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태형은 여자를 꽉 잡고 있던 손을 스르르 풀었다. 아니, 정확히는 온몸에 힘이 빠져 스르르 풀렸다 하는 게 더 맞겠다. 그리고 태형은 털썩 주저앉았다. 태형을 부축하고 있던 여자 몇이 앗, 하는 소리를 내며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태형은 넋이 나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태형의 초점 잃은 두 눈동자가 허공을 향했다. 왕후요…? 중전? 중전마마? 왕비?
“마마…….”
여자가 조그맣게 태형을 불렀으나 태형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 언제부터 조선이 이렇게 개방적인 나라였지? 언제부터 남자가 중전 자리를 꿰찰 수 있게 되었던 거야? 내가 배운 조선의 역사는 다 거짓부렁이었던 건가? 우리나라가 동성애에 이렇게 오래 전부터 개방적이었어? 게다가 조선의 의료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기에 남자보고 임신을 하라 하는 건가. 태형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의문들이 한꺼번에 뒹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도 안 되고, 말도 안 됐다. 태형이 입을 껌벅였다.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옆에서 여자들이 그런 태형을 보며 안절부절 못해 하는 게 느껴졌다. 태형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정신 차리자, 김태형.
“그… 국모라 하면……. 여자…….”
“예?”
“남자도 국모가 될 수 있…….”
“마마…….”
“지 않겠죠. 하하.”
그래서 은근슬쩍 물어보려 했다. 남자도 조선의 국모가 될 수 있나요? 그러나 태형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여자의 얼굴이 경악에 가까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어의를 부를까요? 하고, 다른 여자가 제 옆의 여자에게 속삭이는 것이 태형의 귓가에 닿았다. 태형은 정신을 차렸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와 있는 이곳이, 판타지 세계는 아닌 모양이었다. 남자는 중전이 될 수 없다. 회임도 할 수 없을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불가능한 것이 조선시대에서 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왜!? 설마!? 태형은 재빨리 제 손을 뻗어 제 가슴팍을 만졌다. 편편하다. 여자의 몸이 아니다. 그러니까, 평소의 제 몸과 다를 것이 없었다는 뜻이다. 태형은 조금 더 확실하게 확인해 보기 위해, 그러니까 중요 부위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 흠칫 굳었다. 8개의 눈동자가 저를 향해 있었다. 태형은 아, 하하. 하고는 괜히 치맛자락을 쓰다듬었다. 비단이 참 좋네. 그 말에도 8개의 눈동자는 저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마마,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
“네, 마마.”
“…남자가… 교태전에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될까?”
“…사지가 찢겨 성 밖에 걸리겠지요, 마마.”
…미친. 태형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절대 말하면 안 된다. 태형은 아하하 웃으며 괜히 치맛자락을 끌어당겼다. 혹시나, 제가 남자라는 것이 밝혀지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남자라는 것이 밝혀지면 이곳에서 나가기 전에 이 세상에서 먼저 하직하게 생겼다. 태형은 손을 저었다. 아하하. 내가 묻는 것이 너무 많았구나. 악몽을 꿔서. 됐으니 이만 나가 보거라. 그러나 태형의 말에도 여자들은 요지부동이었다. 마마, 어의를 불러들일까요? 하고 정말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태형이 소리를 질러 들어왔다. 그리고 들어온 곳에서, 저들이 모시는 중전 마마께서 웬 헛소리만 하고 있으니. 정신이 오락가락 하고 있다고 생각할 만도 했다. 태형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어 보였다.
“괜찮다. 잠시 악몽을 꿔서 그렇대도.”
“마마…….”
“나가라고.”
나 지금 내 몸의 안위를 살펴봐야 한단 말이다. 태형이 차마 이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제서야 여자들은 마지못해 발걸음을 뗐다. 혹여 편찮으시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밖에 있겠나이다. 그렇게 그들이 나가고, 장지문까지 꼭 닫힌 것을 확인한 태형이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지? 넓디넓은 방 안에는 창호지를 뚫고 들어온 햇살뿐이 없었다. 태형은 그래도 못미더워 슬쩍 일어나 제 뒤에 있던 병풍 뒤로 들어가 섰다. 그리고 치마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신체의 안위를 확인했다.
