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

 

숨을 크게 들이쉬고 강의실 안으로 들어서자 예상했던 대로 기묘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졌다. 그 감각이 너무나도 익숙해서, 나는 입술을 물었다. 그 때와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나를 가까이 아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나를 향해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는 것 정도일까. 나는 천천히 걸어가 늘 앉던 강의실 끄트머리에 앉았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을 하고 있지만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저번 학기에 이어 이번 학기에도 2학년 전공 필수 2개와 교양 하나(내가 신청한 것을 전정국이 따라 신청했다)가 전정국과 겹쳤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금 이 수업은 전정국과는 겹치지 않는 전공 수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총에서 있었던 일은 화제인 모양인지 주위에서 나를 힐끔대는 것이 느껴졌지만.

 

오기 싫었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상황이었으니까 오기 싫었는데, 휴학하고 복학한 지 한학기만에 다시 휴학을 할 수는 없었고, 휴학을 할 수 있다 해도 이 소문이 다시 수그러들 때까지 휴학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일이었고,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그냥 온 거였다.

 

그 날 그렇게 개총이 파한 이후, 나는 주말 내내 전정국에게서 오는 연락을 싸그리 무시했다. 전화는 받지 않았고, 카톡은 미리보기로 뜨는 것조차 읽지 않았다. 종국에는 아예 핸드폰을 꺼 버렸다. 어차피 연락 올 사람도 없고.

 

처음에는 화가 났다. 내 좆같은 과거를 아는지 모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알든 모르든 안 그래도 아직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남아 있는 과 안에서 조용히 살고 싶었던 나를 비슷한 상황에 빠트린 전정국이 미웠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한 건지도 이해가 안 됐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고 화가 가라앉고 나자 신기했다. 물론 내가 강선우처럼 쓰레기 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애초에 고백하고 그대로 정신을 잃은 건 전정국이었으니 그럴 수도 없었지만) 어쨌든 그렇게 고백하고 끝난 사이에 나한테 계속해서 연락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니. 역시 대단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거랑은 별개로 나는 이제 내가 곧 마주해야 할 상황들이 충분히 좆같았으므로 이 상황을 어떻게 또 견뎌내야 할지를 생각해야 했다. 유경험자니까 그때보단 좀 나으려나. 허탈해서 웃음이 나왔다. 조용히 살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또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그것도 똑같이 과 내 최고 유명인사와.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강선우와의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러고 나니 자연히 지금 내 상황과 그때의 상황이 겹쳐 보였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번에 고백 받은 것은 나고, 고백한 것은 전정국이라는 거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때 강선우에게 피해가 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은근히 추켜세워져 졌으면 추켜세워져 졌지. 그럼 이번에도 그럴까? 전정국은 게이새끼로 낙인찍히고 나는그런데 문제는 나도 게이라는 거지. 그리고 그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고. 몰랐대도 이제는 다들 알게 됐을 테니까. 그 때의 소문을 아는 내 동기들에 의해.

 

…….”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될 대로 돼라였다.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아웃사이더가 되고 싶었고, 이제 와서 학교생활에 미련도 없었다. 전정국이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걔가 저지른 거니 책임도 알아서 지겠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는 차분히 잠에 들었다. 핸드폰은 여전히 꺼 둔 채로. 그리고 학교에 왔다. 연락 올 사람이 없다는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는데, 핸드폰을 꺼도 일상생활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렇게 나를 힐끔대는 사람들을 무시하며 수업을 듣고, 다음 수업으로 가기 위해 강의실을 나서려는데 누군가가 나를 붙잡아 오는 것이 느껴졌다. 전정국이었다. 놀라울 건 없어서, 나는 무심히 전정국의 얼굴을 쳐다보고, 시선을 내려 전정국에게 잡힌 내 손을 쳐다봤다. . 아파. 내 무미건조한 말에 가뜩이나 불안으로 가득했던 전정국의 눈이 꼭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변했다. 비에 맞은 강아지 같았다. 토끼나.

 

선배…….”

…….”

잠깐 얘기 좀 해요.”

 

얘기. 해야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한숨을 부정적으로 해석한 건지 내 앞의 전정국이 안절부절 못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말고, 좀 조용한 데로 가자.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전정국은 가만히 있어도 시선을 끄는 사람인데, 불과 3일 전에 있었던 가십 때문에 현재 경영대 내 가장 핫한 인물일 나와 전정국의 투샷에 복도의 모든 시선이 나와 전정국에게 꽂힌 탓이었다.

 

*

 

선배, 미안해요. 진짜 그 때 거기서 고백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럼 언젠가 고백을 하려고는 했었다는 거네.”

선배를 좋아하는 건 진심이에요…….”

 

조용한 곳을 찾고 찾다 결국 온 곳이 건물 뒤 으슥한 곳이었다. 그 때까지 아무 말이 없던 전정국은 내가 담벼락에 기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닥하자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꺼낸 말이 저거다. ‘거기서 고백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선배를 좋아하는 건 진심이에요.’. 그 와중에도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전정국의 순수함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생각보다도 더 대단한 놈이었다.

