얼버무리자 상궁이 여전히 벅찬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날이 참 좋습니다마마조금 더 걸으시지요.

 


그럴까.”

 


칭찬을 받아서 그런가태형은 기분이 좋아졌다그래서 조금 더 걷기로 했다이렇게만 된다면 여기서의 생활도 꽤 지낼 만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한성왕후란 사람에게는 좀 안타깝게 되었지만왕도 부인을 잘 찾지 않는다 하고교태전에 오지도 않는다고 하니 잘만 피해 다니면 어찌어찌 잘 되겠지그 가까운 시일 내에 있다는 합방이란 것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몸이 아프다고 드러누우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제가 직접 당하고도 안 믿기는데설마 중전이 갑자기 남자로 바뀌었다고 의심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태형은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궁 안을 돌아다녔다지리를 모르니 상궁이 가자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는데가는 내내 몇몇 궁녀들과 내시(로 보이는 사람들)들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신경 쓸 만 한 무리도 마주치지 않았기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그리고태형은 곧 커다란 연못에 다다랐다경회루경복궁 내의 누각태형은 제 기억력에 감탄하다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경회루가 이렇게 예쁜 곳이었나매번 올 때마다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었는데태형이 주위를 둘러보았다잔잔한 바람과 물결그 위에 지어진 목조 건물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사실 실제로 본 것보다 교과서에서 그림으로 더 많이 보긴 했다태형이 입을 벌리고 경치를 감상하고 있는 사이상궁 하나가 살며시 웃으며 태형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마마날이 참 좋지요.”

진짜 예쁘다…….”

제가 좋은 소식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좋은 소식태형은 빙그레 웃으며 상궁을 돌아봤다날씨도 좋고기분도 좋고단순한 태형은 어느새 걱정 따위는 곱게 접어 날려 버리고 이 기분을 만끽하고 있던 차였다그러나 그 평화롭고 즐거웠던 기분은상궁의 말 한 마디로 한 순간에 와장창 깨졌다.

 


주상 전하께서 이 시간에 경회루로 산보 나오시는 것을 즐기신다 합니다아마 오늘도

!?”

 


미친그걸 왜 지금 말해!! 태형은 순식간에 간담이 서늘해졌다태형은 재빨리 등을 돌리고 상궁을 잡아끌었다가자태형의 다급함에 상궁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마마태형은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도 아직 왕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왕이라니지금 현재 가장 마주치면 안 될 인물이다그러나 그런 태형의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상궁은 의아한 표정으로 가만히 멈춰있을 뿐이었다태형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상궁을 뒤로 하고 재빨리 교태전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불행히도 태형은 아직 이곳의 지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결국 다시 상궁에게로 돌아온 태형이 다시 한 번 재촉했다어서 돌아가자제발.

 


알겠습니

주상 전하 납시오!”

 


그러나 상궁이 대답을 끝마치기도 전에제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태형이 이를 악물었다시발좆됐다제 뒤를 슬쩍 쳐다 본 상궁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마마참 잘 되었지요하고 귀엣말로 물었다잘 되긴 뭐가 잘 돼!! 아니 이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눈치 더럽게 없네!! 태형은 눈을 감았다하필이면하필이면태형이 그렇게 등지고 눈을 감고 있는 사이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등 뒤가 서늘했다어떡하지어떡하지태형이 입술을 깨물었다망했다최대한 안 마주치려고 했는데이렇게 첫날 딱 마주칠 줄이야뭐가 이렇게 스토리 진행이 빨라!!

 


마마예를 갖추셔야지요!”

 


태형이 그대로 얼어 가만히 멈춰 있자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있던 상궁이 태형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히 속삭였다태형은 그제야 아아아하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그래총애 받지 못하는 왕비라 들었으니까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쳐 갈 확률이 높다태형은 제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다른 사람들은 제 얼굴을 보고도 한성왕후라 불렀으니 얼굴을 들켜도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겠으나괜히 제 발 저린 탓이었다제발 그냥 지나가라… 제발… 제발……그러나 어쩐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본능적으로 온 몸의 감각이 불안하다 외치고 있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목소리도 최대한 작게허리는 최대한 깊숙이태형은 머리가 거의 땅에 닿을 듯이 숙였다가채가 무거워 저절로 머리가 내려갔다미친 듯이 뛰는 심장 때문에 가뜩이나 얼굴이 뜨거운데피가 몰려 얼굴이 계속해서 뜨거워지고 있었다고개를 들면 얼굴이 잘 익은 새빨간 토마토가 되어 있을 것이 뻔했다.

 


고개를 드시오중전.”

…….”

