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안녕하세요, 전정국입니다.”

김태형입니다.”

 

태형은 세차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제 눈앞에 내밀어진 정국의 손을 맞잡았다. 혹시 빠르게 뛰는 심장을 정국이 눈치 채지는 않을까. 얼굴이 너무 빨개지지는 않았을까. 그것도 아니면 너무 긴장한 나머지 손이 땀으로 축축하지는 않을까. 그 짧은 새에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정국은 그런 태형의 손을 살짝 맞잡은 후 웃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미소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마주 웃었다. , 저야말로.

 

이번에 새로 들어가게 될 작품의 감독이 우연찮게도 학교 선배임을 알게 되었을 때, 태형은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게다가 활동 기간은 겹치지 않았지만 같은 동아리. 비록 과가 달라 말을 섞어 본 적도, 아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넓디넓은 영화계에서 같은 학교에 같은 동아리를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태형에겐 충분한 친밀감의 이유가 되었다. 오랜 외국 유학 생활의 여파로 남은 사소한 애정결핍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태형은 언젠가 예대에서 한 번 마주쳤을 수도 있겠네요!’하고 웃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거지만, 윤기는 그 때 태형이 자신에게 작업을 거는 것인 줄 알았다고 했다.

 

팬이라고?”

. 그래서 완전 설레요.”

신기하네.”

 

? 뭐가요? 제 앞에 놓인 와인 잔을 흔들며 태형이 발그레해진 볼을 하고 윤기에게 물었다. 태형의 적극적인 주도 하에 윤기와 태형은 빠르게 친해졌고 둘은 작업 얘기도 할 겸 종종 이렇게 술을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윤기는 같은 학교의 선배일 뿐 아니라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상대였고, 귀국한 지 3년밖에 되지 않아 이렇다 할 친구가 없었던 태형에게는 좋은 말상대였던 것이다.

 

, 전정국 좋아하는 거야 안 좋아하는 애들을 세는 게 더 빠르긴 하지만.”

……?”

너같이 눈을 반짝거리면서 팬이라고 말하는 남자는 없었거든.”

 

윤기는 무심하게 툭 하고 말을 던지는 것이 말버릇이었지만, 가끔 태형의 심장은 그런 윤기의 말에 쿵 내려앉곤 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민윤기는 눈치가 빨랐다. 편하면서도 불편한 점. 태형은 저도 모르게 입에 머금고 있던 와인을 꿀꺽, 넘긴 채 그대로 굳었다. 혹시 들켰을까. 태형에게서 말이 없자, 치즈를 씹던 윤기가 태형을 쳐다봤다. 뭘 그렇게 얼어 있어?

 

아니, , 그냥.”

그럼 뭐, 소개시켜 줄까?”

저한테요? 누구를요? 전정국을요?”

그럼 누구겠어.”

 

태형이 말을 더듬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기를 쳐다보자, 윤기가 그런 태형을 보며 픽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

 

, 그래도 돼요?”

안될 건 뭐야? 너도 이 영화 관계잔데. 쫑파티에서 소개시켜 주면 되겠네.”

 

조금 더 일찍 말했으면 촬영 현장에도 와 보라고 했을 텐데. 윤기가 말을 이었고 태형은 아, 하고 짧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러니까, 그 소개를 말하는 거였구나. 하긴. 그럼 그렇지. 눈치 못 챘나 보다. 태형이 생각하며 동그랗게 키웠던 눈을 살짝 접었다. 그럼 저야 감사하죠. 그 날 뭐 입고 가지. 순간 놀랐던 심장을 진정시키고 나니 머릿속이 설렘으로 가득 찼다. 처음에 생각했던 그 소개는 아니었지만, 인사라도 하게 되는 게 어딘가. 예전에 했던 영화 쫑파티에서 멀찍이서 혼자 일방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영화 스크린이나 TV로나 가까이 볼 수 있었던 사람이다. 적어도 이번에는 간단한 인사말 몇 마디라도 나눠볼 수 있을 거 아니야.

 

만나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지려나.”

? 뭐라고 했어요? 못 들었어요.”

아냐.”

 

윤기가 고개를 돌렸다. 사람 심리라는 게, 옆에서 말려 봐야 괜히 더 불타오르기만 할 뿐, 전혀 소용이 없다는 걸 윤기는 숱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윤기는 와인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만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태형은 좋은 사람이었다. 외국에서 유학도 했고, 닳고 닳은 사람들이 사방에 널려 있는 영화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어딘가 애 같은 순수함이 있는. 그래서 묘하게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그래서 그런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태형은 윤기가 꽤 아끼는 사람의 범주 안에 들어가 있었다. 정국은 좋은 친구고, 좋은 배우이며, 역시나 제 바운더리 안의 사람이지만 그 사실이 꼭 정국이 애인으로서도 좋은 사람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정국은 애인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소개시켜주기엔, 그건 서로를 위해 지양하고 싶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가벼운 파트너라면 모를까.

그러니까. 윤기가 와인을 목 뒤로 넘기고 입을 열었다.

 

그렇게 좋아?”

진짜 오래 전부터 팬이었다니까요.”

잘됐네.”

 

만나 보면 알게 되겠지.

 

*

 

만나 보면 알게 되겠지. 윤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첫 만남부터 태형이 정국을 너무 많이알게 되었다는 거지.

태형은 정국을 만났고, 인사를 나누었고, 우연찮게 자리를 바꾸게 되어 인사를 한 후부터는 거의 정국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고 술을 마셨다. 그날 밤 태형의 기분은 최고조를 달리고 있었고, 그래서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쫑파티가 끝나고 자리가 파했을 때, 태형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태형은 제가 왜 여기 있는 지 알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태형은 쏟아져 내려오는 햇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밤새 퍼마신 술에 머리는 울리고, 목은 텁텁하고. 침대 옆 협탁을 더듬어 핸드폰을 확인하려고 했을 때, 제 손에 핸드폰 대신 웬 옷가지가 잡히는 것을 느낀 태형이 가늘게 눈을 떴다. 잠깐만. 내 방 천장이 이렇게 넓었던가?

 

태형은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여긴 내 집이 아니다. 그리고 호텔도. 여긴 명백히 누군가가 살던 흔적이 묻어 있는 넓은 오피스텔이었고, 돌아누워 있었기 때문에 옆이 보이진 않지만 옆에는 누군가가 누워 있었다. 저와 같이 옷을 벗은 채로. 그 사실을 인지하고 나자 태형은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국에 온 이후로는 처음이라 해도 원나잇이야 종종 했었으니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제 옆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누워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게 누구인지 짐작도 안 갈 정도로 술을 퍼마시고 정신을 잃은 점은 좀그렇긴 하지만. 아무튼. 그러나 그 숱한 하룻밤의 인연들에도 규칙은 있었다. 관계는 제 집에서도, 상대의 집에서도 아닌 호텔에서. 괜히 제 집에서 상대를 떠올리지 않도록.

다른 사람에겐 어떨지 몰라도 태형에게, 누군가를 제 집에 들여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어차피 하룻밤의 인연일 거라면 그 사람에게 제 자신을 알리고 싶지도,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지도 않은, 그런 단순한 이유 말고도. 호텔이야 그 날로 끝이고 수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가는 곳이지만 집은 아니니까. 제 바운더리 안의 영역이니까.

그래서 태형은 누군가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 있는 집 안의 침대 위에서 눈을 뜬 이 상황에 할 말을 잃었다. 예전에는 아무리 정신이 없었어도 마지막 남은 본능이 그 사람의 집에 가는 것만은 막았었는데. 이 짓도 이제 그만 해야겠네. 읊조린 태형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옆에서 별다른 인기척이 나지 않는 걸 보니 상대는 아직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누구인지 확인은 해야지…….

 

일어났어요?”

 

그런데, 제 옆에 누워 있는 얼굴이 너무나도 의외라. 그리고 낯선사람이 아니라. 태형은 입을 벌렸다. 잠에서 이제 막 깬 듯, 눈을 부비며 저와 눈을 맞추는 이 사람은, 믿기지 않지만 전정국이었다. 대한민국의 탑 배우이자, 태형이 최근에 작업을 했던 영화의 주인공이자, 어제 처음으로 윤기에게 소개받아 말을 튼. 그리고, 제 짝사랑 상대인.

정국은 굳어 있는 태형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머리 안 아파요? 어제 술 엄청 많이 마시던데.

 

이게 어떻게 된 거…….”

 

태형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허리에서 알싸하게 느껴지는 통증 때문에. 그래, 이런 얘기를 굳이 물어서 확인 사살을 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모든 정황 증거가 단 한 가지를 가리키고 있는데. 눈앞의 정국은 그런 태형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네? 못 들었어요. 하고 말했지만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정국의 입에서 나오는 우리 잤어요, 류의 말을 들을 자신이 없었다. 오늘 받을 충격은 정국의 오피스텔에서 눈을 뜬 것만으로 충분했으니까. 아무리 술을 퍼마시고, 정국에게 호감이 있었다 해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냉큼 자 버릴 수가 있지. 그리고 나야 전정국을 좋아했다지만. 거기에 응해준 전정국은 또 뭐지? 태형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굴리며 뻑뻑한 눈가를 꾹 눌렀다. 머리가 아직까지 지끈거렸다.

 

해장 하러 갈까요? 속 안 쓰려요?”

아니, 그보다…….”

 

정국은 이 상황이 익숙한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아침 인사를 건네고, 해장을 하러 갈까 묻고. 그런데 그 익숙함이 묘하게 신경 쓰여서. 태형은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은 기지개를 피더니 태형에게 물 갖다 줄까요? 하고 물었고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태형은 제가 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정국에 관한 소문을 들어본 적이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자유로운 영혼. 신기할 정도로 그에 대한 나쁜 뒷소문은 없는 편이었지만, 사람들은 전정국만큼 연예인 생활 잘 즐기는 놈도 없을 거야하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했다. 담백한 관계를 즐기고, 마무리도 항상 깔끔하게. 그만큼 배려를 해 준다는 소리겠지, 상대에게도. 태형 역시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문제는, 제가 그런 정국을 감당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는 거였고. 그래서 이렇게는 시작하지 않으려고 했었는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

 

태형의 머리가 부산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정국이 다가와 물을 건넸고 태형은 말끝을 흐리며 컵을 받아들었다. 태형이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해장은 괜찮아요. 알아서 할게요. 약속이 있어서.”

약속?”

 

정국의 미간이 살짝 접혔지만 태형은 정국의 그런 미묘한 변화를 눈치 챌 만큼 섬세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태형은 말을 이었다. , 어젯밤에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죄송해요, 실수가 많았네요. 그 말에 정국이 아, 하고 감탄을 터뜨렸다. 태형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나 봐요?”

…….”

되게 태연하네. 일어나자마자 약속 갈 정신도 있고.”

 

태연해 보이는 건 그러는 그 쪽도 마찬가지거든요. 태형은 그 말을 삼키며 물컵을 내려놓았다. 살짝 떨리는 손을 혹시나 정국이 눈치 챌까 봐. , 그게 왜요? 최대한 태연한 척 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다. 태형은 괜히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냥.”

 

정국이 어깨를 으쓱했다. 태형은 제 입술을 살짝 물었다가 풀었다. 핸드폰이 어디 갔지. 한시라도 빨리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여기 있으니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다. 집안이 온통 정국의 향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심장이 계속 빨리 뛰고 있으니 조금 더 있다가는 정국에게 들킬 것도 같고. 머리도 지끈거리고. 그리고 그 때 태형의 시야에 핸드폰이 들어왔다. 태형의 핸드폰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져 있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저절로 그려지는 어젯밤의 풍경에 태형이 얼굴을 붉혔다. 저게대체 왜 저기에 가 있는 거야.

 

, 암튼 그러니까 그냥 없었던 일로 해요. 피차 깔끔하게.”

 

옷을 대충 추슬러 입고, 핸드폰을 챙기는 동안 정국은 그런 태형을 말없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을 뿐 말이 없었다. 하긴, 무슨 말을 할까. 당연한 건데도 묘하게 서운한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모든 준비를 빠르게 마친 태형은 현관에 서서 한 번 더 못을 박았다. 괜히 구질구질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 솔직히. 겁이 났다. 무서웠다. 정국을 좋아하니까. 그건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정국의 입에서 우리 사인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듣는 것보다 제 입으로 말하는 게 나으니까. 괜한 자존심이고, 부질없는 짓이라 해도, 태형은 그랬다. 그러나 막 방을 나서려는 태형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정국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이었다.

 

싫은데.”

?”

싫다고요.”

지금 뭐라고,”

난 이렇게 끝내긴 싫다고요. 어제 너무 좋았거든.”

 

태형은 뒤를 돌아 정국을 쳐다 본 그 상태 그대로 굳었다. 내가 지금 헛것을 듣는 건가. 그러나 정국의 얼굴은 여전히 태연하다. 태형은 괜히 아려 오는 것 같은 허리를 짚었다. 뭐가 저렇게 당당해? 아니, 당당하지 않을 건 없나? 태형이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그럼 뭐, 오늘부터 1, 이라도 하자는 건가. 태형이 멍하니 정국을 쳐다보고 있자, 정국이 천천히 태형에게 다가왔다.

 

약속 있다고 했으니까, 오늘은 보내줄게요.”

그게 무슨…….”

나도 깔끔한 거 좋아해요. 그렇다고 없던 일로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러고는 씩 웃는다. 그 웃음에 가뜩이나 어지럽던 머리가 배로 혼란스러워졌다. 전정국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태형은 눈앞으로 다가온 정국에 숨을 멈췄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무, 빨리. 혹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연락할게요.”

…….”

받아요.”

 

. 다짐을 받아내듯 꾹 눌러 못 박은 정국이 다시 씩 웃고는 등을 돌렸다. 정국이 그대로 욕실로 모습을 감추고, 태형은 현관에 우두커니 혼자 남겨져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지금뭐가 어떻게 된 거지.

 

*

 

드디어!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남자 전정국씨를 만나보게 됐는데요!”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던 태형은 갑자기 들려 온 익숙한 이름에 고개만 움직여 TV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날 그렇게 정국이 현이 씨에게 가고 난 후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국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지금쯤 현이 씨랑 같이 있을 테니 내 생각 같은 건 안 나는 거겠지. 태형이 입술을 물었다. 연락한다고 한 적도 없는데 기약 없는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제 처지가 우스웠다. 그 와중에도 TV에서 흘러나오는 전정국이란 단어에 반응하는 제 자신도.

 

안녕하세요, 전정국입니다.”

이번에 새로운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들었어요!”

, 촬영은 다 끝났고, 이제 편집 막바지 단계에 있어요.”

 

그러고 보니까 나도 작업해야 하는데. 태형은 작업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이내 다시 눈을 감았다. 이런 기분으로 무슨 작업. 작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태형은 의미 없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소파를 두드렸다. 전정국, 류현이, 김태형. 영화, 작업, 전정국……. 생각은 전정국으로 시작했다가 전정국으로 끝난다.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결국 그 끝은 전정국으로 이어졌으니까. 이게 뭐야. 태형은 입술을 짓씹었다. 작업을 하는 시간 외에도 전정국은 제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는데, 이제는 작업을 하고 있을 동안에도 전정국을 생각해야만 하니까 작업을 하면서 현실을 도피할 수도 없다. 전정국이랑 더 이상 엮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윤기 형이 아무리 부탁하더라도 전정국의 영화를 맡는 게 아니었는데.

 

이번 영화가 정국 씨한테 특별하다고 들었어요.”

, 처음으로 시나리오랑 연출에 참여했거든요. 물론 윤기 형, 아니 민 감독님이 거의 다 했지만요.”

민윤기 감독님하고도 각별한 사이시죠?”

서로한테 특별하죠.”

 

화면 속 전정국이 웃는다. 태형은 TV를 끄려고 리모컨을 집어들었다 결국 다시 내려놓았다. 이렇게라도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마음이, 꼭 예전에 서로를 알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해서. 혼자 멀찍이서 스치듯이 본 걸 가지고, 첫 눈에 반한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서사로 여태까지 이어질 만큼 지긋지긋하게 짝사랑할 정도로 빠져 버렸던 그 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차라리 그 때가 나았나.”

 

태형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땐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었는데. 전정국의 행동 하나 하나에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의미부여하고, 그러다가 실망하고. 연락을 주고받아서 설렐 일도 없었지만 이렇게 힘들 일도 없었는데. 태형은 리모컨을 꼭 쥐었다. 그 날, 섹파로 지내자는 전정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전정국에게 연락이 올 것 같아서 괜히 핸드폰을 주기적으로 쳐다보는 일도, 아무런 반응 없는 현관문을 쳐다볼 일도 없었겠지. 태형은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TV에서는 계속해서 전정국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럼 이번 영화에 상 욕심도 크시겠네요.”

이번 영화에 애정이 각별한 건 맞는데, 저는 의외로 욕심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정말요? 그건 정말 의외인데요.”

저 욕심 많아 보여요? 하하. 그런데 정말이에요. 어렸을 때 데뷔해서 그런가. 어렸을 땐 욕심이 많았었거든요. 최고가 되고 싶고, 다 내 거 하고 싶고. 갖고 싶은 건 다 가져야 하고.”

 

전정국이 살짝 웃고, 리포터도 따라 웃는다. 태형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런데, 욕심을 부린다고 다 제 게 되는 건 아니더라구요.”

…….”

그걸 깨닫고 나니까, 언젠가부터 욕심을 안 부리게 되더라구요. 놓아야 하면 놓을 수 있게.”

 

그래도 여러분들의 사랑은 욕심 부리고 싶어요! 이번 영화 많이 사랑해주세요! 사뭇 진지해 지는 것 같았던 인터뷰는 전정국의 애교스러운 농담을 끝으로 웃음과 함께 끝났고 전환된 화면은 영화의 짧은 클립과 내용을 보여주며 마무리됐다. 그리고 태형은 TV 전원을 껐다. 그나마 TV의 소음과 빛 덕에 채워지고 있었던 커다란 거실은 텅 빈 듯 적막해졌다. 태형은 그제야 천천히 눈을 떴다. TV를 껐음에도 전정국의 얼굴과 전정국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태형의 머릿속에 짙은 잔상으로 남아 있었다. 태형은 언젠가 윤기와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 날 이후 걸려온 전정국의 전화를 결국 무시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편한 관계로 지내자는 전정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너 전정국 좋아하지.’

, 언제부터 알았어요?’

 

윤기는 전정국 좋아하냐?’고 묻지 않았다. ‘좋아하지.’하고 말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에 가까웠다. 그리고 윤기의 그 확신 어린 말투는 태형이 거짓말을 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너한테 전정국 소개시켜 주고 나서 네 얼굴 볼 때부터?’

…….’

, 아니다. 확신은 그 때 했고, 내가 전정국 소개시켜 줄까 물었을 때 네 반응 봤을 때부터 예상은 했다.’

안 놀라요?’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말하는 윤기에, 태형은 침착하게 잔을 내려놓고 물었었다. 외국에서야 자신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으니 제가 게이라는 것을 밝히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지만,(애초에 게이 클럽 단골이기도 했다) 한국은 좀 다르다고 들었는데. 한국에서는 처음 하는 커밍아웃인데 그 상대의 반응이 너무나도 무덤덤해서, 태형은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그러자 윤기가 왜 놀라야 하는데? 하고 되물었다. 태형은 그러니까……. 하고 말끝을 흐렸다.

 

네가 게이라는 거? 아님 전정국을 좋아한다는 거?’

…….’

전자면, 이쪽에선 완벽하게 헤테로인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들어서, 별로. 후자면, 그건 좀 놀랍긴 하네.’

 

그런데 뭐 그렇다고 엄청 놀라울 정도는 아니고. 윤기가 잔을 들며 조용히 말했고 태형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영화 쪽 산업 종사자인 것을 이런 식으로 감사하게 될 줄이야. 커밍아웃에 대한 걱정이 가시고 나니 문득 고개를 드는 궁금증에 태형이 다시 윤기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건 놀랍지 않으면서, 전정국을 좋아하는 건 놀랍다니, 그건 무슨 말이지.

 

그런데 제가 전정국 좋아하는 게 왜 놀라울 일이에요?’

걔 소문 알고도 그런 마음이 드나, 싶어서.’

소문?’

그냥, . 소문이라기엔 팩트지. 가벼운 거.’

 

여자건 남자건 3개월을 못 간다고, 유명하잖아. , 나쁘다곤 생각 안 해. 깔끔하게 만났다가 헤어지는 게 얼마나 편하고 좋은 건데. 그런데 왠지 너는 좀.

 

그런 스타일 아닐 거 같아서.’

……

. 혹시 지금 전정국이랑 사귀나?’

 

말을 잇던 윤기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태형에게 물었고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 그럼 다행이고. 괜히 사귀는데 초 친 건가 했네. 이어지는 윤기의 말에 태형은 사귀는 건 아니고, 섹스 파트너긴 하죠. 하는 말은 삼켰다. 아무리 윤기라 해도 그 수많은 가벼운 관계중 하나가 저예요, 하고 굳이 광고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윤기는 눈치가 빠르고, 사람을 잘 파악하는 사람이었다. ‘너는 그런 스타일 아닐 거 같다는 윤기의 말은 사실이었고, 태형은 가벼운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나가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전정국에 대해 그렇게 말했으니, 태형도 알고 있었다. 전정국이 관계에 감정을 무겁게 싣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애초에 모르고 시작한 게 아니었으니 알게 된 후에도 끊지 못했다. 끊을 수가 없었다. 감정의 책임이 모두 제 몫이고, 무거운 감정의 짐도 모두 제 것이 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

 

태형은 멍하니 핸드폰을 들었다. 쌓여 있는 메신저 중에 정국의 것은 없다. 그 사실만 확인하고 다시 핸드폰을 끄려는데, 태형의 시야에 빠르게 올라오고 있는 단톡방의 메시지가 걸렸다. 대학 동아리 동기 단톡방이었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그 방에 들어갔다. 채팅창은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지만 채팅방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대박, 전정국이랑 류현이랑 사귄대.]

[소속사에서 인정했다는데? 사귄지 오래 됐다며.]

[이번에 휴가도 같이 간거래.]

[? 태형이 읽었다. 태형아, 진짜야? 지금 완전 기사 다 났어.]

[아 맞아, 쟤 전정국 영화 한댔지!]

 

동기 하나가 보내 준 기사의 캡처 사진에, 정국은 환하게 웃고 있다. 그 옆에는 현이 씨. 기사의 헤드라인은 전정국-류현이 열애 인정. 태형은 핸드폰의 화면을 껐다. 순식간에 빛이 사라졌다. 태형은 눈을 감았다. 빗방울이 창밖을 두드리는 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유난히 일찍 찾아온 세찬 비가 지리한 여름 장마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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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

 

태형은 마른 입술을 살짝 혀로 핥았다. 그러지 않으려 했음에도 입이 바짝바짝 타들어가 어쩔 수가 없었다. 목욕을 마치고, 화려한 옷을 몇 겹씩 겹쳐 입고. 그 자체만으로도 무거운 가채를 머리에 얹은 뒤 보기만 해도 무거운 장신구들을 몇 개씩 꽃아 넣고. 분칠을 하고, 입술을 바르고. 평소 같았으면 이건 하지 말자, 저건 하지 말자 말이 많았을 태형은 머리에 장신구를 꽂아 넣을 때쯤엔 이미 영혼이 잠시 외출을 나간 상태였기에 그저 가만히 상궁들의 손길을 받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말을 할 기운조차 남아있질 않았으니까.

정국의 말에 얼어버린 듯 멈추었던 심장은 정확히 3초 뒤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고, 태형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타오르는 얼굴에 정국에게 더 대꾸도 못 한 채로 욕실 안으로 도망치듯 몸을 숨겼다. 물속에 코를 박고 죽을까. 여기에 계속 있다가 기절해서 나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코를 박고 죽기에 물속은 너무 답답했고, 기절해서 나가기에 태형은 너무나 건강했다. 결국 온갖 꽃과 향유가 듬뿍 뿌려진 물속에서 편안한 목욕을 즐기고 나와 한층 향기로워진 태형은 제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며 달아오른 볼을 숨겼다. 소복 차림의 촉촉이 젖은 태형을 잠시 응시한 정국은 이내 고개를 돌리고 그럼 이따 봐요, 하고는 방을 나갔고. 태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더 따져 봐야 더 수치스러워지기만 할 텐데. 그냥 묻자. 태형은 제가 현대로 다시 돌아갈 때 쯤, 과거의 기억을 지우는 약이 나와 있기를 바라는 부질없는 소원을 빌었다.

 

…….”

 

그런데 이건 또 뭐야……. 태형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다 이내 포기했다. 합궁을 준비하는 소란스럽고 복잡한 과정들을 다 마치고 난 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쳐버린 몸을 가누며 가만히 앉아 있는 태형에게 상궁은 가까이 다가와 눈을 감으라고 말했다. 태형은 그에 살짝 눈을 감았다, 곧이어 제 눈 위에 닿는 이질적인 감각에 황급히 눈을 떴었다. 뭐 해?!