“…있네.”
있어. 있다고. 태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설마. 하루아침에 조선시대로 떨어진 것도 모자라 강제로 성별까지 바뀌었을라고. 태형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쥔 채 터덜터덜 제가 누워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다.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게 뭐야…….”
그렇지만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뭐가 이렇게 제멋대로야. 아니, 보통 드라마 같은 거 보면 막, 차에 치이거나, 우물에 빠지거나, 벼랑에서 떨어지거나, 하다못해 뭐, 어? 넘어지기라도 해야 이런 곳으로 떨어지던데! 태형은 어이가 없었다. 태형의 마지막 현대에서의 기억은 과에서 워크샵을 다녀오는 바람에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잔뜩 지친 채 제 자취방에 쓰러지듯 누워 낮잠에 빠져든 것이었다. 무슨 놈의 타임 슬립이 자는 사람 머리채를 잡아가지고 끌고 와?! 뭐 이런 개연성도 없고 감동도 없는 뜬금없는 타임 슬립이 다 있냐고. 태형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그 때 마신 술에 뭐가 있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그렇다면 과 전체가 조선으로 왔어야 했다. 교수님이며 동기들이며 선배 후배들 모두. 그런데 보통 드라마나 소설 같은 거 보면 대량으로 타임슬립을 하진 않던데. 태형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드라마나 소설 따위를 근거 삼아 추측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우습기는 했지만. 이런 일을 겪어 본 후기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으니 드라마나 소설을 바탕으로 추리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내가 뭐, 원한 같은 걸 샀나? 곰곰이 고민해 봐도 딱히 없었다. 그냥 평범한 대한민국의 대학생으로서 살아왔을 뿐이다. 그럼 대체 왜!!!!
“아니, 그리고 이건 또 뭐야.”
태형이 두 번째로 어이가 털려 버린 부분이었다. 한 나라의 국모로 타임슬립이라니. 그것도 남자가!! 역사서에 길이길이 남을 수치였다. 아니, 이런 건 적지도 않으려나. 태형은 어이가 없어 허허 웃었다. 아니, 왕도 아니고.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왕자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고. 내시… 아냐. 내시보단 나은 건가? 암튼! 왕비가 뭐야!! 왕비가!! 태형은 괜히 섬세하게 수놓아진 치맛자락을 펄럭였다. 그 와중에 손에 닿는 비단의 감촉이 쓸데없이 좋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 어느 드라마나 소설을 봐도 남자가 한 나라의 국모로 타임슬립을 했던 경우는 없었으니까. 쓸데없이 이런 곳에서 특별하고 난리야. 태형이 억울한 듯 중얼였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 내가 남자인 걸 들키면 안 되겠지.”
사지가 찢겨 성 밖에 걸리겠지요, 마마. 여자의 목소리가 태형의 귓가에 이명처럼 울렸고 태형은 순간 온 몸에 한기가 끼쳐 몸을 떨었다. 뜬금없이 조선시대에 떨어진 것도 억울한데 오자마자 사지가 찢겨 죽을 수는 없었다. …혹시 죽어야만 돌아갈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그 모험을 감수하기에는 너무 위험이 컸다. 아까 뺨 때렸을 때 아팠던 거 보니까 고통은 그대로인 것 같던데. …음. 아니야. 그건 안 돼. 태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차라리 몰래카메라여서 지금쯤 와하하 웃으며 동기들이 쳐들어왔으면 좋겠다고, 태형은 멍하니 생각했다. 하지만 태형은 눈치가 제법 빠른 편이었다. 이 상황은 실제 상황이다. 애초에 제가 잠든 사이에 이렇게 복잡한 옷을 껴입힐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아까 마주한 그 눈들. 그 눈은 연기 따위가 아니었다. 진심이었어. 물론 뭐, 메소드 배우들을 섭외했을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상황들을 고려해 봤을 때 그것보단 믿기지 않지만 차라리 조선시대로 타임슬립을 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다. 태형은 혹시나 싶어 옆을 두리번대다 경첩을 발견하고 재빨리 거울을 쳐다봤다. 혹시 얼굴이 바뀌었나 싶어서. 하지만 얼굴은 대학생의 태형 그대로였다. 옷이 화려하고 예뻐서 그렇지, 분명 남자의 얼굴이었다는 소리다. 종종 예쁘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 나라 왕도 취향 참……. 태형이 중얼거렸다. …근데 또 이렇게 보니까 제법 여자 같…
“기는 무슨!!! 정신 차려!!”
