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차라리 화장실을 가고 싶다고 하지 그랬냐, ?!”

 

시발 진짜 변명을 해도 진짜……. 그렇게 도망치듯 교태전으로 돌아온 이후, 멍하니 앉아 벽을 바라보던 태형은 이내 서안(書案:책을 펴 보거나 글씨를 쓰는 데 필요한 서실용 평좌식 책상)에 제 머리를 박으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세상에 배가 고프다니. 아무리 둘러댈 말이 없기로서니. 그 말이 거기서 그렇게 나올 게 뭐야. 너무 바보 같잖아!! 연기라도 했어야지 멍청아!!! 태형은 입술을 마구 깨물며 서안에 머리를 콩콩 찧다 이내 볼을 대고 스르르 무너졌다.

 

쪽팔려서 이제 어떻게 봐…….”

 

가뜩이나 좋아한다는 감정을 알아채고 난 후에 정국이 얼굴 보는 게 힘들어졌는데, 거기에 쪽팔려서라는 이유까지 덧붙여졌다. 태형은 착잡한 심정에 눈을 감았다. 아직까지도 아까의 열기가 얼굴에 그대로 남은 채였다.

 

그 와중에 또 잘생겨가지고…….”

 

짜증나게. 한 번 보니까 자꾸 보고 싶어지잖아. 태형이 불퉁하게 중얼였다. 정국이 태형에게 그냥 후배였을 때는 잘생겼다는 생각을 가끔(은 아니고 사실 제법 자주)만 했을 뿐이었는데, 좋아한다고 자각하고 나니 태형의 안에서 정국은 킹 갓 제너럴 어쩌구 하여튼 얼굴킹이 되었고 이제 태형은 시도 때도 없이 정국의 얼굴을 떠올리며 멍하니 입을 벌리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정국의 얼굴이 변한 것은 아닐 테니 아마 그만큼 제가 정국을 좋아한단 얘기겠지. 태형은 고개를 돌려 다시 이마를 서안에 기댔다. 열 좀 식히자…….

 

마마, 소인이 들어가도 되겠사옵니까?”

 

태형이 역시나 몽글몽글 떠오르는 정국의 얼굴에다 애써 블러 처리를 하며 가만히 앉아 열을 내리고 있던 그 때였다. 문 밖에서 조그맣게 들리는 상궁의 목소리에 태형은 비척비척 고개를 들어 어, 들어와, 하고 말했다. 그에 문이 열리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태형의 눈이 이내 동그랗게 커졌다. 저게 뭐야?

 

마마, 전하께오서 우육牛肉을 하사하셨습니다.”

?”

뿐 아니라 돈육豚肉과 계육鷄肉을 비롯해 삼과 각종 약재들도 보내셨습니다.”

아니, 갑자기 왜.”

마마께오서 더위에 기력이 쇠하신 것 같아 보이신다고하루빨리 기운을 차리셨으면 하신다고…….”

 

태형은 제 눈앞에 놓인 휘황찬란한 식재료들에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현대에 있을 때 엄마의 손에 끌려 간 백화점 식품관에서나 보았던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식재료들이 신선한 태형의 눈앞에서 날 먹어 봐요, 하고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을 채 다물지 못하고 식재료와 상궁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니까이게 지금 다 전정국이 나한테 보낸 거란말인가?

 

마마, 혹 그간 찬이 부실하였

, 아니야 그런 거!”

 

두 손에 가득 들린 신선한 식재료들과는 달리 그간 제가 관리하던 태형의 식단이 부족하였을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시들어가고 있는 상궁의 표정에 태형은 벌어지는 입을 간신히 닫고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부족하긴 무슨. 충분했는데. 자취방에서 끓여 먹던 즉석밥이나 라면에 비하면 얼마나 감사하고 따끈한 집밥이었는데.

 

, 그냥 전하께서 나를 너무 아끼셔ㅅ,”

……!”

, 걱정하셔서…….”

 

물에 데친 시금치처럼 시들어버린 상궁의 표정을 풀어주고자 황급히 말을 잇던 태형의 성급한 단어 선택에 상궁의 얼굴이 순간 햇빛을 받은 해바라기처럼 밝아졌고 그에 제 단어 선택의 실수를 자각한 태형은 재빨리 말을 바꿨다. ‘전하께서 나를 너무 아끼셔서라니. 이게 무슨 사랑받는 중전이 행복에 겨워서나 내뱉을 수 있는 염장 대사란 말인가. 그러나 태형의 그러한 정정이 무색하게 상궁의 눈빛은 이미 다시 봄비를 맞은 새싹처럼 파릇초롱해진 후였다.

 

마마…….”

, ?”

소인은 정말

…….”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태형은 이번에도 차마 상궁에게 전하지 못한 말을 삼키며 으,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런 태형을 보며 흐뭇하게 웃던 상궁이 이내 그럼 오늘 석반에는 한우를 올릴까요? 하고 발랄하게 물었고 태형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약 주고 병 주고도 아니고. 제 피로의 원인 제공자에게 위로 받는 기분이 묘했다. 아니다. 이런 것들은 위로보다는 효도에 가까운가

 

저기,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전정국 다 컸네. 선배한테 효도도 할 줄 알고까지 생각하던 태형은 순간 떠오른 생각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여태까지 정국의 얼굴을 떠올리고 지워내느라 급급해 아까 정국이 했던 말을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정국이가 아까 분명히

 

왕이랑 왕비랑 절에 가서 고목에 소원을 비는 행사가 매년 있대요. 그런데 대충 말하는 걸 들어 보니까 우리 워크샵 갔던 그 절 같은 거예요. , 우리 워크샵 갔을 때도 소원 들어주는 나무 있었잖아요.’

 

라고 했었지. 아까는 정신이 없어 흘려들었는데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니 태형 제 자신도 그 나무에 소원을 빌었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 나무와 저와 정국이 이 조선에 떨어지게 된 것이 관련이 있는 걸까?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하문하시지요.”

내가 간절히 바랐던 소원 같은 게 있을까?”

?”

 

정말 그 나무가 소원을 들어 준 걸까? 그런데 누구의 소원? 내 소원? 아니면 정국이의 소원? 그것도 아니면 왕과 왕비의 소원? 태형은 확실히 하고 싶었다. 그래서 상궁에게 물었다. 소원을 말해봐, 내게만 말해봐, 그런데 네 소원 말고 내 소원내 소원을 내가 알지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알겠느냐마는, 태형이 현재 제 자신인 왕비의 평소 소원을 알 턱이 없으니까. 하지만 소원이란 생기면 누구에게든 말하고 싶어지는 종류의 것이다. 말하면 이루어진다고도 하지 않는가. 태형은 왕비가 평소 그 말을 신뢰하여 친한 상궁에게 제 소원을 흘렸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태형의 그런 기대와는 달리, 상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마, 그게 무슨…….

 

누군가가 소원을 이루어준다면 내가 바랐을 거 같은 거 말이야.”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마마, 모든 것을 갖고 계신 마마께서 바라셨던 것이라 하면…….”

…….”

마마의 마음이 전하께 전해졌으면 좋겠다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하셨던 것밖에는 생각이 나질 않사옵니다…….”

…….”

마마께서는 늘 성심(聖心:임금의 마음)은 마마를 향해 있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마마의 마음이 주상께 닿았으면 좋겠다 하셨지 않으셨습니까.”

 

아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상궁이 말을 이었다. 마마께오선 습관처럼 강녕전을 쳐다보시곤 하셨으니까요, 마마. 그리고 그 말에, 태형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어쩌면, 정말 정국이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그 소원 나무 때문에 정국과 제가 이 조선으로 떨어지게 된 거라고.

 

하지만 마마, 그건 모두 옛말이고 이제는 전하께오서도 마마를

그건가 봐.”

?”

왕비의 마음이 왕에게 전해지는 거.”

마마, 그게 무슨…….”

 

그러니까, 내가 정국이를 좋아하는 게. 내가 정국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정국이에게 알리면, 그게 우리가 조선에서 현대로 돌아갈 수 있는 열쇠인가 봐. 태형은 멍하니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조선에 오고, 정국이도 조선에 오고. 내가 정국이를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그걸 정국이에게 말하면…….

 

그럼 나는?”

?”

나는 어떡해?”

마마, 갑자기 무슨…….”

 

제 앞의 상궁이 의아해하거나 말거나, 태형은 멍하니 중얼였다. 그럼 나는 어떡해? 전정국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어 버린 나는. 전정국은 한유라를 좋아하는데. 만약에 내가 전정국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래서 현대로 돌아가게 되면. 그 후에 나는 어떻게 되는 건데?

 

이런 게 어딨어…….”

 

억울해. 왕비 소원은 들어주면서, 왜 내 소원은 안 들어 줘. 태형은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

 

오늘도 그렇단 말이지.”

, 전하. 송구하오나 그렇사옵니다…….”

 

그 날로부터 벌써 5일 째, 태형은 이리저리 정국을 피해 다니고 있었다. 최대한 정국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외출을 자제하는가 하면, 정국이 찾아오기라도 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정국을 만나주지 않았다. 처음엔 아직 기력이 회복되지 않아 왕을 뵙는 것이 송구하다는 핑계로, 그 다음부턴 자리에 없다는 핑계로. 또 그 다음에는 주무시고 계시다는 핑계로. 아프다는 핑계를 대면 혹시나 제가 간호하겠다고 나설까 봐 제일 쉽고 편한 핑계는 대지도 못한 채로, 태형은 상궁으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게 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전하께 거짓을 고하느냐며 안 된다고 만류하던 상궁도 태형의 간절한 눈빛에 결국 지고 말았고.

 

혹시 그간 중전에게 누가 찾아왔었느냐? 한 희빈이라든가…….”

아뇨, 전하. 전하께오서 명을 내리신 이후로 한 희빈은 교태전 근처에 얼씬도 못 합니다.”

중전에게 변고가 생겼다거나…….”

아닙니다, 전하. 그저 오수에 드시는 시간이 길어지신 것 뿐입니다.”

 

상궁은 왕의 앞에서는 반드시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을 해야 하는 것이 궁궐의 예의인 것에 감사했다. 아니라면 차마 전하의 눈을 바로 보지 못하다 결국은 제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걸 들켰을 테니까. 하늘같은 주상전하께 이렇게 거짓을 고하게 되다니. 상궁은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제가 모시는 중전마마의 간청이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부디 저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하루빨리 중전이 기력을 차렸으면 좋겠다고 전해주시오.”

그러겠사옵니다, 전하.”

 

이렇게 다정하신 전하께 마마는 왜! 상궁은 남몰래 눈물을 훔치며 허리를 조금 더 숙였다. 왕의 행렬이 교태전에서 서서히 멀어져 가고, 상궁의 시야에서 왕의 행렬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즈음 교태전 안쪽에서 태형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갔어?”

가셨습니다.”

 

, 다행이다……. 태형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나머지 몸을 드러냈고 그런 태형을 상궁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응시했다. 마마, 언제까지 이러실 겁니까……. 그러나 어느새 상궁의 앞으로 온 태형은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미안해, 거짓말 하게 해서.”

소인은 괜찮습니다. 다만…….”

…….”

왜 주상전하를 피하고 계시는 건지, 그 연유만이라도 알려주시면 안되겠사옵니까, 마마.”

…….”

염려가 되어 그렇습니다. 혹 주상전하께 큰 잘못이라도 하신 겁니까?”

잘못…….”

 

상궁의 걱정스러운 말에 태형이 고개를 들어 초점 없는 눈빛으로 상궁을 쳐다봤다. 잘못이라. 잘못이라 한다면 잘못이 있긴 했다. 나에게 잘못이 있다면

 

너무나 많이 사랑한 죄…….”

?”

 

난 너로 인해 그 죄로 인해 눈물로 앓고 있다고이러케……. 태형은 의아한 얼굴의 상궁의 말에 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래, 이게 다 그 망할 소원나무 때문이다. 걔가 이 한성왕후란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애꿎은 제 자신을 조선으로 끌고 오지만 않았어도 나는 현대에서 행복할 수 있었는데. 비록 마음이야 아팠겠지만 전정국을 좋아한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그렇게 외면한 채로 살아갈 수 있었는데!! 태형은 다시 불쑥 치고 올라오는 억울한 마음에 입술을 꼭 물었다. 소원나무 개새끼야…….

 

중전?”

……?!”

 

그런데 태형이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억울한 감정을 삭히고 있던 그 때였다. 태형이 자리하고 있는 몇 걸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고, 태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가 놀라 동그래진 눈을 하고 있는 상궁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제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목소리는, 그러니까…….

 

방금 전에 중전은 오수에 들었다고…….”

, 전하…….”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향기. 그리고 제 눈앞에 있는 상궁의 떨리는 목소리. 태형은 꿀꺽 침을 삼켰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제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여태껏 기를 쓰고 피해 왔던, 제가 짝사랑 중인 전정국이라는 걸. 태형이 놀라 그대로 굳어있는 동안, 정국의 향기가 조금 더 가까워졌고 태형은 다시 한 번 꿀꺽 침을 삼켰다. , 어떡하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태형은 눈을 꼭 감았다. 그러니까, 아직은, 전정국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데. 그러나 그런 태형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쪽으로 오는 정국의 발자국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안 돼. 아직은 안 돼. 태형은 숨을 합 하고 들이쉬었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그리고 잠시 후 정국의 손이 태형의 어깨에 닿기 직전, 태형은…….

, 마마?!”

……?!”

 

튀었다. 속된 말로 토꼈다. 앞 뒤 잴 것도 없었다. 머릿속에는 그저 지금 당장 정국을 마주할 수는 없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은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제가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는 채로, 태형은 무작정 앞을 향해 뛰었다. 놀라 저를 부르는 상궁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고, 전정국의 향기 역시 멀어져 갔다.

 

김태형 이 대책 없는 새끼야…….”

 

태형은 괜히 찔끔 나오는 눈물을 참으며 최대한 멀리, 빠르게, 정국이 제 모습을 볼 수 없도록 뛰었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 말 그대로

 

이제 난 몰라…….”

()사랑에 미친 멍청이의 뜀박질이었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보게.”

, 송구하옵니다, 전하…….”

예상은 했지만…….”

소인을 죽여 주시옵소서…….”

 

정국은 제 눈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상궁을 쳐다봤다. 솔직히, 예상은 했다. 김태형이 자길 피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우연의 일치겠거니. 요즘 날씨가 너무 덥다 보니 지쳐서 계속 잠을 자는 것이겠거니 스스로 위안하고 있었는데. 정국은 입술을 물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현대에서 있었던 일들이 데자뷰처럼 겹쳐졌다.

 

…….”

전하…….”

일어나 고개를 드시오.”

 

정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의아함과 두려움이 섞인 상궁의 눈과 정국의 눈이 마주쳤다. 그때도, 지금도. 태형은 일방적으로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그 때는 이유라도 예상할 수 있었다지만, 지금은 이유도 알 수 없다. 사실, 이유를 알고 있더라도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겠지만.

 

그러니까, 여태까지 고의로 나를 피해 왔던 거란 말이지…….”

, 전하…….”

내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 부탁이라뇨, 전하. 당치도 않습니다…….”

 

명하시옵소서, 따르겠나이다. 상궁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고 정국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이게 옳은 일인가, 옳지 않은 일인가 생각이 들었지만 이렇게 또 이유도 모른 채로 답답하게 태형과 멀어지기는 죽어도 싫었으니까.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날을 잡아줄 수 있을까.”

?”

중전에겐 알리지 말고.”

전하…….”

자꾸 나를 피하니까.”

…….”

이렇게라도 얼굴을 마주 보고 얘기를 하고 싶어서…….”

 

지금 하는 말이 제 눈앞의 상궁에겐 어떻게 들릴까, 나중에 태형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생각들은 떠올랐다가 곧 사라졌다. 이기적이라면 이기적이겠지만, 애가 닳고 속이 타서 어쩔 수가 없었다. 정국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엄청 한심해 보이겠지. 자길 일부러 피하는 사람을 붙잡아 달라고 부탁하는 꼴이라니. 그건 좀 곤란하다고 거절당해도 할 말 없다. 차마 상궁의 눈을 바로 볼 수 없어, 정국은 고개를 숙였다.

 

전하…….”

…….”

소인,”

…….”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명 받잡겠습니다.”

?”

 

그러나 곧이어 들려온 상궁의 결의에 찬 목소리에, 정국은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깜박였다. 제 눈앞의 상궁은 주먹까지 꼭 쥐어 보이며 단호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단호하고도 결의에 찬 눈빛에 정국은 방금 제가 뭐라 했는지 다시 한 번 돌이켜 보았다. 내가 방금 적장의 목을 가지고 오라는 부탁을 했던가?

 

이 몸의 뼈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빠른 시일 내에 반드시 전하와 마마를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

, 아니, 뭐 그, 그렇게까지는…….”

그동안의 불충을 용서하소서.”

 

제가 전하의 그 깊고도 넓은, 마치 하해와 같은 중전마마를 향한 애심(愛心)을 잠시 잊고……. 상궁은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결심을 다졌다. 말을 마치고 다시 고개를 숙인 상궁의 등 뒤에서는,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결심의 오오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정국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살펴 가시옵소서, 전하.”

 

끝까지 결의에 찬 목소리로 고개를 숙인 상궁을 뒤로하고, 정국은 얼떨떨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낱 상궁이 이토록 충성심이 깊을 줄이야최후의 순간,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뛰어 들어가는 장수의 기백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정국은 다시 떠오르는 그 눈빛에 살짝 몸을 떨었다. 태형이 형 그렇게 안 봤는데…….

 

상궁들한테는 엄청 FM 스타일인가?”

 

*

 

왜 이리 소란이야?”

, 마마!”

 

그렇게 어떤 의미에서의 사랑의 도주를 한 지 이틀, 태형은 그 날 이후 깊게 잠들지 못해 퀭한 눈으로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아침부터 교태전이 평소답지 않게 소란스러웠다. 태형은 채 뜨지 못한 눈을 비볐다. 아침부터 무슨 일 있는 건가.

 

마마, 기침하셨습니까. 목욕물을 받아놓을까요?”

아침부터? 그런데 오늘 무슨 날이야? 왜 이렇게 다들 바빠 보여?”

, ,

……?”

날이 좋으니까요! 간만에 새 단장이나 해볼까 하고……. , 마마께서도 새로운 기분으로 하루를 맞이하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유난히 떨리는 상궁의 목소리, 쉬이 마주치지 못하는 두 눈. 어딘가 어색한, 저 문장. 태형은 멍하니 상궁을 쳐다봤다. 상궁의 태도가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태형은 아직 채 잠에서 깨지 못한 두뇌를 빠르게 돌렸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봤을 때 상궁은 지금…….

 

많이 바쁘구나.”

?”

붙잡아놔서 미안. 목욕물 받아줘. 목욕은 내가 혼자 할게.”

 

태형은 채 다 못 뜬 눈을 부비며 상궁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와 동시에 잠시 빠르게 돌아갔던 CPU도 종료시켰다. 늘 고생이 많아. 적절한 인사는 잊지 않고. 그러나 혹시 제가 한 거짓말이 들켰을까를 걱정하던 상궁은 그런 태형의 격려에도 멍하니 태형을 쳐다볼 뿐이었다. 우리 마마님늘 생각하는 거지만 참 선하시고다정하시고

 

? 나 얼굴에 뭐 묻었어?”

 

눈치가 없으시구나…….

 

*

 

벌써?”

요즘 마마께서 기력이 없으시니, 그럴 땐 일찍 침소에 드시는 게 좋사옵니다.”

그래도아직 술시(戌時19~21)밖에 안 됐는데…….”

…….”

역시 일찍 자는 게 건강해지는 지름길이겠지? 그래, 자자!”

 

오늘 상궁 이상해무서워제 말에 눈에 띄게 딱딱해지는 상궁의 표정에 태형은 금세 꼬리를 내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아침부터 청소를 열심히 하더니 많이 피곤했나제가 순순히 방으로 들어가자 다시 풀리는 상궁의 표정에 태형은 영 께름칙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채 슬금슬금 상궁이 준비해 놓은 이불 위로 올라섰다. 상궁이 문을 닫고 물러나고, 방 안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태형은 이부자리에 가만히 누워 오지 않는 잠에 눈을 깜박였다. 목욕물에 향유를 얼마나 들이부었는지 아침에 한 목욕인데도 아직까지 온 몸에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아니, 가만.

 

이 촛대 뭐지?”

 

태형은 익숙한 듯 낯선 촛대와, 평소와는 다른 침실의 분위기에 이불 위에 뉘였던 몸을 반짝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하긴 했다. 아무리 제가 궁중의 일들에 대해 잘 모른다 해도,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아침부터 부산스러웠던 적은 여태까지 없었다. 그러니까그 말인 즉슨오늘은 뭔가 특별한 날이라는 것인데교태전에 특별한 날이란…….

 

뭔가 기분이 쎄한데…….”

 

태형은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쩐지 등 뒤가 서늘했다. 그러고 보니 이 분위기낯설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러니까…….

 

주상 전하 납시오!”

……?!”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태형이 방문을 열어젖히려던 바로 그 순간, 태형의 손이 닿기도 전에 문이 열렸고 태형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 내시의 우렁찬 소리와 함께 제 눈앞에 등장한 그 사람때문에. 그러니까,

 

, …….”

 

요 며칠 태형의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던 그 사람. 계속해서 태형을 잠 못 들게 만들었던 그 사람. 자나깨나 태형의 눈앞에서 어른거리던 그 사람.

 

오랜만이네요,”

 

잘생기고, 예쁘고, 귀엽고, 하여간 이 세상 좋은 형용사는 다 같다 붙여도 모자람이 없는 그 얼굴.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태형이 가장 보고 싶으면서도 가장 피하고 싶었던 그 사람,

 

중전.”

 

전정국 때문에.

 

*

 

…….”

 

배신자……. 태형은 제 아랫입술을 세게 감쳐물었다. 배신자……. 환하게 웃는 상궁의 얼굴이 눈앞에 어렴풋이 스쳐지나갔다. 배신자……. 하하하하하 중전마마아아 행복하시옵소서어어어 들어본 적 없는 상큼한 상궁의 목소리까지 저절로 재생되어 귓가에 울렸다. 태형은 정국을 보자마자 달아오른 제 얼굴을 가라앉히기 위해 정국을 등지고 앉아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태형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미치겠다 별들아…☆★

 

.”

…….”

나 안 볼 거예요?”

 

등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정국의 목소리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리려다가 아직 제 얼굴이 뜨거운 것을 자각하곤 간신히 참았다. 그리곤 고개를 더 숙였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제 감정을 자각하지 못했을 때에도 이런 분위기에 정국과 단 둘이 남겨졌을 때 죽을 것 같았는데, 감정을 자각하고 난 후에 정국과 이렇게 단 둘이 방 안에 남겨지게 되었으니 지금 태형의 상태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냥 차라리죽여줘……. 좀 진정이 되면 무슨 말이라도 꺼내 볼 텐데, 지금 섣불리 말을 꺼냈다간 딸꾹질이 튀어나올 것 같아 태형은 입술을 부러 더 꾹 물었다.

 

…….”

 

그리고 그 때, 정국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태형은 그 소리에 제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태형은 슬쩍 몸을 돌려 정국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 곳엔, 여태까지 제가 봐 왔던 전정국 중에 가장 굳은 얼굴을 한 전정국이 있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지금난 건가?

 

갑자기 왜 나 피하는데요.”

…….”

이제 나랑 말도 섞기 싫어요?”

,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거 아니면 나 좀 보고 얘기해요.”

 

태형이 제 말을 부정하자마자, 정국은 태형의 팔을 잡아 제 쪽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긴다. 그 바람에 제가 채 힘을 쓰기도 전에 휙 하고 돌려 앉혀진 태형이 눈을 깜박였다. 그 순간 태형의 시야에 정국이 가득 들어찼고 태형은 지금 당장 제 심장이 터져 죽는대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태형을 모르는 정국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있긴 있었지내 인생 최대의 지각변동을 일으킨 일이내가 널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됐거든 내가……. 태형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차마 입 밖으론 꺼낼 수 없는 말이 목에 걸려 태형을 간지럽게 했다. 그냥 대충 얼버무리고 이 상황을 무마해야 하는데,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일단 얘가 좀 뒤로 갔으면 좋겠는데. 날 놔주든가. 태형이 정국의 시선을 피했다. 정국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머리가 핑핑 돌았다.

 

말 안 해줄 거예요?”

, 그런 게 있어!”

…….”

넌 몰라도 돼.”

…….”

 

그 말을 마치고, 태형이 정국의 손에 제 손을 겹쳐 정국의 손을 떼어내며 뒤로 물러났다. , 이제야 좀 살겠네. 뒤로 물러선 다음 숨을 몰아쉰 태형이 잠시 눈을 도르륵 굴리다 문득 이상해진 분위기에 정국을 쳐다봤다. 왜 아무 말이 없지……. 그러나 태형의 눈이 정국을 향한 그 순간, 태형은 저도 모르게 흡, 하고 숨을 들이쉬어야 했다. 정국이, 그 때 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날. 한유라의 생일날, 과방에서 봤던 정국의 그 얼굴.

 

형 되게 상처받게 말하네요.”

,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아무것도 아니라네가 굳이 알 필요가 없…….”

형이 지금 왜 날 피하는지 제가 아니면 누가 알아야 하는데요?”

?”

누구냐고요, 그 새끼가.”

 

, 아니 왜 말이 또 그렇게……. 태형은 당황해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정국은 쉬이 물러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지금 태형이 왜 자신을 피하는지, 대답을 꼭 듣고야 말겠다는 얼굴. 태형은 제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정국이 화화났나?

 

아니 잠깐만.”

?”

근데 왜 네가 화내?!”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태형은 문득 차오른 억울함에 반짝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 지금 전정국이 나한테 화를 낼 처지야? 불쌍한 건 난데? 한유라 좋아했다가 포기하고. 이젠 전정국 좋아했다가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건 난데. 왜 나한테 화내? 태형이 눈을 세모나게 떴다. 왜 나한테 화내는데?! 세상 억울한 건 난데!

 

화 낸 거 아니에요. 기분이 안 좋은 거지.”

왜 기분이 안 좋은데? 겨우 내가 너 피한 거 때문에?”

겨우아니. 그게 겨우도 아니지만. 제가 요즘 기분 좋을 일이 뭐가 있는데요. 한창 썸 타고 있었는데 방해꾼이 끼어들질 않나, 갑자기

아니 잠깐만.”

……?”

너 썸 타고 있었어?!”

? .”

누구랑?!”

 

태형은 경악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어느새 억울함과 분노는 휘발되고, 머릿속은 온통 충격으로 가득 찼다. 전정국이 썸을 타고 있었다니! 대체 누구랑? 충격과 공포다 그지 깽깽이들아! 왜 내 허락도 없이? 아니 쟤가 썸타는데 내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지 않지! 내가 정실부인이잖아!

태형의 머릿속은 한순간에 혼란스러워졌다. 대충 태형의 머릿속은 크게 두 가지 붕당으로 나뉘어졌는데, ‘전정국이 썸을 타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야파와, ‘당연히 나랑 상관있지 내가 정실부인인데파가 그것이었고 그 외에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를 궁금해 하는 오하원칙 파, ‘정실부인이라니 미쳤냐, 김태형?’ ,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용을 중시하는 소수의 다 됐고 배고파 정도가 있었다. 아무튼, 태형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묻자 정국은 그 표정에 되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형 그걸 지금 몰라서 물어요? 그 말에 태형은 입을 벌렸다. 몰라서 묻냐니. 그럼 알고 묻겠니. 태형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내가 알아야 하는 사람이라면…….

 

설마 한유

형이랑요.”

?!”

 

설마 한유라, 하고 말하려던 태형의 말은 태형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싹둑 잘라먹은 정국의 목소리에 의해 이상하게 마무리되었다. ?! 하고 의미 모를 탄성을 내지른 태형은 그대로 멈추어 입을 벌렸다. 형이요? 무슨 형이요? 설마 지금 네가 말하는 그 형이 나

 

형이랑 저랑 썸 타고 있었잖아요.”

…….”

밤도 같이 보내고. 뽀뽀도 하고. , 키스였구나. 아무튼. 최근엔 데이트도 하고. 비록 중간에 불청객이 끼어들긴 했지만.”

…….”

 

그랬구나내가 너랑 썸을 타고 있었? 아 정말? 난 오늘 처음 알았네…….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래, 생각해 보니 그러긴 했다. 정국과 자신은 소위 말하는 연인들이 하는 행동을 전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저를 괴롭히던 묘한 기시감의 정체가 이것이었나? 태형은 뭐라 차마 반박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반박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게다가 정국의 얼굴이 너무나도 태연해서. 결국 태형은 잠시 눈을 깜박이며 살짝 웃고 있는 정국의 얼굴을 쳐다보다 슬쩍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 언제부터?”

언제부터더라. 쫌 됐는데.”

…….”

조선에 떨어지고 한 일주일째부터였나?”

…….”

 

그랬구나……. 태형은 멍청하게 읊조렸다. 나랑 전정국이랑 썸을 타고 있었구아니, 이게 아니지!! 멍하니 정국의 말을 납득하던 태형은 다시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근데 썸은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타는 거 아니야!? 나야 물론 전정국을 좋아한다지만. 전정국은아니, 그것보다. 내가 자길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데?!

 

, 그런데 써, 썸은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타는 거 아니야!?”

형 저 좋아하잖아요.”

언제 알았어?! 아니, 어떻게 알았어?!”

 

괜히 어설프게 침착한 척 뱉은 태형의 말에 정국은 태연하게 대답했고, 태형의 침착한 척은 단 3초도 버티지 못하고 박살났다. , , 그거 어떻게 알았어?! 나도 안지 얼마 안 됐는데?! 말한 적도 없는데?! 태형은 여태까지 제가 정국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정국에게 소리쳤다. 사실, 이제 와서 숨긴다고 달라질 것도 없겠지만.

 

좀 됐어요.”

 

아 좀 됐어? 알게 됐으면 나도 좀 알려 주고 그러지 그랬냐……. 난 그것도 모르고 괜히 고민했

 

원래 좋아하는 사람 태도는 신경 써서 보게 되잖아요.”

가 아니고 너 나 좋아해?!?!?!?!”

 

충격에 충격에 충격. 태형은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 만큼 입을 벌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다 무슨 소리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가 짝사랑하는 상대와 썸을 타고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짝사랑 상대가 자길 좋아한단다. 태형은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 , 좋아, 아니, 내가 널 좋아, 네가 나를 좋아하고너도 나를 좋아하고우린 서로 좋아하는데 그 누구도 말을 안해요링딩동 링딩동 링디기디기 딩딩딩 가나다라마바사 하쿠나마타타

 

형은 진짜 아무것도 모르네요.”

?”

그럼 형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키스해요?”

아니, 그건 어쩔 수 없이,”

저랑 키스를 어쩔 수 없이 했다고요?”

아니 그니까,”

형은 어쩔 수 없으면 키스도 막 해요?”

, 정국아!!!”

 

나 얘 무서워. 태형은 다시 심각해지려는 정국의 얼굴에 다급하게 정국의 이름을 외쳤다. 정국과 제가 썸을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 2. 정국이 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지 1. 태형은 행복해할 틈도 없이 코너에 몰아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래 참았으니까. 정국은 태형을 만나 반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으니까. 말해주고 싶은 마음도, 해주고 싶은 것도 많다. 물론, 그중엔 이토록 빙빙 돌아오게 만든 태형의 눈치 없음에 대한 복수도 조금.

 

, 좋았어!!”

?”

너랑 한 키스! 좋았어! 물론 그 때는 내가 널 좋아하는지 몰랐지만, 좋아하니까 한 거야. 그리고 좋았어. 그러니까 다른 사람하고는 안 할 거야!”

…….”

, 그게 중요한 거 아닐까?!”

 

말은 바로 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한 건 아니라고. 무슨 말인지 자신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좋았으니까! 좋았다. 그럼 된 거 아니야? 태형은 재빨리 말을 이어나갔다. 정국과 오해가 쌓이는 건 이제 더 이상은 싫었다. 정확한 의미 전달의 중요성을 이미 경험한 바 있는 태형이 정국을 똑바로 응시했다. 정국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저게 무슨의미지. 정국의 얼굴에 떠오른 미묘한 표정을 해석하기 위해 태형이 멍하니 정국을 쳐다보자, 정국이 곧이어 씩 웃었다.

 

.”

?”

태형이 형.”

.”

지금 나 꼬시는 거예요?”

?”

 

정국의 얼굴이 훅 하고 가까워진다. 태형은 꿀꺽, 침을 삼켰다. 꼬시긴 누가. 꼬시는 건 지금 네 얼굴이 날 꼬시고 있는데, 정국아……. 태형은 아랫입술 안쪽을 꾹 깨물며 눈을 깜박였다. 지금그러니까이 분위기는그건가? 키스각?

 

태형이 형.”

.”

제가 그 나무에, 무슨 소원 빌었는지 알아요?”

…….”

…….”

몰라…….”

 

태형의 개미만한 목소리가 가까스로 공기를 울리고, 정국이 조금 더 가까이 태형에게 다가왔다. 태형의 코와, 정국의 코가 닿을락 말락, 아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맞닿아 있었다. 태형은 자꾸만 놓아지려 하는 제 정신줄을 간신히 붙잡으며 정국을 마주 보기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이 순간을, 꼭 기억해두고 싶었으니까. 그런 태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국이 사르르 눈꼬리를 접었다. 제가 무슨 소원을 빌었냐면요…….

 

형이 날 좋아하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

김태형이, 전정국을 좋아하게 해달라고.”

…….”

 

태형은 코앞에서 느껴지는 정국의 향기에 제 손을 꼭 쥐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그리고 곧이어, 정국의 손이 태형의 손에 닿는다. 정국은 태형의 손을 풀어 태형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넣었다. 마약을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달콤하고 몽롱해서 정신이 나갈 것 같은 기분. 태형이 정국을 쳐다봤다. 코가 닿고, 숨이 닿고, 그리고…….

 

지금 이루어 진 거 맞죠,”

 

입술이 닿는다.

 

제 소원.”

 

정국의 입술이, 태형의 입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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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좆같은 연애

 

이 비극적인 이야기의 서문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까. 그래, 내가 17살에 했던 첫 연애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물론 내 첫 연애가 17살은 아니지만 제대로 된연애가 그 연애였고 좆같은연애의 시작 역시 그 연애이기 때문에 편의상 첫 연애라고 칭하도록 하겠다.

나는 잘생겼다. 아니 비극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대놓고 초장부터 이게 무슨 재수 없는 소리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이것은 하늘을 우러러 한 치의 거짓과 과장이 없는 팩트다. 나는 잘생겼다. 나의 이 잘생김은 내가 유치원에 다니고 있을 때부터 빛을 발했는데, 어느 정도냐면 당시 내가 다니던 유치원에는 같은 달의 생일인 아이들을 하루에 몰아 합동 생일 파티를 열어 주는 관습이 존재했는데 그 컨셉이 전통 결혼식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사이비 종교 단체도 아니고 웬 원생들의 의사 따위는 사뿐히 무시하고 치러지는 합동결혼식인가 싶긴 한데, 그 때 나를 포함한 아이들은 어렸으므로 딱히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았고 그 의식은 매 달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합동결혼식에 의의를 제기한 아이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나를 사모하던 한 여자아이였다. 내 생일은 12월이었고 그 여자아이는 생일이 12월이 아니었기 때문에 테크니컬리 그 여자아이와 나는 합동결혼식을 치를 수 없었다. 그러나 나를 향한 그 여자아이의 의지는 꽤나 확고했고 절대로 내 옆에 제가 아닌 누군가를 세울 수 없다는 그 아이의 땡깡에 결국 그 아이는 나와 합동결혼식을 치룰 수 있었다. 지금 와서는 그 여자아이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여자아이가 ‘()형아, 나랑 나중에 꼭 결혼해야 해.’ 하는 말에 내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나 역시 그 여자아이가 조금은 마음에 들었던가 보다. (생각해 보니 그 때의 사진이 남아 있을 텐데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모르겠다. 찾게 되면 증거자료로 후첨하겠다.)

, 이야기가 잠시 딴 곳으로 샜는데 아무튼 그 정도로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잘생겨서 인기가 많았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유치원과 초등학교 때의 가벼운 썸도 연애로 친다면 첫 연애도 17살이 아니었던 거고. 그러나 언제까지고 지속될 줄만 알았던 나의 이 순탄한 인기 가도와 연애는 내가 17살이 되던 해 시작과 동시에 찬란하게 무너졌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나의 인기 고공행진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고, 나의 연애가 이때부터 어그러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01. 김태형의 사정

 

위에 말했듯이 나는 인기가 많았고 살면서 단 한 번도 고백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밀려드는 고백을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까. 초등학교 때 나를 두고 경쟁하는 여자아이들의 치정싸움에 지친 나는 여자아이들에게서 벗어나겠다는 일념 하에 남자 중학교로 진학했고 여자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혹시 이게 문제였을까? 그렇게 내 연애의 암흑기를 끝내고 나는 공학으로 진학했고 입학한 지 3개월도 안 되어 한 여자아이에게 고백을 받았다. 그 아이는 2반에서 반장을 맡고 있을 만큼 인기 많고 똑똑하고 예쁜 여자애였다. 그 때의 나는 연애가 하고 싶었고, 그 여자아이는 충분히 괜찮았기 때문에 나는 웃으며 그 고백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는 나의 연애 암흑기가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그게 내 진정한 연애 암흑, 아니 칠흑기의 시작일 줄.

 

미안해, 태형아. 우리 헤어지자.’

?