 


그러나 그런 태형의 간절한 바람을 비웃듯왕의 목소리가 태형의 뒷덜미로 떨어졌다시발태형이 다시 한 번 속으로 욕을 짓이겼다안 좋아한다며교태전을 찾지도 않는다며왜 굳이 또 말을 섞으려 하는 거야한성왕후가 들으면 통탄할 말들을 생각하며 태형이 눈을 꼭 감은 채 고개를 들었다차마 제정신으로 왕그러니까 제 남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항마력이 부족했다오늘 하루 일어난 일이 너무 버라이어티해서 태형의 머리는 이미 과부하였으니까.

 


…….”

…….”

왜 눈을 감고 있지눈을 뜨고 나를 보시오.”

 


……태형이 속으로 탄식했다결국… 내 남편의 얼굴을 보게 되는구나… 하긴고개를 들라 했는데 눈을 감고 있는 모양새도 웃기긴 했다부인이 생기기도 전에 남편부터 생겨버린 제 처지에뭐라고 변명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태형이 천천히 눈을 떴다.




해가 너무 좋아서눈이 시려서

…….”

……?!”

 


살짝 눈웃음을 치며 눈을 뜬 그 순간이었다태형은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그리고 그대로 입을 벌린 채 큰 눈을 깜박였다이건… 너무 말도 안 된다아무리 드라마라도 이렇게 막장일 수는 없는 것이다태형은 제 눈앞의 익숙한 인영에 그대로 굳었다어쩐지들려오는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하다 했다그냥 기분 탓이겠거니 했는데태형은 제 눈을 똑바로 마주쳐오는 두 눈에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악연도 이런 악연이 있나그러니까… 제 눈앞에 있는 주상 전하이 나라의 국왕은제 하나뿐이 없는 남편은.

 


…….”

 


성격 좋고 인물 좋은 걸로도 모자라 집안까지 좋아 학과를 넘어 단과대에서도 손꼽히는그러나 같은 이유로 손꼽히는 태형과 사이가 안 좋은 것으로도 유명한.



…….”


태형의 과 후배,

 


…….”

 


전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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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여러 믿지 못할 일들이 벌어진다고 듣긴 들었었다그러니까비과학적인 일들이를 테면 귀신이라든가아니면 염력이나 독심술을 쓰는 초능력자라든가외계인이라든가아니다외계인은 아닌가아무튼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대충 넘어가자아무튼그러니까. TV를 통해뉴스를 통해혹은 인터넷을 통해태형도 심심치 않게 그런 얘기들을 접했었다타임머신의 개발이 사실은 이미 성공했는데 국가에서 사용을 막고 있다거나, 15년 동안 실종됐었는데 15년 후에 다시 찾은 사람을 보니 하나도 늙지 않았다거나그런 거태형은 그런 인터넷 글들을 읽으며 몇 번은 신기해하고몇 번은 주작이라며 투덜거렸었다그러나 그런 글들을 한 번도 진지하게 읽어 본 적은 없었다말하자면신기해했든투덜거렸든어떤 경우에도 인터넷에 널린 그런 글들은 태형에게 그냥 심심풀이 땅콩에 불과했다는 것이다다시 말하자면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리라고는꿈에도정말 죽었다 깨어나도 상상하지 못했었다는 뜻이다그것도 태형제 자신에게.

 


여긴 어디…….”

 


그러나 태형은 지금 제 눈을 의심했다나 뭐 하다가… 이렇게 됐지태형은 눈을 끔벅였다한 숨 낮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익숙한 천장이 아니었다나무로 만들어진 대들보높은 천장우리 집이 이렇게 한옥 느낌이 났었나태형이 멍하니 생각하다 눈을 빠르게 두 번 깜박였다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태형은 후다닥 제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태형의 시야에 들어찬 것은 제가 몇 분 전 잠이 들었던 익숙한 제 방의 풍경이 아니었다화려하게 장식된 병풍금실로 수놓아진 이불넓은 방과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는 햇살이 풍경은그러니까.

 


사극?”

 


그래태형이 즐겨 보곤 했던 사극 드라마 안에서나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나 아직 꿈꾸고 있나태형은 제 볼을 살짝 잡아 늘렸다통증이 느껴졌다꿈이 아니다이번에 태형은 제 뺨을 살짝 때렸다아프다꿈이 아니다태형은 제 볼을 꼬집고 때리다가문득 제가 입고 있는 옷이 과하게 무겁고 바스락거린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리고 제 옷을 보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내린 순간태형은 끄어어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제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몇 분 전 태형이 입고 잠들었던 후드와 청바지가 아니었다그러니까 태형이 지금 입고 있는 옷 역시사극에서나 볼 법한치렁치렁하고 화려한 금실이 수놓아진딱 봐도 비싸 보이는 고급 원단의 한복이었다아니한복?! !? 내가?!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태형은 제가 입고 있는 한복을 펄럭여 봤다없다밑에가그러니까태형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그냥 한복이 아니었다태형은 지금 치마를 입고 있었다아니 왜?! 태형은 다시 한 번 제 뺨을 쳤다아팠다그리고 잠시 후태형은 입을 벌렸다그리고,

 


이게 뭐야아!!!!!!!!!!!!!!!!!!!!!!!!!!”