 

선배가 너무 좋아서, 그런데 선배는 나한테 관심도 없는 거 같고. 그런데 지윤이가 선배가 좋다고 해서, 속상해서그런데 선배는 제 연락 하나도 안 받고,”

 

전정국의 말이 두서없이 이어졌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윤이는 또 누구고, 얘는 왜 여기서 제 마음을 고백하고 있는 걸까. 할 말이 있다는 게 이거였나. 나는 전정국의 말을 잘랐다. 하고 싶다는 말이 그거야? 내 무뚝뚝한 말에 전정국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축 처진 귀와 꼬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선배 곤란하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정말 진심이에요. 제가 그러면 안 됐는데,”

…….”

그치만 선배를 좋아한다고 했던 건 진심이에요. 지금 당장 대답을 바라는 건 아니에요. 그냥, 제가 술 취해서 마음에도 없는 얘기를 한 건 아니,”

정국아.”

 

나는 전정국의 말을 끊고 전정국을 쳐다봤다. 전정국의 커다란 눈이 나를 향했다.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도, 전정국이 어려 보였다. 순간적인 착각을 진심과 혼동하는 게 틀림없었으니까. 그냥, 전정국은 누군가에게 이렇게 매달려 본 적이 처음이었던 거다. 자기를 싫어하는 것 같은 사람이 신기해서 다가왔다가, 그 사람이 천천히 마음을 열어 가는 게 기분 좋았겠지. 그래서 그 기분 좋은 감정을 좋아하는 감정이랑 착각한 거다. 어젯밤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난 네 말 안 믿어.”

…….”

너 그냥 착각하는 거야.”

 

호기심, 단순한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호감, 신기함. 그런 것들이랑. 나는 가볍게 얼굴을 쓸었다. 입 안이 썼다. 내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전정국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선배 혹시 화났어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안 났어. 화가 났었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아니었으니까. 그 말에 전정국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 눈을 맞추며 나를 불렀다. 태형 선배. 마주친 전정국의 눈은 내가 전정국을 마주했던 그 어느 때보다도 가라앉아 있었다. 그 생소함에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저 제 감정도 모를 정도로 바보 아니에요.”

…….”

어떻게 하면 믿어 줄 건데요?”

…….”

남준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저랑 선배랑 무슨 사이냐고.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선배랑 저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냥 그랬어요. 나 혼자 선배 좋아하는 거라고.”

 

. 나는 전정국의 대담함에 입을 벌렸다.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니. 그것도 술 취해서 그냥 헛소리한 거라고 넘길 수 있었던 걸, 다시 한 번 못을 박았다니. 그러나 나의 그런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정국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선배하고 얘기 한 후에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선배가 전화를 안 받아서그래서 그냥 솔직하게 말했어요. 선배한테 피해 안 가게 하려면 그게 제일 나을 것 같아서. 사실이기도 하고.”

…….”

제가 부담스러우면, 그냥저 무시하시면 돼요. 그럼 소문 같은 건 금방 없어질 거예요. 제가 일방적으로 선배 좋아한 거고, 선배는 아무 잘못 없으니까. 제가 책임질게요.”

 

글쎄. 그런 걸로 소문이 쉽게 없어질 것 같진 않은데. 더더군다나 그 전정국이 날 좋아하는 거면. 그러나 나는 굳이 이 말을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다. 말해봐야 전정국의 죄책감만 커질 테니까. 이미 내 안에선 정리가 끝난 상황이었고,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전정국은 여전히 날 쳐다보고 있었다. 할 말 다 끝났으면 갈게. 내 말에 전정국이 입이 조그맣게 벌어졌다가, 닫혔다가, 다시 벌어졌다. 무언가 할 말이 남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할 말 있으면 해. 하고 말했다. 피곤했다. 이미 이번 수업은 늦어버린 것 같으니 어딘가로 가서 한숨 잘 생각이었다. 밥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내 말에, 잠시 머뭇대던 전정국이 입을 열었다. 선배,

 

다 괜찮은데, 제가 잘못한 거니까 감당할 수 있는데.”

…….”

선배가, 제가 한 고백이 착각이라고 생각하는 건 싫어요.”

.”

저 진짜 선배 좋아해요.”

너 진짜

 

대단하다. 나는 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내 반응에 전정국은 미간을 좁혔다. 나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꼭 어린아이가 칭얼대는 것 같잖아. 나는 찬찬히 전정국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기분 탓인진 몰라도 그 사이에 전정국의 얼굴이 조금 핼쑥해진 것도 같았다. 내 시선에 전정국은 입술을 깨문다. 전정국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제 마음을 착각이라고 말해서, 억울해 하고 있을까? 아니면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고 있을까.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살았을 거고, 일생을 살아오면서 대부분의 일들은 제 뜻대로 되어 왔을 전정국이 지금 이렇게 애타 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문득 전정국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어쩌다가 나 같은 애랑 엮여서.

 

나 좋아한다는 소문 나 봐야 너한테 좋을 거 없어.”

왜요?”