 

마지막이옵니다, 마마.’

이게 뭔데!?’

꿀입니다, 마마.’

 

꿀을 왜……. 그러나 태형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상궁이 뭐 그런 걸 새삼스럽게 물어보냐는 듯 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니까합궁날엔 당연히 해야 하는 어떤 관습인 모양이었다. 그럼 여기서 제가 그걸 왜 내 눈에 발라!!’하고 외치는 것은 이상한 일이 될 테고. 결국 태형은 익숙한 척 다시 곱게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세밀한 붓으로 꼼꼼히 제 눈꺼풀에 꿀을 바르는 상궁을, 제 앞에 펼쳐질 미래처럼 깜깜한 시야를 견뎌내면서.

말하자면 섀도우 같은 건가. 하고 생각했던 태형은 이내 제 몸을 부축해 일으키는 상궁들에 아, 내가 스스로 일어날게, 하며 눈을 뜨려다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눈이 떠지지 않았으니까. 제 눈에 발랐던 게 가루 같은 것이 아니라 끈끈한 꿀이었음을 실감한 태형이 눈을 감은 채로 눈을 굴렸다. , 뭐지? 합궁 하는 내내 눈을 못 뜨게 하는 게 목적인 건가?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용기는 없는 태형은 결국 상궁들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추정)으로 안내되었다. 마마.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저희 상궁들이 항상 곁에 있을 것입니다. 태형을 방 한가운데에 푹신한 이불 위(역시나 추정)에 앉힌 후 귀에 다정하게 속삭인 상궁은 그 말을 마치고 다시 한 번 태형의 옷매무새와 머리 모양을 다듬어 주더니 이내 방을 나간 듯 방은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태형은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이라도 뜨고 뭔가를 볼 수 있으면 김장감이 조금은 덜 할 텐데. 눈이 보이지 않으니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더욱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더 이상 뜨거워질 수 없을 것처럼 뜨거워진 제 얼굴 온도라든가, 세차게 뛰는 심장이라든가. 잔뜩 곤두선 온 몸의 솜털이라든가. 전정국은 언제쯤 들어올까.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까. 전정국은 이런 꼴을 하고 있는 나를 어떻게 생각아니 이건 왜 생각해. 아무튼. 여러 가지 생각들이 태형의 머릿속에서 얽히고설키는 와중, 잔뜩 예민해진 태형의 귀에 드륵, 하고 장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미친 것처럼 뛰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문 소리는, 100%, 아니 200%. 전정국일 테니까.

 

…….”

 

마루를 밟는 조용한 발걸음 소리, 비단옷이 바닥과 닿아 마찰하는 소리. 점점 가까워지는 인기척, 그리고 조금씩 진해지는 익숙한 향기. 전정국의 향기. 태형은 이미 감은 눈을 조금 더 꼭 감았다. 심장아 제발 정신 좀 차려지금 네가 이렇게 뛸 때가 아니란 말이야……. 태형은 가만히 주먹을 꼭 쥐었다. 나중에 진짜로 결혼을 해서 첫날밤을 치르게 된다고 해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떨리는지 그 이유를 태형 자신도 알 수 없었음에도 태형은 제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가 진짜 기절하는 거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태형이 형.”

…….”

 

정국의 향기가 순간 확 하고 가까워지고, 정국이 제 앞에 앉는 기척이 나고. 그러니까 당연히 제 앞에 앉아 있을 사람은 정국일 수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이 목소리는 너무나도 당연한 거고 예상한 거였는데. 살면서 몇 만 번은 들었을 익숙한 제 이름인데.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익숙한 정국의 목소리인데. 하나부터 열까지 조금도 새로울 것 없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예상했던 그대로인데 태형은 순간 쿵, 하고 내려앉은 제 심장에 숨을 멈추었다. 전정국의 목소리가 이랬었나? 분명 정국의 목소리가 맞는데.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너무 낯설게 들려서. 태형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

, …….”

머리, 무겁죠. 내려줄게요.”

 

민망한 듯, 조그맣게 헛기침을 한 정국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고 태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감겨져 있는 눈은 답답했지만,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겠다고, 태형은 생각했다. 눈을 뜨고 있었으면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또 한참을 헤맸을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다고 감고 있는 건 더 이상하고. 차라리 이렇게 반 강제적으로 감겨져 있으니 다행인 것 같기도 하고.

 

…….”

 

태형 자신만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긴장을 한 건 정국도 마찬가지인 듯, 정국도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조선에 떨어진 이후로 이상할 정도로 거침없고 아무렇지 않아 보였었는데. 어느새 제 뒤로 간 정국이 천천히 제 머리에 꽂힌 장신구들을 내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익숙지 않은 듯 순간순간 음, 하고 말끝을 흐리는 목소리도. 태형은 침을 삼키는 제 소리가 혹시나 정국에게 들릴까 조심조심 침을 삼켰다. 너무가까워. 분명 가채랑 장신구 때문에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정국의 숨결이 제 뒷덜미에 닿는 것 같은 오싹한 느낌에 태형이 살짝 몸을 떨었다.

 

…….”

 

왜 그렇게 긴장했냐고, 떨리냐고. 농담이라도 하지. 이상할 정도로 아무 말이 없는 정국에 오히려 애가 타는 쪽은 태형이었다. 그렇다고 제가 먼저 말을 꺼내기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국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태형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사이 정국도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는지 어느새 태형은 무겁게 제 머리를 짓누르던 무게가 한결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 그래. 고맙다고 말을 꺼내야겠다. 태형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간신히 말을 골라 막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제 뒤에서 작게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태형이 눈을 반짝 뜨려다가 실패하고 입을 열었다.

 

너 웃어?”

, 그냥, .”

왜 웃어? 뭐 웃긴 거 있어?”

 

웃어서 기분이 나쁜 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유 모르게 심장이 뛰고, 얼굴이 빨개지고, 모든 감각 하나 하나에 집중이 되다 보니 숨이 막혀서 기절할 것 같았는데 정국은 웃고 있다니. 태형이 반색을 했다. 뭐가 웃긴데? 나도 알려줘. 나 지금 눈 감고 있어서 안 보,

 

형이랑 결혼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어서요.”

 

뭐라고? 신이 나서 말을 이으려던 태형의 입이 한 순간 굳었다. 태형은 잠시 심장의 과부하로 인해 제 귀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전정국 방금 뭐라고 한 거야? 결혼? 태형은 순간 제가 어렸을 적에 집에서 주전자의 물이 다 끓었을 때 나던 삐, 하는 소리가 제 귓가에 메아리치는 것을 경험했다. 방금 내가 헛것을 들은 건가. 태형이 정국의 말에 아무 반응이 없자 정국이 다시 말을 이었다.

 

옛날에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이 신혼여행 다녀오시더니 그랬거든요. 신혼 첫날밤에 제일 먼저 하는 게 뭔지 아냐고. 너희들이 생각하는 거 다 아니고, 신부 머리 풀어주는 거라고.”

…….”

실삔이랑 고무줄 엄청 많이 사용하고, 스프레이 뿌려서 단단히 고정시켜 놓은 머리라 신부 혼자서는 절대 못 풀어서, 호텔방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하는 게 침대 위에 앉아서 머리 풀어 주는 거라고.”

 

그런데 그게 엄청 긴장되고, 설레셨대요. 되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정국이 조곤조곤 말을 이어 갔다. 갑자기 그 생각이 나서요. 정국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말을 멈췄다. 그러나 조용하고 차분한 정국과는 다르게, 태형의 심장은 또 미친 듯이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 쟤는 무슨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아니 아무렇지도 않아야 하는 게 맞긴 한데! 자꾸만 연상되려 하는 신혼 첫날밤을, 자신은 애써 무시하려고 하고 있었던 거였는데 그걸 정국은 아무렇지도 않게 화제로 꺼내 놓으니 붉어지는 얼굴은 도리어 모조리 태형의 몫이 되었던 것이다. 태형이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 너는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끔찍?”

그래!”

저랑 결혼하는 게 끔찍해요?”

 

애써 농담으로 넘기려고 한껏 올린 목소리로 받아친 건데, 제 머리에 부드럽게 닿던 정국의 손길이 순간 멎었다. 그리고 들리는 가라앉은 목소리. 태형은 순간 이상해진 공기의 흐름에 하던 말을 멈추었다. 분위기 뭐지. 나 뭐 잘못 말했나. 태형은 다시 입을 열었다.

 

, 아니. 그게 아니라. 무슨 남자 둘이서,”

형 그런 쪽으로 편견 있는 사람이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 왜 나 쓰레기 된 기분이지?? 태형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태형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버둥대자 정국이 가만히 있어요, . 머리 엉켜요. 하고 다시 태형의 머리를 잡았다. 그러나 할 말을 찾지 못한 태형은 계속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러니까, 대한민국은 아직 동성 결혼이 합법화 되지 않았잖아. 내 말은 그게 그러니까…….

 

끔찍하단 건 아니고…….”

…….”

말이 잘못 나왔어. 미안. 나 그런 쪽으로 편견 없어…….”

 

결국 태형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제 동성애에 관한 평소 견해와 함께 말끝을 흐리며 사과하자 정국이 됐어요. 하고 태형의 목을 장난스레 톡 건드렸다. 화난 건 아니구나. 아까 한없이 낮아져 있었던 목소리와는 미묘하게 달라진 정국의 목소리에 태형이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동시에 제 머리가 완전히 가벼워졌고, 정국이 제 뒤에서 몸을 일으켜 제 앞으로 앉는 기척이 났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 태형은 침을 꿀꺽 삼켰다. , 이제 이렇게 잠들면 되는 건가. 눈을 감고 있는 것이 답답하긴 했지만, 어차피 잠들 거면 크게 상관도 없었다. 태형이 치렁치렁한 옷에 감싸져 있는 제 손을 쥐었다 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국의 표정도 읽을 수가 없고. 잠시 머리를 굴리던 태형이 그럼 이제 좀 누울까, 하고 입을 열려던 그 순간이었다.

 

전하. 중전 마마의 눈을 뜨여 주십시오.”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태형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래봤자 감겨 있는 눈 때문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태형의 심장이 다시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기척이 느껴질 만큼 바로 옆은 아니었지만 꽤 가까이서, 500m 정도? 선명하게 들린 목소리. 이 방에 나랑 전정국만 있는 게 아닌가?! 태형이 다시 정국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이게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여기 누구 있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곤히 잘 얘기했으면서 혹시나 제가 말을 편히 하는 것이 밖에 들릴까 태형이 최대한 정국에게 가까이 붙어 조용히 말했다. (물론 눈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거리는 순전히 태형 스스로 가늠한 거였다.)

 

, 찮아요. 방에 우리밖에 없어요. 안 들렸을 거예요.”

그런데 왜 이렇게 가까이서 들려? 밖에 누구 있어?”

형 몰랐어요?”

 

그러나 정국은 도리어 제게 되묻는다. 태형이 뭘? 하고 묻자 정국이 아……. 하고 말끝을 흐렸다. 난 형이 그래서 긴장한 줄 알았는데. 이어지는 정국의 말에 태형은 삽시간에 불안해졌다. 내가 뭘 모르는 거지? 뭘 몰랐기에 내가 긴장을 했어야 했던 걸까. 태형이 불안으로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뒤이어 이어진 정국의 말은,

 

이 방 문 바로 밖에 상궁 8명 있어요.”

 

태형의 넋과 어이, 어처구니가 다함께 손을 잡고 잠시 외출을 다녀오게 하기에 충분했다.

 

*

 

이게 무슨 일이야…….”

 

태형은 멍하니 중얼였다. 아직까지도 정국이 한 말의 충격이 가시질 않고 있었다. ‘저희 상궁들이 항상 곁에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이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내 옆에 있을 거다 뭐 그런 관념적인 얘기가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내 옆에 있겠다는 뜻이었어? 태형은 왠지 모를 배신감에 허허 웃었다.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나는구나. 태형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이 상황에서 뭘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해?

 

형이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원래 왕이랑 왕비가 합궁을 할 때는 그렇게 한대요. 그래서…….”

 

정국이 말끝을 흐렸다. 태형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 대체 왜?! 왕과 왕비가 잠자는 와중에 뭐 큰일이라도 날까 봐? 태형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속삭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전하, 마마의 눈을…….”

잠시, 중전과 담소를 나누는 중이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상궁의 말을 끊은 정국이 다시 태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지. 사실 정국도 아주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태형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렇게 긴장한 건 줄 알았는데. 난처한 것은 정국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나도 모를 수가 있지. 상궁들이 말 안 해준 건가. 정국은 입술을 깨물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태형이 하나도 모른다면 앞이 너무 깜깜했다. 어떻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설명해. 그러나 제 앞의 태형은 눈까지 감은 채로 저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꼭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데려다가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 느낌에 정국이 입술을 핥았다.

 

, 일단 눈부터…….”

, 이거 떠도 되는 거야?”

…….”

 

진짜 하나도 모르나봐. 정국은 볼을 쓸었다. 신부가 초야에 삿된 것을 보지 않게 하려는 의도에서 처음 발라 놓게 되었다는 신부 눈의 꿀은, 신랑이 혀로 핥아 주는 것이 관례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방 안에는 꿀을 녹일 만한 액체 따위는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고. 어쨌든 공식적으로는 초야도 아니고, 궁중 예법도 아닌데다가 그 얘기를 해 준 내시도 장난스레 얘기하기에 그냥 지나가듯 한 말인 줄 알았는데. 방에 들어서자 눈을 감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태형에 정국도 조금 당황했었다. 정국은 바짝 마르는 입술을 다시 혀로 핥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정국이라고 이 상황이 긴장되지 않을 리 없었으니까.

 

그럼 뜨게 해 줘. 나 너무 답답해.”

 

. 그런데 내가 하는 말들 밖에 들리지는 않겠지? 그럴 거리는 아니지?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에 기분이 조금 나아진 듯, 한 톤 정도 밝아진 목소리로 태형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고 정국은 그건 아닐 거예요. 거리가 좀 있어서……. 하고 말끝을 흐렸다. 태형이 다행이다, 하고 살짝 웃었다. 태형의 살짝 말려 올라간 입꼬리에 정국이 주먹을 꼭 쥐었다 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긴장해 본 일이 있었나? 수능 때도 이렇게 긴장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뭐 해? 나 빨리 눈 좀 어떻게 해 줘.”

.”

? 이거 너무 답답해.”

 

, 모르겠다. 머리는 핑핑 돌고, 태형은 보채고. 정국은 결국 충동적으로 태형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놀란 듯, 혹은 지금 제 눈가에 닿은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듯, 태형의 몸이 순간 굳었지만 정국은 태형이 뭐라 말을 잇기 전에 혀를 내어 태형의 눈가를 살짝 핥았다. 어차피 다른 방법은 없으니까. 달콤한 꿀이 혀를 통해 뇌까지 전해졌다. 달고, 달고, 달다. 너무 달아서 머릿속이 울리고, 심장이 찌릿했다. 정국은 눈을 감았다. 태형은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정국은 그런 태형의 팔을 저도 모르게 조금 더 꼭 잡았다. 태형이 움직이지 못하게.

 

…….”

 

한 쪽 눈의 꿀이 녹아 없어지고, 다른 쪽 눈으로 입을 옮겨 다른 쪽 눈의 꿀까지 다 녹여 없앤 다음 정국은 손을 들어 제 옷소매로 태형의 눈가를 꾹 눌렀다. 태형은 그때까지도 미동도 않고 있었다. 태형의 눈가를 살살 눌러 녹은 꿀까지 깨끗하게 닦아낸 정국이 손을 내리자, 어느새 눈을 뜬 건지 태형이 원래도 커다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저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정국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것 같은데.

 

, 지금 뭐…….”

…….”

…….”

 

태형이 저도 모르게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마지막 남은 정신이 지금 여기서 소리를 지르면 안 된다고 알려 준 덕분에 태형은 제 소리를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이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 태형의 입 안에서 울려퍼졌고 그런 태형을 쳐다보며 정국은 꿀꺽 침을 삼켰다. , 나 발로 걷어차이는 거 아닐까.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정국은 긴장한 상태로 가만히 앉아 그런 태형을 응시했다.

 

, 이거, 지금, , …….”

…….”

, , 입으로!”

 

태형이 검지 손가락을 제 눈에 가져다 댔다가 다시 정국의 입술을 향해 뻗었다가를 반복했다. 정국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사실은 저도 충동적으로 저질렀던 거라,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얬다.

 

전하, 해시(亥時:21:30~23:29)가 다 되었습니다. 이제 중전마마의 옷고름을 풀어 주십시오.”

 

차마 누가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한 채로 얼마나 그렇게 마주 보고 앉아 있었을까, 문 밖에서 상궁의 목소리가 들렸고 태형은 그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의 형태로 되어 있는 것 같은 방 안에는 병풍과 촛불 정도가 은은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 전혀 몰랐는데, 다행히도 사이에 얇은 창호지로 된 문이어서 그렇지 문과 제가 앉아 있는 침구와는 거리가 꽤 있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긴장한 탓에 목소리가 작게 나왔었는데 그 덕에 정국에게 말을 편하게 하는 제 목소리가 밖에 들렸을 것 같진 않았다. 태형이 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쉬다 이내 저를 쳐다보고 있는 정국과 눈을 마주치고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 뭘 봐. 괜히 한 번 투정하는 것은 잊지 않고.

 

전하, 혹 옥체가 편치 않으십,”

, 아니다.”

 

태형과 정국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을 눈치 챘는지 상궁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었고 그 목소리에 괜히 화들짝 놀란 태형과 정국의 시선이 다시 맞닿았다. 촛불이라곤 하지만 사방이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궁들이 제법 눈치가 빠른 모양이었다. 저 한지에 구멍 뚫린 건 아니겠지. 설마. 살짝 불안해진 마음에 태형이 살짝 몸을 움직여 창호지를 살펴봤다. 다행히도 그런 무엄한(?) 짓은 저지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옷 안 불편해요?”

…….”

 

잠시간의 침묵 후에 정국이 먼저 말을 꺼냈고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제 옷을 내려다봤다. 안 불편할 리가. 눈이야 겨우 뜨게 됐다지만, 평소에도 치렁치렁하고 무거워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던 왕비의 복은 오늘따라 몇 배는 더 무겁고 불편해 태형은 팔을 움직이는 것도 조금씩 힘겨워지고 있었다. 무슨 옷이 이렇게 화려하고 불편해. 태형이 괜히 입을 삐죽였다. 게다가 웬 옷에 매듭은 이렇게 많은지. 가만히 제 옷을 내려다보던 태형이 이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좀.”

그럼 잠깐만요.”

 

태형의 말을 들은 정국이 살짝 고개를 기울여 태형의 단단히 매어져 있는 옷고름을 살펴보더니 이내 손을 들어 천천히 태형의 옷고름에 가져갔다. 그리고 그 손에 태형은 저절로 흡, 하고 숨을 멈췄다. 팔을 드는 것도 힘든데, 제 스스로 이렇게 복잡하고 무거운 매듭을 풀 수는 없었으니 정국의 손을 빌려야 하겠다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붙어 앉아 정국이 제 옷고름을 풀어 주고 있는 이 상황은 생각보다도 더그러니까…….

태형은 숨을 멈춘 채로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옷들끼리 스치는 비단 소리와 함께 옷이 한 겹씩 벗겨지고 있었다.

 

…….”

 

한 세 겹 쯤 벗겼을까. 정국이 잠시 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왜 갑자기 멈추나 싶어 태형이 살짝 내려다보니 딱 봐도 복잡하고 단단하게 매어져 있는 매듭이 눈에 들어왔다. 정국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이내 다시 손을 움직여 천천히 매듭을 풀었다. 태형이 조그맣게 입술을 벌렸다. 얘 왜 이렇게 여자 한복 고름을 잘 풀어? 되게 많이 풀어 본 솜씬데? 완전 선수아니 한복 잘 벗기는 거 가지고 선수라고 할 수 있나? 그런데 이런 건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태형의 머릿속은 곧 21세기에서 태어나 21세기의 삶을 살아 왔을 정국이 어떻게 이토록 한복 매듭을 익숙하게 풀어 나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점으로 가득 찼다. 그것도 심지어 여자 한복을. 그래, 생각해 보니까 그 때도. 잠에서 갓 깨서 몽롱했던 주제에 잘도 제 매듭을 매어 줬었다. 그것도 예쁘고 단정하게. 전정국 알고 보니 종갓집 자손이었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여자 한복을! 머리 장신구 풀어 주는 것도 그렇고!!

여러 가지 생각을 마구잡이로 떠올리며 정국의 동그란 뒷통수를 내려다보다 갑자기 차오르는 묘한 배신감, 내지는 억울함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제 옷고름을 푸는 데에 열중하고 있는 정국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 잠깐만 전정국.”

……?”

너 왜 이렇게 옷고름 잘 푸냐?!”

?”

되게 많이 풀어 본 솜씨다?”

 

정국의 동그란 눈이 자신을 향하고,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속에 있는 말을 내뱉고. ? 그리고 뒤이어 그게 무슨 개똥같은 소리냐는 듯한 정국의 시선이 태형에게 닿고.

그제서야 제가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자각한 태형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 나 방금 무슨 소리를 한 거야? 그러니까 이건 마치 꼭, 남자친구와 첫날밤을 치루기 위해 온 호텔에서 제 옷을 벗기는 남자친구의 손을 제지하고 자기, 왜 이렇게 능숙해?’ 하고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남자친구를 바라보는 여자 같잖아.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 시바. 이 상황을 어떻게 해명하지? 아니, 전정국이 능숙하건 말건 선수건 말건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태형은 여전히 제 옷고름을 푸는 정국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린 채로 눈을 깜박였다. , 그러니까이건…….

 

, 나는 잘 못 푸는데! , , 하하, . 너 되게 잘 푼다. , 그러니까, , 부러워서……!”

 

시발 부럽긴 뭐가 부러워……. 태형은 제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변명에 그저 눈을 깜박였다. . 하하. 태형이 어색하게 웃음을 늘렸다. 그때까지도 정국은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고 그런 정국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아 태형은 눈을 굴렸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사촌누나가 우리 학교 패션 디자인과라서요.”

?”

저번에 프로젝트 준비할 때, 제가 도와줬었어요. 모델도 섰었고.”

…….”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 하지 말라구요.”

 

정국은 말을 마치고 다시 고개를 숙였고 태형은 멍하니 그런 정국을 내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제가 정국과 서먹해졌던 기간 동안, 정국이 유라가 아닌 패디과 여자와 사귄다는 소문이 잠깐 돈 적이 있었다. 그 소문에 아니, 그럼 유라는 뭐야? 하고 놀라 태형은 곧바로 패디과를 다니고 있는 제 친구 지민에게 연락해 소문의 진위 여부를 파악했었고. 그런데 지민이 절대 아니라고 단언하기에 헛소문에 시달리는 정국도 참 피곤하겠다 싶었던 적이 있었근데, 잠깐만. 패디과?

 

패디? 우리학교 패디?”

.”

! 나 패디에 아는 사람 있어. 혹시 나랑 같은 학번이야? 그럼 걔랑 동기겠는데?”

알아요. 박지민 형.”

 

문득 떠오른 생각에 태형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지만 정국은 무심하게 태형의 옷고름을 푸는 데 열중이었다.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답한 정국의 말에 태형의 눈이 놀람으로 동그래졌다.

 

어떻게 알아? 나 고등학교 친군데?”

예전에 술자리에서 형이 말해줬잖아요.”

내가?”

. 그러면서 그랬어요. ‘우리 운명인가 봐!’”

 

그 말을 하며 정국이 가만히 고개를 들어 태형과 눈을 맞췄고 그 시선에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그랬나? 태형은 어색하게 웃었다. 기억이 없다. 술자리였다니 아마 술에 취해 아무 말이나 했다가 잊어버린 거겠지. 내가 그런 말도 했었구나. 제 딴에는 반가워서 말을 꺼낸 거였는데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정국의 반응에 민망해진 태형이 볼을 긁었다.

 

넌 별 걸 다 기억한다…….”

그걸 어떻게 잊어버려요.”

 

얕게 한숨을 내쉰 정국이 복잡했던 매듭을 다 풀고 태형의 옷을 한 꺼풀 더 벗겼고 태형은 그런가하긴, 사촌누나랑 선배 친구랑 동기면 잊어버리긴 힘들긴 하겠다. 하고 읊조렸다. 그 말에 정국이 잠시 태형을 쳐다봤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형은 좀, 무심한 거 같아요.”

?”

그냥, 좀 불쌍하다구요.”