 


소리질렀다아주 크게.

 


조선 로맨스

 


마마왜 그러십!”

뭐야누구세요!! 뭐야!!”

 


태형은 제 팔을 X자로 포개 몸을 가리며 여전히 소리를 꽥꽥 질러댔다태형이 지른 소리에 놀란 눈을 하고 장지문을 열어젖힌역시나 한복을 입고 있는 여자들은 그런 태형을 보고 눈을 끔벅였다마마그러나 태형의 심장은 갑자기 쳐들어온 그 여자들로 인해 더더욱 빨리 뛰고 있었다이게 다 뭐야뭐야뭐야?! 왜 갑자기 어디서 막 튀어나오는 거야?! 태형이 뒷걸음질을 치다 제 치맛자락을 밟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그러자 멀찍이 서서 당황스러운 눈으로 태형을 쳐다보고 있던 여자들은 태형이 미처 뭐라고 할 새도 없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왔다.

 


마마괜찮으십니까!”

아니잠깐만요.”

혹 좋지 않은 꿈을 꾸셨습니,”

아니지금 뭐 하는 거예요?!”

 


자신을 부축해 일으키려는 여자들의 손에 붙들려 버둥거리던 태형이 제 팔을 조심스레 붙들고 있는 여자를 붙잡고 물었다서프라이즈드라마아니내가 배우도 아닌데 무슨 드라마야그럼 뭐생일 기념 몰래카메라무슨 말을 갖다 붙여도 말이 되지 않았다연예인도 아니고한낱 일개 대학생인 자신을 이렇게까지 큰 스케일로 몰래카메라를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느냔 말이다. (그리고 생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분명 태형은 자신의 자취방에서 잠들어 있었다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곤히 자긴 하지만누군가 자신을 들어다 옮기고 옷을 벗기고 이렇게 척 봐도 복잡해 보이는 옷을 입혀다 눕힐 때까지 잠에서 깨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하나부터 열까지 상식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 투성이다태형은 입을 다물질 못했다그러나 태형이 쳐다본 궁녀는 되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마를 부축해 드리고 있사옵니다.”

아니그게 아니라여긴 어디에요?! 왜 제가 여기 있어요?!”

마마께서 오수(午睡)에 들고 싶다 하셔서 막 이부자리를 준비해 드린 참이었습니다그러니 이곳은 교태전마마의 침소입니다마마…….”

교태전이요?!”

 


태형은 제 기억을 더듬었다워낙 오래 전이라 제대로 기억이 나진 않지만교태전어딘가 익숙한 단어였다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들어 봤던 것 같은데태형이 여전히 입을 벌린 채 여자를 쳐다봤다경복궁강녕전교태전가만교태전그거 왕비의 침실 아니야?

문득 떠오른 생각에 태형이 다시 눈을 크게 키웠다그러고 보니뭔가 이상했다아무리 역사 쪽에 무지한 태형이라지만태형도 여태껏 살면서 보고 들은 것이 있었다그리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적어도 태형이 여태까지 봐 왔던 드라마에서 남자가 이런 치렁치렁하고 화려한 치마를 입고 있었던 적은 없었다남자가몰래카메라든드라마든예능이 됐든뭐가 됐든 간에 남자한테 이런 치렁치렁한 한복을 입혀 놓다니이게 무슨그러나 제 팔을 붙든 여자는 여전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마마태형은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머릿속이 복잡했다아니이게 다 무슨…….

 


이거 그러니까예능 같은 거예요몰래카메라일반인 대상으로 하는?”

마마무슨 말씀이신지…….”

 


태형은 당황스러운 표정의 여자를 보고 다시 한 번 손을 들어 제 뺨을 쳤다그러자 제 팔을 붙들고 있던 여자들의 얼굴이 한꺼번에 놀람으로 물들었다.

 


꿈은 아닌데.”

마마!!!!”

어어왜 이래요?!”

마마이러시면 안 되옵니다……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굳건히 하셔야지요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하였으니 전하께서도 곧 희빈에게서 마음이 뜨실 겁니다.”

아니,”

게다가 곧 합방 기일이 다가오지 않습니까대전 상궁이 기일 중의 기일이라 하였으니 필히 그 날에 회임을 하시어…….”

회임?!?!”

 


태형의 눈이 더 이상 커다래질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래졌다목소리 또한 크고 높았다태형의 목소리에 놀란 듯여자 또한 뒤로 주춤 물러섰다태형이 여자의 두 팔을 덥석 잡았다여자가 히끅하고 딸꾹질을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태형은 지금 그런 것에까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회임이라니회임이라니임신 말하는 거 아닌가?!

 


임신이요?!”