태형은 저도 모르게 빽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장지문 너머에서 마마, 괜찮으십니까? 하는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형은 아, 아아! 괜찮아. 버, 벌레가 있어서! 하고 급히 얼버무렸다. 사지가 찢겨 성 밖에 전시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니 최대한 몸을 사려야 했다. 어의는 물론이고 저 상궁처럼 보이는 여자들과도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태형은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아까는 그래도 있어야 할 것이 그 자리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다행인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
“아냐. 그래도 만약에 있어야 될 게 없었으면 나는… 도저히 버티지 못했을 거야.”
태형은 꿀꺽 침을 삼켰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현대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든, 뭘 하든 하는 것이다. 태형이 야무지게 주먹을 쥐었다.
“하나님, 제가 태어나서 하나님을 믿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딱히 나쁜 짓은 안 하고 살았었는데요……. 어찌하여 저한테 이런 시련을 주시나요…….”
…그래도 억울한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
“마마. 산보 나가실 시진이옵니다.”
태형이 제 신체의 안위(?)를 확인하고 한 숨 돌린 후 상황 정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자신을 부르는 상궁의 목소리에 태형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산보. 산보라면 산책 말하는 건가. 원래 한 나라의 왕비는 산책 나가는 시간도 정해져 있는 건가? 쉬는 시간만 있으면 자취방에 엎어져 뒹굴거리기 바빴던 태형에게는 생소한 시간이었지만 태형은 어어어- 하고 얼버무렸다. 그리고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 상태로 나가도 될 것인가, 아니면 무슨 핑계를 대고서라도 나가지 말아야 할 것인가.
“마마…?”
“아, 곧 나가마!”
…이렇게 하는 거 맞나. 태형은 대충 대답하고는 끙차, 하고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마주쳐야 할 상황이라면 미리 나가서 대충이라도 파악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분위기 파악이라도 좀 해 두자. 산보라면 뭐, 딱히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겠지.
*
“…저 오만방자한 것.”
그런데 이렇게, 떡하니 사람을, 그것도 요주의 인물을 마주칠 줄이야. 태형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교태전을 나서서 상궁 몇을 거느리고 발걸음을 뗀 지 얼마 되지 않아(그 와중에 태형은 치렁치렁한 한복을 입고 걷는 것에 적응했다. 태형은 제 자신이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태형은 한 무리의 여자들을 발견했다. 옆에서 한 희빈의 무리들인 것 같습니다, 하고 상궁 하나가 태형에게 속삭였다. 한 희빈? 태형이 묻자 상궁이 고개를 끄덕이며 교태전 근처에는 오지 말라 일렀거늘, 전하의 총애를 받더니 오만방자해진 모양이옵니다. 하고 덧붙였다. 한 희빈. 무언가 익숙한 단어에 태형은 기억을 더듬어 한 희빈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 냈다. 아까 정신없던 와중에 상궁 하나가 화무…어쩌고 하며 회임을 해야 한다고 했었지. 그럼 저 여자가… 태형은 꿀꺽, 침을 삼켰다. 그 때, 한 희빈 무리가 태형을 발견하고 태형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상궁 하나가 옆에서 저, 저런! 하고 혀를 차는 것이 들려왔다.
“…유라?”