 

정국이 조용히 말했고 태형은 정국에 말에 어? 내가? 뭐가? 하고 반문했지만 정국은 태형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 됐어요. 하고 태형에게서 손을 뗐다. 그 사이 부지런히도 풀었는지 어느새 태형은 얇은 소복만을 입고 있는 채였고 태형은 다시 한 번 정국의 손재주에 감탄했다. 너 진짜 소질 있는 거 같아.

 

전 원래 다 잘 해요.”

, 그래…….”

 

칭찬이 맞긴 했는데, 그걸 또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꾸하는 정국을 보니 태형은 왠지 짜게 식었다. 그런데 또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라. 태형은 입맛을 다셨다. 맞는 말이긴 한데 재수가 좀 없긴 하네. 태형은 이 말은 속으로 삼킨 뒤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 전하께오서 중전 마마의 각부(脚部: , 왕비의 다리)를 어수(御手: 왕의 손)로 쓰다듬어 주십시오.”

 

진짜 이 방에 CCTV라도 달아 놓은 거 아니야? 도대체 어떻게 안 건지 옷을 벗기자마자 들리는 상궁의 목소리에 태형이 흠칫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방 안에 불을 밝히는 것이라곤 촛불뿐이고 그마저도 5개뿐이라 방 안은 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일 것 같지 않은데, 태형은 상궁의 기민함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나저나 각부? 어수? 이게 다 무슨 말이야? 태형은 정국을 쳐다봤다가 놀라 눈을 키웠다. 쟤 얼굴 왜 저렇게…….

 

너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

…….”

저 상궁이 뭐라 그랬는데?”

 

태형은 가만히 상궁의 말을 다시 되짚어 봤다. 각부를 어수로 쓰다듬가만 있어 봐봐. 쓰다듬다. 어수. 어수는 저도 알고 있는 단어였다. 손 수(). 그럼 손으로 쓰다듬어라. 중전의뭐를? 하나하나 맞춰져 가는 단어 조각에 태형의 얼굴이 천천히 달아올랐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상궁은 지금

 

미친…….”

 

애무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 거야?! 태형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얼굴이 화끈거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니,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로? 왜 상궁이 8명씩이나 필요한가 했더니. 왕과 왕비를 지켜 주는 거라면 그냥 문 밖에 있어도 될 것 같다 생각하긴 했는데. 설마 지금 성교육을 실시간으로 시켜 주려고 상궁들이 8명이나 밖에 앉아 있는 거야? 진짜? 태형이 새어나가려는 비명소리를 제 손으로 막아내며 정국을 쳐다봤다. 그러나 아까까지 아무렇지도 않던 정국은 어디로 갔는지, 정국은 귀 끝까지 새빨개진 채로 차마 태형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태형은 그 와중에도 놀라 눈을 깜박였다. . 나 전정국 부끄러워 하는 거 처음 봐.

 

진짜로? 진짜?”

형 몰랐어요?”

 

태형이 조그맣게 정국에게 묻자 다시 되묻는 정국에 태형은 입을 벌렸다. 진짜로? 왕과 왕비란 원래 이런 거야? 이렇게 사생활도 없고 뭣도 없고 실시간으로 부부 관계를 가지는 것까지 다 들려줘야 하는 거냐고.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태형은 이내 떠오르는 생각에 비명을 삼켰다. 잠깐만. 그러면아무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오늘 밤은그러니까뭐라도 해야한다는건가?

 

너는 알고 있었어?”

…….”

알고 있었어!? 그런데 여기 들어오면 어떡해!!!”

 

태형이 상궁에게는 들리지 않는 선에서 가장 커다랗게 정국에게 소리쳤다. , , !! 이 상황을 어떻게 하려고! 태형은 제 손에 땀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 미친. 아무리 제대로 보이지는 않는다지만.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바로 바로 제지(?)가 들어오는 상황에서 어떻게 아무 거사(?)도 안 치르고 나갈 수 있을까. 태형은 다시 세차게 뛰기 시작한 제 심장을 느끼며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일생일대의 위기였다. 아니, 어떻게 해? 어떻게 해야 해?

 

형도 알고 있는 줄 알아서, 생각이 있나 보다 했죠.”

, 나는!!!”

형도 교육 받았을 거 아니에요.”

내가 받은 교육은!!!”

 

내가 받은 교육은 왕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방법들뿐이었거든!!!! 이 말은 차마 내뱉지 못한 태형이 그대로 입을 벌린 채로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은 계속 말해보라는 듯 태형을 쳐다봤으나 태형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어버버 말끝을 흐렸다. 그러니까, 진짜아니여기서얘랑?

 

?”

말도 안 돼.”

 

2n살의 모태솔로 김태형. 이런 곳에서 라이벌이었던 학교 후배와 첫 경험을 치르게 되는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레이터의 나레이션에 태형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미친 소리 하지 마!!!!!! 태형은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생각해내라, 생각해내라 김태형. 넌 할 수 있다. 네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배워 왔던 모든 것을 떠올려라. 태형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인간의 뇌란 이다지도 정직해서. 태형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지식들이라곤 요 근래 거의 세뇌되다시피 교육받았던 중전으로서의 교육들뿐이었다. 그 사실에 태형은 다시 한 번 절망감을 맛보아야 했다. 내가 수억 들어가며 2n년간 받았던 모든 고등 교육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왜 수많은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는가. (보통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태형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리빙 포인트] 음식이 싱거울 때는 소금을 뿌리면 좋다. 이건 왜 떠오르는 거야도와줘요 리빙 포인트…….

 

. 괜찮아요?”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아무렇게나 주워섬기며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태형은 저를 흔드는 정국의 목소리에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여기서 기절하면 될까? 정국아, 형 뒷목 좀 쳐줄래? 사람 뒷목에는 연수가 있어서, 여길 되게 세게 치면 기절할 수 있대

태형의 생각은 한없이 뻗어나가 (C+을 받은) 교양으로 들었던 인체의 신비에 관한 대학 강의까지 닿았고 태형은 그 강의 내용 중 제가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연수에 관한 지식까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대신 세게 치면 안 돼그럼 죽을 수도 있어. 아니, 이 상황엔 차라리 죽는 게 나을까?

 

정신 차려요, …….”

 

정국이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태형을 쳐다봤지만 태형은 여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정국아내가 그런 쪽으로 편견이 없다고 하긴 했지만 그게 내가 이 상황에서 이렇게 첫날밤을 치르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거든적어도 있잖아, 사람과의 스킨십에는 단계라는 게 있잖아

 

.”

 

결국 보다 못한 정국이 태형의 눈앞에 박수를 쳤고 태형은 그제야 초점 없는 눈동자를 정국에게 맞췄다. , 어차피 저 사람들 우리 못 봐요. 그러니까 그냥 연기만 하면 돼요. 정국의 말에 태형이 응? 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였다. 연기? 무슨 연기?

 

. 신음 소리 낼 수 있어요?”

?”

 

정국이 한참을 머뭇대다 천천히 입을 열었고 태형은 그 말에 멍하니 입을 벌렸다. 신음소리요?

그러고 보니, 태형이 아까 떠올렸던 정보들 중에 생각나는 것이 있긴 했다. ‘중전으로서의 성교육’. 가장 아름답고 예쁜 소리를 내는 법. 왕을 조금 더 달아오르게 하는 법. 태형은 더는 불타오를 수 없을 것 같았던 제 얼굴이 더욱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지금 나보고연기를 하라는……?

 

방법이 없잖아요.”

그냥 네가 내 뒷목을 치는 게 낫지 않을

…….”

…….”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정국의 무언의 눈빛이 너무나 잘 느껴져서, 태형은 입을 다물었다. 심장이 벌렁거려서 죽을 것 같은데. 태형은 눈을 꼭 감았다. 저번에 어떻게 신음소리를 내라고 그랬더라. 그러니까 중전으로서의 품위를 지키면서 가장 아름답게 낼 수 있는 소리는…….

 

…….”

…….”

 

두 눈을 꼭 감고, 죽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아내면서. 문 밖의 상궁이 들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소리를 낸 거였는데, 앞의 정국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에 살짝 실눈을 떠 정국을 쳐다보니 정국은 지금 뭐 한 거냐는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다. 이게 최선입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정국의 눈에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시발, 내가 신음 소리를 내 본 적이 있었어야지!

 

, 그건…….”

전하. 중전마마를 조금 더 어루만져 주십시오.”

…….”

 

제 신음소리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정국뿐만이 아닌 듯, 장지문 밖의 상궁이 역시나 말을 꺼냈고 태형은 억울한 표정으로 정국을 쳐다봤다. 아니, 나도 제대로 하고 싶은데!!!!! 니가 함 해 보든가!!!!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아내면서.

 

중전 마마께서 많이 긴장하신 듯 합니다. 전하. 중전마마의 구순에 접문하여 주시지요.”

 

구순? 접문? ? 문을 접으라고? 이번에는 저번과 달리 해석할 수 없는 한자들에 태형이 정국을 쳐다봤다. 그러나 정국은 저와 달리 저 한자를 알고 있는 듯, 얼굴이 조금 더 붉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거 야한 말이구나. 무슨 말인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물어보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 같은 느낌에 태형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정상적인(?) 신음소리를 낼 수 있을까. 흐읏, 이 아니고 흐응이었나.

 

.”

?”

 

태형이 보다 나은 신음소리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을 때, 정국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태형을 불렀고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정국을 쳐다봤다. 그런데 쟤 왜 저렇게뭔가 표정이

 

너 무슨 생각 하

형 도와주는 거예요.”

? 그게 무슨…….”

 

태형이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태형은 놀라 제 눈의 크기를 키웠다. 그리고 제 눈앞, 아니 그보다 더 가까이 있는 정국의 감긴 속눈썹을 쳐다봤다. 그러니까, 지금태형은 멍하니 제가 느끼고, 보고 있는 감각을 정리했다. 눈앞에 있는 정국의 감은 눈. 제 볼을 붙잡은 정국의 손. 그리고 제 입술에 닿은 정국의 입술. 그리고

 

,”

 

제 소리를 먹고 들어가는 정국의 혀. [SYSTEM : ‘김태형님의 뇌 기능을 정지합니다.] 태형은 멍하니 제 머릿속에서 울리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생각을 멈추었다. 그러니까, 너무 투 머치. 태형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너무 너무한 상황이었다, 지금 이 상황은.

 

흐아,”

 

그 와중에 도와주는 거라던 정국의 말은 사실이었는지, 정국은 중간 중간 숨 쉴 틈을 만들어 주며 태형으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소리를 낼 수 있게 했다. 문 밖의 상궁들도 이번에는 별 말이 없었고. 태형은 텅 빈 제 머릿속에 멍하니 떠오르는 생각에 눈을 감았다.

 

전 원래 다 잘 해요.’

 

그러니까…….

 

흐읏.”

 

전정국의 말은 진짜였다고.

 

(口脣: 입술)

(接吻: 입맞춤)



왕과 왕비가 합궁을 하는 날에 상궁들이 저렇게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은 팩트이지만 눈에 꿀은... 진짜 있는 관습인지는 확실치 않다는데.. 너무 좋아서 넣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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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합궁이라니!!!”

 

태형이 제 볼을 감싸 쥐고 소리쳤다. 머릿속이 과부화 되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합궁! 합궁! 합궁이라니! 그러나 그런 태형의 태도를 설렘 내지는 기대감으로 해석한 듯, 태형 앞의 상궁은 그런 태형을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저리도 좋으실까. 그런 상궁을 알면서도 차마 그거 아니라고 항변할 수도 없는 처지의 태형은 그저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이 속내를 어디 가서 털어놓나!!

우리 합궁일 정해졌대요.’

 

정국은 그 말을 마치고 곧바로 방을 나갔고, 태형은 잠시 제 귀를 의심하여 그대로 앉아 입을 벌렸다. 합궁. 합궁合宮. [명사] 남녀가 성교함. 또는 그런 일. 특히 부부 사이의 성교를 이르는 말. 그러니까, 전정국도 알고 있었던 거다. 합궁일을 조정하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니, 정국이 먼저 그 화제를 꺼냈었던 것도 같았다. 그 땐 그냥 먼 훗날의 일이겠거니 하고 넘겼었는데. 아니 근데 그걸 왜 전정국한테 먼저 말해!! 나한테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정도는 줘야지!!!

 

…….”

마마?”

그래서 합궁일이 언젠데?”

 

태형이 푹 떨구었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사실 태형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정국에게 먼저 말하는 게 맞겠지. 정국도 저와 다름없는 합궁의 당사자일 뿐 아니라 왕이기까지 하다. 왕이 제일 먼저 알지 않으면 누가 제일 먼저 알까. 그러나 괜히 억울한 것은 어쩔 수 없었으니까. 태형은 멍한 머리를 다시 정리했다. 그래. 말이 합궁이지,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사실 합궁이 걱정이었던 것도, 왕이 제 정체를 알까봐서였는데, 이제는 그런 걱정도 없다. 태형은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같이 자는 것뿐이다, 한두 번 같이 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어제도 같이 잤으니까 특별히 의미부여 할 필요는 없다. 태형의 묘하게 결연해진 눈빛에 마마께서 정말로 굳게 다짐하셨나 보다 생각한 상궁이 살짝 미소 지었다. 물론, 태형이 다짐을 한 건 맞았다. 그게 상궁이 생각하는 다짐과는 오조 오억 광년쯤 떨어져 있어서 그렇지.

 

사흘 후입니다, 마마.”

, 사흘…….”

 

왜 이렇게 가까워……. 태형이 조용히 읊조렸다. 사흘이면 3일 후. 마음의 준비만 해도 모자란 시간이다. 아무리 의연하려 해도 자꾸만 떨리는 손에 태형이 라마즈 호흡을 했다. 사실 라마즈 호흡이 뭔지 모르지만 그냥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었단 소리다. 아무튼 그런 태형의 말에 상궁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얼마 안 남았지요. 그러니 오늘부터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준비?”

. 튼튼한 원자 아기씨를 회임하기 위한, 또 전하께 최선의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한 준비요, 마마.”

회임최선의 모습…….”

 

하나같이 정말받아들이기 힘든 말들뿐이네. 태형이 머리를 짚었다. 그래. 그까짓 준비하는 척쯤이야. 어차피 진짜로 할 것도 아닌데. 제 눈앞의 펼쳐진 운명을 수용하기로 결심한 태형이 푹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었다.

 

그래서, 뭐부터 해야 하는데?”

 

*

 

마마, 똑바로 보십시오!”

, 아니…….”

 

태형은 자꾸만 저도 모르게 붉어지는 얼굴을 어찌할 수가 없어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의연하려 해도 차마 제 앞에 놓여진 책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아니 이게 뭐야! 태형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합궁 준비라 해서, 회임에 좋은 약이나 먹고 목욕재계나 할 줄 알았던 태형은 제 눈앞에 펼쳐진 의외의 준비에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대체 이런 걸 왜 알려주는 건데!

 

회임에 가장 좋은 자세는 주상 전하께오서,”

아니, , 잠깐만!”

마마벌써 다섯 번째이옵니다!”

 

그러니까 태형은 지금, 10대 이후 다시는 마주할 일 없을 줄 알았던 그 교육. 이미 정규 교육 뿐 아니라 시청각 자료를 통해 비정규 교육까지 모두 마스터한 지 오래인 그 교육. 이름하야 성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이 나이에, 이런 곳에서 성교육을 다시 받게 될 줄이야. 그것도 개인 과외로! 태형은 입술을 꼭 물었다. 이런 그림 따위가 아니라 움직이는 영상과 소리로 이미 다 알고 있는 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태형은 마치 이런 행위(?)는 처음 보는 것처럼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Safety Sex, 노콘 노섹!을 필두로 하는 교육만을 받아 왔던 태형은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효율적(?)으로 임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교육은 처음 받아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렇게 적나라한 그림과 언어를 사용하면서. 11, 여자에게.

 

, , 그냥 하면 되는 거 아닐까?! 굳이 이렇게 배워야 할까?”

마마. 튼튼한 원자 아기씨를 회임하기 위해서는 기일 뿐 아니라 마음가짐과 자세 또한,”

, 에헤이-”

 

태형은 황급히 상궁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 뒤에 나올 엄한 말들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10분여 전, 상궁이 살짝 미소 지은 얼굴로 대충 봐도 두꺼워 보이는 책을 들고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했던지라, 태형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무방비한 상태의 태형에게 전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으로 운을 뗀 상궁은 옆에 살짝 붙어 앉더니 대뜸 태형에게 헐벗은 두 남녀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말로만 듣던 춘화春畫. 태형은 조선의 색체 표현이 이렇게 사실적이었는지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 훌륭했다.

 

전하께서 마마의 위로 올라타-”

아 제발…….”

 

시발, 시발, 시발! 태형은 울고 싶어졌다. 정상위, 후배위. 이런 체위들이 조선 시대부터 있었구나. 태형은 입 안쪽 여린 살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런데 그걸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요. 튼튼한 원자 아기씨를 회임하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자세는 정상위라는 것까지 TMI로 알게 된 태형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도 펄쩍펄쩍 뛰었다. 아주 조금 있으면 애무하는 법까지 나오겠어!!! 태형은 제 손에 집히는 베개를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이게 뭐라고, 야동을 접한 10대 소녀처럼 부끄러움을 타느냐는 말이다. 이미 다 알고, 본 것들인데. 그건, 태형이 자꾸 상궁의 말을 들으며 떠올리게 되는 머릿속 그림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니까, 그 얼굴. 내 위로 올라타는 전정시발!!!!

 

알겠습니다, 마마. 그럼 조금 더 쉬운 것부터 하도록 하지요.”

, 그래.”

 

태형은 살짝 숨을 내쉬었다. 쉬운 거. 그래. 아무리 흘려들으려 해도 자꾸만 생생하게 서라운드로 플레이되는 영상에 태형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 감으니까 더 선명하게 보여, 미친아. 잠시 그런 태형을 응시하던 상궁이 살짝 한숨을 내쉬더니 춘화집을 스르륵 넘겨 초반 부분을 펼쳤다. , 마음가짐 같은 게 나오려나. 태형은 슬쩍 눈동자를 굴려 춘화집으로 시선을 옮겼

 

옥경(玉莖)을 입에 담으실 때는, 이를 사용하지 말고 잇몸과 입술로 다정하게

, 잠깐만요1!!!!”

입 안을 향기롭게 하여 혹여나

잠깐만! , 그만하,”

전하께오서 옷고름을 풀어 주실 때는 그저 가만히 있지 마시옵고

 

제발 잠깐만!!!!!!!!!!!!!!!!!!! 그러나 태형의 인지 부조화, 혹은 게슈탈트 붕괴, 혹은 멘붕, 어쨌든 태형의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다 못해 산산이 가루가 되어가거나 말거나 상궁은 더 이상은 봐줄 수 없다는 듯 꿋꿋이 말을 이어나갔다. 태형이 혹여나 눈을 피할세라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옥경이 무엇인지 모르는 태형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무리가 없도록 시각 자료를 충분히 활용하면서.

 

*

 

영혼까지 털린 느낌, 혹은 영혼의 순결을 뺏긴 느낌.

 

이라고, 태형은 지난 사흘을 회고했다. 첫 날부터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이어지는 상궁의 표현들로 시작됐던 준비는 하루가 지날수록 그 강도를 높여 가며 진행되었다. 그러니까, 나름의 완급 조절도 했었던 거다. 태형에겐 처음부터 헬게이트 난이도였어서 그렇지.

 

기침하셨습니까, 마마.”

 

태형이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것은 제 손을 가볍게 마사지하며 해사하게 웃는 상궁의 얼굴이었다. 이제는 놀랄 힘도 없는 태형이 며칠 새 핼쓱해진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궁은 태형의 말에 조금 더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날이 밝았습니다, 마마.”

 

그래나의 이 고생도 오늘로 끝이 나고 말이지. 태형이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만 삼키며 제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상궁을 쳐다봤다. 이제 태형은 제 신체의 보안에 대해서는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어차피 중요 부위만 들키지 않으면 됐으니까. 합궁날이 결정된 후부터, 자꾸만 제 몸을 만지려 드는 상궁들에게 사지는 건드려도 좋으니 몸통을 포함해 무릎 위, 팔꿈치 위로는 절대, 손도 대지 않을 것으로 합의를 봤던 것이다. 물론 상궁들의 불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부분인데!’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항의하는 상궁들에게 태형은 당황한 나머지 내 몸은 오직 전하만이 만질 수 있다!!’고 외쳤고 상궁들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말로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아무 말이나 하게 된다,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한 태형은 이런 말을 한 것은 전정국에겐 죽을 때까지 비밀로 가져갈 것이라 다짐하며 제가 조선에 떨어진 이후 얼마나 비밀이 많은 사람이 되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됐다.

 

연습했던 것들은 모두 기억하고 계시지요, 마마?”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상궁의 말에 태형은 다시 한 번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하다마다. 지난 사흘간 하루 종일 그것들만 연습했는데. 어차피 실전에는 하나도 쓸모없겠지만.

그러니까, 태형은 지난 사흘 간 시각 자료들을 통한 간접 수업 뿐 아니라 직접 체험해 보는 시간도 가졌다. 물론 중전의 몸으로 타인과 그런 것들을 실습해 볼 수는 없었으니, 그 비슷한 것들로. 태형은 잠시 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수치스러운 기억에 입술을 깨물었다. 살다 살다 방중술을 연습해 보게 될 줄이야.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의. 태형은 그간 연습했던 것들을 저도 모르게 떠올렸다.

걸을 때 발뒤꿈치 들고 걷기. 이거 정도야 별 거 아니지, 하고 생각했던 태형에게 의외의 복병은 따로 있었다. 바로 옆에서 그 발뒤꿈치를 들고 걷는 것의 효능을 태형의 귀에 꽂아 넣는 상궁의 목소리. ‘허벅지 안쪽 근육과 회음부 쪽 근육이 긴장되어 성감을 높여 줄 수 있으며 전하에게 보다 큰 만족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말에 태형은 잘 걷다 말고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려야 했다. 그뿐만이랴. 금가루가 섞인 소금으로 양치질, 누워서 천을 덮고 한 방울씩 떨어지는 얼음물을 배꼽으로 받기. 그 중에서도 가장 태형의 항마력을 시험했던 것은 혀로 연시 핥기였다. 이건 상궁이 따로 설명을 해 줄 필요도 없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으니까. 태형은 그 순간 가장 쉽고 간단하게 목숨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했었다.

 

소리를 어떻게 내야 전하를

알고 있어, 제발 그만해…….”

 

태형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서 얻은 정보와 지식들은 다시 현대로 돌아간다 해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잊어버리려 해도 말이다. 씻을 수 없는 추억이 되어 버린 사흘간의 준비에 태형은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난 이제 다시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렸어…….

 

오늘은 이제 옷감을 고르시고, 장신구를 고르셔야 합니다. 어서 기침하시지요.”

알겠어…….”

 

태형이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그 날이었다. 자신과, 정국의 첫날밤 아닌 첫날밤.

 

*

 

안 돼, 안 돼, 안 돼!”

오늘은 저도 절대로 양보 못 합니다, 마마.”

 

태형은 단호했으나, 상궁도 오늘만큼은 절대로 양보하지 못하겠다는 듯 단호했다. 태형은 입술을 물었다. 옷감을 고르고, 장신구를 고르고. 마사지를 받고. 한 번 더 중전의 역할에 대해서 세뇌 교육을 받고. 오전 오후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정신없이 준비를 마치고 나니 날은 어느덧 어둑해져 푸른 끼가 돌았다. 이제 정말 그 시간이 다가오는구나. 태형은 제법 깜깜해진 창밖을 내다보며 멍하니 중얼였다. 오늘이 대망의 그 날이라 그런지, 상궁은 더 이상 엄한 소리를 하지 않았다. 아마 태형이 내성도 없이 그 얘기를 꺼낼 때마다 질겁하니 긴장을 풀라는 작은 배려인 듯 했다. 하지만 정작 복병은 지금부터임을, 태형은 깨달았다. 평소에는 태형의 명령대로 목욕 시중을 들지 않았던 상궁이, 오늘만큼은 반드시 목욕 시중을 들어야겠다고 나선 것이다.

 

안 돼. 이건 진짜 안 돼.”

마마. 마마께서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전하의 손이 닿으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제발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알아서 할게!”

 

어차피 걔는 오늘 밤 내 몸에 손도 안 댈 거라고……. 태형은 답답한 속을 억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낭패였다. 순순히 혼자 목욕을 하게 해 줄 거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상궁은 생각보다도 더 강건했던 것이다. 태형은 소복만 입은 채로 치맛자락을 꽉 말아 쥐었다. 하지만 태형도 절대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절대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어쩌면 태형보다도 상궁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더 안 되는 일이었다.

 

마마. 시간이 촉박하옵니다. 벌써 날이 어두워 졌사온데,”

그러니까 혼자 들어가겠다고. 여태까지 잘 했잖아!”

오늘은 평범한 날이 아니지 않습니까!”