 

그 여자아이와 사귄지 정확히 101일이 되던 날이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갑자기 왜? 나는 재빨리 어제의 데이트를 리와인드하기 시작했다. 어제 100일 기념으로 영화를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선물도 주고받고 어둑해진 공원에서 처음으로 로맨틱하게 가벼운 뽀뽀도 했다. (키스까지는 뭔가 부끄러운 마음에 하지 못했다) 그 후엔 여자애의 집 앞까지 데려다 줬지. 여자애는 날 보고 웃으며 조심히 들어가라고 했고, 나 역시 웃으며 뒤돌아섰다. 그리고 집. 모든 게 완벽했는데!? 나는 되감기를 마치고 다시 ()여친을 쳐다봤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선물이 마음에 안 들었나? 아님 영화가? 어제 먹었던 스파게티가 입에 안 맞았나? 필사적으로 말이 되는 이유들을 다 갖다 붙여봤지만 그 중에 납득이 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였다. 그러나 내 어이 털린 얼굴에도 그 여자아이의 표정은 단호했다. 미안해.

 

아니, 이유라도 알려 줘.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미안해.

 

전 여친은 입술을 깨물고, 멍하니 서있는 나의 손에 내가 그녀에게 주었던 100일 반지를 꼭 쥐여 주곤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멀어져 갔다. 나는 차마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내가 차이다니. 그것도 이유도 모르고. 나는 멍하니 내 손에 쥐여진 반지를 내려다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에 이니셜이나 새기지 않는 건데. 나는 반지를 손에 쥐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엎어졌다. 슬픔이나 억울함보단 의아함이 더 컸다. 대체 왜? 좋았는데? 우리 뽀뽀도 했잖아. 키스도 아니니 내 스킬이 부족해서도 아닐 거고. (단순한 입술 박치기에도 스킬이 필요한 것인가?!) 그렇게 나는 그 날 밤을 꼬박 새웠다. 나는 원래 궁금증이 있으면 잠을 잘 못 자는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문자답을 해 봐도 내 궁금증은 혼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 다음 날 친구에게 물어 봐도 그 해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의문은, 꽤나 가까운 시일 내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풀렸다.

 

대박. 니 전 여친, 레즈래.’

 

? 이별의 아픔이 채 씻기기도 전에 들려온 청천벽력에 나는 멍하니 칠판을 쳐다보다 그대로 박지민을 쳐다봤다. 이게 무슨 개소리야? 그러나 박지민의 눈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더 말해보라는 뜻을 담아 박지민을 쳐다봤고 박지민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 학교에 소문 다 났어. 1반 애가 서유진(17, , 태형의 전 여친)이랑 한소희(17, , 3반 반장)랑 불 꺼진 미술실에서 뽀뽀하는 거 봤대.’

말도 안 돼.’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 2반으로 향했다. 설마. 그럴 리가. 5반에서 2반으로 가는,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에이, 헛소문이겠지. 설마. 말도 안 돼. 류의 말들을 생각하며 애써 웃었다. 설마, 나랑 헤어진 이유가 갑작스럽게 성 지향성을 깨달았기 때문이겠어? 그러나 심호흡 후 2반 문을 차분히 열어제낀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은 3반 반장과 보란 듯이 손을 잡고 있는 내 전 여친이었다. 나와 100일을 사귀는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환한 미소를 지은 채로.

 

서유진.

태형아.

잠깐 얘기 좀 해.’

 

나는 나도 모르게 성큼 걸어가 전 여친의 앞에 섰고 내 전 여친은 꽤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봤다. 여전히 손은 한소희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나는 잠시 시선을 꼭 맞잡은 두 손에 두었다가 다시 서유진을 쳐다봤다. 서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인적이 드문 학교 뒤편으로 갔다. 서유진이 나에게 고백을 했던 그 곳으로. 아니 얘는 아는 장소가 여기밖에 없나? 장소 선택을 해도 참. 그러나 나의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서유진이 입을 엶과 동시에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미리 말 못 해줘서 미안해.

…….

너무 놀랄 것 같아서 말 못 했어. 나 소희 좋아해.’

 

확인 사살 완료. 나는 뭐라 대꾸도 못한 채 그대로 굳었다. 사실 서유진이 나한테 미안할 건 없다. 이미 헤어진 마당에 뭐가 미안해. 물론 너무나 갑작스럽게 차인데다가 일주일도 안 돼서 새로운 애인을 사귀긴 했지만. 나는 그냥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던 건데 서유진은 그런 내 태도를 다른 쪽으로 해석했던 건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도 몰랐어. 내가 착각하고 있는 건 줄 알았어. 태형이 너는 멋있고, 예쁘고, 잘생겼으니까. 너랑 사귀다 보면 소희를 잊을 수 있을 줄 알았어.’

…….

그런데너랑 어제 뽀뽀를 하고 나니까 알겠는 거야.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건 소희였다는 걸.

…….

태형이 너에겐 너무 미안해. 뭐라 할 말이 없다…….

 

나는 어이가 없어 절로 벌어지는 입을 채 다물지도 못한 채로 서유진을 쳐다봤다. 딱히 화가 났던 건 아니다. 그냥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뽀뽀가한 중생으로 하여금 자신의 진정한 성 지향성을 깨닫도록 인도했다는 것인가? 내 소중한 첫 뽀뽀가? 이걸 좋아해야 돼, 말아야 돼? 나는 입을 뻐끔뻐끔 움직였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나는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고 그래서 나는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는, 찌질한 전 남친의 표본 같은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날 좋아하긴 했니?’

?’

…….’

좋아했어. 친구로.’

…….’

태형아, 넌 정말 나한테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이야.’

 

너에게 난 그저 연인이 아닌 우정이 편했을지도 몰라 I’m a love loser너 땜에 너무 아파 너 땜에 너무 아파 너 땜에 너무 아파 헷갈리게 하지 마……. 그 순간 언젠가 들었던 남자 아이돌의 노래 가사가 머릿속에서 재생됐고 나는 고개를 떨궜다. 이 노래가 이렇게 슬픈 노래였던가…….

 

태형아.’

행복해라…….’

 

결국 끝까지 인소 남주 같은 모먼트로 나는 눈물을 삼키며 돌아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웬 허세인가 싶은데, 그 땐 그게 최선이었다. 그렇게 둘은 내가 졸업할 때까지도 알콩달콩 사귀었고 나는 그 충격에 한동안 연애를 하지 못했다. 이것이 나의 첫 연애 스토리이다.

 

, 그럼 두 번째로 넘어가 보자. 나의 두 번째 연애는 이듬해 여름이었다. 원래도 잘생긴 걸로 유명했던 나는 레즈의 전 남친이라는 꼬리표와 함께 더욱 더 유명해져 전교생이 아는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 학교에서 나는 차마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귈 수 없었다. 사실, 그럴 생각도 못 했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그 일이 나에게는 꽤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상처는 새로운 사랑으로 치유하는 법. 나의 두 번째 여친은 나보다 한 살 연상으로, 독서실에서 만났다. 그녀는 호랑이도 무서워한다는 고3이었지만 처음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에게 고백했고 나는 그 고백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고 3이었기 때문에 이렇다 할 데이트를 자주 하지는 못했으나 우린 나름 깨가 쏟아지는 연인이었다. 공부를 하다 잠시 쉬러 나왔을 때 삼각김밥과 라면을 나눠먹으며 사랑을 키우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연인. 그렇게 데이트다운 데이트는 몇 번 하지 못한 채로 그녀는 수능을 치렀고 그녀가 지망하던 모 여대에 붙은 이후 우리는 매일같이 붙어 다니며 데이트를 했다. 그녀가 대학생이 된다는 사실이 조금 불안하기는 했으나 그녀가 여대로 간다는 사실이 나에게 위안이 되어 주었고 그렇게 그녀로 인해 상처만 남은 나의 첫 연애가 치료되는가 싶었다. 그러니까, 3월이 지나 4월의 초입 그녀의 학교 앞 카페에서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받기 전까지는.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

그리고,’

아니,’

여자야.’

 

방금 뭐라고 했……. 나는 그녀가 다니는 여대 앞 카페에 앉아 마시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그대로 다시 컵으로 리필했지만 그녀는 그런 내 모습에도 눈을 피하지 않고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사귀는 건 아니야.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해야 할 것 같았어.’

누나, 그게 무슨 말

미안해, 태형아.’

 

세상이 나한테 이럴 수가 있을까? 신은 정녕 나를 버린 것인가? 여대로 가서 안심했더니. 여대로 갔음에도 불구하고 미팅 한 번 나가지 않기에 내심 안심하고 좋아하고 있었더니. 세상에 여대로 간 것이 가장 큰 위험 요소였을 줄이야.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고 2분 전까지만 해도 내 여친이었던 전 여친은 여긴 내가 낼게,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이 때, 나는 또 하나의 명대사를 남기게 된다.

 

날 갖고 논 거예요?’

태형아.’

…….’

 

너 담담 그저 당당 날 차 빵빵 뭐니 뭐니 난 네게 뭐니……. 장난해 너 도대체 내가 뭐야 만만해? 날 갖고 노는 거야……. 1년 전의 악몽이 다시 나를 슬금슬금 휘감기 시작했다. 그 남자아이돌의 노래 역시 다시 내 머릿속에서 리플레이되기 시작했고. 이쯤 되면 내 인생의 주제가다.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에 당황한 전 여친이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 거 아냐, 태형아. 널 정말 좋아했어. 단지…….’

…….’

내가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너무 뒤늦게 깨달아서 그런 거야. 다 내 잘못이야.’

 

내 전 여친은 날 위로했고 나는 결국 고개를 떨궜다. 시발 이게 뭐야……. 이거 컬투쇼에 제보해도 되겠다고……. 그러나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을 어떻게 붙잡을 수 있을까. 게다가 아예 다른 성별을 좋아한다는데. 나는 결국 그렇게 그녀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현타가 온 나는 그렇게 고3 생활을 도 닦는 수도승처럼 보낼 수 있었고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며 공부에만 전념했다. 그 덕분에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고. 아무튼 그 악몽 같은 연애사를 뒤로하고 대학교 입학식과 미터, 새터를 치르면서 나는 다시금 새로운 희망에 부풀었다. 그래, 고등학교는 고등학교로 미뤄 두고, 이제 새로운 역사를 쓰는 거다.

 

그래서 나는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내 상대를 찾아 나섰다. 이번에는 정말 나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여자애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나의 인기는 역시나 식을 줄을 몰랐으므로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많았고 미팅에 나갈 때마다 나는 거의 모두에게 연락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신중했다. 얼마나 신중했느냐면 1년이 지나도록 연애를 하지 않을 정도로 신중했다. 그 누구를 봐도 자꾸만 태형아, 미안해. 사실 나 여자 좋아해.’하고 말할 것만 같아서. 그러나 내가 2학년이 되던 해 3월에 나간 미팅에서, 나는 나에게 유난히 강력하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었고, 결국 내가 고백을 하려고 했던 날 그녀에게 고백 받았다. 1년 동안 열심히 고민한 만큼, 그리고 나에게 그렇게나 열정적으로 대시를 한 만큼, 이 사람만큼은 정말로 나를 좋아해서. 남자인 나를 좋아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내 세 번째 연애를 시작했다.

그녀와의 연애 역시 순조로웠다. 함께 벚꽃 축제를 즐기고, 놀이공원으로 데이트도 가고. 술도 마시고, 맛집도 찾아다니고. 전혀 이상할 것 없는 평범한 대학생의 연애. 그래, 이것으로 나의 징크스와 악몽이 끝나는구나. 성인의 연애라기엔 스킨십의 진도가 조금 느린 것 같긴 했지만 나 역시 키스도 못 해본 채였고 그녀 역시 풋풋한 새내기였기에 나는 그것을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이 바로 불행의 전조일 줄.

 

오빠, 미안해.’

…….’

 

대학생활의 꽃이라는 축제가 열리기 직전, 정확히 말하면 하루 전 날이었다. 축제 때 언제 만나 뭘 할지까지 다 정해 놨는데 축제 전날 밤, 나는 그녀에게서 이별을 통보받았다. 이번엔 학교 앞 작은 술집이었다. 나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트렸고 쇠로 만들어진 젓가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오빠가 놀랄 거 아는데, 사실 나…….’

여자 좋아해?’

어떻게 알았어?’

 

, 시발. 나는 나도 모르게 욕을 읊조렸다. 물론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한 것은 아니고, 속으로. 이제는 눈물도 안 나왔다. 이쯤 되면 난 거의 뭐의사나 다름없는 거 아닌가? 혹시 당신의 성적 지향성이 궁금하신가요? 확신이 안 서신다구요? 국비대학교 입구 1번 출구에서 김태형을 찾아주세요! 쉽고 빠르게 판단해 드립니다!

 

여기 젓가락 좀 새로 주세요.’

 

나는 놀란 눈의 그녀를 앞에 두고 자연스럽게 젓가락을 새로 주문해 눈앞의 닭발을 집었다. 모든 것이 놀랍도록 차분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예상했던 바다. 내 차분하고 침착한 태도에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티가 났어?’

아니. 네가 말하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어.’

그럼 어떻게…….’

 

내가 레즈들만 골라 사귀는 쓸데없고 필요 없는 능력이 하나 있거든. 나는 그 말은 애써 목 뒤로 삼키며 소주잔을 들었다. 목이 탔다. 속도 탔다. 진짜 사업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디나이얼들이여 나에게 오라 내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내가 아무 말 없이 닭발을 씹자 그녀는 내 눈치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사실 알고는 있었어. 그런데 인정하기 싫었어. 그래서미팅도 나가 보고

나 좋아하는 척도 하고.’

좋아하는 척은 아니었어! 정말 좋아했어. 그냥,’

나보다 여자가 더 좋았던 거겠지.’

…….’

 

그래. 알아. 다 이해해. 나는 부처의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마지막 한 잔을 내 입에 털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간적으로 이 자리는 네가 사라. 어이없는 상황도 세 번이나 겪어 보니 내성이 생겼는지 나는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동작들을 수행했다. 가방을 챙기고, 겉옷을 챙기고, 뒤를 돌아 술집을 빠져나간다. 혹시 이건 오랜 기간 나를 두고 촬영하는 예능 프로그램 같은 건 아닐까? 트루먼 쇼 그런 거그게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이럴 수가 있나이게 내가 바랐던 연애 꿈파란만장 love story 다 어디 갔나……Drama에 나온 주인공들 다 저리 가라 터덜터덜 자취방으로 향하는 내 머릿속에선 그 남자아이돌의 노래가 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

 

시이이이이이이발!!!!!!!”

 

나는 울먹이며 테이블을 손으로 쿵 내리쳤다. 시끄러운 주점 안의 시선이 잠시 나에게 닿았지만 사람들은 이내 흥미를 잃고 다시 자신들의 화제에 집중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테이블을 쿵 쳤다. 이번에는 내 손이 아닌 머리로. 내 앞에 앉아 있던 박지민이 한숨을 내쉬었다.

 

운명인가 봐. 받아들여라,”

무슨 운명!? 뭐 이따위 좆같은 운명이 다 있어?!”

 

한 번은 우연이다. 두 번은 우연의 일치다. 그런데 세 번은? 나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박지민과 함께 내 앞에 앉아 있던 김남준이 내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김남준은 내 대학 동기로, 내 이 비극적인 연애사를 전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사실 김남준에게도 말하려고 말한 것은 아니었는데, 새터에서 술에 취한 내가 과대였던 김남준에게 내 과거 연애사를 주절주절 얘기하면서 친해지게 됐다. 정확히 말하면 내 술주정을 들어준 유일한 이가 김남준이었다.

 

태형이 많이 취했네.”

안 취했어!!”

 

술 취한 이의 술주정이 아니라, 정말 나는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말짱했다. 내가 아무리 술에 약하다 해도 맥주 한 병으로 취하지는 않으니까. 다만, 나는 그냥 술에 취하고 싶은 기분이었을 뿐이었다. 술기운을 빌려 울고 싶을 뿐이었다. 누가 나를 욕해, 난 어제 차였는데. 그것도 세 번 다 같은 이유로!! 같은 일을 당하지 않게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내 잘못도 아닌데!!!!!

 

그래, 그래. 안 취했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안 취했다고!!!”

뭐야, 벌써 가게? 너네 학교 축제 재밌다며.”

 

김남준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고 박지민은 내 앞에서 아쉬운 소리를 했다. 근데 나 정말 안 취했는데그런데

 

나 혼자 있기 싫어…….”

…….”

외로워…….”

 

나는 김남준의 옷깃을 잡고 징징대기 시작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정말로 취한 것은 아니고, 평소보다 조금 더 솔직해졌을 뿐이다. 외로운 건 사실이었으니까. 연애를 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사실상 유치원 때 이후로 나에게 진실 된 사랑을 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 아닌가. 외로웠다. 지독하게 외로웠다.

 

그럼 오늘만 내 자취방에서 자고 가든가.”

흐엉…….”

진짜 가게?”

 

김남준이 깊은 한숨과 함께 마지못해 말했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집까지 버스 타고 가기 귀찮았던 것도 있다. 그렇게 자리를 정리하려 하니 못내 아쉬운 듯한 박지민이 진짜 가게? 하고 물었고 김남준은 어차피 더 이상 할 것도 없잖아. 하고 말했다.

 

저기서 뭐 무대 하는 거 같던데?”

무대?”

그거라도 보고 가면 안 돼?”

오늘 연예인 안 와. 오늘은 그냥 애들 끼 콘테스트 할 걸.”

, 완전 보고 싶어.”

 

박지민이 김남준을 초롱초롱하게 쳐다보며 말했고 김남준은 어느새 말짱하게 앉아 있는 나를 한 번 보고, 초롱초롱한 눈을 한 박지민을 한 번 보고, 시계를 한 번 본 후에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적으로 극혐하는 눈빛이 그의 얼굴에 스쳐지나갔던 것으로 보아 박지민의 초롱초롱한 눈에 넘어간 것은 아니었고, 그저 김남준이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류의 인간이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결국 우리는 박지민을 선두로 한창 불타오르고 있는 야외극장으로 향했고, 그리고, 나는 보고야 말았다.

 

.”

춤 잘 추네.”

 

그녀를. 그러니까 조금 더 상세히 말하자면, 커다란 무대 위 그보다 더 큰 존재감으로 살랑거리는 치마를 입고, 찰랑거리는 길고 까만 생머리를 하고, 그와 대비되어 극적인 효과를 이루는 하얀 피부를 가진, 동그랗고 예쁜 눈망울의 그녀를.

내가 그 무대 앞에 막 도착했을 때 그녀는 레드벨벳의 러시안 룰렛과 아이오아이의 너무너무너무 댄스 메들리를 추고 있었고 그 짧은 순간 동안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나는,

 

쟤 누구야?”

 

그녀에게 한눈에 반하고 만 것이다.

 

저거 전정아 같은데.”

전정아?”

, 맞네. 지금 공대 애들 무대 할 시간이네. 공대 여자 댄스팀.”

 

나는 김남준을 쳐다봤다가, 다시 무대를 쳐다봤다.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분위기에 무대 앞에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으므로 무대를 가까이에서 볼 순 없었지만 멀리서 봐도 확연한 것은 있었다. 전정아의 아름다움. 나는 절로 초롱초롱해지는 눈을 조금 더 크게 떴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막 걸그룹 댄스를 끝낸 그녀에게 사회자가 다가가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 소리는 내게 들리지 않았다. 시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다 무뎌지는 것 같았다. 나만 빼고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

 

급하게 준비한 무댄데도 완벽했는데요! 혹시 더 보여주실 것이 있나요?”

근데 이상하네. 전정아 머리가 저렇게 길었나? 내 기억으론 단발이었는데.”

넌 쟤를 어떻게 알아? 너 사회대잖아.”

전정아 유명해. 공대여신.”

 

내가 멍을 때리고 있는 동안 김남준과 박지민이 대화를 나누었고 나는 그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무대를 응시했다. 사회자가 전정아에게 마이크를 내밀었지만 전정아는 사회자의 귀에 대고 뭐라 중얼였고 그에 사회자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대화를 한 거지?

 

공대 여자 댄스팀 Wolf에서 특별히 준비한 무대가 있다고 하는데요!”

…….”

박지윤의 성인식’! 음악 주세요!!!”

 

빨간 불이 탁 하고 켜지고, 익숙하고 끈적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하얀 얼굴에 동그란 눈의 전정아가 무대 양 사이드에 있는 커다란 전광판에 잡힌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운명이야.”

?”

나 결심했어.”

 

여태까지 내 그 좆같았던 연애의 기록은, 지금 이 순간 전정아를 만나기 위해서였음을. 시선은 여전히 무대에 고정한 채로, 나는 김남준의 팔과 박지민의 팔을 꽉 잡았다. 남준아. 지민아. 더 이상 나는 나에게 고백하는 여자들과 사귀지 않을래. 이번엔 내가 먼저 고백할 거야. 내가 쟁취해 낸 사랑과 연애를 하겠어.

 

얘 뭐라는 거야?”

내일 보자.”

? , , ! 김태형!!!!!! 어디 가!!!!”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어마어마한 인파를 뚫고 무대 뒤, 전정아가 무대를 마치고 내려올 것이라 추정되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부정하진 않겠다. 술에 취하진 않았으나, 술이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결단을 조금 더 쉽게 내리게 했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확신에 차 있었다. 내가 쟁취해 낸 사랑은,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동안의 연애는 전부 이 순간, 그러니까 전정아를 만나기 위한 포석일 뿐이었다고. 드디어 진정한 사랑이 나에게 찾아온 거라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때 열심히 풀어댔던 논리야 놀자가 울고 갈 무논리적 추론이었으나, 그 때의 나에게 그 깨달음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부피를 측정하는 법을 알아내고 외쳤다던 유레카와 같았다. 그러니까, 그만큼 나는 그녀를 운명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것이다.

 

.”

…….”

저기!”

 

전속력으로 달린 탓에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술기운에 머리끝이 살짝 뜨겁고. 그리고, 무작정 달려 도착한 곳에는 정말 운명처럼. 그녀가, 전정아가. 무대 뒤도 아니었다. 무대에서 조금 떨어진 수돗가에서. 나는 그녀를 마주했다. 그래, 그 땐 이것도 운명인 줄 알았다. 소란스러운 무대와 주점을 뒤로하고, 학교 전체가 시끄러운 축제 한 가운데 유일하게 인적이 드물었던 그 수돗가. 주황 조명이 부드럽게 그녀와 나를 비추고 있던 그 공간. 그녀를 찾아온 건 맞지만 백스테이지로 가기도 전에 이렇게 마주치게 되었다는 게, 정말 그 때의 나에겐 운명, 숙명, 필연처럼 느껴졌다. 지구가 우릴 위해 움직여 준 줄 알았다.

 

, 그러니까…….”

……?”

번호 좀 주세요!!!”

 

주황 조명에도 빛을 발하는 하얀 피부, 검고 긴 생머리, 동그랗게 빛나는 예쁜 눈동자. 그 눈동자가 나를 향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외쳤고, 내 머릿속은 포화 상태였다. 귓가는 온통 내 심장박동 소리로 가득 찼다. 그래서, 그 때의 나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게 무슨…….”

, 그러니까, 혹시 남자친구가 없으시다면,”

아니,”

 

그녀의 목소리가 여자의 것이라기엔 조금 굵고, 치마를 입은 그녀의 자세가 조금 어색하고. 그녀의 어깨를 타고 내려와 가슴까지 닿는 길고 새카만 머리카락이 어딘가 조금 인조적이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내가,

 

제가 그쪽한테,”

 

그 누구의 의지도 아닌 오롯이 나 혼자만의 의지로. 다른 누구의 손도 아닌 내 손으로 직접,

 

첫눈에 반했거든요…….”

 

좆 같은연애의 포문을 열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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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ke Love  (2) 2018.05.31

12

 

궁궐 안 모두가 잠든 깊은 밤, 금실로 수놓아진 비단 금침 안에서 태형은 지금 현재 일생일대의 고민을 끌어안고 제 인생에 있어 어쩌면 가장 커다란 결정이 될 지도 모를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느라 쉬이 잠들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디서든 잘 자는 태형을 잠 못 들게 하고 있는 그 고민은 바로 제가 느낀 그 이상한 기시감에 대한 고민이었으니.

비록 지금이야 조선에 떨어져 팔자에도 없는 왕비 행세를 하며 왕을 사모하는 역을 수행하고 있지만, 조선에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아니 조선에 떨어진 이후 꽤 오랜 기간 동안에도 혹시 제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될 줄은, 그러니까 제 성적 지향성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을 하게 될 줄은 태형은 전혀 몰랐으니까. 태형은 가만히 누워 눈을 감았다. 그래. 처음부터 천천히 생각을 해 보자.


 

Q. 언제부터였는가?

A. 잘 모르겠다.(웃음)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정국을 보며 설레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Q. 설렌다고? 그것뿐인가? 그게 좋아한다는 감정인가?

A. 그것 역시 잘 모르겠다. 난 조선에 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같은 동아리의 후배 한유라를 좋아하고 있었다. 물론 모종의 이유로 포기하긴 했지만, 분명 그건 좋아하는 감정이 맞았던 거 같은데.


Q. 말에 확신이 없다. 그렇다면 이 고민을 왜 하고 있는 것인가? 정국에게 느끼는 감정과 한유라에게 느꼈던 감정이 다른가?

A. 잘 모르겠지만, 좀 다른 것 같다. 아니다. 비슷한가? 그러고 보니 유라를 봤을 때 설렜던가? 유라가 가까이 와서 웃을 땐 좀 설렜던 거 같긴 한데…….


Q. 대답이 전부 모른다다.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시발. 태형은 제 스스로와 문답을 이어나가다 이내 반짝 눈을 떴다. 답이 안 나온다. 무언가 확실한 게 없다. 그러나 이상했다.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가 이상했다. 그러니까, , 정국이 지민을 찾아갔었다는 지민의 말에 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냔 말이다.

 

질투…….”

 

태형은 곰곰이 생각하다 저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에 제가 놀라 팔짝 뛰었다. 질투? 내가 왜 질투를 해? 박지민한테? 정국이는 그냥 후밴데? 그냥 후배가, ? 그냥 이제 약간 어? 고민이 있으면 다른 선배한테 찾아가서 술 먹고, ? 고민 상담 할 수도 있는 거지. 그 때는 나랑 사이도 안 좋았었고. 그러면 지민이한테 찾아갔을 수도 있지. 그게 뭐라고. 머리로는 다 이해가 되는데. 전혀 이상할 거 하나 없는 상황인데.

 

그런데 왜,”

 

내 기분이 이렇게 구리냔 말이다. 태형은 입술을 꾹 물었다. 태형이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해도, 2n년간 사회생활을 하면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은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정국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단순한 후배를 보는 선배의 감정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게 그저 후배를 향한 선배의 조금 강렬한 애정인지, 아니면 좋아하는 감정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제가 지금 맡고 있는 중전의 역할에 과몰입을 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전정국은 남녀를 통틀어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예쁘게 생겼긴 했다. 예쁘기만 한가? 잘생기기도 했고, 귀엽기도 하다. 정색하고 수업을 듣거나 과제를 하느라 인상을 찌푸릴 때면 그렇게 남자답고 잘생길 수가 없는데, 저에게 태형이 형,’ 하고 헤실 웃을 때는 또 그렇게 예쁘고 귀여울 수가 없으니까. 그래, 사실 전정국 정도면 남자고 여자고 그게 뭐가 중요아니 이게 아니고. 나 남자를 좋아하나? 여태까지 내가 남자를 좋아했던 경험이 있었나?

그러나 태형이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 보려 해도 태형의 과거 연애 기록은 0에 수렴하였으므로 태형은 곧 제 머릿속의 검색창을 종료시킬 수밖에 없었다. 대신 정국의 웃는 얼굴이 다시 불쑥 치고 올라왔다. 아니 이건 왜 자꾸 떠오르는 거야…….

 

제가 대신 마실게요. 그래도 되죠?’

 

그래. 정국이의 첫인상은 그거였다. 태형의 머릿속에 정국이 잘생긴 신입생에서 전정국으로 바뀐 순간.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정국은 제게 다정했던 것 같다. 태형이 눈알을 도로록 굴렸다. 딱히 해 준 것도 없는데 자신을 엄청 잘 따르는 모습이 무지 귀여웠었는데.

 

나야 상관없지만, 형은 들키면 안 되잖아요.’

형이랑 결혼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어서요.’

그러니까 이상한 오해 하지 말라구요.’

계속 걱정했잖아요.’

앞으로는 피곤하거나 힘들면 나한테 말해줘요, 형도.’

. 잡을래요?’

 

한 번 떠올리기 시작하니 기억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태형은 촘촘히 엮여 올라오는 정국의 목소리에 가만히 제 손을 심장께에 올렸다. 심장 박동이 차분하게, 그러나 평소보다는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다. 딱 기분 좋게 빠른 정도로.

 

…….”

 

가만히 누워 심장 박동을 느끼던 태형은 이내 저도 모르게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고 보니까, 키스도 했었지. 전정국이랑. 세상에. 후배랑 키스라니. 다시 생각해도 미쳤다.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지 잘 기억도 안 났다. 기억나는 건 온통 그 때의 감각들뿐이었다. 빙빙 돌아가던 머리, 뜨겁던 얼굴, 미친 듯이 뛰던 심장, 그리고…….

 

형 도와주는 거예요.’

 

전정국의 입술.

 

으악!!!!”

 

태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갑자기 잔뜩 클로즈업 되어 떠오른 정국의 입술과 그 감촉이 생각나서였다. 미쳤어 김태형!!! 왜 자꾸 생각하는데!!!!! 태형은 어느새 빨개져 있는 제 얼굴을 손부채질로 식히며 방 안을 어수선하게 돌아다녔다. 정신 차려. 이상한 생각 하지 마. 그건 그냥 어쩔 수 없이. 상황이 상황이었으니까. ? 그냥 어쩔 수 없이 한 연기 같은 거…….

 

생각해보니까 괘씸하네?”

 

미친 듯이 떠오르는 정국의 생각을 가라앉히려 아무 이유나 다 갖다 붙이던 태형은 순간 떠오른 생각에 방 안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까. 전정국 이 새끼 완전 선수 아냐?

 

사람이 왜 그렇게 아무한테나 다정해? 유라 좋아하면서?”

 

게다가.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었다지만. 어떻게 선배한테 키스할 생각을 해? 유라 좋아하면서?(2) 태형은 괜히 치고 올라오는 억울함에 입술을 꼭 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제가 설렜던 그 순간들 모두, 어떻게 보면 원인 제공은 전부 전정국이 한 거였다. 그런데 전정국은 한유라 좋아하잖아?(3) 그럼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태형은 제가 정국의 어장 안 싱싱한 활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래. 친했던 선배니까 도와주러 온 건 그렇다 칠 수 있다. 다정하게 대하는 것도 뭐, 천성이 그렇다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뭐? ‘형이랑 결혼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어서요.’? ‘, 잡을래요?’? 이건 완전히 작정하고 꼬실 때 하는 말 아니냐고?!(맞다)

 

그냥 그럴 수 있는 건가?”

 

한껏 열을 내던 태형은 문득 다시 차분해졌다내가 이상한 건가. 남들은 다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정국이가 옷고름을 매 줄 땐 심장이 뛰고, 박지민이 옷고름을 매줄 땐 좀 힘들었던 건 그냥 그 날의 컨디션 차이였던 건가. 내가 너무 연애를 못 해 봐서 저런 것들에 내성이 없고, 정국이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건가? 나 지금 아무것도 아닌 거에 혼자 땅 파고 있는 건가?

태형은 다시 고민에 빠졌다. 이러한 태형의 의식의 흐름과 행동이 혹자가 보기에는 답답하다고 여겨질 수 있겠으나 원래 제 3자가 보기에는 명확하다 못해 UHD화질로 선명한 그림도 당사자가 보기에는 흐리멍덩해 보일 수 있는 것이 짝사랑이란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그래서 태형은 결국 제 가슴을 꽉 메우는 답답함에 방문 앞으로 다가섰다. 아무래도 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형은 방문을 열어젖히려던 손을 멈추었다. 지금 제가 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 분명 밖에 앉아 있는 상궁들이 저를 따라 나올 텐데, 태형은 지금 저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을뿐더러 굳이 상궁들을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

 

그래서 태형의 시선은 자연스레 제 눈앞에 있는 문 대신 바람이 솔솔 새어 들어오고 있는, 살짝 열린 꽤 커 보이는 창으로 옮겨졌다. 저거, 내 몸 하나는 충분히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홀린 듯 창가로 다가선 태형은 잠시 뒤를 한 번 돌아보고, 문가를 쳐다봤다. 아까부터 제가 조금 큰 소리를 내도 아무 기척이 없는 것이, 아무래도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당직을 서고 있는 상궁들도 졸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금방 돌아올 거고, 멀리 나갈 것도 아니니까. 태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으아아!”

 

그러나 한 번 더 뒤를 살핀 후 창을 밟고 몸을 밖으로 빼자마자, 태형은 미처 보지 못한 코너에서 갑자기 등장한 누군가와 부딪혀 중심을 잃었고 그대로 몸이 기우뚱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 넘어질 것 같…….

 

…….”

…….”

 

그러나 쿵, 하고 마룻바닥으로 그대로 추락해 큰 소리와 함께 고통이 찾아올 것이란 태형의 예상과는 다르게, 꽤나 푹신하고 편안한, 흡사 과학적인 침대 같은 느낌이 대신 태형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꾹 감았던 눈을 뜬 태형은 제 앞에, 정확히는 밑에 깔린 인영에 눈을 깜박였다.

 

편안하냐?”

…….”

 

지민은 옷감을 한아름 끌어안은 채 그대로 마룻바닥에 뻗어 태형을 올려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태형이 느꼈던 편안하고 푹신한 감촉은 지민이 두 손 잔뜩 들고 있던 옷감의 감촉이었다. 물론, 그 밑에 깔린 지민도 태형의 푹신함에 한 몫을 했겠지만. 어쨌든 태형은 제 바로 코앞에 있는 지민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바로 그 때, 태형은 무언가 기시감을 느꼈다. 이 상황, 언젠가 비슷한 것을 경험했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안 비키냐? 편안한 김에 아주 망자의 길도 편안하게 걷게 해줘?”

.”

.”

너 지금 기분이 어때?”

 

? 지민은 제 위에 올라탄 채로 코앞에서 멍하니 묻는 태형의 질문에 인상을 찌푸렸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걸까. 갑자기 오밤중에 창문으로 튀어나와 저를 깔고 앉은 것도 모자라 비키지도 않고 있는 지금 이 상황에서의 내 기분을 묻는 건가 이 새끼?

 

네가 나를 깔고 누운 지금?”

.”

니 숨결이 내 코앞에서 느껴지는 지금?”

.”

좆같은데.”

그치! 좆같지!”

 

시발 저 반응은 또 뭐야……. 분명 험한 말을 내뱉었음에도 깨달음을 얻은 듯 환해지는 태형의 얼굴에 지민은 제 기분이 한층 더 더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좆같다는 게 저리 기뻐할 일인가? 안 그래도 조선에 와서 야작은 없겠구나 기뻐했던 것도 잠시 팔자에도 없는 야근을 떠맡은 탓에 평소보다도 더 진한 다크서클을 함유한 지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나저나 얘 왜 안 비키고 있는 거야. 지금 온 몸에 힘이 안 들어가서 밀치기도 귀찮은…….

 

그게 보통 친구 사이에 정상 반응인 거겠지?”

…….”

막 심장이 뛰거나 얼굴이 빨개지거나 그런 건 정상이 아닌 거지?!”

…….”

 

뭐요? 그러나 이어지는 태형의 말을 들은 지민은 창백해지는 제 얼굴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태형에게서 벗어나고자 꿈틀꿈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얘 지금 뭐라는 거야? 옷감을 잔뜩 쥔 두 팔을 태형이 깔고 앉아 있지만 않았어도 지민은 두 손을 제 가슴 위로 올려 방어 태세를 취했을 거였다. 심장이 뛰어? 얼굴이 빨개져? 설마 그거 지금 네 기분을 묘사하고 있는 거? 아니 시발 이 새끼 아무리 상황이 상황이라 해도 저렇게 얌전히 왕비 행세를 하고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러냐.”

…….”

 

갑자기 말이 없어진 지민에 이상함을 느낀 태형이 새하얗게 질린 지민의 얼굴을 쳐다보다 이내 떠오른 생각에 그 즉시 질색을 하고 소리를 지르며 지민의 위에서 내려왔다. !!!!!!! 아니거든!!! 지금은 나도 좆같거든!!!!!

 

, 그래?”

 

그럼 다행이고. 태형이 후다닥 내려옴과 동시에 재빨리 몸을 일으킨 지민이 흩어진 옷감을 주워모으며 진심으로 중얼였다. 내가 너 여자 옷 입는 거에 편견이 없다곤 했지만 그게 내가 그쪽 세계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었거든. 나는 네가 또 잘못 받아들인 줄 알았지. 위험(?)에서 벗어나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조그맣게 중얼거리던 지민은 그 순간 문득 고개를 드는 기시감에 말을 멈췄다. 아니, 잠깐만. ‘지금은나도 좆같거든? 그럼, 다른 때는 뭐, 설렜단 소리야? 그러나 지민이 고개를 들어 태형을 쳐다봤을 때, 지민은 물어보기도 전에 태형의 표정과 어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태형은 어딘가 깨달음을 찾은 표정으로 지민을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지민아,”

…….”

나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지민은 옷감을 가득 끌어안은 채로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형을 쳐다봤다. 아까야 정신이 없어서 되도 않는 오해를 잠시 하긴 했지만,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긴 했고, 지민은 본디 타고나기를 눈치가 빠르게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새삼스레 조선에서 태형에게 그 친구 사이에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 심장이 뛰고’ ‘얼굴이 빨개지는현상이 나타날 경우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는 추론을 쉽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설마 저 친구가 궁녀를 지칭하는 건 아닐 거고. 모든 정황과 근거들을 조합해 봤을 때, 태형이 지금 말하고 있는 상대는 단 한명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즉 이 상황은,

 

나 큰일 난 거 같아 지민아…….”