마마그 날에 꼭 회임을 하시어 튼튼한 원자 아기씨를

아니남자

 


가 어떻게 임신을 해요하고 따져 물으려던 태형의 입이 한 순간 일자로 다물어졌다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 때문이었다혹시 이게 실제 상황이라면그러니까정말 말도 안 되지만꿈도 아니고 몰래카메라나예능 같은 것도 아니라면정말 제가… 타임 워프를 해서 조선시대에 떡 떨궈진 것이라면그리고 설마 지금 제 자신이

 


내가 누구죠?”

?”

내가 누구냐 물었습니다.”

 


태형이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목소리를 내리깔고언젠가 봤던 사극 안에서의 말투를 어설프게 따라하며 물었다호랑이 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했다아직까지도 미친 듯이 뛰는 심장과 복잡한 머릿속을 가다듬으며 태형이 더듬더듬 물었다혹시 이 상황을 누군가가 아주 작은 소형 카메라로 다 찍고 있고카메라 너머 상황실에서 지금 제 모습을 보며 킬킬대고 있다 하더라도혹시나라도만에 하나라도 이 상황이 예능이 아니라 다큐라면태형은 정신을 차려야 했다.

 


마마께서는…….”

…….”

 


꿀꺽태형은 침을 삼켰다태형은 가만히 눈을 깜박이며 여자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여자의 눈에 살짝 의아함이 스치더니이내 입이 천천히 열렸다그리고그 여자의 입에서 나온 소리에태형은 제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주상 전하의 어진 배필이시자조선의 하나뿐인 국모이신,”

…….”

한성왕후이시지요.”



미친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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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태형이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기억은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의 눈이었다. 사실 지금에 와서는 그 남자의 얼굴도, 그 때의 제가 몇 살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으니 그 순간이 현실이었는지, 아니면 제가 만들어낸 기억인지조차도 확실하지 않지만, 그 눈만큼은 소름끼칠 정도로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좌절, 분노, 경멸, 증오. 세상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은 모두 담은 것 같았던 그 눈.


긍정적인 눈빛을 받았던 시간보다 부정적인 눈빛을 받았던 시간이 훨씬 더 많았던 제 인생이니 그만큼이나 오래된 기억은 잊어버릴 법도 한데, 그 눈은 아직까지도 가끔 태형의 꿈에 나와 태형을 괴롭혔다. 그 눈에 신음하다가 식은땀에 젖어 꿈에서 깨고 나면, 어두컴컴하고 싸늘한 방은 차라리 위안이 되었다. 그러고 나면 다시 잠들 수 없었지만.

 


너 누구랑 대화해?’

어딜 보는 거야?’

너 소름끼쳐.’

 


하나같이 익숙한 말들. 때론 어른보다 어린아이의 순수함이 더 잔인할 때가 있다. 태형의 어린 시절이 그랬다. 어린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 말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 입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그뿐이었다.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어떤 것을 보는 태형에 대한 두려움. 그건 차라리 견딜 만 했다. 어떠한 괴롭힘도, 따돌림도 없었으니까. 아이들은 그저 태형을 피할 뿐이었다. 그 때문에 가끔 외로울 때도 있었지만, 태형의 옆에는 귀신들이 있었다. 귀신들하고 대화하면 외롭지 않았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제 말을 들어 줄 사람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태형을 좋아했으니까. 그러나 문제는 아이들이 자라날수록 그 두려움이 혐오의 감정으로 바뀌어 갔다는 데에 있었다.

 


눈 씨발 존나 기분 나빠.’

 


왜인지 모르겠지만, 머리가 좀 큰 아이들은 제 밑에 두고 제 감정을 쏟아낼 희생양을 필요로 했다. 그건 일종의 공식 같은 거였다. 학년이 바뀌고, 학교가 바뀌어도 오히려 그 정도만 심해질 뿐 바뀌지 않는 공식. ‘귀신을 보는 아이라는, 태형이 유치원에 있을 때부터 태형을 따라다니던 수식어는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에게는 두려움을 줬지만 아이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 수식어는 아이들에게 두려움 대신 이유를 주었다. 태형이 괴롭힘을 당해도 될 이유. 태형이 맞아도 되는 이유.


 

사람을 쳐놓고 사과도 안 하냐?’


 

다른 지역에서 사고를 쳐서 전학을 왔다던,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한 남자 아이는 또래 아이들보다 다소 폭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를 짓밟고, 그 위에 군림하길 원했고 뭐든지 제 멋대로 하길 원했다. 그 아이에게는 제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제물이 필요했고, 고아원에서 자라 보호해줄 부모님이 없고 귀신을 본다는 기분 나쁜 소문까지 달고 있는 태형은 그 제물에 적합했다.