 

몰라서 묻냐? 나는 눈으로 그렇게 물었다. 내 눈빛의 의미를 알아챈 듯, 전정국의 잘생긴 미간이 조금 더 좁혀졌다.

 

전 제가 선배 좋아한다는 거, 전교생이 다 알아도 상관없어요.”

…….”

사실인데 뭐.”

쓸데없는 오기 부리지 마.”

 

나는 건조하게 내뱉었다. 전정국은 어리다. 그리고 아직 뭘 모른다. 이런 간단한 대화에서도 전정국이 그동안 빛, 그것도 아주 밝은 빛 아래에서만 살아왔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전정국은 여전히 날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더 말할 수 있을까. 어차피 지금 전정국에겐 들리지도 않을 텐데. 내가 전정국의 눈을 피하자 전정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기 아니에요. 그럼, 믿어 줄 거예요?”

?”

내가 선배 좋아한다는 거, 온 전교생이 다 알게 돼도 내가 후회하지 않으면, 믿어 줄 거냐고요.”

…….”

제가 선배 좋아하는 거.”

 

쟤는 왜 저렇게 저거에 집착할까. 내가 괜찮다는데, 왜 제가 나서서 제 인생을 꼬려고 드는 거냔 말이다. 나는 다시 전정국을 쳐다봤다. 평소와는 다르게 가라앉아 있는 전정국의 눈빛은 단호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저한테는 중요해요.”

네 맘대로 해.”

 

이미 한 번 게이라고 소문났던 거, 두 번 난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전정국이 김남준에게 다시 한 번 못을 박은 만큼, 전정국이 나를 좋아한다는 소문은 어차피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이고 전정국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내가 인정하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 것처럼, 자꾸 아니라고, 아니라고 하면 오기로라도 더 좋아한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그냥 그렇게 말했다. 전정국같은 애가, 순간적인 감정에 더 이상의 감정 소모를 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정말로, 내가 바란 것은 단지 그뿐이었다.

 

*

 

선배!”

 

그러나, 그 때의 나는 잠시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전정국이 생각보다도 더 대단하고, 대담한 놈이라는 것을. 나는 강의실 문 앞에 멍하니 서서 내가 늘 앉던 자리 옆자리에 앉아 나를 부르며 해맑게 웃는 전정국을 쳐다봤다. 자연히 강의실 안 시선이 나에게 모아졌다. 나는 얼떨떨하게 한 손을 올려 그런 전정국에게 응답했다. ,

 

어디 가요, 선배. 맨날 여기 앉았잖아요.”

 

그러고는 늘 앉았던 그 자리를 피해 다른 쪽 구석으로 가 앉으려는데, 그런 나에게 전정국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자리에 앉다 말고 전정국을 얼떨떨하게 올려다봤다. 교양에서야 상대적으로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수강 정정 전부터 내 옆자리를 꿰찬 전정국 때문에 어쩌다 보니 매일같이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들었다지만, 전공에서는 전정국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후배들과 동기들이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넘쳐났으므로 학기 초, 내가 강의실에 들어서기 전부터 전정국의 근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수업 직전에 들어와 수업이 끝난 직후에 바로 나가기 편한 문 근처 맨 뒷자리에 앉았고 전정국은 맨 앞쪽 가운데에 앉다 보니 자연히 교양에서 같이 앉아 수업을 듣고, 일주일에 세 번 이상 같이 밥을 먹어도 전공 강의실에서는 친한 티를 낼 일이 별로 없었는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붙어 다니다 보니 학기 말에는 나에게서 전정국을 찾는 사람이 꽤 있었지만), 지금 전정국의 행동은 그런 불문율을 깨는 것이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는 대충 그런 뜻을 담아 전정국을 올려다봤지만 전정국은 그런 내 눈빛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아니면 알고도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여전히 생글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여기가 좋으면 여기에 앉을까요?”

…….”

잠시만요, 가방 가지고 올게요.”

, 아니.”

 

나는 나와 전정국에게 모아진 강의실 안의 시선을 느끼며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당황스럽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내 눈빛에 전정국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그 얼굴을 멍하니 보고 있자니, 문득 어제 전정국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내가 선배 좋아한다는 거, 전교생이 다 알아도 제가 후회하지 않으면 믿어 줄 거예요?’. 그러니까, 전교생이 다 알아도가 정말말 뜻 그대로의 의미였던 건가. 나는 갑자기 등 뒤로 끼치는 한기에 잘게 몸을 떨었다.

 

뭐야, 전정국. 둘이 사귀기로 한 거야?”

아뇨, 그냥 저 혼자 좋아하는 건데요.”

와우.”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렇게 어정쩡한 상태로 멈춰 있는데, 선배 하나가 들어오면서 무심하게 던진 말에 전정국은 더 이상 간단할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대답한다. 그 대답에 선배는 역시나 담백하게 와우,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고. 저 선배는 나도 아는 선배였다. 민윤기. 강선우와의 일로 과 전체가 들썩거렸을 당시 2학년 학회장이었는데, 모두가 나에게 집중하며 힐끗거릴 때 유일하게 무심했던 선배였다. 딱히 나를 배려해서라기보다는 그냥 본인이 세상일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았지만 그 때의 나에게는 꽤 위안이 되었던 존재였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민윤기 선배를 쳐다보고 있자니 윤기 선배가 그런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나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갑자기 마주친 시선이 나는 아, 하고 멍청한 소리나 냈고.