 

조선에서 호모가 빗발친다…….

 

*

 

말도 안 돼.”

 

태형은 제 손을 제 볼에 갖다 대며 짜부시켰다. 말도 안 돼. 태형의 입에서 정확히 12번째 같은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리고 그 말에 지민은 제 귀가 잠시 동안 로그아웃해주길 간절히 빌었다. 저 멀리서 상궁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태형을 밀치고 욕을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이 14번째 말도 안 돼,를 반복했다.

태형이 이렇게 일을 하고 있는 지민을 찾아와 지민을 붙잡고 하소연을 하고 있는 연유는 단 하나였다. 어젯밤 지민을 깔고 누운 그 사건 이후, 태형은 결국 제 감정을 자각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여태까지는 비교할 대상이 없어 긴가민가했는데 지민을 통해 비슷한 상황에 놓이고 나니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아니, 사실 솔직히 말하면 여태까지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 신기할 정도로 명백한 거였다. 제가 남자를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을 못 해봐서, 그동안은 유라를 좋아했으니까, 조선에 떨어진 이후 왕비가 되어 정신이 없었으니까 등등의 꽤 그럴듯한 변명에도 가려지지 않는 확실한 감정. 그러니까, 어젯밤 태형은 인정하고야 만 것이다.

 

내가,”

 

김태형이,

 

정국이를,”

 

전정국을,

 

좋아하나봐.”

 

좋아한다고.

 

나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 호모새끼들아……. 그러나 그 깊고 긴 고뇌 끝에 내려진 태형의 결론이, 지민에겐 TMI에 불과했으므로 지민은 입을 꾹 다문 채로 빨래를 널며 다시 한 번 상궁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내가 저 상궁들 몰래 김태형을 한 대 치는 데 성공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지민은 저와 태형을 쳐다보고 있는 상궁들의 형형한 눈빛에 곧 그 확률이 0이다 못해 마이너스인 것을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지민의 머릿속에선 김태형 이 새끼 일부러 내가 지한테 욕 못 하게 하려고 상궁들 데리고 온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몽글몽글 솟아나기 시작했다.

 

증즌므므.”

?”

끄즈즈스읍스스.”

…….”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옆에서 사랑타령이야. 지민은 상궁들에게는 들리지 않게끔 작은 목소리로 복화술을 사용하여 웃는 낯으로 태형에게 읊조렸다. 그러니까 결국 지금 전정국 김태형 서로를 좋아하는 거 아니야. 이런 커퀴새끼들. 속으로 생각하며 지민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돌려 빨래를 털었다. 지민은 둘이 지지고 볶든 사귀든 결혼을 하든 저와는 하등 상관이 없으니 제발 그냥 제 눈앞에서 사라져 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태형과 정국이 그간 얼마나 오랜 시간 어떻게 삽질을 해 왔는지 모르는 지민에게는 태형과 정국의 이러한 반응들이 그저 하찮게만 보일 뿐이었으니까.

 

, 그렇게 쉽게 말 할 문제가 아니야. 정국이는 한유라를,”

주상 전하 납시오!”

 

그러나 그런 지민의 시큰둥한 반응에 태형이 울상을 지으며 지민을 붙잡고 한탄을 시작하려던 바로 그 참이었다. 야간 시찰 이후 밀린 정사를 보느라 한동안 얼굴을 볼 수 없었던 정국의 등장을 알리는 내시의 목소리가 태형과 지민의 귓가에 닿았고 태형은 순간 쿵 하고 내려앉는 제 심장을 느꼈다. 아직 정국을 마주치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그 전에도 알게 모르게 정국을 의식하고는 있었지만 자각을 하고 나니 이젠 정정국의 자만 들어도 괜히 심장이 뛰었던 것이다. 태형은 고개를 숙일 생각도 못 하고 그대로 굳어 지민을 쳐다봤다. 제 등 뒤에서 여러 명의 사람이 걸어오는 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지민은 그런 태형의 허리를 쿡 찔렀다. 뭐 해, 고개 안 숙여그리고 그 찌름에 정신을 차린 태형이 고개를 숙인 순간, 정국의 향기가 확 하고 가까워졌다.

 

, 고개 들어도 돼요.”

 

늘 그랬듯이 저와 정국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신하들을 저 멀리 물린 채 혼자 다가온 정국이 태형에게 말했지만 태형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제 얼굴이 새빨개져 있을 거라는 것은 뻔했으니까. 화끈거리는 제 얼굴이 그걸 말해 주고 있었다. 세상에. 언제 이렇게 좋아하게 된 거야? 왜 여태 몰랐지? 어떻게 여태 몰랐지? 태형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심장이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유라를 좋아하던 때와는 쨉도 안 되는 감정의 쓰나미였다.

 

?”

, 김태형. 뭐해.”

, , !”

 

, 날씨가 덥네. 태형은 부러 정국과 눈을 맞추지 않고 눈을 도르륵 굴리며 고개를 들었다. 정국이 그런 저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으나 뭐라 변명을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에 태형은 애써 그런 정국을 외면했다.

 

태형이 형, 왜 내 눈을 안,”

, 바쁘다더니!”

…….”

여기까진 웬 일이야?”

 

태형이 재빨리 정국의 말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그런 태형의 태도에 살짝 미간을 찌푸린 정국은 무어라 말을 보태려다 이내 그만두었다. 어차피 여기서 더 캐물어봐야 태형이 순순히 진짜 이유를 알려 주지는 않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넘어가는 건 넘어가는 거고. 그거와는 별개로 괜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건데, 눈도 안 맞춰 주고.

 

, 확실한 건 아닌데, 현대로 돌아갈 단서를 찾은 것 같아서요.”

?!”

 

정국의 말에 태형이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지민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가 이내 상궁들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정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지민의 눈은 조선에 온 이래로 가장 밝게 빛나고 있었다. 누가 보면 조선에 제일 먼저 도착해 오랜 기간 있었던 사람인 줄 알 정도로. 그러나 정작 정국이 말을 꺼낸 순간 태형은 멍해지는 머리에 눈을 깜박였다. 현대로 돌아갈 단서? 그러나 그런 태형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민은 그게 뭔지 빨리 말해 보라며 정국을 채근했다.

 

유독 저랑 친하게 지내는, 아니지. 저랑 친하게 지낸 게 아니라 왕이랑 친하게 지냈던 것 같은 내시가 하나 있었거든요.”

…….”

그런데 오늘 저한테 뜬금없이 그러는 거예요. 정말로 그 나무가 영험한 것 같다고.”

“‘그 나무’?”

그래서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니까, 왕이랑 왕비랑 절에 가서 고목에 소원을 비는 행사가 매년 있대요. 그런데 대충 말하는 걸 들어 보니까 우리 워크샵 갔던 그 절 같은 거예요. , 우리 워크샵 갔을 때도 소원 들어주는 나무 있었잖아요.”

대박.”

 

지민은 정국의 말끝마다 반응하며 예능프로가 탐낼 리액션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었으나 태형은 정국의 말을 듣는 내내 멍한 상태로 멈춰 있었다. 소원 나무, 조선, 현대, 그리고 귀환. 어렴풋이 생각만 하고 있던 것이 뭍으로 올라오니 머리가 순식간에 복잡해졌다. 시끄럽게 뛰던 심장은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고 태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정국과 눈을 맞췄다. 태형이 정국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계속 시선을 딴 곳에 두고 있던 내내 정국은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는지 태형이 정국에게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태형은 정국의 눈을 마주할 수 있었고 정국의 까만 동공에 제가 가득 들어찬 그 순간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태형이 형?”

 

좋아한다. 나는 전정국을 좋아한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엄청 많이, 김태형은 전정국을 좋아한다. 차마 부정할 수도 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에 태형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불안감이 태형의 울대를 타고 울컥 넘어왔다. 혹시, 이대로 현대로 돌아가게 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건 아닐까?

 

, 김태형. 너 왜 그래?”

 

전정국은 한유라를 좋아하고, 김태형은 한유라와 전정국을 방해하는 인물 1. 후배와 짝사랑하는 상대를 놓고 꼴사납게 경쟁하다가 사이까지 틀어져버린 선배와 후배 사이로. 태형은 저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정국의 얼굴을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떨어트렸다. 조선에서야 유라도 없고, 공동의 목적이 있으니 연합을 했다지만, 이 관계가 과연 현대에 가서도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까? 태형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토록 친하다고 생각했던 정국과도 단 한 순간 만에 사이가 틀어져 버렸는데, 또 그러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으니까. 게다가, 어찌어찌 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해도, 유라와 정국이 잘 되는 것을 바로 옆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지켜볼 수 있을까? 유라의 경우에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쉽게 유라를 포기할 수 있었지만, 과연 정국도 그럴 수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지금 제가 정국을 좋아하는 감정이 유라를 좋아했던 것보다 훨씬 강렬한 감정이라는 건 알겠는데. 이것도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어디 아픈 건 아니?”

 

대답 없는 태형에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정국의 손이 태형의 이마에 닿았고 태형은 그 다정한 온기에 괜히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니야, 그냥 잠깐너무 더워서. 제가 생각하기에도 빈곤한 변명에 태형이 고개를 숙였다. 속이 답답하다. 분명 현대로 가는 단서를 찾게 된 건 좋은 일인데. 언제까지고 조선에 눌러 앉아 있을 수는 없었는데. 정국이도, 지민이도. 전부 한시라도 빨리 조선에서 벗어나 현대로 가고 싶을 텐데.

 

, 근데 나 갑자기 배가 고파서……. 나중에 얘기하자.”

 

현대로 돌아갔을 때, 정국이 없는 일상이 너무 허전하면 어떡하지 태형은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게 아무 말이나 내뱉고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


사실 이 편에 넣고 싶었던 내용은 따로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밀렸네요ㅠㅅㅠ

날씨가 너무.. 더워서.. 스프라이트 샤워를.. 드리고 싶었는데..

그래도 되게 빨리 오지 않았나요..?

이제 완결이 머지 않은 것 같아서 박차를 가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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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여기, 대한민국의 평범하지는 않고 평균보다 약간 잘생긴(이라고 본인은 누누이 강조했다) 2n살의 대학생 박지민이 있다. 단언컨대 그는 평생을 평범하게 살아왔고, 조금 특이한 일을 겼었다 해도 p<.05 수준의 역치를 넘지 않는, 통계적으로 지극히 평균의 범주 내에 속하는 일만을 경험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해 왔다. 말인 즉슨, 평범하게 태어나 평범하게 자랐고 여태까지 평범한 인생을 영위해 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

 

웬 생전 처음 보는 한복을 입은 남자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진짜로 날이 서 있는 것 같은 진검을 제 목에 들이대고 있는 바로 지금. 이건 과연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은 수준 내의 이상한 경험이 맞을까? 지민은 제게 겨누어진 진검에게서 느껴지는 살기에 꿀꺽 침을 삼켰다. 옆에는 김태형이 당황한 눈빛으로 그 남자를 제지하고 있었다. 지민은 숨을 살짝 들이쉬었다. 이게 대체무슨 상황이지.

 

, 내시가 맞다. 그러니 그 검을 당장 치우거라!”

…….”

 

그러나 태형의 그런 말에도 호위무사들은 쉬이 칼을 내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태형과 정국의 옆에 그림자처럼 항상 따라 붙어 왔던 호위무사들이었다. 중전의 몸을 만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내시의 얼굴을 모를 리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지민은 그들에게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일 테니, 아무리 중전의 명령이라 한들 쉬이 경계를 풀 수가 없는 거였다. 이것은 자칫하면 궐내 추문으로 끝나지 않고 왕에 대한 역모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사안이었으니까. 그나마 태형이 저지하였기에 감히 중전 마마에게 손을 댄 이 무뢰한의 손을 당장이라도 잘라버리지 않고 칼을 겨누고만 있는 거였다. 그러니 이제 정국이 나설 차례였다. 정국이 지민의 존재를 증명해주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정국이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할 말을 정리해 채 입을 떼기도 전에, 사지에 몰린 지민은 저도 모르게 먼저 입을 열었다.

 

, 제가!”

……?”

어렸을 때 옆집 누렁이에게 그만!!”

 

먹다 남은 간식 가지고 약을 올리는 게 아니었는데 너무 재밌어서 약을 올리다가 누렁이가 화가 나서 그만…….

지민은 재빨리 디테일을 덧붙였다. 연기의 핵심은 디테일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생존본능이란 이렇듯 대단한 것이다. 지민은 뇌리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아무렇게나 주워섬기며 저도 몰랐던 제 안의 작가적 재능을 가감 없이 펼쳤다. 지민의 상세하고도 구체적인 설명에 지민에게 칼을 겨누고 있던 호위무사의 얼굴이 공감성 고통으로 일그러졌고 그와 동시에 칼이 지민에게서 조금 멀어졌다. 그리고 그새를 놓치지 않은 태형이 재빨리 어서 칼을 치우래도! 하고 채근했다.

 

, 그래! 그런 비극에도 여기까지 오기 위해 분골쇄신한 아이다. 그것이 대견하여 최근 특채로 등용했다!”

…….”

중전의 말이 맞다. 오늘 시찰도 사실 이 자를 만나러 온 것이니 칼을 내리거라.”

 

지민의 절박한 연기와 태형의 설명, 그리고 결정적으로 정국의 동의까지. 결국 호위무사는 칼을 내리고 고개를 숙였고 한껏 긴장했던 지민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게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야……. 지민이 넋이 나간 채 조용히 읊조렸다.

 

*

 

조선이라고?”

보시다시피.”

뺨 때려 줄까?”

몰래카메…….”

누가 널 몰래카메라 하려고 이 정도 스케일로 정성을 들여.”

 

그건 그렇네. 제가 생각해낸 이 상황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설명들을 모두 성공적으로 반박해낸 태형의 간결하고도 핵심만 짚어내는 말에 지민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과 마찬가지로 지민 역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대학생답게 포기가 빠름특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누굴 고자로 만들어!!”

, 적응 되게 잘 하던데…….”

그거야 내가 순발력이 좋, !”

, 시끄러.”

 

그러나 납득하는 듯하던 지민은 이내 번뜩 떠오른 상황에 소리를 빽 질렀고 정국은 소리를 지르는 지민의 입에 떡을 쑤셔 넣었다. 소리 좀 낮춰요. 저기까지 다 들리겠네. 정국이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고 태형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그 낯선 모습에 눈을 깜박였다. 정국이가저런 성격이었던가? 저를 대하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정국의 모습에 태형은 괜히 서늘해진 제 목덜미를 쓸었다. 지민은 제 입에 가득 찬 떡 때문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우물거리며 온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고, 정국은 그러거나 말거나 태형이 아까 잔뜩 샀던 과자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태형은, 그런 정국과 지민을 번갈아 쳐다보다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멀찍이 떨어져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호위무사들을 의식하며.

 

그래도 죽는 것보단 고자가 낫잖아.”

그래요. 진짜로 목이 없어지는 것보단 가짜로 그게 없어지는 게 낫지.”

 

? 제 말을 거드는 차분하고 게 이어지는 정국의 목소리에, 태형은 정국을 돌아봤다. 아니 맞는 말이긴 한데……. 태형은 괜히 제 옷깃을 여몄다. 어쩐지 자꾸 주변이 추워지는 것만 같은데……. 태형이 지민을 돌아보자 지민도 같은 것을 느꼈는지 얼굴이 살짝 하얘져 있었다. 아니다. 손이 살짝 그 쪽으로 가 있는 걸 보니 정국의 태도 때문이 아니라 정국이 한 말 그 자체에 겁먹은 것 같기도 하고…….

 

으브븝!!”

다 먹고 말해.”

그래서 왜 갑자기 조선에 오게 된 건데!!”

 

그리고, 아무리 조선이라 해도 널 만졌다고 왜 내 목을 날려?! 퍼뜩 정신을 차린 후 떡을 꿀꺽 삼킨 뒤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태형을 향해 말을 이어나가던 지민은 태형에게서 느껴지는 무언가 이질적인 기분에 잠시 말을 멈추고 태형을 아래위로 차분히 훑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정국을 보고, 다시 태형을 보고. 다시 정국을 보고, 그리고

 

근데 김태형 너 왜…….”

…….”

여자 옷을…….”

 

지민이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태형은 그제야 아, 하고 제 몸을 더듬었다. 여태껏 계속 중전으로 사는 것에 익숙해져서 제가 여자 옷을 입고 있는 것이 현대의 사람, 그러니까 지민에게 이상해 보일 거라는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지? 사실 나 왕비야? 조선의 국모가 되었어? 태형이 잠시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그 침묵을 잘못 이해한 지민이 할 말을 고르기 위해 입을 벌렸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리고 잠시 후, 지민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

취향을 존중한다, 친구야.”

?”

내가 패션디자인 학과잖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나도 여자 옷 보면 참 남자 옷과는 다르게 선택의 폭이 넓구나 생각해 본 적 있고 그런 점이 좀 아쉬웠던 적도 있어. 물론 그렇다고 난 여자 옷을 입어 볼 용기까지는 나지 않았었지만, 패션학도로서 너의 그 선구적인 발상을 존경하는 바고 그러니까 네가 좋아하는 거라면 난 친구로서 너의 그런 취향을 충분히 존중해 줄 의사가 있…….”

그런 거 아니거든!!”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듣다 못한 태형이 지민의 말을 잘랐고 지민은 말을 하다 멈추고 멀뚱히 태형을 쳐다봤다. 여전히 얼굴엔 안쓰러움이 묻어 있는 채였다. 그럼 뭔데. 그러나 막상 지민의 그 표정에, 태형은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굳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사실 내가 조선에서 여장을 하게 됐어. 왜냐면 내가 중전이거든……. 어떻게 말해도 이상해 보이는데?

 

괜찮아. 애써 무마하려 하지 않아도 돼. 나는…….”

태형이 형이 왕비라서 그래요.”

?”

 

뭐라 변명을 해야 하긴 하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 사이 정국이 (역시나)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 말에, 지민의 눈은 커다랗게 동그래져 정국을 향했다. ?! 왕비?!

 

왕비라니, 그럼 왕은 누군데?”

저요.”

……?”

 

이게 무슨 갑자기 분위기 조선왕조실록이 아니고. 지민은 정확히 0.7초간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입을 합 다물었다. 내가 지금 헛것을 듣는 건가? 아님 얘네가 지금 날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건가. 사실 타임슬립도 아니고 정말 그냥 평범한 대학생을 상대로 하는 방송국 특집 몰래카메라라던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아는데, 꿈도 아니고 몰카도 아니에요.”

아니, 말이 안 되잖아!!”

정 못 믿겠으면 아까 그 사람한테 가서 사실 나 내시 아니라고 말해보든가요.”

 

아니 그건 좀……. 지민이 말끝을 흐렸다. 제 눈앞에 펼쳐진 이 상황을 믿지 못해 벌떡 일어났던 지민은 슬쩍 다시 앉아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자신은 조선에 떨어졌고, 정국과 태형도 조선에 떨어졌다. 그리고 태형이 여자 옷을 입고 있기에 물어보니 조선의 왕비란다. 그리고? 왕은 전정국.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은,

 

개판이네…….”

…….”

언제부터 조선 왕실이 이렇게 개족보가 됐어?”

 

나한텐 말도 안 해주고? 내가 한국사 하느라 얼마나 쌔가 빠졌는데……. 문득 제가 쳤던 수능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온 지민이 다시 한 번 태형을 훑었다. 조선에도 남색이 있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설마 왕비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을 줄이야. 조선이 생각보다 많이 개방적인 나라였구까지 생각하던 지민이 문득 눈을 깜박였다. 아니, 잠깐만. 아무리 그래도 남자가 왕비는 좀혹시 설마…….

 

김태형 너 여ㅈ…….”

아니야.”

 

그 뒤로 어떤 말이 나올지 예상한 태형이 지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말을 막았다. 그거 아니야. 나 건실해. 태형의 단호하고 확신에 찬 눈빛에 지민이 아, 하고 감탄을 터뜨렸다. , 그래……. 다행이네. 친구의 신체적 안위에 대한 안도의 말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상황 이해됐으면, 뭐 좀 물어봐도 되냐?”

 

결국 지민이 천천히 제가 처한 상황에 납득하며 다시 한 번 상황을 반추하고 있는 동안, 태형이 조심스레 물었다. 여태까지는 정국과 저만 이곳에 떨어진 줄 알았는데. 지민도 왔다는 것은 무언가 연관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쩌면 지민의 등장이 현대로 돌아가게 해 줄 단서일지도 모른다. 물론 조선에서의 생활이 싫다거나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다거나 뭐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언제까지고 조선에 눌러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뭔데?”

너 어쩌다가 여기 왔어?”

 

태형이 꿀꺽, 침을 삼켰다. 정말 도움이 될까? 정국과 자신은 겹치는 것이 하도 많아 무엇이 정국과 저를 조선에 떨어지게 했는지 알기 힘들었다. 같은 과, 같은 동아리, 그리고 한유라까지. 한 희빈이 한유라와 몹시 닮은 것으로 보아 혹시 한유라가 얽혀 있지 않을까 했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도 한 희빈은 이 시대의 사람이었고, 지독히도 저를 싫어하고 있으니 어떻게 뭐라 떠 볼 수도 없었다. 게다가 어쩐지 정국은 한 희빈에게 물어보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나 왜 여기 왔는데?”

짚이는 거 없어?”

없어. 전혀. 나 되게 착하게 살았는데…….”

 

시발 어쩌다가 조선에 떨어져서 팔자에도 없는 고자 코스프레나 하고 있고. 지민이 꽤나 억울한 듯 웅얼거렸지만 지민이 그러거나 말거나. 태형은 끙, 하고 팔짱을 꼈다. 그럼 대체 뭐지? 무슨 연관성이지? 태형이 골몰하고 있는 사이, 정국이 그런 태형을 도우려는 듯 입을 열었다.

 

여기로 오기 전 마지막 기억이 뭔데요?”

마지막 기억?”

뭐 하고 있었냐구요.”

할아버지 댁 갔다가,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소화도 시킬 겸 등산 갔다가낮잠?”

…….”

 

한마디로 아무것도 안 했다는 소린데. 지민의 말에 태형이 조금 더 크게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아무래도 쉽사리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아 보이네. 태형이 웅얼거리며 미간을 좁히자 정국이 태형의 등을 살짝 두드렸다. 이유가 없진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언젠가 돌아갈 방법이 생기겠죠. 설마 평생 여기 있겠어요.

 

아니…….”

 

정국의 위로에 태형이 고개를 들었다. 사실, 언젠가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리고 제가 없는 현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살짝 불안하긴 해도 조선에서 살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스트레스도 없고, 해야 할 것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딱히 걱정하고 있는 건 아닌데…….”

 

그 날 이후 이제 평생 인사도 못 하고 지내는 사이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정국과 이렇게 편하게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할 수도 있게 됐고. 막상 정국은 지민에게 말하느라 제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지만, 태형은 어쩐지 간질거리는 기분에 고개를 숙였다. 상황이 어쨌든, 이유야 어쨌든. 정국과 이렇게 다시 웃으며 대화할 수 있게 된 이 상황이 태형은 좋았다. 이전에나 지금에나, 정국은 태형에게 특별한 후배였으니까. 고등학교 때까지 이렇다 할 동아리 생활을 하지 않았던 태형에게 처음 생긴 제대로 된 후배였고, 많은 동아리원 중에서도 자신을 유난히 잘 따르던 후배였다. 뭐 꼭 처음 생긴 자신을 잘 따르는 후배였기 때문만은 아니고, 그냥 정국 자체가 특별했던 거지만. 왜 특별했냐고 물으면 글쎄, 태형도 알 수 없었다. 그냥 정국을 보면 기분이 좋았다. 잘 해주고 싶고, 웃는 얼굴이 보고 싶고.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그래서 그 때도, 제가 처음으로 좋아한다고 자각했던 유라를 쉽게 포기할 수 있었던 거였으니까.

 

태형이 형.”

 

정국을 위해.

 

*

 

비록 조선에 떨어진 이유나 현대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것에 대해서는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이 상황에서 지민은 태형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긴 했다. 외로운 궁중 생활에 자신의 편이 되어줄 한 줄기 빛같은 의미에서는 아니고, 지극히 실용적이고 직접적인 의미로.

 

내가 왜 니 옷고름을 쳐 매 주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건지 설명해봐.”

내시라서?”

시발…….”

 

지민이 태형의 풀어헤쳐진 옷고름 앞에 서서 주먹을 쥐며 읊조렸다. 조선에 온 지 이틀, 지민은 등장한지 단 하루 만에 그 누구보다도 중전의 가까이에서 중전의 의복을 맡아 관리하는 요직을 꿰차는 기염을 토하며 궁궐 안 사람들에게 세상살이에 있어 인맥의 중요성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딱히 본인이 원한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사실, 제아무리 내시라 한들 내시 역시 남자이기 때문에 보통 상황이었다면 그런 근직(近職)을 내시가 맡는 것은 절대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겠지만 정국, 그러니까 왕의 동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취업의 기쁨도 잠시, 지민은 이내 제가 해야 할 일이 태형의 옷을 다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쟤는 왕빈데, 나는 내시네?’류의 것은 물론 아니고(지민은 왕비의 자리까지 탐할 정도로 권력욕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2년간 열심히 공부한 것을 처음으로 실전에 적용할 수 있게 된 기회가 하필 김태형의 옷 관리라는 것에 대한 현타였다. 내가 이러려고 패디과에 왔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다들 첫 취업 내지는 인턴에 대한 로망 정도는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 로망이 제 절친한 친구의 옷 관리하는 것으로 깨부숴지다니!

 

나는 뭐 좋은 줄 아냐…….”

 

그러나 지민의 그런 투덜거림에 억울한 것은 태형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태형도 이 상황이 뭐 그닥 그렇게 많이 달가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마주한, 오늘 입을 옷을 들고 들어온 똥 씹은 표정의 지민에 태형도 남몰래 한숨을 내쉰 차였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더 이상 궁녀에게 제 몸을 맡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 정도일까. 낯선 여자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 어색하기도 했고, 제가 입고 있는 옷을 정돈하는 일이니만큼 제가 남자인 것을 들키기라도 할까 그동안 조마조마하긴 했었으니까. 물론 뭐,

 

너 숨 쉬지 마, 시발. 숨결 느껴지니까.”

 

작업 특성상 지민과 얼굴을 매일 가까이 해야만 하는 것이 퍽 달갑지만은 않긴 했지만 말이다. 태형이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거든. 하고 이를 악물고 대꾸하며 숨을 흡 들이쉬었다. 이상하네. 정국이가 매 줄 때는 이렇게까지 항마력이 딸리진 않았었는데정국이는 박지민처럼 투덜거리지 않고 담백하게 군말 없이 해 줬어서 그런 건가. 태형은 지민이 제 옷고름을 매어주는 동안 몇 번이고 욕을 하고 싶은 것을 참으며 주먹을 쥐었다. 참아, 참아.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

 

다 됐다.”

 

억겁 같았던 몇 초가 지난 후, 짧은 한숨과 함께 지민이 떨어져 나갔고 태형은 참았던 숨을 파 내쉬었다. 이 짓을 매일 아침 해야 하는 거야? 태형이 참담하게 중얼이자 그에 조그맣게 욕을 읊조리던 지민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태형을 쳐다봤다. , 맞다 그러고 보니까 너.

 

전정국이랑 싸웠다 하지 않았냐.”

…….”

어쩌다가 둘이 같이 있게 된 거야? 그것도 부부로.”

 

세상에 한 여자를 두고 싸우던 남자 둘이 극적 타결을 서로와 결혼하는 것으로 볼 줄이야. 솔로몬도 미처 생각하지 못할 완벽한 합의가 아닐 수 없지 않은가. 지민은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지민의 그 말에, 태형은 그런 거 아니야, 하고 지민의 앞에 주저앉았다.

 

그냥 와 보니까 이미 부부였어.”

…….”

…….”

하긴. 설마 너네 의지로 결혼하진 않았겠지.”

 

와 보니 이미 부부였다니. 잠시 어이없음에 멍하니 입을 벌리고 눈을 깜박이던 지민은 이내 이미 부부였다는 설명이 와서 결혼했다는 설명보다 합리적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말하지만 지민은 납득(포기)이 빠른 편이었다.

 

그래서, 화해는 했고?”

화해?”

너네 둘 싸웠었던 거 아니었어? 서로 인사도 안 하고 지냈다며. 너 나한테 전정국 개새끼라고 그랬잖아. 그러고 보니까 그 때 왜 그랬냐? 난 아직 너네 왜 싸웠는지도 몰라.”

…….”

 

지민의 말에 태형이 조그맣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정국과 그렇게 된 이후, 지민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었다. 정신이 없기도 했고, 그 날 정국에게 충격의 형과 사이가 틀어지는 한이 있어도 유라를 포기할 순 없다발언을 듣고 정신없이 지민을 찾아가 지민의 멱살을 잡고 엉엉 운 이후, 지민을 포함한 타인에게 정국에 대한 말을 일절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날의 기억은 제게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으니까.

 

화해는안 했는데.”

뭐야, 그럼 여전히 냉전 중인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화해를 안 했다기 보다싸운 적도 없었던 것 같은 분위기랄까. 태형이 조그맣게 읊조렸다. 그 말에, 지민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싸운 적도 없었던 거 같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냥, 정국이가 그 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 말을 안 해.”

그 날?”

 

태형의 말에 지민이 되물었다. ‘그 날이라니. 무슨 날? 태형과 정국의 관계에 있어 지민이 떠올릴 수 있는 날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태형이 울면서 저를 찾아와 멱살을 잡은 날, 그리고 정국이 역시나 울면서 저를 찾아와 멱살을 잡은 날. , 지민은 영문도 모른 채 울면서 저를 찾아온 태형과 정국에게 두 번이나 멱살을 잡히고 술 상대가 되어 줬던 것이다. 아니 그러고 보니까 근데 진짜 이것들이…….

 

생각해 보니까 열받네? , 너나 전정국이나, 나를 무슨 호구로 아냐? 뭔 일만 터졌다 하면 나한테 와!”

?”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도 안 해주고! 무작정 쳐들어와가지고 술만 마시고 가고! ? 나 야작하는데!! 내 자취방이 너네 고민상담소야?! ?! 내가 상담사냐고!”

정국이도 너 찾아왔었어?”

 

딱히 설명할 말이 없어 가만히 지민의 말을 듣고만 있던 태형이 지민의 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정국이 제 자취방에 찾아와 단 둘이 술을 마셨다는 지민의 말을 들은 그 순간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정국이가 너 자취방에 왔었다고? 둘이 그렇게 친해? 그러고 보니, 태형은 정국에게도 제가 모르는 다른 친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여태까지는 해 본 적이 없었다. 정국을 알게 된 이후로 태형과 정국은 주중 주말 가리지 않고 붙어 다녔기 때문에 과내에서도 거의 샴쌍둥이라 불릴 정도였고, 정국과 사이가 틀어지고 난 후에는 부러 정국과 관련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었으니까. 그래, 생각해 보니까 정국에게도 분명 제가 모르는 친구들이 있을 거였다. 그리고 제가 모르는 사생활도. 그러니까 정국은 그들과 얘기도 하고, 어쩌면 고민 상담도 하고, 또 어쩌면 그들 중 누군가와는 사귀었을 수도 있고…….

 

넌 지금 이 상황에 그게 묻고 싶냐?”

아니, 둘이 아는 사이라는 건 들었는데자취방에 찾아가서 술 마실 정도로 친한 줄은 몰랐어. 많이 친해?”

아니 그니까 지금 그게 나한테 물어볼 말이냐고…….”

그럼 뭘 물어봐야 하는데?”

 

사실 물어보고 싶은 건 이것 말고도 많았다. 지금 이 순간 태형은 정국에 대한 궁금증이 갑자기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앗기 때문에. 얼마나 친해? 언제부터 친해? 왜 친해? 그럼 너 정국이에 대해서 이제 약간 좀 많이 알아? 등등. 이유는 자기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태형은 지금 호기심 천국 상태였다. 그런데 박지민이 지금 이런 걸 물어보길 원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그럼 뭐지? 태형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였고 그 순진무구한 태형의 눈빛에 지민은 그 순간 제 뇌 안의 어이와 어처구니가 사이좋게 손을 잡고 외출을 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김태형이 희대의 눈새이기 때문에 전정국과 여태까지 이어지지 않은 것이, 그래서 제가 일찍이 전정국과 김태형의 사이와 서사를 아는 둘의 교집합 친구 No.1이 되지 않은 것이,

 

너네 진짜 짜증난다…….”

 

어쩌면 저에게는 다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 ?”

 

그러니까, 여태까지는 말이다.



+


태형이는 과연 성공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인가!

오랜만에 왔는데 별 내용 없이 분량상 애매한 곳에서 끊기네요ㅠㅅㅠ.. 

다음 편은 최대한 빨리 갖고 오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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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형 진짜 왜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도 아예 제 차로 같이 타고 가자는 석진의 말에 식겁해 우리 밥 먹고 바로 영화 보러 가기로 하지 않았냐며 없는 약속까지 만들어 낸 태형이 차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석진에게 물었다.

아무리 제가 석진을 안 세월에 비해 만난 시간은 짧다고 해도, 또 제가 알던 석진의 성격이 만나지 못했던 몇 년 간 바뀌었다고 해도. 지금 석진의 이러한 행동들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아무리 초면에 정국이 실례를 했다지만 그 웃으면서 내리찍는 화법은 웬 것이며, 방금 전에 그래 놓고 같이 밥 먹으러 가자니까 바로 응하는 건 또 뭐냐고. 그러나 그런 태형의 반응에도 석진은 태연히 차에 시동을 걸 뿐이었다. 뭐가?

 

갑자기 왜 같이 밥을 먹자 그래? 언제 봤다고.”

 

사실 이것 말고도 물어보고 싶은 건 더 많았지만, 다른 질문들은 애써 삼켰다. 혹시라도 제가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었냐 물으면 석진이 그럼 걔는 너한테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하고 되묻기라도 할까 봐. 그러나 그런 제 걱정은 전혀 쓸데없는 것이었음을, 태형은 석진의 차가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잠시 말없이 정면을 응시하던 석진이 입을 연 순간 알게 되었다.

 

쟤지?”

?”

네 뮤즈.”

?”

너 한국으로 돌아가게 한 사람.”

 

생각지도 못했던 석진의 말에 태형은 그대로 굳어 눈만 깜박였다. 그런 태형의 얼굴을 쳐다보던 석진은 이내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씩 웃으며 다시 정면을 쳐다봤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태형은 멍하니 그런 석진을 쳐다봤다. 뭐야, 이 형?

 

마스크는 좋네. 이름이 전정국이었던가.”

어떻게…….”

민 감독 영화에 심심찮게 나오던데. 연기도 곧잘 하고.”

 

태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형이 이렇게 눈치가 빨랐나? 아니면 내 행동이 그렇게 티가 났던 건가. 석진이 제 감정을 어디까지 눈치 챈 것인지 알 수 없어 태형은 손을 꼭 쥐었다. 석진의 말을 듣고 나니 석진의 이상했던 행동들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석진은 처음부터 제가 귀국하는 것을 의아해했고, 자연히 제가 귀국을 결정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인 그 뮤즈에 대해 궁금해 했다. 정국과의 사이가 애매해져버린 후 태형이 정국에 대해 말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그걸 알아챈 후에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마음 한 구석에 계속 궁금증은 남아 있었을 테고. 태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뒤따라오고 있는 정국의 차를 쳐다봤다. 이대로 석진과 정국을 같은 공간 안에 둬도 괜찮을까?

 

그리고 지금도, 망설이는 이유가 저 애 때문인 것 같고.”

아니 형, 그건 아니,”

 

태형이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석진의 차가 부드럽게 멈췄고 씩 웃은 석진이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발렛 파킹 직원에게 키를 맡기고 태형이 앉아 있는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려는 직원을 제지한 후 친히 조수석 문을 열어 태형을 에스코트했다. 그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얼떨결에 석진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나온 태형이 눈을 깜박였다. 석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때, 석진의 얼굴이 확 하고 가까워졌다. 태형은 순간 숨을 멈췄다. 석진의 목소리가 가깝고 조용하게 귓가에 울렸다. 그러니까,

 

쟤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그러는데,”

…….”

나 조금만 놀려도 되지?”

 

? 그러나 태형이 석진에게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석진은 제 뒤를 향해 씩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에 태형이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정국과 눈이 마주친다. 태형이 꿀꺽, 침을 삼켰다. 진짜 이대로,

 

금방 따라 왔네요. 정국 씨, 여기 괜찮죠? 일부러 가까운 곳으로 왔는데.”

, .”

 

같이 있어도 괜찮은 거냐고.

 

*

 

아깐 실례했습니다. 태형이 형이 싫어하는 것 같아서 그랬던 건데.”

그럴 수도 있죠. 다른 사람들도 종종 오해하더라구요.”

많이 친하신가 봐요, 태형이 형이랑.”

특별한 사이긴 하죠. 안 지 오래되기도 했고.”

제가 괜히 두 분 식사하시는 데 끼어든 건가요?”

괜찮아요. 태형이랑은 뭐, 맨날 같이 먹는데요. 오랜만에 여럿이서 먹으니까 좋네요.”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모르겠네. 태형은 제 몫의 파스타를 꾸역꾸역 입에 넣었다. 분명 아무렇지도 않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화인데 왜 이렇게 숨이 턱턱 막히는지. 태형은 파스타 대신 핑퐁처럼 주고받아지는 대화에 집중했다. 그러나 이 장소에서 긴장하고 있는 것은 태형밖에 없는 듯, 평화로운 평일 오후의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전부 안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태형이 앉아 있는 이 테이블도 마찬가지였고. 그게 설사 표면적인 것뿐일지라도 말이다.