시작은 사소한 부딪힘이었다. 그 아이는 태형의 자리 가까이에서 시끄럽게 떠들었고, 그 아이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 태형은 몸을 움직였다. 그 아이의 덩치가 제법 컸기에 태형의 팔이 그 아이의 몸을 스쳤고, 정신을 차렸을 때 태형은 교실 뒤쪽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괴롭힘은 한두 명씩 그 인원을 늘려 가며 규모도 커졌다. 시도 때도 없이 태형의 몸을 툭툭 치는 것부터 시작했던 괴롭힘은 심부름, 체육복과 교과서 망가트리기, 교실 뒤편으로 불러내 인간 샌드백 만들기 같은 것들로 점점 강도가 높아졌지만 태형은 그때마다 그냥 이를 악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선생님에게 말씀드려 봐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괴롭힘을 주도하는 아이 부모의 입김이 센 데 반해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의 부모가 없을 때 흔히 생겨나는 경우였다.

 


사람이 말을 하면 사람 눈을 쳐다봐야 할 거 아냐.’

 


그 날은, 유난히 폭력의 강도가 셌던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교실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던 태형은 갑자기 느껴지는 한기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주먹이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덕에 간신히 뜰 수 있었던 눈을 깜박였다. 그 남자 아이의 등 뒤에서, 검은 기운이 아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죽음의 그림자였다.

 


, 내 말이 말 같지 않,’

너 조심해.’

?’

 


차라리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상황이 좀 나아졌을까. 어차피 정해진 수명을 바꿀 수는 없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무슨 오지랖으로 그 아이에게 그런 말을 꺼냈던 걸까 제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를 내려다보며 벙 찐 그 얼굴을 응시하며, 태형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 죽을지도 몰라.’

…….’

네 뒤에…….’

 


태형은 말을 잇지 못하고 제 배를 움켜쥐어야 했다. 그 남자 아이가 더 듣지 않고 태형의 복부를 힘껏 발로 차 버렸기 때문이었다. 씨발, 좆같은 게 어디서 저주야. 남자 아이는 소름끼쳤던 만큼 부러 더 큰 소리를 내며 태형을 발로 밟았다. 힘껏 발길질을 해 대다가, 태형의 움직임이 멎었을 즈음 남자 아이는 태형을 향해 침을 뱉었다. 그러고는 한 번만 더 그딴 재수 없는 소리 하면 말 못하게 만들어 준다, 고 말하고 돌아섰다.


태형은 그 날로 병원에 입원해 꼬박 1주일을 병원에 있어야 했다. 전치 3주가 나왔기 때문에 2주 동안 통원 치료를 해야 한다는 말도 들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태형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태형은 자신을 쳐다보는 반 아이들의 시선이 미묘하게 달라졌음을 감지했다. 태형이 교실에 나타난 순간 교실은 얼어붙었고 태형이 천천히 교실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동안 아이들은 조그맣게 속닥거리며 태형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그 이유는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그 아이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하얀 국화꽃. 태형은 엎드려 눈을 감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태형이 그 아이에게 죽을 것이라 경고하지 않았어도 결과는 비슷하게 흘러갔을 거였다. 태형이 귀신을 보는 아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고 갑작스러운 그 아이의 죽음에 대해 아이들은 자연스레 귀신을 보는태형이 귀신에게 부탁해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를 죽여 달라고 했다는 소문을 퍼트렸을 테니까. 그러니 태형이 그 아이에게 죽을 것이라 경고한 건, 그런 아이들의 상상에 못을 박은 것이나 다름없었고 부풀려진 소문은 평범한 인간은 인간의 수명에 관여할 수 없다는 사신 가 후계자의 말에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들에게 이미 태형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이 사건은 태형의 인생에 있어 여러 가지 의미로 특별한 사건이 되었다. 첫 번째는 이 이후 아이들의 괴롭힘이 뚝 멎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귀신을 보는 아이라는 수식어에 귀신을 시켜 사람을 죽인 아이라는 수식어까지 더해졌다는 것이고, 마지막은, 그 소문을 듣고 찾아온 한 남자가 태형을 입양해 갔다는 거였다. 사실 입양이라기보다는 채용에 가까웠지만.


너와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태형에게 숙식을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병원비도. 대신 자신을 도와 퇴마를 해 줄 것을 부탁했다. 태형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당장 병원비가 필요했고, 어디에서 먹고 자든 지금 살고 있는 지하 쪽방보다는 나을 거였으니까.


 

귀신들이 전부 완전한 사람의 형태로 보인다는 거지?’

.’