 

태형이 오랜만이네.”

러게요. 선배 잘 지내셨어요?”

나야 뭐, 인턴이다 뭐다 정신없었지. 이 수업 들어?”

.”

자주 보겠네. 나 졸업하기 전에 밥이나 한 번 먹자.”

!”

 

오랜만이라는 인사에 그러게요, 하고만 대답하고 말기에는 어색해 잘 지내셨냐고 안부를 물었는데, 생각보다도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그 때. 그러니까 그 사건이 있었을 때 학교를 다니고 있던 사람하고는 처음 마주치는 거였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대하는 윤기 선배의 태도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윤기 선배가 픽 웃고는 나를 지나쳐 자리에 가 앉았다. 물론 그 때의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아니 오히려 윤기 선배가 소수인 거겠지만, 그래도 그 때의 나를 알고 있는 사람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대화할 수 있구나 싶어 기분이 조금, 괜찮아졌다.

 

선배.”

, ?”

가방 가져올게요.”

 

과거의 감상에 빠져 그렇게 멍하니 윤기 선배를 눈으로 좇고 있었는데, 옆에서 전정국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정국을 돌아보니 조금 굳은 얼굴로 나에게 말하고는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까까지만 해도 생글생글 웃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표정이 굳었지? 멍하니 생각하다가 이내 혹시, 하는 생각에까지 닿는다. 혹시 내가 민윤기 선배 조금 쳐다보고 있었다고 질투하는 건가? 설마?

 

선배.”

?”

 

내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가방을 가져와 내 옆에 자리 잡은 전정국이 잠시 머뭇대다가 말을 꺼낸다. 왜 갑자기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 거지. 나는 자꾸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전정국의 질투에 대한 것을 잊어버리려 애썼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 그러니까, 이런 거 가지고 질투하는 거면 진짜진짜 날 좋아하는 거 같잖아. 나는 어정쩡하게 전정국을 쳐다본다. 전정국은 그런 나와 눈을 맞추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이내 입을 연다.

 

제 고백 거절한 이유가 혹시,”

…….”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어서 그런 건…….”

…….”

 

전정국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 전정국 대박.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쓸데없이 진지한 얼굴인 이유가,

 

아니죠?”

 

질투맞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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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형 선배.”

 

그 날, 전정국은 꽤 많이 취해 있었다. 원체 주량이 세기도 한데다가 술을 그렇게까지 취할 정도로 마시는 애가 아니었는데, 그날따라 내 앞에 앉은 전정국은 무언가 고민거리가 있는 듯 연거푸 술을 들이켰었다. 나는 그런 전정국에 맞춰 주다가, 말리다가, 결국엔 포기하고 전정국이 술잔을 들 때마다 물과 술을 번갈아 가며 마시고 있었고.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평소의 전정국 같았으면 내가 굳이 말을 시키지 않아도 혼자서 조잘조잘 떠들어 댔을 텐데, 그 날 전정국은 나에게 말을 시키지 않았다. 왜 그러냐고, 무슨 일 있냐고 물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겨우 한 학기 동안 말 몇 번 튼 것 가지고 친한 척 오지랖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질까 싶어 관뒀었고. 그래서 나는 그냥 술잔을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면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싶어서. 그래서 문득, 술을 마시다 말고 고개를 들어 나의 눈을 마주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전정국에, 나는 반가움까지 느꼈었다. 이제 왜 그렇게 오늘따라 이상하게 굴었던 건지 이야기를 해 주려나 싶어서. 그런데,

 

저 선배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니, 좋아해요.”

 

한순간이었다. 전정국이 잔뜩 취기가 오른 빨간 얼굴로, 그러나 표정은 한없이 진지하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 그 누구도 아닌 제 앞에 앉은 나, 김태형을 똑바로 쳐다보며 뱉은 문장에 온갖 소리들로 시끄럽던 술집 안의 소음이 한 순간에 멎었다. 나는 마시려던 술잔을 채 내려놓지도 못 한 채 그대로 굳었고, 내 눈앞의 전정국은 그 말을 했으니 이제 여한이 없다는 듯 그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숨 막히는 정적 속 술집 안의 모든 시선이 나를 향했다가, 전정국을 향했다가, 다시 나를 향했다.

 

얘 방금 뭐라고 한 거…….”