 

태형과 상궁의 신경전이 이어졌다. 이게 무슨 아닌 밤중에 전쟁이야. 태형은 상궁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다. 지난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해결했더라. 그러나 곧이어 떠오른 그 날의 일에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타이밍 좋게 정국이 나타나서 무마됐었지. 그러나 같은 행운을 두 번 바랄 수는 없다. 그것도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오기로 한 시간까지 정해져 있었고. 제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는지 꿈에도 모를 정국은 왕이 해야 할 준비로 바쁘겠지. 태형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냥 이대로 그때처럼 밖으로 도망쳐?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게다가 오늘 같이 왕과 왕비의 합궁으로 온 궁궐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날에 왕비가 소복 차림으로 교태전을 뛰쳐나갔다간 뒷일이 어떻게 될지 뻔했다. 중전의 정신이 이상한 것 같다고 소문이 나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나오지 않는 방법에 태형이 미간을 좁혔다.

 

마마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서 계실 겁니까. 이러다가 정말,”

꺄악!”

 

상궁이 다시 한 번 더 태형을 다그치려던 그 순간이었다. 밖에서 갑자기 들린 어린 궁녀의 비명소리에 태형과 상궁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다. , 뭐야?! 태형이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물러섰다. 교태전은 경복궁 안에서도 가장 깊숙이 있는 곳이었다. 궁녀가 저런 식으로 비명소리를 낼 일이 없는, 아주 안전한 공간이란 뜻이다. 게다가 오늘은 왕이 교태전으로 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철저히 해 놓았을 텐데. 태형과 상궁의 눈이 허공에서 얽혔다. 상궁도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듯 의아함과 약간의 불안함이 섞인 표정으로 태형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태형과 상궁이 있는 교태전 내에서도 가장 깊숙이 있는 욕실의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젖혀졌다.

 

, 전하!”

전ㅈ,”

 

그리고 나타난 인영에, 태형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제 앞에 있는 상궁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그 문을 열고 나타난 인영은, 여기까지 서둘러 달려온 듯 얼굴이 살짝 발개진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전정국이었다. 태형과 눈이 마주친 정국은 하,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하는 것 같은 느낌의 그 한숨에 태형이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왕이 오기로 한 시간까지는 2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그 시간에 늦었다 해도, 왕이 교태전까지 뛰어 올 일은 없었다. 이 궁궐 안에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시되는 것이 전정국, 그러니까 왕이었으니까. 의외의 인물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상궁이 급히 고개를 숙였고 태형도 덩달아 고개를 숙였다.

 

, 전하. 어떻게 여기…….”

.”

 

잠시간의 침묵 후에 상궁이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말을 꺼냈고 정국이 그에 조그맣게 감탄사를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벌써 온 거지? 그것도 신하들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급하게. 묻고 싶은 것이 한가득이었으나 꾹꾹 눌러 참은 태형이 정국의 대답을 기다렸다. 왕이 이렇게 직접 달려올 정도면 뭔가 심각한 일이 있었나…….

 

중전이 보고 싶어서…….”

……?”

! , 아니. 잠깐 자리를 비켜 줄 수 있겠나?”

 

그리고 이어진 대답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고 그건 상궁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제가 들은 말이 환청인가를 의심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상궁이 되물었고 정국은 민망한 듯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헛기침을 했다. 저게 무슨 말이야? 보고 싶어서 달려왔다니 그게 무슨…….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정국이 세차게 열어젖힌 문 밖에 서 있는 궁녀들도 방금 제가 들은 말이 환청인가를 생각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정말 말도 안 되는. 그러나 어명은 어명이니. 상궁은 나가기 직전에 놀란, 그러나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는 눈으로 태형을 살짝 돌아봤고 태형은 저도 모른다는 의미로 눈을 깜박였다. 상궁이 문을 닫고 나가고, 방 안에는 소복만 입고 있는 태형과 정국 둘만이 남았다. 태형은 입을 벌리고 눈을 깜박였다. 너 지금 뭐하냐?

 

아니, …….”

……?”

합궁 날에는 상궁들이 꼭 목욕 시중을 들어 준다고 해서,”

?”

그게 관례라고, 지금쯤 중전마마께서도 준비 중일 거라고……. 근데 형은 들키면 안 되니까.”

 

주위에 혹시 들릴까 싶어 두리번거린 정국이 민망한 듯 두서없이 말을 뱉었고 태형은 그런 정국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니까 지금……. 태형은 정국이 뱉은 말을 다시 한 번 찬찬히 되짚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정체가 들킬까 봐 그게 걱정돼서 준비하다 말고 여기까지 뛰어 왔다는 소리인 건가?

나야 상관없지만, 형은 들키면 안 되잖아요.”

 

여전히 민망한 듯, 낮은 목소리로 정국이 말했다. 태형은 그대로 가만히 멈춰 서 그런 정국을 쳐다봤다. 이거 좀 이상하긴 한데, 그러니까, 되게 당연한 거일수도 있는데. 그냥 여럿도 아니고 단 둘만 조선에 떨어진 거니까 서로 돕는 게 맞는 건데. 이런 상황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너무 이상한데.

 

, 전하, 소인이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오늘 중전의 목욕은 내가 거들어도 되겠느냐.”

? 전하! 어찌 그런……. 감히 어떻게…….”

 

나 왜 설레지?

 

태형은 빨라지고 있는 제 심장 박동을 느끼며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정국의 시선이 지금 저를 향하고 있지 않다는 거였다. 어떻게 핑계를 대야 상궁들이 태형의 목욕 시중을 들게 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듯, 정국은 살짝 찌푸린 미간을 하고 문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정국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면, 이유 없이 빨개진 제 얼굴을 봤을 테니까. 태형은 두근두근 뛰는 제 심장께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댔다. 대체 왜…….

 

, 전하! 그래도…….”

중전이!”

…….”

그런 말도 하지 않았느냐!”

?”

중전의 몸은 나만 만질 수 있다고!”

……!”

 

라고?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순간, 태형은 빠르게 뛰던 심장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너 방금 뭐라그랬그러나 태형이 그대로 굳어 버렸거나 말거나, 정국은 조근히 말을 이어 나갔다.

 

중전의 뜻이 그렇다면, 나만 중전을 도울 수 있지 않겠느냐.”

, 황공하옵니다, 전하!”

 

태형이 그렇게 혼자 하겠다 할 때에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더니, 정국의 말 한 마디에 상궁들은 바로 수긍했다. 그러나 그런 상궁들의 태도에 태형이 배신감을 느낄 새도 없이, 태형은 지금 온통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바로 상궁의 말을 듣고 살짝 웃으며 저를 돌아보는 정국의 얼굴. 태형은 천천히 손을 들었다. , , !

 

, 그거, 어떻게, 어디서 들었어?”

? 뭐가요? 그나저나 형. 이제,”

, 내가, 내 몸 너만 만질 수 있다고, ,”

, 그냥 신하들이 말해주던데요. 그건 그렇고 이제 씻어요, .”

아니, , !!!!”

걱정 마요. 안 볼 테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태형은 말을 채 잇지 못한 채로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태형이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마치고, 정국은 뿌듯한 얼굴로 살짝 웃으며 뒤를 돌았다. 태형은 탕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갈 생각도 못한 채로, 정국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린 그 상태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태형은 만약 제 손에 지금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면. 그래서 초록창에 검색을 해 볼 수 있었다면.

 

시바아아알……!”

 

가장 빠르고 고통 없이 죽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는지 검색했을 거란 뜻이다.





*옥경(玉莖·임금의 음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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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고, 태형은 생각했다. 처음에는 분명히 서로 마주치면 간단히 눈인사만 하는 사이만이라도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사이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것을 바라게 됐다. 같이 밥을 먹으면 같이 술을 마시고 싶고, 술을 마시면 눈을 맞추고 얘기하고 싶고. 눈을 맞추고 얘기하고 있으면 키스하고 싶고, 키스하면 자고 싶고. 그러다가 자고 나면, 유치하지만 사랑을 속삭이며 꼭 껴안고 잠들었다가 아침에 같이 눈을 뜨고 싶고.

 

다 왔어요.”

.”

 

태형은 짧은 감탄을 터뜨리며 멍하니 빠져 있던 생각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비싼 차가 좋긴 좋아. 멈추는 것도 몰랐네. 태형이 어색하게 웃으며 안전벨트를 풀자 정국이 씩 웃었다. 그럼 자주 타요. 정국의 실없는 소리에 태형이 됐거든, 하고 짧게 응수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잘 빠진 차에서 내리니 자신에게 모아지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 저 차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알게 되면 더 시끄러워지겠지. 썬팅이 짙게 되어 있으니 그러진 않겠지만, 태형은 혹여나 안에 타고 있는 정국이 보이기라도 할까 봐 재빨리 차 문을 닫았다. 괜한 소란은 딱 질색이었다.

 

, 맞다 형!”

…….”

그런데 형은 왜 내가 나오는 잡지는 안 봐요? 내가 안 나오는 잡지 사기가 더 힘들 텐데.”

…….”

꼭 사 놔요! 나중에 검사할 거니까!”

 

그러나 그런 태형의 노력이 무색하게, 정국은 창문을 내리고는 얼굴을 쏙 내밀어 쓸데없는 소리를 했고, 저에게 모아졌던 시선은 그대로 정국을 향해 개중 정국을 알아본 몇 명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너무나 의도가 투명한 정국의 행동에 태형은 아, 씨발. 하고 조용히 욕을 읊조렸다. 그러니까, 자신을 버리고 윤기와의 약속을 가는 태형에 대한 투정, 내지는 복수. 태형의 살벌한 눈빛에 씩 웃은 정국이 그대로 창문을 올리고 재빨리 차를 몰아 거리를 빠져나갔다. 정국에게 모아졌던 시선은 다시 태형에게로 향한다. 이쯤 되면 정국이 내일 데이트 잊지 마요!’ 라고 외치지 않은 것을 감사해야 하나. 속으로 한 번 더 욕을 읊조린 태형이 걸음을 재촉해 재빨리 건물 안으로 모습을 숨겼다.

 

*

 

그냥 다시 만나면 되잖아.”

미쳤어요?”

 

태형은 태연한 윤기의 태도에 입을 벌리고 테이블을 쿵 쳤다. 그러나 윤기는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고기 먹고 싶다기에 삼겹살집이나 갈 줄 알았더니, 윤기가 태형을 데려온 곳은 멀쩡하다 못해 고급스러움이 넘치는 레스토랑이었다. 이런 곳은 나랑 말고 애인이랑 와야죠. 태형이 투덜거리자 윤기는 네 연애 고민 상담 해 주는 몫이라고 생각해. 가끔은 남이 구워준 스테이크가 먹고 싶은데 이런 곳에 여자 데리고 왔다가 괜히 귀찮아지는 거 싫어. 하고 딱 잘라 말했다. 그게 참 민윤기답다고, 태형은 생각했다.

 

별로 깊게 생각 안 해도 될 거 같은데.”

그게 문제죠. 난 가볍지가 않으니까.”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고 윤기는 밥상머리 앞에서 한숨 쉬지 말라며 작게 잘라진 고기를 포크로 쿡 집었다. 지금 한숨을 안 내쉬게 생겼냐고요, 내가. 짝사랑하는 사람한테서 자꾸 섹파 사이로 돌아가자는 얘기를 듣는데. 태형은 입을 삐죽였다.

첫 경험이 외국 유학 당시 시험이 끝나고 처음으로 갔던 핫한 게이 클럽에서 만난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남자인 만큼, 태형도 자유로운 섹스나 연애에 대해서 보수적인 편은 아니었다. 가끔 몸이 뻐근하면 클럽도 갔고, 한 때는 원나잇도 자주 했었다.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고, 감정이 널을 뛰게 되는 연애보다는 그런 단순한 관계가 훨씬 편했으니까. 그럼 왜 전정국의 지속적인 섹파 제의를 거절하고 있느냐. 그건, 태형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감정의 깊이와 간극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원나잇은 괜찮지만 그 이상으로 이어지는 관계에 감정을 빼놓을 수는 없는 제 자신.

하필 한국인은커녕 동양인도 찾아보기 힘든 도시로 가게 된 외로운 외국 유학 생활이 길었기 때문인지, 태형은 누군가에게 정을 쉽게 주는 편이었다. 자신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쉽게 뿌리치지 못했고, 살이 맞닿으면 맞닿은 시간만큼 어느샌가 제 자신도 모르는 새 감정은 깊어져 있었다. 문제는 그 감정이 항상 상대적이지는 않았다는 거였고. 그 감정의 차이와 간극은 꽤 잔인해서, 몇 번의 속앓이 후에 태형은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러니까, 감정이 깊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애초에 그 싹부터 잘라내기로. 매번 클럽에 가서 괜찮은 상대를 찾아야 하는 귀찮음을 감수하더라도, 절대로 주기적으로 만나는 섹스 파트너는 만들지 않을 것.

 

네 말대로라면 어차피 이미 늦은 거 아닌가? 전정국 좋아한다며.”

…….”

다른 사람이랑 붙어먹는 걸 지켜보는 것보단 그냥 섹파라도 되는 게 낫지 않아?”

 

태형은 입을 꾹 다물었다. 윤기의 말이 너무나도 정곡을 찔렀기 때문에, 딱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거랑 그거랑은 다르죠. 잠시간의 침묵 후에, 태형이 말을 이었다. 뭐가 다른데? 어느새 스테이크 한 접시를 깨끗이 비운 윤기의 눈이 태형을 향해 있었다. 태형은 입을 삐죽였다.

 

그냥 자존심이 상하는 건 아니고?”

…….”

걔는 널 섹파로밖에 생각 안 하는데, 너는 걜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게.”

팩트도 너무 직구면 폭력이거든요.”

 

태형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윤기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이 이거였다. 저를 너무 잘 안다는 것.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형 말이 다 맞아요. 그리고 그렇게 계속 만나다 보면, 걜 더 좋아하게 될까봐 무서운 것도 있고. 태형이 결국 속에 있는 말까지 다 털어놓았다. 윤기가 그런 태형을 보며 혀를 찼다. 때 아닌 상사병을 앓고 있는 태형이 조금, 안쓰러운 것도 같았다. 어쩌다 전정국 같은 애한테 빠져서.

 

그럼 차라리 아예 안 보는 건?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

그건 또 싫고?”

그게 제 마음대로 됐으면 진작에 집 비밀번호 바꿨죠.”

 

윤기로부터 정국을 소개받기 전부터 정국과의 섹스 파트너 관계를 끝낸 지 1년이 지난 지금까지, 태형의 집 비밀번호는 똑같았다. 0215. 태형이 정국을 처음으로 마주한 날짜. 정국은 윤기가 태형을 저에게 소개해 준 그 날을 첫 만남으로 알고 있을 테니 정작 정국은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차라리 처음부터 알려주지 말 걸. 비밀번호 바꾸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바꾸려고 마음먹을 때마다 태형은 결국 문 앞에 주저앉아 버렸다. 자꾸 정국이 그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아서.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정국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 문을 열고 들어와 줬으면 좋겠어서.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소개시켜주지 말 걸 그랬나.”

…….”

그랬으면 차라리 나았을 거 같아?”

 

윤기가 가만히 태형에게 말했고 잠시 윤기를 쳐다보던 태형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정국을 만난 걸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글쎄, 어떨까. 태형은 제 앞에 높여진 샐러드를 의미 없이 뒤적였다. 분명한 건, 윤기가 아니었더라도 언젠가 태형은 정국을 만나고야 말았을 거라는 것이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랬다. 언젠가는 그랬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렇게 믿고 싶으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는 몰라도.

정말 제 예감이 맞다면, 윤기가 자연스럽게 정국을 소개시켜 준 건 차라리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래, 팬이라고 해서 별 생각 없이 정국에게 저를 소개시켜 준 윤기가 무슨 잘못이 있을까. 잘못은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잔뜩 취해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초면에 원나잇을 해 버린 제 자신에게 있지. 태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작부터가 엉켜 있었으니 관계가 제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에휴, 생각해서 뭐 해. 잠시 멍하니 정국을 생각하던 태형이 이내 정국의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됐고, 이제 일 얘기 합시다. 몇 곡 필요한데요?”

“3. Intro, Outro, 남주인공 테마곡.”

 

태형의 말에 윤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고 윤기의 말에 태형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겨우 세 곡? 나야 고맙긴 한데.

 

갑자기 연락해서 부탁하기에 많이 필요하거나 급하게 필요하거나 둘 중 하나일 줄 알았는데. 둘 다 아니네요?”

사실 이미 곡이랑 작곡진 다 정해져 있었거든.”

 

태형의 말에 윤기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국이 처음으로 성인 주연을 맡으며 대박을 터뜨려 성공적인 성인 연기의 포문을 열게 된 영화가 윤기의 첫 상업 영화 데뷔작이라는 특별한 인연에, 둘은 그 뒤로도 몇 편의 영화를 함께 찍었었다. 그 중의 하나에서 태형이 OST를 맡게 되어 그 때 윤기가 정국을 소개시켜 줬던 거고. 사실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이유로 다른 때보다 훨씬 빠르게 가까워진 윤기가 정국의 팬이라는 태형의 말에 신경을 써 주지 않았다면 굳이 작곡가인 태형이 정국을 소개받을 일은 없었을 거였다.

어쨌든. 이어진 말에 태형의 눈이 조금 더 짙은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작곡가가 다 정해져 있었다면 더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제 입으로 말하긴 민망하지만 태형은 이쪽에서는 알아주는 영화 음악 작곡가였고, 들어오는 일거리야 차고도 넘쳤다. 사실 윤기에게서도 이번에 들어가게 될 영화의 음악을 맡아 달라는 눈치를 받았지만, 이미 예전에 받아 놓은 일거리가 넘쳐나는 탓에 고사했었고. 그런데 그렇게 마무리 된 줄 알았던 윤기에게서 며칠 전에 연락이 온 거였다. 이번 영화에 태형의 곡이 꼭 필요하다고. 평소에 아쉬운 소리를 잘 하지 않는 윤기였던지라, 그만큼 급한 일인가 보다 싶어 조금 무리할 각오를 하고 승낙했었는데.

 

그럼 왜…….”

그런데 우리 남주인공께서, 김태형 작곡가님의 곡이 아니면 안 하시겠다고 땡깡을 부리셔서.”

 

살짝 태형의 눈치를 본 윤기가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그 말에, 태형은 순간 멍해지는 머릿속을 느낄 수 있었다. 윤기의 말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거였으니까. 정국의 성격상 장난으로라도 내 덕분에 형 돈 더 많이 벌겠네요.’ 하고 말했을 법도 한데, 윤기에게 부탁을 받고 그 부탁을 수락한 후에도 정국은 별 말이 없었다. 윤기를 만나러 간다는 말을 들은 오늘까지도 정국은 마치 자신도 어디선가 들은 것처럼 형 이번에도 내가 하는 영화 OST 맡았잖아요.’ 하고 말했을 뿐이다. 태형은 가만히 입을 벌리고 허공을 쳐다봤다. 이거 좀이상한 상황 맞지.

 

전정국이 말 안 해?”

오늘도 만났는데 별 말 없었어요. 형 만나러 간다고까지 얘기했는데.”

걔 휴가 간 거 아니었어?”

헤어지고 귀국했대요.”

이번엔 좀 오래 가나 싶더니.”

 

걔가 그럼 그렇지. 윤기가 한숨을 내쉬었고 태형은 어색하게 웃었다. 잠시 그런 태형을 응시하던 윤기가 살짝 고민하는 듯 입술을 깨물다 여전히 멍 해 있는 태형의 손을 툭 건드렸다. 태형아. 사뭇 진지해진 윤기의 목소리에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기를 쳐다봤다.

 

전정국. 좋은 배우고 좋은 놈이지만.”

…….”

좋은 애인은 아냐.”

 

꽤나 고민한 듯 무겁게 이어지는 윤기의 목소리에 태형이 어색하게 웃었다. 윤기가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지는 태형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 표현하진 않아도 윤기가 제 자신과 정국을 모두 아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윤기는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고 있을 거다. 저 말도, 태형을 위해 진심으로 해 주는 어렵게 꺼낸 말이겠지. 정국과의 애매한 관계에서 상처를 받는 것은 태형, 자신뿐이었으니까. 태형은 그런 윤기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

 

알아요.”

…….”

그러니까 더 이상 안 가려고 하고 있는 거고.”

 

태형은 말을 마치고 샐러드를 입 안에 구겨 넣었다. 그런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나. 태형은 천천히 야채를 씹었다. 지금도 이렇게, 아무런 의미 없을 정국의 행동에 괜히 의미를 부여하면서 심장이 뛰는데. 태형이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지나 드레싱에 잔뜩 절여진 야채가 입 안에서 질척하게 뒹굴었다.

 

*

 

내가 준 넥타이 했네요?”

 

정국과의 약속이 있는 날 저녁. 의식하지 않으려 했음에도 평소보다 일찍 떠진 눈에 태형은 곧바로 작업실로 향했지만 오전 내내 작업에는 진전이 없었다. 당연했다. 머릿속에는 음표와 오선지 대신 정국에 대한 생각들로만 가득 차 있었으니까. 결국 의미 없는 멜로디만 두드리다 작업 창을 닫은 태형은 차라리 드레스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약속 때문에 신경을 썼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정국과의 약속을 일찍부터 준비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도저히 다른 것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 어차피 이러나 저러나 정국은 신경도 안 쓰겠지만.

 

그랬나.”

 

그런데 또 귀신같이. 제가 선물해 줬던 넥타이를 알아보는 거다. 사실 정국과 만난다고 부러 정국이 선물해 준 넥타이를 하고 나온 것은 아니었고, 정말로 그게 마음에 들었던 거였는데. , 그래. 이것도 문제였다. 정국이 제 취향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 아무것도 안 하고 숨만 쉬어도 존재 자체가(정확히는 얼굴이) 제 취향인데 정국은 제 옷 취향이나 음식 취향도 귀신같이 잘 알았다. 이래서 그렇게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인기가 많은 건가. 연예인으로서도, 파트너로서도. 괜히 다운되는 기분에 태형이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대꾸했다. 그런 정국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국은 넥타이 잘 어울린다며 씩 웃었다. 웃지 마. 정들어. 태형(29, 이미 전정국에게 정이 들다 못해 좋아 죽겠는 사람)이 속으로 꿍얼였다.

 

여기 수제 버거가 엄청 맛있대요.”

근데 너 이런 데 와도 돼?”

 

정국이 태형을 데려온 곳은 태형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었던 수제버거집이었다.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간 태형은 의외의 풍경에 살짝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스테이크나 파스타 같은 것보다 햄버거를 훨씬 더 좋아하는 태형으로서는 다른 곳보다도 이 수제 버거 집이 좋은 선택일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정국의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이렇게 뻥 뚫린 인테리어로 되어 있는데다 유명하기까지 한 햄버거 집은 생각도 못 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여기 와 보고 싶었던 건 또 어떻게 알았대. 알고 그랬다기보다는 그냥 별 생각 없이 고른 곳이었겠지만.

 

뭐 어때요. 연예인은 햄버거도 못 먹나?”

아니, 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알아보잖,”

형이랑 있는데 뭐 어때요.”

 

스캔들 같은 거라도 나면 어쩌려고, 하고 말을 이으려던 태형은 정국의 말에 입을 합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전정국도 남자고, 저도 남자고. 제가 정국을 좋아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니 괜히 찔려서 그렇지 정국과 저의 관계는 몇 번쯤 같이 밥을 먹어도 전혀 스캔들이 날 일이 없는 사이였다. 게다가 지금은 정국이 주연을 맡아 촬영하고 있는 영화의 OST까지 맡게 되었으니까. 스캔들이야 현이 씨 같은 사람이랑 밥을 먹어야 나는 거겠지.

괜히 한 번 더 정국과 제 사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인을 받은 느낌에 태형이 제 머리를 살짝 헝클어트렸다. 속상해할 일도 아닌데 괜히 속이 상해서, 그게 더 속이 상했다. 이래서 연애가 하기 싫었던 거였는데. 끝없는 감정 소모. 그런데 심지어 이건 연애도 아니고 일방적인 짝사랑이야. 태형이 입술을 물었다.

 

여기 싫어요?”

아냐. 먹자.”

 

제 표정이 눈에 띄게 안 좋아진 것을 느꼈는지, 옆에서 정국이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목소리가 들렸고 태형은 애써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이런 말을 정국에게 할 수는 없으니까. 한 번 더 태형을 흘긋 쳐다본 정국은 뭐라 한 번 더 말을 걸려는 것 같았으나 마침 종업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고 태형은 고개를 돌렸다. 종업원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마도 전정국 때문에.

 

전정국으로 예약하셨죠? 두 자리.”

.”

이 쪽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약속 잡은 게 어제 밤인데, 그 짧은 새 예약까지 해 둔 모양이었는지 안내를 받아 자리하게 된 곳은 커다란 창이 옆으로 나 있는 자리였다. 좋은 자리도 예약했네. 태형이 속으로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형 뭐 먹을래요?”