 


말이 퇴마였지, 사실상 남자는 무당이나 다름없었다. 사신 가가 버젓이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귀신을 볼 줄 아는 게 다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돈 좀 있는 사람들은 전부 사신 가를 찾아갔으니 남자가 하는 일이라곤 가끔 찾아오는, 잡귀에 엮여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을 봐 주고 시시한 잡귀를 구슬려 떼어내 주는 것 정도였다. 아니면 귀신들이 속닥이는 말을 듣고 어설프게 점을 봐 주거나. 그마저도 태형은 볼 수 있는 것들을 남자는 볼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래도 어쨌든, 그 남자와 함께 했던 2년은 태형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안정적이고 평화로웠던 2년이었다. 그 끝이 어땠고, 그 남자가 무슨 의도로 태형을 입양했든지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남자와의 만남이 갑자기 찾아온 것처럼, 남자와의 이별 또한 갑자기 찾아왔다. 중학교도 채 졸업하기 전의 어느 겨울, 요즘 부쩍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태형은 그날따라 공기의 흐름이 평소와는 다르다고 느꼈다. 이유 모를 불안함 때문에 수업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그래서 태형은 집에 가는 길을 서둘렀다. 자꾸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고, 오싹한 한기에 목 뒤가 간지러웠다. 그리고 발걸음을 재촉해 집에 다다랐을 때, 태형이 본 것은 엉망이 되어 버린 집 안과 거실에 쓰러져 있는 남자, 그리고 그런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태형의 인기척에 태형을 돌아본 네댓 명의 남자들이었다. 태형이 눈을 깜박였다.

 


김태형?’

…….’

대답 안 해도 알겠네. 그 새끼랑 똑같이 생겼어.’

 


한쪽 입꼬리만 올려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인 남자는 곧바로 태형에게 다가왔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제 앞에 있는 사람이 위험한 사람임을, 제 본능이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태형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남자는 우악스럽게 태형의 손목을 낚아챘다.

 


괜히 시간낭비 할 뻔 했잖아.’

누구세요?’

저 새끼 보고 널 데려오라고 시킨 사람.’

 


남자가 고갯짓으로 거실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태형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 닿았다. 익숙한 실루엣인데,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은. 태형은 불안하게 뛰는 제 심장을 억눌렀다. 설마. 아니겠지. 대낮에. 도시 한복판에서. 살인 같은 게 일어날 리가 없잖아. 그러나 아무리 다독여도 손이 절로 덜덜 떨렸다. 그런 태형을 알아챈 남자가 픽 웃었다.

 


죽었어.’

,’

정확히는 죽였지. 내가.’

 


살인을 했다고 제 입으로 말하면서, 남자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태형은 떨리는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현실감이 없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제게 웃으며 다녀오라고 했던 사람인데. 이렇게 쉽게 죽을수 있는 건가. 어렸을 때부터 귀신을 봐 왔기 때문에 죽음에는 제법 의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착각이었다. 귀신과 시체는 달랐다. 그것도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의. 게다가 말이 퇴마였지 태형이 여태까지 해 왔던 것들은 귀신과 직접 대화해 그 사람에게서 떨어지게끔 하는 거였다. 그건 죽음 같은 개념이 아니었다. 완전한 이별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무슨 생각 하는지 아는데, 영혼도 소멸시켰어.’

…….’

그리고 이제부터 내 명령에 제대로 따르지 않으면 너도 저렇게 될 거야.’

 


태형은 시선을 돌려 다시 제 눈앞의 남자를 쳐다봤다. 혹시나 제 능력으로 남자를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밖으로 꺼내어지기도 전에 제 눈앞의 남자에 의해 부서졌다.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너무 갑자기 찾아온 상실이고 이별이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가져본 적이 없어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따뜻함, 다정함, 온기 같은 것들. 가져본 적이 없으면 잃을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잘 기억해.’

…….’

이런 게 이제부터 네가 해야 할 것들이니까.’

남자는 말을 마치고 손을 휘둘렀다. 그리고, 태형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태형이 눈을 뜨자마자 느낀 것은 제 목 뒤에서 느껴지는, 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목 뒤로 손을 가져다댔고 만져지는 축축한 거즈에 순간 숨을 멈췄다.

 


…….’

 


태형은 제 손을 멍하니 쳐다봤다. 제 손에 묻어나온 것은 피였다. 아마도 제 목 뒤에서 나왔을. 거즈가 덧대어져 있었지만 거즈가 흡수할 수 있는 피의 양보다 더 많이 흐른 피가 번져 나온 탓일 것이다. 아직도 타는 것처럼 욱신거리는 목 뒤의 감각이 그걸 알려주고 있었다. 태형은 그제서야 주위를 살폈다.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제가 여태까지 살아왔던 집보다도 더 큰 방이었다.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목 뒤에서 느껴지는 아픔이 큰 탓인지는 몰라도, 요 근래 계속 자신을 괴롭혔던 두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태형은 멍하니 손을 쥐었다 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싶어서.

 


일어나셨네요.’

…….’

잠시만 기다리세요. 거즈 갈아드릴게요.’

 


 

때마침 문을 열고 중년의 여자가 들어왔고, 그 여자는 태형에게 존댓말을 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분명, 쓰러지기 전에 봤던 광경과는 꽤 괴리감이 있었다. 제가 살던 집을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제 목 뒤에 커다란 상처까지 내 놓고는 이런 대접이라니. 제가 쓰러진 사이에 누군가 저를 구하러 와 준 건가, 하고 태형은 생각했지만 곧이어 들어온 남자로 인해 그런 태형의 생각은 흐려졌다. 저와 같이 살던 남자를 죽이고 제 목 뒤의 상처를 냈을, 그 남자였다.