 

태형이 형한테 이렇게 친한 형이 있는 줄 몰랐네요. 태형이 형 주변 사람은 대충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 그거 좀 이상하게 들리는 거 알아요?”

 

쿨럭. 태형은 저도 모르게 작게 기침을 했다. 정국의 시선이 잠시 태형에게 닿았다가 다시 석진에게로 향했지만 태형은 그런 정국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불안한 눈빛으로 석진을 쳐다봤다. 이 형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나 그런 태형의 불안함에는 아랑곳 않고, 석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꼭 자기 애인 주변 사람 견제하는 것 같잖아요.”

그게 무슨…….”

근데 그럴 리는 없으니까.”

 

진짜 이 형이 어디까지 하려고! 태형은 입술을 꼭 문 채로 석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꽤 세게 찌른다고 찌른 거였는데, 석진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정국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프지도 않나? 태형은 불안한 눈빛으로 정국을 쳐다봤지만 정국의 시선은 자신을 향해 있지 않았고 마지막 희망으로 쳐다본 윤기 역시 이 상황이 흥미로운 듯 그런 석진과 정국을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네. 태형은 속 타는 마음에 물컵을 꼭 쥐었다. 아무래도 이 레스토랑을 나가자마자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약국에 가는 것이 될 듯싶었다. 방금 먹은 파스타가 얹힐 것은 분명해 보였으니까. 빨리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 태형이 꿀꺽, 침을 삼켰다.

 

왜 그럴 리가 없,”

아무튼 뭐, 대답을 하자면,”

…….”

제가 쭉 뉴욕에 있었어서 그럴 거예요. 뉴욕 살거든요. 지금은 태형이 보러 잠깐 온 거고.”

, 그럼 다시 돌아가시는 건가요?”

. 그래야죠. 그래서 제가 지금 태형이한테 잘 보여야 돼요. 태형이 뉴욕으로 데려가려면.”

!”

 

. 태형이 한 박자 늦게 짧은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지만 이미 석진의 말은 정국에게 닿은 후였고, 그 말을 들은 정국의 시선 역시 태형에게 닿은 후였다. 태형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김석진 진짜. 아군이야 적군이야. 태형은 으득 이를 물었다. 확실한 건, 아군이든 적군이든 지금 김석진은 시한폭탄과 같다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진짜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릴 기세였다. 태형은 석진의 허벅지를 꾹 눌렀다. 그만 해, 제발…….

 

태형이 형을 뉴욕으로 왜…….”

, 그건 H 감독 영화

, 영화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이번엔 늦지 않게, 태형이 석진의 허벅지를 세게 꼬집으며 외쳤다. 다행히도 석진의 짧은 비명은 태형의 큰 목소리에 묻혔고 태형은 그런 석진을 향해 어둡게 웃어 보였다. 흐즈 믈르그 흐쓸튼드……. 그러나 그런 태형의 표정에도 석진은 아프지도 않은지 빙글빙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태형이 입술을 꾹 물었다. 이 형 진짜 왜 이래? 태형이 석진을 향해 최대한 티 나지 않게 눈을 부라리고 있을 때쯤, 정국이 입을 열었다.

 

영화?”

, , 영화! 밥 먹고 영화 보기로 했거든. 예약해 둔 시간이 좀 촉박할 것 같아서! , 하하, !”

“H 감독은 무슨 말,”

태형이가 H 감독을 제일 좋아하잖아요. 근데 최근 개봉작을 아직 못 봤다고 해서. 그거 보러 가려고 했거든요.”

 

이제야 좀 제 의도를 이해한 것인지 처음으로 석진이 태형을 거들었고 태형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영화. H 감독 영화 보러 가기로 했거든. 태형은 석진의 말을 반복하며 괜히 볼을 긁었다. 지금 태형의 머릿속에는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석진이 눈치를 좀 챈 것 같아 다행이긴 해도, 태형은 한 번도 석진에게 정국에 대해 제대로 설명한 적이 없었으니 석진은 악의 없이 실수를 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태형은 오랜만에 정국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굳이 석진이 도와주지 않아도 말이다.

 

, 다 먹었지? 이제 슬슬 일어나자. 진짜로 영화 시간 늦겠다.”

그거 그냥 취소하면 안 돼? 이렇게 갑자기 일어나면 좀 실례잖아.”

…….”

 

바로 이렇게. 태형이 석진의 옷깃을 살짝 잡아끌며 말했지만 석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눈치를 챈 것 같았는데, 그냥 착각이었나? 태형은 애가 타는 마음에 입술을 꼭 짓씹었다. 김석진 진짜, 도와주질 않네. 아무래도 석진에게 정국과 제 관계에 대해 제대로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굳이 정국을 화제로 꺼내놓고 싶지 않아 말하지 않았던 것이 이런 상황을 불러올 줄이야. 태형은 어떻게 하면 석진에게 지금 당장 이 곳을 나가고 싶다는 제 뜻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이 앞에서 대놓고 나가자고 할 수도 없고, 문자를 보낼 수도 없고…….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잠시 고민하던 태형은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짧게 생각해 본 결과 가장 최선의 선택은 화장실을 가는 척 자리를 떠서 석진에게 전화를 거는 거였다. 나중에 설명할 테니 일단 나오자고 직접적으로 말할 생각이었다. 정국과 윤기의 앞에서는 아무리 간접적으로 눈치를 줘도 석진은 눈치를 챌 것 같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석진과 윤기, 그리고 정국의 시선이 잠시 태형에게 닿았고 태형은 제가 이 셋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 잠시 동안 혹여 석진이 허튼 말을 할까 석진의 어깨를 부러 꾹 눌렀다. 제발 3분만 입 닥치고 있어……. 차마 입으로 내뱉진 못하고, 눈을 통해 석진에게 간절한 텔레파시를 보낸 태형이 잰 걸음으로 테이블을 나섰다. 그 와중에 레스토랑은 또 쓸데없이 커다래서. 화장실까지 가는 그 짧은 거리가 태형에겐 꼭 천릿길처럼 느껴졌다.

 

*

 

.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오늘은 이만 가자. 알겠지?”

 

태형은 두 손으로 핸드폰을 붙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 너 돌아오면 가자. 석진의 이 말이 이토록 반갑게 느껴질 일인가. ‘내 이름 말하지 말고 잠자코 듣고만 있어.’로 시작한 짧은 통화 끝에, 마침내 얻어낸 그 대답에 태형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드디어 벗어날 수 있겠구나. 오늘 정국을 마주한 이후로 계속해서 답답하게 조여 왔던 숨통이 이제야 좀 트이는 느낌이었다.

 

언제까지 이래야 되냐.”

 

전화를 끊고, 차가운 물에 손을 씻고 나니 그제서야 좀 돌아오는 것 같은 정신에 태형이 멍하니 거울을 쳐다보며 중얼였다. 알고 있다. 이렇게 피하기만 해서 해결될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마주하기가 무섭다는 핑계로 벌써 몇 년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만 있으니까. 태형은 제 손에 닿아 있는 차가운 물방울을 응시했다.

그렇지만. 핑계라고 하면 핑계지만. 태형은 손을 문질렀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정국도 답을 주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확실한 감정, 애매한 관계. 그 간극 사이에서 태형은 끊임없이 상처받았고 그걸 정국이 모르지는 않았을 거라고 태형은 생각했다. 어쩌면 답을 주지 않는 것이, 그게 답인 걸까. 몇 년째 유지되고 있는 이 한없이 가벼운 관계가, 정국이 제게 줄 수 있는 가장 무거운 감정인 걸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리 끝없이 물어도 혼자서는 답을 낼 수 없었지만.

 

…….”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정국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물음이었다. 정국은 태형에게 태양 같았다.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정국은 빛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결국 태형은 언제나 시선을 빼앗겼으니까.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떠올랐고 냉정해지려 해도 차가워지지 않았다. 정국에 대한 지리한 이 감정은 한동안 보지 않으면 사그라진 듯 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생겨났다. 태형이 물기 묻은 손으로 제 눈가를 꾹 누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눈가가 시렸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태형이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고, 머리 아프고. 한 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고 나면,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자. 그리고 찬찬히 생각을 해 보는 거다. 정국과의 관계에 대해서. 사실, 답은 정해져 있겠지만.

 

…….”

 

그러니까, 정말로 그러려고 했다. 외면하지 않고, 정국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했다.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태형 스스로. 혼자 깊이 생각하고 결론을 내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태형이 형.”

 

태형은 그 자리에 멈춰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진정되었던 심장이 다시 뛰고, 조금 트였던 숨통이 다시 꽉 답답해져 오기 시작했다.

 

잠깐 얘기 좀 해요.”

 

코너를 돌아 화장실을 빠져나온 그 순간 마주한, 벽에 기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전정국 때문에.

 

*

 

나한테 할 말 없어요?”

 

여기선 좀 그렇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자는 정국의 말에 비상구 계단으로 자리를 옮긴 후에 얼마나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을까. 태형은 정국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침묵의 시간 동안 정국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태형은 입을 꾹 다물고 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존심이라면 자존심이고, 무서움이라면 무서움이다. 그러나 그 침묵을 깨고 제 귓가에 닿은 정국의 목소리에, 태형은 결국 고개를 들어 정국을 마주했다. 태형이 말없이 바닥을 쳐다보고 있는 내내, 정국의 시선은 줄곧 태형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태형이 고개를 들자마자 둘의 시선은 공중에서 얽혔다. 평소 같았으면 그 눈에 생각이 멎었을 태형이었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태형은 입을 벌렸다.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닌, 어이없음의 감정에 자연스레 나온 반응이었다.

 

너는,”

 

나한테 할 말 없어? 그러나 뒤에 딸려 나와야 했던 단어들은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대신 태형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태형의 모습에 정국의 미간이 작게 좁혀졌지만 태형은 눈치 채지 못했다. 태형은 주먹을 꼭 쥐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고, 눈가가 시려 왔다. 여기서 울면 진짜 답 없는 거야, 김태형. 참아. 태형이 제 자신을 다독였다. 이렇게 눈물이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정국의 앞에 서면 감정이 널을 뛰어서 통제가 힘들어졌다. 그러나 이제 태형은 정국을 보면 널을 뛰는 감정에 익숙해지다 못해 그런 자신을 달래는 것도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게 불행 중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아이러니한 것은, 그 널뛰는 감정을 통제하진 못해도 간신히 숨기고 감출 수 있는 것 역시 정국의 앞에서였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제가 정국에게 갖고 있는 감정을 들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정국과의 이런 가벼운 관계마저 끊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태형으로 하여금 감정을 숨길 수 있게 했으니까.

 

없어.”

 

그래서 태형은 그렇게 대답했다. 정국에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묻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따지고 싶은 것도, 화내고 싶은 것도. 그러나 태형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말들과 감정 중에 정국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나같이 다 제 감정을 나타내는 것들뿐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럴 자격이 태형에겐 없었으니까. 뭐라고 물어볼 수 있을까. 왜 나한테 연락 안 했냐고? 현이 씨랑은 진짜 사귀는 거냐고? 태형은 시린 눈가를 꾹 눌렀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 누적된 피로와 감정이 같이 태형을 짓누르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도 없어요?”

전정국.”

…….”

없어. 너한테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그거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태형은 한 글자 한 글자 혀로 꾹꾹 눌러 말했다. 정국이 원망스러웠다. 왜 자꾸 가만히 있어도 힘든 사람을 건드려. 네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난 이미 충분히 힘든데. 내 감정의 무게도 감당하지 못해서 버거운데. 나한테는 명확한 대답 한 번 준 적 없으면서 나한테서 무슨 말을 기대하는데. 태형이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의 표정은 읽을 수가 없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답답한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둘 다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그 날 레스토랑에 형 혼자 두고 간 거 미안해요.”

…….”

…….”

할 말은 그게 다고?”

 

태형은 기다렸다. 그러나 정국에게선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뭐라고 설명해 주면 좋을 텐데. 그럴 일이 있었다고. 사과만 하지 말고, 이유를 말해 주면 좋을 텐데. 너를 부른 사람이 류현이라서라는 이유 말고, 내가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이유가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끝끝내 정국의 입에서는 그 이유가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나는 김태형이고, 걔는 류현이니까. 그 이유만으로도 전정국에겐 충분한 이유가 될 테니까. 생각해 보면 그랬다. 정국은 싸웠던 연인과 화해하기 위해 자리를 뜬 것뿐이고, 갑자기 자리를 뜨게 된 것에 대해 태형에게 사과도 했다. 그 때 정국의 행동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태형에게 구구절절 설명해야 할 의무가 정국에겐 없다. 하지만.

 

…….”

 

굳이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었을까. 차라리아무 말도 하지 말지. 사과하지 말지. 이렇게 다른 이유를 얘기해줄 것처럼, 그 날 일을 설명해줄 것처럼 날 여기로 데려오지 말지. 기대하게 만들지 말지. 태형은 하도 깨물어 아려 오는 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감정은 깊은 바다와 같았다. 옅은 바람에 수면은 흔들리지만 바다 속 싶은 곳은 미동하지 않는 것처럼. 정국을 향한 태형의 감정이 그랬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수면에 파동이 그어지지만, 몇 번씩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어도 결국 깊은 곳에 있는 무거운 감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태형의 바다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다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진동은 무거운 감정을 뿌리 채 흔들리게 하고 있었다. 쌓아 왔던 감정은 이미 금이 잔뜩 가 있었고 조그만 진동에도 금방 부서질 수 있는 상태가 된 지 오래였으니까.

 

태형이 형.”

전정국.”

 

한계였다. 태형은 지금 흔들리고 있었다. 모든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태형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흔들리고, 부서지고, 끌어올려졌다 내팽겨쳐졌다. 태형이 숨을 몰아쉬었다.

 

너 나 좀 그만 괴롭혀.”

…….”

나한테 사과는 왜 해? 왜 자꾸 찾아와? 왜 자꾸 앞에서 거슬리게 알짱거려. 지금도, 왜 불러내는데. 밥은 왜 같이 먹자고 하는데. 너 그러는 거 진짜 짜증나.”

…….”

 

한여름의 태양. 눈이 부시게 빛나서 시선을 빼앗기고 어디에 있든 바라보게 되는 여름날의 햇빛. 하지만 한여름의 태양은 눈부신 만큼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바라볼 순 있어도, 그 옆에 다가갈 수도, 같이 걸을 수도 없게. 태형은 이제 정국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그냥 멀리 있을걸. 다가가지 말걸. 욕심내지 말걸. 멀찍이 제 환상 속에서 정국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만족할걸.

 

그냥 평생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후회됐다. 석진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냥 상상 속으로 남겨놓고, 가까이 다가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태형은 꾸역꾸역 올라오는 감정들을 간신히 눌러냈다. 나는 너만을 위한 사람이 아니야. 그런데 지금의 나는 다 네가 있어야만 의미가 있게 됐어. 내가 화내는 것도, 실망하는 것도. 우울한 것도 행복한 것도 다 너 때문이고 내 모든 감정들을 네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런 내가 싫어. 답이 없는 고민을 계속해야 되는 것도 싫어. 지쳤어. 그만 하고 싶은데 그만 할 수 없는 것도 싫어. 지긋지긋한 기대. 지리한 감정의 반복.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차올라 태형의 목울대가 울렸다.

 

다 상관없으니까 나 좀 내버려 둬.”

그러나 그 수많은 말 대신 태형이 내뱉은 말은 나 좀 내버려 두라는 말이었다. 이건 자존심일까, 무서움일까. 알 수 없다. 그냥, 너무 지쳤다. 태형은 고개를 들어 정국을 마주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좀 하자.”

 

목소리가 떨려 나오진 않았을까. 태형은 제가 뱉은 목소리가 최대한 담백했길 빌었다. 아무렇지도 않았길 빌었다. 정국을 좋아하면서 익숙해진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연기가 이 순간 최대로 빛을 발하길 간절히 빌었다.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 사람 때문에 그래요?”

?”

 

태형의 말에 정국은 아무 말이 없었고 태형은 눈을 감았다 떴다. 해야 할 말은 다 했기 때문에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하고 싶은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머리가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정국의 시야 밖에서 사라지고, 제 시야에서 정국을 몰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태형이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린 그 순간 들린 정국의 목소리에 태형은 발을 멈췄다. 정국의 목소리가 낮게 이어졌다.

 

맨날 가볍게 굴었잖아요. 형 가벼운 사람이잖아요. 왜 그 사람한테는 안 그래요?”

전정국.”

. 애인은 뉴욕에 따로 있으니까, 애인 몰래 그냥 즐긴 건가?”

 

태형이 몸을 돌려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은 비스듬히 서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태형이 눈을 깜박였다. 저런 표정의 전정국은 처음이다. 저렇게 날선 말을 하는 전정국도.

 

난 그것도 모르고. 민윤기 좋아하냐고나 묻고 있었네.”

.”

애인이 곧 뉴욕에서 돌아올 거라서,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이제야 이해가 되네.”

 

정국의 온도가 너무 차가워서, 태형은 침을 삼켰다. 정국과의 관계가 좋게 마무리될 수 없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질 줄은 몰랐는데. 정국의 입에서 쏟아지는 날선 말들은 이미 너덜해져 더 이상 상처가 날 수 없을 것 같았던 감정에도 생채기를 낸다.

 

애인은 알아요? 형이 나랑 잔 거?”

…….”

형이 이렇게 아무하고나 자고 다니는 거. 나랑 섹스 파트너 관계였던 거 다 아

태형아!”

 

그 때였다. 비상구 문이 열리고, 환한 빛과 함께 석진의 목소리가 태형의 귓가에 닿았다. 태형은 고개를 들어 석진을 쳐다봤다. 석진이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태형은 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고 석진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챈 듯 여기 있었네, 하며 태형과 정국에게로 빠르게 다가왔다. 곧이어 석진이 태형을 감쌌고 그걸 본 정국은 입술을 꾹 물었다. 석진이 조심스럽게 태형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냐는 의미였다. 태형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진짜 영화에 늦을 것 같아서. 이만 태형이를 데려가도 될까요?”

…….”

할 말 끝났어. 가자.”

 

대답이 없는 정국 대신, 태형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 짧은 단어를 내뱉는 데에도 심장이 울컥하고 눈이 시렸다. 최악의 날에 하는 최악의 마무리. 이보다 더 거지같은 결말도 있을까. 태형이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걸어 올라갈 동안에도 정국은 끝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너 괜찮아?”

…….”

너 짐 내가 다 챙겨 나왔어. 얼른 차로 가자. 너 얼굴 진짜 안 좋

.”

 

태형이 눈가를 짚었다. 나 다 끝났어. 엘리베이터 안, 정국이 없는 곳. 정국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 도착하자 그제서야 꾹 눌러 왔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게 무슨 소리냐 묻는 석진의 말에 태형은 대답하지 못했다. 온 몸이 전부 욱신거렸다. 머리도, 눈가도, 입술도, 심장부터 발끝까지 모두. 제 울음에 석진이 당황해 저를 도닥이는 것이 느껴졌다. 태형은 주르륵 무너져 내렸다. 진짜 끝났다. 모든 것이.

 

그게 무슨 소리야, 뭐가 끝나. 태형아.”

…….”

, 태형아. 왜 그래. 너 괜찮아? 물이라도 갖다 줄

…….”

 

단어가 울음 때문에 뚝뚝 끊겨져 나왔다. 태형은 고개를 숙이고 울음을 뱉어냈다. 정말 다 끝났다. 제가 생각했던 최악의 결말보다도 더 최악으로. 석진이 괜찮냐고 물어 오며 제 등을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태형은 고개를 저었다. 안 괜찮다. 괜찮을 수가 없었다. 모든 소리가 소음으로 대치되어 귓가를 찢어질 듯이 울리고 있는데. 아직도 그 차가운 목소리와 얼굴이 계속해서 눈가를 울리는데. 태형이 울음에 푹 젖은 목소리로 숨을 헐떡였다. ,

 

, 듣고 있어.”

미국 갈래…….”

?”

나 미국 갈래 형…….”

 

모든 것이 끝났다. 제 감정도, 정국과의 관계도.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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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정국 번외 02

 

너 태형이랑 무슨 일 있었냐?”

?”

태형이가 너보고 개새끼라던데.”

 

아니, 뭐라고? 나는 학교에서 우연히 마주친 박지민 형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왜 이 형 생각을 못 했지. 나는 대답 대신 야작에 지쳐 보이는 박지민 형을 붙잡고 태형이 형이랑 연락이 되냐고 물었다. 개새끼고 뭐고, 일단 그게 제일 중요했으니까.

그 날 이후로 일주일. 나는 김태형의 머리카락 한 올 못 보고 있다. 아니, 이게 말이 돼? 같은 관데. 같은 동아린데. 그동안 그렇게 붙어 다녔는데!! 나는 이를 으득 물었다. 전화는 안 받고, 메신저도 차단을 해버렸는지 읽지도 않고. 기말고사가 가까워져 오는데 같이 듣는 수업은 들어오지도 않고, 동아리도 안 나온다. 아니,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학교 수업까지 빼먹을 일이야? 좋아하지도 않지만, 내가 한유라를 좋아한다는 게 그렇게 충격인가? 그렇게까지 한유라가 중요해? 그렇게 붙어 다녔던 후배를 단 하루 만에 뚝 잘라낼 만큼 한유라를 좋아하는 거냐고!!!!

 

아니, 안 돼. 나 계속 야작하느라 정신없었거든.”

그 말은 언제 들었는데요, 그럼?”

언제더라. 일주일 전이었나.”

 

일주일 전이면 대충 그 사건이 있었던 날이다. . 그럼 그 날 자취방에 안 들어오고 바로 박지민 형네 자취방으로 갔던 건가. 어쨌든 무사히 집에 들어는 갔나 보네. 그건 그렇고. 나는 박지민 형을 똑바로 쳐다봤다. 박지민 형이 내 형형한 눈빛에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진짜 연락 안 되는 거 맞아요?”

내가 거짓말을 왜 해. 근데, 진짜 싸웠어? ? 너 김태형이면 죽고 못 살았잖아.”

…….”

 

그래, 죽고 못 살았지. 그래서 그렇게 좋아하는데도 고백도 못 하고, 옆에서 땅 파고. 그런데 그 결과가 이거라니. 생판 남도 이렇게 말할 정도로 티를 냈는데, 정작 본인은 알지도 못하고. 서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네가 이해해라. 알잖아, 김태형이 눈치가 없어서 그렇지 나쁜 애는 아냐…….”

 

박지민 형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멀어져 간다. 내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주일 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잔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니, 말할 기회는 줘야 되지 않냐고. 이러는 게 어딨어. 나는 잔뜩 충혈된 눈가를 꾹 눌렀다. 진짜, 너무 어렵다. 김태형 좋아하는 거.

 

*

 

태형 오빠?”

. 넌 연락 돼?”

 

연락이 되지 않은 지 2주일 째. 더 이상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극약처방을 쓰기로 했다. 죽기보다 싫었지만, 제발 아니길 빌었지만, 혹시 한유라라면 김태형이랑 연락이 될까 해서. 김태형 때문에 여기까지 오다니. 난 날 보며 수군거리는 한유라의 친구들을 애써 무시했다. 한유라가 살짝 웃는다.

 

오늘 같이 밥 먹기로 했는데.”

?”

 

물어보면서도, 제발 아니길 바랐는데. 한유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그런다. 오늘 같이 밥을 먹기로 했다고. 진짜, 이쯤 되면 김태형이 원망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나한테 이래. 그러나 내가 이렇게 절망스럽거나 말거나, 한유라는 말을 잇는다.

 

나도 최근에 연락이 안 됐었는데, 어제 갑자기 연락 오셔서 할 말이 있다고, 오늘 밥 같이 먹자고…….”

…….”

그래서 같이 먹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먹을래? 일루 오신다 그랬? 저기 태형 오빠다.”

 

태형 오빠!!!! 그 말에 내 고개는 저절로 뒤를 향하고, 그제야 내 시야에 내가 2주 동안 찾아 헤맸던 김태형의 실루엣이 잡혔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얼굴. 그러나 내가 채 움직이기도 전, 김태형은 날 보자마자 뒤를 돌아 도망쳐 버린다. 나는 멍하니 그런 김태형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 왜 그냥 가시지? 둘이 무슨 일 있었어?”

…….”

 

쫓아가야 하는데, 쫓아갈 기력도 없다. 나는 까칠해진 볼을 쓸었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꼬여 버린 건지, 한숨밖에 안 나왔다. 누굴 탓해야 하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 한숨에 한유라가 무슨 일 있어? 하고 물어 오는 것이 들렸다.

 

아냐. 난 별로 입맛이 없어서. 그냥 둘이 먹어.”

?”

그리고, 태형이 형 만나면 할 말 있으니까 연락 좀 받으라고 전해주라.”

 

제발. 나는 말을 마치고 고개를 숙였다. 서럽고 억울하고 서운해서 속이 다 쓰렸다.

어쩌다가 내가 한유라한테 이런 부탁까지 하게 됐지. 무엇보다 우울한 건, 누군가를 통해야지만 김태형에게 말을 할 수 있게 된 이 상황이다. 그리고무서워졌다. 만약 이 상황이, 내가 진짜로 김태형한테 고백한 이후에도 이어진다면? 오해가 아니라, 내가 김태형에게 고백했는데 그 이후에도 김태형이 날 죽자고 피해 다니고, 내가 부담스러워져서 작정하고 숨어 버리면. 그럼 어떻게 하지. 지금이야 김태형이 오해 때문에 날 피해 다니고 있는 거라지만, 그 땐 해명할 수도 없을 텐데. 속 쓰리고 목도 아픈데 그 와중에도 김태형이 좋아서. 그래서 더힘들다.

 

*

 

그럼 종강하는 날에 초밥집 앞에서 봐요.”

 

진짜 오랜만에 듣는 김태형의 목소리.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린데도 너무 오랜만이라 울컥했다. 이게 진짜 무슨 짓이야……. 헤어진 연인 사이도 아니고, 목소리로 울컥할 일이냐고.

기말고사가 가까워지기도 했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기 때문에 김태형과 종강하는 날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전화로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오해를 풀려면 아마 고백을 하게 될 것 같은데, 그걸 전화로 할 수는 없잖아.

기말고사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드디어 김태형을 만나는 날에 나는 아침부터 긴장감에 입술을 깨물었었다. 시험 보기 직전에도, 시험보다 오늘 저녁에 김태형을 만날 거라는 사실이 날 더 긴장하게 했으니 말 다 했지.

 

누가 저런 데다 핸드폰을 두고 다녀.”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무거운 전공책은 동방에 두고 가야겠다 싶어 들른 동방엔 아무도 없이 핸드폰 하나만 덩그러니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김태형도 핸드폰 참 여기저기 잘 두고 다녔었는데. 문득 혹시 저거 김태형 핸드폰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살펴보니 김태형의 핸드폰과는 기종이 다르다.

 

김태형 핸드폰이면 뭐, 어쩌게.”

 

괜히 찔리는 마음에 나는 괜히 책상을 쓸며 조그맣게 중얼였다. 어디까지 갈 거냐, 전정국…….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약속 시간은 7, 지금은 630. 내가 기억하고 있는 김태형의 시간표가 정확하다면 김태형의 시험은 오늘 오전에 이미 끝났고, 아마 지금쯤 초밥집으로 향하고 있으려나. 30분 후에 김태형을 만난다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같이 가자고 해볼까. 좀 그런가. 나는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대다 핸드폰을 들었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시험 시간 동안 꺼 놓았던 핸드폰을 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김태형의 문자였다. 약속을 뒤로 미루자는.

 

[정국아, 전화했는데 전화 안 받네ㅠㅠ 시험 보는 중인가..]

[근데 정국아, 진짜 미안해. 오늘 시험 끝나고 교수님이 갑자기 나 부르셨는데 7시에 보자셔ㅠㅠ 근데 언제 끝날지 모르겠어ㅠㅠ 너 너무 많이 기다릴 지도 모르는데 우리 내일 만나자. 내가 초밥 사줄게ㅠㅠ]

 

짜게 식는다는 게 이럴 때 쓰는 표현인가. 나는 황망히 그 문자를 쳐다봤다. 3시에 와 있는 문자였는데, 계속 시험이라 꺼 놔서 이제 본 거였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한순간에 몸이 스르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잠시 내려놓았던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정국아.’

 

김태형의 글씨체도 아니고, 이모티콘도 없는. 기본 서체로 반듯하게 적혀진 내 이름인데 그 글자 위로 이상하게 김태형의 목소리와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정국아, 하고 부르는 김태형의 목소리와 내 이름을 부를 때 김태형의 얼굴. 어떤 얼굴로 이 문자를 적었을까 문득 상상이 되니 괜히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이게 얼마만이야. 김태형한테 문자를 받은 게.

오늘 당장 김태형을 보지 못하는 게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김태형은 이 짧은 문자만으로도 충분히 내 기분을 좋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나 보다. 약속을 미룬 게 자기 때문도 아닌데 미안하다며 내일 밥을 사겠다는 김태형. 나를 정국아, 하고 불러주는 김태형. 나를 생각하면서 이 문자를 보냈을 김태형. 지금 당장 떠오르는 모든 종류의 김태형이 너무 좋아서 심장이 뛰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김태형이 좋냐고 물으면 곧바로 응, 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좋다. 이미 내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 한없이 유치해지고, 한없이 치졸해질 만큼, 김태형에 한해서만큼은 이성적인 판단이 잘 되지 않을 정도로 김태형이 좋다.

 

아침부터 보자고 하면 좀 그런가.”

 

나는 핸드폰을 만작였다. 뭐라고 답장하지. 사실, 내일 보면 더 일찍 볼 수 있고, 그러면 더 오랜 시간 같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삐쭉 고개를 내밀었다. 영화 보자고 할까. 이제부터 방학이니 한유라가 방해할 수도 없을 텐데. 서운함 같은 건 이미 예저녁에 사라져 버리고, 내일 일찍부터 김태형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만이 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이거 좀 위험하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됐지.

 

어느덧 밖은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고 나는 나른한 기분에 하품을 했다. 시험도 끝났고, 내일이면 오해도 풀 수 있을 거고.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시간은 정말 오랜만이라 어쩐지 몸이 무거웠다. 동아리방은 조용하고, 아무도 없고. 늘 시끄럽기만 했던 동아리방이 조용한 게 나름 운치가 있어서 슬금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 많고 시끄러운 곳을 좋아하지 않아서, 김태형을 만나기 위해서만 왔던 곳이었는데. 아무도 없을 땐 또 이런 느낌이구나 싶어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금 더 이 한적함을 느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니, 나는 잠깐,”

 

그러니까, 그 익숙하다 못해 누군가가 내 귓가에 붙여 놓은 것처럼 울리던 그 목소리가 바로 문 밖에서 들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태형이 형?”

정국아,”

? 정국이 있었네?”

 

갑자기 들이닥친 여러 명의 무리에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별안간 동방의 문이 열리고, 고요하던 동아리방이 시끄러워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정국이도 오늘 시험 끝났구나! 여기서 뭐해? 우리 지금 술 마시러 갈 건데 같이 갈래? 그러나 나는 나에게로 쏟아지는 여러 명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대신,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인영을 쳐다봤다. 왜 김태형이 지금 여기 있지? 지금 시간은 710. 김태형이 아까 나에게 보낸 문자에 따르면 김태형은 지금 이 동아리방이 아닌 교수님의 방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왜 김태형은 동아리방 안에 있으며 우리 지금 술 마시러 갈 거라는 사람들과 함께 들어온 걸까. 김태형과 한유라. 한유라와 김태형. 그리고 한유라의 손에 들린, 오늘 김태형과 만나기로 했던 그 초밥 집의 종이봉투. 그리고 당황한 듯한 김태형의 표정. 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것들이 의미하는 건 뭘까. 좋았던 기분이 슬금슬금 어두워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종이봉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 그런 내 얼굴을 보던 한유라가 종이봉투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 나 오늘 생일이라고 태형 오빠가 사다 줬어. 짱이지.”

, 아니,”

내가 며칠 전부터 초밥 먹고 싶다고 그랬었거든.”

…….”

 

한유라의 말에 김태형이 아, 하고 입을 벌렸지만 이미 한유라의 말은 귀를 통해 내 머릿속에 닿은 후였다. 나는 멍하니 김태형을 쳐다봤고 김태형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설마.

 

내 생일이라 우리 술 마시러 갈 건데 너도 같이 갈래, 정국아?”

 

한유라 생일 파티에 가려고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야?

 

정국아?”

 

그리고 그 순간, 내 귓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 김태형을 쳐다봤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기 때문에 생긴 그 요란한 소리에 동방 안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집중되었고 김태형의 시선 역시 나에게로 향했다. 그 때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내가 거울을 보진 못했으니 알 수 없지만, 좋진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건 나와 눈을 맞추게 된 김태형의 표정에서도 추측해낼 수 있는 거였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진짜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형 진짜…….”

…….”

짜증나네요.”

 

김태형을 쳐다봤다가, 한유라가 들고 있는 종이봉투를 쳐다봤다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내가 한 거라곤 김태형을 좋아한 것뿐인데. 문득 치고 올라오는 자괴감과 허탈함에 나는 머리를 짚었다. 그리고 내뱉었다. 내가 한 말에 김태형이 뭐라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리는 것이 보였지만 이번만큼은 정말로 김태형의 목소리가 듣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 가방을 챙겼다. 진짜 거지같은 하루의 마무리네. 그리고 그대로 동아리방을 나섰다. 내 뒤에서 동기들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 중의 김태형의 것은 없다. 그래, 무슨 말을 하겠어. 상황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데. 나는 어금니를 까득 물었다.

 

*

 

그 날, 그 후에 내가 했던 행동들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뿐더러 그 일을 곱씹어 생각하는 것은 내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으니 짧게 묘사하고 넘어가자. 그 날 밤 나는 박지민 형을 찾아가 거의 울부짖으며 미친 듯이 술을 마셨고, 너만 차단 기능 있는 줄 아냐, 나도 있다! 고 외치며 김태형을 차단했고. 내가 김태형을 차단한 것은 까맣게 잊고서 김태형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는다며 핸드폰을 붙잡고 징징거렸고, 보다 못한 박지민 형이 내 핸드폰을 뺏자 핸드폰 대신 박지민 형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는 것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 날 김태형을 차단한 것은 내가 그나마 그 날 했던 짓 중 가장 잘한 것으로 평가되는데, 그러지 않았다면 내가 김태형에게 전화를 걸어 뭐라고 울부짖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술에 쩐 채로 이틀을 보내고, 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유럽행 비행기 티켓을 끊은 것이었다. 당장 떠날 수 있는 것으로.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었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러면 한 순간 미쳐서 김태형을 찾아가 대체 걔가 어디가 좋냐고 따져 묻기라도 할 것 같았으니까. 그런 추태까지는 부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그 방학 동안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혼자만의 이별 여행이 아니라 마음 정리 여행을 떠났다.

 

*

 

즉흥적으로 떠났던 마음 정리 여행은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이 있긴 뭐가 있었겠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랬겠지) 정확히 개강 날 오전에 귀국하는 일정으로 마무리됐다. 나중에 가서야 수강신청을 고려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으므로 수강신청 또한 망해 전필 과목들은 전부 실패한, 요상한 교양들로 가득 찬 시간표를 갖고서.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덕에 바로 전 학기에 김태형과 붙어 다니다시피 했던 시간표와는 다르게 김태형과는 겹치는 수업이 하나도 없게 됐고.

한 달이 넘는 여행 기간 동안,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그 유명한 격언은 대충 들어맞는 듯 했다. 물론 처음 2주는 힘들었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무뎌진 건지 아니면 진정이 된 건지 점차 괜찮아졌으니까.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시간표 덕에 학교에서도 김태형을 마주치지 못했으니 김태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고 그에 미루어 보아 나는 그럭저럭 정리가 됐다고 믿었다. 그래서 새롭게 태어나자는 의미로 핸드폰도 바꾸고, 번호도 바꾸고.

그러니까 진짜로, 그렇게 마무리된 줄 알았다. 수강 정정 후에 갑자기 내가 듣는 이상한 교양을 평소에 듣고 싶었던 강의라 칭하며 수강 신청한 한유라를 봤을 때도 아무 생각이 안 들었으니까. 그래. 한유라가 잘못한 게 뭐가 있을까. 모든 것은 신의 뜻이고 그냥 김태형과 나는 안 될 인연이었던 거겠지. 내게 강 같은 평화…….

그러니까 나는 그 때 당시 이런 게 해탈의 경지, 더 이상의 어떠한 고통도 없는 상태, 다른 말로 득도 혹은 열반에 들었다는 것일까 생각하며 이참에 불교에 귀의나 해 볼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므로 나중에 나와 한유라가 단 둘이 이상한 교양을 듣고 있는 것과 김태형과 한유라가 아직도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 날 있었던 일이 카더라 통신에 의해 부풀려져 나와 김태형, 그리고 한유라가 세상에 둘도 없을 핫한 삼각 캠퍼스 치정극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굳이 해명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아마 그 때 내 머리 뒤에는 광배가 비치고 있지 않았었을까 싶다.

 

이건 여기다 두면 돼?”

 

그러나 내가 간과한 것이 몇 가지 있었으니.

 

, 김태형 땡큐.”

 

내가 생각보다도 더 순정남이었다는 사실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쉽게 식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오랜만에 본 김태형이 내 상상 속의 김태형보다 더 귀엽고 예쁘고 잘생겼었다는 것.

 

전정국, 안 가?”