 

꽤 오랜 침묵을 뚫고, 3학년 회장 김남준이 입을 열었다.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내 평탄하지만은 않았던 대학 생활이, 다시 한 번 지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오해와 연애

 

내 대학 생활은 시작부터가 꼬여 있었다. 나는 쓸데없이 어린 나이부터 나의 성적 지향성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 인간이었고, 그에 따라 방황도 좀 하고, 탈선과 일탈도 좀 했어야 했던 나의 청소년기는 내 특별한 성적 지향성에 대한 고민만으로도 벅차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고뇌와 번민을 하는 것으로만 채워졌다. 여자친구도, 그렇다고 남자친구도 사귈 수 없었던 나는 19년을 그대로 솔로로 지냈고 남들이 연애도 하고, 질풍노도의 시기도 보내는 그 시간들 동안 딱히 이렇다 할 취미 없이 공부만 하며 보냈다. 그렇게 재미없게 살았으니 소위 명문대라 불리는 대학교로부터 무리 없이 합격 통보를 받아낼 수 있었고, 대학 합격이 확정되고 난 후 나는 농담으로라도 친하다고는 하지 못할 내 고등학교 친구들 중 그나마 유일하게 친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박지민과 (시큰둥하게 반응해도 유일하게 나에게 계속 살갑게 말을 붙여 주는 배알 좋은 놈이었는데, 이런 박지민과도 과는 다르지만 같은 학교에 합격하게 되지 않았다면 아마 연락이 끊어졌을 것이다) 처음으로 내 민증을 보여주고 산 맥주를 마시며 결심했다. 대학 생활은, 내 하나밖에 없는 대학 생활은 이렇게 시시하게 보내지 않겠노라고. 연애도 해 볼 것이며, 그 누구보다도 지루하지 않게 보내겠다고.


그래서 나는 노력했다. 과에서 주최하는 모든 행사에 참여했고, 학생회 같은 건 하지 못하더라도 꾸준히 내 존재를 과에 어필했다. 그 즈음 나는 내 성적 지향성에 대해 확고한 결론을 내린 상태였고, 연애도 꼭 해 보겠다는 내 목표에 따라 자연히 호감이 가는 사람도 찾게 되었다. 그 때 만난 게 걔였다. 강선우.


강선우는 입학과 동시에 소소하게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큰 키에 잘생긴 얼굴. 집안도 좀 사는 것 같았고 성격도 시원시원했다. 덕분에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인기를 끌었고 자연스레 1학년 학회장을 맡게 되었다. 과에 열심히 참가하려고 했던 나와도 자연스럽게 많이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친해졌다. 친구라고는 박지민밖에 없었던 내게 강선우는 뭐든지 처음이었고, 강선우는 그런 나를 신기해하며 잘 챙겨줬다. 나는 내 성적 지향성에 따라 자연히 미팅 같은 건 나가지 않았고 그건 강선우도 마찬가지였다. 나야 게이라서 그렇다지만, 걘 왜? 그래서 나는, 걔도 혹시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희망을 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선우는 여자동기 및 선배들에게 인기가 폭발적으로 많았음에도 그 누구와도 사귀지 않았다. 오히려 나와 있는 것을 더 좋아했다. 이런 상황에서, 걔를 좋아하는 내가 착각하지 않고 버티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신중했던 나는 1학기 내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결론을 내렸다. 강선우도 게이이고,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온 이후 첫 기말고사가 일주일 남짓 남은 어느 날, 나는 학교 앞 어딘가의 술집 안에서 조금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로, 강선우에게 고백했다. 너를 좋아한다고. 강선우는 내 말에 눈을 크게 떴고, 나는 그런 강선우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강선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그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지옥과 천국을 오갔다. 그리고 그 긴 침묵 후에 걔가 뱉은 말은,

 

너 게이야?’

 

였다. 나는 고개를 들어 강선우를 쳐다봤다. 강선우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난 깨달았다. 내가 내 상상 속에서 만들었던 강선우와 현실의 강선우는 아예 다른 사람이었음을. 그는 나를 보기 좋은 장식품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옆에 두면 제 급이 올라가는 명품 같은 걸로. 미팅이나 소개팅에 나가지 않았던 것은 그런 곳에 나가지 않음으로서 제 희소가치를 올리려는 의도에서였고 그 누구와도 사귀지 않았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좋아했던 것도, 과내에 저와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급의 친구로 날 골랐던 것이었을 뿐이다. 나를 값비싼 명품쯤으로 보던 강선우의 눈빛은 나의 고백 이후에 달라져 있었다. 저보다 아래의 것을 보는 눈빛으로.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 했었나. 그 말이 지금 이 상황에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선우는 나를 그렇게 봤다. 내 고백이, 걔한테는 차라리 더 잘 된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자신보다 아래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것이었으니까.


그 뒤의 상황은 불 보듯 뻔했다. 월요일 아침 학교에 간 나는 나를 향해 수군거리는 동기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김태형 게이래.’ ‘선우한테 고백했다가 차였대.’ 낮은 목소리로 조용하게 말한 것이 전혀 소용없을 정도로 똑똑히 내 귓가를 파고든 말들이었다. 강선우는 사실에 허풍을 섞어 동기에게 고민상담 하듯 그 날의 이야기를 흘렸고 소문은 점점 부풀려져 종국에 이야기는 나에게는 관심도 없는 강선우를 내가 한 학기 내내 스토커처럼 쫓아다닌 것처럼 변해 있었다. 해명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강선우는 이런 사회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제 손바닥 위에 놓고 굴릴 줄 아는 인간이었고, 나는 이런 상황에 익숙하지 못한 인간이었다. 동기들은 날 슬금슬금 피했고 나는 어떻게 끝났는지 모를 기말고사를 마치고 바로 휴학했다. 끔찍했던 2주였다.