그런데. 그 요주의 인물이 아는 얼굴일 줄이야.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태형을 발견하고는 성큼성큼 걸어와 가볍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 ‘한 희빈’의 얼굴을, 태형은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태형이 아껴 마지않던 후배 하나와 사이가 망가지면서까지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던 동아리 후배, 한유라였으니까. 태형은 어어, 하며 어설프게 희빈, 아니 유라의 인사를 받았다. 혹시 유라도 나처럼 조선시대에 떨어진 건가?! 반가움과 의아함이 동시에 들었다. 그런데 뭔가… 평소의 유라와는 다른 느낌. 태형은 제 몸을 훑고 지나가는 위화감에 몸을 살짝 떨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중전 마마.”
“너…”
“마마께서 요즘 도통 제 알현을 윤허하여 주지 않으셔서 말이지요.”
“그럼, 교태전을 희빈 마마의 집인 양 들락거리는 것이 정상입니까?”
태형이 뭐라 하기도 전에, 상궁이 재빨리 말을 가로막았다. 그 말에 유라가 한 쪽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 태형은 순간 입을 합 다물었다. 한복을 입고, 말투가 좀 요상하게 변한 것 외에는 분명 유란데. 유라가 맞는데. 엄청난 위화감이 태형을 덮쳤다. …순간, 어쩌면 저 한 희빈이란 사람은 유라가 아니라… 유라의 조상… 아, 아무튼 그냥 닮은 사람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형은 일단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다.
“교태전의 주인이란 계속 바뀌는 것 아니겠습니까?”
“뭐, 뭐라!”
“그리고, 전하께서 찾으시지 않아 교태전이 적적해하고 있을 텐데, 저라도 자주 걸음하여야 덜 외롭지 않겠습니까.”
“이, 오만방자한…!”
정작 태형은 아무 생각이 없는데, 옆의 상궁이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태형은 좀 진정하라고 말해 주고 싶었으나 일단 입을 가만히 닫고 있었다. 보아하니 저 한 희빈이란 사람도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았다. 임금의 총애를 등에 업고 오만방자하다더니 정말인가보네. 희빈이란 사람이 중전에게 저렇게 대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태형이 가만 머리를 굴렸다. 사랑받는 첩, 사랑받지 못하는 정실부인. 드라마나 소설에서 많이 접했던 레퍼토리였다. 아마 정말로 그‘한성왕후’란 사람이 들었으면 꽤 타격이 컸겠지. 하지만,
“내가 죽으면 교태전의 주인은 당연히 바뀌겠지.”
“마, 마마…!”
“그런데 내가 그쪽보다는 오래 살 것 같은데. 사람이 욕심이 많으면 단명하거든.”
태형이 입은 타격은 0, 제로였다. 지금의 태형으로서는 그 전하란 사람이 자신을 찾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은 거니까. 하지만 저렇게 윗사람을 대놓고 비꼬는 한 희빈이란 사람의 행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아서, 태형은 저도 모르게 한 마디 했다. 혹시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 생각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어차피 저 한 희빈도 딱히 예의를 갖추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
한 희빈이 입술을 꼭 깨물더니 휙 하고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제 상궁들에게 가자, 하고는 작별 인사도 없이 멀어져 갔다. 쟤도 참 인생 피곤하게 사네.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한 희빈은 현대의 한유라가 아니었다. 잠깐이지만 혹시, 이 타임 슬립의 이유가 제가 짝사랑하는 유라와 이어지기 위한, 뭐 그런 건 아니었을까 하는 핑크빛 상상을 했었다. 궁중 로맨스, 뭐 그런 거 있잖아. 하지만 그 상상은 채 5분도 가지 못해 산산조각났다. 저 유라를 꼭 빼닮은 한 희빈은 저와 궁중 로맨스를 펼칠 생각이 개미 똥만큼도 없어 보였으니까. 하긴, 중전과 첩의 로맨스라니. 제가 생각해도 좀 웃기긴 했다. 그게 무슨 막장드라마란 말인가. …애초에 남자가 중전으로 타임슬립한 이 상황에서 뭔 막장을 더 따지겠느냐마는. 순식간에 궁중 로맨스에서 사랑과 전쟁으로 바뀌어 버린 장르에 태형은 참담해졌다. 뭐 이래……?