 

몇 달 만이지? 나는 멍하니 서서 날짜를 세며 워크샵에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는 김태형을 쳐다봤다. 그런 나를 이상하게 생각한 동기가 와서 나를 툭 칠 때까지. 그러니까, 또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었던 거다. .

 

씨발…….”

뭐야, 왜 갑자기 욕해?”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나는 고개를 숙였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이 느껴졌다. 옆에서 무슨 일이냐며 나를 흔드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런 게 어디 있어. 다 끝났는데.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해탈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김태형을 본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뭐 해? 너네 안 타?”

몰라요. 전정국 갑자기 욕하더니 이래요.”

? 너 어디 아프냐?”

전정국 아까 태형이 형 쳐다보.”

 

나는 아직 김태형을 좋아한다는 걸.

 

. 너 태형이 형이랑 같이 가는 거 싫어서 그래?”

…….”

소문이 진짜였구나. 그래도 야, 삼일만 참아봐.”

 

싫긴 씨발. 좋아서, 김태형이 너무 좋아서 탈인데. 나는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여전히 고개는 숙인 채로. 옆에서 동기 놈이 학교생활 잘 하기에 별 일 아닌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보다며 나를 위로하는 것이 들려왔다. 그래나도 내가 해탈한 줄 알았지. 진짜로 득도한 줄 알았지. 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열반에 오른 줄 알았지.

 

해탈은 지랄.”

 

나는 나직하게 중얼였다. 해탈이며 열반은 무이대로 불교에 귀의했다간 내가 김태형을 두고 하는 생각들에 부처님이 친히 음행죄로 지옥에 끌고 갈 판인데내 험한 말에 나를 토닥이던 동기 놈이 살짝 몸을 움츠리거나 말거나, 나는 한 번 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버스로 향했다. , 순정 순정 누가 말했나, 김태형을 좋아하는 전정국이 말했지…….

 

*

 

그 후 워크샵 장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학술 답사를 빙자한 관광을 하는 내내 내 시선은 줄곧 김태형을 향해 있었지만 나는 김태형과 단 둘이 대화할 만한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사실, 버스에서 내린 이후로 조가 나뉘는 바람에 대화할 타이밍은커녕 김태형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조가 갈리니 잠드는 방도 갈리고, 관광 일정도 전부 갈렸으니까. 결국 23일의 일정이 끝나 마지막 일정이 될 때까지 김태형과 말 한마디 섞어보지 못한 나는 애가 타 죽을 지경이었다. 사실, 김태형과 말을 섞을 기회가 생긴다 해도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 이 나무는 이 사찰의 자랑으로, 조선시대부터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나무입니다. 600년이 넘었다고 해요.”

 

나는 가이드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있는 김태형을 쳐다봤다. 쉽게 사람들을 모아서 버스에 태우기 위함인지 23일 내내 조로 나뉘어 진행되었던 일정은 마지막 일정만큼은 전원이 모여서 진행됐고 나는 혹시나 하고 기대했지만 역시나였다. 김태형은 저만치 앞에서 내가 끼어들 틈 없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말 이대로 말 한마디 못 해보고 워크샵이 끝나는 건가. 신이시여, 이러는 게 어딨어요. 이럴 거면 차라리 김태형을 내 눈앞에 나타나게 하지 말든가요. 나는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앞에서는 가이드가 방긋방긋 웃으며 열심히 설명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해서, 이 나무는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도 소원을 들어주는 영험한 나무로 통했다고 합니다. 왕과 왕비마저도 와서 소원을 비는 것이 연례 행사였다고 하니 말 다 했죠.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소원이 있다면 속는 셈 치고 한 번 빌어 보시고, 다 같이 버스에 탑승하는 걸로 할게요.”

 

가이드는 말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고, 나는 무심코 가이드가 말했던 나무를 올려다봤다. 고개를 들어 쳐다봐야 할 정도로 커다랗고 오래되어 보이는 나무. 멍하니 나무를 쳐다보고 있자니 옆에서 동기가 나를 툭 치는 것이 느껴졌다.

 

소원 뭐 빌 거야?”

무슨 소원.”

가이드 말 못 들었어? 소원 들어주는 나무라잖아. 근데 이런 거 어딜 가나 하나씩은 꼭 있는 듯.”

소원?”

난 여자친구 생기게 해달라고 빌어야지.”

 

어딜 가나 하나씩은 꼭 있는 것 같다고 궁시렁거릴 땐 언제고, 옆의 동기는 눈까지 감고 조그맣게 소원을 중얼이고 있었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김태형 쪽을 향했다. 잠시 나무를 쳐다보기 전까지 줄곧 쳐다보고 있었으니 찾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동그란 머리통이 금세 내 눈에 들어찼다. 김태형은 내 옆의 동기처럼 소원을 빌고 있는 듯, 눈을 감고 입을 중얼이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지, 거리가 멀어서 들리지는 않았지만.

 

…….”

 

나는 다시 나무를 쳐다봤다. 소원. 나는 다시 김태형을 본다. 눈을 감는 것으로는 부족했는지 김태형은 손까지 모으고 소원을 중얼이고 있다. 대체 무슨 소원을 빌고 있기에 저렇게 손까지 모으고 열심인지. 나는 입술을 물었다. 그 소원 안에 내가 들어있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그냥, 한유라랑 잘 되게 해주세요 뭐 이딴 거만 아니었음 좋겠다. 그럼 너무 질투 날 것 같으니까.

 

소원…….”

 

나는 조그맣게 중얼였다. 사실 나에게 소원이라 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천지신명님. 아시죠? 제 소원은 하나예요. 나는 조용히 손을 모았다. 대체 김태형이 뭐라고, 이까짓 나무 앞에서 이렇게 온 맘을 다해 빌어야 하나 피실 웃음이 새어나오긴 했지만, 나는 곧 다시 표정을 굳혔다.

 

김태형이 저를 좋아하게 해주세요.’

 

나는 어느새 나도 모르게 감긴 눈을 조금 더 꼭 감았다. 간절하고 간절한 소원. 1학년 처음 입학하고, 엠티에서 김태형을 처음 봤을 때부터 품어 왔던 올곧고 솔직하고 대쪽 같은 순정. 청순한 사람이 이상형이라 하기에 팔자에도 없는 청순한 연하 남친 코스프레까지 하게 만들었지만, 어디서 굴러들어왔는지 모를 여우한테 뺏긴 내 첫사랑. 워크샵에 온 이후로도 은근히 나를 피하는 것 같은 김태형에 혹시 내 존재가 김태형을 힘들게 할까 차마 제대로 말도 못 걸 만큼 소중했다. 이런 건 하나도 모르겠지. 바보 같은 김태형. 한유라가 어딜 봐서 청순이야. 생각하다 보니 또 괜히 열이 올라 나는 모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두고 봐. 진짜, 기회만 생기면 청순이고 뭐고.

 

다 빌었으면 가자!!”

 

콱 잡아먹어 버릴 거야. 눈을 뜨고 김태형 쪽을 쳐다보니 어느새 기도를 끝냈는지 다른 선배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김태형이 보여 나는 이를 물었다. (김태형을 향한 형형한 눈빛에 옆의 동기가 희대의 삼각관계에 에피소드를 한 가지 더 추가하고 있었음은 정국이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다시 눈앞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런 내 간절한 소원을 이런 초목이 알기나 할까. 나는 괜히 그 나무를 째려봤다.

 

두고 볼 거예요.”

 

내 소원 들어주나, 안 들어주나. 그 와중에도 혹시 반말을 하면 괘씸죄로 들어줄 소원도 안 들어줄까 싶어 존댓말을 하다 내 자신이 어이가 없어 픽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렇게 미쳐가는구나, 전정국. 나는 다시 김태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김태형은 여전히 웃으며 버스에 올라타려 하고 있었다. 문드러지는 내 마음도 모르고.

 

안 가냐?”

 

멍하니 김태형을 쳐다보고 있자니 내 옆의 동기가 나를 툭 쳤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젠 하다하다 나무한테까지 화풀이냐. 진짜 중증이다, 전정국.

 

어떡하냐 나…….”

? 뭐가?”

 

이러다가 진짜 평생 수절하고 살아야 되는 거 아니냐고.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하나님 부처님 예수님.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진짜 정말. 딱 한 번만. 딱 한 번만 기회가 생긴다면,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아무리 눈치가 없는 김태형이라도 눈치 채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절대로 한 톨만큼의 오해도 없게, 다 솔직하게 표현할게요.

 

내가 진짜,”

 

좋아한다고.

 

?”

 

그러니까 나 좀 좋아해 달라고



+


이렇게 해서 조선에서 빠꾸없는 전정국이 되었다는 후문..

이렇게 번외가 끝이 났네요! 다음 편부터는 다시 조선입니다 'ㅅ'

그 전 편들에서 나 나름 열심히 떡밥을 뿌려 놨었는데, 지금 다시 찾아보는 것도 나름 재밌지 않을까..싶..습니다..(아님 말구.. 소금소금)


사실 이번 편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조금 더 있는데.. 그건 앞으로 또 차차 알게 되는 걸로..☆

그러니 그냥 지민이의 말을 인용하며 끝낼게요...


태형이가 눈치가 더럽게 없어서 그렇지 나쁜 애는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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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솔직히 말하면, 처음에 김태형은 나에게 그냥 그저 그런 평범한 선배들 중 하나였다. 아니다. 처음부터 평범한선배는 아니었지. 그 얼굴을 어떻게 평범하다고 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한 눈에 튀는 얼굴인데. 하지만 그에 대한 내 감상은 그냥 잘생겼네, 정도에서 끝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소리다. 잘생긴 거야 특별한 일도 아니었고 남자가 잘생긴 거랑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니까.

 

정국 번외 01

 

그런 김태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김태형을 처음 본 오티날로부터 이주 정도 후, 엠티에서였다. 나는 나에게로 쏟아지는 관심과 질문들에 대답하기에도 벅찼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내가 먼저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되면 으레 있는 익숙한 일이었다. 정신없이 통성명을 하고, 연락처와 술잔을 주고받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어느 정도 취해 있었고 문득 옆을 보니 내 옆엔 그 때 봤던 그 잘생긴 선배가 앉아 있었다. 그 선배, 그러니까 김태형도 일부러 내 옆에 앉게 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옆에 앉아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지. 김태형은 누군가를 판별할 수 있을 정도로 제정신인 것 같지 않아 보였으니까. 얼굴은 빨개져서, 환하게 웃으며 앞의 누군가와 술잔을 부딪히고 있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김태형의 시선을 따라 앞을 쳐다봤다가 미간을 좁혔다. 내 앞에는, 그러니까 김태형의 앞에는 딱 봐도 이런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학번일 것 같은 남자 선배가 계속해서 김태형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고 김태형은 그걸 계속해서 받아 마시고 있었다. 그제야 주위에서 김태형과 그 선배를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그러니까, 저 선배는 지금 작정하고 김태형에게 술을 먹이고 있는 것이고 김태형은 그걸 모르거나 아니면 거절하지 못해서 계속 받아 마시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게 나랑 무슨 상관. 나는 힘없는 한낱 새내기에 불과했고 설령 나한테 저 고학번으로 보이는 선배를 막을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해도 내가 김태형을 도울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괜히 나한테까지 불똥이 튈까 싶어 자리를 옮기려고 했는데.

 

- 잘생긴 후배님이다.”

 

눈이 마주쳤다. 김태형이랑. 나는 눈을 깜박였다. 잘생겼다는 말. 한두 번 들어본 것도 아닌데. 김태형이 나를 보더니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몰랐는데, 김태형은 웃을 때 입이 네모가 됐다. 그리고 속눈썹이 생각보다 길었다. 코끝에 점도 있네. 그리고…….

 

선배, 저도 술 주세요.”

 

예쁘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니, 알긴 알지. 김태형이 예뻐 보여서.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랬다. 김태형이 예뻐 보였다. 예뻐 보였다는 거는, 그러니까, 객관적인 시선으로 판단한 게 아니라 나한테 그래 보였다는 거다. 물론 김태형은 객관적으로 봐도 예쁘지만.

나는 자리에 앉아 김태형에게 계속해서 술을 권하는 선배에게 내 잔을 내밀었다. 충동적으로. 선배가 당황하는 듯 하더니 이내 웃으며 내 잔에도 술을 채웠다. 내 주위가 조용히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김태형이 나를 쳐다보는 시선도. 내 잔에 술을 따라주고, 앞의 선배가 다시 김태형을 쳐다본다. 태형아, 안 마셔? 그 말에 김태형이 난처한 듯 웃는다. 억지로 먹이고 있었던 게 맞았던 거다. 주저하던 김태형은 결국 술잔을 들었고 나는 내가 한 번에 마셔 버려 비워진 내 잔 대신 그 잔을 뺏어 들었다.

 

선배, 얼굴이 빨개요.”

?”

더 마시면 속 안 좋으실 것 같은데.”

 

나는 내 영향력을 안다. 20년간 보고 듣고 경험한 게 있으니까. 나는 어딜 가나 내가 의도하거나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무리의 중심에 있었고 우위에 있었다.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편했으니까. 그리고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 내 행동들은, 웬만한 상황에서는 내 의도대로 먹혀 들어갔다.

 

제가 대신 마실게요. 그래도 되죠?”

…….”

 

이렇게. 나는 말끝을 흐리는 김태형의 술잔을 뺏어 들고 그 안의 술을 비운 다음 앞의 선배를 쳐다봤다. 웃으면서. 나는 웃고 있지만 주변은 얼어붙는다. 말은 못 해도 생각은 다들 비슷하겠지. 쟤 대박이다. 내지는 어디 신입생 주제에 버릇없이. 하지만 눈앞의 선배가 나한테 뭐라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새내기들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고, 이미 그만큼의 영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고, 이 선배가 김태형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고 있었던 행동이 바람직한 행동도 아니었고. 거기다가 여긴 신입생들이 선배에게 잘 보여야 할 뿐 아니라 선배들이 후배들에게도 잘 보여야 하는 첫 제대로 된 만남 자리인 첫 엠티고.

그래, 태형이 술도 약한데. 정국아, 너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타이밍 좋게 회장 형이 나서서 말했고 앞의 선배는 벙 찐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 지금 당장 뭐라 말은 못 해도 표정을 보아 하니 아마 나는 저 선배에게 찍힌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뭐. 사실, 저 선배가 지금 당장 나한테 뭐라고 했어도 상관은 없었다. 덕분에 김태형의 시선이 날 향하게 됐으니까.

 

*

 

내 상태가 좀 이상하다는 걸 자각한 것은 그 날 이후로 며칠 되지 않아서였다. 그 다음 날 내 숙취를 걱정하는 회장 형으로부터 그 선배가 김태형에게 죽자고 술을 먹였던 이유가 그 선배가 일방적으로 마음에 들어 하던 여후배 하나가 김태형을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제는 다분히 충동적이었고, 술도 마신 상태였고,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있는 거지, 하고 내 안에서 마무리를 지었기 때문에. 평소에는 귀찮아서 안 했더라도, 술김에 정의로운 행동 한 번 해 볼 수도 있는 거지.

그 날 그렇게 다들 술에 쩐 채로 유야무야 엠티가 마무리되고 주말 내내 나는 김태형을 마주치지 못했으므로 그렇게 김태형이란 존재는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는 듯했다. 애초에 나는 어떤 사람에게 깊은 주의를 두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에 김태형을 마주친 순간,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거다.

 

전정국, 맞지? 그 날 고마웠어.”

 

수업이 시작하기 전 멍하니 강의실에 앉아 앞을 쳐다보고 있는데, 내 옆자리에 인기척이 나더니 이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멍한 시선 그대로 옆을 봤다가 순간 숨을 멈췄다. 그 웃음이 내 눈앞에 있었다. 눈꼬리가 접히고, 입이 네모나게 되는 웃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 날 고마웠다고 말했어야 됐는데, 정신이 없어가지구. 선배가 돼서 후배한테 도움 받았네.”

 

김태형이 나한테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그 말은 내 왼쪽 귀로 들어와 오른쪽 귀로 그대로 흘러나갔다. 살면서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은 처음이었다. 누군가가 예뻐 보였던 적도 김태형이 처음이었는데. 누군가가 웃는 얼굴에 이렇게 심장이 뛰어 본 적도 김태형이 처음이다. 심지어 중, 고등학교 때 사귀었던 여자 친구와 키스를 할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몸의 신호들이다. 이 신호들은 날 의아하게 만들었다. 이게 뭐지?

 

선배.”

?”

저 밥 사주세요.”

 

뭐긴 뭐야, 꽂힌 거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내 감정도 모를 만큼 눈치가 없지 않았고 그래서 김태형을 붙잡고 김태형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랬다. 밥 사주세요. 이렇게 다짜고짜 밥을 사달라는 후배는 처음이었는지 당황한 것 같은 김태형의 눈이 느리게 깜박여졌다가, 이내 예쁘게 휘었다. 그래, 안 그래도 사 주려고 했었는데! 비싼 거 사줄게. 뭐 먹고 싶어?

 

선배는 뭐 좋아하시는데요?”

? 글쎄…….”

전 다 좋아요.”

 

어차피 중요한 건 음식이 아닌데요, . 그 말은 혀로 꾹 눌러 삼키면서.

 

*

 

김태형과 요 근래 붙어 다니면서 내가 김태형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 목록은 대충 다음과 같다.

1. 김태형은 귀엽다. 2. 김태형은 모태솔로다. 3.김태형은 인기가 많다. 4. 그런데 그걸 정작 본인은 모른다. 5. 그래서 김태형은 자기가 여자들한테 인기가 없는 줄 안다. 6. 고로 김태형은 눈치가 없다. 7. 그냥 없는 것도 아니고, 없어도 더럽게 없다.

 

, 형은 이상형이 뭐예요?”

? 청순한 사람?”

청순?”

. 귀엽고 청순한 사람.”

저 귀엽고 청순하다는 소리 되게 많이 듣는데.”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대놓고 티를 내도 맞아, 정국이 귀엽고 청순해!! 그래서 내가 많이 좋아하잖아!’ 같은 속 편한 소리나 하지. 나는 활짝 웃는 김태형의 얼굴에 입술을 꾹 물었다. 어떻게 눈치가 없어도 저렇게 없지. 진짜 아예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이미 진작에 내가 자길 좋아하는 건 눈치 챘는데 내가 싫어서 모른 척 하는 건가. 솔직히 말하면, 누군가를 먼저 좋아하는 게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건 알겠다. 김태형이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고, 해도 너무한다는 거.

 

너는 왜 사서 고생을 하냐.”

 

고생도 그냥 고생이 아니야. 희대의 눈새 김태형을 좋아하다니. 개고생 가시밭길인데. 내가 고민 끝에 김태형을 짝사랑한다는 말을 털어놓았을 때, 박지민이 형이 오징어를 질겅 씹으며 대꾸한 말이었다.

박지민 형과의 인연은 꽤 오래됐는데, 알고 지낸 기간에 비해 딱히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는 아니었음에도 그에게 내가 김태형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린 걸 보면 내가 그 때 얼마나 절박하고 답답했는가를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박지민 형이 내 사촌 누나를 좋아하면서 보일 꼴, 못 보일 꼴을 이미 다 나한테 보인 상태였기 때문에 더 편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박지민 형은 김태형의 의중을 알 수 있는 나의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결국 별 도움은 안 됐지만.

어쨌든 박지민 형과 김태형이 고등학교 때 절친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 날도 어김없이 단 둘이 가진 술자리에서 김태형은 술이 오른 상태로 기분 좋게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다 제 고등학교 친구 얘길 꺼냈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익숙한 이름에 나는 눈을 반짝였었다.

 

진짜? 박지민을 알아?’

. 제 사촌 누나랑 학원 같이 다녔었어요. 그 형이 우리 사촌누나 엄청 따라다녀서 알게 됐는데.’

아 맞아. 걔 학원에 짝사랑하는 애 있댔어. 엄청 유난이었는데. 그게 네 사촌누나였구나.’

지금 같은 과 동기잖아요.’

맞아! . 우리 운명인가 봐!’

 

우리 운명인가 봐.’ 술에 취한 사람이 아무 의미 없이 내뱉은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일이면 제가 그런 말을 했는지도 기억 못할 김태형을 알면서도. 그 말에 나는 또 설레고. 나는 웃는 김태형을 쳐다봤다. 그래도 어쩌겠어.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는데. 이렇게 눈치 없고 너무해도, 그게 김태형이면 평생 지고 살아야지.

 

김태형은, 니가 걜 붙잡고 입술을 들이밀어도 니가 걜 좋아하는지 모를 애야.”

설마.”

 

어쨌거나, 박지민 형은 나한테 그랬다. ‘네가 왜 여태껏 짝사랑으로 마음고생을 안 했는지 알겠다. 김태형 좋아하면서 몰아 하려고 그랬구나.’ 라고. 그 땐 그냥 설마, 하고 말았는데. 신은 역시 공평하시다며 내 어깨를 토닥이는 박지민 형이, 그냥 나를 놀리려고 하는 말인 줄 알았지.

 

*

 

그런데, 이런 법이 세상에 어디 있냐고.

 

유라 귀엽지 않아?”

?”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익숙한 게 무서운 거라고. 이렇게 계속 옆에서 맴돌다 보면 부담스럽지 않게, 자연스럽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있겠지. 어차피 김태형은 눈치가 없고, 그래서 주위에 여자도 없고. 그래서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게 실수였을까. 휘몰아치는 중간고사와 플젝 때문에 잠시 정신없던 한 달을 보내고 오랜만에 김태형을 만난 음식점에서, 나에게는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김태형의 수줍은 얼굴. 살짝 들떠있는 목소리. 그러니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 같은 얼굴.

 

걔가 누군데요?”

? 우리 동아리 들어온 애. 너랑 동갑이잖아. 한유라.”

 

언제 또 같이 사진까지 찍은 건지. 그럴 필요 없는데 김태형은 친히 핸드폰을 사진첩을 뒤져 그 한유라와 제가 다정하게 찍은 셀카를 보여준다. 그 와중에 김태형 잘 나왔다. 저 여자애만 잘라서 소장하고 싶네. 나는 얼이 빠져 김태형을 쳐다봤다. 그런데, 귀엽다니. 김태형의 입에서 누군가가 귀엽다는 말이 나온 건 처음이라. 나는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왜요?”

걔가 나 좋아하는 거 같아.”

…….”

 

말도 안 돼.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그렇게 티를 낼 때는 죽어도 모르더니, 걘 대체 어떻게 했기에 김태형한테서 이런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거지? 내가 할 말을 잃고 눈만 깜박이고 있던 그 때, 갑자기 내 뒤에서 높은 톤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그 목소리가 김태형의 이름을 불렀고, 그 순간 김태형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태형 오빠! , 정국이도 있었네?”

 

걔구나.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듯 낯선 얼굴의 여자애가 날 보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딱히 주변인들에게 관심을 두는 성격은 아니라 잘 몰랐는데 (게다가 요즘 내 신경은 온통 김태형에게만 쏠려 있었으니), 말을 듣고 보니 몇 번 동아리에서 본 것도 같았다. 옆에 앉아도 되지? 그러라고 한 적도 없는데, 그 여자애, 아니 한유라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내 옆에 앉는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내 옆의 한유라를 보는 김태형의 얼굴이, 너무 솔직하게 김태형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어서.

 

둘이 밥 먹으러 온 거예요? 잘 됐다. 오늘 혼밥할 뻔 했는데.”

 

잘 되긴 뭐가.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내 앞의 김태형은 눈치도 없이 아, 진짜? 잘 됐네, 우리랑 같이 먹자. 하고 대답하고 있다. 같이 밥 먹는 것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그동안 플젝이다 중간고사다 뭐다 해서 오랜만에 단 둘이 만난 거였는데. 하긴, 김태형에게 뭘 기대하겠어. 나는 얕게 한숨을 내쉬고 메뉴판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한유라가 환하게 웃으며 고마워, 하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정국이랑은 밥 처음 먹는 거 같아. 같은 동아린데도 얼굴 보기가 힘들더라.”

, 그동안 바빠서.”

, 태형 선배한테 얘기 들었어. 이번주부터는 나오는 거지?”

 

친화력이 좋은 건지, 넉살이 좋은 건지. 내 말투가 꽤 무뚝뚝했을 텐데도 한유라는 살갑게 말을 붙여 왔다. 그 와중에 나는 또 언제 둘이 만나 내 얘기를 한 건지가 신경 쓰이고. 아무리 사랑이 유치한 거라지만 이렇게 유치해질 필요까지 있나. 박지민 형이 내 사촌 누나를 쫓아다닐 때 뭐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는데 지금 내가 딱 그 꼴이다. 문득 고개를 드는 자괴감에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밥 다 먹고 뭐 해요? 오빠 이제 수업 끝 아니에요?”

. 나 오늘 정국이랑 영화 보려구.”

우와! 뭐 보세요?”

킹스맨 2.”

저도 그거 보고 싶었는데!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 , 그래, .”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대화에 김태형은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승낙해 버린 다음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본다. , 괜찮아? 하는 눈빛. 나는 그 눈빛에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을 리가. 오랜만에 단 둘이 데이트였는데, 갑자기 끼어든 불청객이 반가울 리 없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내가 아니, 안 괜찮아요.’ 할 수도 없고. 김태형은 당황한 것 같고. 그래.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 했지. 대체 어떻게 했기에 김태형 입에서 나 좋아하나 봐소리가 나오게 만들었는지 알아나 보자.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 또 환해지는 김태형의 얼굴이 미우면서도 좋아 죽을 만큼 예뻐서. 나도 참 중증이다.

 

*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것은 그 날로부터 며칠이 지나지 않은 후였다. 그 날 이후로 한유라는 나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여 왔고, 인문대 건물과 공대 건물이 꽤 떨어져 있음에도 나는 심심치 않게 공대 건물 근처에서 한유라를 마주쳤다. 아무리 내가 타인에게 무신경하다 해도, 내가 한유라를 마주치는 상황은 그 역치를 넘어서는 횟수였다. 그리고 매번 와 있는 메신저. 이런 이상한 흐름이 며칠쯤 이어지고 난 후, 나는 상황이 돌아가는 판국을 알아챘다. 아주 개 같은 상황.

 

정국아, 안녕. 또 만났네. 밥 먹으러 가?”

아니. 수업.”

 

짜증나. 나는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한유라를 쳐다봤지만 한유라는 그런 나를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연신 생글생글 웃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한유라는 관심이 있었다. 김태형한테 말고, 나한테. 그 날 영화관에서 굳이 김태형과 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가운데 앉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는 삐딱하게 서 그런 한유라를 쳐다봤다. 뭐 하자는 거야, 지금.

 

, 진짜? 태형 오빠가 지금 너랑 밥 먹으러 간다던데?”

…….”

그래서 같이 가자고 하려고 했는데.”


시발. 나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누가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 그랬을까. 그 말을 한 사람은 천성이 선한 사람이었던 게 분명하다. 웃는 얼굴에 침을 왜 못 뱉어. 나는 욕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하지만 난 그냥 삐딱하게 서서 한유라를 쳐다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는 것은, 한유라 때문이 아니라 김태형 때문에. 저렇게 생글 웃는 낯이 김태형을 웃게 하니까. 짜증나지만. 한유라가 나한테 고백을 한 것도 아니고, 김태형이 종종 얘기를 꺼내는 걸로 봐선 김태형한테도 꾸준히 연락하고 있는 거 같은데. 거기다 대고 김태형한테 한유라에 대해 왈가왈부 할 수가 없는 거다. 상황이 복잡했다.

 

같이 갈 거지?”

…….”

 

그러니까, 한유라가 보통이 아니란 얘기다. 대체 김태형은 있는 게 뭘까. 눈치도 없고, 보는 눈도 없고. 청순한 애가 이상형이라며. 그 말 때문에 누구는 성질 죽이고 팔자에도 없는 착하고 청순한 후배 코스프레하며 사는데. 얘가 뭐가 청순해. 꼬리 백만개는 달린 여우구만.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

 

정국아, 나 물어볼 게 있는데…….”

?”

 

그런데 내가 간과했던 게 있었다. 김태형의 마음. 내 자취방에서 김태형과 맥주를 몇 캔 마시고 나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어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던 때였다. 그날따라 김태형은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왜 그렇게 많이 사 온 건지, 나는 과제가 있어서 많이 못 마신다는데도 김태형은 그럼 내가 다 마시지 뭐! 하고는 정말로 그 많은 캔들을 다 비워냈다. 그 때, 김태형이 나에게 뭔가 할 말이 있었다는 걸 눈치 챘어야 했는데.

 

넌 누구 짝사랑해본 적 있어?”

?”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노트북 모니터에 고정시켰던 시선을 떼고 김태형을 쳐다봤다. 그러나 김태형의 시선은 날 향해 있지 않았다. 품에는 내 베개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손에는 맥주 캔을 꼭 쥐고. 우물쭈물 입을 뗀다. 나는 잠시 그런 김태형의 (귀여운) 모양새를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눈치 챈건가. 심장이 조금 뛰었다.

 

있죠. 저라고 없겠어요.”

진짜? 그 사람도 알아? 네가 그 사람 좋아하는 거?”

…….”

 

원래 몰랐는데, 지금은 좀 아는 것도 같아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 그렇게 말했고 김태형의 얼굴은 미묘하게 변한다. 그러니까, 지금이 타이밍인가. 나는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노트북을 덮었다. 지금 과제가 중요한가. 김태형이 중요하지. 그러나 내 대답에 날 쳐다볼 줄 알았던 김태형은 날 쳐다보는 대신 맥주 한 캔을 더 깠다. 이미 충분히 많이 마신 것 같은데.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김태형을 말리지는 못했다. 혹시 술이 김태형에게 용기를 주고 있는 건가 싶어서. 그 때 만약 김태형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생각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그렇게 다른 줄 알았다면 목숨 걸고 막았을 텐데.

 

그럼 너도 이해하겠네? 짝사랑이 얼마나 힘든 건지.”

그렇죠?”

그럼 너내가 한유라 좋아하는 거 알지.”

?”

 

나는 김태형의 입에서 튀어나온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혹시 그럼 너 짝사랑하는 사람이 나야?’ 그럼 너 나 좋아해?’까진 아니어도, ‘그 사람은 널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라든가, ‘지금도 좋아해?’정도의 말이 나올 줄 알았던 나는 순간 머리가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그 얘기가 여기서 왜…….

 

그런데 너 왜 맨날 나 방해해?”

 

? 나는 김태형의 외침에 그대로 굳어 김태형을 쳐다봤다.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누가 누굴 방해해? 내가 김태형을? 그러나 김태형은 술을 잔뜩 먹어 발개진 얼굴로 억울한 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지금?

 

나도 이런 말 하기 싫었어. 그런데 맨날, 나랑 유라랑 밥 먹으러 가면 따라 오고. 영화 보러 가도 따라 오고. 유라랑 나랑 만나고 있는데 누구랑 카톡하냐고 물어보면 너랑 하고 있고. 유라는 맨날 네 얘기만 하고!”

 

김태형이 이렇게 말이 빨랐나 싶을 정도로 김태형 입에서는 단어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나는 멍하니 그 단어들을 주워섬기고 있었다. 내가 방해해? 김태형이랑 한유라 사이를? 기도 안 찰 말이었다. 방해하는 건 한유라가 나랑 김태형 사이를 방해하고 있는 거지. 원래 밥도 나랑만 먹었잖아. 영화도 나랑만 봤고. 한유라랑 카톡한 건 한유라가 계속 동아리 관련 질문으로 날 귀찮게 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8시간 10시간에 한 번씩 답장했는데. 그리고 한유라가 계속 내 얘기만 하는 건,

 

좋아하니까요!!!”

 

좋아하니까. 김태형 말고 나를. 하나도 안 좋고 짜증만 나지만, 걔가 날 좋아하니까. 그런데 나는 김태형을 좋아하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빽 소리를 내뱉었다. 그래, 고백을 내뱉었다’.

실수였다. 이렇게 고백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술도 마셨고, 기대하고 있었던 게 한 순간에 이렇게 무너지니 순간 머리가 휙 돌았던 거다. 게다가 김태형이 날 방해꾼 취급했잖아! 나는 김태형을 똑바로 쳐다봤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지. 내가 방해라니. 방해받아서 빡치는 게 누군데. 참고 있는 게 누군데. 서럽고 짜증나고 서운하고 죽겠는데 참고 있는 게 누군데! 다 형 좋아해서 지금 이러고 있는 건데 어떻게 나한테!

 

?”

…….”

, 좋아한다고?”

 

예상했던 대로, 김태형은 놀란 토끼눈을 한다.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술 취한 채로, 자취방에서, 과제하다 말고 멋없고 무드 없게 고백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나 싶어 속이 상했다. 좀 참을 걸. 그런데 어떡하겠나. 너무 오래 잠가 놓은 감정이라 한 번 터지니 주체가 안 된다. 나는 말없이 김태형을 쳐다봤고 김태형은 그런 나를 쳐다봤다. 여전히 눈은 동그랗게 뜬 채로.

 

진심이야?”

진심이에요.”

포기 못 하겠어?”

포기하기엔 이미 너무 좋아해요.”

…….”

포기 못 해요. 아니, 안 해요.”

 

그런데 엎질러진 물을 어떡하겠어. 나는 김태형에게 조금 다가갔다. 김태형은 여전히 충격이 큰지 입을 벌리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하긴, 충격이긴 하겠지. 그렇게 티를 내도 몰랐는데. 말 잘 듣는 후배라고만 생각했던 내가 자길 좋아한다니, 충격이긴 할 거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늘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면, 이제부터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면 된다. 어차피 난 포기할 생각도 없고, 포기도 안 되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김태형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무서운 건 사실이라. 차마 김태형의 얼굴을 제대로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말없이 앉아만 있었을까, 김태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랑 어색해져도?”

.”

나랑 사이가 틀어져도?”

당연, ?”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무심코 대답하다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마주한 김태형의 눈가가 빨갛다. 나는 당황해 입을 벌렸다. , 울어? 그러나 내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김태형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여전히 눈을 크게 뜬 채로 그런 김태형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잠깐만, 지금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설마

 

, 이제 나한테 아는 척 하지 마.”

 

지금 내가 한 그 좋아한다는 말을 내가 한유라를 좋아한다고 착각한 거야?! 그러나 내가 생각 정리를 끝내기도 전에 김태형은 자취방을 나가 버렸다. 여전히 눈가는 빨간 채로. 아니, 눈치가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나는 얼이 빠져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다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일어났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오해를 해도 무슨 별 거지같은 오해를 하고 있잖아!!

 

태형이 형!!!!”

 

그러나 김태형은 눈치는 더럽게 없는 주제에 행동은 재빨랐다. 술도 엄청 마셨을 텐데, 택시라도 탄 건지 김태형은 이미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전화도 안 받고, 메신저도 안 받고. 결국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김태형의 자취방까지 찾아가봤지만 김태형은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 술까지 마신 사람이 대체 어딜 간 거야. 그러나 작정하고 내 연락을 다 씹는 김태형은 아무리 전화를 하고 메신저를 보내도 묵묵부답이다.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아 진짜 설마…….

 

나 차단한 거냐고…….”

 

그러니까, 이게 나의 첫 고백에 대한 기억이다.


+


정국이의 다정함은 태형이 한정


삽질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


~대환장파티는 번외 0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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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

 

태형은 제 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이제는 자취방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대한민국의 햇살이 아닌 창호지를 통해 들어오는 조선의 햇살에도 익숙해진 참이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불렸다던 조선의 아침은 정말로 햇살이 부드럽고 새가 지저귀는, 새벽의 공기가 아직은 차가운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조선에 와서 좋은 것이 하나 있다면 시끄러운 핸드폰 알람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 학교에 지각할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아침에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손 안에 감기는 부드러운 비단 이불을 만끽하며 여유롭게 눈을 뜰 수 있…….

 

으아악!!!!!!”

잘 잤어요?”

 

태형은 천천히 눈을 뜨자마자 제 눈에 들어차는 전정국의 퀭한 얼굴에 눈곱도 채 떼지 못한 눈을 크게 뜨고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정국은 그런 태형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이내 얕게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쓸었다.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 한 채로 너무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정국의 얼굴에 태형의 심장은 또 아침부터 힘차게 뛰고 있었다. 나 진짜 부정맥 아니야? 무슨 이렇게 심장이 시도 때도 없이 뛰어. 태형은 제 심장에 손을 올렸다. 안 돼 아직 쓸 날 많이 남았는데…….

 

너 왜 여기…….”

 

나 어젯밤에 한숨도 못 잤어요, 하고 광고를 하고 있는 듯한 정국의 퀭한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던 태형은 말을 잇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문득 떠오른 어젯밤의 기억 때문에. 그러니까 어제가, 합궁일이었지. 그리고 전정국이 내 머리와 옷고름을 풀어 줬었고, , …….

 

그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니죠?”

 

첫키스도 했다.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제 심장에 얌전히 올려뒀던 손을 올려 제 입에 가져다댔다. 뽀뽀가 아니었다. 키스였다. 키스였다고. 뽀뽀와 키스의 차이가 뭘까요?’ ‘역시 혀의 유무죠!’ 언젠가 지나가듯 봤던 한 남자아이돌의 인터뷰가 태형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명쾌하고 확실한 정의 감사합니다. 그걸 이 상황에 적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태형은 뜨거워지는 얼굴을 통제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 미쳤어. 학교 후배랑. 그것도 남자 후배랑. 키스했다. 그 앞에서 신음소리도 냈다. 차마 문장으로 옮겨 적기도 낯부끄러운 말들에 태형은 입 안쪽 살을 잘근 씹었다. 정국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디 아픈 건 아니죠?”

?”

계속 걱정했잖아요.”