그리고 나는 반수를 시작했다. 부모님에겐 더 좋은 학교를 가고 싶어서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문제집을 푸는 와중에도 강선우와, 날 보던 동기들의 눈빛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악몽을 꾸다가 땀을 흠뻑 흘리며 잠에서 깨는 것은 일상이었다. 결국 그 해 본 수능에서 나는 더 좋은 대학은커녕 지금 다니고 있는 대학에도 못 올 점수를 받았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나는 복학하지 않았다. 대신 군 휴학을 신청했다. 2년이 지나고 나면, 소문이 수그러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군대를 다녀왔고, 복학했다. 다행히도 강선우는 없었다. 얼핏 듣기로는 2학년까지 다 마치고 군대를 간 것 같았다. 당장 마주칠 일은 없을 거라는 게 위로가 됐다. 학교를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마주치겠지만.


1학년도 채 다니지 못하고 도망치듯 휴학계를 냈기 때문에 23살에 나는 아직도 1학년이었다. 동기들은 전부 2,3학년 수업을 듣고 있을 테니 차라리 잘 된 일이었다. 즐거운 대학 생활을 보내겠다는 1학년 때의 다짐은 이미 빛이 바래 구석에 처박힌 지 오래였고 그냥 조용히, 고등학생 때 그랬던 것처럼 학점이나 잘 받으며 무사히 졸업하는 것만이 내 목표가 되었다.


다행히도, 내가 신청한 1학년 수업에 내가 아는 얼굴은 없었고 그 사실에 소소하게 감사하며 강의실 한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참이었다. 멍하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강의실이 소란스러워졌다. 자연스레 고개가 소란스러워진 쪽으로 돌아갔다. 소란의 근원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인영 하나가 강의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주위 여자애들이 하는 정국 선배인가 봐.’ ‘, 그 말로만 듣던?’ 따위의 말들이 내 귓가에 가볍게 안착했다. 아직은 어색한 듯 강의실로 들어오며 인사하는, 흐릿했던 인영이 조금 더 선명하게 잡혔다. 어딜 가도 눈에 띌 만한, 잘 생긴 얼굴. ‘잘 지냈어?’ ‘이 수업 들어?’ 하는, 주위에서 건네는 호의 담긴 안부들에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 기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저 익숙한 풍경이 꼭, 예전 1학년 때를 떠올리게 했다. 강선우가 꼭 저랬으니까. 어딜 가도 주목을 받았고, 호의 어린 말들을 받았었으니까.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우스운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불편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쨌든 나랑은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

 

옆에 앉아도 돼요?”

 

그런데 이렇게 다시 마주칠 줄이야. 수강신청에 실패해 별 생각 없이 시간표에 맞춰 넣었던 교양 시간이었다. 나는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빼고 나에게 말을 걸어 온 인영을 올려다봤다. 그 얼굴을 기억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 번 보면 잊기 힘들 정도로 잘 생긴 얼굴이었으니까. 나는 잠시 아니라고 할까, 그러라고 할까 고민하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쳐다본 것 같아서였다. 잘 생긴 얼굴이 씩 웃으며 내 옆자리에 자리를 잡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이어폰을 다시 껴도 될까 잠시 고민했다. 수업이 시작하기까지는 7분 이상이 남아 있던 터라 강의실엔 아직 자리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굳이 이 자리에 앉아야 했을까, 얘는. 이 자리가 마음에 든 거라면 다음부터는 다른 자리에 앉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이어폰을 귀에 구겨 넣었다. 더 이상 말을 걸지 말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러나 그 행동은 옆의 인영이 나를 톡톡 두드리면서 무시당했다. 나는 다시 이어폰을 빼고 옆을 쳐다봤다. 잘 생긴 얼굴이 여전히 나를 보며 살짝 웃고 있었다.

 

경영학과죠?”

…….”

우리 이거 말고도 같은 수업 듣는 거 같은데. 기업과 경영.”

 

모를 리가 없었다. 아까 처음으로 얘를 봤던 수업이었으니까. 전필이니 나를 경영학과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 그것도 맞았다. 그런데 이렇게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을 걸다니, 얘도 참 친화력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무심하게 반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앞의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살갑게 말을 걸어 왔다.

 

“1학년, 맞죠? 제가 새내기를 잘 몰라서.”

…….”

, 소개가 늦었네. 제 이름은 전정국이에요. 1학년은 맞는데, 나이는 22. 1학년 1학기 마치고 바로 군대 갔다 와서.”