…….”

 

태형이 메뉴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버거 자체는 A세트가 마음에 드는데, 사이드메뉴는 D세트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혹시 사이드메뉴를 바꿀 수 있을까 싶어 메뉴판을 훑으니 매정하게도 사이드 메뉴 변경 불가가 버젓이 쓰여 있다. 태형이 습관적으로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둘 중 뭘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정국을 흘긋 쳐다보니 메뉴판에는 관심도 없는 눈치였다. 두 개 시켜서 나눠 먹자고 하면 좀 그런가. 결국 끙, 하고 고민하던 태형이 메뉴판 위에 A세트를 손으로 짚었다.

 

나 이거.”

그럼 A세트랑 D세트 주세요.”

 

. 태형이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살짝 놀라 정국을 쳐다보니 정국은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냥 우연의 일치인가? 괜히 찔리는 느낌에 태형이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별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네, 진짜.

 

어제 윤기 형이랑은 뭐 했어요?”

그냥 밥 먹었는데.”

뭐 먹었는데요?”

 

그런 건 왜 물어봐? 태형이 살짝 미간을 좁히며 대꾸하자 정국이 그냥, 궁금하잖아요. 하고 웃었다.

 

이틀 연속으로 다른 사람이랑 데이트 하고.”

이게 데이트냐? 그냥 저녁 뜯기는 거지.”

뜯기다뇨. 너무하네.”

네가 애인이랑 헤어지는 바람에 내가 위로해 주는 거잖아. 내 돈 쓰면서.”

위로해달라고 한 적 없는데? 그럼 오늘 내가 다 사면 데이트라고 해 줄 건가?”

 

뭐래. 태형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정국을 쳐다봤다. 누가 배우 아니랄까봐 대사는 잘 치네. 속으로 생각하며 태형이 제 앞의 물을 들이켰다. 어차피 원하는 건 그냥 나랑 자는 거면서, 정국은 자꾸 저렇게 사람을 헷갈리게 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한테도 다 저러겠지만. 한없이 가벼운 전정국. 태형은 그런 정국의 잘생긴 얼굴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어쩌다 저 얼굴에 낚여가지고. 태형은 차라리 화제를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정국의 의중을 다 알고 있어도 정국의 저런 말과 얼굴에는 내성이 없었으니까.

 

스테이크 먹었어.”

. 스테이크.”

…….”

그런데 형은 스테이크보다 버거가 더 좋죠?”

 

그런데 화제는 왜 다시 이쪽으로 회귀하는가. 태형은 입술을 물었다. 정국이 하는 말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 싸움인 건가? 내가 어제 자기 버리고 윤기 형한테 갔다고? 태형은 눈을 굴렸다. 그냥 그렇다고 하면 끝날 대화긴 한데. 실제로도 스테이크보다는 여기가 더 좋고. 그러나 괜히 지고 싶지 않았다. 태형은 아니? 하고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정국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진다.

 

거기가 분위기 더 좋았는데.”

거짓말.”

스테이크랑 햄버거랑 비교가 되냐.”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태형이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정국을 당당히 마주하기에는 양심에 찔렸으므로. 그러자 정국이 흠, 하고 팔짱을 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기분이 안 좋다는 명백한 의사표현. . 어쩌라고. 태형이 괜히 속으로 투덜거렸다.

 

진짜 민윤기랑 사귀어요?”

뭐라고?”

아님 섹파?”

.”

날 두고?”

 

, 왜 또 화제가 그리로 가. 애써 돌린 보람도 없이 원점으로 돌아간 대화에 태형이 정국과 눈을 맞췄다. 그러나 정국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대체 왜 저래? 태형도 덩달아 미간을 좁혔다. 눈치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왜 애먼 윤기 형한테 불똥이 튀냔 말이다. 태형이 입을 열었다.

 

그런 거 아니거든. 윤기 형은 그런 사람 아니야.”

그럼 난 그런 사람이고?”

말꼬리 잡지 마.”

그럼 더 문제 될 거 없잖아요. 나랑 자자니까요?”

싫다니까. 너 자꾸 이러면 나 진짜,”

나 못해요?”

그런 문제가 아니,”

좋아했잖아.”

. 글쎄.”

그럼 민윤기 좋아해요?”

!!!”

 

결국 태형이 저도 모르게 쾅, 하고 테이블을 치고는 놀라 주위의 눈치를 봤다. 저도 모르게 커진 목소리가 주위에 들렸을까봐. 탁 트인 가게 안이었지만 다행히 테이블 사이가 꽤 떨어져 있는 데다 그나마 자리가 외진 곳이어서 그런지 주위에 들렸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정작 정국은 정말로 단단히 마음을 먹은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답답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나만큼 답답할까.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왜 궁금한데. 태형의 한층 낮아진 목소리에 정국이 말을 이었다.


나한테도 이유는 알려줘야죠. 그 때도 형이 일방적으로 끝냈잖아요. 난 이유도 모르고.”

그 땐 아무 말 없었잖아, 너도.”

그거야 형이 잠수를 탔으니까!”

 

사실, 태형도 찔리는 것은 있었다. 정국과의 섹스 파트너 관계를 이어가다가 도저히 이렇겐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태형이 일방적으로 관계를 끝낸 게 맞으니까. 그것도 매너 없이 한창 영화를 촬영하고 있을 정국에게 문자로. 그리고는 그대로 해외로 잠수. 그러나 태형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정국의 얼굴을 보면 도저히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계속 감정 없는 파트너 관계를 이어 갈 수도 없고. 정국의 말에 살짝 어깨를 움츠렸던 태형은 이내 문득 떠오른 생각에 다시 눈을 똑바로 떴다. 왜냐하면, 태형에게도 할 말이 아주 없는 것은 또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이주일 간의 잠수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계기가, 타국에서 접하게 된 유명 모델과 정국의 열애설이었다. 아무리 섹파에 불과했다지만 태형과의 관계가 끝난 지 이주일 만에.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호텔로 들어가는 두 남녀의 실루엣. 그 사진을 본 순간 얼마나 열이 올랐는지, 태형은 곧바로 귀국 비행기 티켓을 끊었었다.

 

민윤기 좋아하냐고요.”

 

그러나 어차피 다 지난 얘기고. 그 이후로도 정국은 공식적으로는 한 번, 비공식적으로는 세 번 정도 이별을 겪었다. 아마 원나잇까지 합하면 더 많겠지. 섹파도 이별로 치나? 아무튼. 태형이 입을 삐죽였다. 헤어지자마자 모델이랑 호텔 간 건 자기면서, 이제 와서 왜 이러는데? 빈정대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태형은 그 말을 간신히 혀끝으로 밀어 삼켜냈다. 괜히 치졸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뭐가 됐든, 태형은 순순히 정국이 원하는 대답을 내어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그럼 이렇게 가볍게 형 건드리는 짓 안 하죠.”

 

그래서 퉁명스레 내뱉은 말에 돌아오는 대답이 어쩌면 의외의 것이어서, 태형은 순간 쿵 하고 떨어진 제 심장을 숨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눈치 챘을까. 흘긋 정국의 눈치를 보니 정국이 눈치를 챈 것 같진 않았다. 속으로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태형이 괜히 바짝 마르는 입술을 혀로 핥았다.

 

가벼운 건 아냐?”

당연하죠.”

 

정국의 대답은 단순명료하게 떨어졌다. 태형은 괜히 물컵을 꼭 쥐었다. 그래. 알긴 아는구나. 날 대하는 네 태도가 엄청 가볍다는 거. 그러니까, 알고도 그런다는 거지. 그리고 내가 윤기 형을 좋아하면 바로 그만둘 수 있을 정도로, 쉽다는 거지. 태형이 입 안쪽 여린 살을 잘근 씹었다. 어째 지고 싶지 않아 말을 하면 할수록 피해는 태형 자신만 입는 것 같은 느낌이다.

태형과 정국이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는 사이, 때마침 종업원이 손에 그릇을 들고 천천히 다가왔고 태형은 재빨리 표정을 풀었다. 이 와중에도 혹시 정국이 구설수에 오를까 싶어서. 아 정말. 이렇게 사려 깊은 사람이 또 어딨어. 태형은 살짝 웃으며 햄버거를 건네받았고 정국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런데 D세트를 받은 정국이 햄버거로 손을 뻗는 대신 제 세트에 있는 감자를 들어 태형의 A 세트에 있는 샐러드와 바꿔 가져가는 것이다.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국을 쳐다봤다. 너 지금 뭐 하냐? 그러자 정국이 아무렇지도 않게 제 앞에 놓인 콜라를 마시며 응수했다.

 

형 풀 안 먹잖아요. 버거에는 감자튀김이라고 입에 달고 살았으면서.”

그건 그런데…….”

나 체중 관리도 해야 하니까, 겸사겸사.”

 

체중 관리 하는 놈이 햄버거 먹냐. 태형은 멍하니 생각하며 제 앞에 놓여진 감자튀김을 쳐다봤다. 제 심장 박동이 기분 좋게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 태형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런 건 좀

 

…….”

 

반칙이잖아. 태형은 빨개졌을 얼굴을 숨기기 위해 콜라를 들이켰다. 탄산이 목을 따끔따끔 쏘아대다가 식도를 타고 심장까지 따끔거리게 했다. 진짜, 쓸데없이 기억력은 좋아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 이렇게 해 줄 것을 아는데. 그냥 저런 매너가 몸에 밴 앤데. 그러나 그렇게 마음을 다잡아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괜히 기대감이 조금씩 커지는 것도. 태형이 버거를 한 입 물었다. 어제 푹 젖어 질척거렸던 야채와는 달리 양상추가 기분 좋게 아삭거렸다.

 

작업은 잘 돼 가요?”

 

직전의 대화가 애매하게 끝나서 살짝 어색해진 분위기에 뭐라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정국이 먼저 입을 열었다. 태형은 버거를 씹다 말고 정국을 쳐다봤다. 그래. 이것도 있었지. 자기가 부탁해 놓고, 나한테 말 안 한 거. 평소 같았으면 별 거 아니라고 치부하고 그냥 넘어갔을 텐데, 그게 전정국이 되니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지금 물어볼까. 그냥, 네가 부탁한 거라며. 왜 말 안 했어? 하고 자연스럽게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고민하던 태형이 살짝 정국의 눈치를 보다 막 입을 열었을 때였다.

 

…….”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정국의 핸드폰이 가볍게 진동하며 제 존재를 알렸다. 잠깐만요, 하고 뒤집어 놓았던 핸드폰을 확인한 정국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리고, 태형은 제 입술을 살짝 물었다. 진동하던 핸드폰 위에, 잠깐 반짝이고 있었던 익숙한 이름 때문에.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

 

잠시 핸드폰을 보다가 입술을 깨문 정국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고 태형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까지 기분 좋게 뛰던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류현이’. 정국의 바로 전 여친 이름. 그리고 어쩌면잠시 후에 전 여친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는 이름. 갑자기 입맛이 떨어져 태형은 햄버거를 내려놓고 콜라를 들었다. 얼음이 녹아 스테인레스 잔 밖으로 맺힌 물방울이 차갑게 태형의 손에 닿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태형은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정작 흐른 시간은 2분여 남짓인데 꼭 2시간이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테이블이 멀어 느껴지지 않던 소음도 왜인지 아까보다 훨씬 크게 들려서 혼자가 된 느낌을 가중시켰다. 헤어진 사이에, 뭐가 그렇게 할 말이 많을까. 태형은 어느새 바닥을 보이는 콜라잔을 내려놓았다. 차가운 음료를 한 번에 많이 마신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태형이 의미 없이 메신저를 확인하고 있을 때, 정국이 다시 돌아왔다. 살짝 난처한 얼굴을 하고.

 

.”

가 봐야 돼?”

 

정국은 제 자리에 제대로 앉지도 못 한 채로 태형의 눈치를 봤다. 정국이 나가서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아니, 살짝 굳은 얼굴로 현이 씨로부터 오는 전화를 응시했을 때부터 어쩌면 예상하고 있었다. 태형은 숨을 살짝 들이쉬었다. 가 봐. 급한 일인 것 같은데.

 

미안해요, . 여긴 내가 낼게요.”

당연히 그래야지. 헤어진 것도 아닌데.”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하지 말지. 아니길 바라고 넌지시 던진 말은 칼이 되어 태형을 찌른다. 태형은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소 같았으면 빈말로라도 집까지 데려다 줄게요.’하고 말했을 정국인데, 이번에는 그런 말도 없었다. 정말 급하긴 한가 보네. 반도 먹지 못한 버거를 뒤로 하고 계산대에 선 정국을 기다리면서 태형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 못한 배가 허전했다.

계산을 마치고 내려가면서, 정국은 한 번 더 미안하다고 말했고 태형은 대충 손을 들어 손짓했다. 나중에 제가 더 비싼 거 사줄게요. 정국의 말에 태형은 됐어, 하고 건물 밖으로 나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정국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자 그제서야 현실감이 들었다. 정국은 현이 씨에게 갔고, 자신은 혼자 남았다. 태형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서서 거리를 쳐다봤다. 거리는 어느새 어둑해져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낮에 제법 더웠던 날씨 때문에 얇고 입게 나온 것이 실수였는지 차가워진 기온에 태형이 살짝 몸을 떨었다. 아직 5월인데. 낮에 더웠다고 이렇게 얇게 입고 나오는 바보가 여기 있네. 태형이 중얼였다.

 

헤어진 것도 아니면서 나보고 자쟤. 나쁜 새끼.”

 

늘 이런 식이었다. 혼자 착각하고, 기대하고, 결국엔 혼자 남겨지고. 태형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선선한 바람이 태형을 감싸 돌고 지나갔다. 언제쯤이면 착각하지 않을 수 있게 될까. 여름은 아직 멀었는데.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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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술 사줘요.”

깜짝이야…….”

 


갑자기 방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소리에 태형이 놀라 쓰고 있던 헤드폰을 내려놓았다. 집 안에 딸려 있는 작업실이었지만 새벽까지 작업을 하다, 침대가 있는 침실까지 가기가 귀찮을 때 잘 용도로 작업실 안에 가져다 두었던 싱글킹 사이즈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인영에 태형이 미간을 좁혔다. 분명히 작업 중 팻말이 걸려 있을 땐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혼자 사는 집임에도 불구하고 작업실 방문 앞에 달아 놓은 작업 중이라는, 필요 이상으로 친절한 팻말은 단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한 사람이 그 팻말에 쓰인 한글의 의미를 전혀 존중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걸어 놓은 이래로 단 한 번도 제 몫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태형은 제 침대에 누운 인영을 세게 째려봤다. 너 안 일어나?

 


작업실에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

나가.”

 


태형이 세모눈을 하고 방문 밖을 가리켰다. 허리에 손까지 올리고, 제법 매서운 눈을 한 태형 때문에 침대에 누워 한 번 더 수울-하고 떼를 써 보려다가, 결국 못이기는 척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누워서 더 떼를 써 봐야 태형이 제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고, 오히려 역효과만 더 일으킬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것에 대해서는 의외일 만큼 관대하면서, 작업실에 대해서만큼은 태형은 단호했다. 결국 어깨를 으쓱하고 밖으로 나가자, 태형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제 신성한 작업실에 제멋대로 쳐들어온 불청객을 내쫓고, 하던 작업을 대충 마무리한 뒤 거실로 나오자 불청객은 어느새 자연스레 소파에 앉아 탁자에 놓여진 잡지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아주 자기 집이 따로 없네. 불청객 쪽으로 한 번 시선을 던진 태형은 그대로 부엌으로 가 커피를 내렸다. 오늘 오후에 약속 나가기 전에 곡 하나는 끝내려고 어젯밤을 그대로 샜더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제 마무리만 하면 됐었는데.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 때문에 아무래도 오늘 약속 전까지 끝내기는 무리지 싶다. 어느새 다 내려진 커피를 머그컵에 담아 들고 거실로 나간 태형이 입을 열었다.

 


현이 씨랑 칸쿤 간다더니. 왜 여기 있어?”

헤어졌어요.”

.”

 


사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헤어져? 태형이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자 불청객은 어깨를 으쓱한다. 상대가 요즘 주가가 치솟는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인 만큼 이번에는 좀 오래 가는가 싶더니. 역시나 100일을 제대로 못 넘긴다. 태형이 무심코 커피에 입을 댔다가 아뜨, 하고 다시 내려놓았다. 잠이 부족해서 머리가 몽롱했다.

 


찬 거야, 차인 거야?”

둘 다?”

그게 뭐야.”

몰라. 술 사줘요.”

스케줄까지 다 빼고 100일 여행 계획하기에 이번엔 좀 진지한가 했더니.”

 


절대 안 된다는 매니저의 말에도 꼭 가야 한다고 생떼를 부리던 모습이 아직도 훤한데.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지금 매니저랑 대판 싸우고 얻어낸 금쪽같은 일주일간의 휴가를 3일 만에 박살내고 기껏 온 곳이 내 집이란 말이지. 그러나 제 눈앞의 인영은 태형의 한숨에도 태평했다. 그렇죠. 그러니까 술 사줘요. 앵무새도 아니고, 계속해서 따라 붙는 술 사달라는 말에 결국 태형이 다시 미간을 좁혔다.

 


돈도 많은 게, 왜 자꾸 나한테 술을 사달래?”

. 우리 사이가 이것밖에 안 돼요? 실연당한 사람한테 술도 못 사주나?”

보나마나 네가 잘못했겠지!”

 


태형이 잔을 제법 세게 내려놨다. 그 모습에도 눈 깜짝 않는다. 저런 게 지금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몸값을 자랑하는 핫한 배우라니. 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걸까, 한숨이 나왔다.

전정국. 나이는 27, 6살 때 스크린으로 데뷔해 그 때부터 쭉 쉬지 않고 연기를 해 온 국민 배우. 어린 나이에는 아역상을 휩쓸고, 커서는 남우주연상과 대상을 휩쓸고. 마의 청소년기도 훌륭하게 넘겼으며 나이에 비해 연차가 높다 보니 자칫 식상해졌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탄탄한 연기력과 그에 걸맞은 화려한 필모그래피로 운과 실력을 두루 갖춘 이시대의 아이콘이자 선망의 대상. 뭐뭐하고 싶은 남자, 하면 1위를 가져가는 건 예사였고 연예인들의 연예인, 연예인들의 이상형에 심심찮게 뽑히는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그의 화려한 이력에 대해 얘기하자면 밤을 새도 모자랄 정도로 끝도 없는 사람.

 


그래서 이번에는 왜 헤어졌는데?”

지나가는 여자 가리키면서 쟤 너 스타일 아니냐길래, 그렇다고 했어요.”

…….”

그럼 자고 싶냐길래, 그렇다고 했고.”

미친…….”

 


그런데 전정국에 열광하는 그 사람들은 알까. 전정국이 사실은 이런 놈이라는 걸. 태형은 머리를 짚었다. 그런 태형의 반응에도 눈앞의 정국은 태연했다. 그랬더니 헤어지자던데요. 더 이상 간단할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끝난 정국의 설명에 태형은 입을 벌렸다. 그게 무슨 둘 다야. 그냥 네가 찬 거지! 그것도 상대에 대한 예의라곤 쥐뿔도 없이!

 


요즘은 쓰레기가 말도 하네.”

, 그게 아니라.”

 


정국이 다시 소파에 늘어졌다. 태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그런 태형을 바라보던 정국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처음엔 아니라고 했죠. 그 정도 눈치도 없을까봐.”

그런데.”

남자고 여자고 지나갈 때마다 물어보는데, 이쯤 되면 내 입에서 그렇다는 말이 나오길 바라고 있는 거 같기도 하고.”

그거야 니가-”

근데 또 걔가 짚는 사람마다 귀신같이 내 스타일이어서.”

…….”

원하는 게 쓰리썸인가? 근데 난 그건 별로거든요.”

 


태형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렸다. 사위 삼고 싶은 남자 1, 결혼하고 싶은 남자 1. 여름휴가를 같이 보내고 싶은 남자 1위라는 타이틀이 정국의 위에서 반짝거리다 우르르 부서져 내렸다. 결혼을 하고 사위를 삼고 여름휴가를 같이 보내고 싶기는 개뿔. 현실은 여름휴가 갔다가 싸우고 헤어진 남자고, 결혼했다간 인생 말아먹기 딱 좋은 남자 1위일 텐데. 그러나 그런 태형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국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헤어졌어요.

 


그리고 넌 귀국하고?”

니가 갈래, 내가 갈까. 그러기에 내가 간다고 했어요.”

잘 했다…….”

차이고, 호텔에서도 쫓겨나고. 형한테 술 얻어먹을 자격은 충분하지 않아요?”

차이긴. 네가 하도 못미더우니까 계속 물어본 걸 거 아냐. 계속 아니라고 대답해 줬어야지.”

 


이 쉽고 간단한 걸 정국은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다 알면서 그냥 그렇게 해주기가 싫은 걸까. 정국이 바보도 아니고, 아마 마지막 선택지가 그 답일 거였다.정국은 원래 그랬으니까. 그 상대가 누구든 인연에 연연해하지 않고, 복잡하고 귀찮은 건 싫어하고. 맺고 끊음이 확실하고 깔끔했다. 그러니 정글 같은 연예계에서 저렇게 자유롭게 살아도 더러운 뒷소문이 나지 않는 거겠지. 태형은 어느새 적당히 식은 머그컵을 다시 들었고 정국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형이랑 할 때가 제일 좋았는데.”

푸흡!”

 


그리고 이어진 말에, 태형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보람도 없이 그 커피를 그대로 쏟아냈다. 콜록, 콜록, 콜록. 커피가 적당히 식어서 천만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입천장이 홀라당 다 까졌을 것이다. 그 사실에 감사하며 태형은 새빨개진 얼굴로 입가에 묻은 커피를 닦아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나온 말에 태형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정작 말을 꺼낸 정국은 태연했다.

 


, 그냥 다시 나랑 자면 안 돼요?”

그런 소리 하지 말랬지.”

형만한 사람이 없어요.”

.”

 


태형이 세차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사뭇 진지한 얼굴로 정국을 쳐다봤다. 하지만 정국은 그런 태형의 표정에도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대체 왜 싫다는 거예요?

 


형도 지금 사귀는 사람 없다면서요.”

그거랑 상관없어.”

그럼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나?”

전정국.”

설마, 날 두고.”

.”

 


태형이 표정을 굳히고 낮은 목소리로 정국을 불렀다. 이런 화제는 불편했다. 태형이 부러 머그컵을 소리 나게 탁자 위에 올려놨다. 그만 하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그 의미를 모를 리 없는 정국이 눈썹을 찌푸렸다. 정국의 입이 다물어지는 것을 확인한 태형이 얕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머그컵을 쥐었다. 이제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밤을 새는 작업도 자제해야 될 듯싶었다. 오늘 약속 나가서 제대로 정신 차릴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태형이 벽에 걸린 시계를 흘긋 쳐다봤다. 슬슬 정국을 내보내고 약속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나 오늘 약속 있어. 술 먹고 싶으면 나중에 약속 잡고 와.”

누구랑요?”

윤기 형.”

?”

 


누구와의 약속이냐 물어보는 정국의 목소리에 대답해 주지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괜히 대화가 길어져 봐야 피곤할 것 같아 그냥 순순히 대답했더니 꽤 불만인 듯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형은 몸을 돌려 다시 싱크대 쪽으로 향했다. 애초에 잠을 깨려고 내린 커피였는데, 정국의 말에 잠이 전부 달아나 버렸으니 이제는 카페인이 필요 없었다. 그러나 약속이 있다는 태형의 말에도 정국은 일어나 나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실연의 슬픔에 잠긴 나보다 민윤기가 더 중요해요?”

.”

너무하다-”

 


윤기는 태형의 오래된 형으로, 정국과는 친한 형, 동생 사이였다. 애초에 태형과 윤기가 알게 된 계기가 정국의 영화를 함께 하게 된 것이었으니 오래되기로는 저보다 정국과 윤기의 사이가 더 오래 됐을 텐데, 그래서 그런지 정국은 윤기가 저보다 4살이나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심심찮게 윤기를 윤기 형이라는 호칭 대신 민윤기, 하고 불렀다. 윤기가 그 사실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나가, 빨리. 나 준비해야 돼.”

진짜 나 버리고 가려고?”

버리긴 누가. 그러기에 누가 멋대로 집에 쳐들어오래? 집에 나 없었으면 어쩌려고.”

그랬으면 이 집에서 혼자서 쓸쓸히 형 기다렸겠지.”

주인도 없는 집에 누가 함부로 들어와도 된댔는데?”

그런 말은 집 비밀번호나 바꾼 다음에 하지?”

정신이 없어서 그랬어. 조만간 진짜 바꿀 거야.”

“1년 동안?”