“마마…….”
“…나, 나 뭐 잘못한 건가?”
그 순간, 옆에서 들려오는 상궁의 목소리에 태형은 황급히 상궁을 돌아보았다. 너무 성질대로 했나. 아닌데! 나름 성질 죽인 거였는데. 태형이 지레 겁을 먹고 상궁을 쳐다보자 상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마마. 항상 저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계셔서 제가 다 안타까웠었는데, 마마…….
“잘하셨습니다, 마마.”
“아…….”
상궁이 벅찬 듯 눈을 깜박였다. …그 한성왕후란 사람은 참 현모양처의 표본이었나 보네. 이런 것 가지고 감동을 다 먹고. 태형이 애매하게 볼을 긁었다. 이번에야 어찌 잘 넘어갔지만 본래 한성왕후란 사람의 성격이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태형도 앞으로 조금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태형이 아하하, 웃었다. 그, 그런가. 태형이 얼버무리자 상궁이 여전히 벅찬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참 좋습니다, 마마. 조금 더 걸으시지요.
“…그럴까.”
칭찬을 받아서 그런가, 태형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조금 더 걷기로 했다. 이렇게만 된다면 여기서의 생활도 꽤 지낼 만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성왕후란 사람에게는 좀 안타깝게 되었지만, 왕도 부인을 잘 찾지 않는다 하고. 교태전에 오지도 않는다고 하니 잘만 피해 다니면 어찌어찌 잘 되겠지. 그 가까운 시일 내에 있다는 합방…이란 것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몸이 아프다고 드러누우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제가 직접 당하고도 안 믿기는데, 설마 중전이 갑자기 남자로 바뀌었다고 의심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태형은 조금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궁 안을 돌아다녔다. 지리를 모르니 상궁이 가자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가는 내내 몇몇 궁녀들과 내시(로 보이는 사람들)들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신경 쓸 만 한 무리도 마주치지 않았기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태형은 곧 커다란 연못에 다다랐다. 경회루. 경복궁 내의 누각. 태형은 제 기억력에 감탄하다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경회루가 이렇게 예쁜 곳이었나? 매번 올 때마다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었는데. 태형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잔잔한 바람과 물결, 그 위에 지어진 목조 건물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사실 실제로 본 것보다 교과서에서 그림으로 더 많이 보긴 했다) 태형이 입을 벌리고 경치를 감상하고 있는 사이, 상궁 하나가 살며시 웃으며 태형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마마, 날이 참 좋지요.”
“진짜 예쁘다…….”
“제가 좋은 소식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좋은 소식? 태형은 빙그레 웃으며 상궁을 돌아봤다. 날씨도 좋고, 기분도 좋고. 단순한 태형은 어느새 걱정 따위는 곱게 접어 날려 버리고 이 기분을 만끽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그 평화롭고 즐거웠던 기분은, 상궁의 말 한 마디로 한 순간에 와장창 깨졌다.
“주상 전하께서 이 시간에 경회루로 산보 나오시는 것을 즐기신다 합니다. 아마 오늘도…”
“뭐!?”
미친, 그걸 왜 지금 말해!! 태형은 순식간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태형은 재빨리 등을 돌리고 상궁을 잡아끌었다. 가, 가자. 태형의 다급함에 상궁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마마…? 태형은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도 아직 왕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왕이라니. 지금 현재 가장 마주치면 안 될 인물이다. 그러나 그런 태형의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상궁은 의아한 표정으로 가만히 멈춰있을 뿐이었다. 태형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상궁을 뒤로 하고 재빨리 교태전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불행히도 태형은 아직 이곳의 지리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결국 다시 상궁에게로 돌아온 태형이 다시 한 번 재촉했다. 어서 돌아가자, 제발.
“아, 알겠습니…”
“주상 전하 납시오!”