 

그런데 이어지는 정국의 말에, 태형은 고개를 들었다. 정국의 동그란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태형은 입을 벌렸다. 그러고 보니, 그 다음에 어떻게 됐더라. 상궁들은 장지문 너머에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그 과도한 친절에 태형은 연기를 해야 했다. 그리고 제 혼신의 발연기에 정국이 도와주겠다며 입을 맞췄고, 그리고,

 

어떻게 된거야?”

 

그리고 어떻게 됐더라? 그 다음의 기억이 없었다. 태형은 재빨리 시선을 내려 제 몸의 상태를 살폈다. 설마, 첫키스에 이어 첫경험까지 한큐에 해결하고 지쳐 잠들었다는 전개는 아니겠지. 그러나 다행히도 등골이 서늘해져 세심히 살핀 제 상태는 저도 모르는 사이 인생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넘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태형의 행동을 응시하던 정국이 입을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잠든 사람을 데리고 뭘 해요.”

잠들었다고?”

눈 감는가 싶더니, 갑자기 픽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요?”

 

태형이 멍청히 눈을 깜박였다. 쓰러져? 내가? 잠들었다고? 키스하다가? 설마.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제 마지막 기억은 키스에서 끊겨 있었다. 아니 세상에 키스하다가 잠드는 사람도 있어? 그것도 첫키스인데? 근데 그게 내 얘기래. 태형이 멍하니 입을 벌렸고 정국은 그런 태형의 턱을 받쳐 입을 닫아주며 픽 웃었다. 형이 생각해도 황당하죠? 난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아니, 어떻게, ?”

피곤한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피가 확 몰리면 그럴 수도 있대요.”

 

상궁들이 많이 괴롭혔어요? 정국이 태형을 향해 웃었고 태형은 그 웃음에 다시 멍해지는 머리를 느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첫날밤에 키스하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니.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태형은 눈동자를 굴렸다. 아니 그래도 명색이 첫날밤인데. 물론 뭔가를 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고 하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제가 갑자기 쓰러져버린 탓에 정국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싶어 태형은 괜히 미안한 마음이 차올랐다. 제가 그렇게 대책 없이 쓰러져버린 후에 들이닥쳤을 궁녀들을 정국 혼자서 어떻게 해결했을까 싶기도 하고. 결국 잠시 입을 벌렸다, 닫았다를 반복한 태형이 이내 개미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

형이 왜 미안해요?”

아니…….”

형이 미안할 일은 전혀 아니고. 그렇게 힘들었으면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요.”

 

그런데 정국의 반응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다는 반응이라, 태형은 괜히 마음 한 구석이 찡 해 오는 것을 느꼈다. 유라 때문에 조금 어색해지긴 했지만, 정국이 괜히 제가 아꼈던 후배는 아니긴 했던 모양이었다. 전정국 진짜 된 놈 맞구나. 태형은 뿌듯해진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후배 하나는 참 잘 뒀어.

 

앞으로는 피곤하거나 힘들면 나한테 말해줘요, 형도.”

…….”

.”

 

알았죠? 퍽 다정하게 들리는 정국의 목소리에 제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고 있자 확답을 받아내려는 듯 정국의 시선이 진득하게 따라 붙는다. 결국 태형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제가 정국에게도 했던 말인데. 아무 특별할 것 없는, 선후배 사이에 할 수 있는 일상적인 말. 그런데 어쩐지,

 

그럴게.”

 

심장이 간질거리는 것 같다.

 

*

 

마마, 소인들이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십니까…….”

 

정말, 숨이 멎는 줄 알았사옵니다. 그렇게 정국을 보내고, 합궁으로 특별히 준비되었던 방을 떠나 제가 본디 생활했던 방으로 돌아온 태형은 제가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버선발로 뛰쳐나와 울상을 짓는 상궁들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랬어? 하긴, 합궁이라고 그렇게 학수고대하며 준비를 했는데 막상 방 안에 들여보냈더니 갑자기 픽 쓰러졌으니 놀랄 법도 했다. 괜히 미안해진 태형이 상궁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자 상궁이 지금은 괜찮으신 거냐며 걱정스런 얼굴로 태형을 살폈고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냥 잠든 거야. 좀 피곤했나 봐.

 

소인들이 마마를 잘 보필했어야 했는데…….”

아냐, 괜찮아.”

전하께서 마마를 직접 살피실 테니 저희는 다 물러가라고 하셔서…….”

?”

 

그런데. 상궁의 말에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던 태형은 처음 듣는 소리에 눈을 키웠다. 그게 무슨 소리야? 계속 옆에 있었던 거 아니었어? 태형이 묻자 상궁은 고개를 저었다.

 

본래대로라면 저희가 마마를 간호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 전하께서 마마와 전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다 물러가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

몇 번이나 저희가 하겠다는데도, 직접 살피시겠다고, 그러니 방 안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워낙 단호히 말씀하셔서 저희도 어쩔 수 없이…….”

 

상궁이 머리를 조아리며 하는 말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제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 그럼 밤새 합궁을 위해 마련된 그 방에서 단 둘만 있었단 건가. 태형은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아 고개를 숙였다. 아니,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간호, 해 줄 수도 있는 거지. 혹시 상궁들이 저를 간호한답시고 제 몸을 만질까봐 상궁들을 모두 물린 것일 거고.

 

하온데 마마…….”

……?”

소인이 중간 중간 혹여 전하께서 잠드셨을까 몰래 보고 왔사온데…….”

, …….”

정말 전하께서는 단 한 시도 한눈을 팔지 않으시고 오직 마마만을 지켜보고 계셨사옵니다.”

…….”

어의가 마마께오선 그저 잠드신 것뿐이라 했을 때 몇 번이고 확인을 받으셨으니 그냥 잠드신 것인 걸 알고 계셨을 텐데, 그 용안에 다정함과 마마를 향한 연정이 어찌나 듬뿍 묻어나는지. 간혹 마마의 이마에 손을 올려 혹여 마마께서 불편하실까 살피시는데 정말 저는…….”

…….”

정말 조선에 양봉업이 따로 필요 없겠다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아까 저를 걱정하며 우울해하던 상궁은 어디로 갔는지, 제 눈앞의 상궁은 그새 제가 다 설렌다는 듯 두 손까지 꼭 모아 쥐고서 태형을 반짝반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태형은 그런 상궁을 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 , 그냥 자네가 보고 싶은 것만 봐서 그런 게 아닐까. 하지만 상궁은 그런 태형의 말에 가당치도 않다는 듯 제 눈은 마치 매의 눈과 같아서 진실만을 본다며 단호했다.

 

진짜?”

진실이고말고요!”

 

결국 볼을 긁은 태형이 상궁에게 슬쩍 물었고 상궁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왜 이렇게 심장에 나비가 날아든 것처럼 간지러운지. 태형은 제 심장께에 손을 갖다 댔다. 왜 이렇게 오늘따라 아무것도 아닌 거에 의미부여가 되지? 후배가 아픈 선배 간호해 줄 수도 있는 건데. 단 둘이. ? 자취방에서. 밤새도록……. 간호해 줄 수도 있는 거아닌? 막 그렇게 막 다정한 눈빛으로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전하께서 정말 마마를 연모하시는가 봅니다.”

그래?”

 

그러니까, 왜 이런 거에 괜히 기분이 실실 좋아지냐는 말이다. 태형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려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에게 챙김 받는다는 게 기분이 좋은 건가. 아니면 사이가 안 좋아졌던, 원래는 엄청 친했던 후배와 다시 친해지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은 건가. 그것도 아니면,

 

, 그리고 전하께서 마마가 그 때까지 기운을 차리실 수 있으시다면,”

…….”

사흘 후에 전하께서 야간 시찰을 나가실 때 동행하지 않으시겠냐고 마마께 여쭤 보라 하셨습니다.”

…….”

전하께오서 이러신 적은 정말, 처음이옵니다, 마마.”

 

그냥 전정국이 좋은 건가.

 

*

 

정국와 태형의 첫 합궁 아닌 합궁이 있고 난 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정말 괜찮다고 했는데도 상궁들은 태형이 바람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부서질까 애지중지 대했고 그런 상궁들이 약간은 부담스러우면서도 사실 편한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라. 태형은 나름 만족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 날 이후 태형은 한 번도 정국을 볼 수 없었지만 그 이유는 상궁들이 충분히 이해가 가도록 설명을 해 주었다. 최근 합궁을 준비하느라 궁 전체가 들썩였기 때문에 조금 밀린 정사를 해결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거였다. 조선으로 떨어지기 전에는 인사도 안 하고 지냈던 사이면서, 그새 또 매일 보는 일상에 적응된 것인지 하루가 머다하고 보던 정국을 보지 못하니 조금 허전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했지만 태형은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었다. 사실 그래봐야 3일이었고, 오늘 밤에 정국과 함께 궁 밖으로 야간 시찰을 다녀오기로 했으니까. 태형은 아침에 눈을 뜬 이후부터 계속 하이 텐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마, 오늘따라 안색이 밝으십니다. 혹 오늘 밤 전하를 뵙기 때문입니까?”

, 아니거든!!”

이리도 중전 마마와 주상 전하의 사이가 좋으시니, 지밀상궁에게 언질하여 다음 합궁일을 빨리 정하여야겠습니다. 이대로라면 정말 튼튼한 아기씨를 회임하실 것 같사옵

에헤이!!”

 

대낮부터 그 무슨 낯부끄러운 소린가!! 태형은 괜히 찔리는 마음에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거 아니고 그냥 밖에 나가서 좋은 거야!! 태형은 재빨리 덧붙였지만 사실 제 자신도 왜 때문에 이렇게 아침부터 기분이 좋은 것인지는 확실히 알지 못했다. 정국을 만나서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니면 외출을 나가서 기분이 좋은 건지. 궁 안 생활이 답답했던 것도 맞고, 밖에 나가 보고 싶었던 것도 맞지만 뭐랄까그것 외에도 미묘한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달까. 태형은 애써 떠오르는 얼굴을 지우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밖에 나가서 좋은 거야. 밖에 나가서. 끊임없이 제 자신에게 세뇌하면서.

 

마마…….”

 

신난 태형이 조찬을 물리고 읽지도 못하는 한문으로 가득 찬 책을 뒤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상궁 하나가 제 옆에 있던 상궁에게 다가와 뭐라 귓속말을 하더니, 이내 상궁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무언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 같은 흐름에 태형이 구경하고 있던 책을 덮고 상궁의 안색을 살폈다. 아침부터 태형과 함께 내리 밝았던 상궁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져 있었다. 뭐지? 갑자기 살짝 내려앉은 분위기에 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 있어?”

다름이 아니오라…….”

 

그러니까, 상궁이 전해 온 사건의 전말은 대략 이러했다.

요 근래 왕이, 그러니까 정국이 한 희빈을 전혀 찾지 않았던 관계로 한 희빈과 한 희빈의 아비는 꽤 불만이 쌓여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한 달에 한 번 찾았다지만 명색이 애첩인데. 게다가 그냥 아무도 안 찾은 거였으면 왕께서 요즘 그냥 그 쪽(?)에 관심이 없으신가보다, 했을 텐데 오히려 교태전은 평소보다 더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아무 일도 없었지만) 최근의 합방까지. 한 희빈은 결국 질투에 눈이 멀어 조선 최고의 세도가인 제 아버지에게 불평을 했고, 그에 한 희빈의 아버지는 억지로 날을 받아 상선(尙膳 : 내시부의 우두머리)에게 왕을 한 희빈의 처소로 모셔 오도록 약속을 받아냈고, 우연찮게도 그 날이 오늘, 그러니까 정국과 태형이 야간 시찰을 나가기로 한 날이었다는 것이다.

 

해서아마도 오늘 밤 전하께오서는 희빈의 처소에 가지 않으실까 싶사옵니다.”

…….”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두근두근 기분 좋게 떠올랐던 기분이 한 순간에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렇구나. 태형이 중얼였다. 머리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데, 납득도 하는데. 어쩐지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 서운? 아쉬운 게 아니라 서운? 태형은 저도 모르게 떠올린 단어에 옷 아래의 손가락을 꼼질였다. 서운하다니, 누구한테? 그냥 밖에 나가기로 했는데 못 나가게 돼서, 그게 아쉬운 거 아닌가? 뭐가 서운한 거지.

 

마마?”

, ?”

오늘 다과상에 유밀과를 올릴까요?”

 

유밀과는 태형이 좋아하는 달달한 과자로, 요 근래 합궁을 앞두고 상궁이 먹지 못하게 했던 것이었다. 제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슬그머니 묻는 상궁의 마음에 태형은 살짝 웃어 보였다. 그래, 서운하고 아쉬울 게 뭐가 있어. 어차피 한 희빈은 유라가 아니고 야간 시찰이야 나중에 또 나가면 되지. 그렇게 애써 달래 보아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지만.

 

*

 

그런데 왜.

 

전하, 소녀에게 어찌 이러십니까!”

 

태형은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렇게 어딘가 서운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고 일찍 잠자리에 들려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상궁 하나가 방으로 뛰쳐 들어오더니 태형을 불렀다. 마마, 잠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고. 그래서 무슨 일인가 싶어 교태전 안뜰로 뛰어 나온 태형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지금쯤 한 희빈의 처소에 있어야 할 정국과, 역시나 한 희빈의 처소에 있어야 할 한 희빈이었다. 너희가 왜 거기서 나와?태형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눈을 깜박였다. 마침 나와 있었던 교태전의 상궁들이 태형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 중전 마마. 오셨습니까. 상궁들 역시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어찌 이러다니. 내가 중전을 찾는 것이 희빈에게 어찌 이러냐는 소리를 들을 만 한 일인가?”

전하!”

그보다도, 어째 교태전에 올 때마다 매번 중전의 얼굴보다도 희빈의 얼굴을 먼저 보는 것 같소.”

…….”

희빈이 이리도 중전을 친애하는지 몰랐는데.”

 

태형은 살짝 낯선 정국의 굳은 얼굴에 정국에게 한 걸음 다가서려다 그대로 멈추었다. 제가 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국은 한껏 억울한 표정의 희빈에게 한없이 차가운 얼굴로 차가운 말을 내뱉고 있었다. 정국은 천천히 나긋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에는 명백히 뼈가 있었고 그를 희빈도 느꼈는지 한 희빈은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한 희빈의 뒤에서 한 희빈의 상궁들 역시 서로 눈치를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고. 태형은 조금 멀찍이 서서 그 장면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박였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조차 태형은 모르는 채였으니까. 그 순간, 얕게 한숨을 내쉰 정국이 주위를 둘러보다 태형과 눈이 마주쳤고 태형은 흡,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저렇게 냉한 표정의 정국은 처음 본다.

 

중전. 여기서 뭐 하십니까. 채비하지 않고.”

?”

나와 야간 시찰을 나가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정국의 입에서 나온 말은 또 의외의 것이어서. 그거 오늘 취소되었다고 아까 상궁이 그랬……. 태형이 정국의 말에도 멀거니 눈만 깜박이고 있자 정국이 살짝 웃으며 다가와 태형의 어깨를 보란 듯이 감쌌다. . 지금 한 희빈이 보고 있지 않나? 저를 감싸는 온기에 태형이 저도 모르게 한 희빈에게 시선을 던지자 역시나 정국과 태형을 향해 있던 한 희빈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이 보여, 태형은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이게 뭐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지.

 

너 지금 뭐 해?”

뭐가요?”

오늘 한 희빈한테 가기로 했다며.”

 

결국 태형이 상궁과 희빈에겐 닿지 않게끔 고개를 한껏 정국에게 기울여 속삭였다. 남들이 보면 저기서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고 있는 한 희빈에게 보란 듯이 다정하게 귓속말하는 부부 내외로 보이겠지만 그런 사실이 태형의 머릿속에까지 닿을 새는 없었다. 태형은 그저 이 상황이 당황스러울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태형과 달리, 역시나 정국은 태평했다.

 

형이랑 약속이 먼저였잖아요. 저건 지 멋대로 잡은 거고. 애초에 나는 약속한 적도 없는데.”

아니 그래도…….”

근데 형은 왜 준비 하나도 안 하고 있었어요?”

아니, 나는 당연히 오늘 파토난 줄 알았지!”

제가 형이랑 한 약속을 깨고 한 희빈한테 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 아니 말이 또 그렇게 되나? 태형은 되려 눈을 크게 뜨고 물어 오는 정국에 말끝을 흐렸다. 아니 뭐 딱히 그렇다기보단한 희빈의 아버지가 세도가라 했으니까. 아무리 너라도 그걸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건데…….

 

내가 형 같은 줄 알아요…….”

? 뭐라고? 못 들었어.”

 

방금 정국이 뭐라 투덜거린 것 같았는데. 태형은 되물었지만 아녜요. 하고 말을 뚝 끊어 버리는 정국에 태형 역시 입을 삐쭉 내밀었다. 아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태형은 자꾸만 눈치 없이 올라가려 하는 입꼬리를 내리느라 무진 애를 썼다. 분명히 꼬인 상황인 것이 틀림없는데. 한 희빈이 저렇게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도 자꾸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느새 교태전 안, 태형의 방까지 도달한 정국이 태형을 감싸고 있던 팔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계속 어깨가 감싸인 채로 왔구나. 어느새 정국이 저에게 하는 스킨십이 익숙해진 것 같아 태형은 입맛을 다셨다. 아니 뭐, 별 거 아닌 스킨십이긴 한데…….

 

그 용안에 다정함과 마마를 향한 연정이 어찌나 듬뿍 묻어나는지.

 

자꾸만 그 말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태형은 자꾸만 귓가에 메아리쳐 들리는 상궁의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그 상궁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거라니까. 정신 차려, 김태형! 괜히 손바닥을 펴 제 볼을 가볍게 두드린 태형이 잠시 상궁이 제가 입을 옷을 준비하러 간 사이 어색해진 공기에 잠시 눈을 굴리다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유라, 아니 희빈한테 잘 해줘.”

?”

아니, 그러니까. 너 좋아하잖아.”

형이 지금 걔 걱정할 처지예요?”

 

사실, 딱히 진심은 아니었고. 괜히 한 번 던져본 거였다. 그런데 그에 대답하는 정국의 말투가 또 삐딱하다. 제 딴에는 나름 정국을 위한답시고 한 말인데. 괜히 찔끔한 태형이 아, 아니! 하고 말을 더듬었다.

 

아니, 내 말은,”

그리고 걔가 저 좋아하는 거지 제가 좋아하는 건 걔가 아닌데 왜 잘해줘요, 제가. 아니, 생각해보니까 나 좋아하는 것도 아니잖아. 왕을 좋아하는 거지.”

 

아니 근데 왜 화를 내구 그르냐……. 묘하게 뾰족한 정국의 말투에 태형은 차마 대꾸는 하지 못하고 입을 삐죽였다. 하긴 정국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정국이 좋아하는 건 현대의 한유라지 조선의 한 희빈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어쨌든 한 희빈이랑 한유라가 우연이라기엔 좀 많이, 심하게 닮았으니까 한 말이었는데한 희빈의 아버지가 권력가이기도 하고……. 태형이 우물쭈물 손가락을 꼼질대자 그런 태형을 지켜보던 정국이 폭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준비하고 나와요. 이러다 야시장 문 다 닫겠다.”

야시장?”

. 형이 예전에 뭐, 대만인가. 야시장 가보고 싶다고 그랬잖아요. 대만은 아니지만.”

 

, 내가 쟤한테 그런 말도 했었나. 태형은 볼을 긁었다. 대만 야시장, 평소에 태형이 가보고 싶어 했던 곳이긴 했다. 그런데 그런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쟤 기억력 엄청 좋네. 태형이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한 희빈이고 한유라고. 정국의 말대로 어차피 지금 태형이 신경 쓸 바는 아니긴 했다. 전정국이 알아서 하겠지. 정국이 말을 끝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궁이 태형이 야간 시찰에 입고 나갈 옷을 준비해 들어왔고, 태형은 옷 입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상궁의 말을 애써 뿌리친 채 낑낑거리며 혼자 옷을 주워 입었다. 아무래도 매번 정국이 도와줄 수는 없으니 혼자서라도 어떻게든 한복을 입는 법을 익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태형의 이러한 고민은 머지않아 태형도, 정국도 생각지 못했던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사실 머지않아, 라고 표현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금방. 그러니까, 태형과 정국이 호위무사를 너덧명을 데리고 야간시찰을 나갔던 그 날 밤에. 그러니까, 상황은 대략 이렇게 전개되었다.

 

*

 

우와. 나 야시장 처음 와 봐.”

 

태형은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기분이 좋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야간 시찰을 나오지 못할 것 같아 살짝 서운했던 거였는데, 정국과 함께 밤 외출을 나올 수 있게 된 데다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야시장이 제 눈앞에 펼쳐져 있다. 이거야말로 조선에 떨어지지 않았다면 평생 보지 못했을 장면 아닐까. 태형은 연신 감탄을 터뜨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비록 전기로 빛나는 화려한 조명은 없지만, 은은한 불빛에 왁자지껄한 상인들의 목소리는 분명 그만의 낭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길 잃어버려요.”

 

명색이 왕과 왕비였기에 호위무사를 대동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고작 너덧명으로 이루어진 호위무사는 태형과 정국을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는 대신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태형과 정국이 조그맣게 대화하는 목소리는 듣지 못할 만큼의 거리를 두고. 방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움직여야 할 때는 항상 지척에 상궁들을 대동해야만 했던 궁궐 안에 비하면 이 정도는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로운 기분이라, 태형은 활짝 웃었다. 완전 신기해. 그냥 야시장 같은데, 사람들 다 한복 입고 있어.

 

저건 뭐야?”

저거 과일아 형! 그러다가 진짜 길 잃어버린다니까요.”

 

게다가 적응했다곤 하지만 언제나 불편했던 치렁치렁한 여자 한복을 벗고 입은 야간 시찰복은 여자의 의복보단 남자의 의복에 가까워서, 태형은 훨씬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밤바람은 시원하고, 기분은 자유롭고, 몸 역시 가볍고. 태형의 기분은 지금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고 할까. 그래서 태형은 조심하라는 정국의 말에도 끝도 없이 이어진 상점들을 기웃대며 연신 두리번거렸다. 조선에 떨어진 이후로는 처음 느껴 보는 광경이었다. 사람도 많고, 시끄럽고. 꼭 학교 축제 같다. 태형이 중얼거렸다. 여자친구랑 학교 축제 구경하는 게 로망이었는데. 이러다가 슬쩍 손도 잡고, 서로 맛있는 거 사서 먹여주기도 하고…….

 

으악!”

, 미안합니다~!”

 

태형이 구경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그 때였다. 누군가가 태형을 퍽 치고 지나갔고 그 반동에 태형의 몸이 휘청였다. 태형을 치고 지나간 남자는 태형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대충 사과한 채 휙 하고 지나쳤고 태형은 바닥에 나동그라져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뭐야, 완전 고의로 치고 지나간 것 같은데!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이가 없어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태형이 눈만 깜박이고 있자, 인파에 밀려 살짝 뒤에서 태형을 뒤쫓아 오고 있던 정국이 재빨리 태형에게 다가왔다.

 

그러길래 조심하랬잖아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아니, 저 사람이 나 일부러 치고 지나갔,”

 

태형이 뭐라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정국이 태형의 팔을 잡아 힘주어 태형을 일으켜 세웠다. 아니, 진짜. 내가 연약한 게 아니고 저 사람이 어깨빵을 친 거라니까? 태형이 억울한 듯 꿍얼대자 정국이 살짝 웃으며 그런 태형의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주며 입을 열었다.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요. 바빴나 보죠. 사람 잃어버리기 딱 좋겠네.”

앞으로 조심할게.”

.”

 

정국이 제 몸을 툭툭 털어 주는 것도 그렇고, 일으켜 세워 준 것도 그렇고. 다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인데 정국이 해 주니 괜히 기분이 묘했다. 6살 어린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 태형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자 정국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몇 번이고 조심하랬는데 내가 그 말 안 듣고 기웃대다가 넘어져서 짜증났나? 태형이 살짝 정국의 눈치를 보자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던 정국의 눈이 순간 태형을 향했다. . 눈 마주쳤어. 순간 마주친 눈에 태형은 숨을 삼켰다. 어쩐지 기분이 좀,

 

.”

?”

잡을래요?”

 

이상해. 태형은 제게 내밀어진 정국의 손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정국을 쳐다봤다. 그러나 정국의 시선은 태형을 향해 있지 않았다. 왜 날 안 보고 얘기하지? 그러나 정국의 얼굴을 바로 쳐다볼 수 없는 것은 태형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뭐라고. 태형은 괜히 간질거리는 것 같은 느낌에 입 안 쪽 여린 살을 꾹 깨물었다. 이게 참, 분위기라는 게 무섭다. 태형은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분명히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친했을 땐 장난으로 껴안고 어깨동무도 했던 사이에 손잡는 게 뭐 대수라고.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사람이 많으니까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잡는 거라는 걸 알고 있어도. 아무리 머리로는 이해를 한다 해도.

 

…….”

 

그렇게 내 얼굴 쳐다보지도 못하고 손만 내밀면, 괜히 나까지 부끄러워지잖아. 태형은 제게 내밀어진 손을 잡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게 무슨 연애 초반에 스킨십 진도 나가는 커플 같은 텐션이지.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자꾸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러고 보면, 태형은 계기야 어쨌든 정국과 처음 한 것이 되게 많다는 것을 실감했다. 비단 조선에 떨어지기 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조선에 떨어진 이후론 더더욱. 이렇게 손을 잡고 걷는 것도, 야시장에 온 것도. 그리고 또 첫키스도 전정국이랑 했고…….

 

으아악.”

왜 그래요?”

? , 아냐.”

 

갑자기 첫키스가 왜 떠오르는데! 그건 무효지! 태형은 재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잊어버려 김태형. 그건 연기였어. 어쩔 수 없는 거였다고. 태형은 애써 제 자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드는 제 안의 또 다른 자아가 질문을 던진다. 그럼 지금은 뭔데? 굳이 손잡고 걸을 필요 있어? 그냥 가까이만 걸으면 되지. 태형은 입술을 깨문다. 그러게. 이건 뭘까. 태형도 제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그러고 싶어서 잡은 건데.

 

.”

, ?!”

저거 먹을래요?”

태형이 제 안의 또 다른 자아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정국의 목소리가 들렸고 그제야 태형은 깊은 고뇌에서 벗어나 정국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국이 가리킨 것은 꿀이 발라진 딸기였다. 전정국은 제가 딸기를 가장 좋아하는 걸 알고 저걸 짚은 걸까, 아니면……. 태형은 무의식적으로 또 정국의 생각을 하다 이내 제 볼을 짝 쳤다. 이런 거에 하나하나 의미부여 하지 말라고! 이러다가 아주 숨 쉬는 거에도 의미부여하겠어! 태형은 자꾸만 떠오르는 생각을 잊으려 부러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먹을래!! 먹어!! 다 먹자!!

 

그거 다 먹을 수 있겠어요?”

 

그리고 잠시 후, 정국은 태형의 두 손 가득 담긴 먹을거리들을 보고 눈을 깜박였다. 딸기꼬치, 닭구이, , 꿀이 발라진 과자, 유과까지. 다 먹을 수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음식들은, 태형이 욕심을 부려 가득가득 산 것들이었다. 혹시 상궁들이 형 굶겼어요? 정국의 말에 태형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정국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서, 그때마다 충동적으로 음식들을 샀다. 제가 사려고 할 때마다 명색이 왕인데 이 정도는 낼 수 있다며 정국이 계산한 탓에 제가 산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이 말은 죽어도 못 하지. 태형은 다 먹을 수 있어, 하고 괜히 큰 소리를 쳤다.

 

…….”

 

그러나 태형이 차마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건 제 손이 단 두 개뿐이라는 거였다. 한 손에는 떡을, 한 손에는 꼬치를. 그리고 끌어안은 품에는 과자가 담긴 봉투를. 막상 먹으려고 하니 옴짝달싹 할 수 없을 정도로 태형은 무작정 손에 집히는 대로 사고 보았던 것이다. 결국 살짝 한숨을 내쉰 정국이 태형의 손에 들린 딸기 꼬치를 뺏어 들었다. , 고마워. 태형이 대신 들어주려나보다, 하고 생각하며 감사의 말을 하려던 그 때였다.

 

.”

?”

 

아니, 들어주려는 거 아니었나? 태형은 갑자기 제 입에 들이밀어진 딸기 꼬치에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입을 벌리라는 듯 아, 하고 말한 정국은 안 먹고 뭐 하냐는 표정이다. 결국 태형은 얼떨결에 정국이 내민 딸기 꼬치의 딸기 한 알을 입으로 쏙 베어 물었다. 그러자 정국이 잘 먹네, 하고 웃는다. 태형은 괜히 귀가 뜨거워지는 것 같은 기분에 딸기를 꼭꼭 씹었다. 아니, 내가 음식들을 그렇게 소중하게 품고 있었나. 들어주는 게 아니라 먹여 주다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태형이 딸기를 다 씹어 삼키자 정국이 태형이 먹기 편하도록 딸기를 위로 밀어 올린 뒤 다시 한 번 태형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걸 또 태형은 받아먹었고. 그러니까, 말하자면 태형은 지금 자각하지 못한 채 얼떨결에 제 로망을 실현 중에 있었던 것이다. 야시장에서 맛있는 거 먹여 주기. 비록 그 상대가 여자친구가 아닌 후배긴 했지만……. 아니 그러고 보니 손도 잡았잖아?!

 

무슨 생각해요, .”

, ?”

 

[SYSTEM] ‘김태형님의 캠퍼스의 로망퀘스트 달성! 저도 모르는 새에 머리 위에 반짝반짝 빛나는 퀘스트 완료 타이틀을 달아버린 태형은 입 안에 가득 찬 달콤한 과즙을 혀로 핥았다. 그 와중에 또 딸기 꼬치는 엄청나게 달아서. 그 달콤한 감각은 태형의 혈관을 타고 올라가 태형을 대책 없이 기분 좋게 만들었다. 달고, 시원하고, 따뜻하고. 그 묘한 감각에 태형은 또 심장이 간지럽고. 꼭 마치 제가 영화 속 한 장면의 주인공 같은 느낌…….

 

도둑이야!!!!”

 

그러나 태형이 기분 좋게 정국이 건넨 떡을 한 입 딱 베어 물었을 때였다. 바로 지척에서 들리는 고함 소리에 태형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고, 태형의 눈은 금세 그 크기를 키웠다. 태형이 돌아본 곳에는 한 아주머니가 도둑이라며 소리를 치고 있었고, 한 남자가 재빨리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 그러고 보니까 나 가져왔던 돈주머니가 없어!!”

 

낯설지 않은 얼굴이다. 태형은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음식들을 우수수 떨어트리고 제 몸을 더듬었다. 혹시나가 역시나. 태형이 야간 시찰을 나가기 전 상궁이 단디 챙겨 주었던 엽전이 가득 들어 있던 돈주머니가 없었다. 제가 사는 것마다 정국이 다 돈을 내버려서 몰랐는데, 어쩐지 몸이 지나치게 가볍더라. 그게 옷 때문이 아니라 동전 무게였을 줄이야. 태형은 먹다 만 떡까지 마저 떨어트리며 입을 벌렸다. , , 저 사람!! 아까 나랑 부딪혔던 사람이잖아!!!!

 

마마, 무슨 일이십니까!”

, 저 사람이 내 돈!!!”

 

태형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뒤에서 걷고 있던 호위무사들이 달려왔고 태형은 도망치고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삿대질을 했다. , 저 놈이 내 돈을 훔쳐갔어!!! 그 말에 호위무사들의 눈빛이 번뜩였다. 아니, 어디서 감히 중전 마마의 패물을! 그러더니 호위무사들은 그 남자를 뒤쫓아 뛰기 시작했고 태형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 손에 잡히는 것을 붙잡았다. , 진짜 나 왜 이렇게 둔하지?!

 

아니 그, , , 잠깐만…….”

, 나 진짜 바본가 봐.”

 

태형이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제가 떨어트린 음식물들이 눈에 들어와, 태형은 더욱 더 울상을 지었다. 가뜩이나 소란스러웠던 거리는 도둑의 등장으로 더욱 더 소란스러워졌고, 태형의 뇌는 떨어진 음식물들과, 잃어버린 돈과, 제 자신의 정신없음에 과부하에 걸린 상태였다. 조선에 와서 나름 잘 적응해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사고를 치다니. 물론 제 잘못은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제 자신이 원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사람들이 쫓아갔잖아요. 잡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잠깐만…….”

.”

 

태형이 고개를 숙이고 시선은 음식물들에 고정한 채 제 자신을 탓하고 있던 차였다. 제 정수리 바로 위에서 떨어지는 정국의 목소리에 태형이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태형은 화들짝 놀라 헉, 소리와 함께 확 몸을 띄웠다. 제 얼굴 바로 위에 있는 정국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그리고 태형의 얼굴 역시. 놀라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제 가까이에 있는 정국을 붙잡고 한탄을 했던 것이다. 의도치 않게 정국의 멱살을 잡았던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아니, 그게, 내 의도는 네 멱살을 잡으려 했던 게 아니라…….

 

아니, 알아요. 그냥 너무 가까워서 그랬어요.”

, 진짜 미안.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런 사람이 뭔데. 태형은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당황한 상태였다. 사실 멱살이라기보다는 가슴팍을 잡은 것에 가까웠지만. 태형은 왜 그 순간 제 손이 갑자기 그리로 갔는지 알 수 없어 손을 쥐었다 폈다. 아니 왜 그리로 갔니 내 손아……. 태형과 정국 사이에는 몇 초 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그 분위기를 깨 줄 호위무사는 소매치기를 잡으러 떠난 후였다. 아니 그런데 그깟 소매치기 잡겠다고 왕이랑 왕비를 내팽겨치고 달려 나가는 호위무사도 있나. 몇 명은 남아서 우릴 호위해야 하는 거 아니야? 가득 차오르는 민망함에 태형이 괜히 속으로 호위무사를 탓하며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찼다. 바로 옆에서 정국이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를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을까. 호위무사를 기다려야 하니 어디로 가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서 호위무사가 사라진 곳만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던 태형이 결국 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입을 연 그 때였다.

 

저기, 정국아.”

김태형?!”

, 뭐야?!”

 

정국이 채 대답을 들려주기도 전에, 조선에 온 뒤로는 정국을 제외한 사람에게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제 이름이 들리며 제 손이 누군가에 의해 확 낚아채졌다. 제 손을 갑자기 강하게 붙잡아 오는 누군가의 손길에 태형은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부여잡고 뒤를 돌아보았고 그 곳엔,

 

박지민?!”

 

태형의 고등학교 친구이자, 정국의 사촌누나의 동기. 태형과 정국이 재학 중인 대학교의 패션디자인학과를 다니는,

 

, 왜 그런 꼴을 하

, 아니 나으리!!!!! 잡았습니다아!!!!!!”

가만, 너 전정ㄱ

지민이 형?”

아니, 박지민, 근데 너 지금 나 이렇게 잡으면 안 되는

아니, 그런데 마마, 아니 마님, 그 자는!”

 

그리고 이제는 그 사이 타이밍 좋게도 도둑을 때려잡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달려오던 호위무사들의 표정이, 지엄하고 고귀하신 중전 마마의 손을 붙잡고 있는 웬 사내놈을 보고 험악해지는 것을 본 태형의 임기응변에 의해 졸지에 새로운 직업을 하나 갖게 된,

 

아니, 잠깐, 잠깐만. 그러니까 이 자는!”

이 건방진 놈이!”

, , 새로 들어온!!”

새로? 뭘 새로?”

내시다!!!”

 

뉴비 내시 지민이 있었다.



+


이번 편은.. 살짝.. 쉬어가는 화..



다음 편은 정국이 번외이자 과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 편이 될 예정입니다!! X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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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태형은 정국과의 관계가 꼭 저온 화상을 입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따뜻한 줄만 알았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깊숙이 파고들어 상처를 입히는 열 같은 관계.

처음에 무엇을 기대하고 정국에게 다가갔던 걸까. 이제 태형은 그것마저도 기억해내기 어려웠다. 섹스 파트너로만 지내는 걸로 만족하려고 정국의 제안을 수락했던 거였나? 아니면, 그렇게 지내다 보면 정국의 마음이 제게 기울까 기대한 거였나. 그것도 아니면, 더 이상 먼발치에서 혼자 정국을 바라보는 게 지쳐서였을까.

 

…….”

 

만약 마지막 이유였다면, 태형은 당장이라도 이 미지근한 관계를 그만두고 정국과 시작한 것을 후회해야 했다. 옆에서 지내다 보면, 마음이 식을 줄 알았던 걸까. 옆에 있는 것이 멀리서 지켜보는 것보다 덜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뭐가 됐든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저온 화상은 자각이 없어 더 위험하니까. 상처가 더 깊어지는 줄도 모르고 따뜻함에 취해 계속 머무르려 하게 되니까. 마치 지금 제 상태처럼.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는 배우 전정국의 소속사 측은 본인 확인 결과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맞다.’고 류현이와의 공식 열애설을 인정했다. 연예계 선남선녀 커플의…….]

 

태형은 전정국와 류현이의 열애설을 자세히 보도하고 있는 기사를 읽다 이내 인터넷 창을 꺼 버렸다. 기사를 찾기 위해 검색하는 수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모든 포털사이트들이 전정국과 류현이의 열애설을 더 많이 띄우지 못해 안달이었으니까.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만두고 싶지 않다면 그것 역시 거짓말일 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정국을 놓지 못하는 것은, 그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러지 못해서였다. 여태까지 태형이 맺어 왔던 관계들에서 태형이 항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많은 관계들 중에, 분명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보다 제가 상대를 더 좋아했던 적도 많았고, 하룻밤의 인연으로 끝내기에는 아쉬워 관계를 지속해볼까 고민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때마다, 태형은 제 자신을 통제할 수 있었다. 어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태형은 그 상대들보다 항상 제 자신을 우선에 둘 수 있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옅어지는 감정은 그런 태형을 도왔으니까. 그런데 왜.