 


정곡을 찔린 태형이 입을 꾹 다물었다. 태형은 정국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정말로 몸을 돌려 싱크대에 컵을 집어넣었다. 이제 정국이 뭐라 하든 절대로 반응하지 않을 참이었다. 일일이 대꾸해 주다 보면 결국 끝에 가서 지는 것은 언제나 태형 자신이었으니까. 태형이 말없이 침실로 들어가자 정국이 그제서야 소파에서 일어나 태형을 졸졸 쫓아왔다.

 


사귀는 중은 아니고, 썸타는 중인가?”

…….”

민윤기와의 약속이 날 버리고 갈 정도로 소중한 약속이란 말이지.”

…….”

몸 정도 있는 나를 버리고.”

…….”

, 형이랑 자고 싶다.”

!!!!!!!!”

 


결국 듣다듣다 폭발한 태형이 고개를 휙 돌렸다. 너 진짜 안 나가냐? 주거 불법침입으로 고소해 버린다!! 태형이 소리를 지르자 정국이 고개를 으쓱했다. 그럼 다음 날 신문 헤드라인은 전정국의 비밀스러운 연인이겠네요. 신문 1면엔 내 얼굴이랑 형 얼굴이랑 나란히.

 


너 안 꺼져?!”

검색어 1위하겠다. 이번에 새로 들어갈 영화 홍보엔 좋겠네. 형 이번에도 내가 하는 영화 OST 맡았잖아요.”

욕실까지 따라 들어올 거냐고!”

, 들켰어요? 아깝다. 자연스러웠는데.”

 


너 진짜……. 태형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해졌고 정국은 그런 태형을 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태형은 그런 정국을 노려봤다. 이 상황에도 저 얼굴은 너무 멀끔하게 잘 생긴 완벽한 제 취향이라. 그게 너무 약올랐다. 태형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진짜 현관 비밀번호를 바꿔야겠어. 올해 안에만 벌써 50번은 넘게 한 다짐이었다.

 


그럼 내일. 나 저녁이랑 술 사주기. 그럼 오늘은 물러날게요.”

내가 왜!”

그럼 민윤기 약속 가기 전에 경찰서 들러서 나 신고하고 가든가.”

아오…….”

 


태형이 이를 갈았다. 정말이지. 더 이상 전정국과 엮이고 싶지 않은데, 정국은 제 뜻대로 움직여 줄 생각이 개미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태형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이 씩 웃었다. 씻고 나와요. 약속 장소까지 데려다 줄게요. 정국의 말에, 태형은 한숨을 쉬고 욕실 안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옷을 벗고, 샤워 부스 안으로 들어가 찬물을 맞으면서 태형은 제 자신이 한심해 눈을 감았다. 매번 같은 패턴인데도 어쩜 그렇게 매번 넘어가는지, 제가 생각해도 우스웠다.

 


바보냐, 김태형…….”

 


그러나 그건 어쩔 수가 없는 것이기도 했다. 태형에게 정국은 불가항력이었으며, 정국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그건 정국을 제외하면 아무도 함부로 들어오지 않을 작업실에 굳이 작업 중 팻말을 붙여 놓은 이유이기도 했고, 넓디넓은 집에 멀쩡한 더블 사이즈 침대를 놔두고 작업실에 놓여 있는 싱글 킹 침대에서 잠이 드는 것이 더 편한 이유이기도 했으며,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1년이 지나도록 현관문 비밀 번호를 다시 태형 혼자만 아는 것으로 바꾸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정국의 말이 태형에게 절대적인 이유는,

 


짜증나…….”

 


3년 전 태형이 처음으로 단독 OST를 맡은 영화이자 정국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의 뒤풀이에서 정국을 처음 마주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짝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누구를? 김태형이, 전정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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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포기 못 해요. 아니, 안 해요.’

나랑 어색해져도?’

.’

 

 

 

너 진짜후회 안 해? 태형이 고개를 숙이고 물었지만 앞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 안 해요. 결국 태형은 입술을 깨문다. 너 어떻게 그렇게 단칼에 딱 잘라 말 할 수가 있어? 차마 그 말은 하지 못 한 채로.

 

 

안 돼…….”

 

 

 

. 태형의 눈이 번뜩 뜨였다. 햇살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갑자기 눈으로 가득 들어찬 햇빛에 태형이 눈을 찌푸렸다. 꿈이었구나. 태형이 입모양으로 중얼거렸다. 다시 돌이켜 봐도 악몽인 꿈이다. 태형이 다시 눈을 감으며 살짝 옆으로 돌아누웠다. 조금만 더 잘래. 예기치 못하게 깨어 버린 단잠에, 태형이 막 다시 잠으로 빠져들려던 참이었다.

 

 

……?”

뭐야…….”

, 전정국?!”

 

 

 

무심코 뻗은 제 손에 잡히는, 익숙하지 않은 온기에 태형이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제 시야에 가득 차게 들어오는 것은 전정국의 잘생긴 얼굴이다. 태형이 헉, 하고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뭐지?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지? 그 전에야 전정국의 자취방에서든 제 자취방에서든 같이 눈을 뜨는 것은 놀랄 것도 없는 일상이었다지만, 그 사건 이후로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러니 꽤나 오랜만에 마주하는 눈 뜨자마자 보이는 전정국의 얼굴은 태형에게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형 깼어요?”

너 왜 여기,”

마마- 기침하실 시간이옵니다.”

 

 

 

아직 눈을 채 뜨지 못한 정국을 향해 태형이 의문의 말을 던지려던 그 때, 문 밖에서 저를 부르는 상궁의 목소리가 들렸고 태형은 그제서야 아, 하고 얕은 감탄을 뱉었다. , 여기 대한민국 아니지 참……. 나 타임슬립 했었지. 제가 생각하면서도 현실이 더 꿈같아 태형이 마른세수를 했다. 마마, 소인이 들어가도 되겠사옵니까. 평소와는 다르게 묘하게 설렘이 묻어 있는 상궁의 목소리에 태형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상궁의 설레발에는 그냥 적응해야 될 듯싶었다. 사실, 이렇게 정국이 대놓고 태형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이 상황에서, 상궁이 오해를 하지 않는 것이 더 부자연스러운 일일 거였다. 저였어도 제가 모시는 마마가 주상 전하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면 기쁘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까. 잠시 제 옷매무새를 살피고 정국을 흘긋 쳐다본 태형이 어, 괜찮아. 하고 중얼였다. 다행히도(?), 아니 당연하게도! 간밤에는 아무 일도 없었는지 태형은 속옷은 물론이고 소복에 치마, 당의까지 전부 갖춰 입고 있었다. 이렇게 불편한 옷을 입고 용케도 단잠을 잤네. 태형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상궁 둘이 조심스럽게 장지문을 열며 소리 없이 들어왔다.

 

 

, 주상 전하께오서 아직,”

원래 쟤

?”

주상께서는 잠에서 쉬이 깨지 않으신다.”

 

 

 

 

쟤 제대로 깨우려면 30분은 공들여야 한다, 고 말하려던 태형이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한 나라의 국왕에게 쟤라니. 상궁들이 들으면 기절할 테니까.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태형은 이내 저를 면밀히 살피고 있는 상궁들의 시선을 캐치했다. 상궁은 태형을 한 번, 아직 이불 속에 누워 있는 정국을 한 번 번갈아 쳐다보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태형이 고개를 들어 장지문 밖을 쳐다봤다. 역시나. 상궁 대여섯 명이 방 안쪽을 힐끔대다 태형과 눈이 마주치자 후다닥 장지문 밖으로 모습을 숨긴다. 태형이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 진짜…….

 

 

 

무슨 생각 하고 있는지 아는데,”

…….”

그거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어.”

 

 

 

그 말에 상궁은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에이 뭐야……. 입 밖으로 내지만 않았다 뿐이지, 온 몸과 얼굴로 표현하는 그 말에 태형은 비언어적 표현의 적나라함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어쨌든 그 솔직한 모습에, 태형이 뭐! !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이 한성왕후란 사람은 꽤 좋은 윗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이렇게 상궁들이 편히 대하며 진심으로 한성왕후가 잘 되기를 바라는 걸 보면. 왠지 모르게 뿌듯해지는 기분을 애써 물리치며 태형이 슬쩍 정국을 내려다봤다. 아까 형 깼어요?’ 한 것은 잠결에 한 말이었는지, 정국은 아직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태형이 얕게 한숨을 내쉰 후 정국을 살살 흔들었다.

 

 

 

일어나

…….”

시옵소서 즈은하…….”

 

 

 

지켜보고 있는 저 상궁만 아니었어도……. 태형이 이를 악물고 미소를 지으며 정국을 흔들었지만 역시나, 정국은 일어나지 않았다. 태형은 결국 정국을 꼬집기 위해 이불 밑으로 손을 넣었다. 원래 같았으면 야!! 일어나!! 하면서 세차게 흔들어 깨웠을 텐데. 여기서는 그러면 안 될 테니까. 태형이 정국을 꼬집기 위해 손을 정국의 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전정국 깨우는 데에는 팔 안쪽 여린 살을 꼬집는 게 직빵이지. 내적 미소를 지은 태형이 슬쩍 웃으며 정국의 살을 잡은 그 때였다.

 

 

 

아파…….”

.”

하지 마요…….”

 

 

 

정국의 살을 잡아 막 힘을 주려던 그 찰나에, 태형이 뭘 하려는지 잠결에도 깨달았는지, 정국이 그대로 태형의 손목을 잡아 태형을 끌어당겼다. 순간적으로 확 잡아당겨진 터라 어떻게 힘도 제대로 주지 못 한 채로 졸지에 정국의 위에 털푸덕 엎어진 태형은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정국은 그런 태형의 허리 위로 팔을 감아 토닥일 뿐이었다. 더 잘래요…….

 

 

 

아니, 이 미친…….”

……!”

졸려…….”

 

 

 

순서대로 태형의 읊조림, 상궁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정국의 목소리. 태형은 욕을 뱉을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태형은 입안이 바짝바짝 말라 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전정국이 태형이 형, 이라고 헛소리라도 하게 되면……. 태형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전하, 제발 일어나세요……. 하지만 태형의 간절한 속삭임에도 정국은 여전히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잠결이라 전하, 라는 호칭이 저를 부르는 것이라고 인식하지 못 하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태형의 허리에 감긴 정국의 손은 풀릴 줄을 몰랐다. 이 자식 이거 진짜 안 되겠네. 어디서 이런 이상한 잠버릇은 배워 온 거야? 태형은 힐끔 상궁들의 눈치를 봤다. 상궁들은 왕과 왕비의 모닝 애정 행각을 차마 대놓고는 보지 못 한 채 옷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지만 태형은 그 옷 위로 힐끔힐끔 보이는 매의 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결연함이 돋보이는 눈빛. 이 상황에서 전정국의 뺨을 때리거나 물리적인 힘을 쓸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가지뿐이지.

 

 

. 전정국…….”

 

 

 

태형은 몸에 힘을 주고 얼굴을 정국의 귓가에 갖다 댔다. 훤한 대낮에 이불 위에서 저와 정국이 지금 어떤 모양새를 하고 있는지는 머릿속까지 닿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 의식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붉어져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태형은 어금니를 물었다. 제발 좀 일어나라, 이 자식아…….

 

 

 

정국아…….”

…….”

제발 좀 일어나, !!”

 

 

 

 

상궁들의 귀에까지는 들리지 않게, 그러나 최대한 크게. 정국의 귓가에 다이렉트로 꽂히게끔 최대한 정국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소리친 태형이 입술을 떼며 정국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천만 다행히도 이름을 부른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정국은 초점 없는 눈동자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무슨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아니고 이게 뭐야! 입가에 경련이 이는 것 같았지만 태형은 저와 정국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궁들을 의식하여 정국을 향해 최대한 환하게 웃어 보였다. ....... 입모양으로 그렇게 말한 태형이 이번에는 제 손을 정국의 볼에 갖다 댔다. 힘겹게 뜨게 만든 눈이 다시 감길까봐 아예 못을 박아 두려는 거였다.

 

 

 

일어나셨습니까, 즈은하…….”

 

 

 

그러면서 태형은 정국의 볼을 감싸 안는 척 하며 손가락으로 정국의 볼을 세차게 꼬집었다. ! 정국이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린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태형이 ㅎ……

 

 

 

, 전하께서 기침하셨다! 사람을 부르거라. 곧 가신다 하니까!”

 

 

태형이 형, 이라는 소리가 나오기 전에 정국의 말을 가로막은 태형은 상궁들을 향해 눈짓을 했고 상궁들은 솟아오른 광대를 채 숨기지 못하며 예, 명 받잡겠사옵니다 마마, 하고는 물러갔다. 장지문이 닫히고, 태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대환장파티야. 정국은 여전히 제 위에 있는 태형이 믿기지 않는 듯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태형이 형 왜 여기꿈 아니었…….

 

 

 

정신 차려! 여기 대한민국 아니잖아!”

……?”

아오 진짜.”

 

 

 

태형이 눈을 세모나게 뜨며 정국의 볼을 잡아 늘렸다. 너 아침에 정신없어 하는 거 아는데, 지금 네 정신 챙겨줄 여력 없다. 혹시나 들렸을까 한 번 더 장지문 쪽을 쳐다본 태형이 어느새 힘이 풀린 정국의 팔을 풀고 정국의 위에서 내려왔다. 온 몸에 힘을 주고 있었더니 근육이 욱신거릴 정도였다. 한동안 멍한 얼굴을 하고 있던 정국은 정신이 들었는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태형은 흐트러진 제 옷매무새를 다시 가다듬었다. 한복의 자도 모르는 태형이라 별 의미는 없었지만.

 

 

 

꿈인 줄 알았어요.”

, 나도 꿈이었으면 좋겠는데 아니야. 사람 불렀으니까 정신 차려.”

근데 형 뭐해요.”

 

 

 

 

태형은 간밤에 풀려 버린 제 옷고름을 다시 매는 데에 열중이었다. 이대로 있자니 꼴도 사나웠고, 가만히 있으면 상궁이 매어 주겠지만 상궁의 손에 몸을 맡기는 것이 영 꺼림칙했던 탓이었다. 무엇보다도, 괜히 흐트러진 한복이 이상한 기분을 들게 한 것이 가장 컸다.

그러나 21세기에서 태어나 21세기의 삶을 살아 온 태형이 한복의 옷고름을 제대로 맬 줄 알 리가 만무했으므로 그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한복을 입어 본 경험이라곤 유치원 때 생일파티를 했던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심지어 그 때도 옷고름은 엄마가 매어 줬었고. 태형이 옷고름을 붙잡고 낑낑거리고 있자 정신을 차리려는 듯 마른세수를 하던 정국이 이리 봐요. 하고는 태형의 가까이로 붙어 앉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태형은 정국의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제 바로 앞에 있는 정국에 혀를 깨물 뻔 했고. 아니, 얘는 무슨 말 좀 하고 가까이 오지!

 

 

 

 

이렇게 하는 거예요.”

 

 

 

 

태형이 놀란 제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는 사이 어느새 깔끔하게 태형의 옷고름을 매어준 정국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태형은 그 말에 제 옷고름을 내려다보고는 작게 감탄했다. , 뭐야? 얘 손끝이 왜 이렇게 야무져? 아니, 것보다 여자 옷고름 매는 방법은 어디서 배운 거야……. 상궁이 매어준 것만큼 깔끔하고 단정하게 매인 옷고름에 태형이 괜히 제 가슴팍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정국이 여전히 제대로 동그랗게 뜨지 못한 눈을 비비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정도는 배워 놔요.”

…….”

맨날 내가 매 줄 수는 없잖아요.”

 

 

 

 

뭐래! 간신히 진정시켰던 심장 박동이 무색하게 태형의 얼굴이 다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저번부터 느꼈던 건데, 전정국은 이상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데에 소질이 있었다. 그게 무슨 신혼부부 넥타이 매 주는 아내 같은 소리냐고. 태형이 돼, 됐거든! 하고 응수했고 그에 정국이 뭐라 입을 열려던 차에 장지문 바깥에서 전하, 기침하셨습니까.’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국은 마지막으로 기지개를 크게 핀 후에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 또 피곤한 하루 시작이네. 정국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귀에 꽂혔다.

 

 

 

…….”

 

 

 

그러고 보니, 왕비의 일과란 별 것 없어서(원래는 내명부를 다스려야 하지만 희한하게도 이 왕은 부인이 아직 두명뿐이어서 딱히 할 것이 없었다) 귀찮을 일은 그다지 없었는데, 왕의 일과는 좀 다르려나. 태형은 피곤한 얼굴로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정국을 멍하니 쳐다봤다. 자신이야 여자 한복을 입고 있어야 한다는 것만 빼면 나름 평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데, 정국은 팔자에도 없는 왕 노릇을 해야 하니 얼마나 정신없을까 싶었다. 마냥 부러울 일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태형이 입맛을 다셨다. 여럿도 아니고 단 둘만 조선에 떨어지니 괜히 애틋함과 동지애가 생기는 것 같았다. 원래는 친한 사이이기도 했고. 선배로서 후배한테 뭔가 도움이 되어 줘야 할 것 같고……. 잠시 눈알을 굴린 태형이 결국 마악 발걸음을 떼려는 정국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하루도 힘내고!”

……?”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 해!”

 

 

 

 

태형의 목소리에, 정국이 사뭇 놀란 눈으로 태형을 쳐다봤고 그 눈에 태형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 지금 무슨 소릴 한 거지? 무슨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덕담을 한 거야? 태형은 제 얼굴이 파라락 불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국이 하도 친근하게 굴어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저와 정국의 관계는 이렇게 덕담을 주고받을 만 한 관계도 아니었다. 아마 정국도 그래서 저렇게 의아한 눈을 하고 있는 거겠지. 태형은 민망함에 눈을 깜박였다. 정국의 시선과 태형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괜히 나댔다. 쪽팔려!!

정국의 시선을 피하지도,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 한 채로 태형은 그대로 굳어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이 상황을 무마해야 하지? 뭐라고 둘러대지? 아니 근데 이게 뭐 둘러댈 상황이야? 그냥 선배로서 덕담 좀 해 주면 안 되는 건가? 아무리 우리 사이가 나빠졌기로서니…….

 

 

 

 

알겠어요.”

?”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라면서요. 그러겠다구요.”

, …….”

방금 놀란 건, 형한테 그런 말 들은 게 되게 오랜만 같아서.”

 

 

 

 

정국이 조곤히 말을 이었다. 오해하고 있는 건 귀신같이 또 어떻게 알았대. 태형은 괜히 심장이 간질거려 입을 다물었다. , 그래서 놀란 표정 지은 거였구나. 난 또……. 괜히 정국을 탓하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태형은 어색하게 웃었다.

 

 

 

 

.”

?”

아니에요. 고맙다고요.”

 

 

 

 

방금 전정국이 뭐라 한 것 같았는데. 태형이 어? 하고 눈을 크게 뜨자 정국이 고개를 저었다. , 이제 진짜 가야겠다. 형도 오늘 하루 힘내요. 사이좋게 덕담을 주고받은 태형과 정국이 손을 흔들었다. 영락없는 부부의 모양새였으나 정작 둘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짜로 나가려는 듯, 정국이 발걸음을 옮겼고 태형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쉬운 게 없다, 정말. 그리고 그 때, 막 장지문을 열고 나가려던 정국이 순간 멈춰 서 태형을 돌아봤다그리고 그 이후 정국이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문장은,

 

 

 

 

아 맞다.”

…….”

우리 합궁일 정해졌대요.”

 

 

 

 

모처럼 기분 좋게 시작한 태형의 하루를 똥간에 처박기에 완벽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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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부만 써 놓은 게 세갠가 네갠가..ㅠㅠ

완결 못 내는 병이 있어서....ㅠㅅㅠ....

그래서 괜히 해 보는 변명...
조선 로맨스는 천천히 시트콤처럼 흘러갈 거구
Lost Stigma는 쓰는 데 생각을 많이ㅋㅋ... 해야 하는 거라 텀이 느릴 것 같습니다. 그래도 꼭 보고싶은 장면이 있어서 제발 거기까지 닿을 수 있기를..ㅠㅅㅠ..

그거외엔... 연재 또 시작하면 안 되겠지...ㅠㅠ


그나저나 정국이랑 태형이 진짜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잘생겼다.... 볼때마다 감탄해..ㅠㅅ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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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너 괜찮겠냐.”

뭐가요?”

그냥한 희빈한테 그렇게 막 대하는 거.”

 

이미 머리를 탈출해 자유를 찾은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교태전 안으로 들어와 방 안에 앉은 태형은 잠시 넋을 놓고 천장을 쳐다보다가 정국에게 말했다. 그러나 막상 사고를 친 정국은 천하태평이었다. 형 방 좋네요. 내 방이랑은 되게 다르다. 여자 방이라 그런가.

 

말 돌리지 말고. 이거 진짜 괜찮은 거냐고.”

그게 왜요?”

아니…….”

하루아침에 태도 바뀌었다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요?”

 

아니 뭐 그것도 있고. 태형은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냥 대충 오늘은 중전과 할 말이 있다고, 가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굳이 그렇게 커퀴벌레 같은 모양새를 만천하에 보여줄 필요가 있었던 건가그것도 아무리 본인은 아니라지만 유라를 닮은 총애받던 후궁의 앞에서. 태형은 괜히 바닥을 문질렀다. 차마 너 왜 이렇게 나한테 다정하게 굴어? 하고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는 탓이었다.

 

설마 얼굴까지 똑같은 왕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고 사람들이 상상이나 하겠어요?”

…….”

그냥 갑자기 마음이 바뀌셨나보다, 하겠지.”

 

그건 그런데…….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간단하고 단순한 정국의 말에 더 이상 뭐라 물어볼 말이 없었다. 내가 너무 쓸데없이 생각이 많은 건가. 태형이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확실히, 정국의 처지가 저보다는 나은 것 같긴 했다. 옷을 벗긴대도 정국은 거리낄 것이 없으니까. 그치만 나는……. 태형이 제 판판한 가슴팍을 내려다봤다. 들키면 그날로 엿 되는 거다. 태형이 괜히 옷을 꽁꽁 싸맸다.

 

왜 그렇게 몸을 웅크리고 있어요? 추워요?”

…….”

 

결국 묻고 싶었던 것은 묻지 못하고 얼마나 말없이 그러고 있었을까, 정국이 먼저 말문을 텄다. 그러나 태형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제 몸을 조금 더 뒤로 물렸다. 아니 그럼 정말 넌 아무렇지도 않아? 오히려 태형은 정국에게 묻고 싶었다. 태형은 지금 이 상황이 어색해 미칠 것 같았으니까. 왜냐하면, 그렇게 그런 거 아니라고, 그냥 대화만 하는 거라고 말했는데도 태형의 말을 귓등으로 들은 상궁들이 담백했던 교태전 안을 어딘가 묘한 분위기로 바꿔 놓았기 때문에.

화려하게 장식된 나비와 꽃 모양의 촛대, 그 위에 올려진 일렁이는 촛불. 금실로 수놓아진 폭신한 한 쌍의 침구. 어느새 어둑해진 바깥, 아무도 없는 건지 아니면 없는 척을 하는 건지 숨죽은 듯 조용한 주위. 방 안에 남겨진 단 둘. 태형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어디선가 봤던 조선 시대 신방과 똑같았다. 단 둘이 있었던 게 처음도 아닌데, 왜 이리 기분이 이상한지. 분위기라는 게 참 큰 역할을 한다 싶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멀찍이 떨어져 있어요?”

아니…….”

누가 잡아먹어요?”

잡아!!”

 

먹기는 무슨!!!!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정국의 말에 태형이 펄쩍 뛰었다. , 잡아먹다니! 잡아먹다니! 누가 누굴! 호랑이가 토끼를? 사람이 닭을? 얘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태형이 놀라 커다래진 눈으로 정국을 쳐다보자 정국이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놀라요.”

…….”

누가 보면 내가 진짜 형 잡아먹는 줄 알겠네.”

아니, 그 잡아먹는다는 표현 좀…….”

 

태형이 말끝을 흐렸다. 태형은 지금 제 처지도 처지지만, 정국의 태도 때문에 더 혼란스러웠다. 여기 있는 전정국은 태형이 알던 그 전정국이 아닌 것 같았다. 뭐랄까, 조금 더 직설적이라고 해야 할까, 거리낌이 없어졌다고 해야 할까. 내가 알던 전정국은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태형이 알던 전정국이란 의사 표현이 그다지 많지 않고 태형이 먹자는 대로, 가자는 대로, 하자는 대로 순하게 웃으며 따르던 후배였다. 말하자면, 뭐가 좋아? 하고 물으면 다 좋아요. 하고 화사하게 웃는 토끼 같은 애였달까. 그런데 뭔가 지금의 전정국은

 

형이 지금 딱 잡아먹히기 직전에 몰린 것처럼 웅크려 있으니까 그렇죠.”