그러나 상궁이 대답을 끝마치기도 전에, 제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태형이 이를 악물었다. 시발. 좆됐다. 제 뒤를 슬쩍 쳐다 본 상궁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마마, 참 잘 되었지요? 하고 귀엣말로 물었다. 잘 되긴 뭐가 잘 돼…!! 아니 이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눈치 더럽게 없네!! 태형은 눈을 감았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태형이 그렇게 등지고 눈을 감고 있는 사이,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등 뒤가 서늘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태형이 입술을 깨물었다. 망했다. 최대한 안 마주치려고 했는데, 이렇게 첫날 딱 마주칠 줄이야. 뭐가 이렇게 스토리 진행이 빨라…!!
“마마, 예를 갖추셔야지요…!”
태형이 그대로 얼어 가만히 멈춰 있자,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있던 상궁이 태형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히 속삭였다. 태형은 그제야 아, 아아, 하고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 그래. 총애 받지 못하는 왕비라 들었으니까,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쳐 갈 확률이 높다. 태형은 제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들은 제 얼굴을 보고도 한성왕후라 불렀으니 얼굴을 들켜도 딱히 문제 될 것은 없었겠으나, 괜히 제 발 저린 탓이었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 제발… 제발……. 그러나 어쩐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온 몸의 감각이 불안하다 외치고 있었다.
“그…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목소리도 최대한 작게. 허리는 최대한 깊숙이. 태형은 머리가 거의 땅에 닿을 듯이 숙였다. 가채가 무거워 저절로 머리가 내려갔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 때문에 가뜩이나 얼굴이 뜨거운데, 피가 몰려 얼굴이 계속해서 뜨거워지고 있었다. 고개를 들면 얼굴이 잘 익은 새빨간 토마토가 되어 있을 것이 뻔했다.
“고개를 드시오, 중전.”
“…….”
그러나 그런 태형의 간절한 바람을 비웃듯, 왕의 목소리가 태형의 뒷덜미로 떨어졌다. 시발. 태형이 다시 한 번 속으로 욕을 짓이겼다. 안 좋아한다며! 교태전을 찾지도 않는다며! 왜 굳이 또 말을 섞으려 하는 거야! 한성왕후가 들으면 통탄할 말들을 생각하며 태형이 눈을 꼭 감은 채 고개를 들었다. 차마 제정신으로 왕, 그러니까 제 남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항마력이 부족했다. 오늘 하루 일어난 일이 너무 버라이어티해서 태형의 머리는 이미 과부하였으니까.
“…….”
“…….”
“왜 눈을 감고 있지? 눈을 뜨고 나를 보시오.”
아……. 태형이 속으로 탄식했다. 결국… 내 남편의 얼굴을 보게 되는구나… 하긴, 고개를 들라 했는데 눈을 감고 있는 모양새도 웃기긴 했다. 부인이 생기기도 전에 남편부터 생겨버린 제 처지에,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태형이 천천히 눈을 떴다.
“해가 너무 좋아서, 눈이 시려서…”
“…….”
“……?!”
살짝 눈웃음을 치며 눈을 뜬 그 순간이었다. 태형은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대로 입을 벌린 채 큰 눈을 깜박였다. 이건… 너무 말도 안 된다. 아무리 드라마라도 이렇게 막장일 수는 없는 것이다. 태형은 제 눈앞의 익숙한 인영에 그대로 굳었다. 어쩐지, 들려오는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하다 했다. 그냥 기분 탓이겠거니 했는데. 태형은 제 눈을 똑바로 마주쳐오는 두 눈에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악연도 이런 악연이 있나. 그러니까… 제 눈앞에 있는 ‘주상 전하’는. 이 나라의 국왕은. 제 하나뿐이 없는 남편은.
“…….”
성격 좋고 인물 좋은 걸로도 모자라 집안까지 좋아 학과를 넘어 단과대에서도 손꼽히는, 그러나 같은 이유로 손꼽히는 태형과 사이가 안 좋은 것으로도 유명한.
“…….”
태형의 과 후배,
“…전…….”
전정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