 


상처는 금방 나을 거야. 흉터는 남겠지만.’

…….’

방이 마음에 드나 모르겠네. 이제부터 네 방인데.’

 


퍽 다정하게 들릴 법한, 말이 담고 있는 내용과는 다르게 감정이 조금도 담겨 있지 목소리로 남자가 말했다. 태형이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깨물자 남자가 말을 이었다.

 


내 말만 잘 들으면 네가 힘들 일은 없을 거야.’

…….’

여태까지 능력을 제대로 써 본 적 없었겠지. 기껏해야 귀신들을 달래서 떨어지게 만드는 것 정도였겠고.’

…….’

네가 할 일은 귀신들을 소멸시키는 거야.’

 


힘들 일은 없을 거라고. 태형은 조소했다. 이미 가졌던 모든 걸 잃은 사람한테 힘들 일은 없을 거라니. 그것도 모든 걸 잃게 만든 사람이. 이보다 더한 역설도 있을까. 남자가 그런 태형의 생각을 읽은 듯 비릿하게 웃었다.

 


내 탓 하지 마. 그 놈이 죽은 건 네 탓이니까.’

…….’

그 놈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고, 날 배신하려 했어. 너 때문에.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웠는데.’

그게 무슨,’

그게 네 운명이야. 진심으로 충고하는데, 누구에게든 정을 주지 마. 너도, 걔도. 불행해질 거야.’

…….’

내일부터 시작하는 걸로 하지.’

 


남자는 말을 마치고 방을 나섰다. 남자가 방을 나서자 여자가 다가와 태형의 목 뒤를 치료했다. 태형은 그 손길을 받으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죽여 줘, 제발…….’

 


그러나 태형이 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태형은 남자가 했던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힘든 일은 없을거라던 남자의 말은 거짓이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진실이었다.

 


미안해……. 그런데 너무 고통스러워……. 넌 할 수 있잖아…….’

 


누구에게든 정을 주지 말라던 말. 상대도, 태형 자신도 불행해질 거라던 말. 태형은 제 앞에서 자신을 죽여 달라 우는 영혼을 쳐다봤다. 손이 덜덜 떨렸다.

 


저는, 악귀만,’

날 편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거 알아……. 태형아, 제발 부탁이야…….’

 


태형아. 태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지옥이었다. 태형은 제 손을 꼭 쥐었다. 눈앞에 있는 이 영혼과 처음 만났을 때도 이 영혼은 같은 목소리로, 같은 톤으로 이렇게 태형을 불렀다. 태형아, 하고. 아니, 그 땐 영혼인지 몰랐으니 그 사람은.

 


제발…….’

 


그러니까, 문제는 이거였다. 귀신인지, 사람인지. 태형은 구분할 수 없었다는 것. 귀신들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태형에게 호의를 갖고 다가왔다. 몇 년을, 길게는 몇 백 년을 외롭게 떠돌다 저와 눈을 마주칠 수 있는 태형의 존재가 그들에겐 반갑고 간절했을 거였다. 그렇게 그들은 태형의 곁을 맴돌았다. 태형은 나중에야 그들이 사람이 아니라 귀신임을 알게 됐지만, 달라질 건 없었다. 아니,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귀신을 소멸시킬 수 있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고요, 악귀만…….’

악귀도 귀신이잖아. 비슷하게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 그렇겠?’

 


제 눈에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이 보이는 악귀들을 소멸시키는 것은 차라리 쉬웠다. 악귀를 소멸시킬 때도, 멀쩡한 사람을 죽이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지만 악귀들은 제가 소멸시키기 직전에 검은 기운을 내뿜으며 형체를 뭉그러트렸으니 제가 죽이는 것이 사람이 아닌 악귀라는 것을 제 자신에게 되뇔 수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죄책감에 가끔 악몽을 꾸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태형아.’

?’

소멸시켜줄 수 있어?’

 


처음 그 말을 들은 것은 태형이 일을 시작한 지 6개월 정도가 흐른 후였다. 태형이 일을 시작한 직후에 만났던, 제 나이 또래처럼 보이는 남자 영혼이었다. 그는 죽은 이유도, 왜 성불하지 못하고 여기에 남아 있는지도, 자신의 이름도 모른다고 했다. 그냥 몇 십 년을 정처 없이 떠돌았다고. 그래서 처음으로 눈을 마주친 태형에게 다가왔고, 태형은 그런 그와 금세 친해졌다. 그가 귀신인 것을 알게 된 것은 2주일 정도가 흐른 뒤였다.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그냥 태형과 있으면 제가 아직도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져 기분이 좋아서 그랬던 거라고, 미안하다고. 사실 별 상관은 없었다. 귀신이든 사람이든 누군가 제 옆에 있다는 사실이 좋았으니까. 그런데 그 이후 태형을 줄곧 따라다니며 태형이 악귀를 소멸시키는 것을 본 그가 어느 날 그런 부탁을 한 거였다. 자신을 소멸시켜달라고.