 

늑대 같다. 그것도 먹잇감을 한입에 집어삼키기 위해 기회만 엿보고 있는. 태형이 꿀꺽 침을 삼켰다. 왜 갑자기 이렇게 분위기가 바뀌어 버린 건지 태형은 알 턱이 없었다. 낯가림이 끝난 건가? 아니, 2년 동안 그렇게 붙어 다녔는데도 낯을 가리고 있었던 거야? 아님, 어차피 유라 때문에 사이가 틀어졌으니 막 나가겠다, 이건가? 태형은 도로록 눈알을 굴렸다. 그렇게 붙어 다녔다지만 유라 일이 있고 난 후에는 인사도 제대로 안 하는 사이가 됐으니, 사실 말이 아주 안 되는 가설은 아니긴 했다. 진짜 볼 장 다 봤다 이건가괜히 서운해진 태형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또 무슨 생각해요? 혼자.”

, 아니…….”

“?”

그냥너 성격이 뭔가 내가 알던 성격이랑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서?”

 

우물쭈물하던 태형이 정국의 얼굴은 차마 쳐다보지도 못 한 채로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가뜩이나 여기 떨어진 후로 외롭고 서러운 일이 많은데, 같이 떨어져서 알게 모르게 위안이 됐던 정국까지 제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으니 더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나 혼자 그냥 뚝 낙오된 기분이랄까. 아니 사실 낙오된 건 맞는데……. 태형이 바닥을 좀 더 세게 문질렀다. 어째 되게 나보다 어린 애한테 투정부리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됐네. 그러나 민망함을 무릅쓰고 말을 꺼낸 태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국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 진짜 어이없었나 보다. 이 와중에 이런 투정이나 부리고. 잠시 정국의 대답을 기다리던 태형은 민망해져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아하하. 아니야, 그냥 해 본 말

그냥,”

…….”

별로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돼서요.”

 

뭐가? 정국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대답에 태형이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소용이 없었다는 걸 알게 돼서? 뭐가 소용이 없는데? 정국의 말엔 주어가 없었다. 태형이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태형이 주어를 궁금해하거나 말거나, 말을 마친 정국은 몸을 일으켜 태형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정국을 올려다봤다. , 뭐야?

 

형이 이쪽으론 안 올 것 같아서.”

…….”

거리가 너무 멀잖아요.”

 

그러더니 제 눈앞에 털썩 주저앉는다. 등 뒤엔 경첩, 코앞엔 전정국으로 앞뒤가 막혀 버린 태형이 꿀꺽, 침을 삼켰다. 차마 가까이 오지 말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대화 하자는 건데. 대화하기엔 너무 머니까 가까이 온 걸 텐데. 괜히 유난을 피우는 게 더 이상한 것 같아서. 아니 그런데 그냥 대화하는데 이렇게까지 가까울 필요가 있나그냥 조금 거리를 두고 있으면 안 되나……. 심장이 이유 없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뭐, 이렇게 가까이 앉았던 일이 처음은 아닌데, 왜 이렇게 의식이 되는 건지 진짜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 !”

 

차마 정국의 눈은 못 보겠어서, 정국의 목울대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태형이 갑자기 들린 정국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정국이 그 동그란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급 더워지는 것 같았다. 얼굴이 빨개졌을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게 더 이상한데!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국은 그런 태형의 상태를 눈치 채지 못한 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 왜 오게 됐는지, 형은 뭐 잡히는 거 없어요?”

…….”

?”

 

, ! 태형이 잡생각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잘게 떨었다. 집중하자, 김태형! 괜히 홧홧 달아오르는 얼굴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태형이 제 볼을 가볍게 쳤다.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정신 차려!

 

전혀 없어. 너는?”

…….”

있어?”

저는 버스에서 잠들어 있다가 여기로 오게 됐다니까요.”

 

아 맞다 그랬지. 태형이 멍하니 중얼였다. 정국이 어깨를 으쓱였다. 형은 자취방에서 낮잠 자다가 끌려왔다고 했고. 저는 버스에서 자다가 여기 왔고. 그럼 잠을 계속 자야 하나? 멍하니 중얼거리는 정국에 태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왠지 아닐 것 같은데.

 

그렇게 쉽게?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여기 오게 된 걸 텐데.”

그런가.”

게다가 우리 이미 한 번 잤잖아.”

…….”

, ?”

 

갑자기 말없이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정국에 태형이 말을 더듬었다. 갑자기 뭔가 또 눈빛이 달라졌다. 아직 채 진정되지 않았던 심장이 다시 박동을 빨리 하려는 것 같았다. 태형은 2n년간 함께 했던 제 심장이 이렇게 워커홀릭이었는지 오늘 처음 알고 있는 중이었다. 도대체가 쉴 틈 없이 필요 이상으로 열일한다. 좀 쉬엄 쉬엄 해도 될 텐데.

 

아니에요. 형 말이 맞네요. 이미 여기서 하룻밤 지났죠.”

! ! , 맞아. 아까 한 희빈 봤지? 진짜 유라 닮지 않았어?”

닮았더라고요.”

그런데 유라는 아니야. 그 사람은 한 희빈이야. 그건 그럼 왜 그런 걸까? 그럼 다른 사람들도 또 닮은 사람들이 있을까?”

…….”

우리 말고 또 떨어진 사람이 있는 건가?”

그건 아닐 것 같아요.”

 

제 딴에는 나름 가능성 있는 가설을 제시한 거였는데, 제가 말을 꺼내자마자 딱 아니라고 단칼에 자르는 정국에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러자 정국이 음, 하고 말을 늘렸다. 태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뭐 아는 거 있어?”

아뇨. 그냥. 왠지. 원래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봐도, 여러 명이 타임슬립을 하진 않잖아요. 끽해야 두 명 아닌가?”

그런가.”

 

역시, 전정국도 별 거 없네. 결국 드라마나 영화를 기반으로 한 추리였다. 하긴, 쟤라고 뭐 별 수 있겠나. 버스에서 잠들었다가 끌려왔다는데. 태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잡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단서라든가, 특별한 점이라든가. 태형이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 해야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갈 수는 있는 걸까. 눈앞이 깜깜했다.

 

사실 그런 생각도 해 보긴 했거든.”

뭘요?”

아니그게…….”

 

태형이 고개를 숙였다. 차마 제 입으로 말을 꺼내기가 참 뭐했다. 기나긴 밤 동안, 태형도 생각이란 걸 해 봤었다. 제가 처음 여기 떨어진 후부터 지금까지 쭉. 그러다 보니 문득 뭔가 떠오르는 게 하나 있긴 했다. 제가 이곳으로 떨어지고 난 후, 제일 처음 들었던 말. 그러나 태형은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게, 그러니까, 진짜.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

 

……. 혹시 왕이랑 중전의 사이가 좋아져야 하는 그런 건가…….”

……?”

아니!! 아니!! 그니까!! 내가 여기 와서 제일 처음 들은 말이 그거였거든! 원자 아기씨를 회임해야 한다고!!”

…….”

아니, 그렇잖아! 원래 막, ? , 왕이랑 왕비랑, 이렇게, 사이가 좋아야 좋은 거잖아! 후궁 말고! 정실 부인이랑 막, 금슬이 좋아야, 가정이 평화롭고 사회가 평화롭고 나라가 평화롭고! 백성들이 행복하고! ! 왕실 싸움 같은 거 안 일어나고!”

 

막 후궁이 기가 세가지고 막, 그러면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그런 거잖아!! 장희빈! ?! !!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태형이 아무 말이나 뱉기 시작했다. , 괜히 말했어! 그냥 말 하지 말걸. 혹시나 해서 꺼냈던 건데, 역시 이건 아니겠지!? 태형이 정국의 얼굴은 채 바라보지도 못한 채 어색하게 웃었다. 미쳤다, 김태형. 어쩌자고 그런 말을 꺼냈냐!!! 태형이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고 있을 동안에도 정국은 아무 말이 없었다. 태형은 속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 진짜, 시간을 딱 3분만 돌리고 싶다…….

 

, 역시 아니겠지? 하하. 그래. 그렇겠지. 나는 여자가 아니니까 임신도 못 하고. 그냥 해 본 말이야! 아하하!”

진짜 그건가?”

?”

 

어떻게든 이 사태를 수습하려 과장되게 파하하 웃으며 정국의 어깨를 토닥이려던 태형의 몸짓이 순간 멎었다. 갑자기 제 코앞으로 얼굴을 슥 드민 정국 때문이었다. , 미친. 너무 가까워……. 태형은 아무 말도 못하고 굳어 눈을 깜박였다. 누가 뒤에서 톡, 하고 밀면 바로 입이 맞닿을 거리였다. 심장이 순간 멈췄다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 , 뭐야!!

 

…….”

…….”

농담이에요, .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요.”

 

새하얘진 머릿속에 태형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시선은 정국에게 고정한 채로 눈만 깜박인지 얼마나 지났을까. 픽 웃은 정국이 태형의 얼굴에 닿을락, 말락 하던 제 얼굴을 다시 천천히 물리며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태형은 그제서야 푸하, 하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심장은 아직까지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

…….”

뭐야, 진짜 놀랐어요?”

 

그래 이 개자식아……. 온 몸에 힘이 풀린 태형이 제 뒤의 경첩에 툭 하고 등을 기댔다. 서 있었으면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대로 주저앉았을 거였다. 얼굴이 더 이상 뜨거워질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져 있었다. 미친. 태형은 제 심장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 지금 박동 수 재면 300도 넘을 거 같아. 태형은 멍하니 언젠가 봤던 예능 속의 심장박동을 재는 기계를 떠올렸다. 이게 예능이었다면……. 정말 평생 박제감이었으리라. 허구헌날 붙어 다녔던 후배놈이 얼굴 좀 들이밀었다고 이렇게 빨리 뛰는 심장이라니.

 

진짜 그건가?”

!!!!!!!!!”

, , 정신 차렸어요?”

이게 진짜 날 갖고 노네!!!!!”

 

정국의 낮은 중얼거림에 태형이 벌떡 일어나서 빽 소리를 질렀다. 정신을 차린 태형에 정국이 방긋 웃었다. 형 얼굴 진짜 빨개요. 그렇게 놀랐어요? 자신은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겠는데, 너무나도 멀쩡해 보이는 정국에 태형은 약이 올라 죽을 것 같았다. 저 새끼 저거 완전 선수잖아!! 유라야!! 속으면 안 돼!!!! 태형은 내적 고함을 질렀다. 김태형!!! 너도 정신 차려!!!!

 

너 저번부터 진짜, 나 그만 갖고 놀아라!!”

제가 언제 형을 갖고 놀았어요?”

?”

 

정국이 태형을 올려다보며 태연한 얼굴로 말했고 태형은 어이가 없어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너 그걸 몰라서 물어?? 태형이 어이가 털린 얼굴로 묻자 정국이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도 가지고 뭐.

 

너 대박이다…….”

뭐가요.”

, 말을 말자.”

형 말이 진짜일지도 몰라서 그랬던 건데.”

 

온 몸에 힘이 풀린 태형이 제 옆에 깔린 이불에 머리를 대고 털썩 누웠다. 짧은 시간 동안 온 기력을 전부 전정국에게 뺏긴 기분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국은 그런 태형을 쳐다보며 조용히 중얼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 정국의 그 말에, 태형이 픽 웃었다.

 

진짜 그거면, . 어쩌게.”

, 필요하다면 하는 거죠.”

얘 진짜 위험한 애네.”

 

태형이 놀란 눈으로 반쯤 고개를 들어 정국과 시선을 맞췄다. 내가 널 그렇게 키웠어?! 너 그렇게 문란한 애였니!? 태형이 입을 뻐끔거리자 정국이 아, 뭐래요. 하고 입을 삐쭉였다.

 

뭐긴 뭐야! 난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어!!”

누가 누굴 키워요.”

아무튼 그건 아닐 거야. 남자가 임신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

타입슬립하는 건 말이 되고요?”

.”

 

끔찍한 소리 하지 마. 경악한 표정으로 정국을 보며, 태형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현대로 돌아가고 싶다지만, 그렇다고 이 나이에, 남자의 몸으로, 조선에서. 임신을 하고 싶은 마음은 개미 코딱지만큼도 없었다. 임신이 될 리도 없겠지만 아무튼!!

 

어쨌든 뭐, 임신은 답이 아닐 거 같긴 해요. 임신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리고 그럴 거였으면 형이 여자의 몸으로 왔다든가 했겠지.”

, 너 끔찍한 소리 좀…….”

근데 형이 누나 아니랬으니까.”

 

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태형의 말이 길게 늘어졌다. 갑자기 풀린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따뜻한 바닥과 푹신한 침구 때문인지,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눈이 깜박깜박 감기기 시작했다. 태형은 손을 들어 눈가를 비볐다. , 뭔가 더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얻은 게 없는데…….

 

아직 여기 떨어진 지 하루밖에 안 지났잖아요. 조금 더 있다 보면 뭔가 단서가 보일

…….”

형 자요?”

…….”

 

태형이 거의 감긴 눈으로 꾸물꾸물 움직였다. 머리만 푹신하고 몸은 그대로 바닥에 있는 채라 등이 배길 텐데도 그 불편함이 태형의 수마를 물리치진 못했다. 태형은 빠르게 RAM 수면 상태로 접어들고 있었다. 정국이 허, 하고 웃었다. 뭐야, 이 형…….

 

. 올라와서 자요.”

…….”

…….”

 

그러나 정국의 말이 태형의 의식 속에 박히기도 전에, 태형의 뇌는 이미 수면 상태로 접어든 후였다. 결국 얕은 한숨을 내쉰 정국이 읏차, 하고 일어나 태형을 살짝 끌어 이불 위로 올려놨다. 뭐 이렇게 빨리 잠들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랑 대화하고 있었으면서.

 

이러고 있으니까 꼭 옛날 같네.”

 

그러고 보면, 개총이든, 회식이든, 단 둘이 술을 먹은 날이든. 술을 먹은 날이면 태형은 항상 이렇게 대화하다가도 곧바로 잠에 들곤 했었다. 그럼 잠든 태형을 업어다가 제 자취방에 누이는 것은 항상 제 몫이었고. 문득 떠오른 옛날 생각에 정국이 픽 웃었다. 어느새 깊게 잠든 태형이 새근새근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잘 자요, .”

 

태형의 가슴께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 준 정국이 이불을 살짝 토닥이며 말했다. 조선에서의 두 번째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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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마마, 감축드리옵니다!”

감축드리옵니다!!”

어어어???”

 

정국이 먼저 경회루에서 내려가고,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후 천천히 경회루에서 내려와 멀찍이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궁녀 무리에게 다가간 태형은 제가 가까이 다가서자 눈을 빛내며 자신을 환대하는 분위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형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상궁 하나가 살짝 나서며 감격에 찬 얼굴로 태형을 올려다봤다.

 

소녀는 믿고 있었사옵니다. 언젠가 전하께서 마마의 진심을 알아주실 것이란 것을요.”

?”

이제 다 되었습니다. 이제 마마께서 튼튼한 원자 아기씨만 회임하시게 되면 한 희빈 따위는!”

, 잠깐만!”

 

태형이 황급히 상궁의 말을 가로막았다. 손까지 모아 쥐고 환희에 차 말을 하던 상궁의 말이 멎었다. 태형은 새빨개진 얼굴을 어쩌지도 못 한 채로 손을 휘저으며 말을 더듬었다.

 

,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잠깐 대화한 거,”

분위기가 더없이 화사하셨습니다. 두 분께서 가까이 붙으시어

그건 내가 넘어질까봐 잡아준 것뿐이고,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태형이 손을 휘젓자 그래도 그게 어디야라고 눈으로 말하고 있는 듯 한 상궁은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머리 위에는 밝은 오오라가 계속해서 남겨진 채였다. 사실, 이렇게까지 극구 부인할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 같은데. 설사 그게 진짜 왕이 아니라 해도 어쨌든 이 사람들이 보기에 자신이 모시는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는 건 좋을 테니까. 그러나 어쩐지 얼굴이 홧홧하고 부끄러워져서 태형은 저도 모르게 완강하게 부인하고야 말았던 거였다. 이래서야 내일 밤에 교태전으로 정국이가 오기로 했다는 말을 어떻게 꺼내지. 또 분명 되게 김칫국 마실 것 같은데. 태형이 볼을 긁었다. 어쩐지 일이 꼬인 느낌이었다.

 

뭐 좀 물어봐도 될까?”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태형은 교태전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물었다. 상궁이 조금 더 고개를 숙이며 하문하시지요, 하고 대답했다. 잠시 눈을 도로록 굴린 태형이 입을 열었다.

 

평소에 정전하께서는 한 희빈을 얼마나 자주 찾으셨어?”

한 희빈…….”

 

자신이 이 조선시대로 떨어지기 전에 왕이 한 희빈을 얼마나 찾았든, 한 희빈은 유라가 아니고 왕은 정국이 아니었으니 제가 상관할 바가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궁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왕의 총애를 믿고 그렇게 오만방자할 정도였으면 엄청 자주 들락거렸나? 그러나, 교태전에 들어섰음에도 혹여 누가 들을까 주위를 살피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연 상궁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달에 한 번 정도 찾으셨습니다.”

달에 한 번?”

.”

한 달에 한 번?”

그러하옵니다.”

 

그런데 한 달에 한 번이라니. 태형은 저절로 벌어지는 입을 다물며 당황한 것을 숨기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한 달에 한 번? 총애 받는 후궁이라기엔 턱없이 부족해 보이는 횟수였다. 부부관계를 한 달에 한 번밖에 하지 않았다는 소린가? 아님 밤에 하는 게 취향이 아니라 낮에 어딘가 다른 곳에서 한아니, 궁궐에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 그나저나 그럼 이 한성왕후란 사람은 그보다도 더 적게 왕을 만났단 소리면, 거의 독수공방 수준이었단 소린데. 도대체 이 왕이란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었던 거지? 태형의 생각이 끝도 없이 가지를 쳐 가며 뻗어가는 와중, 상궁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러니 더더욱 기가 찬 것이지요, 마마. 전하께서 한 달에 한 번밖에 찾지 않는 주제.”

, 난 괜찮으니 계속 말해.”

! 무튼, 전하께서 따로 찾는 후궁이 없으시고, 그나마 찾으시는 후궁이 한 희빈이니 총애 받는다 하긴 하지만, 사실 총애 받는다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지요.”

…….”

 

태형은 교태전 안에 도착해 제 겉옷을 벗기는 상궁의 말을 귀담아 들으며 머리를 굴렸다. 확실히, 달에 한 번은 총애 받는 후궁이라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왕의 일과가 그렇게 바쁜 건가? 아님 성욕이 없는 거? 그것도 아니면 혹시 왕이 게이라거나태형의 생각의 가지가 무성해지고 있을 때, 상궁이 그런 태형의 생각을 다시 멈추게 했다.

 

소녀의 짧은 소견으론 말입니다, 마마.”

, !”

한 희빈의 아비가 조선 제일의 세도가이지 않습니까.”

, 그렇지.”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아무래도 전하께서 그 때문에 내키지 않음에도 한 희빈을 찾으시는 건 아닐까 합니다.”

 

. 태형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생각보다 쉽게 풀린 의문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왕도 희빈이 좋아서 찾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지.

태형이 이토록 희빈과 왕, 그리고 한성왕후의 관계를 궁금해 하는 것은 비단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혹시 정국과 제가 조선시대로 나란히 떨어진 이유가, 왕과 왕비의 좋지 않은 사이와 관련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했던 정국의 말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일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좋지 않은 왕과 왕비의 관계, 좋지 않은 정국과 저의 관계. 그것도 현대에서는 유라 때문에, 조선시대에선 한 희빈때문은 아닌가? 아무튼. 무언가의 이유 때문에. 단서라곤 하나도 없으니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

 

그런데, 그렇게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던 태형은 문득 잔뜩 무거운 한복에 짓눌렸던 제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새 제 몸에 걸친 옷이 얇디얇은 소복뿐이라는 것도. 그리고 계속 저와 대화를 나누던 상궁의 팔에,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한복이 걸쳐져 있다는 것

 

, , , 잠깐만!!”

?”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마마?”

 

너무 당황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존댓말까지 쓴 태형의 목소리에, 자연스럽게 태형의 옷을 벗기던 상궁의 얼굴이 의아해졌다. 태형은 어느새 두 팔로 제 가슴을 감싸고 상궁으로부터 멀어진 후였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벗기고 있는 줄도 몰랐다. 큰일 날 뻔 했네! 절대 제 몸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형에, 당황한 것은 상궁이었다. 갑자기 왜 저래…….

 

산보를 다녀오셨으니 환복(換服)하셔야지요, 마마.”

, 어디까지 벗기려고!”

그야 당연히 속곳까지

, !”

 

태형이 질겁을 했다. 속곳이라니! 속옷이라니! 절대로 안 될 말이었다. 그랬다가는 제가 남자라는 것이 만천하에 알려질 터였다. 미쳤다고 그걸 눈뜨고 볼 수야 없지. 태형이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돌아라, 김태형의 두뇌!

 

주상 전하를 만나고 왔더니 몹시 피곤하구나! 오늘은 일찍 잠에 들어야겠으니 이대로 입고 자겠다!”

그래도…….”

, 그거 잠시 다녀왔다고 그렇게 바로 옷을 바꿔 입으면 낭비 아니겠느냐! 이것도 모두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난 괜찮다!”

마마…….”

 

아무 핑계나 되는 대로 주워섬긴 태형이 말을 마치고 상궁의 눈치를 봤다. 그런데 아무렇게나 뱉은 그 말이 놀랍게도 통한 것인지, 태형을 보는 상궁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져 있었다. 태형이 꿀꺽, 침을 삼켰다. 마마소인의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제가 마마의 하해와 같은 깊은 뜻을 모르고……. 그리고 이어진 상궁의 말에 태형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 그래. 백성들을 위하는 국모가 되어야지.

 

그럼 침구를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그래…….”

 

좀 자자. 잠이 필요하다. 의도치 않게 백성을 제 몸처럼 아끼는 참된 국모가 된 태형이 지친 목소리로 중얼였다.

 

*

 

마마!!!!”

, 괜찮다고!!!!!”

아니되옵니다!!! 어서 이리 오시옵소서!!!!”

 

그러니까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이냐면, 사건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조선으로 떨어진 후 길디길었던 첫 날이 무사히(?) 지나가고, 오전의 일과까지 무사히 마친 태형은 슬쩍 상궁의 눈치를 봤다. 정국이 이따 저녁에 오기로 했다고, 말을 하긴 해야 할 텐데, 아직까지도 그 타이밍을 잡지 못한 거였다. 점심 먹기 전에 해야지, 점심 먹은 후에 해야지. 자신을 바라보는 그 환희 서린 눈빛이 부담스러워 계속해서 미루기만 하던 태형은 결국 저녁까지 알뜰히 챙겨 먹은 후 일찌감치 침구를 준비할까요? 하고 묻는 상궁의 눈치를 보며 어렵사리 운을 떼었다. 그러니까, 오늘 주상 전하께서 오시기로 하셨

 

아니, 마마! 그걸 왜!’

 

그러나 태형의 말을 채 끝맺어지기도 전에, 태형의 말은 상궁의 놀란 목소리에 의해 가로막혔다. ‘마마!’ 하고 감동 어린 눈빛으로 저를 쳐다볼 줄 알았던 태형은 상궁의 예상외의 태도에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 상궁의 눈은 뭐랄까다급함? 경악? 그런 것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 왜 저러지? 좋은 거 아닌가? 태형은 어리둥절했다. 상궁의 태도가 너무나도 초조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 후, 태형은 그 이유를 알게 됨과 동시에 상궁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마마!!!! 목욕물을 받아 놓았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아니, 아니, 그런 것 때문에 오는 게 아니라니까!”

마마!!!!!!! 지금부터 준비하여도 늦었사옵니다! 전하께 항상 향기롭고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드려야지요!!!”

괜찮아!!!!”

마마!!!!!!!!!!!”

 

잠깐의 침묵 후에 벌떡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간 상궁은, 태형이 채 이유를 물어보기도 전에 다시 장지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대여섯 명의 상궁들과 함께. 태형은 문을 박차고 들어온 그 상궁들을 멍하니 쳐다봤다. 뭐야? 이 분위기? 그리고 잠시 후, 태형은 다짜고짜 저를 욕탕으로 데려가 옷을 벗기려 드는 여자들을 피해 도망쳐 다니고 있는 것이다.

 

마마, 분칠도 해야 하고, 환복도 하셔야 하고, 장신구도마마! 제발!!”

아 내가 괜찮다니까!!”

 

내가 안 괜찮아!!!!!! 온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은 상궁은 내적 쌍욕을 하고 있는 듯 했고 태형은 이제 반쯤 목숨을 걸고 달리고 있었다. 저 눈빛은 진심이다. 잡히면 빼도 박도 못하고 끌려갈 것이다. 옷만 벗겨지는 게 아니라 살가죽까지 벗겨버릴 기세였다. 사자 앞의 토끼 내지는 목욕탕 때수건을 들고 있는 엄마 앞의 아이가 된 태형은 결국 교태전 대문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생각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후였다.