 

짜증나…….”

 

전정국한테는 그게 되지 않을까. 태형은 눈가에 손을 올렸다. 눈가가 시큰거렸다. 너무 오래 좋아해서? 너무 오래 애태워서? 제대로 만난 적도 없을 때, 혼자 먼발치에서 시작한 짝사랑이라서? 마음이 있는 채로 몸을 섞어서? 그러고도 놓지 못해서? 놓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서? 계속 마주쳐야 하니까?

갖다 붙이려면 이유는 많았다. 전정국을 좋아한다는 이유 말고도 제게 전정국이란 존재는 특별했으니까. 그러니 그런 이유들을 다 갖다 붙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게 답이 아니라는 것은 제 자신이 이미 제일 잘 알고 있는데.

 

전화 한 번 정도는 해 줘도 되잖아. 태형은 입술을 짓씹었다. 우울하다가, 허탈하다가, 그 감정도 지나가니 이번엔 억울함이 찾아왔다. 며칠 전까지 나한테 그렇게 말해놓고. 현이 씨를 만나러 간 이후로 아무 연락 없는 전정국이 너무 미워서. 그리고 그게 정말로, 전정국의 안에 김태형이란 사람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알려주는 것 같아서. 사실, 그 정도가 맞겠지만.

누군가 그랬다. 제 살을 깎는 사랑은 하지 말라고. 그 감정은 결국 사람을 닳게 만들어 지치게 한다고. 하지만 태형은 그 사람에게 묻고 싶었다. 제 살을 깎아가면서까지 그 감정을 놓지 못하는 사람이, 그 감정을 가져가고 싶어서 여태껏 갖고 있는 것이겠느냐고. 놓지 못하니까. 놓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것 아니겠냐고.

 

…….”

 

무엇보다 비참한 건, 지금 이 순간에도 자꾸만 현관문을 보게 되는 제 자신이다. 혹시라도 정국이 그 문을 열고 들어오길 바라면서.

 

*

 

태형아!”

 

누구를 만나고 싶은 기분은 전혀 아니었는데. 태형의 감정과 상관없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 정국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 동안 작업이 제대로 진척이 될 리 없었지만 태형은 작업실 안에 틀어박혀 이어지지 않는 멜로디만 붙잡고 있었다. 윤기에게서 몇 번이고 전화가 왔지만 태형은 받지 않았다. 윤기의 얼굴을 보고 무슨 말을 하게 될지 제 자신도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정국에 대한 제 마음을 알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인 윤기의 앞에서 볼썽사납게 펑펑 울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너무 비참하잖아.

 

무슨 일이야, 이렇게 갑자기.”

 

그러나 그런 태형에게도 거절할 수 없는 사람은 있었다. 정확히는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기 보다 거절할 수 없는 경우가 더 정확하겠다. 미국에서 나 하나 만나려고 날아왔다는데 어떻게 거절해. 태형은 석진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석진이 그런 태형을 와락 끌어안았다. 너 보고 싶어서 왔지!

 

석진은 태형이 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우연히 만난 한국인이었다. 태형이 대학을 다녔던 그 도시에 살았던 건 아니었고, 방학을 맞아 놀러간 휴양 도시에서 만난. 사실 한국인이라고 하기에는 좀 어폐가 있는 것이, 석진은 한국인의 모습을 한 외국인에 가까웠다. 부모님만 한국인일 뿐 그 도시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도시에서 살았으니까. 그렇지만 오랜 외국 유학 생활에 지친 태형에게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았고 그러니 태형이 석진을 클럽에서 만나지 않은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석진과 하룻밤을 보내고 이름도 모른 채 그대로 헤어졌을 테니까.

 

여기서는 막 그렇게 껴안으면 사람들이 오해해.”

볼에 뽀뽀하려다가 자제한 건데.”

그건 거기서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태형은 살짝 웃으며 석진을 마주 안았다. 석진은 같이 있으면 즐겁고, 편안한 사람이었다. 석진이 사는 도시와 태형이 대학을 다니는 도시는 꽤 거리가 있었음에도 여름휴가 내내 꽤 친해진 둘은 그 후에도 종종 만나곤 했다. 태형이 귀국을 하고, 석진은 미국으로 취직을 하게 된 이후로는 처음 만나는 것이었지만.

 

형은 여전하네.”

여전히 잘생겼지.”

 

태형의 말에 석진이 씩 웃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인정. 태형도 석진을 따라 마주 웃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러나저러나 오랜만에 만나는 석진은 태형을 웃게 만들었다. 김석진이란 사람 자체가 그랬다. 딱히 알고 그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태형이 우울하거나 외로울 때마다 석진은 귀신같이 연락을 해 오곤 했다. 그리고 석진을 만나면, 어쨌든 석진과 함께 있는 시간동안은 웃을 수 있었고.

 

타이밍도 좋아.”

?”

아냐. 그런데 회사는 어쩌고 온 거야?”

사실은 나 지금 일하는 중이야.”

?”

 

석진의 캐리어를 살피던 태형이 고개를 들어 석진과 눈을 맞췄다. 석진이 그런 태형을 보고 씩 웃었고 그 웃음에 태형이 미간을 좁혔다.

 

뭐야. 출장 온 거야? 나 보러 왔다더니. 순 사기꾼,”

너 보러 온 거 맞는데?”

……?”

 

태형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일하는 중이라며. 출장 온 거 아니었어? 태형은 석진의 웃음을 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석진이 무슨 회사에 다니더라?

 

같은 말이야.”

?”

너 헌팅 하러 왔거든.”

 

빵야. 석진이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흔들며 웃었고, 태형은 그런 석진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

 

진짜?!”

그럼 가짜게.”

 

끼니때가 훨씬 지난 3, 태형과 석진이 발걸음을 옮긴 곳은 태형의 집이나 한적한 카페가 아닌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태형의 몫까지 총 3인분을 시킨 석진은 배고파 죽는 줄 알았다며 제일 먼저 나온 스테이크를 잘라 입에 쏙 넣었다.

누가 보면 스튜어디스들이 형 굶긴 줄 알겠어. 태형이 웃었다. 석진이라면 뉴욕에서 한국까지, 장장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동안 비즈니스 클래스에 앉아 나오는 기내식이며 간식·안주거리들을 전부 다 놓치지 않고 섭렵했을 게 분명한데, 석진의 배는 아직 모자란 모양이었다.

 

기내식은 먹어도 먹은 것 같지가 않아.”

그건 그렇긴 한데.”

암튼 그래서, 생각 있어?”

 

스테이크 한 접시를 깨끗이 비운 석진이 냅킨으로 입가를 꾹 누르며 태형을 응시했다. 그러니까, 공항에서 석진이 태형을 헌팅 하러왔다는 말의 뜻은 태형을 스카우트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였다. 석진은 뉴욕에 본사를 둔 세계적인 헤드헌팅 회사의 문화 예술 파트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평소 태형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인 H. M. Big 감독이 이번에 새로 들어가게 될 영화를 맡을 마땅한 영화 작곡가를 찾지 못해 석진에게 의뢰를 해 왔고, 그에 석진은 태형을 추천했다는 것이 석진의 설명이었다.

 

너 그 감독 좋아하잖아.”

좋아한다 뿐이게. 이번에 개봉한 영화도 보러 가려고 했었는데…….”

 

태형은 순간 말을 멈췄다. 석진을 만난 덕에 잠시 잊고 있었던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집에 쳐들어와서는 한다는 말이 우리 영화 보러 가요.’ 였지. 로케 촬영 때문에 미국에 다녀왔다더니, 국내에서는 아직 개봉하지도 않은 H 감독의 영화 포스터를 가져와 흔들며 정국은 그랬었다. 개봉하자마자 보러 가자고. 꼭 자기랑 봐야 한다고. 그러나 정작 국내 개봉일에 전정국은 현이 씨와 칸쿤에 있었지.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덕분에 보통은 늦어도 개봉 다음 날에는 봤을 영화를, 태형은 아직까지도 못 보고 있었다.

 

했었는데?”

아냐.”

 

괜히 목이 타서, 태형은 앞에 있는 컵을 들었다. 나중에 DVD 사서 보면 되지. 그깟 영화가 뭐라고. 태형은 애써 제 자신을 다독였다. 석진도 앞에 있는데 우울해지고 싶지 않았다. 태형에게서 이렇다 할 답이 없자, 석진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뭘 고민해. 좋은 기회 아니야?

 

나 지금 형 덕 보는 거야?”

내가 네 덕 보는 거지. 그 감독이 네 곡 듣더니 엄청 좋아했어. 왜 이런 사람 여태 몰랐냐고.”

진짜?”

그래서 내가 그 때 너 귀국하지 말라고 했잖아. 나랑 같이 미국 가자니까.”

뭐래…….”

 

석진은 얼굴이 살짝 진지해졌지만 태형은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영화 음악 작곡가라는 직업을 살리기에 한국보다는 미국이 훨씬 더 좋긴 했다. 시장 크기 자체가 비교가 안 되니까. 하지만 대학 졸업을 앞두고 거처를 고민하던 태형은 그 즈음 우연히 영화를 보게 됐었다. 정국의 영화. 영화의 주연도 아니고, 주인공의 친구였을 뿐인 조연이었는데도 영화가 끝날 때까지 태형의 머릿속에는 온통 정국뿐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사람의 영화에 제 곡을 쓰고 싶다고. 그렇게 태형은 귀국을 결정했다. 뭐 물론, 이유가 그거 하나 뿐은 아니고. 오랜 외국 유학 생활에 지쳐 있던 탓도 있었겠지만.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별 건 아니고.”

?”

영화가 끝날 때까지, 네가 현장에 있었으면 좋겠대.”

?”

 

그 감독 작업 방식이 그래. 좀 피곤한 스타일이긴 하지. 현장에 직접 나와서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봐야 좋은 곡 나온다고, 계속 실시간으로 피드백 주고받기도 편하고. 석진이 말을 이었고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런데 뭐, 딱히 문제 될 건 없지 않아? 아예 와서 살라는 것도 아니고.”

…….”

길면 5개월 정도. 그동안 살 곳은 아마 감독이 준비해 줄 거야. 매번 이렇게 하거든. 아니면 나랑 같이 살아도 되고.”

아니…….”

개런티는 뭐, H 감독인데 당연히.”

 

어때, ? 석진이 씩 웃었지만 태형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5개월씩이나 가 있어야 한다고? 예상과는 다르게 태형이 곧바로 긍정의 대답을 내놓지 않자, 석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완전 좋아할 줄 알았는데. 표정이 안 좋네.”

아니, 좋아. 좋은데…….”

맡고 있는 작업 있어? 지금 당장 오라는 건 아니야. 2주일 정도 시간 있어. 못다 한 작업은 미국 가서 해도 되고.”

…….”

너 잘 생각해. 이거 완전 좋은 기회야. 대박이잖아.”

 

석진의 말은 사실이었다. H 감독이라니. 그 감독이 디렉팅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감독이니 흥행 보장은 물론, 온갖 영화제란 영화제에는 전부 노미네이트 될 것이 뻔했다. 그런 영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비단 태형이 제일 좋아하는 감독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태형의 커리어에도 엄청난 득이 되는 것일 거고.

그런데 계속 마음에 걸리는 얼굴이 있어서. 태형은 제 손을 꼭 쥐었다. 이런 일생일대의 기회 앞에서 고작 그런 게 마음에 걸리다니 제가 생각해도 제 자신이 너무 우습고 어이없지만, 마음은 솔직했다. 전정국. 5개월 동안 미국에 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정국을 5개월 동안 못 본다는 말과 같았다. 물론 지금이라고 해서 매일매일 보는 사이라거나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이는 아니긴 했지만, 그래서 더 문제였다. 차라리 그렇게 시간을 내서 만날 정도로 친한 사이였으면, 정국보고 미국에 오라고 하거나 보고 싶을 때마다 제가 정국을 만나러 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태형과 정국의 관계는 그 정도도 되지 못했으니까.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태형이 그렇게 망설이고만 있자, 그런 태형을 쳐다보던 석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난 꼭 너 데려갈 거야.”

…….”

이참에 아예 눌러 앉으면 더 좋고.”

 

석진의 말에 태형이 뭐라 답을 하려던 순간 타이밍 좋게 석진이 시킨 두 번째 메인 디쉬가 서빙되었고 순간 진지해졌던 석진의 얼굴이 한순간에 확 풀렸다. 일단 먹고 다시 얘기하자. 석진이 씩 웃으며 포크를 들었고 태형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

 

나 꼭 너 데려오겠다고 그 감독이랑 약속했어. 내 커리어를 위해서라도 너 데려가야 돼.

 

라고 석진은 농담 삼아 말했지만, 그 밑에 깔려 있는 석진의 진심을 태형이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석진은 태형이 귀국과 미국행을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부터 그런 태형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대체 왜? 혹시 돈 때문이야?’

 

귀국하기로 마음을 굳히고 석진을 만나 제 결심을 알렸을 때,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의 석진이 제일 처음 내뱉은 말이 저거였다. 마치 정말로 돈 때문이라면 제가 도와주기라도 할 기세로. 아니, 그럴 기세가 아니고 정말로 그랬을 것이다. 석진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석진이 생각하기에 태형은 한국에 처박힐 인재가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작곡가라는 것이 거리와 장소에 큰 구애를 받는 직업은 아니라 해도, 기회가 주어질 확률과 만나는 사람들이 달라질 거였다. 무리를 해서라도 미국행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순데, 왜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거야. 제가 고향 내지는 조국에 대한 개념이 태형보다 옅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태형의 결정은 쉬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형은 그런 석진의 말에 웃으며 그랬다. 그런 거 아니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뮤즈?’

비슷해.’

 

이유가 그것 뿐만은 아니었지만, 가장 큰 이유가 그거였다. 정국을 만나고 싶어서. 그 땐 정국을 향한 제 감정이 이렇게까지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지만. 아무튼 태형의 그 말에 석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표정은 석연찮은 채로. 하지만 그 이상 석진이 어쩔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태형의 선택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계속해서 아쉬웠던 것은 사실이라. 석진은 의뢰가 들어오자마자 태형을 떠올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신이 주신 기회라고. 태형이 제일 좋아하는 감독인데다가, 능력도 좋고, 이번 영화도 태형의 작곡 스타일과 잘 맞았다. 그러니까.

 

, 진짜 할 일 없어?”

 

태형의 말에 석진은 씩 웃었고 작업실 문을 열어주자마자 마주친 낯선 얼굴에 윤기가 그런 석진을 보며 태형에게 눈짓했다. 저거 뭐야? 그에 태형은 윤기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 그러니까 이 형은…….

태형을 꼭 데려가고야 말겠다던 석진의 다짐은 정말 진심이었는지,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태형의 말에도 석진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태형에게 찾아왔다. 아니 시간을 좀 달라니까? 하고 태형이 말하면 석진은 지금은 일하는 중 아니고 그냥 친한 형이 미국에서 놀러 온 건데. 나 버릴 거야?’ 하고 능청을 떨었다. 사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저래 봬도 석진이 꽤 능력 있는 문화·예술 헤드헌터라 작업에 아주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태형은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석진과 함께 있는 시간 동안만큼은 정국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고. 사실 그게 가장 컸다.

 

널 만나는 게 내 일이잖아.”

뭔데?”

 

그런데 이렇게 윤기의 작업실까지 따라올 줄이야. 태형은 다시 한 번 석진의 넉살에 감탄했다. 비싼 호텔방을 놔두고 매번 제 집에서 자며 뒹구는 석진에게 오늘은 나가 봐야 한다고 했더니 한다는 말이 따라가도 돼? 였다. 오랜만에 (반은 일 때문이었다 해도) 자신을 만나러 비행기까지 타고 온 석진인데, 이런 저런 일 때문에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한 게 좀 미안하기도 하고 해서 태형은 윤기와의 중간 피드백 회의가 끝나고 밥이라도 사 줄 생각으로 그러라고 했었고. 그런데 설마, 회의 동안은 카페에 있을 줄 알았지.

 

민 감독님이시죠? 작품 많이 봤어요.”

누구신데요.”

미안, 윤기 형. 친한 형인데…….”

애인이야?”

아니!”

 

무슨 그런 말을! 태형이 눈을 키우며 극구 부인했고 윤기는 흠,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어쨌든 네가 아는 사람이라는 거지? 일단 들어와서 얘기하자. 그 말에 석진은 태형보다도 먼저 윤기의 작업실에 들어섰다. 역시나 생글생글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김석진입니다.”

민윤기입니다.”

태형이한테 말씀 많이 듣지는 사실 않았고, 태형이가 작업한 영화 보다가 민 감독님 팬이 됐거든요. 그래서 무례인 줄 알면서도 태형이한테 졸랐습니다. 혹시 큰 실례가 안 된다면 옆에서 조용히 구경해도 될까요?”

…….”

 

석진이 생글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윤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석진의 손을 맞잡았다. , 저 형 거침없는 거 봐. 태형은 그런 석진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언제 봐도 참 대단한 친화력과 넉살이었다. 저 정도는 돼야 뉴욕에서 능력 있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건가.

 

*

 

“Intro는 박자만 조금 조정하고, 테마곡은 그냥 이대로 가도 될 것 같은데? 좋아.”

 

역시 김태형이네. 회의를 끝내며 윤기가 덧붙인 말에, 태형이 살짝 웃었다. 요 며칠 내내 정국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던 터라 제대로 한 게 맞을까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윤기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남주인공이 짝사랑을 하는 역할이었던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으려 해도 저절로 시나리오 속의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으니까. 아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나. 대신 태형은 작업 내내 정국을 떠올려야만 했다.

 

끝났어?”

 

작업실 한켠에서 윤기의 컬렉션들을 구경하고 있던 석진이 몸을 일으키며 가까이 다가와 태형을 뒤에서 감싸 안으며 태형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가, 석진은 이런 스킨십이 자연스러웠다. 처음에는 그 행동에 식겁하던 태형도 이제는 그 행동에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굳이 물리치진 않게 되었고. 사실, 의식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게 더 맞겠다.

 

…….”

 

그런데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태형이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친 윤기의 동공이 조금, 아니 상당히 많이 흔들리고 있어서. 순간 왜 저러지, 하고 생각했던 태형은 이내 저와 석진의 자세가 윤기가 오해를 하기에 딱 알맞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윤기는 아까 석진을 보고 제 애인이냐고까지 물어봤었으니까. 당황한 태형이 제 허리에 감겨 있는 석진의 팔에 손을 올렸다. , 잠깐만 이것 좀 풀어봐.

 

아 왜애. 나 배고파. 서 있을 힘도 없어. 빨리 밥 먹으러 가자.”

아니, 이거…….”

윤기 형, 나 잠깐 형 핸드폰 좀……,”

 

그 때였다. 그러니까, 태형이 제 허리에 둘러진 석진의 팔을 풀기 위해 힘을 쓰고, 석진은 그런 태형을 더 꼭 껴안으며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고 있던 그 때. 비밀 번호를 빠르게 누르는 소리와 함께 작업실 문이 갑작스럽게 열리더니 인영 하나가 뛰쳐 들어왔고 윤기, 석진, 태형의 시선이 한순간에 새로 들어온 인영에게 닿았다. 그리고,

 

뭐야?”

 

정국과 태형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타이밍도 진짜. 이주일 만에 보는 정국의 얼굴은 여전히 잘생겼고, 멋있고, 설레고. 태형은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정국을 응시했다. 생각지도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마주한 전정국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와중에, 이 다음에 석진과 밥을 먹을 생각으로 옷을 차려 입고 나왔다는 사실만이 태형에게 위안이 되어 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어차피 윤기의 작업실에만 있을 거라 생각하고 후드만 대충 걸치고 나왔을 테니까. 이주일 만에 보는 건데 그런 모습을 정국에게 보여줬다면 정말 죽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잠시간의 적막이 흐르고 태형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정국은 다짜고짜 손을 뻗어 태형의 허리에 감겨 있는 석진의 손을 떼어냈다. 워낙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태형은 몸에 힘을 줄 새도 없이 정국에 의해 석진의 손에서 벗어나 정국의 등 뒤로 숨겨졌다. 석진은 갑자기 일어난 이 상황에 당황한 듯 눈을 깜박이고 있었지만 정국의 얼굴은 풀릴 줄을 몰랐다. 그 와중에 태형은 제 팔을 쥐고 있는 정국의 손이 너무 뜨겁다는 생각을 했다.

 

싫어하잖아요.”

?”

 

여전히 낮게 깔린 목소리로 정국이 석진에게 말했고, 석진은 그런 정국에 멍하니 되물었다. 그러니까, 하필이면 정국이 본 상황이 석진이 태형을 끌어안고 태형이 그런 석진을 떼어 내려고 했던 그 순간이라. 아마도 정국은 석진이 억지로 저를 끌어안고 있었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런 건 아닌데. 그러나 태형이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잠시 이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눈을 굴리던 석진이 이내 아, 하고 짧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김태형 씨랑 무슨 사이신진 몰라도, 싫어하는데 계속 잡고 있는 건 무례한 거,”

무례한 건 그 쪽 아닌가? 무슨 사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그렇게 끌고 가고.”

 

정국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웃는 낯의 석진이 말을 이었고 그런 석진의 말에 정국의 표정은 더욱 더 굳어졌다. 그 사이에서 당황한 태형은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어 눈을 깜박이고 있었고. 왜 상황이 이렇게 된 거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정국이 갑자기 나타났을 때부터 태형은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져 있었으니까. 그러나 태형이 멍해 있거나 말거나, 석진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

그 쪽이야말로 태형이랑 무슨 사인진 몰라도,”

 

그 말을 끝으로 석진은 정국에게 끌려갔던 태형을 붙잡아 제 쪽으로 당겨 왔다. 한순간에 주말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전쟁 같은 삼각관계의 여주인공이 된 태형은 멍하니 석진을 쳐다봤지만 여전히 웃는 낯의 석진의 시선은 정국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니, 이 형 왜 이래? 태형은 낯선 석진의 모습에 입을 벌렸다. 석진은 상대방이 아무리 무례하게 굴어도 웃는 얼굴로 천연덕스럽게 넘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상황에 묘한 각을 세우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지금 석진의 말투에는 누가 봐도 날이 서 있었다. 정국의 시선이 태형을 잡은 석진의 손에 닿았다가, 다시 석진에게로 향했다.

 

태형이는 나랑 더 친하거든요.”

 

그 말을 하며, 석진은 씩 웃었다. 저 형이 저런 얼굴도 할 줄 알았나. 석진을 알게 된 지 꽤 오래 됐으니 석진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얼굴은 또 처음 보는 거였다. 하긴, 잘 안다고 하기엔 정작 붙어 있는 시간은 얼마 없었긴 했다. 태형은 가만히 제 팔을 쥔 석진의 손을 쳐다봤다. 태형의 시선이 제 손에 닿아 있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석진이 씩 웃으며 손을 풀고 태형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이건 또 뭐 하는 상황이지? 그런 석진의 행동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정국을 쳐다봤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정국의 저런 얼굴도 처음 본다. 대체 왜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당황스러움에 가뜩이나 새하얬던 머리가 점점 굳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자기소개부터 할까요? 저는 뉴욕에서 태형이를 데려가려고 온,”

!”

……?”

, 아니, 석진이 형. 그만 가자. 배고프다며.”

 

태형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호칭에 재빨리 말을 고쳤다. ‘은 석진이라는, 외국에서 사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발음을 뺀 석진의 말하자면 영어 이름이었다. 애초에 석진과의 만남 자체가 외국에서였고, 그 이후로도 쭉 외국에서 살았으니 사실 태형에게도 석진이란 이름보다는 이란 호칭이 더 편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서 진, 하고 부르려니 뭔가, 애칭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부러 의식해서 석진이라 부르고 있었던 거였는데 당황하니 익숙한 호칭이 튀어나와 버린 거다. 하필 이런 상황에서. 그러나 그런 태형의 속도 모르고, 석진은 진이라고 부르는 거 오랜만이네!’라며 활짝 웃었다.

그냥 빨리 이 자리를 피하는 게 낫겠어. 태형은 재빨리 석진을 잡아끌었다. 오랜만에 본 정국의 얼굴을 오래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석진과 정국을 한 공간에 같이 오래 두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지금 하마터면 석진이 저를 스카우트하려고 한다는 것을 정국이 알 뻔 했으니까. 정국에겐 그 사실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았다. 선뜻 가라고 해도, 가지 말라고 해도, 정국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괜히 마음만 복잡해질 것 같아서

게다가 태형이 생각할 때 지금은 정국을 마주하기에 별로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석진이 옆에 있었고, 옷을 차려 입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편한 옷차림이었고, 정국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묻고 싶은 것도, 듣고 싶은 것도 많은데.

 

윤기 형, 저 이만 갈게요.”

, 그래. 수고해라. 밥 맛있게 먹고.”

전정국 너도잘 지내고.”

 

잘 지내고가 뭐야. 태형은 제가 생각해도 바보 같은 인사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나중에 보자, 라고 하기엔 뭔가. 저와 정국은 그렇게 당연히 나중에 만남을 기약하는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태형은 한시라도 빨리 이 불편한 공기를 벗어나고 싶어 여전히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석진을 꽉 잡아끌었다.

 

잘 됐네.”

 

하지만, 세상이 언제나 제 뜻대로 돌아가지는 않는 법이다. 태형이 막 윤기의 작업실을 나서려던 그 때, 등 뒤에서 낮게 가라앉은 정국의 목소리가 태형의 귓가에 닿았다. 태형은 순간 숨을 멈추었고, 정국의 목소리가 다시 느리게 이어졌다.

 

나도 윤기 형이랑 밥 먹을 참이었거든요.”

?”

이왕 이렇게 된 거, 같이 먹죠. 초면에 실례한 것도 있고,

…….”

제가 살 테니까.”

좋아요.”

 

태형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재빨리 뒤를 돈 석진이 웃으며 대답했고 태형은 그대로 굳어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만약 이 세상에 타이밍의 신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자신은 그 신에게 단단히 미움을 산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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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세계는 인간의 세계보다 냉혹하다. 힘의 서열이 견고하며, 약육강식이 진리이자 율법으로 통하는 사회. 비록 반 정도는 인간이었기에 서로를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야만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선조로부터 몇 만 년을 내려온 본능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니까. 인간들의 신분제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하고, 예외란 있을 수 없는 위계서열. 그것이 수인들의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바탕이었다.

그래서. 현석은 제가 유서 깊은 호랑이 가문에서 태어난 것을 일생동안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후회라니, 감히 그런 단어를 입에 올릴 수도 없다. 평생을 자랑으로 여기며 살아왔고 주위에서 떠받드는 소리를 들으며 제 자신이 이 사회의 상위 계층인 것을 만끽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제 막내아들이, 그것도 그냥 호랑이도 아니고 오백 년 만에 태어난 흑호라며 태어날 때부터 세간의 칭송을 받았던, 자신과 같은 A등급도 아닌 S등급을 부여받은 제 막내아들이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한다는 소리가,

 

나 호랑이 안 할래!”

 

라니.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호랑이 가문의 가장 김현석 씨가 수박을 먹다 말고 뒷목 잡고 쓰러지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이 말이다.

 

Fake Love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명문가인 호랑이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ㅇㅇ동에 비싼 땅값이 무색할 만큼 거대한 면적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한옥은, 만지면 부서질까, 바람 불면 날아갈까 애지중지 금지옥엽 업어 키웠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막내아들의 폭탄선언으로 인해 한순간에 발칵 뒤집어졌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호랑이를 안 하겠다니. 물론 본형이란 것이 하고 싶다고 그렇게 되고,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지만 평생을 긍지 높은 호랑이로 살아온 현석에게 막내아들의 호랑이 부정 선언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호랑이 하기 싫다니. 호랑이 안 할 거라니. 남들은 되지 못해 안달인 축복받은 본형을 가지고 어떻게 그런 소릴. 그것도 내 아들이! 현석은 들고 있던 포크까지 떨어트리고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태형을 쳐다봤고 둘째 호랑이 남준은 아, 결국. 하고 중얼거리며 씹던 수박을 마저 씹어 삼켰다.

 

모든 이야기에는 기, , , 결이 있다. 이 이야기에서 태형의 폭탄선언은 전의 단계에 해당한다 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사단의 시작이자 원인인 기를 파악하기 위해 몇 주 전, 운명의 그 날로 거슬러 올라가 보도록 하자.

 

 

안녕, 전정국이야. 잘 부탁해.”

 

수인들은 기본적으로 원인들과 섞여서 살아가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로 겉으로 보기에 태가 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것은 원인들의 시선에서 그런 것일 뿐 같은 수인들끼리는 수인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알아보느냐 물으면 그건 글쎄, 그냥 직감이라고나 할까. 동물의 직감이라는 것이 원래 정확하다지 않는가. 그리고 그 수인을 알아보는 통찰력의 정확도는 먹이사슬의 위에 있을수록, 그러니까 현대 수인 사회의 단어로 얘기하자면 등급이 높을수록 올라갔다. 쉽게 말하자면 S급은 하위 등급의 본형이 무엇인지 여타의 등급들보다 더 잘 알 수 있었다는 소리다. 상대의 본형이 개인지, 고양이인지, 아니면 도마뱀인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힘의 차이 때문에 수인들은 상대가 자신보다 낮은 등급에 속해 있는 수인인지, 아니면 자신보다 높은 등급에 속해 있는 수인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지만, 자신보다 높은 등급의 수인의 본형이 무엇인지는 파악하기 어려웠다. 똑똑한 여러분들은 전부 이해를 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한 번 예를 들어 보자면 내가 B 등급의 수인일 경우 상대가 나보다 높은 등급인지는 파악할 수 있으나 상대가 호랑이인지, 뱀인지, 곰인지는 알 수 없었고 따라서 S인지, A인지조차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반대로, 상대가 나보다 낮은 등급일 경우 조금만 주의 깊게 살피면 참새인지, 햄스터인지 대강 알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상대의 등급이 무엇인지 대충 가늠할 수 있었다. 사실 뭐, 높은 등급의 경우 굳이 제 본형의 특징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으므로 알기 쉬웠지만.

물론 오래 전 수인들이 원인들에 의해 사냥당하고 팔려나갈 적에는 사냥을 피하기 위해 SA등급의 수인들이 BC등급의 수인인 것처럼 변현하는 경우도 있었다곤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엔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이 경우는 제외하도록 하자. 그도 그럴 것이, 높은 등급일 경우 온갖 선망의 눈빛과 혜택을 독차지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겠는가.

 

아무튼,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물론 같은 반으로 전학을 왔다는 것은 동갑임을 전제로 깔고 들어가는 것이긴 하지만, 새로 온 전학생은 생글 웃는 낯으로 초면부터 말을 놓는 대범한 학생이었다.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교실 맨 뒷자리에서 졸고 있던 태형은 제 귀에 들어와 꽂히는 맑은 목소리에 느리게 눈을 떴다. 하암.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소리와 함께 태형이 기지개를 폈다. 선생님이 버젓이 교실 앞쪽에 서 있는 상태에서 상당히 발칙한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아무도 태형에게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딱히 문제아라거나 학교를 주름잡는 일진이라거나 하는 수식어가 붙여져 있지는 않았지만, 이 학교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본형을 가지고 있는 태형은 선생들마저도 쉬이 대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 호랑이라곤 하지만 고양잇과에 속하는 태형에게 아침햇살은 차마 뿌리칠 수 없는 나른한 유혹이었을 테니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라 치자. 어쨌거나 태형은 호랑이 귀가 뾰족 튀어나온 것도 모른 채 큰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들어찬 빛에 제 동공이 점에 가깝도록 작아졌다가 다시 천천히 크기를 키우는 동안 태형은 뾰족 솟아오른 귀를 움직이며 제 잠을 깨운 소리의 근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막 자다 깬 터라 초점이 잘 안 잡히는 눈에 태형이 몇 번 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빈자리에 앉으면 되나요?”

 

태형의 홍채가 새로운 전학생에게 초점을 맞추는 데 성공했을 즈음, 새로운 전학생은 해사하게 웃으며 선생님을 쳐다봤다. 빈자리. 이 반 전체에 빈자리는 없었다. 다만 혹여 태형이 불편할까 싶어 태형의 옆자리에 빈 책상과 걸상을 가져다 놓은 공간만이 존재했을 뿐. 아마도 눈치 없고 대범한 저 전학생은 태형의 옆자리를 빈자리라 칭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당돌한 말에 선생이 아,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우리의 대범한 전학생,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선생님이 말끝을 흐리거나 말거나 교실을 가로질러 태형의 앞에 섰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태형은 갑자기 가까워진 인물에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런 태형에게 전학생은 예의 그 해사한 웃음으로 손을 내밀었다.

 

안녕, 넌 이름이 뭐야?”

 

나한테 이렇게 거침없이 대한 수인은 네가 처음이야, 같은 진부한 전개의 스토리는 아니고, 그냥 태형의 홍채가 간신히 초점을 맞춰 HD 화질로 꽉 차게 시야에 들어찬 그 전학생의 얼굴이 너무 잘생기고 예쁘고 귀엽고 다 해먹어서. 성형외과 의사선생님이 이건 제가 본 바, 완벽한 얼굴이라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박수를 칠 것 같은 예쁘게 쌍커풀 진 동그란 눈에 오똑한 코, 오밀조밀 예쁜 입술까지. 다시 말해 이건 정말 본 적이 없는 그런 완벽한 제 취향의 얼굴이어서.

 

앞으로 잘 부탁해.”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그 무난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인사말을 내 앞으로의 미래를 너에게 헌납하고 싶어로 멋대로 바꿔 듣고 싶게 만드는 그 달콤한 목소리에, 대한민국 천연기념물에 지정된 명문 호랑이 가문의 막내 S등급 흑호 김태형은 이 그린 듯 잘생긴 전학생에게 한 눈에 반해버리고 만 것이다.

 

 

토끼야.”

?”

토끼라고.”

 

밥먹다말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이 고기가 토끼 고기라고? 잘생긴 전학생이 태형의 심장에 불을 지핀 그 날의 점심시간, 태형은 제 오랜 친구 지민과 밥을 먹다가 젓가락을 꼭 쥐었다. 토끼니까 아마 등급은 C. 근데 진짜 잘생겼어.

태형의 두서없는 스토리텔링에 지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지금 뭐, 수인 얘기하는 건가. 태형의 오래된 친구인 지민은 강아지 수인으로 등급은 C에 해당했다. 원래대로라면 S등급인 호랑이 태형과 C등급인 개 지민은 친구가 되기 힘들 수도 있었겠으나 태형이 워낙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아 하는 것도 있었고, 흑호라는 제 본형 때문에 초등학생 꼬꼬마 당시 또래 아이들이 태형을 피했을 때 태형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와 준 유일한 이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지민이었기 때문에 태형은 지민에게 알게 모르게 꽤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 연유와 시간들로 지민은 지금까지도 태형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고.

아무튼, 지민은 지금 태형이 하고 있는 말의 주어가 제 식판 위에 놓인 고기가 아니라는 것에 안심하며 젓가락으로 고기 완자를 쿡 찍어 입에 넣었다. 토끼 고기는 먹기 싫어. 토끼는 너무 귀엽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토끼 타령이야? 네 반에 토끼가 있었나?”

내 짝궁이야.”

전학 왔나 보네.”

 

태형과 붙어 지낸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지민은 태형의 두서없고 설명 없는 스토리텔링 기법에도 귀신같이 태형의 말을 알아듣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였다. 태형이 제 가족과 저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 대한 말을 꺼내는 것은 그토록 오래 태형의 옆을 지켜 온 지민에게도 생소한 것이라, 지민은 곧 흥미를 보였다. 토끼인데 잘생겼다고? 이름이 뭔데?

 

토끼는 뭘 좋아하지? 상추 주면 좋아할까?”

당근 좋아하지 않을까?”

그냥 맨 당근을 먹어?”

 

제가 던진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는 태형은 이미 익숙했다. 궁금한 거야 그냥 제가 직접 알아보면 되고. 지금 태형은 눈앞에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고기가 있음에도 새로 전학 왔다는 그 토깽이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상태이니. 지민은 자연스럽게 태형의 질문에 장단을 맞췄다. 몰라. 동물농장 보니까 되게 잘 먹던데. 수인은 좀 다르려나? 너도 사료 먹진 않잖아. , 그거 욕이거든? 그럼 걔도 당근 싫어하면 어떡해.

 

물어 보면 되지.”

?”

물어봐. 뭐 좋아하냐고.”

 

사실 당연한 건데. 태형은 지민이 마치 지혜의 왕 솔로몬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민을 쳐다봤다. 그래, 물어 보면 되는 거였어. 워낙 호랑이 가문에서 태형을 어화둥둥 짜란다짜란다 키운 터라 태형은 어딘가 모르게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좋게 말하면 귀여운 거고. 나쁘게 말해도 김태형이니까 귀엽다. 태형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야무지게 주먹을 쥐었다. 걔가 좋다고 하는 건 전부 갖다 줄 거야.

 

완전 결혼이라도 할 기세네.”

결혼…….”

나 이 고기 먹어도 돼?”

완전 좋다.”

?”

 

슬그머니 태형의 식판에 담긴 고기 완자를 가져가려던 지민은 태형의 말에 손을 멈추고 눈을 똥그랗게 떴다. 그냥 농담 삼아 한 말이었는데!? 그러나 태형의 눈은 이미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래 맞아. 이건 운명이야. 나 그 토끼를 반려로 삼을래!

 

오늘 처음 봤다며.”

첫눈에 반했어.”

.”