 


그게 무슨 소리,’

나 지쳤어. 이제 그만 쉬고 싶어.’

…….’

이 몸으론 잠도 못 자. 그냥 계속, 떠돌아다니기만 하는 거야. 몇 십 년을 그랬어. 이제 그만 하고 싶어.’

…….’

 


태형은 할 말을 잃고 영혼을 쳐다봤다. 영혼은 간절한 눈으로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태형이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러면, 사신 가를 찾아가 보는 게…….

 


그 사람들은 나 같은 죽은 이유도 모르는 영혼들에겐 관심이 없어. 태형아. 부탁이야.’

제가 소멸시킨 영혼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저도 몰라요. 사후세계가 있는 건지, 아니면 그대로 없어지는 건지. 그런데도 소멸시켜 달라고요?’

상관없어.’

그 말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거예요?’

 


태형이 멍하니 물었다. 영혼이 태형의 눈을 잠시간 응시하다,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가 정말로 태형을 친구로 생각했다면, 이런 부탁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귀신과 사람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과 귀신을 똑같이 느끼는 태형에게 자신을 소멸시켜 달라는 건, 태형에게 살인을 부탁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친구라 여겼던 사람을.

 


어떻게…….’

미안해.’

 


눈가가 아렸다. 태형은 일을 시작하게 되면서 남자에게서 받은 조그만 단검을 만작였다. 이 단검으로 영혼의 목을 찌르면 그 영혼은 소멸될 것이라고, 남자는 말했었다. 예리하게 벼려지지 않은 무딘 칼날은 사람을 찌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을 찌르기 위한 것이라 알려주는 것 같았다. 좁고 가는 칼날에 섬세하게 새겨진 뜻 모를 한자들의 음각이 주는 감각이 오늘따라 낯설었다.

 


다시다시 생각 해 보면,’

태형아.’

…….’

오랫동안 생각했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전부터.’

 


차라리 그 말은 하지 말지. 태형은 단검을 꽉 쥐었다. 제가 그를 친구라고 여기고 편안해하며 농담을 건네고 있었을 어느 그 순간에도, 그는 태형에게 언제쯤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할지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였다. 태형은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그는 여전히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

 


못 하겠다고 하려 했다. 안 할 거라고. 그러나 그의 눈을 마주친 순간, 태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 말고는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눈빛.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언제부터 그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차마 가늠도 가지 않았다. 문득,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국화꽃이 떠올랐다. 거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남자의 모습도. 죽음. 생각해 보면, 죽음은 언제나 태형을 따라다니던 거였다. 어떤 형태의 죽음이든. 태형은 천천히 단검을 고쳐 잡았다.

 


태형아.’

…….’

 


태형은 그를 향해 칼끝을 세웠다. 만지면 온기가 느껴질 것 같은 목이 시야에 들어왔다. 피는 나오지 않았지만, 영혼을 찔러도 누군가를 찌르는 그 감각은 느낄 수 있었다. 이 영혼도 죽기 직전에 형태가 뭉그러질까? 태형은 멍하니 생각했다. 어느 쪽이 차악일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제 자신에 태형은 웃음이 나왔다.

 


이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인 거네요.’

…….’

 


내 손으로 직접 죽여주는 거. 태형이 허탈하게 웃었다. 영혼은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계속 단검을 쥐고 있는 태형의 손에 머물러 있었다. 1초라도 빨리 죽여 달라고 하는 것 같은 그 모습에 태형은 입술을 물었다. 태형이 단검을 쥔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티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 어느 때보다도 떨리는 손은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이 아니었다.

 


고마워,’

…….’

태형아.’

 


태형이 그의 목에 단검을 대고 힘을 주어 누르는 순간, 영혼이 눈을 감고 말했다. 그와 동시에 영혼의 형체가 칼끝에서부터 잘게 부서졌다. 태형은 눈을 감지 않았다. 끝까지 눈을 뜨고, 악귀가 아닌 영혼이 소멸되어 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악귀가 아닌 영혼은 소멸될 때 형체가 까맣게 뭉그러지지 않았다. 가루가 되어 흩뿌려지듯이 천천히 사라졌다. 그렇게 끝이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고.

 


내 이름은 부르지 말지.’

 


태형이 허탈하게 중얼였다. 끝까지, 태형에 대한 배려라고는 없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에도, 태형을 달라진 것 없이 해오던 일을 계속했다. 학교를 다니며, 끝나고는 남자가 일러준 대로 악귀를 소멸시켰다. 아무렇지도 않게. 감상에 젖을 틈이 없는 건 차라리 다행이었다. 어차피 달라질 것 없는 운명이라면 그냥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나았다. 치료해 봤자 다시 덧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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