 

마마! 어디까지 가시

어머.”

…….”

 

그러나 태형이 교태전 대문을 막 박차고 나간 그 순간 마주한 아주 익숙한, 그러나 낯선 얼굴에 태형은 그대로 멈춰 서 굳어버렸고, 뒤따라 태형을 잡으러 쫓아오던 상궁도 옆에 나란히 멈춰 섰다. 태형의 앞에는 살짝 놀란 눈을 한 유라, 아니 한 희빈이 서 있었다. 태형은 숨을 몰아쉬었다. 온 힘을 다해 달리다가 막 멈춰 선 터라 심장이 아직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중전 마마께서 어찌…….”

…….”

이리도 체통을 지키시지 않고.”

 

그러나 살짝 놀란 듯 하던 희빈의 얼굴은 금세 여유로운 웃음으로 바뀌었다. 괜히 책잡힐 짓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근 하루 만에 태형은 이미 한성왕후란 사람에게 일종의 동질감 내지는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아랫것들에게 치이는 인생이란. 상황 자체가 동정심도 좀 들고, 아무래도 지금은 제 자신이 그 본인이다 보니 아예 따로 떼놓고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랫것들이 보고 흉을 볼까 두렵습니다.”

…….”

 

흉은 지금 네가 보고 있잖아……. 태형은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삼켰다. 제가 봐도 지금 제 꼴은 모로 보나 한 나라의 국모와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가채도 얹지 않고 버선발로 건물을 뛰쳐나와 잔뜩 뛴 탓에 얼굴은 발그레했고 호흡까지 불규칙했다. 한 희빈이 아닌 누가 봤어도 혀를 찼을 만 한 모양새였다.

 

어찌 이리 체통을 못 지키십니까. 이러니 전하께서도…….”

한 희빈!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제가 틀린 말을 했습니까?”

 

한 희빈은 계속해서 태형을 비웃었고 보다 못한 상궁이 희빈의 말을 가로막았지만 태형은 괜히 서러워져 고개를 숙였다. 아니 내 기분이 왜 이러지. 저 사람이 아무리 나한테 뭐라고 해 봐야 그건 한성왕후란 사람에게 하는 말이고, 한 희빈이 하는 말들도 나에겐 전혀 타격이 없다. 나에게 저렇게 면박을 주는 사람도 유라가 아니라 유라와 닮은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추스르려 해도 왜인지 계속해서 서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영문도 모르고 조선시대에 떨어진 것도 서러운데, 한 나라의 중전인데다가, 나름 적응해 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자신을 적나라하게 싫어하는 사람에게 싫은 소리를 듣는 것에는 면역이 없었던 것이다. 태형은 입술을 꼭 물었다.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리도 체통을 지키지 못하시는 걸 보니 교태전의 주인이 바뀔 날이 정말로 머지않았나 봅

이렇게 버선발로 뛰쳐나와 맞이할 만큼 우리 중전이 과인을 기다렸나 봅니다.”

 

그 때였다. 한 희빈의 말이 멎음과 동시에 제 뒤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태형은 고개를 들어 뒤를 쳐다봤고 이어 놀람으로 눈이 커다래졌다. 언제 온 것인지, 기척도 없이 가까이 온 정국이 살짝 웃으며 제 어깨를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태형이 저를 보는 것을 눈치 챈 정국이 그런 태형을 조금 더 꽉 끌어안으며 태형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 전하…….”

희빈은 교태전엔 어인 일이오? 이렇게 늦은 시각에.”

, 저는…….”

그나저나 우리 중전은 이렇게 대문까지 나와 나를 반길 만큼 내가 좋소?”

…….”

우리 중전이 이리도 과인을 좋아해 주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얘 왜 이래……. 태형은 서러웠던 것도 잊고 정국을 쳐다봤다. 어느새 나오려던 눈물은 자취를 감춘 후였다. 제가 먼저 희빈에게 질문을 해 놓고, 희빈이 당황하여 하는 말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다시 전에 없는 따뜻한 눈빛으로 저를 보는 정국에 태형은 입을 벌렸다. 전정국이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잘 할 수 있는 애였던가. 태형은 지금 처음으로 제가 걸치고 있는 한복이 치렁치렁한 것을 감사히 여겼다. 손가락이 곱아가고 있는 것을 숨길 수 있으니까. 태형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 그렇습니까…….

 

희빈은, 아직 중전에게 볼 일이 남았나?”

, 전하…….”

아니라면 우린 이만 들어가 봐도 되겠소? 날이 아직 추운데, 우리 중전이 나를 반기느라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여 병이 들까 걱정돼서.”

 

그놈의 우리 중전’. 태형은 몸을 작게 떨었다. 정말, 전정국이 이토록 연기를 잘 하는 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새내기 장기자랑 때 춤 말고 연기를 시킬걸 그랬지. 대상은 따 놓은 당상이었을 텐데. 어차피 춤으로도 대상은 탔으니까 상관없나……. 태형이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며 힐긋 한 희빈을 쳐다봤다. 한 희빈의 얼굴은 놀람과 당혹스러움, 부끄러움 같은 것들로 범벅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달에 한 번이었어도 총애 받는 후궁이었다는데 이런 취급은 처음이겠지. 태형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태형은 아직 정국의 품에 안겨 있는 채였다.

 

…….”

, 그럼 소녀는 이만…….”

…….”

물러가겠사옵니다, 전하…….”

 

한참동안을 멍하니 서 정국과 태형을 번갈아 보던 한 희빈은 문득 정신을 차렸는지 급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말을 전했고 정국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는 그렇게 악바리를 쓰더니 전정국 앞에서는 얌전한 고양이가 따로 없네. 태형은 이제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어 살짝 눈을 감았다…가, 번뜩 떠오른 생각에 제 옆에 있는 상궁을 쳐다봤다. 정국이 오늘 밤에 처소에 오기로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난리를 쳤는데, 제가 봐도 다정해서 손가락이 곱을 것 같은 달달함을 과시하는 왕을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라이브로 시청한 상궁의 반응이 어떨지 상상이 갔기 때문이다. 아마 또 좋아가지고 미소를 지으며

 

…….”

…….”

 

망했다. 태형은 다시 고개를 돌려 차라리 정국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소리 없는 아우성’. 태형은 그 어구의 뜻이 무엇인지 지금 이 순간 생생히 깨달았다. 저와 정국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 그 상궁의 얼굴은 마치, 이번에 터진 최애컾의 떡밥이 전무후무 역대급인 동인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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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그래이제 알겠어태형은 속으로 중얼였다이제야 태형은 제가 뜬금없이 이 조선시대로 떨어진 이유를 깨달았다이것은 세상이 제게 날리는 엿이었다수없이 많은 빅엿을 먹이겠다는 뜻이었다그게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었다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

왜 말을 하다 말지?”

 


정국아니 왕이 빙긋 웃었다시발웃는 것까지 전정국이랑 똑같아태형은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무슨 놈의 스토리가 이따위인 것일까장르가 궁중 로맨스인줄 알았더니 궁중 치정물이었던 것으로도 모자라제가 치정을 펼쳐야 할 상대는 제 짝사랑이고치정을 통해 얻어내야 할 인물은 제 라이벌이다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었다태형은 죽고 싶어져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정실부인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첩하고만 놀아난다기에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었다한량에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놈팽이일 줄 알았더니제 눈앞의 인물은 정국을 닮아아니다정국이 이 사람을 닮은 건가아무튼훤칠하니 잘생겼다동그란 눈과 서글서글한 인상태형은 간신히 벌려진 입을 다물었다제 눈앞의 왕은 여전히 살짝 웃고 있었다태형도 입 꼬리를 끌어올려 어색하게 웃었다.

 


… … …….”

 


사실태형과 정국이 처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아니오히려 그 반대였지태형은 정국이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부터 정국이라면 죽고 못 살 정도로 정국을 아꼈고그런 태형을 정국도 곧잘 따라 둘은 칙칙한 공대의 훈훈한 투샷으로 손꼽히곤 했었다둘은 틈만 나면 붙어 다녔고항간에 사실은 둘이 사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았을 정도였으니그러나 그 소문은 1년을 채 가지 못했다태형과 정국이 있는 동아리에, 2학기부터 들어오게 된 다른 과 후배 한유라의 등장 때문에.

 


한유라는 인문대의 여신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로예쁜 얼굴로 유명했다성격은… 모른다굳이 소문이 나지 않은 걸로 보아서는 좋지도나쁘지도 않겠다고 대충 추측할 수 있었을 뿐이다유라는 예뻤고, (남자)선배들에게 예쁨을 한 몸에 받았다남자들만 득시글한 공대 위주로 편성된 동아리에서한유라의 존재는 단연 돋보였다태형과 정국이 든 동아리는 꽤나 학술적인 것으로 인문대 사람들과는 오억 광년쯤 떨어져 있었기 때문그래서 태형과 정국 같은 훈훈한 남자가 둘이나 있음에도 여타의 여자들이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던 것이었다.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새로운 신입생이 들어와 반가운 마음뿐이었다태형은 유라에게 친절하게 대했고유라도 태형을 곧잘 따랐다금세 유라는 정국과 태형의 일상에 끼어들었고 그 전에는 늘 둘이서 했던 것들을 차츰 셋이서 하게 되었다상황은 대략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선배오늘 뭐 해요?’

나 오늘 정국이랑 영화 보기로 했는데?’

우와뭐 보세요?’

킹스맨2.’

저도 그거 보고 싶었는데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그래.’

 


이런 식으로유라는 계속해서 둘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고태형은 그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정국은 그 상황이 퍽 달가운 것 같지는 않은 눈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별 말을 하지는 않았고그때까지만 해도 태형에게 유라는 그저 후배 1, 여자와는 연이 없었던 태형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서투르게 대해도 계속해서 다정한 성별이 여자인 인간일 뿐이었다그러는 와중에도 유라는 끊임없이 태형에게 눈웃음을 쳤고꼭 달라붙어 애교를 부렸다문제는남중 남고를 나와 공대에 진학한 태형은이런 것에 면역이 없었다는 거다그 잘난 얼굴을 가지고도 여자와 이렇다 할 역사를 쓰지 못한 이유였다태형은 그 때마다 얼굴이 빨개지기 일쑤였고유라는 그런 태형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게임 끝혹시 유라가 날 좋아하나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태형은 언젠가부터 유라를 보면 심장이 뛰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그런 태형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 챈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한 몸처럼 붙어 다니는 정국이었다그리고 어느 날정국은 태형을 불러내어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지?”

.”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태형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어느새 이렇게 가까이 다가온 건지제 얼굴 바로 앞에 있는 정국의 얼굴을 한 왕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그리고태형은 제 몸이 기우뚱 기울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망할 놈의 치마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무겁고 치렁치렁한 한복은 아직 태형에게 마음을 채 다 열지 않은 모양이었다다시 한 번 치마 끝단을 밟은 태형이 어어하는 소리와 함께 팔을 휘저었다넘어진!

 


으잉.”

무슨 생각을 하기에.”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머릿속에서 삐용삐용 하고 적신호가 켜졌다너무 가깝다아까도 가까웠는데지금은 더 가까웠다무엇이정국아니 왕의 얼굴이그리고 태형은 그 순간 왕의 팔과 손이 제 허리에 감겨 있음을 감지했다그러니까태형이 넘어지기 직전에 왕이 제 팔을 뻗어 태형의 허리를 감아 잡아챈 거였다태형이 흡하고 숨을 멈추었다너무심각하게 가까웠다왕이 그런 태형을 보고 픽 웃고는 살짝 힘을 주어 태형을 바로 세워 주었다그제서야 태형은 숨을 몰아 쉴 수 있었다태형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얼굴이 뜨거웠다온통 새빨개져 있을 게 분명했다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오늘따라 중전이 평소와 많이 다른 것 같은데.”

…….”

 


고개를 숙이고 숨을 고르고 있는데 제 머리 위로 떨어지는 목소리에 태형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사이가 좋지 않은 것 같아 안심하고 있었는데그래도 부부는 부부였는지 그 짧은 새에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챈 모양이었다태형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뭐라 둘러대야 할지 알 수 없었다태형의 머릿속은 이미 과열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태형이 멍하니 제 눈앞의 인영을 쳐다보고 있는 새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자꾸 고개를 숙이고

…….”

중전은 나랑 있는 것이 많이 불편하신가 봅니다.”

 


묘하게 서운한 티가 묻어 있는 목소리태형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런 게 아닙니다그렇게 내뱉고 나니 그럼 뭐냐는 듯 저를 쳐다보는 왕의 얼굴에 태형은 입 안쪽 여린 살을 잘근 깨물었다사이가 안 좋다더니다 거짓부렁이었나말투 하나하나행동 하나하나 어디 한 군데 다정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게다가 제가 고개 좀 숙이고 있었다고 서운한 듯 말하기까지어떻게 봐도 금슬 좋은 부부인데태형이 입을 열었다닫았다를 반복했다뭐라고 말해야 하지무슨 말을 해야 가장 자연스러울까?

 


나랑 있는 것이 불편

그럴 리가요!”

 


태형이 재빨리 말을 가로막았다불안함에 심장이 두근거렸다태형의 다급한 목소리에 왕의 눈이 놀란 듯 느리게 깜박여졌다태형이 살짝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너무 좋아서심장이 두근거려서

…….”

떨려서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부끄러운 듯 소매로 입가를 가리는 연기까지 해낸 태형이 슬쩍 왕의 눈치를 봤다왕은 그대로 멈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성공 한 건가태형이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소매로 가린 입가는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쪽팔려 죽을 것 같다아까 경회루 위로 올라오면서 왕이 중전과 단 둘이 있고 싶다며 사람들을 물린 것이 천만다행이었다같은 남자한테 이딴 수줍은 고백이라니게다가 그냥 남자도 아니고아무리 본인은 아니라지만 전정국을 닮은 남자한테태형은 눈을 감았다이불킥 백 년 감이다태형은 이제 이 상황이 몰래카메라거나 예능이 아니기를 바라야 하는 처지가 됐다왜냐하면 이 사실을그러니까 정국을 닮은 왕에게 이런 부끄러운 듯 수줍은 고백을 했다는 사실을 저 말고는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사실만이 태형에게 단 한 가지 위로가 되어 주

 


.”

……?”

 


그러나 순간 들려온웃음을 참는 듯한 묘한 소리에 태형이 내렸던 눈을 들어 눈앞의 왕을 쳐다봤다왕은 저를 쳐다보면서 입술까지 깨물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왜 저래저렇게 좋은가어리둥절해진 태형이 멍하니 그런 왕을 쳐다봤다잠시 숨을 고른 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엇이 그리 좋은 것인데?”

?”

무엇이 그리 좋아서 떨릴 정도냐 물었다.”

그야 당연히 주상 전ㅎ

난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제가 얼마나

그 날 이후로 연락도 다 씹고아는 척도 안 하길래.”

 


씹어뭘 씹어태형은 순간 뇌가 멈추는 소리를 들었다중전이 왕의 연락을 씹… 그래도 되는 건가아니 그보다 씹다니육포나 고기를 씹는 게 아니라 연락을 씹다니연락을 씹는다는 관용어가 조선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유서 깊은 관용어였던가조선시대에도 연락을 씹는다는 힙한 표현을 썼던 건가태형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왕을 쳐다보자 왕의 입이 다시 천천히 열렸다.

 


뭘 그리 놀라요태형 형나 모르겠어요?”

 


형이란다왕이 중전에게태형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삿대질을 했다너무 놀란 입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어하는 이상한 소리만 냈다그럼 안 놀라겠니날 배신 때린믿었던 후배가 하루아침에 내 남편이 됐는데그 말을 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태형은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

 


정신이 좀 들어요?”

전ㅎ아니 너!”

…….”

전정국?!”

 


잠시간의 멍때림 후 정신을 차린 태형이 제 앞의 왕아니 전정국을 보고 삿대질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주위 신하들이 봤다면 기함을 할 행태였지만 태형의 사고는 거기까지 닿지 못했다정국이 그런 태형을 보며 씩 웃었다정신이 들었네요형이 저 기억 못 하는 줄 알았잖아요.

 


너 전정국?!”

.”

내 후배!?”

.”

“21세기에 살고 있는 K대 기계공학과 전정국?!”

학번까지 불러 드려요저 맞다니까요태형이 형.”

…….”

태형 누나?”

아니거든!!”

 


정국의 말에 태형이 눈을 키우며 빽 소리를 질렀다그렇구나난 또 혹시나정국의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에 더 대수로워진 것은 태형이었다너 언제아니너 왜 말 안 했어!!!! 태형이 빽빽 소리를 질렀다.

 


당연히 형도 알고 있는 줄 알았죠옆에 사람들 있으니까 연기하는 줄 알았는데.”

그럼 너 나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어?!”

그래서 여기 올라올 때 신하들 다 가라 그랬잖아요.”

그런데 너!!”

 


그럼 날 보던 그 다정하고 따스한 눈빛은 뭐야아니 것보다경회루에 올라오고 나서도 정국은 계속해서 말투가 이상했다계속해서 연기를 하고 있었단 소리다아니 도대체 왜?! 태형은 무엇부터 따져 물어야 할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심장이 쿵쾅거렸다게다가지금 태형은 21세기에서 보던 선배 김태형의 모습이 아니라 조선시대 중전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화려한 가채에 치렁치렁한 여자한복게다가 부끄러운 듯 수줍은 고백까지!! 세상에서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상대에게 그 모든 것을 들켜 버린 태형은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게다가 전정국은 왜 왕이냔 말이다내시도신하도 아닌왕이라니!!

 


너 왜 왕이야!”

?”

 


그래서모든 의문과 궁금증들을 제치고 태형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그거였다너 왜 왕이야?! 왜 니가 왕이야?! 난 중전인데!? 태형의 억울함을 잔뜩 담은 눈이 그대로 정국에게 꽂혔다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정국의 눈매가 애매하게 접혔다.

 


글쎄요그럼 형은 왜 왕비예요?”

그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저도 몰라요워크샵 끝나고 집 가는 길에 버스에서 자다 일어났더니 이렇게 되어 있던데요.”

 


넌 버스에서 자다 일어났니태형은 순식간에 멍한 얼굴이 되었다버스에서 자다가 깨 보니 타임슬립이었다니쟤도 참 정신없었겠다 싶었다자취방에서 낮잠 자다가 끌려온 나는 양반이라 해야 되나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그러자 정국이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근데 형 생각보다 잘 어울리네요.”

…….”

처음에 나한테 부인이 있다기에 누군가 했는데형이었을 줄이야.”

 


그러니까 이거 지금 욕이지주저앉은 제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제 앞에 꿇어앉은 정국이 태형을 찬찬히 훑으며 한 말에태형은 넓은 한복 단을 펄럭이며 성질을 부리려 했다한복이 무겁고 이미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은 탓에 앙탈을 부리는 모양새가 되어 버렸지만정국이 신기한 듯 태형의 머리 위에 올려져 있는 장신구들을 만작였다이거 진짜예요?

 


몰라아니 그보다 너너 왜 다 알고 있으면서 계속 연기했어?!”

제가 뭘요?”

여기 올라오고 난 다음에도 너 계속 왕인 척 했잖아!!”

형도 계속 연기하길래 장단 맞춰 준 건데.”

 


정국이 몸을 일으켜 여전히 주저앉아 있는 태형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태형은 어이가 없어 입을 뻐끔거렸다그거야나는네가 전정국이 아니라 여기 시대 사람인 줄 알고 그런 거지태형이 성질을 버럭 내고는 제게 내밀어진 정국의 손을 팩 뿌리쳤다그러나 당당했던 그 뿌리침과는 다르게혼자 힘으로 일어나려니 아까 주저앉을 때 한복을 깔고 넘어진 것인지 몸이 일으켜지지가 않았다태형이 낑낑거리자 정국이 얕게 한숨을 내쉬며 태형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계속 앉아 있고 싶은 거예요?”

너 나는 어떻게 알아봤는데?!”

제가 형을 왜 못 알아봐요?”

 


붙어 다닌 시간이 얼만데정국이 가채를 쓰고 있는 태형이 신기한 듯얼굴을 가까이 가져다대며 말했다갑자기 가까워진 정국에 태형이 히익하고 몸을 뒤로 물렀다가까이 오지 마!

 


아니그런 말이 아니잖아내가 진짜 여기 사람이었으면 어쩌려고?”

그 얼굴을 하고요?”

너 그거 무슨 뜻이냐?”

 


태형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묻자 정국이 어깨를 으쓱이며 살짝 웃었다.

 


그래서 좀 자세히 봤었는데나 보자마자 형이 그랬잖아요. ‘!’”

…….”

그러고 얼굴을 가리질 않나허둥지둥하질 않나어딜 봐도 매일 보는 남편 얼굴 보는 부인 모습은 아니라서형이구나 했죠아니 그리고 뭣보다 너무 똑같이 생겼잖아요.”

똑같이 생겼다고 다 우리 같은 처지는 아니야너 한 희빈 못 봤어?”

 


태형이 눈을 반짝였다이곳으로 떨어진 후로 제가 누군가보다 뭔가를 더 아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괜히 목소리가 높아졌다너 못 봤구나태형의 말에 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제 부인 본 건 형이 처음이에요.

 


부인…….”

…….”

이라고 하지 마새꺄!!”

 


누가 니 부인이야!! 태형이 버럭 소리를 쳤다괜히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온몸에 닭살이 돋는 느낌에 태형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그런 태형을 보며 정국이 웃었다왜요맞잖아요그 말에태형은 입을 벌렸다전정국이 원래 저런 성격이었던가그러나 정국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뭔가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지긴 했지만지금은 그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태형이 입을 열었다.

 


나도 우연히 만났는데한 희빈유라랑 똑같이 생겼어난 처음에 유라도 같이 떨어진 줄 알았다니까.”

한유라요?”

유라.”

…….”

 


정국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태형은 입술을 삐죽였다아 괜히 말했나진짜 유라는 아니라지만유라랑 정말 똑같이 닮은 사람인데정국은 그런 한 희빈의 남편이고 자신은… …됐다태형은 여전히 주저앉아 정국의 표정을 살폈다그러나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정국은 이내 다시 태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그러니까 걔는 타임슬립을 한 건 아니라는 거죠?

 


아쉽냐모처럼 공식적으로 연인이 될 수 있었는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요.”


그런데 형 계속 그렇게 앉아있을 거예요거기 편해요태형의 질문을 간단히 일축한 정국이 태형에게 물었고 태형은 아아니그건 아닌데…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아까 그렇게 당차게 정국의 손을 뿌리쳐 놓고 혼자 못 일어나겠어… 따위의 약한 말을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던 탓이다하지만 그런 태형을 눈치챈 듯정국이 픽 웃더니 태형이 뭐라 하기도 전에 태형에게 다가와 태형을 끌어안듯이 안아 태형을 일으켰다태형의 얼굴은 다시 붉게 달아올랐다.

 


누가 막 함부로 내 몸에 손 대래!”

뭘 이 정도 가지고부부 사이에.”

부부 사이는 무슨이 나라 중전이랑 왕이 부부지 너랑 내가 부부냐!?”

지금은 그렇잖아요.”

왜 하필 또 너야!!”

 


태형이 홧김에 소리쳤다하지만 진심이었다왜 하필 전정국인가여자로 타입슬립한 것도 억울한데왜 전정국은 왕이고내 남편은 전정국이냔 말이다그것도 유라를 첩으로 두고 있는유라와 정국을 두고 치정을 벌일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던 태형은 암담해졌다이게 뭐야…….

 


근데 형은 내가 왕이어서 좋아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미쳤냐?”

아니그렇잖아요들어보니까 조만간 합방 있다던데형이 누나 아니라면서요.”

그건……!”

 


태형이 입을 벌렸다정국은 진심으로 궁금한 듯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입을 벌렸지만 할 말은 없는 태형이 입을 뻐끔거렸다맞는 말이다아무리 아프다고 버텼다 한들그 변명이 통했을지도 모르고언제까지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거였다그러면… 전정국이 왕그러니까 내 남편인 걸 감사해야 하나…….

 


그러게.”

그쵸?”

 


태형의 멍한 대답에 정국이 씩 웃었다그 모습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지만 태형은 입을 꾹 다물었다그래긍정적으로 생각하자생판 모르는 사람이 남편인 것보다야 전정국이 남편인 게 낫아냐생판 남이 나은 거 같기도 한…….

 


아악!!!”

왜 그래요?”

몰라…….”

 


태형이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그래도 다행인 건 다행인 거다혼자보단 둘이 낫긴 나으니까어찌 됐든 현재에서 과거로 떨어진 것이 저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위안이 되어 줬다그게 설령 사이 안 좋은 후배전정국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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