 

사실, 원인들과 다르게 수인들의 결혼 시기는 꽤 빠른 편이었다. 반이 동물이니만큼 종족 번식에 관한 본능이 강했으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하는 것은 부지기수였고 빠른 경우 고등학생 때 결혼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태형이 누군가를 반려로 정했다고 하는 것이 막 그렇게 엄청나게 이상하고 섣부른 것은 아니긴 했다. 문제는,

 

토끼라며.”

.”

호랑이랑 토끼가 어떻게 반려가 돼?”

 

태형은 S등급의 호랑이이고, 새로운 전학생은 아마도 C등급일 토끼라는 거였다. 현대 수인 사회는 등급 간의 결혼을 엄격하게 법으로 막아놓고 있었다. 종족 간의 결혼은 상관없어도 (파충류와 포유류의 결혼 같은) 등급 간의 결혼은 안 됐다. 견고한 위계 서열 사회를 지키려는 의도에서는 아니고,(굳이 법으로 막아놓지 않아도 위계 서열은 지켜졌으니) 보통 SA등급에 속하는 육식 동물과 B, C등급에 속하는 초식 동물들이 결혼할 경우 본형의 날에 생길 수 있는 자체검열을 막기 위해서였다. 위에 반 정도는 인간이었기에 서로를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야만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기술해놓긴 했지만, 그 말은 나머지 반은 동물이란 뜻이고 세상에는 언제나 예외가 있는 법이니까.

 

왜 안 돼?”

 

그러나 그런 복잡한 먹이사슬에 기반을 둔 법 따위야 태형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원래 천국에 있는 사람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하고 싶으면 해야 했고, 여태까지는 그게 됐다. 그러니 내가 결혼하고 싶으면 하는 거다. 물론 결혼을 혼자 할 수는 없으니 짝궁의 동의도 필요하겠지만.

다시 말해, 태형은 지금 제 짝궁 토끼만 동의한다면 그 토끼를 반려로 삼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민은 눈을 깜박였다. 등급이 등급이니만큼 딱히 이 세계의 규칙 따위를 신경 쓰지 않고 살아가는 애인 걸 알고 있긴 했지만……. 이번 일은 정말로 가능할지 지민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래, 화이팅.”

 

그게 가능하든 아니든 지민이 신경 쓸 바는 아니라. 지민은 그냥 본디 자신 말고는 딱히 타인을 신경 쓰지 않던 태형의 변화가 신기할 뿐이었다. 뭐 어쩌면 김태형이라면 진짜로 가능하게 만들지도 모르고. 지민은 그런 태형을 응원하며 태형이 손도 대지 않은 고기 완자를 낼름 집어먹었다. 대체 얼마나 잘생겼길래 천하의 김태형이 저렇게 관심을 가지나. 고기 완자를 꼭꼭 씹어 삼키며, 지민은 눈을 빛냈다.

 

*

 

당근 좋아해?”

 

웬 당근. 정국은 제 눈앞에 서 수줍게 야채 선물 세트를 내밀고 있는 태형을 쳐다봤다. 초면의 짝궁에게 야채 선물 세트라니. 그런 기발한 발상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아니 그보다, 학교에 있었던 거 아니었나? 학교 매점에서 이런 걸 팔아? 그 와중에 정국은 태형이 수줍게 내민 야채 다발이 꼭 꽃다발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상추와 양배추, 치커리와 케일로 화려하게 장식된 꽃다발은 정 중앙에 당근이 화룡점정으로 꽂혀 있었다. 그런데 나 이런 거 안 먹는데. 그렇지만 그 야채 다발을 정중히 거절하기엔 그것을 건넨 이가 너무 귀엽고 예뻐서. 정국은 제 취향 따위는 꿀꺽 삼키고 환하게 웃으며 야채 다발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 토끼가 내 선물을 받아줬어. 당근 좋아하나 봐. 태형은 정국의 환한 웃음에 마주 웃었다. 정국이 제 선물을 받아준 것이 너무 기뻐서 태형은 금방이라도 뿅, 하고 뾰족한 귀가 솟아오를 것 같았다. 그러나 정국은 받아든 야채 다발을 바로 섭취하는 대신 제 가방에 소중히 꽃아 두었다. 하긴, 점심시간이 막 지났으니 배부르려나. 관대한 태형은 뿌듯한 마음으로 정국의 옆자리에 앉았다. 원래 누가 옆에 앉아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태형이지만, 정국이니까 좋았다.

 

어디서 전학 왔어?”

 

잠깐 앉아서 숨을 고른 태형은 이내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정국과 친해지기.

정국에게 선물로 줄 야채 다발을 퀵으로 주문한 후 점심시간 내내 태형은 지민과 앉아 대본을 짰다. 무슨 대본이냐면 토끼 짝궁과 친해지기 대작전’. 위해서도 말했듯 그 나이 먹고도 태형은 사람을 대하는 것이(정확히 얘기하면 사람이 아니라 수인이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그 사실은 큰 상관이 없으므로 편의상 사람이라 칭하도록 하겠다) 서툴렀으므로 지민은 A to Z까지 태형을 가르쳐야 했던 것이다. 게다가 지금 태형은 그냥 짝궁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제 평생의 반려로 점찍은 이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것이었으니까. 아주 치밀하고 계획적인 플랜이 필요했다.

 

나 중국에서 왔어.”

너 중국 사람이야?”

아니. 사정이 있어서, 한국 사람인데 어렸을 때 중국으로 가서 중국에서 살다가 온 거야.”

 

그렇구나.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다음에 뭐라고 말해야 됐더라. 하지만 문제는 태형이 그 치밀하고 계획적인 대본을 전부 기억할 만큼 세심하지 않다는 데에 있었다. 태형은 눈동자를 굴렸다. 어렸을 때 초식 동물들이 저만 보면 무서워서 슬슬 피했던 아픈 기억이 있는 태형은 기억나지도 않는 대본을 떠올리는 대신 조심스럽게 정국을 살폈다. 혹시 얘도 날 무서워하지 않을까? 그러나 정국은 전혀 그런 기색 없이 웃으며 태형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 준 야채 다발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태형은 곧바로 이어진 정국의 말에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넌 고양이지?”

?”

아까 귀 봤어. 검은 고양이. 귀여워.”

 

중국에서 살다 와서 그런가. 정국은 거리낌이 없었다. 중국이면 대충 같은 문화권 아닌가? 원래 중국 수인들은 이렇게 본형을 막 물어보고 그러나? 태형은 잠시 입을 벌렸다. 아니 뭐 사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형을 숨기려는 시도는 해 본 적이 없었고 수시로 본형의 특징을 드러낼 만큼 본형을 묻는 것이 저에게 큰 실례는 아니었지만 (애초에 태형이 티를 내기 전에 이미 상대는 태형이 그 유명한 흑호임을 알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건 어디까지나 태형이 호랑이, 그러니까 수인 사회의 상위 계층이기 때문이었고 보통은 첫 만남에 이렇게 직접적으로 본형을 묻는 경우는 잘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제 본형이 숨기고 싶은 약점일 수도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제 눈앞의 정국은 그 동그란 눈을 살짝 접어 웃고 있었다. 한 치의 때도 묻어 있지 않은 것 같은 저 순수한 웃음. 태형은 눈을 깜박였다.

 

…….”

역시, 그렇구나. 앞으로 잘 부탁해.”

 

그리고 태형은, 저도 모르게 제가 고양이임을 긍정하는 답변을 내놓고야 말았다. 아니 사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많이) 큰 고양이여서 그렇지. 그러나 차마 제 눈앞의 귀여운 토끼에게 제가 사실은 네가 알고 있듯 작고 귀여운 검은 고양이가 아니라 흑호임을 밝힐 용기가 태형에겐 없었다. 그러다가 도망가면 어떡해. 나 무서워하면 어떡해. 결국 태형은 환하게 웃으며 내민 정국의 손을 붙잡고 마주 웃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절대로 제 본형을 드러내지 말아야겠다 다짐하면서.

 

*

 

자 이쯤에서 필자는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다.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는 좋아하는 사람과 마음이 가까워지는 거리가 가장 빠르다고 생각한다. (빛 아닌가요?) (여기 이과반이니?) 그렇기 때문에 태형과 정국이 가까워지는 속도는 그들이 함께 했던 시간과 비례하지 않았다. 태형이 자신의 본형을 속일 만큼 정국에게 한 눈에 반했다는 사실은 앞에 기술한 바 있으므로 생략하고, 사실 빈자리에 앉으면 되나요?’때부터 마음속에 태형을 점찍어 두었던 우리의 대범한 전학생 전정국도 태형에게 첫눈에 반했으므로 둘의 친밀도 함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상공을 향해 치솟았다.

혹자는 이러한 빠른 전개가 필자가 이 둘이 사랑에 빠지는 디테일한 여정을 쓰기 귀찮아서 개연성 따위는 우주스타 BT21에게 줘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여러분들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김태형과 전정국이 서로에게 사랑에 빠지는 것에 개연성 따위는 필요 없음을. 그냥 둘이 서로를 만나게 되면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은 수학의 공식 종교의 율법 우주의 섭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둘이 어떻게 사랑을 키워갔는가에 대한 묘사는 과감히 생략하도록 하고 그렇게 둘은 손을 잡고 사랑을 속삭이고 뽀뽀를 하고 오늘부터 1, 넌 내꺼 난 니꺼 하는 사이가 되었다.

태형과 정국의 나이 방년 19, 성인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나이로 앞에서 기술한 바 있듯 수인들로 하여금 미래를 약속하기에 그다지 어린 나이가 아니었으므로 둘은 이윽고 미래를 약속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했다. 정국은 태형만 보면 그 매력적인 앞니를 보이며 환하게 웃었고 태형도 그런 정국을 보며 마주 웃었다. 문제는, 제 하나뿐인 반려 정국이 아직도 제 정체를 호랑이가 아닌 고양이로 알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토끼랑 결혼하겠다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제 막내 동생이 고민이 있다기에 세상에 그게 대체 무슨 고민일까 싶어 하던 일도 때려 치고 당장 집으로 달려온 석진과 남준은 태형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토끼에게 빠진 호랑이라니. 로미오와 줄리엣도 와서 한 수 배우고 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아닌가.

 

아니, 태형아. 이건 말도 안 돼. 그러니까 이건…….”

사랑이 아니라 식욕 아니고?”

!”

아니야!”

 

순서대로 남준, 석진, 다시 남준, 그리고 태형. 남준이 태형에게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말을 고르는 새에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석진이 말했고 남준은 그런 석진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적나라하게 말하면 어떡해, 애 상처받게! 그러나 태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사랑이야! 그 단호한 입매에 석진과 남준은 할 말을 잃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러니까 형들이 도와줘. 아부지가 허락 안 하실 거 아니야.”

아니, 아버지가 허락하시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고…….”

나 진짜 첫눈에 반했어. 이런 감정은 처음이야.”

 

남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태생이 고귀하고 특별한 태형이었던지라 태형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구혼은 물밀 듯 밀려 들어왔었지만 아버지는 그런 정략적인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며 태형에게 반려를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고 모두 물렸었다. 그러나 태형이 나이를 먹고 반려에 눈을 뜰 나이가 되어도 애인은커녕 제대로 된 친구도 지민밖에 없을 만큼 하도 남들에게 관심이 없기에 저래서 번식은 하겠나 싶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반려를 찾았다고 저들에게 폭탄선언을 할 줄이야. 그것도 초식동물이랑! 토끼랑! 본형으로 변하면 한입에 쏙일 토깽이랑!!

 

아니, 잠깐만 태형아. 얼마나 됐는데.”

반 년.”

반 년?!”

 

아니 반 년 동안 연애를 했는데 그동안 몰랐단 말이야!? 반년이면 100일도 넘었잖아!!! 100일이 뭐야 200일이 가까워지잖아! 남준과 석진은 다시 한 번 입을 벌렸다. 꼭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지만 석진과 남준이 놀랄 일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토끼가, 너 안 무서워 해? 보통은 호랑이라 하면 무서워할 텐데.”

그게…….”

……?”

내가 나 고양이라고 했어…….”

 

간신히 다시 정신줄을 다잡은 남준이 태형에게 물었고 그에 이어진 태형의 고해성사에 둘의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야 말았다. 심지어 사기까지 쳤어?!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를 해 보면, 호랑이가 토끼를 반려로 맞이하고 싶어 하는데, 먹이 사슬 상, 그리고 수인 사회의 법규 상 그것은 금지되어 있다. 그래도 먹이 사슬을 초월한 사랑이라고 좀 포장을 하려 했더니 정작 그 토끼는 호랑이가 고양이인 줄 안단다. 이걸 어디서부터 풀어야 돼? 석진과 남준은 할 말을 잃고 대책 없는 제 막내 동생을 쳐다봤다. 태형아, 지금 이걸 우리한테 말하면 우리보고 뭘 어쩌란 거야…….

 

결혼하고 나서 밝히면 되지 않을까?”

그거 사기결혼이야.”

어차피 사기죄 기소는 못 할 걸.”

 

법 위에 호랑이 가문 있다. 남준이 태형을 설득하려고 꺼낸 말에 눈치 없는 석진은 무심히 대꾸했고 남준은 석진을 째려봤다. , , ! 그제서야 아 맞다, 하고 중얼인 석진이 어색하게 웃었다. 태형아. 토끼면 결혼은 못 해…….

 

형들이 아버지를 설득하고, 아버지가 법을 고치면 되지 않을까?”

태형아, 우리가 아무리 호랑이라지만 그렇게까지 막나갈 순 없어.”

 

그러면 이 사회에 법은 왜 있고 경찰은 왜 있겠어. 물론 그 경찰 라인이랑 법 라인도 전부 다 우리 손 안에 있지만……. 뒷 문장은 삼킨 남준이 다정하게 태형에게 말했고 태형은 눈썹을 늘어트렸다. 그런데 진짜 나 걔가 너무 좋은데. 꼭 반려로 맞고 싶은데.

 

아니, 호랑이가 토끼한테 사랑을 느낄 수가 없을 텐데.”

식욕이랑 헷갈리는 거라니까? 그런 경우 종종 있다고 책에서 본 적 있어.”

사랑이라고!”

아니 태형아. 걔는 네가 호랑이인줄도 모른다며.”

그거는!”

 

태형이 말끝을 흐렸다. 제일 찔리는 구석을 남준이 훅 짚었기 때문이다. 남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석진의 말대로 태형은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호랑이가 토끼에게 사랑을 느낀다니. 그건 말이 안 됐다. 이게 무슨 인간이 치킨에게 사랑을 느끼는 소리란 말인가.

 

솔직하게 말하면 받아들여 줄 거야…….”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냐. 본형의 날에는 어떻게 할 건데?”

 

본형의 날. 3년을 주기로 찾아오는 본형의 날에 수인들은 각자 동물의 모습으로 돌아가 원기를 충전해야만 했다. 그 날에 수인들은 수인獸人이 아니라 였다. 짐승.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놓아버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날에 수인들은 각자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것만큼은 꼭 지켜져야 하는 절대 법규였고.

 

배 안 고파. 안 잡아먹으면 되잖아.”

 

하지만 그런 남준의 이성적인 설득에 순순히 넘어갈 태형이 아니었다. 이미 태형은 사랑에 눈멀고 귀 먼 상태였으니까. 태형은 지금 이게 사랑이 아니면 므어가 사랑!을 외치고 있었다. 아니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토깽이길래 애를 저렇게 만들어 놓은 거야!? 석진과 남준은 멀거니 태형을 쳐다봤다. 무슨 말을 해야 저 어린 막내 동생을 정신 차리게 할 수 있을까.

 

태형아 너 고기 좋아하잖아. 걘 풀 먹고 살아. 식탁에서 같이 밥을 못 먹을 걸?”

나도 풀 먹으면 돼.”

 

그게 무슨 고양이 풀 뜯어먹는 소리야!!! 우리 조상님도 마늘과 쑥만 먹다가 뛰쳐나왔는데! 조상의 얼을 헤칠 셈이니!! 남준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으나 태형의 단호하고 반짝거리는 눈빛을 꺾을 수는 없었다. 옛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다. 물론 태형이 남준과 석진의 자식은 아니었으나 남준과 석진 또한 부모 못지않게 태형을 어화둥둥 업어 키웠으니 그런 태형을 이길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고작 몇 시간만의 공방전 끝에 석진과 남준은 태형에게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그래, 네 맘대로 해라……. 그 말에 태형은 고마워, 혀엉! 역시 형들밖에 없어!를 외쳤다.

 

그래도 태형아. 아버지가 허락해 주실 지도 문제지만, 그 전에 그 토끼한테는 분명히 말을 해야 돼.”

?”

그래. 걔도 알 건 알아야지. 그건 그 토끼한테도 나쁜 짓 하는 거야.”

…….”

이건 약속해. .”

 

그러나 남준은 마지막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래, 아직 그 토끼가 태형이 호랑이인지 모른다고 했으니. 어쩌면 그 토끼가 태형이 호랑이인 것을 알면 알아서 도망쳐 줄지도 모른다.

남준의 눈빛은 단호했고 옆에서 석진도 그런 남준을 거들었다. 그 두 사람의 단호함에 태형은 주춤했다. 남준과 석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다른 건 몰라도 거짓말이 나쁜 것은 알고 있다. 심지어 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제 반려에게. 태형은 결국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어. 말할게. 태형의 대답에 남준은 약속, 이라며 새끼손가락을 태형에게 내밀었고 태형은 느린 몸짓으로 제 새끼손가락을 남준의 새끼손가락에 걸었다. 약속.

 

그래. 그럼 나중에 한 번 데려와. 얼굴은 봐야지.”

.”

 

태형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고 남준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제 그만 가서 자. 내일 학교 가야지. 석진의 말에 태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긴 후 방을 나섰고 석진은 남준을 돌아봤다.

 

태형이 진짜 괜찮은 거야?”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

아마 태형이 호랑이인 거 알면 그 토끼가 도망치지 않을까.”

태형이 슬퍼하겠네.”

 

석진이 안쓰러운 듯 말했고 남준이 으음, 하고 낮게 신음했다. 그래도, 어차피 식욕과 사랑을 착각하는 것일 테니 잠깐 슬프고 지나가는 게 낫다. S급과 C급의 결합은 말이 안 되니까. 태형이 수인인 이상 끝이 정해져 있는 결말이었다. 그러니까, 남준과 석진은 그저 그 토끼가 제 연인이 호랑이인 것을 알고도 결혼하겠다고 설치는 정신 나간 토깽이가 아니기만을 빌었다.

 

 

, 우리는 다시 이 이야기의 처음인 으로 돌아간다. 현석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금지옥엽 업어 키웠던 태형에게 저도 모르게 삿대질을 했고 태형은 그럼에도 현석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태형의 눈에는 평범한 인간은 쳐다보기만 해도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던 호랑이의 안광이 쓸데없이 깃들어 있었다. 그만큼 단호하고 결연했다는 소리다. 현석은 처음 보는 제 막내아들의 기백에 눈을 깜박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태형아.”

태형아, 말을 똑바로 해야지. 호랑이 안 할래, 가 아니고 토끼랑 결혼할래.”

, 맞아. 토끼랑 결혼할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현석은 1차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2차 충격의 쓰나미를 맛보았다. 남준은 옆에서 수박을 씹으며 차분하게 태형의 말을 수정해 주었고 태형은 수긍하고 말을 고쳤다. 현석은 그런 남준을 쳐다봤다가 다시 태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토끼? 무슨 토끼?

 

태형이한테 반려로 삼고 싶은 상대가 생겼대요. 그런데 그게 같은 반 토끼.”

토끼?!”

. 엄청 귀여워요. 아부지도 보면 좋아할 거야.”

 

아닐 걸……. 남준은 눈을 도르륵 굴렸다. 현석은 아직도 토끼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입만 뻐끔대고 있었다. 아니, , 일단 태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호랑이 부정 선언은 아니었으니 그건 다행이긴 한데. 뒤이어 나온 말도 쉬이 넘길 수 있는 사안은 아니라. 현석은 냉정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태형아, 토끼랑 호랑이는,”

그거 이미 내가 말 했어요 아버지.”

사랑과 식욕을,”

그건 석진이 형이 이미 했고.”

그런데도 반려로 맞겠다고?”

.”

 

태형의 눈빛은 역시나 쓸데없이 올곧았고 그 눈빛에 현석은 할 말을 잃었다. 현석이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깜박이고 있자, 그런 현석과 태형을 번갈아 쳐다보던 남준이 이내 포크를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설득이 안 돼요, 아버지. 완전 확고해. 반년이나 사귀었대요.

 

…….”

그런데 김태형. 너 걔한테 너 호랑이라는 거 말은 했고?”

…….”

 

남준은 이 때 당연히 태형에게서 긍정의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태형이 입을 꾹 다무는 것이다. 태형의 그런 태도에 되려 당황한 것은 남준이었다. 아니, 저 얼굴은 뭐야? 설마.

 

너 아직도 말 안 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진짜 결혼하고 말 할 생각이었어?!”

, 아니, 형아.”

뭐라고?!!?! 호랑이인 걸 말을 안 해?!”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현석이 부러 쾅 소리를 내며 거실 테이블을 치며 일어났고 그 소리에 놀란 태형의 귀가 뾱 튀어나왔다. 이거 이거, 안 되겠네!! 현석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짐짓 엄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고 남준은 그런 현석을 올려다봤다. 아니 아버지, 갑자기 왜…….

 

호랑이인 걸 숨기면 안 되지! 내일 당장 그 토끼를 봐야겠다!!”

아버지!!!!”

아니, 아버지, 아버지가 왜…….”

 

물론 사안이 사안이라지만. 남준은 현석의 오버액션에 당황했다. 굳이 바쁜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가기까지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그 토끼를 집으로 부르든지. 아니면 태형으로 하여금 제 정체를 밝히게 하든지. 그렇게 하면 될 것인데. 물론 태형은 이미 한 번 제 말을 듣지 않은 전적이 있었지만. 태형은 예상치 못한 현석의 반응에 당황한 눈치였고 현석은 단호한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당황해 하얘졌던 남준의 머리에 생각 한 줄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버지 혹시…….

 

태형이 너, 내일 학교에 아버지랑 같이 가!”

 

토끼고 나발이고, 목석같던 셋째 아들 김태형의 마음을 뺏어 버린 그 상대의 얼굴이 궁금해서 이러시는 건가?

 

*

 

, 김 회장님. 여기는 어쩐 일로…….”

 

그날 밤, 태형은 안 된다고, 토끼에게는 제가 직접 말할 거라고 울며불며 떼를 썼지만 단호한 현석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다음 날 아침 퉁퉁 부은 얼굴로 현석과 함께 등교한 태형은 등교하자마자 제 교실로 가는 대신 교무실로 끌려갔다. 옆에는 현석을 대동하고서.

 

여기, 우리 태형이가 반려로 맞고 싶어 하는 토끼가 있다던데.”

아부지!!”

 

거칠 것도 없었다. 현석은 바로 본론부터 꺼냈고 그 말에 교무실은 한 차례 술렁였다. 토끼? 태형이 흑호 아니야? 그런데 반려로 토끼를 맞아?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교무실의 반응에 현석은 미간을 좁혔다.

 

최근에 전학을 왔다고, 이름은…….”

 

현석은 순간 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현석은 태형이 반려로 맞고 싶어 하는 그 토깽이의 이름도 모르고 있는 채였다. 태형은 퉁퉁 부은 얼굴로 현석을 째려봤고 현석은 그런 태형의 얼굴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밤새 운 것 같은 얼굴이 안쓰럽긴 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형의 마음을 겟챠해버린 그 토끼의 얼굴이 궁금해서 여기까지 친히 행차하긴 했지만…….

 

여기 3반 검은 고양이가 누굽니까!”

아버지!!!”

 

그 때였다. 교무실의 문이 태형과 현석이 들어왔을 때처럼 힘차게 열렸고 그와 동시에 낮고 큰 목소리가 교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현석과 태형에게 고정되었던 시선은 교무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새로운 인영에게 모아졌고 태형과 현석의 시선도 그를 따라 교무실의 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전 장관님?”

아니, 김 회장님?”

 

현석이 놀란 눈으로 먼저 말문을 텄고, 뒤이어 역시나 놀란 얼굴의 전 장관이라 불린 남자가 마주 인사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여러분들도 예상하셨듯 우리의 대범한 전학생 정국이 놀란 눈으로 태형을 바라보고 서 있었고.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태형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순간 교무실이 적막으로 가득 찼다.

 

전 장관님. 아드님 일로 중국에 가셨다더니 여긴 어쩐 일로.”

, 일이 다 끝나서 온 지 좀 됐습니다. 복직은 아직이지만. 그나저나 김 회장님이야말로 여긴 어쩐 일로…….”

, 저는 아들 녀석 때문에…….”

 

하하하. 허허허. 현석과 전 장관은 제법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영문을 모르는 정국과 태형, 그리고 교무실의 선생님들은 눈을 끔뻑이며 그런 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잡아먹을 것처럼 들이닥쳐서는 왜 갑자기 친목 도모를……. 그러나 그 둘을 제외한 나머지들의 분위기가 갑자기 싸해졌거나 말거나, 전 장관과 현석은 말을 이었다.

 

, 저도 아들 놈 때문에. 아니 글쎄, 아들놈이 고양이를 반려로 맞겠다지 뭡니까.”

고양이를요? 저런.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뱀과 고양이라니 가당키나 합니까.”

그러니까 말입니다. 게다가 우리 정국이는아니, 그보다. 김 회장님 아드님이면 그 몇 백 년만의 흑호라던……. 무슨 사고라도…….”

, 그게. 우리 태형이가 토끼랑 결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

 

현석은 말을 하다 말고 순간 훅 들어차는 기시감에 말을 멈췄다. 잠깐만. 이 느낌 이거 뭐지? 뭔가 되게 이상한 느낌인데. 그리고 그 순간 전 장관도 같은 것을 느낀 듯 현석을 쳐다보던 시선을 돌려 제 아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현석과 전 장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경악에 가득 찬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는 정국과 태형이 있었다.

 

호랑이!?”

!?!?!”

 

뭐야?! 나한텐 고양이랬잖아! 고양이랬으면서!!! 정국은 온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태형 역시 너 토끼!!!!! 하고 비언어적 표현을 내뿜고 있었다. 아니, 그렇지만. 태형은 재빨리 이성을 되찾았다. 아무리 변현이 가능하다 해도, 본형이 뱀이라면 토끼로 변현을 할 수는 없었다. 그건 기본적인 거였으니까. A 등급에 속하는 뱀이라면 C에 속하는 도마뱀이나 개구리 같은 걸로 변현을 할 수 있는 거였다. 그런데 제가 느낀 정국은, 분명 토끼였다. 포유류였단 말이다. 파충류가 아니라!!!!

 

, , !”

잠깐만. 정국아. 너 설마 그 검은 고양이가 김 회장님 아드님이냐?”

고양이……. 흑호…….”

태형아, 너 왜 전 장관님 아드님을 토끼라고…….”

세상에 검은 호랑이도 있어요?! 그런 게 어딨어!”

 

멍하니 흑호를 중얼이던 정국이 외쳤고 전 장관은 머리를 짚었다. 정국은 꽤나 놀란 듯 동공이 확 열려 있었다. 흑호라니. 검은 호랑이라니. 생전 들어보지도 못했다. 사실 태형이 흑호라는 것은 꽤나 알려져 있는 사실이었지만, 거의 갓난아기 때 중국으로 넘어갔던 정국은 태형의 존재를, 그러니까 흑호의 존재 자체를 몰랐던 것이다. 그러니 태형이 첫 만남때 보여 주었던 검은 귀와 태형에게서 느껴지는 고양잇과의 기운을 당연히 검은 고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고. 그러고 보니 고양이 치고는 귀가 좀 둥글다 싶긴 했다. 아니, 그래도. 검은 호랑이보다는 그냥 귀가 좀 둥근 고양이가 더 현실성이 있으니까.

 

저기 계시잖아. 무슨 실례니. 그리고 정국아.”

…….”

네가 할 말은 아닌 거 같다.”

 

이게 무슨 소리야. 태형에게 왜 뱀을 토끼로 착각한 거냐고 물으려던 현석은 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이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태형이 바보도 아니고. 무려 S급에 속하는 흑호인데. A급인 뱀의 본형을 몰랐다고? 이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바로 알 수 있는 거였다. 흑호처럼 모르는 이가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뱀이 희귀한 종도 아니고. 그리고 의문점은 하나 더 있었다. 뱀이면 파충류인데. 토끼라니. 그런데 전 장관의 옆에 서 있는 정국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토끼가 맞아서. 현석은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돌연변이? 입양? 설마. 그런데 그 순간 문득, 현석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 가지가 있었다. 뱀에게서 토끼 돌연변이가 나올 수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전 장관이 뭐가 아쉬워서 C급의 토끼를 입양할까. 후원을 하면 했지. 그러면 남은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제가 태어난 이래로, 아니 제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태어난 이래로도 나타난 적이 없어 생각지도 못했던 그 경우.

 

김 회장님. 잠시 따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래야겠지요.”

 

현석은 꿀꺽, 침을 삼켰다. 전 장관의 동공이 얇은 비늘 모양으로 좁혀졌다.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해 있는 교무실의 모두를 남겨두고, 전 장관이 먼저 교무실을 나섰고 현석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우두커니 남겨진 태형과 정국은 여전히 멍하니 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은서로에게 서로가 사기를 친 상황, 쌍방 사기이다.

잠깐 얘기 좀 해.”

 

침묵을 깨고 태형이 먼저 입을 열었고 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평화롭던 아침의 교무실에는 선생님들만이 벙 찐 채로 남겨졌다.

 

*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너 토끼잖아.”

그러는 너는. 너 고양이라며!”

호랑이도 고양이거든!!”

지금 그게 말이 되는 변명이라고 생각해?”

 

정국이 짐짓 엄한 척 태형에게 말했고 순간 움츠러들었던 태형은 이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는 너는!! !! !! 토끼!!!

 

나느은! 사정이 있었고!”

사정은 무슨 사정! 나한텐 말을 했어야지. 아니 그보다 너, 정체가 뭐야?!”

 

태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뱀이 왜 토끼 흉내를 내!? 아니, 어떻게 토끼 흉내를 낸 거야?! 태형의 말에 정국은 동그란 눈을 깜박였다. 지금까지도, 태형은 정국에게서 토끼를 느끼고 있었다. 분명 토끼가 맞았다. 19,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이었지만 단 한 번도 본형을 잘못 느낀 적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태형은 S급이었으니까. 제게 본형을 숨길 수 있는 수인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제 눈앞에 있는 이 사랑스럽고 잘생기고 예쁜 생물체는 대체 뭐냔 말이다!

 

결혼은 어차피 스무 살이 넘어야 할 수 있으니까…….”

?! 그럼 결혼할 때까지 숨기려고 했단 말이야?!”

 

지도 그럴 생각이었으면서. 태형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그런 태형에 정국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뭐, 그 전에 말할 수 있으면 말하려고 하긴 했는데. 네가 겁먹고 도망갈까 봐……. 그리고 아버지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고…….

 

아니 일단 다 필요 없고. 너 뱀은 맞아?”

맞을 걸?”

맞을 걸은 또 뭐야.”

일단 제일 비슷한 건 뱀이야.”

그게 무슨 소린데. 너 뭔데?”

 

태형의 말에 잠시 주위를 살피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정국이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그 순간, 태형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각을 느꼈다. 내리누르는 듯 한 압도적인 감각. 자신보다 강한 상대를 만났을 때나 느낄 수 있는, 태형을 만난 수인들은 태형을 만날 때마다 느꼈을 익숙한 감각이겠지만 태형은 처음 느끼는. 태형은 멍하니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의 동공이 세로로 좁혀졌다. 태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정국이 제 본형을 드러내는 모습을 쳐다봤다. 정확히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러니까뱀은 맞는 것 같은데그런데 뱀한테이 있었던가……?

 

저거 뭐야?”

 

태형이 간신히 손을 들어 정국의 머리에 길게 솟아난 뿔을 가리켰다. ? 웬 뿔. 눈을 보니 뱀인데 왜 뱀한테 뿔이 달렸지? 뿔이 달린 동물은 사슴이나소나그런 건데. 아니면…….

 

…….”

아니 누가 뿔인 걸 몰라서 물어?!”

…….”

 

정국이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이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차피 보여줄 거 다 보여준 마당에 망설이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정국이 제 볼을 살짝 긁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때문에 중국에 갔었던 건데. 나 전에 마지막으로 나타났던 곳이 중국이라고 해서.”

…….”

…….”

설마 ㅇ…….”

, 맞아.”

 

정국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정국의 등급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 생각해서 설명하지 않았던. 한 세대에 존재했던 경우보다 존재하지 않았던 경우가 훨씬 더 많았던. 몇 천 년에 한 번 태어날까 말까 한다는 전설의 등급. 워낙 희귀해 전설의 동물이라 불리는 본형을 타고 태어난 수인에게만 주어지는 그 등급.

 

용이야.”

 

SS급 되시겠다.

 

 

용이란 것이, 워낙 오래 전에 나타났다 사라진 터라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고, 사실 그 기록이 진짜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던 탓에 수인 사회는 용을 인어나 구미호 같은 전설적인 동물로만 여겼다. 전래 동화에나 등장하는 그런 걸로. 하지만 정국이 태어난 해, 정국의 머리 위에 선명하게 솟아난 뿔을 보고 대한민국 수인 협회장(대충 인간 사회의 대통령)은 용이란 것은 사실 실존한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제 자신이 S급임에도 불구, 느껴지는 이 감각은 저보다 높은 등급을 가진 수인만이 줄 수 있는 것이었으니.

SS급이란 것은 그냥 상징적인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협회장은 알 수 없었고 다른 나라의 협회장들과도 의논을 할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아무리 수인과 원인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현대사회라지만. 용은 좀 차원이 달랐으니까. 정국의 존재가 세간에 알려지면 원인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도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용의 탄생은 극비에 부쳐졌다. 사회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냥 뱀의 가문에서 아들이 태어난 것으로 하고, 일단 마지막으로 용이 있었다던 중국에 가서 자료를 좀 모아 보자고 극비리에 합의를 끝낸 뱀의 가문과 협회장은 그렇게 정국의 탄생을 비밀에 부쳤다. 그리고 19. 대한민국의 수인 협회장은 SS급의 등장을 알릴 준비를 모두 마쳤고 그에 따라 정국 역시 중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냥 뜬금없이 사실은 용이 있었습니다!! 개꿀잼몰카! 하고 용의 등장을 알리긴 좀 그러니 정국의 20살 생일에 대대적으로 발표를 하는 것으로 하고, 그 때까지는 제 존재를 밝히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정국에게는 굳이 파충류가 아닌 종으로 변현을 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그리고 정국은 토끼를 택했다. , 토끼라면 그 누가 봐도 용을 떠올릴 수는 없을 테니. 어차피 용을 눈치 채지 못할 의도로 하는 변현이니 무엇이든 상관 없었으리라. 그런데 왜 하필 토끼야? 정국의 정체가 공개되고 난 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태형은 정국에게 물었다. 제 하나뿐인 반려가 토끼가 아닌 용이었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런데 왜 하필 토끼냔 말이다. 용이면, ? . 그럴 듯 한 걸로 바꾸지.

 

?”

아니 그냥. 다른 것도 많잖아. 늑대 같은 거 할 수도 있고.”

 

저 같으면 적어도 A급으로 변현을 했을 것이다. , 어차피 실 등급이 SS인데 재벌이 서민 체험하는 느낌으로다가 토끼를 택했을 수도 있지만, 뜬금이 없어도 너무 뜬금이 없지 않나. 생긴 모습이 뱀이나 늑대보다는 토끼를 닮아서 그런 건가? 태형은 정국의 얼굴을 살피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살짝 튀어나온 이빨이나 땡그란 눈 같은 것이 토끼를 좀 닮은 것도 같,

 

내 뿔 모양,”

……?

토끼 귀 같지 않아?”

?”

그래서 토끼 했어.”

…….

 

아니 전혀. 별로. 차라리 네 얼굴이 토끼를 닮아서 토끼를 했다고 하는 게 더 설득력 있는데. 태형이 그 말을 삼키며 아, 하하. 하고 웃었다. 세상에 그딴 이유로 변현을 하는 수인도 있다니. 제 반려지만, 어쩌면 앞으로의 삶이 조금, 고달플 수도 있겠다고 태형은 그 순간 생각했다.

 

아무튼. 그렇게 교무실에 한바탕 폭풍을 몰고 왔던 전 장관과 현석은 비밀의 대화 끝에 악수를 나누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사돈. , 저야말로. SS급과 S급의 결합이라니. 이보다 더 완벽할 수가 있을까. 그것도 의도한 바가 아니라 연애결혼이다. 둘은 무려 서로를 C급으로 알고 있었음에도 서로를 반려로 맞겠다며 땡깡을 부리지 않았는가.

물론 태형과 정국은 서로에게 뒤통수를 사이좋게 얻어맞은 것이 되었으나 쌍방 과실이니 그냥 퉁 치는 것으로 한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고, 전 장관도 좋고, 현석도 좋고. 태형과 정국은 두말할 것 없이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굳이 이 상황에서 서로를 속인 것을 가지고 감정이 상해 봐야 의미가 없으니까. 게다가 속인 것도 서로가 정체를 알면 상대가 겁먹고 도망갈까봐였다. 원래 동물들의 소유욕이 좀 그렇다.

그렇게 둘이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으로 이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이 이야기의 목표와 주제가 전정국과 김태형이 성대하게 맺어지는 것이었으니까.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지만 목표와 주제를 달성했으니 그런 대로 만족한다. 중요한 것은 전정국와 김태형이 서로를 반려로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 결혼도 하기 전에 서로가 연기에 꽤나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태형과 정국이 알게 모르게 남다른 각오를 다졌다는 것은 우리끼리만 알고 있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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