 

1학년은 맞는데, 새내기는 아니라서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반응하지 못하고 있으니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신이 나서 묻지도 않은 제 소개를 한다. 나보다 한 살 어린 걸 보니 나보다 1년 후에 입학한 것 같았다. 말하자면 내가 선밴데, 후배를 챙겨 주려는 선배 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그냥 가만히 있었다. 굳이 설명하기도 귀찮았고. 어차피 오늘 보고 말 사람인데. 얘를 보고 있으면 자꾸 강선우가 떠올라서 기분이 가라앉았다. 얼굴도, 분위기도. 닮은 구석 하나 없는데, 그냥 잘났다는 게, 과내에서 시선을 끄는 존재라는 사실 때문인 것 같았다. 이쯤 되면 피해의식 아닌가 싶다.

 

이 교양에는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어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친하게 지내요. 밥 사줄게요.”

괜찮은데.”

, 내가 너무 들이댔나?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아도 돼요. 그냥 과 선배가 후배 밥 사주는 거니까,”

 

전정국이 당황하며 말하고 있는데, 교수님이 들어오셨다. 나는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다시 앞을 봤다. 수업 내내 전정국이 옆에서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꼭 대형견이 주인 눈치 보는 것처럼. 나 같은 거 별로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얘도 참 인생 피곤하게 산다 싶었다. 이 정도로 싸가지 없게 대했으면 그냥 무시할 법도 한데. 뭐가 아쉬워서. 수업이 끝나고, 나가려고 짐을 챙기는 동안에도 옆에서 안절부절 못 하고 있길래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부담스러운 거 아니라고. 그냥 정말로 괜찮아서 그런 거라고. 그러자 아하고 멍청한 소리를 낸다. 그 후에 뭔가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긴 했는데, 그냥 먼저 가볍게 목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어딜 가도 시선을 끄는 사람의 옆에 있어 봤자 피곤해지기만 한다. 주목받는 기분은, 1학년 때 느낀 걸로 충분했다.

 

*

 

태형 선배!”

 

그러나 어쩐 이유에서인지, 전정국은 나를 쉽사리 놓아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정정 기간 동안 교양이든 전공이든 출석하지 않았고 정정기간이 끝난 후에도 전정국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수업 시간이 시작하기 직전에 강의실에 들어가 맨 뒷자리에 앉았는데, 전공에서는 그럭저럭 성공하는 듯 보였던 내 전략이 교양에서 전정국이 내가 강의실에 들어섬과 동시에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탓에 산산이 부서져 내렸기 때문이다. 꽤 큰 목소리로 날 부른 탓에 나는 순간적으로 온 강의실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고 결국에는 천천히 전정국의 옆자리에 가 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새 호칭까지 변한 후였다. 얘는 웃는 얼굴로 사람 엿 먹이기가 취미인가. 본인은 전혀 악의가 없는 것 같지만.

 

왜 저한테 말 안 했어요. 저 진짜 선배가 새내기인 줄 알고

…….”

그 땐 죄송했어요, 진짜. 제가 밥 살게요.”

 

아니 얘는 밥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나는 역시나 괜찮다는 말로 전정국의 제안을 가볍게 밀어내려 했지만 전정국의 눈빛은 단호했다. 선배, 진짜 죄송해요. 밥 사게 해 주세요. 제가 마음이 불편해서 그래요. 그 간절함이 깃든 단호함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밥 한 번 먹고 떨어지게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오늘은 얼떨결에 전정국의 옆자리에 앉았지만, 다음부터는 반드시 따로 앉을 거라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선배!”

 

하지만 전정국은 내 생각보다 끈질기고 눈치도 없는 놈이었다. 아무리 늦게,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강의실에 들어와도 전정국은 쉬는 시간 내내 강의실 문만 쳐다보고 있는 건지 내가 들어오는 걸 귀신같이 알아챘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나를 부르며 나를 위해 제 옆자리를 맡아두었음을 어필했다. 이쯤 되니 쟤의 정신세계가 궁금해졌다. 첫 날은 아는 사람이 없어 나에게 아는 척을 했다 해도, 지금은 (전정국이 이 교양을 듣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수강 정정 기간에 이 교양을 넣은) 같은 과 여자 동기 및 후배들이 꽤 있는데도 굳이 왜 나를 제 옆자리에 앉히려고 하냐는 거다. 그 여자애들의 부러움과 의아함이 섞인 시선을 받고 있자니 절로 피곤해졌다. 그래서 언젠가는 전정국에게 내 자리 굳이 안 맡아줘도 돼, 하고 말했더니 이 자리 별로예요? 나름 꿀자리 잡으려고 한 건데그럼 선배는 어디가 좋아요?’ 하고 눈치 없이 물어 오는 것이다. 그 순수한 호의를 차마, ‘나 너랑 같이 앉고 싶지 않아.’ 하고 뿌리칠 수가 없었다.

 

선배는 학식이 왜 좋아요?”

 

전정국은 나에게 끝없이 말을 걸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대답해주고. 수업을 핑계로 연락을 주고받고, 같이 과제를 하고 밥을 사주고, 얻어먹고. 그러기를 몇 달, 정신을 차리고 나니 나와 전정국은 어느새 일주일에 세 번 꼴로 밥을 같이 먹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단언컨대 내가 원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전정국이 배알도 없는 놈이라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난 최대한 무뚝뚝하게 전정국을 대했고 가끔은 내가 생각해도 내가 너무 싸가지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전정국은 그런 나를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그냥 그게 내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건 그런 나를 왜 굳이 제 옆에 두려고 하냐는 거였다. 뭐가 아쉬워서. 가끔 전정국은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요 선배저랑 밥 좀 먹어 줘요.’ 라는 말을 나와 같이 밥을 먹기 위한 이유로 제시했지만 그게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과 동기·후배들도 알고, 하다못해 저기 지나가는 개새끼도 아는 사실이었다. 전정국이 먹자고만 하면, 아니 굳이 먹자고 하지 않아도 전정국과 밥을 같이 먹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과 안팎으로 넘쳐났으니까. 그러나 저기 너랑 밥 먹고 싶어서 며칠째 타이밍만 노리고 있는 쟤랑 먹어.’라고 말할 정도로 오지랖이 넓지 않은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것이다. 한 학기의 절반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자니 이제 과 내에서 나는 전정국과 한 쌍으로 통했다. 걔하고는 고작 수업 두 개밖에 겹치지 않는데 전정국이 아기오리마냥 나를 쫓아다닌 결과였다. 주목을 받지 않고 싶었던 나로서는 아주 거지같은 상황이었고.

 

멀리 나가기 귀찮아.”

그래도 가끔은 밖에 나가서 맛있는 거 먹어요! 제가 살게요.”

다른 애랑 가서 먹어.”

선배랑 먹고 싶으니까 그렇죠~”

 

쟤는 진짜 밸이라는 게 없나? 전정국은 이 정도는 익숙하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볶음밥을 입에 욱여넣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볶음밥을 씹다 말고 전정국을 쳐다봤다. 이쯤 되니 전정국이 대단하게까지 느껴졌다. 이렇게 싸가지 없게 구는 사람에게 저렇게까지 대할 수 있는 전정국의 인성에 박수를 쳐 주고 싶을 정도였다.

 

네 맘대로 해라

? 진짜요? 먹어 줄 거예요? 앗싸. 집에 가서 맛집 검색해야지!”

 

선배가 먹고 감탄할 정도로 맛있는 집으로 알아 올게요! 내 말이 마치 A+을 주겠다는 교수의 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뻐하며, 전정국은 제 앞에 놓인 돈가스를 열심히 썰었다. 그런 전정국이 어이없으면서도 귀여워 웃음이 나왔다. 쟤는 내가 어디가 저렇게 좋을까. 대단한 정성이다.

 

선배 지금 웃은 거예요?”

…….”

선배 웃는 거 처음 보는 거 같아요

 

짱이다. 사진 찍어도 돼요? 반짝반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하는 말에 나는 다시 표정을 굳혔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거나 먹어. 그 말에 전정국은 다시 시무룩해져 돈가스를 썰었다. 금세 다시 회복하고 조잘대긴 했지만.


그러니까, 전정국은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는 애였다. 주목 받는 것이 익숙하고, 어딜 가나 사랑받는 아이. 좋은 집안, 좋은 학교, 잘생긴 얼굴, 밝은 성격. 그 어느 곳에 가도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겠지. 그러니까 나 같이 배배 꼬인 인간한테도 인정을 베풀 수 있는 거일 거고. 그래서 혹시나 전정국이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연애 감정으로 좋아하기 때문에 나에게 이렇게 달라붙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전정국은 누군가가 자기를 정말로 미워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하는 거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고. 학번은 달라도 학년은 같은, 같이 복학한 처지에 과에 어울리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을 수도 있고. 전정국 같은 인간은 누군가가 무리에서 떨어져 있는 것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니까.

 

왜 그렇게 봐요?”

밥 안 먹냐?”

 

그렇게 내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고 나니, 전정국을 대하는 게 훨씬 더 쉬워졌다. 시종일관 얼굴을 굳히고 있어서 그런지, 우려했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이대로라면 그냥 적당히 전정국과 어울리면서 조용히 학교생활을 해 나갈 수도 있을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계속해서 나에게 말을 걸어 주는 전정국의 마음씀씀이가 기특하기도 했고.

 

선배가 그렇게 절 보고 있는데 어떻게 밥을 먹어요.”

…….”

심장 떨려서.”

 

그래서 나는 이런 전정국의 말들을 전부 농담으로 치부했었다. 전정국은 아쉬울 거 하나 없는, 정도正道의 길만을 걸어왔고, 걸어 갈 사람이었으니까. 배배 꼬인 나와는 다른.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에게 반하는 일 같은 건, 정말로 일어날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듬해 봄 만장일치로 떠맡듯 2학년 학회장을 맡게 된 전정국이, 가지 않겠다는 나를 며칠에 걸쳐 설득해서 오게 만든, 그것도 내가 강선우에게 고백했던 그 술집에서 진행된 1학기 개강총회에서 술에 취해 나에게 고백하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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